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1)

* * *

결국 일주일 만에 내 쪽에서 먼저 이석경의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병원에 데려다준 생색을 내자는 게 아니라 나에게는 이석경을 만나야만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일방 각인을 끊으려면 피각인자가 필요했으니까.

“왜 전화 안 했어요?”

- 아…….

내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 그게…….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었어요.

“이석경 연락처 좀 알려 줄래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대꾸 없이 한숨만 몇 차례 내쉬던 동생은 침묵 끝에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이석경 연락처를 알려 주는 게 어려운 일인가.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좋지 않은 예감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석경이 동생과 함께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고맙다고 예의를 차리겠지. 그럼 나는 각인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만 하고 당장 그 애를 병원에 끌고 갈 것이다.

이석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쩌다 저에게 각인을 하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마치 이석경을 눈앞에 둔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그려 보던 나는 멈칫했다.

놀란 두 눈이 의심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정신을 잃은 나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각인을 한 거냐고 경계하는 눈길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날 밤 내가 한 짓이 강간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어쩌면 이석경은 그날 일을,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나에게 간절하게 매달렸으니까.

나는 명쾌한 대답을 준비하는 대신 또 다른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채 이석경의 동생을 만나러 갔다.

“이석경은 같이 안 왔어요?”

이석경이 함께 나오지 않은 게 나에게 유리한 일인지 불리한 일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지만 나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이재경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하고 동갑이시니까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편한 대로 하세요.”

“우리 형 도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도 많이 고마워하고 계세요. 이건 부모님이 형한테 전해 주라고 준비한 거예요.”

이재경은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얼마 안 되지만 사례금이에요.”

이석경의 동생과 부모님이 나에게 고마워한다. 그럼 이석경은?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되는 사례금이 내 눈앞에 있었다. 푼돈이나 취하자고 생색내는 걸로 받아들인 건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봉투를 도로 물렸다.

“됐어요.”

“받아 주세요.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저희 형 연락처를 왜 물어보시는지 모르겠지만, 형을 만날 생각이라면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이에요?”

“아시다시피 저희 형은 그날 오메가로 발현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그,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한 것도 충격을 많이 받았고요. 이제 겨우 추스르는 중인데 괜히 또 들쑤시고 싶지 않아요.”

“내가 이석경을 들쑤실 거라는 말인가요? 이석경이 그날 일을 기억하나요?”

“아뇨, 형은 그날 일은 아무것도 기억 못해요.”

“그럼 내 존재를 아직 모르겠네요.”

이석경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내 영역으로 얌전히 걸어 들어온 이석경은 자기가 들어온 곳이 정작 어디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재경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각인을 끊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석경에게 하루빨리 깨우쳐 주고 싶은 갈망이 나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너는 내 손에 들어왔잖아. 그러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내 앞에서 해야지.

“네, 아직 몰라요. 앞으로도 몰랐으면 하고요.”

“왜요. 이해를 못하겠어요.”

“형은…… 알파잖아요. 그렇죠?”

“그런데요.”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형의 고통을 모르시겠죠. 형은 알파니까요.”

“알파니까 더더욱 오메가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

“내가 이석경을 책임져 줄 수도 있어요.”

이재경은 짐짓 놀란 눈을 했다. 나 역시 그 말을 내뱉고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석경을 책임지고 싶은 거구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럴 필요 없는데…….”

“지금이야 혼란스럽겠지만 이석경도 곧 깨닫게 될 거예요. 저를 품어 줄 알파가 필요하다는 걸. 내가 그걸 해 주겠다는 말이에요.”

말끝에 나는 태정이 말하는 시혜적인 미소를 언뜻 지었던 것도 같다.

이재경은 굳은 얼굴로 나를, 나의 의욕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이재경은 체념인지 허락인지 모를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념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내 쪽에서 생떼를 부린 결과 같아서 꺼림칙했고, 허락이라기에는 이재경이 우위에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알았어요.”

“…….”

“시간을 주세요. 저희 형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연락드릴게요.”

이재경은 나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것은 마치 나에 대한 적의를 감추기 위한 위장 같기도 했다. 개운치 않은 감정들이 자꾸만 뭉쳤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데요. 재차 묻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급하게 굴 필요 따윈 없다. 금세 연락이 올 테니까.

기억을 못한다 하더라도 이석경의 무의식은 분명 알파를, 나를 원했었다. 나에게 사랑스럽게 매달렸고 내 입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내 자신감은 터무니없지 않았다.

