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가방이 무겁다. 아니, 사실은 마음이 무겁다. 석경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가만 보니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제일 무거웠다. 공학관 건물이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 순간부터 현저히 느려진 발걸음이 멎을 듯 말 듯 천천히 이어졌다.
금요일 늦은 새벽, 2주나 일찍 찾아와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던 히트사이클은 주말을 보내는 동안 서서히 안정되었다.
컨디션을 핑계로 수업을 째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너무나 정상이었다. 신열이 물러간 몸은 한결 좋아졌다.
석경은 공학관을 바라보며 수업을 쨀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았다. 가방이 무거워서? 마음이 무거워서? 어느 것이 더 그럴듯한 핑계로 보일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학교를 자퇴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부딪쳐야 할 상황임을 잘 알기에 한숨을 내쉬며 공학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전 토요일, 석경은 권윤조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석경은 숨을 죽이고 바깥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기척이 없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바람일 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석경은 샤워 가운을 입고 있는 제 모습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닫힌 방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일단 저 문을 열고 나가서 드레스룸에 가서 옷을 입고 그다음엔……. 그런데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권윤조를 마주칠 텐데. 석경은 슬그머니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단념했다. 참, 여기 5층이지. 5층에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권윤조에게 더는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죽더라도 권윤조 집 창문에서 떨어져 죽어서는 안 된다. 간밤에 잔뜩 발정 난 채로 달려든 것도 미안한데. 심지어 같은 남자가 안아 달라 애원하는 더러운 꼴을 보게 했지. 아무튼 여러모로 평생을 사죄해도 모자랄 만큼 미안한 상황에서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석경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독한 열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흐릿한 잔상만으로도 워낙에 충격적이라 그저 이 세상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그 전에 일단 권윤조 집에서 사라져야겠지.
석경은 마음을 굳게 먹고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데 문고리를 잡는 순간 입이 말랐다. 이 문을 열고 권윤조를 마주할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아연 하얘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서 숨을 멈추고 온몸이 귀가 된 것처럼 바깥의 소리에 집중했다. 어? 지금 마침, 밖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길게 생각할 여유 따위 없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생각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실어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주방에 서 있던 권윤조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
“…….”
석경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도로 방문을 세게 닫아 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놀란 듯 약간 커진 권윤조의 눈과 입술이 보였다. 잠시 후 방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석경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창문을 응시했다. 마음은 벌써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땅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갔다. 반대쪽에서 권윤조가 힘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버텨 볼까 하는 고민을 할 틈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권윤조의 얼굴이 보였다.
“석경아, 일어났어?”
“어, 저기…….”
“응?”
“바람 불어서 세게 닫힌 거야.”
“어?”
“문, 내가 세게 닫은 게 아니라.”
“그래.”
묘한 표정의 권윤조가 목뒤를 매만지며 짧게 대꾸했다.
“…….”
“석경아, 컨디션은 좀 어때?”
진심 어린 권윤조의 염려가 석경의 귀에는 발정 난 건 좀 어떠냐는 말로 들렸다. 석경은 귀 끝까지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다행이다. 얼른 밥 먹자.”
“나 옷 갈아입고.”
도망치듯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바지를 입으려는데 뭔가 허전해서 멈칫했다. 어제 입고 온 속옷이 욕조 안에서 흠뻑 젖었고, 그 젖은 속옷을 권윤조가 침대 위에서 벗겼고, 벗긴 그 속옷의 행방을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 버거워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허전한 하반신에 바지를 꿰어 입고 상의도 후다닥 입고 재빨리 드레스룸을 나왔다. 상황을 일일이 곱씹으면서 뒷일을 고민할 여유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최악의 전개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촉 같은 거였다.
“밥 먹자.”
문 앞에서 권윤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곧바로 현관으로 직행하려던 석경은 크게 당황했지만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
“미역국 끓였어.”
“아냐, 나, 나는 괜찮아. 배가 안 고파.”
“그래도 같이 먹어 주라. 어제 내 생일이었잖아.”
그랬지. 권윤조 생일이었지. 얘 생일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석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권윤조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떨구어진 고개가 더욱 밑으로 향했다.
“……미안해.”
“뭐가?”
“전부 다.”
말없이 가만히 제 손을 잡아 오는 온기에 석경은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쳤다. 각자 다른 의미로 놀란 두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석경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저에게 뿌리쳐진 권윤조의 무색한 손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굳어 있다가 현관으로 뛰어갔다.
“석경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석경아, 잠깐!”
“미안해! 내 속옷은 버려도 돼!”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석경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미친 사람처럼 집까지 뛰어온 석경은 침대에 몸을 던져 거친 숨을 헐떡였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불안한 눈으로 액정을 보자 예상대로 권윤조였다. 부재중 전화 일곱 개가 쌓일 때까지 무시하고 받지 않던 석경은 하는 수 없이 여덟 번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
- 석경아.
“…….”
- 집이야?
“……응.”
- ……그래.
“…….”
- 집에 잘 들어갔는지 걱정돼서 전화한 건데, 확인했으니까 끊을게.
