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1)

* * *

달이 바뀌었다. 초여름과 함께 대학 축제 시즌이 다가오면서 캠퍼스에 활기가 돌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시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푸르렀고 온통 싱싱했다.

“윤조야, 이번 주말에 어머니랑 쇼핑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보조석에 앉은 최승희가 운전을 하는 권윤조를 향해 말했다.

“난 됐어.”

권윤조는 짧게 대답했다. 무뚝뚝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다감하다고도 할 수 없는 말투였다.

“어머니가 섭섭하시겠다. 모처럼 아들이랑 쇼핑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우리 어머니 그런 분 아니야.”

“아니긴. 말씀은 안 하셔도 서운해하시지. 윤조 네가 오죽 무뚝뚝한 아들이니?”

권윤조는 무뚝뚝하다는 최승희의 평가에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듯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제 막 학교 정문을 빠져나온 차가 혼잡한 도로로 합류했다. 최승희는 대꾸가 없는 권윤조를 내버려 두고 카오디오 볼륨을 조금 키웠다. 스피커에서 계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뒷좌석 오른쪽 창가에 앉은 석경은 턱을 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5월의 캐럴송처럼 제 존재 역시 차 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석경은 생각했다.

“석경아, 이수현이 지난주에 영화 봤는데 괜찮대.”

태정과 석경 사이에 껴 앉은 준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다, 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지. 석경은 그제야 영화관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도대체 왜 이 차에 타고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참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그 어느 날 카페에서 권윤조와 나눈 이상야릇한 대화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시간에 파묻혔다. 그런 식의 애매한 대화는 그날로 끝이었고 두 번 다시는 없었다.

대신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그날 이후로 최승희와 네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최승희는 마치 원래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네 사람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미리 약속을 정하고 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녀가 동방에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종종 계획을 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권윤조는 몹시 곤란하고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석경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끝내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석경도 물론 초반에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며 자리를 빠져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매번 자리를 피하다가는 준영의 의심이 깊어질 수도 있으니까, 한심한 합리화까지 보태서 스스로를 막다른 길에 세워 놓았다.

어쨌든 최승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석경은 늘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드디어 짝사랑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 권윤조를 아무 감정 없이 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마음이 얼마나 접혔는지 남은 앞으로를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권윤조가 한결같이 석경에게 자상했기 때문이다. 다시 권윤조의 다정을 마주하면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하도 자주 들어서 어느새 친밀해져버린 소리였다.

“그래?”

“인터넷 보니까 평도 좋더라.”

“응, 다행이네”

“근데 나, 석경이 너랑 공포영화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지?”

“그러네.”

당연하지. 내가 공포 영화를 잘 못 보니까. 사실대로 말은 못 하고 어색하게 웃던 석경은 백미러를 통해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오래 시선이 얽혔다. 우연히 마주쳤다기에는 깊었고, 작정하고 마주쳤다기에는 은밀했다.

빠앙. 뒤차에서 울린 경적 소리가 막막한 시선들을 갈라놓았다. 능숙한 손짓으로 기어를 바꾸고 출발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석경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시작된 심장의 두근거림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았다. 석경은 그러나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시트에 느른히 등을 기대었다. 여전히 온몸으로 그를 의식하느라 멀미가 시작되려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30분 전에 영화관에 도착했다. 태정의 제안으로 일행은 팝콘 내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가위바위보 공식 똥손인 석경이 팝콘을 사게 됐다. 번호표를 받고 공기 중에 진동하는 팝콘 냄새를 맡으며 카운터 근처에 서 있는데 권윤조가 어느새 옆에 다가왔다.

“왜 왔어?”

“너 혼자서는 다 못 들어.”

“…….”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나도 가위바위보 져서 온 거야.”

“내가 어떤 표정으로 봤는데.”

“참견 말라는 표정.”

석경은 차마 아니라는 대답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스쳤다.

“석경아.”

앞에 대기 인원이 2명 남았을 때 권윤조가 침묵을 깨며 석경의 이름을 불렀다.

“응?”

“팝콘 내가 살게.”

“왜?”

“영화관, 최승희가 오자고 해서 온 거니까.”

권윤조의 말을 듣자마자 제가 억지로 따라온 것처럼 보였나 의심이 먼저 들었다.

석경은 대꾸를 미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맹세코 억지로 따라오지는 않았다. 잘하지 못하는 게임이라도 친구들의 뜻에 따라 PC방에 가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취향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맞춰주고 따라가는 게 오히려 편했다.

“됐어. 내가 가위바위보해서 진 거니까.”

다음으로 든 생각은 ‘근데 왜 네가?’였다. 그가 마치 최승희의 행동을 수습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석경은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럴 만한 명분도 있고 자격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석경은 조금 실망했다. 최승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계획을 바꿔 놓아도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던 권윤조다. 그 점을 내심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어쩐지 미안하다는 말을 백 번쯤 들은 기분이었다. 사실상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너 혹시 공포 영화 같은 거 못 보는 건 아니지?”

장난기보다는 염려가 밴 질문에 석경은 괜히 속이 뒤틀렸다. 씨이, 남이사.

“잘 보는데.”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말해.”

“안 무서워. 공포 영화 좋아해.”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궁금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권윤조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공포 영화 감독 이름 하나만 대 봐.”

“…….”

“오늘 안에는 댈 수 있지?”

“…….”

“3초 셀까.”

“왜 그래? 잘 본다니까.”

좋아하지는 않아도 상식처럼 알고 있던 이름 몇 개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 타이밍 좋게 대기번호 순서가 왔다. 석경은 저에게서 자꾸 진실을 캐내려는 권윤조를 남겨 두고 카운터 앞으로 걸어가 팝콘을 주문했다.

