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2부 2권) (14/18)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2부 2권

3. (2)

가로등 하나만 깜빡이는 깊은 어둠 속.

티베인은 메모에 적힌 주소와 눈앞의 거대한 건물을 번갈아 보았다. 쥐새끼 같은 놈 하나 찾느라 하루가 다 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찾긴 찾았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모자를 눌러썼다.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운 일로델이 언제인가 그에게 씌워 준 의미 깊은 모자였다.

램프 빛이 화려한 호텔로 들어선 티베인은 커다란 기둥에 몸을 숨기고 정황을 살폈다. 오셀인지 뭔지 하는 쥐새끼가 또다시 냄새를 맡고 튀면 곤란한 건 그였다. 다시는 일로델의 앞에, 그리고 자신의 앞에도 나서지 못하도록 영원히 세상에서 없애야 했다. 티베인은 로비에서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 하나뿐인 엘리베이터, 열려 있는 비상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

티베인은 그늘에 몸을 숨기며 프런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로건을 곁눈질했다. 놈이 왜 이곳에 있을까. 지금쯤이면 일로델이 별채에 틀어박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시간이었다. 자신도 특별한 용무가 없었다면 일로델이 존재하는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로건이라고 다르진 않을진대, 왜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을까.

뭐,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놈도 이곳에 용무가 있는 것이다.

오셀은 아카데미 아카데미 노래를 부르는 일로델을 위해 집안에 들인 외부인이었다. 어머니는 일로델을 아카데미로 보내기 전 가정교사를 먼저 들이기로 했다. 그 무렵 집안의 사사로운 일은 로건이 맡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가정교사 선정에도 로건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불 보듯 뻔했다. 그 음흉한 자식이 정말 오셀이 오메가라는 걸 몰랐을까? 분명히 알고 있었으리라. 모든 사실을 아는 로건이, 혹은 두 연놈이 짜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일로델과 멀어지게 만든 것이다.

티베인은 로건이 호텔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프런트로 다가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그를 보고 친절히 웃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금 그놈…. 그 새끼…. 그 사람이 내 형인데, 어디서 내려왔지?”

“예에?”

눈을 휘둥그레 뜬 직원이 챙모자 아래로 그늘진 티베인의 얼굴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일로델 외에 멍청하게 구는 놈을 봐줄 만큼 티베인의 아량은 넓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후려치고 윽박지르려는데, 직원이 대뜸 반갑게 웃었다.

“언제 내려오셨습니까? 불편한 것은 없으셨는지요?”

“엉?”

“아, 대령님께서는 최상층에 계셨다 오셨습니다. 이것을 물으셨지요?”

이야기가 길어지진 않을 모양이었다. 한시가 급한 티베인도, 얼굴이 뭉개질 예정이었던 직원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티베인은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대신 “거기, 열쇠 내놔.” 하며 직원을 을렀다. 얼마 가지 않아 고급스러운 태슬로 장식된 열쇠 뭉치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여분 열쇠입니다. 저, 혹시. 방에 있는 열쇠는 분실하셨습니까?”

“뭐라는 거야? 그딴 거 없어.”

“그, 그렇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또 찾아 주십시오.”

어지간히 얼빠진 새끼로군. 시간이 없어서 무사한 줄 알아. 티베인은 직원을 언짢은 눈으로 노려보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정말로 바빴다. 빨리 오셀을 처리하고 돌아가 멍청한 일로델을 한 번 더 설득해야 했다. 제 주제에 혼인은 무슨. 되지도 않을 헛다리 그만 짚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일로델에게도 편한 길이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호텔은 지하 2층, 지상 20층의 더없이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도시 안에서 록퍼스 가문의 자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사치스러운 공간 역시 가문의 지분이 꽤 되었다. 저층에는 도박장과 식당, 온갖 향락이 펼쳐지는 거대한 사우나가 있어 그곳을 드나드는 객들로 엘리베이터가 멈출 틈이 없었다. 티베인은 멋쟁이 신사 숙녀들을 모두 걷어차서 건물 아래로 떨어뜨리고 싶은 걸 참으며 계기판을 노려보았다.

로건은 귀족 주제에 투자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후원을 해대는 모양이지만, 티베인은 정말이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여유가 없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로건의 견제에 맞서야 했고, 동시에 일로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급급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어디서 굴러들어 온 연놈이 일로델을 채갈까 봐 한시도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티베인에게도 변명할 말은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일로델은 어릴 때부터 그의 옆에 붙어 있질 않았다. 늘 어디론가 사라졌고, 찾아내면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곤 했다. 오죽 싸돌아다녔으면 한때 일로델의 옷장에는 노란색 옷만 가득했다. 눈에 잘 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린 날 티베인의 꿈은 거대한 감옥을 만들어 일로델을 가둬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원대한 소망으로 남아 있었다.

객실 층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티베인 홀로 남아 최상층으로 직행했다. 귀빈을 위한 공간에는 단 하나의 객실밖에 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오셀을 어떻게 족칠지 생각했다. 록퍼스 가문이 알파만 태어나는 가문인 만큼, 임신으로 한몫 잡아 보려는 놈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오셀은 끈질겼다. 과거 일로델의 귀에 들어갈 걸 걱정해 목숨만은 살려 보냈지만, 두 번이나 호의를 기대해선 안 될 것이다. 티베인은 방문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

방 안은 은은한 램프 빛 외에는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했다. 그리고 묘하게 낯선 느낌이 났다. 넓은 공간을 떠도는 날것의 냄새가 알파의 페로몬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티베인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 쓰레기 같은 오메가와 한판 하셨나 보군.

로건의 문란한 좆질 따위 알 바 아니지만, 티베인은 시시한 듯 웃으면서도 짜증이 났다. 겨우 그런 마음으로 애한테 손을 댔단 말이지. 두 연놈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특히 로건은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미친놈이긴 해도 일로델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라 생각했는데, 진정 오물만도 못한 새끼였다.

티베인은 흉흉한 기세로 응접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갔다. 호화롭게 꾸며진 침대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마침 일어나려던 참인지 나른한 움직임으로 맨어깨에 시트를 두르고 있었다. 티베인은 그를 거칠게 침대로 밀치곤 도망치지 못하도록 시트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한 대 후려갈기기 위해 손을 쳐든 순간, 익숙한 푸른 눈을 마주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일로델?”

“뭐, 뭐야. 뭐야?”

지친 몸을 추슬러 몸을 일으키던 일로델은 난데없는 기습을 당하고 날아간 시트부터 찾았다. 경황없이 침대를 더듬던 일로델은 한발 늦게 검은 인영을 발견하곤 껑충 튀어 올랐다. 순간 로건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겁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인영은 로건에 비해 몸집이 날렵했고, 몹시 사나운 기운을 풍겼다. 그가 누구인지 깨달은 일로델이 당황해서 외쳤다.

