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7/18)

5.

-호외요, 호외!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그뿐이랴. 온 제국 안이 들썩였다. 도심과 떨어진 외곽 지역까지 신문을 파는 청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이 시각 모두 같은 소식을 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뮬리 공작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서두를 펼친 신문은 그가 어디서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또 얼마나 끔찍한 모습이었는지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참여한 청소부의 사실감 있는 인터뷰를 실어 자극적인 논조를 이어갔다.

뮬리 공작은 야만인 우두머리와 그의 일당을 이송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배에서 야만인 무리에게 역공을 당해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사인은 목이 꺾여서 발생한 경추 골절이나, 특이하게도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바다에서 발견된 시신이 으레 그렇듯 물고기의 소행으로 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허벅지, 다리, 팔뚝 등 떨어져 나간 부위의 흔적이 일정했고 그 범위가 컸다. 마치 사람이 뜯어 먹은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뮬리 공작의 주검을 수습한 사람은 바다의 영웅이자 제국의 영웅, 록퍼스 대공이었다. 그는 운 좋게 목숨을 건져 외딴 섬까지 헤엄쳐 도망간 공작의 아들 프레디도 찾아냈다. 세상이 혼란에 빠진 사이 대공은 공작의 장례를 도맡아 처리했고, 깊은 애도를 표하며 야만인 소탕에 대한 열의를 드러냈다. 황제도 그에 동의하며 대공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안타깝게도 야만인 말살의 꿈은 허탈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제국의 두 기둥이 든든하게 버티는 한 미래는 밝았다. 그 문장을 따라 읽던 보랏빛 눈동자가 조롱의 기색을 띠었다.

더 가관인 것은 황궁의 사교계 분위기, 속된 말로 스캔들이나 가십거리를 주로 싣는 기사였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공작의 아들 프레디가 이상한 발언을 했다. 대공 측에서 야만인을 놓아주었다 주장한 것이다. 그는 대공 저에서 열린 무도회가 전부 거짓이었고, 감금당해 협박을 받았으며, 그 모든 건 대공 가문의 형제들이 벌인 짓이라 강조했다. 대부분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었으나 대충 정리하면 그런 소리였다. 그 외에도 그는 대공 가가 악마의 저택 같았다느니, 그 안에서 형제들이 난교를 했다느니, 심지어는 제 아비의 장례를 치르는 대공에게도 욕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그를 가엾게 여기던 사람들도 질려서 등을 돌렸다. 그는 결국 황제에게까지 행패를 부려 가택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됐다.

무도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돌아오자 황궁이 또다시 들썩였다. 그들은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모두 입을 모아 불모지였던 남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대공 저택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온종일 떠들었다. 거기에 뮬리 공작을 따르던 귀족들까지 합세해 대공 가문을 극찬하고 나서니,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자들은 절로 울상이 되었다. 그들은 소식 한 자락이라도 더 듣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묘한 것이 하나 있다면, 불발된 혼인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글쎄,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어요?’라는 한 귀부인의 수상한 인터뷰 외에는.

“…….”

헤롯이 신문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테이블 너머에서 그녀를 힐긋거리던 셰본이 서둘러 딴짓을 했다. 헤롯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걸 보여줘?”

“집안의 명예는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네 집안을 왜 걱정해?”

헤롯의 어조는 냉랭했다. 그 속에는 경멸에 가까운 거부감이 담겨 있었다. 셰본이 답답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제발…. 그렇게 고집 좀 부리지 마. 이럴 때가 아니잖아.”

“고집? 뚫린 입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그런 욕은 또 어디서…. 티베인이 황제 폐하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말하는 게 당신을 닮았어.”

“나도 너랑 로건이 똑 닮았다고 생각했어. 세포 하나하나까지 음흉 쩍은 게 아주 똑같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닥쳐!”

헤롯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쩍, 하니 바위 쪼개지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경매에 내놓으면 중형 호텔 정도는 받을 법한 값비싼 대리석 상판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그 가치를 아는 별장지기가 가슴을 쥐며 쓰러지고, 헤롯과 셰본의 호위들은 각각 마주 서서 어색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카티야의 유모가 내게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모르고 있었겠지. 너는 그걸 바랐을 테고. 맞지?”

“…….”

“쓰레기 자식.”

셰본은 다시 죄인이 되어 헤롯의 눈치를 보았다. 고요한 거실 안에서 사납게 씩씩거리는 헤롯의 숨소리만 이어졌다. 당장 총이라도 꺼내 들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힘겹게 참았다. 한참 숨을 고르던 헤롯이 굳게 닫힌 방문을 돌아보았다. 그 눈길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셰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한편, 현 상황을 공교롭게 여기는 태도였다.

“헤롯, 진정하고 앉아 봐.”

“네가 나가면 진정이 될 것 같아.”

“그럼 이야기를 할 수가 없잖아.”

“너와 나 사이에 더 나눌 이야기가 있어?”

“헤롯, 제발….”

셰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이라도 꿇으며 빌고 싶다는 심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마 꿇으라면 당장이라도 꿇겠지. 그 정도로 용서할 사안이라면 헤롯은 차라리 몇 대 후려치고 끝냈을 것이다. 그가 여행가인 척 신분을 속이고, 곧 떠나리라 거짓을 말하고, 신분을 들키고도 뻔뻔스레 굴고, 동생과 결탁해 황위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황위를 양보하자마자 동생을 부추겨 정략결혼을 맺게 되었을 때도, 헤롯은 셰본을 용서했다. 그 과정이 삼 년 내내 신문의 가십난을 장식할 만큼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끝내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빠진 건 셰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롯은 셰본에게 부정한 욕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관심 없는 일에 무정한 인간이라는 것도 알았다. 더 큰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데리고 사는 게 낫다고 여겼다. 막상 대공 가문의 사람이 되니 나름의 목표도 생겼다. 황제와 대공이 힘을 나눠 갖고 서로를 견제하는 지금의 체제가 오래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려면 뜻이 잘 맞는 좋은 후계자가 필요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그만 나가. 애 깰 시간이야.”

“일로델? 일로델이 깨어났어? 언제….”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헤롯이 던진 화병이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하필 또 동부에서 들여온 귀한 도자기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던 별장지기가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감히, 일로델에 관해 물어볼 권리가 너한테 있어? 네가 감히?”

헤롯이 벼락처럼 셰본의 멱살을 잡았다. 호위들이 혼비백산해서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나간 주먹은 막지 못했다. 순식간에 거실이 난장판이 되었다. 제발 진정하라며 만류하는 목소리와 거친 욕설이 폭풍우가 되어 몰아쳤다. 고고함의 대명사 같았던 헤롯은, 사실은 세상 모든 욕설을 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욕을 잘했다.

“…….”

거실의 소란에 눈을 뜬 일로델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의 우렁찬 욕지거리 탓에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지만, 그래도 눈앞이 아찔하더니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몸속에 혈액이 부족해서 생긴 빈혈 증상이었다.

조금 앉아서 쉬자 사물이 다시 보였다. 이제는 친구처럼 익숙한 링거대, 침대 난간에 걸쳐 있는 청진기, 간단한 드레싱 도구와 햇빛에 말려 놓은 약초들. 마치 의료실 같은 풍경이지만, 군데군데 화려한 장식과 가구가 들어찬 이 공간은 본래 어머니가 쉬어가던 방이었다고 한다.

일로델은 한참 골골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발과 다리가 저려 오래 걷진 못해도 방 안을 가로지르는 정도는 문제없었다. 방문을 열자 바로 거실이 나왔다. 그사이 소강상태가 찾아왔는지 헤롯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고, 셰본은 소파에 앉아 까진 이마를 치료 중이었다. 누군가는 헤롯이 깨부순 잔해를 치우고, 누군가는 심약한 별장지기를 짊어지고 나갔다. 호위가 치료를 끝내고 물러나자 셰본이 조용히 입을 뗐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전부 맞는 말이야.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헤롯.”

“…….”

“지금 상황에서 이혼은 정말 아니야. 세간의 시선도 생각해야지.”

일로델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이혼. 너무 생경해서 다시 한번 되뇌게 되는 단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있는 모습이 낯설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이혼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지간해선 벗과 절교하는 일이 없듯 두 사람도 부부보다는 인연 깊은 악우처럼 보일 때가 많았고, 때로는 그런 모습이 재밌기도 했다.

일로델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이혼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지 말았으면 싶기도 하고,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걸 생각하기엔 심신이 너무 지쳐 있었다.

헤롯은 말이 없다가 “세간의 시선.” 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흐트러진 상의를 정리하듯 옷을 매만졌다. 이윽고 정돈을 끝낸 그녀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거실 안이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었다. 총구와 정면으로 마주한 셰본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헤롯, 진정해. 나를 죽여서 무슨 일이 해결된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되겠지.”

방아쇠를 잡은 헤롯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로델이 크게 숨을 삼켰다. 셰본이 그를 살짝 눈짓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이러지 마. 애가 보고 있잖아.”

“어, 어머니….”

일로델도 다급하게 나서며 셰본을 거들었다. 차라리 이혼이 낫지,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총의 주인이 어머니라면 더더욱. 대공비에 의한 대공 살인 사건이라니, 세간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라 온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끔찍한 역사로 기록되어 수백, 수천 년 후에도 회자될지 모른다. 창백하게 질린 일로델이 한 발짝 나섰다. 그러자 헤롯이 돌아보지도 않고 딱딱하게 명했다.

“방으로 들어가.”

“헤롯. 당신이 그렇게 강압적으로 구니까 애가 맨날 기도 못 펴고, 부모한테 의지도 못 하고….”

셰본의 말에 헤롯이 이를 꽉 악물었다.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절대 그렇지 않지. 전부 내 잘못이야. 정말 잘못했어. 일로델에게도…. 정말 할 말이 없어.”

그 순간 권총이 불꽃을 내뿜었다. 탕, 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거실 안이 고요함에 휩싸였다. 스산한 연기를 내뿜는 총구 너머로 셰본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뺨에 긴 상흔이 남아 뻘겋게 입을 벌렸다. 셰본이 눈을 뜨고 아픈 듯 뺨을 움칠거렸다. 아버지의 무사를 확인한 일로델이 혼미해지려던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십시오, 대공.”

“헤롯….”

“나가요, 당장.”

거부할 수 없는 축객령에 셰본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모자를 챙기고 일로델과 헤롯을 각각 돌아본 뒤 기운 없이 별장을 나섰다. 늘 활기차던 아버지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일로델이 작은 창문 너머로 셰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정리하라 지시한 헤롯이 그를 부축하여 방으로 돌아왔다. 헤롯은 그새 차가워진 일로델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고, 따뜻한 밍크 담요를 몸에 둘러 주었다. 그녀는 몹시 속상한 표정이었다.

“일어나면 바로 줄을 당겨 하인을 부르라고 했잖니. 혼자 걷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그 정도는 아니에요.”

“네 몸을 제일 잘 아는 건 네가 아니라 의사야. 메리의 말로는 네가 일 년은 족히 요양해야 한다는구나.”

일로델이 어설프게 웃었다. 메리는 의사이자 어머니의 그… 독특한 친구였다. 그녀는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고, 자신에게는 틈틈이 걷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평생 앉은뱅이가 될 거라며 겁을 줬다. 그리고 어머니를 아주 좋아했다. 꼭 자신의 주치의가 되어 오래오래 어머니를 볼 거라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다.

“다리는 안 저리니?”

“어제보단 괜찮아요.”

“몸이 아직도 차가워서 걱정이야. 정말 나아지긴 하는 건지….”

헤롯의 표정이 흐렸다. 안타까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까 맹수처럼 포효하던 목소리는 환각이었나 싶다. 일로델은 요즘, 사람에겐 누구나 이면이 있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 첫 대상이 헤롯이라는 건 말해 봐야 입만 아팠다. 속을 알 수 없는 아버지도, 발랄한 메리도, 기계 같았던 하인들도, 도도한 귀족들, 사촌 누이인 황녀 전하, 멍청한 오르본,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 또한….

일로델은 헤롯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식사를 끝내고 그녀의 소소한 잡담을 들었다. 늘 늘어놓던 황궁의 스캔들이나 가십 이야기는 없었다. 대신 남부와 달리 북부는 추운 날이 많다거나, 사시사철 눈이 오는 명소가 있다거나, 그곳에 펭귄이라는 머리가 하얀 새가 사는데 너처럼 사람을 잘 따른다거나, 그에게는 낯선 북부 지방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일로델은 흥미롭게 들었다. 사실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열심히 듣는 척을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 같았다. 약을 달일 시간이 되자 헤롯이 이야기를 멈추고 차와 다과를 내오라 지시했다. 티타임이 준비되는 동안 일로델이 밍크 담요를 손으로 깨작깨작 만졌다.

“일로델?”

헤롯이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로델의 복잡한 표정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했다. 물어볼까, 말까. 내리뜬 눈과 작게 옴짝거리는 입술은 궁금한 걸 묻고 싶은 기색이 다분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어린아이 같기만 한 둘째 아들을 헤롯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로델의 손에 달인 약을 쥐여 주며 말했다.

“다른 생각 말고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데만 집중해.”

“…….”

“내가 있는 한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어. 설마, 이 어미의 능력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

일로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헤롯은 만족스레 웃다가 멈칫하며 미소를 접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일로델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일로델은 재빨리 약을 마시는 척 표정을 숨겼다. 그러나 눈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푸른 물결처럼 넘실대는 그 눈은, 어릴 적 그녀가 떠날 때마다 보여주었던 실망 가득한 눈길과 매우 흡사했다.

일로델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기 때부터 일로델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다. 출신 성분도 모르는 유모를 들이고, 귀족이 아닌 가정 교사를 들였으며, 평민이 다니는 아카데미도 보내 주었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는 웃음거리가 될 거라며 무시했을 일을 그녀는 주저 없이 밀어붙였다. 집에 더 머물러 달라거나, 같이 가고 싶다거나 하는 소소한 바람을 이뤄 주지 못했을 뿐이다. 이뻐하긴 또 얼마나 이뻐했는가? 둘째 아들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녀는 요 며칠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일로델이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라리 함께 바다에 빠져들고 싶었다. 죽음. 그 외로운 길을 어떻게 아이 혼자 보낸단 말인가.

다행히 일로델은 눈을 떴고 회복도 빠른 추세였다. 제발 아무 생각 말고 몸부터 추스르길 바랐다. 그게 일로델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틀렸던 게 아닐까. 일로델이 억지로 그녀의 뜻에 맞춰 주고 있었을 뿐이라면, 강압 운운한 셰본의 말도 완전히 개소리는 아니게 된다.

“…….”

일로델은 솟아오르는 질문들을 위장에 집어넣듯 열심히 약을 먹었다. 사과즙을 넣어 단맛이 가미된 약은 역하지 않고 먹기 편했다. 이런 식으로 달여도 되는구나. 무식하게 약초만 달달 끓여 마셨던 지난날이 억울했다. 이참에 약 달이는 법이나 배워 보자며 일로델이 씁쓸한 기분을 달래 볼 때였다. 포근한 체온이 몸을 감쌌다. 헤롯이 일로델을 가만히 끌어안고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일로델이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나도 참 눈치가 없구나. 오늘 처음 알았어.”

“무슨 말씀이세요?”

“뭐기는. 네가 날 많이 닮았단 얘기지. 티베인이 나를 닮기는 무슨, 감히 어디다 갖다 대. 망할 셰본 자식이….”

일로델이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이제 보니 말하는 게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어머니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일로델은 막돼먹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헤롯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얌전히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한 게 많지?”

“…….”

“너는 하루에 걸친 대수술을 했어. 급성 중독은 해독제로 중화했지만, 그사이 네 몸에 있던 괴식물, 아니 자궁이…. 독을 빨아들여서 꺼내야 했다는구나.”

“…….”

“꺼낸 것이 어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네 몸에 그런, 짓거리를 했다는 게 정말 끔찍하고 용서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 덕분에 장기 손실까지 가진 않았어. 천만다행이지. 그래, 다행이야.”

헤롯이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일로델은 고개를 내려 제 배를 보았다.

처음, 그가 눈을 뜨고 마주한 사람은 헤롯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부스스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일로델은 멍한 정신으로도 무언가 불벼락이 떨어지리라 단단히 각오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머니는 대뜸 자신을 끌어안더니 섧게 눈물을 쏟아냈다.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고, 모두 지친 표정이었다. 그때 한창 아랫배 근처에서 소독이 진행 중이었다. 몸이 회복되고 감각이 돌아오자 알코올의 시린 느낌을 감지하고 정신이 반짝 돌아온 것이었다.

일로델이 묘한 눈길로 복부를 바라보고 있자, 헤롯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붕대로 감아놨지만, 배에 수술로 인한 흉터가 생겼어. 범위가 넓지 않으니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흉터는…. 사라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구나. 네가 원하면 연구 센터를 세워 피부를 재생할 방법을 찾아 주마. 어떠니?”

뭐 그렇게까지야. 일로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헤롯이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두 번 권하지는 않고 그의 흐트러진 담요를 정리해 주었다. 일로델은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주택에는 싱싱하게 가꾼 화초가 많았다. 심약해 보이는 별장지기의 취향인 것 같았다. 열린 창문으로는 햇볕이 쏟아지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기척이 경쾌하게 뒤섞였다. 곁에는 언제 보아도 반가운 어머니가 있고,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간 삐죽삐죽 날 서 있던 신경이 독과 함께 녹아내린 듯했다.

“여긴 어디예요?”

“내가 얘기를 안 했구나. 여긴 실톤에 있는 내 별장이란다.”

“실톤이요?”

“그래. 남부 대륙 최고의 상업항이야. 여기도 내가 처음 왔을 땐 별 볼 일 없었지. 이 좋은 지역을 버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니? 당장 마차길과 철도부터 연결하게 했단다. 배가 모이면 사람과 물자도 모이고 그게 곧 재화로 이어지는데, 배만 잘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그 인간답다고 해야 할지….”

툴툴거리던 헤롯이 아차 해서 입을 다물었다. 셰본을 입에 담은 게 스스로도 싫은 표정이었다. 일로델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부모님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자신이 파탄의 시발점이라 해도, 혼자서 세상 모든 일을 책임질 순 없었다. 그걸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겠지….

쿠키는 달콤했지만 씁쓸한 입맛까지 달래 주진 못했다. 얼마 먹지 못하고 내려놓자 헤롯이 다과를 물리라 지시했다. 일로델이 조심조심 움직여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니? 그만 쉴래?”

일로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 조금만 깨어 있어도 피곤했다. 헤롯이 일로델의 머리를 살살 넘겨 주었다. 말갛게 드러난 얼굴은 세상 물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푸른 눈은 마음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투명했다. 어릴 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고, 크면서는 떼를 쓰는 아이 같았다. 언제 봐도 어리게만 보여서 고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제 눈에도 이쁜 건 남 눈에도 예쁘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정도가 있는 법이다. 로건과 티베인, 두 녀석 역시 그녀의 배로 낳은 아들이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대공 가문, 아니 황제와 대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일로델을 지킬 것이다. 또다시 일로델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일로델. 기력이 좀 돌아오면…. 이 어미와 북부로 가자.”

“…….”

“나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구나.”

일로델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그새 피로에 젖어 있었다. 헤롯은 그가 잠들 때까지 지켜보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뱃고동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히 이어졌다.

*

“이건 말도 안 돼!”

쾅, 거친 발길질에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프레디는 세찬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맴돌았다. 가택에 연금된 지 열흘째. 황제에게 보냈던 사죄의 선물과 서신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읽지도 않았는지 뜯은 흔적조차 없었다. 원래가 옹졸하기 짝이 없는 작자라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찾아오는 이라도 있으면 넋두리라도 할 텐데, 공작인 아버지를 따르던 귀족들조차 발길이 뚝 끊겼다. 이젠 하인들마저 그를 피했다. 그는 혼자였다.