석경은 양손에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준영과 태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최승희만 낯선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최승희는 권윤조를 발견하더니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제 남자 친구 저기 오네요. 윤조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최승희가 권윤조에게 팔짱을 꼈다. 권윤조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길게 훑어본 낯선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권윤조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자신이 결코 치한이 아님을 어필하고 쓸쓸하게 퇴장했다.

“누구야?”

권윤조가 낯선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번호 달라고 해서. 남친 있다는데도 계속 귀찮게 하잖아.”

“애들은?”

“화장실 갔어.”

석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풍경처럼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도 훤칠하고 예쁜 두 사람에게 자주, 오래 머물렀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석경은 일부러 두 사람으로부터 몇 걸음 더 멀어졌다.

낯선 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끈질기게 굴었는지에 대해 권윤조에게 종알종알 하소연하던 최승희가 그제야 석경을 발견했다. 하소연하는 내내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눈살이 반듯하게 펴졌다. 표정의 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변했다. 권윤조를 대할 때는 오빠에게 투정을 부리는 막냇동생 같았는데 지금은 또 의젓하고 똑 부러져 보였다.

“어? 석경 씨. 팝콘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최승희는 석경이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팝콘 트레이를 빼앗아 들었다.

“윤조야, 우리 저기 가서 사진 찍자.”

최승희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사람 키만 한 크기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형이 있었다. 과연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석경 씨, 저희 사진 좀 찍어 줄래요?”

“아, 네, 네!”

멍하니 서 있던 석경은 최승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최승희가 웃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신으로 한 장, 상반신으로 한 장 찍어 주세요. 예쁘게요.”

“네.”

꺼리는 인상을 조금이라도 주기 싫어서 일부러 더 흔쾌히 대답했다.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트레이를 잠시 의자 위에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찍사 모드에 돌입했다. 캐릭터 모형 옆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이 액정에 예쁘게 담겨 석경의 눈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석경은 촬영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그러나 이내 상반신이 잡히게 정성스레 세 장을 찍고 손가락으로 만족의 오케이 사인까지 날렸다. 등신같이, 애를 썼다.

“이제 전신 찍을게요.”

전신을 담기 위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날 때였다. 권윤조가 가까이 다가와 석경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작게 한숨을 내쉰 권윤조의 눈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조용히 이글거렸다.

“아직, 안 찍었는데.”

까닭 모르고 압도된 석경에게서 연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만 됐어. 너 뒤에 지나가는 사람이랑 부딪칠 뻔했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음료수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부딪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부딪쳐서 음료수를 쏟는 건 큰 문제다. 어쨌든 부딪치지 않게 막아준 건 고마운데 왜 이렇게 혼이 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지. 석경은 조금 서러워지려고 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폰 이리 줘.”

“…….”

그러나 덤비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직 전신 안 찍었어. 예쁘게 찍어 줄게. 인생샷으로.”

예쁜 애들이니 사진도 예쁘게 찍히는 게 당연한데 석경은 마치 제 덕분인 것처럼 생색을 내 보았다. 손까지 내밀었지만 권윤조는 휴대폰을 돌려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석경아.”

“왜.”

“그만 찍어도 돼.”

“…….”

그 말이 왜 이렇게 애를 쓰냐는 말처럼 들려서 석경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부자연스러워 보였을까. 혹시 최승희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까. 삼각형도 아닌 주제에 작작할 걸 왜 그랬을까.

“저기 애들 온다.”

화장실에 갔던 준영과 태정이 돌아오자 때마침 입장 시간이 되었다. 석경은 최승희에게 전신샷을 못 찍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최승희는 석경이 찍은 사진을 보며 권윤조에게 좀 웃고 찍지 그랬냐고 애교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석경은 나사가 몇 개쯤 풀어진 듯한 기분으로 상영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보려는 영화가 코미디인지 액션인지 공포인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 * *

석경은 이수현에게 건네받은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이제부터 뭘 도와야 하나 조금 막막하고 뻘쭘한 기분으로 서 있는데 손님들에게 음료를 나르고 온 이수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수현, 나 뭐부터 해야 돼?”

“그냥 있어. 지금은 한가해서 할 거 없어.”

“뭐 무거운 거라도 나를까?”

“없어.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가만히 있을 거였으면 내가 여기 안 왔지. 석경은 검지로 눈썹 끝을 긁적이다가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수현이 턱짓으로 가리킨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도 편한 마음으로 앉을 수가 없었다.

석경은 며칠 전 이수현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공대 여학우회에서 축제 때 주점을 열기로 했다며 석경에게 서버가 되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서버 말고 김치전이나 부치면 안 될까? 부추전도 상관없는데.’ 저를 여러모로 많이 챙겨 주는 이수현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어서 절충안을 내놓았다. ‘안 돼.’ 그러나 이수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 ‘그쪽은 티오 다 찼어.’

주점은 오후 6시 전까지는 카페로 운영이 되고 6시 이후부터 술과 안주를 팔았다. 결국 석경은 2시부터 8시까지 6시간 동안 카페 및 주점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학과 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는 석경의 성향을 아는 동기들은 석경이 이수현에게 거하게 약점을 잡힌 게 분명하다는 말을 했다.

“어제 영화 어땠어?”

맞은편에 앉아서 한 일이 분쯤 말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이수현이 불쑥 물었다.

“어, 재밌더라.”

“재밌었다고?”

“응.”

“캄캄한 아파트 복도 걸어가는 장면 장난 아니었지?”

“응.”

“그 공동묘지에서 비보이 귀신에 빙의해갖구 팝핀 추는 연출도 개쩔지 않았어?”

“……응.”

이수현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너 공포 영화 잘 못 보는구나?”

“아닌데?”

“그거 센 편이던데, 거의 제대로 못 봤겠네. 눈 감고 있었어?”

“아니라니까.”

“그래, 그래.”

“진짜 제대로 봤어.”

“근데 그 영화에 아파트 복도랑 공동묘지 같은 거 안 나오거든.”

