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석경은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신축 빌라의 꼭대기 층을 올려다봤다. 케이크까지 사 온 마당에 이제 와서 발길을 돌릴 마음은 없었지만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제 점심을 먹는 도중에 태정이 하나 대수로울 게 없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내일 권윤조 생일이야.’
그 말을 들은 준영이 갑자기 TMI 뭐냐며 짜증을 냈고 권윤조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내일 우리 집으로 와. 내 생일이니까 술 한잔하자.’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정확히 석경의 눈을 보며 말했다.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권윤조의 집이라니, 귀신의 집보다 더 긴장되는 장소인지라 가겠다는 대답이 선뜻 안 나왔다.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는 사이 석경은 케이크 담당이 되어 있었다. 어느 카페의 당근 케이크를 사 오라는 태정의 디테일한 지시에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늦게 상황에 녹아들었다. 권윤조 생일은 그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이름만 다른 술자리 가운데 가장 그럴싸한 명분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스렸다. 솔직히 권윤조의 사는 꼴이 궁금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공간을 궁금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쨌든 큰 변수 없이 생일 파티의 멤버가 늘 붙어 다니는 멤버 넷으로 정해졌다.
‘생일 선물 뭐 필요해?’
석경의 질문에 권윤조는 몸만 오라고 대답했다.
권윤조의 커다란 손아귀에 턱을 붙들렸던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석경은 권윤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권윤조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정도를 모르고 나대는 심장과 수시로 붉어지는 귓불 탓이었다. 이러다 감정을 들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다고 그를 피해 다니는 극단적인 수를 택하지는 않았다. ‘너 혹시 나 피해?’라는 질문을 받게 될까 봐 권윤조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수준으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적당한 거리마저도 어느 순간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저 좋으니까 함께 있고 싶었다.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잊어버린 것이다.
공동현관의 키패드를 누르려는 찰나 석경은 청포도 향을 맡았다. 체향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억제제가 벌써 효과를 다했다는 뜻이었다.
석경은 물도 없이 억제제 한 알을 삼키고 10분가량을 근처에서 서성거린 후에 다시 공동현관 앞에 섰다.
501호를 호출하자 곧바로 자동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외모를 점검하고 표정 관리를 하다가 희미한 자괴감을 느꼈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권윤조가 보였다. 이제 그만 좀 놀라고 싶은데 석경은 또 놀라고 말았다. 눈만 크게 떴을 뿐 놀란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안겨 줬다.
“석경아, 어서 와.”
“왜 나와 있어?”
“우리 집 못 찾을까 봐.”
“나 숫자 읽을 줄 아는데.”
5층에는 현관문이 딱 하나였다. 501호가 아니라 507호나 510호로 적혀 있어도 아마 집을 못 찾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케이크 살 때 뭐 불편한 거 없었어?”
하얀색 반팔 티셔츠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권윤조가 석경의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가져가며 능청을 떨었다. 반팔 티셔츠 한 장 만으로는 미처 가려지지 않은 건장한 골격과 근육이 못내 감질났다. 남자 몸을 보고 흥분하다니. 석경은 주먹을 하얗게 말아 쥐었다.
“참, 석경아. 우리 집 비밀번호 내 생일이야. 1층 공동 현관 비번이랑 여기랑 똑같아.”
“응?”
권윤조는 싱긋 웃으며 지문 인식 대신 보란 듯이 키패드에 오늘 날짜를 입력했다. 석경은 갑작스러운 비밀번호 공개에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들어가자.”
권윤조의 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 석경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집 안 가득 배인 알파의 페로몬 탓이었다. 다소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아카시아 향에 석경은 어깨를 움츠렸다.
“석경아, 안 들어와?”
권윤조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석경을 재촉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딱 필요한 것만 갖춘 심플한 인테리어였다. 석경은 어색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애들은?”
5시 반까지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10분이나 늦게 도착한 터라 준영과 태정이 당연히 와 있을 줄 알았다.
“아직 안 왔지.”
