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른 점심을 먹고 나니 5교시 수업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네 사람은 식곤증도 달랠 겸 카페로 향했다. 권윤조가 밥을 샀기 때문에 카페에서는 석경이 계산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정이 만류했다. 태정이 사려는가 보다 했는데 정작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사람은 권윤조였다. 석경이 당황하자 권윤조가 싱긋 웃으며 ‘내가 다 감당한다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그게 그거였어? 그렇다고 다른 종류의 감당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진짜 갈구는 거인 줄로만 알았다. 반어법 좋아하는 권윤조. 석경은 머리에 입력된 데이터를 지우고 다시 썼다. 인성까지도 잘생긴 권윤조.
태정이 권윤조의 신용카드를 손에 쥐고 주문을 취합했다.
“김준영이랑 이석경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음료 픽업해서 갈게. 먼저 올라가 있어. 윤조 너는 청포도 에이드 마실 거지?”
“응.”
어? 어어? 석경이 약간 커진 눈으로 권윤조를 쳐다봤다.
“왜.”
뭐 할 말 있느냐는 표정으로 마주 보는데 막상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를 만큼 기분이 묘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태정을 제외한 세 사람은 2층으로 올라와 카공족들을 피해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석경은 온통 청포도 에이드에 꽂혀서 무슨 정신으로 2층에 올라왔는지 기억도 안 났다. 청포도, 그거 내 페로몬 향인데. 지질한 생각으로 앓다가 익숙한 듯 물었던 태정의 말투를 떠올렸다. 권윤조의 오래된 취향 같았다. 당연히 석경을 만나기 전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자 군더더기 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권윤조, 너 청포도 좋아해?”
뭐에 홀린 듯이 하얗게 질려 있다가 편해진 얼굴로 묻자 권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일 좋아해.”
흐뭇해할 일이 아닌데 석경은 사실 좀 흐뭇했다. 억제제 효과로 권윤조가 자신의 체향을 맡을 일은 없을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흐뭇할 수 있었다. 반대라면 흐뭇하기는커녕 참을 수없이 민망해서 피해 다니거나 권윤조가 저로 인해 청포도를 싫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느라 진을 다 뺐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그나저나 청포도를 ‘제일’ 좋아한다고? 권윤조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을 알게 됐을 뿐인데 마치 그의 전부를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중에 입꼬리가 올라가다가도 고양감을 억누르기 위해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살다 보니 내가 게임으로 권윤조를 다 이겨 보네. 이석경, 이 기특한 녀석! 졌지만 잘 싸웠다!”
음료를 가져온 태정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픈 곳을 건드렸다. 석경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들이켜며 태정을 슬며시 노려봤다.
“박태정 입 조심해. 이석경 현피 체질이니까. 합기도 유단자야, 얘.”
“진짜?”
“석경이 우리 학교 불주먹이었어.”
“헐, 미친. 이석경 애들 패고 다녔어?”
준영과 태정의 대화에 석경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되냐?”
“아무도 안 팼지. 다들 알아서 기었으니까.”
준영이 깐족거렸다. 태정이 석경의 얼굴을 보며 표 나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이석경 주먹이 불주먹이라는 거네?”
“아니라고.”
“잘 보여야겠다.”
“아니라니까.”
“그래서 말술을 마셨구나.”
태정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술이 왜 나와? 석경은 무언가 더 말을 보태는 걸 포기하고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준영의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석경은 불주먹이라는 감투를 쓸 만큼 싸움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 학교에서 굳이 주먹을 휘두를 일도 없었다. 입학 초기에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을 제압했던 일은 있었다. 그 이후로 제 앞에서 알아서 긴 것까지는 아니지만 저를 함부로 건드는 애들은 없었다.
석경이 빨대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든 순간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석경의 손등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권윤조의 눈길이 어쩐지 진실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툭 불거진 뼈마디에서 투박한 굳은살을 찾는 중일지도 몰랐다.
“진짜 아니야. 이따 김준영 죽여 버릴 거야 내가.”
“석경아,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권윤조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 말 안 하니까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을 권윤조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몰라야 한다.
석경은 권윤조가 뭐라 말을 해도 신경이 쓰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신경이 쓰였다. 친구 이름을 누가 저렇게 간지럽게 발음한단 말인가. 김미연의 오해는 백 번 타당했다.
툭 떨군 눈길 끝에 이슬이 맺힌 유리잔을 매만지는 권윤조의 기다란 손가락이 있었다. 원래도 잘 못하는 게임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못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키보드 위에서 춤추는 기다란 손가락이 종종 석경의 시선을 붙들곤 했었다.
“5교시 수학이지? 내가 대학 와서도 미적분 수식 외우다 대가리 깨질 줄은 몰랐네?”
태정이 미간에 주름을 패며 말했고 준영이 혀를 찼다.
“설마 미련하게 그걸 다 외우냐. 중요한 것만 외워.”
“미적 왜 하지. 안 하면 안 되나.”
“미적을 해야 공업수학을 하니까.”
“공업수학은 왜 하는데.”
“그래야 공학을 하지.”
“공학이 잘못했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미적분을 싫어하는 사람과 미적분을 존나게 싫어하는 사람. 태정아, 너는 아무래도 후자 같아.”
“어? 나 미적분 존나게 사랑하는데?”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볼래.”
“문제는 미적분이 날 안 사랑하네. 타임머신 타고 라이프니츠 조지러 갈 김준영 구함.”
“잠깐, 미적분 발명한 거 뉴턴 아니야?”
