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알을 찌르는 햇빛이 불쾌했다. 반쯤 졸면서 샐러드를 헤집던 일로델이 인상을 쓰자 그의 시중을 들던 하인이 옆을 눈짓했다. 곧이어 거대한 창문이 커튼에 가려지고, 평화를 되찾은 일로델이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흠칫 깨어나서 꾸역꾸역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하인들은 아까부터 안 하던 짓을 반복하는 대공가의 차남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일로델 님. 가재 요리 대신 칠면조 구이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일로델의 시중을 들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손도 대지 않은 메인 요리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일로델은 움찔 놀라서 자세를 바로 했다.
“됐어. 아니…. 전부 물리고 차를 가져와.”
“어떤 차를 내올까요?”
“잠을 깰 수 있는 걸로 아무거나.”
거의 비워지지 않은 점심 식사가 바삐 치워졌다. 일로델은 의자에 늘어지려는 몸을 붙들고 하품을 짝 했다. 수면 부족이 참 무서웠다. 입맛도 없고, 몸가짐을 바로 하기도 싫고, 하인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았다. 그저 침대 생각만 간절했지만, 지금 들어가 자면 하루를 통째로 날리게 되겠지. 그건 곤란했다.
일로델은 어제로 나흘째 뒷골목을 찾았다. 첫날엔 끔찍한 소굴에 발을 들여놓기 무서워서 도망쳤고, 다음 날엔 사기를 당했다. 세 번째로 찾았을 때 제대로 된 중개인을 만났고, 넷째 날인 어제 낙태약을 손에 넣었다. 모두 티베인의 퇴근이 늦어지면서 순조롭게 이뤄진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뒷골목 산책이 용납될 리 없었다. 티베인이 문제가 아니라, 형 로건 때문이었다. 지금도 자신이 밤늦게까지 쏘다니다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은 낱낱이 보고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로건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뭐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베일에 가려진 그 속마음까진 모르겠지만, 일로델은 정말로 해볼 생각이었다. 아이가 생기면 없애고, 형제들을 다시 원위치로 되돌려서 무너진 일상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낙태에 쓰는 독초가 필요했고, 몹시 고된 일이었지만 기어코 그것을 손에 넣었다. 다음으로는 다이아몬드 피어스를 제거할 예정이었다. 하인들에게 빼달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계획이 있었다. 아주 멋진 계획이.
어쨌거나 그러려면 다시 뒷골목을 찾아야 했다. 부디 오늘로 마지막 방문이었으면 좋겠는데. 일로델은 한숨을 삼키며 하인이 따라 준 홍차를 음미했다. 냄새가 무척 향긋했다.
“티베인은 언제 나갔지?”
“아침 일찍 출근하셨습니다.”
“오늘도 늦게 들어온다고 해?”
“네. 일로델 님의 식사를 꼭 챙기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인으로서는 형 생각이 지긋한 막내를 기특하게 여겨 주십사 꺼낸 말이었지만, 일로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짜증을 눌러 삼켜야 했다. 제깟 게 뭔데 저를 챙기라 말라 한단 말인가. 완전히 아래로 보고 하는 소리였다. 자신은 농담으로도 감히 로건의 부하에게 형을 잘 챙기라는 당부는 못 한다. 물론 잘 보필해 주길 바란 적은 있지만, 말로 꺼내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무례한 짓이었다. 저를 형으로 본다면 감히 꺼내지도 못할 망언인 것이다.
반드시 제 위치로 돌려놓을 테다. 노크도 모르는 막돼먹은 손으로 싹싹 빌게 만들고, 상스러운 주둥이에서 꼭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 테다. 그리고 꼬박꼬박 형님이란 존칭도 쓰게 하겠다며 일로델이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때였다. 누군가 식당으로 들어와서 차 시중을 드는 하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밝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일로델에게 전달했다.
“일로델 님. 로건 님께서 오고 계신다는 전갈입니다.”
“뭐!”
일로델이 찻잔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평소 로건을 따르던 그였다. 소식을 듣고 좋아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던 하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지금 어디에….”
“오늘 새벽 열차를 타셨다고 하니 저녁쯤에는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일로델의 눈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바로 조금 전에 로건에게서 반응이 없다며 기세등등하던 참이었는데, 그가 오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결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왜 벌써…. 저택을 떠나신 지 얼마 안 됐잖아.”
일로델의 물음에 하인이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로건 님께서 원정을 떠나신 지는 오늘로 한 달 하고도 열흘이 됩니다.”
말도 안 돼. 경악한 얼굴로 찻잔을 내던진 일로델이 다급히 식당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돌아와 근처에 있는 하인을 붙잡고 소리쳤다.
“돈 내놔!”
얼떨결에 지갑을 빼앗긴 하인이 울상을 짓고, 일로델이 복도로 나서며 “지금 당장 호위와 차를 내와. 빨리!” 하고 소리쳤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식당 안에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뻑였다.
일로델의 차 시중을 들던 상급 하인은 내심 혀를 찼다. 그는 돈을 뜯기고 우는 녀석을 달래며 생각했다. 어릴 적엔 그렇게나 얌전하던 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록퍼스 가문의 금쪽같은 둘째 도련님에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온 듯했다.
*
차창 밖으로 모래바람 날리는 도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일로델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짓씹었다. 그는 형 로건과 동생 티베인에게 해괴한 짓거리를 당한 뒤 별채에 틀어박혔다. 거기까진 확실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안개가 서린 듯 기억이 불분명했다. 그저 물에 푹 잠긴 것처럼 무기력해서, 며칠 좀 멍하니 지냈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 달 하고도 열흘이라니?
순간 머릿속에 주치의 벤이 떠올랐다. 충격으로 인해 기억력에 큰 문제가 생겼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벤은 믿을 수 없다. 아니, 벤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멍청하게 생긴 오르본 자식도 제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하인의 말도 거짓일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행동을 하든 정말로 신중해야 했다.
창밖을 노려보며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차가 멈추었다. 열차역 앞이었다. 여전히 옹색하고 누추한 건물이었지만, 요 며칠 하루가 멀다고 방문한 탓인지 제법 친숙했다. 일로델은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잽싸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곤 운전석에서 당황하는 호위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절대 따라오지 마.”
“하지만 모래바람이 심합니다. 조금 잠잠해지면 가시는 게….”
“나는 바빠. 귀찮게 굴지 말고 한가하면 잠이나 자!”
일로델은 또다시 “하지만….” 하며 입을 놀리는 호위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가, 한가하면 자라고 하는 자비로운 주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뒤에서 한숨이나 푹푹 내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배은망덕한 놈 천지였다. 일로델은 씩씩거리며 열차역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헤매는 일 없이 곧장 매표소로 다가갔다.
“실톤행 스무 장.”
구석에서 돈을 세던 사내아이가 귀를 쫑긋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일로델은 하인에게서 뺏어온 지갑을 매표소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아이가 희희낙락해서 지갑을 집어 들더니 지폐를 한 움큼 꺼내 갔다.
“오늘은 돈이 좀 적네요?”
“부족하면 더 가져올 수 있어.”
바깥에 있는 놈들에게서…. 하인에 이어 호위들의 지갑을 노리는 일로델의 말에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필요한지에 따라 다르죠. 이번에도 어른들의 약이 필요해요?”
“아니. 오늘은 다른 용무야.”
일로델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막에서 심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역 안이 한산했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슬쩍 틀었다. 있는 힘껏 머리카락으로 가려놓은 귓바퀴가 드러나고, 말간 연골에서 하얀 점 같은 보석이 반짝 빛났다. 다이아몬드 피어스였다.
“우와.”
뭔지는 몰라도 돈 냄새를 맡은 아이가 감탄을 터트렸다. 그 반응에 괜히 화들짝 놀란 일로델이 다급히 귓가를 손짓했다.
“이런 거, 어디서 만들어?”
“그걸 만드시려고요?”
“비슷한 게 필요해.”
그 말에 아이가 난색을 보였다. 일로델의 귓가에 박힌 피어스는 문외한이 보아도 몹시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이었다. 예리한 커팅뿐인가. 깨질 것처럼 투명한 몸체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슬럼가에선 돈만 있으면 사람 장기도 구한다지만…. 사람 목숨보다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를 한참 쳐다보던 아이가 입맛을 쩝 다셨다.
“힘들어요.”
“왜?”
“그거 비싼 거 아니에요? 손재주 좋은 사람은 많아도, 재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일걸요.”
일로델이 작게 혀를 찼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이 직접 달아놓은 피어스였다. 당연히 값싼 물건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바다 사막에서 돌아오던 길에 피어스를 매만지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미행이 필요 없는 안전장치란 대체 무엇일까. 짐작조차 안 가지만, 단순한 관상용은 아닌 게 분명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돼. 똑같은 재료일 필요도 없고. 비슷하게만 만들어 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하지만….”
“따로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바로 가져오라고 할게.”
