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
황실과 대공 가문 사이에서 혼사가 오간다는 소문이 빠른 속도로 각지에 퍼졌다. 이는 도시에서 가장 큰 포목점을 시작으로 보석상, 향료상을 거쳐 정보와 돈의 흐름에 민감한 상인들 사이에서 연일 입에 오르내렸다. 근원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택에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하인들이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입이 근질거렸음이 분명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귀족들과 지방 유력자들에게 대공 가문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소문은 명실상부 사실이 되었다. 선 대공비가 요양을 떠나고 30년 가까이 대공가의 저택에서 무도회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카티야 황녀와 베일에 싸인 대공가 차남의 혼인 발표가 있으리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일로델은 며칠째 불면에 시달렸다. 해가 떨어질 때쯤이면 별채에서 마노를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근 뒤 새벽녘까지 뒤척였다. 작은 풀벌레 소리만 나도 깜짝 놀라 일어나는 일이 계속되자 기상 시간이 저절로 늦춰졌다. 그는 점심쯤 퀭한 얼굴로 일어나 오셀이 머무는 호텔에 방문하거나 하인들과 무도회에 관한 논의를 했다. 사실 무도회고 뭐고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헤롯이 저택을 떠나며 맡긴 임무였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묵고 가는 손님은 모두 객실로 안내해. 서재와 집무실이 있는 곳은 통행을 자제하게 하고 지하에는 죄인이 있으니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아, 별채도 마찬가지야. 소란을 피우는 손님은 당장 내보내.”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릴 테니 음식과 술은 넉넉하게 준비해. 일손이 부족하면 내 호위들도 갖다 써. 무능한 놈들이지만 과일 손질이든 서커스든 하나쯤은 할 줄 아는 게 있겠지. 커튼 장식 같은 건 알아서 하고….”
점점 성의가 없어지는 일로델의 주문을 하인이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언뜻 보아도 양피지에 꽤 많은 것이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싶었던 일로델이 기운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인이 “일로델 님.” 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왜.”
“무도회 때 착용하실 가면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가면이라니?”
“무도회 둘째 날 저녁 가면무도회가 열립니다.”
“누구 마음대로?”
“마님께서 요청하셨습니다.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테마라고 합니다.”
그건 또 뭐야. 일로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언제 시비를 걸어올지 모를 형제들도 경계해야 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도회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상한 가면 쪼가리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일로델은 “대충 준비해.” 하고 돌아서다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인물과 마주쳤다. 모릭스였다.
“일로델 님, 안녕하십니까.”
“…….”
별로 안녕하지 못한 일로델은 불안한 눈으로 모릭스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형이 부대에서 일찍 돌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혼자였다. 일로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모릭스를 떨떠름하게 훑어보았다.
“무슨 일이야?”
“특별히 용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가 봐.”
졸지에 운전기사로 전직했다더니 이젠 그마저도 배제되었는지 모릭스는 오전 내내 하는 일 없이 저택을 떠돌았다. 영혼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이 마치 거울을 마주 보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자신 때문에 일어난 불행이 아닌가.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남에게까지 신경 써 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일로델은 팍팍한 현실을 되새기며 모릭스를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모릭스가 묵묵히 쫓았다.
“왜 따라와?”
“생각해 보니 용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없어.”
“지갑,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지갑. 그렇게 되물으려던 일로델이 잠시 멈칫했다. 얼마 전 가짜 피어스를 받으러 갈 때 그가 차에서 쥐여 준 지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로델은 짧게 고민하다가 모릭스에게 턱짓했다.
“따라와.”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별채 근처에 다다르자 호위들이 보였다. 일로델은 그들에게 별채 주변을 감시하라 명령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호위들은 군에서 차출된 인력이었고, 그 말은 형의 통제하에 있다는 얘기였다. 역시나 형의 보좌인 모릭스를 단번에 알아본 호위들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모릭스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일로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 별채로 들어갔다.
“잘 썼어. 고마워.”
일로델이 응접실 구석에 있는 서랍에서 지갑을 찾아 모릭스에게 건넸다. 모릭스는 얇아진 지갑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일로델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일로델은 그에게 지갑을 안겨 주고 모르는 척 다시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도 호텔에 가십니까?”
“그건 왜?”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됐어.”
별로 대화할 기분도 아니고, 오늘 갈 곳은 호텔도 아니었다. 일로델이 눈을 피하며 거절하는데, 모릭스가 대뜸 그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그….”
모릭스는 정말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사실은 용무가 없다고 말할 때조차 그랬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일로델은 고개를 돌리고 곰 같은 덩치를 피해 가려 했다. 모릭스가 망설임을 이겨내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혼인을 하시는 겁니까?”
“…….”
“일로델 님.”
일로델은 모릭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던 군인의 얼굴에 희미한 걱정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아닐까. 그는 ‘너처럼 사서 고생하는 놈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내지는 ‘가만히나 있지 왜 일을 키우냐.’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혹은 ‘내 인생 돌려내’라는 원망을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신세 한탄이라면 들어줄 용의가 있지만, 다른 얘긴 듣고 싶지 않았다. 일로델은 대꾸 없이 모릭스를 보다가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당신의 이름을 왜 가명으로 썼는지 알 것 같아.”
“예?”
“어릴 적부터 봐 왔으니까 어디서 들어도 들었겠지.”
“…….”
“다음에 시간 있으면 운전이나 가르쳐 줘. 오늘은 나가 봐야 해서 바빠.”
이런 식으로 영악하게 대화를 끌어갈 줄 아는 아이였던가. 신변을 위해선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묘한 감동과 죄책감에 휩싸인 모릭스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일로델은 그에게 한번 웃어 주고 돌아섰다. 모릭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하기 조심스러웠다. 또다시 사람을 덥석 믿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말로 혼인을 하는가.
사실 그 물음에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조차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형만큼이나 행동력이 뛰어난 어머니는 저택을 나서는 동시에 혼인 발표를 위한 무도회를 명령하고 곳곳에 초대장을 보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벌써부터 축하 선물이 줄지어 들어오고, 서신은 산더미처럼 쌓여 더는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정작 그와 카티야 황녀는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했는데 혼사는 이미 기정사실인 양 진행되고 있었다.
정략결혼이 으레 그렇듯 분위기가 삭막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한 건 로건도 티베인도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티베인은 깊은 밤중에 별채를 한 번 찾긴 했지만, 조용히 노크만 하고 사라졌다. 그 뒤로 일로델의 불면 증세가 깊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로건과는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부대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외출을 하고, 노을이 질 때쯤 집으로 돌아와 별채에서 농성을 했다. 그렇게 폭풍전야 같은 나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바늘이 되어 온몸을 찌르는 느낌이라면 알까.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살얼음판 같았다.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살도 부쩍 빠져 입던 옷이 헐렁했다. 어느 날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 서신을 쓰려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만두었다. 이대로 가다간 만성 신경쇠약은 예견된 바였다. 정신을 차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멀리 저택 입구 앞에서 차가 대기 중인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터덜터덜 걷던 일로델은 불시에 입을 틀어막혀 산울타리 사이로 끌려 들어갔다. 꼼짝 못 하게 뒤에서 끌어안긴 순간에는 집 안 한복판에서 납치인가 싶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일로델은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진저리를 쳤다.
“이게 얼마 만이야. 미치는 줄 알았네, 빌어먹을….”
