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외전)
어느 날의 행방불명
저택에 아침이 밝았다. 식료품을 실은 차량이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적하던 정원에 활기가 돌았다. 오늘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저택의 주인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로건은 테라스 너머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치곤 틀이 잡힌 골격과 흔들림 없는 단정한 자세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셰본이 작게 인기척을 냈다. 로건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그렇진 않아요.”
로건이 담담하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마침 그의 뒤로 호위 차량이 줄줄이 정문을 통과했다. 그중 어딘가에 헤롯과 갓난아이들이 타고 있을 터였다. 하나둘 차고로 들어오는 검은 차들에 시선을 뺏긴 셰본에게 로건이 목 인사를 했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네.”
“곧 헤롯이 올 텐데, 인사는 해야지.”
“나중에요. 어머니도 쉬셔야죠.”
착하게 대답하며 미소짓는 로건을 보며 셰본도 웃어 보였다. 그러나 희미하게 굳은 입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통찰력이 남다른 편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첫아들 앞에선 언제나 안개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일 셈일까. 스쳐 지나가는 로건을 묵묵히 바라보던 셰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감정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건이 걸음을 멈추고 셰본을 돌아보았다.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인간의 감정을 모를 리가 없어. 너무 잘 알아서 시시한 거겠지. 다 알고 보는 마술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는 법이니까.”
로건에겐 트릭투성이인 마술을 즐기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영리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술사들은 마술에 애착을 갖고 즐기는 자들이야. 네게도 애착을 느낄 만한 상대가 생겼으면 좋겠구나.”
“그 상대가 가족들이길 바라는 건가요?”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나는….”
잠시 망설이던 셰본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동생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걸로도 충분하단다.”
로건은 대답 없이 웃었다. 그는 셰본에게 인사하고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답을 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
록퍼스 가문은 알파만 태어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그리고 귀족가에서 태어난 알파란 곧 후계자를 의미했다. 당연하게도 록퍼스가는 대대로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수많은 분쟁을 넘어 근세에는 자식을 하나만 두게 되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수명이 늘어나서 여분이 필요가 없어진 덕분이었다.
록퍼스가에선 자식이 늘어날수록 파란이 일어난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헤롯은 암묵적인 규율을 깼다. 그녀의 첫아들인 로건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로건은 어디 있지?”
“아까부터 방에 계신다고 합니다. 소식을 알아올까요?”
“됐다,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라. 소란스럽게 굴지도 말고….”
로건의 입장에선 경쟁자가 영역에 들어온 셈이었다. 당장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아기들이 있는 방은 하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문제없겠지. 헤롯이 하인에게 그만 가보라고 손짓하며 침대에 몸을 눕힐 때였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셰본이 방 안에 들이닥쳤다.
“헤롯, 몸은 좀 어때?”
“…….”
헤롯이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셰본이 서둘러 다가와 헤롯을 부축했다.
“그냥 누워 있지 뭐 하러 일어나.”
“감히 누굴 병자 취급하는 거야? 시끄러우니까 입이나 다물어.”
헤롯이 차갑게 셰본을 뿌리쳤다. 셰본과 헤롯은 한때 열애설을 뿌리며 불타는 연애를 했지만, 정략결혼으로 맺어지면서 서로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적어도 헤롯은 그랬다. 결혼 후에는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던 그녀가 거침없이 반말한다는 건 매우 기분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셰본은 기가 죽어서 헤롯의 눈치를 보았다.
“한 달 동안 연락도 없었던 건 너무했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냐. 네 자식들이지.”
“물론 우리 아기들도 걱정했지.”
헤롯은 코웃음을 쳤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기애가 강한 알파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자기 일만으로도 아주 바빴고, 아이는 유모와 교사에게 맡겨놓으면 어느새 성장해 있는 존재였다.
알파인 데다 황족인 그녀 또한 자식에게 관심 없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둘째 아이의 죽음과 한 번의 유산이 그녀를 바꿔놓은 것이다.
저를 훑어보는 헤롯의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셰본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
“정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휴가까지 내고 집에 와 있었겠어.”
그야, 지금 가장 위험한 로건이 이곳에 있으니까.
“…….”
헤롯과 셰본의 시선이 맞았다. 잠시 후 헤롯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 쉬었다.
“로건은 요즘 어때?”
“많이 컸어. 키도 훌쩍 커서 못 알아볼걸.”
헤롯은 로건이 갓 태어난 둘째 아이를 죽인 이후로 그를 보지 않았다. 셋째를 갖고 오랜만에 집을 찾았다 유산한 뒤로는 저택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황족이었고 후계자 다툼은 질리도록 겪어왔다. 하지만 아직 한참 어린 아이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머리가 워낙 좋아서 교사들이 부담스러워해. 더 수준 높은 교사를 붙여줘야겠어.”
“군 간부 중에 골라서 하나 붙여주든가.”
“저런, 직권남용이라고 한 소리 듣겠군.”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해?”
대공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은 헤롯과 남매지간인 황제 말곤 없었다. 셰본이 쓴웃음을 지으며 헤롯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잠시 버티던 헤롯은 못 이긴 것처럼 셰본에게 기댔다.
“로건도 우리 아이야.”
“알아.”
“올해 여덟 살인 건 알지? 아직 어려.”
“어려도 알 건 다 알아. 아니까 제 동생을 죽였지.”
“뭐… 그건 그래.”
말문이 막힌 셰본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직 어린 아들이 행한 짓은 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둘째가 태어난 바로 다음 날, 로건은 하인이 먹는 수면약을 가로채서 아기에게 먹였다. 아기가 사망한 후 그 하인은 처분될 위기에 처했지만, 유유히 이실직고한 로건 덕에 간신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로건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섯 살 어린아이가 벌이기엔 소름 끼치게 치밀한 행위임은 분명했다.
“그만큼 당해줬으면 됐어. 또 못된 짓을 벌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
“어쩔 셈이야?”
“정 안 되면 직접 손을 써서라도 막아야지.”
셰본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입가를 가렸다. 세상에 다시없을 냉혈한처럼 말하고 있지만, 차마 그 사달을 낼 수 없어서 도망친 사람이 헤롯이었다. 덕분에 무혈입성한 황제는 물러 터진 누나를 궁에 불러들여서 알뜰하게 써먹기까지 하고 있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셰본은 씰룩이려는 입가를 안정시키며 헤롯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그렇지만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이긴 했다. 아기들이 무사히 세상에 나온 이상 같은 일을 또 반복하게 만들 순 없었다.
로건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형제끼리 격리해서 양육하는 방법도 생각은 해보았지만, 좋은 수는 아니었다. 로건이 동생들보다 7살이나 많은 이상, 해가 지나면 권력의 격차는 심해질 것이고 때가 늦춰질 뿐이지 결국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냥 남남처럼 지내줘도 좋으니까 가족이라는 것만 좀 인식해줬으면 좋겠는데.
비슷한 고민을 하던 헤롯도 답을 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헤롯의 표정에서 피곤함을 읽은 셰본이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헤롯은 사절하지 않고 셰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아이들은 보고 오셨습니까?”
“아직….”
왜 또 존댓말이야, 사람 서운하게.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셰본을 헤롯이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가서 보고 오세요. 놀랄 겁니다.”
“왜? 쌍둥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생김새가 다르기라도 해?”
“그건 아니지만… 보시면 압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하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셰본은 아이들을 보러 가기보다 헤롯의 옆에 있는 것을 택했다. 매번 황성의 경비다, 애인과의 여행이다 바빠서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던 아내였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했다.
“안 바빠요?”
“당신이랑 누워 있을 시간은 있어.”
셰본이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헤롯의 옆에 몸을 눕혔다. 모난 눈으로 그 꼴을 바라보던 헤롯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휴가라더니 정말이긴 한가 보네. 하긴, 산후조리를 막 끝내고 돌아온 아내가 집에 왔는데 지가 감히 어딜 가겠어. 헤롯은 조금 관대해진 기분이 되어 제안했다.
“그럼 한숨 자고 같이 아기들을 보러 갑시다.”
“좋지.”
“내일 같이 유모 후보도 물색하고요. 쌍둥이니까 유모는 둘을 구하는 게 좋겠죠?”
뭐든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그녀답게 유모를 둘이나 붙여줄 심산인 것 같았다. 셰본은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라며 웃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헤롯이 그를 곁눈질했다.
“왜 그래요?”
“미안, 헤롯.”
“네?”
“내일은 힘들어.”
힘들다니? 헤롯은 의아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셰본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휴가가 오늘 저녁까지였거든.”
“네?”
“해가 지기 전에 나가봐야 하는데….”
헤롯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당장 로건이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는데, 오늘까지가 휴가라고? 싸늘한 시선과 마주한 셰본이 식은땀을 흘렸다.
“미, 미안.”
헤롯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힐금힐금 그녀의 눈치를 보는 셰본을 침대 밖으로 걷어찼다.
“당장 꺼져, 이 웬수야!”
악, 하는 비명이 짧게 침실을 울렸다. 꼭 잘 나가다가 나사 빠진 짓으로 점수를 까먹는 불쌍한 자의 비명이었다.
*
고요한 새벽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든 탓일까. 그는 애매한 시간에 눈을 떴다.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로건이 몸을 일으켰다. 사실 눈을 뜬 이유가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저택 안에 있을 어느 존재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손톱 아래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는 느낌. 처음 겪었던 것보다 더 불쾌한 건 자신이 그만큼 알파로서 성장한 탓일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낮에 셰본이 찾아와 부탁 조의 말을 했었다. 딱히 살인을 즐기는 건 아니기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쾌함을 무시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목적지는 찾기 쉬웠다. 헤롯이 묵는 방 근처에서 하인 둘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예상한 바였다. 잔뜩 경계 중일 헤롯이 아무 방비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로건은 창문 근처에서 타오르는 랜턴을 흘긋거리곤 다시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로, 로건 도련님? 여긴 무슨 일로….”
“동생들을 만나러 왔어.”
