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권윤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이석경과 김준영은 수업이 있었고, 동방에는 나와 태정 둘뿐이었다. 동방에 있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클래식 기타를 서툴게 퉁기던 태정이 문득 말을 걸어 왔다. 과제에 쓰일 자료를 정리하던 나는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대꾸했다.
“뭔데.”
“우리 며칠 전에 과팅했을 때.”
“어.”
“너 그때 그 자리에 관심 있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거 진짜냐?”
“어.”
“그 사람이 혹시…….”
“…….”
태정이 잠깐 뜸을 들였고 나는 그제야 눈을 들어 태정을 바라봤다. 희미한 착잡함과 짙은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석경이냐?”
“어.”
“대박.”
“뭐가.”
“아니, 대박이라고.”
“그니까 뭐가.”
“나는 긴가민가했거든. 처음에는 네가 이수현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근데 이석경을 좋아할 줄이야.”
“좋아하는 거 아닌데?”
나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반박했다.
“뭐래. 관심 있다며.”
“응. 관심.”
“내가 보기엔 단순한 관심이 아닌 것 같은데.”
“맘대로 생각해.”
태정이 허파에 바람이라도 찬 것처럼 실실 웃어댔다. 말없이 눈길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석경이 권윤조 첫사랑인가?”
“뭔 소리야.”
“아니, 너 사람한테 관심 주는 거 처음이잖아. 내가 알기로는 처음인데. 맞지?”
“태정아.”
“응?”
“너 계속 헛소리할 거면 앞으로 입조심해야겠다.”
나직하게 경고를 줬다. 그러나 태정의 눈동자는 여전히 꼴 보기 싫게 반짝거렸다.
“근데 이석경 좀 불쌍하다.”
“……왜?”
“왜긴 왜야. 네 눈에 들었으니까 불쌍하지.”
“그게 왜 불쌍한데.”
“어렸을 때부터 에피소드가 한두 개가 아니라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권윤조한테 찍히면 죽는다’, 이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해. 그래도 네가 내 가장 친한 친군데.”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정이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어릴 때 다니던 유치원 앞에 되게 커다란 벚꽃나무 있었잖아. 너 그거 뽑아서 네 방에다 갖다 놔 달라고 떼썼던 거 기억하냐?”
“…….”
“가지를 꺾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애가 나무를 통째로 뽑아 갈 생각을 해. 나 그때 말은 안 했지만 네 스케일에 좀 질렸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벚꽃나무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데리러 온 어머니에게 고집을 부렸었다. 어머니는 그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었다.
윤조야, 엄마가 이 나무 윤조 방에 옮겨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꽃이 죽을 거야. 윤조야, 이 나무 내일도 보고 싶지? 근데 어쩌지? 나무가 죽으면 내일은 못 보는데. 대신 윤조가 이 나무를 여기 두고 매일 예쁘다고 말해 주면 내일도 볼 수 있고, 내년에도 볼 수 있어. 윤조가 어른이 됐을 때도 볼 수 있고.
윤조야, 어떻게 하고 싶어?
* * *
“권윤조. 석경이 건들지 마.”
준영이 눈에 힘을 주고 경고했다. 불났다는 말에 비몽사몽 깨어난 태정이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간 직후였다. 나는 말없이 준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마음을 놓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준영은 일부러 나를 믿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태정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욕실 앞에 섰다. 이 안에 히트사이클을 맞은 오메가가 있다. 집안에는 청포도 향이 진동을 했다. 향기만으로도 욕구가 날뛰었다. 욕실 안에 있는 오메가를 취하면 마침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쌍방 각인은 아마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더는 작열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석경은 비로소 완전히 내 오메가가 될 것이다.
문을 사이에 두고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찌할 도리 없이 끙끙 앓는 신음도 새어 나왔다.
나는 지금부터 이석경을 취할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 문고리를 잡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불현듯 벚꽃나무가 떠올랐다. ‘윤조야, 어떻게 하고 싶어?’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던 걸음을 뗐었다. ‘그냥 집에 갈래요.’
떼를 쓰고 억지를 써서 내 소유가 된들 하루 만에 시들어 버리는 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래 두고 계속 예쁘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꽃을 나는 원했다.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통화 연결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최대한 빨리 안정제를 구해서 갖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릴 거라는 대답에 20분 안에 와 달라고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석경에게 손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준영의 경고 때문이 아니었다. 발현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이석경을 유린하려던 남정혁을 목격하고 그 후에 일어난 사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그 애를 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상태로 나와 몸을 섞으면 그 애는 손쓸 방도도 없이 앓다가 시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석경이 제 스스로 나를 원할 때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며 단단한 벽을 허물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의 기다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느닷없이 닥쳐온 시련에 나는 사실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석경이 노크 소리를 듣지 않길 바라는 무의식 탓에 손에 거의 힘을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이 열리지 않기를 내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이석경의 모습이 어떨지는, 얼마나 나를 자극할지는 이미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참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인내심이 많지도 않고 그리 성숙하지도 않은 인간이므로.
이석경을 하루라도 더 빨리 내 것으로 만들 궁리만 하는 나를, 이석경과 비슷한 향기가 나는 핸드크림으로 욕구를 달래려는 나를, 나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려다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며 그대로 손을 내렸다. 문밖을 의식하는지 현저히 줄어든 욕실 안의 인기척을 뒤로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잔뜩 성이 날 대로 난 성기를 하의에서 꺼냈다. 무조건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불붙은 정욕을 한차례 끄고 이석경을 상대할 요량이었다.
