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21)

깜빡이 좀 켜줄래 1권

1.

창가에 앉아 있는 권윤조를 발견하자마자 석경은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 버렸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생각으로 카페에 들어갔지만 권윤조와 여자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매장 안에 꽉 찬 커피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다.

근데 나 왜 도망쳤냐. 카페를 나와서야 의문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도망칠 이유를 찾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도망친 게 아니라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자리를 피해 준 거라고 뒤늦게 스스로 납득할 이유를 찾아냈다. 그래 봤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석경은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다른 카페를 찾았다.

“석경아.”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목소리가 들리면 안 되는데.

천천히 돌아보니 권윤조가 서 있었다. 아, 도망가는 거 다 봤겠네. 석경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골랐다.

“석경아, 애들이랑 영화 보러 안 갔어?”

“…….”

“어디 아파?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

입술이 말랐다. 권윤조의 눈길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들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권윤조는 앞에 가만히 선 채로 석경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가 도로 내놓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석경아, 방금 전에 나 봤으면서 왜 그냥 나갔어?”

“…….”

“응? 왜 그랬어?”

“……너 못 봤는데 난.”

“그래? 눈 마주친 것 같았는데. 근데 커피 사러 온 거 아니었어?”

“커피…… 마실까 했는데 그냥 집에 가서 푹 자려고. 그래서 그냥 나온 거야.”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집에 바래다줄까?”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석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윤조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헷갈리게 행동하는 걸까. 친절과 특별한 신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걸까.

그러나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건 어디까지나 석경의 사정이고 몫이었다. 저의 마음이 뒤숭숭해질수록 권윤조의 낯짝은 어째 더 해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또 나만 심란하지. 권윤조의 속이 투명한 건지 까만 건지. 문제는 그 속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석경에게는 안 보인다는 거였다. 보이지도 않는 걸 자꾸 들여다보려니까 초조하고 꽉 막힌 듯 부대꼈다.

동정. 망할 놈의 것. 그거 되게 싫었는데, 그쪽으로 의미를 두는 게 차라리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들어가. 친구 기다리잖아.”

“아까 나 못 봤다며.”

“응?”

“친구랑 같이 있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

“…….”

“…….”

쉽게 들통난 허술한 거짓말에 지독한 현타가 세게 밀려왔다. 놀리고 싶어서 입술이 꿈틀꿈틀하는 권윤조를 그대로 남겨두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온 석경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 좋은 순간에 석경은 권윤조를 생각했다. 종일 휘둘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마저도 그에게 휘둘리는 중이었다. 낯선 장소를 헤매는 것처럼 그를 궁금해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요 며칠 계속 침대에 누우면 권윤조를 떠올렸다. 제가 왜 그러는 줄도 모르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설마 좋아하는 건가? 걔를? 남자를? 알파를? 도대체 어떻게?

늦은 발현 때문인지 평생을 베타로, 또 이성애자로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덕분에 그런 쪽으로는 아예 무감했던 터라 새로운 의혹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아, 씨이발…….”

석경은 낮은 한숨과 함께 욕을 뇌까렸다.

“좋아하나 보네.”

깜빡이도 없이 권윤조를 좋아하게 됐다. 아니 잠깐, 깜빡이가 켜졌었나.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 켜진 걸까. 손으로 이마를 짚은 석경은 그와의 첫 만남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

* * *

새터 첫째 날 아침 석경은 공대 건물 앞에서 버스에 올라탔다.

오리엔테이션에 안 나왔으니 새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여해야 한다는 준영의 설득을 두 번까지 거절하다가 세 번째는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결과였다. 안 가면 공식적인 아싸가 된다는 협박 때문은 아니고 준영이 하도 간절해 보여서였다.

기계공학과 학생회 선배들과 신입생들을 태운 45인승 대형버스 4대는 두 시간여를 달려 강원도에 위치한 연수원에 도착했다.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지 않았던 석경은 소속된 조가 따로 없었다. 하여 새맞단장에게 양해를 구해 준영과 같은 조가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조장을 따라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신입생 열 명과 재학생 두세 명 가량의 인원으로 구성된 조는 총 15개였다. 남초의 대표 기계공학과답게 여학생 비율은 극히 적었다. 각 조마다 겨우 한 명이 홍일점으로 있었고 많아 봐야 둘이었다. 오티에 참여했었던 준영은 조원들과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준영이 조원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때 석경은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괜히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석경은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다.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런 석경에 비해 준영은 낯가림이 뭔지 모르는 성격을 타고났다. 준영의 활달한 성격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른 애들도 만만치 않았다. 대학이 원래 이런 곳인가. 아니면 오티 효과인가. 오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나 은근한 소외감이 오티 불참에 대한 후회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다들 모여서 둥글게 앉아 봐.”

조장의 지시로 조원들은 원을 그리고 앉았다. 구석에 박혀있던 석경도 주춤주춤 일어나 동그라미의 일부분이 되었다.

오티에 참여했던 인원이 대부분이었으나, 석경을 포함해서 불참했던 사람도 몇 명 껴있는 터라 곧바로 자기소개가 있었다.

“권윤조입니다. 나이는 스무 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석경은 무심코 이제 막 소개를 마친 신입생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튀지 않고 무난한 자기소개였지만 외모가 몹시 튀었다. 심하게 잘생긴 외모에 석경의 입이 둥글게 벌어졌다. 잘은 몰라도 동공도 커졌을 것이다. 사람 외모를 보고 감탄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키도 엄청 컸던 것 같은데. 맵시 있게 날씬한, 길고 탄탄한 몸매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다음.”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석경의 차례가 되었다.

“이석경입니다.”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조장이 물었다.

“끝이야?”

“네.”

“뭐 간단해서 좋네.”

5조의 유일한 여학우가 자기소개를 마쳤을 때는 유난히 박수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특히 석경의 옆에 앉은 준영은 온몸으로 박수를 쳤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새터 참여 인원이 전부 모여 연수원 앞 넓은 마당에서 단체 게임을 했고, 저물녘부터는 새터의 본래 취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방 한가운데에 소주와 맥주 박스, 마른안주거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원들은 다시 원을 그리고 둘러앉았다. 조장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당부했다.

“술 마시다 토사곽란을 하든 기절을 하든 상관은 없는데, 각자 주량 생각해서 마셔. 요 바로 앞에 수심 겁나게 깊은 저수지 있으니까 조심하고.”

술은 죽을 만큼 마시되 진짜로 죽으면 곤란하다는 말 같았다.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자 금세 활기가 돌았다.

“등록금 뽑아 먹으려면 실습 과목 많이 듣게. 수천만 원짜리 장비에 손때 묻힐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아나.”

초반에 교수님 두 분이 잠깐 들어와서 신입생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주더니 살이 되는 조언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술자리가 시작되고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 커다란 원은 어느덧 세 개로 나뉘었다. 석경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 개의 동그라미 중 하나가 석경을 불렀다.

“석경아, 이리 와.”

