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황제의 탄생 축하연이 열리는 날, 이른 아침부터 귀족들이 황궁에 모여들었다. 이는 드문 일이었다. 황궁의 연회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낮 동안은 제국의 안녕을 염원하는 형식적인 예식이 거행되고 오후 늦게서야 만찬과 무도회가 열렸다. 황제조차 꺼리는 지루한 오전 연회에 성실히 참여하던 사람은 뮬리 공작뿐이다. 예식을 고안한 창설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얼마 전, 뮬리 공작의 가문에서 줄초상이 났다. 공작을 비롯해 하나뿐인 장남까지 명을 달리하여 특종이 연달아 터지고 온 북부가 술렁였다. 조심스럽게 연회를 미루자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소수의 의견일 뿐, 결국 예식은 정석대로 진행됐다.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영혼 없는 박수를 치며 서로 와인 잔을 맞부딪쳤다.
진행자도 껌뻑 졸 정도로 지루한 예식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귀족들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쪽은 여유만만한 데 비해, 나머지 한쪽은 그들에게 말 좀 붙여볼까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였다. 입술을 깨물며 초조해하던 귀부인 하나가 먹잇감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녀는 턱을 바짝 들고 수수한 인상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네요, 메겐 자작 부인.”
“아, 카드라 후작 부인. 오랜만이에요. 얼마 만이죠?”
메겐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후작 부인도 우아하게 웃으며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맙소사, 여전히 촌스럽군. 장신구 하나 없는 머리에, 저 돈 주고도 안 살 시시한 드레스는 어디서 났담? 말이 좋아 자작 부인이지, 다른 때라면 옆에 두기도 싫을 만큼 볼품없는 여자다. 그러나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후작 부인은 메겐의 손을 붙잡으며 친한 척을 했다.
“5년 전 독서 클럽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죠. 그때 제게 잘 부탁한다며 편지를 주셨던 것도, 전부 기억한답니다.”
“어쩜, 저도 잊고 있던 일을. 여전히 똑똑하세요.”
메겐이 뼈 있는 말을 던지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후작 부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한때 독서 클럽을 주름잡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혼인으로 신분의 격차가 생기자 관계가 소원해졌다. 정확히는 메겐이 말을 걸어도 후작 부인이 무시하기 일쑤였다.
장장 5년간 메겐을 무시하던 후작 부인이 대화를 걸어온 이유는 빤했다. 메겐은 알고도 모르는 척 부채로 입을 가렸다. 마침 그녀의 새로운 친우들이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모두 ‘대공 가문의 무도회’에 참석한 자들이었다.
메겐은 “친구들이 부르네요. 할 이야기가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하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후작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아,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부인도 록퍼스 가문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다죠? 혹시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말해 주지 않겠어요? 저는 거리가 멀어서 아쉽게도 참석을 못 했지 뭐예요. 집안 분위기는 어땠죠? 색다른 소식이라도 있었나요? 다녀오신 분들이 하나같이 말을 아끼시니 정말 궁금하네요. 뭐든 좋으니 하나라도 좀 알려 줘요.”
후작 부인이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어지간히 간절한 모양이지. 메겐은 속으로 깔깔 웃으며 겉으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특별한 건 없었어요. 아, 저택이 정말 넓고 크더군요. 어떻게 관리하나 했는데, 세상에 하인이 백 명이 넘는다지 뭐예요. 정원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곳만 개방해도 관광 수입이 어마어마할 것 같았어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메겐이 여운 넘치는 말로 끝을 맺으며 수상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도대체 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석자들은 저들끼리만 아는 신호를 보내며 묘하게 웃곤 했다. 후작 부인이 옳다구나 싶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럴 일이 없다니, 왜, 왜죠?”
“왜는요. 대공 가문이 뭐가 아쉬워서 저택을 구경거리로 만들겠어요? 참, 부인께선 이번에 저택을 개방했다죠? 언제 한번 구경하러 갈게요. 워낙 변방이라 언제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요.”
메겐이 순진한 얼굴로 호호 웃더니 총총 멀어졌다. 얻은 것 없이 갈굼만 당한 후작 부인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화만 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다른 대화 상대를 찾아 떠났다.
그녀뿐이 아니라 대공 가문의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은 하이에나처럼 연회장을 맴돌았다. 그간 북부 사교계를 주도하던 세력이 뮬리 공작의 파벌이었다면, 지금은 대공 가문의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사교계의 승리자는 풍향에 따라 바뀌는 것.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낙관하던 사람들마저 슬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무도회 참석자들은 날이 갈수록 똘똘 뭉쳤다. ‘오색방울새’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교클럽을 만들고 종종 모이기도 했다. 심지어 록퍼스 대공이 오색방울새 클럽에 다녀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어떤 소식을 나누는지, 클럽의 회원이 아닌 이상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그들이 가진 정보 하나라도 얻기 위해 부나방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오색방울새 회원들은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분명 무도회에서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특별한 일은 없었다며 딱 잡아뗐다. 그리고 신문만 봐도 알 법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대저택에서 저녁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다.’는 영양가 없는 소리만 거듭했다.
오색방울새 회원들이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다른 귀족들이 아닌 척 그들의 뒤를 쫓았다. 록퍼스 대공까지 관여한 이상, 그들을 단순한 사교클럽의 회원이라 여길 멍청이는 없었다. 앞으로 오색방울새 클럽은 자신들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고, 고급 정보를 교류하며, 깊은 연대를 쌓아가는 거대한 세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말을 걸어 보려 해도 도저히 빈틈을 주지 않는 탓에 귀족들은 애가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 복도 끝에서 낯선 무리가 걸어왔다. 황궁을 지키는 친위대와 황녀의 유모, 드물게 정복을 갖춰 입은 카티야 황녀, 그리고 대공 가문의 장남이자 냉랭하기가 만년빙을 깨부순다는 로건 대령이 그 주인공이었다.
“황녀 전하, 안녕하십니까.”
귀족들이 예를 갖추어 황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녀도 웃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의례적인 대화가 오가는 사이 몇몇 귀족들이 로건 대령을 힐끔거렸다. 먹색 제복 코트를 입고 무심하게 서 있는 남자는 소문보다 훨씬 아름답고 위험해 보였다. 북부에서 보기 드문 흑발과 제복 겉으로도 드러나는 탄탄한 체격, 주위를 맴도는 서슬 퍼런 위압감은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인사를 마친 카티야 황녀가 조금 머뭇거렸다.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지못해 로건을 소개했다.