“티, 티베인?”

“…….”

“네가 왜 있어? 뭐, 뭐지?”

일로델은 심신이 쇠약해진 나머지 헛것이라도 보았나 싶어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헛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일로델을 내려다보던 티베인은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차가운 시선이 일로델의 발긋한 뺨과 여윈 어깨, 퉁퉁 부은 젖꼭지를 거쳐 난잡하게 젖은 다리 사이에 도달했다. 일로델은 오싹함을 느끼며 뒤로 천천히 기었다.

“너, 여기, 왜, 왜….”

“나는 볼일이 있어서 호텔에 온 건데.”

“…….”

“죽여버리고 싶은 새끼가 있어서 왔단 말이지. 기껏 휴가 내고 그 새끼 찾는다고 시간 다 갔어. 빨리 끝내고 너 있는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티베인이 입매를 뒤틀며 웃었다. 비틀린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바람 소리가 샜다.

“진짜 사람 돌게 만드네.”

“…….”

“얘기 좀 해봐. 너 여기서 형이랑 배 맞추고 있었냐?”

그때까지도 황망해서 어쩔 줄 모르던 일로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티베인의 말을 곱씹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서 들어 본 적도 없고, 들어 볼 일도 없는 천박한 언행이었다. 그러나 일로델은 무턱대고 따지는 대신 입을 앙다물었다. 티베인의 고저 없는 조용한 어조가 불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직접 확인하면 되는걸, 굳이 물어볼 것도 없지.”

티베인이 일로델의 다리를 벌리려는 듯 그의 무릎을 쥐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일로델이 반사적으로 티베인의 손을 쳐냈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침묵이 흘렀다. 방금까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티베인의 두 눈이 점차 붉게 충혈되었다. 턱은 꽉 다물려서 부들부들 떨렸고, 입술 사이로는 까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어 밀어닥쳤다.

일로델은 갈퀴처럼 뻗어오는 손을 피해 허겁지겁 침대를 벗어났다. 팔을 잡아채려는 걸 바닥을 기듯 피하고, 테이블과 의자 사이를 헤집으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뒤에서 어깨를 잡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쿵 하는 소리가 화려한 공간을 거칠게 울렸다. 일로델은 맨가슴에 닿는 서늘함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벽이라고 생각한 곳은 새카만 어둠을 넓게 비추는 커다란 유리창이었다.

“제대로 뛸 줄도 모르는 게 왜 자꾸 도망을 가? 내가 건드는 것도 싫고, 나랑 있는 것도 싫고, 그래? 어?”

“왜, 왜 이래…. 하지 마. 아파!”

억세게 틀어 잡힌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일로델이 고통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리자 티베인이 혀를 차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티베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하필 발정기가 온 시점에 뜻하지 않게 맞이한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더욱 심화를 부추긴 탓이었다.

티베인은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일로델을 상처 입히게 될 것 같았다. 차라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는 생각에 몸을 물렸을 때였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다량의 희묽은 액체가 일로델의 다리 사이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티베인은 머릿속 어딘가에서 탁, 하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실낱같은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일로델의 엉덩이 한쪽을 우악스럽게 쥐고 비틀었다. 그러자 오므라져 있던 구멍이 비틀려 열리고 안에 들어찬 로건의 정액이 쏟아지듯 튀었다. 일로델은 경기 들린 듯 비명을 지르며 티베인의 손을 잡아 뜯었다.

“하지 마! 하지 마아!”

“가만히 있어. 죽여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티베인의 입버릇 같은 그 협박이 오늘만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일로델은 티베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곧바로 억센 손이 뒷목을 잡고 눌렀다. 일로델은 포획당한 짐승처럼 유리창에 짓눌려 애널을 헤집는 손길을 받아들여야 했다. 흠뻑 젖어 달아오른 내벽으로 손가락이 쑥 들어와 철벅철벅 움직였다. 일로델은 밀려드는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살면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꼽는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도 싸놨군. 그 새끼 정액을 만지고 있다는 게 끔찍할 정도야.”

“미친, 자식, 흑….”

“아, 좆도 같이 넣었지. 생각해 보면 그걸 다 삼킨 것도 신기했어. 내가 모르는 사이 이런 식으로 놀아난 게 한두 번이 아니란 거야. 그렇지?”

티베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더니 퍽퍽 소리가 나도록 손을 움직였다. 애널 안에서 흐른 정액이 일로델의 허벅지와 티베인의 손을 타고 호텔 바닥까지 끈적하게 적셨다. 일로델은 끔찍한 시간을 버티며 턱을 떨다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손끝이 통통하게 부어오른 전립선을 쑤시고 뭉갠 탓이었다.

“여긴 뭐가 이렇게 부었어? 좋냐? 문질러 주니까 좋아?”

“흣, 윽. 으읏.”

“난 네가 어딜 좋아하고, 뭘 해야 좋아하는지도 몰랐어. 근데 형이 쑤셔 주면 뇌가 쏙 빠지도록 구멍을 꿈틀대더라고. 나만 몰랐지, 나만….”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갔다. 일로델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창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기어올라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티베인의 손에 허리를 잡혀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일로델은 엉덩이를 뒤로 뺀 몰골로 손을 허우적대다 유리창을 짚었다. 빛이 은은하게 반사되는 창문 너머로는 어둠에 잠긴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비치는 짐승의 시퍼런 눈과 시선이 맞았다고 생각했을 때, 애널이 꾹 벌어지며 거대한 성기가 단번에 치고 들어왔다.

“하악…!”

일로델이 반사적으로 몸을 당기자 티베인의 성기가 살짝 빠져나갔다. 티베인은 자비 없는 추격자처럼 쫓아와 일로델을 창문에 짓눌렀다. 주인만큼이나 붉게 성이 난 성기가 질퍽질퍽 소리를 내며 아래를 드나들었다. 일로델은 티베인과 창문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귓가로 으르렁대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쏟아졌다.

“뭘 해도, 싫다고만 하고. 말은 들어 먹지도 않고. 구걸도 줄 생각 있는 놈한테나 해야지, 다 필요 없는 짓이야. 젠장!”

혼자 주절대던 티베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일로델의 엉덩이를 세차게 갈겼다. 깜짝 놀란 일로델이 엉덩이를 꽉 조였다. 티베인이 신음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터뜨리며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창문이 쿵쿵 올릴 정도로 거센 움직임에 일로델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흑, 아아아아…!”

“황녀에게 이 꼴을 보여주고 싶어. 어머니, 아버지, 형, 다 보라고 해. 그래도 너는 소용이 없겠지? 미치겠군. 아주 좆같아!”