사람 부리는 데에 익숙한 일로델로선 몹시 보기 드문 부탁 조였다. 필사적인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끙 소리를 냈다. 약 한 달 전, 유명한 록퍼스 가문의 삼남이 열차역을 찾은 적이 있었다. 관리인으로 부임했다는 것 같은데 윗사람들 이야기는 잘 모르겠고, 그때 보았던 그와 눈앞에 있는 신경질적인 도련님은 형제 사이였다. 본인이 직접 사실을 밝힌 적은 없지만 확실했다. 왜냐면, 얼굴이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알았을 땐 얼마나 신났던가. 그가 중개인을 찾고 있다고 했을 땐 마르지 않는 돈줄을 움켜쥔 기분이었다. 맡은 일을 잘 처리해서 신분 상승도 노려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상대가 너무 거물이기 때문일까? 특별히 위협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 위험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는 절박한 얼굴의 일로델과 그 귓가에서 빛나는 흰 보석을 번갈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세공업자를 소개해 드릴게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지만 솜씨는 좋아요.”
“뭐? 정말이야?”
“돈을 많이 줬을 때의 얘기지만요.”
그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고민거리가 해결된 일로델이 함박웃음을 짓자 아이가 움찔해서 물러났다. 차라리 다른 어른들처럼 건방지다며 멱살을 잡거나 침을 뱉는다면 모를까, 그거 하나 들어줬다고 해맑게 웃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거친 삶을 살아온 아이의 본능 어딘가에서 경계심이 발동됐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르다. 신분은 물론이고, 살아온 세상도, 생각하는 방식도. 온실 속 화초도 이보다는 현실적일 것이다.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과연 온실 주인이 가만히 있을까.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아, 이거 줄까?”
옷방에 굴러다니던 시계를 대충 차고 나온 일로델이 금속 줄을 풀었다. 그러자 아이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건 됐어요!”
“그러면?”
뭐든 다 갖다 바칠 기세에 아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실제로 일로델은 뭐든 가져다줄 용의가 있었다. 원하는 건 물어보나 마나 돈이겠지. 맨날 돈만 세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건방진 꼬마지만 기특한 구석이 없진 않았다. 적어도 처음 사기를 쳤던 중개인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이참에 멋진 상자를 준비해서 좋아하는 지폐를 가득 담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로델이 눈을 반짝이자 아이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됐고요. 그냥, 이제 그만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
“아, 물론 열차표 끊을 때는 말고요.”
아이가 유리 위의 어딘가를 손짓했다. ‘매표소’라고 적힌 조잡한 종이였다. 일로델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늘 있는 일이었다.
제게 부담을 느끼고 멀어진 인간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층민 꼬마 주제에 감히 오라 마라 하는 게 좀 못마땅할 뿐이지, 딱히 마음에 담아둔 건 아니다. 누가 묻지도 않은 얘길 구시렁대며 일로델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열차역 뒤편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을 통해 호위들 몰래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좁은 길을 앞두고 주변을 둘러본 일로델이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이번에 가는 곳은 어제처럼 골목 안쪽이 아닌 대로변 근처에 있는 장소였다. 주소가 적힌 메모를 들여다보며 머뭇머뭇 걷는 일로델을 부랑자들이 힐끔거렸다. 그들은 부유해 보이는 청년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잘 관리된 검은 머리, 투명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보석 단추가 장식된 코트와 먼지 하나 없는 구두. 상인의 자식이라기엔 종이를 든 손이 몹시 깨끗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귀족이라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녀석이었지만, 신경질적이면서도 불안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묘한 충동을 자극했다. 다른 때였다면 시비 정도는 걸어 보겠지만…. 그들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곤 고개를 돌렸다.
일로델은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 대로변과 이어진 길목으로 나왔다. 때마침 사람들이 많았다. 바깥에 구경거리라도 생겼는지 통로 한구석에 인파가 몰려 있었고, 경비병 여럿이 그들을 통제 중이었다. 다툼이라도 벌이고 있는 걸까. 이곳에선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일로델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름한 계단을 올랐다. 세공업자가 있다는 가게였다.
“어서 오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람이 왔는데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자, 가게라고 하기도 무색한 조그만 공간에 작업대만 달랑 놓여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까. 일로델은 반신반의하며 작업대에 달라붙어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의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일로델의 말에 노인이 한쪽 손을 펼치고 들이댔다. 뭘 달라는 것 같기도 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우뚝 서 있자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만큼이나 눈동자 한쪽이 희었다. 괴괴한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일로델을 노인이 천천히 훑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피어스를 만들고 싶어. 이것과 비슷하게.”
매표소 꼬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로델이 제 귓가를 가리켰다. 노인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피어스를 들여다보았다. 나이가 많은 건 둘째 치고, 눈도 제대로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까.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노인이 말했다.
“비슷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할 수 있겠어?”
“돈이면 뭐든 가능하지.”
노인이 또다시 손을 펼쳤다. 돈을 달라는 의미였나 보다.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달리 기댈 곳도 없는 처지였다. 하는 수 없이 지갑을 건네주려던 일로델이 품을 뒤적이던 손을 멈췄다. 어쩐다. 아이에게 지갑 채로 전부 주고 온 걸 깜빡했다. 호위가 있는 곳까지 다녀와야 하나? 일로델의 미간이 곤란한 듯 찌푸려진 찰나였다. 노인의 손바닥 위에 두둑한 지갑이 턱 얹혔다.
“계약금 정도는 되겠군. 잠시 기다리시오.”
“…….”
지갑 속에서 지폐를 한 움큼 뽑아간 노인이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멈추고 서 있던 일로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진회색 제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바짝 얼어붙었다가, 낯선 듯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늘상 형 옆에 붙어 다니는 부하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사내는 무표정했다. 원래 그런 표정인지, 군인이 되면 배우는 건지 모르겠지만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호텔에서의 끝없는 도돌이표가 악몽처럼 떠올랐다. 그게 그렇게 소원이라면야. 일로델이 날 선 눈으로 로건의 부하를 노려보았다.
“왜 이곳에 있지?”
“주변을 경비 중이었습니다.”
“당신이?”
“좌천되었거든요.”
그 말에 사나웠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래전부터 형을 보좌하던 사람이 갑자기 좌천이라. 이유는 명백했다. 제가 알게 된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둥 구슬리더니, 뭔가 하긴 했나 보다. 해고보다 낫긴 하지만…. 일로델이 더는 캐묻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슬쩍 틀었다. 때마침 노인이 종이와 펜을 들고 다가왔다.
“이름이 뭐요?”
일로델. 경황이 없던 참에 납죽 본명을 말하려다가 아차 싶어 정정했다.
“모릭스.”
“네.”
이상한 곳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마치 제 이름을 불린 것처럼. 일로델이 뭐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로건의 부하 역시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방금까지 무표정한 얼굴이 군인답다고 생각했던 참인데 지금은 좀 바보 같았다.
“뭐야?”
“방금, 제 이름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저를 내려다보는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금방 무표정으로 포장됐지만, 다 봤다. 일로델의 고개가 먹이를 발견한 딱새의 꼬리처럼 까딱까딱 움직였다. 로건의 부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당신 이름이 모릭스야?”
“네. 아니오. 아니….”
반응 보니까 맞나 보다. 뒷골목을 쏘다니며 가명으로 둘러대던 이름이 저자의 것이었다니.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는 일로델의 시선을 모릭스가 기를 쓰고 피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반가움을 담고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빌어먹을. 모릭스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을 주워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모릭스라는 이름으로 예약하면 되겠소?”
“그래.”
“내일 찾으러 오시오.”
아직 피어스를 제대로 보여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빨리? 일로델이 미심쩍은 듯 노인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볼일 다 끝났다는 태도였다. 뭐 상관없나. 가짜 피어스가 잘 만들어지든 아니든 간에 일은 이미 꼬였다. 일로델은 축 처진 걸음걸이로 건물을 나섰다.
좁은 길목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많아져서 대로변을 내다보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막아선 경비병들의 몸싸움이 한창이었다. 모릭스도 저러고 있었던 걸까. 계급이 좋긴 좋다. 좌천된 주제에 마음대로 빠져나와서 편하게 호위나 하고. 아주 살짝 미안했던 마음이 싹 가셔서 모릭스를 노려보았다.
“형한테 보고할 거지?”
“무엇을 말입니까.”
“여기서 있었던 일. 다 봤잖아.”
대놓고 피어스를 빼놓으면 다시 채울 것이 뻔했다. 그러니 가짜를 만들어서 바꿔 달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달아놓은 물건인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어째 일이 잘 풀린다 했지. 땅이 꺼지도록 한숨짓는 일로델을 모릭스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참 많이도 컸다. 그가 일로델을 볼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릴 적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땐 걸어 다니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자그마했는데…. 그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모릭스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표정을 굳혔다.
“얘기 안 했으면 좋겠는데.”
“…….”
“말하지 마, 제발….”
제기랄. 빌어먹을. 모릭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을 꾹꾹 누르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어쩐지 희망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일로델이 그의 팔을 잡고 슬쩍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
인생의 반을 거친 군인들 틈에서 보내 온 모릭스였다. 팔을 잡은 힘은 무척 약하게 느껴졌다. 그뿐인가. 어릴 적 운 좋게 잡아 보았던 단풍잎 같은 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직도 이렇게 어린 동생 같은 녀석을 로건 님은. 그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알겠습니다.”
“뭐, 정말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 일로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의외로 마음이 약한 걸까. 그러고 보면 호텔에서도 무작정 떼쓰는 자신을 말없이 보내주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황폐해진 일로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모릭스를 보았다.