“록퍼스 대공 가문의 장남인 로건 대령입니다. 오늘 준장 진급을 앞두고 있지요. 곧 수여식이 열릴 예정이라 함께 황제 폐하를 뵈러 가는 길입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로건은 이제 갓 서른의 나이다. 제아무리 잘나도 연령이 곧 경험인 귀족 사회에선 햇병아리였다. 더구나 그는 부친을 닮아 사교 모임에 관심이 없었다. 록퍼스 가문이 대대로 알파를 배출한다는 특수성과 주 활동지가 남부라는 점에서 독립적인 성향을 띠고 있긴 하지만, 작위나 파벌 없이 젊은 나이에 장성에 오른 예는 없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로건이라는 자가 가진 능력이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걸 의미했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와중, 오색방울새 회원들이 쪼르르 앞으로 나섰다. 드세기로 유명한 백작 부인이 대표로 나서서 친한 척을 해댔다.
“이렇게 기쁜 일이! 로건 대령님, 축하합니다. 아, 준장님으로 불러드려야 하나요?”
지켜보던 귀족들은 그녀가 무시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건은 그녀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심지어 “로슬리 백작 부인.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까지 건넸다. 백작 부인이 뛸 듯이 좋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대령 신분이니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어마, 겸손하셔라. 수여식이 끝나면 바로 남부로 돌아가시나요? 아니면 오후 연회에도 참석하시나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연회에서 함께 축하를 드리고 싶은데, 역시 바쁘시겠지요?”
“시간이 되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다시 뵐 수 있다면 좋겠군요.”
로건의 대답은 사실상 거절이었다. 평소라면 대놓고 불쾌해했을 백작 부인은, 그러나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 호호 웃었다.
“바쁜 분을 잡고 제가 실례했네요. 다시 한번 진급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건은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쳤다.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이때다 싶어 악수를 시도했다. 로건은 눈길도 주지 않고 일행과 함께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귀족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한편 혀를 끌끌 찼다. 향후 대공 자리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지금의 그는 후계자일 뿐이다. 벌써 저리 건방져서야 귀족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젊은 나이에 대단한 건 알겠는데, 태도가 바람직하지 못하군요. 남부에서야 왕처럼 지내겠지만, 황제 폐하가 있는 북부에 왔으면 황궁의 법도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뮬리 공작께서 살아 계실 때가 좋았지요. 당돌한 젊은이들에게 몸소 질서를 가르쳐 주던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쩌다 본인에 이어 하나뿐인 아들까지 그리되어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침 욕할 거리도 생겼겠다, 귀족들은 뒷담화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색방울새 회원들을 힐끗거렸다. 대화에 참여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오색방울새 회원들은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연회장에서처럼 서로 떠들며 눈을 마주하지도 않았다. 특히 뮬리 공작과 그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낯가죽이 시체처럼 변했다. 한눈에도 그들은 커다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
묘한 분위기가 전이된 것처럼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눈치가 최고의 능력이라는 중앙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자들이다. 로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귀족들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서로 앞다투어 복도를 빠져나갔다.
*
로건의 수여식은 황제와 재상, 대공, 그 밖의 장성들 앞에서 엄숙하게 진행됐다. 후계로 책봉되지 못한 황녀는 대신들 사이에 섞여 박수나 치는 처지였다.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로건에게 준장의 직위와 금광 소유권이 내려졌다. 로건이 훈장을 받들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제국에 그대 같은 우수한 젊은이가 있어 짐은 마음이 놓인다네.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하지.”
“네, 맡겨 주십시오.”
로건이 빙긋 웃었다. 반대로 황제와 대공의 표정은 떫기만 했다. 사실 로건의 진급은 야만인 우두머리 포획에 대한 포상으로, 놈들을 놓친 이상 무산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야만인들을 놓친 자가 뮬리 공작이라는 사실이 온 천하에 드러났고, 그에게 이송을 명한 자는 황제였다. 대공가에 책임을 묻기도 뭐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들인 로건의 공로는 여전했다. 당연히 진급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
황제는 속이 쓰렸다. 잘난 누이와 능글맞은 친우의 장남이 잘되는 꼴을 보니 뒷골이 당겼다. 본래 계획이 틀어진 것도 한몫했다.
말이 좋아 제국이지, 현 지배 구조는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두 권력자가 협력하는 형국이었다. 긴 시간 평화에 젖어든 북부는 농작물과 문화가 발달하고, 야만인이 설치는 남부는 기술과 군사력이 발달했다. 특히 기술의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남부가 갑자기 독립 선언을 해도 그는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할 처지였다.
그때 셰본이 술책을 내놓았다. 첫째로는 야만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둘째로는 정략결혼으로 내부의 화친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넘어가 누이인 헤롯을 대공 가문에 보낸 것이 실책이긴 했으나, 야만인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야만인들은 있어야 했다. 계속 골칫거리로 남아 황제의 권위를 보장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 가문에서 놈들을 잡아들였다. 그는 의심병이 도졌다. 남부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뮬리 공작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믿음직한 공작은 그를 위로하며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나섰다. 야만인을 이송하는 도중 놈들을 풀어주고 이를 대공 가문의 실책으로 몰자는 것이다. 근심도 해결하고, 얄미운 대공 가문에 흠집도 내고, 뮬리 공작은 과연 중앙 정치계의 두뇌라 할 만했다. 비록 야만인들에겐 안 통했던 모양이지만….
“모두 미래가 밝은 젊은이를 위해 축하의 건배를 하세. 로건 준장, 짐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편히 얘기하게. 그대는 짐의 친조카가 아닌가. 어려워할 필요 없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물론이지.”
황제는 쓰린 속을 다스리며 인자하게 웃었다.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없다. 뮬리 공작을 잃은 건 아쉬우나 그의 자리를 채울 귀족은 넘치고 흐른다. 격분한 야만인들이 이전보다 더 설치고 다니는 탓인지 셰본도 날로 피골이 상접해졌다. 지금도 죽상을 하고 있는 셰본을 보자 황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즐거운 미소를 띠고 와인을 마시던 그는, 다음 순간 로건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제 동생과 황녀 전하의 혼담을 거두어 주십시오.”
“…….”