이석경을 병원에 데려가서 각인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잠시 보류했다. 그렇지 않아도 발현으로 혼란스러운데 저에게 일방 각인한 알파까지 나타나면 더욱 혼란스러울 터였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알파 형질로 발현하는 게 당연했던 나와 달리 이석경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하루아침에 오메가로 발현했다. 나는 그런 이석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드물게 내 관심을 끄는 지루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 정도 정성은 쏟아야 마땅했다.

각인을 끊지 말고 아예 쌍방 각인을 맺는 것은 어떨까. 내가 그렇게만 해 주면 이석경은 앞으로 오메가로서 겪게 될 모든 수난과 불편함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맑고 투명한 모습을 잃지 않고. 구김살도 없고 그늘도 없이 그렇게.

정말이지 나는 내 것에게 그 정도 성의는 보여 줄 수 있었다.

쌍방 각인을 맺으면 나는 평생 이석경의 히트사이클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석경의 성욕은 오로지 나에게만 향할 것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에게서만 안정을 구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석경이 제 스스로 내 영역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평생 없겠지.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입안의 혀처럼 굴겠지.

어느새 나는 쌍방 각인을 맺는 것으로 이석경을 책임지겠다는 말의 의지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 * *

“윤조야, 부탁이야. 제발, 이렇게 빌게.”

서열질에 심취해 교실 안에서만큼은 나에게 좀처럼 알랑거리지 않던 남정혁이 무릎을 꿇었다. 반 아이들이 놀란 시선들이 일제히 모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정혁아, 일어나.”

“한 번만 살려 줘. 네가 안 도와주면 우리 회사 부도나는 거 너도 알잖아. 제발, 윤조야.”

남정혁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업은 자산 가치가 형편없는 기업이었고 따라서 도산은 시간문제였다. 신용상의 문제로 대출 승인도 쉽지 않아 회사채로 간신히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그 회사채의 3분의 2가량이 우리 쪽에서 투자한 자금이었다. 때문에 회사채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남정혁의 알랑거림은 극에 달했었다.

나는 그 자금을 회수해 달라고 형에게 말했다. 돈맥을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사정이 안 좋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나머지 3분의 1에 해당하는 회사채 투자자들도 앞다투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 부도나면 나 전학 가게 될지도 몰라. 윤조 네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정이 있다면, 미운 정이라도 있다면…….”

남정혁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이석경을 때리고 짓밟았던 그날 밤을 계기로 나는 생각했다. 녀석이 힘을 가진 알파로서 세상을 살게 놔둬서는 안 된다고. 그 힘이 훗날 이석경에게 어떤 위협으로 돌아올지 모르니 하루빨리 제거해야만 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녀석뿐만이 아니라 힘을 가진 알파들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모조리 제거하고 싶었다.

“정혁아, 나 너한테 미운 정 같은 거 없어.”

남정혁을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녀석이 가진 알량한 부를 빼앗는 것이었다.

오열을 터뜨린 남정혁은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리던 녀석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씨발 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너는 씨발 인간도 아니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녀석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이 어떤 장치라도 된 건지 남정혁이 주먹을 뻗었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 녀석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교실 바닥 위로 나뒹군 녀석을 짧게 내려다본 나는 그대로 교실을 나왔다.

교실을 나오자마자 내 앞을 가로막은 최승희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고개를 끄덕이자 최승희가 앞장섰다. 최승희는 한적한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윤조야, 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뭐가?”

“나 정혁이한테 다 들었어.”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공원에서 히트사이클 발작 온 오메가를 강간하려던 거, 사실은 너였다며. 그거 뜯어말리다가 정혁이가 너한테 저렇게 얻어맞은 거고.”

최승희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얼마 전 카페에서 열심히 자기변호를 하던 남정혁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예고편을 얼핏 봐서인지 얼토당토않은 오해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남정혁은 최승희의 환심을 사려고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 녀석의 끈질긴 구애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더니 어느새 정이 들기는 든 모양이었다.

“너 그 말을 믿어?”

동요하는 기색 없이 묻자 오히려 최승희가 동요했다. 하긴 그 말을 안 믿으면 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남정혁을 의심해야 하니까 최승희 딴에는 마음이 편한 쪽을 택했을 것이다.

“…….”

“최승희, 정신 차려.”