손으로 기둥을 쥐었다. 잔뜩 성이 나서 힘줄이 툭툭 불거진 기둥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귀두를 문질렀다. 미끌미끌한 선액을 귀두에 펴 바르며 기둥을 움켜잡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절정에 도달했다. 물티슈로 흔적을 닦아내고 바지를 끌어 올렸다.
또다시 심호흡. 그리고 욕실 앞에 섰다. 바지 안에서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단단해지는 존재가 불안했다.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를 노려보다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석경아.”
“…….”
“문 열어.”
“으, 흐읍.”
틀어막는 듯한 신음이 애달프게 흘러나왔다.
“애들 집에 보냈어. 괜찮으니까 문 열어.”
열릴 리가 없었다. 열어 줄 리가 없었다. 발로 차서 문고리를 부쉈다.
문이 열리자 이석경의 향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참았다.
“흐읍, 오, 오지 마.”
홀딱 젖은 채 울고 있는 이석경의 모습에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찬물을 얼마나 맞았는지 입술이 파랗고 얼굴이 창백했다. 수전 레버를 돌려 물을 껐다.
“석경아, 일어날 수 있겠어?”
“저리, 가.”
구석으로 몸을 피하는 이석경을 안아 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몸이 발버둥 치는가 싶더니 목덜미로 그 애의 입술이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떠는 몸이 안쓰러웠다. 목을 파고드는 차가웠던 입술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목을 핥아 올리는 몰캉하고 축축한 혀의 감촉을 애써 무시하며 그 애를 침대 위에 내려놨다. 흥분에 절어 혼몽한 눈빛을 하고 달려드는 그 애를 힘으로 내리누르며 속으로 애원했다. 이러지 마. 지금은, 아직은 아니야.
이석경의 머리를 말려 주고 젖은 옷을 벗기고 샤워 가운을 입히는 동안 기어이 내 입안에서 피 맛이 돌았다. 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야하고 자극적인 요소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볼 안쪽 살이 이에 씹혀 너덜너덜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아 주면, 안 돼?”
숨을 할딱이며 보채는 이석경의 꽃잎 같은 입술이 제 누울 자리라도 찾아내듯, 육욕을 과시하는 내 아랫도리에 매달렸다.
“이석경.”
“너, 너도 힘들잖아. 나 좀 안아 줘. 응? 한 번만, 안아 줘 제발.”
입안의 피 맛이 더욱 진해졌다. 안고 싶다. 미칠 것 같았다. 제발 한 번만 안아 달라는 그 말에 나는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그 말 덕분에 안간힘으로 참을 수 있었다.
‘한 번만’은 ‘마지막으로’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오늘 한 번이 아니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석경을 안고 싶으니까. 제정신을 차린 이석경이 남자를 홀리는 괴물이 됐다는 자괴감에 또 억제제 수십 알을 삼키면 안 되니까.
나는 함부로 이석경을 훼손하기보다 아주 오래도록 그 애에게 예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안간힘으로 그 애를 뿌리치는 사이 안정제가 도착했다.
“이제 됐어, 석경아.”
“으, 흐윽…….”
“잘 참았어.”
안정제를 맞고 잠든 이석경의 눈가에 키스했다.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알 수 없는 어떤 말이 속에 자꾸만 담겼다. 나는 방심하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다음날 이석경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도망치듯 집을 나가는 뒷모습이 생각보다 많은 걸 세세하고 기억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으로 괴로운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이석경이 허튼 생각을, 괴물이 됐다는 생각을 할까 봐 불안했다.
재경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 동안 이석경을 곁에서 지켜 달라고 말했다. 재경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에 알았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윤조 형.’
‘어, 왜.'
'……고마워요.'
무뚝뚝하게 건너온 작은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이석경과 어색하고 민망한 관계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를 피해 다닐 게 분명할 그 애를 어떤 식으로 옆에 붙들어 놔야 하나 주말 내내 고민했다.
그런 내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석경은 월요일이 되자마자 나를 따로 불러내어 사과를 했다.
“그날은, 그날 새벽 일은 진심으로 미안해.”
그날 밤의 사고에 내 책임이 얼마나 큰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늦은 발현 때문인지 이석경은 가끔 알파와 오메가 형질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
“석경아, 일단 사과는 받을게. 근데 나는 진짜 괜찮고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주기가…….”
꽃잎 같은 입술이 주저하듯 작게 달싹거렸다. 나는 그 입술에 넋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응?”
“그거, 주기 말이야.”
“…….”
“여태까지 정확했어. 거의 하루도 안 틀리고 정확했다고. 근데 이번에는 2주나 일찍 찾아왔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변명을 하자면 그래. 근데 주의를 소홀히 한 건 어쨌든 내 잘못이니까.”
“주기가 매번 정확했다고?”
“응, 왜?”
“석경아, 너…….”
“…….”
“알파 손 탄 적 없어?”
“무슨 소리야? 손을 타다니?”
“그러니까, 네 주위에 알파 없었어? 친구나 지인.”
“너만큼 가깝게 지낸 알파는 없었어.”
그 애의 대답에 기분이 좋은 이유는 뭘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유치한 쾌감에 나는 웃음을 지그시 억눌렀다.
“내가 지켜 줄게, 석경아. 다른 알파가 절대 접근 못하게 지켜 줄게.”
이 예쁘고 순진한 오메가를 짐승 같은 알파 새끼들이 음흉한 시선으로 노리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나는 그 애로 인해 질투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질투와 사랑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야아, 굳이 안 그래도…….”
“김준영은 베타라서 알파 체향을 못 맡잖아. 그렇지? 석경이 너는 나 아니면 안 돼. 나여야만 해.”
“…….”
“그러니까 항상 내 옆에 있어.”
“…….”