“대령님께서 따로 묻지 않으신다면, 굳이 보고드리진 않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싶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건 해냈다는 생각에 일로델이 슬쩍 웃자 모릭스가 움찔했다. 매표소 꼬마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일로델에게 팔을 놔달라는 말도, 다가오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휘말리고만 있었다.
“이 피어스 정확히 뭐에 쓰는 건지 알려 줄 수 있어? 형의 말로는 안전장치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싫음 말고….”
과연 록퍼스가의 핏줄이다. 약해진 틈을 파고들어서 사람 휘두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이나 주워 담던 모릭스가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위치를 추적하는 도구입니다.”
“위치를 추적한다고?”
“네. 언제 어디 계시든, 완벽하게 추적이 가능합니다.”
일로델은 모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팔을 놓았다. 그리곤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위치를 완벽하게 추적하는 도구라. 향기를 묻혀놓고 코가 좋은 짐승에게 찾게 한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티베인 자식이 기꺼운 듯 지껄여댄 이야기도 있고, 아마 군의 발명품이라 보는 게 맞겠지.
황제는 나라를 다스리고 귀족들은 나라를 발전시킨다. 제국이 건립된 이후로 그 체제에는 변함이 없었고, 모든 기술의 발전은 귀족 장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군에서 시작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수백 년을 앞서간 기술을 보유 중이라고 하는데, 일로델이 확인할 길은 없었다. 군대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귀족 주제에, 그것도 군 통솔자인 대공의 차남 주제에 입대에 미끄러지길 수차례. 계급이 깡패라고 편리함은 누리고 살지만, 기술 발전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도 모르고 주변 사람이 다 아는 걸 혼자만 모르는 이런 상황이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만 해도 답답해 미칠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잘난 군대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제게 달아놓았다고 한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서 휘청이자 모릭스가 급히 팔을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새삼 충격받을 일도 아니다. 일로델이 됐다고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바로 했다. 골목을 걷다 갈림길이 나오자 모릭스가 차가 대기하고 있다며 길을 안내했다. 집으로 갈 기분은 아니었지만, 가지 않는다고 해도 특별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하물며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데 가긴 어딜 가겠는가. 몰래 움직인답시고 뒷골목을 쏘다니던 것도 다 보았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싶은데, 웃을 힘도 나지 않았다.
“일로델 님, 이쪽입니다.”
길목을 통제 중이던 경비병이 모릭스를 발견하곤 절도 있게 경례했다. 모릭스는 눈인사를 돌려주며 사람들과 닿지 않도록 일로델을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대로변에는 뒷골목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무언가를 보려는 듯 줄지어서 기웃대는 인파를 지나 일로델은 검은 세단 앞에 섰다. 그는 밀려드는 허탈감을 애써 감추고 말했다.
“고마워, 오늘. 여러 가지로….”
차 문을 열어주던 모릭스가 살짝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탓인지 바위처럼 표정을 굳힌 그는 일로델의 인사에도 반응 없이 정면만 쳐다보았다.
그렇지 뭐. 어차피 자신의 사람도 아니다. 씁쓸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일로델이 차에 올랐다. 폭신한 시트가 등을 감싸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시 집으로 바로 가고 싶진 않은데. 속도 답답한데 도시라도 한 바퀴 돌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늦었군.”
일로델이 숨 쉬는 것도 잊고 쩍 얼어붙었다. 맞은편에 로건이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출발해.”
비어 있는 운전석에 모릭스가 올라타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자동차 뒷유리로 보이는 배경이 빠르게 바뀌는 동안에도 일로델은 굳어 있었다.
좌천당했다며. 불쑥 그러한 원망이 먼저 솟아났지만, 같은 일도 세 번을 넘게 당하면 그것도 문제다. 아니지. 설령 수백 번을 당해도 속이는 놈이 잘못이다. 뒷골목에서 사기나 치고 다니는 천박한 것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거짓말쟁이들. 가만 안 둘 테다.
그러나 전투적인 건 속마음뿐이었다. 안쓰럽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일로델을 로건이 힐끗 보았다.
“어디를 다니든 상관없지만, 호위는 데리고 다니도록 해.”
“차라리… 미행을 붙이지 그래요?”
“그렇게 해 줄까?”
일로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고개도 차창으로 돌려버렸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그 상태로 한동안 있었지만, 로건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차가 움직이는 방향도 어둡거나 으슥한 곳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큰길이었다. 그래서일까. 객기와도 닮은 자그마한 용기가 솟았다.
“뻔뻔해.”
“…….”
“틈만 나면 사람이나 속이고.”
“…….”
“거기가 썩어서 떨어질 놈들.”
큼. 누구 것인지 모를 헛기침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닌데.”
“…….”
“사과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일로델은 믿었다. 저 미친 형제들에게 사과를 듣고 다시는 그 짓거리를 하지 않겠단 약속을 받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테이블에 모여 앉아 조카들의 재롱을 볼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물론 그 조카가 자신의 아이일 필요는 없다. 필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거다!
일로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정면을 향했다. 로건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무심한 태도에 약이 바짝 올랐다.
“당장 사과해. 이….”
강간범아. 무슨 배짱인지 티베인에게 하듯 성질머리가 고개를 쳐든 때였다. 뒤편에 있는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
“좌천되었다는 말은 과장이었지만, 그래도 업무가 줄어든 건 사실입니다. 제게 운전만 시키고 계시거든요.”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려는 듯 모릭스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역시나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묵묵히 있던 로건이 눈을 들고 그를 보았다. 백미러로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한 모릭스는 즉각 “죄송합니다.” 하며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이 조용해지자 일로델이 작게 침을 삼켰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로건의 시선이 천천히 따라왔다. 몹시 푸른 눈동자가, 한겨울의 바다를 보는 것처럼 시리고 난폭했다. 어딘지 모르게 사나운 분위기에 일로델이 숨을 죽였다.
기분 탓일까. 묘하게 피 냄새도 감돌고 있는 것 같다. 만일 이대로 로건이 그를 올라탄다면, 반항은커녕 조그만 저항조차 못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일로델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자 로건이 살짝 멈칫하더니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미안, 일로델. 사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피곤해.”
거짓말. 피곤한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덮쳐올 기세였다. 그러나 일로델은 쥐 죽은 듯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누가 보아도 안쓰러울 만했다.
로건은 일로델을 마주하는 대신 창문을 돌아보았다. 매끄러운 유리 위로 7살 아래의 동생이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제법… 많이 컸지. 그는 부하인 모릭스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속내마저 같진 않았다. 로건은 유리창에 비치는 부드러운 목선과 떨리는 어깨를 눈으로 탐했다.
“둘러말할 것 없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직접 얘기해.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수 있어.”
“…….”
“미안하다, 일로델.”
일로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게 아냐. 이런 게 아닌 것 같다. 분명히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는데, 왜일까. 암흑처럼 검은 바다가 밀어닥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절망감이라는 이름의 바다였다.
*
일로델은 수면 부족을 핑계로 저녁도 거르고 방에 틀어박혔다.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별채로 가고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 로건과 그의 부하들이 정원에 모여 진을 치고 있는 바람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이윽고 방 안에 어둠이 내려오고 창문에 램프 빛이 일렁였다. 넋 나간 듯 그것을 바라보던 일로델이 시트 안으로 숨었다.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갇힌 채,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틀어박혀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미라가 되어 발견된 저를 보면 형제들이 어떤 얼굴을 할까. 땅을 치며 그러지 말 걸 후회하지 않을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형제들에게 그 정도 양심이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겁먹은 개처럼 처박혀 있을 일도 없을 테니까!
일로델은 시트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다가 벌떡 일어났다. 낙태약이 별채에 잘 있는지 불안했다. 형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제가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는 건 알아도, 뭘 했는지는 모를 것이다.
“…….”
글쎄, 정말 모를까? 차 안에서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지금 정원에 모여 있는 것도 약의 수색을 위한 게 아닐까? 모릭스는 형에게 피어스 이야기를 했겠지. 아니, 그래도….
답답한 듯 방 안을 빙빙 돌던 일로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보았다.
정원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까보다 더 인원수가 많아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했지만, 자세히 보니 대부분이 노끈에 줄줄이 묶인 사람들이었고 선두에서는 군인들이 그들을 끌고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진 일로델이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자 멀리서 군인들을 지휘하던 로건이 마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틀었다. 일로델은 깜짝 놀라서 주저앉았다. 쳐다만 봤을 뿐인데, 어떻게 아는 거야.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로건은 정면을 향한 채로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긴장을 풀지 않고 방 밖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랜턴을 들고 지나가던 하인 하나가 빼꼼 튀어나온 일로델의 얼굴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섰다.
“일어나셨습니까.”
“응.”
잠은커녕 멍하니 누워 있었을 뿐이지만 일로델은 대충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샅샅이 경계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색은 없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던데. 뭘 하고 있는 거지?”
“야만인들을 이송하고 있습니다.”
야만인? 뜻밖의 이야기에 일로델이 미간을 좁혔다.