프레디는 점점 미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포악한 이빨에 살점이 뜯겨나가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야만인들의 악랄함에,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두려움에, 무엇보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를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자꾸만 되풀이되어서 그는 하루도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서신! 서신을 보내야겠다! 빨리 필기구를 가져와!”

비명 같은 외침에 대기하던 하인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뮬리 공작의 타운 하우스는 도심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이었지만, 요 며칠은 유령이라도 들린 것처럼 음산함이 감돌았다. 도로를 적시는 빗물이 구물구물 뱀처럼 흘러 공작 저를 비껴갔다.

촛불을 들고 다가온 상급 하인이 고급 양피지와 만년필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프레디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뜨고 글을 써 내려갔다. 촛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광적으로 적은 서신을 봉투에 봉해 하인에게 건넸다. 하인은 그것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해? 빨리 그 서신을 고모할머니께 보내!”

“남부에 계신 선 대공비께 말입니까?”

“그래! 노망난 할망구여도 대공 가문의 큰 어른이니 쓸모가 있겠지. 그 고귀한 핏줄들이 붙어먹는다는데 가만히 있겠어? 하하,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미친 록퍼스가 형제 놈들!”

프레디가 크게 웃었다. 번개가 번쩍거리는 창문으로 그의 얼굴이 비쳤다. 단단히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상급 하인은 말없이 있다가 열려 있는 문가를 흘깃거렸다. 그는 무언가 신호를 받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프레디는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어떻게 황제의 분노를 풀지 고심했다. 선물도 서신도 소용이 없으니 여자를 갖다 바칠까? 황제가 호색한이긴 해도 취향은 까다로웠다. 콧대 높은 코르티잔도 그놈의 취향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기가 센 누이 밑에서 자란 탓인지 황제는 순진하고 백치 같은 여자를 선호했다. 최근 본 사람 중에서는, 그렇지. 그 대공가의 차남 같은 녀석 말이다.

이름이 뭐랬더라?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듣고도 잊어버렸다. 야수 같은 티베인과 쌍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희미한 녀석이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연회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섬세한 케이크였다. 희고 부드러운 케이크는 부러 망가뜨리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녀석과 악수를 했을 때의 기분이 딱 그랬다. 생긴 것처럼 손도 말랑거려서…. 힘주어 쥐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었지.

그는 갑자기 목이 타서 주전자째로 물을 들이켰다. 확실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는 녀석이다. 분명 록퍼스의 알파 형제들도 그 요사함에 현혹당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녀석과 닮은 여자를 찾는 거다. 그리고 먼저 맛을 보는 것도 좋겠지. 황제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을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니까….

“거기, 아무나 나가서 여자를 하나 사 와라!”

“…….”

“내 말 못 들었나? 여자를 사 와. 피부가 깨끗하고 순진한 년으로!”

“…….”

“이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주변이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잠자코 정황을 살피자니 이상하게 허전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하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들이 감히 허락도 없이 자리를 떴단 말이야? 프레디가 콧김을 내뿜으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빛 한 점 없는 암흑이 저택 안을 내리덮고 있었다. 분노에 차서 복도로 나가려던 프레디가 흠칫 물러났다. 그가 어둠이라 생각했던 것은 검은색의 로브을 쓴 사내였다. 사내는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누, 누구….”

소리 없는 번개가 내리쳤다. 빗물에 젖은 검은 로브가 차갑게 빛났다. 사내는 키가 크고 골격에 각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심해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가졌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프레디가 입을 크게 벌렸다.

“로, 로…!”

그러나 외침은 검은 장갑에 허무하게 막혔다. 프레디는 저항도 제대로 못 하고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굵은 밧줄이 목을 휘감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막은 손이 떨어져 나가고서야 기회가 왔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줄이 목을 조이는 순간 깩 하는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프레디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밧줄을 지탱한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움직였다. 쩔렁쩔렁 요란한 소음이 복도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흐릿한 촛불이 창문을 비췄다. 천장에 목을 매고 허우적대는 남자의 실루엣이 유리에 반사되었다. 기괴한 춤사위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미약하게 타오르던 양초도 수명이 다하여 불씨가 사그라졌다. 그러자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사라졌다.

*

어머니는 정말 바쁘다.

일로델이 매일 헤롯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니의 별장은 바다와 야자수밭 사이 고즈넉한 언덕에 있었다. 잘 다듬어진 흙길로는 산책하는 노부부와 신문 판매원의 자전거만 간간이 드나들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좋겠구나 싶을 만큼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일로델이 아랫배에 감은 붕대를 풀고 헤롯과 함께 바깥 산책을 하게 된 날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별장으로 작은 선물과 안부 서신이 날아들었다. 보낸 이들 대부분이 고위 귀족이라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어쩐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날은 조금 더 큰 선물이 도착했다. 얼핏 본 서신에 자신의 이름이 보인 것도 같았으나 일로델은 애써 외면했다.

다음 날에는 대문짝만한 선물이 들이닥쳤다. 이건 확실히 어머니 앞으로 온 선물이었다. 열어 보니 아기 천사들이 노닐고 있는 고풍스러운 그림이었다. 어머니는 눈에 띄게 좋아했지만, 보낸 이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식어 빠진 토스트처럼 변했다. 서신 말미에 귀난 재상이라 쓰여 있는 것을 일로델이 힐긋 보았다.

그날 이후로는 아예 사람들이 별장에 방문했다. 첫날엔 황실 친위대 참모가 찾아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다 돌아갔다. 다음 날은 어제 왔던 참모와 치안대 대장이라는 사람이 온종일 가위바위보를 하며 누가 먼저 들어갈지 겨뤘다. 날이 갈수록 방문객은 늘었으나 문전박대는 계속됐다. 바깥에선 기다림에 지친 자들이 결투까지 벌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문을 열지 않았다.

겨우 한산해진 어느 저녁, 일로델은 어머니와 바닷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다가와 젊잖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자신을 귀난 재상이라 소개하며 방긋 웃었다. 일로델은 옆에서 ‘좋은 시간 다 갔군. 망할.’ 하며 중얼거리는 헤롯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럼 이 사건은 치안판사에게 맡길까요?”

“비록 살인이지만 친족간의 문제이니 그들이 더 잘 판단할 거야. 피의자도 오랜 기간 학대를 당해왔다니 할 말이 많겠지.”

“알겠습니다. 커흠. 그럼 한 달 전 마차 사고에 관해서는….”

문이 닫히고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끊겼다. 한가로이 창문 밖을 구경하던 일로델이 고개를 돌렸다. 곱슬곱슬한 단발머리에 흰 가운을 걸친 여자가 눈인사를 했다. 그녀는 메리라는 이름의 의사였다. 큰 진료소를 운영하는 바쁜 사람이지만, 지금은 별장에 상주하며 자신을 돌봐주고 있었다. 얌전히 침대로 가서 앉자 그녀가 복부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아물었네요. 이제 뛰어다녀도 되겠는걸요?”

“정말이야?”

“그래도 무리하지 말아요. 수술 상처만 아물었다 뿐이지, 빈혈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어요. 헤롯 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반년은 가만히 요양하도록 해요.”

어머니는 일 년 요양으로 알고 있던데. 역시 과장이었구나 생각하며 일로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어머니의 그… 친밀한 친우로서 어머니가 오래 머물러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종종 부풀려서 말하곤 하지만 그 속내가 빤해서 밉지는 않았다. 또 의사로서 자부심이 있어 자신의 건강으로 장난을 치는 일은 없었다. 하긴, 그게 정상이지. 하지만 워낙 비정상들 틈에 부대껴 살다 보니 이만하면 감격스럽다.

문밖에서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치안대의 알현이 길어지니 항의가 들어온 듯했다. 메리가 뾰족한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눈치만 귀신같아선. 이제 한숨 돌리려 하니 몰려와서 사람을 괴롭혀요. 조언을 얻을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 아니에요? 그러라고 그 자리에 있는 거 아니냐고요.”

메리가 불퉁해서 투덜댔다. 일로델도 동의하는 바였다. 치안대 대장이면 마차 사고 정도는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일부러 무능한 사람만 골라 직책을 맡긴 게 아닌가 싶다. 황제가 심술궂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자 지레 의심이 들었다. 심보가 티베인 저리 가라 싶게 악독하다 하니 오죽할까?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늘 궁금했다. 언뜻 듣는 이야기론 황제의 친위대인가 싶다가도 누구의 재판을 맡았다고도 하고, 새로운 무역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둥,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대공이고 군을 총괄하는 사령관이라는 건 알았지만, 왜 그렇게까지 바쁜지 알 수 없었다.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군에 지원했지만, 매번 나가떨어지고 그사이 형제들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 버렸다.

진실은 단순하다고 하였던가. 황제와 대공, 두 권력 간의 이해관계가 있었고, 형 로건이 그것을 이용해 자신을 고립시켰다. 사실 형이 부모님에 대해 거짓을 말하거나 이간질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다만 알려 주지 않았을 뿐이다. 필요한 것, 필요하지 않은 것, 모두 입맛에 맞게 조절하여 교묘하게 전달해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형의 탓이기만 할까? 형에게 너무 의존하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어제 신문 보니까 공작 가문의 장남이 죽었다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또 한참 시끄러울 테니 황제가 헤롯 님을 불러들일 텐데…. 아, 차라리 헤롯 님이 황제였으면 좋겠어요. 보고 있으면 속이 터져서 정말….”

생각에 빠져 있던 일로델이 고개를 들었다. 공작 가문의 장남이 죽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누가 죽었다는 거야?”

“얼마 전에 뮬리 공작이 야만인 이송 중에 참변을 당했거든요. 그 모습을 장남이 보았대요. 그길로 정신이 나가서 저택에 연금됐는데, 결국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나 봐요.”

뮬리 공작. 점잖은 척 자신을 조롱 속에 빠뜨렸던 고약한 중년 신사가 떠올랐다. 그 옆에서 히죽거리던 붉은 머리의 프레디도. 두 사람이 죽었단 말인가? 공작은 야만인에게 변을 당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프레디는 자살을 했다고? 정말로?

일로델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메리가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주둥이를 때렸다. 하여간 요 입. 환자 앞에서 떠들 소리가 따로 있지. 아니, 굳이 말하면 헤롯 님의 둘째 아들이라는 이 도련님도 문제다. 뭔 말만 꺼내도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니 신나서 아무 얘기나 하게 되지 않는가.

“아는 사람이에요? 너무 심려하지 말아요. 사람 일이 어떻게 마음처럼만 되겠어요.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면 좋겠지만 끽하면 이렇게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게 인생인데…. 아이참, 제가 괜한 소릴 했어요.”

“아, 아니야. 그냥 놀라서….”

“그럼요. 당연히 놀라죠. 저도 그랬는걸요. 하지만 일로델 님은 너무 놀라면 몸에 안 좋으니까, 이걸 좀 드세요.”

메리가 작은 물체를 손에 쥐여 주었다. 노란색의 사탕이었다. 일로델은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에 넣고 굴렸다. 익숙한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공작 가문의 참혹한 소식을 듣고도 잠잠했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메리가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사탕이 거의 녹았을 때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건…. 무슨 사탕이야? 맛이 괜찮네.”

“그렇죠? 저도 살짝 맛을 봤는데 좋더라고요. 사실 그건 사탕이 아니라 약이에요. 해독과 진통 계열 약초를 여러 가지 섞었다는데, 어떻게 그런 맛이 나나 모르겠어요. 아이들에게 먹이면 딱인데…. 글쎄 죽어도 레시피는 가르쳐줄 수 없다지 뭐예요.”

“누가?”

“잘은 모르겠는데 자기 딴엔 뭐 유명한 과학자래요. 그럼 뭐 해요? 미친놈 같던데. 일로델 님 몸을 그렇게 만든 것도 그 작자라면서요.”

오르본이군. 멍청한 얼굴이 머리에 그려지자 두근거림이 확 가라앉았다. 일로델은 사탕을 본 순간 느낌이 왔다. 로건과 티베인이 자신에게 먹였던 것이었다. 모양도 그렇고 맛도 같았다. 한 번은 독초를 달여 먹은 후 티베인이 주었고, 한 번은 남은 독초를 먹기 전 로건에게 농락당하며 억지로 삼켜야 했다.

“…….”

해독과 진통이라. 결국, 자신이 낙태약을 구해 먹으리라 읽어낸 셈이다.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가셨다. 약을 먹으리란 예상은 했지만, 복용법을 지키지 않으리란 생각은 못 했겠지. 그러니 그렇게 당황했을 테다. 티베인의 비명과 형의 조곤조곤 울리는 낮은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안 돼, 하고 속삭이던 그 떨림이 관자놀이에 닿은 것 같아 일로델은 몸을 바르르 떨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지 바깥이 떠들썩했다. 메리가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일로델, 일로델을 보여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헤, 헤롯 님…!”

“제발, 얼굴만 볼게. 어머니, 일로델 보여주세요. 이제 깨어나서 돌아다니잖아, 보여달라고!”

멀쩡했던 거실이 셰본이 왔다 갔을 때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웬 맹수가, 야만인이, 아니 그냥 미친 부랑자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난동을 부렸다. 바깥의 참상을 목격한 메리가 어맛, 하고 놀라며 방문을 몸으로 가렸다. 그러나 이미 일로델과 티베인의 눈이 맞은 참이었다.

“일로델…!”

일로델이 주춤 물러나고, 티베인이 안광을 번쩍 빛내며 날아든 그때였다. 헤롯이 날렵하게 앞을 막아서더니 그의 멱살을 잡고 메쳤다. 티베인이 오뚝이처럼 일어났으나 헤롯이 다리를 걸고 넘어뜨려 순식간에 수갑을 채웠다. 그걸로도 모자라 녀석은 호위들에게 억눌려 밧줄로 꽁꽁 묶이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그대로 바깥에 버려졌다.

마당에서 “일로델, 일로델! 혀엉!”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쩡쩡 울렸다. 그러나 현관을 닫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이 찾아왔다. 헤롯이 기가 막힌 듯 헛숨을 뱉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저놈이 혼자 여길 어떻게 찾아온 거야? 로건이 알려 줬을 리는 없을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경계를 강화하는 게….”

“아니, 로건은 나와 약속했어. 일로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차라리 내가 데리고 죽겠다고 했거든.”

호위가 입을 떡 벌렸다. 그도 몰랐던 사실인 듯했다. 헤롯은 괜찮냐며 호들갑을 떠는 메리를 다독이곤 일로델에게 다가왔다.

“괜찮니? 많이 놀랐지?”

“네? 아뇨….”

저 정도로 놀라기엔 일로델은 티베인의 미친 모습을 다양하게 보아 왔다. 하지만 그냥 하는 소리라 생각했는지 헤롯이 그를 꼭 안고 토닥였다. 그녀는 이를 핑계로 방문객들을 모조리 내보내고 다시금 문을 폐쇄했다. 방금 왔다가 차도 못 마시고 별장을 떠나게 된 귀난 재상의 눈빛이 매우 처량했다.

그날 저녁, 일로델은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턱을 괸 채 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멀리서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짙푸른 어둠이 찾아와도 바람은 따뜻했고 눅눅한 바다 내음과 건조한 사막의 냄새가 뒤섞여 방으로 흘러들었다.

하늘하늘 움직이는 야자수 잎사귀 밑으로 별장을 둘러싼 검은색의 높고 뾰족한 울타리가 있었다. 그 한참 아래, 힘없이 저택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검은 인영을, 일로델은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아침이 밝자 별장에 활기가 감돌았다. 꾹 닫혔던 현관이 활짝 열리고 별장지기가 마당에 물을 뿌리며 길을 반들반들 닦았다. 헤롯의 명령으로 하인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고 일로델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별장 바깥에서 하인 두엇이 커다란 파라솔을 펼쳐 들고 대기했다. 산책 시간이었다.

오늘 새벽, 굶은 이리처럼 별장 주변을 맴돌던 티베인이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중간에 탈주를 했는지 다시 찾아와 꽥꽥 행패를 부렸지만, 이번엔 군용 트럭 한 부대가 몰려와 녀석을 질질 끌고 갔다. 놓으라며 발버둥 치는 모습이 하도 같잖아서 일로델은 픽 조소했다.

티베인은 군인들과 한참 씨름하다 목에 주사를 맞고 쓰러졌다. 녀석은 트럭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사라졌다. 나머지 군용 차량도 곧 떠날 듯 덜덜거리며 공회전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중간에 있는 차량의 차창이 반쯤 내려갔다. 그늘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델은 잠시 굳었다가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요란한 엔진 소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그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배를 보러 갈 거란다. 아마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거겠지?”

“맞아요.”

“한번 타 보는 것도 좋겠구나. 어지럽거나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하렴. 집안에 멀미 있는 사람은 없지만, 너는 혹시 모르니까.”

헤롯이 일로델의 옷차림을 정돈해 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로델은 순순히 웃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가 저를 못 미덥게 여긴다는 생각에 풀이 죽었겠지만, 이젠 그냥 걱정이라는 걸 알았다. 더군다나 헤롯은 본래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간 혼자 서러워했던 그녀의 수많은 발언이 전부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일로델은 산책하는 내내 웃었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깜짝 놀랄 정도로 넓었다. 멍청하면 용감하다고, 이런 곳을 건너갈 생각을 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아마 형이 열차까지 따라오지 않았더라도 이 광활한 자연을 홀로 가로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 새는 뭐지요?”

“세상에, 갈매기를 모른다고? 네가 바깥 활동을 안 하긴 했구나. 저건 바다에 사는 흔한 새야.”

“바다로 나오려면 열차 타고 하루는 족히 걸려요.”

“그건 또 어떻게 아니? 네 말대로 내륙과 바다를 잇는 이동 수단은 있는데 속도가 느리지. 아무래도 더 빠른 열차를 개발해야겠어. 마침 우리가 철도 사업을 인수했으니 전문가를 양성해서….”

진지하게 운영을 구상하던 헤롯이 순간 떫은 얼굴을 했다. 일로델도 슬쩍 시선을 피했다. 철도 사업을 인수한 곳은 대공 가문이지 황실이 아니었다. 이혼 얘기까지 꺼낸 마당이니 그녀에게 있어 철도고 열차고 다 남의 일이 된 것이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일로델이 배를 묶은 밧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 위에 앉아 있던 갈매기가 총총거리며 자리를 떴다. 분위기가 더 썰렁해졌다. 헤롯이 큼, 하고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장식을 했더구나. 다이아몬드 같은데, 귀에 그건 뭐니?”

“아, 이건….”

이번엔 일로델의 얼굴이 떫어졌다. 그는 손으로 귓가를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피어싱이라고…. 남부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요….”

“그래? 조그만 게 귀엽구나. 네가 직접 한 것이냐?”

“아니요. 저기, 그, 로건, 형님이….”

부드럽게 풀려가던 헤롯의 입가가 슥 굳었다. 그걸… 왜 계속 차고 있니? 뭐가 좋다고 아직도 달고 있어? 유행을 따르고 싶은 거니? 맞아, 너도 그럴 나이지. 유행을 따르고 싶은 걸 거야. 그렇지? 그녀는 입 안을 맴도는 질문 폭탄을 꾹 삼켰다. 도리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 반동으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

일로델은 어색하게 피어스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눈속임용으로 만든 가짜였다. 결국 이렇다 할 쓰임새도 없었고, 가짜임을 알아챘을 로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갑까지 채우고 감금해놨으니 위치 추적 따위 필요도 없었겠지만.

진작 빼버렸으면 좋았을걸.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이제야 생각이 미쳤다. 입에 발린 칭찬은 했지만, 본래 보수적인 어머니는 특이한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늘 단정함과 깔끔함을 강조했다. 더구나 로건이 해 주었다 하니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당장 빼자 싶어 손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헤롯이 그를 만류했다.

“뭐 하러 그러느냐? 그냥 두어라. 하얀 것이 너와 잘 어울리는구나.”

“네? 하지만….”