이수현은 히죽히죽 웃었다. 석경은 한참 말려든 기분이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고개까지 기울여가며 석경의 표정을 뜯어보던 이수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웃긴 거지. 뭐가 저렇게 웃긴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수현이 밝게 웃으니까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이수현에게는 미안하지만 석경은 그녀에게 동지 의식 비슷한 걸 은근히 품고 있었다. 우리 같이 폭탄 맞았잖아, 그렇지? 다만 이수현은 저에 비해 회복이 빨라 보였다. 애초에 다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권윤조를 대하는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 적당히 티격태격했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밀당인가 싶다가도 동성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수현의 변함없는 태도 때문에 두 사람이 썸을 탔는지 안 탔는지는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수현아, 잠깐 이쪽으로 와 봐.’ 호출을 받고 자리를 뜬 이수현은 잠시 후 손에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손에 든 물건을 석경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석경은 이수현이 내민 고양이 귀 머리띠를 엉겁결에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주점 테마가 동물농장이거든.”

“그래서?”

“머리에 차고 있어.”

“헐.”

“고양이가 맘에 안 들면 토끼로 줄까?”

“호랑이는 없어?”

“너는 여기가 무슨 사파린 줄 아니?”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불퉁 내밀고 고양이 머리띠를 차자 이수현이 사악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카페는 바빴고 주점은 더 바빴다. 카페는 음료만 내가면 되지만 주점은 수많은 안주를 챙겨야 했다. 테이블을 기억해서 안주를 갖다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빈자리가 날 틈이 없었다. 자리가 비면 상을 치우기도 전에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학우회 회원들의 인맥 덕분인지 공대 부스임에도 불구하고 주점에는 유독 여자 손님들이 많았다. 고양이 귀 머리띠를 차고 있는 석경을 보고 키득키득 웃으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 손님들의 한결같은 반응에 석경은 머리띠를 벗으려고 했지만 이수현에게 칼같이 제지당했다.

[냉미남 준영이 : 애들이랑 7시쯤에 갈게]

잠시 짬이 난 틈을 타서 휴대폰을 확인하자 준영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시계를 보자 7시가 코앞이었다. 답장을 보내려는 찰나 마침 애들이 주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준영과 태정, 그리고 권윤조는 주점 부스 안에 들어서자마자 석경의 얼굴을 보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석경아, 너, 그거…….”

버벅거리며 손가락으로 고양이 귀 머리띠를 가리키는 준영을 향해 석경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뇨. 할 말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없음 말구. 절루 가서 앉아.”

마침 빈자리가 생겼고 석경은 세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세 남자의 등장에 부스 안의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석경이 보기에도 셋의 외모는 우월했다. 튀는 외모 덕분에 공대 내에서뿐만 아니라 대학 전체에서도 그들은 유명세가 있었다.

특히 권윤조는 ‘어마어마한 쌍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가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별명은 별명이고 권윤조는 권윤조다’ 이수현이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와서 석경에게 전해 준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질 낮은 별명 따위로는 권윤조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 없다는 데에 석경은 내심 동의했다.

“주문해.”

석경이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권윤조는 하라는 주문은 안 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석경의 얼굴을 찍기 바빴다.

“뭐 하는 거야.”

“석경아, 너 되게 귀엽다.”

“야, 그만 찍어.”

면박을 주자 권윤조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몇 장인가를 더 찍었다. 석경은 권윤조를 무시하고 준영에게 빨리 주문하라고 재촉했다.

“뭐가 맛있어?”

“다 맛있어.”

“그럼 다 줘. 권윤조가 쏜대. 소주랑 맥주는 일단 다섯 병씩 갖다 주고.”

준영이 메뉴판을 돌려주며 말했다. 석경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권윤조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본인의 지갑이 방금 털렸는지 안 털렸는지는 관심도 없는 듯 여전히 석경의 얼굴을 보며 싱글거렸다.

“석경아, 너 되게 귀엽다.”

녹음기인가? 아까 한 말을 왜 또 하는지. 이번에도 무시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석경의 손목을 권윤조가 붙잡았다.

“석경아, 나랑 같이 사진 찍…….”

“…….”

“……기는 좀 그렇지? 표정 보니까 알겠다. 싸늘하게 비수가 날아와 꽂히네.”

석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문을 넣으러 갔다.

30분쯤 지나자 최승희가 합류했다. 석경은 바쁘게 술과 안주를 나르는 와중에도 한 그림 안에 있는 권윤조와 최승희의 모습을 자꾸만 훔쳐보며 의식했다.

어느덧 8시가 되었고 석경은 이수현의 허락을 받아 앞치마를 벗었다. 이수현도 앞치마를 벗고 애들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만큼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가고 싶었으나 태정이 감히 말도 못 꺼내게 석경의 손목을 잡아끌어 옆에 앉히고 술부터 먹였다.

“석경 씨, 머리띠 잘 어울려요.”

최승희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석경은 그제야 머리띠를 벗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벗었다.

“석경아, 먹고 싶은 안주 시켜.”

머리띠를 벗을 때 유독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권윤조가 말했다.

“야, 권윤조. 나도 입 있거든?”

톡 쏘아붙인 이수현이 알아서 제육볶음과 치즈 계란말이를 착착 시켰다. 서빙을 하면서 석경이 먹고 싶다고 흘리듯이 말했던 메뉴였다. 한 시간 먼저 술자리를 시작해서 적당히 술이 오른 상태인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석경은 다소 급하게 소주를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권윤조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최승희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천천히 마시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 술 많이 늘었어.”

“아니, 너 말고 석경이. 석경이 천천히 마시라고.”

“아,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어. 헷갈리니까 이름을 정확히 불러 줄래?”

“최승희, 넌 급하게 마셔도 돼. 술 많이 늘었다며. 이제 안 헷갈리지?”

