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땅바닥이 무섭게 파도쳤다. 화장실을 찾아 부스 근처의 단과대 건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둑이 터지듯 취기가 몰아쳤다. 걸어야 할 몸 상태가 아님에도 취한 탓에 석경은 무작정 직진부터 하고 봤다. 비틀거리는 취객의 걸음은 목적지로 둔 기계공학과 주점에 쉬이 닿지 않았다. 그나마 두 발로 버티던 몸의 균형이 제 발에 걸리면서 시선이 휘청 무너졌다. 거친 길바닥에 사정없이 얼굴을 갈 뻔한 위기 상황을 누군가의 부축으로 면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석경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어? 세진아.”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어, 나 안 되는데…… 준영이가 절대 가지 말라고 했는데.”
한세진은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석경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알코올 냄새와 뒤섞여 차분하고 은은한 향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알파의 체향은 후각보다는 신경 어딘가를 자극하는 향이었다. 그렇지 참. 한세진 알파였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새삼 실감하게 됐다.
“집에 가자. 너 많이 취했어.”
“준영이가…….”
“준영이 먼저 집에 갔어.”
“와아, 김준영 배신…….”
“걸을 수 있겠어?”
석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잠깐 끄덕였다고 어지럼증이 확 몰려왔다. 이렇게까지 취한 적은 처음이었다. 혼자서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한세진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세진아, 너는 괜찮아?”
“나? 나 왜?”
“안 취했어?”
“난 뭐, 거의 안 마셨어.”
석경은 제 허리를 감싼 한세진의 팔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눈을 들어 부스 쪽을 바라봤다. 권윤조도 이미 갔겠지. 최승희를 바래다주러.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거짓말처럼 권윤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는 평소의 여유롭고 부드럽던 눈빛과 전혀 다른 격렬한 눈빛을 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세진에게 안긴 석경의 허리로 착 달라붙은 눈동자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석경이 이리 주세요.”
“네?”
“이리 와, 석경아.”
권윤조는 마치 맹수처럼 석경을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당기는 힘에 고꾸라질 뻔한 석경은 다리가 완전히 풀린 채로 권윤조의 품에 와락 안겼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놀란 한세진이 언성을 높였다. 경계하는 목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뭐 하긴요. 집에 바래다줘야죠, 석경이.”
“저기요. 석경이는 내가…….”
“염려 말고 가세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권윤조를 노려보던 한세진이 석경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쪽도 술 꽤 마신 것 같은데 내가 바래다줄게요. 난 술 거의 안 마셨으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권윤조가 석경의 다른 쪽 손목을 붙잡았다.
“나도 거의 안 마셨어요.”
“그래도 나보다는 많이 마셨을 텐데요.”
“술을 누가 더 마셨는지 그걸 지금 꼭 가려야 합니까? 취한 애 세워 두고?”
“뭐라고요?”
석경은 한세진의 단정한 눈썹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고 최대한 똑바로 몸을 세웠다. 양쪽으로 하나씩 붙잡힌 손목을 차례대로 내려다보고 있자니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딱히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몸이 저절로 한세진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 있었다. 빠져나가는 대로 내버려 둔 한세진의 얼굴이 조금 망연해 보였다.
“세진아, 나 괜찮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데 권윤조가 무서운 힘으로 손목을 조였다. 이쪽 손은 빼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놓칠세라 더 꽉 붙잡은 것이다.
“석경아.”
“어차피 같은 방향이야. 친구랑 갈게. 들어가.”
석경은 망연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한세진을 남겨 두고 먼저 자리를 떠야만 했다. 잘 가라며 손 한번 흔들어 줄 틈도 주지 않고 권윤조는 제 허리를 꽉 붙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납치라도 하듯 빠르게 걷던 걸음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느슨해졌다. 체중의 대부분을 권윤조에게 떠맡긴 채 넘어지지 않으려고 걷는 데만 집중하던 석경은 느려진 걸음에 맞춰 드디어 숨을 돌렸다.
“석경아, 택시 탈래?”
“여기서? 걸어서 10분밖에 안 걸리는데?”
“그럼 나한테 업힐래?”
“……왜 그래?”
“업힐래?”
석경은 대꾸하는 대신 제 허리를 안고 있는 권윤조의 팔을 풀어냈다. 세게도 붙들려 있었던 허리가 저릿했다.
잠시 멎었던 발을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권윤조가 양손으로 석경의 어깨를 감쌌다. 대관절 무슨 일인가 놀라서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석경의 얼굴로 권윤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는 석경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댔다. 흠칫 몸을 물리자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보는 권윤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냄새 묻었어.”
“냄새? 무슨 냄새?”