“북부에 가면 더 값진 것으로 맞춰 주마. 블루 다이아몬드를 본 적 있니? 그건 네 형도 구하지 못할 거란다. 왜냐면 나만 갖고 있거든.”

아, 예….

적절한 반응을 찾지 못한 일로델이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그러자 헤롯이 턱을 바짝 들더니 블루 다이아몬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두 눈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보석에 관심이 없는 일로델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아이의 어설픈 반응에 헤롯은 약간 토라졌다. 그녀는 날이 왜 이리 덥냐며 공연히 짜증을 내다가 배에 올라가자며 일로델을 이끌었다.

흑색의 거대한 몸체를 가진 선박은 열차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갑판만으로도 저택 뒤뜰만 한데, 지하가 2층까지 있어 하루 만에 다 둘러보기도 힘들 듯했다. 일로델은 처음엔 조심스럽게 갑판만 기웃거리더니, 시간이 지나자 신이 나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이건 뭐고 저건 뭐냐며 선원들을 덥석덥석 잡고 묻는 것이 꼭 철부지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헤롯은 울적함을 삭이며 그를 지켜보았다. 좀 더 신경 써서 돌봐 주었다면 문제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셰본의 선택에 분노했지만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로서는 자식 하나 희생시켜서 골칫거리를 해결하리라 결심할 법도 했다. 좋은 예로 지배층 간의 정략결혼이 있지 않은가? 좋아서 혼인하는 경우가 드문 세상이다. 셰본은 딱 그 정도의 소감으로 로건과 티베인에게 일로델을 넘겼을 것이다.

“개새끼.”

헤롯이 낮게 욕을 지껄이자 부하들이 흠칫해서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땐 숨죽이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마침 선장에게 배의 운용법을 듣고 온 일로델이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마스트니 야드니 하는 말의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직접 키도 잡아 보고 조난용 발광 신호기도 써 보았다. 새하얀 빛이 바다 한중간을 가로지르는 광경이 기가 막히게 멋졌다. 재밌어서 계속 둘러보자 선장은 그보다 더 신나서 “말만 하십쇼. 당장 바다로 나가겠습니다!” 하며 의욕을 드러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일로델은 선장의 매달림을 뿌리치고 조타실을 빠져나왔다. 헤롯이 활짝 웃으며 그를 맞았다.

“어때? 배는 마음에 드니?”

“엄청 크고 좋아요. 이렇게 큰 배가 있는지 몰랐어요.”

“기함은 이보다 크지만, 프리깃도 대형선에 속하지. 지하에 가면 대포도 있단다.”

“대포요?”

“가끔 해적과 마주칠 때도 있거든. 일반 해적은 군함을 보면 도망치는데, 야만인들은 오히려 덤벼들어. 아주 귀찮은 놈들이야.”

헤롯의 말에 일로델이 깜짝 놀랐다. 그럼 어머니와 야만인이 대포를 쏘며 싸우기도 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일로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셰본을 보고도 덤덤했던 마음에 분노가 샘솟았다. 그에게 총을 들이댄 헤롯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야만인 우두머리를 놓쳤으니 놈들이 다시 바다로 기어 나왔을 거야. 하루빨리 출항하는 게 좋겠지만….”

말을 잇던 헤롯이 일로델을 힐긋 보았다.

“출발 시기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무조건 네 결정에 따를 거란다. 마음 가는 대로 하렴.”

“…….”

“그간 네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아 미안하구나. 모두 널 위한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내 독단이었지 뭐야. 바보 같아서 원.”

헤롯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다를 보았다. 일로델도 그녀를 따라 드넓은 대양을 돌아보았다.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창공을 날고 있었다. 바다에도 뱃길이 있다고 했다. 갈매기가 노니는 길을 쭉 따라가면 이틀 안쪽으로 북부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그게 바로 신형 쾌속정의 자랑이라며 선원이 가슴을 쭉 펴고 얘기해주었다.

재밌었어.

일로델이 빙긋 웃었다. 헤롯이 그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입을 벙긋대며 말을 걸려다 그만두었다.

그녀는 모든 선택권을 일로델에게 넘겼다. 본인의 의견을 듣겠다는 뜻도 있지만, 더는 그를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서 존중하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며칠째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속이 탔다. 거기다 저택을 떠나 마음이 편해진 덕일까? 그전에는 사춘기 떼쟁이처럼 투정이라도 부렸던 애가 날이 갈수록 둥글둥글 해맑아지기만 해서 더욱더 불안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난간을 두드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로델은 더 구경하겠답시고 선박 안을 쏘다니기만 했다.

두 사람은 아침에 나와 날이 저물기 직전에야 별장으로 돌아왔다. 긴 탐험에 지친 일로델은 밥이고 뭐고 잠이나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마음을 읽은 헤롯이 식사는 꼭 해야 한다며 잔소리했다. 죽상을 하고 걷던 일로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별장 앞에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별채에서 일하던 하인 마노였다.

*

조르륵 소리와 함께 찻물이 붉게 우러났다. 두 개의 찻잔이 채워지자 하인이 정중하게 티포트를 세우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같은 신분인 마노는 이러한 대접이 생경한지 앉았다 일어났다 정신 사납게 굴었다. 가뜩이나 피로에 젖어 있던 일로델이 인상을 구겼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

“죄, 죄송합니다!”

마노가 바닥에 철퍼덕 꿇어앉았다. 그러더니 납죽 엎드렸다. 일로델이 황당해서 그를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의자에 앉아.”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일로델 님과 마주 앉아 있겠습니까. 헤아려 주십시오.”

“그럼 서 있든가.”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일로델 님…. 정말 죄송합니다.”

마노가 고해성사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일로델은 그를 바라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엇에 대한 사죄인지 알 것 같았다. 대공 가의 하인으로서, 그리고 별채의 관리인으로서 그곳에서 벌어진 간악무도한 행각을 외면한 일에 대한 사죄였다.

솔직히 괘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같은 하인 신분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예기치 않게 사경을 헤매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자신의 고약한 형제를 상대로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테다. 일로델은 마노를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됐으니까 일어나.”

“죄송합니다….”

“네가 가져온 건 뭐지? 화분 같던데.”

대기하던 하인이 눈치 좋게 화분을 들고 왔다. 마노가 가져온 것이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토분에 막 자라기 시작한 아담한 관목 식물이 심겨 있었다. 햇빛을 잘 받았는지 잎사귀가 싱싱했다. 도감에서 본 것도 같은데…. 뭘까?

그래도 약초학도라고, 몰려드는 선물에도 시큰둥하던 일로델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자 마노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분을 받아 왔다. 그는 귀한 보물이라도 되듯 화분을 신중하게 내려놓더니 그 옆에 꿇어앉았다.

“이것은 레몬 나무입니다.”

“레몬?”

“동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희귀한 식물인데, 오렌지와 비슷한 과일이 열린다고 합니다.”

오렌지? 일로델의 표정이 뚱해졌다. 그는 오렌지나 석류 같은 시큼한 과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푹 익은 망고나 체리 같은 과일이 좋았다. 아무리 별채 담당이라 해도 그렇지, 자신의 음식 취향 하나 꿰고 있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무능한 놈. 너그러워졌던 마음이 급속히 옹졸해졌다. 일로델이 시들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에 들어갔다.

“그게, 과일이 열리긴 하는데, 신맛이 강해서 식용으로 쓰이진 않습니다. 뭐라더라, 아. 뱃사람들이 괴질에 자주 걸리는데, 레몬즙을 조금 주면 바로 낫는다고 합니다. 너무 귀해서 자주 쓰지 못할 뿐이지요.”

“그래?”

일로델이 솔깃했다. 그도 배운 건 있어서 괴혈병에 신 음식이 특효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칭 현대 의학자라는 벤 같은 놈들이 그깟 과일이 무슨 치료를 하냐며 반발하고 나선 턱에 아직도 괴혈병 치료는 지지부진했다. 어차피 귀족들이야 항해 중에도 잘 먹고 다니니 일로델도 특별히 관심을 두진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듣고 보니 꽤 재밌는 연구 거리가 될 듯했다. 어차피 한가하기도 했고….

“동부에서 왔으면 값이 꽤 나갈 텐데, 잘도 구해 왔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기, 사실은, 저….”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리던 마노가 다시 풀썩 엎드렸다. 일로델은 연한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멈추었다. 고슬고슬한 흙 사이에서 하얀 것이 반짝였다. 작고 섬세하게 커팅 된 다이아몬드는 눈에 익은 것이었다. 일로델은 움직임을 멈춘 그대로 피어스를 바라보았다.

“일로델 님, 죄송합니다. 그것은 주인님, 로, 로건 님의 선물입니다. 노여워 마시고 받아 주셨으면…. 아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마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잘 보니 몸도 떨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설마 자신이 이걸 받지 않으면 그의 모가지를 자른다고 했을까? 예전에 로건의 부하인 모릭스가 한 말이 떠올라서 쓴웃음이 나왔다.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로델은 말없이 잎사귀를 톡톡 건드렸다. 아직 어린순은 정말 나무가 될지 의심쩍을 정도로 여렸다. 동부의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희귀한 식물이라. 처음 접하는 나무지만 방법만 알면 키우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기후였다. 열대지방의 식물이라면 추위에 약할 것이 뻔했다. 남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추운 북부에서 잘 자라길 바라는 건 욕심일 테다.

일로델은 어린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났다. 마노는 반쯤 포기해서 고개를 떨궜다. 일로델의 짐작처럼 임무에 실패한다고 모가지가 날아가진 않겠지만, 주인의 신임을 잃은 그는 앞으로 중요한 일을 맡지 못할 것이다. 로건의 수족이 되길 꿈꾸던 그에게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마노가 잿빛 미래를 상상하며 우울해하던 그때, 의외의 허락이 떨어졌다.

“좋아…. 알았어.”

“이, 일로델 님.”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가도록 해. 오늘 많이 걸어서 피곤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가.”

일로델이 하품을 짝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은 팔랑팔랑 흔들며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다. 마노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일로델은 하인의 도움을 받아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곧바로 잠이 쏟아질 듯했으나, 피곤한 건 몸뿐이고 정신은 이상하게 말짱했다.

그는 어둑어둑한 방에서 천장만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린 레몬 나무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슬렸다. 일로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분을 창가로 옮겨놓았다. 지금은 밤이라 해가 없지만, 아침이 되면 질리도록 볕을 쬐게 될 거다. 그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부질없이 뒤척이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났다. 하인이 끄고 나간 촛불을 다시 켰다. 생각보다 면담이 길었던 것일까. 어느덧 밤이 깊어 사방이 고요했다.

헤롯은 마노가 저택의 하인이라는 걸 알고 불쾌해했지만 그를 쫓아내진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마음대로 하라며 선택권을 내어주었다. 그러면서 마노를 쏘아보는 눈빛이 어찌나 매서운지, 쫓아내라고 하면 아예 지옥으로 쫓아낼 기세였다. 잠시 고민하던 일로델은 마노를 들이기로 했다. 마노가 이승을 떠날까 걱정된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얇은 가운을 걸치고 창가에 섰다. 은은한 달빛이 방 안까지 길게 들어왔다. 그는 나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어린 식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흙을 파헤쳤다. 값진 다이아몬드가 때아닌 손장난에 꾀죄죄해졌다. 한참 흙을 뒤적였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누군가의 잘린 귀가 딸려 나오진 않을까 내심 걱정한 것이다.

“선물은 마음에 들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일로델은 숨을 멈추고 굳었다. 세상은 변함없이 고요했다.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도조차 잠들었는지 귀를 기울여도 물소리만 잔잔했다. 문득 환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허하면 생길 수 있는 증상이었다. 그래, 그런 거겠지. 일로델이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보았다.

“…….”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어. 다행이다.”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침대 한편에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문가는 상대적으로 어두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천천히, 익숙한 높이로 시선을 올렸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새벽 보았던 것과 같았다.

“형님….”

일로델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로건이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늘 그렇듯 반듯한 제복 차림이었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일로델은 로건을 확인한 순간 얼떨떨했던 정신이 확 깼다. 급히 창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새벽조의 경비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건 도리어 불길한 징조였다. 일로델이 창백해진 낯으로 다가오는 로건을 보았다.

“자는 모습을 보러 왔는데, 운이 좋았군.”

“형님, 어, 어떻게, 설마….”

“걱정하지 마. 다들 수면향을 맡고 잠이 든 거야. 때가 되면 깨어날 테고…. 나는 그 전에 가야 하지. 꼭 동화 같은걸.”

로건이 소리 죽여 웃었다. 일로델은 헛숨을 터뜨렸다. 동화라고? 그렇게 풋풋한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형은 정말로 뻔뻔하다. 뜨악한 그와 달리 로건은 기분이 매우 좋은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일로델은 살짝 당황했다. 언제나 우아하고 완벽했던 형이다. 저렇게… 선물 받은 소년처럼 좋아하는 모습은 아마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일로델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떫은 얼굴을 했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로건이 창가에 놓인 레몬 나무를 돌아보았다.

“보자마자 너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샀어. 잘못하면 망가질 것 같아서 도보로 운송하게 했지. 알고 보니 관리가 꽤 까다롭다는군. …그런 점도 꽤 닮았지 뭐야.”

일로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레몬 나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나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는 둥, 시큼한 과일은 싫다는 둥, 딱히 좋은 감상은 없었는데 닮았다니까 괜히 기분이 별로였다. 그는 적절한 반응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뚱하니 말했다.

“식물은 망가지는 게 아니라 죽는 거예요.”

“물론 알지. 그리고 얼마든지 다시 사들일 수 있고.”

“…….”

“알고 있어. 그래서 무서웠던 거야. 너를 잃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으니까….”

일로델은 대꾸 없이 흙장난을 쳤다. 값을 매기기도 힘든 다이아몬드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보면서도 로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로델은 화풀이라도 하듯 피어스를 꾹꾹 누르고 괴롭히다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충 툭툭 털어 로건에게 건넸다.

“가져가세요.”

“일로델.”

“저는 이제 형의 보호가 필요 없어요. 감시는… 더 싫고요.”

“…….”

“이제 이런 걸로 절 통제하진 못해요. 저는 떠날 거거든요.”

로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형은 의외로 무표정이 어울렸다. 아마 자신과 있지 않을 때는 늘 그런 얼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도 어울리니,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까.

“따라오면 더 멀리 갈 거예요. 형과 티베인이 없는 곳으로, 어디든지.”

“…….”

“그러니까 가져가요. 레몬 나무는 고마워요. 잘 키울게요.”

일로델은 매정하게 말하며 피어스를 내밀었다. 로건은 묵묵히 서 있다가 느린 손길로 피어스를 거두어 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때, 로건이 미련 없이 피어스를 바닥에 내버렸다. 일로델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필요가 없다 하니 버린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원수 같던 물건이라지만 눈앞에서 버릴 건 뭐란 말인가?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바닥을 훑었다. 그러나 워낙 틈새가 많은 마룻바닥에서 조그만 보석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로건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품속으로 넣으며 웃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군. 내 동생의 여행 계획이나 들어 볼까?”

“형님.”

일로델이 얼굴을 굳혔다. 여행 같은 게 아니었다.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북부로 갈 것이다. 가서 무엇을 할지는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겠지만 어쨌거나 저택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다만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마노든 모릭스든, 로건의 심부름꾼이 오면 그를 받아들이고 언젠가 방문할 로건과 맞서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야말로 망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로건의 방문이 너무 빨랐던 것뿐…. 일로델은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꾹 쥐었다.

“저는 떠날 거예요.”

“어디로?”

“어머니와 함께 북부로요.”

“안타깝군. 어머니를 살려둘 순 없겠어.”

“어머니를 해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어떻게 하려고?”

“죽을 거예요.”

“죽는 것도 자유가 있어야 가능한 거야, 일로델. 그간 내가 너를 너무 풀어주었지.”

“형님….”

“너는 아무 데도 못 가.”

로건이 차갑게 끊어 말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일로델은 ‘제발….’ 하는 애원의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힘겹게 참아냈다. 애원으로는 협상을 타결할 수 없다. 울고불고 사정해서 모든 일이 해결됐다면, 그는 지금쯤 심심풀이로 아카데미나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이상 대응 방식도 바꾸는 게 마땅했다.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는, 아무것도 안 돼요. 형님은, 그, 저를… 조, 조, 좋아하시잖아요.”

“아니, 사랑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누가 후려치고 간 것처럼 뒷머리가 얼얼해서 입만 겨우 뻐끔댔다. 정신 차려. 이성의 말미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일로델이 아찔한 듯 고개를 털었다. 하도 놀란 탓인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려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사, 사……. 아무튼, 형님이 어떤 마음인지, 이제 조금 알아요. 제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말… 맞아요. 저도 이기적이었어요. 하지만 형님이랑 티베인도 잘못했잖아요….”

“…….”

“마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잠깐 떨어져 보자는 거예요. 시간을 두고 생각하다 보면, 형님이나 티베인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말하는 중간에 로건이 식어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일로델도 따라 웃으려다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듯했다.

“어쨌든 시간을 좀 주세요.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너는….”

로건이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일로델은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작은 충격을 받았다. 신이 조각한 듯한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우울이 내려앉아 있었다. 로건은 눈을 내리뜨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너는 북부로 가면 잘 적응할 거야. 곁에는 어머니가 있고, 새로운 사람도 사귀면서…. 점점 우리를 잊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요, 하고 말하려던 일로델이 멈칫했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저택 밖은 생소했지만 재밌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바다만 보아도 끝없이 넓어서, 평생 배를 타고 다녀도 다 돌아볼 수 있을지 아득할 정도였다. 실제로 아직 해도에 없는 섬이 많고, 그곳에는 야만인 같은 기이한 부족이 살기도 한다는 선원의 증언도 있었다.

북부는 또 얼마나 신기한 게 많을까? 그는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웠다. 그래서 차마 로건의 말에 당당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미안해. 그냥 투정 한번 부려 본 거야.”

“형님…?”

“네가 가겠다면 막을 순 없지. 너를 또 잃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정말로…. 끔찍했어.”

로건이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일로델은 조금 멈칫했다. 그러나 뺨을 매만지는 로건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로건은 그가 아는 ‘형님’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도 친애의 표시에 가까웠다.

문득, 정신을 잃기 전 그를 위로한답시고 뺨을 비볐던 생각이 나서 민망해졌다. 그땐 정말 죽는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해독약을 먹은 데다, 몸속에 있던 열매가 독을 흡수해서 독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독 덩어리가 된 열매를 꺼내느라 대수술을 펼쳐서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열매는 어떻게 됐을까? 시들거나…. 아니, 죽었겠지. 오르본이 감히 거짓을 고한 게 아니라면, 정말로 임신을 했을 것이다. 계획대로 아이를 지우고 덤으로 이상한 열매까지 뗐으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예전의 형으로 돌아와 다정하게 웃는 로건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연기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공연히 허무한 기분이 들어서 그를 똑바로 보기 어려웠다.

“내 동생, 무슨 생각해?”

“그냥…….”

“저녁 인사로 키스해도 될까?”

이게 무슨 소리야. 일로델이 움칠해서 고개를 들었다. 로건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키스가 꼭 성애의 표현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그렇게나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길 바라놓고, 전에는 먼저 조르던 이마 키스도 거부하는 건 웃긴 일이 아닌가. 일로델은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이, 이마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촉촉한 살갗이 입술을 덮었다. 놀라서 굳은 사이 그것은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물러났다. 일로델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항의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로건이 다시 입을 맞췄다. 달래듯 여러 번 입술을 빨고 부드럽게 혀를 옭아맸다. 느릿하면서도 끈적한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사방이 고요해서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혀, 형, 이, 이마에…….”

“미안.”

로건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야릇하게 느껴져서 일로델은 몸을 떨었다. 혀의 움직임이 깊어졌다. 굳센 팔이 허리를 휘감자 턱이 저절로 들렸다. 입 안을 침범한 혀는 끈적하고 농밀했지만, 한편으론 절박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일로델은 스스로에게 변명을 주워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흣….”

