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1)

* * *

밤이 깊어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꾸벅꾸벅 졸던 준영은 결국 석경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구석에 가서 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석경은 색색 잠든 준영의 앞머리를 습관처럼 매만졌다.

“둘이 엄청 친한가 봐.”

석경과 준영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길로 지켜보던 박태정이 말했다.

“니들도 친하잖아.”

“우리는 너희만큼은 아닌 것 같아. 야, 권윤조. 너 나랑 무릎베개 되겠냐?”

“토 나와. 상상만 해도.”

“이거 봐. 야, 근데 내가 더 토 나오거든? 너보다 훨씬 더! 지금 당장 토할 수도 있어!”

“더 이상 대꾸 안 할게. 조용히 해라, 그냥.”

권윤조의 반응에 박태정이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준영과 자신의 관계가 유별난 것 같이 느껴져 석경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준영이가 애교가 많아서 그래.”

“이석경 애교에 약한 남자였어? 나도 앞으로 너한테 애교 부려야겠다.”

커다란 박태정이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석경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우, 귀엽다, 귀여워.”

석경은 웃으며 박태정의 장난을 받아줬다. 박태정처럼 붙임성 좋은 친구를 대학에서 만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준영을 따라 새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순간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기분이 바닥을 치겠구나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회복이 빨랐다. 권윤조의 조언 덕분인 것 같아서 괜히 또 웃음이 나왔다. 스무 살이 되어 독립을 허락받고부터 확실히 웃음보가 느슨해졌다.

“근데 친하다는 기준이 뭘까?”

석경이 던진 질문에 박태정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으음, 무릎베개?”

“뭐야, 그게.”

“그리고…… 애교?”

“취했어?”

“그런가 봐.”

둘은 환한 미소를 교환했다. 권윤조는 이쪽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는 사람처럼 기다란 손가락으로 종이컵을 매만지고 있었다.

석경은 권윤조가 계속 자기를 무시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친해지려는 노력도 그만두리라 마음먹었다. 저와 권윤조가 무릎베개를 하는 사이가 되려면 이번 생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 * *

새터 마지막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에 서울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출발 10분 전에 준영과 함께 버스에 오르려던 석경은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다가 도로 숙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틀 동안 지냈던 방을 휘익 둘러보았다. 조원들이 간단히 청소를 해 놓고 나온 방바닥 위에는 찾는 물건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쪽에 개켜 놓은 이불을 들추기 시작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로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인 탓에 등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이거 찾아?”

특유의 저음에 석경은 허리를 숙였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뒤로 돌렸다. 권윤조가 하얀색 플라스틱 약통을 손에 들고 석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경이 찾는 물건이 맞았다. 석경은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 권윤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걸 찾겠다고 이불 몇 채를 뒤집었는지 모른다. 햇살이 먼지와 함께 산란했다. 이불을 급하게 들춰낼 때 생겨난 먼지였다.

“어.”

석경은 손을 뻗었다. 그토록 찾았던 물건이건만 반가운 표정 대신 잔뜩 경계 어린 낯빛으로 권윤조를 보게 됐다.

곤란했다. 설마 이게 뭔지 알아본 건 아니겠지. 흔하디흔한 약통일 뿐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권윤조의 손에서 거의 낚아채듯 약통을 가져왔다.

권윤조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석경이 뒤집어 놓은 이불을 다시 개어 놓기 시작했다. 멀뚱히 서 있던 석경도 부랴부랴 손을 보탰다.

“가자. 버스 곧 출발해.”

권윤조는 이불 정리가 끝나자마자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석경은 권윤조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주머니 속의 약통을 손에 꽉 쥐었다. 언제 어디서 이걸 찾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예민해진 감정을 들킬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제일 늦게 버스에 올라탄 두 사람은 준영과 박태정이 맡아놓은 빈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틀 전 석경의 옆자리는 권윤조가 아니라 준영이었는데 그는 지금 석경의 뒷자리에서 박태정과 꽁냥대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못내 서운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는 새터 첫날의 들뜬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반 이상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자고 있었고 숙취로 인한 알코올 냄새가 히터의 뜨거운 바람과 만나 차 안의 공기는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석경은 차창 쪽으로 완전히 몸을 기댔다. 거북한 공기 사이로 아카시아 향이 풍겼다. 옆에 앉은 권윤조의 체향이었다. 그 향 덕분에 숨쉬기가 그나마 수월했으나 어쩐지 배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권윤조가 저를 무시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기로 다짐했지만, 이렇게 버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석경은 은은하게 풍기는 아카시아 향을 맡으며 창가 쪽으로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댔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옆태가 와중에도 참 잘생겼다.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 없이 군데군데 잘생긴 거 모르는 것도 아닌데 눈이며 코며 입을 자꾸만 훔쳐보게 됐다.

“…….”

“…….”

석경을 돌아본 권윤조가 한쪽 눈썹을 슬쩍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왜.”

지금 들으라고 한숨 쉰 건가. 한숨 속에, 짜증이 제법 섞였는데. 권윤조가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까지 지켜보고 석경도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순간 상해서 인상을 쓰기는 했는데 힐끔댄 건 제 쪽이라서 인상이 도로 공손하게 펴졌다.

“아니야.”

“그거…….”

“응?”

“패딩. 위에 올려 줄까.”

“아, 고마워.”

품에 안고 있던 패딩을 건네자 권윤조가 머리 위에 있는 선반에 올려놨다. 석경은 다시 자리에 앉은 권윤조를 향해 고마움의 표시로 한 번 더 눈인사를 하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몽롱했다. 이틀 연속 술을 들이부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잠들면 안 되는데. 억제제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알만 먹고 그 뒤로는 안 먹었는데. 알파가 가까이 있으면 페로몬 억제가 잘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가수면 상태에서 수마와 싸우다가 어느새 숙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석경은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편하게 머리를 기댄 채였다. 진하게 뒤섞인 아카시아 향과 청포도 향이 콧속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석경은 화들짝 놀라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권윤조가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석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경은 반사적으로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 익숙한 청포도 향은 제 몸에서 풍기는 페로몬이 맞았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대체 언제 잠이 든 거지? 어쩌다가 권윤조 어깨에 머리를 기댄 거지? 입 주위는 왜 이렇게 축축하…… 씹, 침은 또 언제 흘린 거야.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낸 석경은 절망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권윤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눈뜨자마자 제 몸의 냄새부터 분주하게 맡은 것이다.

석경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권윤조도 냄새를 맡았을까?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못 맡았을 리가 없다.

석경은 빠르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차분하게 가방을 뒤적거렸다. 고등학교 때 혹시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알파 친구를 속이려고 계획했던 묘수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석경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청포도 향 핸드크림이었다. 늘 바르는 것은 아니고 지금과 같이 위기에 처했을 때를 위해 상비하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실행에 옮긴 적은 없어서 과연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묘수라기보다는 불가피한 모험이었다.