제 몸에서 불쾌한 냄새라도 나는가 싶어서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한세진 페로몬.”
아아, 그거였구나. 안도하는 심정으로 석경은 숨을 크게 몇 차례 들이마시며 냄새를 찾았다. 냄새가…… 나나? 고개를 갸웃했다. 알파의 페로몬에 둔한 편은 아닌데, 술 때문에 못 맡는 건가.
“페로몬? 잘 모르겠는데.”
“듬뿍도 처발라 놨어. 열 받게.”
씹어뱉는 듯한 말투에 적의가 그득했다. 눈매가 예민하게 찌푸려져 있었고 눈 밑은 붉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권윤조가 마치 다른 인격이 된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권윤조의 말마따나 페로몬을 많이 처발라 놨다면 그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신경을 집중시켜 다시 맡아보았지만 역시 모르겠다. 근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지. 각인한 알파나 오메가는 제 것을 지키려는 본능 때문에 상대가 묻혀온 타인의 페로몬에 극도로 예민해진다지만 권윤조는 당연히 해당 사항이 아니다. 막말로 자신이 한세진의 페로몬에 푹 절여져 장아찌가 됐다고 하더라도 이런 과민 반응은 이해가 안 간다.
“하여간 알파 새끼들이란.”
“…….”
“석경아, 걔 조심해.”
석경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답지 않게 한세진을 흠집 내는 권윤조의 속내를 새삼스럽게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그가 석경의 인맥을 관리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상대가 알파면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친구라고는 해도 한세진은 알파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준영이 던진 떡밥이 권윤조의 신경을 건드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의 질투가 뚜렷하게 와 닿는 이 순간이 달콤하기는커녕 몸에 해롭기만 했다. 그의 질투를 저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야, 너 지나치다는 생각 안 들어?”
약간 격양된 속내와는 달리 석경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낮고 차분했다.
“…….”
“네가 뭔데 내 친구를 함부로 말해.”
“……석경아.”
“네가 뭔데 내 친구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거냐고.”
“…….”
“네가 뭔데 내 친구를 조심하라 마라야.”
친구랍시고 한세진을 감싸는 건 핑계일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은, 권윤조에게 짜증을 벌컥 쏟아내고 싶었다. 성깔을 부리고 싶은 거였다. 석경은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가 뭔데.”
한바탕 쏟아냈더니 울컥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뒤늦게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됐다. 감히 을 주제에 갑에게 성깔을 부려도 되는 건가. 이럼 안 될 것 같은데. 기왕 짜증 낼 거 쌍욕도 섞으려다가 그건 너무하다 싶어서 거기까진 차마 못 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석경아.”
“…….”
“내가 주제넘었어.”
그러나 권윤조는 완벽하게 저자세로 나왔다. 그는 할 말이 잔뜩 있는 서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겨우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목젖 너머로 밀어 넣은 말을 속에 그대로 품고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제가 주제넘었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 한세진에 대해 함부로 말한 걸 반성하는 게 아니라 마치 이런 일로 석경을 놓칠까 봐 불안해하는 느낌이었다.
“…….”
“다시는 안 그럴게. 화내지 마.”
느낌이 묘했다. 을은 원래 갑한테 까불면 안 되는데 어쩐지 마음껏 까불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까불 마음은 없었지만.
이 감정을 뭐라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석경이 권윤조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리 다채롭지는 않았다. 좋아 죽을 것 같다가도 이러면 안 된다고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의 무한 반복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권윤조는 석경으로 하여금 전혀 낯선 감정을 느끼게 했다.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는 약자를 몰아세우는 느낌이었다. 쉽게 말해서 문득 권윤조가 을로 보이고 자신은 갑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권윤조가 늘 저한테 을처럼 행동해서 그렇지 원래는 제가 을이어야 맞는 건데.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을인 법이니까.
그의 사과를 끝으로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집 앞이었다. 처음 권윤조가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석경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었다. 그러던 게 이제 완전히 익숙해져서 집 앞에서 나누는 작별 인사도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들어갈게.”
마주 본 채로 서서 인사를 건네자 권윤조가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석경아, 화났어?”
잠깐 불안해하다 말 줄 알았는데 여태 불안해하고 있었나 보다. 권윤조는 풀 죽은 얼굴로 석경의 기분을 살폈다. 화가 날 리가 없다. 권윤조인데. 내가 좋아하는 권윤조인데.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화 안 났어.”
“다행이다.”
“…….”
“잘 자, 석경아.”
