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밤 9시쯤 준영과 태정은 가방을 챙겼다. 석경은 슬슬 밀려오는 졸음을 쫓을 겸 집에 가겠다는 두 사람을 배웅하러 바깥으로 나왔다.
“공부 적당히 하고 들어가. 어차피 장학금은 다 내 거야.”
“태정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함께 나온 권윤조의 면박에도 태정은 꿋꿋했다. 석경은 웃으며 준영과 태정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내일 보자.”
“우리는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까.”
권윤조는 석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분수가 있는 작은 연못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뒤따라간 석경이 물었다.
“몇 시까지 할 거야?”
“너는?”
“나, 11시?”
“나도.”
둘은 자연스럽게 연못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는 여자 두 명이 석경의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목이 말라서 시선을 못 떼고 있었더니 권윤조가 팔을 툭 건드렸다.
“뭘 그렇게 봐. 맘에 들어?”
“어, 아니. 맥주 맛있어 보여서.”
권윤조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보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무심코 머무는 눈길 하나까지도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나는 네가 맘에 들어. 천둥처럼 외치고 싶었다. 저에게 집중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가 아니라 그냥 말하고 싶었다. 감히 탐 같은 걸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마음이 그에게 갔으면 했다.
“맥주 마실래? 얼른 사 올까?”
“공부해야지.”
“오오.”
“뭐가 오오, 야.”
“딱 한 번만 더 꼬실 건데 넘어올래?”
“꼬시지 마.”
사실 석경은 맥주보다 더한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백을 해버릴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찼다.
“꼬실 건데.”
“…….”
권윤조의 손등이 제 손등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부딪혀 왔다. 더 확실하게, 더 오래 손등이 맞닿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석경은 아까보다 입이 더 근질근질해졌다. 못 참겠어. 고백하고 싶어. 해도 되나?
“맥주 마실래?”
권윤조가 재차 물었다.
“아니.”
“에이, 안 넘어 오네.”
“…….”
내가 하겠다는데 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고백이든 뭐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권윤조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차이는 것도 내가 차일게.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들어가자. 우리 석경이가 술을 다 마다했는데 열심히 공부해야지.”
권윤조가 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심하게 돌린 등을 보자 미친놈처럼 날뛰던 충동이 한풀 꺾였다. 별이 띄엄띄엄한 밤하늘에 대고 석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더불어 뭐든 가능할 것만 같던 기세가 일제히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지금은 말고 이따가 집에 같이 가는 길에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고백을 잠시 미뤘다.
권윤조를 열람실 안으로 먼저 들여보낸 석경은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석경의 발걸음은 열람실이 아닌 복도 끝에 위치한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복도 끝까지 가서 모퉁이를 돌면 음료 자판기 여러 대와 긴 의자들이 놓여있는 휴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체기 탓인지 아까부터 톡 쏘는 탄산이 당겼다. 저는 탄산음료를 마시고 권윤조에게는 이온 음료를 사다 줄 생각이었다.
“이거 그쪽이 놓고 간 거 맞죠?”
복도 끝에 다다라 모퉁이를 돌기 직전 석경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권윤조의 목소리였다.
석경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권윤조가 쪽지나 간식을 놓고 간 상대와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제가 알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내용을 읽어 보지도 않고 찢어 버렸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의문과 함께 불길한 상상이 밀려들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석경은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얼어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게 제가 맞긴 한데…….”
헐. 뒤이어 들려온 상대의 목소리에 석경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저도 모르게 놀란 음성이 작게 튀어나왔다.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의 목소리는 굵직한 저음이었다.
“좋아한다고 적혀 있네. 설마 이거 고백인가?”
“아니, 저…….”
“좋아하니까 뭐 어쩌라는 거예요? 뭘 바라고 이런 짓 했어요?”
“…….”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소름 끼치니까.”
“저기…….”
“그쪽 남자잖아. 같은 남자한테 무슨 짓입니까.”
“…….”
“무슨 과예요?”
“……네? 저요? 저 사체관데요.”
“그럼 공대 올 일은 없을 테고, 앞으로는 중도에 안 왔으면 좋겠는데. 자퇴를 해 주면 더 고맙고.”
석경은 거기까지만 듣고 계단 쪽으로 도망치듯 뛰었다.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부끄러운 두 다리 때문에라도 계속 엿들을 형편이 아니었다. 다리가 풀려 넘어지는 꼴을 간신히 면하고 계단에서 숨을 골랐다.
자신이 마치 권윤조 앞의 이름 모를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소름 끼친다는 말이 저를 겨냥하는 비수와도 같았다. 세상에, 그러니까 내가 같은 남자한테, 권윤조한테 여태 무슨 짓을 한 거야.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덮쳐왔다. 석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잔인하고 가차 없는 권윤조의 말들이 목구멍 깊숙이 박히면서 토기가 쉴 새 없이 치밀어 올랐다. 석경은 아까부터 명치 부근을 틀어막고 있던 음식물을 변기에 모조리 게워냈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창백한 낯을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물에 젖어 이마에 가닥가닥 붙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이 모든 게 고백을 앞둔 부담감이 빚어낸 환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권윤조의 입에서 나온 ‘그쪽 남자잖아. 같은 남자한테 무슨 짓입니까.’라는 말 또한 환청이라고 믿고 싶었다. 혼자서만 앓았을 때는 나름대로 애틋하게 느껴졌던 감정이 현실과 만나자 누군가가 소름 끼쳐 할 정도로 징그럽고 추해지고 말았다.
