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무도회 첫날이 밝았다.
저택 안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식당에서는 하인들이 음식을 나르느라 여념이 없고 로비는 새벽 일찍 도착한 생화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 곳곳에는 조명이 반짝였고 무도회가 열릴 커다란 홀은 악단이 음을 맞추느라 시끌벅적했다. 예정보다 빠르게 모여든 객들이 정문을 넘어서자 저택은 벌써부터 무도회 분위기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에 반해 별채는 한산했다. 커튼이 쳐진 내부는 어두컴컴했고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고요했다. 일로델은 늦게서야 부스스 일어나 저를 깨운 하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으로 은사가 아름답게 얽힌 가면 하나가 내밀어졌다.
“뭐야…?”
“오늘 저녁 착용하실 가면입니다.”
오늘? 오늘이 무도회던가. 실감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날이 오긴 온 모양이다. 일로델은 하품을 쩍 하며 마노에게서 가면을 받아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이걸 쓰고 뭘 하는 거지. 연극이라도 하나? 유행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별나기도 하고, 공교롭기도 하고….
일로델은 말없이 가면을 내려보다 구겨지지 않게 품에 잘 챙겨 넣고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마노가 가운을 팔에 걸치고 다가왔다. 손에는 낯익은 가면이 들려 있었다. 일로델이 그것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건 뭐지?”
“아, 이건 티베인 님에게 드릴 가면입니다.”
일로델의 미간이 슬그머니 구겨졌다.
“내 거랑 똑같잖아.”
“네. 두 분께서 쌍생아이시니 같은 것으로 주문하였습니다.”
잠깐. 누구랑 같은 걸로 주문해? 가뜩이나 쌍둥이로 태어난 것도 속이 뒤틀리는데, 가면 나부랭이까지 똑같은 걸 쓰라고? 일로델의 이마에 혈관이 톡 튀어나오자 실수를 직감한 마노가 목을 거북이처럼 집어넣었다.
“내가 그 자식이랑 같은 물건 쓰는 거 봤어? 누구 마음대로 똑같은 걸 주문하래!”
역시나 불호령이 떨어지자 마노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그 자식한테 아무것도 주지 마!”
“저, 저녁 무도회 테마가….”
“멧돼지 머리나 쓰라고 주든가! 가면은 안 돼. 옷도 내 거랑 똑같은 걸로 주지 마. 아니, 아예 벗고 나오라고 해. 야만인한테는 그게 어울려!”
제자리에서 펄펄 뛰던 일로델이 마노의 손에 들린 가면을 거칠게 뺏어왔다. 그리고 있는 힘껏 구기려다 손을 멈췄다.
“…….”
잠시 고민하던 일로델이 가면을 잠옷 상의 안에 잘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언제 왔는지도 모를 티베인이 문가에 서 있었다. 일로델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상의를 꽁꽁 여몄다.
“뭐 이렇게 캄캄해? 토끼굴이 따로 없군.”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티베인은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와 커튼을 휙 열어젖혔다. 어두웠던 방 안으로 햇빛이 따갑게 쏘아 들어왔다. 일로델은 빛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가 다시 티베인을 돌아보았다. 제복을 말끔하게 갖춰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손질한 모습이 몇 번이고 훑어보게 될 만큼 낯설었다.
“아침부터 아주 기운이 넘쳐. 요 며칠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 오늘은 바깥까지 깽알깽알….”
“…….”
“괜히 문 앞에서 고민했지 뭐야. 큼.”
티베인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일로델을 흘깃거렸다. 약간 멋쩍은 듯한 눈초리였지만 일로델에겐 음흉하고 사악하고 수상쩍게만 비쳤다. 정신이 번쩍 든 일로델이 마노에게서 가운을 뺏어 와 소름이 돋아난 맨살을 시야에서 가렸다.
호텔에서의 난동 이후로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슬슬 활동을 결심한 모양이지. 형이나 티베인이나, 어차피 무도회까지 얌전히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일로델은 품 안에 챙겨 놓은 가면이 잘 있는지 확인하곤 고개를 들어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나가.”
“그래, 나가 봐.”
티베인이 마노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일로델의 미간에 금이 팍 갔다.
“너 나가라고.”
“나가라잖아, 너.”
티베인이 마노에게 으르렁댔다. 마노는 찔끔해서 일로델의 눈치를 보다가 티베인이 위협적으로 이를 내보이자 마지못해 공손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일로델은 살짝 기운이 빠졌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어디 이뿐이던가. 일일이 화내 봐야 쓸데없이 기력만 빨린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너도 나가.”
“뭐, 바쁘냐? 얘기 좀 해.”
“싫어, 강간범아.”
티베인이 불시에 급소를 맞은 듯 숨을 멈췄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창밖에서 맑은 새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멈춘 듯 굳어 있는 티베인을 보며 일로델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턱을 쳐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사나운 욕설이 아닌 짧은 한숨이었다.
“너는 할 말이라곤 그런 것밖에 없냐? 내가 좀 가르쳐 줘?”
“네가 뭔데? 발정 난 개 주제에.”
티베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 나도 오늘 저택 경비를 맡아서 바빠. 얘기만 하러 온 거야.”
“듣기 싫어.”
“듣기 싫어도 들어… 줘. 아니면 끝까지 쫓아다닐 거니까.”
지긋지긋한 거머리 같은 자식. 꼴도 보기 싫어서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를 집어 던졌다. 눈두덩이에 맞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티베인은 오렌지를 받아 슥슥 닦고는 앞주머니에 소중하게 챙겼다. 정말이지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빨리 지껄이고 꺼져! 나도 바빠!”
“몸은 좀 괜찮냐?”
딱 한 마디만 듣고 내쫓으려던 일로델이 흠칫해서 티베인을 보았다. 몸은 좀 괜찮냐니.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고 하는 말인 걸까? 티베인은 짐승 같은 놈이다. 냄새로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에게 다녀온 것까지 알고 있으면 어떡하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불안함을 느낀 탓인지 겨우 멎었던 헛구역질이 재발할 것만 같았다. 일로델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뜻이야?”
“내가 그날, 너한테 좀 그랬잖아. 호텔에서, 때리고, 소리도 치고….”
티베인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았다. 일로델은 몰려드는 허탈함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꽉 눌러 참았다.
“하필 그때 발정기가 와서, 좀 그랬어. 전에도 말했잖아. 발정기 오면 내가 좀, 그렇게 된다고.”
“뭐?”
“암튼 그날 그래서, 내가, 마음이 좀 그렇다고.”
“대체 뭐라는 거야?”
일로델이 짜증을 확 내자 티베인도 덩달아 버럭 소리쳤다.
“아, 설명을 해야 아냐? 잘못했다고!”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게 그것뿐이야? 내가 얼마나, 내가…!”
“그러니까 사과하러 온 거 아냐! 잘못했다니까?”
“닥쳐! 기어 다니면서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큰소리를 쳐?”
“그럼 기어 다닐까? 그거면 돼?”
티베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일로델이 테이블에 놓인 바나나와 청포도를 마구잡이로 떼서 티베인에게 던졌다. 티베인은 아까처럼 과일을 받아내지 않고 얌전히 맞거나 조금씩 피하기만 했다. 일로델은 더욱더 약이 올라 테이블을 장식한 나뭇잎도 던지고 과일이 담겼던 소쿠리도 집어 던졌다. 나이프가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더는 던질 게 없어서 씩씩거리는 일로델의 앞으로 나뭇잎 두어 개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다 했어? 더 해. 화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 뭣하면 고문을 해도 되고.”
“뭐라고?”
“아, 그렇지. 무도회에 옷 벗고 나갈까? 지금 당장 멧돼지 머리는 구하기 어렵겠지만….”
일로델이 냅다 베개를 쳐들고 티베인의 면상을 후려쳤다.
“이 더러운 야만인 자식! 나랑 비슷한 얼굴로 무슨 짓을 하겠다고!”
“네가 하라며. 아, 그래, 때려. 화 풀릴 때까지 쳐.”
크고 폭신한 베개가 티베인의 머리, 뺨, 턱으로 퍽퍽 내리꽂혔다. 터진 베갯잇 사이로 거위 깃털이 풀풀 날리고 티베인의 깔끔했던 머리는 새 둥지처럼 산발이 됐다. 그럼에도 일로델의 끓는 속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목구멍 밑까지 화기가 묵직하게 들어차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티베인과 늘 싸우기만 했다면 초저녁에 말도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됐을 것이다. 놀랍게도 가끔은 화해라는 걸 했다. 지금보다는 어릴 때의 얘기긴 하지만, 티베인에게 힘으로 밀리고 울고 있으면 얄미운 자식이 등을 툭툭 치고는 품 안에 과일이나 케이크 같은 주전부리를 안겨 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침 뗀 얼굴로 졸졸 따라오는 것이다.
그 같잖은 행동이 화해의 제스처라는 걸 일로델도 모르진 않았다. 하루 만에 받아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냉전이 오래가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수년에 걸친 길고 긴 냉전에 가까웠다. 동생이라는 놈이, 형제 사이의 다툼을 넘어 간음까지 범하지만 않았더라면.
“왜, 그만하게?”
“…….”
“그럼 밥이나 먹고 나가자고. 밖에 사람이 얼마나 우글거리는지 모르지? 정원에서 주는 디저트로는 배 채우기 글렀어.”
티베인이 밖으로 나간 마노를 찾았다. 그사이 일로델은 천천히 베개를 내려놓고 협탁에서 종이와 펜을 찾아왔다. 티베인이 떨떠름하게 그것을 보았다.
“뭐야?”
“나는 너 때려 봐야 화 하나도 안 풀려.”
“그러면?”
“앞으로는 그 짓, 안 하겠다고 맹세해.”
단호한 말에 종이를 받아들던 티베인이 멈칫했다.
“거기다 써. 나 티베인은 형님 일로델에게 영원히 발정하지 않겠다고, 거기 써서 맹세해.”
티베인은 말없이 누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받으려는 것처럼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더니 종이 표면을 손톱으로 툭 쳐서 날렸다.
“질리지도 않는군.”
“…….”
“그냥 나를 후려치는 게 나을걸? 그게 더 마음 편한 길이야. 장담해.”
시침 뗀 표정을 벗어 던진 티베인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일로델은 놀라지 않았다. 사막의 밤낮처럼 변하는 그 모습이 동생의 본색이라는 것도 이제는 잘 알았다. 어울리지 않게 사과는 무슨 사과. 예전처럼 적당히 구슬리고 넘어갈 생각인 모양인데, 그 정도로 속에 켜켜이 쌓인 것이 풀어질 것 같았으면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일로델이 턱을 들고 묵묵히 직시하자 티베인이 언젠가처럼 꺼림칙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미묘한 공기가 방 안을 휘감은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당황한 표정의 마노였다.
“일로델 님, 본채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뮬리 공작께서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로건 님께서는 아직 저택으로 오고 계신 중이라 일로델 님께서 맞이하셔야 합니다.”
마노가 서둘러 달라는 듯 문을 열고 바깥을 손짓했다. 일로델은 아직 잠옷 차림인 저를 내려보고 귀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티베인을 지나치다가 문득 생각나 종이와 펜을 건넸다. 티베인은 그것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삐딱하게 서서 일로델만 바라보았다.
“하기 싫으면 마. 나도 너 용서 안 해.”
손에 든 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일로델이 마노와 함께 방을 나갔다. 뭉개진 과일과 깃털로 난장판인 가운데 티베인 홀로 남았다.
“용서 안 해? 귀엽기는.”
티베인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그는 발밑에 뒹구는 종이에 대문짝만한 글씨로 ‘일로델의 영원한 수캐, 티베인’ 같은 멋진 문구를 적어 넣을까 고민하다가 충동을 억누르고 지저분한 옷을 탈탈 털었다. 아무나 불러와 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물건이 눈에 잡혔다. 언젠가 일로델이 약초가 담겨 있다며 보여준 상자였다.
“…….”
티베인은 길쭉한 네모 모양의 나무 상자를 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처음에 본 그대로 두 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뭐랬더라. 몸에 좋은 거라고 했던가? 혹시 로건이 선물한 건가 싶어 심술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괜한 짓 말고 자리에 놔두기로 했다. 여기서 더 신경을 건드렸다간 저 예민한 것이 울화증으로 꼴깍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티베인은 일로델이 휘둘렀던 베개를 들고 와 상자를 잘 감춰 주었다. 그리고 막 차림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 일로델의 뒤를 졸졸졸 쫓았다.
*
폭우와 쾌청함이 공존하는 사막의 우기답게 하늘이 무섭도록 맑았다. 저택의 수많은 창문에 반사된 햇살이 정원 잎사귀를 찬란하게 비추고,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산책로에 심어둔 홍접초가 가녀리게 흔들렸다.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숙녀들은 저마다 양산을 들고 대저택의 정원을 감상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새 모이를 주며 시간을 보냈다. 신사들은 샴페인을 들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인들이 쟁반을 들고 분주하게 그 사이를 지나다녔다.
일로델은 신기한 눈으로 정원을 훑었다. 무도회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 삼 일째 저녁에 끝을 맺는다. 그와 별개로 바다 건너 멀리서 오는 손님을 생각해 저택 문을 일찍 개방했는데, 이른 시간부터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어느새 걷는 속도를 조절하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로델에게 하인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일로델 님.”
“그래.”
그 뒤로도 인사가 줄줄이 이어지자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셔츠 차림의 예민한 인상인 일로델과 총으로 무장하고 걷는 티베인은 차라리 주인과 호위병 같은 모습이었지만, 서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대공가의 유명한 쌍둥이 형제라는 걸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눈치 빠른 귀족들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건넸다. 일로델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티베인은 주변에 이상한 놈이 없는지 눈을 부라리면서도, 별채에서와 달리 의젓한 태도의 일로델을 보며 뿌듯해했다. 첫 무도회라고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얼굴이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기야 사람 많은 걸 좋아하는 놈이 오죽할까. 집안이라는 든든한 백도 있겠다, 중앙 정치에 발을 들였다면 꽤 유명해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너무 믿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거야 아랫놈들이 알아서 쳐낼 일이지. 일로델은 연회가 있을 때마다 예쁘게 빼입고 뭇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티베인은 일로델의 하얀 정장을 하나하나 벗기는 상상을 하며 헤벌쭉 웃다가 정신을 차렸다.
안 될 일이지. 지금도 골치 아픈데, 일로델이 권력까지 가지면 모든 것은 정말로 상상에만 그칠 것이다. 혹은, 어쩔 수 없이 파멸에 이르거나.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며 티베인은 일로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대위님, 대위님!”
저 멀리서 군인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티베인의 부관인 말론 중사였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일로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빼빼 마른 군인을 신기하게 보았다.
“죄송합니다, 대위님. 잠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저택이 너무 넓고 복잡해서요. 그게, 아직 경비 인력의 배치가….”
일로델의 시선을 받은 말론 중사가 그를 힐끔거렸다. 상관의 형제가 쌍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게 생긴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좀처럼 눈알을 가만두지 못하던 그는 티베인에게 대차게 무릎을 까이곤 눈물을 쏙 뺐다.
“얘기하다 말고 어딜 자꾸 쳐다봐? 목숨이 여러 개야? 엉?”
“죄, 죄송합니다. 대위님과, 동생분이 많이 닮으셔서.”
“쟤가 내 형이야! 얼빠진 새끼, 이걸 확.”
티베인이 버럭 화내며 손을 치켜들자 일로델이 그의 팔을 잡아챘다. 움찔 놀라며 돌아보는 티베인에게 일로델이 주변을 눈짓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가 봐. 네가 필요하다잖아.”
“…….”
티베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로델이 내버리듯 팔을 놔주었다. 티베인은 잡혔던 자리를 손으로 쭈물거리며 씩 웃었다. 사나운 상관의 눈치를 보던 말론 중사가 흠칫할 정도로 소년 같은 미소였다.
“이봐, 본채로 가면 쟤 배부터 채워놔. 가만 놔두면 객들 상대한다고 굶을 놈이야.”
티베인의 손짓을 받은 하인 마노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똑바로 해. 바로 다녀와서 확인할 거니까.”
빼놓으면 서운할 협박을 마지막으로 티베인이 말론 중사를 끌고 사라져 갔다. 퍽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일로델은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공손히 기다리고 선 마노에게 명령했다.
“식사 챙길 것 없어.”
“…….”
당황한 마노가 한 박자 늦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일로델은 차가운 얼굴로 마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티베인의 명령이 고깝지 않았더라도 아침 식사는 필요가 없었다. 맞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구역질이 다시 시작될 테고, 그러면 눈치 빠른 형제들이 낌새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정말 벗어나고 싶다면 신중하고 은밀하게. 일로델은 오셀의 조언을 되새겼다. 다행히 물기 많은 채소와 과일은 먹을 수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다. 이런 식단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의심을 받겠지만 최근 식사를 자주 걸렀던 게 도움이 되었다.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며 오늘 하루를 넘겨야 했다. 그러고 나면 선생님이 올 것이고, 그가 벌어 준 시간을 이용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설령 일이 틀어진다 해도 괜찮았다. 반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형제들에게 조금이라도 본때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오셨습니까, 일로델 님. 귀빈들께선 홀에 모여 계십니다.”
현관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상급 하인이 반갑게 맞았다. 일로델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그에게 물었다.
“누가 왔다고 했지?”
“뮬리 공작님입니다. 공작님의 자제분과 선 대공비께서 일행으로 함께 오셨습니다.”
“할머님께서?”
일로델이 깜짝 놀라 멈춰 서자 하인이 맞다는 의미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수그렸다. 일로델은 잠시 복잡한 얼굴로 서 있다가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를 지나 거대한 홀로 들어섰다. 평소 사용할 일이 없어 굳건히 닫혀 있던 그 공간은 어느새 화려하게 탈바꿈되어 귀족들의 연회장이 되어 있었다.
간이 파티가 진행 중인 홀을 낯설게 두리번거리던 일로델은 동그랗게 모여 있는 무리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로델 록퍼스입니다. 저희 가문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년 신사가 고개를 돌렸다. 자줏빛 정장을 빼입은 그는 턱을 꼿꼿이 들고 일로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반갑게 어깨를 부여잡았다.
“자네가 록퍼스 가문의 차남이라고? 이거 반갑군!”
갑작스러운 소란에 홀 안의 시선이 쏠렸다. 점잖게 악수를 나눌 거라 예상했던 일로델은 난데없이 어깨를 붙들려 당황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는 동안 하인에게 들은 인상착의로 보아 그는 귀빈 중 하나인 뮬리 공작이었다. 본래 아버지나 후계자인 형이 맞이해야 하는 손님이나, 자신의 인사에도 구김살 없이 받는 것을 보면 깐깐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화통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형이 부대에 나가 있던 참이라 제가 먼저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네. 나는 선 대공비인 고모님의 조카이지. 자네와 먼 친척이니 경직되어 있을 것 없어. 아, 여긴 내 모자란 아들 프레디일세. 인사들 나누게.”
뮬리 공작 옆에 있던 붉은 머리의 청년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일로델도 마주 미소 지으며 손을 맞잡은 순간, 프레디가 손아귀에 힘을 꽉 주며 팔을 비틀었다. 깜짝 놀란 일로델이 어깨를 움츠리자 프레디가 콧등으로 웃으며 악수한 손을 내던지듯 놓았다. 뮬리 공작이 껄껄 웃으며 프레디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슷한 나이이니 잘 지내게. 이 기회에 친구가 되어 왕래하는 것도 좋겠지. 자네는 집에서만 지내니 바깥일에 통달한 우리 프레디가 좋은 선생이 되어 줄 거야.”
“아, 네….”
일로델은 껄끄러운 얼굴로 대답하며 욱신거리는 손을 주물렀다. 힘 조절이 안 된 걸까? 그렇다고 손이 붉어질 정도로 잡아 비트나?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아무도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다지 별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로델은 호기심 가득한 귀족들의 시선에 둘러싸인 채 어색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풍채 좋은 노인이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로델을 푹 끌어안았다.
“내 귀염둥이가 왔구나!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니. 내 예쁜 강아지!”
갑작스레 습격당한 일로델이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에도 힘이 장사인 그녀는 일로델을 끌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아기처럼 그녀의 품에 안긴 일로델은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뀌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 할머님.”
“이 녀석, 나를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단다. 록퍼스 부인이라고 해야지. 린다, 단것을 가져오너라. 아기는 단맛을 좋아해.”
동그란 눈의 하녀가 “네, 부인.” 하고는 급히 푸딩을 가져왔다. 록퍼스 부인이 스푼으로 푸딩을 떠서 일로델의 입가에 대주었다. 일로델은 숫제 식은땀마저 흘리며 그것을 보았다.
“왜 먹지 않니? 어서 먹으렴, 티베인.”
“…….”
“내 귀염둥이. 너라도 알파로 태어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많이 먹고 빨리 커서 대공 자리를 이어야지. 내가 셰본에게 말해 너를 후계자로 올리게 할 테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쑥쑥 크려무나.”
스푼이 입가를 톡톡 쳤다. 일로델은 주저하다가 작게 입을 벌려 푸딩을 먹었다. 록퍼스 부인이 옳지, 하며 또다시 푸딩을 떠 주었다. 이번에는 일로델도 얌전히 받아먹었다. 조용해진 가운데 어디선가 킥, 하는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곧 불길처럼 번져 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록퍼스 부인의 하녀인 린다 역시 민망한 듯 웃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부인, 그분은 티베인 님이 아니라 일로델 님이세요. 이제 아기가 아니라 다 크셨고요.”
“응? 누구?”
“티베인 님의 쌍생아이신 일로델 님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단다. 그리고 이렇게 아기 같은데 어떻게 다 컸다는 게야. 아직 페로몬도 잘 느껴지지 않잖니.”
그 말에 킥킥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린다가 자못 미안한 얼굴로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부인께서 병환이 깊으셔서…. 아시죠?”
일로델은 고개를 끄덕거리지도 않고, 린다에게 시선을 주는 일도 없이 얌전히 푸딩만 받아먹었다. 린다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숨죽여 웃었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만큼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일로델 본인과 록퍼스 가문에 소속된 하인들 말고는 없었다.
홀 내부를 총괄하던 상급 하인이 조용히 복도로 빠져나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했지만 펄펄 끓는 속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북부 출신 귀족들의 망신 주기는 황궁 사교계의 유구한 악습이었다. 설마 남부 태생인 그의 주인이, 그것도 버젓이 집 안에서 그 꼴을 당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홀에 있는 게 전부 공작 쪽 사람들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아니, 알았어도 하인 신분에 무슨 도리가 있을까. 그들은 황녀와 혼인 이야기가 나오는 일로델의 기를 죽이는 한편, 부마의 자격이 없다고 깎아내리기 위해 오늘까지 벼르고 별렀을 터.
“저렇게 그냥 둬야 해요? 네?”
하인 하나가 그의 뒤를 따르며 씩씩거렸다. 얼마 전에 둘째 주인에게 돈을 뜯기고 꽁해 있던 녀석이 열을 낼 정도이다. 다른 하인들의 속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일로델 님을 빼 오면 안 되나요?”
“쓸데없는 소리. 저기 계신 분이 누군지 몰라? 부인 앞이니 일로델 님도 가만히 계시는 거야.”
“답답해서 그렇죠!”
“괜한 짓 말고 티베인 님을 모셔와. 빨리.”