치즈 계란말이를 입에 넣는 사이에 오고 간 권윤조와 최승희의 팽팽한 대화에 석경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켈록켈록, 귀끝까지 빨개져서 기침을 하다가 권윤조가 내민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이 됐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필 지금 계란말이를 먹어서. 석경은 속으로 한탄했다. 슬쩍 최승희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 정도 농담쯤은 공기처럼 가벼울 터였다.

갈증이 나는데도 이 타이밍에 함부로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입술을 꾹꾹 물며 소주잔만 만지작대던 석경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준영의 시선을 느꼈다. 눈을 돌리자 준영이 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미 석경은 준영이 급하게 웃음으로 덮어 버리기 직전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분명 심란함과 염려가 절반씩 뒤섞인 표정이었다.

입모양으로 왜, 물었더니 준영은 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웃음으로 얼버무려도 소용없었다. 준영이 일주일에 자위를 몇 회 하는지 그리하여 주 몇 회나 현자타임을 갖는지도 훤히 알고 있는 석경이다. 쟤가 진짜 안 어울리게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그러나 얼핏 봤던 표정은 본인이 아프다기보다는 아픈 사람을 보는 것에 더 가까웠었다. 이제는 석경의 표정이 심란함과 염려로 뒤섞이게 됐다.

“니들 그거 알아?”

어느새 감쪽같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준영이 운을 뗐다. 제 쪽으로 모이는 시선들을 한 차례 훑은 준영이 이어 말했다.

“외간깻잎이라고 들어 봤어?”

“어, 나 들어 본 듯.”

“그게 뭐야?”

태정과 이수현이 들어봤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석경을 포함한 나머지는 생소한 표정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한 커플이 커플의 지인이랑 해서 셋이 같이 밥을 먹으러 갔어. 여기서 커플의 지인은 편의상 깍두기라고 부르자. 암튼 깍두기가 깻잎무침 먹으려는데 그거 깻잎무침 뭔지 알지. 혼자 떼 먹기 힘들잖아. 그때 커플 중 하나가 떼 먹기 쉽게 깻잎을 딱 잡아 준 거야. 여기서 깻잎을 떼 먹게 도와주는 행동이 기본적인 매너냐, 사심이냐로 갈리거든.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그 정도 매너는 당연한 거다. 아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반찬을 뭘 집어 먹는지도 내내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야, 근데 깍두기라고 부르는 거 편의상인 거 맞냐? 자꾸 웃긴 장면이 연상되는데요.”

“이거 다들 어떻게 생각해? 특히 권윤조. 넌 어느 쪽이야? 매너야? 사심이야?”

태정이 걸어오는 딴죽을 무시한 준영이 다소 도발적인 투로 물었다. 권윤조가 보일 듯 말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나야?”

“그냥 특히나 네 생각이 궁금하네. 잘 봐. 네 애인이 깍두기의 깻잎을 잡아 줬어. 어때? 이거 매너야?”

“……그게 어떻게 매너야.”

“그럼 뭐야? 사심 들어간 거야?”

권윤조는 심각해졌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는 게 얼굴에서 고스란히 다 보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심각해지냐. 석경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권윤조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는 했다.

“……사심이지.”

“사심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야, 논리가 넘넘넘 빈약한데! 혹시 설명 조금만 더 해 줄 수 있어?”

“질투 나서 논리 따질 심정 아닐 것 같은데.”

“풉!”

듣고 있던 태정이 입안에 있던 소주를 뿜었다. ‘야 이 새꺄,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피해를 당한 준영이 짜증을 내자 태정은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석경은 티슈를 한 움큼 가져와 태정과 준영에게 건넸다. 준영이 옷에 묻은 소주를 닦아 내며 태정에게 물었다.

“그래서, 소주까지 뱉은 박태정은 어느 쪽이신가.”

“나도 사심이라고 생각하는 쪽. 잡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잡아 준 거잖아. 깍두기가 그걸 못 떼어 먹고 낑낑대고 있으니까 안타까워서 마음이 앞선 거지. 내가 봤을 때, 거기 밥상에 대하나 대게가 있었으면 대하 껍데기 까 주고 게살도 쏙쏙 발라 줬을 것 같아. 깻잎만 있어서 그 정도로 끝난 거야.”

“야, 너 좀 비약이 심하네.”

“그니까 그 깻잎 떼 준 어미 새랑, 덕분에 깻잎 먹게 된 깍두기랑 존나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입장.”

“뭐 네 입장은 잘 알겠다. 이수현 너는?”

묘한 표정으로 태정의 이야기를 듣던 이수현이 턱을 괸 자세를 풀며 말했다.

“나는 깍두기가 깻잎 먹지 말고 도망갔으면 좋겠다는 입장. 두 번 다시 그 커플이랑 밥도 같이 먹지 말고.”

“입장이 이상한데?”

“커퀴 사이에 낀 깍두기한테 과몰입해서 그래.”

“어…… 그래. 승희 씨는요?”

가만히 웃고 있던 최승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저는 궁금한 게 있는데요. 깍두기 씨가 겨우 깻잎 잡아 준 정도로 자기한테 사심 있다고 생각할까요? 안 할 것 같은데. 음, 깻잎은 애매해요. 아무래도 깍두기 씨 입장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대하나 대게는 어때요? 안 애매한가요?”

“안 애매한 건 아니고 덜 애매하죠. 그래도 셋 다 애매한 건 마찬가지예요. 저는 확실한 거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게 좋거든요.”

“어쨌든 승희 씨는 깻잎 잡아 준 것쯤은 별거 아니라는 입장인 거죠? 단순한 것도 좋아하시는 입장이고?”

“네, 뭐. 그렇죠. 석경 씨는요?”

별안간 날아온 질문에 석경은 약간 놀랐지만 곧 덤덤한 말투로 의견을 말했다.

“저도…… 매너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겨우 깻잎 잡아 주는 정도로 사심이라고 하기는 오버 아닌가 싶어요.”