준영이었다. 준영의 동그라미에는 권윤조도 있었고, 박태정이라는 이름의, 시쳇말로 인싸 친구도 있었다. 박태정과 권윤조는 유독 친해 보인다 싶었는데 둘이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만든 동그라미는 쉴 새 없이 대화가 오고 갔다. 말주변이 없는 석경은 맞장구를 치듯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말이 없는 편인가 봐? 진즉에 나왔어야 할 질문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석경은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다고 소외받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세 사람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석경의 빈 술잔을 채워 주는 것으로 표 나지 않게 석경을 챙겼다.

“석경아, 차린 건 없지만 안주도 좀 먹어 가면서.”

준영이 석경에게 소주를 따라 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술이 센가 봐.”

쉽게 술잔을 비우는 석경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박태정이 말했다.

“얘? 주당이야. 안 그렇게 생겼지?”

“응.”

박태정은 담백하게 긍정했다. 주당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지. 석경은 속으로 생각하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석경에게 쏠렸던 관심은 부담을 느낄 새도 없이 거둬졌다.

함께 술자리를 하면서 지켜본 결과 권윤조와 박태정은 장난기가 다분했다. 준영도 장난기가 많은 데다 워낙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 세 사람의 합은 아주 잘 맞았다. 권윤조와 박태정의 장난은 도가 지나치지 않고 늘 적정선을 지켰다. 선을 지키는 센스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절묘했다.

석경은 셋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말은 없지만 간간이 웃음소리로 반응을 보이는 석경을 박태정은 친근하고 호의적으로 대했다.

반면 권윤조는 석경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기는 석경도 마찬가지였으나 권윤조가 다른 애들에게는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거나 재치 있는 농담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던 터라 자신을 대할 때의 온도차가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둘 사이에 일절 대화가 없는 것에 비해 눈길은 자주 부딪쳤다. 권윤조는 석경과 눈이 마주치면 때로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언제 눈이 마주쳤냐는 듯 태연하게 하던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석경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도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쟤는 왜 나한테 장난을 안 치지. 나는 장난치면 정색할 것처럼 생겼나?

작게 피어오른 의문은 낯설면서도 당혹스러웠다. 마치 저에게도 장난을 쳐 주길 기대하는 마음 같았다. 애들도 아닌데 장난, 그게 뭐라고. 신경 끄고 술이나 마시자. 단순한 의문이 상세한 고민의 영역으로 접어들기 전에 빠르게 차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술자리 대화는 사적인 소스가 잦아졌다. 절대 빠질 수 없는 여자 친구 얘기도. 고1 때 헤어진 이후로 쭉 솔로라서 올해는 기필코 여자 친구를 사귀겠다는 준영의 다짐과 함께 시작된 얘기였다. 박태정은 고3 여름방학 때 여자 친구와 헤어진 얘기를 했다. 비교적 최근이고 술기운이라 이야기가 길어지겠거니 했는데 담담한 표정으로 짧게 끝냈다.

그러다 다시 시선이 느껴졌다. 권윤조가 제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슬슬 시선을 피할 때가 됐는데 계속 안 피하기에 석경은 짐짓 당황했다. 먼저 시선을 피할 요량으로 술을 들이켰다. 이쯤 되면 저를 안 보겠지.

그러나 틀렸다. 어쩐지 관자놀이가 따가워서 다시 눈을 돌리자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이 어디 안 가고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깊은 응시였다.

“이석경, 너는?”

권윤조가 나지막이 물었다. 마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처럼 제 이름이 새롭게 들렸다.

“나?”

“여자 친구 있어?”

석경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질문을 해 온 상대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에게 말 한 번 걸지 않던 권윤조가 연애에 관련된 질문을 해 올 줄은 몰랐다.

석경이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자 권윤조의 목울대가 작게 요동쳤다. 석경은 중학교 때 다른 반 여자애에게 고백을 받아 아주 잠깐 사귀다가 차인 게 연애사의 전부였다. 그런 것도 연애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 지금은 없는데.”

“그럼 남자 친구는?”

“어?”

“남자 친구 있어?”

권윤조의 진지한 말투에 박태정과 준영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석경도 미간을 찌푸리며 웃고 말았다.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지만 권윤조의 얼굴이 잘생겨서 그냥 웃음이 나왔다. 또 한편으로는 저도 장난에 정색하지 않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석경이 남친은 난데.”

준영이 무게라고는 한 톨도 없는 농담을 보탰다. 석경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준영을 보았고 준영은 그런 석경을 못 본 체 딴청을 부렸다. 석경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준영이 취해서 짐승으로 변하는 중인데 내가 몰라봤네. 빨리 자라.”

“걱정 마, 자기야. 나 아직 밑천 남았어. 어흥.”

준영이 껄껄 웃으며 받아치자 취기에 젖은 웃음이 한 차례 지나갔다. 그때 권윤조도 같이 웃었던가. 웃는 대신 석경을 노려봤던 것도 같았다. 상황을 무시해 버리고 싶어서 눈여겨보지 않았다. 여전히 권윤조의 시선은 석경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고등학교 시절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다. 권윤조와 박태정이 졸업한 고등학교는 석경과 준영이 졸업한 고등학교와 꽤 가까웠다. 상류층 애들이 다니는 곳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학교 다닐 때 오다가다 그 학교 교복 많이 봤는데. 우리 한 번쯤은 옷깃이라도 스치지 않았을까? 빨간색 교복 맞지?”

준영이 소주 뚜껑을 따며 묻자 박태정이 흥분했다.

“맞아. 빨강 교복! 내 유일한 흑역사다.”

“어때서. 빨간 장미처럼 예쁘던데. 물론 여자애들한테만 해당되는 얘기야. 남자 새끼들은 구렸어. 혹시 너희들도 존나 구렸니?”

“아무리 외모가 받쳐 준다고 해도 우리라고 별 수 있냐.”

“갑자기 자랑하는 분위기 뭐냐. 근데 진짜 태양초가 걸어 다니는 것 같더라.”

“어. 강당에 모여 있으면 고추 말려 놓은 것 같았다니까.”

박태정이 침방울까지 튀겨가며 치를 떨자 권윤조가 웃었다. 석경은 빨간색 교복을 입은 권윤조와 박태정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는 권윤조의 모습이 좀 더 또렷했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밤이 깊어지자 인사불성으로 뻗어 버린 조원들이 속출하면서 푸푸 내쉬는 숨소리가 요란해졌다. 다음날도 일정이 있었고, 또 술로 달려야 할 날이 하루 더 남았기에 새벽 두 시쯤 술자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석경은 잠들기 직전 억제제를 삼켰다. 취기 때문에 무방비로 자는 사이 페로몬이 흘러나올까 불안했다.

석경의 체향이 방 안에 꽉 찬다고 해도 베타는 어차피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베타는 오메가를 구별할 수가 없다.

문제는 알파였다. 알파는 오메가가 억제제로 완벽하게 페로몬을 지우지 않는 이상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다. 자신이 알파의 페로몬을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하루에 한 알로 정해져 있는 억제제를 오늘 다섯 알이나 먹은 이유는 조원 중에, 그러니까 같은 방에 알파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한 알을 이미 먹었음에도 새터에서 야금야금 네 알을 더 챙겨 먹은 건 스스로 느끼기에도 까다로운 강박이었으나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석경은 권윤조를 보자마자 그가 알파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의 페로몬이 석경의 몸을 관통했으니까.