“대답해. 그럴 거지?”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열병처럼 입안이 말랐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끄덕거리는 작은 고갯짓이 아득했다.
시시때때로 나를 휘젓던 파괴적인 욕망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그 애를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웃음이 나왔다. 언제 이런 감정이, 아니 감격이 내 안에 자리 잡은 걸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나는 모르고 있었을까.
“석경아, 알파는 러트 사이클 때 오메가 페로몬이 도움이 많이 된대.”
“그래?”
“나 러트 오면 네가 도와줄 거지?”
나는 일부러 가볍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역시 알파 호르몬 때문에 주기적으로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이석경이 그러한 열병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정말 별일 아니니까. 이석경 네가 이상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내 의도가 전해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동그랗게 커졌던 이석경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내가 왜?”
“응?”
“너도 나 안 도와줬잖아.”
자기가 말해 놓고 얼굴이 발개져 버리는 이석경을 보며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날 나한테 많이 서운했구나.”
“누가 그렇대? 그냥 네가 나 안 도와줬으니까 나도 안 도와주겠다는 말이야.”
“우리 석경이 계산 확실하네. 근데 석경아, 혹시 내 페로몬 도움 안 됐어? 내 덕분에 작열통도 많이 사그라들었을 텐데. 그리고 또 있지. 내가 안정제 놔 준 거 기억 못 하는 거야?”
“아…….”
“그냥 확 안아 버릴 것을 그랬나.”
이석경은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카페를 나가 버렸다. 나는 웃으며 이석경의 뒤를 쫓아 나갔다.
* * *
20XX년 4월 x일
익명
#중도 존잘 남신 찾습니다.
어제 중도 3층 열람실 C 구역 창가 쪽에서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공부하시던 남학우 찾아요.
흰색 맨투맨에 연청바지 입으셨구요. 의자에 검은색 바람막이 걸어 놨더라구요. 그리고 얼굴이 되게 뽀얗구 잘생겼어요. 존잘인데 선이 고와서 잘생쁨 느낌. 보기만 해도 막 피가 깨끗해지는 느낌. 칠순 잔치 때도 그분 얼굴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뭔지 알죠?
암튼 가까이에서 보려고 근처에 갔다가 향기까지 넘 좋아서 킁카킁카 주접만 떨고 왔네요.
근데 전공책 봐서는 공대 쪽 같았어요. 이공계 뇌섹남이라니… 하… 잼처럼 발려버렸어요.
오늘도 도서관 가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따로 말 걸 거나 대시할 생각은 절대 없구요!!
넘 존잘이라 호감 뿜뿜이긴 한데 솔직히 막 그런 감정(?)으로 좋은 건 아니라서 사귀는 것까지는 좀 그렇구 덕질만 하고 싶은 그런?
제가 얼굴 작은 남자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제가 얼굴이 작은 편이 아니라 같이 있으면 제 얼굴이 더 커 보일 것 같아서.
다리 긴 것도 흠좀. 데이트할 때 저보다 걸음이 훨씬 빠를 거 아니에요. 근데 제가 뛰면 되니까 그건 별로 문제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문제는 그분 아무래도 신입생 같았어요. 그분께서 연상도 좋아하실까요? 신입생이면 군대도 가야 하잖아요. 하… 곰신될 생각하니까 벌써 슬프네요. 예비역이면 좋겠다. 근데 아닐 것 같아요. 과즙이 막 터질 것처럼 상큼했거든요. 예비역이 그렇게 상큼할 리가 없잖아요.
군대 못 가게 나라 하나쯤 사주고 싶네요. 고무신은 힘들어서..ㅠㅠ
아, 그렇다고 제가 그분이랑 사귀고 싶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 참! 그분이 잠깐씩 자리 비우실 때마다 그분 책상에 음료수 놓고 가는 분들 계셨거든요. 근데 그거 안 챙겨가시고 그대로 놓고 퇴실하시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은 음료수 다섯 개에 열람실 분위기 갑자기 싸해진 거 저만 느꼈나욬ㅋㅋㅋㅋㅋㅋ
잘생겼는데 순진하기까지… 이 정도면 설정과다 아닌가요? 그렇게 순진해서 험한 세상 어뜨케 살아요? 아무래도 제가 옆에서 지켜줘야 할 것 같아요.
어… 암튼 철벽 장난 아닐 것 같아서 말은 못 걸겠구, 혹시 그분 누군지 알면 간단한 인적 사항 공유 좀 해주세요ㅠㅠㅠㅠ 신상 털자는 거 아니구 진짜 간단한 거예요.
이름하고 나이 정도만.
참 근데, 상대방 나이랑 이름만 알아도 궁합 볼 수 있나요? 생년월일시 이런 것도 필요한가요?
아 정말 사귈 생각으로 궁합 보는 건 아니구요. 제가 원래 사주팔자나 토정비결 같은 거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요.
??
폰을 쥔 손이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뭐야, 이 변태 스토커는. 거슬리는 앞머리를 훅 입바람을 불어서 흩날렸다.
태정이 읽어 보라고 보내준 링크였다. 이석경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글들이 학교 SNS에 자주 올라온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도서관을 못 가게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며 무수히 달린 댓글을 훑었다. 이름 이석경, 기계공학과 1학년, 나이 스무 살. 오지랖 넓은 인간들이 이석경의 신상을 거리낌 없이 털어대고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최대한 정중하게 댓글을 달았다.
익명52 : 일반인 덕질하면 스토킹 아닌가요?
