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세진은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지만 술을 마셔서 대리운전을 불러야 하는 그를 번거롭게 하기 싫었다. 석경은 지하철을 타고 가도 된다고 했다. 잠깐의 실랑이가 석경을 택시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세진은 휴대폰 앱으로 부른 택시를 기다리며 말했다.
“석경아, 오늘 내가 한 고백은 못 들은 걸로 하면 안 될까?”
“…….”
“그렇다고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고 대답은 나중에 해 줘도 된다는 말이야. 당분간은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줘.”
“저기, 세진아.”
“어? 택시 왔다. 조심히 들어가.”
석경은 한세진의 고백에 결국 마지막까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석경입니다. 약속 잡아주세요.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택시에 탄 석경은 ‘각인 매칭 프로그램’의 관리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방 각인을 일차적으로 수락한 상대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만나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억제제의 효과가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일이므로. 석경은 시트에 등을 깊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금전적인 문제는 어머니와 이미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했다. 동생 재경에게까지 숨길 마음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어머니와 둘만의 비밀이 생겨 버렸다. 아버지 몰래 큰돈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도 어머니는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각인해야 하는 거부감 때문에 쓰레기가 될 각오로 한세진에게 일방 각인을 부탁하려던 석경은 결국 그 일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애한테 그런 부탁이라니. 석경은 그 부탁을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품었다가 재조차 남지 않게 태워 버렸는데도 너무 미안해서 한세진의 얼굴을 거의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원룸촌 초입에서 택시를 내린 석경은 5분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폐가 팽팽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칠게 부서지는 숨 너머로 권윤조의 모습이 보였다. 낡은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권윤조의 얼굴에 문득 안도감이 스쳤다. 무엇에 안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석경은 내일 직접 한세진을 만나서 고백을 거절하는 의사를 확실히 전하기 전까지 더는 그 일을 떠올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또한 집 앞까지 찾아와 저를 기다리는 권윤조의 행동에서 그 무엇도 찾지 않으려 애썼다.
곧 다가올 각인 상대와의 만남을 우선순위 제일 꼭대기에 올려놓고 현재의 혼란을 묻어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도 불면의 밤을 보낼 터였다. 며칠째 계속된 수면 부족 탓에 피로가 극에 달했다.
“왔어?”
“…….”
“뛰어온 거야?”
각인 매칭 관리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들여다본 휴대폰에는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두 자릿수로 쌓여있었다. 전부 권윤조에게서 온 것이었다. 물론 확인하지 않고 관리자에게 메시지만 보내고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었다.
“여긴 왜 왔어?”
석경은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른 후에 천천히 물었다.
“할 얘기가,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석경아, 내가 그날…….”
말을 꺼내며 성큼 거리를 좁혀 왔던 권윤조가 멈칫하며 발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찌푸려진 그의 눈매가 뜻하는 바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석경이 잔뜩 묻혀 온 한세진의 페로몬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석경은 한세진의 페로몬이 권윤조를 상대하는 무기나 방패처럼 여겨졌다.
“…….”
“전에 네가 우리 집 찾아왔을 때,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거짓말.”
“왜 거짓말이래.”
“거짓말이잖아. 나 분명 너한테 잘못한 거 있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나 피하는 거고.”
“아니야.”
“석경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무조건 내가 미안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도 정말 미안하고.”
“……야.”
“생각해 보니까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게 제일 큰 잘못 같아. 정말 내가 다 미안하니까 네가 알려 주면 안 돼? 내가 그날 뭘 잘못했는지.”
“너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게 없다는 말에 권윤조는 더 애가 타는 듯했다. 그를 애타게 할 마음으로 피해 다닌 것은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은 결과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제 저에게는 남은 패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패잔병이 된 심정으로 피해 다녔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그를 자극하는 강력한 패가 된 모양이었다.
“석경아, 제발 나 피하지 마.”
어느 한구석 빠지지 않고 온통 잘나기만 한 권윤조가 석경 앞에서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일컬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권윤조의 얼굴에는 자신이 매달리는 상황에 대한 비참함이 아니라 뭐든 내려놓겠다는 순종적인 기운만 느껴졌다. 한세진이 고백해올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무게로 석경을 간절히 원하는 듯 보였다.
한세진은 중학생 때부터 석경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어림잡아 5, 6년을 홀로 품다가 고백을 한 셈이다. 그럼 자신도 5년쯤 후에는 권윤조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반대로 권윤조가 5년 후에 저에게 고백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석경은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5년이라는 시간은 자신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놈인지를 권윤조가 알기까지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니까. 5년까지도 필요 없이 1년 안에 탄로 나겠지. 그때는 그를 피하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제발 저를 피하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피한 적 없어.”
석경은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게 고작이었다. 더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잘라 버리자 권윤조는 안 피하겠다는 석경의 다짐을 듣고 싶은 얼굴을 하면서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없이 석경을 바라보던 권윤조가 석경의 가슴팍 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석경은 그의 손이 제 몸에 닿으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사렸다.
“옷에 뭐가 묻어서…….”
석경의 과민반응에 손이 굳어서 눈만 끔뻑이던 권윤조는 이내 처연하게 웃으며 옷에서 떼어 낸 것을 변명과 함께 보여 줬다.
“……어, 고마워.”
“한세진이랑 뭐 먹었어?”
“고기.”
“술도 마셨어?”
“조금.”