하인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한밤중에? 그들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대공가의 장남을 돌아보았다. 언젠가 대공가를 잇는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분이었다. 가능한 한 거스르고 싶지 않았지만, 교대할 때 들은 명령으로는 절대 누구도 들여선 안 된다고 했다. 하인들은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어렵습니다, 도련님. 낮에 다시 오시면 저희가 허락을 받아서… 도련님?”
벌써 이해해준 것일까. 로건이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냥 변덕으로 꺼내본 말인 듯했다. 도련님께서 잠이 안 오셔서 심심하셨던 모양이야. 하인들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잡담을 꺼낼 때였다.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불꽃이 확 솟아올랐다.
“헉, 이게 무슨….”
“부, 불이야! 불이야!”
순식간에 방문 앞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로건은 여분으로 하나 더 준비했던 랜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소리치는 하인들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은한 달빛이 방 안을 비췄다. 로건은 방 한가운데로 걸었다. 조그만 침대에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누워 있었다. 스스럼없이 그것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작고 보드라운 살덩이가 그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다.
“…….”
로건이 작게 숨을 삼켰다. 침대 안에는 똑같이 생긴 아기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나는 여전히 거슬리는 기운을 내보내며 잠들어 있고, 하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째서.
로건이 저를 바라보는 아이와 멍하니 시선을 마주할 때였다. 바깥의 소란이 점점 커지더니 헤롯이 들이닥쳤다.
“로건!”
로건은 천천히 헤롯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유령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설마, 네가, 또….”
“죄송해요, 어머니. 마음이 조금 급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로건의 말에 헤롯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경험했다. 어째서 마음을 놓고 있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벌일 아이인데. 헤롯이 비틀거리자 하인들이 서둘러 팔을 붙들었다. 그녀는 부축도 뿌리치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췄다.
“너….”
“낮에 인사를 올 걸 그랬죠. 그래도 반겨줘서 다행이에요.”
로건이 잡힌 손을 들어 보이며 웃으려는 것처럼 입매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웃지 못했다. 작고 여린 손에 손가락을 잡혔을 뿐인데 마치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모든 죄가 형태가 되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것을 죄책감이라고 하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인 것처럼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로건도 헤롯도 더는 말이 없었다. 불꽃이 사그라든 저택에 어둠과 달빛이 내려왔다.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 떠나고, 로건과 헤롯이 문을 나설 때까지도 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
다시 방 안이 텅 비자 아이는 눈을 감았다. 새근거리는 두 아기의 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
일로델은 곧잘 이상한 행동을 했다. 수업을 빠지고 주방에 들어가 놀거나 하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혼자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로건의 방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급히 달려온 유모에게 붙들려갔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나와서 돌아다녔다. 로건은 짧은 관찰 끝에 답을 냈다. 그의 동생은 명백하게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문 앞을 서성이는 기척이 났다.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던 로건이 곁눈질을 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조그만 발이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새벽에 황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헤롯님을 불러들일 속셈이겠죠.”
“그래.”
“황제 폐하의 인내심도 한 달은 못 가나 봅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줘도 좋을 텐데요.”
“…….”
“로건님?”
로건의 친우 겸 그의 보좌 지망인 모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그가 이상했다. 어리둥절한 모릭스가 로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또다시 작은 발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릭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로델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요.”
“언제나 그렇지.”
어느 순간부터 일로델은 해가 뜨면 가장 먼저 가족들의 방을 확인했다. 안에 누군가 있든 없든 방문이라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마 저택에서 하인들을 제외하고 가장 바쁜 사람은 일로델이 아닐까. 로건은 흘긋 문가를 보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뒤를 모릭스가 따라붙었다.
“어머니는 언제 떠난다고 하시지?”
“아침 식사 후에 가실 것 같습니다. 황궁에서 온 사자가 로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데요.”
모릭스가 고소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의심이 많은 황제는 누이인 헤롯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면 조바심을 냈다. 그녀가 남편인 대공과 힘을 합쳐 황위를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망상 때문이었는데, 정작 둘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인 사람이 황제 본인이었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모릭스가 황제를 비웃는 사이 로건은 소식이 어두우면 뒤처지는 법이라며 혀를 차던 스승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일로델의 유모 겸 교육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누구이든 받아들이는 제자가 부족하면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헤롯이 곧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일로델이 그의 방을 먼저 찾을 리가 없었다.
“아…!”
로건이 문을 열고 나오자 근처에서 서성이던 일로델이 눈을 반짝였다. 로건 또한 소년기의 나이였으나 일로델에게 그의 훤칠한 외견은 충분히 어른으로 보였다.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말도 걸어주지 않고 살갑게 맞아주지도 않지만 일로델은 로건이 좋았다. 적어도 짓궂은 쌍둥이 동생 티베인보다 백배는 좋았다. 일로델은 기다려주지 않는 로건과 모릭스를 쫓아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내려가는 걸 도와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복도를 지나고 계단이 나오자 모릭스가 일로델을 힐끔대며 속삭였다. 딱히 속삭일 필요는 없는 말이었지만 뒤뚱뒤뚱 걷는 일로델이 안쓰러웠던 탓이었다. 로건은 잠시 생각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사실 그에겐 뭐가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일로델이 괜히 다치기라도 한다면 겨우 잠잠해진 헤롯의 경계심이 부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아직 티베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헤롯이 불안함을 못 이기고 티베인을 숨기기라도 한다면 제거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로건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릭스는 희희낙락해서 일로델에게 다가갔다. 여느 때 같으면 없을 기회였다. 로건에게 모릭스가 붙어 있듯 평소엔 일로델에게도 유모가 붙어 다녔다. 하지만 오늘 드윈 남작 부인은 출근이 늦을 예정이었고, 혼자 쌍둥이를 맡게 된 유모 에밀리는 티베인에게 시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드디어 말을 붙여보는구나. 그가 록퍼스가에 드나든 지 삼 년 만의 쾌거였다.
“계단은 위험해. 손잡고 내려가자.”
일로델은 손을 내민 모릭스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로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건은 계단 앞에서 모릭스와 일로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그 모습 그대로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
일로델이 금방 손을 잡을 거라 생각했던 모릭스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잊은 것이 있었다. 일로델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무척 따르지만, 그것도 가족들이 주위에 없을 때의 얘기였다. 일로델에겐 언제나 로건과 붙어 다니는 모릭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잠시 서서 둘을 바라보던 로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일로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릭스의 손을 잡았다. 시선은 여전히 로건의 뒷모습을 향한 채였다.
“휴.”
조그만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본 모릭스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빠져들어야 했다.
*
조용한 2층과는 달리 1층은 하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록퍼스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실내외를 통틀어 백 명이 훌쩍 넘었는데, 그중 궂은일을 하는 하인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안주인을 배웅하러 몰려든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 많은 사람을 거두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이 있어야 하는 걸까. 남작 가문의 양자인 모릭스는 조금 기가 죽은 채 하인들 사이를 걸었다. 로건은 무심한 얼굴로 식당을 향했고, 일로델은 닭 쫓는 병아리처럼 그 뒤를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었을 때였다.
“로건.”
“어머니.”
때마침 사람들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서던 헤롯이 자리에 멈춰 섰다. 로건과 모릭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헤롯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아들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드는 건 성장이 남다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헤롯이 그녀 나름의 인사를 건넸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식사에 불러내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녀석이.”
“오늘 황궁으로 떠나신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배웅이라도 하겠다고?”
“원하신다면 그래야죠.”
헤롯과 로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펼쳐졌다. 그때 뒤늦게 엄마 목소리를 들은 일로델이 모릭스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엄마?”
“일로델?”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황당하게 바라보는 헤롯에게 일로델이 쪼르르 다가갔다. 얼떨결에 달려드는 일로델을 안아 든 헤롯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오늘은 안 보이길래 늦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더니… 네 형에게 먼저 갔던 거냐?”
“응.”
“네, 라고 해야지.”
“네.”
순순히 대답하며 안겨 오는 둘째 아들을 보며 헤롯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저택에 머무는 삼 주 내내 일로델을 상대해야 했다. 처음엔 귀찮아서 억지로 쫓아내기도 했었지만 이젠 일로델이 곁에 없으면 허전하기까지 했다. 오늘 아침은 기다려도 일로델이 오지 않아서 황제의 명령도 뒤로하고 식당을 찾은 참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로건의 방을 먼저 찾아갔다고 하니 묘한 배신감마저 느끼는 그녀였다.
“떠날 시간을 늦추지 않았으면 얼굴도 못 보고 갈 뻔했구나.”
그 말에 일로델이 헤롯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요?”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지.”
“폐하 보러 가요?”
“으음.”
헤롯이 애매하게 대꾸하며 입을 다물었다. 딱히 황제를 보러 황궁에 가는 건 아니지만 어린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긍정이라고 생각한 일로델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갈래요.”
“안 돼.”
“왜요?”
“네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단호한 거부에 일로델의 얼굴이 흐려졌다. 서운함을 바다처럼 머금은 눈과 마주한 헤롯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로델을 황궁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리고 힘이 없는 일로델은 대공가의 약점을 쥐고 싶어 하는 황제의 좋은 먹이가 될 것이었다.
차라리 알파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그런 생각을 하던 헤롯의 시선이 로건에게 닿았다. 그녀의 첫아들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생각을 바꿨다. 일로델마저 알파였다면 아이들에게 저택은 황궁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되었겠지. 하나라도 베타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
“같이 갈래요….”
“안 돼. 네 동생도 집에 있는데 어딜 가겠다고 그래?”
“티베인은 심술쟁이예요….”
일로델이 냉큼 티베인의 뒷담화를 했다.
“네 형도 있잖아.”
“형은 좋아요.”
그제야 수긍을 했는지 일로델이 떼쓰기를 멈추고 헤롯의 목을 끌어안았다. 헤롯은 유독 애정이 넘치는 둘째 아들을 마주 안으며 힐긋 로건을 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아침 식사는 들고 가겠지?”
“좋죠.”
뜻밖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헤롯이 순간 묘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의 시름이 눈앞을 스친 탓이었다. 그녀는 젖먹이들을 남겨두고 황궁으로 돌아간 뒤 끔찍한 상상을 하곤 했다. 주로 아이들의 시체를 맞이하는 상상이었다.