빨개진 눈으로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최승희가 이윽고 한숨과 함께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과 마주한 모양이었다.

“남정혁이 그랬어? 그 새끼가 그런 거야?”

“어.”

“미친 새끼. 비열한 새끼.”

“…….”

“대가리를 깨 버릴까.”

최승희는 한참 동안 남정혁을 향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을 쏟아내며 분노로 씩씩댔다.

* * *

이재경을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남정혁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는 결국 도산했다. 녀석의 가족은 도망치듯 한국을 떴다.

최승희는 쓰레기보다 더러운 남정혁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모욕감과 경멸감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다리던 연락 대신 태정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태정 : 몸은 어떠냐? 학교 끝나고 집에 놀러 갈까?]

[괜찮아. 나 저녁때 누구 좀 만나려고]

[태정 : 누구? 나도 아는 사람?]

[너는 몰라. 내일은 학교 갈 수 있으니까 내일 학교에서 보자]

[태정 : 오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혹시나 다른 연락이 오지는 않았는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침대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며칠간 고열에 시달린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나는 이틀 전 찾아온 러트 때문에 오늘까지 사흘간 학교를 결석했다. 고통 때문에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안정제가 듣지 않았으니까.

작열통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까무룩 실신한 사이에 의사가 집으로 방문했다. 덕분에 내가 각인한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울었고, 아버지와 형들은 상대가 누구냐고, 누군지 말하면 당장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난리였다. 마치 약국에서 약을 사 오겠다는 느낌이었다. 이석경은 흡사 해열제나 진통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석경의 머리채라도 잡아서 당장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내가 제일 간절했을 텐데도 끝내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이번만 견디면, 다음 러트 때는 원 없이 이석경을 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냈다.

[이석경 연락처 알려줘요]

몸을 일으킨 나는 이재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바탕 지옥을 겪고 나자 더 기다려 줄 여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재경 : 제가 연락드릴게요]

10분 만에 답이 왔다. 메시지를 읽은 순간 기분이 좆같아지려고 했다. 내가 지금 질척거리는 입장인 건가.

[그럴 필요 없어요. 오늘 이석경 학교로 직접 찾아갈게요]

[이재경 : 형. 오늘 저랑 만나요. 저랑 얘기해요.]

이번에는 5초도 안 걸려서 메시지가 왔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절박함이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정말로 학교까지 찾아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알았다고 답장을 보냈다.

약속 장소로 나가자 카페에 먼저 와 있던 이재경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살이 빠졌는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맞은편에 앉자 이재경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왜요.”

“형, 살 빠졌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재경이 했다. 나는 대답 없이 볼을 쓸어내렸다.

“형, 저번보다 훨씬 더 잘생겨지신 것 같아요.”

“…….”

“아니, 원래도 엄청 잘생겼는데 더 잘생겨지신 것 같……. 암튼 그렇다구요.”

“고마워요.”

넉살 좋게 대하는 이재경의 태도에 나는 잔뜩 벼르고 있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근데 형은 여자 친구 없어요? 인기 되게 많을 것 같은데.”

“……재경아.”

“네?”

“내가 형이니까 말 놔도 되지?”

“네, 그럼요. 형 여자 친구도 형처럼 외모가 막 출중하고 그래요? 혹시 여자 친구 사진 있어요? 궁금한데.”

천연덕스러운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이재경의 활발함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마치 내 입에서 이석경 이야기가 나올까 봐 애를 태우는 느낌이었다. 또한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재경아.”

“네, 형.”

“우리가 그런 얘기나 하자고 만난 건 아니잖아.”

“……네, 그렇죠.”

“한 달이면 많이 기다려 줬지? 이석경이랑 만나고 싶은데.”

순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재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없이 머그컵 표면을 손으로 매만졌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내 쪽에서 말을 하려던 찰나 이재경이 작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워낙 작은 목소리로 말한 데다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탓에 나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뭐라고?”

“왜요.”

“…….”

이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아 있었다.

“왜 우리 형을 굳이 만나려고 하는데요.”

“그걸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는데.”

허를 찔린 나는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더 강하게 말했다.

“전에 말했었죠. 우리 형 책임지겠다면서요.”

“…….”

“그거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아니.”

“설마 우리 형한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예요?”

“…….”

“우리 형 좋아해요?”

“……아니.”

“근데 왜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굳이?”