대부분의 알파는 구태여 형질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악착같이 형질을 숨기는 것은 오메가들의 일이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감탄한 것도 잠시, 형질을 들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뒤따랐다. 하필이면 알파냐고 그를 탓할 건 못 된다. 피곤한 일이지만 제가 더 신경 쓰고 조심하면 되니까. 떠안아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억울함이 덜했다.

권윤조의 페로몬인 아카시아 향은 싱그럽고 청량한 그의 외모와 무척 잘 어울렸다.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잠복해있던 천박한 오메가 기질이 기어 나오려고 했다. 석경은 혐오스러운 바퀴벌레를 죽이듯 그것을 짓눌렀다.

* * *

무심코 호감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해가 빛나면 그 볕을 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듯 환하게 빛나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매료되는 것이다.

그렇게 빛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상대가 호감을 표현할 기회를 얼마든지 허용하는 사람. 벽을 세워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호감을 차단하는 사람.

권윤조는 명백히 전자였다. 새터 둘째 날에는 권윤조를 모르는 사람을, 아니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졌다. 누구나 권윤조와 친해지고 싶어 했고 아낌없이 열띤 호감을 표현했다.

권윤조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석경은 어땠냐면 한쪽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었다. 응달처럼.

석경은 자신이 인간관계에 서투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더디면 십중팔구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권윤조와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도 당연히 제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석경은 권윤조와 친해지고 싶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하룻밤 사이에 박태정과 절친을 먹어 버린 준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석경이 권윤조와 친해지지 못하고 겉돈다면 준영이 중간에서 곤란해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되도록 빨리 권윤조와 친해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파라는 사실이 약간 걸렸지만 자신이 주의하면 되는 문제니 그렇게까지 큰 걸림돌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 석경은 둘째 날부터 권윤조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몇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비루한 응달 이석경은 거룩한 태양 권윤조의 볕을 쬐기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만만치 않았는지 말을 하자면 둘째 날 아침에 일어난 일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야, 권윤조. 치약 잘 썼다.”

석경은 박태정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정확히는 박태정의 입에서 나온 ‘권윤조’라는 이름 때문에 잠에서 깼다.

“어. 근데 이거 치약 상태가 왜 이래?”

뒤이어 들리는 권윤조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몽롱하게 남아있던 잠기운을 거둬 갔다.

“뭐가.”

“누가 치약을 가운데부터 짜냐?”

“이 새끼, 아침부터 왜 푸닥거리야. 어제 술이 모자랐냐?”

“그러니까 왜 치약을 가운데부터!”

“치약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는 게 중요해.”

석경은 권윤조와 박태정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방에서 칫솔을 꺼낸 석경은 권윤조를 향해 다가갔다. 권윤조와 박태정이 동시에 석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이석경 일어났냐?”

박태정이 먼저 말을 건넸다. 석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권윤조가 들고 있는 치약을 바라봤다. 권윤조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기…….”

석경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권윤조는 들고 있던 치약을 석경에게 말없이 건넸다.

석경은 졸지에 할 말을 잃은 채 얼떨결에 치약을 받아들고 방을 나왔다. 치약을 건네던 권윤조의 굳은 표정이 뇌리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얼른 먹고 떨어지라 이건가. 준영의 가방 안에도 치약이 있었지만 부러 권윤조와 말을 섞기 위한 시도였는데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석경은 치약을 쓰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돌려줬다. 권윤조는 이번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치약도 끄트머리부터 짜서 썼는데 잘했다 못했다는 말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아침 식사 후에 가볍게 족구 시합을 했다. 권윤조의 활약 덕분에 석경이 속한 팀이 가볍게 승리했다. 적수조차 되지 않는 싱거운 경기였지만 권윤조는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팀원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모습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그는 달아오른 햇빛처럼 뜨겁고 눈부셨다.

어쩌면 석경은 그가 저에게도 손바닥을 부딪혀 오기를 내심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윤조는 석경에게 하이파이브를 해 오지 않았다. 기대를 머금었던 손이 머쓱했다. 분명 같은 팀으로 뛰었는데 상대 팀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진 팀이 간식을 쏘겠다고 했다. 아침을 먹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 탓인지 숙취가 도진 석경은 준영에게 방에서 쉬겠다고 말하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방에 들어와 샤워를 한 석경은 구석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벽을 보고 누워 있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조원들이 곧 들이닥칠 터라 애초에 잠을 청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석경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나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느낌이 점차 뚜렷해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했다. 정지된 화면처럼 권윤조가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석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그렇게 놀랐을까. 권윤조가 오면 안 될 곳에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권윤조는 누가 봐도 놀란 얼굴을 한 석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방을 나갔다. 석경은 정지된 화면이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며 아득하게 누워 있었다.

침입자라도 대하듯 하던 자신의 태도가 권윤조를 방에서 쫓아낸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말도 없이 나가 버리냐. 사람 민망하게. 민망한 건지 미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권윤조가 웬일로 혼자 있었다. 권윤조는 연수원 구석 울타리 옆에서 무료하게 서 있었다. 석경의 발걸음이 저절로 권윤조 쪽으로 향하는 사이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거기 혼자 있었는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궁금증이 풀렸다. 고양이였다.

석경도 권윤조의 옆에 웅크려 앉아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고양이를 바라봤다. 곧 권윤조의 시선이 느껴졌다. 석경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권윤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엽지?”

“…….”

권윤조의 눈가가 경직됐다. 자신이 무슨 말을 걸었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긴 침묵이 흐르는 사이 바람이 권윤조의 머리카락에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지나갔다.

귀엽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대화의 맥을 이어 나가려고 준비해 둔 ‘고양이 좋아해?’라는 질문도 ‘나도 좋아하는데’라는 공감대 형성도 소용이 없어졌다. 석경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권윤조의 철벽이 단순히 신경 쓰이는 단계를 넘어 껄끄럽고 거북해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다른 사람들과 저를 대할 때의 차이. 잘 웃고 서글서글한 권윤조가 저를 대할 때는 마치 다른 인격이 된 것처럼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 나한테 왜 저러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의문을 가져보자면, ‘나한테’가 아니라 ‘나한테만’ 왜 저러지? 였다.

석경은 자신의 오메가 형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 의식이었지만 동시에 강력한 단서이기도 했다. 체향을 숨겼는데 눈치챈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아 보았다. 안 나는데. 냄새가 안 나는데 눈치챌 수가 있나?

그런데 권윤조는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확신은 아니더라도 의심 정도는 품고 있는 듯한 찜찜하고 불안한 느낌.