“로건 님께서 야만인 우두머리를 포획해 오셨습니다. 황성으로 이송하는 날까지 야만인 우두머리와 그 잔당들을 저택 지하에 가둬놓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일로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맙소사. 야만인들이 어떤 놈들이던가! 제국이 빛나는 발전을 이루는 동안에도 뛰어난 신체와 일정 수준 이상의 지능을 무기로 끈질기게 노략질을 일삼던 무리였다. 머릿수는 또 얼마나 많은지 해치우고 해치워도 어디선가 계속 기어 나왔다. 아버지 셰본이 늘 바다를 떠도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놈들에게 우두머리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잡아 오기까지 했다니? 이것은 전설 속 영웅이나 해낼 법한 업적이었다!
아주 잠시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던 일로델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영웅이 제게 무슨 짓을 했던가. 그 어느 모험기도 전설 속 영웅의 은밀한 사생활은 다루지 않았다. 동생을 상대로 해괴한 짓을 벌이는 사생활이라면 당연히 다룰 수 없겠지. 제국 최초의 금서로 지정되어 불에 타 마땅할 일이었다.
“그만 가 봐. 아니, 잠깐….”
일로델이 문틈 사이로 손을 뻗어 하인이 들고 있던 랜턴을 뺏어 왔다. 오늘은 긴 밤이 될 거다. 갇혀 있을 땐 갇혀 있더라도 불은 밝히고 있어야지. 일로델은 얼떨떨하게 서 있는 하인에게 그만 가 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뻗어 나온 손이 랜턴을 가로채 갔다.
“위험하게 이런 걸 왜 들어? 손 다치고 싶어?”
랜턴 빛이 둥근 달덩이처럼 떠올라 얼굴을 비췄다. 저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놀란 일로델이 뒷걸음질 친 사이 티베인이 잽싸게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잠깐의 틈도 없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조심성 없기는. 뭘 할 줄 안다고 까불어. 랜턴이 우습냐?”
티베인이 투덜대며 응접실 테이블 위에 랜턴을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우습긴 제가 더 우스워하는 태도였다. 일로델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굳어 있다가 미간을 콱 구겼다.
“네가 여길 왜 들어와!”
“뭐, 들어오라고 비켜 준 거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릴! 성질대로 내뱉으려던 일로델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형과 만난 뒤로 이 자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슬슬 돌아올 시간이긴 했지. 조금이라도 경계를 해야 했는데. 일로델이 굳게 닫힌 문을 불안하게 힐끔거리는 동안 티베인이 응접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만 보면 코흘리개 때랑 변한 게 없어. 너 옛날에도 랜턴에 손댔다가 뜨겁다고 울었잖아.”
“내가 언제.”
“세 살쯤 됐었을걸? 웃겼어. 그럼 랜턴이 뜨겁지 차갑겠냐?”
헛소리를 지어내고 있다. 그런 얼빠진 이야길 누가 믿는다고. 일로델은 경계를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가를 등지고 섰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다.
“진짜인데 왜 안 믿어? 손 뜨겁다고 나한테 불어 달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헛소리.”
“그럼 이건 기억나냐? 너 자다가 오줌 싸서 바지 벗고 보여준 적 있었는데….”
더는 들어줄 수가 없다. 일로델이 이를 갈며 티베인에게 달려들었다. 티베인은 제게 뻗어오는 주먹을 툭 쳐서 날리곤 일로델의 허리를 팔로 감아올렸다. 분통이 터지는 듯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감쌌다. 귀여운 자식. 더 건드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지만, 오늘은 그럴 작정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티베인은 일로델의 목덜미를 핥듯이 바라보며 속삭였다.
“털이 바짝 섰군.”
“…….”
“겁먹을 필요 없어. 내가 형한테서 너 지켜 주려고 빨리 왔잖아.”
미친 자식이, 또 무슨 개소리야. 약이 오르다 못해 성질이 정수리까지 치민 일로델이 티베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려던 때였다. 어쩐 일인지 티베인이 먼저 물러나더니 품 안을 뒤적였다.
“음, 뭐지. 여기 있었을 텐데. 차에 두고 왔나?”
“뭐, 뭐야?”
설마 바다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총을 찾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걸로 위협당하면 저항할 수도 없다. 일로델의 안색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티베인은 부산하게 품을 뒤적이고 주머니를 털어 보더니 낮게 욕을 지껄이곤 나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문 잠그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는 뭐가 급한지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 나가서, 일로델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었다. 그러나 금방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 물론 사슬도 굳게 걸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응접실 테이블과 의자도 문 앞에 쌓아둘 생각이었지만, 별채에 있는 것과 다르게 가구가 너무 묵직해서 옮길 수가 없었다.
일로델이 고급 엔티크 가구와 씨름하고 있는 동안, 티베인은 정원을 통해 차고로 내려갔다. 그는 곧 차 안에서 물건을 발견하고 고이 품에 넣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으로 뛰었다.
정원에서는 여전히 야만인 이송이 한창이었다. 티베인은 개미처럼 줄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자들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시, 티베인과 로건의 시선이 맞았다.
“…….”
또 뭔가를 꾸미고 있군. 로건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지만, 티베인은 가만히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뭐, 좋다. 놈이 어떻게 나오든 앞으로 제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티베인은 저택을 오르며 가는 솜털이 바짝 서 있던 목덜미를 떠올렸다. 군침이 절로 도는 광경이었다. 깜찍하긴. 식인 취향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일로델의 방을 찾은 티베인이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당겼는데, 철컥하는 소리만 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잠긴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싱글벙글하던 티베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야! 문 열어!”
문고리를 부술 듯 흔들어대는 소리에 일로델이 힐긋 시선을 돌렸다. 막 테이블 옮기기를 포기하고 창문을 열어젖힌 참이었다. 들어오기만 해 봐라. 뛰어내릴 테다. 그런 다짐으로 문을 노려보았지만, 방 안을 들썩여대던 난폭한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갔을까. 혹시 몰라서 그 상태로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더는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일로델은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터덜터덜 침실로 향했다.
별채에서 왜 넋을 놓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이미 등반을 다 끝내고 드러누운 기분인데,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절벽을 눈앞에 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
이상한 소리가 났다. 몹시 젖어서 흥건한 것이 철썩철썩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것은 느릿하고 길게 이어지나 싶더니 어느 순간 짧고 빠르게 변했다. 사이사이 거친 숨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섞였다. 일로델은 제 몸이 바다에 잠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소리를 지르는 거다.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괴로우니까….
‘아, 아! 아아앗!’
‘흣, 일로델.’
낮은 탄성과 함께 턱을 잡혔다. 뜨거운 것이 거칠게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일로델은 그 또한 물이라고 생각했다. 물에 빠져서 죽고 있는 거야. 허우적대며 움직인 팔을 무언가가 가로챘다. 그리곤 강하게 짓누르더니 저를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
‘흐아, 아아아, 아…!’
‘이런, 눈을 떴군.’
뿌연 시야에서 화려한 샹들리에가 빙글빙글 돌았다. 저것은 천장이다. 물속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일로델은 입을 크게 벌렸다. 힘겹게 호흡을 이어 나가는 동안 눈앞으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위협적일 만큼 커다란 손이었다. 일로델은 그 손이 입을 막아서 숨통을 틀어쥘 거라 생각했지만, 다정한 손길이 젖은 눈꺼풀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너무 깊이 넣었나 봐. 음, 너는 이곳을 좋아하지.’
‘후으으, 으읏.’
배 속을 잘게 치대는 움직임에 일로델이 몸을 덜덜 떨었다. 배꼽 근처의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손가락 사이로 단단한 것이 닿았다. 손끝인 것 같았다. 단단한 손끝은 일로델의 손 마디마디와 매끄러운 손톱을 신기한 듯 매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등째로 강하게 움켜쥐더니 멈췄던 움직임을 재개했다.
‘아, 아…!’
‘조금만 참자, 일로델. 나도 억제제를 맞은 참이야. 아쉽긴 하지만, 너를 망가뜨릴 순 없으니까….’
달래는 듯한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하지만 속삭임은 곧 사나운 숨결로 바뀌고, 뜨거운 혀가 귀밑의 여린 살을 문질렀다. 안쪽에 빠듯하게 들어차 있던 성기가 조심스레 몇 번 움직이더니 거칠게 안쪽으로 박혀 왔다. 일로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떡였다.
‘아아아악! 아아아!’
미칠 것 같은 쾌감이 머리를 관통했다. 강한 힘이 뒤틀리는 몸을 잡아 눌렀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으로 못질하듯 성기가 박혔다. 고환까지 처넣을 기세였다. 커다랗게 발기한 귀두가 깊은 내벽을 들쑤실 때마다 일로델이 히익, 히익, 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배 속이 터질 것 같은 건 물론이고 방광이 심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요의를 느낀 일로델이 몸부림을 치자 억센 손이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한층 더 무자비하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쯧, 자제가 안 돼.’
로건은 허리를 조이던 손을 풀고 일로델의 두 손목을 그러쥐었다. 탄탄한 상체에 일로델의 몸이 가려지고 허릿짓이 더욱 거세졌다. 방음 시설이 갖춰진 호텔이었지만, 흠뻑 젖은 비명과 질척이는 소리가 벽을 뚫고 나갈 것처럼 격렬했다.
‘하우으, 아으으으….’
일로델은 손목을 잡힌 채 끊임없이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늘어진 채 젖어 있던 일로델의 성기가 연노란 액체를 줄줄 흘렸다. 로건은 소변이 일로델의 몸을 듬뿍 적시기 전에 타월로 꼼꼼히 닦아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기가 깨끗해졌지만, 일로델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멍한 머리로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나 지금….’