“피차 이로운 것이 없는 혼인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황제는 잠시 움직임이 없다가 와인을 마저 마셨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짐이 혼담을 꺼낸 것은 맞네. 하나 추진은 누이가 하였지. 누이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머니는 철회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제 동생과 황녀 전하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
황제가 흠, 하며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대신들 틈에 서 있던 카티야 황녀가 걸어 나왔다. 황제는 그녀를 보자 대번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 싫다는 듯 고개마저 돌리는 행동이 나이만 먹은 어린애 같았다.
“황제 폐하. 저도 함께 간청합니다. 혼인을 철회해 주십시오.”
“또 이러는군. 네가 거절한 혼담이 열 손가락을 넘는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나의 조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로델은 아주 좋은 아이입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황제가 마뜩잖은 눈으로 황녀를 쳐다봤다. 솔직히 황제도 이번 혼담에 약간 회의적이었다. 대공 가문이 애지중지하는 차남을 건드리면 반응이 어떠할까 떠보았더니, 기겁하고 놀라긴커녕 무도회까지 열고 나선 헤롯 때문에 오히려 위축된 것이다. 없던 일로 하자니 누이와 맞서야 할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어째 찝찝하고….
막막하던 차에 로건이 물꼬를 터 주어서 잘 됐다 싶었는데, 갑자기 황녀가 나서니 변덕이 도졌다. 그렇게 좋은 아이면 혼인하거라! 황제가 충동적으로 말을 뱉으려던 그때였다. 황녀가 발을 꽝 구르더니 쩌렁쩌렁 소리쳤다.
“일로델은 착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제 사촌 동생이지요! 그렇게, 여리고, 어린, 안쓰러운 동생과! 어떻게, 감히! 혼인 따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파렴치한 금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간악한 사탄이나 저지르는 짓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폐하!”
폐하, 폐하, 폐하….
넓은 홀에 메아리가 울렸다. 당황해서 굳었던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황녀가 싫었다. 마치 누이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기백, 거기다 야망과 패기까지 갖춘 그녀에게 압도당할 때마다 매우 불쾌했다. 그는 그가 황위를 물러난 후 그곳에 누가 앉든 관심 없었다. 헤롯과 황녀만 아니면 되었다.
점차 노여움을 드러내던 황제가 대뜸 셰본을 돌아보았다. 셰본은 여전히 반쯤 영혼이 나가서 멀뚱히 서 있었다.
“록퍼스 대공!”
“예에, 폐하.”
대답도 반쯤 넋이 빠져 있었다. 분노에 눈이 먼 황제는 그의 태도가 어떻든 무시하고 버럭 소리쳤다.
“혼인은 없던 것으로 하겠네. 그딴 건 필요 없어! 록퍼스 대공, 아니, 나의 평생 친우인 셰본이여. 그대에겐 아들이 셋이나 있지 않은가? 난 알파 아이들에게 욕심 없네. 베타인 둘째 아이를 양자로 들일 수 있게 해 주게. 몸이 약하다 하니 고이 다루어 황위를 물려주겠네. 다 가지게. 그냥 자네 가문이 다 가져!”
“…폐하? 미치셨습니까?”
“그래, 미쳤네! 내 이러려고 황제가 된 줄 아는가? 대신이라는 놈들은 그저 누이만 찾아대지, 딸이라고 하나 있는 건 바락바락 대들기만 하지, 인생의 즐거움이라곤 하나도 없어! 정 양자를 주기 싫으면 자네가 이혼이라도 하게. 그거라도 보아야 속이 풀릴 것 같으니 말이야!”
울분에 찬 황제의 외침이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쳐대기도 했다. 늘 심술보만 가득하고 제 기분에 따라 폭정을 일삼던 황제였다. 그의 속마음을 처음 알게 된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신들도 멋쩍음을 감추며 고개를 외로 꼬았다. 셰본만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희번덕 뜨더니 분노한 황제를 진정시켰다.
“폐하,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뭐 그리 화낼 일이라고 존귀한 몸을 막 다루십니까. 황녀께서 일로델을 만나고 친동생처럼 많이 아끼셨습니다. 그러니 혼인이 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주장을 하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네? 아니, 뭐, 그래요….”
셰본의 부리부리한 눈길을 의식한 황녀가 얼떨결에 긍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거친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셰본이 그의 잔에 직접 와인을 따라 주며 아이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다.
“폐하나 저나 이제 젊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후계를 생각할 나이이지요. 자식에게 조금, 흠결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하는 것이 부모이고 또 웃어른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네. 하지만 자네가 말하니 와닿지 않는군. 서른에 준장이 된 저 우월하고 아름다운 청년에게도 흠이 있단 말인가?”
“있다 뿐입니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폐하께서도 아시면 까무러치게 놀라실 겁니다.”
“흥, 대충 넘어가는군. 뭐가 있든 황녀만 하겠는가? 짐의 생일 연회가 지루해진 것도 황녀 때문이야. 살아 있는 짐승을 예식의 제물로 쓰지 말라며 탄원서까지 받아 온 사건을 기억하겠지? 고약한 것.”
“폐하, 그 탄원서는 저도 썼습니다. 사실 좀 징그럽지 않았습니까….”
“시끄럽다. 황녀가 설치고 다니는 한 나는 인생에 낙이 없어. 자네가 이혼을 하든지, 양자를 내놓든지, 선택하게.”
셰본이 얼굴을 굳혔다. 지금 황제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셰본이 경계를 드러내자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네. 애가 셋이니 이혼은 못 한다고 하겠지. 하나 둘째를 짐의 양자로 들여보내는 건 자네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혈연 간에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니고 말이야.”
“……헤롯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내 맹세코 둘째 아이에게 최상의 대우를 약조하지. 황위를 넘겨주겠다는 말도 농담이 아닐세. 당장 서약서라도 써 주어야 믿겠는가? 보증인은 귀난 재상이 해 주면 되겠군.”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재상이 불똥을 맞았다. 그는 난처하게 눈을 굴리다 필살기인 가래 기침을 터뜨렸다. 황제가 짜증을 내며 그를 타박하고, 셰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진심으로 황제의 제안을 고민하는 듯했다.
카티야 황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 우습지도 않은 희극을 계속 보아 넘길 만큼 그녀는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다. 더불어, 대공의 음습한 수작을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황녀가 굳은 얼굴로 단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로 그때, 묵묵히 있던 로건이 “폐하.” 하고 운을 뗐다. 낮고 풍부한 울림에 술렁이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렇지, 로건 준장이 있었군. 좋다. 그대의 의견도 말해 보아라. 그대의 동생을 짐의 양자로 들이는 데에 찬성하는가?”