헤롯은 로건의 잔인함을 경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후계자를 내세우기 위해 아이들을 낳았다. 그러나 막 태어난 아이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약했고 부모는 방패가 되어줄 수 없었으며 로건은 상상 이상으로 영리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괜한 호기로 일을 벌였다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책했지만, 로건은 아이들과의 첫 만남 이후로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가끔 살의를 억누르지 못하고 티베인을 해치려다가도 그만두었다. 일로델에겐 손도 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저를 따르는 일로델을 달고 다니기도 하는 모양이니 그간 엄청난 변화를 이룬 셈이었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대로만 가준다면 그녀도 로건이 대공가를 잇는 데 불만은 없었다. 가문을 이끌어갈 사람에게 있어 냉정함과 잔인함은 카리스마적인 요소였다. 칼날이 가족에게 향하지만 않는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 들어가자.”
헤롯이 불편한 듯 꼼지락대는 일로델을 추스르며 걸음을 옮겼다. 로건도 그 뒤를 따랐다. 남겨진 모릭스만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서둘러 로건을 쫓았다.
식당 안에는 생화로 화려하게 꾸며진 테이블과 고급스러운 식기들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를 돕기 위한 하인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헤롯 일행이 들어서기 전까지 식당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바로 티베인과 유모 에밀리였다.
“일로델 어디 갔어?”
“마님께 가셨을 테니 곧 오실 거예요. 냅킨 두르셔요, 도련님.”
“필요 없어. 안 해.”
제 몸보다 훨씬 높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티베인이 귀찮은 얼굴로 에밀리의 손을 쳐냈다. 냅킨을 들고 쩔쩔매던 에밀리는 막 들어선 일행을 발견하고 화색을 띄웠다. 정확히는 헤롯에게 안겨서 들어오는 일로델을 본 것이었다.
“도련님! 저기 보셔요. 일로델 도련님이 오셨어요.”
“어디?”
티베인이 상체를 쭉 빼고 식당 입구를 살폈다. 그러다 일로델과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잔을 빼고 앉았다. 에밀리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티베인에게 냅킨을 둘렀다. 그녀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헤롯에게 허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마님.”
“그래, 고생하는구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헤롯은 너그럽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원래 아이들의 식사 시중은 하우스키퍼이자 유모인 드윈 남작 부인의 일이었다. 하지만 곧 은퇴할 나이인 그녀는 오래 일하기 힘들어했고 출퇴근제로 바꾼 후에도 조금씩 근무시간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또 다른 유모인 에밀리는 그만큼 일이 늘어서 고역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헤롯은 드윈 남작 부인의 후계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직접 일로델을 티베인 옆에 앉혔다. 에밀리는 대공 부인의 호의에 어쩔 줄 모르며 진땀을 뺐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로델은 혼자 어설프게 냅킨을 두르고 식사 준비를 끝마쳤다. 칭얼대며 유모를 들볶던 티베인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순조롭게 식사가 진행되고 헤롯의 관심은 모릭스에게 옮겨갔다. 사실, 웬 낯선 아이가 로건의 근처에서 얼쩡대는 것을 보고 뒤늦게 관심을 둔 것이었다.
“이름이 모릭스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네. 그렇습니다.”
“함께 식사를 들지 그러냐?”
“괘, 괜찮습니다. 저는 아침을 먹고 왔어요.”
이렇게 대답하는 게 맞던가. 모릭스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원래 이름 없는 기사의 아이였지만 운 좋게 드윈 남작 부인의 양자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드윈 남작 부인이 로건의 스승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자연스레 모릭스도 함께 대공가에 드나들면서 로건의 보좌를 꿈꾸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가끔가다 이렇게 대공 부부를 마주하게 되면 모든 게 허황된 꿈처럼 느껴졌다. 딱히 대공 부부가 그에게 눈치를 주는 건 아니었다. 다만 헤롯과 셰본에겐 사람을 압박하는 힘이 있었고, 로건도 슬슬 그런 기미를 보이니 정말 이 대단한 사람들 틈에서 잘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아들의 친구에 대해 궁금해진 헤롯과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모릭스가 대화를 잇는 동안 로건의 시선은 건너편을 향했다. 티베인은 헤롯의 시야에서 벗어난 틈을 타 일로델의 그릇에 놓인 음식을 포크로 콕 집어갔다. 손이 느린 일로델은 눈앞에서 허망하게 미트볼을 놓치고 티베인을 돌아보았다.
“하지 마….”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연약했다. 당연히 그만둘 티베인이 아니었다. 일로델은 빼앗긴 만큼 에밀리가 채워준 미트볼을 또 가로채이고 메추리알과 샐러드도 강탈당하길 반복하다가 울상을 하고 스튜를 떠먹었다. 티베인은 스튜까지 욕심내서 스푼을 들이댔다. 일로델의 주변이 흘린 스튜로 흥건해지자 에밀리가 분주해졌다. 소란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헤롯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일로델. 왜 그렇게 흘리고 먹는 거냐? 남작 부인이 없으니 아주 엉망이구나.”
당연했다. 드윈 남작 부인이 있으면 티베인도 쉽게 장난을 치지 못했다. 헤롯의 시선이 쏠리자 티베인은 얌전을 떨며 제 음식에 집중했다. 억울했지만 일로델은 항변하는 대신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수그렸다. 당장의 억울함을 푸는 것보다 곧 떠나갈 헤롯을 화나게 한 것이 더 속상했던 탓이다.
“주변을 정리하고 접시를 새로 갈아주어라.”
“네, 마님.”
에밀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진실을 알고 있는 목격자였으나 식탁의 평화를 위해 묵인하기로 했다. 하인들과 에밀리가 서둘러 일로델의 식기를 갈고 테이블을 닦아낼 때였다. 묵묵히 앉아 있던 로건이 입을 열었다.
“일로델을 제 옆으로 옮기죠.”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로건에게 향했다. 헤롯마저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둘이 붙어 있으면 장난을 치느라 식사를 제대로 못 할 거예요.”
“뭐?”
“일로델, 자리를 이쪽으로 옮기도록 해.”
로건이 턱 끝으로 제 옆을 가리켰다. 그러자 일로델이 화색을 띄우며 에밀리에게 팔을 벌렸다. 어서 자리를 옮겨 달라는 의미였다. 에밀리는 조심스럽게 헤롯의 눈치를 살피며 일로델을 안아 들었다. 어쩐지 한두 번이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헤롯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구나.”
“최근에는요.”
“그때마다 일로델의 자리를 네 옆으로 옮기고?”
“…….”
로건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긍정한다기보다 본인도 지금껏 그래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그것을 본 헤롯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이들이 큰 충돌 없이 지내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덜컥 불안함부터 느꼈다. 로건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걸 잘 알았다. 로건이 일로델을 회유해서 얻을 이득은 미미했다. 애초에 회유할 필요나 있을까. 일로델은 아기 때부터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따랐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사탕 좀 쥐여주고 꼬드기면 졸래졸래 따라가 버릴 철부지였다. 굳이 구슬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선의로 행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로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헤롯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로건도 생각할 거리가 생겼는지 식사를 멈추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사이 로건 옆으로 자리를 옮긴 일로델만 신이 났다. 건너편에 홀로 남아 저를 노려보는 티베인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마냥 좋아서 웃는 일로델을 헤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생 떨궈놓고 거기 앉으니 그렇게 좋으냐?”
“응.”
“네, 라고 해야지.”
“네.”
일로델이 고분고분 대답하며 메추리알을 포크로 집어 로건에게 건넸다. 생각에 빠져 있던 로건은 본척만척하더니 식사를 재개했다. 일로델은 익숙한 듯 무시당한 메추리알을 제 입으로 쏙 가져갔다.
“…….”
둘을 유심히 관찰하던 헤롯은 골이 지끈지끈 아파오는 걸 느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같은 로건도 문제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경계심이 없고 순해 빠진 일로델도 문젯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식사를 마친 헤롯 일행은 티타임을 가질 새도 없이 로비로 향했다. 황제는 언제나 트집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당장 돌아오란 명령을 받고 지금까지 늦장 부린 것도 충분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헤롯이 사람들을 이끌고 로비로 나오자 황제의 심부름꾼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이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그녀는 대답과는 달리 괜히 문 앞에서 옷차림을 바로잡고 바깥을 확인하는 둥 시간을 끌었다. 아주 잠시 활짝 피었던 심부름꾼의 안색이 도로 칙칙해졌다. 헤롯의 품에는 대공가의 어린 차남이 안겨 있었다. 그 말인즉슨 당장 출발하긴 글렀다는 이야기였다.
“저기 보아라. 저 새는 오색방울새라는 새란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지.”
“정말요?”
“그래. 황궁에 가면 없어. 그러니까 많이 보고 가야지.”
오색방울새가 다른 지역에 없는 건 맞지만 많이 보고 가겠단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새에겐 눈길도 안 주고 아들내미만 쳐다보며 말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일로델은 헤롯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새가 금방 날아갈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정원을 내다보았다.
헤롯은 귀여워 죽겠단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지만, 심부름꾼은 애가 타다 못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헤롯은 작위가 없었다. 대신 그녀에겐 황제의 누이라는 신분이 있었고 늦장을 부려도 목숨에 달하는 문제는 생기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에겐 1분 1초가 수명을 결정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헤롯님,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그래.”
“이러시는 건 공자님에게도 안 좋습니다. 그만 내려놓으시고….”
짜증 섞인 어조로 재촉하던 심부름꾼이 덜컥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시선 끝에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로건이 있었다.
“…….”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귀한 집안의 자제들은 잘 먹고 잘 크는 게 일인 만큼 대체로 성장이 빨랐다. 그러니 로건이 열넷이 안 된 나이에도 아카데미 신입생처럼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그 어떤 자제들도 로건처럼 서늘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진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귀족이기 이전에 문명인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야만인 혹은 맹수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기운이었다.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쳐다만 봐도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며 심부름꾼이 속으로 꿍얼대는 사이, 헤롯이 일로델을 내려놓았다. 일로델은 아쉬운 듯 헤롯을 꼭 안았다가 떨어졌다. 순간 자신의 아이임에도 납치해가고 싶다고 생각한 헤롯이었지만 어른스럽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표정을 무뚝뚝하게 굳히곤 근엄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만 가야겠구나. 다음에 올 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네….”