내 감정이 그런 거였구나. 무슨 짓이냐는 물음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수조차 없는 것. 자퇴를 해 주면 더 고마운 것.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권윤조 앞에 서 있었던 남자가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석경아, 정신 차려. 너는 남자잖아. 나도 남자고.’ 아무렴 그러한 고민조차 없이 덜컥 고백을 했으려고. 그런 건 고백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건데. 권윤조, 너는 왜 그런 당연한 것도 몰라. 어쩌면 자신은 뻔뻔하게도 서운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뻔뻔한 인간이 될 바에는 고백 같은 건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대로 중도에서 나온 석경은 자취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권윤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예상했던 일이라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잘생긴 윤조♥ : 어디야?]
[잘생긴 윤조♥ : 왜 안 와?]
석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했다.
[미안해 나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집에 갈게 내 가방 좀 부탁해 내일 보자]
해야 할 말을 한꺼번에 입력해서 보낸 뒤에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무것도 엿듣지 못한 척 태연을 가장하여 메시지를 보내자 뒤죽박죽 헝클어졌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석경은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아직 문을 연 약국이 있나 살피다가 두 군데 허탕을 치고 포기했다. 대신 편의점에 들렀다. 겨우 체한 걸로 약은 무슨 약이야. 급체했을 때는 자고로 소주나 소주 같은 걸로 속을 달래야지. 소주 두 병과 손에 잡히는 과자 하나를 계산해서 편의점을 나왔다.
곧장 집으로 가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까부터 내내 울리던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자 읽지 않은 메시지가 17개에 부재중 전화가 5통이나 쌓여 있었다. 권윤조였다. 석경은 쌓인 메시지를 읽지 않고 권윤조가 아닌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하철 안이야?]
준영은 따로 자취방을 얻지 않고 집에서 통학하는 중이었다. 석경의 독립을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동생 재경이었고 그다음이 준영이었다.
[김준영씨 : ㄴㄴ 방금 전에 내렸어]
[김준영씨 : 왜?]
[지금 전화 해도 돼?]
답장 대신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 어, 석경아. 무슨 일 있어? 공부 안 해? 오늘 11시까지 한다며.
“오늘은 일찍 나왔어. 몸이 좀 안 좋아서.”
- 어디가 안 좋은데?
“그냥, 체한 것 같아.”
- 스테이크 때문에?
알만하다는 말투에 석경은 가만히 웃었다. 준영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가 않고 ‘스테이크’가 아닌 ‘권윤조’라고 들렸다. 권윤조 때문에 체했어?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준영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 같아.”
권윤조와 간질간질 썸이라도 타는 듯한 착각과 함께 꿀꺽 삼켰던 스테이크가 속을 괴롭혀 모조리 게워 내 버렸다. 석경은 자신이 토해낸 것이 비단 스테이크만이 아니길 바랐다. 감정도 미련 없이 토해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 약은 먹었어? 너 설마 술 마시고 있는 건 아니지?
“마시고 있는 건 아냐. 이제부터 마시려고.”
- 미친, 혼자? 뭐 마실 건데? 소주?
“응. 오늘은 딱 두 병만 조지고 자야지.”
- 나 지금 너네 집으로 갈까?
“됐어. 혼자 마실래.”
-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왜.”
실컷 남의 목소리를 지적해 놓고는 준영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뭐냐고 채근하려는 찰나 준영이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 너, 우는 거 아니지?
“안 우는데.”
- …….
“근데 조금 울고 싶은 것도 같다. 혼술 하면 눈물이 나오려나?”
석경은 실없이 웃었다. 웃고 싶어서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웃는 것이 당연했다. ‘석경아.’ 준영이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석경의 이름을 불렀다. ‘응.’
- 권윤조 알파잖아.
“…….”
- 맞지?
“……응.”
-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 질문, 내가 아니라 권윤조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하긴, 그러네.
준영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러나 석경은 준영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했다. 알파인 권윤조를 멀리하지 않고 곁에 두는 이유가 궁금했을 것이다.
“너 집에 거의 도착했지? 끊을까?”
- ……너 괜찮아?
“뭐가?”
- 글쎄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딱 하나만 골라. 대답해 줄게.”
석경은 편의점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주와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자취방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권윤조 알판데 괜찮아?
“뭐, 괜찮은가 봐.”
- 알파라면 죽기 살기로 피해 다니던 이석경은 어디 갔냐?
“나도 몰라. 이제 없어.”
- 권윤조라서 괜찮은 거야? 아니면 이제 알파라도 별 상관없어진 거야?
“……아마도 후자?”
태연하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 그럼 한세진은?
“…….”
- 그럼 세진이도 이제 괜찮겠네? 걔 형질이 알파라는 이유만으로 너한테 절교 당했…….
“야, 준영아. 감이 좀 멀다. 잘 안 들려.”
-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대답 어려운 거 아니잖아. 빨리 해주고 맛있게 술 마셔.
“뭘 또 맛있게 마시래. 아니, 나 진짜 하나도 안 들린다니까. 끊는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고등학교 시절, 준영 못지않게 친했던 한세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수업 도중 오메가로 발현한 아이가 같은 교실에 있던 알파에게 발정했다가 강제 전학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 알파가 제 친구 한세진이라서 석경에게 더 충격으로 기억된 사건이었다.
한세진은 그때 욕설을 내뱉지도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으며 덩달아 발정하지도 않았다. 제 몸에 달라붙는 오메가 아이를 차분하게 떼어내고는 유유히 교실을 나갔었다.
그 사건이 있고 1년이 지난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석경은 오메가로 발현했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다시 학교에 나간 석경은 친구들에게 감기로 앓았었다는 말로 둘러대고 이전처럼 지냈다. 눈에 띄게 우울해하지도 않고 밝아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다.