“일로델….”

입 안으로 뜨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듯 혀를 옴찔거렸다. 그러자 로건이 능숙하게 혀를 감아올리며 움직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순간 머리가 어찔했다. 아, 일로델이 짧게 신음하며 무너져내렸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나 싶더니, 로건이 따라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끝까지 입맞춤을 이어 갔다.

“으응….”

“너무 크게 소리 내면 어머니가 깰 거야.”

“어, 어머니가….”

“그래. 어머니가.”

혀와 혀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얽혔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일로델이 화들짝 눈을 뜨며 로건을 밀어냈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 살짝 웃음기가 남은 얼굴이 그토록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눈빛도 다정하게 녹아내렸다. 조금 전,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은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이런, 괘씸하고, 염치도 없고, 치사한 방법으로, 이런…….

일로델은 첫 키스를 빼앗긴 숫총각처럼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형제들과 살을 비벼댄 문란한 인간의 표본이 됐다. 실제 퍼스트 키스는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기분상으로는 비슷했다. 일로델이 경악과 혼란의 중간쯤에서 헤매는 사이 로건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또다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그러더니 인사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

일로델은 어안이 벙벙해서 로건의 뒷모습을 보았다. 끝인가? 이렇게 쉽게? 아, 쉽지는 않았지. 결과가 좋아서 망정이지 목숨이 오락가락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형도 자신을 놔주겠다 결심한 거다. 자신이 가는 길을 막지 못하는 거다. 죽어가는 자신을 안고 목소리를 떨며 괴로워할 정도로 끔찍한 경험을 했으니까….

순간 묘한 기분이 몰려왔다. 뒤끝이 개운하지 않고 마음이 영 이상했다. 그때 저벅저벅 걷던 로건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질리도록 봐왔던 뒷모습이 이제는 낯설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로건이 몸을 틀어 그를 보았다.

“말하는 걸 잊었군.”

아, 역시 쉬울 리가 없지. 일로델이 긴장해서 어깨에 힘을 주었다. 로건이 다정하게 웃었다.

“바다는 육지보다 햇볕이 뜨거우니 꼭 그늘에 있도록 해. 도착하면 안부 서신 정도는 보내 줄 수 있겠지?”

“…….”

“악마와 심해 사이를 조심하길. 안녕, 일로델.”

담백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로건이 방을 나섰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는 먼지 한 톨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온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일로델은 움직임 없이 멍하니 있었다. 지저분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어이가 없고, 기도 막히고, 화도 나는 것 같아서 소리라도 빽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분노할 대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뒤늦게 허무함이 몰려왔다. 바로 방금까지도 혼자서 안락하고 평온하게 지내던 방이다. 그런데 갑자기 홀로 내쳐진 것처럼 비참하고 쓸쓸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포도주 찌꺼기가 되어 텅 빈 와인 잔 속에 남은 기분이었다.

그게 뭐야.

일로델이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간혹가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행위는 잔잔한 밤이 새벽의 푸른 물결로 넘실거릴 때까지 반복되었다. 일로델은 바닥에 멍청히 주저앉아 활짝 떠오른 아침 해를 맞이했다.

*

하암.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이 터졌다. 처음엔 어디 안 좋느냐, 피곤하느냐며 걱정하던 헤롯도 이제는 입 좀 가리고 하품하라며 타박을 했다. 일로델도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고단함이 터져 나오니 제가 하품을 하는지, 깨어 있기나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도통 정신을 못 차리니 운동 겸 항구까지 걷자는 계획도 무산되었다. 일로델은 고급 세단 뒷좌석에 누워 입까지 헤 벌리고 단잠에 빠졌다.

그는 부우, 하는 뱃고동 소리에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넓은 차 안에 혼자였다. 애가 깨지 않게 운전하라며 못된 감독관처럼 굴던 헤롯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운전하던 운전사도 보이지 않았다. 적적한 느낌이 싫어서 일로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앞에 어제 보았던 거대한 함선이 있었다. 수많은 선원이 달려들어 돛과 그물을 팽팽히 펼쳤다. 그러자 배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크게 맥동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와.”

넋을 빼고 프리깃의 위엄을 감상하던 일로델이 정신을 차렸다. 마침 헤롯과 그녀의 일행도 배 근처에 있었다. 다른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듯했는데, 보기에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머뭇머뭇 다가가 보니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화려한 사령관 제복을 입고 부하들을 대동한 그는 아버지인 셰본이었다.

“헤롯, 제발 얘기 좀 들어. 지금 출항하기엔 시기가 안 좋아.”

“그러면?”

“도망친 야만인들 때문에 바다, 사막 할 것 없이 아수라장이야. 더구나 북부로 가는 바닷길은 놈들이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어. 뮬리 공작이 이송하던 군함을 탈취해서 설치니 나도 아주 골치가 아파. 당신도 알 만큼 알면서 왜 말을 안 들어?”

“내가 대공의 말을 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억지 부리지 마.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셰본이 엄격하게 말했다. 무거운 어조에서 제국의 대공이자 군의 총사령관의 깊은 연륜이 엿보였다. 아내에게 빌다가 총을 맞고 이마가 찢어진 남자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일로델은 낯선 아버지의 위압감에 멈칫했지만, 헤롯은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나를 바보로 봐. 놈들이 군함을 탈취해서 골치가 아프시다? 이송 군함이 몇 척이었지? 내가 모르는 200척의 무적함대라도 출동했나? 달랑 개조 상선 세 척을 못 잡아서 놈들이 바다를 점령하게 해?”

“군함도 군함이지만, 야만인들의 무력은 일반 군인을 뛰어넘어. 알잖아.”

“알지. 다 알지. 야만인을 놓고 벌인 너와 황제의 비밀스러운 약속도 알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

헤롯의 말에 셰본이 입매를 굳혔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나도 평화가 좋아. 정치질은 딱 질색이야. 그 점에서 네 계획은 옳았어. 야만인 때문에 소소한 피해는 입어도 정쟁으로 나라가 기우는 것보단 낫지. 하지만 네가 이용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일로델을 네 멋대로 써먹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멀리서 ‘밧줄을 묶어라, 밧줄을 묶어라.’ 하는 뱃노래가 들려왔다. 일로델은 헤롯과 셰본 사이에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셰본을 더 자주 본 것 같다. 어딘지 속을 알 수 없던 아버지가 당황한 모습이 몇 번을 봐도 어색했다. 당분간 그러고 있자, 헤롯이 갑자기 눈매를 세우더니 쓰읍, 하는 소리를 냈다. 눈치 없게 굴지 말고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어머니….”

일로델이 헤롯에게 터덜터덜 다가갔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거듭 생각하기도 지쳤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서 일로델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에 반해 헤롯의 눈매는 위로 바짝 치켜 올라갔다. 찍소리도 말라는 무언의 표시임이 분명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비키세요, 대공. 그대가 야만인을 무찌르지 못하겠다면 내게 전권을 넘겨도 좋아요. 세 척이든 삼백 척이든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나가겠다는 얘기야? 일로델을 데리고?”

“네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손 놓고 있던 일의 결과지. 아니면, 로건의 짓인가? 누가 됐든 야만인을 들끓게 해서 날 막아 볼 생각이었겠지만, 그런 잔꾀는 안 통해.”

커다란 대포알을 담은 수레가 땅을 울리며 지나갔다. 바다에는 해적 조무래기가 아니라 도시를 상대로 싸워도 승전할 20척의 무장 함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야만인은 조악한 핑계일 뿐이었다. 셰본도 잘 알고 있었다. 차마 이 얘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미안하지만 헤롯, 이 출항은 허락할 수 없어.”

“뭐라고?”

“혼자 나가겠다면 나는 당신을 막을 권한이 없어. 하지만 일로델은 대공 가문의 사람이야. 네 마음대로 거처를 결정할 순 없어.”

헤롯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셰본도 단호한 태도로 물러서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뭐 어떻다고 밖에 나왔을까? 그냥 안에서 잠이나 더 잘걸. 일로델이 울적한 시선을 바닥에 던졌다. 헤롯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나웠다. 그 느낌이 포악한 쌍둥이 동생이 떠오를 정도로 비슷해서, 일로델은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감히 네가 나를 협박해?”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나와 이혼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일로델은 못 데려가.”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면 그만 얘기해.”

사나운 기세와 달리 헤롯의 어조는 차분했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는 게 낫지, 칼처럼 대화를 단절하는 어머니는 무서웠다. 아마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셰본이 말문을 잇지 못하고 당황하더니 기운 없이 고개를 틀었다. 그의 완벽한 패배였다.

헤롯이 셰본에게 한 뭉치의 서류를 던지듯 떠안겼다. 그리고 일로델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잠 깼으면 그만 가자. 도대체 밤에 뭐 하다 이제야 자니?”

“그냥…. 잠이 안 오더라고요.”

“보나 마나 고민한다고 못 잤겠지. 하지만 잘 결정했어. 북부에 도착하면 내 집부터 소개해 주마. 하룻밤 자고 난 뒤엔 블루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고, 그다음 날엔 펭귄을 보러 가자.”

“펭귄요…?”

“열차로 이틀은 걸릴 거야. 그래도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지. 그다음엔 오로라를 보러 갈까?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얘기하렴. 이참에 열차를 타고 북부를 다 돌아보는 것도 좋겠구나.”

“…….”

일로델은 약간 기가 질렸다. 저택 구경도 좋고, 여행도 좋고, 다 좋은데, 어머니의 일정을 함께 소화하다간 지쳐서 몸져눕게 될 것 같았다. 하루빨리 체력을 길러야 한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부두까지 걷는 동안 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경례를 올렸다. 그들은 황실 친위대였다. 문득 낯선 세계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세계는 맞지. 북부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거니까. 정말 가는 건가? 어머니의 집을 구경하고, 열차 여행을 하고, 펭귄도 보고? 가는 도중에 야만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데 그건 괜찮은가?

어머니의 날쌘 추진력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북부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배를 타게 될 줄은 몰랐다. 밤을 꼬박 새우고 병든 닭처럼 졸다 보니 어느새 선박에 오르는 긴 계단을 앞두고 있었다. 부두 끝에 메리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배웅하러 나온 듯했다. 의사 가운을 벗은 메리는 명랑한 학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달려들더니 그… 매우 친밀한 이별의 인사를 나눴다.

“드디어 대공과 헤어지는 거죠?”

“그래.”

“잘됐어요. 그런 남자는 평생 홀아비로 살아야 해요. 이번에 북부로 가면 또 언제 오나요?”

“모르겠구나. 아마 당분간은 올 일이 없겠지.”

“너무해요…. 자꾸 그러면 저는 바람을 피울 거예요.”

“너도 이제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니? 이참에 건실한 아이를 소개해 줄게.”

“그 사람은 헤롯 님과 닮았나요?”

“최대한 맞춰 주마.”

“그럼 좋아요.”

메리가 헤롯의 뺨에 짧게 키스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다가와 건강히 지내고 또 보자며 상냥하게 포옹했다. 일로델은 의연하게 웃으며 화답했지만, 속으론 진땀을 뻘뻘 흘렸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긴, 부모님의 자유로운 연애사 같은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그냥 모르는 채 사는 게 좋았다.

조심조심 높은 계단을 올라 갑판에 섰다. 커다란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그 가운데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제복을 입은 셰본은 서류 뭉치를 들고 허망하게 서 있었고, 메리는 갑판을 따라 달리며 손을 흔들었다.

더운 바람이 불자 삐걱삐걱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돛이 활짝 펼쳐지는 소리였다. 선미에서 ‘닻을 올려라!’ 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바닥이 울렁울렁 흔들리며 선체가 조금씩 조금씩 뒤로 움직였다.

옆에서 헤롯이 들뜬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샴페인 병이 한 번에 깨졌다, 출항의 길조라는 둥 설명하는데 이상하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로델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지는 부두를 보았다. 멍청하게 선 아버지, 즐겁게 소리치는 메리, 모자를 흔드는 별장지기와 하인들, 길 가다 멈춰서 같이 환호하는 행인, 물건을 싣고 내리는 뱃사람과 가격을 흥정하는 상인들까지….

“…….”

낯선 풍경이지만 무섭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지금 본 것을 빠짐없이 그려내라 해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만큼 샅샅이 관찰했지만, 어디에도 로건과 티베인의 모습은 없었다.

좋은 것 아닌가? 그는 밤새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항구를 훑어보는 눈길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남부였다. 되도록 긴 시간 동안 보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는 눈이 빠져라 보고 또 보았다. 하도 보았더니 부둣가에 누가 새로 오고 나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도시가 멀어져 점이 될 때까지도 록퍼스 가문의 두 형제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

총 스무 척의 무장 함대가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자 배를 향해 신나게 환호하던 행인들이 하나씩 흩어졌다. 끝까지 모자를 흔들던 별장의 식솔들도 즐거이 떠들며 자리를 떴다. 메리는 아쉬운 듯 주변을 맴돌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대공의 무리를 스쳐 지나갈 때 일부러 들으라는 듯 킥킥 웃었다.

메리마저 떠나자 항구는 평소의 풍경을 되찾았다. 아직 남아 있는 셰본을 사람들이 흘깃거리다 매서운 군인들의 눈총을 받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참모가 안경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다음 명령을….”

셰본이 휙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을 본 참모가 입을 다물었다. 특별히… 상심해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셰본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참모는 잠시 생각하다가 셰본이 들고 있는 서류를 눈짓했다.

“도장은 찍으셔야 할 겁니다.”

“누가 뭐랬나?”

셰본이 뚱하니 말했다. 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무얼 하면 됩니까?”

“뭐겠나?”

모르니까 묻는 거 아냐. 참모가 능구렁이 같은 상사를 눈으로 욕하던 그때였다. 지축을 흔드는 엔진 소리와 함께 수십 대의 군용 차량이 항구로 들어섰다. 거친 운전에 젖은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겁을 먹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실톤은 대규모의 항구 도시이다 보니 무장 군인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위풍당당하고 고결한, 그야말로 제국을 지탱하는 군부의 위엄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이렇듯 다 쓸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작태는 셰본조차도 처음 보았다. 그는 씁쓸한 입맛을 쩝 다셨다.

“출항을 준비해. 프리깃 급 함선에 무장도 하고, 물자도 넉넉히 싣고.”

“항해 일수는 어느 정도로 잡으면 됩니까?”

“나도 모른다네.”

참모가 말없이 안경을 잡아 올렸다. 대답 좀 제대로 하란 표시였다. 셰본은 귀찮은 듯 외면했다. 딱딱한 군홧발 소리가 여럿 모여 그를 스쳐 지나갔다. 평온했던 항구에 삼엄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셰본은 울적하게 이혼 서류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

끼룩끼룩.

갈매기 떼가 배 위를 지나갔다. 일로델은 반짝 하늘을 봤다가 다시 난간에 턱을 괬다. 첫 항해는 정말이지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멀리서 굽이치는 돌고래 떼를 보았을 때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가면 갈수록 망망대해뿐이니 괜히 기분만 처졌다. 가끔 지나가는 갈매기만 보아도 반가울 수준이니 말이다.

“뱃사람 중에도 간혹 있지요. 배만 타면 울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푸른색만 보아도 우울하다고 얘기하지요.”

“그래? 몰랐네.”

“죄, 죄송합니다. 감히 가르치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삼가겠습니다.”

갑자기 왜 저래. 울적한 속을 털어놓던 일로델이 영문을 모르고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정말 몰라서 몰랐다고 한 말을 비꼬는 투의 질타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말동무랍시고 붙어 있는 헤롯의 부하였는데, 자신을 너무 어려워해서 편한 대화를 이어 가기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배의 선장이나 선원들도 모두 자신을 어려워했다. 서로 간의 태도도 무척 딱딱했다. 처음 구경한 배에서 본 사람들은, 알고 보니 호위 함대의 구성원으로 기함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있는 듯했다. 차라리 거기가 좋았는데. 하지만 마음이 그렇단 거지, 그리 가겠다 떼를 쓸 만큼 경우가 없진 않았다. 어머니는 승선하고 나서도 부하들을 지휘하느라 바빴다. 도대체 안 하는 일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때 파도가 강하게 치며 배가 크게 흔들렸다. 가끔 돌풍이 불 때마다 이렇게 요동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헤롯의 부하가 급히 일로델을 데리고 안전한 지하로 내려왔다. 위에서 선원들이 뛰어다니며 “악마를 조심해라, 악마가 긁히면 안 돼!” 하며 소리쳤다. 흔들림이 가라앉고 나서야 그는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마침 일로델을 찾고 있던 헤롯이 재빨리 다가왔다.

“괜찮니?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오늘따라 돌풍이 심하구나. 그래도 북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얘기야. 남부와 기온 차이가 있다 보니 중간 지점만 오면 날씨가 변덕을 부리거든. 날도 어두워지고 있으니 그만 선실로 들어가자.”

헤롯이 일로델을 이끌고 갑판 위의 선실로 들어왔다. 그곳은 특이하게도 두 방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는데, 각각 함장실과 선장실이라 쓰여 있었다. 당연히 헤롯은 함장실을, 일로델은 선장 대신 선장실을 썼다. 자기 방을 잃은 선장에겐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도 부선장실을 빼앗아 쓰고 있다고 하니, 제일 안타까운 건 항해사들과 쪽잠을 자는 부선장일지도 모르겠다.

선장실로 들어가려던 일로델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헤롯이 왜 그러냐며 돌아보았다.

“어머니, 악마가 뭐예요?”

“악마? 신자가 말하는 사탄 말이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일로델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잊고 있던 말인데, 아까 선원들이 악마가 어쩌고 떠드는 바람에 떠오른 것이다.

“악마와 심해 사이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어요. 배와 관련 있는 뜻인가요?”

“악마와 심해 사이?”

별로 안 좋은 뜻인 걸까…. 헤롯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악마와 심해 사이를 조심하라. 로건이 찾아온 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말이었다. 축복까진 바라지도 않을 테니 좀 정상적인 의미였으면 했다. 일로델이 대답이 나오려는 헤롯의 입을 예의 주시했다.

“배의 겉면을 위험한 악마라고 표현해. 항해 중에 선체가 긁히면 수리를 해야 하는데, 선원들이 밧줄을 타고 틈을 메우다가 바다에 빠지기도 하거든. 아마 그걸 표현한 것 같구나.”

“자주 쓰는 말은 아니에요?”

“글쎄, 저들끼리는 쓸지도 모르지. 하지만 농담이어도 불쾌하군. 바다에 빠지는 걸 조심하라는 소리가 아니냐?”

일로델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설명을 종합해 보면 아마 그런 뜻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사도 아니고 축복은 더욱 아니다. 앞으로 바다에 나갈 사람에게 바다에 빠지지 말라는 소리는 차라리 저주 같은 발언이었다. 헤롯이 불쾌한 듯 혀를 크게 찼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심보가 고약한 녀석이군. 어디서 들었지? 설마 우리 배의 선원이냐? 감히 항해 중에 불운한 소릴 내뱉다니, 혼쭐을 내야겠어.”

역시 좋은 소린 아니었구나. 일로델은 침울함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랐다. 그는 펄펄 화를 내며 선실을 뛰쳐나가려는 헤롯을 뜯어말렸다.

“아니, 아니에요. 오다가, 항구에서 들은 거예요.”

“평민들 말이냐?”

“네? 네, 아, 아마도….”

“질 낮은 말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좋은 얘기만 들어도 모자랄 신분에, 평민들 하는 소리는 왜 듣고 있단 말이야?”

헤롯이 쯧쯧쯧쯧, 하며 그를 째려봤다. 그러더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쉬라며 함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일로델은 뻘쭘하게 서 있다가 선장실로 들어왔다. 조그만 방은 저택이나 별장처럼 화려하고 안락하진 않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 참고 지낼 만은 했다. 그는 딱딱한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좋은 얘기만 들어도 모자랄 신분이라. 참으로 마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머니, 신분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세상 누구보다 우아하고 고귀해 보이던 사람이 떠올랐다. 세상 누구보다 야만스럽던 놈도 같이 떠올랐다. 갑자기 가슴을 채우는 갑갑함이 밀어닥쳤다. 일로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후두둑, 빗방울이 갑판을 적시는 소리가 아득하게 귓가를 스쳤다.