티베인이 일로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리고 먹어치울 기세로 빨아댔다. 일로델은 정신없이 휘둘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완전히 미친 것 같았다. 그간 얼굴만 보면 치고받고 얻어맞았던 것이 평화롭게 느껴질 만큼 지금의 행위는 야만스럽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간에는 손찌검으로 분을 풀었다면, 이제는 강간이 분풀이 수단이 된 것이다. 어렵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아, 아, 흐….”

힘겹게 티베인을 받아내던 일로델이 끝내 무너져 내렸다. 티베인은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는 일로델을 팔에 가두고 끈적하게 뺨을 핥아 올렸다. 방 안이 희미하게 비치는 유리창에서 비슷한 외형을 지닌 두 사람이 외설스럽게 얽혔다. 그것은 토기가 솟을 정도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일로델의 어깨에 소름이 돋아났다.

“말해 봐, 일로델. 강간이야, 화간이야?”

“뭐, 뭐가….”

“형이랑 한 거. 화간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형이라고 네 마음을 얻어낼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렇지?”

느릿하게 속삭이며 대답을 구하는 와중에도 티베인의 눈빛은 광인처럼 번들거렸다. 일로델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곁눈질했다. 그동안 일로델에게 있어 티베인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가끔은 또 다른 자아가 튀어나와 돌아다니는 걸 꺼림칙하게 지켜보는 기분도 들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종의 직감처럼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놀라울 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온 사람이 자신의 몸속에 성기를 넣고 흔든다는 이질감이 몸서리쳐질 만큼 이상했다. 일로델은 티베인이 내뿜는 숨결을 피해 목을 움츠렸다.

“가, 강간….”

“응?”

“강간, 이야. 너, 너랑 똑같이….”

티베인이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안면을 허물어뜨렸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빨 자국이 남은 일로델의 어깨를 핥았다. 그러면서 창문에 두 팔을 짚어 일로델을 가두고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그래. 역시 그 방법뿐이지.”

“아, 아윽, 흑….”

“강간 아니면, 어디 너한테 손이나 대 보겠어? 너도 이해해야 해. 도리가 없는데 어쩌겠어….”

일로델의 어깨와 목덜미에 입맞춤이 떨어졌다. 느릿한 허리 짓이 이어질수록 아래에서 나는 소리가 축축해졌다. 티베인도 정액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반쯤 체념한 일로델은 힘없이 유리창에 몸을 묻었다. 차라리 유리가 깨져서 아래로 떨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흔들림이 점차 거세지는 동안에도 창문은 멀쩡하기만 했다.

“아, 아, 아앗…!”

체온이 옮아 미적지근한 유리창에 일로델의 젖꼭지와 성기가 문질러졌다. 일로델이 펄쩍 뛰며 티베인을 밀어냈지만, 로건과 달리 봐줄 생각이 없는 티베인은 진저리치는 일로델을 휘어잡고 성기를 찔러 올렸다. 성기가 빠져나가고 다시 퍽 소리를 내며 박힐 때마다 안에서 뒤섞인 두 사람분의 정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일로델은 입 안까지 튄 정액을 뱉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앗, 아! 그만, 앗, 하아아!”

“그만하면, 말 들을 거야? 아니잖아. 개 짖는 소리로나 듣겠지. 뭐, 발정 난 수캐?”

사납게 웃은 티베인이 일로델의 양어깨를 그러안고 힘껏 끌어내렸다. 돌처럼 단단한 성기가 깊은 내벽을 사정없이 뚫고 들어왔다. 시야가 뭉개지고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일로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헐떡이다가 성기가 안쪽을 마구 들쑤시자 몸부림치듯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아아! 아아앗!”

“그래. 네가 개가 되라고 하면, 개가 돼야지. 발정 난 수캐 좆 맛이 어때? 어?”

“티, 티베, 제발, 제발 그만, 아아아아!”

“그 입에서 제발 소리를 다 듣는군. 젠장, 미치겠어. 미칠 것 같아, 일로델….”

티베인이 일로델의 고개를 꺾어 거칠게 입을 맞췄다. 일로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창문에 짓눌린 일로델의 성기에서 말간 정액이 질금질금 흘렀다. 입술을 떼고 그것을 곁눈질한 티베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맛이 괜찮았나 본데. 잘됐어.”

일로델은 팔을 잡혀 강제로 일어나면서도 힘없이 티베인에게 기댔다. 개소리에 반박할 기력도, 반항할 만한 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티베인은 일로델을 침대에 데려가 눕히고 그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검붉은 성기가 다리 사이에 와 닿았다. 일로델은 울먹일 기운도 없이 눈을 감았다. 끝나지 않는 악몽에 갇힌 기분이었다.

*

커다란 창문 너머로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움찔 선잠에서 깨어난 일로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안개가 낀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고,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던 일로델은 문득 불편함을 느끼고 저를 옭아맨 것을 확인했다. 티베인이 그의 위에 올라탄 채 잠들어 있었다.

밤새 티베인은 광인이 따로 없었다. 창가에서 그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 침대, 탁자, 욕실, 나중에는 바닥에서까지 발기한 성기를 들이댔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입술을 빨리고 있을 때 경쾌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룸서비스였다. 티베인은 하늘로 치솟은 성기를 드러낸 채 현관에서 음식을 받아왔다. 못 볼 꼴을 보고 깜짝 놀랐을 직원을 생각하면 차마 웃음도 나오지 않는 광경이었다.

일로델은 음식을 억지로 받아먹다가, 또다시 발정이 나서 달려드는 티베인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는 뿌옇게 흐려진 머리로 어릴 적 일을 떠올렸다. 개들의 교미를 보고 놀랐을 때였다. 충격에 빠진 그에게 하인이 설명하기를, 암컷이 거부하면 수컷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같은 배에서 함께 태어난 동생에게.

일로델의 눈꼬리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는 울분에 차서 몸 위에 있는 티베인을 때리고 밀어냈다. 그러는 도중 아직도 티베인의 성기가 아래에 들어차 있다는 걸 깨닫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너무나도 원통하면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뭐야….”

자다가 머리채를 잡힌 티베인이 웅얼거리며 일로델을 끌어안았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일로델은 앞에 있는 튼실한 어깨를 콱 소리 나게 깨물었다.

“악!”

어깨가 뜯어지는 고통에 티베인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버릇대로 손부터 번쩍 치켜들었다가 제 어깨를 물고 엉엉 우는 일로델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주먹에서 힘을 뺐다. 혼자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일로델의 얼굴과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티베인은 말없이 일로델을 그러안으며 그의 몸에서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더더욱 서러워진 울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만 울어. 뭐 그렇게 슬픈 일이라고….”

“저리 가, 저리 가….”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티베인이 구시렁대며 일로델의 옆으로 몸을 옮겼다. 일로델은 그것도 싫어서 티베인을 밀어냈지만, 그는 밀려나는 대신 일로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진정하라며 매끈한 등허리를 쓸어 주었다. 일로델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을 뒤틀다가 기운을 잃고 널브러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터진 설움이 입 밖으로 흘렀다.