석경은 별안간 핸드크림을 손등에 듬뿍 짜서 야무지게 바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체향과 제법 흡사한 청포도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참.”

석경은 옆 사람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권윤조를 보았다. 사실은 단 한순간도 신경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주제에.

“…….”

“너도 바를래? 청포도 향인데. 요즘같이 춥고 건조한 날씨에 보습에도 좋고.”

석경은 권윤조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니, 난 괜찮아.”

조금 늦게 대답한 권윤조가 힘주어 입을 꽉 다물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석경은 긴팔 소매를 걷어 팔뚝에도 핸드크림을 발랐다.

“내가 피부가 많이 건조한 편이라.”

“응.”

“이렇게 주기적으로 발라 줘야 돼.”

“어.”

화가 난 건가. 표정이 몹시 안 좋았을 뿐 아니라 이마에 힘줄도 솟아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멋대로 말을 걸고 쓸데없는 정보를 나열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라면……. 서늘한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혹시 냄새 거슬려?”

“아냐. 향기 좋네.”

석경은 이쯤에서 슬쩍 권윤조의 얼굴을 살폈다. 저에게서 나는 청포도 향이 오메가의 페로몬이 아니라 핸드크림을 주기적으로 처발랐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는지 궁금했다. 권윤조의 이마에 돋아난 힘줄을 노려보았다. 답이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잘 속인 것 같은데. 정말 잘 속인 거 맞나? 근데 이마에 힘줄이 왜. 점점 굵어지는 힘줄을 보는 사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커져만 갔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퍼즐을 눈앞에 둔 느낌이었다. 차근차근 끼워 맞추는 대신 모조리 쓰레기통에 쓸어 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행인지 뭔지 중요한 힌트 하나가 마침 권윤조의 넓은 어깨에 있었다. 아, 내가 정신을 놓아 가지고 저 어깨에 머리를 처박고 잤었지. 페로몬이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부위가 정수리인데 권윤조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아, 씨이…….”

“……?”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설에 권윤조가 눈이 약간 커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석경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크림을 착잡한 눈길로 바라봤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거 자칫 잘못하면 미친놈 취급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석경은 핸드크림과 권윤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권윤조의 눈동자에 미처 숨기지 못한 흥미가 떠올라 있었다. 석경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관심이 주저하는 등을 떠밀었다.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쉰 석경은 핸드크림 뚜껑을 따서 손가락에 쭉 짰다. 그리고 핸드크림이 듬뿍 묻은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정수리 쪽으로 권윤조의 맹렬하고도 열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석경은 정수리에 핸드크림을 치덕치덕 바르며 권윤조의 눈을 애써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열렬한 눈빛에 점차 아연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정상이 아닌 취급을 받는 게 분명했다.

“너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지?”

“어? 아니, 응.”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권윤조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더듬거렸다. 당황스럽겠지. 저 자신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석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두피 쪽이 특히 건성이거든.”

“…….”

“너는?”

“나? 나 왜?”

“너는 두피 안 건조해?”

“아, 나는 딱히 모르겠는데.”

“그래? 좋겠다.”

대처가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 같은데, 권윤조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이길 바랐다.

“근데…….”

권윤조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때 권윤조의 입가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석경은 확실히 보고 말았다. 마치 웃음을 꾹 참아내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 웃긴가 보다. 근데 뭐가 웃긴 걸까? 정수리에 핸드크림을 바르는 사람을 처음 봐서 웃긴 거라면 참 다행일 텐데, 어쩐지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닐 것 같았다.

“응?”

“그렇게 많이 발라도 괜찮아?”

“왜? 냄새 심해?”

“그게 아니라, 너 머리 떡졌어.”

권윤조가 다시 웃음을 꾹 참았다. 석경은 조금 희망을 가졌다. 내 머리가 떡져서 웃긴 걸까? 그런 거라면 더 많이 웃겨 줄 수 있는데. 석경은 핸드크림을 한 차례 더 짰다.

“괜찮아, 지금 머리 떡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권윤조는 이제 한계에 달한 듯 빨개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마의 힘줄도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저러다 터지겠네. 석경은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얘 다 아는구나.

고개를 떨군 석경은 손에 묻은 핸드크림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탈하게 바라봤다. 핸드크림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제가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더 안 발라?”

다음 행동을 기다리던 권윤조가 슬그머니 보채 왔다. 석경은 시선을 들어 권윤조를 바라봤다.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만 제 쪽에서 먼저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러자 한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입술 끝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결국 권윤조도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입이 시원하게 벌어졌다.

“응, 그만 바를래.”

“왜?”

“충분한 것 같아.”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웃기는 놈 됐지 뭐. 손에 남은 핸드크림을 권윤조의 손등에 쓰윽 발라주자 그가 어깨까지 떨며 더 크게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은 많이 봤지만 저를 보며 웃는 모습은 낯설었다.

벽이 조금 허물어졌나. 제가 벌여놓은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둘이 뭐가 그렇게 신났어?”

권윤조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박태정이 고개를 쭉 빼고 끼어들었다. 권윤조가 웃던 채로 박태정을 돌아봤다.

“일어났냐?”

“아우, 잘 잤다. 학교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김준영 깨워야겠다.”

“나 일어났어.”

“뭐야, 눈 감고 있길래 자는 줄 알았더니.”

“이석경 웃음소리 땜에 깼어.”

준영이 손을 뻗어 석경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안 그래도 머리 떡졌는데. 석경은 속으로 투덜대며 대충 손으로 머리를 수습했다. 그 와중에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는데 잠잠해졌던 그의 웃음보가 또 터졌다.

“둘이 앉혀 놓은 보람이 있네. 낯가릴 때는 언제고 이제 눈만 마주쳐도 좋냐?”

역시 자리 배치에 박태정의 계략이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격 없는 술자리 분위기에서 둘 사이만 눈에 띄게 서먹했으니 내심 염려가 됐을 터였다.

어느덧 버스가 공학관 앞에 도착했다. 준영은 석경의 머리 꼴을 보더니 킥킥 웃다가 검은색 볼캡을 씌워 줬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린 기계과 신입생들은 개강 때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하나둘씩 흩어졌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린 기계과 신입생들은 개강 때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하나둘씩 흩어졌다. ‘안 가?’ 준영이 물었다. ‘가야지.’ 석경은 대답하고 대학교 근처에 구한 자취방으로 가야 할지 본가로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주춤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보다 저쪽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권윤조 때문에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개강을 하면 지겹도록 얼굴을 볼 테지만 오늘 안에 권윤조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석경은 환하게 웃는 권윤조를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망설였다. 권윤조가 베타였으면 좋았을 텐데.