“찬성하지 않습니다.”
“왜지?”
“그 아이는 제 연인이기 때문입니다.”
좌중이 조용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다. 황녀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로건을 돌아보았다. 황제와 대공, 대신들은 물론이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도 그를 바라보는 듯했다. 놀라움의 해일 속에서 폭탄을 던진 남자만 고고하게 서 있었다.
먼저 정신이 돌아온 셰본이 “로건!” 하고 소리쳤다. 대신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고, 황제는 제가 들은 게 맞냐며 귀난 재상을 붙잡고 확인했다. 황제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짓고 로건을 돌아보았다.
“짐은 그대의 동생을 짚어 말한 것이다. 둘째 아이 일로델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연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저는 일로델을 사랑하고 있고, 일로델은 제 아이를 낳을 겁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연인을 멀리 보내고 싶겠습니까? 영원히 놓아줄 생각 없으니 그만 단념하십시오.”
로건의 마지막 말은 셰본을 향한 것이 분명했다. 셰본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독한 놈이로다. 사람을 끝의 끝까지 몰아붙여서 마침내 승복을 받아내는 지독한 놈이 태어났다. 그런 부분은 상당수 헤롯을 닮았다.
오, 신이시여. 어찌 이리도 독한 것만 골고루 물려받아 세상에 나오게 하셨나이까….
“로건 대령, 아니, 준장.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농담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지요? 황제 폐하가 계신 곳입니다. 올바르게 행동하세요!”
카티야 황녀가 버럭 화를 내며 로건을 꾸짖었다. 그러나 떨리는 눈과 손은 제발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로건은 성가시다는 듯 작게 한숨을 흘렸다.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아니꼬운 태도였다. 황녀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그녀는 단상 위로 올라가 말이 나오는 대로 마구 쏟아냈다.
“이, 사탄보다 간악한 놈! 파렴치한 악당아! 나는 절대 너와 일로델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 이 금수보다 못한, 어떻게, 그 여리고, 착한 애를, 그렇게…! 아버지, 황제 폐하! 차라리 일로델에게 황위를 넘기겠습니다. 제가 누이가 되어 평생 그 가련한 아이를 보살필 수 있게 해 주세요!”
일로델은 알까?
제가 모르는 곳에서 몇 번이나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황위는 멀리멀리 날아갔다는 것을….
그놈 성격상 황제를 시켜 준다고 해도 싫다며 도망갈 놈이긴 하다. 그래도 혹시나 이용할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희망마저 완전히 꺾였다. 셰본은 패배를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황제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진짜였군. 진짜였어! 정말로 그대와 그대의 동생이 연인이란 말인가?”
“일로델의 정부이긴 합니다만, 티베인도 있습니다.”
“맙소사! 과연 내 조카들, 남다른 구석이 있구나! 누이는 어떻지? 내 누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최근에 아셨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요양을 갔군. 둘째의 납치 사건으로 놀랐다더니 다 핑계였어. 그 성격에 어지간히 복장이 뒤집혔겠지. 재밌군. 이리도 재미있는 일이 또 있나!”
황제가 손뼉까지 쳐대며 즐거워했다. 약이 오른 황녀는 화분에서 장미 나무를 뽑아 들고 휘둘렀다. 혼비백산한 황녀의 친위대가 그녀를 저지하고, 황제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짐이 무지하여 청춘을 누리는 젊은이들이 이별의 시련을 겪을 뻔했구나. 어쩔 수 없지! 연인도 없고 혼인도 싫다 하는 네가 황위에 오르는 게 맞겠다.”
“아버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카티야, 나의 딸이여. 다음 대 황제는 네가 될 것이다. 본래 그것이 황녀로 태어난 네 소임이 아니더냐?”
“…….”
“너는 이 자리가 쉽다고 생각하겠지. 하나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희생이 뒤따르는 자리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들소처럼 날뛰던 황녀가 주춤 멈춰 섰다. 현 황제는 선황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젊은 나이에 황위를 거머쥐었다. 따지고 보면 거저 얻은 자리이지만, 지나온 세월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약점을 지엄하게 짚어냈다.
황녀로서의 소임. 그녀가 가진 야망과 포부. 제멋대로인 아비가 벌려놓은 문제를 바로잡고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러나 그에 따른 희생과 꺾여 나가는 정의.
앞으로도 그녀는 모순 속에서 낙담하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 고통을 즐기려는 황제의 괴팍한 심술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견뎌내겠다. 고통이 아닌 안락을 택한 당신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다. 황녀는 숨을 가다듬고 장미 나무를 팽개쳤다. 그녀는 흙으로 더럽혀진 바닥에 꿇어앉아 이를 악물고 말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역사상 이런 난장판 속에서 황태자가 탄생한 사례가 있었던가? 휘몰아치는 혼돈과 경악 사이에서 헤매던 대신들이 뒤늦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황제는 또다시 건배를 외치며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고, 기분 좋은 듯 껄껄 웃었다.
“황제가 된 뒤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군! 사랑스러운 내 조카들. 무료하고 권태로운 인생의 한 줄기 빛이로다!”
“…….”
대신들이 어색하게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황제가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짐의 대신들은 신중하기로 유명하지. 쓸데없이 혀를 놀려 내 조카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리라 믿네.”
대신들이 흠칫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만일 오늘의 일을 조금이라도 발설한다면 황제든, 황녀든, 헤롯이든, 대공이든, 혹은 로건 준장이든…. 어디선가 철퇴가 내려와 뼈도 못 추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수여식은 그만 마치도록 하지. 대신들은 황녀의 책봉식을 준비하라. 아주 성대하게 치를 것이다!”
하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황제가 빠져나간 홀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귀난 재상이 위로를 건네듯 셰본에게 와인을 졸졸 따라 주었다. 서글픈 술판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대신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끼어들어 서로 와인을 따라 주겠다며 옥신각신했다.
*
로건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일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버지인 셰본이 그렇듯 그도 시간 낭비는 질색이었다. 홀을 나서는 로건을 황녀가 성큼성큼 뒤따랐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습니까?”
“…….”