너무 당연한 투로 대답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애들한테는 6시까지 오라고 했어.”
“왜?”
“그냥. 집 구경할래?”
권윤조는 멀뚱하게 서 있는 석경의 손을 잡아끌고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줬다. 갓 미성년자 딱지를 뗀 스무 살 남자애가 자취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집이었다. 드레스룸부터 서재, 침실까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걸쳤다.
“아, 이거. 생일 선물.”
석경은 소파 옆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종이 가방 안에서 길쭉한 상자 세 개를 꺼냈다.
“몸만 오라니까.”
“핸드크림이야. 네가 전에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청포도라고 해서 청포도 향으로 샀어.”
마냥 무구하게 웃음기를 띠고 있던 권윤조의 눈에 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청포도 향?”
“응. 하나 사기는 좀 그래서 세 개 샀어. 그거 별로 안 비싸거든.”
“…….”
권윤조는 말없이 눈썹께를 긁었다. 별로 안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석연치 않은 반응에 석경은 주눅이 들었다. 괜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생일 선물은 아니고, 우리 엄마가 친구 집에 처음 방문할 때는 화장지라도 사 가라고 하셔서…….”
“…….”
권윤조의 기색을 살피며 주섬주섬 종이 가방 안에서 은은한 파스텔 톤 하늘색의 기프트 박스를 꺼냈다. 물티슈 세트였다.
“화장지 대신 물티슈 사 왔어.”
“……물티슈.”
“인체에 무해하다니까 안심하고 써.”
“무해하다고…….”
“어.”
“인체에…….”
“……어.”
권윤조는 눈썹 긁던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얼굴을 두어 차례 쓸었다. 바닥에 꺼내 놓은 선물들을 보는 시선이 짙었다.
그는 조금 길다 싶을 정도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더니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 입꼬리를 올렸다. 눈웃음으로 가늘어진 눈매에 석경의 영혼이 한 뭉텅이쯤 날아갔다.
“고마워.”
“혹시, 맘에 안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반칙 아닌가. 석경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애매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냥…….”
“맘에 들어.”
“다행이다.”
“나한테 꼭 필요한 거고.”
권윤조가 기쁘게 웃었다. 석경은 웃는 얼굴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괜히 손목시계를 봤다. 6시가 되려면 아직도 10분이나 남았다. 불편하고 어색하고 곤욕스러웠다.
애들이 일찍 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권윤조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석경아, 나 아까 여기…….”
그때 권윤조의 말허리를 자르고 초인종이 울렸다. 석경은 그가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묻는 대신 반가운 초인종 소리에 반응했다.
“애들 온 것 같은데.”
“응.”
한데 문을 열어 줘야 할 집주인이 요지부동이었다.
“……문 안 열어 줘?”
“괜찮아. 아직 6시 안 됐잖아.”
“그래도…….”
연이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석경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권윤조는 그제야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느릿느릿 인터폰 쪽으로 걸어갔다.
* * *
“그러니까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거 아니야?”
“아니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지. 검색해볼까?”
“야, 검색하지 마. 내기해, 내기!”
“좋아, 만 원, 아니 3만 원 빵 가자.”
준영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어서 함께 핏대를 올리던 태정도 지폐 세 장을 올려놨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술잔이 돌았고 다들 나른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니들도 낄래?”
석경은 답을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콜이었다.
“나는 불가능 쪽에 걸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하자 ‘가능’쪽에 건 태정의 눈동자가 설핏 흔들렸다. 지켜보던 권윤조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불가능 쪽에 돈을 걸었다. 3 대 1의 상황. 태정은 제가 졌다는 것을 직감한 듯 씩씩거렸다.
오일러는 프레겔 강을 건너는 다리 7개를 각각 한 번씩만 건너면서 도시 전체를 돌아다닌 후에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했다. 결과는 불가능이었다.
검색을 마친 태정이 휴대폰을 탁 내려놨다.
“누구야? 누가 신성한 술자리에 오일러 같은 걸 끼얹었어?”
