깜빡이 좀 켜줄래 3권
달이 지났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최승희가 내 옆에 있거나 말거나 이석경은 무덤덤했다. 나는 최승희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이제 됐으니 그만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러트 때까지는 최승희의 도움을 받기로 약속했고 무엇보다 날이 갈수록 젯밥에 더 관심을 보이는 최승희를 눈치채고 나서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최승희는 김준영에게 관심이 있었고 숫제 김준영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이석경이 아니라 김준영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와 친밀하게 구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최승희 너 뭐 하냐.”
“내가 뭘?”
“김준영이 좋으면 고백을 해. 나 이용하지 말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김준영 눈치 없어서 직접적으로 말 안 하면 몰라. 질투 작전 같은 거 소용없어.”
“나는 너 도와주는 거라니까?”
“퍽이나 도움이 된다.”
“근데 아까 내가 너한테 팔짱 꼈을 때 김준영 표정 안 좋지 않았니? 혹시 질투하는 건가?”
최승희가 기대로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몰라. 내가 김준영 얼굴을 왜 봐야 하는데. 석경이 얼굴 보기도 바쁜데.”
“다음에는 너랑 손을 한번 잡아 봐야겠다. 어떻게 나오는지 보게.”
“그냥 고백을 하라고.”
“뭔 고백? 안 좋아한다니까?”
“너도 참 나만큼이나 한심한 애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최승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김준영은 어떤 스타일 좋아해?”
“몰라.”
“나 같은 애는 안 좋아하겠지? 하긴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나도 알아. 사람들이 나 싫어하는 거.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은 남정혁같은 쓰레기밖에 없지.”
“…….”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 왕따라서 친구라고는 너랑 태정이밖에 없고. ……솔직히 너는 나 귀찮게 생각하지 친구로도 취급 안 하고.”
“잘 아네.”
“사람들이 나를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알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모르니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최승희나 나처럼 재수 없는 성격을 타고난 애들은 교묘하게 그걸 숨길 줄 알아야 하는데 최승희는 그걸 못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는데 어떻게 친구가 생겨.”
최상의 해결책을 줘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하긴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누굴 상관해. 나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윤조야, 내가 너 이번 러트 때까지 도와주기로 했잖아. 혹시 말이야, 내 덕분에 너랑 이석경이랑 잘되면 나 너희랑 계속 같이 놀아도 돼? ……나 너희랑 계속 놀고 싶은데.”
“안 돼.”
“와, 치사하다.”
* * *
이석경은 영화관에서 커플 사진을 찍어 달라는 최승희의 요청에 그토록 열심일 수가 없었다. 전신사진을 못 찍었다고 아쉬워하는 그 애 때문에 나는 비참하고 쓰라렸다. 조금도 질투하지 않는 이석경에게 화가 나다가도 사랑스러운 그 애를 보고 혼자 화를 푸는 상황이 반복됐다.
바보 같은 시간들이었다. 나와 최승희의 유치하고 엉성한 공작은 무의미했으며 한 달 동안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는 변화를 갈망했고 제자리걸음에서 이탈하고 싶어서 바보같이 허둥댔다.
“오랜만이야, 석경아.”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어.”
그렇다고 이런 식의 변화를, 불청객의 느닷없는 침입을 갈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냄새 묻었어.”
“냄새? 무슨 냄새?”
“한세진 페로몬.”
“페로몬? 잘 모르겠는데.”
“듬뿍도 처발라 놨어. 열받게.”
나만 두고 이석경 혼자만 제자리걸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하여간 알파 새끼들이란.”
“…….”
“석경아, 걔 조심해.”
“야, 너 지나치다는 생각 안 들어?”
“…….”
“네가 뭔데 내 친구를 함부로 말해.”
“……석경아.”
“네가 뭔데 내 친구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거냐고.”
“…….”
“네가 뭔데 내 친구를 조심하라 마라야.”
“…….”
“네가 뭔데.”