*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다는 하늘과 해수면의 구분이 없는 막막한 어둠 그 자체였다.

‘해적이다! 해적이다아!’

선박 망루에서 주위를 살피던 선원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때마침 번개가 하늘을 쩌적 가르며 온 세상을 비췄다. 짙은 실루엣이 빠른 속도로 기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펄럭이는 검은 돛과 뾰족한 선체. 노예들에 의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노. 해적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갤리선이었다.

‘포격!’

기함에서 내려온 명령에 호위 함대가 대포를 쿵쿵 쏘아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해적선은 포를 정면으로 맞고도 침몰하지 않았다. 선원들이 우왕좌왕 갑판을 뛰어다녔다. 일로델 역시 깜짝 놀라서 선실 문을 열었다. 때마침 헤롯과 친위대들이 뛰어왔다.

‘일로델! 어서 안으로 들어가렴. 어서!’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해적이 나타났다는구나. 아주 악명 높은 놈들인 모양이야. 이 어미와 안에 있자.’

친위대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계십시오.’ 하고 늠름하게 말하며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고전하던 친위대도 하나둘 쓰러졌다. 해적들이 그들을 내던지고 선실 문을 발로 찼다. 얄팍한 문짝이 나가떨어지고, 헤롯이 놀란 듯 소리쳤다. 일로델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머니의 비명을 듣자 갑자기 용기와 분노가 마구 솟구쳤다.

‘이얍!’

일로델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해적들을 내리쳤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놈들이 종이짝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두 번 휘두르면 뒤에 있는 놈들까지 휙휙 날아갔다. 유령을 베는 것처럼 아무 느낌도 안 나고 피도 튀지 않았다. 이건 좀 이상한데?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일로델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검을 휘둘러댔다. 그러다 삐걱 문을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로델. 이리 나오렴.”

헤롯이 선원실 문을 열고 손짓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엄격했다. 어머니는 원래 엄격했지…. 일로델이 비몽사몽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언뜻 보니 문틈으로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싸움판의 전사가 아니라, 아침에 늦게 일어난 잠꾸러기였다. 일로델이 허겁지겁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그러다 잠옷 차림인 것을 확인하고 머뭇거렸다.

“여기, 내 아들이 입을 가운을 가져와. 바로 근처에 있을 테니 입고 나오거라.”

헤롯이 딱딱하게 말하고 선실을 빠져나갔다. 곧바로 하인이 들어와 그에게 가운을 입히고 허리의 띠를 단단히 둘러주었다. 그 손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로델은 어머니가 또 분노할 일이 있었나 보다, 하며 태평한 생각을 했다. 누가 혼날지는 몰라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으니 근심 걱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니지, 늦잠을 잤잖아. 뒤늦게 죄가 떠오른 일로델이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일동, 자리로!”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선원들이 차례로 갑판 가장자리를 둘러쌌다. “저격수, 발포 준비!” 또다시 외침이 이어지고, 선원들이 장총을 꺼내 바다를 겨눴다. 한 치의 빗나감 없는 움직임이 흡사 기계 같았다. 무슨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일로델은 어안이 벙벙해서 갑판 최상층에 올라 있는 헤롯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일로델, 이 어미 뒤로 오너라. 내 곁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해.”

“네?”

“혹시라도 돌아다니다 넘어지면 크게 혼낼 것이니 알아 두거라. 배가 좀 흔들릴 테니 거기 아무거나 잡고 있어.”

일로델은 얼떨떨했지만, 어쨌거나 헤롯이 하라는 대로 했다. 선미와 연결된 사다리를 잡으려다 지저분해서 그 옆의 밧줄을 잡았다. 바닥과 연결된 밧줄 같았는데 쓰임새는 몰라도 단단하긴 했다.

계속되는 호령과 외침 속에서 일로델은 헤롯의 등만 멀뚱멀뚱 봤다. 묘하게 낯선 느낌이 났다. 늘 가벼운 제복 차림이던 헤롯이 긴 코트까지 빈틈없이 착복하고 서 있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친위대원과 같은 복장이었다. 일로델은 슬슬 불안함이 몰려드는 걸 느끼며 헤롯에게 물었다.

“어머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전투 준비 중이란다. 해적이 오고 있다는구나.”

헤롯이 덤덤하게 말했다. 일로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적? 갑자기 뭐지. 아직 꿈에서 덜 깬 건가? 그때 멍청한 생각을 비웃듯 쾅, 하는 굉음이 터졌다. 대포 소리였다.

“반응이 어떻지?”

“포격에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바람을 받아 더 빠르게 다가옵니다!”

“선박 수는?”

“총 세 척, 야만인 우두머리 이송 중 빼앗긴 캐럭으로 보입니다. 지시를!”

헤롯이 화난 듯 발을 크게 굴렀다. 셰본 어쩌고 중얼대는 것을 보니 아버지 욕을 하는 듯했다.

“인정사정 봐줄 것 없다. 군함은 되찾지 않아도 좋으니 야만인들을 빠짐없이 몰살해라!”

“네!”

기운찬 함성이 선체를 뒤흔들었다. 열다섯 척의 프리깃이 대열을 갖춰 뒤로 물러나고, 나머지 네 척의 전열함이 기함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섰다. 헤롯과 일로델이 탑승한 기함은 3층 갑판에 104문의 함포를 장비한 최상급 전열함이었다. 단순히 크기만 비교해도 조르르 달려드는 캐럭 세 척 정도는 가볍게 깔아뭉갤 만큼 거대했다.

해적이 온다는 소리에 긴장했던 일로델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이어서 민망함이 몰려왔다. 꿈과 현실이 이렇게나 다르다. 꿈에서 우왕좌왕하던 선원들은 날카로운 저격수가 되어 있었고, 수십 명의 친위대는 헤롯과 논의를 주고받으며 그녀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현실의 그는 잠옷에 가운 차림으로 최후방에서 보호를 받는 처지였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꿈 중에 그런 꿈을 꿔서는. 영웅전에서 접했던 해전에 대한 조악한 상상력과 어머니를 지켜 주겠다는 깜찍한 이상이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그래, 누가 아는 것도 아닌데 뭐. 무덤까지 비밀로 갖고 가면 되지….

“보고합니다. 전방에서 해무가 몰려옵니다. 범위는 꽤 넓습니다.”

“이놈의 북부 기온이 또 말썽을 피우는군. 일로델! 곧 안개가 끼니 놀라지 말고 있거라.”

해적보다 안개가 더 놀라운 일이었구나. 일로델은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얌전히 끄덕였다. 그에게서 민망해하는 기색을 읽은 부하가 “차라리 안으로 모시는 것이….” 하며 운을 뗐으나, 헤롯이 “안 돼. 내 눈에 보여야 안심이 돼.” 하며 칼같이 거절했다.

그사이 자욱한 안개와 더불어 세 척의 캐럭이 눈에 보일 만큼 다가왔다. 쾅, 소리를 시작으로 커다란 포성이 줄지어 터졌다. 400발에 가까운 포격을 한 몸에 받은 캐럭이 갈가리 찢기듯 파괴됐다. 다음 포탄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세 척 모두 그 자리에서 침몰했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지만, 다들 당연한 결과인 듯 환호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죽이며 바다를 주시했다. 뒤로 물러났던 프리깃이 앞뒤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서로 다리를 이으며 백병전을 준비했다.

“놈들이 여기까지 올까요?”

“황제의 누이인 내가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오겠지. 인간에게 잡혔다가 도망쳤으니 그 굴욕이 오죽할까. 이참에 어떻게 생겼는지나 구경해야겠다.”

헤롯의 부하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로델은 빠르게 몰려오는 해무를 바라보았다. 순백의 하얀 안개는 산등성이에 구름이 낀 듯 신비로웠다. 그것에 시선을 뺏긴 찰나, 사방에서 조총 소리가 탕탕 터졌다. 멀리 비명이 울렸다. 일로델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헤롯은 그를 돌아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안 돼. 역시 눈에 보이는 게 낫겠어.”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에 혼자 두자니 불안하고, 옆에 두자니 참상을 목격할 아이가 신경 쓰인 것이다.

아니지. 일로델은 다 자란 어른이야.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활어처럼 튀어 오르는 야만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총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도 꿋꿋이 기함으로 난입했다. 순식간에 갑판 1층이 난투에 휩싸였다.

다 커서 군인이 되고도 남았을 나이이니, 참상 좀 목격해도 문제없겠지. 헤롯이 3층까지 날 듯이 뛰어오른 야만인의 목을 잡고 꺾었다. 난전 중에도 우득, 하는 소리가 널리 퍼졌다. 그러자 야만인 중 하나가 헤롯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가리키며 꽥 소리쳤다.

“황제다! 인간 우두머리다!”

“오호라, 저것들이 말도 하는구나. 하지만 잘못 배운 모양이야. 나는 황제가 아니다.”

“아니, 맞다! 너는 우두머리다! 잡아서 산 제물로 바치자!”

야만인들이 우우우우, 하며 발을 굴렀다. 친위대에 둘러싸인 일로델에겐 그 광경이 보이지 않았다. 참상이고 뭐고, 애초에 보이질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끔 덩치 큰 그림자가 날아들었다가 금방 잡혀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끝이었다. 그가 뭐라도 좀 보려고 기웃대고 있을 때였다. 키가 큰 야만인 하나가 가운 차림의 일로델을 발견하고 가리켰다.

“인간 우두머리의 애인이다! 인간 우두머리가 애인을 또 바꿨다!”

“뭣이?”

헤롯이 발끈했다. 야만인들이 켁켁 웃었다. 놈들은 말이 서투를 뿐, 그녀에 관해 알고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녀에게 정부가 많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이 코웃음을 치며 “무식한 것들. 얘는 내 아들이야!” 하며 가슴을 쭉 폈다. 그 태도가 어찌나 당당한지 일로델은 민망함에 그만 얼굴을 가렸다.

난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날고뛰는 야만인들이어도 쪽수에는 어쩔 수 없어서 잡히기 전에 바다로 뛰어들거나 끝까지 저항하다 포박되었다. 아군의 피해는 자잘한 부상자 외엔 없다시피 했고, 죽어 나뒹구는 시체는 전부 야만인들이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때였다. 소리 없이 해무가 몰려왔다. 전투 앞에서도 의연하던 선원들이 불길한 자연현상에 긴장하며 두리번거렸다.

“내가 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너희는 당황하지 말고 옆에 있는 자를 확인하라!”

하얀 안개 속에서 헤롯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살피며 때때로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일로델은 저 잘 있어요, 하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한숨을 푹 쉬었다.

차라리 선실에 들어가 있겠다고 할 걸 그랬다. 이건 완전히 짐 덩어리가 아닌가. 자신의 이상이 현실을 웃도는 수준이란 건 꿈을 통해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도움이 안 될 줄 몰랐다. 그럼 주제에 뭘 바란 거지. 꿈에서처럼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나?

절로 헤식은 웃음이 흘렀다. 검을 배우겠다고 하면 들고 일어날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 티베인은 좋다고 할까? 그놈은 옛날부터 자신에게 공부 좀 하라며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꼭 배우고 싶다면 제가 알려 줄 수도 있다며 거들먹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려는 수작이었겠지만, 당시에는 고깝다 못해 꼴도 보기 싫었다.

형은 어떨까. 체력 단련용으로는 허락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하든지 무관심할 테고 어머니는 명백히 싫어하겠지…. 이토록 알기 쉬운 관계가 그땐 왜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푸른 모래가 휘날리는 사막의 오후, 형이 자신을 안고 ‘복잡한 아이가 되었다’며 중얼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 말이 맞았다. 자신은 복잡한 인간이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복잡해져 갔다. 신나게 실을 엉켜놓고는 왜 이렇게 됐냐며 한탄하다가 억지로 잘라낸 꼴이 되었다.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바라는 거야 단순하지 않은가? 어머니를 지키고 싶다. 밉긴 하지만 아버지도, 형도, 동생도 지키고 싶다. 소중한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었다. 그들을 도와주고 아끼고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이 지금 어떻게 되었나. 이 축축한 안개비처럼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녹아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

배만 타면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자신의 이야기가 맞나 보다. 평생 뱃사람은 못 되겠어. 일로델이 쓰게 웃으며 발장난을 할 때였다. 순간 그는 멈칫했다. 뒤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언뜻 배가 물살에 흔들리며 내는 비명과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바로 발밑에서 난 소리 같았다. 짧은 찰나 등골이 오싹했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려는 그때, 털이 부숭부숭한 손바닥이 입가를 세게 틀어막았다.

“……!”

마침 해무의 한중간이었다. 안개가 깊어지자 선원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리고, 그들을 독려하는 헤롯의 힘찬 외침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일로델은 희미하게 보이는 헤롯의 실루엣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실루엣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는 야만인의 괴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다가 한곳에 멈춰 섰다. 느낌상 난간 근처인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일로델이 손을 들어 야만인을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야만인은 끄떡도 없이 그를 번쩍 안더니 안개 가득한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작은 물소리에 귀가 좋은 선원 하나가 재빨리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악마의 입김 같은 해무가 걷혔을 때 일어났다. 대공 가문의 차남이자 헤롯의 금쪽같은 아들이 실종되어 비상사태가 내려진 것이다.

*

『어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야만인들의 언어를 배워가고 있어요. 재밌는 표현이 있다면 ‘우가우가’랍니다. 그들은 ‘우가우가’로 모든 의사를 전달해요. 솔직히 너무 미개한 것 같아서 틈틈이 제국어 교육을 시도하고 있어요. 하지만 머리가 나쁜지 ‘우두머리’라는 말밖에 모릅니다. 저는 왜 이곳에 있을까요? 말도 안 통하는 야만인들과 있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 로건 형, 티베인, 보고 싶어….』

일로델은 서신을 쓰다가 서러움에 엉엉 울었다. 갑자기 식도가 콱 차오르더니 입 밖으로 물이 줄줄 흘렀다. 사방에서 오오오, 하는 괴상한 환호가 터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양옆으로 나부끼고 어지러움을 느낄 때마다 입과 코에서 물이 쏟아졌다. 눈물도 계속 흘렀다. 그는 야만인에게 거꾸로 들린 채 바닷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욱…. 그만, 그만해, 야만인 놈들아, 윽….”

일로델이 몸부림치자 야만인이 그를 바닥에 털썩 내려놨다. 일로델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정신없이 기침했다. 아직 위장에 바닷물이 남았는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그때 웬 놈이 그의 입을 잡고 벌리더니 쓰디쓴 약물을 마구 처넣었다. 일로델은 기도를 남실남실 간지럽히는 약물을 죽자 사자 식도로 넘겼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먹은 것이었다.

“윽…. 뭐야,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우으으….”

순간 속이 울컥하더니 남아 있던 바닷물이 약물과 함께 토해졌다. 그러자 야만인들이 좋다고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일로델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서 드러누웠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이 빙빙 돌아서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이 들기 전, 잠깐 보았던 꿈인지 환상인지 너무나도 생생했던 서신이 떠올라 힘껏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있는 곳은 좁고 길쭉한 배 위였고, 눈앞에는 스무 명쯤의 야만인이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바다에 빠지기 전 자욱했던 안개는 온데간데없고, 햇빛이 쨍쨍한 맑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낯설고 지저분한 배, 그리고…. 아무리 둘러봐도 야만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놈들에게 잡혔을 때 이렇게 되리라 각오는 했다. 사자 굴에 들어가도 사자 수염을 잡으라 하지 않던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낸디, 살았다.”

“네놈들. 나를 어쩔 셈이야?”

“낸디, 말을 한다. 화가 났어.”

놈들이 켁켁켁 웃었다. 웃는 소리도 이상하고, 생긴 것도 털 많은 짐승 같고, 그들에게서 풍기는 악취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야만인들이 저들끼리 이상한 말을 주고받으며 일로델을 손가락질했다. 일로델이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놈들이 또 웃었다. 개중에서 그나마 털도 거의 없고 옷만 제대로 입으면 인간처럼 보일 법한 야만인이 다가왔다. 일로델이 화들짝 눈을 돌렸다. 야만인 여자인 듯한 그녀는 망측하게도 가슴을 훤히 드러낸 차림이었다.

“낸디, 아주 예뻐. 만지고 싶어.”

“뭐, 뭐야? 미개한 것이 감히 누굴 만지겠다고…. 저리 가. 나는 낸디가 아냐.”

“사랑하는 동물. 예쁜 낸디, 이거 줄까?”

그녀가 녹색의 물체를 건넸다. 아이 주먹만 한 에메랄드였다. 이 야만인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일로델은 어이가 없어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얌전하다. 보드랍고 예뻐. 낸디, 우리가 키워.”

“안 돼.”

야만인들 뒤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놈들이 우우 길을 비켜섰다. 그 사이로 거대한 덩치에 털이 덥수룩한 야만인이 걸어 나왔다. 일로델은 놈이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자신을 납치한 천하의 악종이었다. 일로델은 벌떡 일어나 원흉을 노려봤다. 놈도 희고 괴괴한 눈알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데리고 가지 않는다.”

“왜!”

“이것은 상품이다.”

여자가 아쉬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나긴 아쉬운지 일로델의 뺨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나 작은 동물을 귀여워하는 손길과 비슷했다. 일로델은 기가 막혀서 마냥 당하고 있다가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상품이라니, 무슨 뜻이지?”

“너는 거래할 물건이다. 나는 약속의 조건으로 너를 옮기기로 했다.”

“어디로?”

“북쪽의 땅이다.”

북쪽의 땅이라면, 북부인가? 약속의 조건으로 자신을 옮긴다는 말은 누군가 사주한 사람이 있단 얘기다. 거래 상대는 누구지? 설마, 황제?

다른 곳도 아닌 북부가 도착지라면 황제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잊고 살았지만, 그건 남부에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시탐탐 대공 가문의 권력을 넘보고 누이의 영향력을 시기하는 황제에게 일로델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혼인, 교육, 발령. 그를 황궁에 묶어둘 구실은 차고 넘치며, 그 순간 그는 볼모가 되어 대공 가문을 옭아매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일로델은 끔찍한 상상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놈들은 이송 중 도망친 야만인들이다. 바다로 나오기 전까지 저택 지하에 갇혀 있었다. 누가 황제의 사주를 전달한단 말인가? 무도회가 열리고 많은 손님이 드나들었어도 지하 감옥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녀 전하, 로건, 셰본,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 외엔 없었다.

설마 또 아버지가…? 하지만 아버지는 출항을 뜯어말리다 기어코 어머니를 화나게 만들지 않았던가. 연기였나? 아, 모르겠다…. 일로델이 복잡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옆에서 여자 야만인이 “낸디, 우리와 가자.” 하며 은근히 구슬렸다. 차라리 그러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야만인 놈이 엉뚱한 소릴 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뭐…?”

“그자는 매우 사악하다. 뱀의 혀를 가진 교활한 악당이다. 그자는 나의 안전을 약속했고 그것은 지켜졌다. 하지만 나의 많은 가족이 죽었고 우리는 비탄에 빠졌다. 이것은 잘못된 약속이었다.”

야만인이 분노한 듯 짐승처럼 목을 울렸다. 일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저들끼리 떠들며 시시덕대던 놈들도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옆에서 ‘낸디, 낸디.’거리던 여자도 머뭇머뭇 물러났다. 그들의 눈에서 깊은 거부감이 느껴졌다. 마치 무형의 물질이 몸을 툭툭 밀치는 기분이었다.

그래 봐야 지저분한 야만인들일 뿐이지.