그건 내가 이석경한테 각인을 해버려서…….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이석경한테 나를 책임져 달라고 하는 게 오히려 앞뒤가 맞는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재경에게 할 게 아니라 이석경을 만나서 본인에게 직접 전해야 할 얘기였다.

“그날 내가 구해 줬잖아. 이석경을.”

“그래서요?”

“한번 구해 줬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내 귀에도 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이재경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인 이재경은 머그컵을 매만지며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백마 탄 왕자님도 아니고.”

“…….”

“촌스러워요, 형.”

“……촌스럽다고?”

“우리 형이 들었으면 아마 뒷목 잡았을 거예요. 너무 열 받아서. 책임이니 뭐니 그런 거 진짜 너무 황당하고 촌스럽고 유치하다구요.”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이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형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책임 같은 거 안 져도 되니까.”

이재경은 눈물로 뺨을 거침없이 적시며 뚝뚝 울고 있었다.

* * *

이재경과 헤어지고 곧바로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는 이석경이 다니는 고등학교 앞에서 멈췄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아직 불이 켜진 학교 건물을 노려보며 야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형이 죽으려고 했어요.’

둔기로 얻어맞은 듯 멍했던 머리는 아까부터 뜨거워진 채였다. 숨통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듯 허탈했던 감정도 분노로 빼곡해졌다.

각인 상대의 죽음이 내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지난주가 엄마 생신이었거든요. 가족들끼리 외식을 나갔는데 어떤 모르는 남자가 형한테 명함을 줬어요.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남자는 알파였는데 형이 오메가라는 걸 알고 그런 거예요. 오메가한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형을…… 무시한 거예요.’

그날 밤 이석경은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족히 수십 알은 되는 억제제 한 통을 한꺼번에 삼켰다고.

‘공원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형이 죽으려고 한 거, 다 알파 때문이에요.’

그럼 안 되는데. 그러다 허무하게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누구 마음대로. 분노로 온몸의 혈관이 경련했다.

‘형도 알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형 내버려 두세요.’

붙잡아다 억지로라도 쌍방 각인을 맺어 버릴까. 나는 이석경을 죽음으로 내몬 두 명의 알파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남자애들을 노려봤다.

‘부탁이에요. 형이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까.’

이해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한 게 죽을병에 걸린 일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다 책임지면 되니까 복잡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는데. 손가락이 열 개이고 발가락도 열 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 혼란스러운 것도, 혼란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한 것도 전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석경은 친구와 함께 교문을 걸어 나왔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지. 뭐라고 말을 걸지.

택시를 잡을 때만 해도 얼굴을 보자마자 몰아붙일 마음으로 가득했었다. 몰아붙일 명분도 없으면서 혼자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석경의 얼굴을 보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난여름에 봤을 때는 친구가 둘이었는데 오늘은 하나뿐이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이석경은 뭐라고 신나게 떠들어 대는 친구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눈이 따가울 만큼 예뻤다. 씨발, 저렇게 예쁜데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날 아버지가 형을 많이 때렸어요. 같은 남자를 홀리는 괴물이 됐다고.’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가 된 이석경의 걸음은 현저히 느려졌다. 나 역시 느린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문득 걸음을 멈춘 이석경은 벤치에 앉았다.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그 애를 지켜봤다. 거무스레한 하늘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땅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손대면 그대로 녹아 버리고 말 눈꽃처럼 허무한 눈빛을, 오른손에 감긴 붕대를.

그 애의 얼굴에 드리운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가,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마침내 확인하고야 말았다는 듯한 공허한 얼굴이, 절망의 냄새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형은 진짜로 자기를 괴물로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형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발.’

그 애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멍들게 하고 싶었다. 어두운 그림자에 더 짙은 그을음을 남겨 버리면, 무작정 그 애를 취해 버리는 것으로 더한 절망에 빠트려 차라리 나를 원망하게 만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우리 형 되게 잘 웃었거든요. 근데 요새 한 번도 못 봤어요, 웃는 거.’

교복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은 이석경이 막대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탕을 보면서 천천히 위로 향하는 입꼬리가 마치 기적 같았다. 그 애는 우연히 주머니 안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이 신기하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그러나 이석경은 오른손에 감긴 붕대 때문에 막대사탕 하나도 까먹지 못했다. 어떻게든 포장을 까먹어 보겠다고 낑낑대는 모습이 궁상맞아 보였다. 한 술 더 떠서 흐느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그 모습들을 전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깟 사탕 내가 평생 까 줄 수도 사 줄 수도 있는데. 그러나 나는 이석경에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괴로웠다. 나는 사냥을 나간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이석경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게 막막했다.