그렇게 싸늘하게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어쭙잖은 대꾸가 이석경을 자극할까 무서웠다. 나 혼자만 남겨두고 먼 곳으로 이탈해버릴까 봐. 도망가려는 이석경을 억지로라도 붙잡아둘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애원에 가까운 파리한 눈빛으로 말없이 이석경을 바라봤다. 뭐든 하나부터 열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나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울음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 나는 한세진이 몰고 온 불길한 변화의 조짐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 * *
활활 타오르던 몸뚱어리가 끝없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뼈마디가 산산조각으로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다. 깜빡깜빡 정신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추락을 반복했지만 도무지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화염을 뒤집어쓴 살갗이 죄다 녹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더는 고통을 느낄 피부가 없으니.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온몸 구석구석을 물어뜯는 듯한 고통은 여전했다.
이석경의 얼굴을 보면, 그 애의 향기를 맡으면, 그 애를 안으면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짓뭉개진 의식 틈으로 그런 꿈같은 생각을 떠올린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다시 정신이 들어왔을 때, 누군가 내 입술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아니다. 내 쪽에서 갈구하고 있다. 모자라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는 연한 살덩이를 입에 물고 놓지 않았다. 이 사랑스러운 감촉을 놓치면 나는 또다시 불덩이가 되어 천 길 낭떠러지로 처박힐 것이다.
“……권윤조, 정신 차려!”
입술에 달라붙어 있던 사랑스러운 기운이 사라지면서 절박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화들짝 깨어난 감각들이 눈앞에 있는 인영을 파악하려 애썼다. 너는 누구지. 왜 그런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뿌연 막이 사라지면서, 흐렸던 정신이, 눈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석경아…….”
“…….”
“네가 왜…… 여기 있어?”
열기가 확 걷혔다. 겁먹고 떠는 어깨가 보였다. 이석경이 여기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왜.
그 애를 침실 밖으로 내보내면서도 그 애를 붙들고 싶었다. 떨고 있는 모습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강렬하고 혹독한 유혹이었다. 제 발로 나를 찾아온 건 이석경이잖아. 모른 척 붙잡아 둘까. 그 애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떨고 있는 어깨를 무마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떠올랐다.
그러나 거실에 있는 최승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의문이 풀리자마자 헛된 기대가 무너졌다. 붕 떠올랐던 몸이 추락했다.
“너야? 네가 그런 거야?”
“저기, 윤조야.”
“네가 석경이 여기로 데려온 거야?”
나는 점차 명징해지는 의식을 안간힘으로 끌어모아 우선 이석경을 집에서 내보냈다. 러트를 핑계로 그 애를 욕심껏 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윤조야.”
하얗게 질린 최승희가 나를 불렀다. 심하게 앓은 탓에 피로가 몰려왔다. 잔뜩 지친 얼굴을 숨길 기운조차 없었다.
“왜 그랬어.”
“미안해. 나는 이석경 페로몬이라도 있으면 네가 덜 힘들 것 같아서, 그래서.”
“너, 설마 말했어?”
“안 했어. 말 안 했어, 윤조야.”
급하게 고개를 저어대는 최승희를 보며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정말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최승희가 가자는 대로 따라온 거구나.
“가라. 앞으로는 석경이 근처에 절대 나타나지 마.”
“…….”
눈물을 흘리는 최승희를 거실에 남겨두고 침실로 들어왔다. 지친 몸뚱어리가 또다시 무너졌다.
* * *
이석경이 일주일째 나를 피하고 있었다. 참신하지 않은 갖가지 핑계들이 일부러 피한다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 애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한세진의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망연하게 지켜봐야 했다.
동방에 돌아온 나는 이석경의 대변인 혹은 공모자가 된 김준영에게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뭘 보냐.”
나는 냉기를 갈무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세진은, 누구야?”
내 질문에 김준영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짧은 웃음을 내비쳤다. 무슨 질문이 그 모양이냐는 투였다.
“내 친구. 그리고 석경이 친구.”
“그리고?”
그런 싱거운 대답으로는 쉬이 물러날 기세가 아니자 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가 좀 긴데 괜찮겠어?”
“……괜찮아. 시간 많아.”
준영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내가 LA에 있을 때 말이야. 메이저리그에서 현역으로 활동할 때…….”