“아무리 집 안이라도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누가 사탕 준다고 따라가지 말고, 가끔은 동생도 챙기고….”
그리고 네 형도 좀 경계하고. 말을 이으려던 헤롯이 티 나지 않게 로건을 흘끗거렸다. 딱히 거리를 두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위험해 보이는 로건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꽤 심각한 문제였다. 최근 야만인들의 활동이 점점 지능적으로 변해가면서 애어른 할 것 없이 납치되는 귀족들이 늘었다. 일로델은 상대가 지능적이지 않아도 납치당하기 딱 좋은 아이건만 경계심마저 고장 난 것 같으니 문제였다.
하지만 헤롯은 일로델에게 말하기를 포기했다. 만약 일로델이 곧이곧대로 들어서 로건을 멀리하면 기껏 이어가고 있는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신 그녀는 로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로건. 네게 일로델을 맡겨도 될까?”
그러자 로건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일로델을 왜 제게 맡기죠?”
“네 동생이니까 돌봐주고 지켜 달라는 얘기야.”
“어머니도 황제 폐하를 돌봐주었나요?”
“그….”
그럴 리가 없었다. 황족이든 귀족이든 아이를 돌보는 건 유모의 몫이었고 과거 황제의 유모는 그녀가 아니라 드윈 남작 부인이었다. 오히려 동생과는 지금의 로건과 일로델보다 더 데면데면한 관계였다는 걸 떠올린 헤롯이 작게 한숨을 삼켰다. 일로델이 유난히 눈에 밟히는 아이라서 그런 걸까. 과보호인 건 알겠지만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드윈 남작 부인이 올 거예요.”
“그래….”
힘없이 대답하는 헤롯을 로건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실제로 그는 헤롯의 부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로델이 연약하고 무해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켜야 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키게 된다는 건 완벽하게 그의 보호 아래로 들어왔다는 것이고, 그건 아마 오메가가 될 확률이 높았다. 사실 그것도 달갑진 않았지만,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일로델이 헤롯의 곁을 떠나더니 로건의 옆으로 착착 다가갔다. 그리곤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형아 돌볼게요.”
“…뭐라고?”
“다녀오세요. 안녕.”
일로델이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헤롯은 뒤통수가 얼얼한 사람처럼 서 있다가 쓰게 웃었다. 그녀는 늘 걱정이 많았다. 황제의 심술과 변덕이 걱정이었고, 분쟁지역을 전전하는 셰본도 조금은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엔 아이들도 걱정이었고, 다른 무엇보다 로건이 잔인한 성미를 드러내고 영영 억누르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어쩌면 그 걱정들이 일로델에게도 전달되었던 게 아닐까.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본능적으로 느낄 순 있었을 것이다. 한참 어린 주제에 속이 깊은 아이가 기특하고 애틋했지만, 그럴수록 헤롯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셰본이 말하길, 그녀는 속마음을 드러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녀오마. 드윈 남작 부인이 오면 말 잘 듣고.”
“남작 부인은 무서워요….”
일로델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서 말했다. 헤롯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컸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변인의 흉을 보는 일로델이 우습고 귀여웠다. 하긴, 언제까지 아기일 리는 없지. 그녀는 조금 가벼운 마음이 되어 저택을 나섰다. 곧 차량 수십 대가 몰려나오고 열을 맞춰 일제히 정원을 빠져나갔다.
*
일로델은 당당하게 로건을 돌보겠다고 선언했지만 이행하지 못했다. 헤롯이 저택을 나가자마자 제 손을 잡고 늘어진 티베인 때문이었다. 방 안으로 끌려 들어온 일로델은 어쩔 수 없이 정상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대공가 어린 공자들의 첫 번째 일과는 블록 놀이였다.
“도련님들, 잠깐 놀고 계셔요. 저는 서재에서 동화책을 골라올게요.”
유모 에밀리가 벽장에서 블록 상자를 꺼내놓고 놀이방을 나갔다. 오늘은 바다 사막을 만들어 보기로 한 날이었다. 일로델이 상자에서 푸른색 블록을 꺼내 잔뜩 쌓아 올리자 티베인도 슬금슬금 다가와 거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티베인이 울분에 차서 말했다.
“너, 이제 형한테 가지 마.”
일로델이 블록 너머로 우뚝 선 티베인을 올려다보았다.
“왜?”
“형은 나빠. 가지 마.”
“싫어….”
일로델의 입장에선 로건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일로델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자 화가 난 티베인이 블록을 넘어뜨렸다. 와르륵,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왜 그래? 하지 마.”
“내 말 들어.”
“무슨 말?”
“형한테 가지 말라는 거.”
“싫어….”
연타로 거부당하자 티베인이 블록들을 집어 엉뚱한 곳으로 던졌다. 일로델이 탁자 밑으로 굴러 들어간 파란색 블록을 찾아와 다시 쌓아 올렸다. 그러자 티베인은 블록 상자를 번쩍 들더니 벽장 깊숙이 집어넣곤 앞을 막아섰다.
“블록 줘. 사막 만들어야 한단 말야.”
“네가 꺼내 가.”
일로델이 버티고 선 티베인의 옷을 잡고 늘어지자 그가 못 이긴 듯 비켜섰다. 일로델은 서둘러 잡고 있던 옷을 놓고 벽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벽장문이 쿵 닫혔다. 순식간에 갇혀버린 일로델이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티베인?”
“넌 공부 안 할 거잖아. 내가 올 때까지 거기 얌전히 있어.”
공부는 블록 놀이 다음의 일과였는데, 드윈 남작 부인이 저택에 도착하면 수업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예절, 역사, 언어, 수학 등의 수업으로 그것들은 졸리면서도 졸면 꾸중을 들었다. 삼엄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일로델은 매번 수업을 빠지고 돌아다녔고 남작 부인은 몇 번 지적하다가 방관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일로델에겐 기대가 없는 태도였다.
제가 올 때까지 있으라는 티베인의 말은 그 수업이 끝날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에 질린 일로델이 벽장문을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장은 꽤 넓은 공간이었고 빛도 거의 들지 않아서 어느 게 문인지 벽인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일로델은 손에 닿는 아무 곳이나 두드리며 애원했다.
“티베인, 열어줘….”
“안 돼. 형한테 갈 거잖아.”
“안 갈게….”
“그걸 어떻게 믿어? 그냥 거기 있어.”
티베인은 냉정하게 말하곤 벽장 앞을 떠났다. 자박자박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은 일로델이 울먹이며 외쳤다.
“티베인! 가지 마, 열어줘….”
티베인은 애처로운 애원에도 돌아보지 않고 방 밖으로 나왔다. 문도 꼭꼭 닫았다. 마침 서재에서 돌아오던 길이던 에밀리가 티베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혼자 나와 계셔요? 일로델 도련님은요?”
“몰라, 어디 갔어.”
“아이참, 또 도망가셨어요? 곧 남작 부인이 오실 텐데….”
“나 옷 갈아입을 거야.”
티베인이 너덜너덜 늘어난 니트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걸 본 에밀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잠깐 사이 둘이 술래잡기라도 한 걸까. 멀쩡하던 옷이 참혹할 지경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남작부인과 마주치게 하면 혼쭐이 나는 건 그녀였다. 하는 수 없이 동화책을 놀이방 앞에 둔 에밀리가 티베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차가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
모릭스는 정수리를 지글지글 태우는 햇빛을 피해 그늘로 뛰어들었다. 세상 물정 몰랐을 땐 귀족이란 화려한 저택에서 파티나 열며 허송세월하는 자들인 줄 알았다. 웃기는 소리였다. 물론 그런 귀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무능해서 있는 재산만 까먹는 중이거나 부패해서 뇌물로 연명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다 보니 유능한 데다 부패하지도 않은 가문과 연을 갖게 된 모릭스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유 훈련 시간이긴 하지만 혼자 팔자 좋게 늘어져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얼린 타월을 머리에 무장하곤 모의 사격 중인 로건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일로델이 보이지 않네요. 이 시간이 되면 꼭 찾아왔었는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휴식이 찾아왔다. 오늘의 훈련이 유독 힘든 이유기도 했다. 모릭스는 아쉬운 얼굴로 저택을 힐끔거렸다. 총기류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격술이 중요해진 건 알지만, 차라리 몽둥이를 들고 때려 부수는 게 낫지 땡볕 아래서 과녁판이나 노려보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아깐 로건님을 보살피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면서…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딱히 맹세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본인의 일도 아니었지만 모릭스는 배신감을 느끼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잡담이 계속되자 과녁을 향해 서 있던 로건이 모릭스를 곁눈질했다.
“힘들면 가서 쉬도록 해.”
로건은 너그러운 윗사람이었다. 바꿔 말하면 아랫사람에게 크게 기대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릭스는 급격히 샘솟는 위기감을 집중력으로 바꿔서 과녁을 노려보았다. 그때 로건이 총구를 내리고 그늘로 향했다. 저 때문인가 싶어 민망했던 모릭스가 로건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저, 저는 괜찮은데….”
“드윈 남작 부인은 언제 도착했지?”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릭스가 눈을 끔뻑였다.
“아까 차가 지나가는 걸 보긴 했는데… 한 두어 시간쯤 전에 도착하셨을걸요.”
“…….”
로건은 말없이 하인에게서 얼음 타월을 받아 목덜미를 훑었다. 열을 식힌다기보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모릭스는 문득 로건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삼 년 전, 모릭스는 양자가 될 결심을 하고 드윈 남작 부인을 만나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가 전복 사고를 당했다. 유례없는 추위와 폭설 탓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서둘러 몸을 추슬렀지만 다친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모릭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추위에 얼어가는 몸을 감싸고 구조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다행히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차량이 그들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탑승객이 많으면 승차를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밖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낸 승객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로건과 그의 호위들이었다.