한세진은 오랜만에 등교한 석경을 걱정하는 한편 무척 반가워했다. 그러나 석경은 그와 같은 반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 안도할 따름이었다. 공원에서 저를 강간하려던 알파와 한세진은 결코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석경은 한세진을 피했다. 한세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순전히 수치심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치사량의 억제제를 삼키고도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저를 붙들고 울다가 실신한 어머니와 동생 재경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해서는 안 됐다. 따라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압도하는 거대한 수치심과 열등감과는 최대한 멀리해야 했고, 한세진은 석경이 피해야 할 1순위가 되었다.
한세진은 이유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이유를 짐작한 채로 석경의 냉대를 견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르는 사이처럼 서로 완전히 멀어졌다. 따지고 보면 서서히 멀어진 것일 뿐 제 쪽에서 절교하자고 못을 박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석경은 준영을 통해 오랜만에 듣게 된 이름이 멀고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했다. 2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마음이 그랬다. 잘 지내고 있을까.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피해 다니기 바빴던 친구의 안부를 어느덧 궁금해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소한 변화를 깨달을 때마다 석경은 무던해진 자신이 신기했다.
“석경아.”
땅을 보고 걷던 석경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권윤조가 빌라 앞에 서 있었다. ‘같은 남자한테 무슨 짓이야.’ 저를 바라보는 다정한 얼굴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겨우 잠잠해졌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피할 생각은 없었다. 권윤조를 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예전에 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에 대한 감정을 자각했을 때, 그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히트사이클을 겪었을 때, 위기는 수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석경은 피하지 않았다.
친하게 지냈던 한세진을 밀어냈다는 죄책감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어서 같은 종류의 후회를 반복하기 싫어 신중해진 것도 있고, 그저 권윤조의 곁에라도 있고 싶은 헛된 욕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피하지 않으리라는 게 석경의 본심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애쓰지 않고 자신을 놓고 싶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권윤조의 얼굴을 마주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반갑지 않았다.
“왜 여기 있어?”
어떤 얼굴로 권윤조를 마주 봐야 할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좋아하니까 뭐 어쩌라는 거예요? 뭘 바라고 이런 짓 했어요?’
도서관에서 권윤조가 남자에게 했던 질문이 고스란히 석경을 겨누었다. 자신은 권윤조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란 걸까. 그에게 뭘 바라고 고백하려 했을까.
고백을 결심했을 때, 맹세코 자신은 아무런 기대가 없었을까. 아마 조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를 탐내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은근한 기대가 깔렸다는 걸 인정한다.
“전화했는데 안 받길래 걱정돼서. 몸 안 좋다며.”
그렇게 말하는 권윤조의 눈길이 약간 아래로 향해 있었다. 눈길이 머문 곳은 석경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탐색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석경은 뜨끔했다. 마치 술을 마시고 싶어서 먼저 튄 모양새라 절대로 내용물을 들키기 싫었다. 석경은 소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슬그머니 뒤로 숨겼다.
“이제 괜찮아.”
“그거 소주야?”
숨기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권윤조가 물었다.
“아닌데.”
“딱 봐도 자태가 소주였는데.”
“아니야.”
바투 다가온 권윤조가 석경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빼앗았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텼으나 허무하게 빈손이 되고 말았다. 권윤조가 제 몸에 밀착한 순간 힘이 탁 풀려서 제대로 뭘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손에 들어온 비닐봉지 안을 열어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거봐, 맞잖아.”
석경은 봉지 안을 들여다보듯 권윤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활짝 열어보고 저 역시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거봐, 맞잖아.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기대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러게 나한테 야한 농담을 왜 하고 그래? 뭐, 친구끼리 야한 농담쯤은 할 수도 있어. 근데 성적인 농담의 대상이 내가 되면 헷갈리지 않겠냐고. 내 입에 도대체 뭘 물려 주고 싶었는데. 참 나, 줄 거면 시원하게 줄 것이지. 받은 적도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다.
“야, 그거 이리 줘.”
“너 체했잖아. 아픈 주제에 술은 무슨 술이야.”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약 상자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체한 티를 있는 대로 내고 다니기라도 한 건가. 준영도 그러더니 권윤조도 거의 확신을 담은 말투였다. 어설프게 부정했다가는 뭐 땜에 체했는지도 밝히려 들 것만 같아서 고맙다고 하며 고분고분 약을 받아들었다.
“근데 약국 문 닫았던데.”
“편의점에 상비약 정도는 팔아. 술만 파는 거 아니야.”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라 괜히 눈썹 아래를 검지로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내 가방 가져왔네. 무거웠을 텐데. 고마워.”
달라는 의미로 손을 뻗었지만 권윤조는 가방을 넘겨주는 대신 석경을 빤히 보고만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석경아.”
“응.”
“……아니다.”
권윤조는 석경의 가방을 건네주며 잘 자라고 말했다. 소주는 끝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뭔데, 뭐가 아닌데?’ 캐물어도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권윤조를 보내고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석경은 제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청포도 향을 맡고 당황했다. 언제부터 났지? 정신이 한 뭉텅이쯤 날아간 터라 의식을 못 했었다. 권윤조가 하려다 만 말이 뭐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 * *
중간고사가 끝났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하나둘씩 동방에 모였다. 준영이 동방에 제일 먼저 도착했고, 다음으로 태정, 석경 순이었다. 그리고 권윤조가 넷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동방에 들어왔다.
“권윤조, 시험 잘 봤냐?”
준영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냥 뭐.”
