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2/18)

2.

조용하던 황궁 복도에 다급한 걸음 소리가 울렸다. 천장에 묶인 채 노래하던 새가 깜짝 놀라 날개를 퍼덕였다. 바닥에 떨어진 깃털 하나를 시종이 옷자락으로 훔치며 물러났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기둥 아래를 지키고 서 있던 경비병들의 절도 어린 경례가 이어졌다. 셰본은 정면을 바라보며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를 확인한 시종장이 “록퍼스 대공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하고 고하며 알현실 문을 열었다.

셰본은 우렁찬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금으로 조각된 독수리상이 중앙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와 눈싸움을 하듯 늠름하게 걷던 셰본이 순간 멈칫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알현실 내부에는 황제 외에도 귀난 재상과 뮬리 공작이 함께였다. 셰본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자 뮬리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알현실을 나섰다. 때마침 나가는 참에 엇갈리게 된 모양새였다.

“황제 폐하.”

셰본이 공손하게 예를 차리자 황제가 짐짓 놀라며 크게 환대했다.

“이게 누구인가. 나의 친우가 왔군. 고개를 들라.”

“황공합니다, 폐하.”

그가 알현을 신청한 것은 오늘 새벽이었다. 당연히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인데, 셰본은 참으로 객쩍은 인사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황제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황제의 팔을 장식한 화려한 금팔찌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실톤 해안의 해적들을 몰아냈다는 보고를 들었지. 참으로 눈부신 활약이야.”

“황송합니다.”

“다시 뱃길이 열렸으니 세금을 걷는 데는 문제가 없겠어. 안 그런가, 재상?”

백발이 성성한 귀난 재상이 인자하게 웃으며 황제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들은 곧 대공령에서 들여올 코끼리 상아와 사향에 매길 세금에 대해 심도 높은 논의를 시작했다. 셰본은 따분한 희극을 감상하듯 그들을 구경하다가, 노쇠한 귀난 재상이 가래를 뱉어내는 사이 잽싸게 말을 꺼냈다.

“폐하. 야만인 우두머리에 대한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물론 받았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명만 하시면 제가.”

황제가 말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저었다. 또다시 팔찌가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셰본은 티 나지 않게 그것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누이인 헤롯을 시기한 황제는 종종 그녀의 물건을 강탈해 오곤 했다. 헤롯의 입장에선 귀찮아서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황제는 그녀의 물건을 빼앗아 오는 행위에서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차고 있는 팔찌 역시 과거 헤롯의 물건이었다.

짐의 첩실에게 이것을 채우고 밤을 보낸 적이 있었지. 은밀히 흘러나온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셰본은 인내심이 강했다. 쉴 새 없이 짤랑대는 소리를 평온하게 흘려듣던 그는, 그러나 다음 순간 미간을 구겨야 했다.

“뮬리 공작에게 이송 임무를 맡겼네. 머지않아 공작과 그의 기사들이 그대의 저택을 방문하게 될 거야.”

“폐하.”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야. 뮬리 공작이 직접 청해 왔네. 그는 얼마 전 사교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했겠지. 야만인 우두머리를 황궁까지 끌고 오면, 아무렴 오를리에 백작 부인과의 스캔들이 문제겠는가.”

황제가 즐겁다는 듯 껄껄 웃고 재상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오를리에 백작 부인이라면 아흔이 넘은 노인일 것인데…. 그런 그녀와 세련된 중년인 공작 사이에 무슨 스캔들이 있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셰본은 또다시 잡담이 시작되려는 분위기를 서둘러 가로막았다.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야만인 우두머리를 황궁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습니다.”

“글쎄. 슬슬 야만인을 뿌리 뽑을 때도 되었지. 언제까지 살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결정된 일이네. 그것보다 나의 조카는 능력이 대단하군.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들이다니, 제국 역사상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이 아닌가?”

젊었을 적에는 무식하고 황포한 들소 같더니, 이제는 능구렁이가 다 됐다. 티베인 녀석은 이렇게 늙으면 안 되는데. 어딘지 모르게 황제와 닮은 구석이 많은 셋째 아들을 떠올리며 셰본이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이루지 않았던 업적이지요, 폐하. 저희가 야만인을 잡느라 바쁘게 돌아다녀야 폐하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안 놓이네. 내 누이와 이혼을 해 주어야겠어.”

“애가 셋인데 어떻게 이혼을 합니까. 절대 안 됩니다.”

매우 진실한 대꾸가 돌아오자 시종일관 평온하던 황제의 미간에 슬쩍 금이 갔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던 찰나, 귀난 재상이 타이밍 좋게 가래 섞인 기침을 했다. 황제가 거슬린다는 듯 노려보자 귀난 재상이 “신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연회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부러 잡아들인 것이 아니다.”

“가문을 이을 후계자라곤 하나 로건은 아직 일개 장교 신분입니다. 진실을 알고 했을 리가 없지요.”

“알면서 벌인 짓이라면? 감히 짐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녀석은 황제 폐하의 권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순간 셰본의 말문이 막혔다. 한평생 황제의 자리만 바라보고 살아온 황제로서는 권위에 관심 없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셰본은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로건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어릴 때부터 속을 알 수 없었던 그의 장남은 커가면서 전략가의 면모를 보였다. 로건이 군에서 개발한 무기와 기술들도 그 대부분이 전쟁에 필요한 전략적 도구였다. 그렇다고 로건이 전쟁에 뜻이 있다거나, 재능을 꽃피워 한자리하고 싶어 하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가끔가다 로건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계급씩 높아져 있곤 했지만, 녀석이 가진 지위는 능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러면 무엇에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셰본은 이리저리 색다른 정답을 찾아보다가 포기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의 첫아들은 둘째 아들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것도 가족 간의 따스한 관심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쪽으로.

뭐든 술술 대답할 기세던 셰본이 괴로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자 황제가 즐겁게 눈을 빛냈다.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폐하. 하지만 들으셔도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짐의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아무렴…….

셰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걸 참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 녀석은, 로건은 제 동생 말고는 관심이 없습니다.”

“동생? 둘째 아이 말인가?”

“어찌 아셨습니까?”

“내 누이도 그 아이에게 관심이 많지. 그러고 보니 많이 컸겠어. 아직도 몸이 약한가?”

황제의 물음에 셰본이 진지한 얼굴로 긍정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알파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외엔 건강상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귀족 사회 안에서는 몹시 연약한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어려서는 걷는 것도 힘겨워 어머니와 형에게 안겨 다니더니, 커서는 군대에서 이름뿐인 계급조차도 달기 힘들 정도로 허약하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 집 안에 연구소를 만들어 준 것이 파다하게 퍼져서, 일로델은 어느새 호사가들 사이에서 붓꽃처럼 여리고 가련한 도련님이 되어 있었다.

본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셰본은 소문이 꽤 달가웠다. 건강을 핑계로 일로델을 향한 황제의 관심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 역시도 무척이나 반겼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베타로 태어난 둘째 아이가 얼마나 연약하고 안쓰러운지 일장 연설을 하고 다녔다. 모르긴 몰라도, 진심이 팔 할쯤 섞인 그 허풍이 소문에 더욱 불을 지핀 것이리라.

“올해도 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기는 어렵겠군. 배를 타기 어려워한다지?”

“그렇습니다.”

“가족들 모두 걱정이 많겠어. 이제 뱃길도 열렸으니, 몸에 좋은 환약을 지어서 보내주라 하겠네.”

대공가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아는 황제가 신난 어조로 말했다. 그 단순한 사고 구조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헤롯이 열등감에 휩싸인 동생을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다면 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셰본은 선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아직 감사를 받기는 이르지. 선물은 그뿐이 아니네.”

“그렇습니까?”

“나의 조카가 역사적인 성과를 이뤘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게 됐지. 작게나마 성의를 준비하였으니 꼭 받아주었으면 좋겠군.”

셰본이 마음 가는 대로 하시라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제국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야만인들이 설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권력 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것이다. 예로부터 황제는 드넓은 땅을 가진 지배자였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모든 지역을 통치하기는 불가능했다. 이에 귀족들에게 영토를 나누고 동, 서, 북을 통틀어 황제의 지배하에 두었다.

문제는 바다 건너의 남쪽 땅이었다. 남쪽의 땅은 많은 자원과 넓은 면적을 가진 대륙이었지만, 반 이상이 사막이었고 그 어딘가에 야만인 주둔지가 있었다. 그들의 존재에 골머리를 앓던 초대 황제는 당시 오른팔 격인 대공에게 남대륙을 하사하고 모든 권리를 위임했다. 무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대공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황폐한 남쪽 땅으로 들어가 변경백 역할을 자처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현 황제가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공령의 주민들이 황제가 아닌 오랜 기간 함께 터전을 일궈온 대공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베타로 태어나 알파인 헤롯과 경쟁해야 했던 그는 대공가에서 알파만 태어난다는 것도 매우 불쾌해했다. 셰본과 헤롯이 혼인을 하자 황제는 알파 가문에 제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으며, 심지어는 첫 자식인 황녀가 알파로 태어나자 갖다 버리라며 노발대발하였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했다.

셰본은 그런 황제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신혼 생활도 마다하고 야만인 소탕에 전념했다. 나아가 야만인들이 완벽하게 소탕되지 않도록 개체 수를 조절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겉으로나마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로건이 난데없이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들이는 바람에 황제의 의심병이 도질 위기에 처했다. 거기다 야만인 소탕에 대한 기대로 대공 가문의 인기마저 드높아지고 있으니 황제의 속이 어떻겠는가.