말없이 있던 석경이 슬쩍 끼어들었고,
“뉴턴? 만유인력? 그 양반이 미적분을 할 줄 안다고?”
권윤조도 고개를 갸웃하며 동참했다. 그리고 그때 권윤조의 무릎이 석경의 무릎에 닿았다.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발명을…….”
맞닿은 무릎에 신경이 쏠려 점차 흐려지는 석경의 말끝을 준영이 툭 자르며 튀어나왔다.
“뭐야, 권윤조. 이과 나왔으면 그 정도는 다 아는 거 아님?”
“그럼 나 문과 나왔나 보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 스파이! 문과 씹새끼 해봐.”
“이과 씹새끼.”
“저기, 맨 앞 글자가 틀렸는데요.”
“윤조 절반은 문과 맞아. 고3 올라오면서 이과로 전과했거든.”
태정의 놀라운 제보가 있었다. 석경과 준영의 고개가 동시에 권윤조에게 향했다. 그 말이 사실이냐는 무언의 질문이 있었고 사실이 맞는다는 무언의 대답이 침묵 속에서 잠시 동안 오고 갔다.
그러는 사이 석경은 맞닿았던 무릎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방금 같은 접촉이 또 일어나지 않게끔 다리를 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맞닿아 있었을 뿐인데 아주 오래 시달린 것처럼 무릎이 뻐근했다.
“근데 쟤 수학이랑 과탐 점수 나보다 높았어.”
이어지는 태정의 제보에 네 사람이 사이좋게 수능 점수를 깠다. 총점 말고 수학하고 과탐만. 서열이 정해졌다. 석경이 가장 위였고 권윤조, 준영, 태정이 차례대로 뒤를 이었다.
졸지에 문과 출신에게 밀린 태정과 준영이 서로를 염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정아, 어쩌냐. 수학이랑 물리 못 따라가면 공대에서 버티기 힘들 텐데.”
“넌 교수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는 듣니?”
“수업 시간 원래 멍 때리는 시간 아니야? 문제만 잘 풀면 되지.”
“솔루션 베끼려고? 기계 왜 왔냐? 설마 전자기기 덕후라 온 건 아니지?”
“넌 솔루션 봐도 모르잖아. 그냥 전과해라, 태정아. 복전 하든지.
“아냐. 수능 다시 봐서 의대나 가야겠어.”
“친구는 때리면 안 되겠지?”
“때리지 마. 아픈 거 짱시룸. 그리고 우리 슬슬 들어가야 돼.”
태정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트레이를 반납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 넷이서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무나 해도 되는 일이지만 그 아무나가 본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므로 공정하게 가위바위보를 한 것이다. 한 판 만에 당번이 가려졌다. 석경이었다. 그것도 게임이라고, 어쩌면 가위바위보마저도 못하냐는 비웃음을 남기고 준영과 태정은 먼저 휙 나가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하려는데 권윤조가 먼저 트레이를 가로챘다.
“왜 네가 들어? 이리 줘.”
“됐어. 이깟 게 뭐라고.”
석경은 등을 돌려 걸어가는 권윤조의 등을 멍하니 보다가 황급히 쫓아갔다.
“내가 졌으니까 달라고.”
“컵 깨진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알았다면 결코 멍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석경은 하는 수없이 트레이를 빼앗으려던 손길을 거두었다.
석경은 트레이를 반납하고 빈손이 된 권윤조를 말없이 쳐다봤다. 권윤조의 매너가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권윤조 말마따나 ‘이깟 거’라서 말을 아끼게 됐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권윤조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 고마운데.”
“그래, 고마워하지 말라고.”
권윤조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겨진 석경은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준영이가 가위바위보에서 졌어도 대신 들어 주려고 했어? 속에 삼킨 말을 곱씹는 사이 권윤조의 매너가 선을 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오메가라서? 의심을 거치자 무의식중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로부터 세뇌된 마초 기질이 저항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연약하고 가여운 인간으로 보이는 것은 싫었다.
연약하고 가여운 것은 호감보다는 동정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정을 베풀면서 자기만족을 얻는다. 그럼 동정을 받은 쪽은 꼼짝없이 자위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석경은 권윤조의 친구이고 싶지 자위 도구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차라리 고딩 때 불주먹이었다고 준영의 장난에 동참할 걸 그랬나. 트레이를 대신 들어줄 마음이 들 정도로 못 미더운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았다.
기분이 침울해지려고 했다.
* * *
카페에서의 일을 기점으로 뭔가가 달라졌다. 뭐가 달라졌느냐 하면, 저를 대할 때 미묘하게 데면데면한 그림자가 남아있던 권윤조가 온통 햇살이 되었다. 마치 깊어가는 봄 날씨처럼 권윤조의 친절은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졌다. 그 변화를 석경이 의식하면서 둘의 관계도 조금 달라졌다.
석경은 친절에 섞인 불순물, 즉 ‘다른 취급’이나 ‘동정’을 의심했지만 그 고민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자의식 과잉이 빚은 착각임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카페 사건 다음날, 그러니까 석경이 ‘다른 취급’에 대해 한창 예민한 상태였던 날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다. 권윤조도 같이 듣는 수업이었고 석경은 강의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책상에 엎드려 있었던 석경은 옆자리에 앉는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피곤해?”
권윤조는 1교시 강의실의 침체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석경에게 말을 걸었다. 석경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권윤조는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석경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셔. 아직 따뜻할 거야.”