일로델은 개의치 않고 원흉을 노려보았다. 놈은 다른 누구보다 덩치도 크고, 털도 많고, 이상하게 생겼고, 제국어도 제법 하고, 무엇보다 다들 따르는 눈치였다. 슬슬 느낌이 왔다. 이놈이 바로 야만인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베일에 싸여 있던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말이다.

로건.

티베인은 애초에 거래라는 걸 모르는 놈일 테니 제쳐두고……. 저런 꿈에 나올까 무서운 해괴한 생물과 거래를 하고, 조롱하듯 약속을 이행할 만한 인물은 세상을 뒤집고 찾아봐도 로건뿐일 것이다.

로건. 티베인.

나의 형님, 나의 동생.

불씨가 반짝이듯 떠오른 단어들이 젖은 몸을 따뜻하게 휘감았다. 묘한 안도감이 전신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마치 두 사람이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해서 일로델은 의연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적대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야만인들을 향해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약속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건 당신 탓이야.”

“맞다. 약속은 지켜졌다. 하지만 내가 바란 것과는 다르다. 식사도 맛이 없었다.”

식사는 무슨 놈의 식사? 이 야만인 놈이 말로 안 되니 트집을 잡는구나. 일로델은 이를 꽉 악물었다. 이곳은 사자 소굴이다. 등을 보이는 순간 물려 죽을 것이다.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어쨌든 지켜졌다면 대장부답게 인정해.”

“아니다. 약속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잘못된 약속을 해서 화가 나니까, 나를 해, 해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주 살짝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일로델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사자 수염이 아니라 놈의 털을 다 뽑아버려도 모자랄 판에, 이 머저리 같은 놈. 그가 자학하는 사이 야만인 우두머리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족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너를 죽이면 우리는 멸족한다.”

“…….”

“나는 너를 수탈한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북쪽으로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복수다.”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건데…. 일로델이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야만인 우두머리가 손을 들어 배가 향하는 쪽을 가리켰다. 끝없이 넓은 수평선이 펼쳐진 바다였다. 그 중간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솟아 있었다. 언뜻 돌고래 같은 바다 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다가갈수록 그림자의 정체가 선명해졌다. 노란 해변 위에 야자수 몇 그루가 생색내듯 올라서 있는 작은 섬….

아니, 그냥 조그만 모래더미였다.

“…….”

일로델은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곳에 다다라 떠밀리듯 땅을 밟았을 때도 계속 웃었다. 배 위에서 야만인들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실성한 놈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럼 제정신일까? 도저히, 이해 불가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꿈도 이렇게 허무맹랑한 꿈은 안 꾼다. 내면의 부끄러운 이상을 드러내면 드러냈지, 평생 이런 어이없는 개꿈은 처음이었다. 빨리 깨자. 이런 시시해 빠진 꿈…. 차라리 눈뜨고 나니 별채의 천장이 보였으면 좋겠다. 수갑에 묶여 티베인의 개소리를 듣는 게 낫겠다. 형의 시커먼 속내를 깨닫고 기겁하던 어느 날이 그리운 것도 같았다.

“안녕, 예쁜 낸디. 잘 가….”

여자 야만인이 불길한 여운이 넘치는 인사를 남겼다. 순간 일로델이 웃음을 뚝 멈췄다. 그는 필사의 기운을 발휘해 야만인 놈들 배에 기어올랐다. 그러나 놈들이 ‘쉿, 쉿.’ 뱀 쫓는 소리를 내며 그를 내쳤다. 해변을 데굴데굴 구르던 일로델이 발딱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야만인들이 노를 꺼내 위협하듯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노를 저으며 멀어져 갔다.

“기다려, 이런 곳에 혼자 두면, 죽으라는 얘기잖아. 나를 죽이면 멸족당한다며. 이 무식한 야만인 놈! 빨리 나를 배에 태워!”

“너를 죽이는 건 우리가 아니라 태양과 굶주림이다. 그리고 다시 싸움을 걸어오겠다면 물러나지 않겠다. 우리는 거룩한 바다 사막의 전사들이다!”

“자, 잠깐만….”

야만인들은 저들끼리 사기를 높이며 우우우, 하며 합창을 해댔다. 일로델은 숫제 울먹이며 손을 뻗었다. 그사이 배는 속도를 받아 쭉쭉 나아갔다. 방향도 돌리지 않고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거라곤 잔잔하게 물결치는 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눈 부신 태양…. 뭐 없다. 눈앞의 세상을 단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로델은 큰 충격을 받았다.

“…….”

하늘 높이 뜬 해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위대한 인간이든, 미개한 야만인이든, 햇빛의 풍요로움에 감사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순간 일로델은 태양이 가장 저주스러웠다. 그는 뜨거운 빛이 닿지 않는 야자수 밑으로 기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엔 침대도 없고 하다못해 마룻바닥도 없지 않은가? 곧 죽어도 더러운 모래 위에 눕고 싶진 않았다.

일로델은 멍하니 무릎을 감싸고 발밑을 보았다. 보드라운 모래사장 위로 바닷가재가 뽈뽈뽈 지나갔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갑자기 뒤꼭지에 열이 확 올랐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안 돼! 나를 데려가! 미개한 야만인 놈들, 차라리 북부로 데려가란 말이야! 적어도 사람이 있는 곳에 데려다줘….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머니, 아버지, 형님, 살려 줘요! 티베인! 티베이이이인!”

일로델은 해변을 내달리며 빽빽 소리쳤다. 섬이라고 쥐똥만 해서 5분도 되지 않아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밀빛으로 가득한 섬 중간에는 야자수와 열대 식물이 옹기종기 모여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럼 뭘 하나? 여긴 지옥이다. 포유류의 흔적조차 없는 끔찍한 무인도였다.

광인처럼 뛰어다니던 일로델은 어느 순간 모랫바닥에 철퍼덕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일로델은 눈을 뜨자마자 마실 것을 찾아 헤맸다. 마침 조그만 야자수가 있어 야자열매를 땄다. 하지만 껍질이 어찌나 질긴지 도저히 손으로 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동그란 자갈 하나를 주워 야자를 퉁퉁 두들겼다. 넋이 나가서 계속 두들기기만 했다. 운 좋게 야자가 쩍 벌어지고 그는 허겁지겁 갈증을 채웠다. 그러자 이번엔 빵과 고기를 달라며 빈속이 꼬르륵 울어댔다. 철딱서니 없는 위장을 부여잡으며 일로델도 함께 울상을 지었다.

좋아….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낙태에 쓰이는 독초를 먹고 깨어나니 어머니의 별장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북부로 가자고 하였고, 웬일로 선택권을 주었다. 선택이란 참 어려운 문제였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에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티베인이 길 잃은 멧돼지처럼 별장에 난입한 그날,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비록 금수라지만 키우던 동물을 버리는 무책임한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저런 녀석을 놓고 가면 벌을 받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북부행을 결심했다. 티베인은 동물이 아닌 사람이며, 자신의 동생이고, 형 로건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떨어져서 생각해 보는 게 정답일 수 있었다. 아닌 말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북부가 어떤 곳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배도 타 보고 싶었고, 바다도 실컷 구경해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펭귄도 궁금했다. 얼마나 잘난 녀석인지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그래.

처음에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욕심이 컸다. 그러다 담백하게 안녕을 고하고 떠난 로건의 태도에 다소 빈정이 상했다.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을 내키는 대로 휘두르다가 뒤늦게 선택을 존중한다며 물러나면, 뭐 좋아할 줄 알았나? 그 와중에 바다를 조심하라는 둥 불길한 소리나 하고, 차라리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렸으면 한 번쯤 재고를 해봤을지도 모른다. 음모 그만 꾸미고, 협박 그만하고, 의리 없는 야만인과 약속 따위도 하지 말고, 떳떳하게 고백해왔다면…. 글쎄, 그것도 고민은 좀 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 직면하진 않았겠지.

그래도 해방감 하나는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모랫바닥에 뒹굴고 원숭이처럼 야자를 따 먹어도 흉보는 사람 하나 없다. 아카데미 성적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몸단장도 필요 없다. 홀딱 벗고 뛰어다녀도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 티베인 놈이 없다. 늘 어디선가 느껴지던 형의 시선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토록 궁금했던 자유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

일로델은 쓸쓸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바다를 보았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부두에 저렇게 생긴 것이 많았었지…. 일로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움직이는 물체에 집중했다. 멀리서 봐도 작고 조악한 배였다. 돛도 아닌 하얀 깃을 내건 어선이었다. 가녀린 몸체로 호젓하게 바다를 횡단하고 있었다.

일로델은 홀린 듯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걸로는 모자란 것 같아서 가운을 벗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했다. 바닷가까지 뛰어나가 “도와주세요!” 하고 힘껏 소리쳤다. 그러나 조촐한 어선에 망원경 같은 값비싼 항해 도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어선은 일로델을 발견하지 못하고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일로델은 맥없이 주저앉았다. 날이 점점 보랏빛으로 저물고 있었다. 하루가 이렇게 길 수도 있는 건가. 더 끔찍한 사실은, 아직 밤도 오지 않았다는 거다. 어둠이 내려오면 세상은 암흑 속에 잠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 벌써 지긋지긋했다.

실소가 픽 흘렀다. 무인도? 그래, 형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선포했지만 무인도는 제외해야겠다.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당장 나갈 수만 있다면, 형이 있든 티베인이 있든 상관없다. 여기서 미치나 저기서 미치나 차라리 형제들 곁이 낫지. 근데 만에 하나, 정말로 몸이 멀어져서 마음도 멀어졌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형제니까 구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겠지? 아무렴 가족인걸….

맙소사.

일로델이 실성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릴 적 티베인이 야만인에게 납치당했을 때 형의 반응이 어땠나. 그는 망설임 없이 티베인을 버렸다. 형은 가족애 따위 없는 사람이다. 마음이 멀어졌으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 티베인이라고 뭐 다를까? 변덕이 들끓는 놈이니 벌써 자신 같은 건 잊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썰렁했다. 완연하게 저문 하늘처럼 텅 빈 느낌이 났다.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형제들의 애정을 그리워하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이렇게 간사한 인간을 사랑하다니, 그들은 정말 미친놈들이었나 보다.

일로델은 한가로이 모래를 던지며 장난을 쳤다. 형제들이 아니어도 자신을 구하러 올 사람은 많았다. 어머니의 부하만 해도 그 수를 다 세기 어려울 정도이니 말이다. 황제도 생각이 있다면 자신을 구해서 생색을 내고자 할 테니 눈에 불을 켜고 찾으라 명할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올지 내기하며 버티기만 하면 된다. 구출되면 뭘 하지? 어머니와 함께 북부로 가서 저택을 구경하고, 어머니가 원하는 피어스로 교체하고, 열차도 타고, 그놈의 펭귄도 보고….

“재밌겠네.”

일로델은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해 보았다. 그러자 정말 재밌을 듯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는 야자수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멀리서 쏴아아, 하는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 해변은 파도 한 점 없이 잔잔했다. 다행이었다. 가뜩이나 살림도 빈곤한데 물까지 들어차면 원통해서 눈물이 났을 거다. 비록 섬 같지도 않은 섬이지만 이곳은 바람도 나긋하고, 지형도 평평하고, 며칠 마실 것도 있으며, 이제는 모랫바닥도 양모 카펫처럼 편안했다. 어느 정도 생존이 가능한 곳에 버리고 간 걸 보면, 야만인 놈들이 퍽 신경을 써 준 셈이다. 아니면 천천히 말라 죽길 바랐거나….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울컥 명치가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인도에 홀로 남은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현실을 자각하면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나마 낮에는 야자도 두드리고 구조를 기다리느라 바쁘게 보낸 편이다. 밤이 오고 어둠에 갇히니 자연스레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러니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두려움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일로델은 울적함을 달랠 겸 하늘을 보았다. 반으로 조각난 달은 시원찮게 빛나고, 하늘에 총총들이 박힌 별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중에도 별 하나가 유독 빛났다. 말을 걸듯 깜빡깜빡 반짝이기도 했다. 마치 힘내라며 응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다. 한낱 인간인 자신에겐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자연의 신비 앞에서 이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보라, 바다의 경이로운 하늘을! 시간이 갈수록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 주었던 빛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다. 도시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볼까. 이는 행운의 징조임이 분명하다. 좀 너무 커지는 것 같아서 무섭긴 하지만….

“…….”

한참 넋을 빼고 있던 일로델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에도 쑥쑥 자라난 빛이 달덩이만큼 커졌다.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저것은 별이 아니다. 선박에서 보내오는 조난용 발광 신호였다.

“여기! 여기에요! 구해 주세요! 사람이 있어요!”

일로델은 맨발로 뛰쳐나가 힘껏 소리쳤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배의 모양이 육안으로 보였다. 요전 날 어머니와 함께 구경했던 프리깃이었다. 이틀이면 북부에 도착할 만큼 빠르다는 게 허세는 아닌지 다가오는 속도가 시원시원했다. 일로델은 함빡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가운을 휘두르기도 하고 팔짝팔짝 뛰기도 했다. 선수 쪽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밝은 빛 때문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 그림자만 봐도 반가워서 눈물이 울컥했다.

“빨리 오세요! 저 여기 있어요!”

일로델이 웃으면서 울먹였다. 한나절 만에 꼬질꼬질해진 그는 섬에 사는 원주민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천만다행으로 얼굴은 아직 해사해서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를 확인한 선원이 “일로델 님이 맞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일로델은 ‘그래, 나야 나!’ 하고 마주 외치려다 주춤해서 입을 다물었다. 점차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눈에 익었다. 그러자 배 위에 올라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일로델은 신나게 흔들던 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얼굴에서 함박웃음도 사라지고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는 멀뚱멀뚱 서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한숨이었으나, 확실한 건 안도의 표현은 아니었다.

“밧줄부터 내려, 새끼야! 빨리!”

귀에 익은 목소리가 선원들을 닦달해댔다. 일로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더니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벌렁 뒤로 누웠다.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많았다. 그래, 뭐…. 엄청 경이롭진 않지만 이것도 열차와 굴뚝 연기로 부예진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긴 하다. 딱히 관심도 없는 별을 하나둘 세 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 누가 와서 섰다. 티베인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깨어 있네? 너 나 보고 엄청 좋아 죽더라? 너무 좋아서 기절한 줄 알았지 뭐야.”

“…….”

“아닌가? 눈 뜨고 기절했나? 야, 일로델. 나 보이냐?”

일로델이 눈알을 굴려 그를 확인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티베인은 반갑게 눈을 반짝이더니 씨익 웃었다. 일로델은 그를 빤히 보다가 스르륵 등을 돌려 누웠다. 티베인이 “늦게 와서 삐졌냐? 망망대해에서 이 정도면 빠른 거지….” 하며 꿍얼댔다. 알 게 뭔가 싶어 무시했다. 그러자 녀석이 옆에 찰싹 붙더니 슬그머니 누웠다. 일로델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앞에서는 선박에 달린 램프가 온 섬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언젠가 티베인에게 목걸이를 받고 혼자 펄펄 뛰었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다. 공연히 서먹하고, 겸연쩍고, 그때보다 백배는 더 부끄러워서 미치겠다.

자연의 신비가, 뭐? 행운의 징조? 그리운 형제들의 애정? 가슴이 뻥 뚫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져….

일로델은 주먹을 꼭 쥐었다. 반나절 동안 혼자 청승을 떨어댄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었다. 형제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해 망정이지, 그들이 독심술까지 구사했다면 이미 창피함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괜찮다. 자신이 형제들에게 내보인 거라곤 손을 쳐들고 팔짝팔짝 뛴 것밖엔 없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여기 풍경 죽여주네. 별장 하나 지어놓고 살면 딱이겠는데.”

“…….”

“까짓거 내가 힘 좀 쓰지 뭐. 나도 너한테 별장 하나 지어 줄 돈은 있어. 부족하면 열차 하나 팔라고 하면 되고….”

티베인이 일로델 등에 찰싹 붙어 주절주절 떠들었다. 너랑 별을 보니 좋다느니, 여기서 매일 별이나 보고 싶다느니 하다가, 급기야 주정꾼처럼 흥얼댔다. 일로델은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나 선박으로 다가갔다. 계단 아래에 로건이 있었다.

“…….”

그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모자를 일로델에게 씌워 주었다. 일로델은 검고 딱딱한 모자를 푹 눌러 썼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최대한 그늘 속에 숨기며 선박에 올랐다. 선원들이 급히 의자와 물, 싱싱한 과일을 가져왔다. 일로델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깨작깨작 물을 마셨다.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아니면 먼저 몸을 닦는 게 좋을까?”

일로델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도리질을 쳤다. 그는 조그맣게 “밥….” 하고 중얼거렸다. 로건이 웃으며 끄덕였다.

“안에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해 놨어. 갓 구운 빵과 수프도 있지. 오늘 밤 안에 널 찾지 못했다면 전부 버리고 다시 만들었을 거야.”

“…….”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 내 동생.”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대사인가. 난데없이 야만인에게 납치당하고 무인도에 떨어졌다가 가까스로 구출된 참이다. 다른 때였다면 형제들의 만행도 잊고 엉엉 울며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로델은 모자 밑으로 눈만 들어 로건을 올려다봤다. 어딘가 시무룩한 태도였다. 어린 동생의 뜻 모를 행동에 로건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지?”

“저…. 야만인한테 납치당했어요.”

불쑥 일로델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내리고 습관처럼 손을 만지작댔다. 응석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노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에 로건의 입매가 설핏 굳어졌다.

“그래, 들었어. 놈들이 네게 무슨 짓을 했지?”

“저를 납치해서 바다로 뛰어들고, 거꾸로 들어서 물을 토하게 하고, 억지로 쓴 약을 먹이고, 낸디라고 이상하게 부르고, 뱀처럼 교활하고 사악한 놈과 약속을 했는데, 자기가 생각한 내용과 다르다면서 저를 이곳에 놓고 갔어요.”

일로델은 차근차근 대답을 이어 가며 로건을 빤히 보았다. 속눈썹이 그늘진 푸른 눈과 미동 없는 표정. 아름답고 사악한 악당에게선 몰염치한 고결함 외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일로델의 뚱한 눈길이 계속되었다. 로건은 굳은 입매를 풀고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횡액을 당했군. 많이 놀랐지?”

“뭐, 조금요….”

“미안해, 일로델. 모두 내 잘못이야. 좋지 않은 일은 방심한 순간 일어난다는 걸 잊고 있었어.”

아, 그러셨구나….

일로델이 뱁새눈을 뜨고 로건을 노려봤다. 저 우아한 얼굴은 상아로 조각해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낯짝이 저리 두껍겠는가.

“그만 갈까? 네가 원한다면 더 있다 출항해도 돼.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없어. 북부든, 남부든, 이참에 세계여행을 떠나도 좋겠지. 선택은 네 자유야, 일로델.”

로건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그 제안은 몹시 유혹적이었다. 일로델은 착잡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하늘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답답한 마음으로 볼만한 게 그거밖에 없었다.

꿈인가 싶을 정도로 너그러워진 어머니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가슴 두근거리는 북부행과 앞으로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 사이좋은 형제와 저를 필요로 하는 가족들….

뭐 하나라도 부서진 소망이 있다면 짜증이라도 내 보겠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분 나쁠 정도로 모든 게 보전되어 그의 앞에 있었다. 절벽까지 내몰리다 어쩔 수 없이 뛰어내리고 보니 다시 원점이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그리되도록 조작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일로델은 오싹함을 느끼며 팔을 쓰다듬었다. 로건이 어깨에 블랭킷을 덮어 주었다. 하필이면 밍크로 된 두꺼운 담요였다. 무더위에 쪄 죽을 것 같았지만 일로델은 얌전히 있었다. 이제 정말로 로건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형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무섭도록 치밀하고 사악했다.

이 뱀처럼 교활하고 사악한 악당아.

야만인 우두머리를 대신해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지금까지 당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참는 게 무슨 대수랴. 일로델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집으로…….”

“음?”