권윤조는 손을 크게 흔들고 여느 때처럼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미련 없는 넓은 등을 석경은 미련하게도 갖고 싶었다.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었다. 짜증 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젯밤 권윤조에게 짜증을 낸 일 때문에 석경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권윤조의 서러운 표정이 석경을 오래도록 뒤척이게 만들었다. ‘네가 뭔데’라는 말을 4번이나 내뱉으며 몰아붙일 때는 코끝도 조금 빨개진 것 같았는데.
“어제 세진이 부르길 잘했지?”
준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너 한세진 왔던 거 기억은 하냐? 완전 취해가지고.”
“취했어도 기억은 선명해. 세진이 왔을 때 석경이 네 표정 되게 웃겼는데.”
석경은 뭐가 그렇게 되게 웃겼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준영의 눈동자가 허튼 소리를 준비하는 듯 기이하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석경이 대거리 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준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골치가 아팠다. 어쩌다가 김준영한테 마음을 들켜 버려서는. 조용히 품으려던 감정이 요란하게 줄줄 새어 나가는 기분이라 짝사랑에 대한 회의감이 진하게 밀려들었다.
“윤조가 연락이 안 되네.”
결석은 물론이고 지각 한 번 없던 권윤조가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태정은 권윤조에게 몇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고 메시지도 보내는 듯했다.
“전화 안 받아?”
“응. 본가에 일 생겼나.”
준영이 묻자 태정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추측을 내놓았다.
“일?”
“안 좋은 일은 아니고 집안 행사 같은 거. 가끔 그랬으니까.”
석경도 물론 신경은 쓰였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수준이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이니 연락도 없이 수업을 째는 정도로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다. 오전에 그나마 틈틈이 연락을 시도했던 태정이 관심을 아예 꺼 버리자 석경과 준영도 그러려니 했다.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세 사람은 동방에 모여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귀찮으니 동방에서 치킨을 시켜 먹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사다리를 타서 물주를 정했다. 준영이 걸렸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동방 문을 노크할 사람이라곤 최승희 한 사람뿐이었는데 치킨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참이라 헷갈렸다.
“치킨이 벌써 왔나?”
“최승희 아니야?”
준영과 태정이 한마디씩 주고받는 사이 동방 문이 열리고 최승희가 들어왔다. 최승희는 석경과 준영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 곧장 태정 앞으로 다가갔다.
“태정아, 윤조 학교 안 왔어?”
“응, 너도 연락 안 돼?”
“폰은 켜져 있던데……. 얘가 받지를 않아.”
“괜찮겠지.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
최승희는 걱정 어린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조용한 동방에 울렸다. 권윤조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기, 석경 씨.”
휴대폰을 귀에서 뗀 최승희가 어두운 낯으로 석경을 불렀다.
“네?”
“오늘 윤조한테 연락해 보셨어요?”
“아, 아뇨.”
오늘뿐만 아니라 석경이 먼저 권윤조에게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늘 먼저 전화나 메시지를 하는 쪽은 권윤조였다. 오늘 같은 경우도 태정이 대표로 권윤조에게 연락을 취했고 불통이라는 것도 옆에서 뻔히 지켜본 터라 굳이 따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윤조한테 전화해 보실래요?”
“네? 지금요?”
“네.”
“저, 근데 방금 전에 승희 씨가 전화했는데도 안 받았…….”
“해 주세요, 전화.”
부탁과 명령의 경계에서 석경은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내심 당황했으나 석경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신호가 걸리는 사이 동방은 아까보다 더한 적막에 휩싸였다. 저에게 모인 시선에 석경은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 응, 석경아.
받지 않을 줄 알았다. 안 받는다는 말을 준비하고 있던 석경은 기습처럼 건너온 낮은 목소리에 덜컥 고장이 나버렸다. 부름에 대꾸 없이 몇 초를 흘려보내자 다급한 음성이 건너왔다.
- 왜 그래, 석경아!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은 이쪽에서 해야 할 판이었다. 석경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최승희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너 연락 안 된다고 해서. 수업도 안 나오고.”
- 나 걱정돼서 전화한 거구나. 난 또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놀랐잖아.
“전화 왜 안 받았어? 박태정이 아침부터 연락했는데. 승희 씨도.”
- …….
“괜찮아? 별일 없어?”
석경은 변명이라도 주워섬기듯 잔뜩 어설프게 지껄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안부를 물었다.
- 응, 괜찮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 석경아.
“응?”
- 너 나한테 처음으로 전화한 거 알아?
“어? 내가 그랬나?”
- 응.
유난히 낮고 허스키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약간 흐트러진 숨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너 진짜 괜찮아?”
- 응, 괜찮다니까.
슬슬 통화를 마무리할 요량으로 내일 보자는 말을 꺼내려는데 최승희가 석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저 좀 바꿔 주세요.’ 권윤조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최승희가 휴대폰을 가져갔다.