“나를 이용하고, 내 아버지를 이용하고, 귀족들을 휘두르고, 그대에게 이용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긴 한가요?”
로건이 걸음을 멈췄다. 로비로 나가는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붉게 변한 해가 로건의 뒷모습을 길게 비췄다. 그가 조용히 황녀를 돌아보았다.
“무엇이 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원하는 걸 얻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얻었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 황위를 얻었어요.”
“잘됐군요.”
말이 ‘잘됐군요.’이지 듣는 사람에겐 ‘어쩌라고.’나 다름없었다. 황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힘껏 웃어 보였다.
“별로 잘된 것 같진 않아요. 나는 그대와 협력하여 내 능력을 펼치고 승계를 받아내고자 했어요. 하지만 다 틀렸죠.”
“모든 결과를 끝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과도 과정의 한 자락입니다.”
“좋은 이야기에요. 과정이 정정당당했다면 더 좋았을 테지요.”
“전하께선 정정당당하게 동생을 강간할 수 있습니까?”
뭐, 무슨…….
고막에 닿는 것조차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대꾸에 황녀가 질겁하며 물러났다. 로건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비겁해져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였다고 생각하십시오.”
“아, 비겁했다는 건 인정하는군요? 지금까지 그대가 행한 모든 술수가 추악했다는 것도 인정하나요?”
“저는 일로델을 위해 얼마든지 비겁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굳이 비난이 하고 싶다면 다른 쪽으로 궁리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
황녀의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할 말을 찾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로건이 지루한 눈길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허비되고 있군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
일로델을 위해 얼마든지 비겁하고 추악해질 수 있다.
그 말은, 그러니까…….
지금까지 일로델을 위해 이 기분 나쁜 모사들을 꾸며 왔단 뜻인가?
황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전부 본인의 욕심일 뿐이다. 친동생에게 저열한 욕망을 품었다면 억지로 탐하고자 할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억눌러야 마땅했다. 적어도 탐욕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고, 멀어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로건은 얼마 전까지 부대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대귀족가의 자제답지 않게 유독 이른 시기에 입대하여 쭉 군부대에 거주하였다는 그의 행적은 북부에도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녀가 처음 만나본 일로델은 약간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만, 놀라울 만큼 경계심이 없었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만일 저 악마 같은 남자가 ‘정정당당’하게 동생을 강간해 왔다면, 벌써 망가지고도 남았을 유약한 아이였다.
‘어떻게 조련하는지 아십니까?’
‘어릴 때부터 다리에 사슬을 묶어 생활하게 합니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으니 포기하지요. 그때는 사슬을 풀어주어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로건을 쫓아가던 황녀가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이럴 땐 좋은 머리가 싫었다. 저 남자의 심정 따위 알고 싶지 않은데, 티끌만큼이라도 깨닫게 되었다는 게 아주 불쾌했다.
로건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를 휘감은 페로몬은 얼음처럼 냉랭했고 미소 띤 얼굴은 종종 잔인함을 드러냈다. 반대로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깃털처럼 보드라웠다. 바로 거기서 착각이 시작된 것이다.
로건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아니다. 그의 내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섬뜩하고 포악했다. 어린 동생의 다리에 사슬을 묶지 않은 것만으로도 형제의 도리를 다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는 천하의 거침없는 악종이었다.
“로건 님! 로건 님!”
정적이 감돌던 복도에 소란이 일었다. 낯이 익은 듯, 아닌 듯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가 목발을 짚고 다가왔다. 로건이 그를 흘긋 보더니 앞을 보고 걸었다. 남자는 헐레벌떡 로건을 따라가며 무언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 덕에 생각에서 깨어난 황녀가 조용히 둘의 뒤를 쫓았다.
“또다시 배양기에서 신호가 잡혔습니다. 이번엔 무려…. 무려 딸꾹질을 했어요! 이건 혁명입니다. 예술의 환상을 뛰어넘는 과학의 아름다움을 제가 보았습니다! 로건 님께도 보여드리러 가져왔습니다. 여기, 요 조그맣게 튄 그래프가….”
“그건 뭐지?”
“네, 그러니까 요 조그맣게 올라온 부분이 아기가 딸꾹질을 했다는 표시입니다. 처음엔 맥박으로 착각했는데 딸꾹질은 그보다 크더군요! 이것은 세기의 발견입니다. 태아가 딸꾹질을 하다니!”
“태아? 누구의?”
“예에? 그야 당연히….”
침을 튀기며 설명하던 오르본이 황녀와 눈이 맞고는 “어이쿠!” 하며 뒤로 넘어졌다. 정작 로건은 쥐도 새도 모르게 멀어져 등을 보이고 있었다. 황녀는 버둥대는 오르본에게서 서류를 가로채어 읽어 보았다. 세 장짜리 문서에는 태아의 부모 이름, 임신 날짜, 태아 상태, 중간중간 의미를 돕기 위한 그림과 표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
황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서류를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로건을 따라갔다. 로비로 나오자 로건의 부하와 황녀의 친위대가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황녀는 성질대로 ‘사탄도 울고 갈 놈!’ 하고 소리치려다 멈칫했다. 그녀는 보폭이 넓은 로건을 힘껏 쫓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이건 뭐죠? 내가 본 게 맞는 건지? 이거, 이것 때문에 일로델이 수술했다는, 그, 그거.”
“자궁 말입니까?”
로건의 대꾸가 돌아왔다. 성가신 기색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황녀가 서류를 힘껏 구겼다.
“당신 정말 몹쓸 인간이군요? 이렇게까지 해서 또 뭘 얻을 속셈이지요? 끝내 일로델을 망가뜨릴 생각입니까? 아니, 그러고도 남지! 진정 일로델을 위한다면 차라리 그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겁니다!”
“일로델을 데려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벌써 그랬을 겁니다.”
“…….”
“걱정 마십시오. 어느 귀족가이든 아이는 가문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썽 없는 후계로 길러내면 족하지요. 일로델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존재로 만들 생각 없습니다.”
“…….”