“내일 저녁은 나랑 먹자.”
석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황을 모면하겠답시고 대충 수락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해서 다시 1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따라서 석경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침묵뿐이었다.
* * *
다음날 오전 10시쯤, 석경은 한세진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어제 네가 밥을 샀으니 오늘은 제 쪽에서 사겠다는 거였으나 진짜 목적은 고백에 대한 답을, 거절을 확실히 돌려주려는 거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나가던 석경은 제 앞을 막아선 권윤조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함께 일부러 잔뜩 피곤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아까 점심 메뉴를 정할 때 석경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을 텐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왜.”
“석경아, 오늘 나랑 저녁 같이 먹기로 한 약속 잊지 마.”
일방적인 통보도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석경은 어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나 가야 돼. 친구가 기다려.”
석경은 붙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우두커니 서서 저를 바라보는 권윤조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한세진은 어제처럼 공대 주차장에서 석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햄버거를 먹고 싶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석경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일부러 싼 거 고른 거지?”
한세진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정말로 아침부터 햄버거가 당겼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세진의 차를 타고 유명한 수제 햄버거 가게로 갔다.
“오후 수업은 어떻게 돼?”
주문을 넣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 햄버거를 기다리면서 석경이 물었다.
“나 오늘 오전 수업밖에 없어. 너는?”
“음, 나도 없어.”
7교시 수업이 남았지만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몸이 안 좋아서 쉬겠다는 진부한 핑계를 대서라도 권윤조가 일방적으로 잡은 저녁 약속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권윤조가 지치고 실망해서 나가떨어지게 될 거라는 계획을 품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석경은 그저 현재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냥 지금은, 권윤조를 마냥 피하고만 싶었다.
햄버거를 먹고 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한세진과 영화관에 갔다. 석경은 상영관에 들어가기 직전 준영에게 몸이 안 좋아서 수업에 못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대출 가능한 수업이니까 출석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라는 답장이 왔다. 같은 수업이니 권윤조의 귀에도 들어갈 테지만 석경은 권윤조에게 보낼 메시지도 입력했다.
[미안.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석경은 메시지를 전송하고 전원을 꺼버렸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카페에 갔다. 고백을 받은 다음 날인데도 둘 사이에 큰 어색함은 없었다. 고백을 못 들은 걸로 해달라는 부탁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한세진은 시종일관 편안한 기류 속에서 대화를 이끌었다.
한세진은 자신의 마음을 숨길 줄 알았다. 어제 고백을 받았던 일이 망상인가 의심이 될 정도라 석경은 고백에 대해 답변을 할 타이밍을 좀체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초연한 듯한 태도가 그의 감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그다지 깊은 감정은 아닐 거라고. 제 우유부단함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그랬다.
카페에서 나오자 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둘은 차를 타고 다시 학교 근처로 와서 석경이 자취하는 빌라에 한세진의 차를 주차하고 저녁밥을 먹는 대신 술집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술자리가 그런 말을 하기에는 더 편하겠지. 그러나 석경은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자리를 끝내고 술집을 나올 때까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석경아, 우리 2차 갈까? 근처에 수제 맥줏집 괜찮은 데 있거든.”
여태 기회를 흘려보내기만 하던 석경에게는 더없이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 거기서는 기필코. 석경은 비장한 마음으로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제 맥주는 기대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구수한 맛을 선호하는 석경의 취향에 딱 맞았다. 1차에서 넘어온 술기운에 맛 좋은 2차까지 보탰더니 몸과 마음이 한없이 풀어졌다. 석경은 한세진과 만난 진짜 목적을 잊은 채로 중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둘 사이에 맴돌던 편안한 기류가 깨진 것은 순전히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 셋의 취기 가득한 대화 소리가 넘어온 탓이었다.
“너네 혹시 오메가랑 자 본 적 있냐?”
“없지. 오메가를 어디서 만나냐. 가뜩이나 희귀한 애들인데 걔들이 오메가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같은 베타가 페로몬인지 뭔지를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얘기 듣기로는 장난 아니라던데? 존나 맛있나 봐. 특히 히트사이클 맞은 남자 오메가랑 자고 나면 다른 잠자리로는 영 만족이 안 된다더라.”
“그 정도야? 대체 얼마나 좋길래. 아, 어디 눈먼 오메가 없나.”
“오메가가 아무리 눈이 멀어도 너랑은 안 잘걸? 알파랑 자려고 하겠지.”
남자들의 육담은 낄낄대는 웃음소리까지 완벽하게 저질이었다. 수치심이 어깨를 짓눌러와 석경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들이 조롱하는 대상은 석경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국 석경일 수밖에 없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못 듣는 재주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듣지 않아도 상관없는 말들은 안 들리는 재주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저에게 그런 재주들은 없었다. 대신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것들에 무뎌질 수도 있다는 희망은 있었다. 험한 조롱이든 저속하기 짝이 없는 조롱이든 예의 바른 조롱이든 앞으로도 숱하게 겪어야 할 일이니까.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한세진이 석경을 보며 말했다.
“석경아, 나가자.”
수제 맥줏집을 나온 두 사람은 석경의 자취방 쪽으로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걸었다.