그렇다고 ‘너 내가 오메가인 거 알아?’라고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역으로 ‘너 오메가지?’라는 질문을 받아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야겠지. 그런데 거의 들킨 마당에 무슨 재주로 잡아떼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대부분의 알파가 사회계층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탓에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권력관계는 더욱 두드러졌다. 알파를 유혹하는 천박한 오메가. 히트사이클에 성범죄의 대상이 되어도 오메가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감히 알파를 유혹했으니까. 페로몬에 눈이 돌아 덜컥 임신이라도 시키면 귀찮아진다며 오메가를 해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듯 취급하는 알파도 많았다.

좀 더 비정하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알파는 오메가를 정복하고 싶은 자극적인 성 노리개로 여기거나, 더러운 오물을 보듯 기피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의 케이스는 고등학교 때 보았다. 보았다기보다 들었다. 석경과 친분은 물론이고 접점도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틈만 나면 오메가랑 하는 섹스가 이렇다 저렇다며 감동 어린 목소리로 떠벌려 대는 변태라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소문을 들었을 때 모욕적인 기분이 들었다. 녀석에게 농락당한 오메가가 제가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말아 쥔 주먹이 하얘졌었다.

그렇다면 권윤조는 두 부류 가운데 어느 쪽일까.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서늘한 침묵, 무시, 찌를 듯한 시선, 저를 싫어하는 낌새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침묵은 경멸을 나타내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라고 어떤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권윤조는 아무래도 자신을, 오메가인 자신을 경멸하고 기피하는 것 같았다. 물론 추측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추측이 사실이라고 해도 권윤조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석경은 다시 제 체향을 신중하게 맡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억제제를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아직은 의심 단계일지도 모르니 자연스럽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하게 당당할 필요는 없다. 베타가 알파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딱 그만큼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과연 그게 될지 크게 자신은 없었다. 오메가보다 베타로 살았던 세월이 몇 배나 길었음에도 ‘자연스러운’ 베타가 까마득했다. 베타일 때는 알파 앞에서 굳이 자연스러울 필요가 없었다.

의혹을 풀지 못한 꺼림칙한 기분과 함께 둘째 날 저녁을 맞이했다. 둘째 날 술자리는 첫날과 달리 다른 조와의 교류가 부쩍 활발해졌다. 특히 석경의 방은 원정을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아 번잡했다. 대부분 권윤조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윤조야, 이거 마셔.”

처음 보는 여자애가 상기된 표정으로 권윤조에게 숙취 해소 음료를 건넸다. 이게 몇 번째더라?

“고마워. 잘 마실게.”

권윤조는 마치 훈련된 것 같은 관성적인 미소와 인사로 숙취 해소 음료를 받았다. 그리고 무심한 동작으로 그것을 제 옆에 내려놓았다. 권윤조 옆에는 이미 수많은 숙취 해소 음료가 있었다.

수줍은 미소가 어려 있던 여자애의 표정이 아연 돌변했다. 이제 이런 광경도 석경에게는 익숙했다.

“되게 많이 받았네?”

가만히 숙취 해소 음료들을 노려보던 여자애가 마치 해명을 필요로 하는 듯 툭 뱉었다. 심통 난 목소리가 꽤나 저돌적이었다.

“응, 많은데 하나 줄까?”

대강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드는 권윤조를 보며 여자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마도 자신이 방금 건네준 숙취 해소 음료의 미래를 앞당겨서 목격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됐어.”

석경은 방을 나가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았다. 화가 났을까? 본인만 권윤조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실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어서? 아니면 기껏 용기를 내어 표현한 호감이 특별한 취급을 받지 못해서?

“와, 기계과에서도 원래 막 이런 일이 있고 그런 거였어? 과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사람이 문제였구나.”

약 20분 전부터 같이 술을 마시던 2학년 선배가 씁쓸한 투로 말했다. 학과 동아리 홍보 차 우리 쪽에 끼어든 선배였다.

“참, 석경아. 생각해 봤어?”

“네?”

“우리 동아리 가입하는 거.”

“……생각해 볼게요.”

“형 얘기 잘 들어. 1학년 때는 내가 지금 기계과에 들어온 게 맞나, 좀 헷갈릴 거야. 미적분, 물리, 화학, 뭐 이런 거만 죽어라 파거든. 고등학교 이과 심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과 지옥인 셈이지. 기계과 동아리도 다 거기서 거기야. 이과 지옥에서 안 벗어나. 동방 가면 칙칙한 복학생들이 PC 앞에 앉아서 허구한 날 매트랩이나 돌리고 앉아 있어. 근데 우리 동아리는 차원이 달라. 왠 줄 알아? 무려 영어 동아리거든. 문과 테라피라고 아니? 이과에 찌든 뇌를 문과로 정화하는 거야. 공대 안에서는 이과 놈들 다 거기서 거기라 자기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찌질한지 모르는데 공대 밖으로 나가면 들통나는 거 순식간이거든. 아 나란 인간, 정말로 이송한 인간이었구나. 뒤늦게 깨달아도 소용없는 거지. 이건 좀 내 자랑 같은데, 어디 가면 문과 같다는 소리 종종 들어. 다 우리 동아리 덕분이야. 인마!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석경은 어딘가 사이비 종교 신도 같은 구석이 있는 선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아, 네.”

“석경아, 우리 동아리 가입할 거지?”

선배는 옆에 앉은 석경에게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비교적 만만해 보였던 걸까? 선배는 아까부터 석경만 공략했다. 실패한 개그를 5분 동안이나 설명하던 다른 선배에 비하면 눈앞의 선배는 비교적 양호했다.

“네. 가입할게요.”

“형이 밥 많이 사 줄게. 술도 사 주고. A급 족보도 줄게.”

“고맙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무슨. 형이라고 불러.”

선배가 석경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석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선배의 손길이 남아있는 볼을 쓸었다.

“네, 형.”

그때 우연처럼 마주친 권윤조의 눈빛은 깊고 습한 동굴 같았다.

동아리에 가입하겠다는 석경의 확답을 들어서인지 선배는 술을 두어 잔 더 마시다가 곧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와, 저 선배 엄청 적극적이다.”

박태정이 석경을 보며 말했다. 두 눈동자가 장난기로 번들거렸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뭐가.”

“아니, 밥 사 주고 술 사 주고 족보도 주고 다 해 준다잖아. 이거 거의 뭐 프러포즈네.”

“내가 제일 만만했나 보지.”

“아냐, 석경아. 네 볼도 막 만지고 눈빛도 좀 되게 끈적하고. 너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솔로 탈출하는 거 아니야?”

석경은 박태정의 가슴팍을 향해 소주 뚜껑을 던졌다.

“야! 저 선배 남자잖아.”

“뭐 어때서 그래.”

그러면 선배가 내 볼 만질 때 술은 왜 뿜었냐. 석경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한 박태정의 모순을 짚어 주려다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화제를 마무리했다.

“아, 징그럽다. 그만해.”

“안 그래도 그만하려고 했어. 준영이가 입 닥치라고 아까부터 눈치 줬거든.”

석경은 준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준영이 박태정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새꺄. 석경이는 그런 거 진짜 싫어해. 농담이라도 하지 마.”

준영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잘라 말했다. 전투력이 급상승한 준영을 석경은 말없이 바라봤다.