“부디, 이번이 마지막 참견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가 보겠습니다.”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남긴 로건이 세단에 올랐다. 체면도 잊고 뛰쳐나온 귀족들이 북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차량의 행렬을 구경했다. 그 한심한 뒤통수들을 바라보며, 황녀는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덧없음이야말로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이니라. 어디선가 보았던 구절이 그녀의 심금을 울렸다. 그자는 아마 세상의 무가치함을 주장하고 싶었겠으나, 황녀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세상은 가치 있되, 로건이라는 악당 앞에서는 덧없다. 그가 인정하는 세상은 일곱 살 어린 동생인 일로델뿐이다. 또한, 그는 하나뿐인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성실한 악당이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는 법. 천하의 악종보다 못한 삶을 살아서 되겠는가? 황녀는 깨달음을 얻고 지식을 연마하러 도서관으로 떠났다. 산과 들 사이로 노란 노을이 아름답게 저물어 갔다. 복도에서 혼자 버둥대는 오르본만 제외하면, 북부의 오후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느긋함을 되찾고 있었다.
*
저택에 돌아온 뒤로 일로델의 일상에는 소소한 변화가 생겼다. 일단 할 일이 많아졌다.
일로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게 온 서신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주 발신인은 무도회에서 만났던 사람들, 어머니, 황녀 전하, 귀난 재상이었고, 한 번은 아버지에게서도 왔다. 그는 최근의 근황을 짧게 묻고, 내용의 반 이상을 신세 한탄으로 낭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갓 태어날 아이는 삶의 축복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남겼다. 어머니도 아니고 아버지가 그러니까 더 의미심장했다.
해가 뜨거운 정오가 되면 일로델은 밖에 내놨던 레몬 나무를 별채에 들이고 오색방울새에게 모이를 줬다. 요즘은 분수까지 가기도 귀찮아서 별채 앞에서 줬더니, 시간이 되면 새들이 먼저 날아와 창문을 부리로 톡톡 두드렸다. 지능이 티베인만큼은 되는 듯했다.
그다음 일로델은 점심을 먹고 아카데미에 출석해 나무에 관한 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와 레몬 나무에게 공부한 것을 써먹었다. 그러나 저습한 환경 탓에 나무는 날로 기운을 잃어갔다. 급기야 병에 걸렸는지 멀쩡한 잎사귀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 일과인 ‘어머니께 서신 쓰기’에서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다. 노란 열매라 하여 나름 ‘노란 녀석’이라는 애칭도 붙여 줬는데, 정작 열매도 못 보게 생겼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일로델은 오늘도 레몬 관찰 일지인지 안부 서신인지 모를 글을 쓰고 있었다. 주위가 고요한 가운데 난데없이 싹둑 하는 가위질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갑자기. 일로델은 펜을 내려놓고 침실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하인 마노가 별채에 모셔둔 레몬 나무를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었다.
“지, 지금…. 지금, 뭘 하는 거야……?”
으슥한 그늘 속에서 마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정원용 가위가 조용히 빛을 발했다. 마치 괴기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공포는 또 처음이었다. 일로델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를 발견한 마노가 헉, 하더니 바닥에 철퍽 엎드렸다.
“이, 일로델 님. 죄송합니다! 안이 어두워서, 계신 줄도 모르고 그만….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인사가 문제냐?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는데…….
일로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레몬 나무의 시든 부분이 삐죽삐죽 잘려 나가 있었다. 얼마 전, 일로델은 나뭇가지를 다듬는 법을 수업에서 배웠다. 언젠가 정원사가 말했던 가지치기였다. 하지만 싹트던 것부터 봐왔던 녀석을 자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런데 갑자기 마노가 와서 싹싹 잘라버린 것이다. 일로델이 뾰로통해졌다.
“왜 맘대로 자르고 그래? 내가 하려고 했는데.”
“죄, 죄송합니다! 요즘 나무 때문에 심려가 크신 듯하여서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마노를 타박해 봐야 잘려 나간 가지가 다시 붙는 것도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이 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로델이 불퉁한 얼굴로 일어나라며 손짓했다. 마노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본 이후로 자주 저렇게 엎어졌다. 다시 불러 주셔서 감사하다고 엎어지고, 죄송하다고 엎어지고, 용서해 달라고 엎어지고, 일어나라고 허락하는 것도 이제 귀찮다. 차라리 다른 하인으로 바꿀 걸 그랬나 보다.
“내가 열심히 정성 들여서 보살폈는데. 매일 도서관 가서 공부도 하고. 햇볕도 쫴 주고.”
“…….”
“이렇게 허무하게 갈 것 같았으면 더 열심히 돌봐 줄걸….”
일로델이 상심을 감추지 못하고 불쌍한 가지를 쓰다듬었다. 옆에서 마노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감히 조언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식물들은 가지를 잘라 주어야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어… 죄송합니다…….”
마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무표정으로 한껏 감추고 있지만, 일로델의 눈 밑이 촉촉해지고 있었다. 야단났다. 마노는 재빨리 바닥을 훑어서 떨어진 가지들을 주워 들었다.
“제가 허락도 없이 주제넘은 짓을 하였습니다. 다시 붙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로델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됐어. 나도 가지치기가 뭔지 알아. 근데 막상 자르려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그냥 뒀던 거야…. 차라리 잘됐지 뭐.”
일로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리고 마노가 모아온 가지들을 소중하게 모아 선반에 넣었다. 마노는 그를 지켜보며 가슴 한편이 쿡쿡 쑤셨다. 워낙 정이 많은 도련님이다. 설마 나뭇가지에도 정을 붙일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주인의 특별한 성향을 고려하지 못하여 그에게 상심을 안기게 된 셈이었다. 마노는 침울하게 서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소리쳤다.
“정 그러시다면 최대한 가지를 자르지 않고 관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습니다만….”
“어떻게?”
“자를 부분에 흠집만 내는 겁니다. 그러면 나무는 가지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영양분을 나누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무를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자르지는 않고 흠집만 내서?”
“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가지치기와 비슷한 효과가 나게 됩니다.”
일로델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모았다. 좀 치사한 방법 같다. 하지만 제삼자가 묻지도 않고 몸을 마구 잘라내느니, 나무 스스로 운명을 선택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일로델이 의욕을 드러내며 팔을 걷어붙였다.
“좋아. 흠은 어느 정도 내면 되지?”
“너무 많이 내면 부러집니다. 반이 안 될 정도만 이렇게….”
“가위 내놔. 내가 할 거야.”
“아, 무겁고 날카로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손에 힘을 꽉 쥐시고….”
일로델과 마노는 어느새 머리를 맞대고 가지치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 뒤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뭐 하냐?”
“저리 가. 안 보이잖아.”
“뭘 보는데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있나 그래? 나도 좀 끼워 주지?”