허리 아래로 묵직하게 불거진 살덩이가 문질러졌다. 기겁한 일로델이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억센 팔이 허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성기는 빠르게 부풀어 올라 엉덩이의 갈라진 부분을 노골적으로 비벼 올렸다. 일로델은 입을 막은 손과 허리를 감싼 팔을 마구 잡아 뜯었다. 낮게 긁히는 목소리와 진회색의 제복이 지겨울 정도로 낯익었다.
“가만히 있어. 여기서 엎어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감히 내 눈앞에서 외간 놈이랑 데이트를 해?”
“헛소리…. 이거 놔!”
일로델은 입가를 틀어막은 손을 힘겹게 떼어내고 한쪽 팔을 휘둘렀다. 팔꿈치가 운 좋게 티베인의 명치로 돌진했다. 단번에 풀려난 일로델이 다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곧바로 거친 손길에 팔을 잡혀 끌려갔다.
“하지 마, 놔아!”
“시끄러워. 한 번만 더 삑삑거리면 정원 한가운데서 벗겨놓고 올라탈 줄 알아. 그렇게 소원이면 하인들 앞에서 실컷 소리 질러 보라고.”
결국,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질질 끌려간 일로델은 분수대 앞 벤치에 내던지듯 앉혀졌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달아나려 했지만, 티베인이 앞을 막아서며 벤치를 거칠게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진동이 몸을 타고 흘렀다.
“조용히 얘기 한번 나누기 힘들군. 응?”
“…….”
일로델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티베인을 올려다보았다. 72시간 동안 골방에 처박히는 형벌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티베인은 무단결근으로 구금되었다 풀려난 뒤로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혼인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난동을 피우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말없이 자신을 노려볼 뿐이었다. 지금처럼, 고요하면서도 몹시 사나운 눈으로.
“너, 네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먼저 시선을 피한 일로델이 묻자 티베인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이럴 때야말로 발정기가 유용하지. 으슥한 데서 좆 좀 흔들다 온다고 하면 되거든.”
일로델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티베인의 바지 앞섶을 무의식중에 곁눈질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긴 제복이 터져나갈 것처럼 팽창해 있었다. 일로델은 칠색 팔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혀에다 문지르면 나아질 거 같은데, 어때.”
“입 다물어. 발정 난 수캐 자식아.”
“황녀도 알파인 거 모르냐? 좆도 빨 줄 알고 그래야 예쁨받지. 이래서 새신부가 너 같은 숙맥이랑 재미나 보겠어?”
계속 들어주다간 귀가 썩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일로델이 다시 일어서려 했다. 티베인이 그를 밀치고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세게 쥔 것 같지도 않은데 나무로 된 등받이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비틀렸다. 일로델은 저를 가둔 팔뚝을 밀치다 찔끔해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동안 나도 생각을 많이 했단 말이지. 네가 툭하면 발작하고 끙끙대니까 내 나름대로 맞춰 주려고 했단 말이야. 목걸이 그거, 걸어 줬다고 돼지 취급했단 소리까지 들으면서.”
“…….”
“그런데, 뭐? 혼인?”
티베인이 말을 멈추곤 일로델을 내려다보았다. 조롱기 남은 얼굴에 짙게 내린 그림자가 위협적이었다. 평소보다 배는 난폭한 기세에 일로델이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그는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내심 당황한 상태였다. 티베인은 도망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일로델을 빤히 보다가, 분노를 참듯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뭐, 좋아. 너 하는 짓이 그렇지. 한 번은 귀엽게 봐줄 테니까 지금 당장 취소하겠다고 해.”
“뭐?”
“어머니한테 서신이든 사람이든 보내서 취소하라고. 어차피 너도 후회하고 있을 거 아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소리는 네가 하고 있지.”
티베인이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나 형이 버티고 있는데 혼인이 성사될 것 같냐? 너도 머리가 있는 놈이면 그 정도로 상황 판단이 안 되진 않겠지. 괜히 일 키우다 다치지 말고 봐줄 때 포기해.”
“…….”
“대답 안 해?”
일로델은 불현듯 비 오던 밤의 로건을 떠올렸다. 혼인을 결정한 걸 후회하느냐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더없는 기회라 생각해서 어머니를 졸라 일을 진행했지만, 그에 대한 형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괜히 벌집을 들쑤셨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부모님의 안위는 영원히 볼모가 될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형에게 또다시 이상한 짓을 당할 것이다. 티베인 자식은 뻔뻔한 얼굴로 자신을 강간할 것이고, 모든 관계는 어그러져서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될 게 분명했다. 일로델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벤치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내 일이 아냐.”
“엉?”
“선생님께 들었어. 너…. 네가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이던 티베인이 이내 입매를 비틀었다.
“아, 그 하이에나 같은 놈도 있었지. 그래, 뭐라고 했지? 내 말을 안 들어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단 소린 안 했냐?”
“네 아이를 가졌었다고 했어.”
티베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어딘지 낯선 얼굴로 일로델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옥처럼 사방을 가두고 있던 팔에서 벗어난 순간,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가졌었다. 그리고?”
“네가, 억지로 약을 먹였다고 했어.”
“그리고?”
“그래서, 아이가 지워져서.”
“그리고?”
“선생님이.”
“그리고?”
틈을 주지 않고 돌아오는 대꾸에 일로델이 말을 멈췄다. 티베인은 피식 웃고는 상의 속주머니에서 궐련을 찾았다. 그러나 곧 습관처럼 길거리에 버렸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일로델을 만날 때의 그는 괜한 트집 잡히는 일이 없도록 흡연을 삼가는 편이었다.
“지루해서 들어줄 수가 없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사람이면, 선생님께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언제는 사람 아니라며? 뭐랬더라? 벌레 다리?”
일로델은 혼자 말하고 혼자 큭큭대는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안 보는 사이 이상한 약이라도 했는지 머리는 산발에 눈은 움푹 꺼져서 약물 중독자가 따로 없었다. 어딜 보나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녀석이지만, 선생님은 티베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있는 듯했다. 호텔에서 본 선생님의 태도는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날, 선생님과 티베인은 정원 구석에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히는 엎드린 선생님 위에 티베인이 올라타 있는 모습이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새에게 모이를 주러 나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일로델은 얼마 전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그것은 혀를 빼고 흘레붙는 두 마리의 개였다.
‘더러워.’
‘…….’
‘이상해.’
일로델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넋 나간 듯 저를 올려다보는 티베인을 인지하고 나서야 깨달았을 뿐이었다. 배신감과 충격, 그리고 희미한 공포로 얼룩진 표정이 과거를 뛰어넘어 차례로 가슴께를 들쑤셨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로델은 고개를 저어 치워버렸다. 이제 와 되새길 만큼 좋은 기억도 아니었다.
비록 짐승처럼 맺어진 관계라 하더라도 선생님은 티베인의 아이도 가졌었고, 여전히 티베인을 그리는 마음도 있다. 티베인 자식은 본래 멍청하니 자신에게 음심을 잘못 품었을 뿐 원래는 선생님과 맺어져야 하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좀 심하긴 했지. 그 새끼, 아니. 선생님 이름이 뭐였지?”
“오셀 선생님이잖아.”
“오셀. 오셀이라.”
입 안으로 오셀의 이름을 중얼거린 티베인이 갑작스레 돌아섰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 세웠다.
“어, 어디 가?”
“해결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 떠올라서. 왜, 빨아 줄 마음이 생겼어?”