액정을 끄고 신경질적으로 폰을 내려놨다. ‘석경이한테는 이거 보여 주지 마.’ 태정에게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석경이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갔다는 음료수 다섯 개. 아마 이석경은 저한테 준 건지도 모르고 두고 왔을 것이다. 이석경은 그만큼 둔하다. 자신이 예민한 편이라는 이석경의 근거 없는 믿음 또한 둔하고 무심한 기질의 일부일 정도로 둔하다.
* * *
OB가 소집했다는 동아리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문제는 OB가 알파라는 거였다. OB가 알파인 줄 알았다면 이석경에게 어떤 원망을 듣더라도 나도 안 오고 이석경도 못 오게 했을 것이다.
이석경을 보는 OB의 시선이 점차 짙어졌다. 눈에 띄는 외모에 대한 단순한 흥미가 농밀한 탐색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나는 이석경의 체향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메가 페로몬이 새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 OB는 알파의 본능으로 이석경을 의심하고 있었다. 의심으로부터 그 애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과민반응이 OB에게 괜한 확신을 안겨 줄까 봐 섣불리 뭔가를 할 수도 없었다.
“후배님, 어디 가?”
“아, 저 화장실에…….”
“술이 많이 된 것 같은데 걸을 수 있겠어? 부축해 줄까?”
“괜찮습니다.”
OB가 이석경의 손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 새끼가 지금 누굴 만져.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석경을 빼앗듯이 끌어당겨 서둘러 호프집을 나오면서 OB의 뒷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새끼 알파야.”
“알아.”
“아는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나 지금 냄새 안 나잖아. 저 선배는 내가 오메가인 거 몰랐을 거야.”
“냄새가 문제가 아니라 너는…….”
“……내가 뭐?”
네 얼굴이 변태 스토커들을 홀리고 다닌다고.
“됐다.”
요즘 들어 속 타는 일들이 늘었다. 이석경은 둔할 뿐만 아니라 무방비하다. 유리하게 이용한답시고 그런 이석경에게 스킨십을 해 대며 사욕을 채우다가 나만 된통 당했다. 내 손을 탄 이석경의 히트사이클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나는 일주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볼 안쪽 살이 너덜너덜 다 씹혀서.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알딸딸하게 취한 이석경에게 아이스크림을 물려줬다. 근데 아이스크림을 왜 저렇게 먹지? 나는 겨우 아물기 시작한 볼살을 꾹 씹었다.
“석경아, 왜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먹어?”
“어?”
“좀, 그런 식으로 빨아야 돼?”
내가 좆이라도 세우면 어쩌려고? 실은 이미 섰지만. 그 애의 예쁜 입에 아이스크림 대신 내 것을 물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식?”
학교 SNS 변태 스토커와 술자리에서 추근대던 OB 때문에 나는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하게 묻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더 삐딱해지고 헝클어졌다.
“잘?”
“…….”
“잘 빠네, 되게.”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저속한 의미를 알아들을까? 확률은 반반이었다.
“미친…….”
알아들었네. 추근대던 OB를 대할 때의 표정과 나를 볼 때의 표정을 비교했다. 아까 같은 뿌리 깊은 경멸은, 없었다. 그나마 재활용은 가능한 쓰레기 쪽으로 분류된 것 같았다. 아까 그 OB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였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OB랑 비교될 수준은 아니지.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권윤조, 나 내일부터 중도에서 살 거야.”
“그래?”
“같이 할래, 공부?”
“그래, 같이 하자.”
그렇지 않아도 이석경을 노리는 변태 스토커를 쳐내려고 중도에 출동하려고 했었다.
* * *
“이거 그쪽이 놓고 간 거 맞죠?”
먼저 가겠다는 태정과 준영을 배웅해 주고 다시 열람실에 돌아오자마자 이석경 자리 앞을 서성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이석경 자리에 무언가 내려놓고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남자가 놓고 간 물건을 손에 들고 남자를 뒤쫓았다. 복도에 서서 얘기하면 이석경과 마주칠 게 분명해서 남자를 복도 끝으로 데려가 험한 기세로 물었다.
남자는 낯선 이의 추궁에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다가 거북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게 제가 맞긴 한데…….”
나는 남자가 쓴 쪽지를 눈으로 읽었다. ‘좋은 인연이 되고 싶어서 용기를 내봅니다. 010-2468-xxxx’ 좋은 인연? 감히 누굴 넘봐? 이석경과 좋은 인연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간들은 이 자식 말고도 학교에 넘쳐났다. 나는 항상 그래왔듯 쪽지를 구겼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소름 끼치니까.”
“저기…….”
“그쪽 남자잖아. 같은 남자한테 무슨 짓입니까.”
같은 남자인 이석경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목소리만큼은 당당하게 흘러나왔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데 참견이냐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참견을 안 할 수가 없지. 내가 먼저 발견해서 경고를 하니 망정이지 남자가 이석경에게 직접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주가 엄마 생신이었거든요. 가족들끼리 외식을 나갔는데 어떤 모르는 남자가 형한테 명함을 줬어요.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남자는 알파였는데 형이 오메가라는 걸 알고 그런 거예요. 오메가한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형을…… 무시한 거예요.’
뇌리에 남아있던 재경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날의 일이 이석경에게 어느 정도의 치욕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으니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무슨 과예요?”
“……네? 저요? 저 사체관데요.”
사체과. 듣고 보니 운동 꽤나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놈이 이석경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말이지. 상대가 남자라서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 건가. 이석경이 또다시 그날과 같은 치욕을 겪기라도 할까 봐?
그럼 상대가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가정해 보았지만 더러운 기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였어도 당연히 내 선에서 통제했을 것이다. 잡스러운 날파리들의 성별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럼 공대 올 일은 없을 테고, 앞으로는 중도에 안 왔으면 좋겠는데. 자퇴를 해 주면 더 고맙고.”