“그만 포기해. 네가 발악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고, 화만 돋우는 길이야. 얌전히 있으면 예뻐해 주는데 도대체 왜 그래?”

일로델이 또다시 티베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티베인은 순순히 받아들이며 야생 삵 같은 일로델을 보듬어 주었다. 울기가 흠뻑 남은 몸이 따끈따끈했다.

“너만 받아들이면 돼. 나는 절대 포기 못 하니까 네가 받아들여.”

“…….”

“너만 포기하면 돼. 너만….”

일로델은 나직한 티베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어깨 너머로 동이 터오는 창밖을 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이 아침 해는 뜨고 또 저물 것이다. 그게 꼴 보기 싫어서 일로델은 눈을 감아버렸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도, 하다못해 형제들을 뉘우치게 만드는 일도, 그저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

비슷한 시각.

새벽 기운이 잠잠하게 물결치던 실톤 항구에 요란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로 세 척의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 88명의 선원과 황제의 칙명을 받은 이백여 명의 군인들로 철벽같은 수비를 구축한 죄인 수송 함대였다.

배는 물살을 헤치며 느긋하게 다가와 부두에 정박했다. 가장 먼저 군인들이 앞다투어 내리고, 질서정연하게 자리한 그들 사이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걸어 내려왔다. 잠자리가 불편했던 것인지, 혹은 눅눅한 바다 공기가 익숙지 않은 것인지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붉은 머리의 젊은 사내가 따라 내렸다. 중년 신사와 꼭 닮은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로건은 부하들과 함께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중년 신사 역시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그늘 밖으로 빠져나왔다. 뒤늦게 로건을 발견한 신사가 점잖게 미소 지었다.

“로건 대령이 아닌가. 오랜만에 보는군.”

“실톤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작 각하.”

로건의 환대에 중년 신사, 뮬리 공작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의 외아들인 프레디도 아버지를 따라 여유로운 척 웃어 보였다.

“너무 이르게 도착한 게 아닌가 당황했지 뭔가. 바로 보이지 않아 자는 줄만 알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실 때를 대비해 밤새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대공께 한 소리 듣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귀한 후계자를 고생시켰다고 말이야.”

“공작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도 흡족해하실 겁니다.”

뮬리 공작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긴 항해로 쌓인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잘나 빠진 대공의 아들에게서 언제 또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지금 순간, 황제를 부추겨 야만인 우두머리 수송 업무를 받아낸 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시끄러운 스캔들도 잠재우고, 로건의 환대까지 받고, 덜떨어진 아들의 면도 세워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뮬리 공작은 저를 따라 실실 웃는 프레디를 흘겨보았다. 프레디는 찔끔 입을 닫고 딴청을 피웠다.

“듣기로는 아직 고모님이 도착하지 않으셨다더군. 그런가?”

“길이 멀어 천천히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열차 여행이 고되신가 봅니다.”

“남부의 거대한 땅덩이가 일을 그르치는군. 건강에 문제가 없으셔야 하는데, 걱정이야.”

뮬리 공작이 칭하는 고모는 곧 로건의 조모이자 선 대공비였다. 변방의 작고 아름다운 성에서 요양 중인 그녀는 아흔이 넘은 나이로 인지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아마 초대장을 받고도 뜻을 알지 못해 엉뚱한 이야기를 했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친히 사람을 보내 항구까지 데려오게 한 주제에, 뮬리 공작은 참으로 큰일이라는 듯 혀를 쯧쯧 찼다. 그러면서도 눈은 거대한 땅덩이를 탐욕스레 살폈다. 이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하며 로건은 빙긋 웃었다.

“바로 저택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음…. 아니. 고모님이 오시는 걸 기다려야지.”

“제 부하가 별장으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불편함 없이 모시라고 해뒀으니 편히 지내다 오십시오. 저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뮬리 공작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의 환대도 좋지만, 몇 날 며칠을 울렁이는 바다 위에 있었더니 육지의 침대가 더욱 그리웠던 탓이었다. 군인의 안내를 따라 뮬리 공작과 프레디가 멀어져 갔다.

잠자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건이 손을 들어 올렸다. 허리를 꼿꼿이 들고 서 있던 이백여 명의 군인들이 자세를 풀고 일사불란하게 함대를 찾아 들어갔다. 소란을 뒤로하고 걷는 로건에게 모릭스가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대령님. 야만인들의 이송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했군. 오늘부터는 업무로 복귀하도록 해.”

그 말에 모릭스는 멈칫했다가 한 박자 늦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일로델은 모릭스가 하는 일 없이 저택을 떠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는 경비를 목적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야만인들이 이성을 잃고 대공 저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상부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야만인들은 잠잠했고 이송 준비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모릭스도 더는 저택에 체류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는 왜 굳이 자신이 지목되어 저택에 남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일로델과 약간의 친분이 생긴 그는 늘 일로델의 곁을 맴돌며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로건에게 보고를 올려야 했다. 한마디로 감시 역할을 배정받은 것이다. 처음 ‘별 탈 없음.’, ‘그럭저럭 지냄.’ 같은 무심한 말로 시작한 그의 보고서에는 날이 갈수록 ‘잠을 못 잠.’, ‘울었음.’ 또는 ‘불안해하는 것 같음’, ‘안타까움’ 같은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이 섞이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야 했는데.

사실 로건은 보고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일로델을 감시하는 인원은 저택에 상주하는 숫자만으로도 백이 훌쩍 넘었고, 특히 하인들은 주인의 총애를 받기 위해선 무엇이든 갖다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또 다른 주인인 일로델에게도 관심이 아주 많았고 타인에게 일로델의 이야기를 하는 걸 즐겼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따분한 저택에서 예쁘장하고 순진한 대공가의 차남은 가십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에게 보고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릭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일로델에게 어떤 사감이 있는지 확인하고 처리 방식을 결정하려 했던 것이다. 로건의 옆에서 오래 지낸 모릭스는 그가 일하는 방식을 잘 알았다. 로건은 이중 삼중으로 그물을 쳐놓고 표적을 관찰하다가 무너뜨리는 것을 즐겼다. 로건의 옆에서 무력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지켜보던 모릭스도,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제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정을 갈구하는 일로델에게 다가간 순간 로건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이용해 일로델을 고립시켰다.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알게 모르게 자행됐고, 사실을 알고 있는 모릭스도 늘 조심해서 일로델을 멀리했지만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렇게 신중을 기했음에도 일로델을 상처 주는 데 이용된 것이다. 그나마 말로써 활용 가치가 떨어진 자신과는 달리, 일로델은 앞으로도 저택에 있어야 했다. 씁쓸한 사실이었지만 이제 정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릭스는 차량 조수석에서 깜빡이는 붉은 점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어디지?”

“아직 호텔에 계십니다. 저택으로 가십니까?”