권윤조도 건성으로 대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픈북이었다며. 책은 뭐 한다고 가져갔어. 무겁기만 했을 텐데.”
“응, 책 펴 놔도 모르겠더라. 넌 잘 봤냐?”
“문제를 아주 더럽게 복잡하게도 냈더라고. 그래서 풀이 과정도 더럽게 복잡하게 써놨어. 아마 채점하느라 고생 좀 할 거다.”
“고생을 왜 해. 그냥 F 줘버리면 간단할 텐데.”
심드렁하게 대꾸한 권윤조는 곧장 소파로 다가왔고 석경은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둘 사이에 간단한 문답이 오갔고 권윤조는 자연스럽게 석경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진동 울리는데 안 받아도 돼?”
권윤조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게 분명한 휴대폰 진동을 알려주자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석경의 손을 쓱 잡아당겨 제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석경아, 재워 줘. 토닥토닥해 줘.”
“자려고? 밥 먹으러 가야지.”
“5분만 잘게.”
“야, 권윤조. 거기 누워 있지 마. 석경이 무릎베개 네가 전세 냈냐?”
준영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데도 권윤조는 오히려 반색을 했다.
“뭐야, 전세 내도 되는 거였어? 석경아, 나 전세 내도 돼?”
“되겠냐.”
“아쉽다.”
“무거워, 저리 비켜.”
“석경아, 밥 먹고 우리 영화 보러 가자. 나 영화표 두 장 생겼어.”
비키라고 하자 권윤조는 귀신같이 말을 돌렸다.
“우리 둘만? 애들은?”
“영화표가 두 장뿐이라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준영이 두 사람이 있는 쪽을 흘겨보며 한 차례 눈치를 줬다. 여기 동방에 너희 둘만 있는 거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시험 끝나면 다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는데 이수현만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없는 이수현은 몰라도 여기 있는 준영과 태정은 챙겨야 도리일 것 같았다.
“애들한테 물어봐서 같이 가자.”
“나는 감.”
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고 휴대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태정도 액정에 눈을 박은 채로 말했다. ‘나도.’
“공짜표 두 장은 잘생긴 사람이 하나씩 갖기로 하자.”
준영이 손에서 휴대폰까지 내려놓고 의견을 내자 권윤조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누구 맘대로?”
“어차피 그거 공짜 표라며. 일단은 내가 잘생겼으니까 한 장 가질게.”
“그니까 누구 맘대로?”
“아, 그럼 권윤조 너도 잘생긴 사람으로 쳐줄게. 네가 가져온 표니까. 뭐 할 수 없지.”
“누가 공짜 표래?”
“공짜 표 아니야?”
“내 카드 긁어서 산 것도 공짜냐?”
“아, 네가 산 거야? 근데 그걸 생겼다고 표현하냐?”
“김준영, 너 들으라고 한 표현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씹, 죽었네.’ 박태정이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 보면 모르겠냐. 쟤 이석경한테 개수작 부린 거잖아. 공짜 영화표가 생겼는데, 레스토랑 기프티콘을 받았는데, 뮤지컬 초대권을 오다 주웠는데, 너무 뻔해서 하품이 다 난다.”
“권윤조가 왜 석경이한테 개수작을 부려?”
“몰라. 심심한가 보지.”
“별…… 씨발.”
권윤조를 보는 준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우리 석경이가 너 심심할 때 갖고 노는 장난감이냐? 너 우리 석경이 보면서 눈웃음치는 것도 존나 마음에 안 들었어.”
준영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큰소리로 꺙꺙대거나 말거나 권윤조는 석경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석경아, 오늘은 안 되겠다. 영화는 내일 보러 가자. 저것들 따돌리고 우리 둘이서만 가는 거야.’
“이수현이 늦네.”
석경은 못 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개수작이니 뭐니 오해하기 딱 좋은 태정의 말들 때문에 안 그래도 정신이 사나웠던 터라 권윤조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석경아, 넌 왜 이수현만 챙겨? 네가 걔한테 왜 밥을 사 주는지 난 이해가 안 가.”
“이수현이 나를 챙겨 주는 거지. 과제에 노트 필기에 족보까지 내가 걔한테 받은 도움이 얼만데.”
“그럼 앞으로 네 과제랑 노트 필기 내가 다 해줄게.”
“괜찮은데…….”
“아냐, 석경아. 나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너 좀 그런 거 있어. 보호 본능 자극하는 거. 특히 너 술 먹은 다음날 숙취로 골골 거리는 모습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데. 그때는 정말 너한테 뭐든 다 해 주고 싶어.”
얘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지껄이는 걸까. 기가 찬 석경을 대신해서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준영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권윤조 뭔데 오늘도 이렇게 하찮아? 식전에 짜증 나게 왜 저러는데.”
“권윤조 하찮아진 거 하루 이틀이냐. 적응할 때 됐잖아. 야, 권윤조. 최승희가 너 연락 안 된다고 나한테 문자 보냈다. 어디냐고 물어보는데?”
태정의 말에도 권윤조는 묵묵부답이었다.
“씨이, 그냥 내가 알아서 대답한다?”
태정은 한동안 권윤조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석경은 어느새 닫혀 버린 권윤조의 눈꺼풀과 눈 밑에 짙은 그림자를 만든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 최승희.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첼로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던 긴 생머리의 빼어난 미인. 권윤조와 거의 평생을 함께한 소꿉친구인데 여친은 아니고 좀 복잡한 관계의 여자애.
똑똑. 그렇게 5분쯤 지났을 무렵 조심스럽게 동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동 얼음이 되어 서로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 무슨 소리야?”
“노크 소리 아냐?”
“노크? 그게 뭔데?”