“야, 너 그만해라.”
준영에게 낚였다는 사실을 눈치챈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김준영은 얄밉게 킥킥대며 웃었지만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근데 요새 승희 씨 안 보이네? 바쁘신가?”
혼자 머쓱해져서 웃음을 거둔 김준영은 괜히 동방 입구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몰라.”
그 일이 있고 나는 최승희의 번호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
“설마 깨진 거?”
“뭘 깨져. 사귄 적 없다니까.”
“근데 왜 붙어 다녔어?”
“몰라. 최승희가 네 낯짝이 보고 싶었나 보지.”
“권윤조 오늘 까칠하네. 사포인 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숨바꼭질 중인 이석경을 숨겨 주는 데 일등 공신인 김준영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권윤조.”
“왜.”
“너 요새 왜 그 짓 안 하냐?”
“무슨 짓.”
“석경이한테 하는 하찮은 짓거리.”
“…….”
“그래도 나는 너 하찮을 때가 제일 좋은데.”
“……이석경이 없잖아. 없는데 뭘 해.”
나는 나지막이 뇌까렸다.
“하긴. 석경이가 없네.”
김준영은 바로 수긍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굴 놀리나. 저거 분명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
“뭐야, 너.”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권윤조가 하찮은 짓을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그리고 한참 생각했다. 난 참 행복한 놈이구나. 과제가 아무리 좆같아도 내 옆에는 석경이가 있으니까. 권윤조 파이팅!”
“진짜, 이 새끼 뭐지.”
김준영은 내가 이석경 때문에 예민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계속 속을 긁어 댔다.
나는 공대 주차장에서 봤던 이석경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무정하면서도 방어적인 눈빛으로 나를 밀어내던 모습. 나를 공기 취급하려고 기를 쓰던 모습. 그러면서도 나를 피한다는 뻔한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
나는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를 습관처럼 고민했다. ‘석경아,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도망치려는 이석경을 붙들고, 혹은 메시지로 수차례 물었지만 그런 거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실제로 이석경은 나를 싫어하거나 나에게 서운한 게 있는 듯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나를 향한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미지근한 표정을 볼 때마다 내 피는 서서히 달궈졌다.
* * *
이석경은 오늘도 어김없이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석경아, 오늘 나랑 저녁 같이 먹기로 한 약속 잊지 마.”
도망치려는 손목을 잡아채고 단단히 다짐을 두었다.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석경을 눈앞에 두고, 나는 오랫동안 굶주린 맹수가 된 기분을 느꼈다. 힘으로 제압하고 망가뜨려서라도 그 애를 가지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들 때마다 기분이 한없이 불쾌해졌다. 나는 역겨운 가학심을 억눌렀다.
“나 가야 돼. 친구가 기다려.”
이석경이 내 손을 뿌리쳤다. 앙탈이라도 부리듯 사랑스럽게 내 손을 쳐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진저리를 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머리채라도 잡아 도로 내 눈앞에 끌고 오고 싶은 거친 충동을 참아내며 멀어지는 이석경의 뒷모습을 고요한 눈빛으로 숨죽인 채 지켜봤다.
슬픔과 분노, 조바심, 짜증, 불안, 음침한 욕구,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통제를 벗어나 내 신경을 긁어 댔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뱉어냈다.
최승희가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 애와 내 시간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이석경을 순조롭게 가질 수 있었을까. 최승희를 원망하던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일주일 전의 그날을 곱씹었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이석경이 내 집에 찾아왔던 그날을.
열에 들뜬 나를 다독여 주던 이석경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 내가 뭔가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인정과 동시에 최승희를 탓하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정신이 아닌 내 앞에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이석경이 나타났다. 혹시 내가 허락도 없이 껴안고 입술을 비비기라도 걸까. 그래서 화가 난 걸까. 벌써 수백 번이나 했던 추측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래도 석경아, 널 건드리지 않았잖아. 네 몸을 열고, 널 욕심껏 탐하고 싶은 욕망을 내가 어떻게 참아냈는데. 너의 달고 부드러운 입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잖아. 그건 정말 네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극한의 인내심이었어.