엉겁결에 캔커피를 받았다. 따뜻했다. 마시지는 않고 가만히 손에 쥐고 있는데 권윤조가 손수 뚜껑까지 따 주었다. 석경은 어쩐지 들떠 보이는 권윤조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낮게 흘러나온 석경의 목소리에 웃음기 가득했던 권윤조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어?”
“이거 나한테 왜 주는데?”
솔직히 말해. 그래서 내가 네 자위 도구야, 아니야? 석경의 속내는 훨씬 격렬했다.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는 듯 권윤조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룻밤 동안 벼른 감정까지 실어 곱지 않은 눈길로 권윤조를 바라보고 있는데 태정과 준영이 소란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석경, 커피 뭐야? 비싼 커피 뭐야? 비싸고 맛있는 커피 뭐야? 치사하게 혼자 마시냐?”
준영이 캔커피를 노리며 와악와악 시끄럽게 다가왔다. 석경은 그 와중에 커피를 사수하기 위해 캔을 쥔 손에 힘을 꽉 실었다. 권윤조에게는 이거 왜 주냐는 식으로 굴었지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김준영, 네 거도 있어.”
그때 권윤조가 가방 속에서 캔커피 두 개를 꺼내 준영과 태정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아. 두 개의 캔커피를 좇는 석경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준영과 태정은 고맙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거 나한테 왜 주냐는 얼빠진 질문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석경은 방금 전 예민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캔커피 하나에 프러포즈 반지라도 받은 것처럼 반응한 저를 보며 권윤조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쓱해진 석경은 얌전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꽃샘추위에 떨고 있던 석경의 손에 권윤조가 핫팩을 쥐여 주었다. 불쑥 퍼지는 따뜻함에 멍해졌다가 추슬렀을 때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는 넓은 등이 보였다. 그리고 싱숭생숭해 할 겨를도 없이 태정과 준영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핫팩의 온정 역시 보였다.
석경이 무거운 전공 책들을 한 품 가득 안고 있으면 언제 가져갔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권윤조의 품으로 옮겨가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석경에게만 해당되는 친절은 아니었다. 생색 따위 없이 무심하게 제 짐을 들어 주는 권윤조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 동기들의 모습을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니까.
어느 날인가는 석경이 지나가는 말로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맛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날 권윤조는 동방에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아니 왜 치약 맛 아이스크림을 사 왔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왜 우리 민초 기를 죽이고 그래?’ 극명하게 갈리는 호불호 속에서 권윤조는 석경의 호불호를 궁금해했다.
“어때?”
“맛있네.”
“진짜?”
“아니.”
두 번 만에 솔직해지는 석경을 보며 권윤조는 저 혼자 크게 웃었다.
권윤조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사심 없이 친절했다. 가끔은 친절이 아니라 봉사활동으로 보일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권윤조가 석경에게 친절하려고 친절한 것이 아니라, 석경이 운 좋게 권윤조의 친절 혹은 봉사활동에 수혜를 입는 거였다.
석경은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해내려 노력했다. 따라서 소멸된 동정에 기뻐했고, 특별함을 잃은 친절에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간지러운 감각이 신경은 쓰였어도 썩 나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상적이고 공평한 친절이 쌓여 갔고, 석경은 그 친절에 점차 익숙해졌다.
* * *
“석경아.”
강의실 앞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권윤조가 석경을 보자마자 이름을 불렀다. 석경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권윤조에게 다가갔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석경은 강의실 안을 힐끗 보았다. 변함없이 넘치는 에너지로 웃고 떠드는 준영과 태정의 모습이 보였다.
“너 기다렸어.”
“왜?”
권윤조가 가방 속에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재질의 납작한 진주색 상자를 꺼냈다.
“이거 받아.”
“이게 뭔데?”
“초콜릿이야.”
상자처럼 윤이 나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권윤조의 얼굴이 말갰다.
“갑자기? 아직 오전인데.”
“응?”
“나 술 안 마셨다고.”
권윤조가 웃었다.
“석경아, 오늘 화이트 데이야.”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물질적인 친절에도 익숙해진 석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더는 의심도 혼란도 없었다. 아마 태정과 준영도 똑같은 초콜릿을 받았을 것이다.
역시 뭐든 겪어 봐야 느는 거다. 멋대로 해석하고 착각하지 않는 노하우도 마찬가지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냐. 난 오늘 화이트 데이인 줄 모르고 준비 못 했는데. 이따 밥이라도 살게.”
“괜찮아.”
“……잘 먹을게.”
“…….”
“들어가자.”
상자를 손에 든 채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석경의 팔을 권윤조가 붙잡았다. 그의 눈길이 석경의 손에 들린 초콜릿 상자에 꽂혔다.
“그거, 가방에 넣어.”
“어? 왜?”
“넣어.”
“어, 알았어.”
권윤조의 눈길을 받으며 주섬주섬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강의실에 들어가 준영을 비롯한 친구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석경은 준영과 이수현 사이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고 권윤조는 석경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동아리도 같고 겹치는 수업이 많다 보니 이수현과도 편해졌다. 사실 두 사람이 친해진 데는 새침했던 첫인상과 상반된 이수현의 털털한 성격 덕을 많이 봤다.
“어제 술 마셨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물었더니 이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대 여학우회 회식.”
피곤한 얼굴로 대답한 이수현이 석경 쪽으로 무언가를 스윽 밀었다. 하트 모양의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금박 포장이 된 동그란 초콜릿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권윤조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초콜릿이었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느닷없었다. 석경은 제 쪽으로 내밀어진 초콜릿을 보고 당황했다.