불끈 말아 쥔 남자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속에서 끌어 올리는 듯한 한숨을 크게 내쉬며 화를 참고 있었다.
나는 더는 볼일 없다는 얼굴로 등을 돌렸다. 남자도 나와 더 실랑이를 벌이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고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성과 없는 행동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열람실 자리로 돌아와 있을 줄 알았던 이석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0분을 더 기다렸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왜 안 와? 그러자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집에 간다는 답장이 왔다. 이석경이 없는데 도서관에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후다닥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내 선명한 집착이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되어 증거로 남고 있었다. 그 애도 나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럼에도 이석경은 단 한 번도 증거를 들이밀며 내 집착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비정상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지 무심한 사과를 건넬 뿐이었다.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무음으로 해 놔서 몰랐어.’ 때문에 나는 마음을 놓고 그 애에게 집착하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 한 번도 이유를 고민해 보지 않았다.
이석경이 나를 이상하게 여겼더라면, 쌍방 각인을 맺어야 한다는 식어 빠진 핑계를 쥐고 있는 대신에 내 마음의 정체를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친놈이라고 욕이라도 해 줬으면, 너 이게 얼마나 비정상적인 짓인지 정말 모르는 거냐고 나를 비난했더라면,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나를 몰아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 애가 내 옆에 없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불안하고 힘들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더 일찍 깨달았을 텐데. 나는 그런 종류의 불안을 잘 견디는 인간이 결코 아니니까.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석경은 받지 않았다. 이석경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얼굴을 봐야 숨통이 좀 트일 듯했다.
* * *
“며칠 전에, 남정혁한테 연락 왔어.”
2년 전 남정혁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가 공중분해되고 녀석의 가족은 필리핀으로 도피성 이민을 갔었다.
“왜?”
아무 대꾸 없는 나와 달리 태정은 최승희가 전한 소식에 반응을 보였다. 최승희는 나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내가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대.”
최승희는 말끝에 냉소를 흘렸다.
“오해는 무슨 오해. 최승희 너 절대 속지 마라.”
“안 속아.”
“남정혁 가식에 속아서 홀라당 넘어갔던 게 누구였더라.”
“그땐 그 새끼가 내 추종자 노릇하면서 허영심을 채워 주니까 판단력이 흐려졌던 거고.”
최승희는 구정물이라도 삼킨 얼굴을 했다.
“승희야, 앞으로는 좋은 남자 만나라.”
“박태정, 너나 잘해. 참, 윤조야.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그것도 같은 과에 같은 동아리라고 하던데.”
나는 태정을 노려봤고 녀석은 딴청을 부렸다. 저 입 싼 새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응, 그래서 어쩌다 좋아하게 됐는데? 짝사랑이라며. 걔 예뻐? 나보다 더? 이름이 뭐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질문을 듣자 하니 그래도 태정이 이석경 얘기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사나운 시선을 느낀 태정이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승희야, 그만해. 윤조한테도 프라이버시가…….”
“태정이 얘기 들어 보니까 새터 때부터 걔 좋아했다며.”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길래. 나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죄인처럼 눈을 깔고 있는 태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최승희에게 눈을 돌렸다.
“아니야.”
“내가 태정이 얘기를 듣고 생각을 해 봤는데, 윤조야. 합리적인 의심이 막 들었거든. 들어 봐?”
“…….”
“너 원래 한국 쪽 대학에는 관심 없었잖아. 졸업하면 미국 건너가서 적당한 대학 골라서 다닐 생각 아니었어? 근데 너 고2 때부터 갑자기 미친듯이 공부했지? 이게 진짜 합리적인 의심인데, 들어 봐?”
“…….”
“너 고2 때 일방 각인했잖아. 이상하지? 네가 공부 시작한 시기랑 딱 겹치네? 너 그 각인 상대 쫓아서 우리 학교 입학한 거 아니야?”
최승희는 6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돌아가신 최승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어머니는 최승희를 딸처럼 여겼고 최승희 역시도 어머니를 잘 따랐다. 어머니는 최승희가 스무 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함께 마시고 싶어서.
친모녀보다 더 다정한 두 사람은 사소한 이야기도 서로 공유했다. 따라서 내가 일방 각인을 했다는 사실을 최승희가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거였다.
“흐억!”
최승희의 ‘합리적 의심’에 격하게 놀란 반응을 보인 쪽은 내가 아니라 태정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태정은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눈동자에 깨달음이 번졌다. 그렇구나, 각인 상대가 이석경이었구나. 내가 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지? 속마음이 고스란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둘러 놀란 감정을 덮은 나는 청포도 에이드를 한 모금 들이켜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설 쓰지 마.”
“소설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태정아, 너 윤조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너도 윤조 각인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마, 말 못 해. 죽어도 말 못 해. 나도 의리가 있는 놈이야.”
“그래? 넌 그럼 그 대단한 의리 지켜라. 내가 직접 찾아내면 되니까.”
최승희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는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최승희가 어쩐지 일을 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더 반응을 보였다가는 최승희의 ‘합리적 의심’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 * *
5분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쌓였다. 발신자는 최승희. 그녀의 집착도 나만큼이나 비정상이다.
용건은 뻔하다. 동방에 찾아오겠다는 전화이리라. 최승희가 동방에 오면 틀림없이 이수현을 의심할 것이다. 최승희의 상식 선에서는 상대가 남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나는 그녀의 의심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진동 울리는데 안 받아도 돼?”
이석경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이석경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나는 고개를 젓고는 그의 손을 쓱 잡아당겨 내 가슴 위에 올려놨다. 흠칫 당황하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을 타고 전해졌다.
“석경아, 재워 줘. 토닥토닥해 줘.”