너무 잘난 자식을 두어도 문제이지.

셰본이 진심 어린 한탄을 하며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알현실 밖에서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하는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곧이어 넝쿨이 조각된 화려한 문이 열리고 성난 발걸음이 이어졌다. 말을 타던 도중에 달려왔는지 승마복을 입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던 여인은 셰본을 발견하곤 바위처럼 표정을 굳혔다. 분노와 당황이 반쯤 섞인 그 시선을 마주하며 셰본은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일로델은 벤치에 앉아 손에 쥔 것을 뿌렸다. 곡류와 유채씨가 고루 섞인 새 모이였다. 이윽고 오색방울새 두 마리가 다가와 조그만 부리로 바닥을 쪼았다. 발끝까지 다가와 종종걸음을 치는 것을 보니 먹이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저택 안은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았다. 하인들에 더해,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 가둔 뒤로 군인들이 저택에 주둔하면서 물샐틈없는 경계를 이어 가고 있는 탓이었다. 일로델은 그나마 조용한 곳을 찾다가 정원 한구석에 눌러앉았다. 산울타리 안에 연못처럼 꾸며진 분수대가 있는 장소였다. 조모인 선 대공비의 개인 공간으로 쓰였다는 이곳은 정해진 시간 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 무척 고요하고 한가로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로 이틀째던가.

일로델은 문득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어제 아침, 동이 트자 몰려온 군인 수십 명이 티베인을 끌고 갔다. 군내 치안을 담당하는 군인들이었다. 티베인은 끌려가면서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가만두지 않겠다’라며 날뛰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치안 군인은 대공인 아버지의 친위대이자 직속 부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티베인에게는 무단결근의 벌로 72시간의 구금 명령이 내려졌다. 다른 사람들은 예외 없이 30일 동안 구금된다고 하니, 그래도 아들이라고 많이 봐준 셈이다.

72시간도, 30일도 부족하다.

그런 인간 말종은 영원히 가둬버렸어야 했는데.

일로델이 웃음기를 거두며 얼굴을 굳혔을 때였다. 근처에서 모이를 먹던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새 모이를 밟지 않기 위해 빙 둘러 다가온 하인이 일로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로건 님께서 찾으십니다.”

일로델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하인을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현관에서 커다란 짐을 옮기던 하인이 “죄송합니다.” 하며 길을 비켰다.

어머니 헤롯의 방문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탓일까. 저택 안팎으로 하인들이 분주했다. 어머니는 집에 자주 오는 것이 아님에도 복도에 있는 장식품의 개수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호되게 경을 쳤다. 하우스 키퍼가 없는 저택은 하인들도 해이해지기 마련인데, 드윈 남작 부인이 은퇴하고 수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일벌레들만 가득한 걸 보면 어머니의 불호령이 얼마나 무서운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서재 앞에 다다르자 하인이 뒷걸음질로 조용히 물러났다. 일로델은 습관처럼 노크를 위해 손을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무례할 정도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찾으셨다고요.”

책상 너머에 로건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만년필을 걸치고 무심하게 서류를 살피는 그를 일로델이 새삼스레 쳐다봤다. 군의 제복을 입고 저택에서 업무를 보는 형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집중에서 깨어나듯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든 로건이 일로델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왔군. 편한 곳에 앉아.”

일로델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문이 바로 옆에 있어서 심적으로 무척 편한 장소였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도망쳐야지. 일로델은 일부러 닫지 않고 열어놓은 문과 로건을 번갈아 보았다. 당당하게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 마음과는 달리 바짝 얼어붙은 어깨는 작은 소리만 나도 움찔 튀어 오를 듯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같이 들고 싶어도 시간이 안 되는군. 저택에 있어도 얼굴 한 번 마주하기 힘들 줄은 몰랐어.”

로건이 싱겁게 웃으며 만년필을 가죽 케이스 안에 보관했다. 일로델은 물 흐르듯 움직이는 우아한 손끝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어색하게 눈을 내렸다. 서신을 보내던 중이었을까. 책상 위에는 봉합되지 않은 봉투와 사슴 가죽의 피지가 나란히 쌓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로건이 보란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원정을 다녀온 사이 밀린 서신이 너무 많아. 일일이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는 것도 일이야.”

그렇기도 하겠지. 매해 연하장 한 번 받는 것이 다인 자신과는 달리, 로건은 업무용 서신부터 정치적인 사교 편지까지 하루만 걸러도 산처럼 쌓일 것이었다. 거기에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서신은 남에게 맡기기도 어려울 터. 내심 고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로건이 불쑥 말했다.

“그렇지. 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어때?”

“네?”

“답장을 보낼 만한 서신을 선별해 주면 돼.”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일로델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잠깐만요, 저는.”

“직접 답장을 보내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그렇게 해. 발신인은 내 이름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네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 있어야 할 텐데, 큰일이군.”

로건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서신 더미를 툭 쳤다. 그 작은 소리에 놀란 일로델이 급히 로건을 불렀다.

“형님.”

로건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일로델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형님이라니.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개자식이라고 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참 한가로운 호칭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의 형은 사람 다루는 데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 역시 수없이 말려들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도 무언가 속궁리가 있을 것이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며 일로델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네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지?”

너무나도 당연한 듯 흘러나온 말에 일로델의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표정의 일로델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감 있는 조용한 움직임이 시선을 가로챘다.

“네게 부담을 주고 싶은 건 아니야. 귀찮으면 거절해.”

부드러운 미소와 귀가 가려울 정도로 낮고 다정한 어조. 마치 과거 그의 ‘형님’으로 돌아온 것 같은 태도였다. 누가 넘어갈 줄 알고. 일로델은 작게 주먹을 움켜쥐며 제게로 다가오는 로건을 노려보았다.

“서신, 전부 버리면 어쩌시려고요.”

“상관없어.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면 엉뚱한 답장을 보내도 돼. 모두 네 자유야, 일로델.”

소파 앞 테이블에 고급 피지가 산처럼 쌓였다. 일로델은 찜찜한 마음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군인으로서의 업무 서신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귀족으로서의 사교 편지도 그에 비견될 정도로 중했다. 특히 대공가 사람들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만큼 사교 모임에 드나드는 일이 적기 때문에, 온갖 잡담으로 치장된 정치적인 문서가 안부 서신이랍시고 날아드는 일이 잦았다. 오죽하면 신분 빼고는 빈털터리인 자신에게도 연하장이 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꿍꿍이속이 있다기엔 로건에게 득 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맞은편 소파에 로건이 앉는 동안에도 일로델은 서신 더미를 쏘아보았다. 폭발물을 앞둔 것처럼 꺼림칙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가죽 피지를 살짝 들춰 보았다. 지면을 가득 채운 동그랗고 귀여운 글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대령님께.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날 황궁의 연못에서 저를 보셨을 거예요. 당신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물에 빠진 순간 연못보다 푸른 눈동자가 저를 향했으니까요. 당신의 눈길을 한 번 더 받을 수 있다면 저는 연못에 빠져 죽어도 좋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밤이 되면 옷을 벗고….’ 일로델은 화들짝 놀라서 서신을 넘겼다.

‘나의 밤 취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명하니까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를 만난 뒤로 완전히 바뀌었어요.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정부들도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생각이 있으면 부디 그대의 발을 핥게….’ 서신을 넘기는 손이 빨라졌다. ‘벌써 32번째 서신이에요. 어떻게 답장 한 번 없죠? 이번에도 답장이 없다면 당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소문낼 겁니다. 제발 나를 그런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말아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가관인 서신들의 상태에 일로델의 표정이 썩어갔다. 이 무례하고 천박한 내용들은 뭐란 말인가! 어쩌면 형은 걸출한 능력의 대가로 악성 서신에 시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귀족이라는 놈들이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다니? 욕을 해도 제가 하고, 화를 내도 제가 낸다고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열중해서 서신을 넘기는 일로델을 로건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뒤늦게 시선을 눈치챈 일로델이 즐거운 듯 웃는 로건을 마주하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면 그렇지. 애초에 중요한 서신을 자신에게 맡길 리가 없었다. 놀림당했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가죽 피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로건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궐련을 빼 물었다.

“보다시피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일 거야. 진지하게 임할 필요는 없으니 무료할 때 읽어 봐.”

“그냥 버리지 그래요?”

“가끔 쓸 만한 내용이 있기도 해. 곤란한 일이지.”

과연, 그래서 솎아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일로델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잠깐,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서둘러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때였다. 돌연 이어진 로건의 말에 일로델이 입을 다물었다.

“거리에 집을 하나 구해 달라는 얘길 했다던데.”

진짜로 올 것이 왔다. 그것도 허를 찌르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로델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에 쓰려는 거지?”

“집을 나가려는 건 아니에요.”

“물론 그래야지.”

일로델은 눈을 들어 로건을 노려보았다. 로건이 불이 붙지 않은 궐련을 물고 엷게 웃었다. 불온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었다. 일로델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티베인이면 모를까, 로건은 눈싸움하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아는 사람을 그곳에 살게 하고 싶어요.”

“누구를?”

“정말로,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반신반의하며 묻는 일로델의 말에 로건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술 사이에서 궐련을 빼냈다.

“나라고 네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야. 음…. 그러고 싶지만 자제하고 있지.”

“자제한다고요?”

“얘기했던 것 같은데.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방법은 많아. 알고, 통제하고…. 그러다 보면 너를 가두고 싶어지겠지.”

