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2부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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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다 된 시각이었다. 어둠이 내린 뒷골목에 깔끔한 복장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할 만큼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은 몹시 더러웠다. 내다 버린 쓰레기들,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오물과 그 주변을 탐색하는 쥐 무리가 끔찍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깔끔한 복장의 청년, 일로델은 발목을 스치는 뭉클한 감각에 돌덩이처럼 굳었다. 쥐 한 마리가 놀란 듯 찍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로델은 그보다 더 놀라서 한참을 굳어 있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며칠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땐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찾은 장소였지만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찾았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여러 번 방문이 이어지자 이젠 쥐와의 스킨십 정도는 감당할 만했다. 감당 못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찾는 물건은 정상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쥐와 오물이 산을 이루고 있어도 일로델은 이곳에 와야만 했다.
“누구쇼?”
“모릭스 베일리.”
“당신이?”
일로델은 긴장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뒷골목을 찾은 첫날, 일로델은 장렬하게 사기를 당했다. 현란한 말발을 가진 중개인은 그가 가진 수표와 차고 있던 시계까지 털어간 뒤 종적을 감췄다. 얼떨결에 세상의 쓴맛을 맛보게 된 일로델은 이제는 정말 그 누구도 믿지 않기로 했다. 모릭스 베일리라는 정체 모를 가명도 그렇게 생겨난 것이었다.
떨떠름한 시선으로 일로델을 훑어보던 사내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사내의 움직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가 묻어났다. 일로델은 코를 틀어쥐고 싶은 걸 참으며 다가오는 사내를 보았다.
“돈이 많다길래 색골 노인네인 줄 알았더니, 웬 도련님이었군. 교환에 필요한 건 갖고 오셨나?”
“물론이지.”
“보여줘 봐.”
악취만큼이나 무례한 말투였다. 마음 같아선 실톤 앞바다에 던져버려도 시원찮은 상대였으나, 일로델은 순순히 준비해온 것을 꺼내 들었다. 지폐 다발을 본 사내가 단숨에 눈빛을 바꿨다. 그는 교활한 뱀처럼 주변을 경계하고는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약초 두어 개가 들어가 있음 직한 크기였다. 일로델이 떨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 하자 사내는 잽싸게 몸을 틀어 상자를 뒤로 숨겼다.
“뭐 하는 거야? 내놔!”
기어코 인내심이 바닥난 일로델이 본색을 드러냈다. 워워. 진정하라는 듯 사내가 두 손을 들었다.
“급하게 굴지 마. 이야기는 들어야지.”
“필요 없어!”
“너 같은 녀석들이 나중에 와서 뭐가 잘 안 됐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지. 겨우 몇 분 소비한다고 안 나올 애가 나오고 그러진 않는다구.”
일로델의 푸른 눈동자가 쩍 얼어붙었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안광에 사내는 순간 긴장했지만, 곧 여유를 되찾고 킬킬 웃었다. 어린놈이 성깔하고는.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티는 다 내면서, 아득바득 독살을 부려대는 게 나름 귀여운 맛이 있었다. 어느 가문 도련님인지는 몰라도 발등에 불똥 제대로 떨어졌구먼. 암, 아직 엄마 아빠에게 혼나기 무서운 나이지. 사내는 한참을 혼자 킬킬거리다 일로델에게 물었다.
“얼마나 됐지?”
“뭐가?”
“임신 말이야. 상대는 여자 친구인가? 아니면 오메가?”
일로델이 주먹을 꽉 쥐자 사내가 어이쿠, 하며 몸을 물렸다.
“화내지 마. 나도 뭘 알아야 설명을 해 줄 거 아냐. 애를 지우고 싶은 거지?”
사내의 말에 일로델이 멈칫했다. 이윽고 고뇌 가득한 머리통이 작게 끄덕여졌다.
“파트너가 임신한 지는 얼마나 됐지?”
“잘, 몰라.”
“모른다구? 마지막 섹스가 언제였는데?”
“…….”
거스러미 하나 없는 미끈한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하늘이 쪼개져도 그따위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생긴 대로 까탈스러운 도련님이군. 사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질문을 바꿨다.
“배는 안 불렀겠지?”
“아직….”
“그럼 희망이 있군. 자, 이거 봐.”
사내가 상자 뚜껑을 슬쩍 열며 일로델에게 눈짓했다. 일로델은 시선을 내리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상자 안에는 뿌리가 무성한 식물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잘 들어. 이건 독초야. 두 개가 있지만 급하다고 다 먹였다간 여자 친구를 황천길로 보내게 될 거라구. 한 번에 하나씩, 최소한 일주일 간격을 두고 먹여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일로델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설프게나마 약초학도였다. 사내의 친절한 설명이 없어도 복용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었다. 저것은 진짜였다. 진짜 낙태에 쓰이는 독초가 맞았다. 절로 마른침이 꿀떡 넘어갔다.