이석경은 잡힌 제 손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려고? 밥 먹으러 가야지.”
“5분만 잘게.”
어제저녁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호출을 받고 오랜만에 본가에 갔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와 함께 어머니와 최승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겨진 내 표정과는 아랑곳없이 최승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여긴 웬일이야?’ 퉁명스럽게 묻자 너 보러 온 거 아니고 어머니 보고 싶어서 온 거라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어머니는 차갑고 무뚝뚝한 나를 못마땅해하며 혀를 찼다.
어머니와 최승희는 식사 내내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살가운 대화를 나눴다. 나는 묵묵히 식사를 했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일이 시험이라 일찍 가 봐야 합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 말을 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윤조야, 너 요즘 만나는 사람 없니?’
‘없어요.’
어머니는 의도적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뒤에 이어질 말은 뻔했다.
‘각인 상대는 누군지 정말 말 안 할 거니?’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누군지 알아낼게요. 걱정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최승희를 바라봤다.
‘너희 둘이 결혼하면 소원이 없을 텐데.’
‘어머니,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요. 윤조는 제 취향 아니에요. 그리고 남매끼리 어떻게 결혼을 해요.’
‘너희가 무슨 남매라고.’
‘와, 저 서운해요. 언제는 제가 딸이라면서요. 그럼 윤조랑 저 남매 맞죠. 윤조야, 누나라고 불러.’
최승희의 넉살에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고 나는 혹시라도 최승희의 입에서 각인 상대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올까 봐 신경 쓰여서 제대로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내일 시험이 있어서 일찍 가 볼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있다 가라는 말을 뒤로하고 집을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왔지만 운전 중이라는 핑계로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 최승희?”
“태정이 오랜만. 윤조 여기 있지?”
전화를 받지 않자 최승희는 결국 동방까지 직접 찾아왔다. 무시하고 눈을 감고 있는 나를 이석경이 곤란한 목소리로 불렀다.
“권윤조.”
“응? 석경아, 왜?”
“일어나 봐.”
“왜에.”
“……친구 왔잖아.”
난처해하는 이석경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더 버티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최승희를 상대해야 했다.
“최승희, 네가 여긴 웬일이야?”
최승희 너는, 네가 어떤 순간을 방해했는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극심한 짜증을 느끼는지 알기나 할까.
“그러게. 내가 여기 왜 있을까. 맞혀 볼래?”
“하하, 길이라도 잃은 거야?”
“너 만나러 왔지. 연락이 안 돼서.”
“왜? 나한테 볼일 있어?”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야?”
“응.”
예상대로 최승희는 이석경을 논외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승희가 결코 논외로 취급할 수 없는 인물이 동방에 들어왔다.
이수현이 동방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수현은 최승희의 존재를 궁금해했고 최승희는 그 질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저는 최승희라고 해요. 윤조랑 약혼한 사이구요.”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놀랐다. 나는 최승희를 끌고 동방을 나와 외진 복도 끝으로 데려갔다.
“뭐 하는 짓이야?”
“쟤야? 이수현?”
“…….”
입을 열면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최승희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반응 보니까 쟤도 너한테 마음 있는 것 같던데?”
“그깟 반응 보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야?”
“응. 윤조야, 내 말 믿어. 쟤도 진짜 너한테 마음 있어. 마음이 없으면 나를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볼 리가 없지. 축하해. 너 짝사랑 아니야.”
“야, 너는 진짜 안 되겠다. 가라. 화내기 전에.”
나는 최승희의 단단한 오해를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렸다. 언제까지 그 오해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이석경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동방으로 되돌아와 문을 열자 이수현이 도끼눈을 뜬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윤조,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이번에는 이수현을 따라 빈 강의실에 들어갔다. 이수현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쓰레기라도 보듯 나를 경멸하는 이수현의 얼굴에서 애정이 읽혔다. 물론 나를 향한 애정은 아니었다.
“권윤조, 너 뭐야.”
“뭐가.”
“약혼이라니? 너 이석경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주위에서 다들 내가 이석경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 첫사랑이 이석경이고 내가 이석경을 짝사랑하고 있고, 그러니까 내 사랑의 주인이 온통 이석경인 셈이었다.
“이수현, 너 석경이 좋아해?”
“좋아해.”
“설마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미친.”
“그럼, ……썸?”
이수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썸? 나랑 이석경이랑? 야, 이석경이랑 썸은 네가 타고 있잖아. 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내게. 근데 뭐야, 약혼?”
“…….”
“나 이석경한테 고백할 거야.”
“……하지 마.”
“왜 하지 말래. 넌 약혼까지 했으면서.”
“약혼한 거 아니야.”
“지금 약혼을 했고 안 했고가 중요한 게 아닌 거 알지?”
알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서 동방을 뒤집어 놓은 최승희라는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런데 내가 왜 이수현에게 해명을 하고 있을까. 내가 해명하고 싶은 상대는 사실 이석경인데.
순간 숨이 턱 막힌 것처럼 생각이 멈췄다.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얼얼했다.
“그럼 이석경은? 너 이석경 좋아하지? 확실히 말해.”
아니라고 대답하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이미 반쯤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몰랐어.”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아닌 멍청한 중얼거림이었다.
“뭐?”
“몰랐다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내가 서 있는 장소와 눈앞에 있는 이수현을 바라봤다. 빈 강의실. 그리고 이수현.
등신같이 삽질만 실컷 하다가 겨우 이석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소가 빈 강의실이었고, 하필이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수현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데, 내가 마주 보고 있어야 할 사람은 이수현이 아닌데.
