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1)

* * *

실컷 자고 일어나자 붉게 물들었던 창밖이 남색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준영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영화가 기대보다 괜찮았다고,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그런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동생에게 온 메시지가 있었다.

[재경 : 지금 형 자취방 가는 중]

시간을 보니 벌써 30분 전에 보낸 메시지였다. 어디냐고 답장을 보내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교복 차림의 동생이 서 있었다.

“형, 잤냐?”

얼굴을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건네는 한마디에 석경은 푸스스 웃었다.

“갑자기 왜 왔어?”

“저녁도 안 먹고 잤지?”

“뭐라도 시켜 먹을까?”

각자 질문만 하는데도 대화가 이어졌다. ‘자고 갈 거야?’ 편한 옷을 챙겨 주려고 묻자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학교 가잖아.’ 석경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치킨을 주문했다. 치킨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특별히 마시게 해 주는 거야. 술은 형이랑만 마셔야 돼.’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며 재경에게 캔맥주 하나를 건넸다. 석경도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재경은 더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형, 나 지금 체하라고 하는 소리지?”

“집에는 별일 없어?”

“나한테 묻지 말고 집에 좀 자주 와.”

두세 마디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다. 대화가 없으니 몇 개 없던 캔맥주가 빠르게 동났다. 나가서 더 사 올까 말까 고민하는데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잘생긴 준영이 : 대박사건!]

준영을 비롯해서 태정, 권윤조까지 네 사람이 모여 있는 단체 대화방이었다.

[박태정 : ???]

[무슨 일?]

[권윤조 : ?]

[잘생긴 준영이 : 내일 저녁 7시에 전에 말했던 과팅!]

[박태정 : 호오~]

[난 또 뭐라고]

[잘생긴 준영이 : 또 뭐? 뭐가 있어야 하는데?]

[잘생긴 준영이 : 암튼 다들 시간 되는 걸로 알고 약속 잡는다]

[잘생긴 준영이 : 내일 과팅 안 나올 사람은 지금 대화방에서 당장 나가 버려]

권윤조님이 나갔습니다.

잘생긴 준영이님이 권윤조님을 초대했습니다.

[잘생긴 준영이 : 윤조야?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권윤조 : 나가라며]

[잘생긴 준영이 : 내일 과팅 안 나올 사람은 지금 대화방에서 당장 나가 버려. 내가 다시 정중히 초대할 테니까]

[잘생긴 준영이 : 이 말을 하려던 거였고요. 다름이 아니라요.]

[ㅋㅋㅋㅋㅋㅋㅋ]

[박태정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씨밬ㅋㅋㅋㅋㅋㅋ뭔 개소리야]

[태정아 개가 무슨 죄야]

[박태정 : 그러네ㅋㅋㅋㅋㅋ개야 미안해~]

[박태정 : 멍게소리야ㅋㅋㅋㅋㅋ]

[멍게는 또 무슨 죄야]

[박태정 : 멍게야 미안해~]

[박태정 : 뭔 김준영소리야ㅋ 됐냐?ㅋㅋ]

[응]

[잘생긴 준영이 : 석경아……ㅠㅠ 너 나한테 왜그래?]

[권윤조 : 석경아 너 내일 시간 돼?]

[나? 아마 될걸?]

[권윤조 : 진짜 과팅 나가려고?]

[잘생긴 준영이 : 시간이 된다는 말은 간다는 말이 아닐까?]

[왜? 넌 과팅 안 나가려고?]

석경은 물어놓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권윤조는 과팅이 내키지 않는 걸까. 그런 낌새는 전부터 있긴 했다. 오늘 카페에서 같이 있던 여자애 때문이겠지. 아마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권윤조 : 너 안 나가면 나도 안 나가려고]

[잘생긴 준영이 : ??]

[박태정 : ???]

[잘생긴 준영이 : ???? 머선12go]

석경이야말로 물음표였다. 내가 안 나가면 너도 안 나간다고? 그럼 내가 나가면 너도 나가겠다는 뜻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깊어졌다.

권윤조는 종종 석경이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 선을 그었지. 그거 때문에 빈정 상해서 이쪽도 덩달아 선을 그어 보려다가 망했고.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잠깐 떠올라서 다시 귓바퀴가 뜨거워지려고 했다. 별일도 아닌데 뒤끝이 생기는 걸 보니 진짜 권윤조한테 뭔 감정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권윤조 : 과팅 안 나가고 우리끼리 노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잘생긴 준영이 : ??? 저기요?? 선동하지 마실게요]

[박태정 : ㅋㅋㅋㅋㅋ윤조 어지간히 나가기 싫은가 보다]

[잘생긴 준영이 : 왜 나가기 싫은데? 여자애들 앞에서 뚝딱거릴까 봐 겁나냐?]

[박태정 : ? 자기소개냐?ㅋㅋㅋㅋㅋㅋㅋ]

[잘생긴 준영이 : 넌 또 뭐야? 너 내가 뚝딱거리는 거 봤어?]

[박태정 : 꼭 봐야 알까?]

[잘생긴 준영이 : 너 모르냐? 의외로 뚝딱거리는 면이 매력이 될 수도 있다 그랬어]

[박태정 : 뭔 김준영소리야ㅋㅋ 어떤 찌질한 모쏠이 그런 말을 해?]