로건의 첫인상은 책에서 보았던 흡혈귀와 매우 흡사했다. 아이답지 않은 우아한 외형과 서늘한 무표정이 그러했고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살아있는 사람만 열차에 태우라는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모릭스는 묘한 감동에 휩싸였다. 그는 결코 되지 못할, 초월적인 존재를 앞두었을 때나 느낄 법한 감동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도 모릭스가 로건을 흡혈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피 대신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걸 목격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이라면 땀 정도는 같이 흘려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혼자 외로이 얼음통을 끌어안고 열을 식히던 모릭스는 만사가 귀찮아진 듯 나무 그늘에 드러누웠다.
“지금쯤이면 일로델이 이 나무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을 시간이죠. 오늘은 얌전히 수업받고 있나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
“매일 보이다 안 보이니 허전해요. 뭐 하고 있나 궁금하고….”
방금 본인 입으로 수업을 받고 있을 거라 말한 건 잊은 듯했다. 도통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릭스를 로건이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모릭스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돌연 긴장해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남의 동생에게 너무 관심을 보였다. 요즘처럼 납치니 유괴니 흉흉한 세상에 아주 수상쩍어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 로건님의 동생이지만 맨날 보다 보니 제 동생 같기도 하고… 헉, 아니 그러니까….”
로건은 횡설수설하는 모릭스에게서 관심을 거둬들였다. 그의 시선이 저택을 향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로건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저택 문을 열고 누군가 급히 달려 나왔다. 간편한 복장의 하인들과는 달리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에 두건을 쓴 그녀는 쌍둥이들의 유모 에밀리였다.
“에밀리 아닌가요? 무슨 일이 생겼나?”
같은 곳을 바라보던 모릭스가 꿈지럭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정원을 두리번거리던 에밀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대더니 결심한 듯 다가왔다.
“저, 저어, 도련님들 안녕하세요. 훈련 중이신가요?”
에밀리는 고아원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던 평민이었는데 대면 첫날에 일로델에게 간택 당했다. 그렇게 록퍼스가에서 유모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귀족가의 생활에 통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어려워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로건일 것이라 모릭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
로건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인사를 건네는 에밀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가끔 사람을 가만히 관찰하곤 했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적을 탐색하는 야생동물의 행동과 흡사했다. 한번 당하면 오싹하다 못해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졌다. 인사 한번 건넸다가 숨넘어가게 생긴 에밀리를 안쓰럽게 보던 모릭스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 휴식 중이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 그게.”
화들짝 정신을 차린 에밀리가 주위를 살폈다. 목을 빼고 나무 뒤편까지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일로델 도련님이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아뇨, 오늘은 안 왔어요.”
마침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던 터라 모릭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에밀리의 표정이 대번 흐려졌다. 말이 없어진 그녀를 보며 모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로건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그….”
에밀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헤맸다. 푸른색의 서늘한 눈이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말 없는 재촉에 가슴이 덜컥한 에밀리는 서둘러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일로델 도련님이 사라졌어요. 계속 찾고 있는데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서….”
말을 잇던 에밀리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앞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
로건과 모릭스가 저택 안으로 들이닥치자 하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벌써 들어올 시간이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은 듯했다. 평온한 면면들을 보며 모릭스는 가슴을 탕탕 치고 싶어졌다. 평소 하인들마저 어려워하던 에밀리였다. 애가 없어졌는데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혼자 시간만 낭비하는 답답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로건이 그들에게 손짓하자 나이가 지긋한 하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로비에 있었지?”
“마님을 배웅하고부터 쭉 이곳에 있었습니다.”
“일로델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본 사람은?”
로건의 물음에 하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다른 하인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로건을 향해 공손하게 전달했다.
“저도 보지 못하였고 다른 아이들도 못 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나간 후로 문을 이용한 사람은 누가 있지?”
“드윈 남작 부인과 꽃을 배달하는 업자가 방문하였습니다.”
“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애초에 밖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저택 안으로 들어올 일이 없었고,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문을 이용하는 사람이 한정된 터라 누군가 밖으로 나갔다면 반드시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로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명령했다.
“나가는 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저택을 수색해. 어린아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설마….”
“일로델이 없어졌어. 찾아.”
로건의 담담한 명령에 늙은 하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일로델은 매일 저택 안팎을 돌아다니며 놀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있는 곳에서 놀았고 하인들은 유명인을 발견한 것처럼 들떠서 아이의 위치를 공유하길 즐겼다. 그러니 없어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한 그는 서둘러 수색조를 짜기 시작했다.
로건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뒤로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모릭스와 에밀리도 뒤를 따랐다. 에밀리는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내내 말이 없었고, 모릭스는 걱정으로 초조한 한편 내심 뜻밖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로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로건은 무심한 얼굴을 했다. 헤롯에게 그랬던 것처럼 왜 제게 이야기하냐는 말을 할 것 같았지만, 그는 바로 저택으로 돌아와 수색 명령을 내렸다.
그는 평소에도 동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티베인은 없는 사람 취급하기 일쑤였고, 일로델은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중에서야 성별로 인한 상성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일로델은 알파가 아닌 베타임에도 제 형에게 찬밥 취급을 당해야 했다. 이쯤 되면 상성을 떠나 무심함 자체가 성격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실은 일로델을 이뻐하는데 쑥스러워서 숨겼던 걸까. 너무 희망적인 추측이란 건 알지만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모릭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로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의견을 보탰다.
“저택 주변도 수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비가 있으니 나가진 못했겠지만, 혹시 모르니 담장 근처라도….”
“그럴 필요는 없어.”
로건이 힐긋 모릭스를 보았다.
“도시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 저택 주변이야. 일로델은 사람이 없는 곳엔 가지 않아.”
“그, 그랬죠.”
생각 외로 일로델에 대해 아는 게 많으시네요. 모릭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로건은 무의식중에 행동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 괜히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은 금물이었다.
곧 수색조가 만들어지고 구석진 곳이 많은 지하와 1층의 수색이 선행되었다. 그들과 따로 행동하며 식당과 연회실을 둘러본 일행이 위층으로 향하던 때였다. 계단을 오르기 전 에밀리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로건과 모릭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에밀리는 황급히 놀이방 앞에 널브러진 동화책을 수습했다.
“그건 뭐지?”
“죄, 죄송해요. 아까 서재에서 갖고 나온 건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만….”
에밀리가 식은땀을 흘리며 송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로건은 그런 그녀를 힐긋거리곤 놀이방을 바라보았다.
“일로델이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아침에 잠깐….”
“여긴 언제 찾아보았지?”
“아까 정원으로 나가기 전에 둘러보았어요. 도련님을 마지막으로 뵌 곳이었는데, 역시나 안 계셔서….”
에밀리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동화책 사이를 불안하게 더듬었다. 모릭스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찰나, 로건이 놀이방의 문을 열었다.
“우와.”
모릭스가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볕이 잘 드는 넓은 내부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이런 꿈같은 장소는 처음이었다. 로건도 어릴 땐 이곳을 이용했을까. 선반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토끼 인형을 힐끔거리던 모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상상이 안 되는 걸 떠나 불손하게까지 느껴지는 생각이었다. 로건은 글을 익히자마자 서재로 향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랬을 것이었다.
“일로델을 마지막으로 발견한 장소가 여기라면, 어디로 갔는지는 못 봤나요?”
“…….”
“에밀리?”
모릭스의 부름에 멍하니 있던 그녀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렇게 말한 에밀리가 동화책을 품에 끌어안았다. 또다시 낯가림이 발휘된 걸까. 머쓱해진 모릭스가 뒷목을 긁었다. 그러다 동화책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미간을 꿈틀거렸다. 흰색의 얇은 그것은 종이처럼 보였지만 작고 귀여운 꽃잎이었다.
모릭스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에밀리는 저택에 꽃을 배달하러 오는 남자와 연애 중이었다. 대공가로 들어오기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원칙대로라면 결격 사유이나 일로델이 그녀를 너무 잘 따르는 바람에 고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일로델은 누구나 잘 따르지만 그 사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저런 식으로 애정을 확인하는 모양이지. 꽃잎을 흘긋대던 모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쨌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로델은 곧잘 돌아다니는 아이긴 해도 로건의 말처럼 늘 사람과 붙어 있어서 위치를 놓칠 일은 없었다. 그녀도 그걸 알아서 마음을 놓고 있었겠지만, 기어코 문제가 터져버렸고 이 문제는 오롯이 유모인 그녀의 책임이었다.
“일로델이 어디로 나갔는지는 못 봤나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티베인 도련님은 아실 거예요. 마지막까지 함께 계셨거든요.”
그럼 가서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새로운 단서를 얻은 모릭스가 로건을 돌아보았다. 로건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는 듯 방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모릭스의 추측대로 로건은 놀이방이 처음이었다. 그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급목재로 지은 건물부터 보석을 깎아 만든 열차, 친칠라 털로 만든 인형 등 방을 가득 채운 장난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런 것들을 왜 만지고 노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였지만 일로델에겐 제법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로건이 테이블 밑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네모난 것이 눈에 띄었다. 로건이 그것을 주워 들고 유심히 살피자 에밀리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 그건….”
“뭔데요?”
“블록이에요. 두 도련님들이 갖고 노셨던 건데, 그러고 보니.”
에밀리가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황한 행동이 어수선했다.
“블록 상자가 여기 있을 텐데….”
“블록 상자?”
로건의 물음에 에밀리가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모릭스도 그녀에겐 나름대로 어려운 상대였지만 로건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녀는 대번 긴장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블록이 들어있는 상자예요. 아까 도련님들 놀고 계시라고 꺼내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서….”
에밀리는 또다시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모릭스는 내심 혀를 찼다. 아이도 잃어버리고 귀한 책도 밖에 내팽개쳐놓고 장난감까지 분실했다면 벌을 받고도 남을 사안이긴 했다. 하지만 원래 이렇게 정신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지금은 신분을 떠나 성인인 그녀보다 로건이 훨씬 어른처럼 보였다.
“상자는 어디에 보관하지?”