일곱 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은 일은 끝내 묻어두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권윤조는 전화를 끊었다. 권윤조는 저를 향해 무례하게 발정한 남자에게 여전히 친절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탓에 두피가 아팠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초콜릿 상자를 꺼내 책상 겸용으로 쓰는 식탁에 앉았다. 석경은 초콜릿을 가만히 노려봤다. 화이트 데이에 권윤조에게 받은 것이었다. 초콜릿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초콜릿을 하나씩 먹어치우면서 석경은 앞으로를, 그러니까 권윤조와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의미가 있나 싶었다. 저는 그저 죄인일 뿐, 둘의 관계를 결정하는 열쇠는 권윤조가 쥐고 있었다. 권윤조가 저를 경멸하든 용서하든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한데 그 난리를 치르고도 밥을 먹고 가라고 말하던 권윤조의 얼굴에서 경멸 한 조각 발견할 수 없었던 건 어떤 까닭일까. 눈빛, 목소리, 몸짓. 경멸이 자리해야 할 부분에서 석경을 향한 연민만이 흘러넘쳤다.
과분한 연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받지 않는 전화를 여덟 번이나 걸었던 권윤조는 저를 이미 용서한 것일까. 사죄한 적도 없는데 벌써 용서를 받고 말았다.
과분한 인연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과분해서, 그 인연을 끝내는 일은 이미 석경의 손을 떠나 있는 듯했다. 이제 저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석경은 부끄러운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남들과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특별하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권윤조의 호의가 연민이라는 것을.
물론 순도 백 퍼센트의 연민만은 아닐 것이다. 비밀 함구에 대한 책임감과 알파로서 오메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착한 다정함, 약간의 호기심, 약간의 흥미. 따로 떼어낼 수 없이 얽혀있는 감정의 덩어리일 것이다.
한데 장막에 가려진 권윤조의 감정을 멋대로 해석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걸 해석하느니 차라리 고백을 했다가 시원하게 차이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그런 패기는 찰나였다. 권윤조는 저를 시원하게 차는 것으로 그칠 인물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가지고 있는 연민과 책임감과 의무가 두 배 세 배로 불어나겠지. 자만과도 같은 생각에 스스로 야유를 느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고백은 못 할 짓이었다.
초콜릿 상자가 비었을 무렵 석경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지난 새벽의 일에 대해 권윤조에게 정식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다정한 연민에 기대어 자신의 잘못을 흐지부지 눙치고 싶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에 허덕이며 발작적인 성욕을 드러낸 것뿐이지 제 속마음까지 드러낸 것은 아니니까 권윤조가 원한다면 계속 친구로 지낼 셈이었다.
비록 연민과 책임감과 의무감이 뒤섞인 기묘한 우정일지라도 그가 원한다면 연민이든 동정이든 그가 주는 대로 기꺼이 받을 생각이었다.
주말에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건만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권윤조의 얼굴을 보자마자 석경은 여지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석경아!”
권윤조는 도망치고 싶은 석경의 수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캔커피를 주었다. 석경은 그것을 받으며 겨우 입만 움직여 웃어 보였다.
“……잘 마실게.”
“그리고 이거 네 속옷.”
권윤조가 자못 경건한 얼굴로 건넨 작은 종이 가방을 석경은 폭탄이라도 되는 듯 내려다봤다. 분명 버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소용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버려도 되는데.”
“속옷 귀엽더라. 빨아서 잘 말렸어.”
“……고마워.”
“…….”
“빨아줘서 고맙다는 말이었어. 속옷 귀엽다고 해서 고마운 게 아니라. 그건 하나도 안 고마워.”
귀엽다고 할 게 따로 있지. 무슨 까만색 남자 속옷을. 콧구멍에 힘까지 들어간 채로 주절주절 구차한 말을 늘어놓자 권윤조가 진정하라는 듯 웃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진정이 전혀 안 됐다.
“알았어. 들어가자.”
석경은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권윤조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의아해 하는 눈길에 석경은 손을 뗐다.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석경은 준비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수업 끝나고 나서 할 말 있는데 시간 있어?’ 간단하고 짧은 문장이 목구멍에 턱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꼴사납게 허리를 비틀며 안아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의 달뜬 목소리와 낯선 눈길로 저를 내려다보며 안 된다고 말하던 권윤조의 굳은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석경은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수업 끝나고 나서 시간 있는데 할 말 있어?”
“……?”
살짝 커진 권윤조의 눈에 혼란한 기운이 완연했다. 석경은 조금 늦게 자신이 내뱉은 문장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깨달았다.
사과고 뭐고 그냥 이대로 증발했으면…….
“아, 망했다.”
엉망진창 문장이 제멋대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한탄이 담긴 작은 중얼거림도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석경아.”
권윤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제가 민망하지 않도록 애쓴 결과라는 사실을 석경은 알았다. 눈가를 문지르다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긴 석경은 흩어지려는 이성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수업 끝나고 나서 할 말 있는데 시간 있어?”
“……응.”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석경은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는지도 정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만한 여유까지는 없었다.
* * *
석경은 학교 앞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 2층 창가 쪽 테이블에 권윤조와 마주 앉아 진동 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위태로운 침묵을 깨고 진동 벨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몸체를 흔들어 댔다. 석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진동 벨을 낚아챘다.