[잘생긴 준영이 : 우리 엄마]

[박태정 : 어머니께서 세상만사 진리를 꽉 잡고 계신 듯. 존경한다고 꼭 전해 드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권윤조 : 석경아 진짜 이런 놈들하고 과팅 나갈 거야?]

[응ㅋㅋㅋㅋ나갈래ㅋㅋㅋㅋㅋㅋ]

나가야지. 내가 게이가 아니라는 거 증명하려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스스로에게 하는 증명이기도 했고 권윤조를 대상으로 하는 증명이기도 했다. 후에 제가 실수로 감정을 흘리더라도 ‘아니겠지 설마, 이석경 여자 좋아하던데’라고 고개를 저을 수 있게끔. 이를테면 밑밥 깔기였다.

그리고 과팅에 나가면, 혹시 거기서 마음에 드는 애를 만나면 설익은 마음을 접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도 들었다. 과팅 만세.

[잘생긴 준영이 : 석경아 부담 갖지 마. 내일 잘 안되면 기절할 때까지 술이나 퍼먹고 자빠지면 되니까]

[박태정 : 석경아 잘하자! 술 퍼먹고 자빠지기 싫으면]

[나만 솔깃한 거야? 술 퍼먹고 싶다]

[권윤조 : 그래? 그럼 우리끼리 마시자]

[박태정 : 술 마실 핑계 하나 더 늘었네]

[잘생긴 준영이 : ??? 그러니까 저기요???]

[농담이고 잘할게]

[권윤조 : 난 농담 아니야]

[잘생긴 준영이 : 아 왜 벌써 망한 것 같지?]

[박태정 : 내일 기절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거냐?]

[잘생긴 준영이 : 그래 ㅆㅂ 기절할 때까지 술 마시고 먼저 지치는 쪽이…]

[잘생긴 준영이 : 먼저 지치는 쪽도 술 퍼마시자]

[박태정 : 그래서 숙취해소는 환이 좋냐 음료가 좋냐? 학계에서는 뭐래?]

[잘생긴 준영이 : 몰라 씨바]

[잘생긴 준영이 : 다들 내일 필참해]

과팅은 전원 참석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동생 재경은 밤 10시쯤 집에 간다고 일어났다. 택시 타고 가라고 돈을 쥐여 주자 지하철 타면 된다며 거절했다.

“형.”

백팩을 어깨 한쪽에 걸치고 현관으로 향하던 재경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석경을 돌아봤다. 이제야 자취방에 불쑥 찾아온 본론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3주 정도 남았지?”

석경은 재경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3개월에 한 번씩 찾아오는 히트사이클. 다행히 석경의 주기는 정확한 편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염두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응.”

“그날, 집에 와 있을 거지?”

돌아오는 주기는 석경이 독립을 하고 처음으로 겪는 히트사이클이 될 터였다. 독립 전에는 가족들이 함께 사는 집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히트사이클을 견뎠다.

아버지는 석경이 따로 나가 살긴 하지만 히트사이클에는 당연히 집에 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경을 보냈을 테고. 하지만 석경은 집에 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귀뺨을 세 대 얻어맞은 뒤에 간신히 허락받은 독립이다. 쌍코피가 터지고 한동안 소란한 이명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뺨 세 대 정도로는 교환 조건으로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여기 있을 거야.”

“형.”

“아버지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면 의무적으로 협회에 등록을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철저하게 협회의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오메가는 알파에 비해 심리적으로 협회 등록을 꺼리는 편이지만 억제제를 구입하려면 협회 등록증이 필요해서 오히려 알파보다 더 신속하게 등록을 한다. 게다가 알파와 오메가는 병역 대상에서 제외가 되므로 등록을 기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간혹 등록을 미루고 있었더라도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신체검사와 함께 형질 검사도 실시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자진해서 협회에 등록한다. 벌금도 벌금이지만 괜히 협회의 관심을 사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봐야 본인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석경은 고2 때, 늦은 발현을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실시하는 형질 검사에서 당연히 베타 판정을 받았다.

아버지는 석경이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서류상에서라도 계속 베타로 남기를 원했다. 본인이 경영하는 약국에서 억제제를 입수할 수 있으니 굳이 번거롭게 등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제 아들이 공식적인 서류에 오메가로 표기되는 것이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을 테다.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석경은 읽었다.

아버지의 고집에 쓰다 달다 아무런 의견이 없던 어머니는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협회로 달려가 오메가 등록증을 받아왔다.

아버지는 석경의 히트사이클이 올 때마다 약국 문을 닫고 집에 들어앉아 석경을 감시했다. 발정 난 아들이 어디 가서 알파한테 매달려 다리라도 벌릴까 봐.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형 나는…….”

“재경아, 걱정하지 마.”

“걱정을 어떻게 안 하냐.”

재경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 이제 안 그래. 절대 안 그럴 거야.”

염려 말라는 듯 재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완고한 석경의 표정을 읽은 재경이 한숨과 함께 설득을 포기했다.

“약, 너무 많이 먹지 마. 요새 하루에 한 알씩만 먹고 있는 거지?”