‘괜찮아, 일로델. 형이 잘못한 거야.’
‘형님이…?’
‘그래. 며칠만 참으면 발정기가 지나가는데 너무 욕심을 냈지.’
로건이 깊게 허리를 움직이며 일로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일로델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아득한 듯 다시 감았다. 성기가 제대로 발기되지 않는 탓일까. 정상이라면 내보내고 나서 해소될 쾌감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긴 언제나 그랬지.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일로델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안으로 퍽퍽 쑤셔 박히는 성기의 움직임에 비명을 내질렀다.
‘흐으윽, 아아, 아….’
‘반응이 있으니 미치겠군. 아직까진 참아야 하는데, 큰일이야.’
미치겠다니. 늘 우아하고 고고한 형이 쓰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속된 표현이었다. 하지만 형이 잘못한 거니까.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제가 소변도 보고 형이 이상한 말도 쓴 거다. 제멋대로 납득한 일로델이 손을 들어 로건을 끌어안았다. 저와는 다르게 근육이 탄탄하게 올라붙은 몸이 손안에서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였다. 로건이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일로델을 내려다보았다.
‘네 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이럴 때마다 착각하게 돼.’
‘형님, 저는 형님이 좋아요.’
‘그래….’
중얼거리듯 낮게 속삭인 로건이 일로델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연결이 더욱 깊어지고 안쪽에 가득 찼던 정액이 울컥울컥 흘렀다. 그 느낌이 싫어서 구멍을 움찔거리자 로건이 작게 웃었다.
‘그냥 흘려보내. 정액 따윈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어.’
‘형니임….’
‘그래, 내 동생.’
로건이 일로델의 허벅지를 밀어붙인 채 성기를 찔러 넣었다.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다는 게 사실인지, 그의 성기는 쉴 새 없이 정액을 내보내고 있었다. 로건은 온통 희묽게 젖은 일로델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입과는 다르게 눈빛은 사납게 들끓고 있었다.
‘가라앉지를 않는군. 다음부터 발정기는 반드시 피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로건의 말에 누군가 대답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일로델은 또다시 물에 잠긴 기분이 되어 멍하니 헐떡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겁고 거대한 것이 부어오른 내벽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제 성기도 재량껏 옴찔옴찔하는 걸 보니 뭔가를 내보낼 듯했다. 괜찮았다. 형은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 준다. 자다가 소변을 보아도 티베인처럼 오줌싸개라고 놀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인 것이다.
‘좋아요, 좋아, 아, 아아….’
‘앞에 만져 줄까?’
‘응, 으응, 흐윽, 흑.’
‘그렇게 좋아?’
‘좋아, 좋아요, 형님, 형….’
바로 그때였다.
“뭣? 이게 지금 누굴 부르는 거야? 야! 당장 일어나!”
거친 손길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일로델은 수면의 여운이 남아서 끙끙대다가 화들짝 눈을 떴다. 씩씩대며 저를 흔드는 티베인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놈. 일로델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손에 뺨을 짝 소리 나게 얻어맞은 티베인이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이게, 이쁘다고 살살 만져 주니까 형을 찾아? 가만 안 두겠어.”
“으응, 뭐야, 저리 가….”
“내 이름만 부를 때까지 빨아 줄 테니 각오해.”
힘없이 늘어져 있던 다리가 벌어졌다. 다리가 벌어지다니. 왜? 그러고 보니 하체가 휑했다. 마치 바지가 벗겨진 것처럼…. 일로델이 이상함을 느낀 순간, 뜨겁고 뭉클한 것이 그의 성기를 덥석 머금었다. 그리고는 쭉쭉 소리가 날 정도로 걸신들린 듯 빨았다. 다리 사이에서 까만 머리통이 요리조리 움직였다. 일로델은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생생히 느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헉, 왜 이래!”
깜짝 놀란 티베인이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는 일로델의 입을 막았다. 일로델은 그 손을 콱 깨물고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전에 없는 속도로 침대를 벗어났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잽싸게 쫓아온 티베인이 일로델의 팔을 붙들었다.
“그 꼴로 어딜 가!”
“이거 놔! 이거 놔아!”
“못 놔. 제법 힘 좀 쓰는데? 어디 한번 벗어나 봐.”
티베인은 일로델의 허리를 잡고 그를 침대 위에 파묻었다. 그리고 발버둥 치는 몸을 팔로 억누르며 침이 살짝 묻은 성기를 닦아주고 속옷과 바지를 착착 입혔다. 그러는 동안 일로델은 티베인을 밀치고 때리다가 종국에는 그의 탄력 있는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악!”
티베인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픔보단 간지러움 때문이었다. 슬쩍 몸을 피하자 공격이 먹혔다고 생각한 일로델이 티베인의 등짝과 옆구리를 마구 물었다. 이게 지금 유혹을 하는 건가? 다분히 개인적인 바람이 섞인 고민을 하던 티베인이 순순히 일로델을 놓아주었다.
일로델은 정신없이 티베인의 곁을 벗어나 창가로 뛰어갔다. 바깥은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지만, 상황은 그날의 새벽과 비슷했다. 일로델이 희게 뜬 얼굴로 티베인을 경계했다.
“오, 오지 마. 오면 뛰어내릴 거야!”
“아, 그래?”
티베인이 느릿하게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자 일로델이 급히 창틀을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짓을. 같은 협박이 두 번이나 먹히겠냐?”
“무슨 소리야.”
“네 방 밑에 호위가 몇 명이나 깔렸을 것 같아? 뛰어내려도 받아줄 놈들이 한 트럭은 될 거다.”
말도 안 돼. 바깥에 아무도 없는데 무슨 헛소리야. 아주 잠시 일로델이 티베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문 밖을 힐끔거리던 때였다. 서둘러 몸을 날린 티베인이 일로델을 끌어안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얼떨결에 품 안에 갇힌 일로델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아악! 이 거짓말쟁이 자식! 이거 놔!”
“윽, 날뛰지 마! 누가 거짓말을 했다고 이래?”
“방금 했잖아!”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뭘 한다고? 좀 믿어. 네가 지금 삑삑 소리 지르고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놈들이 다 듣고 있을걸?”
그 말에 일로델이 발버둥을 멈췄다. 진짜일까. 생각해 보면 딱히 티베인이 저를 속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 아니, 그런 거 알 게 뭐야. 이 자식은 쌍둥이 형에게 발정하는 미친놈이다. 진짜 강간범이었다. 조금 전에도 침대 속으로 들어와 다리 사이를,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일로델이 사나운 눈으로 티베인을 돌아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를 보면 그 말밖엔 할 게 없냐?”
“너 같으면…!”
일로델이 다시 발끈하는 기색을 보이자 티베인이 “아, 그래, 그래.” 하며 팔의 힘을 풀었다. 결박에서 벗어난 일로델이 티베인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멀리 떨어졌다.
“응접실 창문이 열려 있던데. 네가 연 거냐?”
응접실 창문? 그러고 보니 밤새 안 닫았던가. 침대 근처를 살금살금 벗어나던 일로델이 움찔하자 티베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들어오라고 써 붙여 놓지 그래? 나랑 똑같이 태어나서 똑같은 거 먹고 자라온 놈이 왜 그렇게 멍청하냐?”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뭐, 나 때문이라고? 그래. 내 탓 해라. 그거라도 해야 네가 내 생각 한 번이라도 더 하지.”
일로델이 입을 꾹 다물고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티베인은 세상만사 귀찮은 듯 침대에 벌렁 누웠다. 제 침대에 누운 것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물론 일로델은 티베인이 침대에 편히 누워 있는 모습 따위 기억에 남겨놓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느낌이 그러했다.
“형은 오늘부터 저택에서 근무해. 무려 야만인 우두머리를 잡아 가둬놨으니, 당연하지.”
“…….”
“이런 상황에서 너 혼자 두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출근 안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티베인이 침대를 뒹굴뒹굴 뒹굴었다. 야만인 우두머리보다 야만인 같은 자식의 몸이 시트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정말 칼만 있다면 모가지에 들이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로델은 말없이 주먹을 꾹 쥐었다.
예전이었다면 형이 저택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이 아름답다 못해 저 티베인 자식조차도 예뻐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밀림에 굴러떨어진 기분이 이럴까. 그것도 온 사방에 짐승이 깔리고 출구도 없는 밀림이었다. 저 같은 인간은 이리저리 몰이를 당하다가 뼈째로 씹혀 먹히는…. 일로델이 한동안 말이 없자 티베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이제 좀 처한 상황을 알겠냐? 머리를 써.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도 몰라?”
“몰라. 그딴 거 알 게 뭐야.”
“멍청하긴. 수업 빼먹고 도망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티베인이 혀를 쯧쯧 찼다. 어딘지 가여워하는 투였다. 저에 대한 무시를 읽은 일로델이 근처에 있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 티베인은 그것을 움켜쥐고 냄새를 맡더니 길게 신음했다. 아까부터 움직임이 좀 둔한 것 같다 했는데, 제복에 감춰진 아랫도리가 불룩했다. 저런 꼴을 보고도 아군이니 어쩌니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놈이 미친놈 아닌가? 일로델은 진저리를 치며 방문을 열었다. 티베인이 어기적대며 그 뒤를 쫓았다.