“남부에 있는 저택으로 가요. 가서 깨끗하게 씻고 제 방에 누워서 자고 싶어요.”

로건이 작게 웃었다. 그가 일로델의 귓가에 “뜻대로.” 하고 속삭였다. 두 사람이 선실로 향하자 그때까지도 멀뚱히 누워 있던 티베인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티베인은 닻을 올리는 선박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일로델? 어디가? 여기서 살고 싶은 거 아니었어?”

“…….”

“내가 별장 하나 지어 준다니까? 배도 매일 태워 주고 물고기도 잡아 줄게. 야!”

접혀 있던 돛이 활짝 펼쳐지고 신속하게 출항 준비가 완료되었다. 배가 둥실둥실 움직이는 동안에도 티베인 자식은 계속 헛소리만 지껄여대며 승선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로델은 참다 참다 짜증이 확 나서 소리쳤다.

“거기서 살고 싶으면 너 혼자 살든가! 나는 집에 갈 거야!”

“뭐? 야! 잠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티베인이 선박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미 배는 출항했고, 위로 오르는 계단도 접힌 지 오래였다. 일로델이 걸음을 멈추고 저만치 멀어져가는 티베인을 쳐다봤다. 머뭇머뭇 로건을 돌아보기도 했다. 형은 티베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듯했지만 그래도 배를 멈춰 달라고 하면 멈출 것이다.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남부까지 전속력으로 달리겠지. 일로델은 도리 없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저기…. 그, 티베인, 쟤도 좀…….”

일로델은 갑자기 민망함이 해일처럼 몰려와 두 손으로 모자를 꾹 눌러썼다. 왜 민망한지 너무 잘 알아서 더 부끄러웠다. 형이 자신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주리라 확신한다는 점에서 낯뜨겁고, 겸연쩍고, 쥐와 한 가족이 되어 쥐구멍에 들어 살고 싶었다.

그의 예상대로 로건은 군말 없이 선원들에게 돛을 접으라 명령했다. 어느덧 무인도와 훌쩍 멀어진 곳에 배가 덩그러니 섰다. 티베인은 바다 괴수처럼 수영해 오더니 배에서 내려 준 밧줄을 잡고 훌쩍 올라탔다. 그는 저를 놓고 가려 했다느니, 동생한테 그래도 되냐느니, 그렇게 미우면 차라리 때리라느니, 꽥꽥 떠들다가 일로델의 시퍼런 눈총을 받고 조용해졌다. 티베인은 언제 뻔뻔하게 굴었냐는 듯 일로델의 눈치를 보며 물먹은 옷을 쭉 짰다.

“조용한 항해가 될 줄 알았는데, 아쉽군.”

로건이 한쪽 입매를 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일로델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티베인을 두고 가는 것도 계획이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인지, 또 어디까지 짜여 있는지, 생각하면 막막하지만 이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것이 형이 원했던 결말임은 분명하니까.

참 무섭지 않은가. 야만인에게 했던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셈이다. 딱히 대장부는 아니지만 내뱉은 말도 있으니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패배했다. 기 싸움이든, 수 싸움이든, 또는 단순한 애정이든, 믿음이든…. 자신은 형제들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들의 마음을 비뚤어진 성욕이라 덮어버리기엔 그 크기가 너무 컸다. 아예 외면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각인했을 뿐이다.

그래, 졌다.

인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망할 밍크 담요만 벗어 던져도 심신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졌다고 해도 완전히 끝난 게임은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일 수도 있다. 그는 로건의 섬뜩한 음모에 휘말렸음에도 오메가가 되지 않았고, 몸속에 있던 괴식물도 제거했다. 아이에 대해 생각하면 묘한 기분에 휩싸이지만…. 그대로 태어났다면 아이에게도 불행이었을 것이다. 사랑만 담뿍 받아도 모자랄 존재에게 미친 어머니, 아니 아버지가 웬 말인가.

목적을 달성한 형은 한동안 잠잠할 테고 티베인도 죽어 지낼 테지. 형제들에게 벗어나겠다고 헛발질만 하느니, 그들을 휘어잡을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나았다. 어디 두고 보자고. 일로델이 사악하게 웃었다. 옆에서 익숙한 시선이 뺨을 찔렀다. 로건이 깊은 눈길로 그를 보고 있었다.

“…….”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일로델이 서둘러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뺨에 꽂히는 시선은 걷히지 않았다. 괜히 그 부분이 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심장도 막 두근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죄책감 때문이다. 잠깐이나마 형에게 마음고생을 시켰으니까….

망할, 그까짓 게 무슨 고생이야? 저처럼 형제들 등쌀에 시달리고, 망측한 짓도 받아 주고, 임신도 하고, 생사도 오가고, 야만인에게 납치도 당하고, 무인도에도 갇혀 봐야 고생 좀 했다고 하는 거지. 그게 다 로건의 간계였다고 생각하면 웃다가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게 당연하다. 일로델은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댔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피어올랐다.

정황상 형은 자신이 북부로 갈 것을 예상하고 야만인과 거래를 했다. 그러니 자신을 순순히 보내 준 것이고, 악마와 심해 사이를 운운하며 납치를 예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약속이 잘못되었다며 자신을 무인도에 버리고 갔다. 꼭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놈들은 변덕을 부려 이상한 곳에 데려갈 수도 있었다.

출항을 앞둔 밤, 위치 추적 도구인 피어스가 화분에 꽂혀 돌아왔다. 또다시 이런 걸로 사람을 옭아맬 심산인가 싶어 거절했고, 형은 그 자리에서 피어스를 버렸다. 그 과정을 떠올려 보면 형은 야만인들의 돌발행동을 예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예상했다. 그러니까 피어스를 돌려주려 한 거다. 하지만 버렸잖아…. 왜 버렸지? 형은 자신을 어떻게 찾을 속셈이었을까? 설마, 괘씸하니까 운에 맡기자는 생각은 아니었겠지? 저렇게, 애틋하고, 간절하게 쳐다볼 정도로 자신을 조, 좋아하면서….

“일로델?”

일로델이 선실을 앞두고 멈춰 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은 뺨과 원망 어린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로건은 다시 한번 일로델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린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을 겨우 잡았던 아기가 떠올랐다. 조그맣던 것은 어느 순간 걸어 다니고 말을 했다. 기쁘면 웃었고 서러우면 눈썹을 찌푸렸다. 그에게 바라는 게 생기면 빤히 올려다봤고, 서운하거나 불만스러우면 지금처럼 바닥을 쏘아보았다. 어리석은 아이는 무정한 형의 빈 바구니에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제 바구니도 애정으로 채워 주길 바랐다. 돌아오지 않는 보답에도 어린 일로델은 무한한 사랑을 기대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로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선실 문을 잡고 기다리는 모릭스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볼 정도로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감회인가? 모릭스가 갸웃한 찰나 로건이 빙긋 웃었다. 그는 깜빡했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

일로델이 돌아보자 로건이 손을 뻗어 그의 귓가를 매만졌다. 일로델은 잔뜩 긴장해서 주먹을 쥐었다. 혹시 또 이상한 짓을 하면 선상 반란도 마다하지 않겠단 심정이었다. 로건은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귀를 놓아주었다. 그의 손끝에는 조그마한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들려 있었다.

“이것도 이제 버려야겠군.”

“네? 그건….”

가짜인데.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피어스가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일로델이 난간을 붙들고 허망하게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자신의 돈은 아니었지만, 꽤 비싸게 주고 맞춘 거였다. 세공의 달인이라는 늙은이를 찾겠다고 지저분한 뒷골목을 돌며 고생도 많이 했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티베인이 헐레벌떡 달려와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하며 그를 소심하게 잡고 끌어 내렸다.

“시제품이라 바다에서는 오차가 너무 크더군. 해저로도 케이블을 연결해야겠어.”

“흥, 간만에 맘에 드는 짓을 한다 했지. 땅에서만 위치를 알 수 있으면 뭔 소용이야? 내가 없으면 어쩔 뻔했냐고.”

“네 후각은 믿을 만해. 군견 사육장으로 보내 줄까?”

“좋지. 나는 일로델만 찾아다닐 거야. 생각만 해도 신나는군.”

로건과 티베인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일로델은 시큰둥하게 앉아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래. 그렇지…. 그렇게 섬세한 물건이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질 리가 없지….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속여 먹는 인간들이다.

망할 놈들.

수많은 대상을 향한 원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구 하나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일로델은 바지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됐고 그냥 밥이나 먹자. 먹어야 힘을 내서 원망도 하고 욕도 하지.

마침 주린 배가 꼬르륵 울렸다. 그는 터덜터덜 선실로 향했다. 모릭스가 문고리를 잡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댁도 꼴 보기 싫으니 저리 가라며 밀어내고 문을 꽝 닫았다. 그러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거친 바닷바람도 잠재우는 부드러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건조 지대인 남부가 가장 타오르는 시기,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동부에서 온 부채가 불티나게 팔리고 게으른 신사들은 집 앞에 나와 마차를 불러댔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중앙 광장의 분수가 시원한 물을 내뿜었다. 사람들은 광장 그늘에 잠시 쉬어가며 대공 저택을 향해 예의를 표했다. 앞으로도 록퍼스 가문이 남부를 무탈하게 다스려 주길 바라는 의미였다.

록퍼스 가문의 드넓은 저택에도 어김없이 무더위가 찾아들었다. 정원사들이 땡볕에 달궈진 얼굴로 식물을 가꿨다. 하인들도 빨랫감을 들고 나르며 땀을 훔쳤다. 보기만 해도 더운 바깥 풍경에 반해, 저택 안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우기의 밤보다 더 서늘하고 고요했다. 하인들의 발소리는 물론, 테이블에 식기를 놓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

만찬에 가까운 식사가 테이블에 길게 늘어섰다. 그러나 음식을 앞둔 자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숨 막히는 압박감은 일로델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는 테이블보 밑으로 초조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곧바로 냉랭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일로델. 손, 가만히.”

깜짝 놀란 일로델이 어깨를 움찔했다. 옆에서 티베인 자식이 킥 하고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나 싶어 째려보니 녀석이 모른 척 눈을 피했다. 참 억울한 일이다. 어머니의 눈에 저 자식의 껄렁한 자세는 안 보이는 걸까? 그는 헤롯의 시선이 비껴간 후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식당 안의 공기가 살얼음판 저리가라였다.

“그래….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았다. 놈들이 저 녀석을 납치해서 무인도에 놓고 갔다 이거지? 너희들은 홀로 남은 일로델을 우연히 발견하였고.”

“아주 우연은 아닙니다. 야만인들이 다니는 동선을 미리 파악했던 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

로건의 말이 끝나자 헤롯이 입을 꽉 다물었다. 그녀는 딱딱한 눈으로 죄 없는 비프스테이크를 노려보았다. 말도 못 하게 분노한 얼굴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미는지 주먹까지 쥐었다. 그녀의 손에 있던 불쌍한 나이프의 모가지가 푹 꺾였다. 뒤에서 대기하던 상급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나이프를 가져왔다. 실로 폭탄이 떨어져도 묵묵히 일만 할 놈들이다. 일로델이 살얼음판 속에서도 꿋꿋한 하인들을 돌아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놈들은 일로델이 내 아들인 걸 알고 있었어.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놈들이 왜 일로델을 무인도에 놓고 간 거지? 인질로 삼으려는 게 아니었나?”

“야만인들은 생각보다 영악합니다. 일로델이 어머니의 약점이라는 걸 간파했을 겁니다. 적의 수장이 생사불명의 아이를 영원히 찾아다니게 만들면, 그것이 더 큰 이득이자 복수가 아니겠습니까?”

헤롯이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잔뜩 졸아든 일로델이 어깨를 움츠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다. 헤롯은 노여움을 어찌할 바 모르겠는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엉거주춤 서 있던 셰본이 “헤롯, 진정해. 애가 많이 놀랐어.” 하며 조심스레 그녀를 달랬다. 그는 처음 식당에 들어와 슬그머니 헤롯 옆에 앉았다가 퇴출당하여 자리를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헤롯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진정하려 해도 자꾸만 열이 치솟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애를 잃어버릴 뻔했다.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렸다. 안개 속에서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던 아이가, 잠시 눈을 뗀 사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의 절망감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막막함과 무력함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바다를 뒤엎어서라도 아이를 찾아내라 닦달했지만, 웅장한 자연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일 뿐이었다.

헤롯이 거친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자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옆에서 나이프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식하고 눈치도 없는 티베인 놈이 우아한 척 고기를 썰어 먹고 있었다. 폭탄이 터져도 처먹기만 할 놈이다. 일로델은 어이가 없어서 티베인을 째려봤다. 그때 헤롯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뭐…. 어찌 됐든…. 다행이구나.”

“…….”

“다행이야….”

다시 눈을 뜬 헤롯은 조금은 울적한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일로델은 차마 그녀를 오래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어머니는 자신이 북부가 아닌 록퍼스 저택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도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방금처럼 복잡한 눈으로 마주 보다가 ‘들어가자.’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황궁에서 황제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릴 거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로건, 네 진급식도 함께 열릴 거야. 늦지 않게 미리 참석하거라.”

“네.”

“티베인, 먹고 노는 것도 좋다만 귀족으로서 제국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거라. 네가 임시로 철도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지? 나도 열차에 관심이 많으니 앞으로 나와 볼 일이 많겠구나.”

옆에서 뭘 하든 희희낙락 처먹던 티베인이 뭐 씹은 얼굴을 했다. 고소하다. 이번엔 일로델이 킥 웃으며 발로 티베인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녀석은 어쩔 줄 모르다가 얼떨결에 “아, 네, 네.” 하고 대답했다. 헤롯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로델.”

티베인에게 발장난을 하던 일로델이 딱 굳었다. 그는 머뭇머뭇 헤롯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른 형제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엄격하게 물었다.

“너는 뭘 하고 싶으냐?”

“네? 저는….”

갑자기 물으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느긋하게 물었어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군의관을 목표로 했으나 특별한 의의는 없었다. 그저 가족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시켜 준다면야 열심히 하겠지만, 현재로선 굳이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연구소를 빙자한 별채도, 집을 나가 볼 구실이었을 뿐 지금은 그냥 원수 같은 건물이다.

뭘 하는 게 좋을까….

일로델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도 일로델에게 빠져들었다. 검은 머리통이 기웃거릴 때마다 셋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주 좋아 죽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나 싶어 셰본도 뚱하니 둘째 아들을 쳐다봤다. 옆에 있는 막내는 태양에 검게 그을린 데 반해, 녀석은 뽀얀 얼굴과 맑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독기를 뿜었다가도 제 독기에 제가 질식하는 녀석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집안에서 곱게 자란 녀석의 표본이었다.

오메가로 태어났으면 고생깨나 했겠지.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베타로 낳아 줬으니 된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다만 이제 제 살길 찾아서, 가능하면 평화로운 미래를 구상해 주었으면 했다. 셰본은 속이 끓는 마음으로, 나머지 셋은 그저 행복하게 일로델의 고민을 구경했다. 마침내 일로델이 입을 열었다.

“저는…. 레몬 나무를 재배하고 싶어요.”

“레몬 나무?”

“굉장히 신 열매가 열리는 나무예요. 이걸 많이 재배해서 괴혈병약을 만들고 싶어요.”

헤롯이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재빨리 표정을 굳히고 근엄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구나. 토지는 얼마든지 있으니 얘기만 하렴. 나무를 키운다면 땅이 비옥한 북부가 좋겠지?”

“아니요, 그게…. 레몬 나무는 열대지방에서 온 식물이라 추위가 오면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럼 북부에서는 키우기 어렵단 얘기냐?”

“네, 아마도요. 그래서…. 남부에서 처음 도전해 보려고 해요.”

“…….”

일로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해했다. 결국 남부에, 록퍼스 저택에 남겠다는 얘기였다. 헤롯의 굳은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 꼭 레몬 나무를 심어야겠니? 아니면, 남부에서 마지막으로 도전해 봐도 되잖아. 저 셰본보다도 악랄한 놈들 사이에서 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레몬 같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이 어미를 따라 북부로 와!

버럭 토해내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맴돌며 간지럽혔다. 헤롯이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찻잔이 비자 하인이 티포트를 기울였다. 헤롯은 김이 펄펄 나는 차를 단숨에 마시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차가 울분이 되어 위장을 불태웠다.

멍청한 것. 제가 무슨 꼴을 당했는데. 그 참상을 제 눈으로 목격했어도 저리 한가한 소리를 할까? 안에서 무르익은 자궁을 꺼내느라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본 이 어미의 심정은 어떻고! 답답함이 몰려왔다.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고 싶었다. 하지만 헤롯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일로델의 의지가 흐려진다. 마음이 약한 아이는 또다시 그녀의 뜻을 따라, 타인의 뜻을 따라 길 잃은 부표처럼 떠다니겠지. 믿고 기다려야 했다. 일로델이 스스로 선택하며 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지만 다치지 않게 도와줄 순 있겠지. 부모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암, 그렇고말고.

헤롯이 울화통을 참으며 희망을 불태우는 동안 일로델은 죄인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로건은 눈을 내리깐 채 차를 마시고, 티베인은 일로델의 음식을 슬쩍해서 음미하듯 먹었다. 셰본은 자리에 앉는 건 포기한 듯 벽면에 내걸린 아기 천사 그림을 멀뚱멀뚱 감상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정적이 끝을 맺었다. 헤롯이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구나. 지금 출발해도 새벽에나 출항하겠군. 느려터진 열차를 꼭 바꾸고야 말겠어.”

“어머니?”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란 일로델이 헤롯을 따라 일어났다. 헤롯이 그를 돌아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일로델은 낯선 어머니의 미소에 움찔 몸을 사렸다.

“더 있다가 가고 싶지만, 그동안 밀린 일이 너무 많더구나. 빨리 끝내고 다시 찾아오마.”

“네?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지, 연회가 끝나고 로건과 함께 오면 되겠군. 내 자랑스러운 아들아, 나의 호위를 믿고 맡겨도 되겠느냐?”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맡겨 주십시오. 불편함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든든하구나. 아무쪼록 네 동생에게도 그리하리라 믿는다.”

고개를 든 로건과 헤롯의 냉랭한 시선이 맞부딪쳤다. 일로델은 긴장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릴 적엔 이렇듯 두 사람이 종종 기 싸움을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로건은 말없이 웃으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헤롯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인지, 아닌지 조금은 모호했으나 그녀는 일단 만족하기로 한 눈치였다.

헤롯은 로건과 일로델, 그리고 티베인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더불어 늘어서 있는 하인들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다시 세 아들을 보았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녀는 부하들을 호령할 때처럼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모두 내 배로 낳은 자식들이고 너희는 서로 형제다. 근친상간이 죄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자랑거리도 아니지. 나는 일로델의 결정이 아니라면, 결코 이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일로델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는 알량한 욕심으로 네 형제이자… 연모하는 상대를 위험에 빠뜨렸어. 평생 죗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일로델을 받들어라.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하면, 나는 즉시 너희와 일로델을 격리할 것이다. 그리고 일로델!”

갑자기 이름을 불린 일로델이 군인들처럼 “네!” 하고 소리칠 뻔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군 생활을 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가 차렷 자세로 헤롯을 보았다. 그녀도 엄격한 기조를 유지하며 그를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유례없이 냉엄했다. 일로델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뭔지는 몰라도, 갑자기 책임감이란 녀석이 어깨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이제 다 큰 성인이지.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할 생각이다. 그러나 방관하겠단 소린 아니야! 아주 사소해도 상관없으니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을 넣거라.”

“어…. 어떻게요?”

“매일매일 서신을 써. 아니, 그것도 도착하려면 느리지. 안 되겠다. 바다 밑으로 전신기 회선을 깔아야겠어. 군용 부호로 간단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 좋겠구나.”