“…….”

“네가 견딜 만한 일은 아닐 거야. 나는 그런 상황이 오는 걸 바라지 않아.”

간담이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형은 이미 자신의 귀에 위치를 추적하는 도구를 달았다. 그 말대로 당장은 참고 있다 해도, 언젠가 들여다볼 심산이 아니라면 이런 물건을 달아놓을 이유가 없었다. 형이 저택을 떠나 군에 들어갔을 때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친동생을 향한 정욕을 억누르고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기억에도 없는 시작 역시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났다.

일로델은 금이 간 와인병을 기억 속에서 끌어냈다. 아카데미 입학 선물로 로건에게 받은 와인이었다. 5년 정도 숙성하면 최상의 맛을 낸다는 설명을 듣고 장식장에 올려두었는데, 하필이면 티베인이 그 와인병을 들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살짝 깨지고 만 것이다. 일로델은 아쉬운 대로 금이 간 병을 천으로 감싸두었다. 하지만 틈 사이로 야금야금 새어 나온 붉은 액체는 병을 감싼 천을 적시고, 장식장 바닥을 물들이고, 급기야 값비싼 러그까지 집어삼켰다.

로건의 ‘자제하고 있다’라는 말은 금이 간 와인병을 닮았다.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고, 그러는 사이 점점 붉은 반경을 넓혀가는…….

“누구에게 집을 주고 싶은 거지? 아카데미 친구인가?”

생각에 빠져있던 일로델이 움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다른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친구는 아니에요.”

“그러면?”

“예전에, 잠시 고용되었던 가정교사 선생님이에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로건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로델은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티베인과 선생님 사이의 일은 자신의 부탁으로 로건의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아마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보고되지 않고 처리된 일이었을 것이다. 로건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저택에서 선생님을 내보냈다. 자신 역시 거기서 모든 일이 끝났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자에게 집을 구할 돈이 없을 것 같진 않았는데. 위로금이 부족했나 보군.”

위로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갈 곳이 없어 보였다.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무는 일로델을 로건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자가 네게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협박이라거나….”

“절대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든 일로델이 숨을 죽였다. 어느덧 웃음기가 가신 로건이 서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당한 이유를 듣지 못한다면 선생님에게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다. 아니, 짐작만이 아닐 것이다. 고위 귀족을 해한 평민은 야만인으로 취급해 그들과 같은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형은 실제로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로델은 할 말을 찾으며 헤매다 어깨를 늘어뜨렸다.

“선생님에게, 아이가 생겼었대요. 그런데, 티베인이 강제로 없애게 해서….”

더듬더듬 속삭이던 일로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

‘오셀 선생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른 순간, 일로델은 티베인의 팔을 뿌리쳤다. 좁은 골목에 탁, 하는 거친 소리가 울리자 경비병들이 놀라서 물러났다. 불똥이 튀는 것을 원치 않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그 탓에 부축을 잃은 오셀이 자리에서 휘청였다. 일로델은 서둘러 다가가 쓰러지려는 그를 붙잡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일로델….’

촛불처럼 꺼져가는 목소리와 잘게 떨리고 있는 가는 몸. 가까이서 본 그는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티베인에게 걷어차였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가득 멍과 흉터가 가득한 데다 목을 조른 흔적까지 있었다. 일로델은 경악에 차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런…. 왜….’

그러나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방금까지 티베인이 선생님을 구석에 몰고 신나게 발길질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목가에 남은 선명한 흔적을 응시하던 일로델이 고개를 돌렸다. 티베인은 밀쳐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어딘지 놀란 듯했던 그는 일로델의 시선을 받고는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뭐야. 왜 또 나를 그렇게 봐?’

‘네가 그런 거지?’

‘나? 뭘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를 듣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일로델은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경멸을 입에 담았다.

‘금수만도 못한 자식.’

갑작스러운 비난에 티베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일로델은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엉거주춤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경비병에게 손짓했다.

‘저 자식을 격리해. 죄 없는 민간인을 폭행한 위험한 인물이야.’

‘예? 하지만….’

경비병들이 난처한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귀족으로서 죄 없는 민간인에게 죄를 붙여 주기는 얼마나 쉬운가. 일로델은 혀를 차며 말을 바꿨다.

‘티베인은 군인 신분에 부대를 이탈하고 거리에서 난동을 부렸어. 귀족의 품위를 훼손한 건 물론이고 록퍼스가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든 죗값을 받아야 해. 집에 데려가서 처분을 기다리게 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귀족 가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경비병들이 혼비백산해서 구경꾼들을 해산시켰다. 방금까지 망나니 같은 두 형제가 사이좋게 사고를 치고 물러가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조용히 처리하면 되는 일이라 여겼는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어딘지 동생처럼 보이는 일로델이 사실은 형이라는 사실도 당황스러웠다. 록퍼스가의 차남과 삼남은 쌍둥이지만, 차남은 베타로 태어난 데다 군인이 되지도 못했단 이야기는 유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그들은 더욱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설령 티베인 대위가 혼자 벌인 일이라 해도 처리 방법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군 내부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게 아닌 이상, 병사인 그들로서는 장교인 티베인을 구속할 권한이 없었다. 그와 비슷하거나 혹은 그보다 높은 계급의 상사 명령이라면 모를까, 일로델은 그저 귀족 신분인 민간인이 아니던가.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난색이 가득한 분위기를 읽은 일로델이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그때 티베인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심기가 단단히 꼬였는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엉뚱한 데 떼써서 되겠어? 저 녀석들은 내 아랫놈들이지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뭐라고?’

‘네 보잘것없는 명령은 집에서나 먹힌단 얘기야. 밖으로 나온 순간 명령이 아니라 생떼일 뿐이지. 이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순간 일로델은 묘한 충격에 빠졌다. 보잘것없는 명령.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 놓았던 자존심을 푹 찌르는 말이었다. 거기까진, 좋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건 스스로 인정하는 바이니 어떻게든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무시하는 소리를 입에 담은 사람이 다름 아닌 티베인이라는 것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분노이기도 하고 배신감 같기도 한 그것은 머리로 통제할 수 없는 내면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 그런.’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어 갈 때였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을 따뜻한 체온이 감쌌다.

‘나 때문에 동생과 싸우지 마, 일로델.’

‘선생님….’

어깨 뒤로 넘어온 손이 진정하라며 등을 토닥였다. 일로델은 울컥해서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부축하고 있을 셈이었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의지해도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벼랑 끝에 매달리듯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기는 일로델을 티베인이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옆을 향했다. 단발머리의 가녀린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안광이 번뜩이는 눈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티베인은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일로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둘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일로델이 진저리를 치며 팔을 흔들었다.

‘하지 마! 나를 건들지 마!’

‘시끄러워, 이리 와.’

‘싫어, 싫어!’

일로델은 발광하듯 몸부림치며 티베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선 경비병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이 자식을 잡아들여!’

‘그, 그건….’

‘이건 내 명령이 아냐! 로건 형의 명령이야! 듣지 않으면 형에게 말해서 너희들 모두 가만두지 않겠어!’

끔찍한 말이었다. 토하고 싶을 정도로 역겹고 무능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로델은 통렬한 자기혐오와 대상을 구분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눈앞이 검게 물드는 경험을 했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땐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일로델은 분노의 여운이 남아 턱을 떨다가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빨리, 데리고 가.’

경비병 둘이 머뭇거리며 티베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차마 손은 대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티베인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몸을 물렸다. 표정이 완벽히 사라진 얼굴은 언젠가 바다 사막에서 보았던 것처럼 기이하고 소름이 끼쳤다.

‘형에게 말해서 가만두지 않겠다?’

‘…….’

‘그런 소리가 자연스럽게도 나오는군. 그렇게 비위가 좋을 줄은 몰랐어.’

티베인이 비웃었다. 형용할 수 없는 짓을 당하고도 급한 순간에 형을 떠올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비웃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 보라는 것처럼 침묵이 이어졌지만, 일로델은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좋아. 마음대로 해.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어디 마음대로 해봐.’

‘…….’

‘차 보낼 테니까 집에 제때 들어와. 늦으면 알지? 저런 뭣도 아닌 새끼, 찾아내서 사막에 파묻는 건 일도 아니야.’

저열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에겐 공포와도 같았을 것이다. 일로델은 두려운 듯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오셀을 감싸고 티베인이 떠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뒤 세 사람의 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저와 선생님은 마치 발소리에 밟혀 죽을까 도망치지 못하고 움츠린 개구리 같았다. 아니, 딱 그 짝이었다.

‘일로델, 괜찮니?’

일로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들게 만들어야 했다. 방금 그것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고 생각해야 했다. 야만인 자식이 건넨 말 따위에 상처받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했다. 일로델은 한동안 오셀이 건네는 걱정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속으로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 뒤로는 선생님이 묵는 여관에 들러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저택에서 쫓겨난 선생님은 형의 소개로 무역상에 취직했지만, 그것도 곧 그만두게 되었다. 임신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오심으로 의원을 찾은 선생님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 티베인과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 당연히 티베인의 아이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몇 날 며칠 저택 근처를 서성이다 힘겹게 티베인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잡혀서 억지로 약을 먹어야 했어. 그렇게까지 잔인한 아이인 걸 알았다면 절대 만나러 가지 않았을 거야….’