“윤조야, 나야. 왜 전화 안 받았어?”
최승희는 석경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더니 걸음을 옮겨 동방 구석에서 통화를 이어갔다. ‘밥은? 많이 아파? 내가 집에 갈까? 죽이라도 사서 갈게. 걱정돼서 그러지. 그냥 죽만 놓고 갈게.’ 나긋나긋 이어지던 말소리가 끊기고 최승희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석경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돌려줬다.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석경을 바라보던 최승희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석경 씨. 부탁이 있는데요.”
“네?”
“지금 윤조네 집에 갈 건데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세요?”
“…….”
“제가 몰라서요. 윤조가 어디 사는지.”
집이 어딘지 모른다는 말에 석경은 속으로 놀랐다. 두 사람은 대체 무슨 사이일까. 집안끼리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약혼을 전제로 만나는 건가 싶었는데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던 석경은 두 사람 사이의 영문을 헤아려서 무엇할까 싶어서 생각을 그만두었다.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알겠어요. 같이 가요.”
권윤조에게 미리 연락을 해 둘까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최승희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기만 하면 될 테니까.
“고마워요.”
준영은 치킨이 금방 도착할 테니 닭 다리라도 뜯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아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던 권윤조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입맛이 사라진 터라 석경은 바로 동방을 나왔다.
최승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처음이라 그저 어색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주고받는 대화가 매끄러웠다. 그녀가 석경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온 덕분이었다.
“전 사실 기계공학과 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드론 하나쯤은 뚝딱 만들어서 하늘에 띄우고 그럴 줄 알았어요. 고장 난 기계 고치는 건 기본이구요.”
“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심지어 그런 줄 알고 기계공학과 들어온 사람도 꽤 있어요.”
“전에 태정이한테 전자 제품 고장 나면 직접 고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서비스 센터 맡겨야지 그걸 왜 직접 고치냐고 하던데요? 그럼 학교에서 대체 뭘 배우는 거예요?”
“음, 쉽게 말해서 기계를 만들기 위한 기초 학문을 배워요.”
“그게 결국 기계 만드는 거 아닌가요?”
“하하, 좀 달라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있으니까 전공으로 택한 거잖아요. 석경 씨는 어때요? 고장 나면 직접 고치고 그러나요?”
“저는 일단 손으로 때려 보고 안 되면 서비스 센터에 맡겨요.”
최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그런 식의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최승희는 별거 아닌 석경의 말에도 크게 웃었다.
“저, 석경 씨.”
미리 전화로 주문한 죽을 픽업하고 원룸촌 안에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네.”
“사실은 그때 카페에서 들었어요.”
“네? 뭘요?”
“석경 씨 오메가죠.”
약 한 달 전, 카페에서 마주쳤던 최승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승희와의 약혼 사실을 부정하던 권윤조를 냉소로 대하던 바로 그때 말이다. 설마 했는데 최승희는 그때 자신이 한 말을 들었던 것이다.
“…….”
“걱정 마세요. 저 입 무거워요.”
침묵을 아웃팅에 대한 불안으로 해석했는지 최승희가 안심시키는 말을 해왔다.
“네.”
“그리고 저도 오메가거든요.”
갑작스러운 고백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권윤조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조건의 짝이라는 감상이 가장 먼저 들었을 뿐이다.
“석경 씨는 그…… 주기 왔을 때 뭐가 가장 힘드세요?”
함께 걸어오는 동안 부담 없고 가벼운 화젯거리를 입에 올리던 최승희가 왜 갑자기 무겁게 훅 치고 들어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석경은 불편해졌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아무리 형질이 같다고는 해도 터놓기에는 민감한 주제였다. 석경은 그러나 성실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작열통이 가장…… 힘들죠.”
“그렇죠? 저도 그래요. 안정제를 맞으면 좀 낫기는 한데…… 그마저도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최승희는 그 끔찍스러운 상황에 벌써 감정을 이입한 듯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석경은 고개를 끄덕일 뿐 따로 대꾸는 하지 않았다.
어느덧 권윤조의 빌라 앞에 도착했다. 석경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죽과 혹시 몰라 약국에 들러 종류별로 구입한 감기약이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최승희에게 내밀었다.
“이 건물 5층이에요. 501호.”
“어? 같이 안 들어가세요?”
“네, 굳이 저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돼요. 윤조가 저랑 태정이 전화는 다 씹구 석경 씨 전화만 받은 거 모르세요? 같이 올라가요.”
“아뇨, 저는…….”
“그거, 석경 씨가 산 거니까 직접 전해 주셔야죠.”