티베인이 여전히 성이 나 있는 제 물건을 눈짓했다. 일로델은 질색하며 인상을 구겼지만 티베인에게서 눈을 돌리진 않았다. 둘을 상대하는 것보단 하나가 낫다고 했던가. 그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형을 상대하기도 벅찬 지금, 혼인이든, 선생님의 일이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무엇 하나라도 티베인과 끝맺음 되길 바랐다.
“내일 휴가 낼 거니까 나머지 얘기는 그때 하자고. 다른 길로 새면 가만 안 둬.”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티베인은 형형한 눈을 부라리며 그렇게 지껄이곤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
일로델은 외출을 하려던 계획을 변경하고 별채에 틀어박혔다. 티베인의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면 부족의 여파로 거대한 피로감에 휩싸인 그는 하인 마노에게 방을 지키게 하고 하루를 내리 잤다. 다시 깨어났을 땐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일로델은 마노를 내보낸 뒤 약초 더미를 뒤적이며 별채를 지켰다. 어쩌면 티베인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날 밤은 여느 때보다 고요하게 지나갔다.
여명이 밝아오자 일로델은 식사도 마다하고 호위들을 닦달했다. 형제들과의 대면도 피할 겸 어제 자느라 가지 못했던 곳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호위들은 목적지를 듣더니 난색을 표했다.
“아카데미 말입니까?”
“그래.”
별채 앞을 지키던 호위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늘 그렇듯 또 토를 달려는 분위기였다. 일로델은 마음을 굳게 먹고 호위들을 노려보았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 우두머리를 잃은 야만인들이 도시 곳곳에 출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험하니까 차라리 호텔로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래서?”
“가서 은사님도 뵈시고 식사도 드시죠. 일로델 님 앞으로는 언제나 예약이 잡혀 있습니다.”
일로델은 막힘없이 따박따박 대꾸하는 호위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티베인에게 배운 고대로 써먹었는데, 왜 안 먹히는 것일까.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드는데 얄밉기까지 한 놈들이었다. 그냥 성질대로 ‘시끄럽고 빨리 차나 내와!’ 하고 패악질을 부리려던 찰나, 호위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모릭스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편한 차림인 걸로 보아 새벽부터 영혼 없이 저택을 떠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됐다 싶은 일로델이 그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한가하지? 지금 당장 아카데미로 갈 거야. 운전해.”
“…….”
모릭스는 저보다 머리 하나 작은 일로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호위들을 돌아본 그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릭스가 나서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티베인이 자주 몰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군용 차량이 준비되고, 일로델은 후련한 마음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저놈들은 왜 그렇게 말이 많지?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어.”
“호위들이 무례한 짓을 했습니까?”
“아카데미는 가지 말라는 둥, 호텔로 가라는 둥, 감히 잔소리를 하잖아.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어. 다음에 또 그러면 혼쭐을 내야지.”
퍽 서러웠던 일로델이 오랜만에 열이 올라서 쉴 새 없이 조잘댔다. 모릭스가 조심스럽게 차를 운전하며 호위들을 두둔했다.
“아마 집 안에 계시는 게 안전해서 그랬을 겁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 같은데 양심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나한테 집 안에 있는 게 안전하다는 말을 해?”
“그래도 지금은 집이 가장 안전합니다. 헤롯 님께서 수행원들 일부를 저택에 남겨두고 가셨거든요.”
그 말에 앞 좌석을 부둥켜안고 씩씩거리던 일로델이 흠칫했다.
“어머니가? 왜?”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미러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모릭스는 ‘네가 무슨 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눈치였다. 일로델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뒷일 생각 않고 전부 털어놓고 싶은 걸 참느라 눈물까지 쏟지 않았던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형이 무슨 일인가 벌이리라는 걸 미연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을 추궁하는 태도가 평소와 다르게 격렬했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신 걸까?”
“모르겠습니다만, 그랬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일로델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서러움을 못 이기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은 무사할지언정, 이번 일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었겠지. 형의 보호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과 자신은 한배를 탄 사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운전하느냐에 따라 뒤집힐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는. 그 사실을 깨닫자 오싹하리만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깜짝 놀라서 모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모릭스는 백미러를 슬쩍 올려다봤을 뿐 ‘한심하다.’라거나 ‘너 때문에 내가 더 무섭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일로델은 크게 안도하며 앞 좌석 헤드에 고개를 묻었다.
“점점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아. 알면 알수록 무섭기만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형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나를 임신, 시켜서 뭘 얻겠다는 거지?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걸까? 티베인은 그냥 미친 거지? 그렇지?”
“…….”
“차라리 전부 괴롭힘이고 장난이었으면 좋겠어. 가족끼리 이런, 이런 짓 하는 거, 너무 이상하고 무서운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심을 털어놓는 와중에도 모릭스는 정면을 향한 채 말이 없었다. 반갑게 맞장구쳐 주리란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무의미한 기분이 되어 일로델은 말을 흐렸다. 비가 멎고 구름 사이로 잠깐 드러난 하늘은 선뜻 걷고 싶을 만큼 쾌청했다. 넋두리를 멈추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일로델이 길가에 차를 세우게 했다. 그가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가자, 당황한 모릭스가 서둘러 따라 나왔다.
“안까지 모시겠습니다.”
“어차피 바로 앞인데, 그냥 걸어도 돼.”
일로델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얼굴은 희게 질렸고, 늘 단정했던 검은 머리칼은 윤기를 잃고 푸석했으며, 햇빛 받은 바다처럼 빛나던 눈은 어둡게 그늘져서 바닥을 향해 있었다. 모릭스는 문득 전장에서 만난 야만인들을 떠올렸다. 교묘한 토끼몰이 끝에 두 번의 매복을 당한 그들은, 마침내 투지를 잃고 순순히 투항해왔다. 그 어느 짐승보다도 거칠고 야생적이던 자들에게서 밀물처럼 생기가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일로델 역시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로델 님.”
“왜?”
“용무가 끝나시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른 곳이라니?”
일로델이 모릭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모릭스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결심을 굳힌 듯 대답했다.
“어디든, 여행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바다 건너 북부에는 사시사철 눈만 오는 곳도 있습니다. 조용하고 운치 있어서 마음에 드실 겁니다.”
순간 가슴이 일렁거릴 정도로 설레는 제안이었다. 특별히 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조용한 곳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일로델은 잠시 눈 덮인 산장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를 상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조용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혼인을 덜컥 승낙한 바람에 그를 위한 무도회까지 앞두고 있지 않은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만한 일을 벌였으면 최소한 도망은 치지 말아야 했다.
“고맙지만 됐어. 다녀올 테니까 심심하면 자고 있어.”
“하지만, 일로델 님.”
“그만해. 나는 한가롭게 여행할 시간 없고…. 내 형제들에게서 당신을 지켜 줄 여유도 없어.”
일로델은 힘없이 손을 내젓곤 터덜터덜 담장 길을 걸었다. 당황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모릭스는, 일로델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반은 충동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집착이 강한 형제들을 버거워하는 일로델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과연 목숨을 걸 만한 일인가?
바로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일로델만 조용히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정상적인 관계는 아님이 분명했지만, 인간의 삶에 오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었다. 그러한 삶의 형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밤새 다짐을 해놓고도 막상 일로델을 보니 마음이 갈대처럼 휘청였다.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양어머니도, 병원에 계신 아버지도, 깊이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로건도 뒤로하고 일로델을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이 어디 즈음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답답해하는 아이의 숨통을 잠깐이라도 틔워 주고 싶었다.