“응.”

실상 하루에 서너 알씩을 먹고 있지만 공부하기도 바쁜 녀석이 괜한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할까 봐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루 서너 알이면 그나마 많이 줄인 거다. 발현 초기에는 강박 때문에 하루가 아니라 시간마다 한 알씩을 먹었었다. 의사는 그런 석경에게 억제제 과다 복용의 심각성과 위험에 대해 설파했다. 한 시간 가까이 위협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쉽게 요약하자면 신경계통이 망가져서 억제제 효과의 지속시간이 점차 단축된다는 거였다. 까딱 잘못하면 복용을 중지해야 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침방울을 튀겨 가며 말한 페로몬 조절 수단이 사라졌을 경우에 겪게 될 일들은 아찔하고 끔찍했다.

그래서 줄였다. 한데 벌써 어디가 잘못돼 버렸는지 하루 한 알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의사도 더는 한 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소견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이 이상 복용량을 함부로 늘리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대학생 됐다고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지 말고.”

말수가 적은 재경이지만 오메가인 형을 염려할 때만큼은 말이 많아지곤 했다. 석경은 동생의 잔소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꼭 자기가 형인 것처럼 구는 게 마냥 귀여웠다. 무뚝뚝한 녀석이 재롱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알았어, 인마.”

“남자도 조심하고.”

“이재경, 맞을래?”

“아, 왜. 남자 조심 안 할 거야?”

“빨리 가라. 형 열받기 전에.”

재경은 짓궂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소리를 듣다가 이윽고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남자를 조심하라는 재경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조하는 심정이 잠시 머물렀다. 그래, 남자 조심해야지. 특히 권윤조.

웃음을 지운 석경은 담담하게 새겼다.

* * *

“이석경, 과제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옆자리에 앉은 이수현이 태블릿의 스케치 어플에 끄적끄적 낙서를 하며 물었다. 학기 초에 공개된 강의계획서에 과제 내용과 기한이 올라와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미리 해 두려던 참이었다.

석경은 이수현이 끄적여 놓은 낙서에 눈을 두며 대답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나랑 자료 공유하자. 범위 정해서 자료 조사 분담해도 좋고. 어때?”

“좋아. 근데 논문 같은 거 참고해도 되나?”

“다들 그렇게 해.”

“그런가.”

그런가. 이수현이 태블릿 위에 석경의 반응을 그대로 따라 썼다. 의식의 흐름이 충실하게 반영된 이수현의 낙서가 웃겨서 석경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경아, 안녕.”

고개를 들자 너무도 눈부셔서 조명 반사판이라도 받은 것 같은 얼굴의 권윤조가 석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왔어?”

“초딩이냐? 안녕이 뭐야?”

이수현이 옆에서 톡 쏘았다. 그러면서 또 태블릿에 ‘석경아 안녕’이라고 낙서를 했다.

“이수현, 강의실 앞에서 누가 너 부르더라.”

권윤조가 이수현의 시비조에도 아랑곳 않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누구?”

“나야 모르지.”

“이상한데? 왜 직접 안 오고?”

“글쎄.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이수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이수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권윤조가 석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이수현이 앉았던 자리였다.

“어? 거기 이수현 자린데.”

권윤조는 태블릿을 비롯한 이수현의 소지품들을 한쪽으로 옮기고 제 전공 책을 올려놨다.

“이제 내 자리야.”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자 권윤조는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석경의 앞에 올려놨다. 일련의 행동들이 하나같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뒷자리에 앉은 준영과 태정이 귀신같이 캔커피를 발견하고 자기들도 달라며 성화를 부렸다.

“내 거는 없어?”

“응, 무거워서 하나만 사 왔어. 먹고 싶으면 알아서 사 먹어.”

“와, 배신감. 한 달 동안 말 걸지 마라.”

태정이 치사하다며 욕을 했다. 석경은 제 앞에 놓인 캔커피를 태정에게 줄 요량으로 손에 쥐었다. 그런 석경의 손목을 권윤조가 붙잡았다.

“너 마셔.”

“난 괜찮으니까 태정이…….”

“석경아, 너한테 준 거잖아.”

“…….”

“너한테만 준 거야.”

어쩐지 칭찬을 바라는 듯한 표정에 눈동자는 또 축축해 보일 만큼 빛났다. 대꾸할 말을 떠올리기 전에 마음이 먼저 눅눅해졌다.

‘너한테만 친절하면 돼?’ 저에게만 캔커피를 챙겨 주는 권윤조의 변화와 그 이유가 너무나도 뚜렷해서 부담스럽게 갑자기 왜 이러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붙잡힌 손목을 슬그머니 비틀어 빼내자 권윤조가 옅게 웃었다. 홀려 버린 석경은 심란한 기분을 애써 단속하며 고개를 돌렸다.

“권윤조, 밖에 나 찾는 사람 없는데?”

다시 돌아온 이수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 없어? 기다리다 갔나 보다.”

“권윤조, 너 진짜야? 나 찾는 사람 없었지?”

“있었어.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근데 너 왜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니?”

“내가 앉아 있으니까 내 자리지.”

“원래 내가 앉아 있었어.”

“이제 내 자리야. 그렇지, 석경아?”