종이가방을 내밀어도 최승희가 건네받지 않으니 도리가 없었다. 석경은 죽만 전해 주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동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벨을 누르려던 순간 권윤조가 알려준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벨을 누를까 비밀번호를 누를까 고민하다가 아픈 애를 한 번이라도 덜 번거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 비밀번호도 알고 계시네요.”
“아, 네. 전에 권윤조가 알려줬거든요.”
“윤조 집에 자주 왔나 봐요.”
“아뇨. 자주는 아니고…… 오늘이 두 번째예요.”
최승희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5층에서 내렸다. 현관문 비밀번호도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당연히 벨을 눌렀다. 안에서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두어 차례 더 벨을 누른 후에 돌아보자 최승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석경을 바라봤다.
“혹시 여기 비밀번호도 아세요?”
“알긴 하는데 함부로 들어가기는…….”
“목소리가 많이 아파 보이던데, 정신 잃고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요. 부탁할게요, 석경 씨.”
느낌이 좋지 않기는 석경도 마찬가지라 최승희의 부탁을 핑계 삼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알파의 농밀한 향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석경에게 달려들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실의 위치를 아는 석경이 침실 쪽으로 눈짓을 하며 최승희에게 말했다.
“침실에 있나 봐요.”
“석경 씨가 들어가서 괜찮은지 봐 주실래요?”
“승희 씨는요?”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인 석경은 최승희를 거실에 남겨두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권윤조의 모습이 보였다. 숨결이 편안한지만 확인하고 나갈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석경은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굳이 손가락을 코밑에 대 보지 않아도 권윤조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낯빛과 앞머리를 축축하게 적신 식은땀, 불안정한 호흡까지 무엇 하나 편안한 수면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권윤조, 일어나 봐.”
석경은 불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권윤조를 깨웠다. 어깨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어서 조금 더 세게 흔들자 가늘게 떨리던 닫힌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흐린 눈동자가 석경을 담으면서 시간을 두고 안광이 점차 강렬해졌다.
“어…… 석경아…….”
“너 괜찮, 윽!”
거칠게 안겼다. ‘석경아. 석경아. 석경아.’ 권윤조는 석경의 몸을 꽉 끌어안고 끝없이 석경의 이름을 불렀다. ‘야, 좀 놔 봐.’ 밀어내려 시도했으나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권윤조의 몸에서 평소보다 몇 배나 짙은 아카시아 향이 풍겼다. 그의 체향을 흡수할수록 석경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하아, 석경아. 석경아.’ 간절한 음성보다 더욱 간절하게 귓바퀴를 맴도는 뜨거운 숨결에 석경은 녹아내릴 것 같았다.
“권윤조, 잠깐만…….”
권윤조는 러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를 짓누르는 위압적인 페로몬은 도무지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됐다. 권윤조는 석경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체향을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석경은 너무 놀라서 덩달아 이성을 잃으려는 와중에도 거실에 있는 최승희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권윤조, 이거, 놔 봐!”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실어 밀어내자 권윤조가 고개를 들고 석경을 마주 보았다. 열이 잔뜩 오른 시선은 석경을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석경아…….”
권윤조가 양손으로 석경의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만큼 가까워졌을 때 석경은 기겁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 결에 권윤조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춥춥춥 민망한 소리를 내는 권윤조의 입술이 석경의 볼 위를 정신없이 배회했다. 미끄럼을 타듯 갸름한 턱선을 입술로 머금기도 하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베어 물 것처럼 굴었다. 귓불을 빨고 혀로 귓바퀴를 핥았다. 석경은 권윤조를 힘껏 밀어내고 저항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러트를 맞아 흥분한 알파의 힘을 오메가가 당해낼 리가 만무했다.
“석경아, 석경아.”
단단한 손이 석경의 셔츠 안을 비집고 들어와 허리를 매만졌다. 그의 손이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속절없이 달아올랐다. 그의 입술이 빨고 지나가는 턱 선과 목줄기와 쇄골은 마치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권윤조, 그만……!”
바르르 떨며 입을 연 순간 입술보다 더 뜨거운 축축한 혀가 석경의 입안으로 불쑥 침입해 들어왔다. 권윤조는 석경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빨아 당겼다. 헐떡이는 틈에 깊숙이 들어온 혀가 난폭하게 입안을 훑었다.
권윤조는 정신없이 혀를 얽으며 석경에게 몸을 붙이고 비볐다. 딱딱하게 부푼 그의 중심이 석경의 몸에 위협적으로 맞닿았다. 와락 겁이 났다. 이러다 깔아뭉개질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자 딱 붙어있던 서로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권윤조, 정신 차려!”