준영은 석경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유일한 친구다. 그 비밀이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기실 석경보다 준영이 이런 농담을 더 싫어했다. 오메가 친구를 지켜주는 준영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준영에게 걸린 마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과민 반응이 오히려 엉뚱한 의혹을 부풀린다는 사실을 준영은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참 나, 김준영 웃기는 자식이네.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

조금 이상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박태정이 따지듯이 물었다.

“뭐가?”

“네가 어제 그랬잖아. 네가 이석경 남친이라며.”

“그거 농담 아닌데.”

“뭐? 진짜?”

박태정의 눈이 다시 커졌다. 석경은 웃으며 준영의 어깨를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툭 쳤다.

“야, 그만해. 쟤 진짠 줄 알잖아.”

뒤늦게 준영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은 박태정이 어딘가 안도하는 얼굴로 웃었다. 석경은 그런 박태정을 보며 소리 내어 웃다가 권윤조를 슬쩍 보았다. 권윤조는 표정을 읽을 수도 없게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짠 줄 알잖아’ 사실은 박태정이 아니라 권윤조의 오해를 고쳐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오메가이고 권윤조가 알파라서 일 테다. 그렇지 않아도 오메가라는 의심을 받는데 게이라는 오해까지 받게 될까 봐 신경 쓰였다.

“원정 왔습니다!”

얼마쯤 지나 여자 동기 4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살짝 취해 있었고 그만큼 기분이 들떠 있었다.

여자애들은 남자 넷이서만 둥글게 모여앉아 있는 꼴을 보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작았던 원이 순식간에 두 배로 커졌다. 준영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모습을 보고 석경은 속으로 웃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태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을 더 가져왔다.

“이름이, 이석경 맞지? 받아.”

여자 동기 하나가 순하게 웃으며 석경을 향해 술병을 기울였다. 그렇게 차례대로 한 사람씩 잔을 받다 보니 연거푸 4잔을 먹게 됐다. 다른 녀석들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에서도 술을 따라 주자 원정 왔으니까 살살 하라며 엄살을 떨었다. 석경은 살살 따라 줬지만 다른 녀석들은 얄짤없었다.

6조 김미연이 4잔 째에서 버거워하자 권윤조가 숙취 해소 음료를 건넸다. 취기로 인해 발그레했던 김미연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김미연이 이 방에 원정을 온 것은 오늘만 세 번째인가 네 번째였다. 다른 여자 동기들도 처음은 아니었다. 4명이 그룹이 되어 한꺼번에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지만.

여자애들끼리 작정하고 이쪽 머릿수에 맞춰 왔다는 사실을 아무리 둔한 석경이라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아마 준영도 그것을 눈치채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을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4 대 4 미팅이 되었다. 석경은 저에게 제일 처음으로 술을 따라 주며 살갑게 말을 붙였던 동기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화살표의 혼선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짝도 어느 정도 합의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8조라는 건 알겠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이름표도 없었다.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는 성의는 다들 첫째 날이 한계였다.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다른 여자 동기가 그 애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렸다.

“야, 김준영 술 넘치잖아. 살살 좀 따라. 원정 온 손님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돼?”

“웃기지 마, 이수현. 너는 우리 조잖아.”

“어? 너 잘생겨졌다?”

“취한 척해도 소용없어.”

4명의 여자 동기 사이에는 5조의 홍일점 이수현도 끼어 있었다. 같은 조라서 제법 친해진 터라 이수현은 누굴 짝으로 정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석경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수현이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덩달아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석경은 머쓱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수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권윤조를 목격했다. 어느새 이수현도 그런 권윤조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석경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화살표 몇 개는 겹치는 것 같은데. 권윤조에게 받은 숙취 해소 음료를 손에 꼭 쥐고 있는 6조 김미연도 묘한 기류를 눈치챘을까. 사실 그런 것들은 찰나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석경은 다만 저를 불편하게 하는 멀미가 멎기를 바랄 뿐이었다.

“얘 또 걸렸네! 괜찮아? 마셔! 오오, 마셔 마셔!”

8조 여자애는 8박자 프라이팬 게임에서 연속으로 3번이나 걸렸고, 벌주도 3잔 째였다. 석경은 소주와 맥주가 혼합된 종이컵을 들고 울상을 짓고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멀미를 잠재울 계기가 필요했다.

“이리 줘. 내가 마실게.”

“응?”

“흑기사 해 준다고.”

“아, 고마워.”

‘오오! 이석경 멋있다!’ 술잔이 석경의 손으로 건너오자 격렬한 반응이 쏟아졌다. 준영이 흥흥, 거리며 시샘인지 놀림인지 모를 묘한 소리를 냈다.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흑기사를 자처한 이유는 순전히 권윤조 때문이었다. 마치 탐색이라도 하는 듯 저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는 시선 탓에 멀미가 났다.

왜 저러는지 짐작은 갔다. 오메가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 관찰하는 중일 것이다. 석경은 결백 아닌 결백을 증명하려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보란 듯이 여자애들과 더 자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고 흑기사 노릇까지 했다. 잘 봐. 나는 여자한테 관심 있으니까. 네가 훗날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완전히 알아차린다고 해도 알파인 네가 경계할 만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유치하지만 석경에게는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었다.

“와아아!”

깔끔하게 술잔을 비워 내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별일도 아니건만 다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행동이 두 스푼씩 과했다. 방안에 8명만 있는 것도 아닌데 소음 조절이 안 됐다.

석경은 아까부터 이쪽을 아니꼽게 주시하던 복학생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꼬장꼬장 시비를 걸고 싶어 죽겠는데 명분이 없어서 눈꼬리만 날카롭게 찢고 있는 복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귀하디귀한 기계과 여학우들을 차지한 발칙한 신입생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달아오른 취기와 함께 들들 끓고 있었다. 한데 즐겁게 웃고 떠들자는 취지가 강한 새터 술자리라 감히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야, 공대 들어오는 여자들은 뭔 생각으로 오는 거냐?”

복학생의 꼴사나운 주사는 맥락도 없이 표출되었다. 일순 방안의 소음이 뚝 끊기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달콤한 열기로 가득했던 공간이 얼어붙었다. 이쪽을 향해 직접적으로 던진 말은 아니었으나 치졸한 광역 도발을 모두가 들었다. 여자 동기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같이 놀고 싶으면 술잔 들고 올 것이지 뭐 이따위로 관심을 끄냐. 그런 건 또 부끄럽고 용기가 안 나나 보다. 어떤 게 진짜 부끄러움인지 분간도 못 하는 복학생 무리를 바라보는 석경의 눈에 한심한 기운이 담겼다.

“대기업에 취업 잘 된다니까 왔겠지.”

“취업이야 잘 되지. 근데 기계 나와서 갈 데 뻔하잖아. 공대 나왔으면 공장에서 기름때 묻히는 거 기본 아니냐? 관리직이라고 책상에 붙어서 설계만 할 것 같냐? 작업복 입고 현장 나갈 일 없을 것 같아? 현장직들이 관리직만 보면 일단 기부터 죽이고 보는데 여자들은 그거 절대 못 버텨. 대학 다닐 때야 좋지. 여자라고 교수들이 학점 잘 주고 남자들이 떠받들어 주고.”