“내가! 내가 갔다 올게!”
진동 벨을 한 손에 꼭 쥐고 1층으로 쫓기듯이 내려간 석경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청포도 에이드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권윤조는 석경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걸어오는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여전히. 석경은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빨대를 입에 물고 차가운 커피를 쭉 들이켰다.
해야 할 말은 다 정해 놨으니 입만 열면 되는데 석경은 자신의 입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까 강의실 앞에서의 말실수는 가벼운 트라우마가 되어 석경의 말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권윤조의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도 말문을 막는 데 일조했다.
“석경아, 주말에 뭐 했어?”
목이 바짝바짝 타서 다시 커피를 쭉 빨아들이는데 결국 권윤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 동생, 동생이 집에 놀러 와서.”
권윤조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지난 토요일, 집에 들어오고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동생 재경이 연락도 없이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형, 괜찮아?’ 석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경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석경은 당황한 기색을 가리려고 볼을 쓸며 갑자기 웬일이냐고 물었다. 재경은 대꾸 없이 석경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다가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했다.
“아, 동생이랑 놀았구나. 친동생?”
“응, 고2야. 두 살 어려.”
“귀엽겠다.”
“귀엽긴. 남자야.”
석경이 정색하자 권윤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에 눈을 툭 떨구자 그의 손가락에 감긴 상처밴드가 보였다. 가슴에 결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가락 얼마나 다친 거야? 많이 아프지.”
“이거? 별거 아니야. 안 아파.”
석경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느새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얼음만 남아있었다. 언제 다 마셨지. 더는 귀한 시간 빼앗기 싫은 마음에 석경은 한시라도 빨리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권윤조.”
“응?”
“그날은, 그날 새벽 일은 진심으로 미안해.”
“…….”
“잘 자다가 쫓겨난 준영이랑 박태정한테도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너한테 제일 미안해.”
토요일 밤에 석경은 준영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저는 미처 몰랐던 대강의 사정을 알게 됐다.
그날 새벽, 준영을 흔들어 깨운 권윤조는 지금 당장 태정을 깨워 데리고 나가 달라고 했다. ‘뭔데, 왜?’ 비몽사몽으로 묻자 권윤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석경’이라고만 대답했다. 긴밀한 암호와도 같은 그 대답을 준영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약 있어? 알약 말고 주사.’ 잠이 확 달아나 버린 준영의 물음에 권윤조는 지금 가져오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준영은 깊이 잠든 태정을 깨웠다. ‘야, 불났어! 일어나!’
“네가 미안해할 일 아니야.”
“내가 사과할 처지조차 못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니면, 사과 받아 주라. 내가 미안해, 진짜.”
권윤조는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표정이었다. 석경에게도 고문 같은 시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날 새벽의 일을 사과하는 이 상황에서 권윤조나 저나 자연스럽게 그날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너 나한테 미안해할 짓 안 했어.”
“했어. 내가 너 성……추행한 거잖아.”
“성추행이라니.”
“성추행이…… 맞지.”
“아니야.”
“나 아는 사람도 그런 비슷한 일 당했는데 많이 힘들어했어.”
“그래?”
“응.”
“……얼마나?”
“응?”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는데?”
“…….”
“지금도 힘들대?”
뭐라 대답하면 좋을까. 석경은 깊게 파고드는 권윤조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워서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타인의 고통에 크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저 역시 힘들었음을 표현하는 것인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스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미안해.”
“석경아, 일단 사과는 받을게. 근데 나는 진짜 괜찮고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주기가…….”
“응?”
“그거, 주기 말이야.”
“…….”
“여태까지 정확했어. 거의 하루도 안 틀리고 정확했다고. 근데 이번에는 2주나 일찍 찾아왔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변명을 하자면 그래. 근데 주의를 소홀히 한 건 어쨌든 내 잘못이니까.”
권윤조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석경을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에 놀란 것도 같은데 무엇이 권윤조를 놀라게 했는지 석경은 짐작할 수 없었다.
“주기가 매번 정확했다고?”
권윤조가 한참만에 꺼낸 질문에는 의아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응, 왜?”
“석경아, 너…….”
“…….”
“알파 손 탄 적 없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후벼 팔 듯 집요한 시선에 석경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무엇보다 권윤조가 저에게 던진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손을 타다니?”
되묻고 나서야 혹시 어떤 성적인 의미인가 싶어서 석경의 마음에 까슬한 것들이 일어났다. 알파랑 붙어먹은 적 없었느냐 이 뜻인가? 피해의식이 고개를 들며 심정이 뒤틀리고 이해심이 각박해지려 했다. 권윤조는 어느덧 삐딱해진 시선의 석경을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주위에 알파 없었어? 친구나 지인.”
고등학교 때 알파 친구는 있었지만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부터는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석경은 뒤늦게 권윤조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알파와의 접촉이 오메가의 히트사이클 주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었다.
“너만큼 가깝게 지낸 알파는 없었어.”
“나 말고는 가깝게 지낸 알파가 없었다고?”