둘이 꽁냥꽁냥 투닥거리는 행태가 거참, 정치인지 치정인지 헷갈렸다. 대충 치정으로 해석한 석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권윤조의 주장을 별로 거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수현은 권윤조를 노려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제 물건들이 놓여 있는 권윤조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준영과 태정은 PC방에 간다고 했다. 넷이 다 같이 가자고 이야기가 나왔지만 석경은 거절했고 뒤이어 권윤조도 다음에 가겠다는 말로 거절했다. 권윤조가 당연히 PC방에 따라갈 거라 예상했던 터라 석경은 당황스러웠다.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감정을 식히고 싶어서 그와 떨어져 있으려던 의도가 실패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간다고 할 걸 그랬다. 갑자기 말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강의실을 나가는 준영과 태정의 뒷모습만 넋 놓고 보는데 이수현이 말을 걸어 왔다.

“이석경,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석경이 되물은 게 아니었다. 권윤조가 석경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불쑥 끼어든 거였다.

“넌 알 거 없고.”

“우리 지금 같이 동방 갈 건데.”

“화장실이 아니라 동방이라 다행이다.”

“화장실도 같이 갈 건데?”

이수현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석경, 내가 진지하게 궁서체로 말하는데 너 권윤조랑 놀지 마.”

“응, 그러려고.”

석경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지만 농담으로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결국 권윤조는 자리를 피해 줬다. 아니, 피해 줬다기보다 이수현에게 쫓겨났다.

이수현이 석경을 따로 부른 이유는 예상대로 과제 때문이었다. 이수현은 과제 관련된 이야기 외에는 일체 잡담을 꺼내지 않았고 대화는 10분 만에 끝났다. 권윤조와 셋이 있을 때는 농담도 하고 실없는 말도 곧잘 하는 이수현은 석경과 둘만 있을 때는 딱 할 말만 했다.

이수현을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된 석경은 빈 강의실에 앉아서 권윤조가 준 캔커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마 내일도 주겠지. 모레는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또 주겠지.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그 후로도 계속.

권윤조는 친절이 아니라고 했다. 이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캔커피가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두려웠다. 어느 정도냐면 마시기가 아까웠다. 캔에 날짜를 표기해서 고이 보관하고 싶었다. 이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야.

이 소중한 애물단지를 어쩌면 좋을까 고뇌를 한답시고 빈 강의실에 앉아는 있는데 기쁘면서도 설레는, 아슬아슬하고 두근거리는 그런 생소하고 달뜬 감각만이 석경을 에워쌌다.

한동안 앉아 있던 석경은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섰다.

석경의 발걸음은 동방으로 향했다. 동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권윤조 혼자 동방을 지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권윤조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석경아, 왔어?”

“응.”

권윤조는 석경에게 아주 잠깐 눈길을 주고 계속 심각한 얼굴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는 듯한 분위기라 석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말을 걸 기회를 엿봤다. 다음부터 캔커피 사 오지 마. 얼굴을 보자마자 이 말을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들어왔는데 한번 타이밍을 놓쳐 버리자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졌다.

석경은 벌이라도 서는 기분으로 권윤조를 힐끔거렸다. 권윤조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아…….”

권윤조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탄식을 내뱉었다.

“쌌네.”

쌌다고? 뭘? 석경은 눈동자를 굴렸다. 이윽고 권윤조가 인상을 찌푸리며 노트북 뚜껑을 거칠게 닫았다.

“왜, 무슨 일 있어?”

호흡을 가다듬은 석경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아니? 없는데?”

“분위기가 심각해 보여서 무슨 일 있나 했지.”

“아, 고스톱 쳤어.”

“…….”

권윤조는 언제 심각했냐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석경은 갈등했다. 방금 전까지 인터넷 고스톱을 치면서 세상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권윤조에게 제 중요한 의지를 전달해도 되는 것일까. 이석경, 너 겨우 캔커피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너 혼자 왜 이렇게 심각한 거야? 이건 그냥 캔커피잖아. 어쩐지 말을 꺼내면 유난이라는 반응이 되돌아올 것만 같았다.

“석경아, 이수현이랑 뭐 했어?”

“얘기했어.”

“무슨 얘기 했는데?”

권윤조는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걸까. 이수현의 일이라면 사사건건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아까도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수현을 일부러 떨어뜨려 놓았다는 걸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석경을 견제라도 하는 듯이. 졸지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방해물 취급을 당한 셈이다.

진짜 둘이 썸이라도 타는 건가. 그럼 어제 그 소꿉친구는? 심지어 오늘은 과팅도 잡혔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는 게 권윤조의 연애 스타일인가 싶었다. 여지없이 복잡한 그의 여자관계를 떨떠름한 심정으로 헤아리는 사이 아주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서로의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석경은 헉, 소리를 꾹 눌러 삼키며 뒤로 확 물러났다. 그래도 여전히 가까웠다. 물끄러미 보는 눈길에 숨이 차올랐다. 놀라서 저리 가라는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권윤조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석경아, 이수현이랑 무슨 얘기 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언뜻 스산했다.

“그, 그냥, 과제…….”

“과제?”

“으응.”

“그렇구나.”

“권윤조.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또 뭐?”