“너잖아. 네가 먼저 시작했어.”
“시발, 그럼 내가 잘못했네.”
내기에 대한 정산을 끝내고 태정은 우울한 낯으로 술을 들이켜다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야! 3만 원 빵 한 번 더 해! 이번에는 탈이과로, 좀 고상하게 예술 계통으로. 엉? 어떠냐.”
“네가 알고 있는 문제 내는 거 아니지?”
태정에게 받은 돈을 지갑에 잘 챙겨 넣은 준영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냐, 이거는 나도 헷갈려서 그래. 못 믿겠으면 나랑 똑같이 걸면 되잖아.”
“뭔데. 들어나 보자.”
“고흐가 자른 귀가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남의 비극을 내기 같은 걸로 막 소비해도 돼? 그래서 넌 어느 쪽 할 건데.”
“나는, 오른쪽!”
“그럼 나도 오른쪽.”
준영은 태정을 따라 오른쪽에 걸었고,
“나는 왼쪽 할게.”
석경은 태정의 돈을 도로 돌려줄 계산으로 왼쪽에 걸었다.
“그럼 나도 왼쪽.”
마지막으로 권윤조도 왼쪽에 걸자 2 대 2 승부가 되었다. 그런데 준영이 정답을 검색하기 직전에 말을 바꿨다. ‘잠깐, 나도 왼쪽으로 할래! 바꿔도 되지?’ 그렇게 다시 3 대 1이 되었다. 정답은 권윤조가 검색했다.
“왼쪽이라는데?”
“뭐야 시발, 거짓말이지.”
“자화상에서는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거울 보고 그린 거라 좌우가 바뀐 거래. 직접 봐라.”
“그 시대에 거울이 왜 있어?”
“야아, 태정아. 거울이…… 있지, 왜 없어.”
석경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하자 권윤조가 웃었다.
“너 몰랐구나. 박태정 쟤 좀 바보야.”
“야, 뼈 때리지 마. 나 아픈 거 짱시룸.”
돈을 잃은 태정은 다시 우울해졌다. 권윤조가 그런 태정을 툭툭 건드렸다.
“돈 좀 잃었다고 삐쳤냐?”
“아닌데. 빡친 건데.”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명심해.”
“아, 혹시 내가 분위기 흐리는 중?”
“응.”
태정이 과장된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윤조야, 너만 할까? 네가 과팅 분위기 조져 놓은 거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 나.”
과팅 막바지에 번호 교환이 있었다. 반쯤 형식적인 절차였으므로 서로 연락을 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사정이 될 터였다. 그러니까 번호 교환은 관심의 표현이라기보다 과팅으로 맺은 인연에 대한 예의 차리기에 가까웠다.
물론 관심과 사심을 품고 연락처를 묻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권윤조를 향하는 화살표가 대개 그랬을 것이다.
‘네 번호는 뭐야?’
‘그런 거는 물어보지 마.’
권윤조는 무례하게도 거절했다. 얼핏 미친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단체로 어버버했고 번호를 물었던 여자애의 얼굴은 분노인지 무안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새빨개졌다. 뒤늦게 태정이 수습에 들어갔다.
‘쟤가 오늘따라 농담이 지나치네. 술이 과했나.’
태정이 애써 무마했지만 폭탄 같은 발언을 덮기에는 한참이나 궁색했고 이후로 ‘그런 거’를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그때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진짜 취해서 그런 거야?”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아오, 저 새끼랑 두 번 다시 미팅 안 나간다. 에퉤퉤퉤!”
태정이 화풀이 술을 벌컥 들이켰다. 둘이 아무리 티격태격해도 지켜보는 사람이 눈치를 볼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지지는 않았다. 익숙한 모습이라 다들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둘이 다정하게 대화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 두 사람에 비해 석경과 준영의 모습은 확실히 대조적이었다. 준영은 딱 5분만 쉬겠다며 석경의 허벅지를 베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새터 때 생각난다.”
태정이 또 봐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새터 때도 준영이 석경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었다.