석경이 졸업한 고등학교에는 알파가 세 명 있었다. 셋 중 둘은 우월감과 자부심을 갖고 자신들이 알파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

나머지 하나는 석경의 친구였다. 친구가 스스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전교생이 그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쨌든 석경은 그 셋만 조심하면 됐고, 조심을 거듭한 결과 자신이 오메가임을 졸업 때까지 잘 숨겼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운이 좋아 여태 아웃팅 한번 당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으나 석경의 기저에는 알파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늘상 깔려 있었다. 오메가를 보는 알파의 시각부터가 곱지 않은데 저 역시 좋은 마음일 리가 없었다. 알파에게 오메가는 한낱 성 노리개, 혹은 기피 대상일 뿐이니까.

언젠가 저의 형질을 알아채는 알파가 나타난다면 되도록 기피 대상으로 자신을 봐 주기를 바라 왔던 석경이다. 알파가 자신을 성 노리개로 본다면 그 새끼를 죽이고 저도 죽겠다는 각오로 지내 온 것이다.

과연 권윤조는 어느 쪽일까. 그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막연하기만 했던 ‘언젠가’가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니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고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권윤조.”

권윤조는 저를 부르는 석경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석경의 곁으로 다가와 한 발짝 정도 간격을 남겨 두고 우뚝 멈춰 섰다.

“집에 가려고?”

“응. 저기, 권윤조. 미안한데 나랑 오 분만 얘기할 수 있을까?”

권윤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경을 인적이 없는 벤치 쪽으로 이끌었다. 벤치에 앉은 석경은 막상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권윤조가 이틀 동안 저한테만 서먹하게 굴었던 이유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눈치채서였다면 반드시 오늘 숙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흐지부지 개강 때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너 알지?”

“…….”

“나 오메가인 거.”

석경은 앞머리를 한 차례 쓸어 올려 볼캡을 고쳐 썼다.

“어, 알아.”

권윤조의 대답은 담백하게 흘러나왔다. 이 순간 그가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유추하기가 어려운 어조였다.

기피일까? 석경은 권윤조를 바라봤다. 그가 오메가인 저에게 욕정을 느낄 가능성은 제로로 두고 아예 제외했으므로 자신을 기피하는지 아닌지만 판단하면 되는 거였다. 아니, 사실은 제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세 번째 유형이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처음이라고?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조심성이 없었나? 이틀 동안 체향을 완벽하게 숨겼는데. 석경은 당황하고만 있다가 겨우 물었다.

“나 냄새났어?”

권윤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석경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어떻게……?”

궁금하면서도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권윤조가 어떻게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는지는 제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냥 느낌으로.”

“느낌으로 알았다고?”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석경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권윤조가 부연했다.

“내가 찾아 준 약통, 그거 억제제잖아. 그거 처음 봤을 때 느낌으로 알았다는 말이야.”

“아.”

명쾌한 답은 아니었으나 석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의구심과 함께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예상치도 못했던 그의 사과에 석경은 놀랐다.

“뭐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알아 버려서.”

문득 어둠 속에서 엿들었던 그와 김미연의 대화가 떠올랐다.

‘미안해.’

‘이제 와서 뭐가?’

‘사탕이 쓰다는데 달콤한 말을 못 해 줘서.’

비슷한 맥락으로 건넨 사과 같았다. 그러니까 몸에 밴 매너의 일종.

“아니, 네가 미안할 건 없는데…….”

“내가 비밀로 해 주기를 바라는 거지?”

“어? 그래 주면 고맙긴 한데…….”

석경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숙제가 착착 진행되었다. 애초에 입단속을 하려고 대화를 청한 터라 안심이 되면서도 얼떨떨했다. 이제 뭐가 남았지. 내 용건은 끝났으니 권윤조가 앞으로 나를 기피할 일만 남았나?

그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반전 없는 결말이었다. 버스 안에서 유쾌하게 웃었던 권윤조의 모습이 아직 뇌리에 남아 서걱거렸다. 석경은 배드 엔딩 영화처럼 불행해진 기분이었다. 권윤조가 대체 뭐라고.

서운한 표정이 드러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석경.”

석경의 고개가 저절로 위로 향했다.

“…….”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어?”

“바로 올게.”

권윤조가 어딘가로 달려갔다. 석경은 점점 작아지다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 권윤조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고 있었다.

그는 500밀리리터짜리 생수통을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다. 벤치에 앉아 가볍게 숨을 몰아쉰 그는 석경에게 생수통을 내밀었다. 받지 않고 눈으로 묻자 곧 입을 열었다.

“너, 억제제 먹어야 될 것 같아서.”

“…….”

“버스 안에서부터 계속 나서, 네 향기.”

“…….”

“너도 알잖아. 인공적인 향이랑은 다르다는 거.”

권윤조는 석경의 위기 대처 방식의 허술함을 조곤조곤한 말투로 까발리면서 유감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순간 현기증이 나듯 석경의 마음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석경은 뭐라고도 대꾸할 수 없었으므로 말없이 생수통을 받았고 권윤조가 보는 앞에서 억제제를 삼켰다.

“고마워.”

석경은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체향 안 날 때까지만 여기 앉아 있다가 가자. 시간 괜찮지?”

“으응.”

석경의 머릿속에 세 번째 유형의 알파가 입력됐다. 억제제를 챙겨 먹으라며 물을 사다 주는 알파. 석경은 점차 옅어지는 체향을 의식하며 숨을 죽였다. 온전히 아카시아 향만 남았을 때, 그가 자신의 휴대폰을 석경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 네 번호 모르거든.”

석경도 권윤조의 번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새터에 참석한 기계과 학생이 다 아는 그의 번호를 자신만 모르고 있었는데 겨우 알게 되나 싶었다.

석경은 휴대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번호가 틀리지 않았는지 재차 확인까지 한 후에 돌려줬다.

“권윤조.”

석경은 이제 막 연락처를 알게 된 권윤조와 자신의 거리를 재 보았다. 같은 대학, 같은 과, 같은 학번, 준영과 박태정이라는 연결고리. 서로의 형질을 놓고 따지자면 우주만큼 먼 느낌이었고, 비밀을 공유했다는 점에서는 가깝게도 느껴졌다.

“응?”

“치약 말인데.”

“치약?”

“나도 밑에서부터 짜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

“…….”

“나는 형질부터가 커다란 흠이라서, 남들한테 사소한 것 하나라도 흠 잡히기 싫거든.”

“…….”

“물론 너는 좀 다른 이유겠지만. 어쨌든 너도 그렇고 또 나도, 치약 밑에서부터 짜는 거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

“너랑 나, 친구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질문은 권윤조의 딱딱한 침묵 앞에서 서서히 힘을 잃었다. 친구 할 수 있을까? 라니.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질문이었다.

그러나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는 신기하게도 들지 않았다. 제 이상을 그대로 본뜬 듯한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몇 번을 밑지고 굽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뾰족뾰족 날카로웠던 자존심이 흐물흐물해졌다.

벽돌 같은 침묵이 길어지면서 자꾸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그새 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비웃고 있는 건가. 뭐가 됐든 이제 그만 어떤 대답이든 해 주었으면 하고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떠올릴 때쯤이었다.

