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2부 3권 (완결)} (16/18)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2부 3권 (완결)

4. (2)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사정을 하긴 했는지, 중간에 기절을 했는지, 떠오르는 것도 없고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일로델은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는 걸 느꼈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주변이 약간 서늘하고 어둠이 깊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 시간대는 밤인 듯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개굴개굴 우는 소리가 났다. 근방에 웬 개구리가 있나 보다 생각한 그때, 별안간 환희에 찬 외침이 들렸다.

“알, 알을 낳았습니다. 개구리가 알을 낳았어요!”

“쉿.”

차갑고 날카로운 주의에 방금 소리친 남자가 헙, 하는 소릴 냈다.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낮고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로건의 냉랭한 목소리였다.

“개구리가 알을 낳았다. 그래서?”

“그것이, 그러니까.”

몹시 긴장했는지 남자가 침을 꿀떡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났다. 일로델은 그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오르본이었다. 또 작당 모의를 하러 온 건가. 신경 쓰기도 귀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형제들이 무슨 개짓거리를 하든 간에 자신은 무력하게 당할 뿐이다. 눈도 뜨기 싫었고, 숨도 쉬기 싫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을 기력조차 없었다. 눈감고 멍하니 숨만 쉬는 동안 오르본이 벌벌 떨며 말했다.

“임, 임신을 확인하려면 개구리를 이용하는 게 정확합니다. 개구리에게 오줌, 아니, 소변을 투여해서 경과를 보는데, 만약 알을 낳으면….”

“…….”

“거의 완벽한 확률로, 임신이 확실합니다.”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 소리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로건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다정하게 휘어지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일로델은 로건의 만족 어린 시선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망망대해의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

사납게 변덕을 부리던 우기가 지나고 하늘이 파랗게 물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반짝 떠오른 햇빛 아래로 하인들이 묵혀 두었던 빨랫감을 들고 저택과 빨래터를 오갔다. 정원에서는 비에 눌린 꽃을 돌보는 정원사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사방에서 길목을 싹싹 쓸어내는 빗자루질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뒤뜰에서 개를 산책시키는지 왕왕 짖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잠시 후, 작은 소란이 일고 굳게 닫혔던 저택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곱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띠고 서로에게 이별의 인사를 했다. 그간 함께 지내며 필요 이상으로 친밀해진 자들은 아쉬움에 발을 떼지 못하며 서신을 주고받을 약속을 했다. 조금은 소란스러우면서도 들뜬 분위기였다.

갈 길이 바쁜 귀부인들이 먼저 양산을 쓰고 길을 나섰다. 문 앞을 지키던 군인들이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그녀들은 서로를 보며 즐겁게 웃다가 계단 아래에 멈춰 섰다. 그리고 좋은 시간을 만들어 준 주최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상대가 “돌아가는 길 평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하며 웃었다. 냉랭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의 미남자가 햇빛 아래서 우아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황홀하다는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잠시 로건에게 시선을 뺏겼던 귀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이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와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비밀스러운 유대감을 형성한 자들의 은밀한 표현이었다. 로건은 말없이 잘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부인들은 도도하게 부채를 펴들고 정문을 향해 걸었다. 부채 아래의 입술은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집무실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던 셰본이 등을 돌렸다. 책상 너머에 있던 그의 부관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뭔가?”

셰본이 먼저 물었다. 묵묵하게 서 있던 부관이 대답했다.

“바다로 나갈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우두머리가 잡혀서 해적 놈들도 몸을 사리고 있는데, 나가서 뭘 하자고?”

“숨어든 야만인 잔당을 처리하심은 어떤지요.”

“때가 되면 알아서 기어 나올 것을. 건드릴 필요 없으니 놔둬.”

할 말이 없어진 부관이 입을 다물었다. 셰본도 말을 잇지 않았다. 둘은 또다시 서로를 멀뚱히 바라봤다. 무감한 얼굴로 서 있던 셰본이 별안간 너그러이 웃었다.

“할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하게.”

“없습니다.”