‘형이 죽으려고 한 거, 다 알파 때문이에요.’

불쑥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오늘 당장 쌍방 각인을 맺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이석경이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사탕의 포장을 벗기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을 때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려 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이재경과 틈틈이 연락하며 이석경의 안부를 살폈다.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섞어 이석경이 지망하는 대학과 학과를 알아내고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공부에 도통 관심이 없어서 내박쳐 둔 성적은 반에서 중간쯤에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이석경이 지망하는 명문대는 꿈도 못 꾸는 성적이었지만 하루에 서너 시간씩만 자고 코피를 쏟아가면서 성적을 올렸다.

그렇게 나는 이석경에게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가면서도 늘 조급하고 불안했다. 게다가 몇 번의 러트를 겪을 때마다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곤 했다.

결국에는 이석경을 갖게 될 거라고 자신하면서도 그 애와 각인을 맺는 그 짜릿한 만족의 순간이 선명하기는커녕 흐릿하고 막연해져만 갔다.

* * *

“이석경입니다.”

새터 첫날, 조별로 배정된 방에 빙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이석경은 짧게 이름만 소개하고 덧붙일 말을 궁리하는 듯하다가 도저히 할 말이 없는지 이내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1년 넘게 억누르고 참아왔던 충동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나는 얼른 그 애를 삼켜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충동을 따르는 순간 뭘 해 보지도 못하고 그 애를 잃게 될 터였다.

나는 성난 갈증을 익숙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석경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오늘 처음 본 동기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 애에게 다가가 경계를 풀고, 그 애의 곁을 차지하고, 마침내 각인을 맺게 될 때까지 깜빡이를 셀 수도 없이 켜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 또한 되새겼다.

첫째 날 밤. 하루 종일 그 애를 신경 쓰고 의식하던 나를 전혀 알 까닭이 없는 이석경은 연신 소주만 홀짝댔다. 뚫어져라 보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도 무심하고 심드렁하게 나를 마주 보다가 눈을 돌릴 뿐이었다.

나는 이석경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걸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던 ‘적당한’ 미소도 지어지지 않았다. 이석경 얼굴을 보기만 해도 인내심이 자꾸만 바닥나서 뭘 어떻게 하기가 힘들었다.

둘째 날 아침. 나는 숙취에도 불구하고 일찍 눈을 떴다. 밤새 그 애가 어디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벌떡 몸을 일으켜 확인했다. 이석경은 구석 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이석경의 자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냐?”

언제 깼는지 옆에 자고 있던 태정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정아.”

“왜.”

“나 코피 쏟아가며 공부하기 진짜 잘한 것 같아.”

“어, 그래. 양치하게 치약이나 내놔 봐.”

아침을 먹은 후에는 족구 시합을 했다. 이석경은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단숨에 에이스로 떠오른 이석경은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합이 끝나고 진 팀이 이긴 팀에게 간식을 사 주기로 했다. 이석경은 피곤하다며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이석경을 따라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단둘이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계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발길이 움직인 거였다.

그런데 이석경을 따라 방에 들어가려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이석경과 단둘이 있는 기회를 만들어 친해지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는 수없이 그런 녀석들을 끌고 매점으로 향했다. 나는 시답잖은 잡담을 하며 간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매점을 빠져나왔다.

방에 들어가자 어느새 샤워까지 마쳤는지 덜 마른 머리를 한 이석경이 구석에서 벽 쪽을 향한 채로 누워 있었다. 목까지 덮은 이불 탓에 뒤통수만 겨우 보이는데도 그 애를 보자 내 감정은 혼자 또 격해졌다.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려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이석경이 이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나를 발견한 눈이 커다래졌다. 미안, 나 때문에 깼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나 역시 놀라서 입이 굳어 버렸다. 한동안 시선이 얽혔다.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나였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말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 나는 울타리 근처에서 한가롭게 서성대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제법 사람 손을 탄 고양이었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자 스스로 몸을 비벼왔다. 잔뜩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는데 가까이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석경이 나를 보며 귀엽게 웃고 있었다.

“귀엽지?”

내 속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한 물음에 멍해졌다. 그 물음이 본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양이임을 깨달은 것은 이석경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뒤늦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웃는 그 애가 너무나도 기특했다.