석경은 습관처럼 준영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권윤조가 이쪽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또 저 눈빛이다. 저라는 존재가 권윤조에게 뭐라도 된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드는 눈빛. 저를 다른 애들보다 30분이나 일찍 집에 부른 의도를 고민하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눈빛. 만지면 질감이 느껴질 것만 같은 뚜렷한 눈빛. 너무 좋아서 잇몸이 다 마르는 느낌이었다. 석경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김준영, 자면 안 돼.”
석경이 어깨를 살짝 흔들자 준영이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석경 무릎베개 완전 수면제야. 더 누워 있다가는 잠들겠어. 야, 우리 게임하자.”
준영이 왕게임을 하자는 의견을 냈다. 남자들끼리 무슨 왕게임을 하냐고 투덜대던 태정은 누구보다 눈을 반짝이며 왕좌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권윤조가 반대를 하면 석경도 은근슬쩍 반대쪽으로 묻어가려고 했는데 권윤조도 찬성 쪽에 의견을 보탰다. 석경은 고민 없이 다수의 의견에 따랐다.
“다들 신중하게 적어. 유치하게 1번이랑 2번 키스하기 이런 거 적지 말고. 심보 곱게 쓰자, 태정아.”
“야, 나 아까 권윤조한테 맞아서 부러진 뼈 아직 안 붙었거든?”
인원이 네 명뿐이라 왕을 따로 정하기도 애매하여 결국 각자 미션을 종이에 적은 후에 하나씩 뽑기로 했다. 미션을 다 적은 후에는 고유 번호를 뽑았다. 석경은 2번이 되었다.
“어떡할까? 돌아가면서 뽑을까? 내가 먼저 뽑을게. 시계방향으로 돌자.”
준영이 가운데에 모아 놓은 미션 종이 중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주목을 받은 준영이 짓궂게 웃으며 천천히 종이를 폈다.
“뭔데, 빨리 읽어.”
태정이 재촉했다.
“이야, 이거 쓴 사람 누가 봐도 이석경인데? 4번, 소주 반병 맛있게 원샷 하기. 뭐냐?”
“4번 누구야? 축하한다.”
태정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4번을 찾는 분주한 시선들 가운데서 유독 미동 없이 굳어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태정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권윤조, 너로구나!”
“석경아, 실망이야.”
권윤조가 소주 반병을 채운 글라스를 손에 들고 입꼬리를 축 내렸다. 석경은 손사래를 치며 발뺌했지만 그가 속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야, 나 아니야. 왜 나라고 생각해.”
“소주 맛있게 원샷 하기 라니. 발상이 딱 너잖아. 소주가 어떻게 맛있어?”
아무리 그래도 반병은 너무 심했지 싶었다. 그 정도 양은 자신도 힘들 터였다. 하지만 심한 건 심한 거고.
“소주 맛있지 않아?”
“거봐. 너 맞잖아.”
석경은 원망 어린 권윤조의 눈동자를 피했다.
“권윤조, 지금 마피아 게임하냐? 미션 쓴 사람 족쳐서 뭐 하려고? 잔소리 그만하고 맛있게 원샷이나 해.”
태정이 재촉하자 권윤조는 소주 반병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오, 권윤조! 맛있게 원샷 하라니까 멋있게 원샷 하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권윤조가 입가에 묻은 소주를 손등으로 쓰윽 닦아내고는 씨익 웃으며 한마디 했다.
“맛있다!”
지켜보던 석경도 한마디 했다.
“잘 마시네.”
“목구멍 열었거든.”
“잘 열었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시선을 맞춘 권윤조가 석경을 꽤 오래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고 석경도 따라 웃었다.
“자, 다음 이석경 차례.”
석경은 종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글자를 읽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준영이 종이를 확 채갔다.
“이씨, 이거 쓰지 말라니까 누구야! 2번이랑 3번 키스하기 누구냐고!”