권윤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표정은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석경은 그의 얼굴에 번지는 예민한 기운을 살피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권윤조의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을 연달아 톡톡 두드렸다. 초조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쾌해 보이는 손짓이었다. 이마에 푸른 힘줄까지 세워 가며 입술에 꾸욱 힘을 준 권윤조는 조용히 입꼬리를 내려 웃었다.
마지막으로 날숨을 깊게 내뱉으며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입을 열었다.
“석경아, 아무래도 사과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내 잘못이니까.”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권윤조는 그날 새벽의 일은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한 번 더 단호하게 못 박았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내가 너를 만져서 그래.”
“만져? 나를?”
결코 평범하게는 들리지 않는 이상야릇한 표현에 일단 되묻고 봤다.
“응.”
“언제? 네가 나를 언제 만졌다고.”
그날 밤 자는 사이에 저를 만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디를? 제 몸 가운데 그가 만질 만한 곳이 있던가. 설령 있다고 해도 저를 만질 이유가 대체 뭔가. 머리가 복잡했다.
“너랑 나랑 붙어 다닌 지 벌써 한 달이잖아.”
“응.”
“한 달이면 여기저기 꽤 만졌지. 손도 만지고 어깨도 만지고 허리도 만지고 엉덩이도 만지고.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엉덩이는 안 만지지 않았냐.”
“그래서 주기가 앞당겨졌을 수도 있어.”
“진짜 엉덩이는 안 만졌는데. 암튼 그 정도로 2주나 앞당겨진다고?”
그때 아카시아 향이 한층 짙어지면서 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석경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비단 신체적 접촉만이 아니라 알파의 페로몬에 오랜 기간 노출되어 주기가 흐트러졌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넌 여태 알파랑 가깝게 지낸 적이 없었잖아. 그건 정말 잘했어. 여하튼 알파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는 너를 내가 자극한 거야.”
“…….”
알파는 오메가와는 달리 억제제 없이도 페로몬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데, 권윤조는 저와 있을 때 페로몬을 억누르는 편이었다. 그런 보이지 않는 면에서조차도 끊임없이 저를 배려해 준 것이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권윤조는 서로의 입장을 역전시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층 밝아진 낯빛으로 사과했다. 그의 눈은 더는 고문당하는 듯한 눈빛이 아니었다. 제 잘못임을 주장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빛나는 눈빛이었다.
“아니, 난 괜찮은데…….”
알파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는데 굳이 다른 이유를 찾기도 뭐했다. 이번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을 테니 다음에는 주기가 앞당겨지는 일은 없을 테지. 석경은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석경아, 만약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할 거야?”
“또? 면역이 생기지 않았을까?”
“다른 변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는 덮치지 않겠다는 확답을 듣고 싶은 걸까. 석경은 조금도 삭지 않은 미안한 감정을 안은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민폐라니.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그니까…… 조심하겠다는 말인데.”
“그런 말 듣겠다는 게 아니라.”
“……그럼?”
“내가 지켜 줄게, 석경아.”
지켜 주겠다는 희한한 다짐의 의미를 되물을 새도 없이 권윤조는 말을 이었다.
“다른 알파가 절대 접근 못하게 지켜 줄게.”
“야아, 굳이 안 그래도…….”
“김준영은 베타라서 알파 체향을 못 맡잖아. 그렇지? 석경이 너는 나 아니면 안 돼. 나여야만 해.”
“…….”
“그러니까 항상 내 옆에 있어.”
“…….”
“대답해. 그럴 거지?”
권윤조가 조곤조곤 쏟아내는 말들이 석경은 그저 신기했다. 강압적인 어투가 분명한데 석경에게 선택권이 있는 듯 구는 것이, 그 괴리감이 무섭도록 낯설고 묘했다.
뭐라 대꾸해야 하는데 엉뚱한 생각 따위나 불쑥 치고 들어왔다. 얘가 좀…… 원래 이렇게 섹시했나. 의문과 동시에 아찔하고 두려운 욕구가 은근하게 석경을 치고 지나갔다.
석경은 멍해진 채로 얼떨결에 염치없이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권윤조를 덮친 일로 사죄를 하겠다고 따로 불러낸 마당에 하는 생각이라는 게 고작. 얘가 이렇게 섹시했냐고? 풍월하고 자빠졌다. 상대가 좋게 좋게 나와 주니까 별 속 편한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었다.
“좋아. 석경아, 앞으로 나만 믿어.”
자신만만한 얼굴로 저만 믿으라며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에 석경은 시선을 빼앗겼다. 왜 저렇게 섹시하게 웃지.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욕구에 새롭게 장작이 들어왔다.
“석경아.”
“……어?”
“왜 그런 얼굴로 봐?”
“아니, 그냥.”
도대체 어떤 얼굴이었을까. 제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알게 되는 것도 무서웠고 모르는 채로 있는 것도 무서웠다. 석경은 슬그머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 석경아. 나 러트 오면 네가 도와줄 거지?”
“뭐, 뭘 도와줘?”
“나도 그때 많이 힘들거든. 그래서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권윤조는 웃는 낯으로 뜻밖의 민감한 부탁을 해왔다. 그렇지 참. 얘도 힘들겠구나. 괜한 데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야 도와주고 싶지. 네가 이렇게 섹시한데. 그놈의 섹시……타령인지 풍월인지가 서글펐다. 그에게 갖는 욕구가 터무니없어서 석경은 서글펐다. 앞으로도 숱하게 그런 마음을 가질 테지. 권윤조를 몰래 탐하면서 저란 사람은 과연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을까.