“나?”
“그럼 다른 사람 걸 너한테 주겠냐.”
“오늘 화이트데이잖아.”
“응. 그래서 주는 거야. 아, 사탕이 아니라서 그래?”
“아니,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날이잖아.”
“아무나 주면 어때.”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남자인 권윤조가 남자인 저에게 초콜릿을 줬으니까. 석경과 이수현이 초콜릿을 두고 말을 주고받는 동안 태정과 준영이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냈다.
“이수현! 왜 이석경만 주냐? 너 이석경 좋아하냐? 지금 고백한 거냐?”
“이게 무슨 고백이야. 고백에 소울이 없잖아.”
태정은 고백이라고 몰아갔고 준영은 고백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절절한 하트 모양 케이스는 소울이 아니고 뭐야?”
“그건 재활용 플라스틱.”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수현이 끼어들었다.
“이석경이 내 옆자리에 앉았잖아. 그래서 준 거야.”
“이거 봐, 변명에 소울이 없는데?”
“진짜야. 그리고 이거 내가 직접 산 것도 아니야. 오는 길에 받은 건데 나는 초콜릿 싫어해서 어차피 못 먹는 거라.”
태정이 작정하고 몰아가는데도 이수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이었다. 달기는커녕 싱겁기 짝이 없는 전개에 태정과 준영이 결국 흥미를 잃고 물러났다.
“고마워. 네 옆에 앉길 잘했네. 애들 안 나눠 주고 나 혼자 먹어도 되지?”
석경은 더 늦기 전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든지.”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심드렁한 이수현의 대꾸에 석경은 웃다가 뒤를 돌아본 채로 있던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눈 맞춤은 그리 길지 않았다.
권윤조는 이내 이수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받은 걸 왜 석경이한테 줘?”
“주면 안 돼?”
이수현이 반문했다.
“마음이 담긴 선물이잖아. 좀 그렇지 않아?”
“뭐가 좀 그래?”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너한테 호감이 있어서 줬을 거 아냐.”
“난 그 사람한테 호감 없는데. 초콜릿한테도 호감 없고.”
“아니, 그래도 이건 매너가 아닌 것 같아.”
“매너?”
“그래, 매너.”
둘 사이의 기이한 공기가 팽팽했다. 석경은 물론이고 준영과 태정도 태풍의 눈 속으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때 이수현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조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권윤조, 욕구불만이냐? 뜬금없이 왜 나한테 시비를 털어.”
이수현의 거침없는 발언에 석경은 제가 다 놀라서 숨을 집어삼켰다. 방금 깜빡이, 켰어야 되는 거 아닌가.
“욕구불만은 맞는데 너한테 시비 턴 건 아니야.”
의외로 권윤조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TMI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욕구불만이 맞는다는 인정에 오히려 석경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권윤조가 욕구불만이구나. 석경은 마른침을 삼키며 뜻밖의 정보를 지식처럼 새겼다.
“시비 턴 게 아니면 설교냐?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윤조 네가 매너 운운하니까 되게 웃긴 거 알아? 너 그 숙취 해소 음료, 새터 때 기억 안 나?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뭘 했는데.”
“너 여자애들이 준 숙취 해소 음료, 네가 안 먹고 다른 사람들한테 뿌렸잖아.”
“나눠 먹은 거지. 다들 취했으니까.”
“너한테 호감이 있어서 줬을 텐데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은 안 들었고?”
“…….”
“그뿐만이 아니야.”
이수현은 작정이라도 했는지 권윤조를 몰아붙였다. 다들 숨을 죽이고 이수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매너 때문에 다들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잖아. 입학한 지 이제 겨우 2주 됐는데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너 어마어마한 쌍놈이라고 소문 다 났어.”
권윤조의 잘생긴 눈썹이 작게 꿈틀하는가 싶더니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권윤조는 감정을 속에 감추는 일이 노련해 보였다. 그의 진심을 파고들려면 이수현처럼 깜빡이 없이 들이받아야 겨우 가능할 것 같았다.
“푸훕.”
참다가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들렸다. 준영과 태정의 웃음소리였다.
어마어마한 쌍놈. 석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터질 것 같아. 재채기처럼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석경은 숨을 꾹 참으며 웃음을 집어삼켰다. 재빨리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어깨가 들썩였다.
“석경아.”
놀란 나머지 웃음이 뚝 멎었다. 고개를 들자 석경의 책상에 한 팔을 괸 권윤조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
얼이 빠져 되묻자 비스듬히 고개를 뉜 권윤조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렸다. 권윤조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습관처럼 펜을 빙그르르 돌리면서도 시선은 석경의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많이 웃긴가 보네.”
“어? 아니. 나 안 웃었는데.”
때마침 교수가 들어왔다. 자세를 고친 권윤조가 앞을 향했다.
석경은 권윤조의 뒷모습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봤다. 어마어마한 쌍놈.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면 누구라도 너덜너덜해질 터였다. 이수현의 말을 들은 순간 어느 정도 동의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웃음까지 터뜨렸고 심지어 그걸 숨기지도 못했다.
근데 나만 웃은 거 아닌데. 태정이랑 준영이도 웃었는데. 왜 나한테만 눈깔을 그렇게 무섭게 뜨고. 입만 웃으면 다야? 눈깔이 서늘한데.