둘째 날 밤에는 이석경과 친해지고 싶어서 아예 작정을 하고 방으로 찾아오는 인간들의 행렬이 끊이지를 않았다. 방문을 잠가 버릴까. 오늘은 술자리를 빌려 기필코 가까워지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형이 밥 많이 사 줄게. 술도 사 주고. A급 족보도 줄게.”

동아리를 홍보한답시고 이석경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추근대던 선배.

“이름이, 이석경 맞지? 받아.”

한꺼번에 몰려와 미팅 분위기를 만들던 여자 동기들.

나를 가로막는 여러 방해 요소들과 함께 둘째 날 밤도 빠른 속도로 깊어갔다.

술을 마시다가 걸려 온 전화에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간 이석경이 신경 쓰였다.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구실이 없었다. 마침 여자 동기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여자애에게 고백을 받는 동안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석경을 내내 의식했다.

“안 추워?”

이미 들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계속 숨어 있는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공원에서도 추위를 많이 탔었는데. 나는 그 애에게 벗어줄 겉옷을 챙겨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춥다. 들어가자.”

추워서 빨개진 코끝이 신경 쓰였다. 나는 등을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참, 이석경.”

“…….”

“박하사탕 먹을래?”

나는 그 애의 손에 박하사탕을 쥐여 주었다.

“……사탕 별로 안 좋아하는데.”

거짓말. 좋아하면서. 사탕 껍질을 까지 못해서 서럽게 울었으면서.

“사탕, 솔직히 좋아하지?”

“……아닌데.”

고작 사탕 하나 때문에 내가 여태껏 저를 얼마나 봐줬는지 알면 감히 그런 거짓말은 못 할 텐데.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입술에 직접 사탕을 까서 물려 주고 싶었다.

* * *

“윤조야, 너 mbti 뭐야?”

개강 총회 날이었다. 나에게 호의적으로 굴던 여자 선배가 불쑥 물어왔다.

“아, 저 그거 안 해 봐서 몰라요.”

“헐. 너 그거 미리 해 놓는 게 좋을 텐데. 팀플 할 때 mbti 유형으로 묶어서 조 짜거든. 그래야 트롤도 거를 수 있고.”

“아, 정말요.”

“정말이겠냐?”

칼같이 자르는 남자 선배를 흘겨본 여자 선배의 시선이 이번에는 이석경에게 향했다.

“석경이 너는 mbti 해 봤어?”

“저도 안 해 봤어요.”

“안 해 봤구나. 근데 나는 너 무슨 유형인지 알 것 같은데.”

“저요?”

“응. 씨유티이 아니야?”

“씨유티……이? 아, 큐트요.”

여자 선배의 농담에도 이석경은 담백하게 피식 웃는 게 다였다. 신입생다운 귀엽고 수줍은 반응을 기대했는지 여자 선배는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야, 추하다. 후배들한테 그만 들이대라.”

남자 선배가 일침을 날리자 여자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너 뭔데 초 쳐? 내가 우리 잘생긴 신입생한테 약 좀 팔아 보겠다는데.”

갑자기 여자 선배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마음은 이석경을 술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데리고 나갈 궁리로 이어졌다.

흡사 납치라도 하듯 이석경을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한 나는 그를 편의점에 데리고 가 초콜릿을 사 먹였다. 먹는 모습을 집중해서 지켜보다가 물었다.

“맛있어?”

말없이 끄덕이는 모습에 진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나는 다음 러트 주기를 떠올렸다. 5월 말쯤이려나. 얘를,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때까지 쌍방 각인을 할 수 있을까. 목적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목적을 이루면 알 수 없는 이 조바심도 사라지겠지.

이석경은 나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했다. 새터 마지막 날, 버스에서 내린 이석경은 친구 관계가 우리 둘의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말했다.

‘치약 말인데.’

‘치약?’

‘나도 밑에서부터 짜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

‘…….’

‘나는 형질부터가 커다란 흠이라서, 남들한테 사소한 것 하나라도 흠 잡히기 싫거든.’

‘…….’

‘물론 너는 좀 다른 이유겠지만. 어쨌든 너도 그렇고 또 나도, 치약 밑에서부터 짜는 거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

‘너랑 나, 친구 할 수 있을까?’

순진하게도 물었다.

‘그래.’

속 안의 온도는 펄펄 끓고 있었는데도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온도는 한없이 낮았다.