하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드넓은 저택에서 셋째 주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복도 끝에서 천군만마처럼 듬직한 로건과 티베인이 한 무리의 군인을 이끌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인들이 체면도 잊고 주인에게 반갑게 달려들던 그 무렵. 일로델은 싹 비운 푸딩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먹을 만했다. 말캉거리는 식감은 피로감을 주지 않았고 달콤한 망고와 겉에 뿌려진 커스터드 가루는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무엇보다 구역질이 나지 않았다. 뜻밖의 수확을 얻은 일로델이 입맛을 짝 다시자 록퍼스 부인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녀는 린다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일로델의 입가를 닦아 주려 했다. 일로델은 손을 들어 정중하게 막았다.
“제가 할 수 있어요, 할머님…. 록퍼스 부인.”
“내 귀염둥이, 벌써 다 컸구나. 하지만 이런 건 어른이 해 주어야 한단다. 멀쩡하게 있던 유모까지 내보내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내 성에서 함께 사는 건 어떠니. 응?”
“네, 뭐…. 좋아요.”
“린다, 들었니? 티베인이 나와 함께 산다는구나! 어서 아기방을 준비하거라. 어서!”
알록달록한 아기방에 구겨 넣어진 티베인이라. 상상만 해도 배꼽 잡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비웃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로델도 영혼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록퍼스 부인의 성화가 계속되자 린다가 아이를 어르듯 말을 건넸다.
“부인, 쌍생아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그럼.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아기들이 아니니.”
“거기 계신 분은 티베인 님의 쌍생아이신 일로델 님이세요. 티베인 님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두 분 다 장성하셨어요. 몇 해 전 티베인 님의 소위 임관식 때 참석하셨잖아요.”
린다의 느릿하고 꾸준한 설명에 록퍼스 부인이 불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분은 티베인 님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티베인이 아니라고?”
문어처럼 몸을 휘감고 있던 팔에서 드디어 힘이 빠져나갔다. 일로델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던 뮬리 공작이 다가왔다. 입술 한번 꿈틀댄 적 없다는 듯 근엄한 표정이었지만 일로델은 만족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고모님. 거기 있는 아이는 티베인이 아니라 일로델입니다. 황녀 전하와 혼담이 오가고 있는 아주 자랑스러운 청년이지요.”
“일로델? 일로델이 누구란 말이야?”
“티베인과 쌍둥이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록퍼스 가문에서 처음으로 베타가 태어나 유명했지요. 또 잊으셨습니까?”
록퍼스 부인이 혼란한 기억을 되짚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고개가 불안하게 돌아가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반듯하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얇은 입술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차츰 떨리기 시작하는 록퍼스 부인의 손끝을 바라보며, 일로델은 문득 드윈 남작 부인을 떠올렸다.
어릴 적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던 그녀를 무서워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가족도 아니고, 가문의 중요 인물로 섬길 수도 없고, 심지어 별다른 재능도 없는 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해 줄 한가한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품은 적의는 당혹스럽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에겐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고, 적의를 품지 않을 이유 또한 없기 때문이다.
록퍼스 부인의 떨리는 검지 손끝이 일로델을 겨냥했다. 기대감 어린 눈길 속에서 일로델은 고개를 수그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게, 가짜란 말이냐?”
“…….”
“내 앞에서 진짜 행세를 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노화로 흐려진 눈동자가 일로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뮬리 공작이 그녀의 옆에서 혀를 쯧쯧 차며 “분위기가 엉망이군. 자, 어서 고모님께 사죄하게.” 하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록퍼스 부인이 대뜸 공작을 노려보았다.
“너는 뭘 하고 있었지?”
“예?”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냔 말이다! 셰본!”
“예? 고, 고모님, 저는, 고모님의 조카….”
뮬리 공작의 항변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록퍼스 부인에게 멱살을 잡혀 낙엽처럼 날아갔다. 사색이 된 프레디가 “아버지이!” 하고 절규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신나게 웃고 있던 귀족들 또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알파로 태어난 그녀는 왕년에 창던지기를 취미로 할 만큼 힘이 장사였다. 인지 능력이 저하된 지금은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린다가 서둘러 주인을 말렸다.
“부인, 진정하세요. 대공께선 이 자리에 안 계십니다.”
“그럼 어디 있는 거지? 당장 모셔 오너라! 어서 저 가짜를 내다 버리라고 해라, 어서!”
“부, 부인.”
“기어코 가문에 오점을 남기겠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이미 티베인이 있는데 저것이 왜 필요하단 말이야! 잠깐만, 티베인은 어디 있지? 우리 티베인은 어디 있어? 대공이 되어 그 악마에게서 우리 가문을 지켜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어!”
식탁 밑에 구겨져 있던 공작이 주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허리를 짚고 의사를 불러 달라고 웅얼대는 모습이 좀 전의 멋진 신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일로델은 저를 노려보는 록퍼스 부인을 마주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곧바로 폭언을 쏟을 것처럼 입매를 오물거렸다.
충격에 대비해 이를 앙다문 그때, 한쪽에서 큰 소란이 일고 기겁한 귀족들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로 무장한 군인들이 쏟아지듯 들어오더니 문가를 막아섰다. 일로델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잠시 눈을 의심했다. 로건과 티베인이 마치 사이좋은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끙, 하필이면….”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던 뮬리 공작이었다. 그는 얼없이 몸을 가누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히고 꽥 소리를 질렀다. 옆으로 티베인이 “아, 실례.” 하며 건들건들 스쳐 지나갔다.
“너 괜찮아? 저 노망난 노인네한테 맞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응?”
일로델은 부산하게 구는 티베인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로건과 티베인을 번갈아 보았다. 왜 둘이 같이 있냐는 그 시선에 로건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록퍼스 부인을 마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록퍼스 부인.”
“…….”
“사랑하는 동생의 무도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뵈니 좋군요.”
록퍼스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이 없었다. 로건이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맞은 린다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에게 “부인, 로건 님이 오셨어요.” 하고 속삭였다. 그래도 반응이 없던 록퍼스 부인은, 어느 순간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 여기가 어디니.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구나.”
“부인, 록퍼스 저택이에요.”
“왜 내 성이 아닌 거지? 나는, 너무 무섭구나. 돌아가고 싶어….”
로건이 말없이 록퍼스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미소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길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죽을 거야. 기어코 저 악마에게 모두 죽고야 말 거야. 그녀는 겁먹은 사람처럼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난폭하면서 생기 넘치던 노인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찾던 티베인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부, 부인? 왜 그러세요? 부인?”
영문을 알 수 없는 기행에 린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로건이 군인들을 손짓해 불렀다.
“객실로 모셔.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니 모든 일정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
“뭣? 자, 잠깐….”
뮬리 공작이 서둘러 로건을 불렀지만 면전에서 무시당했다. 군인 둘이 바닥에 주저앉은 록퍼스 부인을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하녀 린다가 그 뒤를 급히 따라나서고, 잠시 문가에서 비켜섰던 군인들이 다시 출구를 막아섰다.
눈 깜짝할 사이 상황이 정리되자 뮬리 공작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 아비 닮아 건방진 놈. 그러나 덜컥 항의부터 꺼낼 수는 없었다. 무슨 속셈인지 눈을 시퍼렇게 뜬 무장 군인들이 홀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크게 헛기침을 했다.
“부대에서 바로 돌아온 모양이로군…. 옷 정도는 갈아입고 와도 되는데 말이오. 파티에 제복이라니 민망하군.”
뮬리 공작은 저도 모르게 겸손한 말투를 썼다. 로건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이번 파티와 무도회는 일로델이 주인입니다. 저와 대위는 참가하지 않고 저택의 경비를 맡을 겁니다. 제복 차림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다들 아쉬워할 텐데….”
“그렇군요.”
로건이 싱겁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뮬리 공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고모님께서 생각보다 병세가 깊으시더군. 안타까운 일이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요양하시게 둘 걸 그랬소.”
“그렇군요.”
“슬슬 다시 파티를 시작해도 되지 않겠소? 음악도 끊겼군. 홀 안에 군인들이 있으니 흥이 안 나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대공 가에는 건방진 핏줄이 흐르는 것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뻔히 알 텐데 번번이 무시당하자 뮬리 공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람이 말하는데 자꾸만 어디를 쳐다보는 거야. 그가 성을 내며 로건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때마침 대공 가의 쌍둥이, 덜 건방지지만 모자란 차남인 일로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이게 무슨 일이죠?”
“미안해. 미리 이야기를 못 했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저택 안에도 경비가 배치될 거야.”
“그건 알겠는데….”
문을 막고 있잖아요. 총을 들고. 일로델이 불안한 눈으로 문가를 지키고 선 군인들을 흘긋거렸다. 물론 그가 느끼는 불안은 신변의 위협이 아니었다. 형제들이 이상한 짓을 벌이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이다. 입 가벼운 하인들이 또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을 테니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테고, 그렇다면 로건도 티베인도 가만히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령 귀족들을 가둬놓고 위협한다거나, 때린다거나, 총을 난사한다거나. 설마 그렇게까지 막 나가진 않겠지만….
“괜찮아. 네 손님들이니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지. 작은 협조만 해 주면 문제없어.”
“협조요?”
“저택 내 어디를 가든 보고하고, 소지품 검사를 허용하고, 검문을 받아들이면 돼.”
듣고 있던 귀족들은 뜨악한 제안이었지만, 일로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미행을 붙이거나 이상한 추적 장치를 억지로 채우거나 때리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양호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는 걸 경비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저택 지하에 흉포한 야만인들도 갇혀 있으니 손님들도 이해하겠지.
“피곤해 보이는군. 저녁때까진 자유 시간이야. 손님맞이는 내가 할 테니 가서 쉬어.”
“…….”
일로델은 로건을 물끄러미 올려 보다 또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은 무도회의 주인이 자신이라 했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자리에 없어도 그만,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걸 주인이라 부르진 않았다. 애초에 로건이 맞이하러 나왔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아는 만큼 일로델은 조용히 퇴장하기로 했다.
로건은 잠자코 물러나는 일로델과 그의 뒤를 쫓아가는 티베인을 바라보다 좌중을 둘러보았다.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저마다 판돈을 계산하느라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로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러분, 파티를 즐기십시오.”
그것은 차라리 명령에 가까웠다.
*
“빌어먹을 노인네. 뭐? 가문의 오점? 죽여버리고 싶군.”
복도로 나오자마자 티베인이 화려한 꽃장식을 향해 냅다 발길질했다. 동부에서 들여온 값비싼 화병이 기우뚱 쓰러지자 하인 네 명이 몸을 날려 참사를 막았다. 일로델은 소란을 무시하고 걸었다. 티베인이 그를 쫓으며 사납게 따졌다.
“넌 뭐야? 미친 노인네가 하는 말을 왜 가만히 듣고 있어? 눈 뜨자마자 땍땍거리던 놈은 땅으로 꺼지셨나? 응?”
“시끄러워. 저리 가.”
“나한테 시끄럽다고 할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했어야지. 거기 있는 놈들이 뭐 대단하다고 얌전히 당해 주고 있어? 황제도 너한테 그따위로 못 해. 너 바보냐? 어? 바보야?”
일로델은 별채로 가려던 걸음을 틀어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티베인이 들어오기 전에 문을 닫고 고리를 잠갔다.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잠깐이었다. 우두둑하는 굉음과 함께 문짝이 뒤틀리더니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억센 손이 고리를 잡아 뜯었다. 문의 기능을 다한 나무판을 내던지고 다가오는 티베인을 일로델이 질린 얼굴로 쳐다봤다.
“자꾸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지 마. 얘기 좀 하자고.”
“할 얘기 없어.”
“가끔 격에 안 맞게 바보 천치처럼 구는 게 답답하단 말이지. 형에게 휘둘린 건, 그래. 그 자식은 음흉하니까. 근데 별 꼴같잖은 새끼들에게 놀아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궁상이냐?”
문가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몰려든 하인들이 뜯겨나간 문짝과 서재 안의 험악한 분위기를 돌아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일로델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뗐다.
“내가 그런 성격인 거 알고 있었잖아.”
“뭐?”
“알고 이용했잖아. 너랑 형이랑. 근데 이제 와서 답답해? 너는 제멋대로야.”
티베인이 벙찐 얼굴로 일로델을 쳐다봤다. 그는 일로델의 말을 곱씹듯 제멋대로야? 제멋대로, 하면서 입 안으로 웅얼거리더니 하, 하고 웃었다.
“이럴 때는 또 입이 트이는군. 뭐, 좋아. 나는 네가 털 세울 때마다 쥐어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좋아. 우리 가서 노망난 노인네에게도 한마디 해 주자고. 어때?”
“싫어. 피곤해.”
“잡소리 들어주고 있었으니 피곤하지. 뭣하면 넌 구경만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맹세컨대, 티베인이 떠들어대기 전까진 지금처럼 피곤하지 않았다. 예고 없는 적의에 약간의 충격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이겨낼 만은 했다. 더욱이 그들은 여러 번 볼 사람들도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무덤까지 쫓아와 귀찮게 할 티베인과는 달랐다. 일로델은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별것도 아닌 일로 소란 피우지 마. 나 괴롭힌 걸로 따지면 너나 형보다 저 사람들이 나아.”
“뭐…?”
“모르겠으면 양심에 물어봐. 그런 게 있기나 하면.”
일로델이 건성으로 대꾸하곤 티베인을 지나쳐 가려 했다. 티베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는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입술이 닿을 듯 다가오자 깜짝 놀란 일로델이 뒷걸음질 쳤다. 더욱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하인들이 불안한 듯 서재 주변을 맴돌았다.
“나나 형보다 저 치들이 낫다? 어느 면에서?”
“그만해.”
“아, 저 새끼들은 나랑 형처럼 너한테 좆을 안 세웠어? 섹스하고 싶다고 안 해? 그래서 좋아? 그래서 너 비웃고 무시해도 좋다는 거냐?”
하인들 틈에서 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은 웅성거림조차 사라진 복도가 고요했다. 일로델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벙긋대다가 아찔한 듯 눈을 감았다.
“살다 보니 그 입에서 별소릴 다 듣는군. 형제이고 네 분신인 나보다 저 새끼들이 좋단 말이지. 걱정돼서 너한테 헐레벌떡 달려간 나보다 저 새끼들이?”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러면? 내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해.”
뭐가 어렵다고. 일로델은 턱을 들고 티베인을 직시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것과 꼭 닮은 푸른 눈과 마주한 순간 가슴 한편이 철렁해서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강간하고 기만한 형제들과 말 몇 마디로 비웃은 낯선 무리. 잘못의 무게를 따지면 로건과 티베인이 더 원망스러운 게 당연했다. 되레 상처 입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건 가증스러운 일이 아닌가.
애초에 낯선 사람들과 형제들에게 거는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기대치가 다르다는 게 뭐지. 자신은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홀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형과 티베인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묘한 감각은? 안도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들이 자신의 편에 서서 타인에게 지나친 해를 입힐까 걱정할 정도로 안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형제들보다 낯선 귀족들이 낫다고 진심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인정하기가 싫으냐?”
“…….”
“나랑 형이 너한테 미쳐서 발정하는 게 그렇게 싫어?”
당연하지. 당연한 일인데…….
티베인은 노려보고 일로델은 대답할 말을 찾아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만 다툼을 말릴 수 있는 분을 모셔 와야 하지 않을까. 계속되는 충격 속에서도 하인들이 본분을 잊지 않고 서로를 눈짓했다.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왜 서재에 모여 있는 거지?”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마다 등 뒤를 확인한 하인들이 질겁하고 놀라 허리를 숙였다. 소란스러움을 인지한 일로델과 티베인도 고개를 돌렸다. 재빨리 길을 튼 하인들 사이로 화려한 제복을 걸친 사내가 걸어왔다. 어깨와 가슴께에 달린 금장이 무거워 보일 정도로 많았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일로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일로델? 티베인도 있구나. 너희들 뭘 하고 있는 거지? 문은 왜 이 모양이고?”
당황한 일로델만큼이나 셰본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우그러져서 나뒹구는 값비싼 문과 바짝 붙어 있는 둘째와 셋째, 그리고 어딘지 동요한 기색의 하인들을 번갈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집 안의 풍경이 참 별나군. 그런 표정이었다.
대화의 분위기가 깨지자 티베인이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셰본에게 짧게 경례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문은 네가 부쉈겠지?”
“죄송합니다.”
“넘치는 힘을 어쩌겠느냐. 너희들 인사 그만하고 주변부터 치워라. 목공을 불러 새로 문을 맞추고.”
하늘 같은 대공의 명령에 하인들이 서둘러 흩어졌다. 일로델은 여전히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상황 판단을 하고 또다시 깜짝 놀랐다.
“아버지?”
“그래. 왜 그렇게 놀라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못 들은 것이냐?”
“듣지 못했어요.”
“헤롯이 서신을 보낸다고 했는데, 이상하군. 내 이야기만 쏙 빼놓고 보낸 건 아니겠지.”
어머니가? 그러고 보니 서신에 대리인을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설마 아버지일 줄이야. 그야 어머니를 대리할 사람은 아버지 말고는 없긴 했다. 일로델은 얼굴이 상기되어 셰본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티베인이 내키지 않는 듯 그 뒤를 설렁설렁 따랐다.
“언제 오셨어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안 바빠요?”
“지금 막 도착한 참이야. 바쁜 거야 늘 그렇지만 네 어머니가 하도 성화라…. 아, 이런.”
셰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낯선 여성이 걸어 나왔다. 큰 키와 빈틈없이 갖춰 입은 예복. 강인해 보이는 입매와 보랏빛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헤롯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일로델과 셰본을 번갈아 보았다.
“누구죠? 록퍼스 대공.”
“제 아들들입니다. 같은 날 태어난 녀석들이지요. 저기 뚱한 녀석이 티베인이고…. 여기 크다가 만 것처럼 생긴 녀석이 일로델입니다.”
“아, 일로델.”
일로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호전적인 빛을 띠었다. 일로델은 괜히 찔끔해서 셰본을 눈짓했다. 누구냐고 묻는 시선에 셰본이 잠시 머뭇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살짝 곤란한 낯빛이었다. 그사이 앞으로 걸어 나온 그녀가 일로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예….”
“그대의 사촌이자 제1 황녀인 카티야입니다. 무도회에 초대해 줘서 고맙군요.”
얼떨결에 카티야와 악수를 나누려던 일로델이 흠칫 놀라 그녀를 보았다. 일로델의 뒤에서 경계의 눈을 부라리던 티베인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카티야는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굳은 일로델의 손을 직접 마주 잡았다. 그러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저녁이 찾아왔다. 낮보다 더 늘어난 손님들로 저택이 북적였다.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는 무도회는 마지막 날이 가장 메인이었다. 첫날부터 사람이 몰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원 초과가 가까워지자 이름이 알려진 고위 귀족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서고, 나머지는 문 앞에서 돌아나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정원 한쪽에서는 하인들이 불꽃놀이를 준비했다. 상급 하인 하나가 긴장한 얼굴로 폭죽에 불을 붙였다. 이어 커다란 폭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이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무도회가 열리는 홀 안도 붐비긴 마찬가지였으나, 바깥의 명랑한 분위기와는 상반된 숙연함이 있었다. 곳곳에 배치된 무장 군인 때문이었다. 물론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도 황제의 친위대가 보초를 서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흉흉한 느낌은 아니었다. 온갖 파티와 무도회를 섭렵한 귀족들로서도 처음 겪는 분위기였다. 대공가를 지키는 군인들에게선 다치기 싫으면 빨리 꺼지라는 노골적인 적의가 엿보였다. 군인들뿐인가? 냉랭한 태도의 하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죄인 취급이 따로 없군. 무서워서 볼일이나 보러 가겠소?”
눈치 없는 귀족 하나가 툴툴거리다 그의 부인에게 옆구리를 쥐어 뜯겼다. 때마침 옆을 지나가던 록퍼스 대공, 셰본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부인이 부채로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리곤 사근사근 웃었다. 모자란 남편 새끼지만 부디 잘 봐달라는 의미였다.
셰본은 싱겁게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중앙 정치와 연이 없는 그는 파티니 무도회니 하는 것에 참석하는 일이 드물었다. 간혹 황제의 명으로 연회에 나가도 헤롯에게 수작을 거느라 바빴다. 물론 일부러 보인 행동이다. 대공가에 줄을 대고 싶은 귀족이 벌떼처럼 많아도, 그를 주축으로 한 세력이 생기지 않는 것에는 셰본의 평화주의 성향이 한몫했다. 골치 아프게 황제의 견제에 맞서느니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런 그가 무도회에, 그것도 황녀와 함께, 아들의 결혼 발표를 위해 나타났다. 평소 접촉할 일이 없는 대공 가문의 알파 형제들도 만날 수 있다. 콧대 높은 귀족들이 서운한 처사에도 부득불 무도회에 참석한 이유일 것이다. 연줄을 위해, 정보를 위해, 사업을 위해, 또는 혼인을 방해하거나 미혼인 로건과 티베인을 먹잇감 삼아 남았겠지만, 글쎄. 이곳에서 무엇을 얻어 갈 수 있을까.
셰본은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카티야 황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턱을 당기며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다시 뵐 줄 몰랐습니다. 아, 물론 대공 전하의 저택이긴 합니다만,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이 아닙니까.”
“…….”
“이렇게 오실 것 같았으면, 고모님을 제가 모시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아무렴 조카보다 아들의 에스코트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고모님께서 오랜 기간 외출이 없다고 하셔서, 걱정되는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연락이 늦었지만, 결코 몰래 행동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오해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셰본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뮬리 공작을 말없이 보았다. 낮에 공작이 어머니를 모셔 와 일로델에게 망신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참으로 할 짓도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중앙 귀족들에겐 그것이 전투이고 생존 방식이다. 그들이 가장 약하고, 무방비하고,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일로델을 표적으로 삼은 건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지.
그들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집에서, 그것도 로건의 관리하에 있는 영역에서 일로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부러 당해 보라며 방치한 것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셰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로건이 충분히 벌일 만한 일이지만, 일로델처럼 어리숙한 녀석 상대로 그렇게까지 지독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머니께 신경을 써 주시니 고맙군요. 덕분에 오랜만에 뵙고 인사도 드렸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잘됐습니다. 저, 고모님 상태는….”
“나쁘진 않아 보였습니다. 성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셔서 배행하고 오는 길입니다. 나중에 안부 편지라도 보내 주시면 좋아하시겠지요.”
능글맞은 대공답지 않게 차가운 대꾸가 돌아오자 공작이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애초 그의 계획엔 대공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의 개입 역시 계획에는 없었다. 그저 일로델의 기를 꺾고 아들 프레디를 돋보이게 해 줄 생각뿐이었다. 으레 이러한 모임에서는 처음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법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집구석은 뭔가 이상했다. 귀족 간의 서열에 관심도 없고, 황녀가 혼자 있는 걸 보면 혼인에 적극적인 것 같지도 않다. 자기들이 초대한 손님에게 호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열린 무도회란 말인가? 아무 사심 없이 야만인 우두머리를 포획하고, 황녀와 혼담이 오가게 되었단 말인가? 그래서 정말로 혼인을 할지 말지 이 자리에서 정하겠다고? 그럴 리가. 그의 오랜 정치적 감각이 그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뭐지. 도대체 이 무도회 이면에 뭐가 있다는 말이야.
뮬리 공작이 골머리를 썩이며 끙끙대던 그때, 홀의 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비켜섰다. 홀 안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뮬리 공작도 충혈된 눈으로 문가를 노려보았다. 무도회의 진정한 주인공, 록퍼스 가문의 두 알파와 그 사이에 낀 일로델이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셋이 함께 오는군. 형제끼리 사이가 좋은가 봅니다.”