먼저 돌아본 마노가 뜨악해서 뒤로 넘어졌다. 덩달아 놀란 일로델이 화급히 가위를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멀쩡한 가지를 잘라낼 뻔한 것이다. 일로델이 굳어 있는 사이, 부루퉁한 얼굴이던 티베인이 갑자기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는 재빨리 일로델의 손목을 잡고 가위를 빼 갔다. 그리고 별채 밖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너, 뭐, 뭐야. 제정신이야? 다치면 어쩌려고 저렇게 위험한 걸 들고 있어! 너, 너 또 혼자, 피 흘리고 그러면… 너…….”
일로델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티베인을 보았다. 녀석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숨소리도 불규칙했다. 티베인은 진정하려는 듯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마노가 눈치 빠르게 물을 들고 왔다. 티베인이 단숨에 물을 마시고 잔을 쿵 내려놓았다.
“……그래서, 뭐야.”
“뭐가….”
“뭣들 하고 있었냐고.”
“레몬, 가지치기.”
일로델은 짐짓 덤덤하게 말하며 손을 털었다. 그는 흙 묻은 손을 타월로 닦아내며 당황한 속을 달랬다. 아주 잠시. 정말 찰나였지만, 막연하게나마 녀석의 감정이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가장 선명한 것은 바닥없는 공포와 창자를 비트는 괴로움, 그리고 깊숙이 처박아 놓은 잔혹함이었다. 그 외의 잡힐 듯 말 듯 했던 공허한 감각은 녀석이 감정을 다스리면서 사라졌다.
일로델은 손이 반들거릴 때까지 닦아대다 타월을 내려놓았다. 저녁 어스름이 창밖을 물들였다. 본격적으로 철도 관리를 맡으면서 바빠지긴 했는지 티베인의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그래 봐야 저녁 먹기 전에는 칼같이 들어와서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다. 밖으로 쫓아내도 밖에서 맴도는 건 똑같아서, 일로델은 내쫓길 포기하고 때에 따라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는 마노에게 램프를 밝히라 명령하고 티베인에게 눈짓했다.
“레몬 나무 침실로 옮겨 줘.”
“…침실? 밤에는 바람을 쐬어 줘야 한다며? 맨날 별채 밖에 내놓으라더니 웬 침실?”
“오늘은 침실에 두고 같이 잘 거야. 잔말 말고 빨리 옮겨.”
티베인이 티껍게 레몬 나무를 노려봤다. 그는 괜히 커다란 화분을 발로 툭툭 치다가, 한 손으로 덜렁 들고 일로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걷는 길마다 화분의 흙이 줄줄 쏟아지고, 곱게 자란 레몬 나무는 여기저기 부딪히는 수모를 겪었다. 침실에 들어와 서신을 마저 쓰려던 일로델은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제대로 들고 와야 할 거 아냐!”
“난 제대로 들고 왔어. 얘가 서 있질 못한 거지.”
“어린나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서 있어? 지금이 얼마나 예민한 시기인데!”
“흥, 어린놈인지 늙은 놈인지 알 게 뭐야. 난 너 말고는 관심 없어.”
티베인이 바닥에 털썩 앉으며 귀를 후볐다. 일로델의 숨이 거칠어졌다. 도대체가 나아지지 않는 밉상이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분노와 답답함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일로델은 의자 등받이를 움켜쥐고 진지하게 티베인을 꾸짖기 시작했다.
“나도 네가 나한테만 관심 있는 거 알아. 그리고 그게 제일 문제라는 것도 알고!”
“……알아? …정말로?”
“그래! 너는 이기적이고 무식해. 당장 생존밖에 모르는 멍청한 박테리아 같은 놈이야! 사람한테 관심이 있으면, 밤마다 쓸데없이 벽이나 두드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고 교감을 해야 할 거 아냐. 원숭이도 너처럼 거기부터 꺼떡대면서 들이대진 않아!”
“……그래? …근데, 그렇게 해도 안 받아 줬잖아…….”
티베인이 눈알을 굴리며 꿍얼거렸다. 일로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래서, 전부 내 탓이다?”
“……아니, 뭐….”
“시끄러워. 이런 식으로 나올 거면 나랑 같은 공간에 있지도 마.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으니까!”
일로델은 거칠게 몸을 돌리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원래 쓰고 있던 서신을 구겨버리고 새로운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어머니께, 로 시작되는 삐뚤삐뚤한 필체에서 그의 울분이 여실히 드러났다.
『안녕히 지내고 계시는가요?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도저히 티베인 녀석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는 잘 모르시겠지만, 티베인은 조금이나마 불쌍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봐줬어요. 어릴 때부터 음식을 뺏어 먹고, 자꾸 어두운 곳에 가둬놓고, 제가 품고 잘 정도로 아끼던 동화책을 깨물었을 때도 용서했어요. 하지만 이제 인내심의 한계가 왔습니다. 저놈은 말로 해결이 안 돼요. 때리면 더 좋아합니다. 어머니가 옳았어요. 차라리 북부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 저 말고 티베인이요! 어머니께서 친히 티베인을 교육하여 참된 인간으로 만들어주세요. 불쌍한 나무에게 분풀이하지 않는 정상인으로 만들어 주세요.』
글을 꾹꾹 눌러 쓰는 일로델의 등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티베인은 대체 뭘 쓰길래 저러나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훔쳐보고픈 충동을 억누르고 몸만 꼼지락댔다. 꼭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사냥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로델은 씩씩대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제깟 게 무슨 반성을 해. 뭐, 좋은 아빠? 개도 안 믿을 소리. 너는 애한테도 똑같이 굴 놈이야. 나무 학대범 자식.”
“……내가 무슨 나무 학대범이야. 아니야….”
티베인이 소심하게 변명하며 바닥에 쏟아진 흙을 그러모았다. 그러면서 힐긋힐긋 일로델의 눈치를 봤다. 일로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혼잣말에 심취해 있었다. 만약 애가 태어나면, 진짜 애가 생기면, 아기는 연약한데, 등등 특정한 내용이 튀어나올 때마다 티베인의 귀가 수시로 쫑긋거렸다.
조용한 노크와 함께 하인 마노가 램프를 들고 침실로 들어섰다. 일로델은 움찔 정신을 차리고 혼잣말을 멈췄다. 마노가 곳곳에 램프를 걸고 나가려다 방구석에 구겨져 있는 티베인과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의 레몬 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엉망인 바닥을 치워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티베인이 성실하게 흙을 모아 화분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로델.”