“괜한 소릴 했군. 이미 눈으로 실컷 비난하고 있는데, 할 말이 있겠나.”

부관은 대꾸 없이 안경만 들어 올렸다. 그는 몸 쓰는 일은 쥐약이지만 머리가 좋고 무엇보다 일반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다. 셰본에겐 없는 것이었다. 자칫 상식을 벗어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셰본에겐 그 같은 참모가 다수 필요했다. 물론 늘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이번처럼 사사로운 집안일이 그에 해당하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황제의 동태는 어떻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헤롯은?”

“궁 밖에서 살해된 자가 발견되어 치안대를 구성해 범인을 찾고 계신답니다.”

“오, 바쁘겠군. 다른 소식을 들을 새도 없이 바쁘겠어. 가서 그거나 도와줄까?”

“아무리 빨리 가도 도착했을 즈음이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부관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러나 ‘다 끝나 있을 것’이라는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셰본이 입맛을 쩝 다셨다. 아무리 그라 해도 어찌 현 상황이 씁쓸하지 않겠는가. 후계로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남과 비록 베타지만 집안의 귀염둥이인 차남, 말썽쟁이긴 해도 제 할 일은 하는 막내까지, 겉으로나마 멀쩡히 유지되던 집안의 화목이 기어이 무너진 것이다.

그도 나름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틈틈이 로건의 동태를 살피고, 가끔 집에 들러 일로델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파악했다. 티베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던 건 인정하지만, 제국의 대공으로서 저택의 일만 신경 쓰고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걸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이 정도면 헤롯에게 변명이 될까? 뒤늦게 자식놈들의 소행을 알고 불같이 화낼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고 엎드려 살 각오는 이미 되어 있다. 그는 인내심이 강한 인간이었다. 로건이 그런 성질을 전부 물려받지 못했다는 게 원통할 정도로 말이다.

“아마 내일 오후쯤에는 뮬리 공작의 소식이 황궁에 도착하겠지. 큰 소란이 일 거야.”

“네.”

“출항은 모레 새벽이 좋겠군. 아들놈이 벌인 일이니, 아비로서 수습은 해야지.”

부관이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셰본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황녀의 일행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여타 귀족들처럼 로건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저택을 떠나갔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동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저택에 갇혀 지내며 셰본과 마주칠 때마다 경멸의 눈길을 던졌지만, 그뿐이었다. 정의로운 성격인 그녀가 불의에 눈감은 것은 그만큼 황위가 간절하다는 뜻이리라.

다만, 이상한 것은 로건이었다. 그는 황녀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다 집무실을 힐끗 돌아보았다. 셰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순간 셰본은 불길함을 느꼈다. 익숙한 오싹함이 그를 덮쳤다. 첫 무도회가 지난 새벽녘, 아들놈들을 관찰하기 위해 카드 게임을 했을 때 그는 무엇을 느꼈는가. 승률은 그와 로건이 반씩 가져가고 티베인은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다. 티베인 녀석은 과감하고 충동적인 만큼 수가 빤히 보여서 차라리 일로델이 상대인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로건은 크게 터뜨리지 않고 무난하게 승패를 반복했지만, 녀석이 승리를 가져갈 땐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정교한 느낌을 받았다.

다 읽었다고 생각한 수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가.

“헤롯. …헤롯이 뭘 하고 있다고 했지?”

“궁 밖에서 살인범을 색출하고 계신다는 보고입니다.”

“확실한가?”

“네?”

“……당장 출항하는 게 좋겠어.”

“네?”

“차를 준비해. 실톤 항구로 간다. 몇몇은 이곳에 남아 동태를 살펴라. 어서 움직여!”

셰본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하자 부관이 깜짝 놀랐다. 늘 여유로운 그가 소리를 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예삿일이 아니란 생각에 부관이 서둘러 움직였다.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가려 문을 열었을 때였다. 고요한 복도에 어수선한 발소리가 퍼지더니, 막 1층에서 올라온 하인들이 다급한 얼굴로 누군가를 부르며 찾아댔다.