“응.”

짧게 대답한 권윤조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 * *

“윤조야.”

“네, 선배님.”

“윤조야 너는, 매일 체크 남방만 입고 다녀도 돼. 회색 추리닝 바지 입어도 되고, 삼디다스 슬리퍼 직직 끌고 다녀도 돼. 머리는 이틀, 아니다! 사흘까지 안 감아도 될 것 같아. 너는 그래도 돼. 충분히 용서가 될 것 같아.”

“절대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아니야, 윤조야. 네가 잘생겼다는 말씀이야.”

“체크 남방은 가끔씩만 입을게요. 회색 추리닝 바지랑 삼디다스 슬리퍼는 저한테 없어요. 머리는 매일 감을게요.”

“윤조야, 너는 어쩜…… 넌 기계과의 빛, 아니지, 공대의 기적이야.”

석경은 대학로에 위치한 술집의 2층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서 권윤조와 2학년 여자 선배의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듣고 있었다. 개강 총회를 위해 기계공학과에서 통째로 빌린 호프집이었다. 물론 2층짜리 호프집으로는 기계과의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술집 하나를 더 빌렸다고 한다.

권윤조는 바로 옆 테이블에 있었다. 석경의 대각선 자리였다. 권윤조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 선배는 숫제 턱을 괸 채로 그의 얼굴을 황홀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야, 신입생 데리고 진상 그만 부려라.”

석경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자 선배가 결국 여자 선배에게 핀잔을 줬다.

“진상 부리는 게 아니라, 안구 정화 중이야.”

“그게 진상이야.”

“윤조야, 그래? 내가 너한테 진상 부리는 거야?”

“아닙니다, 선배님.”

손을 저으며 웃는 권윤조의 모습을 슬쩍 본 석경은 잔을 비웠다. 준영이가 어디 갔지. 빈 잔을 내려놓은 석경은 고개를 뒤로 돌려 호프집을 둘러봤다. 술 게임에 한창인 준영과 태정, 그리고 이수현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던 석경은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그.만.마.셔.’ 그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이자 이내 못마땅한 눈빛이 돌아왔다. 간섭이라기보다 염려로 느껴지는 그의 관심이 좋았다. 뭔가 진짜 친구가 된 그런 느낌이라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친구가 되기로 한 이후로 권윤조의 서글서글하고 밝은 성격을 석경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늘 무표정으로 석경을 대하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자주 떠올랐고, 서늘한 침묵 대신에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갔다. 찌를 듯한 시선은 글쎄……. 전처럼 시선이 자주 마주치기는 했으나 더는 무서운 눈빛이 아니었다.

둘은 개강 전부터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뜻밖에도 권윤조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 온 것이다. ‘뭐해? 밥 먹었어?’ 그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다 보면 길게는 한 시간까지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석경은 대화 중에 그가 지나가는 말로 추천해 준 영화를 반드시 보았고 덕분에 화젯거리는 한층 풍부해졌다.

새터에서 서먹했던 시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권윤조는 친구가 된 석경에게 스스럼없이 정을 주었다.

[권윤조 : 술 그만 마셔. 너 눈 풀렸어]

권윤조가 테이블 쪽으로 하도 눈짓을 주기에 시선을 내렸더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짜? 여기 술집 조명이 약간 그런가 보네]

[권윤조 : 조명이 뭐가 그래]

[권윤조 : 너 눈 풀렸다고]

[알았어]

[눈에 힘주고 있을게]

“이석경, 술 또 없네? 받아. 소맥으로 말아 줄까?”

앞에 앉은 남자 선배가 맥주병을 들고 술을 권했다. 석경은 빈 잔을 내밀었다. 권윤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네.”

“술 세네? 꽤 많이 마신 것 같던데.”

당연하지. 술이 세다는 말을 들으려고 무리해서 마셔 댄 석경이다. 새터 때부터 줄곧 석경은 그랬다. 주당이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잔을 비워 댔다.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메가의 유치한 자격지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객기를 부렸다. 발악인지 노력인지를 한 덕분에 동기들 사이에서는 주당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누구도 석경에게 술로는 덤비려 들지 않았다.

선배가 소맥을 말았다. 석경의 주량을 시험해 보고 싶은 건지 소주의 비율이 월등하게 많았고 누리끼리한 맥주의 색깔이 거짓말처럼 희미해졌다. 입맛 떨어지는 비주얼이었다.

“마셔. 원샷이다?”

속으로는 질색하면서도 석경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데 누군가 석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느새 석경의 옆으로 다가온 권윤조가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만 마셔.”

이번에는 입 모양도 문자 메시지도 아닌 생생한 목소리였다. 석경은 말없이 권윤조를 올려다보았다.

“권윤조, 너 뭐야?”

술을 따라준 선배가 뭔데 참견이냐는 투로 말했다. 순간 석경은 권윤조의 눈동자가 예민하게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예민함과는 정반대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선배를 보며 술잔을 작게 흔들었다.

“이석경 흑기사 해 주려고요.”

“괜찮아, 내가 마실 거야. 이리 줘.”

석경은 손을 뻗었다. 권윤조가 술잔을 도로 빼앗으려는 석경의 다섯 손가락에 장난스럽게 깍지를 꼈다. 놀라서 손을 빼내려고 하자 강한 힘으로 조여 왔다.

“소원 하나 들어줘.”

그러면서도 석경에게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손을 빼내려는 시도가 몇 번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석경은 낮게 말했다.

“손 놔.”

“손 놔주면 술 마실 거잖아.”

추궁하는 듯한 말에는 농담 기운이 섞여 있었다.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알콜 중독인 줄 알겠다.”

“오늘 술 절반은 네가 다 마셨어.”

“뭘 또 절반이래.”

“술이 센 거야, 술을 좋아하는 거야?”

“둘 다야.”

“거봐, 알콜 중독 맞네.”

권윤조가 한 번에 술을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마신 술이 버거운지 반듯했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러 쌍의 시선들이 권윤조와 석경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석경이 손을 비틀며 빼려 하자 오히려 손가락을 얽어 오는 힘이 한층 더 강해졌다. 손가락이 얼얼했다.

“……아파.”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내뱉자 권윤조가 곧바로 힘을 풀었다. 석경은 그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얼른 손을 빼냈다.

“많이 아팠어?”

권윤조의 눈길이 석경의 손을 더듬었다.

“응.”

“미안.”

석경은 애써 웃으며 그의 집요한 눈길이 닿지 않게 손을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됐으니까 가서 앉아. 앞으로 술 조금만 마실게.”