헤롯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부하들을 불러와 진지한 토의를 시작했다. 가만히 보고 있던 로건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자연스럽게 논의를 이끌었다. 해저 케이블이 어쩌고, GPS가 어쩌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헤롯의 부하들이 끄덕끄덕하며 메모했다. 옆에서 셰본이 ‘왜 또 일을 크게 벌이냐. 살면서 휴식도 필요한 법이다.’라며 중얼댔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뭘 위한 각오였담?

일로델은 허탈한 한숨을 토했다. 어깨에 올라탔던 책임감이 홀랑 날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맥이 빠져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 한참 있으니 묘한 기분이 몰려왔다. 눈앞에 친애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돌이켜 보면 꿈에서나 그리던 풍경이다. 별나고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토록 되돌리려 노력했던 과거보다 훨씬 이상에 가까운 광경이 아닌가?

늘 그렇지만 자신의 소원은 작고 소소했다. 어디 털어놓기도 민망하게 보잘것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들과 사랑을 주고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비웃듯, 언제부턴가 감당하기 힘든 재난에 휘말려 허우적대느라 바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의 소원이 현실이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반이라도 이루어진 것이다.

일로델의 입가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방긋 미소 지었다. 순간 일로델과 로건의 시선이 마주쳤다. 로건이 반가운 듯 눈을 곱게 접었다. 푸른 눈동자에 온화함과 만족감이 반씩 섞여 일렁거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논의를 이어 나갔다.

“…….”

일로델은 미소 짓다 만 그대로 쩍 굳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무서운 건 아닌데, 약간 등골이 오싹한 것도 같고….

그는 살짝 서늘해진 팔을 매만졌다. 그때 옆에서 누가 툭툭 쳤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기에 파리 쫓듯 손을 휘저었다. 짝 소리가 난 걸 보면 어딜 맞긴 한 것 같은데, 녀석은 도리어 냉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뭐 대단한 비밀을 밝히듯 입을 가리고 속살댔다.

“야, 너 군용 부호가 뭔지는 아냐? 그거 전문가도 있을 정도로 되게 어려워. 뭐, 나한테는 껌이지. 꼭 필요하다면 내가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닥쳐.”

일로델이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을 했다. 나직한 한 방에 티베인의 기가 팍 죽었다. 그는 시무룩하게 남은 음식을 긁어먹었다. 그러면서도 힐긋힐긋 눈치를 보며 일로델의 접시에 손을 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던데, 가만 보니 개만도 못한 놈이다. 일로델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된 것처럼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이르다면 이른 파장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가슴이 조이듯 괴롭지는 않았다. 가족들이 자신을 두고 갈 때마다 몰려왔던 공허함과 서글픔이, 곧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졌다.

묵은 먼지처럼 외로움이 켜켜이 쌓이지 않는 헤어짐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

검은 세단이 정문을 빠르게 통과했다. 아들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 헤롯은 그 후로 말이 없었다. 차창을 바라보고 있어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그나마 약간 처진 어깨가 그녀의 기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잘 참았어. 당신이 그렇게 참아 본 게 얼마 만이지? 아, 이런. 내 기억으론 처음인 것 같군. 총에 빗맞은 상처가 아직도 아파….”

“…….”

“기억나? 나와 혼인이 결정되었을 때도 당신이 검을 휘둘렀지.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어. 하하….”

셰본의 억지웃음이 허무하게 잦아들었다. 세상천지 처음 겪는 헤롯의 울적함에 그도 당황한 상태였다. 셰본은 잡담을 멈추고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그는 몇 번을 고심하다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다시 가서 일로델을 데려오는 게 어때? 내게 호위를 맡겨 주면 결코 이번과 같은 일은 없을 거야.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어.”

“됐어.”

“헤롯….”

“일로델이 결정한 거야. 더 참견하는 건 내 욕심이지.”

“욕심 좀 부리면 어때? 당신은 일로델을 북부로 데려가는 게 아이들을 위한 거라 생각하잖아. 상식적으로 그게 올바른 길이고 말이야. 지금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야.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셰본의 계속되는 설득에 헤롯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드디어 차창을 뒤로하고 셰본을 보았다. 우울한 빛이 어려 있을 거라 짐작했던 눈은… 생각 외로 무덤덤했다. 도리어 약간의 짜증이 피어난 기색이었다.

“왜 갑자기 옳은 소릴 해? 그 나이에 망령이라도 왔어?”

“뭐어?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감히 일로델을 들먹이면서 출항을 허락하느니 마니 하던 말종이 누구였지? 듣기 싫으니까 그만 떠들어.”

대화 끊어내기가 칼 같다. 셰본이 억울한 듯 눈썹을 허물었다.

“다 당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대공으로서 야만인 소탕이 미흡했던 건 인정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해역이 됐으니 출항을 재고하란 뜻이었지, 설마 진심이었겠어?”

헤롯의 미간이 겹겹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화를 참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네가 진심이었든 아니든 일로델이 현재 대공 가문의 사람이 맞고, 그를 운운하며 나를 협박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너는 개자식이야.”

“그래, 나는 개자식이고 천하에 다시없을 쓰레기야. 용서를 구하진 않을게. 뻔뻔한 것도 알아. 하지만 이혼은 다시 생각해 줘. 양육권 문제로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 앞으로 후계 문제도 그렇고….”

헤롯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셰본을 빤히 쳐다봤다. 차가운 시선 속에 비난과 경멸이 가득했다. 셰본은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비열하다. 비겁한 모사꾼이고 탐욕스러운 평화주의자다. 양육권에 후계 문제까지 내세운 이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하나 그로 얻는 평화도 있는 법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로건 녀석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가 보기에도 첫째 아들내미는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셰본은 일로델이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길 바랐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편의를 위해 쉬운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로건의 집요함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신분과 권한을 내세워 일로델을 빼앗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로건은 황제와 황녀의 불화를 먹잇감 삼아 쿠데타를 벌였을 것이다. 일로델처럼 곱게 자란 녀석이 제국의 피를 감당할 수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녀석은 제가 아끼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헤매다 어미와 아비의 피를 뒤집어쓰고 자멸할 터였다. 셰본은 패배를 인정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정교한 카드 패를 보고 무의미한 게임을 끝내기로 했다. 그럼에도 로건은 지독한 놈이었다. 그가 간과했던 마지막 패…. 헤롯까지 끌어들여서 기어코 꺾었으니 말이다.

셰본은 당당히 어깨를 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누가 있어 로건처럼 악랄한 놈을 막는단 말인가?

결국은 일로델뿐이다. 자식들 문제는 고 녀석만 잘해 주면 된다. 복잡한 문제도 대충 정리되었겠다, 앞일은 당사자들에게 맡기고 그는 이제 이혼만 막아내면 만사형통이었다. 셰본은 겉으로는 근엄한 태도를 잃지 않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가 급한 마음에 망각한 사실이 있었다. 헤롯이 일로델만큼 무지하진 않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부부니, 애인이니 30년 넘게 알아 온 사이다. 셰본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헤롯의 눈에도 뻔히 보였다.

“차 세워.”

돌연 헤롯의 명령이 떨어졌다. 눈치를 보던 운전사가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대공 내외가 탄 차가 멈추자 호위 차량도 잇따라 멈추며 의문 어린 신호를 보내왔다. 뭔 일인가 싶었던 부하들이 차에서 내려 허둥지둥 뛰어왔다. 헤롯이 창문을 살짝 열더니 말했다.

“내 옆에 쓰레기가 있더구나.”

“예에? 어떻게 그런 일이! 죄송합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그래. 크고 무거울 테니 조심해라. 반항하면 총살해. 내가 책임진다.”

헤롯이 차갑게 말하고 창문을 올렸다. 부하들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찜찜한 기분을 안고 반대편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공이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셰본은 훤히 열린 문을 한 번 보고, 헤롯을 돌아보았다.

“나… 나가라고?”

말 섞기도 싫은 듯 헤롯이 밖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럼 나는 뭐 타라고….”

“대공께선 차가 없습니까? 그거 타고 가세요.”

“이게 내 차인데….”

“앞으로는 내 겁니다. 나가요.”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아무리 그래도 억울해서 좀 더 버텨 볼까 했지만, 그는 도리 없이 밖으로 나왔다. 헤롯을 둘러싼 기운이 몹시 음산해서 계속 뭉개고 있다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았다. 그렇지, 뭐. 아직 부부 사이이니까 내 차가 네 차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거겠지….

셰본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헤롯이 탄 차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검은 세단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떠나갔다. 운전사도 셰본의 부하였다는 점이 그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셰본은 넋이 반쯤 나가서 있다가 맨 끝의 호위 차량을 겨우 얻어 탔다.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된 헤롯의 부하가 힐긋 백미러를 보았다. 록퍼스 대공의 꼿꼿했던 등이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시든 미역 같은 그 모습이, 앞으로 순탄치 않을 그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

셰본과 헤롯의 일행이 빠져나간 저택은 평소의 느긋함을 되찾았다. 해가 기우는 동안 로건은 밀린 업무를 보고, 티베인은 정원을 거닐었다. 그는 목적지가 있는 듯 빠르게 걷더니 그곳에 있던 정원사를 쫓아내고 물이 나오는 호스를 잡았다. 그리고 꽃에 물을 주는 척 저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재의 커다란 창문 너머로 일로델이 책을 읽고 있었다.

티베인은 속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로델이 벌떡 일어나 커튼을 반쯤 닫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티베인이 시무룩해서 호스를 내던졌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서 정원사가 홍수에 잠긴 꽃을 껴안고 통곡했다.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들었다. 한가한 티베인이 맨 먼저 식당에 들어서고, 조금 뒤 로건이 왔다. 마지막으로 일로델이 식당을 찾았다. 세 사람은 대화 한마디 주고받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일로델이었다. 그는 식당을 나서며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티베인이 벌떡 일어나고, 로건도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일로델을 따라 어둑한 정원으로 나왔다.

“…….”

일로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반짝이는 정원 램프들 사이에 서서 나뭇잎을 만지고 있었다. 매끈한 손끝에서 호기심이 담뿍 묻어나왔다. 로건은 한 걸음 떨어져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로건과 다르게 티베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서성댔다. 저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목소리라도 좀 듣고 싶었다. 티베인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야….” 하고 소심하게 불러봤다. 그러자 일로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 부른 거야?”

“어? 어….”

“야라고 하지 마.”

“엉…?”

“너 아쉬울 땐 나한테 형이라고 하잖아. 형님이라고 불러.”

티베인은 뜨끔해서 주둥이를 움츠렸다. 뭐, 맞는 말이긴 한데, 왜 형도 아니고 형님이냐? 겨우 대화할 기회를 얻었으니 까짓거 불러 주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제정신이라 그런지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거기다 로건이 보는 앞에서 모양새도 떨어지는 것 같고….

그가 망설이는 사이 일로델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티베인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혀엉…님.” 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썹이 축 처지고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이제 좀 동생답게 쪼그라든 태도에도 일로델은 냉담했다. 작고 귀엽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가 골골대며 말라가는 동안 놈은 키도 늘고 체격도 건장해져서 눈앞에 있으니 예뻐 보일 턱이 없었다.

“뭐. 불렀으면 말해.”

“어엉? 뭐, 무슨 말….”

“너 나한테 할 말 있잖아. 없으면 저리 가. 보기 싫어.”

매몰찬 추방령에 티베인이 입을 떡 벌렸다. 내심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그래 봐야 귀엽지도 않은 놈, 뭐가 이쁘다고 매번 봐줬을까. 일로델은 쌀쌀맞게 등을 돌리고 이름 모를 나무를 감상했다. 커다랗고 싱싱한 잎사귀에서 관리자의 정성이 엿보였다. 늘 보면서도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레몬을 재배하자고 생각하니 푸릇한 것을 보면 흥미가 갔다. 애당초 레몬 나무를 선물한 사람이 로건이라는 점이 매우 공교롭긴 하지만…. 어쨌든 레몬은 죄가 없다.

일로델이 나무들을 기웃대며 관찰하는 동안 티베인의 얼굴은 핼쑥해져 갔다. 그는 여러 번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끔찍한 일을 상상하는 듯 머리를 부여잡기도 하고 숨이 막힌 사람처럼 급히 제복 단추를 풀기도 했다. 한동안 발광하던 티베인이 이윽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서 낮고 숙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못했어….”

“…….”

“혀, 형이, 그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 던 건 아니지만…. 저 악마 같은 놈이, 부추긴 것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거 같아서….”

“그래서?”

드디어 일로델이 고개를 돌렸다. 냉담한 태도가 헤롯을 보는 듯했다. 한동안 어머니와 붙어 있더니 나쁜 것만 배웠다고 생각하며 티베인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잘못했다고….”

“그리고.”

“감금 그런 거, 안 할게, 이제….”

일로델이 심드렁한 눈으로 티베인을 쳐다봤다. 미개하고 무식한 야만인 자식. 그딴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그랬다면 독초를 먹고 사달이 날 일도 없었다. 받으나 마나 한 사과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저놈에게 형님 소리도 듣고 반성도 얻어냈다. 도무지 이루기 힘들 것 같았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쩔쩔매는 티베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로건을 보았다. 희미한 램프 빛이 아름답게 미소 짓는 얼굴을 비췄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깊고 푸른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충만한 애정이었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가 꿋꿋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형은,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있어.”

일로델은 당황했다. 없다고 잡아뗄 줄 알았는데. 티베인에게 그랬듯 없으면 가라고 매몰차게 대꾸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말 한마디로 아버지를 녹다운시킨 어머니를 본받아 차분하게 대응하자. 일로델은 ‘그럼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이 눈을 접고 웃었다.

“사랑해.”

“……네?”

“사랑해, 일로델.”

일로델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자 갑자기 로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랑해. 하하…. 일로델, 내 동생. 나는 정말로…….”

“…….”

“사랑해. 사랑해, 일로델. 하하하!”

형이 웃고 있다. 즐거운 아이처럼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정작 어린 나이엔 잘 웃지도 않았으면서,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렇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이런…….

“…….”

이런 시나리오는 그의 계획에 없었다. 매번 이렇게 치사하고, 괘씸하고, 파렴치하게 나오겠다면 자신에게도 방도가 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지금은 없는 것 같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일로델이 울상을 지었다. 옆에서 띠껍게 둘을 관찰하던 티베인이 인상을 구겼다.

“저 인간이 맛이 갔나? 왜 저래?”

“…….”

“야! 아니, 혀엉….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얘기 좀 해봐. 저 인간이 방금 한 말 들었지? 지금 상황에 그게 말이나 되냐? 나처럼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뭐? 사, 사, 사, 사랑……. 사, 이런 씨…!”

티베인이 갑자기 눈이 벌게져서 로건에게 달려들었다. 로건은 웃는 그대로 몸만 살짝 피했다. 제힘에 못 이겨 나동그라진 티베인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그딴 소린 나도 해! 일로델 사랑해! 혀어엉, 사랑해! 나는 너 배 속에서부터 사랑했어. 저놈이랑은 비교도 안 된단 말이야! 사랑해! 사랑한다고오오오!”

아, 신이시여.

평소 믿지도 않던 신을 찾으며 일로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캄캄한 어둠뿐이라 다시 눈을 떴다. 저택 위로 떠오른 별이 밤하늘을 아롱아롱 물들이고 있었다. 무인도에서 본 것보다 희미하지만, 그래도 보이는 게 어딘가. 한 번에 둘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탈이 난다. 딱히 얻고 싶지 않아도 굴러들어온 게 아니라면야.

고즈넉한 정원에 로건의 경쾌한 웃음소리와 티베인의 고함이 일렁이듯 물결쳤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 보던 일로델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이지 남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 살 수가 없는데……. 죽을 것 같냐면 그건 또 아니다. 다만 명치 끝이 쿡쿡 조이는 게 간지러워서, 왠지 모르게 웃고 싶어서, 그게 참을 수 없이 이상하고 이상해서…….

“밖에 누구 있습니까?”

하인 하나가 경계하듯 현관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때아닌 소란이 저택 문을 노크한 모양이었다. 일로델은 이때다 싶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층에 있는 방까지 전속력으로 걸었다. 그는 문을 잠글까 말까 고민하다가 아예 열어 두기로 했다.

일종의 시험이었다. 대화 좀 나눠 줬다고 또 멋대로 들어와 날뛰는 금수들이라면, 그는 영원히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나 한 놈만 걸리라는 생각으로 일로델이 응접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똑똑똑, 하는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일로델은 잽싸게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저만치서 램프를 들고 걸어오던 하인이 흠칫 놀라며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하나도 안 놀란 척 인사하며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지요.” 했다. 일로델은 멋쩍은 마음에 “아무거나 차나 한잔 갖다 줘….” 하고 대답했다.

하인이 떠나간 뒤 일로델은 응접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노크 소리를 들었는데. 하긴, 문을 두드렸다기엔 소리가 너무 작았다. 지금처럼 조용한 밤이 아니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약했고, 어딘지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때 다시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조금 더 컸다. 일로델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응접실을 맴돌았다. 그러다 한쪽 벽면에서 들려온다는 걸 깨달았다.

이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일로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딱, 느낌이 왔다. 이 위치는 티베인의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위치다. 노크는 딱 세 번 이어지고, 잠시 쉬었다가 또 세 번 두드리고의 반복이었다. 별로 알고 싶진 않지만……. 아마도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잠이나 자! 미친놈아!”

일로델이 힘껏 벽을 걷어찼다. 때마침 차를 갖고 들어오던 하인이 펄쩍 뛰며 놀랐다.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노련한 하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따라 주고 “좋은 밤 되십시오.” 하고 물러났다. 일로델은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화풀이로 벽을 한 번 더 걷어찼다. 그리고 뛰듯이 침실로 들어와 폭신한 시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망했다. 어머니를 본받아 냉정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주도하려던 계획이, 허를 찌르는 대꾸로 쫄딱 망했다. ‘사랑해’ 한마디로 녹다운당한 건 그였다.

일로델은 시트 안에서 몸부림치며 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말 하나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민망함이 온몸을 비비 꼬아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달콤한 연인 사이에나 주고받을 법한 소릴, 형이라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한단 말인가. 동생이란 놈이 동네 떠나가라 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전처럼 대놓고 해괴한 짓이나 했으면 좋겠다. 그에 대한 대책은 완벽하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랑해’가 튀어나오느냔 말이다. 이 갱생도 안 되는 미친놈들…!

그는 끙끙대며 침대를 굴렀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된다. 새로운 대응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더 획기적이고 형제들을 놀라게 할 방법 말이다. 그래야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도 심장이 평온하지 않겠는가. ‘사랑해’ 따위를 계속 곱씹으며 시트를 쥐어뜯을 일도 없지 않겠는가.

일로델이 발간 얼굴로 몸부림을 이어 갔다. 저녁이 지고 깊은 밤이 사르르 다가왔다. 이래서는 잠도 못 잔다며 한탄하던 그는, 어느 순간 색색 숨을 고르며 단잠에 빠졌다. 온 생각이 ‘사랑해’에 쏠려서 휘장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깜빡한 채였다. 둥글게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온 그림자가 침대의 휘장을 느슨하게 풀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일로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을 작게 다시기도 했다. 로건은 일로델 옆에 앉아 그가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별채에서 그랬듯, 숨을 죽이며 긴 시간 일로델의 옆을 지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로건이 참았던 숨을 짧게 뱉어냈다. 그는 곯아떨어진 동생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입술에 닿는 체온이 아이 때와 다름없이 따끈따끈했다.

“잘 자, 일로델.”

그가 낮게 속삭이자 일로델이 대답하듯 웅얼웅얼 잠꼬대했다. 그는 설핏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뜻의 미소였다. 그 어떤 권력자여도 모든 것을 얻을 순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일로델만이 아니었다. 로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로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훨씬 일찍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는 점이었다.

밖에서 부하 모릭스가 출발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로건은 아쉬움을 감추고 일어섰다. 겨우 돌아온 아이를 두고 떠나는 게 마땅치 않았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은 이상 마무리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일로델의 흐트러진 시트를 살며시 정돈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사라진 방에는 평온한 숨소리만 남아 길게 길게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