귀족들을 물리고 다가온 카티야 황녀가 셰본에게 말을 건넸다. 셰본은 이렇다 저렇다 대꾸 없이 제 아들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 할 말이 없었다. 로건과 일로델, 혹은 티베인과 일로델 둘씩 붙어 있는 건 많이 보았어도 셋이 함께 있는 장면은 그에게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로건과 티베인이 담흑색 제복을 착용한 것에 반해 일로델은 흰 예복에 은사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낯이 창백하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도움을 청하듯 그를 살짝살짝 쳐다보는 시선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셰본의 등골을 훑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평소 육감을 신뢰하는 편이나, 방금 떠오른 생각은 정말이지 부정하고 싶었다.
“로건 대령과 티베인 대위는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 호위로 온 것인가? 형제들이 지켜 주고 있으니 아주 든든하겠어요.”
“글쎄요. 본인 생각은 어떨지….”
셰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그만두었다. 공식 석상에서 형제끼리 사이좋게 비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형제들 서로에게, 무엇보다 일로델에게 좋은 보호 장치가 되어 줄 것이다. 비록 의처증 신랑들에게 시달리는 신부 같은 모습이라 하여도…. 남들 눈에는 우애 좋은 형제로 보이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록퍼스 대공? 표정이 좋지 않은데. 방금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아니. 아닙니다. 가서 인사 나누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황녀가 빙긋 웃었다.
“좋아요. 일로델이 귀엽던걸요. 몇 살이었죠?”
“아마 스물 중반이 안 됐을 겁니다.”
“무심하군요. 아버지를 많이 따르는 것 같던데.”
“저 녀석은 누구든 따릅니다. 그러고 보면 늘 그게 문제였지….”
갑자기 초췌해진 셰본을 황녀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미적거리는 동안 일로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향해 도움의 눈길을 쏘아댔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왜 모르는 척일까. 잠시라도 형제들의 등쌀에서 벗어나면 숨통이 트이겠는데….
말이 좋아 호위고 에스코트다. 일로델은 홀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과 인사 한번 나누지 못했다. 누군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로건이 냉랭하게 끊고, 누군가 악수하자 손을 내밀면 티베인이 혼란을 틈타 명치를 후려쳤다. 그 꼴을 몇 번 겪으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경상자가 나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별것도 아닌 게 콧대 높다고 욕은 먹겠지만, 어쩌겠는가. 난데없이 실려 가는 사람이 속출하는 것보단 나았다.
“음료 가져왔습니다.”
일로델은 공손하게 트레이를 내미는 하인을 바라보았다. 서재에서 나눈 수상쩍은 대화가 그들 사이에 퍼졌을 텐데 아무 일도 없다는 태도다. 놀랍지도 않나? 이상하지도 않냐고? 도심 광장에 있는 시계탑도 이놈들보단 감정이 있겠다.
“샴페인이군.”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유리잔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위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것을 채갔다. 일로델은 제풀에 서글픈 표정을 하고 로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빈속인 거 알아.”
“한 모금만 마실게요. 목이 말라요.”
로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잔을 들어 샴페인을 조금 따랐다. 일로델은 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우울하게 내려다보았다. 언제인가, 술맛을 궁금해하는 자신에게 형이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즐거움은 어디로 가고 가슴이 조이는 것 같은 갑갑함만이 남았을까.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울적했다.
“일로델. 가면과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헤롯이 보면 좋아하겠어.”
“아버지.”
일로델의 표정이 밝아졌다. 셰본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는 부러 내보이듯 일로델을 한 번 끌어안았다. 인사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귀족들이 몰려왔다. 셰본은 형제들 사이에 부대껴 옴짝달싹 못 하던 불쌍한 둘째를 자연스럽게 끌어냈다. 그리곤 귀족들 사이를 걸으며 한 사람씩 소개했다.
“노란 정장이 아주 멋지군요. 이분은 음악을 사랑하는 분이지. 북부에서 유명한 연주단을 모두 후원하고 계신단다. 오늘 무도회의 연주는 어떤지 궁금하군요. 음, 이름이….”
“페르닌 자작입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귀가 황홀할 정도로 좋은 연주군요. 초대 감사합니다.”
“그렇다는군. 저기 계신 부인은 대농원을 운영하시지. 황궁에서 부인의 꽃이 화폐로 쓰인다는 걸 아느냐? 나는 이해 못 하겠지만…. 꽃이 시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닉스 백작 부인?”
“저는 이사벨라입니다. 시들면 버려야죠. 당연하지 않나요?”
“빌어먹을 놈의 가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군. 아, 황녀 전하. 제 둘째 아들 일로델입니다. 아카데미 학생이고 약초 공부를 하고 있지요. 집안의 주치의가 되는 게 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꿈이 있었던가? 그것보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폭풍에 휩쓸리다시피 황녀 앞에 도달한 일로델이 눈을 끔뻑였다. 마찬가지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부탁은요. 예의 차릴 필요 있나요? 어차피 사촌지간인데요.”
“그렇지요….”
셰본이 고개를 돌려 두어 걸음 떨어져 따라오는 나머지 두 아들을 주시했다. 딱딱한 표정에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셰본은 “이야기 상대를 해드리거라.” 하며 일로델의 등을 밀어 황녀의 옆에 데려다 놓았다.
“잠깐 말씀 나누고 계십시오. 저는 아들놈들과 상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셰본이 로건과 티베인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건넸다. 티베인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기고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일로델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잽싸게 시선을 피했다. 겨우 떨어져 있을 기회가 생겼는데 괜히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지간히 동생이 걱정인 모양이야. 내게도 훌륭한 호위가 있으니 마음 놓아도 될 텐데.”
“…….”
“록퍼스 대공과 고모님의 연애결혼은 유명하지. 가족끼리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도 그 영향일까?”
일로델이 카티야 황녀를 돌아보았다. 붉은 가면을 쓰고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일로델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황녀는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왠지 모르게 불편한 듯 시선을 헤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대 형제들의 페로몬이….”
“네?”
“아니야. 열린 곳으로 갈까? 조금 답답해.”
마침 일로델도 답답하던 참이었기에 냉큼 그녀를 따라갔다. 바깥과 연결된 테라스에서는 불빛이 반짝이는 드넓은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근처에서 경비를 서던 군인이 일로델과 카티야 황녀를 발견하고 경례를 올렸다. 황녀는 손 인사를 돌려주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난간에 등을 기댔다.
“지독하군. 형제들끼리 레슬링이라도 했나?”
“레슬링이요?”
두 사람과 그런 걸 했다면 지금쯤 멀쩡히 돌아다닐까? 아마 뼈도 못 추리고 드러누웠을 거다. 엉뚱한 질문에 고개를 젓자 황녀가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다른 형제와 친하지 않아서…. 원래 이런 건지 모르겠어. 완전히 담가놓은 수준이잖아. 그것도 두 사람이 함께.”
“무엇이요?”
“그러니까 페로몬이….”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가 문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릴 했어. 사이가 좋은 형제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내게 보내는 신호이거나.”
“네?”
“그냥 혼잣말이야. 동생께선 호기심이 많군. 아니면 나를 향한 관심인가?”
카티야 황녀가 눈을 찡긋거렸다. 일로델은 휙휙 바뀌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난처해했다. 그간 주변인들이 보조를 맞춰 주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뿐, 평소에도 정보 처리가 느린 편인 그였다. 잠시 황녀의 말을 곱씹던 일로델이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 있어요.”
“뭐?”
“처음 뵙는 거잖아요. 좋은 분인 것 같아요. 누님.”
“누, 누님?”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게 웃었다. 뭐라도 주워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던 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셰본과 이야기를 나누던 형제들도 그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굳은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일로델은 찔끔해서 커튼 뒤로 숨었다. 보이면 안 되는 장면을 들킨 것처럼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죠?”
“아니, 괜찮아…. 그렇군. 나도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되겠어.”
황녀는 한참 웃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녀는 어느 한곳을 가만히 보았다. 위치상 형제들이 있는 곳 같았다. 설마 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일로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커튼 뒤에 숨어 홀을 살폈다. 다행히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여전히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델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녹아내린 아이스크림만 퍽퍽 퍼먹었다.
“티베인이라고 했던가? 아까부터 이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아.”
“저를 괴롭히고 싶어서 그래요. 나쁜 놈이에요.”
“네 형도? 티베인보다 더 자주 돌아보고 있어. 재밌군.”
뭐라고? 형이? 왜? 일로델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지만 차마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경을 쓴 탓인지 괜히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
“누, 누구요?”
“로건 대령 말이야. 곧 준장이라지? 대공의 말로는 본인보다도 진급 속도가 빠르다던데. 대단해.”
“네….”
형님은 머리 좋고, 능력 있고, 어릴 때부터 저택 안의 실세이고, 전에 보니까 야만인 목도 꺾을 만큼 힘도 좋고, 멋있고, 기품 있고, 우아하고, 그런데 가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무섭기도 하고….
막힘없이 중얼거리던 일로델의 목소리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점점 푸념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형에 대한 개인감정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남 앞에서까지 흉보는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그린 듯한 위인이군. 혹시… 게으른 편이진 않아?”
“네에?”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일로델이 화들짝 반문했다. 격한 반응에 황녀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헐뜯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며칠 전에 개인적인 서신을 하나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나도 뒤끝이 심하군. 미안해.”
“서신이요?”
“신경 쓰지 마. 업무용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지.”
카티야 황녀가 민망한 듯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일로델도 아이스크림이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며칠 전에 형에게 서신을 보냈다? 개인적인 서신을?
지난 2주간 로건에게 오는 개인적인 서신은 자신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초반에나 살펴봤지 지금은 마음도 심란하고 그럴 기분이 아니라며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그 안에 황녀가 보낸 서신이 끼어 있었다면 그건 형의 게으름도 황녀의 불찰도 아닐 것이다. 일로델은 끙, 하고 이마를 짚었다.
“죄송해요. 형님은 서신을 못 봤을 거예요.”
“응? 어떻게 알지?”
“형님에게 오는 서신을 제가 분류하고 있거든요. 근데 요 며칠 사정이 있어서 미루는 바람에…. 정말 죄송해요.”
그러나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망측한 편지 가운데 황녀 전하의 서신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애초에 그만한 일을 자신에게 맡기다니, 형이야말로 티베인보다 더한 심술쟁이였다. 일로델은 황당한 얼굴로 굳어 있는 황녀를 보며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질타의 말 대신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로건 대령의 서신을 보았어? 그건 안주인이 하는 일 아닌가?”
“…….”
“아, 하지만 그래.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 그만큼 서로 믿는 거겠지? 재밌는 형제야.”
재밌는 형제라고 말하는 그녀의 어조에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감명을 받았다는 듯 웃고 있지만, 일로델의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졌다. 안주인이 하는 일. 그 말이 고막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고약한 놀림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목덜미가, 가슴께까지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은밀한 수치심이 발밑을 휘감았다.
“즐거워 보이는군요.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로건과 티베인이 이야기를 마치고 다가왔다. 일로델은 황녀 몰래 형제들을, 특히 로건을 열심히 째려봤다. 화려한 홀을 배경으로 둔 그의 형은 오늘도 쓸데없이 아름답고 우아해서 정말이지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대들의 이야기예요. 특이한 구석이 많아서 재밌네요.”
“…그렇습니까?”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더니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일로델은 괜스레 뜨끔해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눈을 치떴다. 그 틈을 타 다가온 티베인이 슬그머니 어깨동무하더니 잔을 뺏어가 입 안에 아이스크림을 탈탈 털어 넣었다. 사사건건 더러운 자식이었다.
“일로델과 이야기가 잘 통했나 봅니다.”
“귀여워요. 순진하고. 내 동생이라면 황궁 생활이 즐거울 것 같네요.”
“부군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무도회의 의미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즐거움이 남은 얼굴로 웃고 있던 황녀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농담이겠지요?”
“…….”
“로건 대령.”
로건은 대답 없이 일로델에게 다가가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넘겨 주었다. 일로델은 보는 눈이 많아 우물쭈물하다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얼었다. 로건이 농담처럼 “같이 춤출까?” 하는 말에 고개만 겨우 저었을 뿐이었다. 황녀가 답답한 듯 한발 앞으로 나왔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직전, 로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지하 감옥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지하 감옥을요?”
“야만인 우두머리가 수감되어 있습니다. 일로델, 같이 갈까?”
엉뚱하다 싶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일로델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거절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도 모르겠고, 사람이든 야만인이든 갇혀 있는 걸 굳이 구경하러 가는 악취미도 없었다. 로건은 두 번 권하지 않고 황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일로델의 어깨에 팔을 얹고 잔을 핥을 기세로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우던 티베인이 그들을 곁눈질하곤 픽, 웃었다.
*
무도회는 자정이 되어 끝났다. 일로델은 녹초가 된 몸을 끌고 본채에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별채까지 가기 귀찮았던 것도 있지만, 아버지가 형과 티베인을 데리고 밤새 포커를 하겠다고 했다. 오늘 밤은 홀딱 벗고 저택을 돌아다녀도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당연한 일에 기뻐해야 하는 현실이 기가 막히기 짝이 없지만….
“고생 많았어.”
랜턴을 점검하러 들어온 하인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늘 방을 비우고 있으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인은 서둘러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일로델 님.”
“내일은 저녁까지 방에 찾아오지 마. 쉴 거야. 방해받기 싫어.”
“알겠습니다. 교대할 때도 말해 두겠습니다.”
“그래, 가 봐.”
하인이 정중하게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던 일로델은 하인이 나간 문을 힐긋거렸다. 둑 터지듯 커다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뭔 내용인지도 모를 책을 내려놓고 우아한 척 두르고 있던 가운도 벗어 던졌다. 그대로 기어가듯 침대로 가 엎어졌다.
끔찍하게 긴 하루였다. 몇 번의 봉변을 당하고 고비를 넘겼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귀족들은 전부 이런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 낮 동안 살벌한 파티를 하고 저녁 내내 춤을 추다 새벽까지 포커와 불꽃놀이를 즐기는 이런 격렬한 삶을? 그간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는지 실감이 됐다. 일로델은 창문 너머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멍하니 보았다.
그래도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 내일은 드디어 형제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다. 선생님이 오면 무도회에 쓰고 다닌 가면을 그에게 주고 형과 티베인을 같은 방에 밀어 넣을 계획이다. 그러고 나면 그 뒤는…. 알 게 뭐람. 선생님 말로는 알파들은 오메가 페로몬에 꼼짝 못 하고 발정한다고 한다. 육욕에 미친 짐승이 된다고 했다. 마침내 엉뚱한 곳에 발정하고 다닌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긴 것에 형제들의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자신에게 행한 죄를 조금은 깨닫게 만들어야 했다. 자신의 몸에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깨닫고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알파와 오메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 신랑과 신부. 비록 신랑이 둘이 되겠지만, 그것도 그들이 택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일로델은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시트를 걷어차고 부릅뜬 눈으로 천장만 노려보길 한참,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라도 해야 갑갑한 기분이 해소될 것 같았다. 드레스룸에서 가운 하나를 어깨에 걸쳤다. 복도를 나와 걷던 그는 문득 걸음을 틀어 집무실로 향했다. 황녀가 말했던 서신의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에 잠깐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십시오.”
집무실 앞은 군인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곤란해하면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막아서긴커녕 냉큼 옆으로 비켜났다. 일로델은 서늘한 집무실에 들어와 램프를 회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테이블 밑에는 서신이 보관된 상자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씩 꺼내서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읽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으면 어쩌나 했지만 기우였다. 형에게 괴상한 글을 보내던 이들은 무도회에서 직접 만나 뵐 수 있다며 설레는 마음을 표출했다. 그 덕인지 최근 날짜가 다가올수록 서신 숫자가 줄었다.
그래도 참 별난 일이다. 무도회 참석자들 안에 해괴한 서신을 보낸 자가 있단 말이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없던데. 최소한 발을 빨게 해달라는 망측한 발언을 할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새 자극에 무뎌진 일로델이 혀를 끌끌 차며 서신을 넘기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양피지나 사슴 가죽 피지도 물론 값비싸지만, 그에 범접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가죽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황녀의 서신이라는 감이 왔다.
봐도 될까?
은밀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황녀가 형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낼 일이 뭐가 있을까…. 연애편지? 맥락도 없이 그 생각이 먼저 뇌리를 스쳐서 괜스레 뺨이 뜨거워졌다. 어쩌다 보니 혼인으로 얽혔지만, 직접 만나 본 황녀는 자신 같은 무능력자에겐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형 같은 사람과 이어지면 그야말로 완벽한 한 쌍이 되겠지.
숫제 가슴이 설레었다. 두 사람을 이어 줄 구실이 있다면 내일 계획에서 특별히 형을 빼 줄 수도 있다. 이어 줄 방법도 얼마든지 있지. 최음에 쓰는 약초라거나….
어느덧 로건 같은 생각을 하며 일로델이 조심조심 서신을 펼쳤다. 안주인이 하는 일이라고 했겠다? 사람 기만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할 테다. 정작 로건 앞에선 꺼내지 못했던 큰소리도 입으로 구시렁댔다. 내용을 보고 싶다는 조잡한 핑계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의 기대감도 분명히 있었다.
“…….”
램프 빛에 의존해 서신을 읽어나가던 일로델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져갔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턱과 손이 잘게 떨렸다. 그는 한참 뒤에 천천히 서신을 접었다. 어질러진 서신들을 상자에 넣고 테이블 아래에 대강 정리했다. 그리고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 새벽달이 뜰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어두웠다.
카티야 황녀는 빛에 노출된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내를 따라 걸음을 뗐다. 화려한 저택과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한 돌계단을 내려가자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보였다. 경례를 올리는 군인들 사이로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미남자가 철창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걸작을 감상하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녀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지요? 로건 대령.”
로건은 눈만 돌려 그녀를 보더니 다시 철창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황녀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동굴 같은 어두운 옥 안에 커다란 인영이 웅크리고 있었다. 동물처럼 온몸에 털이 가득한 그는 흰 눈을 들어 그녀를 쏘아보더니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황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야만인 우두머리인가? 생각보다 얌전하군요.”
“손님들이 있는데 시끄럽게 해서 되겠습니까? 얌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로건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황녀도 두 번 묻지는 않았다. 짧은 정적 뒤로 로건이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입니다.”
“신기하군. 대화가 통하나요?”
“대화만이 아닙니다. 가치관, 견해, 성향, 야만인과 알파는 많은 것이 통합니다.”
황녀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부정의 말을 꺼내진 않았다. 야만인과 알파 간에 공통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알파라면 누구나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우월한 신체 능력 외에도 주기적인 발정, 내재된 폭력성, 잔인함. 사람에 따라 정도가 다를 뿐 알파에겐 야생성이 존재했다. 야만인 또한 그러하니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봐야 변명도 못 되는 일이었다.
“제 생각엔 유전적으로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보지만, 교류가 단절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내력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지요. 중요한 건… 우리도 가끔 원하는 것 앞에선 야만스러워진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건이 황녀를 향해 돌아섰다. 황녀는 고압적인 시선을 받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무도회에서 보았던 아름답고 우아한 남자는 사라지고 포식 동물처럼 위험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긴장을 놓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군. 바라던 바라고 생각하며 황녀가 의연하게 웃었다.
“부정은 안 합니다. 하지만 황위를 위해 일로델과 혼인을 파기하겠단 생각이 야만적인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대도 혼인 파기를 바라고 내게 서신을 보내지 않았나요?”
“잘 받아 보셨습니까?”
“받아 보다 못해 답변도 보냈어요. 서신을 일로델이 관리하고 있었다던데요. 그 아이도 파혼 사실을 알고 있나요?”
“글쎄요. 지금쯤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티야 황녀와 일로델의 혼인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간 둘째 아들의 혼담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헤롯이 돌변해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탓이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황제가 당황할 정도로 상황을 주도하는 헤롯의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문제는 황위를 놓고 황녀와 황제가 다투는 현실이었다. 정쟁의 한가운데 있는 그녀는 단순한 혼인을 넘어 투쟁을 함께할 파트너가 필요했다. 좋은 가문만이 아닌 스스로 실권이 있고 충분히 휘두를 수 있는 자. 그러나 눈엣가시인 황녀에게 황제가 마땅한 남편감을 붙여 줄 리 만무했다. 어디서 그렇게 이상한 놈들만 모아오는지 다 물리치는 것도 한세월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일로델은 혹할 정도로 사랑스럽긴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귀여운 짝꿍이 아니었다.
차라리 로건이었다면.
그녀는 불쑥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등 뒤를 맡겨야 하는 상황에 속을 알 수 없는 자는 위험했다. 그에게 어떤 이득이 있어서 혼인 파기를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로건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한결같았다. 직접 만나고 보니 더욱 확신했다. 그는 읽어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일로델을 만나 보니 어떻습니까?”
“어제 얘기한 것과 똑같아요. 하지만 혼인을 이어 갈 수는 없지. 나는 할 일이 있습니다.”
“황제가 되는 것 말입니까?”
“다른 게 있겠어요? 그대는 나를 지지하는 대가로 뭘 바라죠? 단순히 혼인 파기가 조건이라는 건 믿을 수 없군요. 이건 내게도 유리한 조건인걸요. 혹시 일로델이 혼인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명문 귀족 가문의 장남과 차남. 알파와 베타. 보통은 형제들의 불운한 경쟁과 암투를 상상하겠지만 직접 목격한 대공 가문 자제들은 유별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차라리 걱정이겠지. 불안한 위치에 있는 그녀가 혼인 상대로 미덥지 못하거나 황제의 입김을 우려했으리라. 하지만 로건 정도의 인물이 단지 동생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정쟁에 뛰어들 것이라 여길 만큼 그녀는 순진하지 않았다.
“황궁 후원에 몸집이 큰 동물이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황녀는 살짝 당황했으나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나 코끼리 같은 녀석들 말이지요? 덩치는 커도 말을 잘 듣고 귀여워요.”
“어떻게 조련하는지 아십니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군요.”
“어릴 때부터 다리에 사슬을 묶어 생활하게 합니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으니 포기하지요. 그때는 사슬을 풀어주어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맙소사. 말 못 하는 미물에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황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네요.”
“그렇습니까?”
“결국 멀쩡한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지?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보며 즐겼다니 기가 막히는군. 황제가 되면 후원에서 동물들을 내보내야겠어요.”
로건은 조용히 웃더니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말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므로 보란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참으로 아니꼬운 남자로군. 황녀는 울컥하는 속을 다스리며 철창 안을 눈짓했다.
“혹시 대령께선 야만인을 기르고 싶은가요? 그래서 승낙이 필요하다거나….”
“야만인 말입니까? 재밌군요.”
이렇게 속을 모르는 인물과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일까? 황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지만 위험을 감내하기로 했다. 곧 세대를 교체할 시기가 온다. 그때는 백 명의 귀족들보다 대공 자리에 있을 로건의 지지 하나가 간절해질 것이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여도 지고한 황제였다. 그가 한평생 황녀에게는 자리를 물려주지 않겠노라 생떼를 부리는 이상, 이 자리에서 반드시 로건과 동맹을 맺고 황위를 도모해야 했다.
“전하께선 그저 한 가지만 눈감아 주시면 됩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조건을 말하려는가. 황녀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무엇을?”
“제 연인에 대한 것 말입니다.”
“그렇군요. 연인….”
……연인?
황녀는 귀를 의심하며 로건을 쳐다보았다. 고아한 얼굴은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진실된 한편, 불가사의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남자가 비소로 인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연인이라. 그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기에 납득이 갔다. 아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터.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나 그 역시 눈을 감아야 하겠지.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다. 그녀는 황위에 오르고 싶었다. 황제가 되어야 하는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라왔다. 그래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야만인 우두머리는 어쩔 셈인지? 황제는 의심이 강해서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옭아맬 테죠. 차라리 놔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가문의 명예 때문에 어렵겠지요? 이미 이송 부대가 와 있기도 하고요.”