그가 여태 겪었을 러트사이클이 신경 쓰였다. 안정제를 맞고 그럭저럭 고통을 견뎠을까. 아니면 다른 오메가에게 도움을 받았을까. 오메가와 몸을 섞으며 안정을 찾는 그를 상상하자 머리가 핑 돌았다.
“……내가?”
“도와줄 거야?”
그런데 장난기 가득한 요사스러운 표정이 썩 진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뭘 알고 이러는 건가. 진짜 점점, 나를 놀리려 그러네. 석경은 불안한 떨림과 비틀린 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내가 왜?”
“싫어?”
“너도 나 안 도와줬잖아.”
마치 담아 두었던 원망을 터뜨리는 듯한 말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말실수에 입술을 물자 권윤조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날 나한테 많이 서운했구나.”
“누가 그렇대? 그냥 네가 나 안 도와줬으니까 나도 안 도와주겠다는 말이야.”
“우리 석경이 계산 확실하네. 근데 석경아, 혹시 내 페로몬 도움 안 됐어? 내 덕분에 작열통도 많이 사그라들었을 텐데.”
주기가 찾아왔을 때 알파와 오메가는 대개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고열, 호흡곤란, 구토감, 폭발하는 성욕, 작열통이 한꺼번에 혹은 번갈아가면서 찾아온다.
특히 작열통의 고통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어서 한 번 주기를 앓고 나면 석경은 가스 불 근처에도 가기 싫어지곤 했었다. 안정제를 맞는다고 해서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더더욱 공포의 대상이었다.
주기를 겪을 때 반대 형질의 페로몬이 있으면 성욕을 제외한 다른 고통들은 완화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석경은 이번에 권윤조의 페로몬 때문에 다른 때보다 부쩍 성욕을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작열통을 비롯한 고열, 호흡곤란, 구토감 등의 고통은 크게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권윤조의 말이 애초에 그런 의미였다면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그리고 또 있지. 내가 안정제 놔 준 거 기억 못 하는 거야?”
“아…….”
따지고 보니 어디 주사뿐인가. 뻔뻔하게 꿀꺽꿀꺽 빨아 삼킨 그의 혈액도 도움이 많이 됐다. 이 배은망덕을 어찌 할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권윤조의 말이 빨랐다.
“그냥 확 안아 버릴 것을 그랬나.”
툭 내뱉은 농담이, 목소리가, 어쩐지 한없이 건조하게 들렸다. 과한 농담에 움찔 놀라자 피식 웃어 버리고 마는 모양까지. 아주 끝까지 놀리네. 더 상대했다가는 자제하지 못하고 흑역사나 쌓을 게 눈에 훤해서 석경은 기껏해야 말없이 트레이를 들고 일어날 뿐이었다.
“석경아, 같이 가!”
웃음소리가 등에 달라붙었다. 도와준다고 할 걸 그랬다. 바닥까지 보여 줘서 더는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마당에 뭐가 아까워서 지레 자존심을 세웠을까.
* * *
함께 저녁을 먹자는 말을 거절하고 권윤조와 헤어진 석경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2주나 앞당겨진 주기도 신경이 쓰였지만 진짜 신경이 쓰이는 문제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네 시 경의 버스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뒤쪽 빈자리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차창 밖에 눈을 두고 빠르게 바뀌는 거리 풍경을 흘려보냈다. 병원 가는 길에는 늘 ‘기억’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또한 차창 밖의 풍경처럼 흘려보내려 했으나 잘 안 됐다.
고등학교 2학년 10월 모의고사를 사흘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도중 석경은 몸의 이상을 느꼈다. 온몸이 뜨거웠고 시야가 흐릿했다. 배꼽에서부터 번지는 타는 듯한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술 새로 가쁘게 터져 나왔다.
석경은 갑자기 제 몸 상태가 왜 이러는지 원인을 따져볼 여유도 없이 가방을 들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불길했다.
정신없이 집으로 향하던 석경의 발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이 몸으로 집까지 가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석경은 인적이 드문 어둑한 공원에 몸을 숨기는 데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다.