“아니, 부대로 가.”

그렇겠지. 일로델이 호텔에 있다면 그가 저택으로 갈 이유는 없었다. 모릭스는 일로델의 위치가 표시된 계기판의 전원을 끄고 운전병에게 이동을 명령했다. 최신식의 고급 세단이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부두를 빠져나갔다.

뒷좌석에서 모릭스를 관찰하던 로건은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값비싼 가죽 피지에 무도회 참석자 명단과 그들의 신분, 직업, 이력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본래 저택의 주인인 대공이 살펴야 하는 문서였지만, 공사다망한 셰본은 이미 로건에게 많은 권한을 넘겼다. 좁게는 저택 안팎의 통솔부터 넓게는 남부 지방 부대의 지휘까지, 사실상 대공의 역할 대부분을 로건이 도맡았다. 하루빨리 로건에게 대공 자리를 넘기고 뒷방으로 물러나고 싶은 셰본의 마음이 읽히는 처사였다.

그러나 로건의 뜻은 달랐다. 그는 이대로 대공 자리를 물려받아 황제의 시시한 견제를 받으며 바다와 사막 등지에서 허송세월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가신 것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채우느라 무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아직 평화롭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은 번거로운 계획이 필요한 일이어도 그는 어린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귀찮음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배부른 몸으로 턱시도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로건은 조용히 웃었다. 그가 바라는 일은 그 외에도 아주 많았다. 당장 어제도 호텔에 남아 밤새도록 동생의 다리를 벌리고 정액을 쏟아붓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참고 견뎌야 했다. 일로델을 향한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가 밟아온 시간은 인내로 덮여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것도 꽤 나쁘진 않았지.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매듭을 지을 때가 됐다. 인내심이란 쌓여 단단해지는 것이 아닌, 닳아 없어지는 것임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계획을 상회하는 변수가 있었다 해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도회 역시 예정에는 없었지만, 거래를 이루기엔 좋은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단을 꼼꼼하게 훑어본 로건이 서류를 덮었다. 때마침 긴 이동을 끝내고 부대에 도착한 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대령님.”

사령실로 향하는 초소에서 대화를 주고받던 모릭스가 로건을 돌아보았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사령실에 방문자가 한 명 찾아왔다고 합니다.”

“누구지?”

“티베인 대위입니다.”

로건이 말없이 모릭스를 응시했다. 유리처럼 차가운 얼굴을 마주한 모릭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연애 문제를 넘어 형제간의 치정이 아직도 어색한 그였지만, 사태가 일변하고 있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마침내 티베인 대위가 제거되는 것일까? 티베인 대위도 준비 없이 오지는 않았을 텐데, 가자마자 무장 해제를 지시하는 게 좋겠지. 모릭스는 사령실로 향하는 동안 총살당한 쌍둥이 동생을 안고 구슬프게 우는 일로델을 상상하며 울적해했다. 하지만 잠깐의 감상일 뿐이었다. 사령실의 문을 열고 상석에 떡하니 앉아 있는 티베인을 발견한 순간, 모릭스는 티베인의 시신 처리와 장례 방식에 대해 냉정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야 오는군. 기다리다 지쳤어.”

“예고 없이 오는 방문자들의 운명이 그렇지.”

“농담으로 들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기 있는 놈들을 하나씩 쏴 죽였을 거야.”

티베인이 사령실 안을 지키는 군인들을 턱짓했다. 모릭스는 티베인의 손에 들린 권총을 흘긋 보았다. 은색의 매끄러운 몸체를 가진 물건이 탁, 탁, 소리를 내며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군. 용케 참았어.”

“나를 바보로 보지는 마.”

티베인이 방만한 자세로 앉아 낄낄 웃었다.

“차라리 난동을 부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빌미를 잡아서 나를 처리해야 일로델도 납득할 테니까…. 좋은 형님이야.”

로건은 대꾸 없이 웃옷을 벗었다. 모릭스는 그의 옷을 받아들이며 티베인을 주시했다. 티베인 대위의 태도는 늘 거칠고 사납지만, 오늘따라 한층 심기가 비틀려 있는 모습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발포할 생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찰나, 티베인이 권총을 품 안에 넣고 일어섰다.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글쎄.”

“일말의 호기심도 없군. 막상 들어보면 다를걸? 나 방금 일로델이랑 섹스하고 왔어.”

티베인이 건들건들 걸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자지가 화끈화끈해. 형이 싸지른 정액 빼내겠다고 밤새도록 쑤셔 넣었거든. 혼자만 좋은 시간 갖지 말고 나도 좀 부르지 그랬어?”

모릭스는 저도 모르게 사령실 문을 지키고 선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다 모릭스와 시선을 맞추곤 움찔해서 정면을 보았다. 올바른 경비 태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순간 당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불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

모릭스는 모두를 대표해 조심스럽게 로건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상관은 무심한 얼굴로 “실톤에 남아 있는 인원이 많더군. 재편성이 필요하니 부관들을 소집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치 티베인 따위 보이지도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티베인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고요함이 흘렀다. 잠시 주저하던 모릭스는 제발 남겨두고 가지 말라는 부하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사령실 밖으로 나갔다.

“사설이 길어. 그래서 왜 온 거지?”

“흥, 화도 안 나는 모양이지? 무기를 만들다 기계가 되셨나? 방금 일로델이랑 섹스하고 왔다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새삼 구멍 동서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이런, 개, 좆같은!”

싸움을 걸어 보려다 역으로 도발을 당한 티베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잔뜩 긴장한 군인들이 재빨리 들고 있던 총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티베인은 로건에게 달려드는 대신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옆 부대에서 들으면 깜짝 놀랄 괴성이 널리 널리 퍼졌다.

티베인이 날뛰는 꼴을 잠자코 지켜보던 로건이 궐련을 빼 들었다. 구석에 짱박혀 모르쇠 하고 있던 부관 하나가 서둘러 불을 붙여 주었다. 로건은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길게 내뱉었다.

“일로델은?”

“…….”

티베인의 괴성이 뚝 끊겼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로건을 노려보았다. 호텔에 있다 쫓겨났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하기 싫었다. 티베인은 계속 울어대는 일로델에게 다과라도 입에 물려 줄 생각으로 잠깐 나왔다가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일로델이 안에서 잠가버린 것이다.

하여간 더럽게 까다로운 새끼.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겨서 순순히 굽히고 들어올 줄을 모르고, 그런 주제에 약해 빠져서 조금만 위협해도 끙끙 앓는다. 기왕 일을 치를 거면 말이라도 잘 듣는 놈으로 키워야 할 거 아니야. 티베인은 엉뚱한 원망을 로건에게 쏟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두 팔을 걸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탈진한 광견처럼 허탈해 보였다. 로건은 묻지 않아도 답을 알았다.

“쫓겨났군.”