준영의 말에 태정이 고개를 젖혀가며 웃었다. 준영이 태정을 향해 눈을 흘기며 씩씩거렸다.
“박태정, 저 새끼네. 하지 말라는 짓은 꼭 해요.”
“아, 그래서 2번이랑 3번 누구신데요. 김준영 오버하는 거 보니까 하나는 답 나왔고. 4번은 권윤조, 1번은 나니까 이석경이네! 이석경 2번?”
태정의 지적에 잠자코 있던 석경은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나섰다.
“나 2번 맞는데, 볼 뽀뽀로 하자.”
“뭔 소리야? 격정적으로 키스 갈겨. 혀도 섞고. 뭐든 다 하기로 아까 합의 봤잖아. 엔지 없이 원테이크로 가는 거다. 권윤조, 카메라 준비됐어?”
“씨발, 찍지 마. 누구 약점을 잡으려고! 나 엄마한테 등짝 맞는다고!”
준영이 휴대폰을 손에 들지도 않은 권윤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권윤조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권윤조의 머리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석경의 허벅지 위에 정확히 안착했다.
“권윤조 뭐냐?”
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석경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중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자신일 것이다. 허벅지를 짓누르는 무게감과 뜨거운 숨결에 멀미가 난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설마 소주 반병 원샷 했다고 기절한 거야?”
“맞는 것 같은데.”
“왜 저래, 진짜. 쟤 술 세지 않아? 석경이만큼은 아니어도 꽤 마시던데.”
“침대로 옮길까?”
“깨우자. 저 커다란 놈을 어떻게 옮겨. 석경아, 권윤조 깨워.”
준영과 태정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듣던 석경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깨워야 하나. 석경은 권윤조의 어깨를 흔들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거두었다. 한 백 년쯤은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떨림에 대담한 생각까지 해 보았다.
“……그냥 자게 두면 안 될까?”
“…….”
“오늘 권윤조 생일이잖아.”
설득처럼 덧붙인 목소리에 은근히 무게가 실렸다. 준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석경아, 너 왜 그래? 나는 무슨 나한테 결혼 허락받는 줄. 뭐가 그렇게 비장해.”
“미친놈아.”
“권윤조 생일인데 그니까 뭐 어쩌라고.”
“말꼬리 그만 잡아라. 말이 헛나올 수도 있지.”
석경이 쩔쩔매자 준영은 아주 신이 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태정이 결국 한마디 했다.
“그래서 니들 키스 언제 할 거야?”
준영과 석경은 못 들은 척 계속 투닥거리다가 왕게임을 아예 파투 내 버리기 위해 남은 두 개의 미션 종이를 오픈해 버렸다.
“이건 또 뭐야? 이석경이 권윤조한테 무릎베개 해 주기? 이거 쓴 놈 제정신이야? 왕게임 룰을 아예 모르는 놈인데?”
준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종이를 팔랑거렸다. 태정이 종이를 채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권윤조 글씨네.”
그러자 석경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권윤조에게 시선들이 쏟아졌다.
“왕게임이 언제부터 실명제였어.”
“귀엽다, 귀여워.”
다들 엉뚱하다며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권윤조의 성정을 봐서는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저거 탐나네. 석경은 웃고 떠드는 혼란을 틈타 권윤조가 적은 미션 종이를 슬쩍 챙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술도 확 깨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잔을 가만히 구경하던 석경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슬슬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판을 깨는 기분이라 괜히 미안했다.
“어?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 우리 다 그런 줄 알고 왔는데.”
“아니, 가야지. 난 집도 가까운데.”
석경은 제 허벅지를 베고 있는 권윤조를 바닥에 뉘어 놓고 어질러 놓은 것들을 어느 정도 치운 후에 집에 갈 생각이었다. 기절하듯 잠든 권윤조의 볼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은 욕구와 싸우며 홀로 속을 앓던 터라 벗어날 생각을 하니 내심 개운했다.
잠에서 깨지 않도록 슬그머니 다리를 빼는데 권윤조가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빠르게 달아나는 게 보였다.