“그 점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슬슬 로건이라는 사람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캐내려는 시도는 시간을 땅에 버리는 일과 같았다. 피곤함을 느낀 황녀는 고개를 젓고는 그만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우리는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잘 부탁해요.”
“그렇군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뒤에서 공손히 기다리던 하인이 길을 안내했다. 황녀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로건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야만인 하나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겁먹은 짐승 같은 태도였다.
로건은 무료함을 느꼈다. 일로델이 눈앞에 없는 시간은 늘 같았다. 공허하고 권태로웠다. 그가 보내는 시간 대부분이 빈 상자 같다는 걸 사랑스러운 동생은 알까? 상자 안에 곱게 넣어 사슬을 채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안다 해도 모르고 싶을 것이다.
티베인은 일로델의 한계를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일로델이 망가지지 않고 받아들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약물을 쓰고, 실험을 하고, 티베인을 끌어들이면서도 그 한계를 알리는 경계는 모호했다. 과연 응석에 가까운 일로델의 소망을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을까.
불현듯 파괴적인 욕구가 솟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억눌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작 눈길은 야만인의 발목을 휘감은 사슬을 따라가며 조용히 빛나고 있음에도.
“네게 연인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구나.”
복도 너머 깊은 어둠 속에서 셰본이 걸어 나왔다. 도열해 있던 군인들이 바짝 긴장해 경례를 올렸다. 로건은 놀란 기색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자식놈들이 통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는데 놀랍군. 어느 가문의 자제이지? 설마 군인은 아니겠지. 부대 내 연애는 곤란해.”
“일로델입니다.”
“…….”
셰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귀족의 미덕을 모르는 녀석이로다. 본론부터 말하면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가. 물론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답변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놀랐다. 아들과 아들이 사귀고 있다는데 까무러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러면, 일로델이 너를 받아들였단 말이냐? 그… 연인으로서?”
“그럴 리가요.”
뻔뻔한 녀석. 차라리 사귀고 있다는 답변이 나았을 것이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셰본이 허공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언제였던가, 로건에게도 첫 발정기가 있었다. 일로델을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한 녀석은, 동생을 강간하기 전에 군대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셰본은 놀랐다. 일로델은 애꿎은 티베인을 향해 짐승이니 야만인이니 욕을 해대는 모양이나, 그가 보기엔 로건이야 말로 야만스러웠다. 다른 알파를 죽여 없애는 건 맹수 무리에서나 볼 법한 행위가 아닌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차라리 강간부터 하고 보았을 녀석이다. 나름대로 억누르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짐승 같은 녀석이어도 제 동생을 상대로 끝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완전히 당했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로건의 계획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일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둘째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헤롯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것만은 막아야지. 셰본은 문득 떠오른 무서운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네 동생이 베타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가 일로델과…. 그런 사이가 되겠다는 걸 막지는 않아. 괜한 시간 낭비인 걸 모르지 않지. 단, 그것도 의무를 지켰을 때 이야기야.”
“어떤 의무 말입니까?”
“나는 머지않아 네게 대공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다. 시기가 빠르단 얘기가 나오겠지만 남의 의견이 중요한 건 아니지. 네가 가문의 후계자인 이상, 너 역시 후계자를 생산할 의무가 있어. 몰랐다고는 안 하겠지?”
후계 생산이나 혼인 의무를 고집하는 귀족을 고루하다고 생각하던 그였으나, 오늘만은 달랐다. 지나간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 시간을 두고 일로델을 천천히 빼 오면 되는 일이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헤롯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짜며 셰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건도 대꾸 없이 마주 웃었다. 셰본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고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일로델은 베타야. 그리고 남자아이지. 임신할 수 없는 건 확실해.”
“정말로 확신하십니까?”
로건의 물음에 셰본이 얼굴을 굳히고 불안한 걸음을 뗐다. 그가 주변을 맴돌며 궐련을 빼 들자 군인 하나가 서둘러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연기를 들이켤 기분이 아니어서 바닥에 던져 껐다. 무슨 의도의 질문이지. 교란할 작정인가? 아니, 로건은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일 녀석이다. 셰본은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터무니없는 일이 생겼음을 인정했다.
“네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지?”
“자궁을 심어서 임신시켰습니다.”
“…….”
“막내와 함께 말입니다.”
셰본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목 안이 깔깔했다. 나가서 와인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테이블에 있던 지저분한 물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막내, 티베인과…? 도대체 무슨 짓을…? 아니 그것보다, 그 말을 믿으란 소리냐? 멀쩡한 베타 남자 녀석이 임신을 한다고? 기가 막히는군! 차라리 아무 갓난애나 데려와서 이미 태어났다고 하지 그러느냐?”
“진정하십시오. 증인은 많습니다.”
“증인이라니?”
“이곳에 있는 녀석들 모두 교합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일로델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요.”
셰본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캄캄해진 시야로 울망울망 도움을 청하던 둘째 아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사라지고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모든 일이 알려진 뒤 일로델을 데리고 떠나는 헤롯의 싸늘한 뒷모습이었다.
*
지하를 벗어나 정원으로 나온 황녀는 안내인을 물리고 아름답게 꾸며진 길을 걸었다. 한차례 비가 쏟아질 모양인지 하늘이 흐렸다. 공기는 습했지만 그거라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긴장하고 있었나.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쓰게 웃었다. 로건은 협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었다. 불같은 성질을 가진 그녀는 로건 같은 유형이 껄끄러웠다. 아마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면 불리한 조건을 혹처럼 매달고 나왔을 것이다. 휩쓸리다 보니 일로델의 파혼을 원하는 이유도 듣지 못하지 않았는가. 혹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말을 돌렸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인물이야.
그런 남자에게도 연인이 있단 말이지. 눈을 감아 달라고 말할 정도면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용인하지 않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순한 관계를 이어가는 귀족이 어디 한둘이던가? 정부로 들이면 되는 일을 굳이 조건으로 내세운 이유는 황제의 공식적인 인정, 다시 말해 그녀를 황제로 만들어 정식으로 인가를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대단한 로맨티시스트 나셨군. 대관절 상대가 누구이기에?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녀는 내심 혀를 찼다. 누구면 뭐 하려고. 가십거리나 들쑤시는 귀족처럼 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님?”
낯선 호칭에 황녀가 고개를 돌렸다. 별채로 이어지는 길목에 일로델이 서 있었다. 자다가 막 나오기라도 했는지 가운 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했다. 누구랑은 달리 참 허술하고 귀엽단 말이지. 그녀는 반갑게 다가갔다.
“여기서 보는군. 산책하는 거야?”
“네…. 누님은요?”
“네 형과 있다 오는 길이야. 같이 걸을까?”
일로델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흐뭇하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형제들이 끼고도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제 처음 본 사이임에도 경계를 풀고 따라오는 것이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가까이서 보니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설치기라도 했어?”
“네, 좀…. 바깥이 시끄러워서요.”
“알 만해. 새벽 내내 불꽃놀이를 하더군. 다들 들어가 자고 있으니 한산한 것 봐. 오늘 밤도 그러고 놀 생각인가?”
일로델은 툴툴거리는 황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사촌은 좋은 사람 같았다. 시원시원한 성격만큼 대화에 막힘이 없고 진솔해 보였다. 괜한 일에 끌어들인 게 아닌가 뒤늦게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일로델이 문득 걸음을 멈추자 황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형님과…. 이야기는 잘되셨어요?”
“이야기?”
“파혼을 조건으로 동맹, 맺으신다고….”
황녀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멋쩍게 웃었다.
“역시 알고 있었나? 물론 잘됐어. 조금 의외인 조건도 있었지마는….”
“…….”
“얼마 전에 로건 대령에게서 서신이 왔어. 조만간 대공 가문과 혼담이 오갈 거라 했지. 그땐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야만인 우두머리가 잡히고 정말로 혼인 이야기가 나오더군. 대령이 동맹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나섰을 거야. 아, 그렇다고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야. 하지만 내겐 황위를 지지해 줄 세력이 필요해.”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묻는 눈빛에 일로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행한 대로 돌려받는다고 했던가. 자신이 단순한 도피처로 혼인을 선택한 것처럼, 그녀도 목적을 위해 혼인을 이용한 것뿐이다. 오히려 호수에 돌만 던져놓고 우왕좌왕하던 자신과 달리 그녀는 동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비교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일로델의 반응이 순순하자 황녀는 조금 남아 있던 꺼림칙한 기분을 내려놓았다. 하기야, 그 난해한 인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예뻐하는 동생이었다. 특별히 다투는 사이도 아닌데 나쁜 의도로 혼인 파기를 요구할 이유는 없었다. 워낙 의문스럽게 구는 남자라 괜히 의심이 가는 거라며 황녀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냈다. 역시 황제에게 휘둘릴 동생이 걱정이었을 수도 있고, 겸사겸사 그 연인에 대한 것도 해결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말이야. 대령이 말하는 조건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
“아니요. 저는 자세한 것까진….”
영문을 몰라 얼떨떨한 일로델을 앞두고 그녀가 민망한 듯 웃었다.
“호기심이 사라질 생각을 않는군. 아무것도 아니야. 같이 저택으로 들어가겠어?”
“저는 들를 곳이 있어서요. 먼저 가세요.”
“그래, 저녁 무도회에서 봐. 오늘은 함께 춤을 추자.”
일로델은 저택으로 향하는 황녀를 배웅하고 몸을 돌렸다. 멍한 표정과 기운 없는 걸음걸이는 황녀의 말처럼 피곤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어젯밤 집무실에서 읽은 서신을 떠올렸다.
‘그대의 예상대로 폐하께서 혼담을 가져왔습니다. 동맹 조건은 정말로 파혼뿐입니까? 혹 다른 조건이 있다면 미리 듣고 싶군요.’
황녀의 서신을 읽은 순간, 일로델은 거대한 동굴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반짝이는 것이 있어 출구라고 생각하고 다가가면 이끼가 잔뜩 낀 거대한 늪이 기다리는 그런 동굴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계획된 거지? 그냥, 처음부터 모든 것이 함정이었던 걸까?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은 것도? 혼인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리고 미끼를 덥석 문 자신의 행동도? 마치 귀신에게 홀려 조종이라도 당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일로델은 몹시 불안한 모습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별채로 들어갔다.
마침 하인은 자리를 비웠는지 아무도 없었다. 잘된 일이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베개 밑에 놓인 상자를 찾았다. 안에는 두 개의 독초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뿌리 하나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꺼내 들고 물과 함께 끓였다. 보통 약을 달인다고 하면 2시간 이상은 두어야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펄펄 끓는 물이 검게 변하고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풍기자 일로델이 독초를 건져 올려 부채로 파닥파닥 부쳤다.
일단 임신만 아니게 된다면. 그래, 모든 게 함정이더라도 당장 임신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다시 돌아갈 기회는 있다. 애초에 임신이란 말도 우습지 않나? 배 속에 이상한 걸 심어놓고, 사람이 태어날지 식물이 태어날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그는 만에 하나 수태했을지도 모를 것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식물, 어쩌면 책에서 본대로 족제비 새끼일 수도 있지. 맙소사, 이렇게 끔찍할 수가! 부채질이 더욱더 빨라졌다. 그때 별채 문이 벌컥 열리더니 티베인이 위풍당당 쳐들어왔다.
“너 뭐야, 오늘 방에서 쉰다고 했다며? 가도 없길래 한참 찾았잖아.”
일로델은 깜짝 놀라서 부채를 집어 던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일로델이 굳어 있는 사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티베인이 근처에 있는 약초 상자에 벌렁 주저앉더니 목까지 잠근 상의를 마구 풀어 헤쳤다.
“포커 못 해 죽은 귀신이 들렸나, 무슨 아침나절까지 카드질이야? 에이 젠장. 재미도 더럽게 없어. 왜 나만 지냐고?”
그는 새벽 내내 셰본과 로건에게 잡혀 포커 따위로 실컷 패배감을 맛보고 온 참이었다. 속에 쌓여 있던 푸념부터 늘어놓은 티베인이 일로델을 힐끔거렸다. 갑자기 와서 놀랐는지 아직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티베인은 저 좀 보라는 듯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아, 피곤하다. 눈 좀 붙였으면 좋겠는데. 네 침대에서 조금만 자도 되냐?”
“…….”
“그냥 해본 농담이야. 째려보긴….”
일로델은 티베인을 노려보던 눈길을 돌려 푹 익은 독초를 보았다. 저 자식은 이것이 뭔지 모른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데도 놀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쯤이면 빽 소리를 질러야 할 일로델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자 티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기웃기웃 살폈다.
“뭐 하냐? 약초? 연구라도 해? 웬일로?”
“손대지 마!”
드디어 평소의 반응이 나오자 티베인이 짐짓 놀란 척을 했다. 그러면서 힐끗 조리대를 살폈다. 얼마 전에 숨겨 주었던 길쭉한 나무 상자가 보였고, 그 옆에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뿌리 식물이 있었다. 영 비리비리하더니 드디어 먹는가 보지? 티베인은 흐뭇한 마음이 되어 물러났다.
“내가 그걸 뺏어 먹겠냐? 줘도 싫으니 너나 많이 먹어라.”
티베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일로델이 눈을 질끈 감더니 흐무러진 독초를 입에 구겨 넣었다. 티베인이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허겁지겁 삼키던 그는, 곧바로 속에서부터 치미는 역겨움을 느끼고 욱욱거리며 토해냈다. 결국 반도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자 티베인이 쯧쯧 혀를 차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급하게 먹어? 그렇게 좋은 거면 내가 더 구해다 줄게. 약초 이름이 뭐야?”
“저리 가…!”
“아, 그렇지. 마침 너 주려고 갖고 왔는데 잘됐군. 단 거 먹으면 신경질이 덜하다더라.”
티베인이 노란 사탕을 들고 일로델의 입가를 톡톡 쳤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일로델은 짜증이 솟아서 티베인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독초 맛이 어찌나 지독한지 당장 입가심을 하지 않으면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울 것만 같았다.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벌리자 달짝지근한 사탕이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어때? 괜찮냐? 다 먹으면 또 줄게.”
일로델이 입을 막고 역겨움을 참는 동안 티베인은 흐뭇함에 휩싸여 그의 입가도 닦아 주고 머리도 넘겨 주고 솜털이 바짝 선 목덜미도 만져 보다가 뒤로 빠졌다. 한참 뒤 토기가 잦아든 일로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굴 속 깊은 어둠에 갇힌 저와는 달리, 사막의 햇빛이 어울리는 얼굴로 티베인이 웃고 있었다.
“…형님은 어디 계셔?”
“엉?”
활짝 피어 있던 티베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너는 내가 그걸 알 거라고 묻는 거냐? 관심 없어.”
“황녀 전하와 거래 중인 게 아니고?”
김샜다는 듯 고개를 돌린 티베인이 일로델을 힐긋 곁눈질했다. 잠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나 보군. 뭐, 지금쯤은 얘기가 끝났겠지.”
“…….”
“그러게 말했잖아. 네 주제에 혼인이 가당키나 해?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데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전부 형이 계획한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제 헛생각 그만하고 현실을 봐. 형을 몰아내야 너도 좋고 나도 좋다니까?”
일로델은 티베인을 소리 없이 노려보았다. 결국은 저 자식도 동맹에 대해 알고 있었단 말이지. 살짝 떠본 말에 걸려든 주제에, 뻔뻔하게 떠드는 꼴이 가소로웠다. 전부 알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 동조자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걸 모를까?
“…….”
일로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티베인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오늘은 또 이걸 물고 늘어지겠군. 아, 진짜 까다로운 자식. 말 좀 들으라며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상상 속의 일일 뿐이다. 현실의 그는 입맛만 쩝 다시며 일로델을 구슬릴 말을 찾아 고민했다.
로건은 거래가 성사될 때까지 일로델을 잘 달래놓으라 했다.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다나? 그야 코흘리개 때도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스푼으로 사람을 갈긴 놈이다. 워낙 물러터져서 대단한 일이나 벌이겠냐마는, 어쩌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그는 군말 없이 비위 맞추기에 돌입했다. 젠장, 그런 것 같으면 빨리 얘길 해야지. 그것도 모르고 페로몬에 눈이 돌아서 애 엉덩이를 후려쳤으니….
“저어, 죄송합니다. 대위님….”
전운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별채 문이 끼익 열렸다. 조심스레 열린 문틈으로 티베인의 부하, 말론 중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를 본 티베인이 도끼눈을 떴다.
“뭐야, 또?”
“잠시만 나와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하 녀석들이 지하 창고에서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거길 왜 들어가?”
“여기 하인들이 잡일을 도와야 한다고 해서요…. 대위님, 딱 한 번만, 잠시만…. 제발…….”
말론 중사가 무릎 꿇고 사정할 기세로 애걸복걸했다. 티베인은 말없이 그를 주시하다가 몸을 돌리더니, 가까이 다가가 냅다 무릎을 걷어찼다. 알 바 아니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며 사납게 윽박지르는 가운데, 뒤에서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일로델이 침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
미치겠군. 저걸 따라가면 또 난리법석을 치르겠지? 티베인은 깊은 곳에서 치미는 짜증을 삼키며 말론 중사를 돌아보았다.
“그래…. 일단 가자고. 지하 창고라고 했지?”
“네? 네, 그렇습니다.”
“더럽게 멀군. 오리걸음으로 따라와.”
“…….”
말론 중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때, 일로델은 쓰러지듯 침대에 눕고 있었다. 창자가 뒤틀리듯 요동치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약이 어찌나 독한지 반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몸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떨다가 시트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목이 타서 탁자에 있는 물을 마시고, 마셨던 걸 곧바로 게워냈다. 반쯤 혼절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길 한참, 느린 속도로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정신이 맑아졌을 땐 창밖으로 주홍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일로델은 비척비척 일어나 침대에 한껏 웅크렸다. 넋이 나가서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에서 어이가 없을 때 나오는 웃음이 피식피식 흘렀다. 이걸 일주일 뒤에 한 번 더 먹어야 한다고? 차라리 못돼먹은 형제들에게 반쪽씩 나눠주고 말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왜 형제들은 살맛 나는 얼굴로 돌아다니고 자신만 별채에 숨어 끙끙대고 있어야 하지? 이것이 맞는 선택인 것인가? 진정으로?
“일로델 님? 혹시 계십니까?”
똑똑, 정갈한 노크가 울렸다. 일로델은 기운이 다 빠져서 모른 척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하인 마노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쉬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오셀이라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단독 면담은 거부하려 했습니다만, 일로델 님과 미리 약속되어 있다고 하셔서요.”
혹시 아니라면 곧장 쫓아내겠습니다.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마노를 앞두고 일로델은 살짝 주저했다. 그러나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내 손님이 맞아. 다른 곳은 복잡하니까…. 본채에 있는 내 방으로 모시도록 해.”
마노가 “알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일로델은 그러고도 한참 더 누워 있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은사가 촘촘하게 얽힌 화려한 가면 두 개가 손에 잡혔다. 탈진으로 흐려져 있던 일로델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사람은 행한 대로 돌려받아야 하는 법. 이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형제들도 쓴맛을 볼 때가 되었다. 일로델은 가면 두 개를 비장하게 쥔 채 방을 빠져나갔다. 고풍스러운 침실에 석양을 받은 창문 그림자가 창살처럼 길게 흘러내렸다.
*
일로델은 별채를 나와 곧장 본채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손님맞이를 준비하는 하인들이 분주하게 정원을 오갔다.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빠르게 걷던 일로델은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활짝 열린 현관 사이로 허술한 정장에 목발을 짚은 남자가 보였다. 일로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로건 님께 한번 여쭤보래도? 오르본이 왔다고 하면 아실 거야.”
“죄송합니다. 로건 님께선 면담 요청을 받지 않고 계십니다.”
“그럼 어디 계신지만이라도…. 저택이 너무 넓어서 찾을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저는 로건 님이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이러지 마. 내가 수상쩍어 보이나 본데, 이래 봬도 로건 님께 3년 넘게 후원을 받은 천재 과학자야. 앞으로 그분의 충실한 수하가 될 예정이라구. 그뿐인지 알아? 나는 일로델의 아카데미 친구야. 걔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네가 날 이렇게 취급했다는 걸 알면, 고 성깔 더러운 것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로건의 이름에는 끄떡도 안 하던 하인이 일로델의 이름을 듣자 대번 난처한 빛을 띠었다. 드디어 먹히는군. 승리를 예감한 오르본이 잘난 체하듯 가슴을 쭉 폈다. 그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누구 성깔이 더럽다고?”
“누구긴. 내 친구….”
일로델이 귀신의 형상으로 오르본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돌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오르본이 잽싸게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일로델 너는 당연히 아니지. 비록 나를 말린 생선처럼 목발로 두들겼지만 너는 착한 아이야. 하하…. 자, 잘 지냈어?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
얼굴 가죽이 붙어 있기 싫다고 절규할 만치 뻔뻔한 놈. 당장 감옥에 가둬놓고 주둥이를 찢어도 시원치 않지만, 지금은 오르본 같은 말종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일로델은 비굴하게 알랑대는 그를 콧등으로 무시하고 하인에게 눈짓했다.
“아주 잘했어. 이놈은 손님도 뭣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알려 주지 마.”
“네, 알겠습니다.”
하인이 뿌듯하게 웃었다. 일로델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본이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따라왔다.
“어, 어디 가? 같이 가자….”
“내 방에 오겠다고?”
네까짓 게 감히? 일로델이 냉담하게 노려보자 오르본이 펄쩍 뛰며 물러났다.
“개인 공간은 좀…. 로건 님의 허락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나부터 허락 안 해. 말 걸지 말고 저리 가.”
오르본이 찔끔해서 따라오는 걸음을 멈췄다. 신분이 높은 측이 거부하면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일로델에게 오르본 같은 놈 하나 떼어내는 건 숨쉬기보다 쉬웠다. 필사적으로 떼어내야 할 상대가 형제들이기 때문에 이렇게나 애를 먹는 것이다. 길거리 시정잡배도 안 할 비겁한 작당까지 꾸미면서 말이지. 일로델이 힐긋 품 안을 확인했다. 안주머니에는 무도회에서 쓰는 가면 두 개와 조그만 귀금속 상자가 있었다. 진짜 피어스가 든 상자였다.
그냥 예쁘장한 장식이었다면 진작 버렸겠지만, 이것은 위치를 추적하는 도구라고 했다. 무작정 버리면 금방 들통날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도 늘 찜찜했는데 이제야 제 주인을 찾을 모양이었다. 선생님에게 피어스를 채우고 가면까지 쓰게 하면, 제아무리 눈치가 귀신 같은 형제들이어도 깜빡 속아 넘어가겠지? 특히나 형은 제가 꼰 새끼줄로 제 몸을 묶는 격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일로델은 사람의 시선을 피해 사생활 통제 구역을 돌고 돌아 2층으로 올라왔다.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둔 효과인지 주변이 한산했다. 생각보다 음모 꾸미기가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신감이 붙었다. 일로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응접실을 초조하게 맴돌던 오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로델, 드디어 왔구나!”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너도 여기까지 오는 데 고민이 많았을 텐데, 나도 이해해야지.”
고민이라. 아예 없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긴 하지. 일로델이 대충 수긍해 주며 가면과 귀금속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드레스룸에서 오늘 저녁 입기로 한 예복도 꺼내 왔다. 그러자 오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이, 이게 다 뭐니?”
“전부 선생님 거예요.”
“으응?”
“이번 일 성공하면, 여기 있는 거 전부 선생님 것이 될 거예요.”