“평소엔 먼지가 덜 쌓이게 벽장 안에 보관해두어요.”
로건의 고개가 한쪽 깊숙한 곳에 있는 벽장을 향했다. 그는 곧장 다가가 묵직한 문을 열어젖혔다.
“아….”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던 에밀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서둘러 벽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있었네요. 그런데 이게 왜 안에 들어와 있지….”
에밀리가 벽장 한편에 있는 블록 상자를 앞두고 중얼거렸다. 로건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벽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오후가 되자 창을 통과하는 빛이 길어졌다. 휴식차 식당으로 들어온 모릭스는 지친 듯이 테이블에 엎드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지쳤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일로델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저택 안은 점점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다들 끼니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급한 얼굴로 식당을 지나치는 하인을 힐끗거린 모릭스가 팔 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쩌면 큰일이 벌어진 걸지도 몰라. 모릭스는 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어린아이를 상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로델은 그의 동생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무례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정이 갈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로건에게 자백했던 것처럼 내심 귀여운 동생처럼 여겼다. 그런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라면. 찾아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 젠장.”
모릭스가 한창 공황에 시달리던 그때, 그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에 흰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여인은 드윈 남작 부인이었다.
“자세.”
냉담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모릭스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테이블이 엎드려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아, 아뇨.”
“그렇지. 오늘의 식사가 네 머리통이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그녀의 눈에는 식탁 위에 올라간 건 모두 식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맞긴 한데… 모릭스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황제의 유모로 긴 시간을 보냈던 드윈 남작 부인은 화려한 이력답게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보기엔 한없이 고상해 보여도 수틀리면 양자의 모가지 정도는 간단히 날려버릴 사람이었다.
“로건님은… 어디 가셨어요?”
모릭스가 눈치를 보며 남작 부인의 차를 따랐다. 말을 돌리려는 행동에 남작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군소리 없이 찻잔을 들었다.
“경비병을 지휘하고 계신단다. 이런 곳에서 엎드려 있는 너보다는 훨씬 건설적인 일을 하고 계시지.”
“그, 그러네요.”
모릭스가 따끔함을 느낀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이번 꾸중은 오래갈 것 같다는 불길함이 모릭스를 덮쳤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드윈 남작 부인은 모릭스를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 일로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항상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가볍지 않았다. 하인들을 모두 동원해 저택을 수색해도 일로델은 보이지 않았고, 로건은 수색 범위를 넓히기 위해 경비병을 소집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공에게 사람을 보냈다. 보고가 필요할 정도의 문제라고 판단한 것일 테다.
그녀는 과거 로건의 스승이었고 그에게 조언할 수 있는 소수의 인물이었지만 말없이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로건만 지켜본 것은 아니다. 모릭스와 티베인, 에밀리, 하인들의 태도까지 꼼꼼히 살폈다.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사람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로건은 예상대로 통솔자적인 면모를 보였고, 모릭스는 불안함을 못 이겨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티베인은….
생각을 이어가던 남작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티베인은 그녀가 잘 아는 누군가와 비슷한 구석이 아주 많았다. 하필이면 그분을 닮았을까. 그녀는 연이어 터지려는 한숨을 삼키며 찻잔을 들었다. 어쨌거나 그쪽은 곧 은퇴하고 나면 손을 떠날 문제였다. 그보다 저 나약해 빠진 양자를 쓸모 있게 만들어놓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쉴 만큼 쉬었으면 다시 가봐야 하지 않겠니. 아니면 이런 경험은 보좌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게 아니면?”
모릭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 마음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다. 불안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모릭스는 언제나 중요한 판단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양자로 데려오는 것도 그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건 바뀌지 않는 기질적인 결함이겠지만, 어떤 면에선 장점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녀의 생각은 그랬다.
“일로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무서워요. 이렇게 오랫동안 안 보인 적이 없었는데.”
남작 부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당연히 무슨 일이 생겼겠지. 일로델은 관심에 주린 아이였다. 가장 싫어하는 놀이가 숨바꼭질일 정도로 사람과 붙어 있는 걸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자진해서 숨어 있는 걸 택했을 리는 없으니 최소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찾지 않겠다는 거니? 네 상상이 현실일까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고… 못 찾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저택을 모두 뒤졌는데도 찾지 못하면….”
모릭스가 괴롭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한심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작 부인은 나름대로 만족했다. 모릭스는 성실한 아이였다. 겁이 많은 게 흠이긴 해도 판단을 내려주는 사람만 있다면 열심히 따를 것이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데려온 아이기도 했다.
“어차피 네가 뭔가를 해낼 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단다.”
냉정한 이야기에 모릭스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그런 기대를 받는 사람은 따로 있지. 누구일 것 같니?”
“로건님… 이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모릭스가 생각하는 최상의 도피처는 로건인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 저택에 있는 모두가 그러했다. 아직 작위도 없고 직위도 없는 아이에게 모든 기대와 책임을 지우며 도피하고 있었다. 좋은 현상이었다. 그녀는 로건이 대공가를 잇길 바랐다. 더 많은 권력을 쥐고 황제의 견제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꼭두각시들이 많이 필요했고, 로건도 그들을 다루는 법에 익숙해져야 했다.
차기 대공이 품위 없이 살인이나 저지르고 다닌다니. 말도 안 되지. 시답잖은 일을 대신해줄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린양들을 로건의 품으로 밀어주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어렵다면 네가 믿는 사람의 판단을 따르려무나. 아주 편해질 거란다.”
목소리는 은근하게 흘러나왔다. 모릭스의 얼굴에 번뇌의 빛이 떠올랐다. 아직은 남에게 모든 판단을 맡긴다는 데 거부감이 들겠지. 앞으로도 시간은 많다. 그동안 덜 도덕적이고 더 잔혹해지는 법을 배운다면 로건에게 아주 좋은 수족이 되어줄 것이었다. 드윈 남작 부인은 찻잔 너머로 양자의 모습을 살피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
그 시각, 로비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찰대 보고로는 오늘 하루 저택 근처를 배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차량은?”
“드윈 남작 부인의 차와 배달 트럭이 검문을 통과했습니다. 아직 나간 차량은 없습니다.”
경비병의 보고는 앞서 수없이 들어왔던 보고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더 듣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느낀 로건은 그에게 다음 수색 영역을 지정해주고 돌려보냈다. 벌써 세 번째 반복된 일이었다.
저택의 경비병들은 모두 군에서 차출된 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움직일 권한을 가진 자들은 대공 부부와 후계자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공 부부는 저택을 비웠고 후계자는 표면적으론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경비병들은 로건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도, 반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모두 로건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현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물론 존재했다.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길거리의 시정잡배처럼 주저앉아 있던 티베인이 툭 중얼거렸다.
“형이 내 걸 뺏어갔어.”
“티베인 도련님….”
에밀리가 안절부절못하며 티베인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는 화가 난 맹견처럼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물어뜯을 것처럼 굴었다. 헛소리 같은 이상한 말도 중얼거렸다. 바로 이 어린 폭군이 로비 안을 긴장으로 물들인 주범이었다.
“일로델 내놔.”
“일로델 도련님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제발 진정하셔요….”
“내가 숨겨놨는데 형이 뺏어갔어. 내놔.”
티베인은 일로델을 벽장 안에 숨겨놨었다고 털어놓았다. 말이 숨겨놓은 거지 누가 들어봐도 감금이었다. 이미 지나간 범죄 행위야 어쨌든, 티베인의 자백으로 일은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벽장뿐만 아니라 놀이방의 선반까지 다 들어내서 찾아보았으나 일로델은 없었다. 작았던 문젯거리가 행방불명 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로건 도련님은 일로델 도련님을 뺏어갈 분이 아니셔요. 두 분의 맏형님인걸요.”
“왜 안 뺏어가?”
그렇게 좋은 건데. 티베인은 마치 진귀한 보석 얘기라도 하는 양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 어린 얼굴을 보며 에밀리는 괜히 민망해졌다. 가령 일로델이 진귀한 보석이어도 로건은 흥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에게 귀한 것이 어디 귀한 것이던가.
“됐어, 내가 찾을 거야.”
“도련님….”
“숨겨놔도 소용없어. 난 찾을 수 있으니까.”
정말로 찾아 나설 기세에 에밀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서 티베인까지 무슨 일이 생기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다가가는 그녀를 단호한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그냥 둬.”
“로, 로건 도련님.”
에밀리가 멈칫한 사이 티베인이 쏜살같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물론 가기 전 로건을 매섭게 노려본 것은 덤이었다.
티베인이 사라진 길을 흘긋거린 로건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서도 수색이 한창이었다. 서서히 저택을 벗어나 외부로 수색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그는 내심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로델을 벽장 안에 숨겨두었다고 했던가. 그 역시 일로델이 벽장 안에 있었음을 직감했다. 페로몬처럼 뚜렷한 무언가를 느낀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티베인은 평소에도 일로델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독점할 수 없는 상대를 묶어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둬놓는 것이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일로델은 벽장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습을 감추었다. 수색이 길어질수록 그의 머릿속에 있던 몇 가지 가능성이 하나둘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사고를 당해 움직이지 못했다면 벌써 발견됐을 것이다. 길을 헤매서 움직이고 있다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벌써 달려왔겠지. 저택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벽장에서 나오지 못했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수색이 시작됨에도 일로델을 보았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유괴.
저택은 넓었다. 그도 처음 가보는 장소가 있을 정도로 불필요한 공간이 많았다. 하인이 아이를 옮겨가며 수색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물론 하인이 아닐 수도 있었다. 티베인, 모릭스, 드윈 남작 부인, 경비병들. 누구나 가능성은 갖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을 경계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벽장문을 열어준 사람을 의심 없이 따라갔겠지. 유괴를 당해도 유괴인 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로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오메가였다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까.
“…….”
로건은 혀를 찼다. 지금 상황을 쉽지 않다고 느끼는 게 우스웠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에겐 일로델을 찾는 것보다 찾지 않는 것이 이득이었다. 사실 지금도 적극적으로 수색하고 있다고 하긴 어려웠다.