어제 일을 떠올렸는지 권윤조가 물음 끝에 웃음을 붙였다.

“앞으로 캔커피 사 오지 마.”

“왜?”

“네가 캔커피를 사 오면 나도 너한테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데, 그런 거 마음 쓰이고 부담스러울 것 같아.”

“…….”

권윤조는 말없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몹시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의 무던한 태도가 석경의 유난을 부각시켰다.

“……권윤조?”

“응, 말해. 듣고 있어.”

“끝인데…….”

말끝을 흐리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보답 안 해도 돼.”

“해야 돼. 얻어만 먹고 입 씻을 수는 없으니까 너한테 밥이라도 사야 하는데 내 재정 상태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야. 너 밥 사 주다가 개털 돼서 용돈 받을 때까지 손가락만 빨 수도 있어. 그니까 우리 서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말자.”

거의 숨도 안 쉬고 쏟아냈다.

“…….”

“……내 말, 알아들은 거지?”

계속 웃기만 하고 딱히 대꾸가 없는 권윤조를 채근했다.

“응, 말해. 듣고 있어.”

“너 왜 웃어. 나 되게 진지한데.”

“안 웃을게. 계속해.”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는데.”

“그럼 이제 내가 말해도 돼?”

“……어.”

“내가 앞으로 캔커피도 사 주고 밥도 사 줄게.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지?”

석경은 하마터면 목뒤를 잡을 뻔했다.

“내 말은 아무것도 주고받지 말자고.”

“아, 그건 힘들 것 같아.”

“왜?”

“그러기 싫으니까.”

순전히 막무가내였지만 거기에 대해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단호한 얼굴을 보며 석경은 어떤 이견도 달 수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아까 이미 다 했고 입을 열어 봐야 같은 말만 반복할 터였다. 석경은 결론이 같은 대화, 어쩌면 과정도 같을, 기 빨리는 대화를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 * *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고 했는데 빗방울 하나 구경하지 못하고 저녁을 맞이했다.

“야, 뭐라도 시킬까?”

석경을 포함한 과팅 멤버 넷은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왁스로 어색하게 머리에 힘을 준 준영이 다소 긴장된 낯으로 물었고 태정이 받았다.

“뭐 시키게? 술?”

“먼저 마시기는 좀 그렇고.”

“그럼 안주?”

“그냥 얌전히 기다리자.”

“정각에 오자니까.”

“박태정, 너 미팅 같은 거 처음 하지?”

“어.”

태정을 향해 비웃음을 날린 준영은 이런 좆밥을 보았나, 로 시작해서 신나게 입을 털어댔다.

“원래 미팅하면 남자 쪽에서 최소 두 시간은 먼저 와서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리고 여자분들이 오시면 기립 박수로 맞이한 다음, 큰절을 세 번 올려야 돼. 명심해. 세 번이야. 두 번 하면 미팅은 망하는 거야. 알아들었지? 부탁인데 잘하자 진짜.”

“와, 나는 그런 중요한 사실도 모르고. 미리 알려 줘서 고마워, 라고 할 줄 알았냐? 씹새끼야?”

“안 속네.”

이후로도 준영과 태정의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권윤조는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대화에 섞이기도 했다. 석경은 그런 권윤조를 훔쳐보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며 자주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났다.

“야, 쟤네 같아. 개떨려. 내가 워낙 냉미남이라 싸가지 없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저기요. 냉미남이라는 단어가 방금 능욕당한 것 같은데요.”

준영은 태정의 반박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애들도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맞죠? 기계공학과.”

“네, 맞아요. 반갑습니다.”

기립 박수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막 도착한 여자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고 착석을 하자 죽을 만큼 어색해졌다. 서로 투닥거릴 때는 입이 열 개쯤 되는 것 같던 준영과 태정의 입이 갑자기 사라졌다. 석경은 서둘러 알바를 불렀다.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밤이 깊어지고 술이 돌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배가 불러서 술이고 뭐고 못 먹겠으니 맥주에서 소주로 종목을 바꾸자는 얘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자리 배치에도 변화가 있었다. 나란히 앉아 멀뚱멀뚱 서로 마주 보고 있던 각각의 성별이 조화롭게 섞였다. 석경의 양옆에는 권윤조와 준영이 아니라 국문학과 여자애들이 앉게 됐다.

“다들 잔 채웠지?”

준영이 7개의 술잔을 훑었다. 양이 들쑥날쑥했지만 빈 잔은 없었다. 잔에 술이 얼마 없어도 여자면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듯했다.

“이 중에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지금 바로 원샷 하기.”

표정들이 다들 묘했다. 눈치 게임처럼 정적이 흘렀다. 잔을 만지작만지작하는 얼굴들에 하나둘 미소가 걸렸다. 석경은 딱히 관심 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예의상 마실 생각이었다. 다만 스타트를 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었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권윤조가 제일 처음으로 술잔을 비우며 물꼬를 텄다.

“오오!”

탄성을 내뱉은 준영도 뒤따라서 원샷 했다. 이후로 원샷이 줄을 이었다. 석경도 틈에 섞여서 술잔을 비웠다. 결과는 전원 원샷이었다. 유독 권윤조의 빈 잔이 석경의 눈에 박혔다. 깨끗이도 비웠네.