가만, 왜 나한테만? 섬광처럼 뇌리를 스친 생각에 석경은 눈을 내려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가만히 응시했다. 의문이 의문을 낳았다. 이것 때문인가. 이수현한테 초콜릿을 받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이수현에게 초콜릿을 줬다는 사람이 혹시 권윤조는 아닐까? 어느 쪽이든 권윤조가 질투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괜히 둘 사이에 낀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불편하다는 말로 형용하기에는 모자란,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교수의 목소리가 반은 귀로 들어왔고 반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생각이 어지러웠다. 제 감정이 왜 이러는지 아직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계속 복잡하기만 했다. 왜 복잡하지? 그걸 궁금해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기로에 선 채 석경은 펜을 돌렸다. 권윤조만큼은 아니지만 펜이 제법 현란하게 손가락 위에서 돌았다.
옆에 앉은 이수현과 뒤통수만 보이는 권윤조를 차례대로 훑었다. 펜이 멈췄다. 석경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복잡한 감정을 조금 더 느껴 보기로 했다.
“권윤조. 너 이수현이랑 썸 타냐?”
수업이 끝나고 이수현이 강의실에서 나가자 태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물었다.
“썸. 크흐, 말만 들어도 설렌다. 둘이 진짜 썸이야?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던데.”
준영도 주접을 떨며 거들었다. 썸. 준영을 설레게 만들었다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석경이 느꼈던 복잡한 감정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권윤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친절로 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관심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동기들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했다. 즉 친절과 관심은 별개였다. 관심이 전혀 없어도 그의 친절은 유효했다.
그런 그가 이수현의 행동을 두고 언쟁을 벌였다. 그것은 분명 이수현에 대한 관심이었다. 또한 석경이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순전히 관심 때문이었다. 권윤조에 대한 관심.
“그렇게 보여?”
권윤조는 놀란 기색도 없이 의연하게 대꾸했다. 진짜 썸이 맞나. 속으로 생각하며 석경은 전개를 주시했다.
“그렇게 보이지. 이수현한테 초콜릿이 그렇게 받고 싶었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썸이 아닌가.
“아, 뭐래. 대답 똑바로 해. 썸 타냐고 안 타냐고.”
“안 타.”
썸이 아니란다. 그러나 태정의 취조는 계속됐다.
“어마어마한 쌍놈은 뭐야. 너 여자애들한테 쌍놈 짓 하고 다녔어?”
“아니.”
“그렇지. 내 친구 윤조가 그럴 리가 없지.”
“와. 우정 참 지독하다. 충격적인데요.”
준영이 진저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의 억울한 오명을 풀어 주기 위해 마치 사전에 공모라도 한 듯 매끄럽게 의혹을 해소한 태정은 석경 앞에 있는 초콜릿으로 눈을 돌렸다.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키는 모양새가 나눠 먹자는 뜻 같았다. 혼자만 먹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을 이수현과 했던 터라 석경은 단호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숨겼다. 어딜. 내가 앞으로 술 마시고 취할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오늘만 해도 속이 시끄럽고 복잡해서 술이 당겼다.
“야, 이석경. 하나만 줘라. 아침 안 먹어서 배고프단 말이야.”
“네 거 먹어.”
“놀리냐? 있어야 먹지.”
“권윤조가 준 거 벌써 다 먹었어?”
“권윤조가 나한테 뭘 줬는데.”
“……초콜릿?”
자신 없게 흘러나온 석경의 대답에 태정의 눈꼬리가 한껏 예민해지면서 권윤조를 노려봤다. 권윤조는 조용히 그 눈길을 피했다.
“이석경.”
“어?”
“권윤조가 너한테 초콜릿 줬어?”
“어? 응.”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지만 석경은 거짓말을 하는 대신 일단 사실대로 대답했다. 태정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보니까 썸은 이석경이랑 타고 있었네.”
권윤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준영도 권윤조에게 초콜릿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만큼은 공평한 친절이 아닌 건가. 설마 ‘다른 취급’인 건가. 특별함을 잃은 친절에 은근히 허전함을 느끼던 차라 그것은 반가운 의혹임이 분명했다.
“권윤조, 밥 사라.”
초콜릿 때문에 잠시 꽁해 있던 태정이 말했다. 권윤조는 흔쾌히 밥을 사겠다고 했다. 태정은 비싼 걸로 먹을 거라며 휴대폰을 손에 들고 학교 앞 맛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준영은 우리도 숟가락 얹어도 되냐며 뻔뻔하게 나왔다. 권윤조는 당연한 말을 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의 말속에 등장하는 ‘우리’임이 분명한 석경은 졸지에 권윤조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초콜릿을 받았다고 입을 잘못 놀린 결과에 석경은 그저 난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윤조가 비밀스럽게 건네준 초콜릿의 존재로 인해 간지러운 감각이 입술에서 배회했다. 어쩐지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여기 가면 되겠다.”
6교시 강의가 끝났을 때, 신중하게 맛집 검색을 마친 태정이 목적지를 통보했다.
네 사람은 책을 갖다 놓기 위해 동방으로 이동했다. 이후로는 수업이 없었으므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영화를 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태정은 오늘 하루 권윤조를 확실하게 뽑아 먹어야겠다며 영화까지 쏘라고 했다.
“석경아, 보고 싶은 영화 있어?”
복도를 나란히 걷던 권윤조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냥, 개봉 중인 영화 아무거나 보지 뭐.”
“음, 불주먹이니까 아무래도 액션?”
“나 불주먹 아니라고.”