이변을 느낀 셰본이 부관을 제치고 복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재빨리 창가로 돌아왔다. 조금 전만 해도 문 앞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로건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빈자리에서 하인들만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유리에 비친 셰본의 얼굴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

일로델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혼자 일어난 건 아니고, 티베인이 그를 훌쩍 들어 앉히더니 대형 쿠션을 가져와 몸을 기대게 했다. 그러더니 침대 테이블을 펼치고 하인 마노가 준비해 온 음식을 올려놓았다. 옥수수가 들어간 크림수프, 버터에 구운 고구마, 부드러운 식감의 빵과 과일들은 그나마 그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메뉴였다.

식사 준비를 끝낸 티베인이 수프를 한술 떠서 후후 불었다. 스푼이 일로델의 입가를 톡톡 쳤다. 일로델은 저항 없이 입을 벌려 수프를 받아먹었다.

“어때? 맛있지?”

주방장에게 빙의라도 했는지 티베인의 표정이 뿌듯했다. 일로델은 대꾸 없이 주는 대로 얌전히 먹었다. 포크로 잘게 썬 고구마를 집어 주면 입으로 녹여 먹고, 빵을 뜯어주면 오물오물 씹었다. 망고를 받아먹다 과즙이 흐르자 티베인이 기다렸다는 듯 턱을 싹싹 핥았지만,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일로델이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손목의 수갑이 짤랑짤랑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장장 1시간에 걸친 식사가 끝나고 티베인이 테이블 채로 침실 바깥에 두었다. 그는 물에 적신 타월로 일로델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고, 그러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빤히 쳐다봤다. 티베인이 피식, 하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거 알아? 나는 내 얼굴을 잘 모르겠어.”

“…….”

“너랑 닮은 거죽이 얼굴에 붙어 있어서 운이 좋았단 생각은 해. 거울 보면서 자위도 할 수 있고.”

일순간, 일로델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내비친 감정이었다. 일로델이 작게나마 반응하자 티베인이 짓궂게 웃었다.

“그 새끼가 내 애를 뱄다고 했을 땐 머리에 피가 솟구쳤지. 꼭 네가 그놈과 연분이 나서 나온 결과 같아서 말이야…. 억울해? 실제로 첫사랑이니 뭐니 헤헤거리고 다녔으니 가만 놔뒀으면 둘이 배를 맞췄을지 누가 알아.”

개소리.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티베인도 재미없는 농담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도박에 미친 사기꾼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나도 바보였어. 임신했다는 말에 꽂혀서 보이는 게 없었지. 잡아 족쳐서 의사에게 보이니 애가 있긴 있다더군. 일은 한 달 전에 쳤는데, 애는 들어선 지 4달이 넘었다지?”

“…….”

“그때 그 새끼가 내뱉은 소리가 가관이었지…. 사실은 너한테 강간당해 생긴 애라는 거야. 내가 그 소리를 믿었을 것 같아, 안 믿었을 것 같아?”

힘없이 그늘져 있던 일로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티베인은 일로델을 닦아 주던 타월을 내려놓고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아이가 매달리듯 간절하면서 고집스러운 몸짓이었다. 가슴팍에 묵직하게 기대오는 쌍둥이 동생을, 일로델은 아득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믿어 주든, 아니든, 혹은 여전히 그 새낄 강간한 수캐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이젠 됐어. 너는 어디에도 못 가니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해.”

티베인이 일로델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만지작대며 “더 가벼운 걸로 바꿀까? 팔찌처럼 가늘게 만들어 채워두면 관능적일 거야. 집안에서 후원하는 세공 장인이 있는데….”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로델은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느꼈다. 종종 미친놈이라 욕하곤 했지만, 지금에서야 티베인의 순수한 광기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사나우면서도 천진난만한 그 기운은 야생 들개 같은 티베인에게 퍽 잘 어울렸다. 지금 이곳에 자신이 알던 시끄럽고 성가신 동생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있어. 어떤 놈이 태어날진 몰라도, 바르게 잘 키워서 말썽 피우는 일 없게 해야지. 네가 애한테 신경 쓰느라 나한테 소홀해지면 이 짓거리도 다 헛수고잖아.”