“먹을 때도 절대 생으로 씹어선 안 돼. 푹 끓여서 달인 물과 함께 먹여.”
“달인 물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효과를 봐야지. 맛은 더럽게 없겠지만, 네가 먹을 것도 아니잖아?”
일로델은 또다시 킬킬대기 시작하는 사내에게서 상자를 빼앗아 왔다. 그리곤 수표 더미를 팽개치듯 내던지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에서 사내가 “다음부턴 아랫도리 조신하게 놀리라구. 여자 친구가 불쌍하잖아.” 하며 조롱 섞인 인사를 던졌다.
일로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지만, 속으로는 사내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렇다. 아랫도리는 조신하게 놀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 친구나 오메가를 상대로 놀리는 것은 더 없이 조신한 행위였다. 베타 남자를 상대로도, 뭐 좋다. 서로 합의된 관계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인간사 모두 제각각이니 드넓은 마음으로 이해 못 해 줄 것도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향해 벌떡 세우거나 흔들어선 안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래위로 둘이나 되는 형제들이.
동시에, 같이…….
상자를 쥔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문득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돈을 주우며 웃고 있을 사내를 향해 히스테릭하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네까짓 게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긴 그래,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너 같은 천한 인간도 들으면 기절초풍을 하겠지. 그런 개도 안 할 짓거릴 떠올릴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하겠냐고.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게 정상이지!
낙태약을 먹을 사람은 여자 친구도, 오메가도 아니었다. 바로 일로델 그 자신이었다.
*
땅거미가 내려앉고 거대한 저택 곳곳에 불빛이 반짝였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집으로 돌아온 일로델은 곧장 별채에 틀어박혔다. 초조한 얼굴을 한 그는 선반 깊숙이 독초가 든 상자를 숨기다가 불안한 듯 거둬들였다. 불결함의 온상인 천민 소굴을 오가며 힘겹게 구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어디에 둬야 하지? 욕실? 아니, 습기가 차는 장소에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러면 침실? 티베인 자식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오르본의 약병이 깨진 곳도 침실이 아니던가. 집 안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어디에도….
“일로델 님.”
미친 사람처럼 별채를 헤집고 다니던 일로델이 우뚝 섰다. 누군가가 침실 문가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낯이 익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별채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하인이었다.
“뭐야?”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져와.”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러나고, 일로델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설령 상자를 누군가에게 들킨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남이 보기엔 평범한 식물일 뿐이고 이곳은 자신의 연구실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연구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지만, 별채 안에는 이와 비슷하게 생긴 독초나 약초가 널려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로델은 베개 아래에 독초가 든 상자를 조심스럽게 넣어놓고 침실을 나섰다.
별채는 본래 커다란 응접실과 작은 침실, 욕실이 딸린 아담한 건물이었다. 귀빈용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공가에 귀히 대접받을 만한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찾는 이 없이 해묵은 별채는 엄한 안주인의 명령으로 일로델의 연구실이 되었다. 악몽 같은 일의 시작이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저를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워하다 뿐일까? 어디선가 낄낄대면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연구실이 저택 외부에 만들어졌다면 적어도 마음 편히 쉴 곳은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독초 하나 숨기겠다고 식은땀을 흘리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개만도 못한 자식과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었겠지.
“…….”
테이블 앞에 앉아 막 수프를 떠먹으려던 일로델이 문득 손을 멈췄다.
“뭐야? 네가 웬일로 밥을 다 챙겨 먹고 있어?”
예고도 없이 별채 문이 벌컥 열렸다. 군용 워커의 딱딱한 소음이 바닥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티베인이었다. 그는 안 그래도 풀어 헤친 제복을 갑갑한 듯 가슴팍까지 열어젖히더니, 주저 없이 일로델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봐, 내 것도 가져와.”
“알겠습니다.”
일로델의 식사 시중을 들던 하인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준비해 두었던 식사를 티베인 앞에 가져다 놓았다. 언제부터인가 대공가의 두 도련님은 별채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아마, 둘째 도련님이 별채에서 생활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평소 일 잘하기로 소문난 하인은 눈치 빠르게 일로델과 티베인의 식사를 함께 갖춰 두었다.
테이블을 좀 더 큰 걸로 바꿨으면 좋겠는데. 하인이 한가한 생각을 하며 티베인의 식사 준비를 할 때였다. 일로델이 탁 소리를 내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티베인과 하인, 두 사람의 시선이 일로델을 향했다.
“왜 그래?”
“안 먹어.”
“갑자기? 방금까지 잘 먹고 있었잖아.”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 차라리 나가서 흙을 파먹지, 야만인 놈과 겸상하고 싶진 않았다. 저 하인도 미친 것이 아닌가? 시키지도 않은 식사는 왜 준비해? 일로델은 당황하여 눈을 내리까는 하인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 티베인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너….”
“나가. 지금 당장.”