그러나 권윤조는 물러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석경은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드는 반면 손끝은 몹시도 차가워졌다.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달아오른 열을 식히는데 기분이, 알 수 없는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가벼운 실랑이 속에서 힘의 우위를 가리게 된 방금 전의 상황이 묘했다. 감히 상대조차 되지 않는 완력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희미한 패배감이었다. 친구들과 장난으로 팔씨름을 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석경은 붙잡혔던 손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안주도 먹으라며 잔소리해 대는 준영과 흑기사를 해 주겠다며 술을 마시지 말라고 손깍지를 세게 껴 오는 권윤조를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았다.

이상했다. 말로 하지. 하긴 말로 했으면 그 술 결국 내가 마셨겠지. 근데 나는 흑기사도 필요 없고 그의 소원을 들어줄 마음도 없는데. 역시 이상했다.

“미안한데 나랑 자리 좀 바꿔 줘.”

결국 권윤조는 옆에 앉아 있던 동기를 쫓아내 버리고 석경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석경은 거기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이상야릇하고 거북한 감정을 지속시킬 생각도 없었다. 붉어진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만 내심 안도했다.

“윤조야, 너 mbti 뭐야?”

권윤조에게 뭐든 다 된다며 머리를 사흘에 한 번씩 감으라던 여자 선배가 물었다.

“아, 저 그거 안 해 봐서 몰라요.”

“헐. 너 그거 미리 해 놓는 게 좋을 텐데. 팀플할 때 mbti 유형으로 묶어서 조 짜거든. 그래야 트롤도 거를 수 있고.”

“아, 정말요.”

“정말이겠냐?”

남자 선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너 뭔데 초 쳐? 내가 우리 잘생긴 신입생한테 약 좀 팔아 보겠다는데.”

남자 선배는 항의를 무시하고 석경과 권윤조를 건너다봤다.

“공학용 계산기는 샀냐?”

“아직요.”

선배는 잘 됐다는 얼굴로 티슈에 모델명을 적었다. 받아 들 기미가 없는 권윤조를 대신해서 석경이 티슈를 받았다.

“이게 비싼 거긴 해도 좋아. 계산 실수도 적고 계산 속도도 빠르고. 미적분, 분수, 지수, 행렬 같은 것도 제대로 구현되고. 공식도 입력되니까 시험 볼 때 특히 유용해. 시간 단축 개쩔거든.”

그 외에도 몇 가지 조언들을 해 줬다. 전공 관련 이야기보다는 맛있는 학식 메뉴나, 농대 카페 에스프레소 머신이 좋다는 정보 등이 줄줄이 나왔다.

“참! 1학년 때 과씨씨는 절대 안 돼.”

남자 선배가 권윤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당부하자 여자 선배가 눈을 흘겼다.

선배들 수다가 자연스럽게 전공 이야기로 넘어갔다. 1학년들이 배우는 전공 기초가 아닌 열역학, 유체역학, 동역학, 재료역학이 어떻고 하는 본격적인 4대 역학 이야기였다. 당연히 못 알아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화에 응하고 있다는 표시를 내려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권윤조가 그런 석경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히자마자 곱게 가늘어지는 눈매에 속내를 꿰뚫어 본 듯한 웃음기가 한가득이었다. 영혼 하나도 없는 거 들킨 것 같아서 머쓱해진 마음에 괜히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다시 열변을 토하는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제 살갗에만 겨우 닿을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있자니 청각만 예민해졌다.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야, 됐어. 그런 얘기 지금 해서 무슨 소용이야. 그냥 1학년 때는 무조건 기초만 열심히 해 둬. 수학과 왔다는 기분으로 미적분 파고, 컴공 전공한다는 기분으로 C언어 배우고. 또 뭐냐.”

“너 1학년 때 학고 맞지 않았냐?”

“내가 왜 학고 맞았는지 알아?”

“하루도 안 거르고 술 처먹고 다녀서?”

“내가 기계공학과에 들어왔다고 착각을 했기 때문이야.”

“너 기계공학과 맞아.”

“뭐? 말도 안 돼.”

“애들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원래 반면교사가 더 훌륭한 법이야.”

“어쩌다 그렇게 훌륭한 인간이 됐니.”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술잔이 빠르게 돌았다. 테이블 위에 빈 술병이 늘어갔다.

석경은 술을 들이켤 때마다 권윤조의 눈길을 느꼈다. 간헐적으로 찔러대던 시선이 조금 진득해지는가 싶더니 의자 등받이에 기다란 팔이 걸쳐졌다. 기우뚱 가까워진 권윤조가 석경의 등을 감싸 안는 듯한 자세로 귀에 작게 속삭였다.

“눈치 봐서 몰래 나가자.”

‘왜?’ 석경은 권윤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다시 귓가로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지고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여백이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고 따뜻하고 간지러운 숨결만이 석경의 귓바퀴를 건드렸다.

권윤조를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주제에 몰래 나가겠다고 생각하는 게 신기했다.

“나 취했어.”

그만 몸을 떨어뜨리려는 찰나 권윤조가 긴밀한 비밀 이야기라도 전하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권윤조처럼 귀에 입술을 가져가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아닌 것 같은데.”

“진짜야.”

“음료수라도 갖다 줄까?”

“응.”

권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이 핑 돌았다. 아무래도 권윤조보다 자신이 더 취한 것 같았다.

꼿꼿하게 등을 펴고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여전히 술 게임 중인 준영과 태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감싸왔다.

석경은 은은한 아카시아 향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왜 왔어? 갖다 준다니까.”

“이대로 너 납치하려고.”

권윤조는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실어 석경을 아예 호프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아찔했다. 어느새 겉옷과 가방까지 챙겨 나온 권윤조가 패딩을 입혀 주었다. 석경은 엉겁결에 입혀 주는 대로 있었다.

“진짜 가려고?”

“너 취했잖아. 걸을 때 비틀거렸어.”

“설마.”

“진짜야.”

“나 취한 거 아니야. 취한 건 말이야. 뭐냐면…….”

“뭔데.”

“초콜릿이 먹고 싶어지는 게 취한 거거든.”

“…….”

“나 취했나 보다.”

권윤조의 입술이 크게 휘는가 싶더니 어깨가 아래위로 떨렸다. 석경은 웃느라 정신없는 그를 내버려 두고 원룸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권윤조의 자취방도 같은 방향이었지만 석경의 자취방이 학교에서 더 멀었다.

석경은 어느새 걸음을 따라잡은 권윤조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가져왔다.

[잘생긴 준영이 : 어디냐]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벌써 저를 찾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미안]

[먼저 집에 갈게]

[잘생긴 준영이 : 진짜 튀었냐?]

[잘생긴 준영이 : 튀려면 빨리 튀어라]

[잘생긴 준영이 : 너랑 권윤조 추노한다고 여기 분위기 장난 아니다ㅋㅋㅋ큐ㅠㅠㅠㅠ]

고개를 든 석경은 메시지를 읽으며 웃던 얼굴 그대로 권윤조와 눈이 마주쳤다. 권윤조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지금 너 찾고 난리 났대.”

“너를 찾는 게 아니고?”

“나를 왜 찾아.”