나는 늘 그렇듯이 이 대목에서 억울해졌다. 사실 내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억울함이었다. 석경아, 도대체 내가 너한테 뭘 했어?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나는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하지도 않은 ‘시작’을 비로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고 이석경에게 고백하고 키스를 퍼붓기 위해.
[미안.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다가올 저녁을 웅크린 맹수처럼 노려보던 나에게 이석경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내렸다.
몸이 안 좋단 말이지. 그래서 저녁을 같이 못 먹겠다는 말이지. 나는 미친 사람처럼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메시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많이 오래 참았다.
집에 찾아갔지만 이석경은 없었다.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폭발 직전의 균열이 쩌억 쩌억 소리를 내며 신경을 건드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온하다 할 그런 얼굴로 나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이석경을 기다렸다.
두 개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주고받는 목소리도 어스름히 들렸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엷게 드러난 두 인영이 겹쳐졌다.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겹쳐진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한심한 상상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미련스럽게도 겹쳐진 두 입술이 떨어진 후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환청이 들렸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억세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애를 만나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말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3.
“술 마셨네.”
“…….”
“아프다면서.”
“그게…….”
무겁고 짙은 알파의 페로몬이 위협적으로 석경을 옭아맸다. 잔뜩 겁에 질린 석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윤조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천사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였으나 냉기가 스며든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석경은 한세진의 위악을 간파했듯이 권윤조의 위선을 간파했다. 저에게 남다른 눈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위선을 읽어낸 것이다.
“석경아, 내가 너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응?”
“…….”
입을 열면 말을 더듬게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귀기 어린 위선 앞에서 명백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권윤조는 모를 거였다. 그가 석경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를. 석경도 몰랐다. 자신이 그를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를.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직 그만이 석경을 두려움에서 건져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석경은 권윤조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우리 착한 석경이가, 요새 왜 이렇게 입만 열면 거짓말인지…….”
“…….”
“내가 씨발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좀 알려 줄래.”
“…….”
“아니다, 석경아. 입 다물어. 이유를 들으면 더 화날 것 같아.”
마침내 위선을 거둔 눈빛이 금속처럼 새파랬다.
권윤조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워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런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로가 틈 없이 입술을 맞댈 까닭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뚫고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석경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흔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쪽을 힐끔힐끔 주시하며 계단을 올랐다. 남자 둘이서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권윤조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잡힌 뒤통수가 뜨거웠다. 남에게 보일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에 전전긍긍하는 석경과 달리 권윤조는 오직 석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윤조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만으로도 석경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석경은 권윤조를 힘껏 밀어냈다. 순순히 물러나 준 권윤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어? 눈 주위로 열이 확 몰렸다. 격분한 나머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석경은 입술을 꽉 깨물고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권윤조가 그런 석경을 보며 입꼬리를 더욱 위로 끌어올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석경도 덩달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향한 분노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권윤조 너, 내 반응이 재밌구나.”
“재미?”
권윤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석경은 권윤조를 죽도록 패고 싶었다. 분노는 그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죽도록 패는 대신 그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웃지 마. 왜 웃어?”
“석경아.”
“…….”
“너야말로 떨지 마. 왜 떨고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
“…….”
“겁먹고 도망갈까 봐 아무 짓도 안 하고 참고 있는데, 뭘 안 했는데도 떨면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떨었다고? 석경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도망’이라는 굴욕적인 표현도 자존심을 건드리며 석경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장악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순간들이 어린애의 발버둥처럼 여겨졌다.
“권윤조. 내가 왜 너한테 아프다고 거짓말했는지 말해줄까?”
“…….”
“너 피하려고 거짓말한 거야.”
“…….”
“모르겠어? 내가 너 피하는 거잖아. 그 정도 했으면 눈치채야지. 왜 집 앞에서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데?”
“…….”
“너 이러는 거 나 좀 소름 끼쳐.”
