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변함없는 것 (9/18)

변함없는 것

바다 사막에서 돌아온 날, 로건은 단언했다. 일로델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할 거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던 티베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로건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게 네 아이가 될 수도 있겠지.

사기당하는 얼간이들 말을 들어보면 홀린 것처럼 따르게 됐다고 하던데, 딱 그 짝이었다고 티베인은 회상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미친 짓 같았지만 어쨌든 동시에 사정해서 일로델의 뱃속에 쏟아냈다. 평평한 배가 살짝 솟아서, 눈 돌아가게 귀여웠지.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도 애를 밸 만큼 정액으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당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역시 사막에서 죽여버릴 것을.”

“예?”

보고를 이어가던 말론 중사가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티베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계속해.”

“예….”

말론 중사는 힘없이 대답하며 문서로 시선을 내렸다. 사실 그는 이미 아까부터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상사가 계속하라면 계속해야 했다.

“감사 결과, 실톤행 열차 외에도 강화 유리로 교체하지 않은 열차가 있었습니다. 장부 역시 허위로 작성되어 있었고 그밖에도 지원금을 횡령한 결과가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그러게 왜 도시 방비한다고 쓸데없는 데다 돈을 퍼부어? 군인 놈들은 멍청해서 큰일이야.”

그거 다 너네 가문에서 나온 돈이야. 말론 중사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원금을 횡령한 철도 회사는 군에서 인수하고, 관리 권한은 중위님께 위임한다는 상부의 명령입니다.”

“뭐가 어째?”

내내 삐딱하게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티베인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그걸 내가 왜 맡아? 다른 놈들은 뭐 하고?”

“그, 아무래도 다른 장교들은 바쁘다 보니 비교적 한가하신 중위님이….”

“뭐야?”

헉. 기나긴 보고의 후유증으로 너무 솔직해진 말론 중사가 급히 숨을 삼켰다.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티베인은 이내 싱겁게 웃었다.

“하긴, 내가 좀 한가하긴 해.”

“죄, 죄송합니다.”

“아니, 잘 얘기했어. 나는 한가한 게 좋아. 일이 없어야 일찍 퇴근하고 집에 가지. 안 그래?”

말론 중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 같아 보여도 한없이 진담인 걸 알기 때문이었다. 티베인 중위가 일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부대의 훈련이나 교육 같은 통상 업무는 곧잘 보지만 그 이상은 내팽개치고 퇴근하기 일쑤였다. 명령을 받고 멀리 나가기라도 하는 날은 끔찍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 한다며 병사들을 밤낮없이 굴려대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부대원 모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집에 뭐가 있기에 저리도 득달같이 퇴근을 하려 하는가.

“안 한다고 해.”

역시나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오자 말론 중사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주, 중위님, 하지만….”

“아니, 내가 직접 전하지.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나한테 일을 떠넘겼지?”

눈치가 없는 걸 보니 어디 변방에서 구르다 온 촌놈인가 본데. 티베인이 위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말론 중사는 뒷걸음질 치며 그게, 저기, 같은 말을 주절거리다 발이 꼬여 넘어졌다. 티베인은 공중에 펄럭 흩날리는 종이를 잡아채고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철도 관리 위임 명령. 결재권자. 이름은….

“이, 개자식이.”

문서를 읽던 티베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결재권자 옆에는 ‘로건 록퍼스’라는 우아한 곡선의 서명과 날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

그날 오후, 말린 약초를 실은 트럭이 저택을 방문했다. 혼자 정리하겠다며 사람들을 물린 일로델은 문 옆에 쌓인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힘줄이 끊긴 것처럼 손발에 힘이 없다. 일거리가 생기면 뭐라도 하게 될 것 같았는데 아무 의욕도 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무기력증이었다.

“야, 나 왔어.”

별채 문이 벌컥 열리더니 티베인이 들어섰다. 위아래로 잔뜩 구겨진 제복 차림이 볼만했다. 부대에 있다 퇴근한 모양인데, 굳이 비유하자면 신나게 놀다 들어온 개 같았다.

“…….”

일로델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저 자식이 올 시간인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유일하게 의욕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면 이때였다. 저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티베인이 뒤를 따라왔다.

“저 상자들은 다 뭐야? 내가 옮겨줘?”

“손대지 마.”

“어차피 옮길 거 아냐? 해줄게.”

누가 부탁이나 했다고 생색이라도 내는 말투였다. 일로델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러자 졸졸 쫓아오던 티베인도 제자리에 섰다.