이석경이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 강렬한 욕구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늘 이석경을 보고 싶어 했고 따라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감정이었다. 이제 막 자각한 감정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진즉부터 숙성되어 있었다.
“이수현.”
“왜.”
초조했다. 이수현이 정말 고백을 해 버리면? 이석경이 이수현의 고백을 받아 주면? 나는 칼자루를 쥔 이수현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이석경에게 고백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는 이수현의 눈을. 사실은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이수현의 눈을.
“네가 고백하면 석경이는 아마 너랑 사귈 거야.”
이석경이 그동안 이수현에게 보였던 호의적인 태도가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질투로 심장이 쓰라렸다. 나는 이수현이 잡스러운 날파리 따위가 아니라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알아.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내 고백을 받아 주겠지.”
이수현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실을 마냥 반기는 기색이 아니라 나는 의아했다.
뭐가 됐든 받아 주면 좋은 거 아닌가? 내 단순한 생각과 대조되는 이수현의 복잡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고백 안 하면 안 되냐.”
“안 하면? 네가 하게?”
“나는 여자가 아니잖아. 나는 안 받아 줄 거야.”
“너 웃긴다. 그럼 우리 둘 다 손가락만 빨고 있자고? 너는 용기 없어서 고백 안 할 거니까 나까지 포기하라고?”
“할 거야, 고백.”
“…….”
“시간을 줘.”
이수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허락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가 왜 너를 봐주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네 별명 말이야.”
“내 별명?”
“’어마어마한 쌍놈’ 그거.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내가 학기 초에 강의실에서 너한테 했던 말 때문에 별명이 된 것 같아서.”
“…….”
“미안하다.”
이수현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겨우 그런 일로 책임을 느낀다는 게 신기했다. 정작 나는 그 별명으로 인해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은근히 시기하는 남자 동기들 입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간 소문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수현의 죄책감을 해소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 것이 이석경을 잠시간 양보해 주는 이유라면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암튼 이번 학기까지만 기다릴 거야. 2학기 개강하자마자 고백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개강 총회 때 술 먹고 이석경 덮칠 수도 있어. 나 술 마시면 개 되는 거 알지?”
“알지. 우리 과 동기들 다 알아.”
이수현은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려보더니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동방으로 갈까 하다가 이번에는 김준영이나 태정이 나를 따로 불러내 개인 면담을 청할 것 같아서 이석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려와. 공학관 정문에서 기다릴게.]
이석경이 보고 싶었다. 오직 그 애만 보고 싶었다.
* * *
김준영의 견제를 겨우 뿌리치고 납치라도 하듯 이석경을 데리고 카페로 왔다.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한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얼굴을 앞에 두고 나는 긴장했다. 내가 그전에는 이석경을 어떻게 대했었더라. 어떤 표정을 지었었고 어떤 말투로 말을 했더라. 그 애를 마주 보고 있을 때, 몸을 뒤로 기대고 앉았었는지 앞으로 내밀고 앉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쉽게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이석경을 이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나는 기민하게 이석경을 살피고 또 살폈는데 내가 그 애에게서 바라는 기운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충격과 혼란, 질투, 화난 기운, 해명을 바라는 눈빛 같은 것이 없었다. 이석경은 무심하고 초연했다.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있단 말인가.
“석경아, 아까 최승희가 한 말…….”
“…….”
“아, 최승희가 누구냐면 아까 걔 이름이 최승희거든.”
“응.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적어도 최승희가 누군지는 기억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조금은 쉬워질 것이다.
“나 걔랑 약혼한 거 아니야.”
“어?”
이석경은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냐는 얼굴을 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아니,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서글펐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나를 아프게 할퀴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얘기가 오고 가긴 했는데 정식으로 약혼한 적 없어.”
“…….”
“네가 오해하는 거 싫어.”
내 말을 끝으로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TMI를 쏟아낸 것처럼 객쩍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기…….”
이석경은 무언가를 간신히 참아내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 석경아.”
“이수현은…… 괜찮아?”
이석경이 비록 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내 앞을 지키고 있긴 했어도 나는 이 자리에 우리 둘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그 애의 입술에서 설마 이수현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오래 멍했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벼려졌다.
“석경아, 너는.”
“…….”
“이수현이 그렇게 걱정돼?”
“…….”
이석경의 질투를 달게 받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쓰디쓴 질투를 해야만 했다.
“왜? 내가 걔한테 상처라도 준 것 같아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석경이 최승희 따위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이수현을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지 않다고 해서 침착할 수는 없었다.
“석경아.”
“응.”
“너 우리 과에서 내 별명이 뭔지 알아?”
“……어? 말해도 돼?”
“알고 있으면 말해.”
“……어마어마한 쌍놈?”
“그래서 내가 진짜로 쌍놈일까 봐 이수현이 걱정돼?”
이석경은 이수현이 저를 좋아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나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권윤조, 나는…… 이해가 안 가.”
“어떤 게? 말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좋은 일이고 축하받을 일이잖아.”
“…….”
“너랑 그 여자분 잘 어울려. 네가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너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왜 너한테 최승희와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 속 모르는 말을 지껄이는 이석경이 원망스러웠다.
“언젠가는 할 거잖아. 약혼이든 결혼이든.”
“…….”
“그래도 내가 오해하면 안 되는 거야?”
“…….”
“왜 나한테 약혼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 건데. 넌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어.”
“석경아.”
저 입술을 어떻게 막지? 나는 무작정 그 애의 이름부터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매정한 말만 골라서 할 수가 있을까.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
“네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그 말을 하겠다고 나를 따로 불러낸 거야? 내가 도대체 뭐라고.”