“오버라고? 그니까 깻잎 잡아 준 사람의 행동이 오버가 아니라, 그걸 사심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버라는 거지?”

준영이 석경의 의견을 정리해서 되물었다.

“응, 사심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버 같아. 준영이 넌 어느 쪽이야?”

“아, 나는 애인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논란거리를 던진 사람이 내놓은 의견치고는 무책임했다. 야유가 쏟아졌지만 준영은 배 째라는 식으로 넘기고 말았다.

술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한 시간 정도 자리를 지킨 이수현은 일을 도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앞치마를 둘렀다. 같이 돕겠다고 일어서는 석경을 준영이 부스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왜.”

자못 심각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는 준영의 모습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얘가 눈치가 뛰어나게 빠삭한 애는 아닌데…….

“석경아, 너…….”

“나 뭐.”

“너 설마 최승희 좋아하는 거 아니지?”

“무슨 소리야?”

“아니지?”

“아니야.”

“아님 다행이고.”

전혀 다행인 얼굴이 아니었다. 말은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준영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석경아.”

“……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린 준영은 주위를 살펴 인적 없는 거까지 확인하고는 낮게 물어왔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궁금한 거를.

“그럼 너, 권윤조 좋아해?”

예상 질문인데도 말문이 막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심장은 왜 이렇게 두근거리고. 준영이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석경은 겁부터 덜컥 났다. 약혼 비슷한 거까지 한 애를, 그것도 남자를, 비난받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눈에 사나운 빛을 매달고 있는 준영이 낯선 사람으로 보였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준영도 저를 낯설어하겠지.

“……응, 그게…….”

“그게?”

“그게, 그렇게 됐어.”

“…….”

먼저 짐작하고 물어본 것일 텐데도 준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 나 권윤조 좋아해.”

두 번 말하기 싫어서 주어, 목적어까지 붙여서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근데 그게 또 준영의 눈에 뻔뻔하고 당당하게 비칠까 봐 내뱉어 놓고도 신경이 쓰였다.

지금은 안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하면 덜 뻔뻔해 보일까 싶어서 덧붙일까 말까 망설이는데 준영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걔가 왜 좋은데.”

준영이 궁금해하는 게 ‘걔를 어떻게 좋아해’가 아니라 ‘걔가 왜 좋아’라서 잔뜩 졸아붙었던 마음이 약간 풀어졌다. 일단 비난은 아닌 것 같아서.

“야, 뭐 그런 걸 물어보냐.”

“대답해.”

“어, 음, 다정해서?”

“권윤조보다 내가 훨씬 더 다정한데?”

“그렇긴 하지.”

준영은 원래부터 석경을 유독 싸고돌았었다. 고등학교 때는 반 아이들이 둘 사이를 의심하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결코 남들이 보기에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석경은 단 한 번도 준영이 저를 친구 이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지 않았다. 권윤조는 틈만 나면 의심해 놓고.

그러니까 권윤조의 다정에만 순전히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었다. 석경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너무 좋아하다 보니 탓하는 마음도 자라나게 된 거다.

“그래서, 그게 다야? 다정한 거?”

“너 진짜 이런 TMI가 듣고 싶냐?”

“어, 듣고 싶어.”

“……잘생겨서?”

“나도 잘생겼는데?”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준영을 보고 석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그럼 너를 좋아할 걸 그랬네. 근데 걔 손이 되게 예쁘거든. 너보다 훨씬. 그래서 네가 아니라 걔를 좋아하게 됐나 봐.”

“별, 씨발. 손? 존나 싫다. 야, 그만해.”

“왜. 듣고 싶다며.”

“듣기 싫으니까 그만해.”

섹시해서 좋다는 말은 쌍욕이 날아올까 봐 차마 못 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한 것도 아니고 농담 따먹기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분위기에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꺾어 하늘을 향해 한숨을 한바탕 내쉬고는 세상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야, 석경아.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정리할 거야. 하는 중이고.”

“얼씨구?”

“……그냥 모른 척해 줘.”

“모른 척해야지. 그럼 내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까?”

“그런 뜻이 아니라.”

준영은 잠시 말없이 부스 쪽을 바라봤다. 석경의 눈도 저절로 부스 쪽으로 향했다. 먼저 눈길을 뗀 준영이 결심한 듯 말했다.

“너, 오늘은 그만 집에 가라. 애들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왜.”

“왜긴 왜야. 청승 떠는 꼴 못 봐주겠으니까 그러지.”

“내가 무슨 청승을 떨었다고 그래.”

“너 젓가락 세 번이나 떨어뜨린 거 알아 몰라? 최승희가 권윤조한테 팔짱 낄 때 한 번, 최승희가 권윤조한테 귓속말할 때 한 번, 최승희가 권윤조 어깨에 기댈 때 한 번.”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낮에 무거운 거 날랐더니 손 떨려서 그래.”

“가라, 응?”

석경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당장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반, 계속 있고 싶은 마음 반. 근데 견딜 만하니까 미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거다. 오히려 두 사람을 제 눈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더 못 견딜 것 같았다. 직접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만 상처받는 게 낫지, 더한 상상으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자주 봐야 익숙해지지.”

“익숙해질 게 따로 있지. 뭐 저딴 걸.”

“정리도 되고 좋아.”

“하아, 존나 이석경이랑 친구하기 피곤하다.”

나도 내가 나인 게 피곤하고 마음에 하나도 안 드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이런 성격인데다 형질도 오메가라 쉽게 연애하는 건 애초에 자신 없어서 연애 자체를 꺼리고 있었던 석경이다.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도, 군더더기 없이 사랑받는 것도 자신 없어서 시작도 안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빡센 게 나타나서 짝사랑으로 애를 먹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석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준영아. 너 어떻게 알았어? 나 많이 티 났어?”