“석경아, 어디 가려고.”
눈뜨고 정신 차리자마자 석경의 손목부터 붙잡은 권윤조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허벅지에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깼어?”
“가지 마, 자고 가.”
“어, 나 갈아입을 옷도 없고…….”
“내 옷 줄게. 자고 가. 초콜릿도 사 놨어. 냉장고 안에 많아.”
“그래, 석경아. 자고 가라. 너 집에 가 버리면 우리끼리 무슨 재미냐.”
“석경아, 권윤조 옷 입기 찝찝하면 내 옷 줄게. 나 곰돌이 잠옷 챙겨왔어. 수면 안대도 챙겼는데 너 써.”
준영과 태정까지 한마디씩 거들어 버리니 더는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도리가 없었다. 석경은 하는 수 없이 자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몸에 열 기운이 약간 있었지만 연이은 술자리로 인해 피로가 쌓인 탓이려니 했다.
석경은 권윤조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갔다.
“긴팔로 줄까, 반팔로 줄까?”
“아무거나.”
권윤조는 반바지와 맨투맨 티를 건넸다.
“반팔은 잘 때 추울 수도 있으니까 긴팔 입어.”
“응, 고마워.”
“갈아입고 나와.”
권윤조는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 주고 나갔다. 옷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석경은 침착하게 코를 박고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으음. 하아. 개좋아. 천천히 얼굴을 떼고 입고 있던 상의를 훌렁 벗었다. 전신거울에 마른 듯하면서도 합기도로 다져진 탄탄한 상체가 비쳤다. 평생 한 번도 햇볕을 쬐지 못한 것처럼 하얀 피부도.
“참, 석경아. 혹시 속옷은…….”
뭐라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권윤조가 채 문턱도 못 넘고 우뚝 멈췄다. 뚝 끊긴 뒷말을 기다리느라 멀뚱멀뚱 권윤조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문이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혔다.
뭐지? 속옷은……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을까. 속옷도 빌려준다는 말이었나? 근데 왜 말을 하다 말고. 설마 옷에 코 박고 있는 모습을 본 건가. 닫힌 문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는데 이윽고 문이 다시 열리며 어딘가 딱딱하게 굳은 권윤조의 얼굴이 나타났다.
“문, 바람 불어서 세게 닫힌 거야.”
“어?”
“내가 세게 닫은 게 아니라.”
“아, 응.”
“……갈아입고 나와.”
이번에는 문이 살살 닫혔다. 석경은 무심코 창문을 봤다. 꽉 닫혀있는 창문.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한 공기. 바람이 대체 언제 어디서 불었을까. 속옷이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속옷은 결국 안 빌려주는 건가. 속옷, 어떤 스타일로 입는지 궁금했는데. 석경은 속옷에 깊게 몰입한 상태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자 놀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를 말들이 석경을 향해 쏟아졌다.
“이석경 봐라. 존나 귀엽지 않냐.”
“권윤조 옷이 저렇게 크다고?”
권윤조는 말없이 석경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반바지를 입은 탓에 드러난 종아리에 특히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석경은 장난스럽게 쏘았다.
“내 다리 보지 마.”
“네 다리를 안 볼 거였으면 애초에 반바지를 안 줬겠지.”
낮게 깔린 진지한 목소리에 민망해진 석경은 손등 위를 덮는 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완전히 되살아난 권윤조와 함께 2차가 시작됐다.
* * *
석경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코를 찌를 듯한 진한 청포도 향에 밭은 숨이 툭 터져 나왔다. 온몸이 뜨겁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펄펄 끓는 기름에 풍덩 빠진 듯 온몸에 작열통이 덮쳐 왔다.
“하아…….”
석경은 누군가에게 포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꼼짝도 못 하고 가느다란 숨만 흘리다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인영 셋이 어스름히 시야에 잡혔다. 안간힘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바닥이 거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걸음마다 무릎이 푹푹 꺾이더니 결국 추락하듯 자빠져 버렸다. 이대로는 도저히 집까지 갈 수 없었다.