불퉁하게 대꾸하며 억울하게 눈썹을 늘어뜨리자 권윤조가 웃었다. 초콜릿을 몰래 주려고 강의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권윤조의 모습이 웃음소리와 겹쳐지면서 심장에 찌릿 가벼운 전기가 돌았다.
초콜릿을, 태정이랑 준영이한테는 안 줬다 이 말이지?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고로 다시 혼란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진동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권윤조의 웃음소리가 헐거워지다가 완전히 멎었다. 새로운 소리의 출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권윤조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받아?”
“응.”
권윤조는 주머니 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진동은 계속해서 울렸다. 한 차례 끊겼던 진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권윤조는 결국 휴대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석경아, 동방 먼저 가. 나 잠깐 통화 좀.”
권윤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체 누구 전화길래.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석경은 호기심과 염려가 절반씩 뒤섞인 관심을 꾹 참아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윤조를 뒤에 남겨두고 동방으로 향했지만 통화 내용에서 일말의 단서라도 얻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한없이 더뎠다.
“왜.”
권윤조는 전화를 걸어 온 상대편을 향해 앞뒤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석경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억지로 동방 문을 열었다.
* * *
권윤조는 석경보다 3분가량 늦게 동방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미안한데, 밥은 다음에 살게.”
“왜 그래, 갑자기?”
태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으면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권윤조의 표정을 살폈다.
“일이 좀 생겨서.”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놀게.”
“미안하다.”
권윤조는 책장에 전공 책을 꽂아 놓고 곧바로 동방을 나갔다. 권윤조가 나가자 동방 안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태정이 침묵을 깨며 일어났다. 태정은 평소에 권윤조를 못 뽑아 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굴지만 제 지갑을 여는 데도 주저가 없는 녀석이었다. 석경은 입맛이 없었으나 갑자기 입맛이 없어진 원인이 뭔지 깨닫게 되는 게 두려워서 순순히 따라나섰다.
공학관 정문을 나서는데 약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권윤조였다.
그리고 권윤조의 옆에는 마른 체형의 긴 생머리 여자가 그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여자는 무척이나 눈에 띄는 외모였는데 커다란 첼로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어서 더욱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 최승희네?”
태정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낯설었지만 석경은 그 이름의 주인공이 권윤조 옆에 있는 여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최승희가 누군데?”
준영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윤조하고 나하고 유치원부터 초중고까지 쭉 같이 다녔던 애야. 아, 그러고 보니 대학도 같이 왔네.”
“뭔데, 여친이야? 권윤조 여친 없다 그러지 않았어? 분위기가 완전 여친인데?”
“좀 복잡해.”
“되게 예쁜 연예인 누구 닮은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찬성이야.”
“미친, 뭔 찬성.”
권윤조는 손을 뻗어 여자의 첼로 케이스를 대신 들어주었다. 그러자 여자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밝고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 멜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두 사람은 이쪽에 있는 세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그 세계 안에는 이쪽이 감히 헤아리기도 힘든 깊고 수많은 사연과 떨림이 존재하는 듯했다.
“가자.”
태정이 권윤조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릴 때부터 친구라는 최승희와 인사를 나눌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석경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권윤조가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던 참이었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 그림 좋은데? 구닥다리 영화에서 다정한 연인에게 시비를 거는 양아치 1이었다.
밥을 먹은 후 영화를 보러 가자는 준영과 태정의 권유를 거절하고 집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거의 평생을 함께한 소꿉친구인데 여친은 아니고 좀 복잡한 관계란 과연 뭘까.
석경은 권윤조로 인해 복잡한 감정을 느꼈고 그 이유를 관심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복잡한 관계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이일까. 밥을 먹으면서도 내내 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이 있느냐고 준영에게 몇 차례나 질문을 받았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표정을 가리기 위해 괜히 물을 들이켜야만 했다. 사실 구닥다리 영화의 양아치 1은 순전히 석경의 바람일 뿐이었다. 실연남 1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진한 커피가 당겨서 아메리카노 더블 샷을 주문할 생각이었다. 카페 안에 있는 권윤조와 최승희를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석경은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 버렸다. 매장 안에 꽉 찬 커피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다. 도망칠 이유를 찾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근데 나 왜 도망쳤냐. 카페를 나와서야 의문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도망친 게 아니라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자리를 피해 준 거라고 뒤늦게 스스로 납득할 이유를 찾아냈다. 그래 봤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석경은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다른 카페를 찾았다. 더블 샷 말고, 샷 3개 부어 달라고 해야지. 물은 적게 넣고 사약처럼.
“석경아.”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목소리가 들리면 안 되는데.
천천히 돌아보니 권윤조가 서 있었다. 아, 도망가는 거 다 봤겠네. 석경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골랐다.
“석경아, 애들이랑 영화 보러 안 갔어?”
“…….”
“어디 아파?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
입술이 말랐다. 권윤조의 눈길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들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권윤조는 앞에 가만히 선 채로 석경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가 도로 내놓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석경아, 방금 전에 나 봤으면서 왜 그냥 나갔어?”
“…….”
“응? 왜 그랬어?”
“……너 못 봤는데 난.”
“그래? 눈 마주친 것 같았는데. 근데 커피 사러 온 거 아니었어?”
“커피…… 마실까 했는데 그냥 집에 가서 푹 자려고. 그래서 그냥 나온 거야.”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집에 바래다줄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석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윤조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헷갈리게 행동하는 걸까. 친절과 특별한 신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걸까.