“안 났어. 나는 진짜 네가 그런 줄 까맣게 몰랐어. 권윤조가 옆에서 별 재롱을 다 떨어도 너 맨날 표정 뚱해서 잘 웃지도 않고 무덤덤한데 티가 나겠냐. 안 나지.”

“…….”

“티는 여태껏 권윤조가 다 냈지. 너무 티를 내서 오히려 헷갈리는 거고. 좋아하면 너처럼 숨기는 게 정상이잖아. 깻잎만 잡아 줘도 오해가 발생하는 세상인데. 안 그래?”

“너 그래서 깻잎 어쩌고 얘기 꺼낸 거야?”

준영이 아차 싶은 얼굴로 눈치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의 시험대에 권윤조가 오른 것은 확실하고 제 눈치를 보는 낌새를 보아하니 저 역시 시험대에 올랐을 거라고 석경은 짐작했다. 정확히 뭘 시험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석경아, 들어 봐? 권윤조 걔 생각은, 깻잎 그거 매너 아니라잖아. 사심이라는데. 아, 깻잎을 왜 잡아 주냐고. 사심이라고 생각하면 그걸 잡아 주면 안 되지.”

“야아…….”

“깻잎을 씨발, 깻잎을 잡아 주잖아. 그걸 자꾸 잡아 주는데 헷갈리지. 게살도 발라 주고 대하 껍데기도 까 줄 것 같은데 헷갈리지 않겠냐고. 나도 이렇게 헷갈리는데 너는 오죽할까.”

“너 취했어?”

“취했나 보다. 뜯어말려도 모자랄 판에 내가 왜 너를 부추기고 자빠졌지? 그냥 정리해.”

“정리할 거야. 너나 애들 앞에서 잘해.”

“뭘?”

“괜히 티 내지 말라고. 이상한 얘기로 떠보지도 말고. 깻잎 얘기 같은 거.”

“어휴, 알았어. 내가 그 정도 눈치는 있지, 없겠냐. 너나 젓가락 떨어뜨리지 마.”

석경은 준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먼저 앞장섰다.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권윤조의 커다란 손을 최승희가 두 손으로 붙잡고 장난스럽게 조물락거리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권윤조가 최승희에게 잡힌 손을 빼내면서 석경에게 물었다. 대답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석경의 어깨를 정신 차리라는 듯이 준영이 툭 밀치며 복화술이라도 하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 저 새끼 손이 예뻐?”

“조용히 해.”

“진짜 예쁘긴 한가 보네. 우리 없는 동안 저렇게나 예쁨을 듬뿍 받고.”

한껏 비아냥댄 준영은 석경에게 어깨빵을 한 번 더 시전하고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석경도 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집에 가라는 준영의 말을 들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얌전히 집에 갔더라면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사이좋은 모습을 보지 않았을 텐데. 키스 같은 적나라한 스킨십보다 그런 모습이 더 타격이 컸다.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건강한 유대감 같은 게 느껴져서.

“뭐야, 김준영 표정 왜 썩었냐? 둘이 나가서 싸우고 왔어?”

자리에 앉자마자 사나운 표정으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는 준영을 유심히 살피던 태정이 물었다.

“안 싸웠어. 내가 석경이랑 싸울 일이 뭐가 있어. 우리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준영은 태정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눈은 권윤조에게 두고 그를 지그시 노려보기까지 했다. 석경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티 내지 말라니까 저 새끼가 진짜.

“석경아, 어디 갔다 왔어?”

준영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윤조가 물었다. 석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준영이 치고 들어왔다.

“넌 신경 꺼. 우리 일이야.”

“나 석경이한테 물어봤는데.”

“그니까 석경이한테 신경 끄라고.”

“김준영. 내가 왜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되냐.”

“둘 다 그만해. 그냥 술 깨고 온 거야.”

석경이 끼어들어 중재하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지 않게 서로 눈치껏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나주는 느낌이었다.

석경은 준영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준영이 권윤조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여기서 더 티 내는 것은 위험했다. 술김에 고삐가 풀려서 더 큰 시비라도 일으킬까 염려되기도 했다. 준영의 허벅지를 찌르자 준영은 시치미를 떼며 소주를 마셨다.

뭐든 때려 부술 듯한 기세로 소주잔을 탁 내려놓은 준영은 더는 말 걸지 말라는 얼굴로 휴대폰에 코를 박았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액정을 토독토독 두드리는 손가락이 바빠 보였고 눈빛은 레이저라도 쏠 것처럼 형형했다. 귀도 유난히 쫑긋한 것 같고 머리에 뾰족한 뿔 두 개가 대칭으로 솟아 보이는 것은 다 착각이겠지.

얼어붙은 분위기를 감지한 태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석경을 바라봤다. 석경은 어째 머리가 아플락 말락 했다. 온몸의 근육들도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내 친구 불러도 되냐?”

바쁜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준영이 고개를 들고 태정에게 물었다.

“친구? 누구?”

“고등학교 동창.”

“불러. 술 게임은 사람 많을수록 좋으니까.”

태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근슬쩍 술 게임을 제안했다. 준영은 다시 메시지를 보내더니 테이블 위에 폰을 내려놓고 화풀이라도 하듯 또 소주를 마셨다. 석경은 팔꿈치로 준영의 팔을 툭툭 쳤다.

“동창 누군데? 내가 아는 애야?”

준영의 고등학교 친구를 석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 너도 아는 애야.”

“누군데?”

“한세진.”

“…….”

“이따가 분위기 어색해질까 봐 미리 말해 주는 거야.”

“…….”

“마음의 준비 같은 거 필요하면 세진이 오기 전에…… 내 말 안 들리나 보네. 야, 이석경. 눈 뜨고 기절했냐?”

“기절 안 했어.”

석경은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이런 자리에서? 그런 의문들이 석경을 멍하게 만들었다. 준영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뭔데, 누가 오는데 이석경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고야?”

듣고 있던 태정이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있어. 석경이가 잔인하게 버렸던 남자.”