인내심만으로 억누르기에는 버거운, 지독한 성욕이 머리를 쾅쾅 때렸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를 움켜쥐고 고통과도 같은 성욕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었으나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어디서 나는지 모를 청포도 향내와 뒤를 흠뻑 적신 끈적한 액체에 석경은 바르작 몸을 떨며 성기를 움켜쥐는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석경은 동생 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경아…… 혀, 형이 지금…….’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다급한 음성이 건너왔다. 어디냐는 물음이 들려왔지만 석경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어둡고 나무가 많다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다가 학교 근처 공원이라는 말을 운 좋게 뱉었다. 툭 놓쳐버린 휴대폰 속에서 들리는 외침이 잦아들었을 무렵 석경은 축 늘어져 버렸다.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흐릿하게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 누군가 석경의 옷을 거칠게 벗기고 있었다. 교복 셔츠가 무자비하게 젖혀지면서 단추가 뜯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석경은 저항했지만, 상대가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 미약한 손짓이었다. ‘아, 안 돼…….’ 교복 바지를 끌어내리는 흉포한 손길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었으나 곧바로 무릎께까지 휑해졌다. 다시 깜박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자 복부에 가차 없는 주먹이 꽂혔다. 새우처럼 몸을 말고 구역질 섞인 기침을 내뱉는 사이 바지가 완전히 벗겨졌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제 방 침대에서 깨어난 석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대는 어머니와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며 연신 헛기침을 내뱉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재경이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석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절망에 젖어 눈물을 흘리지도 충격에 휩싸인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무표정으로 제 몸을 힐끗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오히려 재경이 더 힘들어했다. 재경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석경을 지켜보다가 처음보다는 덜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일 없었어, 형.’
‘…….’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줬어.’
석경은 아무 일 없었다는 말뜻을 조금 늦게 파악했다.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이구나. ‘다행히’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아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석경은 또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석경아,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하니?’
시종일관 무디다 못해 텅 빈 반응을 보이는 석경의 허깨비 같은 모습에 어머니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흐윽…… 어쩜 좋아.’
‘…….’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려, 석경아.’
‘…….’
‘다 잊어야 돼. 그래야 네가 살아. 알았지?’
어머니는 통곡이 아닌 부서질 듯한 흐느낌으로 당부했다.
‘……네.’
가까스로 내뱉은 대답 뒤로 아버지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쉬어라.’
‘아버지.’
석경은 등을 돌리고 나가는 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사내자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버지. 얻어맞고 온 어린 석경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음날 바로 합기도 학원에 끌고 간 아버지. 오메가의 천박함을 누구보다도 혐오하고 알파의 우월함을 선망하던 아버지. 뉴스로 오메가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사내자식이 오메가로 살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아버지. 오메가라는 형질 자체가 원죄라고 했던 아버지. 비록 알파는 아니지만 베타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강한 사내로 자라나길 바라던 아버지.
‘……죄송해요.’
고개만 돌려 석경을 내려다본 아버지의 싸늘한 눈동자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마치 바퀴벌레를 보면 죽여야 한다고 여기는 조건반사와도 같은 살기였다.
방에 혼자 남겨진 석경은 몸을 웅크린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가 희미해지다가 어느덧 보이지 않게 됐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명문대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런 인생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뿌리째 뽑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은 그런 걸 누릴 자격을 상실해 버렸다고, 평범한 삶에서 탈락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자격. 석경은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자격을 되찾을 수 있을지 궁리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살아야 할 자격을 찾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다 잊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산다고 말했다. 그런데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 *
버스에서 내린 석경은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 번호부터 뽑아 접수를 하고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이석경 님. 2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사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석경을 맞이했다.
“석경 씨, 오랜만이네요. 앉아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왔어요?”
석경은 마지막으로 억제제를 삼킨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두 시간 전쯤이었다.
“저, 억제제가…….”
“네, 억제제가 왜요?”
“잘 안 듣는 것 같아요.”
의사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잘 안 듣는다니. 무슨 말이에요?”
원래 최소 대여섯 시간은 지속되던 억제제의 효과가 며칠 전부터 두세 시간으로 어이없게 줄어버렸다. 석경은 증상을 말하며 요새 술을 자주 마셨다는 이실직고를 덧붙였다.
“혹시 술 때문일까요?”
“음주가 일시적으로 억제제 효과 지속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어요.”
역시 그렇구나. 염려를 덜어내려는 찰나 의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루 온종일 취해있지 않는 이상은 억제제 효과에 그 정도로 간섭할 수는 없어요. 음주를 안 했을 때도 효과가 겨우 두세 시간이었다는 거죠?”
“……네.”
‘겨우’라는 부사에 방점을 찍고 보니 의사의 목소리가 꽤나 심각하게 들렸다. 술이 원인이 아니라고? 그밖에 최근에 일어난 일상의 변화를 떠올리자 대뜸 권윤조의 얼굴부터 어른거렸다.
“제 동기가 알파예요. 입학 이후로 계속 어울려 다녔고요.”
“알파 페로몬도 마찬가지예요. 진한 페로몬에 노출될 때 일시적으로 영향을 받을 뿐이에요. 그 친구와 온종일, 잘 때도 함께 있었나요?”
“아뇨.”
권윤조는 석경과 함께 있을 때, 집중하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수준으로 페로몬을 약하게 조절했다. 따라서 권윤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말하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의사는 굳은 얼굴로 지난 차트를 뒤적거렸다.
“석경 씨.”
“네.”
“열여덟 살에 발현하고 나서 억제제 과다 복용했던 거 말인데요. 석경 씨 그때 거의 반년 가까이 시간마다 억제제 먹었잖아요.”
“네.”
“그때 페로몬을 관장하는 신경계통이 많이 망가졌어요. 그 문제가 점차 나타나는 거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방법이 없어요. 지금으로서는 두세 시간마다 억제제를 챙겨 먹는 수밖에.”
“…….”