“…….”

“좀 걱정이긴 해. 지금은 싫다고 징징대도 막상 애가 눈에 보이면 넌 절대 외면할 놈이 아니니까…. 눈빛이 반항적인데?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넌 진짜 귀여워.”

일로델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무시당하고도 기분이 좋은지 티베인은 더욱더 품을 파고들었다. 괜히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기도 하고, 납작한 배에 귀를 갖다 대고 숨을 죽이기도 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별채 안은 고요했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려 있어서 맑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작게 삐걱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우아하게 묶인 커튼 사이로 포근한 햇빛이 스며들고, 큰 창문에 이름 모를 곤충이 붙어 날갯짓을 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가운데 자신은 침대에 편안히 앉아 동생의 귀엽지 않은 애교를 받아주고 있었다. 녀석이 주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을 뿐이다. 괴상한 방법으로 임신을 했을 뿐이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말 아이일지 족제비일지는 알 수 없지만 태어나긴 한다면, 티베인 말대로 자신은 외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게 되는 것이다.

내키는 대로 감금하고, 임신하게 만들고, 사랑을 강요하고, 어쩌면 아이까지 인질로 잡게 놔두는 그런 삶을….

더는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이미 그럴 시기는 지났다. 자신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무서운 건, 그렇게나 정상으로 돌리고자 했던 관계가 갈수록 기괴하게 비틀렸다는 것이다. 헝클어진 실처럼 단단히 꼬여서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풀어낼 가망이 없었다. 그 상태로도 실의 역할은 하니 가만히 두고자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서 더 엉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이미 비틀리고 비틀려서 여기까지 왔다. 수갑을 차고 감금 아닌 감금 상태에 있는 건, 앞으로 있을 더 큰 문제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도 머리가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 성적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정도였고, 남들 다 가는 의무대도 번번이 떨어졌다. 당연히 모든 결정이 옳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빤히 보이는 미래를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정도로 얼빠진 인간은 아니었다.

“티베인.”

“응? 나 불렀어? 방금 나 불렀지?”

일로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들갑을 떨어대던 티베인이 씩 웃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주로 화해를 받아들일 때 저렇게 뿌듯한 얼굴을 했다. 늘 얕보이는 걸 알면서도 넘어갔던 건, 그래도 녀석이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수갑 풀어줘.”

“뭐? 안 돼.”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일로델은 물러서지 않았다.

“풀어줘.”

“왜, 뭐 하려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가만히 있어. 먹여 주고 재워 주니까 호강에 겨운 줄 모르고…. 아, 혹시 화장실 가고 싶어? 가서 오줌 쌀까?”

일로델이 손을 꽉 쥐었다. 제멋대로 주절대는 주둥이를 수갑으로 후려치고 싶어졌다. 그는 간밤에 청천벽력 같은 임신 소식을 들었다. 놀란 그를 보고도 만족스럽게 웃던 로건은 이내 잘 자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그 뒤로는 정신이 혼미하며 폭풍우에 난파한 선체처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는데, 몽롱했던 신경이 점차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다. 티베인과의 대화는 늘 불쾌함이 뒤따르지만, 가라앉은 호전성마저 일깨워 준다는 점에선 도움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풀어줘.”

“이제 오줌싸개라고 안 놀릴게. 손이 불편할 것 같으면 내가 고추 잡아 줄 테니까, 가자.”

“아무 데도 안 가. 그냥 풀어줘.”

“왜?”

“기분 나빠…. 팔도 아프고.”

기분 나쁘다는 말에는 뚱하던 티베인이 아프다는 이야기에 반응했다. 그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일로델의 어깨를 주무르더니 “근육이 뭉치긴 했네.” 하며 중얼댔다.

“많이 아프냐? 마사지해 줘?”