질문을 한 태정이 아닌 권윤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 준영이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석경은 당황해서 입을 반쯤 벌린 채 준영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잔인하게 버렸다는 애가 한세진인 거지? 그 한세진이 지금 여기로 오겠다고 한 거고.

따로 정리가 필요 없을 만큼 단순한 상황인데도 머리가 복잡했다. 아플락 말락 하던 머리가 진짜로 아파지기 시작했다. 잔인하게 버렸다는 말의 출처가 준영이 아니라 한세진이면 어쩌나 걱정됐다. 그런 거면 진짜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볼 낯이 없는데 한세진 얼굴을 무슨 수로 보지. 내가 그토록 잔인했었던가. 서로가 서서히 멀어진 게 아니었던가.

“지금 오고 있대?”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물었더니 준영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 너도 같이 있다고 말했어.”

“안 도망가.”

석경의 말에 준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런저런 상황을 떠나서 저와 한세진의 재회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준영이 중간에서 해 왔을 마음고생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예민했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던 그때의 자신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단단해지고 무뎌진 지금의 자신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 안타깝기도 했다.

“석경아, 김준영이 한 말 진짜야?

태정이 썩 좋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네가 잔인하게 버렸다는 거. 화도 잘 안 내는 네가 그랬을 정도면 나는 그 친구 곱게는 안 보일 것 같은데.”

사정을 모르는 태정의 눈에 적대감이 옅게 떠올라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말을 고르는데 준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야, 그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석경이가 잔인하게 버렸다며. 내가 아는 석경이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애가 아닌데.”

“그게 아니라, 석경이 쟤가 보기보다 냉정한 면이 있…… 어휴, 내가 말을 잘못했다. 세진이 진짜 착해. 내가 입방정 떤 거야.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둘이 오해가 있었어. 석경아, 네가 좀 말해 봐.”

“어, 다 내 잘못이야. 한세진 착해.”

“야, 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당황스럽잖아. 너 잘못 없어. 네가 뭘 잘못했는데. 세진이도 잘못 없고 그냥 상황이 그랬던 거잖아. 그치? 내가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준영이 제 입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렸다. 최승희가 그런 준영을 보며 작게 웃었다.

“자초지종은 잘 모르겠지만 대강 어떤 상황인지 이해는 가요. 저도 윤조랑 고등학교 때 1년 가까이 말 한마디 안 한 적 있었거든요. 윤조 얘가 냉정하고 잔인한 면이 있어서 제가 마음고생을 좀 했어요.”

“권윤조가…… 승희 씨한테도 마음고생을 시켰군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도 권윤조가 잘못했네요.”

“하하, 윤조가 딱히 잘못한 건 없구요. 냉전 기간에 저만 안달 난 게 자존심은 약간 상했어요.”

“알죠, 알죠. 오죽했으면 권윤조 별명이 어마어마한 쌍…… 헙!”

준영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겨우 한 글자 남겨두고 입을 막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당황한 것치고는 눈이 너무 웃고 있는데? 준영의 발연기를 지켜보며 석경이 고개를 젓는데 최승희가 다 안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마어마한 쌍놈이요? 저도 그 별명 들었어요.”

“……기분 안 나쁘세요?”

“네? 제가 왜요?”

“아니, 뭐, 약혼자 별명이…….”

“아아, 전 뭐 당사자도 아니니까요. 윤조야, 너는 네 별명 어떻게 생각해? 기분 안 나빠?”

권윤조는 대답을 미뤄둔 채 석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제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석경에게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눈을 피하자 그제야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안 나빠.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남들이 하는 말이잖아.”

“그렇대요.”

최승희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강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여유가 느껴졌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신이 권윤조와 사귀게 된다고 해도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여유로움이었다.

“근데 두 분은 언제부터 친구였어요?”

최승희가 석경과 준영에게 차례대로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저랑 석경이요? 저희는 같은 중고등학교 나왔어요. 중1 때 같은 반 되면서 친해졌구요.”

“아, 중1. 그랬구나.”

“친해지고 싶어서 제가 석경이한테 들이댔어요. 석경이 열네 살 때 진짜 귀여웠거든요.”

“그래요?”

“네. 중고등학교 때 우리 석경이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쉬는 시간만 되면 석경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다들 교실 창문에 개떼처럼 달라붙어 있고 아주 난리였어요.”

“충분히 그럴만해요. 저도 석경 씨 처음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너무 미인이셔서. 남자한테 미인이라는 말은 좀 그런가? 곱게 잘생겼다는 뜻이에요. 윤조랑 태정이는 이렇게 잘생긴 친구를 꽁꽁 숨겨두고 자기들끼리만 놀구.”

석경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최승희의 시선을 피했다. 앞구르기를 하며 들어도 외모가 잘났다는 칭찬인데 어째서 고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말을 돌려서 거북한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괜스레 눈만 굴렸다. 말주변도 없고 능청은 더 없는 탓이었다.

“승희 너도냐? 나도 석경이 처음 봤을 때 놀랐는데.”

“윤조야, 넌 어땠어? 석경 씨 처음 봤을 때.”

태정이 합세한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최승희가 권윤조까지 끌어들였다. 넌 됐어. 너까지 보태지 마. 그렇지 않아도 박차고 나가고 싶으니까. 마음의 소리를 들을 리가 없는 권윤조가 야속하게도 입을 열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잠시 말을 끊은 권윤조는 검지로 콧등을 긁적이다가 석경을 깊게 응시했다.

“뭐 저렇게 생긴 애가 다 있나 생각했어.”

권윤조가 입을 다물자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준영은 헛기침을 하며 ‘왜 멜로 눈깔을 하고 난리야’라고 작게 투덜댔고, 태정은 입안에 소주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뿜고 싶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최승희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소주를 비운 준영이 숙연해진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다른 얘기 하면 안 되나? 내가 석경이 얼빠인 거 석경이가 알면 안 되거든. 우리 석경이가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서.”