한참 주저앉아 있던 모릭스는 비척비척 일어나 운전석에 들어가 앉았다. 초췌한 얼굴로 자신을 지킬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일로델과, 로건 옆에 붙어 그를 돌보겠다고 당당히 선포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겹쳐졌다. 모릭스는 핸들에 이마를 받치고 울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그림자가 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
창밖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모릭스는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
새벽의 아카데미는 인기척 하나 없이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일로델은 숙직을 서는 경비를 닦달해 도서관의 열쇠와 램프를 요청했다. 경비는 눈 굴리기와 말 돌리기로 저항하려 애썼지만, 대공 가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실컷 권력을 만끽한 일로델은 강탈해온 열쇠로 도서관 문을 따고 들어갔다. 램프를 들고 책장을 살피던 그는, 몇 가지의 책과 신문 기사를 찾아 구석에 있는 책상에 자리 잡았다.
처음 펼친 책은 희귀 식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램프에 의존해 목차를 살피던 일로델은 찾던 것을 발견하고 책장을 넘겼다. 기묘하게 생긴 열매 그림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인간의 골반을 닮아 이름이 붙었다는 무명골 열매였다. 제목부터 ‘희귀 식물 백과사전’인 주제에 몹시 희귀하다는 설명이 줄지었는데, 뜨거운 용암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효능은 익히 아는 대로 불임에 효과가 있고, 과거 황제가 총애하던 첩실이 이것으로 아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먼 옛날 화산 근처에 사는 족제비의 새끼가 무명골 열매에서 태어나기도 했다는데, 일로델은 그 대목에서 저자를 비웃었다. 제가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자에 대한 신뢰가 팍팍 깎여나가던 그때, 책장을 넘기던 일로델이 한 단락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러나 인간의 자궁을 대신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식물이기 때문이다. 인체에 씨앗을 심고 약 이 년이 지나면 씨앗은 자연히 녹아 배출된다. 임신과 출산의 성공률도 높지 않다. 유착 기간인 초반에는 임신 가능성이 희박하고, 수태한 이후로도 유산의 위험성은 산재해 있다. 외부 침입으로 인식해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학이 발달하여 열매를 몸 밖으로 꺼내 태아를 발육할 수 있다면 성공률은 높아지겠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기술은 없다.』
“…….”
눈에 불을 켜고 그 부분을 노려보던 일로델이 종이를 잡고 쭉 찢었다. 그리고 잘 접어 품에 보관했다. 약 이 년. 그 시기만 잘 넘기면 이 기괴한 열매가 몸속에서 녹아 사라진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저자에 대한 신뢰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뒷부분도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특별히 도움 되는 내용 없이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비슷한 책을 몇 개 더 찾아보고, 어느새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서적까지 뒤적이던 일로델은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의 대목에서 몸서리치며 책을 닫았다. 설명이 눈에 그려지듯 생생해서, 그동안의 원망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만들려 하다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형과 동생이 나란히 악마에 씌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로델은 읽은 책을 대충 빈 책장에 꽂아놓고 마지막으로 신문을 펼쳤다. 카티야 황녀에 관한 기사였다. 카티야 황녀는 명실상부 황위 계승자였으나, 지금까지도 제위를 두고 아버지인 황제와 대립 중이었다. 기사 역시 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얼마 전 황제가 사생아랍시고 홀딱 벗긴 젖먹이를 연회에 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기의 우람한 성기를 자랑하며 계승권을 부여했다는 다소 망측한 가십이었다. 다음으로, 분노한 카티야 황녀가 식탁을 깨부쉈다는 부분에서 일로델은 찔끔 놀라 조용히 신문을 덮었다. 그리고 몇 가지 기사를 더 뒤적인 결과, 깨달았다. 황녀는 어머니와 무서울 정도로 닮았다. 특히, 불같은 성격이.
일로델은 암담한 기분이 되어 책상에 엎드렸다. 이런 사람과 혼인을 한다고 해도 무서울 것 같았다. 혼인 상대의 정보를 도서관에서 찾아야 하는 처지도 구슬펐다. 그러나 한편으론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황녀이니까 아주 바쁘겠지? 그래도 부모님보다는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형처럼 이상한 짓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동생처럼 자신을 못살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만, 지금처럼 자도 자도 피곤하고 몸이 천근만근 무겁지는 않지 않을까….
“잘 지키고 있어, 자료만 찾고 바로 나올 거야. 음? 열려 있는데.”
작은 소란과 함께 도서관 문이 열렸다. 어느덧 엎드려 잠이 들었던 일로델이 흠칫해서 깨어났다. 푸른 새벽은 온데간데없고, 창문으로 햇빛이 따갑게 비치고 있었다. 벌써 입실 시간인 걸까. 일로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차로 돌아가 이어서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여기 꽂아놨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멀대처럼 키가 큰 남자가 책장 앞을 기웃거렸다. 퀭한 얼굴로 책장 사이를 지나치던 일로델은 멈칫해서 다시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자를 빤히 보았다. 위로만 훌쩍 자란 몸, 갈색의 더벅머리. 그리고 자신을 방심시켰던 멍청한 얼굴. 꿈에서라도 때려잡고 싶었던 불구대천의 원수, 오르본이었다.
“너, 이 자식….”
“흐억!”
뒤늦게 일로델을 발견한 오르본이 기겁하고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왼쪽 다리에 커다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은 채였다. 목발도 내던지고 뒷걸음질 치던 오르본은 얼마 가지 못해 우당탕 쓰러졌다.
“헉, 살려, 살려…. 저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살려 주세요!”
“뭐라는 거야? 이 나쁜 놈, 거기 서!”
팔을 내저으며 궁둥이로 물러나던 오르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로델을 훑어보더니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뭐야. 일로델이잖아.”
에이, 뭐야? 이런 지나가다 벼락 맞을 놈을 보았나.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일로델이 근처에 굴러다니는 목발을 주워 번쩍 치켜들었다. 오르본은 거북이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두 손을 쳐들었다.
“미안해. 나는 또 티베인 중위인 줄 알고…. 아, 이제는 대위지?”
“알 게 뭐야, 그런 자식!”
“일로델이구나.”
일로델은 일말의 주저 없이 목발을 내리쳤다. 딱, 하는 소리가 앙칼지게 울리고, 불시에 정수리를 얻어맞은 오르본이 머리통을 쥐고 뒹굴뒹굴 굴렀다.
“아이고, 이러지 마. 말로 해 줘. 제발….”
“감히 어느 주둥이로 나불거려? 당장 엎드려 잘못을 빌어!”
“자, 잘못이라니?”
“이게!”
일로델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목발을 마구 휘둘렀다. 한 대 맞은 게 꽤 아팠던 오르본도 그냥 맞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재주 좋게 꿈틀거리며 목발을 피하자 약이 오른 일로델이 눈에 딱 보이는 약점을 공략했다. 오르본은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다리를 얻어맞고는 꽥 소리를 내며 뒤집어졌다.
“아구구구, 잘못했어. 잘못했어!”
“이 지렁이 같은 자식! 제대로 일어나서 사죄하지 못해?”
“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네 동생이 내 다리를 부러뜨려놔서 불구가 됐단 말이야. 제발 한 번만 봐줘….”
그 말에 노발대발해서 목발을 내리치던 일로델이 움직임을 멈췄다. 오르본은 잽싸게 다리를 끌어안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끙끙댔다.
“다리만 부러졌으면 다행이게? 발가락까지 싹 부숴놔서 재활도 글렀어. 그나마도 염증 생기면 잘라내야 하니까, 제발 때리지 말아 줘….”