“부르지 마.”
“형님.”
일로델이 펜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뭘 해도 속이 풀리지 않아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형님이란 소리를 백 번을 들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티베인은 사람을 불러놓고 묵묵히 흙만 주워 담고 있었다. 그걸로 생색이라도 내려나 싶어 녀석의 꿈틀대는 등을 빤히 노려보았다. 말 없는 시간이 지났다. 티베인이 불쑥 조심스러운 어조로 운을 뗐다.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누가 귀띔이라도 했다거나….”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일로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뚱하니 대꾸했다.
“없어.”
“…….”
티베인은 ‘아, 그러셔.’ 하는 태도로 코웃음을 치더니 흙 묻은 손을 대충 털었다. 그리고 레몬 나무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난 좋은 아빠 할 거야. 너랑 같이하고 싶었던 공부, 애들한테 가르쳐 주고. 너한테 하고 싶었던 말 애들한테 많이 해 주고. 애들이랑 같이 너 따라다니고…….”
“…….”
“나무한테도 잘할게. 화분 발로 안 차고, 잎에다 몰래 담뱃재도 안 털게. 잘못했어.”
잎사귀에 구멍 낸 게 너였냐?
일로델이 도끼눈을 뜨고 딴청 피우는 티베인을 노려봤다. 그는 울컥울컥 올라오려는 분노를 한숨으로 다스렸다. 가끔은……. 사소하지만 긴 시간을 요하는 일들이 있다. 수술 자국이 아물길 기다리거나, 어린나무가 자라는 걸 지켜보거나, 제멋대로인 짐승을 길들이는 그런 일 말이다. 적어도 무인도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던 시간보다 훨씬 짧고, 덜 막막하고… 목이 조이는 듯한 외로움은 없는 그런 일.
모래와 바다와 태양뿐인 세상에 비하면, 쌍둥이 동생의 저질스러운 투정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 아닌가.
그래도 어쨌든 분풀이는 해야겠다. 일로델은 분노를 담아 썼던 서신을 구겨서 티베인에게 던졌다. 녀석이 서신 덩어리를 이마로 헤딩해 날렸다. 그리고 뚱한 얼굴로 자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녀석이 느끼는 감정이 또다시 전달되었다. 박테리아 같은 놈 주제에,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
일로델은 모른 척할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변덕이었다. 티베인이 흘긋 자신을 확인하더니 불편한 얼굴을 했다. 다가가면 갈수록 녀석의 눈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새끼손가락을 펴서 코앞에 들이밀자 숫제 짜증까지 냈다.
“아, 왜.”
“네가 한 말, 손 걸고 맹세하라고. 어기면 지옥 가는 거 알지?”
“애냐? 유치하게….”
“하기 싫으면 마. 나는 너 안 믿으면 그만이야.”
티베인이 “씨이, 젠장….” 하면서 낮게 욕을 지껄였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성의 없이 손가락을 대충 걸고 빼냈다. 일로델이 제대로 하라며 타박하려는데, 티베인이 갑자기 끄으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철퍽 쓰러졌다. 일로델은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가 조심조심 다가가 보았다.
“티베인? 너 왜 그래?”
“하지 마….”
“뭐?”
“하지 말라고……. 나한테 그런 거 하지 마!”
티베인이 눈알을 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일로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베인을 쳐다봤다. 녀석이 반쯤 허리를 숙이고 도망치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너, 나한테 손대지 마. 가만 안 둬…. 아니, 큰일 난다. 어? 하지 마. 나 지금 위험한 놈이니까 손대지 말란 말이야!”
“손 안 댔어.”
“댔잖아! 새끼손가락…. 크으, 아…. 젠장…….”
티베인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밖에 있던 마노가 들짐승을 발견한 사람처럼 “흐아악!” 하고 소리 질렀다. 일로델은 당황해서 눈만 끔뻑이다가 창문을 돌아보았다. 별채를 두른 아담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 너머로 다리 사이를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뛰어가는 티베인이 보였다. 그 꼴로 어딜 갔는지 잠시 안 보이던 녀석은, 잠시 후 다시 나타나 창밖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아마도 별채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
일로델은 심란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낼 서신을 천천히 적어 나갔다. 오늘은 뜻하지 않게 레몬의 가지가 잘려 나가 마음이 아팠고, 그래도 새로운 가지치기 방법을 알아서 좋았고, 티베인의 심술로 불쌍한 나무가 횡액을 당했고, 녀석이 좋은 아빠가 될 거라며 설레발을 치다가 쑥스러워했고, 그러다 갑자기 성기를 꺼떡꺼떡 세우고 달려 나가는 바람에 깜짝 놀랐고, 자신도 덩달아 놀랐으니 녀석을 북부로 데려가서 교육 좀 시켜 달라….
횡설수설한 글을 마구 써 내려가던 일로델이 문득 손을 멈췄다. 서신 내용이 상큼한 레몬 관찰 일지에서 ‘데일리 에로’ 같은 외설 신문의 가십처럼 되어 있었다. 일로델은 한숨을 쉬며 서신을 구겨버렸다. 이딴 걸 보내면 어머니의 분노는 둘째 치고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다.
일로델은 몸을 바로 하고 새로운 양피지를 폈다. 하지만 세 번이나 다시 쓰려니 피곤함이 앞섰다. 그는 턱을 살짝 괴고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으아아아, 하는 괴성이 점점 다가왔다. 곧이어 울타리 너머로 티베인의 옆모습이 쌩 지나갔다.
밤새 저러고 있을 셈인가?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티베인은 형보다 서투른 놈이다. 형이었다면 스리슬쩍 입맞춤 정도는 하고도 남았겠지…….
“바보.”
일로델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펜을 들었다. 램프 빛에 비친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어머니께, 안녕히 지내고 계시는가요? 하고 적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문장을 적었다.
『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로델은 천천히 서신 쓰기에 빠져들었다. 깃펜 소리가 사각사각 침실 안을 울렸다. 바깥에선 어김없이 티베인의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근처를 지나가던 경비병이 까치발을 하고 별채 쪽을 내다보았다. 소음의 주인공은 역시나 셋째 도련님이었다.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갈 길을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말 많고 탈도 많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귀족 가문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2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