가쁜 숨이 터지면서 말끝이 떨렸다. 젠장.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다. 석경은 권윤조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껴 놓았다. 솔직히 눈앞의 권윤조가 무서웠다. 그런데 무서웠기 때문에 오히려 더 독하게 말할 수가 있었다. 어젯밤처럼 잔뜩 상처받고 풀죽은 모습이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함부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너 혹시 장난감이라도 뺏긴 기분이야? 내가 오메가라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장난감 같아?”
“씨발, 좆같은 ‘오메가’.”
“…….”
권윤조의 이마에 힘줄이 튕겨져 나올 것처럼 돋았다. 욕설을 내뱉는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권윤조가 욕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낯설었지만 위악을 부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정하고 사근사근했던 여태까지의 모습들이 위선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석경은 권윤조의 위선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출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그래서 마치 권윤조라는 인간의 일부가 된 기득권의 교양과 여유, 총명한 예의일 터였다.
“너 이석경이잖아.”
“…….”
“너는, 그냥 너잖아.”
“그래도 내가 오메가가 아닐 수는 없어.”
“그게 네가 나를 피하는 것과 상관이 있어?”
상관이 있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딱히 내세울 만한 이유는 없었으니까.
“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뭘 그만해?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면 나는 못 알아들어.”
애매한 관계가 나누는 애매한 대화. 석경은 그와 자신이 서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확실히 하고 싶었다.
“권윤조.”
“…….”
“내 주제에 감히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
“너랑 그만하고 싶어.”
“뭘?”
“너하고 나. 전부 다. 뭐가 됐든.”
“…….”
“더는 감당 못하겠어.”
“감당…….”
권윤조는 석경이 내뱉은 단어를 억지로 씹어 삼키듯 작게 뇌까리더니 제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주춤 몸을 뒤로 물리자 한쪽 어깨를 틀어쥐었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가해지려는 찰나 석경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러울 것도 없는데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고 전신의 떨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떠는 석경의 모습에 권윤조의 얼굴이 굳어졌다. 권윤조는 조금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었고 석경은 그 손을 사납게 쳐냈다. 석경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이었다.
“만지지 마.”
권윤조는 석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등을 돌린 권윤조가 멀어졌고 이윽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뿌옇게 흐려진 눈을 깜빡이자 새롭게 맺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알았어.’ 권윤조의 마지막 말이 수없이 맴돌았다. 그만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인지, 만지지 말라는 말에 대한 대답인지 애매했으나 권윤조와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 *
석경은 권윤조를 애써 피할 필요가 없어졌다. 늘 석경의 주위를 맴돌던 권윤조가 알아서 석경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굳이 피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집요한 눈빛으로 저를 몰아붙이던 권윤조와 지친 한숨과 함께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무기력하게 등을 돌리던 권윤조가 석경의 안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어떤 게 권윤조의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거리감은 강의실 안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너희 혹시 권윤조 왕따시키는 중이니?”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권윤조를 눈여겨보던 이수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석경은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제 옆에 앉은 준영과 그 옆에 앉은 태정을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권윤조를 ‘왕따’로 보이게끔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태정이라고 석경은 슬그머니 책임을 회피했다. 친하게 지내던 네 사람이 둘로 갈라진 상황에서 태정은 오랜 친구인 권윤조가 아닌 석경을 택했다.
그렇다고 태정이 ‘나는 윤조보다 너희랑 노는 게 더 좋아’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석경의 곁을 지켰다. 따라서 두 패로 갈라졌다는 느낌보다는 권윤조라는 조각이 무리에서 툭 떨어져 나간 형국이 되고 말았다.
태정은 밥도 권윤조가 아닌 석경과 함께 먹었다. 게다가 권윤조의 부재를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고, 권윤조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태정이 아니었다면 석경은 그런대로 잘, 권윤조의 존재를 무시하고 잊으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수현 말마따나 마치 권윤조를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왕따시킨 듯한 상황이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오전 강의가 끝나자 태정이 점심 메뉴를 정하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석경은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가방을 챙기는 권윤조를 힐끗 보았다. 태정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동요하거나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방을 다 챙긴 권윤조는 이쪽으로는 한 번도 고개를 돌려 보지 않고 미련 없이 강의실을 나가 버렸다.