석경은 그제야 여자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각을 쟀다. 이 중에 있단 말이지. 권윤조가 관심 있는 사람이.

단체 원샷 이후로 분위기가 이전보다 다섯 배 정도 들떴다. 특히 여자애들의 목소리에서 설렘과 기대가 묻어났다. 반면 석경의 기분은 다섯 배 정도 가라앉았다.

여자애들이 하나같이 권윤조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꾸 속이 좁아졌다.

석경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홍 니트의 여자애가 맞은편에 있는 권윤조에게 방울토마토 하나를 건넸다.

“안주도 먹어.”

석경은 저만 그 모습을 목격한 줄 알았는데 누구 하나 빠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술자리가 주말드라마 안방 1열로 변했다. 열혈 애청자 모드로 앞으로 펼쳐질 전개를 궁금해했다.

“고마워.”

남주, 아니 권윤조가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며 1차로 성의에 보답했다. 그리고 방울토마토를 받아 입에 넣는 것으로 2차로 성의에 보답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맛있다.”

3차로 환하게 웃으며 방울토마토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여자애의 얼굴이 방울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진짜?”

“응, 진짜.”

이렇게 빠르고 간단하게 서사가 하나 생성됐다. 몰입하게 만드는 힘과 개연성이 권윤조를 에워싼 분위기와 외모로 퉁쳐졌다. 권윤조의 사소한 친절은 깊은 서사가 되었고 세상 의미 있는 신호가 되었다.

싱숭생숭했다. 기어 나와서는 안 될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질투. 서운함. 도대체 내가 뭐라고? 그런 감정을 느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석경은 알고 있었다. 감정이든 뭐든 식히려고 과팅에 나왔는데 되레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석경은 분위기에 녹아들려고, 권윤조가 아닌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져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한데 분홍 니트 여자애와 권윤조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

맛있나. 방울토마토. 방울토마토가 방울토마토지 뭐겠어. ‘진짜’ 맛있는 방울토마토는 대체 어떤 맛이지. 석경은 딱 하나 남은 방울토마토를 노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먼저 뻗어 나온 분홍 니트 여자애의 손이 방울토마토를 집어 갔다. 석경은 자연스럽게 손의 경로를 바꿔 다른 안주를 집었다.

“여기 소주 세 병 주세요. 어묵탕 시킨다? 어묵탕도 주세요.”

결국 맥주에서 소주로 바꿨다. 소주를 들이켠 분홍 니트 여자애가 술잔을 내려놓고 권윤조에게 물었다.

“이 중에 관심 있는 사람 있다고 했지?”

“응.”

“혹시 누군지 말해 줄 수 있어?”

“아니.”

“……왜?”

“아직은 말할 용기가 안 나서.”

“풉!”

태정이 술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를 뿜었다. 더러워 죽겠다는 준영의 노골적인 핀잔이 이어졌고 태정은 분주한 손길로 테이블을 닦았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애의 눈이 기대로 빛났다. 기대의 근거는 권윤조의 수줍은 미소임이 분명했다. 특별한 신호 이하의 무언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쟤는 꼭 저렇게 웃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보는 사람 침샘 아프게. 사람이 사람을 아프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어마어마한 쌍놈’, 그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권윤조는 미소만 지어도 유죄인 거다.

석경은 권윤조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어묵탕 나왔습니다.”

맥주 안주가 사라진 테이블 위에 휴대용 버너가 올라왔다. 뒤이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어묵탕이 등장했다. 냄비를 나르는 알바생의 손길이 지켜보기에도 약간 불안한가 싶더니 냄비가 한쪽으로 휙 기울었다.

“앗! 뜨거워!”

분홍 니트 여자애가 비명을 질렀다. 뜨거운 국물이 테이블로 쏟아지면서 가까이 있던 여자애 쪽으로 튄 모양이었다. 여자애는 테이블 모서리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뜨거운 국물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렸다. 아까 전 태정이 피운 난리는 이제 보니 난리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얼음! 빨리 얼음 좀 갖다 주세요!”

주방으로 달려간 알바생이 커다란 피처에 얼음을 가득 채워 왔다. 물수건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왔는지 대여섯 개 정도 됐다. 알바생이 행주로 테이블을 깨끗이 닦아내는 사이 물수건으로 만든 얼음주머니가 여자애의 발개진 손등에 올라갔다.

“괜찮아? 화상 연고라도 사 올까?”

석경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애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살짝만 데었어.”

밝게 웃어 보인 여자애가 권윤조를 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진짜 괜찮아.”

“나랑 자리 바꿀래.”

유난히 눈이 굳어 있던 권윤조가 여자애를 향해 말했다.

“응? 여기 깨끗하게 닦아 놔서 굳이 안 바꿔 줘도 돼.”

“미안. 자리 좀 바꿔 줘.”

물러나지 않고 재차 청해 오자 여자애는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자리를 바꿨다. 석경의 옆자리에 앉은 권윤조가 깨끗한 물수건을 집어 들고 얼음주머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의문이 모두에게 번졌다.