티베인에게 들었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그 자식은 원래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놈이다. 제까짓 게 자신을 무시해 봐야 어쩔 것이며, 문명인으로서 야만인에게 세심함을 바라는 게 오히려 멍청한 일이었다. 형의 명령을 내세운 것도 전략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았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티베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 준 것뿐이다.

그러나 뒤늦게 선생님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사실은 날이 가면 갈수록 뇌리를 떠돌았다. 티베인이 선생님에게 약을 먹였다. 그것은 자신도 잘 아는 약이었다. 티베인은 제 아이를 임신한 선생님에게 강제로 낙태약을 먹였다. 남이 저질렀다고 해도 놀라운데, 자신의 가족이. 그것도 동생이라는 놈이 천인공노할 잡종 짓을 저지른 것이다.

또다시 분노가 떠오른 일로델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콱 구겼다.

“일로델?”

회의를 진행하던 로건이 일로델을 불렀다. 그러자 집무실 안에 기립해 있던 군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에 쏠렸다. 원치 않는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일로델이 머쓱해서 손에 쥔 것을 쭉쭉 폈다. 어제 선생님과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얼떨결에 도맡게 된 서신이었다.

“피곤하면 쉬면서 해. 네가 좋아하는 과일을 가져오라고 할까?”

“아, 아니요….”

일로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중한 회의 중에 이게 무슨 대화란 말인가.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아서 사슴 가죽 피지에 고개를 박았다. 로건은 재차 권하지 않고 회의를 이어 나갔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오늘 아침, 일로델은 식사를 마치고 곧장 서신 골라내기 업무를 시작했다. 귀찮으면 갖다 버려도 된다고 했지만,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간혹 쓸모 있는 내용이 섞여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일로델은 쓸데없는 책임감을 발휘해 집무실 구석에 자리 잡고 내리 서신을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냥 다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말이 사교 편지이지, 반은 주정꾼들의 헛소리고 반은 안부 인사였다. 아무리 봐도 형이라고 이걸 다 읽고 쓸모 있는 걸 찾아내진 않을 듯했다. 하지만 서신을 보는 일을 멈추진 않았다. 형은 선생님에게 집을 구해 주기로 약속하고 그전까진 안전한 호텔 방을 내주기로 했다. 순간 꼭대기 층이 생각나 가슴이 덜컥했지만, 그곳은 아니라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보답을 해야 했다. 누군가 시킨 게 아니더라도,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일로델은 서신에서 눈을 떼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건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말을 이어 가고, 그 양쪽으로 군인들이 엄숙하게 정렬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회의는 야만인에게서 나포한 배의 설계도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들어봐야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껴 있으니 어쩐지 자신도 어엿한 사회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이상한 내용의 서신을 골라내는 작업이라 해도, 무언가 집안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묘한 보람이 생기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형제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지금처럼 작은 일도 소소하게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자신의 가족은 너무나도 바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고, 그 틈에서 한가한 소리를 꺼내 봐야 저만 한심해질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집안의 기강을 위해 간혹 들르는 어머니와 다정한 형이 있어서 버텼는데, 그 기다림마저 반쪽만 남기고 산산조각이 났다.

굳이 평온을 깬 형제들이 원망스러웠다. 미웠고, 불안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전에도 형제들은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하긴커녕,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나 계속 아무 일도 없지는 않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원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난마처럼 얽혔다. 그 탓인지 머리 한쪽이 찌르듯이 아팠다. 일로델이 서신을 내려두고 이마를 주무를 때였다. 절도 있는 노크가 울리고 모릭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대령님.”

급한 듯 걸음을 옮기던 모릭스가 문 근처에 앉아 있는 일로델을 보고 멈칫했다. 왜 거기 있냐는 표정이었다. 호텔에서의 일로 형에게 밉보이고 운전만 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지 집무실에 드나드는 동안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다. 일로델은 반가움을 담아 모릭스를 보았다. 그러자 모릭스가 곰 같은 덩치를 움칠하더니 로건의 눈치를 보았다.

“뭐지?”

“죄송합니다. 대령님 앞으로 급편이 도착했습니다.”

책상으로 다가간 모릭스가 정중하게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질긴 소가죽 위에 금박의 장식이 유난히 고급스러운 주머니였다. 또 서신인가 싶었던 일로델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 좀 하고 올게요.”

그 말에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걱정스럽게 찌푸린 표정이 예전 같으면 끔뻑 넘어갈 정도로 다정다감했다.

“그만 가서 쉬어도 돼.”

“상황 봐서요.”

“내가 괜한 일을 시켰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 자체는 생각 외로 마음에 들었다. 그저….

일로델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로건을 마주하다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전에는 잊지 않고 모릭스에게 눈인사도 했다. 일로델이 밖으로 나가자 집무실 안에 깊은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숨 쉬는 법도 따로 훈련받는 군인들에게선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로건이 입을 열었다.

“모릭스.”

“네.”

“모릭스라.”

“…….”

“그렇군.”

모릭스는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살짝 무너뜨렸다. 그는 잠시 아득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는 사이 로건이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누구지?”

“헤롯 님입니다. 저택에 도착하시기 전 인편을 통해 급히 보내오셨습니다.”

로건이 가죽 주머니를 열고 안에 든 서신을 꺼내 들었다. 모릭스는 긴장을 감추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서신의 내용을 전해 들었다. 벌써 황도 안에서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속을 읽을 수 없었던 그의 상사가 글을 읽고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로건은 말없이 서신을 읽었다. 내용은 짧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긴 이야기를 집중해서 읽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흘렀다. 로건은 화를 내지도, 재밌다는 듯 웃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주머니에 서신을 갈무리하고 “회의를 계속하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

열차가 내뿜는 매연만큼이나 하늘이 흐렸다. 일로델은 하인이 비를 염려하며 건넨 우산을 들고 정원을 누볐다. 해가 뜨지 않아도 제시간에 찾아온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그 뒤로도 정처 없이 걸었다. 누가 보면 대공가의 차남이 실성했다고 여길 만큼 넋 나간 걸음걸이였다.

실제로 일로델은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만 멈추고 싶은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머릿속을 떠돌았다. 두통은 가실 기미가 없고 속은 벌레를 삼킨 듯 메슥거렸다. 갑작스레 도진 신경증을 잠재우기 위해선 약이 필요했지만, 당장은 달여놓은 약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생각에 넋을 맡기고 귀신처럼 정원을 떠돌았다.

일로델은 정원사들이 애지중지 관리한 잔디를 실컷 헤집어 놓고, 연못에 발을 헛디디기 직전에서야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지나가던 커다란 개가 그를 보고 왕왕 짖었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충성스러운 신호였으나, 두통 환자에겐 고막을 후려치는 소음일 뿐이었다. 일로델이 미간을 찌푸리며 성질을 냈다.

“시끄럽다. 이쪽으로 오지 마.”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하인이 서둘러 개의 목줄을 잡아끌었다.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이번에는 딱, 딱, 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일로델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가위를 들고 가지를 잘라내던 정원사가 뒤늦게 시선을 알아채고 허겁지겁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죄송합니다. 일로델 님께서 아래 계신 줄 모르고 그만….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젊은 정원사가 일로델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일로델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작게 혀를 찼다. 주변이 조용하길 원한다면 처음부터 한산한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정신을 놓고 걷다 보니 어째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길목에 와 있었다. 괜한 곳에 화풀이할 것도 없다며 일로델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만 일어나.”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해고만은 부디….”

한적한 곳을 찾아 이동하려던 일로델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돌렸다. 정원사가 여전히 이마를 땅에 받 아가며 사정하고 있었다. 일어나라는 말을 못 들은 건가? 재차 명령하려던 일로델이 불현듯 기억을 떠올렸다. 정원사들은 자신이 지나가면 작업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누구의 명령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굳이 애써서 알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일로델은 애걸복걸하는 정원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내가 됐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각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원사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일로델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존재감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일로델 역시 대공 가문의 일원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무언이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저택에서는 차남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는 조언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해고를 예감한 정원사가 눈을 꾹 감았을 때였다. 일로델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 가,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지치기?”

“예, 예. 나무의 모양을 내고 열매를 많이 얻기 위한 작업입니다.”

일로델이 눈썹을 모으며 나무를 올려다봤다. 정원사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덕분일까. 푸른 잎사귀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자리 잡은 것이, 과연 잘 다듬어진 나무였다. 무슨 열매를 맺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보다는 훨씬 생산적이고 모양도 멋진 것 같았다. 갑자기 울적한 얼굴을 하는 대공가의 차남을 정원사가 연신 힐긋거렸다. 무언가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운 눈치였다.

바로 그때, 저택에서 분주함이 느껴지더니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정원사는 물론이고 일로델도 깜짝 놀랐다. 하인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구령에 맞춰 일렬로 쭉 늘어서더니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난데없이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일로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머지않아 멀리서부터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유선형의 몸체를 가진 미끈한 차가 줄줄이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 옆으로는 형형한 기세의 군인들이 열을 맞춰 달렸다. 헤롯을 호위하는 차량의 행렬이었다.

어째 요란하다 했지.

일로델은 반가움 이전에 질린 기분이 되어 입을 떡 벌렸다. 그런 일로델의 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검은 수지가 발린 창문이 내려가고 그 사이로 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트에 등을 묻은 그녀는 못마땅한 듯 물었다.

“지금 거기서 뭘 하는 거지?”

“아, 그게.”

어쩌다 보니. 하고 웅얼대며 주변을 둘러보던 일로델이 어색한 얼굴을 했다. 뜻하지 않게 하인들 사이에 끼어서 대열을 망치고 있었다. 의례를 중요시하는 어머니에겐 몹시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로델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자 헤롯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가는 거냐? 이리 타.”