그러나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건 어디까지나 석경의 사정이고 몫이었다. 제 마음이 뒤숭숭해질수록 권윤조의 낯짝은 어째 더 해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또 나만 심란하지. 속이 투명한 건지 까만 건지. 문제는 그 속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석경에게는 안 보인다는 거였다. 보이지도 않는 거 자꾸 들여다보려니까 초조하고 꽉 막힌 듯 부대꼈다.
동정. 망할 놈의 것. 그거 되게 싫었는데 그쪽으로 의미를 두는 게 차라리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들어가. 친구 기다리잖아.”
“아까 나 못 봤다며.”
“응?”
“친구랑 같이 있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
“…….”
“…….”
쉽게 들통난 허술한 거짓말에 지독한 현타가 세게 밀려왔다. 놀리고 싶어서 입술이 꿈틀꿈틀하는 권윤조를 그대로 남겨두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금세 따라잡혔다.
“나 놀릴 거면 빨리 들어가.”
“안 놀릴게. 그리고 나 안 들어가도 돼. 급한 일 생겼다고 친구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급한 일이 뭔데.”
“석경이 네가 급한 일이지.”
뭐가 훅 날아왔다. 내가 급한 일이라고? 도로 걸음을 멈춘 석경은 잠시 후퇴하고 숨을 골랐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매너 때문에 다들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잖아. 입학한 지 이제 겨우 2주 됐는데 너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너 어마어마한 쌍놈이라고 소문 다 났어.’
이수현의 목소리가 석경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나 안 아파. 집에 바래다줄 필요도 없고.”
“정말 안 아파?”
“응.”
“잘 됐다. 그럼 나랑 영화 보러 갈래?”
석경은 궁금했다. 거의 평생을 함께한 소꿉친구인데 여친은 아니고 좀 복잡한 관계의 여자를 카페에 홀로 두고 나온 권윤조가 왜 저에게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하고 있는지.
“……싫은데.”
“영화 보는 거 싫어해?”
권윤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석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참았다. 내가 게이가 아니길 망정이지, 내가 너 보면서 흥분하면 너나 나나 어쩔 뻔했어.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권윤조의 눈을 노려보다가 석경은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호흡이 편해졌다.
최승희와 함께 있는 권윤조를 본 이후로 입맛도 잃고 속으로 전전긍긍했던 스스로에 대한 울분이 치솟아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제가 긁힌 만큼 권윤조를 긁고 싶었다.
“너랑 같이 보는 게 싫어.”
“석경아, 너 되게 솔직하다.”
제법 세게 말했는데도 권윤조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타격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석경은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석경아, 어디 가?
“집에.”
“영화 정말 안 볼 거야?
“응. 나는 남자랑 단둘이 영화 안 봐.”
이후로는 대화가 없었다. 석경은 집으로 향했고, 권윤조는 그런 석경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너 진짜 친구한테 안 갈 거야?”
“메시지 보내면 돼.”
“메시지 보내지 말고 지금이라도 얼른 가. 계속 너 기다리고 있을 텐데 미안하지도 않아?”
권윤조가 걸음을 멈추고 석경을 빤히 응시했다. 온기 없는 눈빛에 석경은 쩌억 얼어붙었다.
“석경아, 네가 내 친구를 왜 신경 써?”
“어? 그…….”
“신경 쓰지 마.”
묵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 미안.”
보이지 않는 경계가 그어졌다. 석경은 당황해서 덮어놓고 사과부터 했다. 날카롭게 그어진 선에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부끄럽고 무안했다. 거의 평생을 함께한 소꿉친구인데 여친은 아니고 좀 복잡한 관계의 여자를 석경이 감히 주제넘게 신경 썼다는 이유로 권윤조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넘어오지 말라고. 그러게 왜 나댔을까. 거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권윤조는 끝내 석경을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언제 냉기를 뿜었냐는 듯 티 없이 웃으며 푹 쉬라는 인사도 건넸다. 조련당하는 기분이었다. 벌써 당한 것 같았다.
“저기, 권윤조.”
“응?”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해도 돼?”
불쑥 꺼낸 말의 절반은 충동이었다. 겨우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저에게 몰두하는 그의 눈빛이, 뭐든 들어줄 것 같은 얼굴이 속내를 부추겼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얼마든지.”
“있잖아, 앞으로…….”
“…….”
“깜빡이 좀 켜 줄래.”
이쪽도 선 좀 그어 보려고.
“어?”
“너 친절하고 매너 좋은 거 나야 고마운데, 친절에도 깜빡이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 너만 그을 수 있는 거 아니거든. 그런데 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친절하게 대해 주려면 친절하게 깜빡이부터 켜 달라는 말인데, 이게 무슨 친절 지옥인가 싶었다.
“깜빡이…….”
권윤조는 작게 읊조렸다. 약간 넋이 나간 듯한 그 표정이 보기 싫어서 석경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석경의 입술은 다시 제멋대로 움직였다.
“네 친절, 기분이 이상하다고.”
“어떻게 이상한데?”
“좀 기분이 별로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깜빡이, 아니다. 그냥 나한테는 친절하게 대해 주지 마. 친절 그거, 따지고 보면 친절한 사람들끼리나 주고받는 거야.”
베풀어 주는 그대로 순수하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자의식만 비대한 인간은 그런 귀한 걸 받을 가치가 없다. 친절을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자위 도구가 됐다고 한탄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런 인간한테는 다정하게 웃어 주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석경은 지금, 권윤조가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셈이었다.
“…….”
“매일 사다 주는 캔커피도 필요 없고 핫팩도 괜찮아. 나도 손 있으니까 책도 들어 주지 마. 초콜릿도 먹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사 먹을게. 또 앞으로 절대 집까지 바래다주지 마.”