“이수현 왔나? 동방 들어오면서 왜 예의 없게 노크를 하고 난리야?”
“걔가 원래 예의가 없잖아.”
준영과 태정의 혼란 가득한 대화가 오고 가는 와중에 다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결국 문 쪽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태정이 문을 열었다.
“어? 최승희?”
“태정이 오랜만. 윤조 여기 있지?”
안으로 들어온 최승희가 가늘고 긴 목을 쭉 빼고 동방 안을 살폈다. 이윽고 석경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권윤조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권윤조는 최승희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발소리까지 전부 다 듣고 있었을 텐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게다가 최승희는 한술 더 떠서 그런 권윤조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눈길을 받는 당사자가 시선을 차단하고 있으니 그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석경의 입장이 슬슬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권윤조.”
결국 권윤조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석경이었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린 권윤조가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석경을 바라봤다.
“응? 석경아, 왜?”
지금 나한테 의문을 느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눈 감고 있었다고 귀까지 안 들리는 건 아니잖아. 누가 왔는지 무슨 상황인지 너도 다 알잖아.
“일어나 봐.”
“왜에.”
왜냐고 자꾸 묻는데도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전에도 최승희 일로 오지랖을 부렸다가 제대로 선 긋기를 당한 터라 더욱 그랬다. 그때와는 엄연히 다른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싫은 소리라도 건너올까 봐 소심해졌다.
“……친구 왔잖아.”
석경은 최승희가 서 있는 쪽으로 눈짓을 했다. 권윤조는 일어날 생각도 않고 그대로 누운 채로 눈만 최승희 쪽으로 돌렸다. 오, 놀란 목소리로 운을 떼고는 이내 반갑다는 듯 웃어 보이는 표정이, 감쪽같았다.
“최승희,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러게. 내가 여기 왜 있을까. 맞혀볼래?”
“하하, 길이라도 잃은 거야?”
“너 만나러 왔지. 연락이 안 돼서.”
“왜? 나한테 볼일 있어?”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야?”
“응.”
권윤조는 내내 웃는 얼굴로 최승희를 상대했다. 최승희도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눈을 굴리던 석경은 마찬가지로 눈을 굴리던 태정과 눈이 마주쳤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묻는 눈빛을 보내자 태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승희야, 여기 앉아. 우리 좀 이따 밥 먹으러 갈 건데. 넌 밥 먹었어?”
“난 윤조랑 먹으려고.”
최승희가 권윤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권윤조는 곤란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미안해서 어쩌냐. 난 친구들이랑 먹기로 약속해서.”
“윤조야, 나 너랑 밥 먹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가라고?”
“그냥 가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 가기 싫으면 안 가고 계속 여기 있어도 돼. 편하게 있어. 난 애들이랑 밥 먹으러 나갈게.”
“그러지 말고 나도 데려가지 그러니.”
둘 다 하나같이 생글생글 웃고 난리가 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인지 하드한 분위기인지 헷갈렸다. 왜 웃고 있는데 무섭지. 석경은 한기를 느끼고 손으로 팔뚝을 쓸었다. 분명 겨울이 지났는데 다시 겨울이 온 것 같았다. 기승전결을 열 바퀴쯤 돈 듯한 수많은 사연이 둘 사이에서 느껴졌다. 석경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남의 다리를 멋대로 소품으로 만들어놓고 아주 지들끼리 영화를 찍고 있네. 허벅지에도 피가 슬슬 안 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분위기에서 도저히 끼어들 용기가 없어서 눈치껏 꾹 참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수현이 들어왔다. ‘아, 배고파 죽겠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 가장 늦게 온 주제에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은 이수현이 낯선 인물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누구, 셔요?”
답지 않게 얼빠진 소리를 내는 이수현을 보고 석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경의 작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최승희는 이수현에게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최승희를 소개해 주지도 않았다. 석경과 준영은 최승희를 오늘 처음 대면한 터라 그럴 자격이 안 되어 입을 다물었고, 태정은 딴청을 피우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모든 기대가 권윤조에게 쏠렸다. 권윤조가 드디어 몸을 일으켜 앉아 최승희를 소개했다.
“박태정 친구야.”
태정에게 꽂혔던 이수현의 시선이 곧 최승희에게로 옮겨갔다.
“아, 박태정 친구분이셨구나. 반가워요. 저는 박태정이랑 같은 과 동기 이수현이라고 해요.”
“네, 반가워요. 근데 저 태정이 친구가 맞긴 한데, 아무래도 제가 누군지 다시 소개해야 할 것 같네요.”
“네?”
“저는 최승희라고 해요. 윤조랑 약혼한 사이구요.”
“…….”
“…….”
“…….”
“…….”
“와아, 씹.”
최승희의 발언이 빚어낸 숨 막히는 정적을 깨트린 것은 준영의 격렬한 반응이었다. 때아닌 욕설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준영은 저도 놀랐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냉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준영이 당황해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때 석경은 속으로 준영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고맙다, 준영아. 너 아니었으면 내가 제일 머저리 같은 반응을 보일 뻔했지 뭐냐.
겨우 정신을 차린 준영은 ‘죄송합니다’라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사과를 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저, 약혼이라니 축하드립니다. 권윤조, 축하해?”
야. 이래도 권윤조 계속 좋아할래? 알 수 없는 존재가 석경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약혼자의 존재는 확실히 석경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계속 좋아해야지 어쩌겠어, 라고 속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도덕적인 문제가 크게 차지하는 터라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약혼자도 있다는데 어떻게 그래. 아이고, 빡세다. 뭐가 이렇게 빡세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석경은 짝사랑을 접는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각오도 없이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랐을 뿐이다. 그래, 어쩌면 최승희의 약혼 발표가 저를 도운 것이다. 이상하게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 기를 쓰고 삽질할 필요도 없겠구나. 그러나 후련한 것과는 별개로 당장 마음을 끊어낼 수는 없어서 또다시 숨이 턱턱 막혀왔다.