“네, 네.”

군인 하나가 반대쪽 차 문을 열고, 일로델이 얼떨결에 차에 올랐다. 반대편에 앉은 헤롯이 언짢은 눈으로 일로델을 노려보았다.

“왜 하인들 틈에서 너를 발견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뭘 하고 있었지?”

“죄송해요. 산책을 좀….”

“변명할 것 없어. 나를 맞이하러 나왔겠지. 하지만 네가 나를 반길 곳은 아랫것들 사이가 아니라 저택 앞이야. 기억해 두거라.”

어쩐지 꾸지람의 초점이 이상했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로델은 “네.” 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헤롯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은 저택에 있겠지?”

“네.”

“소식이 제때 도착했는지 모르겠군. 로건에게서 이야기가 없더냐?”

일로델의 고개가 갸우뚱 넘어갔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에 헤롯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그녀는 곧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이 저택과 멀지 않아 도착이 빨랐던 탓이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차가 조금의 흔들림 없이 멈춰 섰다.

일로델과 헤롯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흐렸던 하늘이 부쩍 어두워져 있었다. 도착 소식을 듣고 현관 앞에서 대기하던 로건이 헤롯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일로델은 어정쩡하게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모자지간이라기엔 삭막한 인사였지만, 헤롯은 ‘보았지?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것처럼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궂어진 날씨를 불평하며 수행원들을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헤롯이 지나갈 때까지 문을 잡고 있던 로건이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라는 말도, 가서 쉬라는 말도 없었다. 어머니가 있어도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

일로델은 복잡한 얼굴로 로건을 마주하다가 그를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섰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일로델의 등을 좇았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그 너머로 하인들이 분주하게 흩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툭툭 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모래바람을 잠재우는 우기의 시작이었다.

*

이른 시간부터 저택 곳곳에 불빛이 반짝였다. 하인들은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커튼의 모양을 바로잡는 등 저마다 바쁘게 서재 안을 돌아다녔다. 언젠가 일로델이 뒹굴거렸던 소파 상석에 보드라운 모피가 깔리고, 책이 잔뜩 쌓였던 테이블 위에는 북부에서 건너온 푸른색의 러너가 장식되었다. 마지막으로 티 트레이가 준비되자 서재 안으로 헤롯과 로건, 그리고 일로델이 뒤따라 들어왔다.

하인들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일로델은 그런 분위기가 피곤했다. 흡족하게 웃으며 모피 위에 앉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잠자코 자리에 앉으려다 주저했다. 평소처럼 로건을 따라 그의 옆자리로 와버린 것이다. 일로델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자 헤롯이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러고 있지? 불편한 거라도 있는 거냐?”

“…….”

불편한 게 없진 않았지만, 있다고 하면 죄 없는 하인들에게 불벼락이 몰아칠 것이었다. 일로델이 죽상을 하고 로건의 옆에 앉았다. 옆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했다.

“오늘따라 기운이 없구나. 안색도 안 좋고.”

“그냥, 날씨 때문에 그런가 봐요.”

일로델은 표정을 감추려 찻잔을 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티포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차를 따랐다. 서늘한 향기가 기분 좋게 감돌았다. 두통에 효과가 좋은 페퍼민트 차는 최근 일로델이 자주 마시는 차였다.

“머리가 아픈 모양입니다. 아침부터 자주 이마를 찌푸리더군요.”

찰나의 기분 전환도 잠시. 로건의 폭로로 일로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헤롯이 염려스러운 듯 일로델을 들여다보았다.

“그걸 그냥 두고 있어? 주치의를 불러야 할 것 아니야.”

“괜, 괜찮아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주치의라니. 저를 보며 혀를 차는 벤의 얼굴을 떠올린 일로델이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마시고 케이크도 깨작였다. 그러나 이미 걱정에 휩싸인 헤롯의 눈에 찰 리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도 이상해. 몸이 안 좋아서 아카데미에 나가지 않은 거냐?”

“아니에요. 그건, 그냥 나가기 싫어서….”

“나가기 싫다고?”

왜 매번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걸까. 예전에는 답을 알지 못했지만, 이젠 알 것도 같다. 일로델이 가라앉은 눈으로 로건을 곁눈질했다.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로건이 옅게 미소 지었다. 로건은 일로델의 앞으로 제 케이크가 담긴 그릇을 밀어 주었다. 먹고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일로델은 작게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가기 싫다라. 집안에서는 네 편의를 위해 아카데미에 매년 기부를 하고 있어. 그런데도 너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있단 말이야?”

헤롯의 표정이 딱딱했다. 그녀는 성의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황궁도 밀어버릴 사람이었다. 일로델은 바짝 긴장해서 대답했다.

“불편한 건 없어요.”

“그런데 왜 나가기 싫다는 거지? 제대로 얘기를 해.”

“그냥, 연구실도 생겼고, 안 나가도 될 것 같아서요. 귀찮기도 하고,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요.”

바람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일로델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카데미에도 다시 나가고 싶었다. 전처럼 매일 아침 티베인과 함께 등교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 일상은 과거가 되었고 그나마도 거짓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문, 가족들과 분리된 오롯이 자신만의 장소라고 생각한 곳에 형과 관련된 오르본이 있었고, 동기들과 교수도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뿐일까. 차라리 나오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그 모든 걸 헤롯에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일로델은 더듬더듬 거짓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길 원했다. 집에서 하는 것도 없으니 공부라도 하라며 호통을 듣고 억지로라도 나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헤롯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나가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마음대로 해.”

그렇겠지. 어차피 자신에게 큰 기대도 없을 테니 이런 반응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일로델은 씁쓸함을 감추며 화려한 무늬의 러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북부의 섬세한 기술로 완성된 러너는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자신은 이 사치스러운 장식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잠시 차를 마시는 동안 대화가 단절되었다. 찻잔을 비우며 집에 오게 된 이유를 떠올린 헤롯이 로건을 바라보았다.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들였다는 게 사실이냐?”

“예.”

“어떻게 생겼지?”

뜻밖의 질문이었다. 물론 궁금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첫 질문으로는 적절치 않은 느낌이었다. 일로델이 의아한 듯 고개를 올리자 헤롯이 피식 웃으며 “아니다.” 하고 손을 저었다.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폐하께서도 흡족해하고 계신다.”

“감사합니다.”

“네 공을 인정해 금광 소유권과 더불어 준장 계급을 내린다고 하니 알고 있거라.”

로건이 황제의 명을 옮긴 헤롯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헤롯이 빙긋 웃으며 로건의 어깨를 짚었다. 예를 주고받는 의례적인 행동이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 본 적 없는 일로델에겐 무척 부러운 풍경이었다. 그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시선을 떨궜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선 아주 신중하고, 변화무쌍한 분이시지. 당분간 눈 밖에 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낸 서신은 받았느냐?”

로건이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헤롯이 주머니 안에 든 서신을 펼쳐 읽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굳은 표정으로 문자 하나하나를 읽어나간 헤롯이 로건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떻지?”

“받아들여야 할 이유도 명목도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우울함의 늪에서 헤매던 일로델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 분위기가 심각하게 변했다. 저 주머니는 아까 집무실에서 나오기 전에 본 것 같은데,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로델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훑는 찰나, 그를 바라보던 헤롯과 시선이 맞았다.

“일로델은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이야기를 안 한 모양이지?”

“바로 전 서신이 도착해서 전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군. 내게도 소식이 늦게 들어왔어. 일부러 출발하고 나서 전하라 했겠지, 맹랑한 놈.”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과도 관련된 일인 것일까. 무슨 일인지 물으려 입을 열었지만, 로건이 한발 빨랐다.

“소문을 이유로 들어 거절하면 됩니다.”

“율도라스는 진심일 거야. 그 정도로 물러날 거면 나에게까지 급사를 보내진 않았겠지.”

“황실과 대공 가문의 관계가 이 이상 공고해지길 원치 않는 귀족들은 많습니다. 패를 보이면 알아서 미끼를 물 겁니다.”

헤롯이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라는 건 황궁에 떠도는 일로델의 건강 상태에 관한 이야기이고, 미끼를 문다는 건 그런 일로델의 꼬투리를 잡아 반대하고 나설 세력을 말했다. 생각만으로도 불쾌한 상황을 과연 참아 넘길 수 있을까.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일로델을 힐긋거렸다. 연신 저를 거쳐 가는 시선에 어리둥절하던 일로델이 대화가 끊긴 틈을 타 헤롯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황녀의 혼인 상대로 네 이름이 거론되었어. 정식 칙명이 내려온 건 아니지만 그쪽에선 이미 소문이 다 퍼졌다는군. 이야기를 흘려서 반응을 살펴볼 셈이겠지.”

일로델이 이상한 소릴 들었다는 듯 머리를 기울였다. 그리고 제가 들은 것이 맞는지 천천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혼인이요? 제가요?”

“그래.”

일로델이 들고 있던 포크를 툭 떨어뜨렸다. 포크 끝에 묻은 크림이 러너를 더럽히자 하인들이 조용히 닦아내고 새로운 포크를 가져다 놓았다. 완전히 얼이 나간 모습에 헤롯이 “아직도 저리 미숙한 녀석을 어딜 보내. 안 되지, 안 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녀는 평생 끼고 살 생각도 있었다. 일로델은 넋이 빠져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혼인? 황녀 전하와?”