오셀의 표정에 숨기지 못한 탐욕이 스쳤다. 그는 감격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부터 제 방이라도 된 것처럼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일로델은 모르는 척 예복으로 관심을 돌렸다. 어차피 선생님이 선의로 자신을 돕는다고 여기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믿고 기대할 뿐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고, 자신 역시 보답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언젠가는 생길 것이라 믿고 기대하다, 늘 실망할 뿐이었다.
형제들에게 기대하는 건 조금 다르지만 크게 빗나가지도 않았다. 가족으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길 바랐다. 남 보기도 망측한, 섹스, 그런 건 제발 좀 빼고 말이다. 그러나 무엇 하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정말이지 단 하나도.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바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너무나도 소소한 자신의 바람은 마치 덧없는 꿈과 같아서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로델이 느릿하게 예복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빠지자 오셀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왜, 왜 그러니? 일로델?”
“…….”
“설마 아쉬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형이랑 동생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선생님이 도와준다고 했잖아. 응?”
일로델은 오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쉬울 게 뭐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가면이? 값이 얼마인지 짐작도 못 하는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그는 이런 것 전부 필요 없었다. 형제들만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전 재산을 바닷속에 공물로 바치고 사흘 밤낮 기도할 수도 있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자신에게 개처럼 흘레붙지만 않으면 된다. 부디 형제들이 홀딱 빠질 만큼 선생님의 페로몬이 매력적이길 바라며 일로델은 오셀의 변장을 도왔다. 오셀이 귀를 뚫는 동안 흑발로 염색된 그의 머리를 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워낙 서툴러서 제대로 한 거라곤 가면 매듭을 짓는 일뿐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오셀에게 광을 내 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초심자이기 때문일까? 완성된 결과가 허술했다. 검은 머리와 은사 가면, 다이아몬드 피어스, 어제와 비슷한 하얀 예복을 오셀에게 입혔음에도 자신은커녕 티베인도 닮지 않았다. 물론 날씬한 몸매를 휘감은 정장과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같은 것이 예쁘다는 인상을 남겼지만, 자세나 분위기는 어딘지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로델과 달리 오셀은 무척 마음에 든 눈치로 거울을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
“이게 정말 나야? 내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거울만 보다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이해가 가….”
그래 뭐, 본인이 마음에 들었으면 됐지. 일로델은 굳이 지적하는 대신 옆에서 끄덕끄덕 맞장구쳐 주었다. 어차피 잠깐의 속임수일 뿐이다. 형제들과 밀폐된 공간에 머물게 해 주면, 선생님은 눈 깜짝할 사이 두 사람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다고 했다. 일전에 오르본도 알파를 쓰러뜨리는 독이 어쩌고 나불댔던 기억이 있어 살짝 불안했지만, 그런 돌팔이와 달리 선생님은 진짜 오메가였다. 불의의 사고로 티베인과 정을 통했던 과거가 이미 있었다. 베타인 그가 느끼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페로몬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일로델은 오셀의 능력을 굳게 믿기로 했다.
“이제 형님과 티베인을 불러올게요. 선생님은 여기 계세요.”
“응?”
그때까지도 감탄을 연발하던 오셀이 아,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뒤늦게 수줍은 척 뺨을 감쌌다.
“고마워, 일로델. 이런 자리 마련해 줘서.”
“네….”
“그냥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나중에 나를 원망하거나 그러면 안 돼. 형제들의 애정이 그리워져도, 그건 잘못된 거잖아. 가족인 네가 바로잡아야지. 혹시라도 내가 뺏어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일로델이 수업을 경청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다 순간 갸우뚱했다.
“선생님이 제 걸 뺏어 간다고요?”
그럴 수가 있나? 그는 뭐든 뺏으면 뺏었지, 누구에게 뺏기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공연히 트집 잡지 말라는 이야기일까? 하긴, 쓸데없이 시비를 걸어 남을 못살게 구는 귀족은 많다. 멀리 갈 것 없이 그도 어제 귀족들의 괴롭힘이 얼마나 피곤한지 겪지 않았는가. 선생님 입장에서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일로델은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며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오셀도 주춤주춤 웃었다. 드물게 발휘된 배려심에 휩싸인 일로델에게 오셀의 파르르 떠는 안면 근육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살며시 문을 열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오셀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나가 볼게요. 꼭 성공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만 믿어요.”
“으응, 그래….”
일로델이 간절한 눈빛을 한번 쏘아 주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오셀은 웃던 얼굴 그대로 안면을 찌그러뜨렸다. 건방진 녀석. 순진무구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까놓고 보면 그렇게나 건방질 수가 없다. 절대 아무것도 뺏기지 않으리라 자신하는 그 눈빛은 도대체 뭐지? 멍청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그런 종류인 걸까?
유구한 알파 가문에서 태어난 베타. 누가 봐도 천덕꾸러기가 따로 없지만, 실상은 잘난 알파 형제들이 보잘것없는 베타 차남에게 감시를 붙이고, 성욕을 품고, 아이까지 배게 만들 정도로 미쳐 있다고 한다. 오셀은 일로델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믿어 주기로 했다. 일로델의 황당무계한 망상이든, 혹시나 아주 적은 확률로 사실이든, 몹시 구미가 당기는 이야깃거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일로델의 자리를 뺏어 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로건과 티베인이라는 세상에 다시없을 매력적인 알파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일로델의 망상도 현실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오메가도 약을 먹으며 베타처럼 사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그는 달랐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인생은 움켜쥐는 자의 것이다. 일로델처럼 있는 것도 못 쓰고 멍청하게 굴 바에야 그가 갖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오셀은 일로델의 침실로 들어가 손에 닿는 모든 것에 페로몬을 묻혔다. 햇볕의 포근한 냄새가 가득하던 공간에 오메가 페로몬이 끈적하게 감돌았다.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오셀은 일로델의 침대에 앉아 닫힌 침실 문을 보며 입술을 길게 말아 올렸다.
*
한편, 복도로 나온 일로델은 때마침 다가오는 하인을 발견하고 초조하게 물었다.
“형님이랑 티베인, 어디 있어?”
“곧 무도회가 시작될 시간이라 두 분 모두 일로델 님을 찾고 계셨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앞장서. 그렇게 말하려던 일로델이 멈칫했다. 아니지. 직접 가서 데려오면 안 되잖아. 어찌저찌 방으로 끌고 갔는데 같은 몰골의 두 사람이 있으면 바보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방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비밀스러운 이야기니까, 꼭 둘만 오라고 해야 해.”
“알겠습니다.”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가 사라진 뒤, 일로델은 잠시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옆방을 찾아 들어갔다. 형제들이 방에 잘 들어가는지 확인을 할 생각이었다. 인기척을 듣기 위해 문을 살짝 열어놓고 벽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낯익은 느낌의 삭막한 응접실이 보였다. 하필이면 티베인의 방에 들어온 것이다.
언제도 한번 보았지만 티베인의 방은 삭막했다. 장식이나 구조, 커튼 색마저도 자신의 방과 똑같은데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빛이 없기 때문인 듯했다. 커튼은 꾹 닫혀 있고, 그 흔한 램프조차 없다. 남의 방을 토끼굴이라고 핀잔주더니 음산하게 사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일로델은 어느새 호기심을 갖고 여기저기 헤집었다. 혹시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서랍도 뒤지고 벽장 속도 살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틈만 나면 와서 치대는 놈이 뒤로는 실체 없는 영혼처럼 살고 있다는 게 오싹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게 있다면, 침실 안의 침대가 생뚱맞은 방향으로 딱 붙어 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니까, 자신의 방이 있는 방향 말이다.
“…….”
그게 뭐. 그냥 거기가 명당자리로 느껴졌나 보지….
일로델은 어쩐지 뜨끔한 가슴을 움켜쥐고 괜히 침대 밑을 살폈다. 뭔가 숨겨두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뭐가 있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물건이 아닌,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이런 걸 뒷걸음에 쥐 잡는다고 하지?
일로델이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꺼냈다. 냅다 풀어서 안을 보았지만, 곧장 실망했다. 납작하고 네모난 가방 안에는 금색의 수갑, 비단 끈, 뭐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얇은 사슬 같은 것만 덜렁 들어 있었다.
일할 때 쓰는 도구인가? 가끔 출정도 나가는 녀석이니 죄인을 잡을 때 쓰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걸 왜 비싼 금으로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로델이 황금 수갑을 흔들며 허탈해하던 그때였다. 바깥에서 저벅저벅 울리는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일로델은 가방을 발로 밀어버리곤 수갑만 챙겨 응접실로 나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익숙한 두 사람의 실루엣이 지나가고 있었다. 로건과 티베인이었다.
“…….”
일로델은 바짝 굳어서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옆방으로 가고 있었다. 이윽고 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짧은 적막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일로델이 발걸음을 죽이며 밖으로 나왔다. 목표 지점은 그의 방 앞이었다. 일로델은 거대한 문을 빤히 노려보았다. 주저 없이 수갑을 꺼내 들어 두 개의 문손잡이에 각각 채웠다. 그리고는 꽁지가 빠져라 복도를 내달렸다.
*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복도에 티베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말끝을 높인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그 능구렁이가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또 무슨 뒷거래라도 벌였나?”
“아니, 거래는 없어.”
“그럼 힘겨루기를 할 생각인가? 흠, 좋지. 방해될 만한 건 치워버리는 게 나아. 죽지 않을 정도로 손봐서 요양이나 보내자고.”
티베인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건들 걸었다. 서슴없이 제 아비를 해치자는 그 얼굴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서 걷는 로건도 표정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도회 준비가 한창인 정원을 내려다보며 ‘죽지 않을 정도’로 제한을 두는 점이 그와 티베인의 차이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티베인은 로건의 내리뜬 눈에서 잔인한 기색을 발견하고는 괴물 보듯 질색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겠군.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다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난 아직 거기까지 미치진 않았어.”
“그렇군.”
“나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면 포기해. 아버지를 죽이든 살리든 형이 알아서 하라고. 젠장, 저런 미친놈이라는 걸 일로델이 알아야 하는데….”
티베인이 경멸하듯 눈을 흘기며 게걸음으로 로건 옆에서 멀어졌다. 같은 자리에 일로델이 있었다면 너도 똑같은 놈이라며 손가락질을 했을 태도였지만, 티베인은 진심으로 자신은 정상이고 로건은 상종 못 할 패륜아라며 굳게 믿고 있었다.
로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창밖을 보다 입을 열었다.
“겁먹은 개 같군. 시끄러워.”
“뭐야?”
티베인의 안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일로델은 종종 그의 말본새를 탓하지만, 로건이야 말로 입 더럽기론 따라갈 자가 없었다. 날벌레도 피해 갈 것 같은 우아한 얼굴로 저속한 소릴 지껄일 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비위가 상했다. 싸우자는 태세로 멈춰선 티베인을 로건이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티베인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앞서서 떠들 것 없어. 꼭 필요하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흥,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단 말이지? 어련하시겠어! 내가 장담하는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어 나가는 상황까지 가면 일로델은 절대 못 버텨.”
“그렇겠지.”
티베인은 순순히 인정하는 로건을 의외롭게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걸음을 재개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솔직한 말로, 일로델과 섹스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가시 돋친 독설을 받아줄 인내와 약간의 죄책감을 견딜 수만 있다면, 보드라운 엉덩이에 좆을 파묻는 것 정도는 쉽기가 손바닥 뒤집기와 다를 바 없었다. 살짝만 짓눌러도 꼼짝 못 하고 우는 놈 상대로 어려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도 간단한 일이다. 빌어먹게도 일로델의 애정을 듬뿍 받던 로건에겐 숨쉬기보다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끝없이 계략질을 일삼는 이유는 속내가 음흉하기 때문만은 아닐 터. 달리 말하면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해보고 있다는 뜻이 된다. 티베인은 아니꼬우면서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로건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방을 지나 일로델의 방이 목전이었다.
“그나저나, 일로델이 왜 우릴 불렀는지 알아?”
“글쎄.”
“나는 알아. 형은 모르겠지만.”
앞만 보고 걷던 로건이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티베인이 우쭐해서 떠들었다.
“일로델이랑 장난치며 자라온 세월이 얼만데. 걔는 당하고만 있을 놈이 아냐. 슬슬 반격이 올 때가 됐지.”
“…….”
“문을 열 때 조심해야 할걸? 위에서 꽃병이 떨어지거나 날아온 찻잔에 콧등이 깨질 수도 있어.”
티베인이 낄낄 웃으며 노크 없이 일로델의 방문을 열었다. 일로델이 던질 찻잔 하나도 로건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형형한 눈으로 맞이할 방 주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티베인은 램프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응접실 안을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야, 일로델. 나 왔어! 어딨냐?”
티베인이 넓은 응접실을 기웃거리는 동안 로건이 문을 닫았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묵직하게 내려온 벨벳 커튼, 티타임의 흔적이 없는 테이블을 지나 바닥을 느릿하게 훑는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로건은 등 뒤의 문을 흘긋 돌아보더니 이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음흉하게 욕실을 훔쳐보던 티베인이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이게 사람 불러놓고 자나? 깨웠다고 또 깽알거리겠군.”
하여간 제 잘못은 하나도 없지. 티베인이 구시렁대며 느릿느릿 로건의 뒤를 따랐다. 로건이 침실 앞에 도착해 두 번 노크했다. 반응이 없자 그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보랏빛 황혼이 짙게 차오른 침실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창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침대의 휘장 사이로 앉은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뭐야, 일어나 있었나? 티베인은 희희낙락해서 로건을 지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티베인이 벼락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우뚝 섰다. 방 안에 묘한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로건 형님. 그리고 티베인.”
오셀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침실 안에는 공기가 후끈할 정도의 페로몬이 가득 차 있었다. 문가에서는 강렬한 수컷 내음이 가득한 알파 둘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면 아래 오셀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보듯 천박하고 탐욕스러운 미소였다. 그러나 오셀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 무슨 행동을 하든, 발정기의 오메가를 앞둔 알파들에겐 먹음직스러운 열매요, 씨를 뿌리는 것을 허락한 너그러운 암컷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셀이 가까이 오라는 듯 형제들에게 팔을 뻗었다. 로건이 알 수 없는 얼굴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몸이 좋지 않아요. 덥고, 나른하고…. 옷을 벗고 싶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
“제 옷을 벗겨 주세요. 로건 형님…. 네?”
오셀이 애교 부리듯 팔을 벌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로건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은 차가웠지만 다른 무언가를 담고 일렁이고 있었다. 로건에게서 머리가 몽롱해질 만큼 짙은 페로몬이 피어올랐다. 거기엔 그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날카롭고 사나운 기운이 가득했다. 오셀의 숨이 기대감으로 가빠졌다.
“어, 어서 벗겨 주세요. 로건 형님, 로, 로건 님. 로건 님.”
“그렇군.”
“빨리, 입 맞춰 줘요. 빨리, 아, 제발….”
로건이 오셀의 턱을 쥘 것처럼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움켜쥔 것은 턱이 아닌 목이었다. 오셀이 켁 소리를 내며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 탓에 가면이 벗겨지고 맨얼굴이 드러났다. 로건이 차갑게 웃었다.
“확실히 일로델의 장난이 과해.”
“켁, 노, 놔, 놔주세….”
“정답을 맞혀서 좋겠어, 티베인.”
로건이 오셀의 목을 잡고 흘긋 돌아보았다. 주춤거리며 다가온 티베인이 오셀을 발견하곤 혐오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치미는 것을 억누르듯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내 참지 못하고 “우웨에에엑.” 하고 내지르며 토사물을 쏟아냈다. 전장에 나가 야만인을 도륙할 때도 느껴 보지 못한 메스꺼움이 그의 내장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로건은 정신없이 토악질하는 티베인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오셀을 보았다. 그새 숨이 넘어갈 듯 낯빛이 거무죽죽했다. 로건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더러운 것을 만진 듯 장갑을 벗는 동안 오셀이 바닥을 기며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헉, 허억,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살려 주세요. 로건 님. 티베인 님.”
“일로델은 어디 있지?”
“모, 몰라요. 저도 몰라요. 저는 시킨 대로 했어요. 저는, 일로델이…!”
로건이 벗은 장갑으로 오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가 악, 소리를 내며 넘어가기도 전에 질긴 가죽제의 장갑이 그의 반대편 머리를 갈겼다. 두 대를 연달아 맞은 것뿐인데 머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제야 오셀은 로건의 눈빛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다. 그것은 살기였다.
여기 있다간 죽을 거야. 정신이 번쩍 든 오셀이 허겁지겁 바닥을 기어 침실을 나갔다. 티베인의 토사물이 묻은 줄도 모르고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가 문을 발견하고 온몸을 던져 밀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셀이 절망에 차서 돌아본 순간, 번개처럼 따라온 티베인이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했다.
“이, 개, 좆같은….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악! 아니에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일로델이, 일로델이 시켰다고요!”
“닥쳐! 어차피 넌 죽은 목숨이야. 차라리 잘됐지. 일로델 때문에 억지로 살려놨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겠어.”
티베인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가 오셀을 쓰러뜨리고 목을 짓밟으려던 때였다. 그의 앞으로 검은 가죽 장갑이 날아왔다. 로건의 짓이었다. 티베인이 반쯤 미친놈처럼 눈알을 홱 돌리며 소리 질렀다.
“뭐야! 말릴 생각이면 집어치워! 형도 죽여버릴 테니까!”
“그럴 때가 아니야.”
“그럴 때가 아니면, 이 새낄 살려놓자고? 언제부터 그렇게 자비로웠지? 아, 나를 물 먹이라고 시켜서 성공했던 놈이니 죽이긴 아깝겠군! 그렇지?”
티베인의 목에서 숫제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로건이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냅킨으로 손을 닦아내고 문으로 다가갔다. 고급스러운 흑단 나무 원목의 표면이 램프 빛을 받아 잔잔하게 빛났다. 그와 반대로 문을 바라보고 선 로건의 모습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와 있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살짝 흔들었다. 바깥에서 철컥철컥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문틈 사이로 수갑을 발견한 로건이 굳어 있던 얼굴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바깥 손잡이에 수갑을 채워놨군. 이런 건 어디서 구했지?”
“뭐? 뭐라고? 뭘 채워?”
별안간 화들짝 놀란 티베인이 서둘러 문가로 다가왔다. 그는 번쩍거리는 황금 수갑을 보더니 “내 거잖아! 이게 왜 여기 있어!” 하며 펄펄 뛰었다. 로건은 시끄럽게 구는 티베인을 무시하고 문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제복 안의 팔뚝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투두둑, 소리와 함께 묵직한 손잡이가 통째로 뜯겨 나와 로건의 손에 들렸다. 그는 두 개의 손잡이 사이에서 달랑거리는 수갑을 빼내 주인에게 던져 주었다. 티베인이 엉거주춤 그것을 받았다.
“할 말이 있다며 부르고, 변장한 사람을 대신 들이고, 문에 수갑까지 채웠군. 누구 짓인지는 너도 짐작이 가겠지.”
“일로델이지 누구야. 이 요망한 자식…. 감히 씨도 안 먹힐 함정을 파고 달아났겠다?”
티베인이 수갑을 콱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일로델을 떠올리자 미친 듯 뒤틀리던 속이 가라앉고 그 자리에 잔잔한 분노가 붉은 핏물처럼 차올랐다. 티베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오셀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선명한 살기를 읽은 오셀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마구 바닥을 기어 왔다.
“제, 제 말 좀 들어줘요. 이, 일로델이 시켰어요. 전 잘못이 없어요. 그, 그렇지. 협박당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저, 저는 너무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전 죄가 없어요!”
멀리서 큰 소리를 감지하고 달려온 군인들이 로건과 티베인을 보고 일제히 경례했다. 로건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발밑의 오셀을 내려다보았다. 귓가에 낯익은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우기의 바람처럼 축축하고 불쾌하게 끈적이는 그것은 정작 일로델의 방에서 오셀을 발견했을 때도 느끼지 않았던 분노였다. 로건은 군인이 차고 있던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 사, 살려 주세요. 일로델이 시켰어요. 믿어 주세요. 정말로 일로델이 시켰어요!”
“아까부터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예리한 검날이 오셀의 귓가에 닿았다. 그대로 천천히 움직이자 잘린 귀에서 피가 흘렀다. 날카롭게 찾아든 고통에 오셀이 비명을 지르려 하자, 군인 하나가 눈치 빠르게 그의 입에 천을 쑤셔 넣고 몸을 압박했다.
“일로델이 무엇을 하든지 그 아이의 자유야. 누굴 협박하든, 사람을 죽이든, 오늘처럼 과한 장난을 치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고 있지. 그래야 미치지 않아.”
“욱, 욱. 우욱!”
“하지만 가끔은 미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 인내심도 거기까지란 얘기겠지.”
구긴 천 사이로 오셀의 둔탁한 비명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검날을 타고 피가 진득하게 흘렀다. 핏물을 타고 살덩이가 툭 떨어지자 로건이 검을 거두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군인이 정중하게 검을 받아 들었다. 티베인이 떨어져 나간 귀를 주워드는 것을 보며, 로건이 군인들을 눈짓했다.
“지하로 데려가.”
“네. 감옥에 수감하겠습니다.”
“아니. 수감이 아니야.”
군인이 의아해서 눈을 들었다. 로건이 무심하게 말했다.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데려가. 식성이 남다르다지…. 작은 부탁의 조건으로 인육을 원했어.”
“…….”
“분에 맞지 않게 영광스러운 죽음이로군.”
오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천을 물고 울부짖는 그를 군인들이 끌고 사라졌다. 로건이 남은 군인들을 향해 “일로델을 찾을 때까지 저택의 문을 봉쇄해.” 하고 명령했다.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로건과 티베인도 자리를 벗어났다. 그늘 아래에서 숨죽여 대기하던 하인들이 서둘러 바닥의 피를 닦아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피비린내 가득하던 웅장한 복도는 어느덧 적막한 시간을 되찾았다.
*
타닥타닥, 분주하게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 소리가 멈췄다. 일로델은 층계참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곧장 뒷덜미를 잡힐 듯한 느낌에 쫓기듯 뛰어온 것이 무색하게도 그를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공한 건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했다지만 너무 쉬운걸…. 일로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중요한 물건을 두고 온 것 같은 찝찝함이 발목을 붙들었다. 괜히 급하게 도망친 것 같다. 다시 가서 확인해 볼까? 수갑이 잘 채워져 있는지만 보고 오는 거다.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
“어맛.”
별안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위를 올려다보며 한눈을 팔던 일로델도 덩달아 놀랐다. 발밑에 물컹한 것이 있었다. 바닥을 쓸고 다닐 만큼 길고 풍성해서 계단께까지 올라온 드레스였다. 난데없이 치맛자락을 밟힌 여성이 불같이 항의하려다 일로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로델 님?”
순간, 무수한 시선이 쏠렸다. 모두 무도회장으로 향하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일로델을 보자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눈을 번뜩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일로델이 당황해서 몸을 물렸다. 그러나 뒤는 계단으로 막혀 있었고, 귀족들은 홀로 있는 일로델과 대화할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신사 숙녀들이 구름떼처럼 계단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거 우연이로군! 어제는 인사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소. 나는 로렌스 호무에 백작이요. 들어본 적이 있겠지? ‘메디안의 성’의 저자가 바로 나요.”
메디안의 성? 아버지가 며느리를 탐하다 아들에게 복수당한다는 파격적인 소재의 소설 말인가? 그 소설은 많은 사람이 열광했지만 일로델은 기분이 나빠 읽기를 중단했던 적이 있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은 했지만, 성에 갇혀 아들의 노리개가 된다는 게 세상천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더구나 어느 순간 불쌍한 며느리는 나오지도 않고 부자간의 묘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바람에 일로델은 진저리를 치며 책을 덮어야 했다. 그딴 허무맹랑한 소설은 금서로 지정해서 불태우고 저자는 외딴 섬으로 보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모른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터지더니 너도나도 손을 뻗어왔다.