억제제 효과가 빨리 사라지면 또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뜻으로 석경은 알아들었다. 하루에 서너 알 정도를 챙겨 먹던 억제제를 예닐곱 알 정도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다 억제제가 아예 듣지 않는 날도 올까. 그런 석경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의사가 말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지속 시간이 여기서 더 단축될 거예요. 문제는 지속 시간이 한 시간 이하까지로 떨어지면 복용을 중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억제제를 안 먹으면 페로몬이 노출되는데요.”
“석경 씨, 미안한데.”
“네?”
“사실 석경 씨 지금 많이 심각한 상황이에요.”
“…….”
석경은 별다른 반응 없이 느리게 숨을 쉬었다.
“복용을 왜 중지해야 하는지 질병을 예로 들어 볼게요. 어떤 질병은 환자에게는 치료제가 되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독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
“마찬가지로 오메가에게 도움이 되는 억제제가 베타에게는 독이에요. 베타는 억제제에, 쉽게 말하자면 거부 반응이 있어서 꾸준히 투약하면 신경이 마비되고 심한 경련으로 호흡 곤란이 일어나기도 해요. 치사량을 넘기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요. 실제로 남편이 베타 형질의 아내에게 억제제를 오랫동안 몰래 먹여서 살해한 일도 있고요.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석경 씨도 알 거예요.”
“…….”
“지속시간이 한 시간 이하가 됐다는 건, 석경 씨 몸도 베타처럼 억제제에 거부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페로몬이 노출되는 한이 있어도 억제제는 복용하면 안 돼요.”
“그럼 저는 일상생활을 못 하잖아요. 학교도 못 다니고, 취직도 못 하고, 또…….”
“……석경 씨.”
“히트사이클은 어떻게 되나요? 이번에 2주나 빨리 주기가 찾아왔는데…….”
“히트사이클은 관계없어요. 주기는 똑같이 3개월에 한 번일 거고 오차도 크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처럼 안정제를 맞으면 되니까 그 부분은 염려 안 해도 돼요.”
“…….”
“석경 씨. 오늘 병원에 온 건 정말 잘했어요.”
의사가 서랍 안에서 팸플릿을 꺼내 석경에게 내밀었다. 팸플릿 상단에 ‘각인 매칭 프로그램’ 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내용을 살펴보라는 의사의 눈짓에 팸플릿을 넘겨 봤다. 등록하면 알맞은 각인 상대를 매칭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각인은 ‘일방 각인’과 ‘쌍방 각인’ 두 종류가 있었다. 일방 각인 쪽이 상대를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각인을 필요로 하는 오메가에 비해 알파는 극소수다. 페로몬 때문에 겪는 일상생활의 불편함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오메가와 달리 자가 조절이 가능한 알파는 굳이 각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각인 상대 외에는 성관계를 할 수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지만 무엇보다 각인 상대가 사망하면 불치의 병으로 앓다가 죽기 때문에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면 쌍방 각인을 하지 않는다.
“쌍방 각인을 하면 주기가 왔을 때 신체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돼요. 성욕 면에서는 각인 전과 차이가 없지만 대신 작열통과 같은 신체적 고통이 말끔히 사라져요.”
“…….”
“그런데 일방 각인은 신체적 고통이 사라지지 않거든요. 이게 일방 각인과 쌍방 각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이왕이면 쌍방 각인이 좋겠지만, 생명이 직결되는 문제라 쌍방 각인을 원하는 알파는 거의 없어요. 있더라도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50대 이상으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구요. 이런 얘기 좀 그렇지만 젊은 오메가를 취할 목적인 거죠.”
“…….”
“일방 각인은 쌍방 각인에 비하면 금액적인 부담도 없고, 그나마 석경 씨 또래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각인을 꼭 해야 하나요.”
의사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석경 씨 지금 이게요. 억제제에 거부 반응이 나타나냐 나타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문제에요. 언제 거부 반응이 나타날지, 몇 년 후가 될지 몇 달이 후가 될지 저도 알 수 없어요. 석경 씨 일상생활 해야잖아요. 학교도 다니고 취직도 해야 하고. 각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석경은 팸플릿에서 일방 각인 항목을 찾아 눈으로 훑었다. 일방 각인을 하면 피각인자 외에는 각인자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히트사이클 때…….”
“맞아요. 각인을 하면 피각인자가 아니면 안정되지 않아요. 각인 전에는 불특정 알파와 관계를 맺어도 작열통을 비롯한 신체적 고통이나 성욕을 해소할 수 있지만 각인 후에는 오직 각인 상대와의 관계로만 고통을 해소할 수 있어요.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안정제도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각인을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석경 씨는…….”
의사가 말을 흐렸다. 뒷말은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이것저것 까다롭게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거다.
안정제도 효과가 없다니. 각인 상대의 도움이 없으면 히트사이클의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참기 힘든 성욕,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건 작열통이다.
하지만 작열통보다 석경을 더 두렵게 만드는 건 각인 상대와 성관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상대가 벌써부터 역겹고 징그러워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고통을 감당하고 말지 관계를 갖는 건 염두에 두기도 싫었다.