내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들만 골라서 해 놓고 끝내 아무것도 설명하지 말라고 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여태 내가 어떤 식으로 분노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분노하는 대신 마치 상처받는 게 타고난 체질인 사람처럼 아파했다.
“석경아,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네가 나한테 얼마나…….”
“…….”
“얼마나 특별한데.”
“그럴 필요 없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
“아니다. 내가 네 생각까지 어쩔 수는 없는 거니까, 그냥 나를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대해 줘.”
“네가 다른 사람이랑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이 대해.”
“…….”
“말했잖아, 석경아. 너는 특별하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애의 잔인한 입술을 막을 수가 있을까. 나는 좋아한다는 고백을 흡사 내던질 기세로 숨을 몰아쉬었다.
“특별할 이유가 뭔데. 아, 내가 오메가라서 그런 거야?”
나를 향한, 어쩌면 알파를 향한, 아니 어쩌면 알파라는 형질을 떠나 인간 권윤조를 향한 지독한 적대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절망적인 순간에조차 그 애에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다. 분노와 함께 형편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올 게 뻔한 유치한 고백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이석경.”
그리고 그때 거짓말처럼 최승희가 눈앞에 나타났다.
* * *
“생각도 못 했지 뭐야.”
나는 너덜너덜해진 상처를 수습할 정신도 없이 최승희와 마주 앉았다.
최승희는 이석경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카페에서 이석경이 한 말을 들은 것이다. 강력한 단서를 쥔 그녀는 아주 쉽게 진실에 도달했다. ‘아까 걔야? 네 각인 상대가?’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물음이었다.
“설마 남자일 줄은 몰랐어.”
“…….”
“고백을 하지 그러니?”
창밖에 눈을 두고 있던 나는 느린 시선으로 최승희를 보았다.
“하려고 했는데 못 했어.”
“왜?”
“나를 싫어해.”
최승희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최승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웃어.”
“걔가 그렇게 말했어? 너 싫다고?”
“아니.”
“그럼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친해 보이던데?”
“그래서 뭐.”
“고백하라고. 차일 때 차이더라도 확실하게 차여야지. 왜, 자존심 상해서 그건 싫어?”
“차이는 건 상관없는데…….”
“근데?”
“나를 피할 것 같아서. 나를 피하면 그건 진짜 못 견딜 것 같아.”
웃음기를 띠고 있던 최승희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럼 어머니한테 말씀드려야겠다. 방법을 마련해 주시겠지.”
“무슨 방법? 납치라도 하라고?”
“뭐 비슷하겠지. 근데 윤조야. 이석경 걔, 네 각인 상대잖아. 물론 예쁘게 연애하다가 이상적으로 맺어지면 좋지.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생 네 곁에 둬야잖아. 왜 고통을 감수하면서 어렵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가.”
나 역시 이석경이 언젠가는 내 곁에 있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한껏 느긋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 되어버린 그 생각은 현재 내게 위안도 위로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이해 안 해도 돼.”
“알았어. 이해 안 하고 그냥 어머니한테 말씀드릴게.”
전적으로 어머니의 편인 최승희가, 어머니의 앓던 이를 당장 빼 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지 마. 그럼 너 다시는 안 봐.”
“그럼 이석경한테 말해야겠다. 너 다음 달이지? 러트. 안정제도 안 듣는 불쌍한 알파 하나 있으니까 옆에 좀 있어 주라고. 이석경이 옆에서 페로몬이라도 흘려주면 네가 그나마 견딜 만하겠지. 그래도 너랑 친군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까?”
“미쳤어?”
“미친 건 너야. 너 몇 년 동안 그 끔찍한 고통을 겪어 놓고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 거야? 매번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는 너 지켜보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은 생각 안 해? 태정이도 널 얼마나 걱정하는데. 그 고통이 어떤지 알고 있는 나는 더하고.”
“…….”
바짝 날이 서 있던 최승희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근데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분위기가 마냥 담백한 친구 사이로 보이지만은 않던데.”
최승희의 말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우리 분위기가 어땠다는 걸까. 친구 사이가 아니면 뭘로 보였다는 걸까. 나는 최승희의 말에서 희망을 찾고 헛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
“……그런 얘기 그만해.”
“내가 도와줄까?”
“도와? 네가 날?”
“응.”
“좋아, 제발 좀 도와주라. 앞으로 가만있어.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내가 옆에서 살살 자극해 볼까? 질투 나게.”
순간 한없이 무심하고 초연하던 이석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좋은 일이고 축하받을 일이잖아. 너랑 그 여자분 잘 어울려. 네가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왜 나한테 약혼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 건데. 넌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어.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네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그 말을 하겠다고 나를 따로 불러낸 거야?’
내 가슴을 사정없이 할퀴던 그 애의 담담한 목소리도 떠올랐다.
“신경도 안 쓸걸.”
“뭐라도 해 봐야지.”
“가만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럼 그냥 이석경한테 직접 말해야겠다. 권윤조가 너한테 각인했다고.”
어머니에게는 몰라도 이석경에게는 말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최승희는. 내가 최승희의 오지랖을 모를까.
“야.”
“너 다음 달에 러트잖아. 그전까지만 뭐라도 해 보자. 밑져야 본전이잖아. 응?”
과연 이석경이 질투를 하려나. 이석경에 관해서는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기대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쩌면 이석경이 질투를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말이다. 나 역시 나와 그 애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을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게다가 최승희를 말릴 방도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최승희를 24시간 밀착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체 무슨 수로 저 입을 막는다는 말인가.
“이석경한테 절대 말 안 한다고 약속해.”
“약속하면 내 도움 받을 거야?”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말고.”
“알았어. 둘 다 약속할게.”
나는 최승희에게 확답을 받고서야 내키지 않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