“…티베인이 그랬다고?”
“으응. 네가 열차역에서 나를 두고 가지 않았더라도…. 아니, 탓하는 건 절대 아니야. 네가 옆에 있어 줬다면, 티베인 대위도 화를 덜 냈을 거라는 거지….”
오르본이 일로델의 눈치를 보면서 연신 제 다리를 살폈다. 일로델은 “열차역? 열차역…….” 하며 곱씹다 비 오는 날의 후줄근한 건물을 떠올렸다. 역사 앞에서 오르본과 마주치고 일의 진상을 캐물었었지. 그리고 불길하면서도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도망쳤다. 뒤에서 비명 소리가 요란했던 것이 잇따라 떠올랐다. 코끼리 다리만 한 붕대를 두른 꼴을 보아하니, 그날 열차역 앞에서 티베인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다리가 아니라 모가지를 비틀어도 시원찮은 자식이지만…. 일로델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목발을 내렸다.
“자, 잘 지냈어? 요즘 무도회 준비하느라 바쁘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도 초대장이 왔어. 살아생전 록퍼스 가의 저택에 방문하게 되다니, 너무 영광이야. 고마워.”
저런 촌뜨기 같은 놈도 귀족이라고 초대장을 받는구나. 오르본이 예의 바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꾸벅였지만 일로델에겐 지렁이의 꿈틀거림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 오르본을 쏘아보았다.
“내가 누구와 혼인하는지는 알겠지?”
“입원 중에 초대장을 받아서 잘은 모르지만…. 한 사람밖에 없지 않아?”
“한 사람밖에 없다고?”
“로건 님 말이야.”
일로델이 또다시 목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기겁을 하고 놀란 오르본이 거미처럼 팔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벽에 가로막힌 그는 책장에 의지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허옇게 질린 얼굴이 평소보다 배는 멍청해 보였다.
“지, 진정해. 원래 그렇게까지 난폭하진 않았잖아. 호, 호르몬 때문인가?”
“닥쳐! 네놈이 감히, 내 인생을 구렁텅이에 빠뜨려놓고, 감히 그따위 농담을 해?”
“무, 무슨 농담 말이야? 구렁텅이라니?”
“시치미 떼지 마! 내가 형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다 알잖아!”
일로델이 통한의 고함을 내지르며 목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곧 오르본의 손에 막히고, 눈 깜짝할 사이 목발을 빼앗겼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일로델이 휘청이자, 오르본이 그의 몸을 보물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받쳐 주곤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난 또 뭐라고. 그게 왜 구렁텅이야? 잘된 일이지.”
“뭐야?”
“세상에 누가 있어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하겠어? 너는 로건 님과 형제간이라 잘 와닿지 않겠지만 이건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라구. 로맨틱하면서도 아주 무서운 일이야.”
“너 방금 무섭다고 했어!”
“내가? 아니야, 잘못 들었겠지.”
저 뻔뻔한 자식의 면상을 후려치지 않으면 오늘부로 사람이 아니다. 일로델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자 오르본이 가까스로 몸을 피해 도망쳤다. 오르본은 목발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쭉쭉 나아가 “비켜, 비켜!” 하며 밖으로 나갔다. 머리끝까지 약이 오른 일로델이 그 뒤를 쫓아가려는 찰나, 문 앞에서 우락부락한 장정들에게 가로막혔다. 티베인의 잦은 출몰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오르본이 사비를 들여 고용한 건달들이었다.
“저리 비켜, 이 천한 놈들!”
“뭣? 이런 비실비실한 게 어디서….”
한 사내가 일로델을 밀치려 들 때였다. 앞서가던 오르본이 뒤를 돌아보더니 복도가 울리도록 쩌렁쩌렁 소리쳤다.
“안 돼, 절대 손대면 안 돼! 미래 대공가의 안주인이라구! 내 밥줄이야!”
“이 개자식!”
일로델의 목덜미가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장정들을 거칠게 밀어내고 오르본을 뒤쫓았다. 아카데미 건물로 들어서던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주변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오르본은 목발을 절뚝이며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빈 강의실로 숨어들었다. 독 안에 든 쥐새끼였다. 일로델은 잠시 숨을 고르다 흉흉한 기세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오르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보이는 거라곤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젤과 미술도구들, 활짝 열린 창문뿐이었다.
“무도회 꼭 갈게! 조심해야 하는 시기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지?”
창문 밖에서 오르본이 염려하듯 손을 흔들었다. 일로델은 창틀을 넘어 보려고 끙끙대다가 헐떡이며 널브러졌다. 남은 힘을 쥐어짜 주변에 보이는 물감을 집어 던졌지만, 이미 멀리 떨어진 오르본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오르본은 꾸역꾸역 교정을 가로질러 마중 나온 차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다 잡은 놈을 코앞에서 놓친 셈이었다. 속이 뒤집혀서 미칠 것 같았다.
*
결국, 오르본이라는 대어는 놓쳤지만 소득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황녀의 정보를 얻었으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오르본은 겁도 없이 무도회에 오겠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로델은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며 주저앉아 있다가, 노을이 붉게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아카데미 밖으로 나왔다.
아카데미는 도심과 살짝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빠져나가면 무인도처럼 고요했다. 별로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좀 시끄럽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오르본이 꼬셔서 갔던 싸구려 펍이 훨씬 취향에 맞았다. 거기에나 들렀다 가자고 할까? 모릭스는 융통성 없는 군인이지만 조르면 받아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꼭 예전의 형이 돌아온 기분도 들었다. 모릭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 너무 피곤해. 이런 날은 맥주가 마시고 싶던데. 저번에 형이랑 같이 찾아왔던 펍 기억하지? 거기로 가자.”
“…….”
“모릭스?”
일로델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석에 있는 모릭스를 들볶았다. 거절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정면을 바라보고 앉은 모릭스에게선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눈 뜨고 자나? 일로델은 앞 좌석을 붙들고 기웃거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의 하늘은 붉은색과 남색이 뒤섞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노을빛이 스미지 않는 자리는 그늘로 덮여 있었고,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로델은 기분 탓이라 여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야보다 높은 곳에서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강인한 얼굴선과 반듯하게 차려입은 제복, 미세한 빛을 머금은 계급장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
일로델은 바짝 얼어붙은 채 숨을 죽였다. 잠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형이 옆에 있다. 왜지? 일로델이 답을 알려 줄 사람을 찾아 모릭스를 흘긋거렸지만, 그는 입매를 굳히고 말이 없었다. 마치 그대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출발해.”
“네.”
연식이 오래된 군용 차량이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를 냈다. 일로델은 그때까지도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형이 차에 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 전과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보나 마나 미행을 했거나 빌어먹을 피어스를 따라왔겠지. 아직은 참느니 어쩌니 해도, 몰래 보고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따라왔을까?
일로델은 식은땀으로 촉촉해진 손을 그러모았다. 로건의 시선이 와닿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동안 공연히 대들다가 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형은 냉정하고 잔인할 뿐 티베인처럼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다. 신경을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말이었다. 일로델은 초조하게 창문에만 시선을 두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처럼 반가운 날이 없다고 생각한 그때, 낯익은 갈림길에서 차가 우측으로 꺾였다. 저택과는 반대로 가는 방향이었다.
“…….”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일로델은 불안한 듯 손가락만 꼼질대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갈까?”
“저는, 집… 으로…….”