“걱정할 것 없어. 이 정도 술수도 못 막으면 가문의 이름을 내려놓아야지. 염려하지 말고 계속 너 하고 싶은 일이나 하려무나.”

많이 놀란 듯한 일로델을 우려한 헤롯이 드물게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일로델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엉킨 실타래가 갑작스럽게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얽힌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해답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해답이 분명했다.

일로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헤롯과 로건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일로델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저는, 혼인. 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요, 어머니.”

“일로델?”

“혼인, 저, 할래요. 어머니.”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사위가 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잘난 형제들이어도 부마가 될 사람에게 손을 뻗진 못할 것이었다. 위대한 발견을 이뤄낸 학자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시야가 이상할 정도로 넓어졌다. 머리 위에 태양이 떠 있어도 이렇게 눈부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탁, 하고 작은 소리가 끼어들었다. 로건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였다. 일로델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숨을 삼켰다. 헤롯 역시 정신을 차리고 얼떨떨하게 물었다.

“혼인을 하고 싶다고? 네가?”

“…….”

일로델은 입을 다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옆에 누가 있는지를 잊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차를 따르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일로델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곁눈질을 했다. 로건의 찻잔에 담긴 홍차가 핏물처럼 섬뜩해 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혼인을 하고 싶다니? 설마 저 녀석이 황녀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헤롯이 답을 구하듯 바라본 상대는 로건이었다. 한때 그녀는 로건의 잔인한 성정을 누구보다 경계했지만, 지금은 일로델에 관한 것 모두를 로건에게 먼저 상담했다. 일로델이 제 형을 따르는 만큼 로건도 일로델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작은 것 하나 물어도 모르는 게 없었다. 자주 집에 얼굴을 비출 수 없는 헤롯에게 로건은 누구보다도 좋은 정보원이었다.

로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본 적 없는 얘기군요.”

“그렇겠지. 둘이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이지 않아. 엉뚱하기는.”

헤롯이 혀를 쯧쯧 차며 일로델을 흘겼다.

“너도 사내아이라고 혼인에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쉽게 논할 문제가 아니야. 아직도 저렇게 철이 없어서.”

로건이 찻잔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무언의 동의였다. 일로델은 로건의 여유로운 옆얼굴을 멍하니 보다 눈을 돌렸다. 한심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헤롯이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로건을 돌아보는 헤롯의 얼굴이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뮬리 공작이 야만인의 수송 임무를 맡았다는 것도 심상치 않구나. 어쩌면 황제의 의심을 부추겼을지도 모르겠어. 황제와 대공 가문이 멀어지길 누구보다 고대하는 자이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군. 골치 아픈 일이야.”

일로델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느새 혼인 이야기는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뒤로도 헤롯과 로건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썰물에 쓸려간 것처럼 희미해지더니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모든 것을 되돌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렬하게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씨가 한풀 꺾였다. 헤롯은 한결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건도 따라 일어나고, 그 기세에 일로델도 꿈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서재 안이 처음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기분 나쁜 날씨야. 이런 날에 타는 열차는 끔찍하지. 기름 냄새가 아주 독해.”

“쉬었다 가시죠. 하인들이 방을 준비해 놓았을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묵고 가야겠어.”

헤롯이 몹시 공교롭게 되었다는 듯 투덜대며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방으로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로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강한 악력에 일로델은 급소라도 잡힌 것처럼 힘없이 주저앉았다.

자리에 서서 헤롯을 배웅하는 로건의 얼굴에 서늘한 그늘이 내려와 있었다. 일로델은 소파에 처박힌 채 얼음처럼 굳었다. 언제인가, 형이 진심으로 화를 내는 순간을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등을 돌리고 하인들을 통솔하는 헤롯을 외쳐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헤롯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있을 생각이냐? 여전히 제 형하고만 붙어 있으려 하는군.”

“…….”

“네 형은 며칠 더 저택에 머무를 텐데, 잠깐 정도는 떨어져 있어도 되지 않니?”

“…….”

“이 어미에게도 시간을 내달란 얘기야.”

헤롯이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는 일로델을 닦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로델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헤롯을 따라갔다. 뒤통수에 시선이 꽂혔다. 일로델은 목덜미의 솜털이 삐죽 설 정도로 오싹함을 느꼈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지금 잡히면 무슨 짓을 당해도 당할 것 같았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뻣뻣하게 걷는 일로델을 헤롯이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너 오늘 이상하구나. 몸이 많이 안 좋은 게 아니냐?”

“아뇨.”

“아니기는? 얼굴이 창백하잖아. 안 되겠다, 의사를 불러.”

“어머니.”

일로델이 헤롯의 말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하얗게 탈색된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애처로웠다. 명백하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헤롯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해.”

“여기서는, 말씀 못 드려요.”

일로델이 사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눈짓했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집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헤롯은 탐색하듯 일로델을 훑어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하인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났다. 헤롯과 일로델을 방까지 안내한 상급 하인과 헤롯의 뒤를 묵묵히 따르던 수행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먼저 방으로 들어간 헤롯은 굳게 닫힌 벨벳 커튼을 열어젖혔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 표면을 타고 흘렀다. 물처럼 번진 정원에서는 군인들이 비를 맞아가며 삼엄한 경비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이제 얘기해 봐.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방 안에 들어오고도 일로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헤롯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장성한 아들들 가운데 유독 일로델이 어리게 느껴지는 데에는 이런 고집스러운 모습 또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너도 이제는 성인이 훌쩍 넘은 나이야. 작게나마 바깥 생활도 하고 있고, 내가 모르는 일도 많이 겪었겠지. 화내지 않을 테니 얘기해 봐.”

그 말에 일로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화를 내요? 저한테요?”

“사고를 친 것이 아니냐? 네 형이 아니라 내게 얘기할 정도면 제법 큰일일 테니 각오는 해두마. 물론 네가 오르코 백작의 막내아들처럼 이상한 약을 하거나 방탕한 짓을 벌였을 거란 생각은 안 해.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너를 믿는다.”

헤롯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희뜩희뜩 빛났다. 만약 조금이라도 방탕한 짓을 벌였다면 무시무시한 호통이 내리칠 기세였다. 이쯤 되면 사고를 치지 않아서 다행인 건지, 사고를 당해서 다행인 건지 알 수 없었다.

“…….”

일로델은 억울함과 서러움에 휩싸여 입을 움찔거렸다. 형제들이 벌인 해괴한 짓거리를 폭로하고 싶어서 손가락 끝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이야기를 했을 때 닥쳐올 여파가 두려웠다. 자존심도 상했다. 형에게 신뢰 어린 시선을 보내던 어머니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가렸다.

과연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믿어 준다면 어떻게 될 것이고,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무엇 하나 짐작되지 않았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딱히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다. 조용히 해결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낙태약도 손에 넣었고 피어스도 교체하지 않았던가. 혼인이라는 천금 같은 기회도 내려왔다. 지금은 이걸 움켜쥐어야 했다. 짧은 시간 치열하게 고민하던 일로델은 근질거리는 손가락 끝을 꾹 말아 쥐었다.

“어머니.”

“그래.”

“저, 황녀 전하와 혼인하고 싶어요.”

“혼인?”

헤롯은 난봉꾼 같은 놈들과 금쪽같은 둘째 아들을 대입해 보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그 얘기를 꺼내려고 저렇게 긴장했단 말인가. 역시 아직도 어린애라는 생각을 하며 헤롯이 고개를 내저었다.

“황실과의 혼인은 간단히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무슨 바람이 들어서 자꾸 혼인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떼를 써도 들어줄 수 없어.”

그것보다 와서 어깨나 주물러 봐라. 그렇게 말하려던 헤롯이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일로델이 서러움에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갓난아기 때도 보여준 적 없었던 모습에 그녀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일로델?”

“떼, 써도. 들어주신 적 없잖아요.”

“뭐?”

“혼인 상대가 황녀 전하면, 형님도 나쁜 짓은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혼인. 시켜 주세요.”

일로델은 소매로 눈물을 북북 닦았다. 티베인 자식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떼를 쓰고 있었다. 죽고 싶을 만큼 한심했지만,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한 걸음이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것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닦는 일로델을 헤롯이 아연하게 보았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일로델에게 다가가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로건이 나쁜 짓을 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대로 얘기하지 못해? 설마 로건이 또.”

“어머니.”

일로델이 작게 헤롯을 불렀다. 목소리가 꺼질 듯이 연약했다. 지친 표정의 일로델을 본 헤롯이 아차 싶어 추궁을 멈췄다. 그녀는 불길처럼 솟아나는 의문을 눌러 참으며 방 안을 빙빙 맴돌았다. 불안한 시선이 그녀가 남긴 궤적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 바닥을 향했다.

헤롯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어물대는 둘째 아들이 미치도록 답답했지만, 동시에 죄책감을 느꼈다. 일로델은 순한 아이였지만 그녀가 떠날 때는 언제나 떼를 썼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 남편인 셰본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다는 건 그녀와 셰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얼떨결에 세상에 나와 애정을 갈구하던 일로델과는 관련이 없었다. 늘 참고 견디길 강요하던 아이에게 이제 와 반대로 굴라는 것도 얼마나 이기적인 요구인가. 헤롯은 충동적으로 결심을 굳히고 걸음을 멈췄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생각해 보마.”

일로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정말이요?”

“그래.”