석경은 각인을 맺을 때도 반드시 성관계가 필요한 건가 해서 각인하는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관계 시에 노팅을 하면 높은 확률로 쌍방 각인이 된다. 석경에게 해당 사항이 아니라 빠르게 넘겼다.
다행히 일방 각인은 성관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일방 각인은 최소 24시간 동안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하거나 상대의 체액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확률이 높지 않아서 각인이 될 때까지 수차례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손가락을 깨물고 그의 피를 빨아 먹었던 일을 떠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지만, 24시간 이내에 억제제를 복용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대목을 다시 곱씹으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각인을 끊을 수도 있나요?”
“초기에는 가능해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불가능하지만요.”
일정 기간은 한두 달 정도라고 부연했다. 석경은 팸플릿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의사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석경을 따라 올라왔다.
“일단 알겠습니다.”
“석경 씨, 하루빨리 등록해야 돼요.”
“네.”
석경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가 조금 걷기로 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열여덟 살 때 가족끼리 외식을 나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생신이었고, 석경이 오메가로 발현하고 나서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어머니와 동생의 노력에 석경도 일부러 더 자주 밝게 웃었다. 아버지의 기분도 오랜만에 좋아 보였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후식을 먹는 도중,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석경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남자에게서 알파의 페로몬이 진하게 풍겼다. 남자는 석경에게 명함을 건넸다.
‘연락 줘요.’
가족들의 표정은 얼어붙었고 석경의 얼굴은 하얘졌다. 그제야 저의 체향이 맡아졌다. 석경의 체향을 맡은 남자가 성적인 의도를 갖고 접근했고 가족 모두가 그 분위기를 읽었다.
싸늘한 분위기로 레스토랑을 나오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버지는 석경의 뺨을 맵게 후려쳤다. 처음으로 당하는 손찌검이었다. 한 대로 그치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제력을 잃은 아버지는 발작적으로 석경을 몰아세웠다. 뺨이 퉁퉁 부어오르고 코피가 터지고 귀가 멍해지고 볼 안쪽 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뺨을 얻어맞았다.
어머니와 동생이 울며 아버지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석경 역시도 아버지의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제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므로.
석경은 꿋꿋하게 서 있으려고 했으나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끝내 쓰러졌다. 바닥을 잘못 디딘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제 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날 새벽, 석경은 광막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 쉬고 있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십 알이나 되는 억제제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과다 복용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독하게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고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구석에 하염없이 몰린 기분이라 그래야만 숨이 조금은 트일 것 같았다. 제 몸에서 풍기는 오메가의 구역질 나는 기운이, 온몸이 잔뜩 더러워진 듯한 꿉꿉함이 그래야만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랬다.
의도가 뭐였든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었다. 석경은 만 하루 만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새빨간 눈으로 동생이 말했다. 형 죽을 뻔했다고.
둔중한 통증이 오른쪽 손목을 압박해왔다. 그대로 죽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석경은 기력 없이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날 이후로 석경은 억제제를 한 시간에 한 알씩 챙겨 먹었다.
아버지에게 맞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레스토랑이 아니라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공원이었다면 그 알파는 어떻게 나왔을까. 명함을 건네며 연락 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 석경의 옷부터 벗겼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나 아는 사람도 그런 비슷한 일 당했는데 많이 힘들어했어.’
‘……얼마나?’
‘응?’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는데?’
지인의 이야기인 양 전한 말에 권윤조는 궁금증과 관심을 보였다.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었더라. 석경에게는 절망이라기보다 깊은 흉이었다.
교직에 계셨던 석경의 외할머니는 교감 자리까지 오르고 정년퇴직을 하셨다. 퇴직 후에 외할머니의 마음을 가장 고달프게 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고 뭉텅 비어버린 일상의 허전함도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아줌마 혹은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가장 견딜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거의 평생을 선생님 소리만을 듣고 살았는데 아줌마라니, 할머니라니. 도저히 무뎌지고 익숙해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석경은 17년을 넘게 베타로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오메가로 산 2년보다 베타로 살았던 17년이 훨씬 길지만, 그 2년 사이에 석경은 달라졌다. 많이 무뎌졌고 더욱더 무뎌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원죄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석경은 오메가라는 형질을 그저 타고났다. 자신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를 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이유 없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얼마간 편해졌다.
잊어야 산다는 어머니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석경은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그날 밤 공원에서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마다 벌레가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공포에 경련 같은 몸서리를 치면서도 완전히 무뎌질 언젠가를 기다렸다. 페로몬을 숨기지 않으면 성욕의 대상이 되고 재수가 없으면 강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어느덧 무심히 냉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토록 혐오하던 알파를, 알파의 형질을 지닌 권윤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석경에게는 기적 같은 변화였다. 심지어 아까 카페에서는 멀쩡한 정신으로도 권윤조에게 욕구를 품고 그를 갖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힘들대?'
악의로 가득 찼던 마음 한구석이 비워지면서 권윤조로 꽉꽉 채워졌다. 문득 설레다가도 문득 행복해졌다. 살아갈 자격은 아니더라도 숨 붙이고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때문에 지금도 힘드냐는 질문에 그럭저럭 괜찮다고, 아니 사실은 많이 아물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 권에 계속
공금.갠소.본문수정有.AngKeumTo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