권윤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질문조로 건넨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석경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덧 권윤조의 집 앞이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외관만 봐도 내부가 얼마나 좋을지 예상이 가는 신축 빌라였다.

“들어가. 내일 보자.”

석경은 패딩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을 빼서 작게 흔들었다. 다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걸음을 옮기는데 뒤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권윤조가 제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뭔가 싶어서 올려다보니 권윤조가 어깨동무를 해 왔다.

“바래다줄게.”

“무슨, 뭘 바래다줘. 왜 바래다줘.”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목소리마저 떨렸다. 술기운 탓에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던 다리도 같이 떨렸다. 권윤조는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남자가 같은 남자를 바래다준다는 것은 석경의 상식 밖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이쪽은 보지도 않고 어깨동무한 손에 힘을 주어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어깨를 감싼 손을 뿌리치려는데 권윤조가 더 강한 힘으로 붙들어 왔다.

술집 안에서 세게 손깍지를 껴 오던 일이 떠올랐다. 무의미한 힘겨루기가 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5분을 연인처럼 꼭 달라붙어서 걸었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 5분 동안 단 한 번도 반항 비슷한 것조차 하지 않았지만 석경은 불에 덴 듯 뜨거워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민감하고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춘 권윤조가 편의점 쪽에 시선을 두었다. 말없이 올려다보자 턱짓으로 편의점 앞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잠깐 앉아서 기다릴래?”

“…….”

석경은 대답 대신 무심한 동작으로 어깨를 툭 털어냈다. 내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권윤조의 손이 쉽게 물러났다.

“기다려.”

권윤조는 당부하듯 말을 남기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앉아서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편의점 유리 너머로 계산대 앞에 선 권윤조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뻔했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을 좀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괜히 눈썹께를 긁었다. 상대 앞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도 못할 부끄럽고 치졸한 분노는 숨기는 편이 나았다.

편의점에서 나온 권윤조는 길바닥에 서 있는 석경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앉아 있지 않고 왜 서 있느냐는 의아함이 담긴 눈길이었다.

“의자가 차가운가?”

“뭐?”

“서 있길래.”

그러니까 지금, 차가운 데에 앉으면 엉덩이 시릴까 봐 서 있는 걸로 보였단 말인가? 다시 날카로워지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권윤조는 그런 석경을 보지도 않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석경도 그쪽으로 다가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냥 서 있었어.”

“…….”

“서 있는 게 편해서.”

“…….”

“……나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해.”

권윤조는 석경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봉투 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한겨울에는 물론이고 한여름에도 찬물로 샤워해 본 적이 없는 석경이 멀뚱히 보고 있자 권윤조는 종류별로 다 집어 온 듯한 초콜릿들을 하나씩 꺼내다가 제 몫의 캔 음료 하나만을 남기고 봉지째 석경에게 넘겼다.

“먹어. 취하면 초콜릿 먹고 싶다며.”

“이렇게 많이는 못 먹는데.”

권윤조는 석경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아, 내가 너무 성의를 무시했나. 손에 잡히는 대로 포장을 뜯어 한입 베어 물자 권윤조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오늘 다 안 먹어도 돼.”

입안에서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의 향연이 펼쳐졌다. 석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를 해치우고 두 번째 포장을 뜯었다.

권윤조는 캔 음료를 들어서 천천히 들이키면서도 눈은 석경을 향하고 있었다. 성의를 생각해서 두 개는 먹어 줘야지. 그러고 보니 초콜릿을 사 주려고 일부러 집에 바래다준다고 했던 거구나. 거짓말처럼 마음이 풀렸다. 불에 덴 듯한 뜨거움도 사라졌다.

“맛있어?”

석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가 입안에 더는 녹여야 할 초콜릿 조각이 남아있지 않을 때 즈음 입을 열었다.

“이거 초콜릿 말이야. 나한테는 취중진담 같은 거야.”

“취중진담? 왜?”

“아버지가 초콜릿 먹는 거 싫어하시거든.”

“충치 생기니까?”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못 믿겠지만, 사내대장부답지 못하다고.”

“뭐? 사내, 대장부?”

권윤조는 그런 희한하고 괴상한 단어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권윤조의 반응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아버지에게 보여 주면 몇 년 정도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통쾌할 것만 같았다.

“초콜릿뿐만이 아니야. 사탕도 싫어하시고, 생일에 케이크 한번 먹어본 적 없어. 우리 집 아들만 둘이거든.”

“……어머니는?”

이것저것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석경은 바로 알아들었다.

“단 거 싫어하셔.”

“성별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취향이잖아. 굳이 따지자면 성별이 아니라 연령 아닌가?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거 아이들이 많이 좋아하니까.”

“맞아. 근데 아버지가 사내답지 못하다고 질색하시니까 그런가 보다 하게 되더라고. 사실은 좋아하는데 어디 가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고.”

그런데 사실 석경은 사내다운 게 뭔지 아직도 잘 몰랐다. 아버지처럼 누구나 황당해 할 편견들을 습득하면 사내대장부가 되는 건가.

“그래서 그때, 새터에서 사탕 안 좋아한다고 말한 거야?”

“그때는 갑자기 물어보니까 당황해서.”

“너는 당황하면 거짓말해?”

“거짓말이 아니라 대외용 진실이지.”

“…….”

“근데 취하면 내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게 되나 봐. 그래서 막 다른 때보다 더 먹고 싶고. 취중진담처럼. 하나 줄까?”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초콜릿 하나를 내밀자 권윤조가 고개를 저었다.

“왜? 너 초콜릿 안 좋아해?”

“좋아해. 근데 먹는 것보다 먹이는 게 더 좋아.”

“그게 뭐야. 취향 존중 못 해 주겠는데?”

권윤조는 조금 웃다가 진지해졌다.

“나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너 술을 대체 언제부터 마신 거야? 하루 이틀 만에 생긴 습관이 아닌 것 같아.”

“처음 마신 건 고1. 근데 자주는 아니고 방학 때 친구들이랑 놀러 가면 그때 진탕 마시고 취하는 거지.”

“나랑 뭐 비슷하네.”

“고1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정말 좋았는데 아무 걱정…… 어? 눈 온다!”

희끗희끗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좋아하는 석경의 모습에 권윤조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너 아무 걱정 없어 보여.”

석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술주정처럼 흘러나온 한탄에 지레 놀라 황급히 말을 돌렸다는 사실을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 얘기를 꺼낸 것도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안 해도 될 말이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취중진담이란 딱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안 해도 될 말.

자신은 취중진담으로 권윤조에게 뭘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뭘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시대에 뒤떨어지고 상식과 동떨어진 아버지의 고루한 마초 사상이 어느덧 예사로워지고 만 ‘사내대장부’에게 매너를 베풀 필요는 없다는 말을 빙 돌려서 한 거나 다름없었다. 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춥다. 그만 일어나자.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존나 하나도 못 알아들었나 보다.