눈물로 젖은 얼굴에 미소가 반짝 떠올랐다. 일로델은 벌써 새신랑이 된 것처럼 “앞으로 정말 잘 살게요.” 하고 떠들어 댔다. 헤롯은 적당히 받아주며 고개를 틀었다. 창문에 비치는 말간 얼굴을 살피는 그녀의 시선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일로델은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헤롯의 말 상대를 했다. 황궁 안의 스캔들과 귀족들의 가십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일로델이 모르는 세계인 만큼 꽤 흥미진진했다. 밤이 깊어 밖으로 나왔을 땐 막막하고 울적했던 기분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잠시 별채로 갈지 고민하던 그는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일로델이 향한 곳은 1층에 있는 서재였다. 그곳은 헤롯의 방과 멀지 않고 널찍한 소파도 있어서 하룻밤 지내기엔 무리가 없었다. 일로델은 지나가던 하인에게 블랭킷을 가져오게 한 뒤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낮에만 해도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던 서재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약하게 불씨가 남아 타오르는 벽난로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일로델은 다음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아까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위협적인 기운을 지닌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형님….”

일로델이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던 로건이 반갑게 웃었다.

“왔군. 책을 가지러 온 모양이지?”

호랑이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온 격이었다. 일로델은 대답 없이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왜 이곳에 형이 있는 거지. 설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서재에 온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알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일로델에게 로건이 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갈색 액체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어때. 한 잔 줄까?”

“…….”

뭐가 들었을 줄 알고. 한가하게 술이나 받아먹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일로델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 혼자였는지 서재 안은 텅 비어 온기조차 없었고 테이블에는 양주병 두어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가로막는 사람은 없고 문은 열려 있다. 나가서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일로델은 조금 안심하며 천천히 문가로 물러났다.

“와서 앉아, 일로델.”

“방해해서 죄송해요. 저는….”

“강제로 앉는 게 좋아?”

무시하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 일로델은 문 앞에서 잡혀 와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는 상상을 해 봤다. 잠시 주저하다가 출구 바로 앞을 등지고 있는 소파에 앉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며 문밖을 살폈다. 램프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왜 그렇게 겁을 먹지? 내가 널 해칠 일은 없어.”

“없다니…. 저한테 그런, 짓을 했잖아요.”

“무슨 짓?”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 일로델은 입술을 깨물며 로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로건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평화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의견이 다르군.”

“평화적인 방법이라고요?”

“지금까지 아무도 죽지 않았고 네 정신도 무사해. 팔다리가 잘리지도 않았고 침대에 묶여서 생활하지도 않아. 충분히 평화적인 것 아닌가?”

일로델이 귀를 의심하며 로건을 보았다. 방금까지 부드러운 혈기가 돌았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형님?”

“놀라지 마, 일로델. 궁금해하니까 알려준 거야. 네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로건은 제가 말하고도 우습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일로델은 오싹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웃던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즐거움과 사나움, 그리고 희미한 희열이 뒤섞인 푸른 눈동자가 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앉아.”

“취하신 것 같아요.”

“취했다고 하면 네 마음이 편해져? 그럼 마음대로 생각해.”

일로델은 굳은 몸을 움직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시야가 빙글 돌더니 다시 소파에 처박혔다. 진한 술 내음이 끼쳤다.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로건이 몸을 겹치듯 소파에 체중을 실었다.

“…….”

일로델은 습격당한 사슴처럼 바짝 얼어붙어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다정한 말만 쏟아냈던 입술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던 입매가 지금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매번… 틀린 답을 고르는군.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지만, 가끔은 이해가 안 돼.”

“혀, 형님….”

“혼인이 하고 싶다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자 로건의 시선이 목덜미를 향했다. 사나운 눈에서 물어 뜯어버리고 싶다는 속내가 읽혔다. 일로델은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겁먹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얘기했던 것 같은데. 네 결혼을 결정한 부모님도 무사하진 못할 거라고.”

“그런 짓, 하면. 형님도 무사하지 못해요.”

“그럴까?”

당연했다. 어머니는 황제의 누이이고 아버지는 군의 실권을 거머쥔 대공이었다. 두 사람을 해치는 행위는 반란인 동시에 쿠데타였다. 겨우 동생과 섹스나 하겠다고 나라를 뒤엎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허풍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로델은 떨리는 손으로 로건의 소매를 붙잡았다.

“제발….”

“벌써 겁먹으면 안 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잖아.”

“왜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러고 싶으니까.”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고 입술이 겹쳐졌다. 깊숙이 밀고 들어온 혀가 바짝 얼어붙은 입 안을 농밀하게 문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로델이 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억센 손에 머리를 잡혀 입술을 길게 빨렸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음란한 소음이 혀와 혀 사이를 오갔다.

“으응….”

일로델은 흐느끼듯 신음했다. 꺾인 고개가 아팠다. 도망칠 곳 없이 끌려 나오는 혀가 간지러웠다. 가볍게 내리뜬 채 자신을 응시하는 두 눈에서 노골적인 집착이 엿보였다. 등골이 저릿할 만큼 오싹한 광경이었다.

로건은 물러나려다가도 격렬하게 입 안을 빨아올렸다. 당장 누군가 들이닥쳐도 절대 멈추지 않을 듯했다. 두려움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인 일로델이 어깨를 떨며 울먹였다. 뒷머리를 쥐고 있던 손이 달래는 것처럼 귓가를 매만졌다. 입술이 아쉬운 듯 천천히 물러났다.

“너는 티베인을 수캐니 야만인이니 부르지만, 그 녀석은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지. 나야말로 짐승에 가까워. 아주 지저분한…….”

로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꿈틀거리던 일로델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로건이 자조 섞인 투로 웃고 있었다. 오랜 시간 숨죽여 웃던 그는 한순간 조용해지더니 평소의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일로델의 머리도 놓고 소파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면서도, 동생을 탐한 입술을 맛보듯 혀를 외설스럽게 움직였다.

“안색이 나쁘군. 아직까진 참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형, 형님….”

“생각해 보니 네가 정장한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됐지. 배가 불러온 몸으로 턱시도를 입고 쩔쩔매는 모습도 제법 귀여울 거야.”

로건이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일견 짓궂은 미소로 보였지만, 그것은 조소였다. 일로델은 로건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곱씹다가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커튼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가 경악 어린 침묵을 갈랐다. 그때 정갈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더니 열린 문가에 하인이 와 섰다.

“일로델 님, 명령하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일로델 님?”

“…….”

일로델은 주술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놀란 듯 뒷걸음질 치는 하인에게서 블랭킷을 뺏어 들고 복도를 내달렸다. 바깥은 눈앞이 어두울 정도로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뒤에서 우산을 들고 뛰쳐나온 하인들이 그를 소리쳐 불렀지만, 일로델은 무시하고 정원 사이를 뛰었다. 밝은 불빛을 따라 달리자 그곳은 별채였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위해 하인 마노가 램프를 밝혀놓은 것이었다.

허겁지겁 별채 문을 열고 들어간 일로델이 침실로 뛰어들었다. 다급한 손이 베개 밑을 훑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길쭉한 상자가 손에 잡혔다. 일로델은 정신없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뿌리가 무성하게 뻗은 독초 두 개가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

일로델은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자를 움켜쥔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지금 먹어버릴까. 해일 같은 충동이 불쑥 일었지만 힘겹게 억눌렀다. 정말로 임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설령 낙태에 성공했다 쳐도 형제들이 또다시 손을 뻗쳐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낙태라니.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샜다. 지독하리만치 낯설고 이상한 어감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지. 머릿속을 떠도는 장면이 끔찍했다. 오셀 선생님에게 억지로 약을 먹였다는 티베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이건 강제로 당한 일이 아닌가.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끝없이 농락해대는 형제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로델은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젖은 몸에서 흘러나온 물기가 마룻바닥을 적셨다. 어둠이 잦아들고 새벽달이 뜰 때까지 그는 웅크린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일로델?”

매끄러운 대리석 탁자 위에 유리잔이 놓였다. 멍하니 현실과 꿈결 사이를 유랑하던 일로델이 퍼뜩 깨어났다. 오셀이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안 좋구나. 피곤한 것 아니니?”

일로델이 고개를 털며 마른세수를 했다.

“잠을 좀 설쳤어요.”

“저런. 어쩌다가?”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별일 아니에요.”

오셀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덧붙였다. 일로델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잔에 든 것을 마셨다. 값싼 찻잎의 향이 불쾌하게 입 안을 뒤덮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큼한 맛이었지만, 덕분에 녹아 흘러내리는 것 같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동이 트자마자 일로델은 호위들을 닦달해 오셀이 머무는 곳을 찾았다. 허름한 여관으로 향하리란 예상과는 달리 오셀은 소리 소문 없이 호텔로 옮겨와 있었다. 그의 거처에 대한 부탁을 꺼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실행이 되었을 줄이야.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행동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고마워. 이렇게 좋은 곳에 머물게 해 줘서.”

“아니에요.”

“혹시 곤란한 건 아니지? 여기 굉장히 비쌀 것 같은데….”

“전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에게 호텔 방을 제공해 준 사람은 형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곤란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로건에 대해 깊게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일로델은 이른 아침부터 오셀을 찾아온 이유를 상기하고 대화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오셀이 아직 멍 자국이 남은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

“의원에는 가 보셨어요?”

“응. 아무렇지 않대.”

그럴 리가. 일로델은 오셀의 얼굴을 장식한 붉고 푸른 자국들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맞은 자리가 첫날보다 훨씬 부어올라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어디서 돌팔이라도 만나고 온 게 아닌가 의심하는 일로델에게 오셀이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늘 있는 일인걸.”