“거기만 아픈 거 아냐. 잠깐만 풀어주면 되잖아. 내가 뭘 하든 어차피 보고 있을 거면서….”

티베인이 난감한 듯 턱을 벅벅 긁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형이 풀어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

“진짜야. 지금 손님 배웅하러 나갔으니 오면 물어봐.”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죽이 척척 맞으셨나? 기가 막혀서 쳐다보자 티베인이 모른 척 딴짓을 했다. 일로델의 어깨도 주무르고 손목도 들춰 보더니, 아무래도 시선이 따가웠는지 옆에 벌러덩 누웠다.

“나라고 뭐, 형 말을 순순히 듣고 싶겠냐? 이게 다 네 탓이잖아.”

“…….”

“잘해 줄 때 이쁨이나 받을 것이지 괜히 일을 벌여서는. 그 인간이 잔꾀를 안 부렸음 어쩔 뻔했어. 기분은 나쁘지만, 형 말에 따르니까 안 될 것도 되고, 너도 내 옆에 있고….”

“…….”

“그러니까 안 돼. 아파도 참아. 그 정도도 못 참을 거면서 반항은 왜 했냐? 멍청한 자식.”

티베인이 팽하니 뒤돌아 누웠다. 일로델이 알 수 없는 눈으로 그의 동생을 보았다. 그의 것보다 조금 넓은 등이 시선을 느끼고 작게 꿈틀댔다. 그 상태로 아무 일 없이 시간이 지났다. 햇빛 사이를 힘없이 떠다니던 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일로델이 말했다.

“알았어.”

티베인의 등이 또다시 꿈틀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일로델은 말없이 수갑이 채워진 제 손목만 멀거니 보았다. 여느 때와 다르게 속내를 읽기 어렵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티베인은 그가 무언의 시위를 한다고 여겼다.

그런다고 풀어주냐. 어차피 오래 채워 둘 것도 아니다. 얌전히 제 처지를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장도 풀어줄 수 있다. 일로델이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지구력이 강한 편은 결코 아니다. 지쳐서라도 포기하겠지. 로건도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 전망했으니, 앞으로는 시간과 인내와의 싸움이다. 근데 점점 그놈의 하수인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근데 또 일이 척척 진행되니 말을 안 들을 수도 없고….

티베인이 떫은 생각을 하며 일로델의 팔을 주물러 줄 때였다. 묵묵히 있던 일로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나 머리 아파. 약 먹고 싶어.”

“또 두통이냐? 많이 심해? 벤한테 약 지어 오라고 할까?”

“그거 못 기다려. 내 베개 밑에 있는 거…. 꺼내 줘. 전에 봤잖아.”

베개 밑에? 아, 도토리 숨기듯 감춰놨던 그 상자 말이지. 누가 뺏어 먹을까 봐 꽁꽁 싸매고 있더니 드디어 먹을 작정인가. 티베인이 픽 웃으며 베개 아래 손을 넣었다.

근데 몸에 좋은 거라고 하지 않았나? 두통에도 효과가 있는 건가? 그는 약초 따위 관심 없었다. 일로델이 주니까 먹는 거지, 어차피 잘 통하지도 않는 거 무슨 효능이 있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마침 약초 상자가 손에 잡혀 나왔다. 안을 보니 이미 하나는 먹었는지 나머지 한 뿌리만 덜렁 남아 있었다. 티베인은 약초를 들고 괜히 킁킁거리다 일로델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먹는 거냐? 끓여서 주면 돼?”

나름대로 본 건 있어서 그렇게 묻자, 일로델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먹을 거야. 줘.”

“이걸? 흙도 묻었는데….”

“됐으니까, 빨리!”

하여간에 성질은. 언젠가는 저 버르장머리도 고쳐 주겠다 생각하며 티베인이 일로델에게 약초를 툭 던졌다. 그렇게 보채댈 땐 언제고, 일로델은 약초를 손에 쥐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언뜻 손이 떨리는 것도 같았다.

“…….”