“태정아, 너 오늘은 권윤조랑 밥 먹어라.”
“왜?”
태정이 왜 그래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석경을 바라봤다. 석경은 말문이 막혔다. 글쎄, 왜일까? 권윤조가 혼자 밥 먹을까 봐? 아니면 권윤조가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굶기라도 할까 봐?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최승희와 함께 밥을 먹겠구나 하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들었다. 왜 처음부터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권윤조에게는 최승희가 있는데.
“아니야. 승희 씨 생각을 못 했어. 권윤조는 승희 씨랑 먹겠지.”
“이석경 너, 윤조가 혼자 밥 먹을까 봐 걱정하는 거야?”
태정이 돌연 진지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걱정 안 해. 승희 씨랑 같이 먹는데 왜 걱정해.”
“그럼 걱정해야 할 텐데. 윤조가 앞으로는 승희랑 같이 밥 먹을 일 없을 거거든.”
“……왜?”
“궁금하면 윤조한테 직접 물어봐. 이 이상 입 털면 괜한 오지랖 될 것 같다.”
“…….”
“참, 석경이 네가 윤조 걱정한 거 윤조한테 말해도 돼?”
“아니.”
그런 말을 전하는 거야말로 오지랖이 아닌가. 석경이 보기에 태정은 확실히 이상했다.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권윤조와 자신이 화해하길 바라는 눈치 같은데 정작 화해하라는 말은 빈말로도 꺼내지 않았다.
“학식 가서 돈가스 정식이나 먹자.”
결국 점심 메뉴는 학식으로 정해졌다. 석경은 돈가스 정식 말고 다른 것을 먹어 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돈가스 정식을 선택했다.
권윤조도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을까? 어쩐지 농대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들고 벤치에 앉아서 파랗게 변한 300년 된 벚나무를 보며 점심을 해결할 것 같았다. 혼자 밥을 먹는 권윤조를 떠올리자 청승과 낭만 사이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석경은 인정해야만 했다. 권윤조가 신경 쓰이고 걱정되어 입안에 있는 돈가스가 무슨 맛인지 도통 모를 지경이었다. 생각을 떨치려 노력했다. 그만해야지. 내 쪽에서 먼저 그만하자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날 밤 유독 과열됐었던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제가 좀 많이 오버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짝사랑에는 마음고생의 크기만큼 보상 심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석경은 보상 심리를 가질 입장이 못 되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고백을 한 적이 없으니까. 뭐 대단히 비극에 젖었던 것도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어정쩡했다. 그러니까 내가 고백한 적도 없으면서 그만하자고…… 했네. 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석경아, 너 살 빠진 것 같다.”
벌써 접시를 깨끗이 비운 준영이 돈가스를 깨작거리는 석경을 보며 말했다. 그런가. 석경은 손바닥으로 볼살을 쓸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일 조모임 하는 거 알지?”
준영이 반 이상 남은 석경의 접시를 한 번 보고는 석경의 파리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말시험 대신인 조별 과제였다. 조원은 이름순도 아니었고 교수가 임의로 정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늘 붙어 다니던 넷과 이수현까지, 적어도 조원을 정할 당시에는 신나게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었다. 기말고사 주간이 되기 전에 과제를 해치우자는 게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바로 내일이 모이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알아.”
“빠지지 마.”
“안 빠져. 내가 왜 빠질 거라고 생각해?”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야.”
내일 권윤조도 나오겠지. 아니면 혹시 모르지. 권윤조가 안 나올지도. 사귄 적도 없는데 마치 헤어진 CC 같다고 석경은 생각했다.
* * *
토요일 오후 2시, 석경은 다 같이 모이기로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각자 점심을 먹고 만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정한 시간이었다. 석경은 11시쯤 아침 겸 점심을 가볍게 챙겨 먹고 방을 청소했다. 대강 한다는 게 성에 차지 않아 자꾸 손이 보태졌다. 청소를 끝낸 뒤에는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과제에 쓰일 자료를 꼼꼼하게 조사했다.