제정신이 아니기는 저도 마찬가지인 주제에 권윤조를 밀어냈다. 쾌감으로 온몸이 녹아내렸으면서, 어느 곳 하나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은 데가 없으면서 그를 밀어낸 것이다.
석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차 달려드는 권윤조 입술을 막았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던 권윤조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흥분이 덜 가신 눈동자에는 옅게 차오르는 이성과 함께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권윤조는 제 입을 막은 석경의 손을 거칠게 잡아 내리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윽고 자신의 침실임을 확인한 그는 한층 더 당황했다.
“석경아…….”
“…….”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게, 너 걱정돼서 와 본 거야.”
“어?”
“너 많이 아픈 것 같아서 왔는데, 벨도 몇 번 눌렀거든…….”
“…….”
“혹시라도 잘못된 줄 알고 걱정돼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왔어.”
권윤조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석경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제가 난폭하게 빨아 대던 입술인데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석경아, 내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러는데…….”
“…….”
“내가 잠결에 혹시 너한테 실수한 건 아니지?”
기억을 못 하는구나. 그래, 어디 그게 권윤조가 한 키스겠는가. 러트가 한 거지. 석경의 마음을 눈치채고도, 또 애매하게나마 석경을 좋아하는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딱 여기까지라고 알게 모르게 선을 그은 권윤조가 제정신으로 그 선을 넘을 리가 없었다.
“실수 안 했어.”
석경은 실수가 다 뭐냐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
“석경아, 정말 미안한데 내가 지금 몸이 좀 안 좋거든.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놀러 올래? 미안해. 모처럼 집까지 찾아왔는데.”
정중했다. 고통 때문에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뜨거운 호흡을 내쉬면서도 석경을 제 영역에서 내보내는 말 하나하나가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어, 갈게. 가려고 했어. 죽 사 왔으니까 꼭 먹고.”
안정제는 맞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는 말로 러트를 에둘러 표현한 권윤조의 성의에 맞춰 주고 싶었다.
“고마워.”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자 권윤조도 따라 일어났다.
“어? 나오지 마. 그냥 있어.”
“엘리베이터까지만 나갈게.”
벌써 바닥에 내려선 권윤조를 말리지 못한 석경은 거실로 나와서야 난리 통에 잠시 잊고 있었던 최승희를 보고 멈칫했다. 최승희는 석경의 어깨너머에 있는 권윤조를 초조한 눈길로 바라봤다.
“윤조야…….”
최승희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부르자 등 뒤에서 권윤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야? 네가 그런 거야?”
“저기, 윤조야.”
“네가 석경이 여기로 데려온 거야?”
“…….”
최승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권윤조와 석경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순간 석경은 제 의지로 왔다고 말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대답해. 네가 석경이 데려온 거냐고.”
정말이지 뭐가 뭔지 석경은 알 수 없었다. 고저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데도 최승희는 점차 파랗게 질려갈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결국 석경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권윤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온 거야.”
“석경아, 나 최승희한테 물어봤는데.”
“어? 근데 정말 승희 씨가 데려온 게 아니라 내가 온 거라서…….”
“석경아.”
“진짜야.”
“석경아, 미안한데 배웅은 못 해 주겠다.”
빨리 나가라는 정중한 재촉임을 알아차린 석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승희 씨, 가요.”
못 박힌 듯이 서 있는 최승희를 부르자 등 뒤에서 예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최승희, 너는 가지 마.”
“…….”
“너는 여기 있어.”
순간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오지랖 넓게도 최승희를 챙겨서 데리고 나가려 했던 석경은 혼자서 현관으로 향했다. 힘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 애썼다.
최승희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에게서 풍기던 짙은 오메가 페로몬이 앞으로 일어날, 또한 일어나야 마땅할 모든 일을 단숨에 이해시켰다. 그렇지. 이게 맞는 거지. 내가 빠지고 최승희가 남는 게 맞는 거지. 눈치도 없이, 왜 최승희를 부득부득 데리고 나오려고 했을까.
집에 도착한 석경은 침대 위로 올라갈 기운도 없이 쓰러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느리게 숨을 내쉬다가 어느 순간 격하게 호흡했고, 또 어느 순간 다시 느리게 숨을 골랐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감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했으면 하는 게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감정의 차이가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알면서도 때때로 이렇게 비참한 순간이 찾아온다. 차라리 나를 좋아하지 말지. 애매하게 좋아할 거면 차라리 나를 좋아하지나 말지.
권윤조는 기억도 못 하는 키스로 인해 축축하게 젖었던 뒤가 찝찝해 몸을 씻고 싶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집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네가 석경이 여기로 데려온 거야?’