“네, 고마워요.”
준영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최승희의 시선이 이수현에게로 옮겨갔다. 경계하는 동시에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이수현의 반응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수현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약혼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느낌이었다. 이수현의 현재 심경을 낱낱이 캐내려는 듯 계속 눈을 떼지 않던 최승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때요. 보시기에 윤조랑 저, 어떤 것 같아요?”
“뭐가요?”
이수현도 지지 않는 눈빛으로 최승희를 마주 봤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최승희.”
소파에서 일어난 권윤조가 최승희의 팔을 붙잡았다. 시종일관 생글거리던 권윤조는 약혼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웃음을 싹 지운 채였다. 이수현은 사나운 눈빛으로 권윤조를 노려봤고, 권윤조는 분노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감해 보이는 굳은 눈으로 최승희를 내려다봤으며, 최승희는 이수현을 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뾰족한 삼각형이 되었다. 석경은 물론 삼각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와.”
최승희는 권윤조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동방을 나갔다.
동방에 남은 사람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권윤조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를 열심히 하는 도중에 당사자가 들이닥치기라도 할까 봐 말을 아끼는 듯했다. 물론 석경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지 오래라 딱히 아낄 말도 없었다.
입조심을 하며 몸을 사린 보람이 있었다. 권윤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동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동방을 다시 나가야 했다. ‘권윤조,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이번에는 이수현이 권윤조의 팔을 붙잡고 동방을 나간 것이다.
“뭐야, 2연타로 대가리 깨진다. 둘이 진짜 썸 탄 거야? 이수현 표정 살벌한 거 봤냐? 약혼도 했으면서 이수현이랑 썸까지 탄 거야? 권윤조 이제 보니까 어마어마한 개새끼네!”
끝내 흥분을 가누지 못한 준영은 거침이 없어졌다.
“야, 그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개새끼 아니고 쌍놈.”
“참, 그렇지. 어마어마한 쌍놈이네!”
“그리고 윤조, 이수현이랑은 뭐 별거 없지 않았냐?”
잔뜩 흥분한 준영과 달리 태정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뭘 자꾸만 정정하고 나섰다.
“뭐가 없었는데 저런다고? 내가 보기엔 입장 정리하려고 데리고 나간 것 같은데.”
준영은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쩐 일인지 석경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그리고 난 우리 석경이가 이수현한테 밀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순서가 석경이가 먼저 아냐? 이석경! 너 왜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 권윤조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나갔어야지. 이수현보다 먼저!”
“준영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석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쟤가 왜 저러지. 나는 삼각형도 아닌데. 애초에 이길 마음도 없었는데 져버린 기분이라 얼떨떨했다. 무엇보다 준영이 생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 같지가 않아서 불안했다. 그렇다고 과민하게 반응할 수도 없고, 웃어넘기자니 찜찜하고.
“석경아, 우리 오늘 술 마시자. 약혼자는커녕 여친도 없는 우리는 술이나 마셔야지 않겠냐.”
“너, 아주 신났구나?”
석경은 결국 웃어버렸다. 충격받은 석경을 지탱하는 건 8할이 준영의 깐족이었다. 남은 2할은 오늘 마실 술이겠지.
“근데 박태정. 너는 알고 있었어?”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준영이 태정에게 물었다.
“약혼한 건 몰랐어. 근데 윤조네 집이 평범한 집안은 아니니까 결혼을 한다면 상대가 최승희겠구나 짐작은 하고 있었지.”
“평범한 집안이 아니면, 뭐 재벌이라도 되냐?”
“어.”
“와씨, 그럼 권윤조 경영학 같은 거 전공해야하는 거 아냐? 기계에는 왜 왔대?”
“권윤조 막내야. 위로 형이랑 누나도 많고. 게다가 그 형이랑 누나가 경영권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 윤조는 평생 이쁨 받는 막내로 살겠대.”
권윤조가 재벌이었구나. 그가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들이 전부 하이엔드 브랜드니 뭐니 하는 얘기를 여자 동기들에게 얼핏 듣기는 했었다. 자취하는 집이나 돈 씀씀이도 예사롭지 않았었고 입이 떡 벌어질 드림카까지. 근데 설마 재벌씩이나 될 줄은 몰랐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깝지만은 않았던 거리가 저만치 확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아까 그 여자분이랑은 정략결혼 같은 거야?”
“정략결혼까지는 아니고 그냥 비슷한 집안끼리 맺어지는 거지.”
“아, 정말? 여자분도 재벌가신가.”
“아니. 아버지가 3선 국회의원.”
“허어, 정략결혼이 아니라 정경유착이었네. 그런 사연이 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 심장 터질 뻔했다고. 그치, 석경아?”
아,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돼. 준영이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부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석경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바지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내려와. 공학관 정문에서 기다릴게.’ 권윤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가자. 권윤조가 공학관 정문으로 내려오래.”
석경은 가방을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이수현은?”
“몰라. 같이 있겠지. 바로 밥 먹으러 갈 건가 봐.”
“아, 이 분위기로 어떻게 밥을 먹어. 차라리 싸움 구경을 제대로 시켜 주든가. 지들끼리만 얘기 홀랑 끝내 놓고 우리는 뭐 어쩌라고.”