“저, 저는 모로이 상회의 주인입니다.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능력은 알아주지요. 사실 이번에 좋은 투자감이 있어서 이렇게….”
“어제 홀에서 뵈었지요? 페르닌 자작입니다. 북부 귀족들은 공작 가문과의 친분을 과시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존경스러운 분들과 인연을 맺고 싶었어요.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잠깐, 당신들 다 뭐죠? 드레스를 밟힌 건 저예요. 제가 먼저라고요!”
일로델이 되는대로 악수를 받아주자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사이사이 고성이 오가고 더러는 멱살을 잡았다. 뒤에서 자리를 내달라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온 군인들이 계단에 핼쑥하게 서 있는 일로델을 보호했지만, 이미 폭주한 사람들을 막을 순 없었다. 차라리 위로 올라가자며 서로 눈짓했을 때, 한쪽에서 노성이 터졌다.
“이게 무슨 추태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물을 끼얹은 듯 복도가 조용해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비켜섰다. 카티야 황녀였다. 그녀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좌중을 쏘아보았다. 체통과 품위처럼 간사한 단어가 또 있을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하이에나가 따로 없는 게 인간인 것을! 그녀는 못마땅한 듯 혀를 쯧쯧 차며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언짢은 기색이 감도는 눈동자가 어머니 헤롯이 한심하게 쳐다볼 때와 상당히 흡사했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예의도 지키지 않은 인사를 왜 받아주고 있지? 미련한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 참, 별꼴을 다 보겠군.”
카티야 황녀가 몸을 홱 돌려 걸었다. 기가 막힌다는 태도였다. 일로델은 잠시 계단을 올려보며 머뭇거리다 기분이 상한 듯한 황녀를 쫓아갔다. 그 모습이 혼인을 앞둔 남녀가 아닌 어미 꿩과 병아리처럼 보여서 몇몇 귀부인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여인들은 두 사람을 천천히 따라가며 수군거렸다.
“오늘은 혼인 발표가 있겠죠?”
“그럼요. 내일이면 무도회가 끝나는데, 그땐 너무 늦잖아요.”
“그럼 내일은 축하연이 열리겠네요. 얼마나 멋질까!”
“너무 단정 짓는 거 아니에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걸요.”
“황제 폐하께서 추진하신 혼인인데 설마 무른다고 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빨리 드레스부터 맞춰놓는 게 좋을걸요?”
“부인이 후원하는 의상실에서 말이죠? 거기 말단 직원이 부인의 정부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기가 막혀서! 도대체 누가 그래요?”
황녀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펄쩍 뛰던 귀부인이 황녀의 눈치를 보았다. 수다를 표방한 도발로 대답을 끌어내는 방식은 그네들의 주특기였다. 황녀는 성질대로 울컥하려는 속을 다스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으니 오늘은 발표가 될 겁니다. 발표 권한은 대공께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그를 찾아가 보세요.”
황녀는 빠르게 말을 마친 뒤 연회 홀로 들어갔다. 속이 답답해서 못 살겠다는 듯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는 그녀 옆에서 일로델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눈치를 보다 입구 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주인 몰래 사과를 훔쳐 먹은 개처럼 불안해 보였다. 황녀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불퉁하게 물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잘하고 있겠지? 그럴 거다. 형제인 자신을 두고 벌떡벌떡 세우는 짐승들이니, 사랑스러운 선생님에겐 넋이 나가서 발이라도 핥아 주고 있을 것이다. 일로델은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을 다독였다. 한참 여기저기 둘러보다 한숨을 푹 쉬는 일로델을 황녀가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뒤늦게 허전함을 눈치채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혼자로군. 로건 대령과 티베인 대위의 호위는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일로델이 슬쩍 눈을 피했다.
“바쁠 거예요.”
그 짓 하느라….
일로델은 뒷말을 삼키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누군들 자신의 계획을 예상이나 했을까? 혼인 발표 따위 오늘이 됐든 내일이 됐든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취소될 테지. 그것이 형의 계획이었다면, 자신은 한 수 앞을 더 내다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제 다음 일을 준비해야 했다. 마침 아버지가 와 있으니, 선생님을 형제들의 숨겨진 정부라 발설해서 빼도 박도 못하는 사이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신기할 만큼 다음 작전이 차곡차곡 생각나는데 어쩐 일인지 손발도 꿈쩍할 수 없었다. 실패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바쁜 일이라? 알 만하군. 거래가 끝났다는 거지. 가족애가 지극한 척하더니, 네 형제들도 별수 없는 모양이야.”
황녀가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그녀는 내로라하는 명문 귀족답지 않게 서로 아끼는 형제들에게 감명을 받은 차여서 이 같은 행보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빠서 사교계 근처도 못 가 본 애를 아귀 같은 인간들 틈에 떨어뜨려 놓냔 말이야. 저라도 지켜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일로델에게 먹을 것을 안겼다.
일로델은 웅장한 음악을 들으며 케이크를 깨작이다가 그만 내려놓았다. 초조함이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형과 티베인을 현혹할 만큼 매혹적인 것이 틀림없겠지만, 무엇이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일이 실패하면 분노한 형제들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일로델은 춤을 추러 가자는 황녀에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죄송해요, 누님. 저는 가 봐야겠어요.”
“가 보다니, 어디를?”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일로델이 횡설수설하며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불안한 눈길은 아버지인 셰본을 찾고 있었지만, 아직 무도회장에 나오지 않았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밖으로 나가려는 계획을 틀어 셰본을 찾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아무리 화가 난 형제들이어도 이상한 짓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식당, 서재, 집무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뒤져 봐도 셰본은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눈에 익은 상급 하인을 붙들고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주인님께선 방금 무도회장으로 향하셨습니다.”
젠장. 길이 엇갈렸다. 일로델은 입술을 깨물고 빠르게 걸었다. 말없이 일로델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보던 황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을 찾는 건가? 내 부하에게 찾아보라 할까?”
일로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도,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그녀의 대답에 일로델이 환한 얼굴을 했다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보일락 말락 끄덕였다. 큰 부탁도 아닌 일에 어려워하는 모습이 의아했지만, 황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하에게 대공을 찾아보라 시켰다. 일로델이 지닌 미숙함의 연장선이라 여기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말했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갑자기 대공은 왜 찾아?”
“…그냥요.”
“그냥?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
두 사람은 무도회가 열리는 홀 앞에 다다랐다. 맞은편에서 군인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제복을 입은 그들은 무도회장을 덮쳐오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자리에 서서 군인들이 가까워지길 기다리던 황녀가 음, 하며 의문 어린 소리를 냈다. 선두에서 걸어오는 자는 록퍼스 대공이 아니었다.
“로건 대령?”
황녀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로건을 알아본 일로델이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직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뒤에서도 한 무리의 군인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로비 쪽으로 뛰어가고, 나머지는 일로델이 서 있는 홀 앞을 둘러싸 포위하듯 섰다. 딱딱하게 굳은 면면들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풍기자 황녀의 호위가 경계하며 바짝 붙어 섰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로건 대령?”
황녀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날카롭게 물었다. 로건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히익, 소리를 내며 몸을 물렸다. 그의 등 뒤에서 억센 손이 나와 거칠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기겁해서 돌아본 일로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티, 티베인….”
“왜 그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티베인이 씩 웃더니 무언가를 내던졌다. 아직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물체가 바닥을 철퍽 굴렀다. 절단된 사람의 귀였다. 파랗게 굳어가는 귓바퀴에 하얀 점 같은 다이아몬드가 반짝 빛났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던 귀족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맙소사, 저게 뭐야!”
한순간에 홀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며 경기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로델은 바닥에 나뒹구는 살덩이를 멍하니 보았다. 날카롭게 잘려 나간 그것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가온 로건이 시야를 가리듯 서며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속삭임이 귓가에 떨어졌다.
“네가 볼 필요 없어, 일로델.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그 모양이니 애가 버릇이 없지. 제대로 봐. 누구 귀인지 네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일로델은 티베인에게 허리를 잡혀 끌려갔다.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오히려 팔뚝에 힘을 꽉 주고는 한 손으로 일로델의 턱을 고정했다. 떨리는 시야에 싸늘히 굳어가는 신체 일부와 그 너머로 당황한 황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호위를 제치고 나섰다.
“티베인 대위, 형제를 괴롭히지 마시오. 로건 대령, 지금 사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 귀의 주인은 누구지요?”
“저택에 신원 미상의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포박해 지하에 가두었으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로건이 딱딱하게 말하며 티베인을 눈짓했다. 티베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지만 일로델의 턱을 쥔 손을 풀었다. 두 사람은 일로델을 끌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흉흉한 기세에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무도회의 주인공인 차남은 뒤늦게 사태를 깨달아 경악한 표정이었고, 두 알파 형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짙은 발정의 냄새를 풍겼다. 정사를 예감한 연인처럼 은밀하고 난잡한 냄새였다.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소수의 알파가 얼굴을 찌푸렸다. 황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세 사람을 따라가려던 그녀였으나, 로건의 부하들이 “위험합니다.” 하며 문 앞을 막아섰다. 그사이 로건이 일로델의 팔을 잡고 단상에 올랐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택 안에 초대받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는 격리 조치하였으나 공범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안전을 위한 것이니 모두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옮겨 주십시오.”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서로가 서로를 눈짓했다. 어느새 홀 주위에 수많은 군인이 포진해 있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신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다. 눈치 없는 누군가는 “그럼 무도회는 끝인 것이오? 나는 혼인 소식이 궁금해서 온 것인데….” 하고 묻다가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무도회 일정은 심문으로 변경됩니다. 공범이 아닌 분들은 무사히 저택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리고….”
로건이 질문한 자를 눈짓했다.
“혼인은 치러질 것입니다. 본인의 반대로 성대한 식은 올리지 못하겠지만,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 그러면, 황녀 전하와…!”
“아니요.”
로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일로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그의 형이 얼마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알게 된 지금,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그는 굳어서 삐걱대는 몸을 움직여 로건의 입을 막으려 했다. 로건은 달려드는 일로델의 팔을 잡고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일로델의 혼인 상대는 저와 티베인입니다.”
“…….”
“뜻밖의 발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축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로건이 일로델의 턱을 쥐고 입맞춤을 퍼부었다. 경악의 물결이 홀 안을 뒤덮었다. 체통도 잊고 입을 쩍 벌린 귀족들 머리 위로 난데없이 탕, 하는 굉음이 울렸다. 그들은 놀라움을 수습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티베인이 천장을 향해 미친놈처럼 총을 쏴대고 있었다.
“뭘 쳐보고 있어? 알았으면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라고!”
난장판이 된 홀 안으로 군인들이 몰려와 귀족들을 보호하며 밖으로 탈출시켰다. 혼이 빠진 채 내빼는 사람들 틈에서 황녀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을 밀치며 “잠깐!” 하고 외쳤다. 입맞춤에서 잠시 해방된 틈을 타 일로델이 고개를 틀고 손을 뻗었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누님, 도와주세요….”
“로건 대령? 이건 합의입니까? 그대의 동생은 무서워하고 있어요!”
로건이 빙긋 웃었다. 그는 겁에 질린 일로델의 머리를 넘겨 주었다. 식은땀이 흘렀는지 동그란 이마가 촉촉했다. 로건은 처음으로 일로델이 오메가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의 동생이 겁먹은 얼굴로 페로몬까지 풍기고 있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이성을 잃은 개처럼 허리를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제 연인에 대해 눈감는 것이 거래의 조건입니다.”
“…….”
“불쾌하니 참견하지 마십시오.”
로건의 푸른 눈이 사납게 빛났다. 황녀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렸다. 일로델은 그녀이든, 혹은 누구든 잡아 주길 바라며 팔을 뻗었지만, 사람들은 못 본 척 홀을 빠져나가고 황녀는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체념한 일로델이 몸에서 힘을 뺐다. 로건이 그를 거칠게 안아 올렸다. 일로델은 입 안 깊숙이 침범해오는 형의 혀를 받아들이며, 뒤에서 동생이 문을 닫으라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묵직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고막을 울렸다.
“많이 떠는군. 무서워?”
입술이 맞닿은 채로 로건이 속삭였다. 습하고 낮은 목소리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일로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형님, 무슨 짓, 무슨 짓을….”
“주최자가 무도회의 목적을 잊으면 안 돼, 일로델.”
“무, 무….”
“혼인 발표를 하기로 했다면 반드시 하는 것이 사교계의 매너지. 물론 네가 알아둘 필요는 없어. 앞으로 이 저택에서 사교 모임이 열리는 일은 없을 테니….”
칼날처럼 섬뜩한 눈과 마주한 일로델이 힉, 하며 숨을 들이켰다. 굳어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이 파고들었다. 잡힌 턱에 힘이 들어가고 입 안을 가득 채운 혀가 거침없이 얽혀왔다. 일로델이 응응, 신음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옆에서 우악스러운 힘이 손목을 잡아채고 어딘가로 끌어당겼다. 후덥지근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나 싶더니, 손바닥에 크고 묵직한 살덩이가 툭 얹혔다.
“큭, 아…. 그래 이거지. 바로 이거야. 젠장…!”
등 뒤로 티베인이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강제로 잡혀 움직이는 손안에서 둔중한 살덩이가 무럭무럭 부피를 키웠다. 일로델은 팔이 뒤로 꺾인 아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패닉에 빠졌다. 무언가를 쥔 손이 뜨겁다 못해 타고 있는 것 같아서, 썩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경악 어린 울먹임이 흐르자 로건의 눈동자가 흘긋 옆을 향했다.
“그 새끼 얼굴 보고 좆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는데, 다행히 제 기능을 하는군. 너 각오해. 사흘 내내 싸질러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으니까.”
“티베인.”
“시끄러워, 말리지 마! 오늘 아주 톡톡히 버릇을 고쳐 놓겠어.”
대뜸 총부터 꺼내 들 때도 그랬지만, 어지간히 이성을 잃었는지 티베인의 흰자가 희번덕거렸다. 로건은 놀라서 바들바들 떠는 일로델을 끌어당기며 낮게 목을 울렸다.
“짐승처럼 굴지 마. 보기 흉해.”
“아무리 짐승 같아도 형만 할까? 애를 혼자 독차지하고 뼈까지 발라먹겠다는 얼굴이야. 아주 야만스럽기 짝이 없어!”
허공에서 맞부딪친 두 사람의 눈동자가 퍼렇게 번뜩였다. 사납게 웃는 티베인은 바지와 속옷을 골반에 걸친 채 거뭇한 음모를 드러내고 있었고, 로건은 금욕적인 제복 차림이 무색하게 포악한 눈빛과 표정을 여실히 내보이고 있었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의 몰골을 자각하고 혀를 찼다. 누가 누굴 탓할 꼴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틈에 일로델은 혼비백산해서 형제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드넓은 홀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급한 대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둘에게 겨눴다. 가녀린 바이올린 활이 눈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어떻게, 거기서.”
“뭘 어떻게야? 너는 그 허술한 잔꾀가 성공할 것 같았냐? 진심으로?”
티베인이 너절하게 풀어 헤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달랑달랑 흔들었다. 황금색 수갑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을 올려다보는 일로델의 눈이 불안스레 떨렸다.
“서….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 아까 그 이상한 거, 서, 설마….”
“이상한 게 아니라 그놈의 귀야. 흠, 어떻게 할까. 얘기해?”
티베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로건을 보았다. 로건은 대답 없이 제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검은 장갑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움직임은 느렸다. 우아한 손길로 웃옷의 단추를 풀고 소매 끝을 접어 올리는 행위가 야릇하게 느껴진다는 것에,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다는 생각에 일로델은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한동안 묵묵히 손을 움직이던 로건이 입을 열었다.
“그자는 죽었어.”
“…….”
“일로델, 네가 걱정해야 하는 건 다른 사람의 안위가 아니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가능하면 놔주고 싶지만 티베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 귀족 가문에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어떤 벌을 내리는지, 혹시 알아?”
그런 것,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라고 해봐야 수업을 빠지거나, 집에 좀 늦게 들어오거나, 동생과 헐뜯고 싸운 것 말고는 없다. 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사람을 죽게 만드는 죄를 저지르게 되리라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다가온 로건이 손안에서 요동치는 바이올린 활을 가져갔다. 일로델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을 앞두자 그가 자상한 형으로 돌아와 부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한심한 어리광이었다. 현실의 로건은 냉랭한 눈을 내리뜨며 현실을 직시하라 종용하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사흘간 독방에 갇히게 돼. 그곳에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지. 네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해, 일로델.”
“저, 저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혀, 형님이, 티베인이, 먼저….”
“또 고집을 부리는군.”
로건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 겁먹은 일로델이 움찔해서 물러났다. 그러나 발을 헛디뎌 기우뚱 몸이 넘어가자 로건이 그의 팔을 잡아채 그대로 원형 테이블에 엎어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일로델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평소 겪을 일이 드문 거친 취급에, 그것도 티베인도 아닌 로건이 저를 테이블에 밀치고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 동생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도 형의 역할이지.”
“혀, 혀, 형님…?”
“괜찮아. 네게 고통을 주는 일은 없어. 고통보다 더한 쾌락은 몰라도….”
열기에 푹 잠긴 속삭임이 떨어지자 일로델이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로건은 솜털이 촘촘히 올라온 하얀 귀를 입 안 깊숙이 빨아올렸다. 크고 단단한 혀가 귀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쑤시고 나올 때마다 일로델은 테이블에 납작 엎드린 채 주먹을 꾹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움직임이었다.
티베인은 근처에 있는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잔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제 손으로 성기를 주무르며 밖으로 꺼냈다. 로건에게 깔려 바르작거리던 일로델은 눈앞에서 번들거리는 동생의 성기를 마주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봐. 그 새끼 앞에서 시든 열매 같았던 좆이 지금은 어떤가.”
“시, 싫어, 흣, 저리 치워….”
“너만 보면 좋다고 날뛰는 걸, 다른 새끼 구멍에 처넣으려 해? 네가 한 짓은 강간이야. 너는 그 새끼를 이용해서 나랑 형을 강간하려 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티베인 놈이 또 헛소리를 한다. 상호 동의하에 하는 것이 어떻게 강간이란 말인가? 물론 선생님에게만 동의를 받고 형제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지만, 형제에게도 품는 음심이니 오메가 페로몬 앞에선 정신이 쏙 빠지게 황홀했을 테고, 지금쯤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마땅했다. 제가 이상한 걸 왜 남에게 씌운단 말이야. 티베인 자식이 제 기능도 못 하는 반쪽짜리 알파인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다. 잘못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울게 생겼군. 이번엔 소용없어. 울고불고 빌어도 안 봐줘.”
떳떳해하는 속내와 다르게 울상을 짓고 있던 일로델이 눈을 꾹 감았다. 귓속을 질척이며 드나드는 소리가 깊은 생각을 방해했다. 일로델은 팔에 힘을 줘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로건이 등을 강하게 짓누르며 귓가와 목덜미를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티베인은 어딘지 넋이 나간 눈으로 일로델의 달아오른 뺨을 주무르더니,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혓바닥을 농락했다. 따끈하고 말랑거리는 혀가 놀라서 도망칠 때마다 티베인의 숨이 거세졌다.
“네가 내 걸 빨아 줄 날은 세상이 무너져도 오지 않겠지? 제길…. 죽여버리고 싶군.”
입 속을 헤집는 손길이 격렬하게 변했다. 일로델은 고개를 저어 피하려 했지만, 로건에게 턱을 붙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건은 다른 손으로 일로델의 셔츠를 풀어 헤치고 드러난 어깻죽지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대로 바지까지 끌어 내리자 뽀얀 살갗이 밖으로 드러났다. 로건과 티베인의 시선이 또다시 사납게 맞부딪쳤다.
“그만 비키지?”
“뭘 하려고?”
“뭐긴, 넣어야지. 나는 형과 달리 젊어. 지금 당장 안 넣으면 자지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
글쎄, 굳이 다른 게 있다면 단어 선택과 인내심 정도가 아닐까. 로건은 짧은 한숨을 쉬며 일로델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일로델은 오메가가 아니라 젖지 않아. 성기를 넣으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지.”
티베인이 거칠게 혀를 찼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당장 쑤셔 넣겠다 덤벼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로델은 테이블 위를 기어오르기 위해 발을 버둥거렸다. 마음만은 넓은 테이블을 날아올라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날쌘 매와 같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등을 억누르는 힘은 강해지고 벗겨진 속옷은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렸다. 반듯했던 테이블보가 난잡하게 구겨지고 떨리는 숨소리가 나약하게 이어졌다. 그것이 자신이 내는 소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 일로델은 서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나쁜, 나쁜, 하지 마, 싫어….”
“내 동생은 책임을 질 줄 모르는군. 발정 난 오메가와 한 방에 갇혀 있었으니 나와 티베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야. 앞으로 사흘은 발정이 이어질 텐데…. 각오하는 게 좋아.”
옆에서 티베인이 “난 사흘로는 모자라. 젊거든.” 하며 잽싸게 끼어들었다. 일로델은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몸부림쳤다. 사흘? 하나씩 하루만 상대해도 힘이 드는데, 사흘이라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뇌가 녹을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밤낮없이 지속되어 백치가 될지도 모른다. 일로델은 사색이 되어 버둥댔다. 그러나 부질없는 몸부림은 억센 손길에 엉덩이 사이가 활짝 벌어지는 결과만 낳았다. 놀란 일로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파드득 튀어 올랐다.
“힉, 무, 무슨, 무슨 짓을.”
“가만히, 힘 빼고 있어…. 티베인.”
로건이 티베인을 눈짓했다. 그의 눈길이 이어진 곳은 일로델이 엎어져 있는 테이블 밑이었다. 티베인은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고 이빨부터 드러내다가, 한 박자 늦게 숨은 뜻을 알아채고 음탕하게 웃었다. 그는 부러 그러듯 수갑을 꺼내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일로델은 섬뜩할 만치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뭐, 뭐야….”
“선물. 좀 나중에 주고 싶었는데, 받을 사람이 미리 발견했으니 어쩔 수 없지.”
티베인이 히죽히죽 웃었다. 일로델은 직감적으로 말뜻을 알아챘다. 서둘러 팔을 빼내려 했지만, 티베인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일로델은 두 손목에서 빛나는 화려한 수갑을 넋이 나가서 쳐다보았다.
“나, 나한테 어떻게, 어떻게 이런 취급을….”
“아직 놀라긴 일러.”
티베인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속옷을 반쯤 걸친 채 힘없이 바르작대는 늘씬한 다리가 보였다. 그는 눈을 이글이글 태우며 탐스러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일로델은 충격에 빠져 ‘나한테 수갑을 채웠어. 나한테….’ 하며 중얼거리다 악, 하고 튀어 올랐다.
“놀라기는. 겁도 많은 놈이 아주 대담한 짓을 벌였어?”
“뭐 하는 거야! 놔, 놔아!”
“시끄러워. …나는 진짜 놀랐단 말야, 나쁜 새끼야.”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티베인이 눈앞에서 달랑대는 일로델의 성기를 한입에 삼켰다. 깜짝 놀란 일로델이 저도 모르게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제대로 발기하지 않은 성기가 뜨거운 입 속에서 마구잡이로 굴려지고 있었다.
“흐익, 히익.”