“이거 얼음 녹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분홍 니트 여자애가 얼음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민망한 듯 기쁜 웃음을 지었다. 권윤조가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꾸했다. 알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얼음주머니의 행방에 이목이 쏠렸다.

“윤조야, 너도 데었냐?”

태정이 물었다.

“아니.”

짧게 부정한 권윤조는 얼음주머니를 든 채 석경 쪽으로 몸을 틀고,

“손 이리 줘.”

석경의 손등에 시선을 툭 던지며 말했다.

“……어?”

“손 달라고.”

“…….”

미동을 않자 권윤조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 석경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그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물집 올라왔네.”

“…….”

범위가 작긴 했어도 뭐가 올라오긴 올라왔다. 화끈화끈한 통증으로 절절 끓던 석경의 손등 위에 얼음주머니가 내려앉았다. 냉기 덕분에 화끈한 열감이 조금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권윤조가 깊숙이 눈을 마주하고 물어왔다. 표정이 약간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석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작게 말했다.

“내가 할게.”

권윤조에게 붙잡힌 손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만큼은 상대해 볼 수 있는 만만한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경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손을 내어 주는 것뿐이었다.

“…….”

“…….”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공기가 테이블을 에워쌌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부터는 자취를 감췄던 침묵에 도로 파묻혔다. 어색하기보다 기묘한 침묵이었다. 게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이쪽으로 몰려 있는 시선들. 정확히는 권윤조에게 꽉 붙들린 석경의 손에 꽂혀 있는 시선들.

숨통이 조여 왔다. 술을 더 주문하든지 급하게 팅, 팅팅팅! 탱, 탱탱탱! 프라이팬 놀이라도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석경아, 말을 하지. 나는 너 다친 줄도 몰랐다.”

준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건너다보며 침묵을 깼다.

“별거 아냐.”

“둘 다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다. 우리 술 게임할까?”

다행스럽게도 태정이 까불거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석경의 숨통도 조금씩 트였다.

태정은 손병호 게임을 주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미팅 처음 나온 사람 접어.”

“이름에 ‘준’자 들어가는 김준영 접어.”

“야이, 반칙이잖아!”

“뭐가?”

준영이 씩씩거리며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같은 게임을 몇 차례 더 반복했다. 게임을 하다 보니 시간이 도둑맞은 것처럼 잘 갔다.

권윤조는 얼음이 녹아 바지가 젖어 들어가도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석경은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게임에 동참했고 간혹 술잔을 들기도 했다. 권윤조도 자유로운 손 하나로 손가락을 접고 술잔을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문득 분홍 니트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꽤 오래 석경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여자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모습에 오히려 제가 난처해져서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이자 여자애가 못 볼 거라도 본 듯 미간을 찡그리며 황급히 눈을 피해 버렸다.

석경은 어설프게 웃은 채로 굳어 버렸다. 방금 뭐지. 웃으면 안 되는 거였나. 내 웃는 얼굴이 그 정도로 심한가. 여자애의 태도가 사뭇 여운으로 남았다.

“권윤조, 이제 석경이 손 좀 놓으면 안 되냐? 그러다 동상 걸리겠다.”

준영의 말에 권윤조가 드디어 얼음주머니를 떼어냈다. 석경은 얼른 손을 가져왔다.

“많이 차가웠어?”

“아냐.”

“손 이리 줘 봐.”

“정말 괜찮아.”

염려가 가시지 않은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석경은 괜히 안주를 챙겼다.

“석경아, 너 뭐 하냐?”

무심코 안주를 입으로 후후 불고 있는데 준영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응?”

“쟤가 왜 저러지……. 아니 왜 황도를 식혀 먹구 있어?”

“……아.”

“하하, 미치겠다. 이석경 취했나 보다.”

웃음소리가 터졌고 귀가 뜨거워졌다. 열기가 얼굴까지 번지기 전에 석경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바람 쐬고 올게.”

소음을 뒤로하고 술집을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뜨거워진 귀를 식혀 주었다. 하필이면 황도를 왜. 어묵도 있었는데. 어묵은 뜨거웠을 텐데. 준영이 말대로 벌써 취한 건가. 희번덕거리는 LED 조명들의 윤곽이 흐릿하게 뭉개져 보이기는 했다.

술집 건물 옆에 엉덩이를 걸치기에 안성맞춤인 화단이 있었다. 석경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내내 붙잡혔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태연하려고 노력했는데 과연 그렇게 보였을지 신경 쓰였다. 능숙하게 태연하고 싶고, 태연하게 능숙하고 싶은데 저는 그게 잘 안 되는 인간 같았다. 자신이 그런 인간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감정을 식히는 것도 이렇게나 서툰지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 식히려는 시도를 하기나 했던가. 석경은 어묵탕 국물이 튄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과팅에는 도대체 뭐 하러 나왔지. 식히고 싶은 건지 달구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얼음주머니는 아무런 신호도 되지 못하는데 자꾸만 그 속을 기웃거리려 드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사실은 좋았다. 손등에 얼음주머니를 대 주던 권윤조의 다정함이 설렜다. 가끔 우연하게 시선이 얽힐 때마다 석경이 먼저 눈을 피하기 전까지 서로 하염없이 마주 보고 있게 되는 순간들도 간지러웠다. 좋았으면 된 거야. 설렜으면 된 거야.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보도블록을 노려보며 자꾸만 위로 향하려는 입꼬리를 내리고 입술을 꾹 물었다.