“됐어. 그냥 여기서 헤어져.”

“바래다줄게.”

권윤조가 손목을 붙잡아 왔다. 지나가던 여자 둘이 이쪽을 보고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더니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석경은 붙잡힌 손목을 빼며 말했다.

“너, 진짜 여기서 가라.”

“바래다준다니까.”

권윤조는 양보 없이 단호했다. 석경의 몸과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 권윤조가 왜 이러는지 대강 짐작이 가기는 하는데, 묘하게 기분이 거슬리고 어딘가 결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초콜릿이 가득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챙겨서 일어난 석경은 단호한 눈빛에 대고 말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너 전에 오메가랑 사귄 적 있어?”

“…….”

“내 말은 남자 오메가 말고 여자. 여자 오메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당연히 여자겠지만 쓸데없는 주석을 붙여가며, 속에 담아둔 짐작을 꺼냈다.

권윤조는 석경의 얼굴을 말없이 오래도록 바라봤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리는 눈발이 조금 굵어졌고, 이윽고 권윤조가 긴 숨을 내쉬었다.

“없는데. 왜?”

왜겠어. 때때로 부서지기 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던 관성은 아닌지, 석경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없다고?”

설마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없어.”

그럼 착각인가.

“……없구나.”

“좀 그러네.”

“……뭐가?”

“깜빡이도 없이 남의 과거를 막 캐려 들고.”

“깜빡이 켰잖아.”

“언제.”

“서두에 분명히 궁금한 거 있다고 했는데.”

“아, 그게 깜빡이 켠 거야? 근데 나는 엄청 놀랐어. 갑자기 네가 그런 거 물어봐서.”

화났나. 권윤조의 기색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가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석경의 자취방 쪽이었다. 거침이 없는 발걸음을 석경은 뒤늦게 따라잡았다.

“화났어?”

달래듯 물었지만 석경은 어쩐지 억울했다. 깜빡이 안 켠 게 누군데. 깜빡이도 없이 대뜸 흑기사를 해주고, 바래다준다고 말하고, 실제로 지금 바래다주는 형국이고, 취한 것 같다는 말에 초콜릿을 잔뜩 사서 안겨 준 건 다름 아닌 권윤조다. 그런 일들이 과연 구 여친에 대한 정보를 슬쩍 묻는 것보다 가볍다 할 수 있을까.

“아니. 놀랐다니까.”

“권윤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너는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치약 밑에서부터 짜는 거랑 깜빡이 켜는 거랑, 둘 중에.”

권윤조가 웃으며 돌아봤다. 석경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우고 짐짓 심각한 체했다.

“글쎄, 뭐일 거 같아.”

“음, 박빙인데.”

“계속 생각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래서 석경은 낡은 빌라 앞에서 걸음을 멈출 때까지 생각했다. 다시는 집에 데려다주는 일 따윈 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는 것보다 치약과 깜빡이를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먼저 친해지자고 청한 건 자신이니까 권윤조가 베푸는 잔정을 입맛대로 골라서 취할 수는 없었다.

“여기야, 우리 집.”

“잘 자.”

권윤조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오던 길로 곧장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석경은 권윤조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권윤조.”

그가 몸을 돌렸다.

“응?”

“……뭐가 더 중요한지 말 안 했잖아.”

“깜빡이.”

“왜.”

“내가 낯가림이 좀 있거든.”

“뭐어?”

늘 북적북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권윤조가?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낯가림,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따지고 보면 권윤조에게 사람들이 먼저 다가갔지 그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편은 아니었다.

특히 저에게 대하는 태도만 봐도 매너는 넘치지만 무뚝뚝하면서도 정연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매너와 친화력을 동일시하지 않고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안 믿는 눈치네.”

“아냐, 믿어.”

작게 웃음을 터뜨린 권윤조는 석경을 남겨두고 어둑한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 * *

동아리방 문을 열자 노트북을 하는 태정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권윤조의 모습이 보였다.

“이석경 왔냐?”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태정이 눈을 들어 석경을 반겼다. 석경을 따라서 동아리에 가입한 준영은 태정과 권윤조, 그리고 이수현까지 동아리로 끌어들였다.

“준영이는?”

“안 왔는데? 니들 수업 같이 듣지 않았어?”

“나 과사 들른다고 동방 먼저 가 있으라고 했는데, 어디로 샜나 보다.”

석경은 의자 중에 하나를 끌어다 앉아 휴대폰을 꺼내 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바로 답장이 왔다.

[잘생긴 준영이 : 공대 매점]

[거기서 뭐해? 언제 와?]

[잘생긴 준영이 : 2분 후]

[잘생긴 준영이 : 근데 왜]

[심심해서]

[잘생긴 준영이 : 딱 기다려라ㅋㅋㅋ]

준영에게 알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고개를 들자 언제부터 깨 있었는지 권윤조가 석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을 피하기가 애매해서 말을 걸었다.

“잘 잤어?”

영혼 없는 질문에 권윤조가 대답 없이 픽 웃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언뜻 비치는 초연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저와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워 보였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늘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이 역시도 낯가림의 일종인가.

석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영이가 올 때가 됐는데.

게으르고 방탕한 대학 생활을 보내지 않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으로 1교시 수업을 이틀이나 넣었다. 오늘도 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다. 두 시간 연강인데 교수가 30분 일찍 수업을 끝냈다. 3, 4교시는 공강이었고, 5교시부터는 태정과 권윤조까지 넷이서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준영이 동방에 합류하면 공강 때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 시작될 터였다.

2분 후에 도착이라던 준영은 10분 후에나 동방 문을 부술 듯이 힘차게 열고 들어왔다.

“얘들아! 석경아!”

“야, 김준영. 문 부서지겠다.”

태정이 한마디 했으나 잔뜩 들뜬 준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석경아, 일단 나 업어 줘. 이건 서서 할 얘기가 아니야.”

“의자에 앉지 그러니.”

“내 얘기 들으면 어차피 둥가둥가 나 업어 주고 싶어질 거야. 빨리 업어 줘.”

대체 무슨 얘기길래, 감질나서 입이나 빨리 열게 할 작정으로 석경이 업어 주려는 시늉을 하자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권윤조가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업어 주지 마. 버릇 나빠져.”

“업어 주지 말래. 준영아, 그냥 소파에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권윤조를 흘겨본 준영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뭔데 그러냐.”

저에게 쏠린 기대와 관심을 즐기던 준영이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었다.

“과팅.”

“과팅?”

“그래. 내가 과팅 물어 왔다.”

“무슨 과?”

“놀라지 마라. 무려 국문과다. 꿈에 그리던 문학소녀들이라고! 이 기계들아.”

준영이 기대했을 열렬한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반색했던 태정이 무용과가 더 좋다는 말을 덧붙이며 초를 쳤다. 석경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고 권윤조는 소파에 앉아 있는 준영을 쫓아냈다.