소름이 돋다 못해 몸서리가 쳐지는 감각이 전신에 퍼졌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일로델이 티베인을 밀어내려 했다. 바로 그때, 뒤에 있던 로건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는 열감 가득한 숨을 느릿하게 내쉬더니 어정쩡하게 선 일로델의 엉덩이를 한껏 잡아 벌렸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혀를 내밀어 붉게 드러난 비부를 흠뻑 머금었다.
“흐아앗, 뭐야, 시, 싫어…. 아….”
말캉한 입술이 엉덩이 사이를 빨아들이고, 혀가 구멍을 갈랐다. 앞에선 티베인이 질세라 허벅지를 움켜잡고 성기를 쭙쭙 빨았다. 일로델은 반쯤 공황 상태가 되어 수갑으로 묶인 팔을 휘저었다. 티베인의 머리를 밀어내고 엉덩이를 틀어쥔 로건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허무할 뿐인 저항이었다. 한동안 어쩔 줄 모르던 그는 돌연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을 받고 급하게 테이블보를 움켜쥐었다.
“우읏, 흣….”
넓은 홀에 물기 가득한 음란한 소음이 메아리쳤다. 형제들이 앞뒤로 달라붙어 은밀한 부위를 게걸스레 빨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감각이 치솟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 야릇한 느낌이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입을 앙다물고 저항해 보려던 일로델은, 그러나 어느 순간 억눌린 신음과 함께 무너지듯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댔다.
“흐으, 으으, 이게, 대체, 무슨 짓…. 하지 마, 하지 말아요….”
경악이 뒤섞인 애원에도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일로델은 맨몸에 셔츠만 걸치고 테이블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티베인에게 잡혀 벌어진 허벅지가 뻐근함을 호소했다. 어떻게든 땅을 지탱해 보려던 발목에서 기어이 힘이 빠지고, 거친 손길에 의해 다리가 크게 벌어졌다. 애널 사이를 몇 번이고 빨아올리는 혀의 움직임이 농밀했다. 아래에서 성기를 빨아대는 소리도 귀에 꽂혔다. 이것은 도무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짓거리였다. 일로델은 헝클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테이블보를 움켜쥐었다.
“흣…. 미친, 변태 같은…. 그만해….”
“그러게 말했잖아. 형은 미친놈에 변태라고. 구멍이랑 자지 같이 빨리니까 어때? 좋아?”
티베인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일로델의 성기를 톡톡 치며 이죽거렸다. 일로델은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입을 열면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어느새 녹진하게 풀어진 애널 사이로 로건의 혀가 깊게 파고들었다. 처음은 빠듯하게 밀고 들어왔지만, 단단한 혀가 내벽을 부드럽게 들쑤시자 움직임은 금세 매끄러워졌다. 일로델은 입술을 꾹 물었다. 테이블에 몸을 지탱하느라 힘이 들어간 팔꿈치가 달달 떨렸다. 그것도 재차 성기를 빨아올리는 티베인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아읏, 흑, 아….”
일로델의 저항이 스러지자, 로건과 티베인이 경쟁하듯 일로델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움직였다. 뜨겁고 말캉한 두 혀가 예민한 부위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동생이 이빨로 귀두를 긁을 때마다, 형의 혀가 추잡한 소리를 내며 엉덩이 사이를 드나들 때마다 머리가 텅 비어갔다. 힘이 빠진 다리는 티베인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바닥으로 흘러내렸을 테고, 동아줄처럼 쥐고 있는 테이블보는 엉망으로 구겨진 지 오래였다. 일로델은 눈앞이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시야가 닫히자 형제들의 혀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이닥쳤다.
“아, 아아…. 이상해, 아….”
일로델의 애널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로건은 예민한 동생의 구멍을 혀로 정성스럽게 문질렀다. 그는 일로델이 쾌감을 느끼는 장소를 모두 알고 있었다. 내벽 깊지 않은 곳을 집요하게 들쑤셔 주면 마취로 정신이 없다가도 지금처럼 허벅지를 잔뜩 조여대곤 했다. 로건의 혀가 목적을 갖고 한 부분을 끈질기게 문질러대자 일로델이 끙끙대며 허리를 흔들었다. 티베인은 움직임에 맞춰 목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빨고 뱉길 반복했다.
“후아, 아, 아아아….”
뒷골이 바짝 당기고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몇 번의 경험으로 일로델은 그것이 사정의 전조라는 걸 알았다. 그러자 로건의 혀 놀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우아한 손으로 엉덩이를 한계까지 벌리고 구멍을 세게 빨아들이기까지 했다. 티베인은 귀두가 예민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예 그 부분만 물고 혀를 빠르게 돌려댔다. 발원지가 어디인지 모를 쾌감이 뒤죽박죽 날뛰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아, 아아아아…!”
일로델이 비명처럼 길게 신음하며 사정하려던 때였다. 로건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용케 지시를 눈치챈 티베인이 통통하게 발기한 일로델의 성기를 잡고 앞을 틀어막았다. 막 사정을 시작하려던 성기가 놀란 듯 꿈틀꿈틀 움직였다.
“으응, 아, 무슨…. 놔, 놔주세요….”
일로델은 성기를 틀어쥔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힘없이 팔을 휘젓는 움직임에 수갑이 흔들려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티베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걸리적대는 물건을 걷어찼다. 무거운 원목 테이블이 짚단처럼 풀썩 넘어갔다. 그는 지지대를 잃고 쓰러지는 일로델을 잡아 올리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방금까지 제 성기를 빨던 입술이 다가오자 일로델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해, 저리 가…!”
“존댓말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 더 해봐. 잘못했어요, 하면 이거 풀어줄게. 어때?”
누가 그딴 말을 한다고. 정신이 없어 대꾸는 못 했어도 반항적인 기운은 전달이 됐는지 티베인이 요도를 막은 손을 꾹꾹 돌려댔다. 발끝이 찌릿찌릿해서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틈을 타 티베인이 덤벼들었다.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이며 뺨이며 콧등까지 빨아대는 통에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일로델은 수갑에 묶인 손으로 티베인을 퍽퍽 때렸다.
그때, 엉덩이 사이로 질척하게 젖은 귀두가 푹 꽂혔다. 당황한 일로델이 몸을 바르르 떨었지만, 그를 빨아먹느라 여념이 없는 티베인은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로델의 어깨와 목 사이로 정중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두 허벅지가 잡혀 허공으로 들리고, 로건의 육중한 성기가 벌어진 구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저지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흑, 아, 아, 아아…!”
갑자기 커다란 것이 쑤시고 들어온 건 둘째 치고, 공중에 들린 허벅지에 무게중심이 쏠려 제법 아팠다. 저도 모르게 울먹이자 로건이 촉촉하게 젖은 뒷머리를 턱으로 긁으며 나직하게 달랬다.
“괜찮아, 일로델. 허리에 힘 빼고…. 자세가 안 좋군.”
“어엉? 뭐야? 지금 뭐 하는 거야? 형이 왜 먼저 넣어!”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티베인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발을 구를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꺼떡였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꼴이었다. 일로델은 쌍둥이 동생의 추잡스러운 몰골에 기함하면서도, 손을 뻗어 도움을 청했다. 뭐라도 껴안고 있어야 형에게 잡힌 허벅지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티베인이 얼떨떨해하며 일로델을 마주 안았다. 물론 앞을 틀어쥔 손은 여전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세는 편해졌다.
“하아, 하아….”
“…됐냐? 하여간 약해 빠져선….”
그래도 힘겨운 건 여전해서 숨을 헐떡이자, 티베인이 수갑에 묶인 손목을 들어 올리더니 팔 사이로 슬그머니 고개를 끼워 넣었다. 일로델은 얼떨결에 동생에게 찰싹 안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뒤에서는 로건의 성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후으, 으으읏, 히, 힘들어요, 형님. 아….”
“착하지…. 괜찮으니까 티베인에게 몸을 맡겨. 아프게는 안 해.”
“아, 싫어요, 아, 아….”
부드럽게 달래는 말과 달리 로건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늘 그렇듯 성기는 질퍽하게 젖은 채였다. 내벽이 쓸리는 아픔은 없었지만, 거대한 것이 안을 채우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아으으응. 일로델이 앓는 소리를 내며 티베인에게 매달렸다. 티베인은 순서를 빼앗은 로건에게 으르렁대다가도 일로델이 매달려 올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홀린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일로델을 내려다봤다. 품 안의 몸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엔 예쁜 짓 하나 안 하던 놈이 지금은 죽을 둥 살 둥 매달려오는 것이 신기했다.
“으응, 으응, 아!”
일로델은 티베인의 목에 매달려 버둥댔다. 어느덧 깊숙이 파고든 로건의 성기가 서서히 움직였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힘이 느릿하면서도 거칠었다. 커다란 것이 빠져나갔다 채워질 때마다 숨이 탁탁 끊겼다. 그와 동시에 티베인이 요도 부근을 살살 비볐다. 작은 틈으로 사정액이 질금질금 흘렀다. 사정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괴롭히고자 하는 의도가 빤히 읽혔다. 일로델은 티베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끙끙대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발버둥을 쳤다.
“하, 하지 마. 넣지 마요…. 그만해, 나쁜 놈들아! 나, 나한테 왜 이래. 선생님한테 가요. 나는 아냐. 나 아니에요…. 아…!”
일로델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느리게 움직이던 로건의 성기가 예고 없이 세게 박혔다. 좁은 내벽을 후벼파듯 쑤시고 들어와 꾹 다물린 속살을 마구잡이로 열어젖혔다. 일로델은 저항하던 것도 잊고 입을 크게 벌렸다. 비명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것이 입 밖으로 터졌다. 일로델이 힘없이 늘어지자 티베인이 그의 등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며 일로델의 몸에 발기한 제 성기를 게걸스레 비볐다. 밖에선 고환과 회음부가 이리저리 짓눌리고 안에선 닫혀 있던 내벽이 쩍쩍 벌어지며 예민한 살을 드러냈다. 커다랗게 불거진 귀두가 그곳을 찧어댈 때마다 눈앞이 번쩍번쩍 튀었다.
“아우, 아! 아아아…!”
“일로델? 형 목소리 들리지? 혀 물지 않게 조심해. 이제 움직일 거야.”
이미 움직이고 있는데, 뭘 더 한다는 거야. 경황없는 와중에도 일로델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수갑에 묶인 처지라는 것만 재확인한 꼴이 되었다. 공중에 들린 몸뚱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허무한 저항은 무산되고, 예고한 그대로 로건의 성기가 빠르게 쳐올려졌다. 혈관이 돋아 울퉁불퉁해진 것이 내벽을 세차게 긁었다. 깊은 곳에 숨겨진 얇은 점막이 몇 번이고 짓이겨지며 질퍽질퍽 젖어 들었다.
“아앗! 아! 아아, 아! 흐아아!”
비명이 다 울리기도 전에 또 다른 비명이 튀어나왔다. 시야가 구겨진 것처럼 비틀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티베인에게 잡힌 곳이 부쩍 부풀어 제멋대로 꿈틀댔다. 티베인은 손을 풀어주긴커녕 강하게 움켜잡으며 허리를 바짝 들이댔다. 이미 로건의 성기가 드나드는 애널에 제 귀두를 갖다 대고 꾹 눌렀다 떼길 반복했다. 그러나 도저히 들어가질 것 같지 않자 이빨을 드러내며 성질을 부렸다.
“형, 좆 좀 치워! 넣고 싶어 미칠 것 같아!”
“하, 짐승이 인간으로 잘못 태어났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일로델?”
로건이 조롱 섞인 투로 웃으며 일로델의 목덜미를 빨았다. 피부에 닿는 숨결이 거칠었다. 일로델은 희미해진 정신으로도 티베인이 억지로 밀고 들어올까 봐 몸을 벌벌 떨었다. 자연스레 형제들의 두 성기가 몸에 들어왔던 기억이 연상되며 더욱 진저리가 쳐졌다. 그는 울먹이며 머리로 티베인을 밀어냈다. 제발 하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안타깝게도 티베인에겐 고개를 비비는 귀여운 행동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크, 젠장…!”
티베인이 숫제 씩씩거리며 성기 끄트머리를 들이밀었다. 로건의 것으로 빡빡하게 들어찬 애널이 찢어질 듯 벌어지며 고통을 호소했다. 일로델이 티베인을 밀치며 크게 울었다.
“미친놈아, 하지 마…. 형님, 형니임, 티베인, 티베인이….”
결국 기댈 곳은 로건뿐이었다. 일로델은 티베인의 만행을 고자질하며 로건에게 달라붙었다. 긴 한숨이 정수리를 헤쳐놓았다. 로건은 어린 동생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그 역시 사정까지는 멀었으나, 겁에 질린 일로델을 위해 잠시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벌어진 입구로 티베인의 성기가 푹 찔러 들어왔다. 티베인은 처음부터 천천히 할 생각은 없다는 듯 사납게 허리를 움직여댔다.
“아앗, 앗, 아파, 앗…!”
“뭐? 아파? 빌어먹을, 왜 내가 하니까 얼굴을 찌푸려? 어디가 좋아? 빨리 얘기를 해봐!”
티베인이 급하게 외치며 성기를 퍽퍽 박아댔다.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얘기를 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일로델은 입을 앙다물었다. 단단하게 휘어진 티베인의 성기가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내벽의 앞쪽을 긁었다. 마침 전립선이 있는 부분이었다. 예민한 장기가 자극을 받고 부풀자 티베인이 옳다구나 그 부분만 쑤셔댔다. 고통인지 뭔지 모를 감각으로 일로델이 턱을 떨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건이 한마디 건넸다.
“티베인, 속도 줄여.”
“시끄러, 말 걸지 마! 읏, 왜 점점 좁아져. 큭….”
쾌감을 아픔으로 인식한 일로델이 안을 꾸욱 조였다. 티베인이 아찔한 듯 고개를 털었다. 그는 입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로건의 조언대로 속도를 늦췄다. 일로델의 앞을 쥐고 있던 손도 놓고, 삽입하기 편하게 다리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느슨하게 들쑤시자 긴장했던 내벽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아, 읏, 흣….”
일로델은 더는 움직일 기운도 없어 로건에게 몸을 기댔다. 로건도 그를 단단하게 받쳐 주며 손으로 젖꼭지를 잡아 돌렸다. 아래에서는 티베인의 성기가 천천히 밀려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부풀어 오른 부분을 일부러 문지르는 것을 보니 감을 잡은 움직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일로델은 그만 저항을 포기했다. 다가올 쾌감을 모른다면 모를까, 괜히 힘만 빼는 짓이었다. 로건의 손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젖꼭지가 발갛게 솟아올랐다. 깊게 쳐올리고 빠져나가는 성기의 움직임이 점점 정교해졌다. 마지막 반항으로 신음을 참아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일로델은 어느 순간 두 형제들 사이에서 완전히 늘어진 채 백치처럼 입을 벌렸다.
“아, 아우, 아아아….”
“이 개자식, 뭐가 이렇게 귀여워. 나를 엿 먹인 주제에…. 귀엽게 군다고 봐줄 것 같아?”
“아응, 아, 티베인, 형님, 그만…. 아….”
“나는, 정말로 끔찍했어.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네가 미치도록 좋은데….”
티베인이 고개를 숙여왔다. 일로델은 그가 입을 맞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티베인은 뺨을 맞대오더니 어리광부리듯 살며시 비볐다. 일로델이 멍하니 흐려진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쌍둥이 동생을 보았다. 귓전으로 로건의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이번 일은 네 잘못이야, 일로델. 나와 티베인을 떼어낼 술수로는 너무 안일했어. 우린 발정 상대가 필요한 게 아니야. 네가 필요해.”
“흣….”
“그 사실을 똑똑히 알려 줄 필요가 있겠지. 너는 배움에 밝은 아이는 아니니까…. 으음, 울렸군.”
로건이 짓궂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티베인은 목덜미를 소리 나게 빨며 허리를 밀어붙였다. 움직임이 점점 일정해지는 것이 사정감이 다가오는 듯했다. 어느새 해방된 일로델의 성기도 쾌감으로 움칠움칠 튀어 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로건의 손에 막혔다. 그는 티베인보다 더 교묘한 손길로 요도 주위를 괴롭혔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흐르고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미칠 것 같은 감각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큭, 아, 미치겠군. 노팅하고 싶어.”
“그만 빼. 이 자세로는 일로델의 몸에 무리가 가.”
“돌겠네. 젠장, 조금만….”
“그것도 못 참을 것 같으면 혼자 자위나 하는 게 낫겠군.”
로건의 비아냥에 티베인이 욕설을 뱉으며 성기를 빼냈다. 갑자기 아래가 텅 빈 느낌에 일로델이 아, 아, 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바로 로건의 성기가 안을 채우며 깊이 치고 올라왔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내벽이 능숙하게 문질러지자 머릿속이 텅 비었다. 앞이 막혀서 사정은 할 수 없었지만, 그 탓인지 절정에 도달할 때와 비슷한 고양감이 계속해서 쌓였다.
“아으응, 아아, 아아아아….”
“역시 나랑은 반응이 달라. 그렇게 좋냐? 나도 배우면 잘할 수 있어. 네가 기회를 안 주니까 그렇지.”
티베인이 고개를 내려 젖꼭지를 세게 빨았다. 로건의 성기는 가장 안쪽까지 들어와 연약한 점막을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던 것도 같았다. 어느새 형의 성기가 동생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녀석의 것이 빠져나가면 또다시 형의 성기가 들어왔다. 그것이 수도 없이 반복되자 이젠 뭐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를 간지러움이 온몸을 기어 다녔다. 일로델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감각 속에서 울부짖었다.
“흐아, 아아아, 제발, 그만해요. 그만해 주세요. 아, 머, 머리가 이상해요. 제발….”
“괜찮아. 정신을 놓아도 돼. 차라리 그게 편할 거야.”
“시, 싫어. 아아응, 하아아아,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하아악…!”
일로델의 몸이 덜컥덜컥 흔들렸다. 정말로 한계가 온 듯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로건은 동생의 성기를 틀어쥔 손을 놓아주었다. 제법 통통하게 부어오른 성기에서 뽀얀 정액이 흘렀다. 일로델이 천장을 보며 입을 벌렸다. 풀린 눈이 오싹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그 눈이 반짝이며 저를 바라볼 때 더욱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로건은 잘 알고 있었다.
사정과 함께 내벽이 조여들었는지 티베인의 움직임이 사나웠다. 그가 노팅의 기미를 느끼고 재빨리 빠져나오자 로건이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채웠다. 푹 젖은 점막이 부드럽게 감겨왔다. 매끄럽게 늘어난 구멍은 조금 무리하면 두 사람의 것도 거뜬히 받아낼 수 있을 듯했다.
로건은 날뛰는 성욕을 진정시키는 티베인과 넋이 나간 일로델을 번갈아 보다, 문득 창밖을 보았다. 창밖으로 짙은 새벽 어스름이 고요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로건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일로델의 머리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
한편, 넓은 식당에는 긴장 어린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귀족들을 한 명씩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심문을 마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문이 열리고 마지막으로 심문을 끝낸 남자가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셰본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황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카티야 황녀가 눈만 올려 그를 보았다.
“록퍼스 대공. 심문은 잘 끝내고 오셨습니까?”
“네. 전하께서도 받으셨습니까?”
“제일 먼저 받았지요. 대공 가문의 심문은 조금 특이하더군요. 앉혀 놓고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누가 침입자의 공범인지 알 수 있는 모양이지요? 대단해요.”
“과찬입니다.” 셰본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이 하는 게 정말 심문이 맞냐며 비꼬는 말에도 태연하게 구는 태도가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황녀는 거칠게 고개를 돌리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식당 안에 모인 귀족들의 눈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록퍼스 대공 가문은 명망 높은 귀족임과 동시에 군사 지휘권을 가진 제국의 실세였다. 자칫 황제와 마찰을 빚을 수 있는 세력이었지만, 대공 측에서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며 권력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그런 가문에서 수십 년 만에 무도회가 열리고, 초대받지 않은 자가 침입하고, 신나게 춤추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조사받는 처지가 됐다. 어지간히 아둔한 자가 아니라면 불길한 일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음모인가? 놀랍게도 심문 대상에는 록퍼스 대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설마 대공 가문 후계자의 단독 반란? 황녀가 침착한 것을 보면 둘이 결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붙어야 이득일지 귀족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불안에 떠는 자들도 있었다. 황제파인 뮬리 공작은 음흉한 대공의 아들놈이 저를 침입자의 공범으로 몰아 해치우려는 속셈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렇듯 제각각 고민하는 바가 다른 그들이었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 하나는 모두 같았다.
그렇다.
무언가의 음모일 수도 있고, 반란의 방아쇠일 수도 있다.
한데, 그렇다면 아까 그 경악스러운 광경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귀족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은근한 호기심을 지우지 못하고 록퍼스 대공을 흘깃거렸다. 대공은 문을 지키고 선 군인을 닦달해 궐련을 빼 물고 뻑뻑 피워댔다. 잠시 후 좌중을 돌아보는 그는 초탈한 표정이었다. 셰본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아비로서 면괴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신변은 안전할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것은 음모도 반란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탈하게 돌아가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셰본이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풀썩 앉았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 셰본을 바라보았다. 반란까지 생각했던 그들에겐 당황스럽다 못해 맥이 빠지는 설명이었다. 당혹 어린 침묵 속에서 아직 어린 티가 남은 귀부인이 “일이라니,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요?”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신 그대로의 일입니다.”
“저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아들놈들이 거친 녀석들이라 가끔 이렇게 사고를 칩니다. 연모하던 둘째 아이의 혼인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이 급해졌던 게지요. 혈기가 사그라지면 자연히 여러분의 안전도 보장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셰본의 말이 끝나자 황녀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연모라니. 그러니까, 대공 가문의 유명한 장남과 삼남이, 차남을 남몰래 연모하다 못해 그렇고 그런 일이 벌였다는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형제끼리, 그것도 둘도 아닌 셋이서, 귀족과 유력가들이 모두 모인 장소에서 잡아먹을 듯 키스를 하고 사람들을 내쫓은 뒤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법한 은밀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혹시 대공이 미친 것이 아닌가?
셰본은 저를 보는 시선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면서도 뻔뻔한 얼굴을 했다. 뭐 문제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진심을 읽어낸 사람들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쳤다. 누군가는 혀를 차고, 처음 질문을 던졌던 젊은 귀부인은 빨개진 얼굴을 부채로 파닥파닥 부쳐댔다. 로렌스 호무에 백작은 어디서 필기구를 가져와 눈에 불을 켜고 뭔가를 써 내려갔다. 가장 강렬한 감정을 내비친 사람은 황녀였다. 그녀는 들이받을 기세로 태평하게 앉아 있는 셰본에게 다가갔다.
“록퍼스 대공,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한단 말입니까?”
“제국법상 근친상간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와 일로델도 사촌지간에 혼담이 오갔지요. 뭐, 다 끝난 일이지만….”
셰본이 손을 까딱였다. 군인이 재떨이를 내밀자 그곳에 궐련을 비벼 끄는 행위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황녀가 성질대로 셰본을 들이박지 않은 건 순전히 그가 대공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눈으로 셰본을 노려봤다. 황녀의 호위들이 조마조마한 듯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돌아가는 일을 대충 파악한 사람들도 언제 불안에 떨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세상 어디에 이런 스캔들이 또 있단 말인가? 북부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당장 인기인이 될 것이다. 베일에 싸여 있던 대공가에 대해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서 저택 문을 두드릴 것이고, 선물이 산처럼 몰려들 것이다. 이번 일이 철통같은 권력을 지닌 대공 가문의 약점이 될 수도 있고, 이것을 빌미로 무언가 얻어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황실과의 혼담 따위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조금만 불편함을 감수하면, 그들은 보다 더 엄청난 소식을 듣고 가게 되는 셈이었다.