“웃으려면 웃어. 내가 문을 못 부숴서 그냥 온 줄 알아? 그 자식이 자꾸 질질 처우니까…. 젠장!”

티베인이 화를 못 이기고 주먹을 내리쳤다. 난폭한 행동에 값비싼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 한쪽이 일그러졌다.

“누구께선 좋았겠지. 강간은 개뿔, 나랑 있던 것처럼 울고 있지도 않았잖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서 좋았겠어.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나도 별다를 거 없어.”

“엉?”

“같이 밥도 못 먹고, 얘기도 못 하고 쫓겨났다는 말이야.”

티베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멋대가리 없는 사실을 털어놓은 주제에, 궐련을 무는 로건의 손짓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일로델을 울려서 심란한 모양이로군.”

“…….”

“몸에 상처를 입힌 건 아니겠지?”

그랬던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 이성을 잃고 엉덩이를 냅다 갈긴 것까진 떠오르는 것도 같은데…. 티베인이 우물쭈물하자 로건의 눈빛이 대번 사나워졌다. 그는 작게 혀를 차고는 테이블에 궐련을 눌러 껐다.

“내가 너를 살려두는 이유는 하나야. 막내 역할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뭐?”

“일로델에겐 분노를 표출할 상대가 필요해. 능력은 우위에 있으면서 사이가 가깝고 만만할수록 좋겠지. 네게 더없이 어울리는 역할이야.”

분노를 표출할 상대. 만만할수록 좋아? 더없이 어울리는 역할…. 로건의 말을 곱씹던 티베인이 천천히 안면을 찌그러뜨렸다. 그동안 일로델에게 미움받고 거부당하고 박해받았던 수많은 나날이 뇌리를 스쳤다. 그 모든 게 로건의 설계였단 말인가? 그럼 그렇지! 영혼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일로델이 자신을 싫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티베인은 제가 벌인 짓은 새카맣게 잊고 눈알을 이글이글 태우며 품 안에 넣었던 권총을 찾았다. 그의 앞으로 서류 뭉치가 던져졌다.

“뭐야?”

“읽어 봐.”

티베인은 찜찜한 듯,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류를 넘겼다. 그는 곧 사납게 이를 갈았다. 무도회 참석자가 적힌 명단이었다. 앞으로 수일 뒤, 이곳에 적힌 인물들이 저택을 방문할 것이다. 일로델의 혼인 소식을 듣기 위해서.

“너도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슬슬 깨달은 게 있겠지?”

“또 무슨 잡소리를 하려고? 집어치워!”

“개별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 불가능해. 일로델에게 우리는 형제일 뿐이야. 아마도 영원히….”

꼴도 보기 싫은 무도회 명단을 내던지려던 티베인이 흠칫 굳었다. 개별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 불가능해. 로건의 말은 사실을 나열하듯 담담했지만, 한편으론 가려운 곳을 후련하게 긁어 주는 구석도 있었다. 일로델을 상대하는 건 쉬울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았다. 평생 못 해 볼 거 같았던 섹스도 하고 애도 배게 만들었으니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이켜 보면 머리카락 한 올 손에 넣지 못한 것이다.

혼자 일로델을 휘어잡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때문에 로건을 찾았다는 것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놈의 교활한 혓바닥에 선동되어 넘어가는 일은 한 번이면 족했다. 보드라운 일로델의 안에서 슥슥 비벼지던 두 개의 좆을 떠올린 티베인이 몸서리를 쳤다.

“그게 뭐 대수야? 나는 걔가 원하면 그까짓 형제, 해 줄 수 있어.”

“일로델은 형제끼리 섹스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뭣? 아니, 그래, 어쩔 수 없지. 까짓거, 정 하고 싶으면 엎어놓고 하면 되고….”

“곧 무도회가 있다는 건 잊은 모양이군. 혼인이 성사되면 일로델은 황궁으로 떠나.”

무도회는 혼인에 대한 귀족들의 분위기와 황제의 반응을 살피려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혼인이 성사될 일은 없었다. 티베인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거대한 초조함에 휩싸였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야. 그냥 다 밀어버리고 일로델을 가둬놓으면 안 되나? 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가 10년을 울겠어, 20년을 울겠어. 적당히 포기하고 살겠지.

하지만 쉴 새 없이 땍땍거리던 것이 힘없이 늘어져서 울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조금 몰아붙였다고 저 혼자 비쩍 곯아가고 있지 않은가. 젠장, 그럼 대체 어쩌라고! 티베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한참 동안 괴성을 내지르던 티베인이 다시 돌아와 명단을 세차게 구겼다.

“방법, 있는 거겠지?”

“무슨 방법?”

“혼인!”

설마 대책도 없이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티베인은 로건을 믿었다. 그의 검은 속과 음험함을 누구보다 믿었다. 그래서 몸소 찾아온 것이다. 벌건 눈으로 노려보는 티베인을 마주하며 로건이 웃었다. 비로소 따분한 대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

호텔에서의 소동 이후로 여러 날이 지났다.

일로델은 며칠이나 지났는지 세어 보다가 포기했다. 그는 언젠가 그랬듯 또다시 별채에 틀어박혀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다. 때가 되면 일어나서 먹고 씻고 별채 안을 맴돌다 또 잤다. 하인 마노의 지극한 관리로 별채 안은 언제나 빛이 났지만, 선반 구석에서는 약초 더미가 곰팡이를 피웠다. 주인의 연구물이라 생각했는지 마노도 거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일로델은 화려한 곳에서 썩어가는 약초가 제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로델 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놓고 나가.”

일로델이 돌아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침대 옆 간이 탁자에 식기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일로델의 식단은 부드러운 닭이 들어간 수프와 과일뿐이었다. 다른 것은 먹기 싫다며 전부 물려버린 결과였다. 단출한 식사 준비를 끝낸 마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일로델이 그 기색을 읽고 고개를 틀었다.

“뭐야?”

“주문한 가면이 완성되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가면?”

“저녁 무도회에서 사용하실 가면입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일로델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부재에도 저택 안에서는 무도회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이런 거겠지. 그래도 주인이 직접 착용해야 하는 물건은 어쩔 수 없이 확인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는 은사가 아름답게 얽힌 가면을 앞두고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니까 그걸로 하라는 의미였다.

“대공께서 저택을 비우셨기 때문에 로건 님께서 손님을 맞이하신다고 합니다.”

“응.”

“일로델 님께서 참석하실 일정은 매 저녁 열리는 무도회입니다. 그 외에는 편히 쉬셔도 됩니다.”

“응.”

“아, 그리고 마님께서 대리인을 보내신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일로델 님 앞으로 서신도 보내오셨습니다.”

마노가 화려한 금장이 감긴 서신을 건넸다. 일로델은 그것을 받아들고 빤히 내려보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는 주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마노가 조용한 걸음으로 물러났다.