오늘도 집 앞에서 권윤조가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석경은 하지 않아도 될 염려를 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기대인지 염려인지 모를 감정으로 낡은 빌라 앞을 쓱 훑었다. 시야에 잡히는 인영이 없었다.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기분이 시원치가 않았다. 사실은 염려보다 기대가 더 컸음을, 알고 싶지 않았던 제 감정을 원치 않게 확인해 버렸다. 석경은 술집에서 오메가를 조롱하고 모욕했던 남자들보다 자신을 미련하고 한심하게 만드는 권윤조가 더 원망스러웠다.
걸음을 멈춘 한세진의 입에서 한껏 억누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맥줏집에서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다.
“미안해, 석경아.”
석경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뭐가?”
“내가 거기 가자고 하는 바람에 괜히 귀만 더러워졌잖아.”
“나 신경 안 써. 저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숨 쉬고 못 살아.”
신경 안 쓴다는 석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한세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저런 얘기에 무뎌질 정도면 대체 어떤 일들을 겪어 왔을까 하는 의문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베타 새끼들도 저 모양인데 네 눈에 알파들은 오죽이나 혐오스러울까.”
석경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는 않아.”
“혐오했었잖아.”
“지금은 아니야.”
한세진은 복잡한 눈길로 석경을 바라봤다. 지금은 알파를 혐오하지 않는다는 석경의 말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너 나 알파라고 미워했잖아.”
“헐, 아니야. 내가 널 왜 미워해.”
“나는 차라리 네가 알파를 혐오했으면 좋겠는데.”
“왜?”
“나 말이야, 너 다시 만나면 진짜 많이 노력하려고 벼르고 있었거든. 다른 알파들 다 쓰레기고 개새끼들이라도 나는 아니라는 거 네가 꼭 깨닫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좀 허무해. 그리고 또.”
“…….”
“너 지금은 나를 너무 편하게 생각하잖아. 하다못해 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라면 관심이라도 줄 텐데, 내가 더는 가시도 뭣도 아닌 것 같아서.”
석경은 오늘 반드시 고백에 대한 답을 돌려주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지금만큼 그 얘기를 하기에 적당할 때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세진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정말?”
“어?”
“정말 생각해 봤어?”
“…….”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이러는 걸까. 다 아는 듯한 한세진의 눈빛을 보자 당황스러운 감정이 미안함으로 변했다.
근데 내가 그렇게까지 영혼 없이 말했나. 생각을…… 안 하긴 했지만, 솔직한 얘기로 생각을 하고 대답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생각이라고 해 봐야 내가 네 고백에 오케이 하는 상황을 재 보는 건데, 그건 진짜 좀 이상하잖아. 내가 그걸 잰다는 게 말이나 되냐구.
마치 석경의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세진이 이어 말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던 건 아니고? 그래서 오늘 적당한 타이밍 봐서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세진아…….”
한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제발 석경아. 더 생각해 줘. 말로만 생각했다고 하지 말고 내 고백에 대해 진짜로 생각하고 고민해 줘. 오래 걸려도 좋아. 아니, 오래 걸릴수록 더 좋아. 그렇게라도 네 머릿속을 차지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고백한 거야. 너한테 거슬리는 존재라도 되고 싶어서.”
“…….”
“석경아, 나 부탁 있는데.”
“……응.”
“한번 안아 봐도 돼?”
“어? 나를?”
안아 봤자 다른 남자들이랑 별다를 게 없는 몸일 텐데.
그런 석경의 속내와는 아랑곳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린 한세진이 석경을 꽉 끌어안았다.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몸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한세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석경은 너무 놀라서 몸이 굳는 바람에 피할 수 없었다. 입술을 열고 들어온 혀가 석경의 입안을 헤집었다. 석경은 늦게라도 고개를 뒤로 빼려다가 한세진이 기분 상하지 않게 슬며시 가슴팍을 밀어냈다. 한세진은 밀어내는 석경의 손목을 움켜쥐고 입술을 제법 세게 빨아 당겼다. 따끔한 통증에 석경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읏, 한세진, 그만해.”
한세진은 선선히 입술을 떼어 내고 석경을 깊숙이 응시했다.
“뺨이라도 날릴 줄 알았는데.”
한세진은 마치 석경에게 미움받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석경은 그의 위악을 간파했기에 두렵지 않았다. 억세게 저항하지 않아도 저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 않을 터였다.
“내가 널 어떻게 때리냐.”
“석경아, 나 많이 생각해 줘. 오늘 내가 너한테 한 몹쓸 짓까지 포함해서.”
“…….”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
한세진의 시선이 아직 미미하게 통증이 남아 있는 석경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집에 들어가. 나 갈게.”
술을 마신 한세진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그대로 두고 등을 돌렸다. 석경은 멍하니 서서 점점 작아지는 등을 바라봤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는 데 어제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고민이 필요해진 느낌이었다.
빌라 입구로 들어서자 센서 등이 켜지면서 계단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석경은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권윤조였다.
입도 뻥긋 못하고 눈만 커다랗게 뜨고 있자 권윤조가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권윤조는 석경의 입술에 잠시 머물던 시선을 들고 눈을 맞춰왔다. 봤을까? 의문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한세진과 마주 보고 서 있다가 키스까지 했던 위치가 여기서 훤히 보였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권윤조가 미소를 머금은 채 석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른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미소가 분명한데 눈빛은 건조했다. 서서히 석경의 내부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석경아, 내가…….”
“…….”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버석버석 메마른 그의 눈빛 탓에 와락 두려움이 밀려왔다.