말을 마치고는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이쪽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복학생이면 학번이 최소 3개가 차이가 난다. 하극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눈빛이 뻔해서 실소가 나왔다. 싸우고 싶어서 근질근질 아주 죽겠나 보다.

“왜 저러는지 누가 설명 좀.”

준영이 작게 속삭였다. 박태정도 덩달아 속삭였다.

“몰라. 워낙에 급발진이라 나도 얼 타는 중이다.”

“석박사 할 건데요.”

결국 6조 김미연의 입에서 팽팽하고 적나라한 적의가 터져 나왔다. 복학생의 얼굴에 드디어 낚았다는 희열과 맹랑한 말대꾸에 대한 괘씸함이 공존했다.

“뭐?”

“공장 취업 안 하고 연구소에서 석박사 할 거라고요.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공대 왔는지 궁금해하셨잖아요.”

“야, 뭔데. 내가 너한테 물어봤어? 네가 여자 대표야?”

“야, 그만해라.”

“뭘 그만해.”

옆에서 말리는 친구를 뿌리치며 복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라는 작자는 말리는 시늉만 조금 하다가 손을 놓아 버렸다. 내심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상황이 참 좆같이 돌아간다. 점점.

석경은 이쪽을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복학생을 올려다봤다. 여차하면 저도 일어날 작정으로 잔뜩 경계를 돋우는데 문득 권윤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권윤조는 양반다리를 한 채 비스듬한 자세로 턱을 괴고 있었다. 복학생의 술주정에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흥미롭게 관조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무덤덤한 표정, 오히려 조금 지루하고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오직 그만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순간 석경은 밑도 끝도 없이 오싹함을 느꼈다. 얘는 뭐야.

복학생을 향해있던 경계심이 권윤조에게 옮겨갔다.

“야, 석박사 너. 선배들끼리 하는 얘기에 어딜 건방지게 끼어들어?”

술주정인지 똥군기인지 모호하다. 어느 쪽이든 꼴값이었다. 김미연은 경멸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복학생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8조 여자애는 눈가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겁먹은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불현듯 전날 밤의 엑스맨 사건이 떠올랐다. 재학생 중 하나가 내내 신입생 행세를 하다가 술기운에 평상시 하던 대로 조장에게 말을 놓고 말았다. 엑스맨과 조장은 당황하고 신입생들은 황당해하면서 그렇게 엑스맨의 정체가 밝혀졌다. 엑스맨이 발각되는 시기를 두고 각 조장들끼리 술 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는지 함께 있던 옆 조 조장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했었다.

석경은 차라리 순진한 신입생들을 속이기 위한 상황극 같은 거였으면 하고 바랐다. 꼰대의 기습적인 테러에 신입생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뭐 그런 거.

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에는 복학생의 분노 조절 장애 연기가 너무나도 실감 났다. 저건, 진짜다. 진짜가 아닐 리가 없다. 사람이 연기로 저렇게까지 한심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학생은 위협적이라기보다 한심했다. 저런 것도 인간이랍시고 두 발로 걸어 다니겠지. ‘후배님들, 사실은 이 모든 게 다 상황극이었답니다’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복학생을 상상하는 것보다 꼰대와 하극상의 드잡이질을 상상하는 게 훨씬 쉬웠다.

저런 새끼가 이 학교에는 무슨 머리로 들어왔지, 라는 순진한 의문은 들지 않았다. 석경이 나온 고등학교도 수재들만 모인 명문고였지만 한심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왜 화를 내세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예요? 여자만 보면 막 분노 조절이 안 되나요?”

그때 얌전하던 이수현도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나섰다. 180도 돌변한 이수현을 보며 석경은 놀랐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고 이수현까지 휘말려 들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거 선배한테 말하는 싸가지 봐라. 얘가 나랑 맞먹자고 하네. 너랑 나랑 학번이 몇 개가 차이 나는데 씨발!”

“지금 욕했어요? 놔! 저런 새끼는 가만두면 안 돼.”

석경은 스스로 멈추기 힘들어진 이수현을 억지로 주저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경은 감정을 지우고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아까 분명 공대 여자들은 교수들이 학점 잘 주고 남자들이 떠받들어 준다고 하셨죠? 선배님 발언 학교 SNS에 그대로 올려도 됩니까?”

“이 씨발 새끼가!”

복학생이 손을 치켜드는 순간 뜻밖에 권윤조가 석경의 앞을 막아섰다. 어? 너 분명 턱 괴고 있지 않았니? 의문을 길게 느낄 새도 없이 목표를 잃은 복학생의 손이 앞을 막아선 권윤조의 가슴팍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권윤조가 제지했다. 복학생의 몸이 우스꽝스럽게 휘청했다. 팔을 붙잡힌 복학생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다.

“그만하시죠.”

권윤조가 말했다.

“놔! 안 놔?”

“선배님, 화가 아주 많이 나셨네. 화가 날 때는 말끝에 용을 붙여 보세요. 그럼 화가 풀려요. ‘놔용. 안 놔용?’ 자, 이렇게요. 따라 해 보세요.”

“너, 씨발,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냐? 이거 완전 또라이네.”

“얼른 제 말대로 따라 하시고 화 푸시는 게 좋을 텐데. 일을 크게 저지를수록 수습도 그만큼 어려워져요. 내일 술 깨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기억 안 나는 척하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아악! 놔! 놓으라고 또라이 새끼야!”

“용, 붙이셔야죠.”

“잠깐만! 놓고! 일단 놓고!”

“’잠깐만용. 놓고용. 일단 놓고용.’”

권윤조는 여전히 복학생의 팔을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다. 복학생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급기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알파의 신체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복학생의 반응은 전혀 엄살이 아닐 것이다.

권윤조는 여유롭게 미소를 머금고 있고 복학생은 아파서 당장이라도 까무러치려고 하는 기묘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 상황을 매듭지은 사람은 학회장이었다.

“아,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얘들아, 미안하다. 신경 쓰지 말고 놀아, 편히 놀아! 어? 놀아. 술 많이 남았지?”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회장이 최후의 발악인 듯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는 복학생을 방에서 끌고 나갔다. 그렇게 상황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빌런이 사라지면서 평화가 회복되었으나 도저히 웃으며 술자리를 이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자애들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몹시 어두운 얼굴로 방을 나갔다.

“새터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준영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 위험한 새터에 네가 오자고 했지.”

“미안해. 저 꼰대 새끼 때문에.”

“됐어, 농담이야.”

석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석경은 복학생의 난동에 완벽하게 무관심했던 권윤조의 갑작스러운 대응이 그저 신기했다. 자신이 보았던 지루하고 권태로웠던 모습이 착각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경계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순간이지만 권윤조의 모습은 정말이지 오싹했으니까.

한데 따지고 보면 그의 모습 자체가 오싹했던 게 아니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알 수조차 없는 밑도 끝도 없는 미지의 무언가가, 그의 속내를 상상하게 만드는 찰나의 전율이 두려웠다. 결국 권윤조가 복학생을 적극적으로 상대했다고는 해도 그때의 전율을 덮어 줄 수는 없었다.