문득 최승희를 조용히 추궁하던 권윤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러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하마터면 저와 선을 넘을 뻔한 게 그렇게도 식겁할 일이었을까. 제가 어련히 알아서 밀어냈을 텐데. 조금 억울했다. 나도 됐거든. 진짜 나도 됐거든. 나도…… 나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언가가 훅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무언가가 뭘까 생각하는 사이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 * *
수업을 마친 교수가 강의실을 나갔다. 석경도 거의 동시에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권윤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권윤조에게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받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 째였다. 수업에 빠질 수는 없어서 꼬박꼬박 학교에 나오고는 있다만 최대한 권윤조와의 접촉을 피했다. 수업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강의실에 들어갔고,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강의실을 나왔다. 공강 시간에는 동방 대신에 도서관에 처박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권윤조를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날 왈칵 터져 나온 눈물과 함께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라 그런지 빠르게 상황을 눈치챈 준영이 석경의 뜻에 동참했다. 아니, 공헌하는 수준이었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석경의 부재를 권윤조와 태정에게 납득시켰다.
속이 안 좋아서 밥 못 먹는대. 과제 때문에 정신없대. 친구랑 약속 있대. 술병 났대. 핑계가 바닥나면 간혹 진실을 흘리기도 했다. 냅 둬, 혼자 있고 싶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계단으로 내려오던 석경은 권윤조의 전화를 거절로 돌리고 한세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세진 : 석경아 나 공학관 주차장이야]
[지금 내려가는 중이야]
답장을 보내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지금쯤 준영은 석경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석경이 친구랑 약속 있대.’ 오늘만큼은 핑계가 아니었다.
주차장 쪽으로 가자 빗속에서 우산을 쓴 한세진의 모습이 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걸고 다가가자, ‘뭐 먹고 싶어?’라며 곧장 물어왔다. 석경은 여전히 울려대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대답했다.
“비도 오는데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
“삼겹살에는 소준데. 아직 해도 안 졌는데 괜찮겠어?”
“소주에 낮밤이 어디 있어. 그냥 마시면 마시는 거지.”
“역시 이석경 뭘 좀 아네. 타.”
한세진이 보조석 문을 열었다.
“넌 운전해야 하니까 마시지 마.”
“그럼 너 술 마시는 거 구경만 하고 있으라고? 대리 부를게.”
웃으며 보조석에 올라타려던 석경의 손목을 누군가 거칠게 잡아챘다. 돌아보자 권윤조가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석경아, 나랑 얘기 좀 하자.”
“지금? 나 지금 친구랑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석경은 목소리 못지않게 건조한 눈빛으로 우산도 없이 비에 젖어 가는 권윤조를 올려다봤다.
“석경아, 너 왜…….”
권윤조가 말을 멈추고 한세진을 노려봤다. 한세진이 석경의 다른 쪽 손목을 붙잡아 온 것이다.
“얼른 타, 석경아.”
“석경이 놓으세요.”
“그쪽이나 놔요.”
익숙한 상황에서 익숙한 실랑이가 또다시 벌어졌다. 얼마 전 취한 밤, 석경은 권윤조의 손이 아닌 한세진의 손을 놓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권윤조의 손을 뿌리쳤다.
“석경아.”
“갈게.”
겨우 손을 뿌리친 정도로 충격받은 얼굴을 하는 권윤조가 보기 싫어서 얼른 차에 탔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굵었다. 석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권윤조의 모습을 외면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벨트 매.”
어느새 운전석에 올라탄 한세진이 말했다. 석경은 기계적인 손짓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무섭게 퍼붓는 빗줄기를 뒤로하고 차가 출발했다.
“주차 편한 데로 가려면 멀리 나가야 하는데, 괜찮아?”
“응, 괜찮아.”
한세진은 방금 전에 권윤조와 있었던 일에 대해 한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가끔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갔다.
도착한 식당은 단순히 주차만 편한 곳이 아니었다. 직원의 안내로 들어온 프라이빗 룸의 전면 창으로 조경이 잘 된 정원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동하는 사이 가늘어진 비와 정원이 어우러져 근사한 풍경을 이루었다.
“여기, 소주 마실 분위기가 아닌데?”
“왜? 별로야?”
“별로가 아니라 분위기가 너무 고급스럽다는 말이야.”
석경은 가게에 익숙해 보이는 한세진에게 주문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겹살과 함께 오늘 새로 들어왔다는 소고기의 특수부위가 상에 놓였다.
“많이 먹어. 부지런히 먹고 더 시키자.”