일찍 도착했다가 괜히 권윤조와 단둘이 있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일부러 5분을 늦었다. 석경은 4번째로 카페에 도착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나머지 한 사람은 권윤조였다.
카페 구석 자리의 6인용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3개 있었다. 안쪽에 한 자리, 바깥쪽에 마주 보는 두 자리가 있었다. 석경은 무심코 바깥쪽 자리에 앉았다. 계산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10분 후에 권윤조가 도착했다. 그의 등장에 좌중이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일찍 왔네?”
이수현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응. 다행히 차가 안 막혀서.”
“걸어서 5분 거리 아니니?”
“맞아.”
이수현은 얄밉다는 듯 권윤조를 향해 눈을 흘겼다. 권윤조는 빈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그는 석경의 맞은편 빈자리를 흘낏 보더니 안쪽 자리에 들어가서 앉았다. 계산이 들어간 행동 같았다.
석경은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였다.
강의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강의실에서의 권윤조가 석경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신경 쓰고 노력한다는 느낌이라면, 방금 전의 권윤조는 저와 가까이 앉는 것 자체를 꺼려 하는 느낌이었다. 그 미묘한 차이에 석경의 얼굴에 미열이 오르고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그 현상을 무마하려고 급히 아메리카노를 마신 거고.
팀플 빌런이 없는 관계로 미팅은 순조로웠다. 이전에 한차례 틀을 잡고 각자 맡았던 결과물을 취합하는 자리라 약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오후 네 시 반.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술 마시기는 딱 좋은 시간이네.”
각자 집으로 흩어지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는 듯 태정이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석경은 당연히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하지만 석경이 하려던 말을 누군가가 가로채 버렸다. 권윤조였다. 순간 거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나같이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듯 예리한 눈으로 권윤조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석경조차도.
“조모임 아직 안 끝났는데?”
태정이 뒤풀이에 불참하면 이름을 빼 버리겠다며 협박했지만 권윤조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가 버렸다. 석경은 권윤조에게 선수를 빼앗긴 터라 집에 간다는 말은 입도 뻥긋 못하고 얌전히 술자리에 동참해야만 했다.
권윤조의 부재 탓인지 흥이 죽어 버린 술자리는 1차로 간단하게 끝났다. 태정과 이수현이 가고 준영과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준영의 입에서 2차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석경은 준영의 제안을 수락했다.
“너는 알지? 권윤조가 왜 그러는지.”
생맥주 500cc를 절반쯤 비운 준영이 앞뒤 없이 물었다.
1차에서 석경은 죄인의 심정이었다. 권윤조가 석경을 의식해서 불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축 처진 분위기를 애써 띄우는 태정을 보고 있자니 석경은 남은 대학 생활이 캄캄해졌다.
“모르겠는데.”
“그래?”
준영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으나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생맥주를 마신 석경은 감자튀김을 부지런히 입에 날랐다. 드물게 먹성 좋은 석경의 모습을 준영이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로 다른 화제를 이어 나갔다. 같은 동아리의 3학년 복학생 선배가 이수현에게 야심 차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경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소식을 전하는 준영의 표정이 한없이 무덤덤했기에 석경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이수현은 눈 높으니까.’ 복학생 선배에게 조금 잔인한 말을 덧붙이면서.
“이수현이 눈이 높나?”
준영이 물었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야.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석경은 이수현이 권윤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연중에 눈이 높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곰곰이 따지고 보니 눈이 높다는 표현은 실례인 것 같았다.
“준영아, 나 휴학할까?”
불쑥 그 말을 꺼낸 건 생맥주 두 잔을 비웠을 무렵이었다. 기말고사가 임박한 탓인지 아니면 주말이라 그런지 술집은 평소에 비해 한산한 편이었다.
석경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준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네가 휴학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권윤조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냐?”
“물어보지 마.”
“둘이 뭔 일 있었지?”
다시 맥주를 들이켜려던 석경이 멈칫했다. 석경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만하자고 했어.”
결국 두서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꾹 밀어 넣고 간결하게 내뱉었다. 준영의 눈이 커졌다.
“그만하자고?”
“응.”