“지구는 둥글고 미친놈은 많구나.”

박태정이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준영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박태정. 너 아까 잘 참더라. 솔직히 네 인내심에 놀랐어.”

“시시해 보여서 나까지 나설 필요가 없더라고.”

“아, 그래서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계셨다?”

“추워서 떤 거야.”

“진심 쪼다 같아. 뭐야, 슬퍼.”

“그러는 너도 굉장히 얌전하던데.”

“석경이 건드리면 나서려고 했는데 마침 권윤조가 대신 나서 주더라고. 우리 석경이 건드리면, 마! 그땐 나도 깡패가 되는 거야!”

석경은 저를 껴안으려는 준영을 냉정하게 밀쳐냈다. 그 모습을 보며 박태정이 웃다가 흐뭇한 얼굴로 권윤조의 등을 두드렸다.

“권윤조 이 자식 진짜, 내 친구지만 또라이 같더라. 용을 왜 자꾸 찾아.”

권윤조는 입술 끝만 들어 올려 소리 없이 웃는 거 말고는 별 반응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손바닥 위에서 갖고 놀았다고는 해도 복학생을 상대한 뒤끝이 더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자애들과 화기애애했던 시간을 방해받아서 언짢았는지도 모른다.

준영과 박태정이 권윤조의 활약을 복기하며 떠들어댈 때, 석경은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석경아, 너 어디 가?”

석경은 자기가 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잊은 것처럼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손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어, 나 잠깐 전화 좀.”

준영이 하얗게 질린 석경의 얼굴을 보았다. 준영은 석경이 가끔 창백해지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경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방을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어둡고 후미진 구석을 찾아 걸어갔다. 이윽고 어둠과 하나가 된 순간 신호가 끊어졌다. 그러나 석경은 전화를 거는 대신에 재차 걸려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아버지.”

-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는 거냐.

다짜고짜 타박하는 말부터 건너왔다. 동시에 커다란 돌덩이가 속에 들어앉아 숨통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 ……술 마셨냐?

“조금, 마셨어요.”

- 제정신이냐? 술 마시고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사내자식이 한심한 소문이나 달고 다닐 셈이냐?

사고와 소문.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조합이었다. 그 두 단어가 나와야 비로소 아버지의 잔소리가 끝이 난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그 말이 일찍 나왔다. 아마 잔소리도 길지 않을 터였다.

“……조심하고 있습니다. 약도 먹었고요.”

- 끊어라.

전화가 툭 끊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석경을 못마땅해 하는 목소리였다.

이럴 거면 왜 전화를 한 걸까. 혹시라도 주제 파악을 게을리할까 봐서?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아버지와 통화할 때만큼 분명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아버지로부터, 또한 오메가라는 형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불쑥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석경에게는.

석경은 하루에 한 알씩만 복용하도록 되어 있는 억제제를 평소 서너 알씩 챙겨 먹고 있었다. 새터에 와서는 하루에 대여섯 알을 먹었다. 그래도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사고와 소문이 날지도 모르는 제 치부를 숨기기에 이 작은 알갱이들은 한참이나 역부족으로 느껴졌다.

석경은 화가 날 때 말끝에 용을 붙여보라는 권윤조의 말을 떠올렸다.

“……용.”

제 목소리가 고스란히 제 귀로 전달되었고 끝내 머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심하고 있어용. 약도 배 터지게 많이 먹었고용. 사실은 술도 조금이 아니라 배 터지게 먹었어용. 소문을 달고 다닐 생각은 저도 없어용. 속으로 몇 마디 더 하다 보니 어쩐지 아버지를 놀리는 느낌이라 통쾌해졌다. 숨통을 틀어막았던 돌덩이가 기우뚱 비껴 났다. 이거 효과 있네.

조용히 웃으며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왜 불렀어?”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석경은 익숙한 목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결코 크지 않았지만 석경의 귀에 유난히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다름 아닌 권윤조의 목소리였다.

혼잣말일 리는 없었다. 권윤조를 불러낸 적이 없는 저를 향한 말일 리도 없었다. 그를 불러낸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들어서는 안 될 종류의 대화가 오고 갈 듯한 좋지 않은 징조를 느꼈다.

석경은 애꿎은 휴대폰 액정을 괜히 엄지로 문지르며 선객의 존재를 알릴 타이밍을 엿봤다. 더 미적거리다가는 몰래 엿듣는 꼴이 될 테니 잠시 어색한 상황을 맞게 되더라도 일찍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사탕 먹을래? 박하사탕인데.”

뒤이어 들려온 발랄한 여자 목소리에 막 걸음을 옮기려던 석경은 반사적으로 어두운 사각지대 안으로 몸을 숨겼다. 느닷없이 갈증이 났다.

캄캄한 밤, 으슥한 장소에서 마주 본 두 남녀. 비록 사방은 어두웠으나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훤했다.

2박 3일 일정으로 온 새내기 배움터에서 이성에게 고백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난 지 하루 이틀 만에 초고속으로 반해서 패기 있게 고백까지 밀어붙여야 하는데, 연애의 필수 코스로 썸을 타야 하는 인간 불신 시대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길거리에서 상대방의 외모에 반해 번호를 따는 일과는 엄연히 경우가 다르다. 고백과 동시에 차이든, 운 좋게 고백이 먹혀들어 몇 달 사귀다가 차이든 이후 몇 년을 같은 과에서 부대껴야 하는 것이다. 이만저만이 아닌 손해를 감수하고 용기를 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공과대학 새터에서 남자 신입생이 여자 신입생에게 고백 받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라는 거다.

석경은 본의 아니게 사각지대에 숨어 희박하고 놀라운 기적을 반강제로 엿듣게 되었다.

“고마워. 그래서 용건이 뭔데?”

기적을 일구어 낸 주인공의 목소리에 석경은 숨을 죽였다. 기적의 성질이 행운인지 피나는 노력의 산물인지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저절로 납득이 되는 최상위 계층에 속한 인물 권윤조.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이런 일을 겪어 본 것처럼. 겪어도 여러 번 겪어 본 것처럼.

“권윤조.”

“응?”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

“너도 나 좋아하지?”

“아니.”

“아니라고?”

찰나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부정에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석경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가 저렇게 단호해. 기껏 용기 내어 고백한 사람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기가 질리도록 냉정한 대답이었다.

“응, 안 좋아해.”

들릴 듯 말 듯 길게 내뱉은 여자애의 한숨 소리와 함께 무겁고 심각한 공기가 짙어졌다. 석경은 작은 한숨 소리마저 정교하게 잡아내는 가까운 거리를 의식하고 보다 신중하게 기척을 죽였다.

“날 안 좋아한다고?”

“그래. 안 좋아하니까 이거, 좀 놓고…… 응?”

“……그렇구나. 너는 날 안 좋아한다 이거지?”

“어.”

“…….”

“…….”

“근데 너, 내가 준 박하사탕 왜 안 먹어?”