“…….”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권윤조의 얼굴에 억눌린 분노가 스쳤다. 잔뜩 힘이 실린 턱 근육이 표 나게 팽팽해지면서 세로로 목을 지나는 핏줄이 굵게 불거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린 표정이 낯설고 섬뜩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커다란 손이 퇴로를 막듯이 석경의 뒤통수를 감쌌다.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카락 사이로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에 석경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픔은 뒤따라오지 않았다.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손길이었다.
“……이거 놔.”
가까스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한없이 여렸다. 권윤조는 놓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며.”
“…….”
“병원은 갔어?”
감정이라곤 실리지 않은 일정한 톤의 목소리에는 병원에 갔다 왔다는 대답 외에는 용납할 수 없다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아픈 곳도 없고 병원에 다녀오지도 않은 석경은 그저 시선만 떨군 채로 있다가 작게 대답했다.
“……응.”
“어디가 아픈데? 많이 아파?”
“그냥.”
“그냥?”
“…….”
석경은 언제부터인지 가늘게 턱을 떨고 있었다. 얼굴도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권윤조는 뒤통수를 감싸지 않은 손을 들어 엄지로 석경의 입술을 쓸었다. 부드럽던 손길이 조금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세게 입술을 꾹 눌러 왔다. 석경은 아팠지만 권윤조가 두려워서 아프다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더 가까이한 권윤조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술 마셨네.”
“…….”
“아프다면서.”
“그게…….”
무겁고 짙은 알파의 페로몬이 위협적으로 석경을 옭아맸다. 잔뜩 겁에 질려 눈꺼풀을 바르르 떠는 석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윤조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천사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였으나 냉기가 스며든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석경은 한세진의 위악을 간파했듯이 권윤조의 위선을 간파했다. 저에게 남다른 눈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위선을 읽어낸 것이다.
“석경아, 내가 너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
“응?”
“…….”
입을 열면 말을 더듬게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귀기 어린 위선 앞에서 명백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권윤조는 모를 거였다. 알파 형질을 타고난 그가 석경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를.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직 그만이 석경을 두려움에서 건져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석경은 권윤조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우리 착한 석경이가, 요새 왜 이렇게 입만 열면 거짓말인지…….”
“…….”
“내가 씨발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좀 알려 줄래.”
“…….”
“아니다, 석경아. 입 다물어. 이유를 들으면 더 화날 것 같아.”
마침내 위선을 거둔 눈빛이 금속처럼 새파랬다.
2.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 탓인지 학교 근처에 위치한 카페는 한낮의 열기를 피하러 들어온 교복들로 가득했다. 마지막 남은 테이블에 앉은 나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교복 셔츠를 손으로 펄럭였다.
“윤조야, 이거 마셔. 시럽은 안 넣었어.”
“어, 고마워.”
트레이를 들고 온 남정혁이 옆자리에 앉으며 나에게 음료를 건넸다.
시원한 음료를 받아 들고 무심코 빨대에 입술을 가져가려는 찰나 맞은편에 앉은 태정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남정혁, 내 거는 없냐?”
흘끗 시선을 내리자 테이블 위에는 남정혁 몫의 음료가 전부였다. 남정혁이 태정 몫의 음료는 사 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빨대를 입에 무는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뭐야, 거지도 아니고? 네 돈으로 사 먹어.”
남정혁은 농담인 양 말하고 태정을 보며 히죽댔다.
“카페 오자고 한 거 너잖아. 커피 사 준다고.”
“윤조만 사 줄 생각이었는데. 네 거는 네가 사 먹어.”
“와, 진짜 대박 치사하네.”
“치사한 건 너지. 야, 박태정. 커피 한 잔에 얼마나 한다고 그걸 얻어먹으려고 그러냐.”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태정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남정혁이 시끄러운 입을 다물고 내 쪽을 바라봤다.
“태정아, 이거 너 마셔라.”
“윤조야, 그걸 왜 박태정을 줘. 너 마시라니까.”
남정혁의 목소리는 서운하다기보다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거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다는 거다. 그런데도 자꾸 이런 식으로 태정을 누르고 제 위치를 다지려 드는 덜떨어진 행동을 한다. 날도 더운데.
나는 남정혁을 향해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하나 더 사 주면 되잖아.”
“어?”
“커피 한 잔에 얼마 안 하니까 또 사 줄 수 있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부탁하자 남정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정혁이 등을 돌리자마자 언제 웃었냐는 듯 미소를 지우는 나를 보며 태정이 혀를 찼다.
“뭐냐, 그 영혼 없는 미소는?”
대외적인 미소, 시혜적인 미소, 사회화 잘 된 미소, 번지르르한 미소, 빈껍데기 미소. 내가 종종 짓곤 하는 미소를 두고 태정은 수많은 수식어를 갖다가 붙여 놓았다. 태정의 눈은 정확했고 무엇 하나 반박할 여지가 없는 수식어들이었다.
태정은 그렇게 웃으면 안 피곤하냐고 물었지만 ‘적당한’ 미소가 세상 살기에 얼마나 편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가만히 웃어 주기만 해도 알아서 순종하고 수발들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팔짱 끼고 지켜보는 삶이 얼마나 편안한데. 나는 나에게 혹은 내 화려한 배경에 친한 척 들러붙는 사람들에게 냉랭하게 대할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남정혁이 네 거만 일부러 안 챙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오늘따라 서운한 티를 내고 난리냐. 입 아프게.”