“대공께서 명예에 관심 없는 분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은 넘어가지요. 일로델의 의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아이는 제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합의가 아니란 이야기지요!”
“그래서, 도움을 주셨습니까?”
“…….”
냉랭한 셰본의 대꾸에 황녀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능력 있고 성실하고 정의감도 있는, 황제가 될 재목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경험이 적은 탓인지 복잡한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누굴 좀 닮아서 성격이 불같은 게 흠이긴 하지. 순간 셰본은 헤롯을 떠올리고 가슴이 뜨끔해졌다. 어차피 헤롯에게도 사실이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최대한 늘려 관계가 정립된 이후에 알려지는 것이 나을 테다. 다 큰 놈들끼리 애도 낳고 잘 살겠다는데 부모가 뭐 어쩌겠는가….
솔직한 말로 셰본은 자식들 문제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여타 귀족들 못지않게 그도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헤롯이 로건의 성품을 문제 삼아 다른 후계자를 세우려 했을 때도 공연한 짓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녀가 원했기에 일을 진행했다. 생각지 못하게 베타에다 여러모로 미숙한 녀석이 태어나 염려했던 것도, 로건이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서며 모든 골칫거리가 해결되었다.
이제 일로델만 받아들이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다. 그보다 더 쉬운 해결법도 없었다. 셰본은 야비한 모략도 마다치 않는 무인이지만, 언제나 단순명료한 쪽을 선호했다. 먼 수까지 내다보며 빈틈없이 그물을 짜는 로건과는 다른 유형의 모사꾼이라 할 수 있었다.
“일로델을 딱하게 여기는 전하께서도 그 아이를 돕지 못하는 사정이… 분명히 있겠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그렇지 않겠습니까?”
“…….”
“아까 공범에 대해 물으셨지요. 다들 제 자식놈들의 공범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물론 안전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보셨다시피 통제가 안 되는 놈들이라 말입니다.”
귀족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대가 없이 얻어만 갈 수 있을 리 없지.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이건 협박이었다. 협조하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하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침입자의 공범으로 몰려 대공 가문을 음해하려 한 죄로 나락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순순히 협조하면 대공 가문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 끈끈한 연을 이어 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야말로, 모두가 공범이 되는 셈이다.
아까부터 쉼 없이 부채질을 하던 젊은 귀부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채를 접었다.
“한곳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덥군요. 잠시 정원에 나가 산책해도 될까요?”
셰본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밖이 어두우니 하인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내 집처럼 편히 부리십시오.”
“배려 감사합니다. …그, 형님분들이 그렇게 나쁜 분들은 아니지요?”
“정확히는 첫째와 셋째입니다. 뭐, 좀 사납긴 합니다만 그래도 정도는 알 겁니다.”
“다, 다행이네요. 일로델 님께서 마음을 편히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저어, 그럼 저는 이만….”
젊은 귀부인과 그녀의 동행인들이 후다닥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시작으로 누구는 변소를 가겠다느니, 눕고 싶다느니, 카드 게임을 하겠다느니 슬그머니 핑계를 대며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넓디넓은 식당 안이 텅 비고 카티야 황녀와 뮬리 공작, 셰본의 무리만이 남았다. 황녀는 어지간히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하, 하고 웃었다.
“사람을 아주 갖고 놀았군. 도대체 언제부터 꾸민 일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겠지요. 일로델의 나이도 제대로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고모님께서도 지금 벌어지는 일을 알고 계십니까?”
일부러 꺼내 본 헤롯의 이야기에도 셰본의 태연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빙긋 웃더니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전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황궁으로 돌아가시겠다면 배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로건에게 안부는 제가 따로 전해드리지요.”
황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짧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대공은 그녀와 로건 사이에 오간 거래를 알고 있는 듯했다. 길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이내 황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남아 있지요. 생각해 보니 그렇게 열을 낼 일도 아니군요. 아버지인 그대가 아들을 희생해 집안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는데, 제가 끼어드는 것도 월권이지요.”
“…….”
“시간이 늦었으니 방으로 돌아가겠어요. 아, 급하게 서신을 좀 보내도 되겠어요?”
“서신 말입니까?”
“황궁에 있는 유모에게 보내야 해요. 내가 1분만 늦게 귀가해도 찾으러 나설 만큼 유난이어서요.”
“알겠습니다. 하인에게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고맙군요.”
황녀가 호위를 이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식당 안에 남은 사람은 셰본과 뮬리 공작 둘뿐이었다. 공작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힘겹게 고민했다. 자꾸 입꼬리가 씰룩이고 배가 근질대서 웃고 싶은 걸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로 근엄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것 참, 공교롭게 되었소. 원래 자식들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렇군요.”
“저도 아이들 놀음에 동참할 마음은 충분합니다만, 황명을 우선해야 하는 몸이라 말이지요. 야만인 우두머리를 황궁까지 수송해야 하는데, 대공께서도 도와주시겠지요?”
셰본이 고개를 끄덕이며 둘러선 군인들에게 협조를 지시했다. 그 모습이 몹시 기운이 없어 보여서 뮬리 공작은 더더욱 즐거워졌다. 그 잘났다는 대공 집안의 형제들이 붙어먹는 꼴이라니. 이보다 고소한 일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터이다.
그는 야만인 우두머리를 끌고 개선장군처럼 궁으로 돌아갈 생각에 부풀었다. 그런 뒤 황제에게 성대한 연회를 제안하고 그 자리에서 오늘 벌어진 일을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거다. 이뤄놓은 것이 있으니 대공 가문의 권력에 흠집을 내긴 어렵겠지만, 드높았던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사교계에선 웃음거리가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서 그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 우리 진짜 북부로 돌아가요?”
“당연히 가야지, 뭔 소리냐?”
“하지만, 아까 그랬잖아요. 가는 건 자유여도 안전은 보장 못 한다고….”
쓸데없는 소릴. 황명을 받은 자의 앞길을 누가 막는단 말이야? 아무리 대공이어도 그건 불가능하다. 뮬리 공작은 한심한 눈으로 아들 프레디를 째려봤다. 그에게 소곤거리던 프레디가 찔끔해서 물러났다. 군소리가 사라지자 뮬리 공작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하 감옥으로 내려와 야만인들과 그 수장이 끌려 나오는 것을 구경했다. 괜히 야만인 우두머리라 불리는 게 아닌지 온몸에 난 털과 거대한 덩치는 불곰과 같았고, 눈알은 허옇고 괴괴한 것이 사람 같지가 않았다. 뮬리 공작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 그를 훑어보다가 호위로 차출된 군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아들 프레디가 불안한 듯 멀어지는 저택을 흘긋거렸다.
“왜 그러냐?”
“그냥…. 아, 아니에요.”
저런 한심한 놈.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프레디가 어깨를 움츠렸다. 프레디는 괜히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꼿꼿이 걸었다. 거대한 정문이 열리고 대형 군용 차량이 나란히 섰다. 군인들의 지시로 야만인들이 줄지어 화물칸에 올라타고, 공작과 프레디는 최신식 세단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차례가 된 야만인 우두머리는 잠시 밧줄로 묶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택을 돌아보았다. 그는 웃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얌전히 화물칸에 올라탔다. 달에 달무리가 잔뜩 끼어 온 세상이 희미한 밤의 일이었다.
*
일로델은 정신이 들기 이전부터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로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무서워요, 같은 두서없는 말이었다. 중간에 임신하기 싫어요, 하는 진심 어린 애원도 내뱉었지만, 갑자기 흥분해서 달려드는 티베인에게 시달린 뒤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임신의 임 자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일로델은 서서히 눈을 떴다. 힘없는 신음이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샹들리에는 사라지고, 어딘가에 엎드린 채였다. 애널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성기가 철벅철벅 드나들었다. 그가 몸을 꿈틀대며 작게 울먹이자, 눈앞에서 열심히 허리를 쳐올리던 티베인이 반갑게 웃었다.
“깼어?”
“응, 으응, 그, 그만….”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둘 것 같았으면 벌써 멈췄어. 이제 알 때도 됐잖아.”
티베인이 일로델의 허리를 휘감으며 그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허리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로델은 맥없이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언제 옮겨 왔는지 그가 있는 곳은 화려한 무도회장이 아닌 낯익은 별채의 침실이었다. 원래 쓰는 것보단 작아도 포근하게 꾸며져 있어서 애용하던 침대에 티베인이 누워 있었고, 자신은 그 위에 엎드려 아래로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일로델이 온 힘을 쥐어짜 몸부림을 쳤다. 그때, 비어 있던 등 뒤로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자고 있는 게 나았을걸…. 예민한 성격이 독이군.”
로건이었다. 그가 뒤에서 능숙하게 목덜미를 빨아올리자 일로델이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납죽 엎드렸다. 단단한 손끝이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끈끈한 액체를 꼼꼼하게 발랐다. 일로델은 점액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아도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또.
일로델이 공포에 휩싸여 팔을 내저었다. 그러나 손목에는 아직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밑에 깔린 티베인의 가슴을 밀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티베인이 켁, 하고 숨 막히는 소릴 내더니 그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바로 풀려났음에도 뼈가 얼얼했다. 일로델이 놀라서 티베인을 쳐다보자 그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뭐.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아픈 꼴 당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
“뭘 계속 쳐다봐.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네 눈엔 내가 그 새낄 강간한 것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반대였어. 쑤시고 싶지 않은 곳에 쑤신 내가 피해자라고.”
“…….”
“근데 너는, 하나뿐인 내 분신이란 놈이, 또다시 나를 그 새끼한테 갖다 바치려 했지…. 역시 그냥은 못 넘어가. 모르는 게 죄라면, 너는 죗값을 받아야 해.”
이야기하면서 분노가 되살아났는지 티베인의 어조가 차가워졌다. 일로델은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의 뒤로 로건이 몸을 끌어안듯 상체를 겹쳤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티베인뿐이라는 걸 알아둬. 나는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수였다고 생각해. 과연, 내 동생다웠지.”
넓은 가슴팍이 들썩이며 웃는 느낌이 등으로 전달되었다. 일로델은 낮은 속삭임과 웃음기가 닿은 등이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이완제가 잔뜩 발라진 애널이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로건이 엉덩이골에 귀두를 들이밀고 마사지하듯 문질러댔다.
“페로몬 제어도 못 하는 녀석의 투정은 잊어도 돼.”
“흣, 혀, 형님….”
“중요한 건, 너는 내가, 저 녀석이 너를 얼마나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거야. 아니면 알고 싶지 않다거나…. 무엇이 진실이든 이제는 확실하게 알 때가 되었지.”
귀두가 천천히 내려와 애널을 꾹 눌렀다. 티베인의 성기로 가득 차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구멍이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구조의 한계를 넘어 제멋대로 구는 몸이 무서웠다. 어차피 부질없는 반항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최대한 움직여 엉덩이를 앞으로 당겼다. 그러다 티베인의 배에 성기가 살짝 비벼졌는데, 또 뭐에 꽂혔는지 티베인 자식이 사납게 목을 울리며 하체를 마구 쳐올렸다.
“읏, 아, 아, 아!”
“구멍이 좁아서 고생시키더니, 이젠 완전 부드러워. 하, 매일 하면 더 말랑해지겠지?”
“흣, 아! 티베인, 살살, 읏….”
“그런 것 보면, 형이랑은 맨날 하진 않았나 봐. 난 너랑 매일 섹스만 할 거야. 별채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고, 너도 못 나가. 대공 따위, 알 게 뭐야. 저 인간이 하든가 말든가.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만….”
티베인이 헐떡거리며 일로델의 턱을 길게 핥았다. 한쪽 팔로는 허리를 강하게 옥죄고, 다른 손으론 뱃가죽에 비벼지는 일로델의 성기를 문지르며 괴롭혔다. 긴 정사로 달뜬 몸이 멋대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동시에 로건의 귀두가 느릿하게 안을 밀고 들어왔다. 티베인의 방아질로 안쪽까지 치덕치덕 발린 이완제가 내벽을 한껏 늘리며 두 사람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배 속을 짓이기는 압박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로델이 겁을 먹고 울먹였다.
“아, 아! 이, 이건 하지 마요. 제발…!”
“괜찮아, 일로델. 처음보다 잘 들어가고 있어.”
“왜, 왜 또, 싫어, 아…!”
“계속 번갈아 하기엔 네가 너무 지쳤어. 끝내고 조금 쉬자. 착하지?”
“아, 아냐. 안 할래요. 안 착해. 하지 마, 혀엉…!”
일로델은 존댓말과 경칭도 잊고 로건을 불렀다. 그런 걸 따질 정신머리도 아니었다. 형제들의 거대한 성기가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싸움하듯 서로를 뭉개는 느낌이 생생했다. 처음만큼의 정신적 충격은 없었지만, 그만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서 모든 감각이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위아래에서 거친 숨소리가 쏟아지고, 두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들어찬 성기들도 꿈틀거렸다. 아직 안쪽이 빽빽해서 맘껏 들쑤시진 못해도, 조금만 유연해지면 마구 찔러 넣겠다는 욕구가 훤히 보였다.
“안 돼, 안 돼, 빼 줘, 빼 줘요. 움직이지 말아요. 싫어….”
결국 울음보가 터졌다. 일로델은 자꾸만 치근대는 티베인의 얼굴을 피해 시트에 고개를 박았다. 저도 모르게 끅끅거리며 우는 소리가 났다. 로건이 어깨에 고개를 얹고 한숨 쉬듯 웃었다.
“내 동생은 왜 그렇게 섹스를 싫어할까? 아…. 물론 나도 티베인과 성기를 맞대고 있는 게 썩 좋지는 않아. 하지만 익숙해져야지. 나 혼자 너를 가지면 망가뜨릴 게 분명하니까….”
로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느릿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목소리였다. 무엇을 참고 있는지 전부 알기는 어려웠지만, 순간 일로델은 수갑 따위보다 더 고약하고 위험한 것에 갇혔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와 비슷했다. 그의 형은 결코 자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다른 때 같으면 뭐라도 대꾸했을 티베인도 잠잠한 걸 보면, 녀석 또한 같은 마음이 분명했다.
절망인지 체념인지, 혹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든 형제들에 대한 원망인지 모를 마음으로 훌쩍훌쩍 눈물이 났다. 로건이 위로하듯 어깨에 입을 맞췄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성기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러자 티베인도 질 수 없다는 듯 아랫배에 힘을 주며 허리를 들썩였다.
“흑, 읏, 읏….”
막대한 부피감에 적응한 내벽이 두 사람분의 성기를 꾸역꾸역 삼키고 뱉었다. 두 살덩이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숨이 탁탁 끊어졌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도 그에 맞춰 끊겨 나왔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앞선 한 번의 경험으로 느낌뿐이라는 걸 알았다.
로건과 티베인이 흘리는 정액으로 내벽이 질퍽질퍽 젖었다. 둘은 길을 틔우듯 같이 움직이다 안이 부드러워지자 조금씩 행동을 달리했다. 핏줄까지 탄탄히 차오른 두 성기가 엇박자로 안을 쑤셨다. 티베인이 전립선이 있는 앞쪽을 집요하게 긁고, 로건은 내벽의 아슬아슬한 끝까지 쳐올리며 여린 점막을 짓찧었다. 뒷골이 저릿할 정도의 충격이 온몸을 난도질했다. 눈을 감아도 눈앞이 점멸하듯 깜빡이고 입에선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아악! 아아악! 후아아아…!”
괴성 같은 울부짖음이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저절로 턱이 들리고 입가로 침이 줄줄 흘렀다. 티베인이 고개를 들어 입 주변을 정신없이 핥았다. 로건은 거친 숨을 여과 없이 뱉으며 목덜미를 사납게 빨아올렸다.
안에 들어찬 성기들이 제법 매끄럽게 드나들며 갈수록 많은 액체를 뿜어냈다. 특히 로건이 깊은 안쪽을 벌리고 정액을 흘려 넣을 때마다 배 속이 출렁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로델은 급히 팔을 뻗어 시트를 손에 꼭 쥐었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아, 아, 아, 잠, 잠깐, 조금, 제발…!”
“왜, 벌써 힘드냐? 좀만 참아. 나도 노팅하고 싶은 거 참고 있단 말야.”
남의 속도 모르고 티베인이 지껄였다. 일로델은 좀 더 참아 보려 안간힘을 쓰다 시트에 이마를 비볐다. 깊은 내벽 속 예민한 점막에 귀두가 파고들면, 그때마다 아랫배가 찌르르했다. 사정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손과 발이 저절로 오므라들고 턱이 달달 떨렸다.
“아우, 아우응…. 그만, 거기, 거기 깊게, 하지 마요. 이상해, 이상해요…. 형, 혀엉…!”
등 뒤로 웃는 듯한 숨결이 와 닿았다. 괴롭히려는 속셈인지, 응석 따위 들어주지 않을 생각인지 로건이 아예 공격적으로 그 부분만 쳐올렸다. 다물려 있던 연약한 점막이 쩍쩍 벌어지며 무자비하게 파헤쳐졌다.
“아아아, 흐아아아아!”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구멍이 꽉 조여들어 움직이기 힘들어지자 티베인이 “형, 뭐 하는 거야?” 하며 인상을 썼다. 로건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쯤 혼미해서 울부짖는 일로델에게 속삭였다.
“내 동생, 내 일로델. 형 말고 로건이라고 불러볼까?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티베인이 괴상한 표정으로 “뭔 개소리야? 미친 변태 놈이?” 하고 짜증을 팍 냈다.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일로델 역시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안쪽을 두어 번 세게 찔리고 나니 생각이고 뭐고 모조리 날아갔다. 아랫배가 미친 듯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성기에서 터져 나오듯 무언가를 내뿜을 것 같았다. 그것이 소변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일로델이 정신없이 외쳤다.
“아, 로, 로건, 로건! 로건, 제발…!”
“그래, 어떻게 할까?”
“하지 마요, 안에, 그렇게, 형…. 아, 로건, 로, 앗, 아, 아아아아!”
높은 비명이 침실을 울렸다. 그 어느 때보다 로건이 깊이 허리를 쳐올린 뒤였다. 발기한 채 뭉개져 있던 일로델의 성기에서 투명하고 긴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그중 상당수는 티베인과 일로델의 얼굴과 그 주변으로 마구 튀었고, 나머지는 티베인의 배 근육 사이로 흥건하게 흘렀다.
“흐으으으, 우으으….”
사정은 꽤 길었다. 끝날 만하면 내벽 안쪽이 간질거리며 물줄기를 계속 뿜어댔다. 극도로 민감해진 몸은 요도 구멍이 벌름대는 느낌마저 낱낱이 느꼈다. 어둠 속으로 떨어졌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고, 바로 눈앞에 있는 티베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
그는 정체 모를 액체를 온통 뒤집어쓰고 눈을 멍청하게 끔뻑였다. 그러다 혀를 내밀어 제 입에 묻은 것을 핥았다. 일로델은 아직 뭐가 뭔지 인지하지 못하고 씩 웃는 동생과 멍하니 마주했다.
“아주 철철 싸네. 오줌싸개.”
일로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의 푸른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실실 웃으며 놀려먹던 티베인이 살짝 당황했다. 일로델은 동생의 몸에 소변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걸 미친 동생 놈이 핥기까지 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끅끅거리던 울음이 헐떡임으로 변하고 통곡으로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성기에선 남은 액체를 픽픽 내뿜었다. 그것이 더 서럽고 창피해서 일로델은 엉엉 울었다. 그의 눈가와 뺨이 새빨갛게 익었다. 원인 제공을 한 티베인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동안, 로건이 여린 점막에 말뚝처럼 박아놨던 귀두를 살며시 빼냈다. 그리고 안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헐떡헐떡 우는 동생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울지 마, 일로델. 이건 그냥 사정액이야.”
“오, 오줌, 이라고, 티베인이….”
“그럴 리가. 너를 놀려서 관심을 받고 싶은 거야. 어린애나 할 법한 짓이지.”
이런, 개 같은 자식. 일로델이 울면서 눈알을 부라리자 티베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모른 척 허리를 슬금슬금 돌리며 전립선을 자극했다. 이미 퉁퉁 부어오른 곳이 비벼지자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일로델은 화내는 것도 포기하고 널브러져서 끙끙 울었다. 이미 분노할 기운도 없는 상태였다.
“앞으로 티베인의 말은 무시해. 스스로 점수를 깎아 먹으니 나는 편하군.”
로건의 빈정거림에 티베인이 “뭐래? 사탄도 울고 갈 놈 주제에. 그러게 내 앞에서 저 인간 이름은 왜 불러. 제가 자초했지 뭐….” 하며 궁시렁댔다. 큰 소리로 나불대지 못하는 걸 보면 저도 찔리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로건이 눈물로 젖은 일로델의 얼굴을 손수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방금 그건 자연스러운 사정 행위이니 걱정할 것 없어. 네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믿어도 돼.”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처음 티베인에게 당했을 때도 이런 식의 사정을 했던 것 같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는 다시 보니 소변 같지도 않았다. 형제들도 그, 노팅이라는 걸 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정액을 줄줄 뿜어댔다. 자신도 비슷한 게 아닐까? 뿌연 정액이 흐르는 것만 사정이라 생각했던 게 틀렸던 거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정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았다. 느낌도 너무 해괴하고, 꼭 소변을 본 것 같은 창피함이 밀어닥쳐서 낯을 들기 괴로웠다. 그는 로건과 티베인이 성기를 천천히 밀어 올릴 때마다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또 심한 자극을 받을까 무서웠던 탓이다. 하지만 자극이 없길 바라는 건 무의미한 희망이었다. 일로델은 속도를 높이며 들쑥날쑥 쳐들어오는 형제들의 성기에 맞춰 또다시 울부짖었다.
“흐아, 아, 아! 멈, 멈춰, 아, 한 명만, 제발, 아!”
“아직 시간은 많아. 네가 자극을 편하게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고 나와 저 녀석의 마음을 인정할 때까지….”
“아우! 아! 아! 아!”
“하나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으니 한 번 더 사정해 볼까? 내 동생, 귀여운 내 일로델. 버틸 수 있지?”
일로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성기가 경쟁하듯 빈자리를 채우고 또 채울 때마다 머릿속이 마비되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백치처럼 입을 벌린 채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누군가 젖꼭지를 쥐고 비틀었을 땐, 스스로 듣기에도 흠뻑 젖은 신음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시야가 이상할 정도로 빙빙 돌아서, 드디어 미쳤나 보다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허리를 움직이는군. 후…. 그래, 잘하고 있어.”
“으응, 아우응, 아아아….”
“일로델, 어지럽지? 사탕 하나 먹자. 아, 하고…..”
그 말에 잘 따랐는지 어쨌는지 알 길은 없었다. 입 안으로 달짝지근한 물체가 들어오고, 긴 손가락이 그것을 굴려대며 전부 녹을 때까지 혀를 애무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왜 자꾸 그걸 먹여? 나한테도 먹이라고 시키더니…. 애한테 또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으르렁댔다. 그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가까이서 들렸다 오락가락했다.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 같았다. 아니, 녹아 흐르는 듯했다. 밑에서 끝없이 철벅대는 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응, 아아, 하아아아아….”
지금 순간, 광적으로 이어지는 쾌감을 멈춰 줄 수만 있다면, 그게 누구든 일로델은 신으로 받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의 사나운 숨소리와 음탕한 움직임은 늘면 늘었지 멈추는 일은 결코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카티야 누님, 귀족들, 하인들, 그리고 저택 어딘가에는 있을 아버지까지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신 따위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3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