일로델은 시트 안에서 헤롯의 서신을 펼쳐 보았다. 대강 못 가서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길게 적혀 있었다. 마노의 말대로 대리인을 보내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자가 최종적으로 혼사를 결정할 테니 군말 없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일로델은 서신을 접고 베개에 뺨을 파묻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무도회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파장할 것이다. 로건의 여유로운 태도가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걸림돌이 될 수 없고,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서재에서 변모한 모습을 보인 건 냉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다.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얌전히 있으라는 경고를.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형제들은 자신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은 얌전히 갇혀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믿었던 형에게 기만당하고, 멀쩡한 베타의 몸으로 애를 낳고, 동생에게 폭력 대신 강간을 당하면서도 찍소리 못 하고 살아가야 했다.

일로델은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이유도 없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시트 안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일로델이 몸을 일으켰다. 협탁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명치가 콱 막히는 느낌이 나더니, 속에서 열화 같은 화가 치솟았다.

“이, 젠장!”

일로델은 대뜸 베개를 내던졌다. 몸을 휘감은 시트도 발로 차버리고 정신없이 협탁을 헤집었다. 손에 종이와 만년필이 잡혔다. 일로델은 펜을 부술 기세로 잡고 글씨를 적어나갔다.

『어머니.』

“가만 안 둘 거야. 전부 말해버릴 거야.”

『도와주세요.』

“나쁜 놈들. 그게 무슨 형제야. 다 필요 없어!”

헐떡임이 더욱 커졌다. 일로델은 난데없이 소리를 꽥 지르더니 종이를 거칠게 구겼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형제들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력한 자신에게 울화통이 터졌다. 이렇게 한심하고 약해빠졌으니 망나니 같은 형제들에게 휘둘리는 거다. 왜 그때 나가라는 말을 못 했을까? 형제, 가족,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단칼에 잘랐어야 했다. 그 뒤에 따라올 상실감을 이겨냈어야 했다.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형과 돌아보면 항상 근처에 있는 동생 따위 더는 필요 없다고!

일로델이 콱 막힌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탓인지 구역질마저 올라왔다. 빈 물잔을 쥐고 방황하던 일로델은 물 대신 수프를 들이켜려 했다. 콧속으로 고소한 닭고기 냄새가 훅 끼쳤다. 순간 골이 띵하더니 속이 뒤집힐 것처럼 메슥거렸다.

“으욱.”

일로델은 수프를 내던지고 욱욱거렸다. 비루먹은 몸뚱어리. 생각해 보면 베타로 태어난 것부터가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알파로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아니, 이젠 많이도 안 바란다. 적어도 티베인보다 튼튼하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그 전에 거지 같은 수프부터 치워버려야지. 요리사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수프에 닭고기를 넣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저런 역겨운 음식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일로델은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마노를 소리쳐 부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수프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달콤한 크림수프에 싱싱한 채소와 닭고기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어제도 저걸 먹었던 것 같은데. 그나마 먹을 만하다며 요리사를 칭찬했던 것도 같다. 일로델은 미심쩍은 듯 갸웃거리다 그릇을 들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곧바로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는 멀찍한 구석으로 도망쳐 벽에 고개를 박고 한참을 끅끅거렸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상태로 멈춰 있던 일로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

시계탑의 시계가 정오를 가리켰다. 화려한 호텔 앞에 마차 여러 대가 멈춰 섰다.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 숙녀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셀도 호텔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신분 확인용으로 맡겨둔 열쇠를 되찾으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호텔에서 진행한 레스토랑 투어가 더없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음식 맛은 어제 갔던 곳과 비슷했지만, 고급스러운 내부와 피아노 연주는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게 될까. 오셀이 행복한 상상을 하며 호텔에 들어서던 그때였다. “오셀?” 돌연 호명된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홀쭉 마른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들었다.

“오셀? 맙소사. 진짜 오셀이잖아!”

“…….”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오셀의 미소가 굳어졌다. 싸구려 남창 새끼가 왜 여기에. 물주라도 생겼나? 그렇다면 당장 하나부터 열까지 캐물어서 뺏어 와야 했다. 하지만….

오셀은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이목이 쏠리기 전에 그늘진 구석으로 청년을 잡아끌었다.

“아야야, 왜 이래? 너나 나나 몸이 재산인 거 몰라? 조심 좀 해!”

“여긴 무슨 일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도망갈 거면 멀리나 가든가, 지금 영감탱이 화가 이만저만이 아냐.”

“도망간 거 아니야.”

“설마 또 포주 짓 하니? 그럼 영감한테 말이나 하고….”

“쉿. 입조심해, 걸레 새끼야.”

오셀이 듣는 귀를 경계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그를 청년이 코로 비웃었다. 역겨운 내숭도 집어던질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꼬락서니가 볼만했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야? 내가 누구 때문에 걸레짝이 됐는데. 약 먹여서 남창 소굴에 던져놓은 게 누구냐고.”

“하, 속은 놈 잘못이지. 그래도 이제 빌어먹고 살진 않잖아? 한 번쯤은 고마워해 보는 게 어때?”

“그래……. 참 고맙다. 너 같은 새낄 믿었던 내가 바보 천치지. 아무튼, 일단 좀 가자.”

“어딜?”

“어디긴. 영감탱이 엄청 화났다니까? 북부에 다녀오라는 선장 말도 안 듣고 너 잡아 오라고 난리야. 빚도 더 늘었다며? 도박쟁이는 약도 없다더니, 그 돈이면 카지노를 샀겠네!”

오셀이 까득 이를 갈았다. 그는 옅은 상흔이 남은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었다. 얼마 전, 오랜 물주인 포주 영감의 약을 슬쩍해 팔아먹은 사실이 들통나 버렸다. 꽤 짭짤한 벌이었는데 아쉽게 됐지. 그 벌이는 포커판에 다 꼬라박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 빈손으로 돌아가면 목만 졸리고 끝나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잘만 하면, 영영 돌아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저 촉새 같은 놈에게 거처를 들켰다는 게 문제이긴 한데. 오셀은 입 안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심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잠깐 들어 봐. 나 지금 여기 호텔에 머물고 있어. 여기 열쇠, 보이지?”

“그래서?”

“감이 안 와? 영감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물주야. 내 말 하나면 껌뻑 죽는다니까.”

청년이 “흐응, 그러셔.” 하며 팔짱을 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오늘 나 본 거 얘기 안 하면, 나중에 사례 제대로 할게. 네 빚이 얼마였지? 아니. 얼마든 상관없어. 다 갚아 줄게.”

“그 소릴 믿으라고? 슬럼가에 들어와 보니 네가 사기꾼에 도박쟁이라는 거 모르는 인간이 없던걸?”

“제발, 제발,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 줘. 이렇게 빌게.”