“그냥 서운한 척한 거지. 저 새끼 하는 짓 얄미워서.”
태정이 씩 웃고는 볼이 움푹 팰 만큼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툭하면 저를 무시하는 놈이 산 커피를 맛있게 잘도 마신다. 자존심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존감이 높아서다. 태정은 남정혁이 저를 은근히 깔보는 이유를 저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남정혁의 인성이 돼먹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윤조야, 많이 기다렸지? 더워서 갈증 날 텐데 얼른 마셔.”
돼먹지 못한 인성의 남정혁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나에게 아첨을 했다. 아첨. 그가 짓는 비열한 미소와 무척 어울리는 단어다.
“고마워.”
나 역시 미소로 보답한다. 고마움을 담은 미소가 아니라 시혜적인 미소로. 너의 아첨을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뜻을 담아서. 유치한 서열질에 장단을 맞춰 준 나는 느긋하게 커피를 넘겼다.
“박태정, 형님이 쏜 커피 맛있냐?”
“어, 맛있네. 이 집 참 커피 잘하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남정혁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태정에게 돌려 하며 제 밑에 태정을 깔아 보려고 또 한 번 시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태정은 별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실 생태계의 피라미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태정을 남정혁이 감히 무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태정은 베타고 저는 꼴에 알파라서. 남정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이 알파라는 자부심을 나와의 일방적인 유대감에서 찾거나 베타나 오메가를 밑에 두는 것으로 충족시키는 놈이다.
‘남정혁이 아무래도 너를 정신적 지주, 뭐 그런 걸로 섬기는 것 같다.’
언젠가 태정이 내게 했던 말이다. 물론 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고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나는 나에게 뭐라 말을 걸고 싶어서 들썩들썩하는 남정혁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 기간인 옆 학교 교복들이 무더위에 녹아내릴 듯한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두고 있다 보니 날도 더운데 딱 붙어서 나란히 걷는 남자애들 셋이 눈에 들어왔다. 이 더위에 저런 웃음이 나오나. 마치 타인의 뜨거운 입김을 온몸으로 맞는 듯한 불쾌함을 카페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느꼈던 나는 그들의 웃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부 잘하는 명문고라더니 시험을 잘 봤나. 환하게 웃는 얼굴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세 사람은 카페 앞 인도를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가운데에 있는 남자애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부신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온 탓에 나는 시린 눈을 가늘게 떴다가 찌푸렸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남자애를 주시했다.
확실히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였다. 이목구비의 단정한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햇볕의 기세에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 느리게 깜빡이는 눈, 그런 위태로운 분위기와 대비되는 생명력 넘치는 웃음이 눈길을 붙들었다. 한없이 불온하고 불길하고 위험한 생김새였다. 몽정처럼 급하고 갑작스러운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쳤다.
왜 저렇게 생겼지. 뭐 저렇게 생긴 애가 다 있지. 가슴을 죄어 오는 낯선 의문이 채 해소되지도 않았는데 신기루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쫓아 나가서 너는 왜 그렇게 생긴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찜찜한 마음을 가만히 달랠 수밖에 없었다.
“윤조야, 뭘 그렇게 봐? 아는 애야?”
남정혁이 옆에서 알아차릴 정도로 집중해서 누군가를 바라봤다는 사실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흥미와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창밖을 기웃거리는 남정혁의 모습이 보였다. 내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녀석 역시 기를 쓰고 바라보곤 했는데, 바로 이런 점들이 태정이 말하는 정신적 지주를 섬기는 자세 뭐 그런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윤조야, 너 정말 괜찮아?”
“뭐가.”
“내가 말했잖아. 이번 승희 생일에 고백할 거라고. 승희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둘이 사귀게 돼도 너 괜찮아?”
나는 남정혁이 지껄인 말들을 되짚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근데 이 새끼가 진짜 뭐라는 거지.
“그러니까 뭐가.”
“윤조야, 내 말은 너랑 승희랑 약혼할 수도 있는데……. 그리고 너랑 나랑 친군데 괜히 승희 때문에 우리 사이가 어색해지기라도 할까 봐 나는 걱정돼서.”
나는 웃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되짚어 본 에너지가 아까울 정도로 시시한 이야기였다.
“난 상관없으니까 고백해.”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남정혁의 얼굴에 언뜻 실망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최승희를 두고 나와 치열한 연적이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최승희를 쟁취하고 우월감에 젖고 싶었던 걸까. 어디까지 나대나 궁금해서 장단을 맞춰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시뿐이었다.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상관이 없었다. 첫째로 나는 최승희에게 아무 감정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내가 남정혁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 할 텐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정으로 잠깐 그런 생각을 한 게 다였다.
“승희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그거 너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야?”
“박태정, 씨발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태정의 발언에 남정혁이 화풀이하듯 발끈했다.
“모르니까 너한테 물어본 거잖아. 너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너 진짜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있어라. 알파랑 오메가는 서로 이끌리는 그런 게 있어. 굳이 말을 안 해도 그런 게 다 느껴진다고. 베타인 네가 뭘 알겠냐.”
“아하, 텔레파시?”
“씨발, 텔레파시가 아니라 페로몬이라고 몇 번 말을…… 됐다, 말을 말자. 윤조야, 박태정 이 새끼가 하는 말 들었지? 텔레파시래. 진짜 좆도 모른다 얘는. 말이 안 통해.”