“펍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바로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주둥이부터 다물고 있을 것이다. 낭패한 얼굴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일로델을 로건이 가만히 보았다. 팔걸이에 턱을 괸 모습이 티베인만큼이나 방만하게 보여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릭스와 함께 가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펍이든 여행이든, 가고 싶으면 얘기해. 그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어.”
‘여행’이라는 단어의 억양이 억세게 느껴진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일로델은 열심히 눈치를 보았다. 로건도 모릭스도, 표정만으론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여행….”
“…….”
“안 갈 거예요. 안 가겠다고 했어요.”
“괜찮아. 티베인 같은 녀석도 보아 넘겼는데, 모릭스 정도면 좋은 남자이지. 너와도 잘 어울려.”
서재에서 대면한 이후로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지기로 한 것일까. 로건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조롱 조의 말투가 특히 그러했다. 일로델이 며칠 동안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에도 로건의 태도 변화가 컸다. 예전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 상처를 주려는 행동은 안 했으면 했다. 로건의 그런 행동은, 일로델에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에 탄 것처럼 아주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이상한 농담 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뭐든 줄 수 있어. 정부 한둘이야 귀족 사회에서 드문 것도 아니지.”
“원한 적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사실 살아 있는 채로 줄 생각은 없었어. 마침 실력 있는 박제사를 후원하고 있어서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언제부턴가 형과의 대화는 개미지옥에 빨려 들어가는 개미가 된 기분을 경험하게 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곁에 있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로델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서 로건을 노려보았다.
“저는 형님이. 그런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로건이 일로델을 마주 보며 즐거운 듯 웃었다.
“어떤 말?”
“그런, 점잖지 못한, 질투 같은……. 아니, 저, 저속하고 무서운 협박….”
“질투가 맞아, 일로델.”
로건의 대꾸에 일로델은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당황한 일로델이 입을 다물자 로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을 들어 묵묵히 운전하는 모릭스에게 명령했다.
“차를 세워.”
“네.”
도심이 멀지 않은 으슥한 길가에 차가 멈춰 섰다. 어느덧 노을은 땅 아래로 내려가고 저녁 어스름이 짙어져 있었다. 창밖에는 동부에서 들여온 거대한 가로수가 시야를 막고 있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길게 울렸다. 어둠을 인지했기 때문일까. 문득 추위를 느낀 일로델이 팔을 쓸자 로건이 히터를 켜라는 명령을 했다.
묘한 침묵 속에서 히터가 돌아갔다. 따뜻한 바람이 차 안에 감돌고 발끝에서부터 훈훈한 온기가 올라왔다. 그럼에도 오싹함이 가시지 않아서 일로델은 연신 팔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따뜻할 것 같았다. 이것이 정말 추위일까? 그럴 리가. 이건 본능의 경계였다. 당장 차 밖으로 도망치라는 경고였다. 일로델이 로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차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로건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일로델.”
“…….”
“이리로.”
모릭스가 끌고 나온 군용 차량은 4인승의 좁은 구조였다. 네 개의 좌석이 운전석과 뒷자리를 빠듯하게 차지한 차 안에서, 로건이 어디로 오라는 것인지는 명확했다. 그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듯, 한쪽 팔을 벌리고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건드렸다.
“어서.”
“…….”
일로델은 옆에 있는 로건과, 그의 앞 자리에 위치한 모릭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마지못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허벌판에서 도망을 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머뭇거리며 로건에게 다가가는 동안에도 창밖을 살피며 활로를 찾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일로델은 로건의 허벅지 위에 앉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모릭스가 앉은 앞 좌석의 시트에도 등이 닿지 않도록 어색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로건의 위에 주저앉게 되었다. 엉덩이 아래로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비벼졌다.
“혀, 형님….”
“괜찮아. 편하게 있어.”
“이, 이상해요, 이런 거….”
좁은 공간에서 속삭인다고 들리지 않을 리 없겠지만, 일로델은 모릭스 쪽을 흘긋거리며 웅얼거렸다. 그러자 로건이 쉿, 하고 작게 주의를 주며 일로델의 셔츠를 벗겼다. 단추가 풀리는 족족 말간 살갗이 밖으로 드러났다. 아래로 내리뜬 로건의 눈길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깨달은 순간, 일로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자, 잠깐만요, 잠깐….”
일로델이 손을 들어 로건을 막으려 할 때였다. 로건이 반쯤 열어젖힌 셔츠로 일로델의 팔을 구속하곤 고개를 숙였다. 발긋하게 노출된 젖꼭지가 뜨거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흣.”
일로델은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지만, 소용은 없었다. 로건의 혀가 젖꼭지를 빨고 가슴을 문지르는 소리가 적나라했기 때문이었다. 일로델이 입을 앙다물고 몸을 뒤틀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사이 단추가 하나 더 풀어지고, 나머지 한쪽 가슴도 밖으로 드러났다. 능숙한 손길이 판판한 가슴과 옆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흐으, 흣….”
일로델이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음란한 혀끝이 젖꼭지를 비빌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로건은 한쪽 가슴을 느릿하게 핥으며 손으로는 뱃가죽과 옆구리를 끊임없이 애무했다. 손이 가슴께로 올라오는 일은 적었음에도, 손끝에 젖꼭지가 걸릴 때마다 바짝 성을 냈다. 일로델은 암담하게 그 꼴을 내려다보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딱딱한 손끝과 이빨이 젖꼭지를 비틀고 깨물며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앗, 아…!”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춥춥거리며 가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바스락거리며 천이 스치는 소리와 로건의 것으로 보이는 낮은 숨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괴롭힘이 길어질수록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다가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기를 반복했다. 등 뒤에는 모릭스가 앉아 있었다. 그가 지금 상황을 알든 모르든…. 아마 모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모릭스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가슴을 훤히 내놓고 형에게 젖꼭지를 빨리는 장면을 보이고 싶겠는가. 일로델은 소리를 죽이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저도 모르게 등 뒤에 닿는 시트에 머리를 비볐다. 어느새 두 젖꼭지가 통통하게 부어올라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다리 사이가 저릿저릿했다.
“허리 조금만 들고…. 그래. 잘했어.”
로건이 낮게 속삭이며 젖꼭지를 음탕하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일로델의 바지를 벗기고 허리를 매만졌다. 일로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뱃가죽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본인은 참는다고 참고 있지만,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일로델은 연신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작은 동물을 연상하게 만드는 울음소리였다. 로건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꽤 좋아하는군. 그러고 보니 여길 만져 준 적은 드물었지. 나도 늘 여유가 없었어.”
로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일로델은 살짝 눈을 떴다. 주인만큼이나 아름다운 속눈썹 아래로 붉은 혀가 자신의 젖꼭지를 짓눌렀다. 그걸로도 모자라 빙빙 돌리고 할짝대며 추잡한 소리를 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척하고 싶지만, 형의 혀였다. 못하게 해야 했다. 일로델은 구속된 팔을 움직여 보려다 젖꼭지를 세게 깨물리고 “아!” 하고 소리 질렀다. 처음이 어렵다고, 그 뒤로는 신음이 줄줄 흘렀다.
“아응, 아, 형님, 그만. 흣, 그만해요….”
“어째서?”
“뒤에, 모, 모릭스가 있어요. 모릭스.”
“괜찮아. 가만히….”