“뭘 그만해?”
“권윤조도 그렇게 묻더라.”
“니들 나 모르게 뭐 시작했었어?”
“안 했어.”
얼마 지나지 않은 생생한 흑역사가 준영 덕분에 적나라하게 떠올랐다.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덜덜 떨며 그만하자고 말하는 저 때문에 권윤조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석경은 자조하며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그럼 뭘 그만하자고 했는데?”
“전부 다. 뭐가 됐든.”
“심오하네. 권윤조는 뭐래?”
“알았대.”
“걔는 또 뭘 알았는데?”
“나도 몰라.”
“묘한 새끼들이네. 둘이 선문답했어?”
“…….”
석경은 대답 대신 생맥주 두 잔을 더 주문했다.
“어쨌든 네가 그만하자고 말한 결과가 지금의 권윤조란 말이지?”
“……응. 아마도.”
“권윤조 네 말 되게 잘 듣는다. 하긴 권윤조가 원래 네 말은 잘 들었지.”
“…….”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나는 권윤조가 너 좋아하는 줄 알았어. 게다가 최승희랑 사귄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그건 석경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착각은 보기 좋게 깨졌다. 한때는 권윤조의 집으로 저를 데려간 최승희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내심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체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준영아.”
“왜.”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또 중간에서 이런 일 겪게 해서. 한세진도 그렇고 권윤조도.”
“…….”
“너한테 미안해서라도 이번에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내가 또 망쳐놨어.”
권윤조를 끊어낸 일이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중간에서 애먹는 준영이나 태정을 볼 때마다 죄스럽고 후회됐다.
더 솔직해지자면 냉담해진 권윤조를 보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저를 한없이 헷갈리게 하는 그를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멀어지고 싶었던 주제에 그냥 친구로라도 남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나한테 미안할 필요 없어.”
“그래도 미안해.”
그러나 후회와는 별개로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면 석경은 권윤조에게 그만하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날 밤 권윤조는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
석경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권윤조를 피해 다니는 자신의 입장은 어딘가 어정쩡했다. 최승희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기에도 어정쩡했고, 권윤조와 뭘 시작한 것도 아니므로 배신감을 느끼기에도 어정쩡했다.
한데 그날 밤 석경을 집 앞에서 기다리던 권윤조의 행동은 그런 어정쩡한 입장의 석경을 상대한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확실했다. 왜 저를 피해 다니냐며 거칠게 분노했다.
권윤조는 분명 저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석경은 그걸 모르지 않았고,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권윤조를 원했다.
아니, 석경은 그날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권윤조를 원했다. 그러니까, 석경이 그날 공포에 떠는 동시에 분노한 이유는 결국 그거였다. 자신이 품은 욕정은 순정하고 고결하며 권윤조가 품은 욕정은 광포하고 일시적이라는 거였다.
한세진과의 키스를 목격한 권윤조가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기분에 충동적으로 자신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이거나 저거나 몸을 섞으면 한낱 욕정에 불과한 것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구태여 급을 나누었다.
후회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자존심은 곧 권윤조에 대한 미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윤조도 저와 같은 감정이었으면, 순정이었으면 하는 바람. 석경은 이제 그만 그 지긋지긋한 미련을 버리고 싶었다.
“석경아, 너 혹시 다시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인 거야?”
“후회는 되는데, 그게 다시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어. 권윤조 옆에서 버틸 기운도 없고.”
석경은 무심하게 내뱉고도 그의 옆에 있는 일이 ‘기운’씩이나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답이 안 나오네. 너 그냥 휴학해라.”
“그래야 하나.”
“농담을 왜 또 그런 식으로 받아칠까?”
“준영아. 나 권윤조랑 잘 지낼 수는 없어도 너랑 태정이가 중간에서 곤란하지 않게 할게. 그건 내가 진짜 노력할 수 있어.”
석경은 다짐하듯 말하고 맥주잔을 비웠다. 이후로는 다시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알게 모르게 뜨겁고 섬세했던 준영의 시선이 미지근해진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한마디 떠들 것을 괜히 두 마디를 떠들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