친구끼리도 섹스를 하나? 펄펄 끓는 속에 냉소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이석경의 순진하고 예쁜 얼굴을 보며 나는 야만성을 띠는 성욕을 느꼈다. 파괴적인 욕망에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그러나 나는 곧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더 깊이 생각하면 알파의 페로몬으로 그를 위협할 것 같았다.

아직은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게 성욕이든 눈앞에 있는 오메가든 나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 *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으로 나는 이석경을 관찰하고 주시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앞에서는 꽉 막힌 것처럼 좀처럼 드러낼 수 없었던 습관 같은 다정함도 이제는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옆에서 지켜본 이석경은 강했다. 그 강함이 스스로를 부러뜨려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강했다.

내가 베푸는 다정함은 그의 강박적인 강인함 앞에서 번번이 맥을 잃었다. 이석경은 내 친절에 한없이 뾰족해지며 물음표를 띄웠다. 이 자식 뭔데 나한테 이래? 라는 의문을 얼굴 가득 떠올리며 나를 경계했다.

내 친절이 절대 특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 즈음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남발했다. 왜 나한테만 이래? 라는 의문을 이석경이 느끼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베푸는 흔한 친절로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식인지 진심인지 나조차도 헷갈릴 구역질 나는 예의가 나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친절의 부작용이 엉뚱하게 발생해 수많은 고백을 받았지만 거절할 때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겨우 이 정도 친절로 나한테 반한다고? 그럼 이석경은 왜 나한테 안 반하는데. 이석경도 얼른 나한테 반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석경이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건가? 오래도록 붙잡아뒀어야 할 의문을 어리석게도 나는 가볍게 흘려보냈다. 대신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하루빨리 나에 대한 그 애의 경계를 허물어서 쌍방 각인을 하고 싶다고.

고백을 몇 번인가 거절하자, 어느새 나는 우리 과의 ‘어마어마한 쌍놈’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편했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 되었고 이석경을 향한 내 친절에는 브레이크가 없어졌다.

나는 순조롭게 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석경이 나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온 것이다.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지 마. 매일 사다 주는 캔커피도 필요 없고 핫팩도 괜찮아. 나도 손 있으니까 책도 들어 주지 마. 초콜릿도 먹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사 먹을게. 또 앞으로 절대 집까지 바래다주지 마.”

다시 가시를 세운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나는 절박해졌다. 무엇 때문에 절박한지는 알 수 없었다.

손 틈새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석경을, 신기루 같은 그 애를 무슨 수로 붙잡아야 하는지 몰라서 머릿속이 바빠졌다. 여유가 점점 흐려지면서 욕망이 사나워졌다. 내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욕망이 사나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석경아, 그런 게 어떻게 친절이야.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됐다고. 아무것도 아닌 그거 다른 애들한테 해.”

“…….”

“어차피 나한테만 친절할 것도 아니잖…….”

말뜻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숨은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웃음부터 새어 나왔다. 아, 정말, 네가 이렇게 깜찍하게 질투를 해 주면 나는,

“그럼 석경아.”

“…….”

“내가, 너한테만 친절하면…….”

“…….”

“……돼?”

앞으로는 너한테만 친절하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잖아. 더는 쓸데없는 짓 안 해도 되는 거고.

사납게 휘몰아쳤던 파괴적인 욕망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대신 그보다 더 요란하게 펄떡거리는 격정이 내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없었고, 그 크기 또한 측량할 수 없었기에 내버려 두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 * *

이석경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금단증세를 앓았다. 자주 그 애를 만지고 싶었고 늘 닿고 싶었다. 내가 각인한 오메가이니 당연했다. 나는 그 애를 만지고 싶은 내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석경’을 만지고 싶은 욕망은 인정하지 않았고, 내 ‘오메가’를 만지고 싶은 욕망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무심코 이석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순간에조차, 나는 내 욕망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내 다정함에 그토록 가시를 세우던 이석경은 의외로 저를 만지는 손길에는 무딘 편이었다. 그런데 이게 좀 미묘했다. 이석경이 무딘 편인 게 나에게 득인지 실인지 헷갈렸다.

거리낌 없이 남의 손을 타는 모습이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냉정하게 쳐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동방에 있을 때, 나는 종종 석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머리를 기댈 때는 최대한 무심한 듯 자연스럽고 나른해 보여야 한다. 이석경의 어깨라서 기대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기대고 싶은데 거기 마침 이석경의 어깨가 있어서 기대는 듯한 인상을 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모습으로 내가 머리를 슬쩍 기대면 이석경은 나를 밀어내는 대신 짧은 눈길만 흘끗 줄 뿐이었다.