“늘 있는 일이라고요?”

“만나던 사람이 손버릇이 안 좋았거든.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일로델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선생님에게 만나던 사람이라니. 그도 사람이니 애인 정도야 있었겠지만, 마치 부모님의 사적인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일로델은 괜히 민망해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오셀의 목을 보았다. 흰 피부에 목을 졸린 흔적이 저주처럼 남아 있었다. 순간 요전 날의 일이 떠오르며 티베인의 뻔뻔한 태도도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일로델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목에 그건….”

“아, 이것도 가끔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마.”

“네?”

막 티베인의 욕을 쏟아내려던 일로델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티베인이 한 짓 아니에요?”

“뭐? 아니야.”

오셀이 생각도 못 했다는 것처럼 크게 웃어서 일로델은 멋쩍어졌다. 틀림없이 티베인의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목을 조르고 손찌검을 해대는 야만인이 또 있다는 말이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티베인 자식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선생님을 짐승처럼 구석에 몰아놓고 발길질을 하지 않았던가. 걷어차는 움직임에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늦게 발견했다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죄송해요. 동생이…. 원래 그런 녀석이긴 한데, 밖에선 좀 자제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나 봐요. 그, 그러니까….”

사죄에 익숙지 않은 일로델이 허둥지둥 말을 헤맸다. 그러는 사이 오셀이 천천히 웃음을 멈췄다. 그는 조용히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더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괜찮다, 아니다, 그 어떤 대꾸도 돌아오지 않는 침묵이 일로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대체 왜 그 자식의 만행을 자신이 대신하여 사과해야 하는가. 억울함이 불쑥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티베인이 먼저 죄를 깨닫고 잘못을 빌 놈도 아니었다. 형인 자신에게도 뻔뻔하게 구는데 선생님에겐 오죽할까? 그저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어 오셀의 마음이 풀리길 바랄 뿐이었다.

“그 아이, 여전하더라.”

“네….”

“요즘에도 많이 다투니?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싸웠잖아. 대부분 티베인이 먼저 시비를 걸었지만.”

“네? 그렇죠, 뭐.”

얼떨떨한 대꾸에 오셀이 즐거운 듯 킥킥 웃었다. 일로델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폭행의 피해자였다. 티베인이란 못된 야수가 벌인 짓이었다. 그 자식의 비난이 폭포처럼 쏟아지면 못 이긴 척 맞장구칠 생각이었는데, 반응이 예상과는 달리 싱거웠다.

“부러워.”

“네?”

“아, 나는 형제가 없거든. 그래서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부러워.”

“부러워요?”

“그럼. 영원히 헤어질 일이 없잖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시간이 지나도 너희는 변함없이 사이가 좋겠지?”

아니요. 일로델은 반박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자신의 속사정이 어떻든 형제가 없는 선생님에겐 부럽게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티베인 자식을 질타하는 분위기가 아닌 건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일로델은 어떻게든 이해해 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런 얘기 물어도 될지 모르겠는데….”

“뭐, 뭔데요?”

“혹시, 티베인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니?”

“새로운 사람이요?”

“응. 집안에서 붙여준 약혼 상대라거나….”

일로델이 느릿느릿 눈을 끔뻑였다. 당최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이러면 안 되지만, 다시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나도 참 뻔뻔하지?”

“아, 아니요.”

일로델은 제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방금 무슨 얘길 했더라. 티베인의 새로운 사람? 티베인의 약혼 상대? 티베인의 옛날 생각? 도통 따라가기 벅찬 대화였지만, 따라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냅다 후려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직 정신이 덜 깬 거야. 일로델이 시큼털털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아기를 생각하면 티베인이 원망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실 내 잘못이 더 커. 그렇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

“나를 보자마자 화낸 것도 이해해. 혼자 많이 힘들었겠지. 안쓰럽게도….”

일로델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찻물을 억누르며 오셀을 보았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여린 인상의 선생님은 어딘지 아련한 눈으로 자신을 마주했다. 그 얼굴에서 미안함을 비롯한 옅은 기대감을 읽은 순간, 일로델은 긴 탄식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

일로델은 호위에게 도시 안을 운전하게 하고 차 안에서 짧은 숙면을 취했다. 밤을 꼬박 새워서 몹시 피곤했지만, 잠자리가 불편한 탓에 길게 잠들 수는 없었다. 점심나절 집에 들어온 일로델은 헤롯이 기다리고 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여느 때보다 화려했다. 붉게 만개한 생화가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평소보다 광나게 손질된 식기가 일로델의 앞에 놓였다. 커다란 샹들리에는 오늘따라 눈부시게 밝았고 상석에 있는 벽에는 새로운 그림이 걸렸다. 이윽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커튼이 걷히자 음식을 든 하인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있을 때마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황궁에서조차 매번 드는 식사에 이렇게까지 격식을 차리진 않을 듯했다. 일로델은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하인들을 조종하는 헤롯을 지켜보았다.

“그림을 한 달 넘게 바꾸지 않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내가 없으면 너라도 명령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해요.”

“역시 하우스 키퍼가 필요하겠어. 드윈 남작 부인만큼 일을 잘해줄 사람을 구해 봐야지.”

일로델은 한겨울 바람처럼 냉랭하던 노부인을 떠올렸다. 지금은 은퇴해서 한가로운 여가 생활을 보내고 있을 그녀는 한때 대공가의 자제들을 휘어잡은 무서운 선생님이기도 했다. 일로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잘 관리할게요.”

“믿어 보마. 아침엔 어딜 다녀온 거지?”

“잠깐 바람 쐬러요.”

“바람 쐬러, 호텔에?”

포크를 들어 올리던 일로델이 깜짝 놀라며 헤롯을 보았다. 그녀는 빤히 다 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일로델은 가슴이 뜨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호위에게 물었지.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부려 먹어야지, 얼굴이 하얗게 떴더구나.”

호위들은 언제나 그렇다. 자신의 곁을 맴돌다 가끔 운전대나 잡는 한가한 놈들이면서 온갖 힘든 일은 다 도맡는 것처럼 매일 죽상에, 쉬라고 해도 한숨이나 푹푹 쉬고, 윗사람에게 고자질이나 한다.

“…….”

일로델은 헤롯의 눈빛에 쪼그라든 것처럼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일로 아침 일찍 호텔에 갔는지 상세히 고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식당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여럿 이어졌다. 제복을 갖춰 입은 로건과 그와 상반된 너저분한 차림의 티베인, 수행원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헤롯을 본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경례를 올리고, 그 사이에서 로건과 티베인이 걸어 나왔다. 일로델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제때 왔다. 앉아.”

짧게 묵례한 로건이 일로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티베인 역시 묵묵히 걸어 일로델 옆에 자리했다. 구금에서 풀려나 바로 집으로 직행했는지 땀 냄새 같은 불쾌한 기운이 훅 끼쳤다. 평소 같으면 질색을 했을 일로델은 아무것도 못 느낀 척 고개를 숙이곤 샐러드를 깨작였다.

“티베인.”

“네.”

“무단결근을 하고 대낮에 거리에서 싸움을 벌였다던데?”

“네.”

무뚝뚝한 대꾸가 이어지고, 헤롯이 혀를 쯧쯧 찼다.

“아주 사고뭉치가 따로 없구나. 요즘 바빠서 신경을 못 썼더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행실이 나빠.”

일로델의 고개가 더더욱 수그러들었다. 이놈은 자신이고 저놈은 티베인이겠지. 어른들 눈에 호텔은 있는 집 자제들이 도박이나 마약 파티 모임으로 이용하는 불순한 시설이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의심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시선이 쏠리는 것이 무엇보다 거북했다. 앞에는 로건, 왼쪽에는 티베인, 오른쪽에는 헤롯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흐드러지게 핀 꽃도 있고 벽에는 새로 걸린 멋진 액자도 있는데, 그들의 눈길은 잠시 다른 곳을 향했다가도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특히 왼쪽에선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피부를 뚫고 느껴졌다.

일로델은 긴장과 불안이 풍선처럼 커지다 몸속 어딘가에서 뻥 터지는 상상을 했다. 다행히 그렇게 되기 직전, 로건이 다른 주제를 꺼냈다.

“오늘 황궁으로 돌아가십니까?”

“비도 잦아들었으니 가 봐야지. 너도 부대에 다시 나가겠다고?”

“계속 비워두니 부관들이 힘들어합니다. 오전 중에는 자리를 지키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렇군.”

일로델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적어도 오전 중에는 숨통이 트인다는 얘기가 아닌가. 갑자기 샐러드가 입에 착착 붙었다. 가족들의 관심이 고팠던 시절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대화가 끊기고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다들 할 말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같은 묘한 분위기였다. 바늘방석 같은 자리에서 일로델은 어서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에 반해 헤롯은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식사를 들었다.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어제 일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다.”

고기를 자르던 로건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초식 동물처럼 채소만 퍼먹던 일로델도 고개를 들었다. 삐딱하게 앉아 일로델을 지켜보느라 한창인 티베인만이 뒤늦게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눈썹을 꿈틀댔다. 헤롯은 장성한 세 아들을 돌아보며 엄숙하게 통보했다.

“혼사를 받아들여야겠어.”

“…….”

“앞으론 바빠질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일로델.”

식당 안이 긴 침묵에 휩싸였다. 그것은 폭탄이 떨어진 뒤에나 이어질 법한 스산하고 고요한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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