석경은 욕실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두 발로 걸을 수가 없어서 네 발 짐승처럼 기어갔다. 신음이 터지는 것을 막고자 꽉 깨물었던 입술에서 기어이 피가 터졌는지 비린 맛이 혀를 적셨다. 제어가 안 되는 자신의 몸뚱이를 욕실 안에 처박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잠갔다.
“으읏…….”
긴장을 조금 내려놓자마자 신음이 잇새를 뚫고 나왔다. 그 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질펀한 관계 중의 은밀한 신음을 연상시켰다. 석경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째서? 아직 2주나 남았는데? 열 때문에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의문이 맴돌았다. 석경의 히트사이클은 여태 단 하루의 오차도 없이 찾아왔었다.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이 자꾸만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흐물흐물했다. 늘 상비하고 다니는 억제제로는 히트사이클 발작을 결코 안정시킬 수가 없다. 집에 있는 히트사이클 안정제가 간절했다.
석경은 다시 바닥을 기어 욕조로 향했다. 그렇지 않으면 욕실 문을 열고 나가 저를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권윤조에게 매달릴 것만 같았다. 아래는 진작부터 젖어 있었고 알파를 원하는 빌어먹을 형질이 미쳐 날뛰었다.
욕조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석경은 물을 틀고 차가운 온도 쪽으로 수전을 돌려놓았다. 찬물을 맞자 고열을 동반한 경련은 잦아들었지만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으읍…….”
차가운 물줄기가 폭력적으로 몸을 때렸다. 끅끅거리며 신음을 삼키는데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숨을 멈추고 잔뜩 귀를 기울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던 모양인지 노크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크고 또렷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석경은 새파래진 입술로 온몸을 떨었다.
“석경아.”
“…….”
“문 열어.”
권윤조의 목소리였다. 아아. 석경은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시렸던 추위를 비집고 열감이 솟구쳤다.
“으, 흐읍.”
“애들 집에 보냈어. 괜찮으니까 문 열어.”
석경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권윤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성을 놓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흠뻑 젖어버린 제 구멍에 박아달라고 애원할 것 같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끊기는가 싶더니 퍽,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권윤조가 들어왔다. 욕실을 가득 채운 오메가의 페로몬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흐읍, 오, 오지 마.”
권윤조는 달리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석경을 일별하고 물을 껐다. 폭력적으로 쏟아져 내리던 냉기가 사라지자 몸속의 열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석경아, 일어날 수 있겠어?”
“저리, 가.”
꿈틀거리며 몸을 물리자 젖은 반바지가 허벅지에 감겨 왔다. 권윤조는 구석으로 몸을 웅크린 석경의 몸을 훌쩍 안아 들었다. 발버둥 쳐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본능은 권윤조의 몸을 구걸하며 야생의 숨결을 내뱉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입술을 벌려 아카시아 향이 나는 부드러운 살갗을 미친 듯이 핥았다. 딱딱하게 경직된 목줄기를 물어뜯을 기세로 빨며 매달렸다.
권윤조는 석경을 침대 위에 내려놨다. 성욕에 눈이 돌아 떨어지지 않으려는 석경을 강한 힘으로 떼어 내고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석경의 젖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그런 손길마저 석경에게는 온통 자극이고 애무였다.
“감기 걸리니까.”
“하, 으읏, 제발…….”
“옷 벗길게.”
무표정한 얼굴로 하는 그 말이 혼탁한 이성 속에서 ‘제발’에 대한 수락으로 들렸다. 석경은 기대에 들뜬 몸을 권윤조에게 통째로 맡겼다. 젖어서 몸에 척척 감긴 옷을 벗겨내는 동안 권윤조의 시선은 줄곧 석경의 흐린 눈동자를 향해 있었다. 석경의 몸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옷을 벗긴 권윤조는 석경의 배 위에 샤워 가운을 떨어뜨렸다.
“입어.”
“하아…… 왜…….”