아니다. 좋아해서도 안 되고 설레서도 안 되는 거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여기 있었네.”

석경은 고개를 들었다. 권윤조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막 애타는 기다림을 끝낸 듯한 눈빛으로. 줄곧 저만 찾아온 듯한 눈빛으로. 오해를 부르고 착각을 낳는 권윤조의 눈빛이 문제라는 것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다.

“……으응.”

“안 추워?”

내려다보는 눈길이 다정했다. 옆에 앉을 생각은 없는지 팔짱을 낀 채 짝다리까지 짚고 서 있는 자세가 느긋했다. 석경은 다정한 눈길이 묻은 볼을 쓸며 말했다.

“술 깨야 되니까.”

“응.”

“또 황도 불어 먹으면 안 되니까.”

머리 위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석경은 머쓱해져서 따라 웃었다.

“근데 석경아.”

“…….”

“누구야?”

“뭐가?”

“관심 있는 애.”

“…….”

멍해졌다. 아니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한참 생각했다. 뭘 들킨 건가 싶어서 숨이 가빠졌다.

“아까 술 원샷 했잖아.”

말뜻이 겨우 선명해졌다. ‘이 중에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지금 바로 원샷 해’ 술집 안에서 있었던 일을 꺼낸 것이다.

“아.”

“누군데. 네가 관심 있어 하는 애.”

목소리만 들으면 성의 없이 툭 던져진 질문 같았다. 석경이 누굴 관심 있어 하는지 한 톨의 관심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 그냥 예의상 마신 거야.”

“그래?”

“안 마시면 좀 그렇잖아.”

“응.”

“재수 없잖아. 눈 높아 보이고.”

솔직히 말했다. 개중 아무나 골라 거짓으로 대답해서 질문의 의도를 떠보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런 유혹이 처음에 불쑥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더욱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그런가?”

땅을 보고 있던 눈을 들자 권윤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히익, 깜짝이야!”

뭐야, 시발.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당할 때마다 매번 놀라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하하하!”

“야, 너 좀 떨어져.”

심장 터진다고. 석경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권윤조는 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펴고 더없이 유쾌한 미소로 석경을 내려다봤다.

“석경아, 너 되게 잘 놀란다.”

“네가 놀랄 만한 짓을 했잖아.”

“내가 뭘 했는데?”

“면상을 가까이 들이댔잖니.”

“얼굴이 가까워서 놀란 거야?”

“그래.”

“석경아, 너 그럼 키스할 때도 그렇게 깜짝 놀라고 그래?”

“뭐?”

권윤조는 놀라서 살짝 벌어진 석경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무구한 얼굴로 웃었다. 석경은 입술을 감쳐물어 권윤조의 시선으로부터 입술을 숨겼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어느덧 웃음을 그친 권윤조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석경의 양 볼을 잡아 쥐었다. 아니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양 볼을 틀어쥔 힘은 점차 세졌다. 악력에 굴복하여 결국 입술이 억지로 벌어졌다.

석경을 바라보는 권윤조의 눈에서 이상한 변화가 감지됐다. 권윤조는 오리주둥이처럼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온 석경의 입술을, 아니 입술 안쪽에 숨겨진 혀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그의 눈빛과 자신의 혀가 난잡하게 엉키는 느낌이었다.

“석경아.”

얼굴이 아니라 심장을 꽉 붙잡힌 느낌이었다. 혀가 아니라 속마음을 보인 느낌이었다. 혀뿌리가 심장처럼 파닥거렸다. 전신을 싸고도는 무력감에 눈물이 다 나오려고 했다. 잔뜩 쫄아서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파르르 떨며 손을 쳐내자 권윤조는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버럭 화를 내려고 했는데 흘러나온 목소리는 맥이 하나도 없었다. 눈꼬리에 날을 세워 쏘아보려고 했는데 눈가가 흐물흐물했다.

“석경아, 초콜릿 사러 갈까?”

초콜릿 말고 우황청심환을 사러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나 이제 쟤한테 화 못 내는구나. 좋아하니까 을인 거다, 나는. 부럽게도 쟤는 갑이고.

갑과 을의 차이는 확연했다. 권윤조는 제 얼굴을 아무 때나 틀어쥘 수 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그 무엇도 손에 쥘 수 없었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깨닫고 인정하니 마음은 편했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내버려 두는 대신 좋아하는 마음에 조건을 붙였다. 좋아하되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석경은 제 분수를 알았다. 분수는 아는 게 아니라 깨닫는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감정이 편안하게 흐를 수 있게 몇 줄기 뿌리내렸던 싱숭생숭한 질투도 도려냈다. 최승희, 이수현, 분홍 니트, 어마어마한 쌍놈(?). 뿌리째 뽑아냈다.

그럭저럭 명쾌해진 석경은 말없이 일어났다. 권윤조가 커다란 손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주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지지 묻었다.”

지지, 란다.

“지지? 뭐래.”

“하하.”

시원하게 웃는 권윤조가 미치도록 좋았다.

그래.

좋으면 된 거야. 설레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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