“건들지 마.”

“…….”

“네 손에 닿느니 썩게 두는 게 나아.”

썩지 말라고 말린 거지만 썩을 때까지 둘 용의도 있었다. 그런 의사는 얼굴에도 전부 드러났을 것이다. 티베인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뭐. 그까짓 거 썩으면 다시 사면 되고.”

“필요 없어. 안 사.”

“뭐든 너 좋을 대로 해. 나도 나 좋을 대로 할 거니까.”

이번엔 일로델이 울컥해서 이를 악물었다. 그때부터다. 형과 함께 개도 안 할 짓거리를 벌인 이후로 묘하게 티베인의 태도가 변했다. 예전 같으면 성질을 못 참고 손을 휘둘렀을 녀석이 이상하게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대단하게 보이는 건 아니고, 약간의 인내를 배운 야만인 같았다.

일로델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등을 돌렸다. 약초 상자를 가뿐하게 짊어진 티베인이 어슬렁대며 따라붙었다.

“나 내일부터 좀 늦어.”

어쩌라구. 일로델은 선반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잠도 제대로 못 드는 날이 이어지면서 각성제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잠들어 봐야 악몽밖에 더 꾸겠는가. 약효가 떨어지면 머리가 쪼개질 듯이 괴롭지만 당장은 눈을 뜨고 있는 게 나았다.

“망할 철도 회사 놈들이 지원금을 꿀꺽하는 바람에 일거리가 늘었어. 나더러 거길 관리하라는데, 지시한 놈이 누군지 알아?”

“…….”

“형이야. 너한테서 나를 떼어놓으려고 작정한 거지. 음흉한 자식.”

약을 들이켜려던 일로델이 멈칫했다. 티베인은 작업대 옆에 약초 상자를 내려놓고 그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다음 달엔 대위로 진급까지 해야 해. 썩을,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놈의 집구석에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별안간 쿵 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 푸념을 늘어놓으려던 티베인이 벌떡 일어나 돌아보았다. 탁자에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일로델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깜짝 놀랐네.”

쓰러진 줄 알았잖아. 티베인이 긴장을 풀며 꿍얼댔다. 제 걱정을 했단 말투였지만, 그조차도 일로델에겐 고깝게 보였다.

“그래서 뭐.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엉?”

“관리직도 맡고, 진급도 해서 축하한다고 해줄까?”

티베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그 멍청한 낯짝을 보며 일로델은 입술을 짓씹었다. 저와 똑같은 얼굴인 주제에 표정 관리도 안 하고 옷차림도 엉망이고 늘 기준 없이 제멋대로 산다. 그러면서도 가져갈 건 다 가져가고 끝없이 위를 향해 올라간다. 겨우, 알파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에 비교해 자신은 무엇인가.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동생과 형에게 추잡한 일을 당한 뒤 무작정 거처를 별채로 옮기고 틀어박혔다. 그 일이 있었던 본채에 들어가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티베인이 바로 옆방을 사용한다는 게 몸서리치게 싫었다. 하지만 저 야만인 자식은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매일같이 별채에 찾아왔다. 매일같이….

그 뒤로 오늘이 며칠째더라.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일로델은 손안에 든 잔을 꽉 쥐었다.

“나가.”

바보같이 눈만 끔뻑이던 티베인이 헛웃음을 뱉었다.

“방금 집에 왔는데 어딜 가.”

“본채로 가면 되잖아.”

“네가 없는데 그 구석엔 뭐 하러 들어가냐?”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며 코웃음을 친 티베인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상자에 주저앉으려는 그의 뒤로 잔이 날아와 부딪혔다. 안에 있던 액체가 사방으로 튀고 진회색의 제복이 짙게 젖어 들었다.

“나는 너랑 있기 싫어. 나가.”

“…….”

티베인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젖은 어깨를 보았다. 이상한 걸 보듯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 화를 참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곤 바닥을 구르는 유리잔을 집어 들고 일로델에게 다가갔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일로델은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뒤는 수납 가구로 가로막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도망갈 곳을 찾아 두리번대는 일로델의 앞으로 티베인이 바짝 다가섰다.

“잘했어.”

“…….”

“형한테도 그렇게 해. 알았지?”

일로델은 마른침을 삼키며 티베인을 마주 보았다. 혼자 성장기인지 전보다 시선이 조금 높았다. 나긋한 입과는 다르게 분노 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티베인이 탁, 소리 나게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놀란 일로델이 어깨를 움찔대자 티베인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빌어먹을.”