간혹 허리를 감싸는 내 손길이 깊숙해질 때면 이석경의 눈매가 예민해지곤 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딴청을 피웠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스스로의 예민함을 탓하는 기색이 엿보일 뿐 끝까지 나를 의심하는 기운은 없었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물론 더한 욕심이 고개를 들 때도 있었다. 뭔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뭘 어째야 할지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알 수 없었다.

저항하지 않는 온순한 이석경을 의식하며 나는 그 애의 달콤한 뺨을 쪽 빨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렁 벗겨 버리고 부드럽고 하얀 속살을 헤집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제력을 손상시키는 그 애의 예쁜 얼굴을 보며 뜨거운 숨결이 뒤섞이는 상상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석경이 과거에 제 목숨을 얼마나 허무하게 저버리려 했는지를,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떠올렸다.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내가 만족하는 동안만큼은 적어도 이석경이 안전할 테니까.

“애들은?”

우리 집에 처음 온 이석경은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다가 대뜸 박태정과 김준영부터 찾았다.

“아직 안 왔지. 애들한테는 6시까지 오라고 했어.”

“왜?”

“그냥. 집 구경할래?”

나는 재빨리 이석경의 손을 꼭 잡고 방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겨우 30분이라도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은 조금 더 진도를 빼고 싶었다. 김준영이 스스럼없이 하는 무릎베개.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이석경이 생일선물을 내밀었다.

“몸만 오라니까.”

“핸드크림이야. 네가 전에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청포도라고 해서 청포도 향으로 샀어.”

“청포도 향?”

“응. 하나 사기는 좀 그래서 세 개 샀어. 그거 별로 안 비싸거든.”

“…….”

뭐가 막 속에서 간지러웠다. 괜히 눈썹을 긁으며 선물의 의미를 순화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아니겠지, 설마. 이렇게 대놓고는 아닐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이석경이? 제 체향이 나는 핸드크림을 나에게 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서 이런 앙큼한 짓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생일 선물은 아니고, 우리 엄마가 친구 집에 처음 방문할 때는 화장지라도 사 가라고 하셔서…….”

“…….”

“화장지 대신 물티슈 사 왔어.”

순진하게 종알거리는 입술. 내가 저 입술을 이미 한 차례 가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모를 테지. 모르니까 저렇게 순진하고 무방비하게.

“……물티슈.”

“인체에 무해하다니까 안심하고 써.”

“무해하다고…….”

“어.”

“인체에…….”

“……어.”

그 애를 바라보는 내 얼굴은 뻣뻣해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미세하게 경련하던 뺨이 그제야 잠잠해졌다.

인체에 무해한 물티슈로 뭘 하라고 너는 그걸 사 온 걸까. 그걸 나한테 알려 주는 이유는 뭘까. 뒤처리까지 야무지게 하라는 의미일까.

청포도 향 핸드크림 세 개. 하나 사기가 좀 그래서 세 개를 샀다는 이석경. 너의 향기가 나는 핸드크림을 내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게 될지 알았더라도 세 개를 사 왔을까. 아마 세 개는커녕 한 개도 안 사 왔을 거다.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에 사용 계획을 밝히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한숨과 함께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거 다 쓸 때까지는 꼼짝없이 쌍방 각인을 미루고 혼자 위로해야 하는 것인지. 내심으로 이석경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냈다. 러트 주기가 다가올수록 어쩔 수 없이 조급해지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간질거리는 속은 여전했지만.

“고마워.”

“혹시, 맘에 안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 그냥…….”

“맘에 들어.”

“다행이다.”

“나한테 꼭 필요한 거고.”

어색해진 공기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석경아, 나 아까 여기…….”

그 순간 초인종이 경박하게 울렸다. 머리 부딪혔는데, 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있지도 않은 혹을 찾아달라는 핑계로 무릎베개를 하려던 나는 차질이 생겨 버린 계획에 망연자실해졌다.

“애들 온 것 같은데.”

“응.”

“……문 안 열어줘?”

“괜찮아. 아직 6시 안 됐잖아.”

“그래도…….”

내가 문을 안 열어 주고 버티자 이석경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방해꾼들을 집안에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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