로건이 일로델의 허리를 당겨 깊이 끌어안았다. 일로델의 가슴과 로건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닿고, 한계까지 부푼 돌기가 속절없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로델은 미약하게 꿈틀거리다 이내 좌석 헤드에 널브러졌다. 아이처럼 안겨 있기 때문일까? 불현듯 어릴 적 그에게 안겨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유 없이 허리 부근이 저릿거렸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아응, 으으응, 흐으….”
“으음.”
낮은 신음이 귀에 꽂히자 저릿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일로델은 발끝을 오므리고 배에 힘을 꾹 주었다. 양 젖꼭지가 혀와 손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자신에게 다정한 말을 걸어주던 혀와, 잡으라며 내밀어주던 커다란 손이었다. 젖꼭지가 끊임없이 돌려지는 동안 머릿속까지 빙빙 돌았다. 일로델은 백치처럼 넋을 빼고 입을 벌렸다.
“아, 아으우, 안 돼. 아, 아.”
“괜찮아.”
“아, 아니야. 앞에, 으응, 간지러워요. 그만해, 잠깐, 아아아….”
헛소리처럼 혼자 울먹거리던 일로델이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로건에게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의 동생이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로델은 실험의 부작용으로 완벽한 발기는 할 수 없게 됐지만, 사정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물론 사정도 완벽하진 않아서 절정이 여럿 반복되는 현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문젯거리는 아니었다. 일로델 본인의 생각은 많이 다르겠지만.
로건은 벌벌 떠는 일로델의 몸을 토닥이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매끈한 허리를 지나 둥근 살덩이가 만져지자 그는 그것을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검지 손끝이 다분히 목적을 가지고 엉덩이 사이를 비벼도 사정 중인 일로델에겐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로건은 여유롭게 기다려 주며 일로델의 엉덩이를 만지고 벌리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백미러 너머로 모릭스가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감추고 있지만, 그와 일로델이 정사를 나눌 땐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걸 보면 나름대로 동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역시 젖지 않는군.”
“죄송합니다. 이곳에는 물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서 구해 올까요.”
“아니, 됐어. 눈 감아.”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모릭스가 즉시 눈을 감았다. 로건은 앞 좌석 등받이에 일로델을 눕히다시피 받쳐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숨쉬기 편하도록 셔츠도 마저 벗겨 주고, 엉덩이에 걸쳐진 속옷도 허벅지로 끌어 내려 주었다. 그의 동생은 예민한 성격만큼 몸도 그러했다. 시간을 두고 진행하지 않으면 기절을 하거나 간혹 실례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개의치 않는 문제였으나, 성정이 까다로운 어린 동생에게는 평생의 수치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로델은 다정한 손길에 머리를 맡기며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엇나간 정신과 감각이 천천히 돌아왔다.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질금질금 사정 중인 성기와 정액으로 젖은 사타구니였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낄 틈도 없었다. 엉덩이 사이에 굵은 것이 비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뜨겁고 습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그것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입구를 살짝 벌렸다가 멀어지길 반복했다.
“아, 아, 안 돼….”
일로델은 자유로워진 손을 움직여 엉덩이 사이를 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바닥에 성기가 문질러졌다. 알파는 정액량이 많다고 했던가. 힘차게 박동하는 성기가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끈적한 액체를 잔뜩 묻혀 놓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지러워서 일로델은 손을 오므렸다.
“형님, 하지 마세요, 그, 그건 싫어요….”
로건이 “재밌는 소릴 하는군.” 하며 일로델의 가슴께를 보았다. 다른 것은 괜찮았냐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조롱당했다고 생각한 일로델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는 도망갈 곳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손으로는 로건의 성기를 밀어냈다.
“싫어, 무, 무서워요. 제발.”
“…….”
“도, 도와줘. 도와줘, 모릭스. 안 돼, 누가 좀….”
정액으로 흠뻑 젖은 손이 로건의 성기를 놓쳤다. 일로델은 겁에 질린 눈으로 로건을 보았다. 방금까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로건은 서늘한 표정이 되어 일로델의 허벅지를 쥐었다. 가차 없이 다리가 벌어지고, 굵은 귀두와 애널 입구가 쩍 소리를 내며 붙었다.
“아, 아….”
일로델은 어깨를 단단히 굳혔다가 바들바들 떨었다. 약 없이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굵은 성기가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괴로울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그만, 수, 숨, 못 쉬겠, 어요.”
“걱정 마. 숨 쉬고 있어.”
“아냐, 아니에요….”
겁먹은 일로델이 울먹이자 로건이 그의 입술을 머금고 농밀하게 빨아들였다. 일로델은 무심코 입술을 벌렸다가, 가까운 거리에서 로건과 시선을 마주하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젖꼭지를 빨릴 때 느꼈던 감각이 또다시 등골을 휩쓸었다. 어딘지 죄책감과 닮은 그것은, 한번 느낄 때마다 머리 한쪽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로델은 감각의 정체가 공포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흣, 안 돼, 아….”
거대한 성기가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일로델은 그를 밀어내 보려 배에 힘을 줬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입구가 익숙한 듯 오물거리며 성기를 삼켜댔기 때문이었다. 로건이 흘리는 정액으로 내벽이 잔뜩 젖어 들자 오물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입구와 내벽이 꿈틀꿈틀 움직일 때마다 배 속이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몸인데도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일로델이 신경질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무, 무서워, 도, 도와주세요. 형님, 형님….”
“곧 괜찮아질 거야. 입 맞춰 줄까?”
“으응, 안 돼, 아, 조, 조금만….”
로건이 낮게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일로델은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로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디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으로 입을 벌리자 혀가 능숙하게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끼리 얽히는 질척한 소리가 차 안을 길게 울리고, 낡은 좌석이 조금씩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로건이 하체를 추켜올리는 움직임에 맞춰 일로델의 몸이 앞 좌석을 밀어내는 소리였다.
“아, 아아, 아으응, 이상해.”
“좋은 거야, 일로델.”
“아, 형님, 좋아요. 아니, 이상, 아아아….”
삐걱거리는 소리가 점차 격렬해졌다. 매달릴 곳 없는 일로델은 로건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안에 침입한 성기를 빼내려는 건지, 더 삼키려는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꿈틀거리며 형의 움직임에 맞춰 갔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으로 어떻게든 저항해 보던 일로델은, 어느 순간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이은 자극으로 부풀어 오른 전립선이 거대한 성기에 짓눌린 탓이었다.
“하으, 아으, 안 돼, 우으으….”
일로델이 허벅지를 조이며 덜덜 떨자 로건이 성기를 묵직하게 쳐올렸다. 일로델은 한번 달아오르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기까지가 까다로울 뿐, 한번 길을 열어놓으면 상처 입힐 걱정 없이 마음껏 성기를 쑤셔 넣을 수 있었다. 로건은 일부러 전립선을 여러 번 짓이겨 팽팽하게 만들고는, 일로델의 몸을 잡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아! 아아아앗! 그만, 아!”
일로델이 비명을 지르며 로건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로건의 손에 허리를 잡힌 채였고 사방이 가로막혀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일로델의 거센 몸부림과 로건이 성기를 퍽퍽 쳐올리는 움직임이 온 좌석을 뒤흔들었다. 특히 모릭스가 앉은 운전석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렸다.
모릭스는 등을 난타하는 진동에도 눈을 감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약에 취해 로건에게 범해지는 일로델은 범죄 현장을 보는 것처럼 안타깝고 가여웠지만, 맨정신으로 로건에게 매달리는 일로델은 그마저도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난잡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로건이 오랜 시간 공들여 길들인 효과라는 건 알지만, 알면서도 불쑥 그런 느낌이 드는 건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아, 아아아! 배, 아파, 아파. 아으으응….”