얼마나 급한지 오셀은 무릎까지 꿇으려는 기세였다. 청년은 고소한 듯, 그러면서도 조금은 솔깃하여 물었다.

“어디 향료상 첩 자리라도 잡았나 봐? 아주 몸이 달았네.”

향료상? 첩…?

손까지 싹싹 빌려던 오셀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청히 입을 벌렸다. 그러다 툭 웃었다. 갑자기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초조함이 싹 가셨다. 향료상의 첩이라. 확실히 예전 같으면 기회라도 잡아 보려고 발버둥 쳤을 터. 하지만 지금은 쥐똥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가 가진 열쇠의 주인이 누구던가. 황제와도 맞먹는 록퍼스 대공 가문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눈앞의 청년도, 포주 영감도 하수구 속 쥐새끼처럼 더럽고 하찮게 느껴졌다. 오셀은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보란 듯이 열쇠를 짤랑짤랑 흔들고 소중히 품에 넣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돌아가 봐야겠어요. 방에 따뜻한 차를 주문해 뒀거든요.”

“뭐…?”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안타깝지만 저는 당신이 찾는 가족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꼭 만나길 바랄게요.”

오셀이 난처한 듯 웃고는 몸을 돌렸다. 청년이 어어, 잠깐, 하고 손짓하며 그를 쫓았으나, 입구 앞에서 경비병들에게 제지당했다. “자, 잠깐, 뭐…. 너 미쳤어? 나, 나, 난 몰라. 너 찾았다고 얘기할 거야. 나중에 내 탓 하지 마!” 질질 끌려 나가며 소리치는 그를 투숙객들이 흘깃거렸다. 오셀도 딱하다는 듯 혀를 차곤 인파에 섞여들었다. 이곳에선 볼품없는 복장의 인간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비렁뱅이만도 못한 존재였다.

오셀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자신의 객실이 있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신문물의 존재가 낯선 그는 엘리베이터에 탈 때마다 제대로 내리지 못할까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차차 나아지겠지. 이곳에 있는 신사 숙녀들처럼. 이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는 호사란 없는 것이다. 오셀은 2층에서 내리는 투숙객과 눈인사를 하며 내심 입맛을 다셨다. 2층에는 카지노와 술집이 있었다. 술집은 투숙객 전용이지만, 카지노는 비 투숙객도 출입이 가능한 대신 신분이 확실해야 칩을 내주기 때문에 가봐야 구경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 칩을 살 돈도 없긴 하지.

이름만으로 카지노의 칩을 구매할 수 있는 인생이란 얼마나 행복할까? 머릿속에 그가 잠시 머물렀던 아름다운 대저택이 떠올랐다. 그곳은 남부에서는 황제보다 유명한 대공 가문의 저택이었다. 록퍼스의 이름을 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칩을 내어줄 텐데.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 어쩐지 속이 쓰린 기분이 되어 오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에 일로델이 오면 카지노에 가보자고 해야겠다. 안 그래도 아침마다 찾아와 소득도 없는 이야기나 늘어놓는 통에 슬슬 귀찮았던 참이다.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속으로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오셀이 5층 복도의 모퉁이를 돌던 때였다. 그의 객실 문 앞에 누군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뭐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일로델이었다.

“일로델?”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아 있던 일로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오셀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일로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잠시 귀찮은 예감이 들었지만 오셀은 순순히 그를 감싸 안으며 등을 쓸어 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네가 아는 게 있긴 하겠니. 대공 가의 언어교사로 일하면서 기초나 겨우 뗀 일로델을 보며 얼마나 기함을 했던가. 알파 가문에서 혼자 베타로 태어났으니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겠지만, 좀 심할 정도로 무지했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기본 교육도 잘 받아온 자신이 미안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불쌍한 아이니까 어쩔 수 없지. 오셀은 울먹이는 일로델을 위로해 주며 그를 방 안에 들였다. 추운 듯이 떠는 어깨에 담요를 얹어 주고 따뜻한 계피차도 가져왔다. 그러나 찻잔을 테이블에 놓는 순간, 일로델이 의자를 끌며 일어나더니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당황한 오셀이 서둘러 일로델의 등을 두드렸다.

“일로델? 일로델, 괜찮니?”

“선생님. 저거, 싫어요. 차….”

“응? 차? 계피차가 싫어?”

일로델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셀은 표정을 굳혔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거부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지, 사람 놀라게 하기는.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어도 대공 가문의 차남이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책임 문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오셀은 “미안해, 금방 치울게.” 하며 찻잔을 트레이에 담았다. 바로 그때, 일로델이 찻잔을 가로채 가더니 억지로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내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욱욱거리며 가슴을 치는 손동작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신경질적이었다. 오셀은 몇 걸음 물러나 일로델의 이해할 수 없는 행각을 지켜보았다.

“윽, 이게 뭐야. 싫어….”

일로델은 역겹게만 느껴지는 차를 내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냥, 몸이 허해져서. 병에 걸려서. 신경증이 도져서.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그럴싸한 이유가 떠오르는데도 자꾸만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니, 말도 안 되지. 책에서도 열매를 심은 초기에는 임신 가능성이 낮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배도 평평하지 않은가. 언젠가 자신에게 독초를 팔았던 사내는 배가 불러오는 게 중요한 것처럼 말했다. 그가 아는 임산부들도 모두 배가 불러 있었다. 가만,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 입덧이 먼저였나? 아니면 배가 부르는 게?

일로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뜯으며 바닥을 굴렀다. 깜짝 놀란 오셀이 서둘러 그를 끌고 침대로 데려갔다. 혹시 약이라도 한 걸까. 방 안으로 들이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다.

“일로델, 제발 진정해. 왜 그러는 거니? 응?”

오셀의 다정한 목소리에 일로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

걱정스러운 표정의 오셀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로델은, 어느 순간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

이야기는 짧지만 길었다. 중간중간 일로델이 울거나 신경질을 냈기 때문이었다. 격한 감정은 대화의 끝에 도달해 겨우 가라앉았다. 일로델은 우는 것도 지친 듯 힘없이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다. 말없이 듣고 있던 오셀은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

“어디 말할 곳도 없고 얼마나 힘들었니? 안쓰럽게도.”

오셀의 손길은 깃털처럼 부드러웠지만, 일로델은 거부하며 고개를 틀었다. 타인이 건드리는 걸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멈칫한 오셀이 손을 거두고는 일로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다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혹시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까?”

일로델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매달리는 눈으로 오셀을 바라보았다.

“도, 도와줄 수 있어요?”

“응. 너만 괜찮다면.”

일로델은 믿기 어려운 듯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며 비난을 당하거나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할 각오까지 했었는데. 도와주겠다는 말만 듣고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일로델이 지친 얼굴을 벗어 던지고 웃자 오셀도 미소 지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과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는 차라리 우는 얼굴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일로델은 구원자의 광휘에 눈이 멀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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