이상함을 느낀 티베인이 무어라 말을 걸려 했을 때였다. 일로델이 눈을 꾹 감더니 약초를 마구 씹어 삼켰다. 방 안에 지독한 쓴 내가 훅 퍼졌다. 일로델 역시 괴로운지 욱욱거리면서도 약초를 씹는 입을 멈추진 않았다.

저게 뭔 미련한 짓인가 싶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던 티베인이 “괜찮냐? 과일 먹을래?” 하며 기웃댔다. 일로델은 그 좋아하는 체리도 싫다고 진저리를 치더니, 눕겠다며 몸을 꿈틀댔다. 티베인이 등 쿠션을 빼내고 일로델을 눕힌 뒤 시트를 덮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약 한 알이면 해결될 걸, 멍청하게 굴기는. 너 시위한답시고 이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

“뭘 해도 안 되니까 얌전히 누워 있어. 음, 드디어 손님들이 떠나는가 보군. 속이 다 시원하네.”

티베인이 문득 창밖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조용하기만 한 별채 안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일로델도 그쪽에 시선을 두었지만, 흐드러진 나뭇잎이 흔들리는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떠나가면 이 거대한 저택 안에는 그와 티베인, 로건만이 남게 된다. 하인들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 아버지…. 아버지도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무도회장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사태를 모르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다. 혹시 자신처럼 어딘가에 감금된 건 아니겠지. 부모님을 해치겠단 소리도 서슴지 않고 해대던 형이니,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거라고 믿고 싶은 건, 너무 못된 생각인 걸까.

티베인이 마사지를 하겠다며 그를 엎드리게 하고 등을 주물렀다. 소리 없이 흐른 눈물로 시트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티베인이 밉고 싫었다. 늘 싸웠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사라진다면 허전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이 넓고 조용한 저택에서 그나마도 티베인의 치근거림이 없었다면 그는 외로움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로건은 언제나 완벽한 형이었다. 형은 자신의 몇 없는 자랑거리였으며 우상이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형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믿음을 배신당했을 땐 아무것도 인정하기 싫었다. 자신이 믿었던 것이 거짓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고 완벽한 형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다.

신과 같은 존재면서 다정하고 완벽한 형이 뭐지?

없어지길 바라면서 필요할 땐 있길 바라는 동생은 뭐고?

그저 자신의 이기적인 바람이 아닌가. 누가 한 핏줄 아니랄까 봐 자신이나 그들이나 하는 짓이 똑같다.

형제들의 마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광기’라고 표현하고 싶은 그 긴 섹스 시간 동안 형제들은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했다. 때로는 거칠고 강압적으로, 때로는 세뇌하듯 다정하게 속삭이며 끝없이 밀고 들어왔다. 며칠이고 계속된 그 행위는 도리어 애원에 가까웠다. 미쳐 있는 애원도 애원이라면 말이다.

“일로델?”

변화를 먼저 알아챈 사람은 티베인이었다. 일로델의 몸이 급격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등과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겨드랑이의 체온을 확인했다. 뜨겁긴커녕 미약하게 남은 온기조차 식어가고 있었다.

일로델도 몸의 이상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체온이 떨어지자 몸이 마구 떨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독초가 아닌가. 더군다나 중매인이 꼭 달여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을 정도로 독한 약이다. 어쩔 수 없이 겁이 덜컥 났다. 그가 몸을 잔뜩 말고 끙끙거리자 티베인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왜 이래? 왜 이러냐고! 몸이 너무 차가워!”

“윽, 윽…. 나, 아파, 티베인….”

“이런, 젠장. 밖에 누구 없어? 아무나 빨리 들어와! 빨리!”

방에서 큰 소리가 나자 하인 마노와 군인들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티베인이 일로델을 끌어안고 “벤을 불러와, 오르본 그 새끼도. 어서!” 하고 고함쳤다. 그사이 일로델의 낯빛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변한 상태였다. 군인들과 마노가 사색이 되어 별채를 뛰쳐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뭐냐고. 일로델, 일로델….”