준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롭게 신음했다. 식사 분위기를 걱정하기보다 싸움 구경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세 사람은 권윤조의 가방까지 챙겨서 동방을 나왔다. 정문에 도착하자 이수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권윤조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이수현을 찾는 석경의 앞으로 권윤조가 다가왔다.
“뭐 찾아?”
“이수현은?”
순간 권윤조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가 안 됐나. 좋지 않은 표정의 권윤조, 그리고 당연히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수현. 어쩐지 두 사람의 난국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느낌이었다.
권윤조는 석경의 어깨너머를 잠시 바라보더니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석경아, 쟤들은 왜 데리고 왔어?”
“내려오라며.”
“너만 내려오라는 말이었는데.”
“…….”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권윤조가 석경을 지나쳐 태정과 준영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석경이랑 단둘이 얘기 좀 할게.”
양해를 구하는 권윤조의 목소리에 이어서 준영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 우리는 들으면 안 되는 얘기냐?”
“응. 안 되는 얘기야.”
“서운하다. 힌트라도 줘.”
“둘이 밥 먹어. 너네 어차피 우리랑 겸상하기 싫어했잖아.”
“네가 말하는 ‘우리’가 설마 석경이랑 너냐? 나 허락 못 해. 석경이 이쪽으로 넘겨. 우리 석경이 할래.”
크게 내쉬는 한숨소리는 권윤조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은 대화의 수준에 회의를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대꾸는 석경의 추측을 뒤집었다.
“못 넘겨.”
“어쭈? 못 넘겨? 그럼 들고 튀지 뭐.”
“내가 못 넘기겠다는데 네가 감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와아, 참나. 너 사람 웃길 줄도 아냐?”
아니, 왜 권윤조 너까지 그러고 있어. 둘 중 하나라도 말리려고 석경이 걸음을 뗀 순간 권윤조가 태정을 보며 말했다.
“태정아, 김준영 좀 데려가라.”
“잠깐만, 박태정. 쪼옴! 알았으니까 놔 봐.”
물고 늘어지던 준영의 허락이 겨우 떨어졌다. 아니, 태정에게 붙들려 갔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그런 연유로 석경은 애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 대신에 학교 앞의 카페에서 권윤조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석경은 마치 낯선 곳에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긴장했다.
권윤조는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우수에 젖은 얼굴이었다. 권윤조에게도 고민이랄 게 있나. 있겠지. 동방에서 목도했던 피 튀기는 삼각형은 예삿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삼각형이 그를 이토록 우수에 젖게 만든 건가. 권윤조의 고뇌를 대면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순간이 석경에게 녹록지만은 않았다.
“석경아, 아까 최승희가 한 말…….”
“…….”
“아, 최승희가 누구냐면 아까 걔 이름이 최승희거든.”
석경은 설핏 구겨진 잘생긴 미간과 머리를 쓸어 넘기는 기다란 손가락에 재차 반한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응. 알고 있어.”
“나 걔랑 약혼한 거 아니야.”
“어?”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얘기가 오고 가긴 했는데 정식으로 약혼한 적 없어.”
“…….”
“네가 오해하는 거 싫어.”
“……내가 오해하는 게 싫다고?”
“그래, 석경아. 네가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석경은 나름대로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교적 담담했고, 준영의 깐족에 정신이 산만해진 덕분에 크게 충격받고 상처받을 틈도 없었다. 짝사랑을 접는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그럭저럭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권윤조가 몰래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걸린 사람처럼 해명하는 모습을 보니 견딜 수가 없어졌다. 배신감인지 분노인지 서러움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온몸에 핏줄이란 핏줄이 죄다 화끈거렸다.
석경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격분을 가라앉혔다. 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실제로 석경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권윤조와 자신의 관계는 의외로 명확했다. 권윤조를 짝사랑하는 이석경. 그거 하나로 설명이 되는 관계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애매해졌다. 왜냐하면 권윤조가 알 수 없는 해명을 저에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막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그런 해명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 해명을 들으려면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고. 너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명분이 없고, 나는 너의 해명을 들을 자격이 없는데.
“저기…….”
권윤조는 이수현에게도 같은 해명을 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석경은 더욱 참을 수 없어졌다.
“말해, 석경아.”
“이수현은…… 괜찮아?”
석경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저한 끝에 질문을 내뱉었다. 이수현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살필 때가 아닌데. 뜬금없는 질문임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문득 궁금했던 것이다. 저랑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폭탄을 맞은 이수현에게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권윤조의 해명을 듣고 이수현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권윤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예민해진 그의 눈빛에서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는 것을 석경은 깨달았다.
“석경아, 너는.”
“…….”
“이수현이 그렇게 걱정돼?”
“…….”
“왜? 내가 걔한테 상처라도 준 것 같아서?”
석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권윤조는 다시 석경의 이름을 불렀다.
“석경아.”
“응.”
“너 우리 과에서 내 별명이 뭔지 알아?”
“……어? 말해도 돼?”
“알고 있으면 말해.”
“……어마어마한 쌍놈?”
권윤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청포도 에이드를 한 모금 들이켠 권윤조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래서 내가 진짜로 쌍놈일까 봐 이수현이 걱정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로 쌍놈일까 봐 내 미래가 걱정돼. 그러나 석경은 속마음을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최승희랑 약혼한 적 없다는 말을 나한테 왜 하는 건데. 내가 오해하는 게 싫다는 말은 왜 하는데. 왜 나한테 너를 쌍놈이라고 생각할 빌미를 주는 건데. 도대체 왜 가만있는 나를 좆같은 삼각형으로 만드는 건데.
“그런 게 아니면?”