일로델은 사라졌고 티베인은 혼자 일로델을 찾으러 나섰다. 찾아내지 못해도 좋고 정말 찾아낸다면 더욱 좋다. 일로델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티베인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 티베인을 처리할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왜.
로건이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린 그때,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 건물을 울렸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에, 에밀리…!”
꽃이 가득한 수레를 끌고 나타난 사내는 에밀리의 연인 버트였다. 냉담한 눈길이 쏟아지자 그는 당황하다가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좀 도와 달라는 눈빛에 에밀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로건은 가보라며 눈짓했다.
“죄, 죄송합니다.”
에밀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허리를 숙였다. 하필이면 이런 다급한 상황에.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녀는 서둘러 버트를 먼 구석으로 끌고 들어갔다.
“일하는 시간에는 말 걸면 안 된다고 했잖아. 왜 이러는 거야?”
“알아, 아는데… 도대체 그 일을 안 할 때는 언제인데?”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알잖아.”
애원하듯 속삭이는 에밀리를 버트가 노려보았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장소 때문에 참는 눈치였다. 험악한 기세에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눈을 피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얼른 얘기하고 가줘.”
“좋아, 나도 바쁜 사람이야.”
“…….”
“문은 언제 열리는 거야? 오늘 안에 나갈 수는 있는 거야?”
“그건, 저기, 이유가 있어서….”
에밀리는 주저했다. 버트는 매일 꽃을 갈러 방문하고 있지만 사실상 완벽한 외부인이었다. 그에게 어디까지 설명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물거리는 그녀가 답답했는지 버트의 말이 빨라졌다.
“설명은 됐으니까 네가 힘 좀 써서 나가게 해줘. 이러다 꽃이 전부 시들겠다구.”
“그, 그럴 수는 없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
“말이라도 해볼 순 있는 거 아냐? 대공 전하도 아니고, 저런 어린애한테 말도 못 붙여?”
그는 한심하다는 것처럼 비웃었지만 그건 저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차라리 대공 전하나 마님을 상대하는 게 낫겠다며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말고 기다려줘. 객실도 준비해 줄게. 그러니까….”
“나는 당장 나가야 해. 지금 여기 담긴 게 값어치가 얼마인지나 알아? 아냔 말야!”
“제발 조용히 해. 왜 그러는 거야….”
에밀리가 당황하며 버트를 말릴 때였다. 수레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가 숨을 멈추었다. 경악의 순간도 잠시, 마침 건너편 복도에서 드윈 남작 부인과 모릭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에밀리는 서둘러 버트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모았다. 드윈 남작 부인은 천천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에밀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죄, 죄송해요. 나가고 싶다고 하여서… 금방 돌려보낼게요.”
“물론 그래야지. 지금 당장 실행하거라.”
드윈 남작 부인은 버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럴 가치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에밀리가 서둘러 버트를 돌려보내려는데, 그가 손을 뿌리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부인, 저는 정말 급합니다. 나갔다 다시 와도 좋으니까 한 번만 내보내 주세요.”
“버트…!”
“부인, 제발….”
드윈 남작 부인은 들은 척도 않고 등을 돌렸다. 버트를 힐끗거린 모릭스도 그 뒤를 따랐다. 면전에서 무시당한 버트는 울컥해서 두 사람을 쫓으려 했으나, 다음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로건이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
버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제자리에 굳었다. 멀리서 보았을 땐 귀티가 흐르는 소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점점 다가올수록 사나운 짐승이라도 앞둔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겁먹은 듯 뒷걸음질 치던 버트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스쳐 지나가던 로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헉….”
아주 잠깐의 찰나였지만 버트는 정신을 잃었다. 그랬던 것 같다고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넘어진 모습 그대로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다시 안쪽에서 찾는 건가요?”
꺾인 복도를 지나 묵묵히 로건을 따르던 모릭스가 물었다. 경비병을 소집했다기에 밖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하긴, 그쪽은 범위가 워낙 넓어서 경비병들에게 맡겨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남작 부인과 무서운 티타임을 가지며 정신력을 회복한 모릭스는 드물게 의욕을 드러냈다.
“생각해봤는데, 저는 지하가 수상해요. 방공호 쪽은 제가 맡아도 되나요?”
“…….”
“로건님?”
로건은 대답 없이 경비병에게 손짓해 무언가를 지시했다. 경비병은 조금 놀라더니 곧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모릭스는 하나둘 해산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로건을 돌아보았다.
“로건님? 수색은….”
“여기까지.”
“네?”
“더는 의미가 없어. 수색을 중단한다.”
그 말에 모릭스가 걸음을 멈춰 섰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로건은 모릭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서갔다. 냉정한 통솔자가 사라진 자리에 노을빛이 불길처럼 일렁였다.
*
옅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잠에서 깬 일로델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꽃잎 속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금은 딱딱하고 지저분한 바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좁은 방 안이 낯선 것처럼 두리번대던 일로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낯선 목소리가 급히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일로델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초 서듯 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이란 건 알았다. 그는 자신을 무시무시한 어둠에서 꺼내준 영웅이었다.
티베인이 떠난 후 일로델은 겁에 질려 문을 긁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무언가 조금씩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빛이 조금이라도 새어 들어오는 틈으로 손바닥을 뻗어봤지만 팔은 통과하지 못했다. 도저히 몸을 빼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로델은 한참 동안 그 상태로 울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티베인의 이름도 부르고 엄마, 아빠, 형의 이름도 불렀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일로델을 안아 올렸다. 놀이방에 꽃을 갈러 들어왔던 버트였다.
“소리 내면 가만 안 둬. 알았어?”
“응.”
“…….”
으름장을 놓던 버트는 허탈한 듯 눈에서 힘을 뺐다. 신기할 정도로 순하고 얌전한 아이라서 묶어놓지 않았지만 로건을 만난 뒤로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이 집구석은 어린애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멍청한 척하다가 뒤통수를 칠지도 몰랐다. 당장 묶어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한시도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로건이 들이닥칠 것 같아서였다.
그러는 사이 일로델이 눈을 떠서 위기감마저 느꼈지만, 일로델은 잠들기 전과 똑같았다. 똑같이 맹탕에 눈치가 없었다. 긴장이 풀려서 주저앉던 그가 순간 펄쩍 뛰어올랐다. 작은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버트는 서둘러 손에 잡히는 천으로 일로델을 덮어두고 문가로 다가갔다.
“누, 누구쇼.”
“나야.”
익숙한 목소리에 버트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초조한 얼굴로 서 있던 에밀리가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제 와? 바로 왔어야 할 거 아냐! 내가 혼자 얼마나 고생했는데!”
“버트….”
에밀리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일로델이 담요 밖으로 얼굴을 쏙 빼냈다.
“에밀리 유모?”
“도련님…!”
놀라서 일로델에게 달려간 에밀리가 담요를 걷어내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조그맣고 따끈한 몸이 익숙한 듯 그녀를 마주 안았다. 에밀리는 먹먹한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는 버트는 어이가 없었다. 뭔 신파극도 아니고. 도련니임? 버트는 그녀의 원래 모습을 알았다. 연고 없는 고아들을 눈 깜짝 않고 팔아넘겼던 독한 년이었다. 그는 배알이 꼴린다는 듯 눈을 흘겼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야? 내숭 그만 떨고 당장 여길 나갈 방법을 궁리해봐!”
“버트, 그만해.”
“뭘 그만하란 거야? 이건 기회야. 절대 놓치면 안 돼!”
버트가 위협하듯 발을 굴렀다. 그러면서도 눈알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모습이 기이했다. 그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이유는 에밀리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밀리와 버트는 어떤 자들과 공모하여 인신매매를 했다. 그들은 아주 사납고 야만적이지만 가진 것이 많았다. 평민 아이는 헐값이어도 귀족 아이를 팔면 마음껏 뜯어낼 수 있었다. 은이나 금 같은 희귀 금속부터 약재, 향신료, 장신구까지. 교환 품목은 수없이 많았다. 그중에서 두 사람이 택한 것은 마약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 나는 이제 시간이 없어.”
“버트… 아직도 약을 끊지 못한 거야?”
“아직도? 아직도라고 했어?”
버트가 멱살잡이라도 할 것처럼 에밀리에게 다가갔다. 에밀리는 일로델을 안고 뒤로 물러났다.
“너는 끊은 모양이지? 그래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냐? 엉?”
“내, 내가 뭘 했다고….”
“쓰레기 보듯 나를 봤잖아! 로비에서도! 지금 여기서도!”
버트가 고함을 치자 일로델이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아이에겐 생전 처음 겪는 거친 상황일 것이었다. 에밀리는 버트의 시야에서 감추듯 일로델을 끌어안았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뭐라도 된 것 같은 모양이지? 정말 귀족 집안의 유모라도 된 것 같아?”
“나는….”
“착각하지 마, 에밀리. 우리는 이미 글러 먹었어.”
“…….”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단 말야.”
버트의 말에 에밀리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납치를 노리고 대공가에 들어왔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멋진 저택과 고급스러운 물건들. 대공 부부와 그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마저 기품이 넘쳤다. 대화는 어디서든 조근조근 이어졌고 식사는 끼니마다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음식이 나오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훔쳐보며 먹는 법을 익혀야 했었지만, 이제는 뭐가 나오든 자신 있었다. 정말 자신이 있었다. 괴로웠지만 약도 끊었고, 이대로 새 삶을 꿈꿔도 될 것 같았다.
될 리가 없지.
꿈은 꿈일 뿐이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비참해지는 달콤한 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알았다. 제 손으로 팔아 치운 아이들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이상 그녀는 현실에서 살아야만 했다.
“좋아… 알았어.”
“에밀리…!”
“대신, 일로델을 팔고 싶진 않아. 그럴 생각이라면 돕지 않을 거야.”
“뭐?”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버트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팔지 않을 생각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이였다.
“어차피 일로델이 우리 이야길 들었으니 여기 둘 순 없어. 그러니까 데리고 나가서 키울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 약은 어쩌고!”
“약값은 내가 줄게. 그걸로 버티다가 다른 아이를 찾아보면 되잖아.”