티베인은 식어가는 일로델을 안고 온몸을 비벼대다, 그걸로는 부족하자 벽난로를 태우고 뜨겁게 데운 돌을 천에 싸서 일로델의 품에 넣어주었다. 손목의 수갑도 풀어 던져버리고 편한 자세로 눕혔다.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방 안이 달아올랐지만, 일로델의 몸은 갈수록 차갑게 식어갔다. 떨림마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일로델, 정신 차려! 나 보여? 나 보이냐고?”

“티, 티베인….”

“너 아까 먹은 거 뭐야. 좋은 거 아니지? 이 개자식, 나를 또 속였어! 좋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 보니까 좋아? 눈 감지 마. 의사 불렀으니까, 제발 기다리라고!”

“아파…. 흣, 아파. 욱….”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던 일로델이 일순 몸을 뒤틀었다. 속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일로델은 본능적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흰 시트가 핏물에 점점이 물들었다.

“…….”

그 광경을 본 티베인이 숨도 쉬지 못하고 굳었다. 그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감각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갑자기 내장이 녹아내리듯 뜨거워지고 몸에 오한이 일었다. 일로델처럼 피를 토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만 그러할 뿐 밖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없었다.

티베인은 일로델과 함께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가진 고통의 반이라도 떼어 오고 싶었다. 하지만 피를 토하며 울고 있는 사람은 일로델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티베인은 모든 사고가 마비됨을 느꼈다.

*

로건이 막 별채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에서 웬 괴성이 울리고 있었다. 로건은 걸음을 빨리해 별채로 들어갔다. 안의 풍경은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실 밖에선 자해하는 티베인을 말리느라 군인 셋이 악전고투 중이었고, 하인들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로건을 발견한 하인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로건 님! 일로델 님이…!”

로건은 하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실로 들어갔다. 바깥의 소란과 상관없이 방 안은 햇빛에 감겨 고요하고 포근했다. 침대는 창문과 꽤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순백의 시트를 휘감고 눈을 감고 있는 일로델은 마치 자는 것처럼 보였다. 입가와 시트를 물들인 핏자국은 붉은 추상화 같았고, 티베인의 괴성은 오페라의 음산한 아리아처럼 들리기도 했다.

로건이 침대로 다가가 일로델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자 미약하게 앓던 일로델이 눈을 움찔거렸다. 눈을 뜨려 해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는지, 일로델이 “형님….”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형이야. 늦어서 미안해, 일로델.”

“아파, 무서워요….”

“괜찮아. 괜찮을 거야. 형이 계속 옆에 있을게.”

“너무 아파요, 형….”

“네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해 줄까? 어머니가 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직위는 없지만, 황궁 내의 권력은 어머니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금 황제를 진짜 황제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어머니의 결정이 없으면 대신들이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래서 계속 어머니를 궁으로 불러들였던 거야. 물론 괴롭히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일로델? 많이 졸려? 이런, 이야기가 재미없었나 보군.”

로건이 조용조용 이야기하던 그대로 옅게 웃었다. 일로델은 서서히 감각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몸을 괴롭히던 추위는 무뎌진 지 오래였고, 커다란 손이 끊임없이 머리를 넘기고 뺨을 쓸어 주는 움직임도 점차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아프다고 중얼거리던 말도 마침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졸리고 졸렸다. 숨을 쉬는 것도 귀찮을 만큼….

가파르게 움직이던 일로델의 가슴팍이 천천히 운동을 멈췄다. 로건의 부드러운 손길도 함께 멈췄다. 그의 표정은 길게 늘어진 휘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차갑게 굳은 입매로 짐작할 뿐이었다.

“일로델, 착한 내 동생. 일어나야지.”

“…….”

“일로델?”

“…….”

“안 돼….”

마지막 말은 꺼질 듯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 속에 담긴 떨림까지도.

죽을 때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감각이 청각이라 하더니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일로델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마음처럼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뺨에 닿아 있을 로건에 손에 최대한 얼굴을 파묻고 가볍게 비볐다. 무슨 의미인지는 그 자신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굳이 말해 보자면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만에 하나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않길 바랐다.