그만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지만 석경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소용돌이가 진정되지도 않은 상태로 말을 했다가 그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지도 모르는데 제멋대로 입술이 열렸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것처럼 분노를 품은 채로 직진하기 시작했다.
“권윤조, 나는…… 이해가 안 가.”
“어떤 게? 말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좋은 일이고 축하받을 일이잖아.”
“…….”
“너랑 그 여자분 잘 어울려. 네가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이상했다.
“…….”
“언젠가는 할 거잖아. 약혼이든 결혼이든.”
“…….”
“그래도 내가 오해하면 안 되는 거야?”
“…….”
“왜 나한테 약혼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 건데. 넌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어.”
“석경아.”
권윤조의 온도가 살갗을 얼릴 것처럼 차가워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 당장이라도 석경의 손목을 잡아채서 깊숙한 늪으로 함께 빨려 들어갈 듯 지독하게 가라앉은 무표정이었다. 반면 석경의 목구멍에서 들끓던 불길은 더욱 뜨거워졌다.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
“네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그 말을 하겠다고 나를 따로 불러낸 거야? 내가 도대체 뭐라고.”
누가 이상한 건지 석경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그때그때 소화되지 못하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의문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고 말았다.
권윤조의 눈동자가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러게 왜 그랬어. 넌 나한테 해명을 할 필요가 없었고, 나 역시 너의 해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속 좁은 말들을 쏟아낼 일도 없었을 텐데.
“석경아,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네가 나한테 얼마나…….”
“…….”
“얼마나 특별한데.”
그 순간 석경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권윤조의 표정이, 목소리가, 분위기가, 공기가, 모든 것들이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권윤조에게 마음을 들킨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권윤조를 짝사랑하는 이석경’은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었다. 눈치챘겠지. 티가 안 날 리가 없었겠지.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렸다. 적어도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석경아,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와 같은 말은 듣지 않으리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비밀을 아는 권윤조가 둘 사이를 애매한 관계로 만들고 있다는 거였다. 저와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저와 사귈 것도 아니면서 최승희와의 일을 해명했다. 거기까지는 자기가 해 줄 수 있다는 듯이 선심을 베푼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
“아니다. 내가 네 생각까지 어쩔 수는 없는 거니까, 그냥 나를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대해 줘.”
“네가 다른 사람이랑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이 대해.”
권윤조는 뻑뻑해진 눈동자를 달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긴 손가락이 감은 눈두덩을 덮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눈을 뜨고, 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석경은 하나를 더 깨달았다. 저를 향한 권윤조의 마음이, 자신이 품은 마음과 제법 비슷하다는 것을. 크기는 다를지언정 색깔은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
“말했잖아, 석경아. 너는 특별하다고.”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단다. 그래서 남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석경의 귀에는 그런 말들이 하나같이 묘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 그 정도의 감정일 뿐이라고. 이 이상 관계를 진전시키지 말고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자는 말로 들렸다.
이게 그건가. 저 갖기는 애매하고 남에게 주기는 싫은, 그런 거?
여기서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면 어떨까. 지금 당장 절 갖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저를 못 볼 거라고 조르고 협박하면 억지로 연애까지는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석경은 영악하게도 저라는 존재가 권윤조에게 그 정도 가치는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더 최악이었다. 그게 무슨 연애야. 연애라는 말로 포장된 애매한 관계지.
애매한 관계는 친구와 연인의 중간에 위치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런 중립적이고 보기 좋은 데에 있지 않았다. 전혀 동떨어지고 고립된, 외로움과 싸워야 할, 모래알만 한 희망과 바위만 한 절망을 번갈아가며 느껴야 할, 사방이 이끼뿐인 어둡고 축축한 데에 있었다.
“특별할 이유가 뭔데. 아, 내가 오메가라서 그런 거야?”
마지막 발악처럼 셀 수도 없이 속으로만 삼켰던 의혹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냈다. 서로가 애매한 관계라는 걸 깨닫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해해 버린 마당에야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는데 제 입으로 못되게 말해 놓고 지레 어깨가 움찔 떨렸다. 겨우 두 문장을 말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석경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 반, 후회 반의 심정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노려봤다.
“이석경.”
권윤조가 분노를 짓씹으며 성까지 꽉꽉 채워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라도 석경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는 듯이. 하지만 석경의 사고를 정지시킨 것은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시야에 끼어든 최승희의 모습이었다.
석경은 반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최승희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들었을까? 그러나 최승희는 석경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권윤조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오메가라는 말을 들었다면 석경을 새삼 눈여겨볼 만도 한데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다행히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윤조야, 또 보네?”
“……너 여기서 뭐 해?”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나 그렇게 매몰차게 쫓아내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밥은 먹었어?”
“…….”
“가 볼게. 친구가 기다리거든. 나중에 연락할게, 윤조야.”
최승희는 석경에게도 눈인사를 건네고 홀연히 사라졌다. 권윤조는 복잡한 눈길로 최승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고, 석경은 그런 권윤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이 끝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이후로는 정적이었다. 둘 사이에는 나눌 말이 없거나 반대로 너무나도 많아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후가 빨갛게 깊어가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자고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석경이었다.
카페를 나와 권윤조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도중 준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김준영씨 : 둘이 얘기 끝났어? 밥은 먹었고?]
[김준영씨 : 지금 태정이랑 같이 있는데 올래?]
권윤조의 약혼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준영이 품은 의심에 불을 붙이기도 싫었다. 어디야? 지금 갈게. 석경은 메시지를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워버렸다. 웬만하면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난 됐어. 시험 끝났더니 피곤하다]
결국 거절의 메시지를 보낸 석경은 자취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