“석경아, 그런 게 어떻게 친절이야.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됐다고. 아무것도 아닌 그거 다른 애들한테 해.”
“…….”
“어차피 나한테만 친절할 것도 아니잖…….”
아, 젠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던 석경은 말실수를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단순한 이불 킥 차원의 발언이 아니었다. 굳이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가지 않아도 자신이 내뱉은 말로 인해 석경은 벌써부터 격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권윤조가 제 유치한 발언을 씹고 뜯고 맛보기 전에 네가 오해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굉장히 유치하게 들렸을 테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유치한 건 아니라고 변명을 해야 했다.
석경은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똑바로 들고 권윤조를 바라봤다.
기묘한 파장이 거기 있었다. 권윤조는 입을 꾹 다문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럼 석경아.”
결국 웃음을 참아내는 데 성공한 권윤조가 완전히 웃음기를 지운 채 입을 열었다.
“…….”
“내가, 너한테만 친절하면…….”
“…….”
“……돼?”
“……되긴 뭐가 돼. 하지 말라고.”
석경은 귓바퀴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떼를 써서 친절 독점권을 따낸 기분이었다. 권윤조의 완강한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져 더욱 그랬다. 놀릴 심산으로 무의미하게 뱉은 말이 아니었다.
석경은 권윤조의 친절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식, 위선, 알량한 동정, 온갖 삐딱한 해석을 억지로 갖다 붙여도 권윤조의 선한 의도를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과거의 자신은 오메가를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로 멸시하고 업신여겼다. 권윤조의 다정함은 따라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세상의 모든 오메가를 혐오하고, 고로 오메가인 스스로를 혐오하고, 그런 주제에 우습게도 오메가를 혐오하는 세상을 혐오하는, 그야말로 혐오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석경의 가련한 몸부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친절. 심지어 그 친절을 앞으로 저에게만 베풀겠단다.
석경은 권윤조의 시야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들키기 전에.
석경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기분을 안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온 석경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 좋은 순간에 석경은 권윤조를 생각했다. 종일 휘둘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마저도 그에게 휘둘리는 중이었다. 낯선 장소를 헤매는 것처럼 그를 궁금해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요 며칠을 계속 침대에 누우면 권윤조를 떠올렸다. 제가 왜 그러는 줄도 모르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설마 좋아하는 건가? 걔를? 남자를? 알파를? 도대체 어떻게?
석경은 권윤조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과 자신의 성별도 그렇다는 것을 생각했다.
또한 권윤조가 알파라는 것과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생각할 필요 따위 없는 사실인데 필요 이상으로 오래 골몰했다. 따로 떼어서도 생각해 보고 나란히 붙여서도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실들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은 게이가 아니다. 진짜 아니다. 그런데 ‘진짜’ 아닐 것까지 있나? 석경은 진짜로 아닌 게 확실한지 골몰했다. 그러자 또 어쩌면 게이가 맞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늦은 발현 탓에 남은 평생을 베타로, 또 이성애자로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덕분에 그런 쪽으로는 아예 무감했던 터라 새로운 의혹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아, 씨이발…….”
석경은 낮은 한숨과 함께 욕을 뇌까렸다.
“좋아하나 보네.”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석경은 이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권윤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거슬려 하는 건 아닐까.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고 거슬리는 짓을 해대니까 권윤조에 대한 생각이 잦아지고 그걸 좋아하는 감정으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하다가, 거슬린다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은 아니지, 다시 절망으로. 희망과 절망을 오가다 지쳐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 * *
알파와 오메가의 발현은 일반적으로 2차 성징 시기와 맞물린다. 대개 14살에서 16살 사이에 발현을 마치며 늦어야 17살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가족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부모나 조부모, 증조부모가 알파나 오메가일 경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석경은 가족력이 없었으므로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가족들이 누구 하나 빠짐없이 베타였기 때문에 석경도 죽을 때까지 베타여야 옳았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형질은 석경과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석경이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이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낮의 교실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석경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남학생 하나가 느닷없이 오메가로 발현을 한 것이다. 그 남학생은 밭은 숨을 내쉬며 발현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끝내 이성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그 교실 안에는 알파가 있었다. 이제 막 발현한 오메가는 울면서 알파에게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석경은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런 녀석과 학년이 끝날 때까지 같은 교실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꺼림칙했다.
학부모들의 강력한 항의로 그 오메가는 결국 강제 전학을 당했다. 석경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오메가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는 있었으나, 제가 받은 피해는 없었기에 지금까지는 방관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석경은 오메가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발정 나서 같은 성별에게 안아달라고 매달리는 꼴이라니. 매년 지구에서 3종에서 100여 종의 생물이 멸종한다던데, 멸종되는 김에 쓸모없는 오메가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었다.
석경은 그 이듬해인 18살에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오메가로 발현했다. 늦어야 17살이라는데 거기서 1년이나 더 늦게 발현을 한 것이다.
고2 가을, 어느 야자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 기운인줄 알았으나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석경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급하게 학교를 뛰쳐나온 석경은 열에 들떠 휘청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 집으로 가다가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지경이 됐을 때 어둑한 공원에 겨우 몸을 숨겼다. 흥건하게 젖은 아래와 주변을 가득 채운 자신의 페로몬 향에 온몸이 떨렸다. 깜박깜박 점멸하던 의식이 어느 순간 완전히 꺼졌고,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제 방 침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