“야, 비켜. 거기 내 자리야.”

“아, 놔 봐! 니들 과팅 나갈 거지? 그렇지? 석경아!”

척박한 반응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준영의 말투가 애절해졌다. 결국 완력으로 소파에서 준영을 몰아낸 권윤조가 화제를 전환했다.

“공강인데 우리 뭐 할까?”

“과팅 나갈 거지? 대답을 해! 석경아! 과팅! 석경아! 과팅! 대답!”

“어우, 내 이름 좀 그만 불러. 귀에서 피 나겠다. 과팅 언젠데.”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어, 나 그날 시간 돼.”

태정이 은근슬쩍 참여 의사를 밝히자 준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도 괜찮아.”

석경의 긍정까지 떨어지자 준영의 얼굴이 도로 의기양양해져서 권윤조를 보았다. 권윤조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과팅 건이 정리되자 몹시도 부산스럽던 동방에 평화가 찾아왔고 화제가 다시 ‘공강인데 뭘 할까’로 돌아왔다. 태정이 부담 없이 의견을 냈다.

“PC방 갈까?”

“안 돼. 이석경 발컨이야. 심각해.”

준영이 단칼에 잘랐다. 물론 단칼에 베인 사람은 의견을 낸 태정이 아닌 말없이 가만히 있던 석경이었다. 저 새끼가?

“권윤조랑 편먹으면 딱이겠네. 권윤조 신컨이거든. 이석경 어때?”

태정의 질문이 날아왔다.

“나 진짜 발컨 맞는데.”

석경은 곤란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게임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친구들과 함께 놀 때 PC방은 필수 코스라 군말 없이 따라가는 편이었다.

준영이 개중에 게임을 좀 하는 편이라 석경과 같은 편이 되어 주곤 했었다. 그때마다 석경은 준영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모진 구박과 쌍욕을 들어야만 했다. 게임만 하면 성격이 돌변하는 준영이 무서워서 석경은 평소처럼 대거리도 않고 고분고분하게 수모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 싫어해?”

권윤조가 물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고, 못하지.”

석경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주눅이 들어서 곤란해 하는 석경을 보며 준영이 키득거렸다. 그런데 정말 저 새끼가?

“그럼 이석경은 내가 감당할게.”

“감당? 권윤조 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다.”

준영이 경고조로 말했다.

“뭐 얼마나 못하겠어.”

“그럼 네가 석경이 잘 좀 돌봐라. 내가 나중에 밥 살게.”

준영의 부탁에 권윤조는 눈은 안 웃고 입만 웃으며 ‘네가 뭔데 밥을 사’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동방을 나섰다. 네가 뭔데? 삐딱한 어감이 석경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제 와서 통성명을 하자는 의미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준영은 뒤따라 나가며 해맑게 ‘저 준영이에여’ 했다.

네 사람은 학교 근처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석경과 권윤조가 나란히 옆자리에 앉고 태정과 준영이 등을 지고 역시 나란히 붙어 앉았다.

세팅을 마친 뒤, 석경은 권윤조의 옆얼굴을 미안한 듯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권윤조가 석경을 돌아봤다.

“권윤조, 나 진짜 못해.”

“괜찮아. 내가 잘해.”

지금은 괜찮다고 하지만 권윤조도 준영처럼 돌변할까. 쌍욕을 퍼부을까. 권윤조가 욕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게임 시작과 동시에 석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석경의 손등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석경은 의지와 상관없이 게임 속 세상에서 시종일관 어기적거리다가 픽픽 맥없이 잘도 죽어 나자빠졌다.

“어? 이거, 키보드가 이상한데? 이거 왜, 컨트롤이……!”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키보드가 아니라 석경의 손이 이상하다는 믿음을 모두가 갖고 있었으므로. 손등에 힘줄까지 세워가며 투혼을 발휘했지만 손이 이상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약 한 시간 후, 준영이 허리를 접으며 숨이 넘어가게 웃는 모습을 석경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석경과 권윤조의 팀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권윤조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신컨이라고 해도 준영도 게임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실력이었고, 태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실상 2 대 1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권윤조, 우리 석경이 감당 잘 했냐?”

“준영아, 입 다물어.”

석경이 대신 나서서 준영을 다그쳤다. 패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누누이 일렀건만 기어코 놀려대는 게 얄미웠다. 권윤조는 가만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기분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권윤조는 게임 중에 욕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석경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욕 대신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억양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대부분 다급한 음성이었다. 이석경! 석경아! 석경아! 아직도 권윤조가 부르는 제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석경은 권윤조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떨구었다.

“실컷 웃었더니 배고프다. 점심 먹으러 가자.”

태정과 준영이 승리의 여운을 즐기며 본인의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장섰다. 뒤처진 권윤조와 석경은 자연스레 나란히 걷게 됐다.

“석경아, 다음에 게임 또 하자.”

권윤조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나왔다. 눈만 꿈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경은 이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너랑 나랑 다른 편으로?”

“아니, 같은 편으로.”

“……왜? 나 때문에 졌잖아.”

“열심히 했다는 게 중요하지.”

“그거 못 했다는 말이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감당할게.”

“야아……. 우리 이미 졌어.”

“그것도 내가 감당할게.”

석경은 대화가 약간 산으로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종 태우기 수법인가. 어쨌든 내 마음이 불편하니까 태우는 거 맞는 거지?

그러나 권윤조는 사람을 태우기에는 한참 모자란 포근포근한 온도를 내뿜고 있었다. 석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반어법 좋아하는구나. 차라리 욕을 하지그래.”

“내가 너한테 욕을 왜 해.”

“준영이는 하던데. 걔는 나한테 욕하고 싶어서 게임하는 애 같아.”

“난 안 해.”

게임 도중 권윤조에게 이름을 불릴 때마다 석경은 흠칫흠칫 떨어야만 했다. 내가 또 뭘 잘못했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가? 물론 결과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네가 내 이름 부를 때마다 욕먹는 느낌이긴 했는데.”

권윤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석경을 바라봤다. 석경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이채가 떠올랐다.

“석경아.”

권윤조가 한없이 다정한 발음으로 제 이름을 불렀다. 꼬박꼬박 성을 붙여서 이석경이라고 불렀었는데 어느샌가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석경아! 석경아! 게임 도중에 들렸던 음성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응?”

“지금도 내가 욕하는 것 같아?”

“조금?”

“석경아.”

권윤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귓불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에 석경은 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자꾸 불러.”

“우쭈쭈.”

……응?

“…….”

“…….”

잠깐, 그러니까, 권윤조가 지금 나한테 우쭈쭈한 거지? 석경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헐, 환장.”

“석경아.”

“…….”

“아직도 욕하는 것 같아?”

그렇다고 하면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나? 우쭈쭈? 두 번은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아니.”

“다행이다.”

권윤조는 정말 다행이라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외모 지상주의자가 길 가다가 보고 한눈에 반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근사하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석경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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