“하나 더 알려 주자면, 며칠 뒤 어머니가 올 거야. 휴가가 아니라 황제의 칙사로 오는 거니까 오래는 못 있겠지. 어떻게 이용하는 게 효과적일지 잘 생각해 봐.”
*
지독했던 모래바람이 멎고 푸른 정원 위로 청명한 하늘이 드러났다. 일로델은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며 한달음에 별채를 찾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부터 들어간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하인이 준비해 둔 옷으로 곱게 갈아입었다. 일로델이 셔츠 차림으로 욕실을 나서자 문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어깨에 블랭킷을 걸쳐 주었다.
“과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져와.”
일로델은 하인이 머리를 말려 주는 동안 폭신한 의자에 앉아 체리를 오독오독 씹었다. 그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이는 건 물론이고,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로는 흥얼거림까지 쏟아졌다. 문가에 기댄 채 잠자코 일로델을 지켜보던 티베인이 참다못해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좋냐?”
일로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소식을 듣고 좋아진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만 빼고 다 좋아하지.”
면전에서 무시당한 티베인이 입을 댓 발 내밀며 구시렁댔다. 일로델은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달콤한 과즙을 음미했다. 오랜만에 맛을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바다 사막에서 그 난리를 겪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사막을 넘어 배를 타고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만약 그때 황궁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형제들의 미친 짓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조차도 실패해서 꼴이 이렇게 되었다는 점에는 한심함을 금치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낙태에 쓰는 독초를 손에 넣었고, 피어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알았다. 거기다 며칠만 기다리면 어머니가 온다. 그 말은, 조금만 참고 견디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래, 어쩔 셈이야?”
“뭘?”
“어머니가 오면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설마 다 일러바치겠단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티베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러바칠까 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혼날 짓은 왜 해? 일로델은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우위를 점한 표정이었다. 티베인은 고개 돌린 일로델의 말랑한 뺨을 쳐다보며 깜찍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깜찍해서, 물어 죽이고 싶었다.
“네가 바보처럼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번에는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시끄러워. 자꾸 말 걸지 마.”
“너는 이번 일을 단순히 형제간의 다툼이라 여기고 싶어 해. 내 말이 틀려?”
바락 짜증을 내려던 일로델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티베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흥, 나는 좋아.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장단에는 맞춰 줄 수 있지. 하지만 형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 그놈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야.”
“…….”
“나야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중 가서 울지 말고 그만 현실을 직시하란 얘기야.”
티베인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사이 일로델의 머리카락을 보송하게 말려 준 하인이 “식사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하고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일로델은 의자에 푹 파묻힌 채로 말이 없었다. 좋아하는 과일만 골라 집어 먹던 손도 멈춘 지 오래였다.
단순히 형제간의 다툼이라 여기고 싶어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일로델은 고개를 끄덕이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그리고 내심 놀랐다. 티베인 주제에,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의견이었다.
일로델은 그동안 잘 버텨서 형제들이 반성하고 사과하게 만들면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로건과의 대화 도중에 밀려왔던 깊은 절망감이 그가 처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돌아가기 글렀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안다고 뚜렷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제게 무슨 재주가 있어 형제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단 말인가? 같은 가문에서 같은 핏줄을 갖고 태어났지만, 가진 것마저 동등하진 않았다. 형은 머지않아 군사적 실권을 거머쥘 대공가의 후계자이고, 동생 놈은 나날이 승진의 길을 걷고 있는 군 장교였다. 하나만 있어도 벅찬데, 둘이 앞뒤로 버티고 서 있으니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에 반해 자신에게 있는 건 무엇인가. 저택 안에 있는 별채 하나와 말린 풀떼기뿐이다. 그깟 걸로 잘난 알파들을 어떻게 할 수 있기나 하면 모를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형제들만 생각을 바꿔 먹으면 되는 일인데. 피해자인 자신이 눈을 감아 주겠다는데, 가해자인 형제들이 그 선택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형이, 정말로 어머니를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긴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렇게 묻자 티베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 하는 거 보면 모르냐?”
“너랑 어머니는 다르잖아.”
“뭐가 그렇게 다른데? 이참에 좀 들어 보자. 내가 널 안 이뻐하길 했어, 뭘 했어?”
이러니까 미친놈의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없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나는 걸 느끼며 일로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속에 불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답답해서 물이라도 마셔야 살 것 같았다. 마침 하인이 가져다 놓은 컵과 주전자가 있어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티베인이 문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일로델의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그머니 감쌌다. 깜짝 놀란 일로델이 손에서 컵을 놓쳤으나 티베인이 재빨리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뭐, 뭐야?”
“어머니를 이용하라는 말은, 고자질하고 잠깐의 자유를 찾으란 얘기가 아냐. 그게 오히려 형이 원하는 일이라는 거… 이제 모르진 않겠지. 그 자식은 계기만 있으면 전부 뒤엎고도 남을 놈이야.”
또 무슨 음흉한 짓거리인가 했지만, 티베인은 진지한 눈으로 문을 돌아보고 있었다. 엿듣는 귀를 경계하는 듯했다. 일로델은 바짝 다가온 티베인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하고 물었다.
“나를 써먹으라니까. 어머니에게 나를 후계자로 밀어 달라고 해. 어머니는 네 말이면 껌뻑 죽으니까 들어줄 거야.”
“…뭐?”
“다른 사람 끼워 넣을 필요도 없어. 형이랑 싸울 명분을 줘. 내가 반드시 그 자식을 죽, 아니, 쫓아내 줄게. 그럼 되잖아.”
되긴 잘도 되겠다. 일로델은 김이 팍 샌 얼굴로 티베인을 노려보다가 어깨를 끌어안은 손을 쳐냈다.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인 시간이 아까웠다. 저 자식은 후계자 싸움이 무슨 장난인 줄 아는 모양인데, 제가 가서 한마디 한다고 뭐가 바뀔 일도 없거니와 다툼이 본격화되는 순간 변방에서 조용히 지내는 친척들까지 합세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될 거다. 그거야말로 자신이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넌 형에 비해 많이 딸리잖아.”
“뭣? 내가? 어디가, 어떻게?”
그걸 꼭 말로 해 줘야 알아? 야만인 소굴에서 주워 온 것 같은 자식이지만, 이럴 땐 징그럽게도 꼭 막내티를 낸다.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젓는 일로델을 티베인이 답답한 듯 노려보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형이 대공이 되면 이야기는 끝이야. 너나 나나 그 자식 손에 평생 놀아나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래서 형을 없애고 네가 대공이 되겠다?”
“너도 둘을 상대하는 것보단 하나가 나을 거 아냐? 그리고….”
티베인이 말끝을 늘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푸른색의 건방진 눈동자가 슬쩍 아래를 향했다. 일로델은 의미를 알 수 없어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라서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례한 시선은 일로델의 복부를 무심하게 훑었다.
“언젠가 태어날 애도 같은 생각일 테지. 그 전에 확실히 정리를 하자구.”
티베인의 눈동자가 다시 위를 향했다. 조금 전의 무심함이 거짓인 것처럼 오만하고 되바라진 눈빛이었다. 일로델은 티베인을 마주하며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자신의 장단에 맞춰 줄 수 있다고 했던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저 자식을 앞두면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만만한 동생 대하는 태도가 나오곤 한다. 사실은 형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녀석인데, 깜빡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
일로델은 대답을 기다리고 선 티베인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말없이 걷는 일로델의 뒤를 티베인이 묵묵히 쫓았다. 다른 때 같으면 대답을 재촉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웬일로 조용했다. 일로델은 침실로 들어가 배게 밑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길쭉한 나무 상자가 손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일로델이 상자를 티베인에게 내밀었다.
“너. 이거 뭔 줄 알아?”
“뭔데. 독초? 나 먹으라고?”
그렇게 말하며 티베인이 손을 뻗자 일로델이 재빨리 상자를 거둬들였다. 줬다 뺏는 행동에 티베인이 뭐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내 거야.”
“뭔데?”
“몸에 좋은 거.”
티베인이 피식 웃었다. 별난 소릴 다 듣는다는 투였다.
“그런 것도 챙겨 먹을 줄 아냐?”
“너랑 형이 나를 괴롭히니까, 이런 거라도 먹으면서 버틸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손대지 마.”
일로델은 다시 베개 속 깊숙한 곳에 상자를 숨겼다. 그리고는 신중한 눈으로 티베인을 살폈다. 티베인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그런 태도였다.
“벤에게 말하면 영양제 정도는 지어 줄걸. 내가 얘기해 줘?”
“벤은 못 믿어. 그리고…. 너도.”
침착하고 단호한 대꾸에 메마른 시선이 내리꽂혔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할 만큼 날카로운 기운이 풍겼다. 일로델은 마른침을 꿀꺽 넘기면서도 기어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일로델을 바라보던 티베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쉬울 리가 없지. 그 고집을 누가 이겨.”
“내가 널 후계자로 밀어 줄 일은 없어. 둘이고 하나고 상대할 생각도 없고.”
“그러면, 계속 줄다리기를 해보시겠다?”