남정혁은 낄낄 웃어대며 내 공감을 구했다. 나는 표정 없이 남정혁을 건너다봤다. 인성은 싹 다 뒤져 버린 주제에 눈치는 그나마 조금 살아 있는 남정혁은 얼른 웃음을 지우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이렇다 저렇다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도 마주 웃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땅에 납작 엎드릴 기세였다.
거봐, 미소가 얼마나 편한데. ‘적당한’ 미소의 효과는 이럴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귀찮게 험한 말을 내뱉을 필요도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그저 웃어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충분히 타격을 입고 알아서 내 마음에 차려고 애를 쓴다. 상대가 비굴한 인간일수록 효과는 좋다. 남정혁처럼.
나는 내 비위를 맞추려고 진땀을 빼는 남정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신기루였던 것처럼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다짜고짜 너는 왜 그렇게 생긴 거냐고 묻는 것보다는 이름을 묻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여태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새파랗게 살아 있는 호기심이 불쾌하고 꺼림칙했다.
겨우 이름 하나 알자고 내가 직접 그런 수고를 해야 한다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남들이 먼저 다가와 내 환심을 사려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에만 익숙했던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한 탓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 때문에 생겨난 불쾌한 감정의 희생양이 된 남정혁은 옆에서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다.
* * *
길지 않은 삶이지만 나는 사냥을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엽총으로 짐승을 쏴 죽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수고롭게 내 영역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늘 내 영역 안에 있었고, 설령 없다 하더라도 손쉽게 들어왔으므로.
물론 그 이전에, 내 의지와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의 수가 별로 없었다. 갖고 싶은 욕망과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기대감, 그리고 충족됐을 때의 짜릿함은 더없이 만족스러웠으나 정작 내 관심을 끄는 것들은 얼마 없었던 것이다.
나는 드물게 내 관심을 끄는 지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로 나름대로 정성을 쏟았다. 돈은 물론이고 시간과 집중을 지불한 것이다.
그러나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호기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나면 곧 시들해졌다. 나는 본질적으로 무언가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관심 이상의 단계로 나아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석경과의 첫 만남은, 아니 두 번째 만남은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그날 나는 하교 후에 태정, 그리고 남정혁과 학교 근처의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딱 한 시간만 더 하자고 조르는 태정을 뿌리치고 밤 9시쯤 PC방을 나왔다. 나를 뒤쫓아 나온 남정혁이 귀찮아서 택시를 잡아탈까 하다가 관두고 걸었다. 선선한 가을밤의 날씨가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결과적으로 이석경을 만났으니까 어떠한 필연에 휩싸였을 수도 있고.
열여덟 가을, 그렇게 나는 필연적으로 이석경을 만났다.
공원 앞을 지날 때였다. 밀도 높은 향기가 달려들었다. 나는 청포도 과즙을 온몸에 뒤집어쓴 것처럼 반응했다. 의지라도 지닌 듯 존재를 과시하는 향기에 걸음을 멈추자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춘 남정혁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윤조야, 이거…….”
“…….”
향기는 신경을 쥐락펴락할 만큼 진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연약함을 풀풀 풍겼다. 그것은 당장 찍어 누르고 깔아뭉개고 유린하고 정복하고 싶은 향이었다. 눈앞이 붉어질 정도의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가학심을 부추기는 가련하고 연약한 향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오메가 같은데. 히트라도 왔나 봐. 엄청 흘려 대네.”
남정혁의 얼굴은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야비한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고 향기의 근원을 수색하는 코는 크게 벌름거렸으며 입맛을 다시는 주둥이는 탐욕스러웠다.
남정혁의 발걸음이 바쁘게 공원 쪽으로 향했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돌아본 남정혁이 공원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야, 저쪽. 가 보자, 윤조야.”
남정혁은 나를 기다려줄 여유 따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기를 왜 가 보자는 거지. 왜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정혁이 무슨 짓을 하든 알 게 뭔가.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도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종류의 질 나쁜 일탈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충동적인 일탈이든 계획적인 일탈이든 나의 성미와는 맞지 않았다.
한적한 도로 위에는 택시는 물론이고 택시 외의 다른 차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오메가 냄새를 싫어했다. 작정하고 홀리는 듯한 특유의 색정적인 냄새가 불쾌하고 역겹게만 느껴졌다.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에도 오메가가 두어 명 있었는데 절대 페로몬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당부를 둘 정도였다. 증오와 멸시에 찬 표정으로 냄새에 치를 떠는 나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오메가도 있었다.
나는 적막한 공원 앞 밤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머리가 어질해질 만큼 위험한 향기를, 그러나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점점 연약해지는 가냘픈 향기를 들이마셨다.
충동은 아까부터 이미 걷잡을 수 없었지만 그걸 억누르는 것은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깟 향기에 홀려 어리석은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가만히 시선을 둔 도로 끝에서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저 택시를 잡아타고, 충동을 난잡하게 부추기는 달고 자극적인 향기를 뒤로하고, 남정혁이 인적 없는 어둠 속에서 저지르려는 행위를 모른 척하면 된다.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택시가 내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나는 공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원 안으로 들어온 나는 희미한 가로등 빛 아래에 얽혀 있는 두 인영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만큼이나 희미하게 저항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축 늘어져 버린 오메가 위에 올라타려는 남정혁이 보였다.