냉랭한 일로델의 말에 티베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어디 가서 쌍둥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꼭 닮은 얼굴이었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분위기의 일로델과 난폭한 기운을 풍기는 티베인을 구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일로델을 올려다보던 티베인이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 얌전해서 좋았는데, 슬슬 시작이로군…. 알았으니까 앉아.”
“싫어.”
“뻗대지 말고, 앉아. 강제로 앉히기 전에.”
일로델은 들은 척도 않고 몸을 돌렸다. 저 자식이 있겠다면 제가 나가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얌전히 티베인의 방문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게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저런 놈 뭐가 무섭다고. 바로 그때, 억센 손이 일로델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일로델이 후드득 몸을 떨었다.
“…….”
묘한 정적이 흐르고, 당황한 듯 티베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잠시 굳어 있던 일로델은 덫에서 빠져나온 들개처럼 허겁지겁 별채를 뛰쳐나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무슨 정신으로 본채까지 뛰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불빛을 향해 무작정 내달린 일로델은 현관 앞에 서서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하인들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뛰쳐 들어간 일로델이 제 손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온갖 청소 도구를 문 앞에 쌓아두곤 발작처럼 소리쳤다.
“아무도 들이지 마. 절대, 아무도!”
“이, 일로델 님?”
“쥐새끼 하나라도 안에 들였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설마 정원에서 쥐라도 보신 것일까?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던 하인 둘이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로델은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걸음을 옮겼다. 본채는 무척 오랜만에 찾은 것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저뿐인지, 지나가는 하인들은 놀라는 기색 없이 허리를 숙여 왔다. 혼자 이상한 세계에서 헤매다 돌아온 기분이 이럴까. 그리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불쾌하기까지 했다.
일로델은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방 안은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일로델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는 응접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램프를 노려보다가 닫힌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침실, 욕실, 옷방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온전히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걸 확인하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일로델은 터덜터덜 걸어 응접실 소파에 몸을 눕혔다.
침실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다시없을 해괴망측한 짓거리가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형 로건은 제게 선택을 강요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인연을 끊느냐, 형제들을 받아들이느냐의 기로에 서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짐승 같은 티베인이 옳다구나 제게 달려들었다.
“…….”
그랬던가? 아마 그랬을 거다. 그 자식은 야만인이니까. 그리고 앞뒤로 단단한 품에 둘러싸인 채 끊임없이 흔들렸다. 가슴이고 등이고 할 것 없이 혀로 핥아지고 탄탄한 피부와 맞닿아 비벼졌다. 형과 동생의 성기가 쉴 새 없이 아래를 쑤셔댔다. 배 속이 터질 것 같아도 멈추지 않았다. 애원 섞인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안에 가득 찬 알파들의 정액이 질퍽이는 소리를 냈다. 마치 귓속으로 파고드는 물기처럼 끈적하게….
‘철컥.’
선잠이 들었던 일로델이 진저리를 치며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서 축축했다. 악몽인지 다른 무엇인지 모를 질척한 꿈 탓이었다.
설마.
일로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바지 안을 확인했다. 특별한 일 없이 보송보송했다. 당연하지. 그 일을 떠올리고… 그렇게 되는 게 말이나 돼? 그래, 당연한 건데. 어쩐지 아득한 기분을 느낀 일로델이 눈을 질끈 감은 찰나였다. 조용한 방 안에 ‘철컥’ 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문손잡이가 사슬에 걸리는 소리였다.
‘젠장, 잠갔잖아.’
문 너머에서 둔탁하게 울리는 것은 티베인의 목소리였다. 일로델은 바지춤을 부여잡은 채 얼어붙었다. 철컥, 철컥, 문손잡이가 아쉬운 듯 두어 번 더 흔들리다 멈추었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일로델은 한참을 굳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화려한 문짝에 달라붙어 바깥 동향을 살폈다. 포기하고 간 모양인지 조용했다. 무능한 하인 놈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무능한 건 자신이다. 제 명령이니까 하인들도 우습게 듣고 잊은 것이다. 문이라도 굳게 잠가놔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늘 그랬듯 아무 생각 없이 열어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또다시 철컥, 하며 손잡이가 움직였다. 일로델이 기겁하고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흔들리던 손잡이는 칭칭 감아둔 사슬에 막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상태로 힘을 주는 모양인지,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려진 문짝 어딘가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
일로델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당황해서 두리번대는 고갯짓이 절박했다. 문이 부서지면 던질 요량으로 찻잔을 집어 든 순간, 한계까지 뒤틀렸던 손잡이가 제자리를 찾았다.
‘아, 급할 거 없지. 어디 두고 보자고.’
위협과 같은 중얼거림이 낮게 깔렸다. 이윽고 상스러운 욕지거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일로델은 멍하니 서 있다가 탈진한 듯 주저앉았다. 그것도 잠시, 벌떡 일어나 달렸다. 침실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넓고 포근한 침대 안으로 파고든 일로델은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티베인에게 찻잔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