마치 겁박하듯 위협적인 물음이었지만, 일로델은 도리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러자 티베인이 움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일로델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베개와 티베인을 번갈아 보았다. 희미하게나마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것이 희망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탈출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티베인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도 눈을 떼기 힘든지 일로델을 힐끔거렸다. 그를 마주한 일로델은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이 되어 웃을 수 있었다.
*
별채에서 식사를 마친 일로델은 차와 호위를 내오라 지시했다. 어제만큼이나 오늘도 바빴다. 피어스를 바꿔 끼려는 계획은 이미 형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손 놓고 있다고 뚜렷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차량이 준비되는 동안 하인이 바지런히 움직이며 일로델의 머리를 다듬고 손톱을 정리했다. 딸깍딸깍 손톱이 잘려 나가는 동안 티베인이 옆에서 감시하듯 눈을 부라렸다.
“너는 이름이 뭐지?”
난데없는 일로델의 질문에 하인이 잠시 멈칫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티베인이 재깍 대답하라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하인은 마지못해 입을 뗐다.
“마노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마노. 저 자식을 쫓아내.”
마노의 얼굴에 울적한 그늘이 졌다. 주인의 공간을 도맡는 일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다행히 진심은 아니었는지 일로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노가 서둘러 일로델의 소매와 옷깃을 정돈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뭐지?”
“죄송합니다. 피어스와 목걸이를 지금 발견하였습니다. 당장 가서 세척을 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깜짝 놀란 일로델이 귀를 가리며 펄쩍 뛰었다. 마찬가지로 놀란 마노를 두고 일로델이 허둥지둥 별채를 나섰다. 피어스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것은 몹시 불쾌한 두근거림이었다. 못된 짓을 들킨 기분이 이러할까. 아니, 그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남몰래 차고 있던 족쇄를 들킨 기분이었다. 불쾌감을 넘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는 일로델을 티베인이 힐긋거렸다. 시선이 목 근처를 훑었다. 일로델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쓸리다가 뒤늦게 티베인의 시선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목걸이는 또 뭐야. 가슴팍을 만져 보니 정말로 무언가 있긴 했다. 마침 별채 앞에 차가 도착했다. 일로델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차창에 목을 비췄다. 검은 유리에 하얀 물체가 별처럼 빛났다. 백금 사이에 작게 커팅된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예식용 목걸이였다.
“너!”
일로델이 불같이 화를 내며 티베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티베인은 어딘지 뜨끔한 얼굴을 하더니 뻔뻔하게 턱을 올렸다.
“자랑하는 거야? 예쁜데?”
“웃기지 마! 이거 뭐야!”
“너 잘 때 채웠는데…. 왜, 마음에 안 들어?”
티베인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일로델은 기가 차서 그 꼴을 노려보다가 목걸이를 마구 잡아당겼다. 그러나 일로델의 힘에 목걸이가 끊어질 리는 없었고, 그는 씩씩대며 목걸이를 풀기 위해 애를 썼다. 단단한 금속과 다듬어진 손톱이 목덜미에 붉은 줄을 죽죽 그어댔다. 티베인이 질겁을 하고 놀라서 일로델의 손을 끌어내고는 재빨리 목걸이를 풀어냈다.
“마음에 안 들면 풀어달라고 하지, 왜 성질이야?”
티베인이 툴툴대며 일로델의 눈치를 봤다. 아까만 해도 기분 좋게 휘어져 있던 눈동자가, 퍼렇게 날이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돼지야? 누가 그런 거 채워 놓으래!”
“돼지한테 누가 이런 걸 채워 놓냐?”
“네가 날 그렇게 취급한 거 아냐! 애완 돼지한테 하는 것처럼, 허락도 없이! 네 맘대로!”
그 말에 울컥해서 따지려던 티베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일로델의 눈 밑으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티베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일로델도 내심 당혹했다. 화가 나긴 했지만, 난데없이 눈물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반대편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모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일로델에게 손을 뻗던 티베인이 멈칫하고, 그사이 일로델이 쥐구멍을 찾은 쥐처럼 조수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훌쩍이고 있자 옆에서 손수건이 건네졌다. 일로델은 그걸로 얼굴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로건의 부하인 모릭스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뭐야, 진짜 운전기사가 된 거야?”
“이번에는 감시 목적도 있습니다.”
일로델은 아, 하는 탄식을 뱉으며 창문에 고개를 박았다. 사방에서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허락도 없이 채워 놓은 목걸이 때문에 화난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괴로울 일은 아니었다. 티베인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자식이 채워 놓은 목걸이 따위, 풀어서 던져버리면 끝인데 그렇게까지 욱할 건 뭐란 말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명백한 화풀이였다. 형에게 당한 짓을 티베인에게 투영하고 녀석에게 풀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미안하거나 후회되는 건 아니었지만, 해일 같은 무력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두려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늪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오갈 곳 없는 분노가 겹겹이 쌓여서, 잠깐 기분이 좋았다가도 깊은 우울감이 발목을 휘감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모릭스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창문에 기대 있는 일로델을 곁눈질했다. 어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호텔에서 보았을 때보다 마른 느낌이 들었다. 출발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마음이 불편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티베인 님과 싸우셨습니까?”
“신경 꺼.”
대화를 거부하는 앙칼진 대꾸가 돌아왔다. 모릭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대공가의 삼남이 미친 산짐승처럼 오렌지 나무를 들이받고 있었다.
“대령님께선 어제 일에 대해 아무 말씀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보고드리지 않았습니다.”
일로델이 슬쩍 팔을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자해를 끝낸 티베인이 운전석 창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모릭스가 창문을 내리자, 티베인이 “걔 옆에 앉아 있지 말고 나오시죠, 소령님. 죽여버리기 전에.” 하며 으르렁댔다. 모릭스는 아직 울음기가 남은 일로델을 바라보았지만, 일로델은 상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잠시 앉아 있다가 일로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순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휴무이십니까?”
“신경 꺼!”
엉뚱한 곳에서 쌍둥이 같은 두 사람이었다. 대공가의 형제들에게 연달아 같은 대답을 들은 모릭스가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티베인이 운전대를 잡은 차가 거칠게 출발하여 드넓은 정원을 빠져나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시 업무가 끝났다. 모릭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며 지나가던 하인에게 주변 정리를 지시했다.
일로델은 창가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었다. 티베인은 빠르게 차를 몰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일로델을 곁눈질했다. 운전대를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도 우냐?”
창밖으로 늘씬하게 솟은 측백나무 가로수가 지나갔다. 일로델은 그것을 뽑아 마구 휘두르는 상상을 했다. 야만인들은 가능하겠지. 지금 순간 그 미개함의 원천 같은 괴력이 가장 부러웠다.
“그게 뭐, 그렇게 울 일이냐? 나는 그냥, 그런 거 주면 좋아한다고 들어서….”
“안 좋아. 끔찍하게 싫어.”
서릿발보다 시린 대꾸에 티베인이 젠장, 말론 자식, 죽여버리겠어 하며 중얼거렸다. 일로델은 모릭스의 손수건으로 마른 뺨을 훔쳤다. 눈물은 멎었지만 잔잔한 분노와 일말의 어색함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고집스럽게 창밖만 노려보는 일로델을 티베인이 연신 돌아보았다.
“돼지 취급했단 소린 취소해. 네가 툭하면 그렇게 펄펄 뛰니까 몰래 채운 거 아냐.”
“…….”
“감히 널 그렇게 취급하는 놈이 있다면 나한테 데리고 와.”
“어쩌게.”
“뭘 물어? 잡아 족쳐서 돼지 밥으로 줘야지.”
야만인 자식. 일로델의 입에서 평소처럼 욕이 튀어나오자 티베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고비 넘겼다는 투였다. 당연한 듯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가로수길이 끝나고 평평한 흙길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낮은 건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일로델이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티베인을 보았다. 잠시 긴장을 풀었던 티베인이 허리를 바짝 펴며 일로델의 눈치를 살폈다.
“뭐, 왜.”
“세워.”
“어디 가는데?”
“약초방. 따라오지 마.”
티베인은 닭 쫓던 개처럼 차 밖으로 나서는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아차 싶어 일로델이 방문한 건물로 쫓아 들어가려 했다. 때맞춰 일로델이 밖으로 나왔다. 팔 한가득 소쿠리를 들고 있었다. 티베인이 들어 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일로델은 모른 척 무시하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반쯤 얼이 나간 티베인이 허둥지둥 운전석으로 돌아오자 일로델이 소쿠리에 담긴 것을 한 움큼 집어 건넸다.
“뭐, 뭐야? 나 주는 거야?”
“먹어.”
“그래, 뭐….”
티베인은 일로델이 건넨 생풀을 우적우적 씹었다. 풀뿌리에 흙이 잔뜩 묻어서 조금은 털어낼 법도 한데, 티베인은 거슬거슬한 흙과 함께 생풀을 질겅거리다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무식한 모습을 보며 일로델은 조금씩 마음이 풀려가는 걸 느꼈다.
상회에 등록된 약초방에서는 독초를 판매하지 않는다. 일로델이 구해온 것 역시 독초가 아닌 약초였다. 주로 몸 안의 열을 내리고 심신을 안정시켜 주며 피부 미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활용도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작용 때문이었다. 물론 일로델에겐 불임과 정력 감퇴 정도는 매우 사소한 부작용이었기에 그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티베인에게 약초를 먹이기로 했다.