“정혁아.”
“…….”
“남정혁.”
무아지경인 남정혁의 어깨를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 돌아본 눈에 이윽고 징그러운 웃음이 맺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너도 그럼 그렇지 별 수 있냐는 웃음이었다.
“……먼저 할래?”
“…….”
“윤조 너 먼저 해. 난 좀 기다리지 뭐. 얘 얼굴도 진짜 반반해서 할 맛 날 거야.”
욕망과 권력 사이에서 주춤하던 놈은 결국 권력에 굴복했고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며 포주처럼 지껄였다. 너 최승희 좋아한다며, 그따위 의문은 입 밖에 낼 가치도 없었다.
“정혁아,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어?”
“나는 이런 거 질색인데.”
“…….”
“정혁아, 뭐 해? 나 이런 거 질색이라고.”
“어, 그럼 어쩌지?”
나는 주춤주춤 물러나는 남정혁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축 처진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흐린 불빛을 받은 오메가의 얼굴은 놀랍게도 눈에 익었다. 셔츠가 풀어 헤쳐지고 바지가 허벅지에 걸려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헤퍼 보이기는커녕 마냥 고결하고 순결해 보이는 얼굴. 그 오메가를 눈에 담았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향기의 주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은 채였다. 엉망으로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갸름한 턱을 적시고 있었다.
“잠깐.”
남정혁은 반갑고도 들뜬 얼굴을 하고 냉큼 돌아왔다. 뭘 기대하는지 뻔했지만 그 기대에 응해 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정혁아, 근데 애를 왜 이렇게 팬 거야. 얘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냥 뭐 반항하길래 몇 대 팼는데.”
반항하길래 팼다고. 나는 손을 뻗어 남정혁의 목울대를 잡아 쥐었다. 경동맥을 터트려 버릴까. 아니면 목뼈를 부러뜨려 버릴까. 놀라서 커진 눈과 고통으로 뒤덮이는 얼굴을 보며 고민했다.
“흐끄, 끄윽…….”
남정혁은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제 목을 움켜쥔 내 손을 뜯어내며 반항했다. 손에 힘을 실어 뒤로 떠밀자 남정혁은 볼품없이 나자빠지며 바닥을 굴렀다.
“흐, 흐억! 컥! 컥!”
나는 남정혁의 턱을 매섭게 걷어찼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재차 턱을 노리자 몸싸움을 꽤나 하는 남정혁은 반사적으로 팔을 겹쳐 얼굴을 가렸다. 내 발끝은 얼굴을 막은 녀석의 팔을 가격했다. 곧바로 어깻죽지를 걷어차자 빠각, 관절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남정혁은 비명조차 못 지르고 나뒹굴었다. 급소는 피해서 때렸으니 아마 기절은 안 할 것이다.
“정혁아.”
“허으윽, 유, 윤조야! 왜, 너 왜 이래! 왜! 왜 때리는데!”
“그냥…… 반항하길래 때렸는데.”
“유, 윤조야.”
“엄살 그만 떨고 일어나.”
“…….”
“걸을 수 있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정혁은 도망치듯 공원을 벗어났다.
나는 수행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 줬다. 히트사이클이라면 안정제가 필요할 테니 일단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오메가용 안정제를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지만 빠른 시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통화를 끝내자 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내 휴대폰이 아닌 오메가 옆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에서 울리는 벨 소리였다. 액정에 떠오른 ‘동생’이라는 글자를 보고 전화를 받자 귀를 찢을 듯 형을 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흥분한 오메가의 동생을 대강 진정시키고 오메가를 데려다줄 병원 이름을 알려 줬다.
수행 비서를 기다리는 사이 정신을 잃은 오메가를 벤치에 앉히고 내 몸에 기댈 수 있게 나 역시 옆에 앉았다. 단추가 다 뜯어진 교복 셔츠는 어쩔 수 없었지만 흐트러진 바지는 추슬러 줬다.
나는 내 페로몬을 조금씩 풀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기댄 오메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고통으로 구겨졌던 미간이 점차 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페로몬을 계속 풀었다.
정숙한 얼굴로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는 오메가를 보며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환희와 전율로 몸을 떨었다. 남정혁의 역겨운 싸구려 냄새가 묻어있고, 맞아서 예쁜 얼굴에 흠집이 난 것을 제외하면 모든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오메가라는 말이지. 히트사이클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이렇게나 흘리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오메가라는 거지.
입꼬리가 비틀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고 고통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며 이토록 즐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내 관심을 분명하고 격렬하게 잡아끄는 게 여태 있었던가. 지난여름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시 보는 우연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토록 쉽게…….
“흐으…….”
열병을 앓는지 오메가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나는 페로몬을 좀 더 풀었다.
“…….”
이토록 쉽게 가져도 되나. 의문은 망설임이 아니라 행운에 대한 감탄이었다. 어떤 수고도 없이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와 준 행운은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큼 예뻤다.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어쩌면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예뻤다.
애써 추슬러 놓은 옷매무새를 다시 거칠게 흩트려 놓고 싶었다. 터진 입가를 세게 짓누르고 싶었다. 싫다고 아프다고 길게 신음을 내지를 때까지. 당장 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욕구를 억누르고 오메가를 눈으로만 음미했다. 지금 상처를 내 버리기에는 아까운 존재였다.
“으…….”