방법도, 형태도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형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자신이 사라지면 슬퍼하겠지. 티베인은 말해 뭐 할까, 따라 죽겠다고도 할 놈이다.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멍청하니 결국 일을 그르친다. 누구에게인지 모를 작은 미안함과 후회가 미련으로 남았지만, 결국 의식과 함께 저 끝으로 사라져 갔다.

“…….”

티베인의 괴성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는 넋이 나간 듯 비틀대더니 자해하느라 휘두르던 검을 내던졌다. 때마침 주치의 벤과 조수들이 들이닥쳐 다급하게 침실로 향했다. 티베인이 저를 부축한 자들을 밀쳐내고 그 뒤를 따랐다. 몸을 가누지 못하던 그는 침실에 들어서 기어가듯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나 늘어선 조수들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아무나 잡고 내던지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으악!”

“대위님, 대위님,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짜 안 돼요!”

“놔, 새끼야! 죽고 싶어? 총 어딨어. 다 쏴 죽일 테다.”

“안 되겠다, 총부터 찾아서 치워! 빨리!”

티베인의 부관인 말론 중사부터 군인 여럿이 달려들어 그를 억눌렀다. 그사이 벤이 인공호흡기를 설치하고 로건이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자다가 달려온 오르본은 덜덜 떨면서도 자신의 집에서 뭔가를 가져다 달라며 끝없이 하인들에게 메모를 건넸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빈 저택에서 하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군용 차량 여러 대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길 반복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시간 감각을 잃었다. 정신이 없으니 아직 해가 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연히 새로운 손님이 별채에 방문했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헉.”

천 뭉치를 들고 막 별채로 뛰어들던 하인이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숨을 삼켰다. 뒤늦게 새로운 기척을 알아본 군인들도 방문자를 확인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사색이 되었다. 방문자는 막 도착하여 신발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딱딱한 얼굴로 별채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지?”

질문을 받은 하인이 시선을 틀고 대답을 피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무례한 짓이었다. 방문자는 대공 가문의 안주인이자 황실의 핏줄을 이은 고귀한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성격이 불같아서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호통이 떨어질 것을 예감하며 하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질타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별채를 일로델의 공간으로 바꾼 뒤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내부를 훑다가 분주함이 느껴지는 지점을 보았다. 방문이 닫혀 있는 그곳은 침실이었다. 그 앞을 지키던 군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헤롯은 주저 없이 다가가 직접 방문을 열었다.

“마침 왔군! 피가 멈추질 않아. 빨리 천을 가져와!”

“…….”

“뭐 하고 있어, 위험한 상황이야! 빨리….”

팔을 뻗으며 재촉하던 주치의 벤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시작으로 모두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방문자를 돌아보았다. 코끼리용 진정제를 맞고 구석에 쓰러진 티베인은 예외였다. 물론, 피 칠갑을 하고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일로델 역시도.

돌처럼 무거운 침묵이 침실을 내리눌렀다. 일로델의 곁에 앉아 있던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회색 제복이 핏물로 검게 얼룩져 있었다. 그늘진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가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는 것도 무시하고 헤롯은 침대로 다가갔다. 흰 시트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고, 그 밖에도 피를 닦아낸 천 뭉텅이가 산발적으로 널려 있었다. 그 어떤 살해 현장도 이처럼 끔찍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그렇게 아끼던 둘째 아들이 피해자라면야.

“일로델, 내 아가!”

헤롯의 절규가 별채 곳곳을 뒤흔들었다. 조심스럽게 응급 처치가 재개된 후에도 그녀는 일로델을 붙잡고 울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잘 안다는 드윈 남작 부인조차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공식적으로는 처음 눈물을 보이는 것이었다.

별채 밖으로도 숙연한 분위기가 전달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던 셰본이 답답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헤롯의 부하들에게 막혀 꼼짝도 못 하는 신세였다.

밤하늘에 떠오른 별 두 개가 비겁한 자들을 비웃듯 총총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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