“아파? 간지러워?”
“가, 간지러워요. 제, 제발, 천천히….”
일로델은 로건을 밀어내길 포기하고 힘없이 흔들렸다. 눈앞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려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기절하기 직전인 일로델의 상태를 감지한 로건이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속도를 늦췄다 뿐이지 허리를 쥔 손은 사납기 그지없어서 일로델이 끙끙거리며 울먹였다. 로건은 작게 혀를 차고는 허리 대신 일로델의 엉덩이를 쥐고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출발해.”
“어디로 갈까요.”
“호텔로.”
로건의 명령이 떨어지자 털털거리는 소음과 함께 엔진이 돌아갔다. 시동으로 인한 진동이 예민해진 점막을 후려치고, 일로델이 진저리를 치며 죽는소리를 냈다. 로건은 다정한 척 일로델의 얼굴에 입 맞추면서도 그의 엉덩이를 움직이는 손을 멈추진 않았다.
“으음…. 편한 곳으로 가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자. 그게 낫겠지?”
“형님, 힉, 히잇….”
“착하다. 내 동생.”
일로델은 뭉근하게 이어지는 자극에 괴로워하면서도 죽자 사자 로건에게 매달렸다. 언제나, 수없이 도움을 구걸해도 돌아오는 것은 형의 목소리뿐이었다. 자신을 수렁에 빠뜨린 사람이지만,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결국 형 말고는 없는 것이다. 일로델은 기운 없이 눈을 감고 애처로운 신음을 흘렸다. 차가 도심을 활보하고 다시 멈출 때까지 성기가 질척질척 드나드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
호텔에 도착한 이후로도 일로델은 로건에게 잡혀 정신없이 흔들렸다. 어둠이 깊어지는 동안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고 절정에 달했는지 로건에게 물어도 모를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형의 성기를 꽂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배 속 깊이 밀고 들어온 성기가 팽팽하게 부풀었다.
“흐윽, 아….”
“쉿, 힘 빼고….”
로건이 몸부림치는 일로델을 가볍게 제압하며 노팅 중인 성기를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일로델은 힘없이 팔을 휘젓다가 그만 포기하고 배를 감쌌다. 그대로 끙끙거리고 있는데, 로건이 그의 손을 밀어내고는 성기 모양으로 튀어나온 뱃가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많이 말랐군. 식사도 너무 자주 걸러.”
“흣, 아, 싫…. 무, 무서워….”
“뭐가 그렇게 무섭지?”
“싫어, 싫어….”
일로델이 어린아이처럼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럽게 패닉에 빠진 일로델을 안고 토닥이던 로건은, 거의 벗겨진 일로델의 셔츠 앞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발견했다. 무명골 열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로건은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다시 셔츠 앞주머니에 소중히 넣어 주었다.
“아이를 낳는 일은, 많이 힘들 거야. 차라리 오메가가 되는 게 나았겠지만…. 그래도 쉽지만은 않겠지. 아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려 줄까?”
“흐, 하, 하지 마요, 하지 마.”
“귀엽군.”
로건이 장난인 것처럼 짓궂게 웃었지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으면 죽는 법이었다. 일로델은 서럽게 빽빽 울며 로건을 밀어냈다. 그 바람에 배에 힘이 꽉 들어가자 한껏 부푼 로건의 성기가 사정없이 조여들었다. 로건은 긁힌 소리로 신음하며 일로델에게 입을 맞췄다. 여유로운 듯 보여도 그 역시 절정에 다다른 상태였다. 일로델은 영원히 느끼지 못할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한계까지 팽창한 성기에서 힘찬 사정이 시작되었다.
“하으, 아아아….”
지금까지 그렇게나 정액을 쏟아부었으면서, 양심도 없이 또 집어넣고 있었다. 일로델은 깊게 얽혀오는 혀에 입 안을 내주며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배 속이 출렁거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정이 길었다. 정액 한 방울까지 모조리 내보낸 로건은,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일로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동그랗게 열린 입구에서 하얀 액체가 주르륵 쏟아지자 일로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으로 그것을 틀어막았다.
“흐, 뭐야….”
“이리 와, 씻자.”
“시, 싫어….”
일로델이 로건을 피해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러자 일로델을 안아 올리려던 로건이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에 놓인 손이 놀란 듯 굳어 있었다. 기분을 건드렸나 싶어 일로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로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물렸다.
“그냥 씻기만 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저녁을 먹자.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괘, 괜찮아요.”
“…….”
“혼, 혼자 할 수 있어요. 혼자 할래요. 혼자 하게 해 주세요.”
로건은 말없이 일로델의 옆에 앉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무서운 협박을 던질까 두려웠지만, 로건은 어쩐지 싱겁게 웃고 말았다.
“혼자 있고 싶어?”
“…….”
“괜찮아. 얘기해 봐.”
일로델은 잠시 머뭇거리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 부근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자 로건이 그것을 가만히 넘겨주었다.
“저녁은.”
“알아서… 먹을게요.”
“그럴 리가. 룸서비스를 요청해 놓을 테니 챙겨 먹도록 해.”
“…….”
“잠도 제때 자고. 심심하면 밑층에 카지노가 있으니 놀러 가 봐. 네 이름을 대면 술이든 칩이든 내어줄 거야. 물론 술은 적당히 해야 할 거고….”
로건의 이야기가 길었다. 크고 따뜻한 손은 그만 멈추는 것 같다가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기길 반복했다. 또 무슨 짓을 당할까 긴장한 일로델은 로건의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머리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은 긴 시간이 지나고, 로건의 손이 아쉬운 듯 멀어져 갔다.
엉겁결에 쫓겨나는 처지가 된 로건은 천천히 일어나 벗어 두었던 옷을 입었다. 탄탄한 상체가 제복 안에 빈틈없이 감춰졌다. 조금 전까지 성기를 쳐올리며 거친 숨을 내쉬던 남자는, 완벽한 군인이자 형제가 되어 일로델을 내려다보았다.
“며칠이고 편하게 쉬다 돌아와. 이곳의 열쇠는 네게만 건네주라고 해놨으니, 나도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어.”
“…….”
“차와 기사는 호텔 앞에 대기해 두지. 불편하지 않도록 하인도 보낼 테니…. 일로델.”
로건이 손을 뻗자 일로델이 또다시 몸을 옹송그렸다. 몹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그 행동은 건드리면 죽은 듯 움츠리는 신경초를 떠올리게 했다. 로건은 일로델을 건드리는 대신 시트를 들어 머리끝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시트 채로 살며시 끌어안았다.
“나도 못 할 짓을 하는군.”
“…….”
“알고 있어도 제어가 안 돼. 정말로….”
시트 사이로 삐져나온 이마에 로건의 입술이 닿았다. 일로델은 흠칫 놀라서 시트 속으로 머리통을 쑥 집어넣었다.
“네가 잘 버텨 줬으면 좋겠어. 너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야.”
그것은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일로델은 숨소리도 죽이고 시트 속에서 눈만 깜빡였다. 로건 역시 일로델을 끌어안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일로델을 놓아주고는 조용히 멀어져갔다. 이윽고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일로델은 조심스럽게 시트 밖으로 얼굴을 꺼냈다.
두려움과 분노, 좌절감과 수치스러움 같은 감정에 혼란까지 더해져 일로델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소용돌이쳤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