오메가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나는 내 품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작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느릿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려다보았다. 어리광을 부리듯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분명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내가 저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알파가 되리라는 것을.
“추워?”
오메가는 대답 대신 매달리듯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를 옭아매는 듯한 체온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기분이 이상했다.
교복 재킷을 벗어 주기 위해 몸을 조금 떨어뜨리자 더욱 강하게 엉겨 붙어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잠깐만. 이거 놔야 옷을 벗어 주지.”
사람들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쯤이야 쉬웠고 거리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 것을 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안달이 난 적은 처음이었다.
결국 재킷을 벗어 주기를 포기하고 다시 오메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천천히 손을 들어 부드럽고 따뜻한 볼을 만졌다. 피가 터진 입가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나는 무심코 피가 묻은 손가락을 핥았다. 그 순간 가슴에 무언가가 벅차게 차올랐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그것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막연했던 그 애의 존재가 보다 현실적으로 나를 채우고 있다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하아…….”
그 애는 조금 전보다 더 짙은 신음을 뱉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응, 그래.”
“흐으…….”
“응, 어떻게 해 줄까?”
대답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여유 또한 없었다. 나는 그 애의 얼굴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그 애의 입술에 맺혀 있던 피가 내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달게 삼켰다. 모자라, 아직 너무 모자라. 입술을 강하게 빨아 당기자 상처가 툭 터지면서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들어왔다. 찢어진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정신없이 빨아 삼켰다.
그 애는 너무나도 달아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내가 그 애의 무엇을 취하고 있고 그 애와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 * *
병원에 도착해 안정제를 투약하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마친 후, 나는 그 애의 동생을 기다렸다. 동생은 혼자가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왔다.
급하게 달려온 가족들은 하나같이 혼란스러워했고 지켜보는 내내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날이 그 애의, 이석경의 오메가로의 첫 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석경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가 말이라도 몇 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부랴부랴 퇴원 수속을 밟고는 도망치듯이 병원을 나가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고맙다는 말 대신에 불편한 경계와 입단속이 우선이었다.
정신을 잃은 이석경을 차 뒷좌석에 짐짝처럼 구겨 넣는 그의 아버지를 보며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낯선 분노를 느꼈다.
“깨어나면 꼭 연락 주세요.”
나는 차에 타려는 이석경의 동생을 붙잡아 겨우 연락처를 교환했다.
* * *
남정혁은 오른쪽 어깨부터 손목까지 요란하게 깁스를 했다. 나는 최승희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최승희의 목소리는 이미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최승희는 약속 장소에 남정혁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녀석 딴에는 최승희라는 지원군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최승희의 등 뒤에 숨어 가려지지도 않는 덩치로 쭈뼛쭈뼛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현재 저에게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알아내기 위한 비겁한 탐색이 훤히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웃었더니 녀석도 안도하며 나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최승희였다.
“너 정혁이 왜 때렸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냥 아무 생각 없었는데.”
최승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대답이 이상한 걸까.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 애의 모습을 봤을 때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그게 말이 돼? 사람 뼈를 부러뜨려 놓고도 그냥이라는 말이 나와?”
최승희는 남정혁과 사귀기로 한 건가.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던 둘의 관계에 처음으로 관심이 생겼다.
“…….”
“너 사이코패스니? 그게 아니라면 무슨 생각이 있었을 거 아냐.”
아니면 녀석의 엄마가 되기로 한 건가. 그럼 남정혁은 밖에서 두들겨 맞고 온 아들인가.
“승희야, 그만해. 그냥 장난치면서 놀다가 다친 거야.”
나는 최승희를 말리는 남정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녀석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최승희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될까 봐. 숨기고 싶어 하는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렇구나. 최승희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남정혁이 그 일을 제 입으로 말할 놈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정혁이는 너 같은 것도 친구라고 감싸는데 권윤조 너는…….”
“아, 최승희 너 모르는구나.”
“뭘?”
“정혁이가 오메가를 폭행했어. 그리고 강간하려고 했지.”
“뭐?”
나는 결코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었고, 정의로운 인간이 되고자 남정혁을 때린 것도 아니었으나 이건 최승희가 알아둬야 할 사실 같았다. 남정혁은 순간 놀랐으나 이내 올 것이 왔다는 듯 차분해졌다. 머리가 있다면 이런 전개는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윤조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내가 언제 그랬어. 승희야, 나 믿지?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그런 일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일편단심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남정혁은 아무런 주저 없이 지껄였다. 최승희의 눈을 가리기 위한 녀석의 모색은 너무나 단순해서 성의가 하나도 없게 느껴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불쌍하고 억울한 얼굴의 남정혁과 의심의 기로에 서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최승희를 차례대로 건너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실을 가려내는 일은 최승희의 몫이다. 녀석의 여자 친구가 될지 엄마가 될지 아니면 인연을 끊어낼지를 결정하는 일도 최승희의 몫이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다고 해도 내가 이 이상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갈게. 나머지는 둘이 알아서 해.”
요 며칠 자리 잡힌 습관 탓에 나는 카페를 나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도 없었고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또한 없었다. 이석경이 깨어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는데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도 연락 한 통이 없다. 설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조금 짜증이 났다.
이석경은 어떠냐는 메시지를 입력했지만 결국 전송하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아직은 그 정도 여유는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뜻밖의 열병을 앓았다. 꼬박 사흘을 앓은 후 나는 이석경에게 각인한 사실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