입안으로 욕지거리를 주워 삼킨 티베인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나가기 전 화풀이 하듯 문을 걷어찬 건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별채 문이 쾅 닫히고 일로델은 몸에서 힘을 뺐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긴장뿐인가. 솔직한 말로, 무섭기까지 했다. 언제 손을 뻗어 옷을 벗기려 들지 모르는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이번엔 어떻게 넘어갔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끔찍한 일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땅만 바라보던 일로델은 비틀비틀 침실로 들어갔다. 달여놓은 약도 사라지고 남은 건 몰려올 두통뿐이었다. 미련하게 견디느니 악몽 속에서 헤매는 게 낫지만, 그것도 잠이 들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일로델이 침대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사이 갑자기 또 별채 문이 벌컥 열렸다.

“진짜 답답해서 한마디만 하겠는데, 나는 자랑하려던 게 아니고… 뭐야, 어디 갔어?”

뒤끝이 넘치는 티베인이었다. 일로델은 화들짝 놀라서 시트 안에 숨었다.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침실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야… 자냐?”

일로델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꾹 감았다. 잠든 척을 하면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티베인은 잠시 문가에 서 있는 듯하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로델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감추려 몸을 웅크렸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왜 들어오는 거야.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이었다.

“진짜 자?”

자는 사람한테 그건 왜 물어. 일로델은 당장 일어나 따지고 싶은 걸 참았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건 공포였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자는 척도 해본 사람이나 하는 것인지 침묵이 길어질수록 눈을 뜨고 싶어졌다.

아주 조금만 실눈을 떠봐도 되지 않을까.

일로델이 고민하던 찰나였다.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시트가 스륵 내려갔다.

“…….”

시선에도 감촉이 있었다. 시트 밖으로 드러난 뺨이 깃털에 닿은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일로델은 눈도 뜨고 뺨도 긁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야만인 자식. 온갖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더니 이젠 이렇게 말려 죽이려나 보다.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작정인지 티베인이 숨소리마저 죽였다. 기척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뺨만 간질간질했다. 어느 순간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일로델은 제가 낸 소리인지 티베인이 낸 소리인지 도통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뺨을 지나 목덜미, 어깨, 등허리까지 간지럽고 이상한 느낌이 났다.

더는 못 참아. 긴장을 견디다 못한 일로델이 벌떡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뺨에 부드러운 것이 닿더니 쪽, 하는 소리가 났다.

“티베인님?”

“헉.”

티베인이 물 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말을 걸었던 하인도 덩달아 놀랐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티베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 새끼….”

“허억, 죄송합니다.”

새파랗게 질린 하인이 뒷걸음질 쳤다. 자비 없이 쫓아간 티베인은 하인의 멱살을 쥐고 탈탈 흔들었다.

“뭐가 죄송한지는 알아? 어?”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 아무것도….”

“뭐가 아무것도야. 내가 뭐, 해선 안 될 짓이라도 한 거 같아?”

티베인이 침실 쪽을 곁눈질하며 낮게 으르렁댔다. 눈치 빠른 하인 역시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하며 소곤거렸다. 누가 보면 희극이 따로 없다고 할 꼴이었다. 티베인은 쯧, 하고 혀를 차며 하인을 내던졌다.

“괜히 깨우지 말고 나와. 오랜만에 깊이 잠든 것 같으니까.”

“네, 네.”

하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잠든 걸 확인하고 있었던 거구나. 그렇겠지. 엄청난 비밀을 목격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인이 침실 문을 조심조심 닫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별채 밖으로 두 사람의 기척이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일로델이 머뭇머뭇 몸을 일으켰다. 가장 처음 한 일은 뺨을 닦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었다. 말캉하고 야릇했던 감촉이 손에도 옮겨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대신 시트로 뺨을 슥슥 닦았다. 그러면서도 어이없는 웃음이 픽픽 나왔다.

화를 내고 나갔다 들어왔으면 차라리 한 대 치던가, 겨우 뺨에 주둥이나 문지르려고 사람을 쳐다봤단 말인가. 같잖아도 저렇게 같잖은 놈이 없다. 얼마나 우스운지 저런 놈을 잠깐이라도 무서워했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했다.

일로델은 베개를 툭툭 두드리고 다시 누웠다.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오랜만에 머리가 맑았다. 이제 훼방을 놓을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 푹 자고 나면 생각이 차분하게 잘 이어질 것 같다고 일로델은 생각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저택의 오후였다.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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