석경은 고기를 먹고 소주를 마시면서도 종종 창밖 경치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래저래 상념이 많았다. 비에 홀딱 젖은 권윤조도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고, 오전 중에 걸려온 전화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방 각인을 수락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연락이었다.
‘직접 만날 때까지 그쪽에서는 석경 씨 정보를 전혀 모르니까 그 점은 염려 안 하셔도 돼요. 현재 공개된 정보는 성별하고 나이뿐이에요. 어떠세요? 내일로 약속을 잡을까요? 보통은 카페 같은 데서 만나서 서로 조건을 맞춰 보거든요. 첫 만남은 부담 없이 만나셔도 돼요. 한 번 만났다고 해서 반드시 각인할 필요는 없으니까.’
부담 없이 만나라고 했지만 전화를 받은 이후로 속에 커다란 바위가 들어앉은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각인을…… 어떻게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다.”
한세진이 석경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응?”
“내 얼굴은 안 보고 네가 자꾸 창밖만 보니까.”
“아, 미안.”
“농담이야.”
“근데 세진아, 내가 네 얼굴을 왜 봐야 해? 뭐가 이쁘다고?”
“와, 이석경 잔인해.”
혹 어색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마음이 편했다. 굳이 할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됐고 친하게 지냈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여러모로 대화가 잘 통했다. 전부 한세진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석경은 알고 있었다. 석경은 많이 웃었고 한세진은 그런 석경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석경은 더더욱 눈앞의 한세진을 두고 괘씸한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그에게 일방 각인의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진짜 얘한테 부탁하면 답도 없는 쓰레기지. 석경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2년씩이나 생까다가 이제 겨우 만난 친구한테 어떻게 그래. 그래도 혹시나 말이라도 해 볼까. 눈 딱 감고 쓰레기가 돼 볼까. 날이 갈수록 점점 짧아지는 억제제의 지속시간이 석경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했다.
그런데 한세진한테 부탁하려면 먼저 제가 오메가라는 걸 고백해야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세진아, 다음에는 준영이도 같이 만나자.”
오늘 만남도 애초에 석경은 셋이 만났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지만 한세진이 둘이서만 만나기를 원했다. 준영은 하도 자주 봐서 지겹다는 게 이유였다.
“아, 김준영 눈치 보는 거 피곤한데.”
한세진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준영이 눈치 볼 일이 뭐가 있어?”
“뭐겠어. 김준영이 네 보호자잖아. 김준영이랑 있으면 너한테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 걔한테 허락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이해가 안 가네. 그게 무슨 소리야?”
“금지옥엽 고명 딸 둔 아빠 눈빛으로 나를 막 노려보거든. 넌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고 싶다.”
한세진은 웃으며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 알맞게 구워져 윤기가 좌르르 도는 소고기를 석경의 개인 접시에 옮겨주며 조금 진지해진 낯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더 신기해.”
“뭐가?”
“권윤조인가 하는 그 친구…….”
한세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이름에 석경은 표정을 굳혔다.
“권윤조가 왜?”
“알파인데도 너랑…… 친하잖아. 김준영이 걔한테는 철벽을 안 치는 건가.”
“…….”
“석경이 너도 그렇고.”
찰나의 표정 변화를 들킨 탓에 못 알아들은 척하기는 힘들었다. 같은 알파인데 권윤조와 자신을 차별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한세진은 그저 단순하게 서운해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의 공백을. 석경이 저를 피해 다닌 시간을.
“너 알고 있었구나.”
“뭘? 권윤조가 알파인 거?”
“…….”
“아니면 석경이 네가 오메가인 거?”
“언제 알았어?”
“고2 때.”
“잘 숨긴다고 숨겼는데.”
“너 잘 숨긴 거 맞아. 그냥, 감정이 있으면 보이는 것들이 있거든.”
“……무슨 감정?”
“무슨 감정일 것 같아?”
“…….”
석경은 당황했다. 무슨 감정인지 적나라하게 담긴 눈동자를 황급히 외면했다. 권윤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감정이 한세진의 눈에서 읽혔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고 자체가 안 됐을 테니까.
“이석경 진짜 많이 변했네.”
한세진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응. 예전 같았으면 내 눈 피하는 대신에 도대체 이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을 텐데.”
“아…….”
“눈을 피한다는 건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
다시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한세진은 소주를 연거푸 두 잔 들이켰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석경아, 내가 너 좋아해. 중학생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
“……세진아.”
“네가 지금은 예전처럼 알파라는 종자들을 혐오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용기 내 본 거야.”
“…….”
“네가 변한 거, 권윤조 덕분인 건가.”
‘이걸 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한세진은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석경은 돌려줄 말을 정하지 않은 입술을 괜히 달싹거리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