날 안으려고 옷을 벗긴 게 아니었어? 그렇게 묻는 석경의 눈을 외면한 권윤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석경의 몸에 샤워 가운을 입혀 준 뒤 앞을 빈틈없이 여며 주었다. 고통처럼 온몸을 지배하는 성욕에 석경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비틀며 눈물을 쏟아내는 석경을 내려다보던 권윤조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입술을 꾹 물었다.
“석경아. 힘들겠지만.”
“흐으읏…….”
“조금만, 참아.”
권윤조는 이를 갈았다. 무언가를 애써 억누르는 붉어진 눈가와 참으라는 말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듯했다. 저런 눈빛을 할 거면 참으라는 말 대신 당장이라도 석경의 몸을 열고 들어와야 옳았다.
석경은 그제야 그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히트사이클을 맞은 오메가의 페로몬을, 그 자극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아, 하…….”
석경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권윤조의 탄탄한 배에 얼굴을 묻었다.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얼굴을 조금 밑으로 내리자 바지 안으로 터질 듯이 단단하게 일어선 흉흉한 중심이 느껴졌다. 도드라진 그의 물건이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석경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기둥을 따라 질척한 타액을 묻혔다. 바지 천을 잘근 씹어 물며 그의 것을 직접 물지 못해 애달파했다.
“석경아.”
권윤조가 강한 힘으로 석경의 어깨를 붙잡아 떨어뜨리려 했으나 석경은 그럴수록 더 절박하게 매달렸다.
“안아 주면, 안 돼?”
다시 강한 힘이 어깨에 가해졌다.
“이석경.”
“너, 너도 힘들잖아. 나 좀 안아 줘. 응? 한 번만, 안아 줘 제발.”
권윤조는 결국 석경을 침대에 눕히고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안으로 들이닥치며 농도 짙은 페로몬을 희석시켰다.
석경은 엉엉 울며 제발 안아 달라고 울부짖었다. 혀를 짓씹으며 안아 달라는 말과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는 말을 미친 사람처럼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피 섞인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뚝뚝 흘려대자 입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불쑥 들어왔다.
“혀, 깨물지 마.”
마치 혼이라도 내듯이 손가락으로 치아를 툭툭 두드렸다.
“으, 으읍…….”
“10분만 참아, 석경아. 지금 안정제 가져오는 중이니까.”
안정제를 가져온다고? 누가? 준영이가? 박태정이? 의문은 찰나의 순간 휘발되고 거대한 성욕이 다시 석경을 집어삼켰다. 입속을 침범한 손가락을 깨물었다. 힘 조절 따위를 할 겨를이 없었다. 무언가 툭 터지면서 비릿하고 축축한 것이 혀를 감쌌다. 며칠 동안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처럼 쭉쭉 빨았다.
권윤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목시계를 수차례 확인하는 동안 석경은 정신없이 그의 손가락을 빨아 댔다. 고통스럽게 구겨졌던 석경의 미간이 알파의 혈액을 취하면서 점차 펴졌다. 안정제만큼은 아니어도 알파의 체액은 분명 히트사이클로 인한 신체적인 고통을 완화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권윤조는 피를 모조리 빨려도 상관없다는 듯 손가락을 내어 준 채 석경을 지켜봤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잠깐 기다려.”
석경은 숨을 헐떡이며 입에서 떨어져 나가는 기다란 손가락을 열에 들뜬 눈으로 아쉽게 바라봤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권윤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돌아온 권윤조는 팩에서 주사기와 작은 약병을 꺼냈다. 주사기 안에 약액을 채우고 석경의 팔뚝에 고무줄을 감고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 일련의 동작들은 조금 서툴긴 했으나 정확했다.
“이제 됐어, 석경아.”
“으, 흐윽…….”
“잘 참았어.”
요동치던 성욕이 잠잠해지면서 발끝에서부터 몽롱한 졸음이 밀려왔다. 석경은 잠들기 전까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잠들기 직전 눈물로 짓무른 눈가 위로 온기가 내려앉은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