“다 들리거든.”

“다 들렸어? 으이구! 석경아, 사랑해. 이 말도 들려?”

준영은 석경을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석경은 몸서리를 치며 준영을 밀어냈다.

“얘 또 취해서 짐승 됐네. 너 그만 마셔.”

“석경아, 내가 보기엔 김준영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아. 똑 부러지게 할 말 다하고 사심까지 채우잖아.”

태정이 문어 빨판처럼 석경에게 달라붙은 준영을 떼어내며 말했다. 겨우 떨어져 나간 준영이 취한 사람답게 과한 동작으로 별안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내가 취한 기념으로 특별히 보여준다. 중1 때 석경이 사진.”

준영은 말릴 새도 없이 휴대폰을 든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화면 가까이 모이는 눈들을 보며 석경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와, 석경 씨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어요. 준영 씨도 귀엽구요.”

“저는 덤인가요?”

“덤으로도 감지덕지 하셔야죠.”

무슨 사진인가 궁금해서 덩달아 목을 빼고 봤더니 중1 여름방학 때 워터파크에 함께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어느새 준영의 휴대폰을 빼앗아 든 권윤조가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도로 빼앗으려는 준영의 손을 물리면서 계속 들여다봤다. 통째로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석경이…… 어릴 때는 이랬었구나.”

“야, 권윤조. 내 폰 내놓으라니까.”

“……이렇게나 귀여웠구나.”

길길이 날뛰는 준영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직하게 말하는 저음이 간지러웠다. 석경의 어릴 때 사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준영 말마따나 멜로 눈깔이었다. 상대방 마음이 심란하거나 말거나. 그게 참 권윤조다우면서도 조련 당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권윤조의 부드러운 눈빛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림과 동시에 날카로워졌다.

“야, 전화 왔지? 이리 내놔.”

결국 휴대폰을 도로 빼앗아오는데 성공한 준영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 아직 있어. 사 오긴 뭘 사 와. 남의 집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술이랑 안주랑 다 있어. 빈손으로 와도 돼.’ 전화를 끊은 준영은 양해를 구하는 말투로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실수니까 내 친구 안 좋게 보지 마. 세진이 진짜 괜찮은 애야. 석경이한테 잘못한 것도 맹세코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잘했어. 나는 무조건 석경이 편인데 세진이만 유일하게 예외야.”

조용히 듣고 있던 태정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무슨, 이석경 구 애인 소개냐?”

“구 애인은 아니고 친구. 친한 친구.”

“근데 석경이가 그 친구를 안 보겠다고 판단한 건데 네가 억지로 자리를 만들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그게, 세진이가 석경이 털끝만큼이라도 상처 줬으면 내가 두 발 벗고 나서서 근처에도 못 오게 했을 거야. 근데 아니니까 다시 잘 지냈으면 하는 거지. 걔가 뭐 석경이 이겨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부 져 주다 보니까 서로 풀지를 못한 거고.”

“진짜 무슨 구 애인이냐. 그럼 우리는 뭐 하면 돼? 어? 뭐 할까? 둘이 다시 잘되게 해주면 되는 거냐.”

태정의 말투에 약간의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석경은 짐짓 심각해지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정아, 그냥 흘려들어. 김준영 취해서 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는 중이니까.”

권윤조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의식하면서 한세진 칭찬을 늘어놓는 준영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준영의 의도가 조금 읽혔다. 그러니까 준영은 저 혼자서 권윤조와 지옥의 밀당을 하는 중이었다. 한세진을 갑자기 주점으로 부른 것도 나름대로 질투 유발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 권윤조한테 가당키나 한 떡밥인가. 권윤조는 당연히 신경도 안 쓸 텐데.

한데 그런 건 둘째 치고 준영에게 미운 털이 박혀 버린 권윤조 때문에 석경은 심란했다. 한세진이 저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듯이 권윤조도 그렇다는 것을 준영이 알아줬으면 했다. 권윤조를 두둔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권윤조를 준영도 좋게 봐 줬으면 하는 미련한 마음이 조금은 섞여 있긴 하지만 결코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석경은 사람 미워할 줄 모르는 준영이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꽤 잘 맞는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준영이 권윤조를 얼마만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래서,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들키기 싫었던 거다. 짝사랑하는 마음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흘리고 다닌 결과가 부끄럽고 썼다.

조용히 소주를 넘기는 석경의 눈에 테이블로 다가오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한세진이었다.

“어, 세진아! 왔어?”

둘이서 저 모르게 주기적으로 만났을 것이 분명할 텐데 준영은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듯 반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한세진을 맞이했다. 한세진은 초면인 이들과 눈인사를 나눈 후에 제 이름을 말하며 경영학과라고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석경은 한세진이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경영학과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경대를 지날 때마다 한세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김준영 취했네.”

한세진은 눈이 반쯤 풀려있는 준영을 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마침내 석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석경아.”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석경의 귀에 전달됐다. 모두가 숨죽이고 두 사람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경이 잔인하게 버렸다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보고 싶었다는 달콤한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석경은 말없이 마른 침만 삼켰다.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어.”

“……어, 그래.”

“야야, 세진아.”

취해서 아까부터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굴던 준영이 돌돌 말린 혀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왜.”

“부스 안에서 분위기 잡지 마라.”

한세진이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다. 몇 센티는 더 자란 키에 소년티를 완전히 벗은 베일 듯한 턱 선이 낯설었던 것도 잠시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웃는 얼굴에 마음이 일렁였다.

석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다가 맞은편에 앉은 권윤조와 언뜻 눈이 마주쳤다. 비스듬히 턱을 괸 권윤조는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조한 무표정으로 석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표정은 지독하게도 바싹 말라 굳어 있었다. 그토록이나 건조하게 만든 속 안의 끓는 열기가 어렴풋이 감지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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