“……꼭 지금 먹어야 돼?”

“꼭 그런 건 아닌데.”

“…….”

침묵이 이어졌다.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길어지는 침묵이 버거웠다. 이대로 끝인가. 끝이면 좋겠다고 석경은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들린 여자애의 목소리가 석경의 바람도 깨고 침묵도 깼다.

“야, 권윤조. 사탕 녹는 동안 차근차근 짚어 보자. 너 왜 나 볼 때마다 웃었어? 막 눈웃음치고.”

“그런 질문 많이 들어. 내가 잘 웃는 편인가 봐.”

“너 되게 웃긴다. 잘 웃는 줄로만 알았는데 웃기기까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춥다니까 옷 벗어 줬잖아. 그래, 안 그래?”

“언제?”

“아침에 족구할 때.”

“더워서 벗어 놓은 건데 네가 입은 거잖아. 난 네가 내 옷을 왜 입고 있나 했어.”

“너무 매정하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너 응원한다고 성대가 너덜너덜해졌는데.”

“누가 그렇게 목청이 큰가 했더니 너였구나.”

“하, 쪽팔려. 따져 볼 거 몇 개 더 있으니까 대답이나 잘해. 나 취하지 말라고 얼음물 갖다 주고 숙취 해소 음료 챙겨 주고 그런 거, 마음도 없는데 그랬다고?”

“얼음물은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 아니었고, 숙취 해소 음료는 너한테만 준 거 아니야.”

“내 이름 부를 때마다 ‘미연아’라고 성까지 빼고 간지럽게 불렀잖아.”

“성이 생각이 안 나서 그랬어. 성이 뭔데? 알려 주면 앞으로 성까지 붙여서 부를게. 안 간지럽게.”

6조 미연이었구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권윤조의 철통방어에 내심 감탄하던 석경은 새로운 정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로소 여자애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게다가 굳이 몰라도 되는 그녀의 개성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누구 놀리니? 너 아까 복학생 선배가 나 공격할 때도 대신 나서 줬잖아.”

“그건 그 새끼가 워낙 짜증 나게 굴어서. 그리고 내가 나선 게 아니라 이수현이랑 이석경이 나서 준 거지.”

갑자기 튀어나온 제 이름 석 자에 석경은 적지 않게 놀랐다. 설마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킨 건 아니겠지. 모습을 드러내기가 애매해서 숨었고, 숨어서 버티다 보니 더욱 나가기가 난감해졌을 뿐인데 어쩐지 작정하고 엿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또!”

“…….”

“……더 이상 따져 볼 게 없네.”

“…….”

“네가 사탕 안 먹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싸하긴 했어.”

“……사탕? 사탕이 왜?”

“네가 나랑 키스할 마음이 있었으면 사탕을 먹었겠지. 다른 맛도 아니고 박하잖아. 치약이랑 비슷한 맛.”

“……아.”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박하사탕이 쓰다.”

“미안해.”

“이제 와서 뭐가?”

“사탕이 쓰다는데 달콤한 말을 못 해 줘서.”

“너 무슨 백일장 대회 나왔니? 자꾸 그런 식으로 입을 터니까 내가 착각한 거잖아.”

“…….”

“뭐 됐어.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좋아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탕 다 녹았으니까 들어갈게. 넌?”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발소리 하나가 저벅저벅 멀어졌다. 석경은 또 하나의 발소리도 멀어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침이 자꾸만 고였지만 소리라도 날까 봐 차마 삼키지도 못했다. 왜 안 가. 추워 죽겠네. 씨발. 염불처럼 속으로 불만을 뇌까리는데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안 추워?”

혼잣말일 리는 없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여자애를 향한 말일 리도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괜히 시간만 끌다가는 꼴이 더 우스워질 것 같아서 석경은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권윤조는 어스름한 달빛을 받은 채로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석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이 도둑고양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얼굴 같았다.

석경의 시선도 덩달아 권윤조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춥다. 들어가자.”

권윤조는 볼품없이 흘러나온 변명을 툭 자르더니 등을 돌려 버렸다.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바람은 석경이 훨씬 간절했을 텐데 정작 먼저 자리를 뜬 쪽은 권윤조였다.

멀어지는 등을 보며 석경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앞서가던 권윤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참, 이석경.”

“…….”

“박하사탕 먹을래?”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다. 순간 석경은 자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는지 안 떴는지 헷갈렸고 신경이 쓰였다. 몰래 숨어 있었던 사실도 들켰는데 동요마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

겨우 되묻자 가까이 다가와서 석경의 손목을 잡아끌어 박하사탕을 손바닥 안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석경이 하는 양을 빤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공기가 목뒤를 눌렀다.

석경은 사탕을 손에 쥔 상태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숙인 권윤조가 석경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각도까지 틀며 들이밀었다. 사탕을 물고 있는지 희미한 조명을 받은 권윤조의 한쪽 볼이 볼록 솟아 있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지도 않았는데 마치 닿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흠칫 떨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사탕 안 먹어?”

옅은 박하 향이 풍겼다.

“……사탕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

“…….”

“초콜릿은?”

“초콜릿이, 왜.”

“초콜릿 좋아해?”

살면서 초콜릿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아봤는지 지금 바로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건조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 겪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냥 그래.”

질문을 던지고 한참을 묵묵히 기다리는 얼굴에 대고 석경은 대답했다.

대답을 늦게 한 이유는 어려운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어서였다. 그 깨달음에 속으로 지레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탕, 솔직히 좋아하지?”

“……아닌데.”

“그래.”

다시 등을 돌린 권윤조가 저만치 멀어졌다.

석경은 눈을 내려 손바닥 위에 있는 사탕을 보았다. 이걸 왜, 뜬금없이. 짧게 오고 간 대화는 더 뜬금없었다. 내내 기척을 숨기느라 조심스럽게 아껴두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미처 몰랐는데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건 애써 추위 탓으로 돌렸다.

무심코 사탕을 입안에 넣고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한 박하 맛이 입안에 퍼졌다. 꿀꺽 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서늘해졌다.

‘사탕, 솔직히 좋아하지?’ 구태여 곱씹을 필요까지도 없는 질문이 다시 생각났다. 사탕을 좋아하고 말고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었다. 재차 캐물을 만큼. 사람 얼굴을 뚫어져라 볼 만큼. 순간 좀 몰아붙이는 것도 같았고. 대답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저에게서 어떠한 반응을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았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권윤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다만 석경이 박하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권윤조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석경도 밖에서의 일을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먼저 거기 있던 사람은 저니까 따지고 보면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괜찮아?”

준영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얼굴이 하얘져서 나갔었지. 석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빈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이 채워졌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박하사탕을 볼 쪽에 숨겨 두고 술을 들이켰다.

다른 방에 원정 가 있느라 싸움 구경을 놓친 조원들이 박태정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원들의 집중이 온통 박태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쏠려 있었다.

새터 이틀째 밤. 석경은 조원들과 제법 친해졌다. 친해졌다고 할 수 없는 사이라도 말은 그럭저럭 섞었다. 그러나 권윤조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권윤조는 좀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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