“이거 뭐야? 그동안 먹은 것보다 맛이 괜찮은데.”
“잔말 말고 먹어.”
“나 지금 운전 중이잖아. 입에 넣어 줘.”
그래, 다 처먹어라.
일로델은 소여물 먹이듯 티베인의 입에 약초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소쿠리가 텅 비었다. 동생이 잘 먹는 걸 보자 기분이 나아진 일로델과 뜻밖의 행운으로 신난 티베인이 탑승한 차가 느릿느릿 흙길을 달렸다. 저 멀리 먼지 바람에 휩싸인 열차역이 보이자 일로델이 근처에 차를 세우게 하곤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
“약초방. 따라오지 마.”
티베인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위해 또 무엇을 사 올지 기대가 됐다. 목걸이 선물도 할 만한데? 티베인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아랫도리를 힐끔거렸다. 약초를 받아먹는 도중 일로델의 손가락이 혀에 닿았다. 움찔 놀라던 손끝이 얼마나 귀엽고 달큼한지 울면서 애원할 때까지 입에 넣고 빨아주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성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이걸 들키면 또 발작을 하겠지. 겨우 분위기가 좋아졌는데 또다시 다투고 싶진 않았다. 이 틈에 빨리 풀어주는 게 좋을지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티베인이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좁히던 그는, 다음 순간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
일로델은 주변을 경계하다가 몸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쫓기듯이 세공 가게를 찾아 들어간 그는 문에 붙어 바깥 동향을 살폈다. 티베인이 쫓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일로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생활 반경 안에서는 보기 어려운 너저분한 물건이 많았다. 청소라는 걸 모르는 듯한 가게 주인은 오늘도 사람이 오든 말든 작업에 매진 중이었다.
“의뢰한 물건을 찾으러 왔어.”
“원금은 가져오셨소?”
일로델이 지갑을 내밀었다. 아까 차에서 모릭스가 손에 쥐여 주고 간 것이었다. 노인은 지갑 안을 흘끗 보더니 책상에 있는 붉은 상자를 눈짓했다.
“확인해 보시오.”
일로델이 바깥을 살피며 냉큼 상자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안을 살핀 일로델이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근처에 있는 거울에 귀를 비춰 보고 다시 상자 안을 보았다. 똑같았다. 세세한 것까진 모르겠지만, 수많은 패싯의 개수와 그 사이의 각도가 소름 돋을 정도로 같았다. 심지어는 각도가 변할 때마다 날카롭게 빛나는 섬광마저 비슷했다.
겨우 하루 만에, 그것도 대충 본 걸로 이렇게까지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세공은 고사하고 보석에도 관심이 없는 일로델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가짜 피어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직접 귓가에 대 보았다. 육안으로는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절대 구분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건 어떻게 바꿔 끼는 거지?”
“내 일은 세공까지요. 부디 그 이상의 버거운 일을 부탁하지 마시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일로델은 혼자 끙끙대며 피어스를 바꿔 끼웠다. 과연 힘겨운 일이었다. 귓바퀴가 붉게 물들 정도로 용을 써야 했으니까. 일로델은 매정한 노인을 흘기며 진짜 피어스를 상자 안에 고이 넣었다. 그리고 얇아진 모릭스의 지갑을 챙기며 “고마워.” 하고 인사하곤 급히 가게를 나갔다. 고개를 숙인 채 작업에 전념하던 노인이 그 뒷모습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밖으로 나온 일로델은 품에 넣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버릴 수는 없겠지. 이걸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고 하니, 지금 버렸다가는 금방 들통날 것이다. 하지만 진짜 피어스에서 해방된 탓일까.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내버린 다음 속이 시원해지고 싶었다.
차라리 티베인에게 줄까? 제복 주머니에 넣어 놓으면 그 무식한 자식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위치를 추적해서 찾아온 형과 눈이라도 맞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똑같은 얼굴인데, 하필이면 왜 티베인이 아니라 저란 말인가. 하긴 그렇게 따지면 티베인은 같은 얼굴에 발정하는 미친놈이다. 원래 정상인은 미친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퀭한 얼굴로 골목을 빠져나온 일로델은 정차된 차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역 안에서 기차 연료를 보충하고 있는지 사방에 비릿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골이 다 띵한 느낌에 빨리 출발하라고 말하려던 일로델이 순간 멈칫했다. 운전석에 티베인이 없었다.
“…….”
일로델은 어리둥절해서 다시 차 밖으로 나왔다. 나른한 오후의 열차역은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이 한산했다. 역 앞의 광장에는 일로델이 타고 온 차와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 두 대뿐이었고, 대로변에는 행인 몇 명이 있었지만 야만인처럼 건들건들 걷는 사람은 없었다.
없다.
티베인이.
설마, 저를 놓고 가버린 건 아니겠지.
일로델은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 당황했다. 설마 싶긴 하지만, 그 심술궂은 자식이라면 얼마든지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못돼먹은 놈. 제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 진작 운전을 배워 두었어야 했다. 차가 있어도 운전할 줄 모르니 이렇게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하는 게 아닌가!
잔뜩 뿔이 나서 차바퀴를 걷어찬 일로델이 등을 돌렸다. 까짓거 걸어가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참에 호텔로 찾아가 외박하는 것도 좋겠지. 형이 찾아올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적어도 형은 저를 도로에 버리고 간 적은 없었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면, 형을 상대하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자고 티베인 자식이 모는 차를 얌전히 타고 왔을까? 목걸이 때문에 상황이 멋쩍어진 것도 있지만, 매일 아카데미 통학을 함께한 것으로 익숙해졌을 공산이 컸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 자식에게 길이 들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졌다. 씩씩대며 상점가에 들어서던 일로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긴 띠를 이룬 사람들이 길을 막고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바라보며 수군대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벌어지는 원숭이의 공연을 구경하고 있다기엔 표정이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 고개를 기웃거리던 일로델이 화들짝 놀랐다.
“너, 뭐 하는 거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일로델이 소리를 빽 질렀다. 구석에 사람을 몰아넣고 사정없이 걷어차던 티베인이 흠칫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일로델은 기가 막히는 한편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잠깐 사이 산처럼 쌓인 서운함을 따지고 들려 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티베인이 일로델의 팔을 잡아챘다.
“따라와.”
“뭘 따라와.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저 사람은 누구고?”
“잠깐 바람 좀 쐤어.”
“그걸 누가 믿어. 놔!”
일로델이 잡힌 팔을 흔들자 티베인이 귀찮다는 듯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꼈다. 짐짝처럼 들린 일로델은 어이가 없어서 벙쪄 있다가 달랑달랑 움직이는 제 몸을 느끼고 발버둥을 쳤다.
“야만인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내려놓지 못해!”
“야, 조심해. 떨어져.”
티베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여든 사람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일로델이 도움을 청하듯 고개를 쳐들자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근처를 지나가던 경비병 두 사람이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긴, 나를 납치하고 있잖아! 빨리 이 불한당을 잡아가!”
경비병의 당황한 시선이 티베인과 일로델을 거쳐 서로를 마주했다. 그 미묘한 반응에 티베인이 픽 소리 내며 웃었다.
“그걸 믿겠냐? 너나 나나 똑같은 낯짝인데. 누가 봐도 우린 형제야.”
이런 젠장. 일로델이 성질을 못 이기고 티베인의 허리께를 후려쳤다. 티베인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아, 하며 엄살을 떨었다. 무척이나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경비병이 주변을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저어, 대위님. 그,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다 끝났으니 가서 일이나 봐. 쓸데없이 관여하다 다치지 말고.”
그 말에 경비병이 뜨끔해서 물러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군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티베인 대위였다. 그는 제국의 명예로운 방패로 불리는 대공가의 자제였는데, 평소에는 한량처럼 굴다가도 수틀리면 한없이 잔인해지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자가 하나만 있어도 두려운데 둘이나 되다니. 경비병들은 투덕거리는 대공가 형제들의 눈치를 보며 구석에 쓰러진 사람을 살폈다. 몸이고 얼굴이고 할 것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혼자 이렇게까지 곤죽을 만들기 쉽지 않을 테니, 아마 망나니 같은 두 형제가 합심해서 폭력을 행사한 듯했다.
그들의 오해가 깊어지는 동안 일로델은 티베인을 붙들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억센 팔에 휘감긴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던 탓이었다.
“내려 줘. 아프단 말야.”
“아, 그래? 그럼 안아 줄게.”
“하지 마, 내려 줘. 티베인….”
버둥대는 사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일로델이 애원 조로 말했다. 바로 그때, 경비병들의 부축을 받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이, 일로델…?”
다 꺼져 가는 목소리가 몹시 가녀렸다. 가까스로 결박에서 벗어나 바닥을 밟고 일어선 일로델이 고개를 돌렸다. 짜증스럽게 혀를 찬 티베인이 일로델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금 이름을 불렸는데. 설마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일로델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낯선 시선으로 상대를 살폈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곧, 가슴이 덜컥할 정도로 놀라서 외쳤다.
“선생님?”
맞아서 부은 몰골이지만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 빛을 받으면 밀처럼 빛나는 고동색의 머리칼. 그리고 여린 어깨와 저를 향해 뻗은 가녀린 손까지…. 기억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듯한 그는 일로델의 첫사랑이었던 가정 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