“때려치워! 저거 하나만 내다 팔아도 얼마인데… 괜한 시간만 낭비했군.”
버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새끼 이리 내.”
“싫어.”
“이 개 같은….”
맞을 것을 예감한 에밀리가 눈을 감을 때였다. 버트의 뒤로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곳은 저택 깊은 곳에 있는 객실이었다. 오늘 하루는 청소도 끝나서 누군가 찾아올 일도 없었다. 에밀리와 버트는 숨을 멈추고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런 데에 있어?”
“…….”
“야, 일로델!”
뒤늦게 일로델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동안 일로델은 알 수 없는 상황에 내내 굳어 있었다. 그의 영웅은 에밀리가 온 뒤로 마구 화를 냈다. 아까부터 화를 좀 많이 내는 것 같긴 했어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벽장에서 꺼내준 사람이야. 벽장문을 열어주지 않은 티베인보다 훨씬 착해.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갑자기 티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티, 티베인 도련님, 여길 어떻게…!”
“내가 찾겠다고 했잖아. 근데 왜 유모가 먼저 찾은 거야?”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었던 말투였다. 버트와 에밀리가 멍청한 얼굴로 티베인을 내려다보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아직 어리니까 당연히 모를 수도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에밀리가 일로델을 내려놓고 티베인을 감싸려 했다. 그녀를 밀쳐낸 버트가 티베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건 뭐야. 얼굴이 똑같잖아… 쌍둥이? 이게 그 알파라는 막내인가? 응?”
“버트, 아이를 내려놔!”
“완전히 금덩어리가 굴러왔잖아! 저 애새끼보다 열 배는 비싸게 팔 수 있겠어! 하하하하!”
“버트!”
에밀리가 버트를 말려보려 달려들 때였다. 그는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티베인을 내팽개쳤다.
“아악! 손, 손이!”
“허락도 없이 건드리니까 그렇지.”
몸을 일으킨 티베인이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버트는 괴로운 듯 몸을 비틀다 왼손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을 굴렀다. 그는 피범벅이 된 손을 감싸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칼을 갖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애새끼가.
“죽여버리겠어. 아니, 약을 사야 해. 이런 망할!”
에밀리는 헛소리처럼 욕설을 지껄이는 버트를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 틈에 어서 아이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그녀는 문이 아닌 안쪽으로 걸어가는 티베인을 향해 소리쳤다.
“도련님들, 문으로 가세요! 어서 밖으로…!”
“가긴 어딜 가!”
“악!”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던 에밀리가 바닥에 엎어졌다. 한껏 씩씩대던 버트는 또 한 번 그녀의 등을 걷어차며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죽이진 못해도 어디 하나 불구로 만들어 놓는 건 문제 없겠지. 대 귀족가의 알파 어린애다. 흠집이 좀 나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매길 수 있을 것이었다.
버트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노려보며 다가오자 일로델이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이런 충격적인 광경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린 일로델을 티베인이 툭툭 쳤다.
“너 빨리 가.”
“무, 무서워….”
“그러니까 빨리 가. 나가서 형한테 가.”
“형아…?”
“그래.”
어디로 가야 해? 그렇게 물어보기도 전에 티베인이 갑자기 몸을 피했다. 티베인을 잡아채려던 버트가 욕설을 내지르며 그를 쫓았다. 좁은 방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일로델은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손도 자꾸 떨렸다. 로건 형한테 가야 해. 엉금엉금 기어가던 일로델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럼 티베인은?
고개를 든 일로델의 시야에 괴성을 지르며 달리는 버트가 들어왔다. 티베인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아귀를 피했다. 하지만 금방 잡힐 것 같았다.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로델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뒷걸음질 치던 티베인의 자세가 무너졌다. 잽싸게 멱살을 잡아챈 버트가 그대로 티베인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버트!”
“남의 몸에 칼을 꽂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까, 꼬마야?”
“안 돼, 그만둬!”
“이렇게 되는 거야!”
버트의 발이 티베인의 팔을 짓밟았다. 희미하게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버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티베인의 팔을 밟았다. 아예 불구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에밀리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어딜 잘못 맞았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때 느리게 걷는 그녀의 옆으로 조그만 인영이 지나쳐갔다. 일로델이 버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도련님, 안 돼….”
일로델을 붙잡으려던 에밀리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일로델은 돌아보는 일 없이 앞서갔다. 그리고 버트의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마침 한쪽 다리를 치켜들던 버트가 중심을 잃고 비틀댔다.
“윽, 뭐야!?”
“하지 마!”
“엉!?”
“내 동생한테 그러지 마!”
일로델이 매서운 얼굴로 버트를 노려보았다. 잠시 어이없어하던 버트가 파리 쫓듯 팔을 흔들었다.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나가떨어졌다. 별 같지도 않은 게. 알파 애새끼가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저건 관심 밖이었다. 귀찮게 하면 확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또다시 일로델이 달려들었다.
“이 쥐새끼 같은 게…!”
버트가 나머지 한 손을 번쩍 든 때였다. 일로델이 붙잡은 팔을 덥석 물었다. 버트의 비명이 길게 울렸다. 그는 일로델의 머리를 후려쳐서 떨어뜨리곤 급히 팔을 살폈다. 손등은 검에 뚫려서 피가 줄줄 나고 팔뚝은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전부 이 빌어먹을 쌍둥이 형제가 벌인 짓이었다. 그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죽여버리겠어.”
버트가 일로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일로델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맞은 머리를 감쌌다. 아프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일로델의 멱살을 커다란 손이 잡아 쥐었다.
“윽….”
“감히 내 팔을 이 꼴로 만들어? 한주먹감도 안 되는 게, 감히.”
그는 씩씩대며 일로델을 들어 올렸다. 작은 몸이 조금씩 허공에 떴다. 에밀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버트, 제발 그만해!”
“죽여버리겠어.”
“버트!”
에밀리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순간 그녀의 발에 챈 것이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바닥에 굴러다니는 단검을 주워들고 버트에게 겨눴다.
“버, 버트. 당장 아이를 내려놔.”
“에밀리….”
버트가 멍한 얼굴을 하더니 손에서 힘을 뺐다. 일로델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몸을 일으켜 콜록대는 것을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에밀리는 조금씩 아이들에게 걸음을 옮기며 버트를 경계했다.
“나를 배신할 셈이야? 네가?”
“그런 거 아냐.”
“아니면 뭐야. 날 찌르고 싶어서 들이밀고 있는 거잖아. 맞지?”
버트의 어조가 이상했다. 흥분이 극에 치달은 것 같았다. 이럴 땐 함부로 행동하는 건 좋지 않았다. 에밀리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설득을 시도했다.
“이제 그만해, 버트… 나랑 같이 여길 떠나자.”
“떠나자고…?”
에밀리의 말에 그녀에게 다가가던 버트가 걸음을 멈췄다.
“곧 교대시간이니 빠져나갈 틈이 생길 거야. 여길 떠나서 먼 곳으로 가자. 가서….”
에밀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언제였던가. 두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 쑥스러워서 서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신혼여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시하게나마 결혼을 계획하고 함께할 미래를 그렸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일들이었다.
“우리 여행하기로 했었잖아.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에밀리….”
“지금 떠나자. 여행하면서 약도 끊고… 그렇게 살아보자, 버트.”
버트는 말이 없었다. 그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에밀리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감히 새 삶을 꿈꾸겠다고 할 순 없었다. 죄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죄에 몸을 맡기느냐 짊어지고 가느냐의 문제였다. 그녀 역시 깨닫는 것이 늦었지만, 버트도 곧 알아줄 거라 믿었다.
“맞아. 너와 결혼하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던 때도 있었지.”
“버트…?”
“하지만 이젠 아냐.”
버트가 에밀리의 손에 들린 검을 빼앗아 그녀를 찔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에밀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옆구리를 감쌌다. 차가운 검 손잡이가 만져졌다. 손가락 사이로 스미듯이 피가 번졌다. 그녀는 그제야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 미쳤어….”
“그러게.”
버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자나 깨나 약 생각밖에 안 나. 정말 미친 모양이야.”
에밀리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핏물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죽는 걸까.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식사 시중을 드는 일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지금은 죽음을 걱정하고 있다니.
이렇게 죽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제대로 살아볼 걸 그랬다. 정말 별것도 아닌 게 고민일 정도로 평범하게 살아볼 걸 그랬지. 기회는 있었다. 지루하고 평온한 고아원 생활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됐었다. 그런 삶도 괜찮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하필이면 죽어가는 때에.
에밀리가 눈을 홉뜬 채 풀썩 쓰러졌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귀를 괴롭혔다. 자신이 팔아넘긴 아이들의 울음소리일 것이라 그녀는 확신했다. 마지막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퉤.”
버트는 에밀리의 시체에 침을 뱉었다. 지옥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으라지, 망할 년. 그의 삶은 이미 통째로 뒤바뀌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약만 있으면 환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얻는 법도 매우 쉬웠다. 어린애들만 갖다 팔면 되었다. 그의 눈알이 도르륵 굴러 티베인에게 닿았다.
걷고 뛰는 게 고작인 애새끼였다. 하지만 기절할 때까지 그를 노려보며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역시 알파는 어려도 위험하다. 남은 팔과 두 다리도 부숴놓을 생각으로 다가가는데, 작은 손이 그의 바짓단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 마… 내 동생이에요.”
“이게 또.”
버트는 귀찮게 구는 벌레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그는 일로델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찍어 눌렀다. 아이의 조막만 한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고 자꾸 훼방질이야? 어?”
“흐윽….”
“귀족으로 태어난 것 말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동생은 알파이기라도 하지 네놈은 뭐야. 쓸모도 없는 게 그냥 죽어야지. 안 그래?”
버트의 입가가 희열로 떨렸다. 즐거웠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귀족을 업신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아이를 납치할 집을 물색하기 위해 배달업을 하며 여러 귀족을 봐왔다. 어떤 놈이든 거만하지 않은 놈이 없었다. 그런 집은 하인들마저 난장판이었다. 늘어진 뱃살을 하고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놈들 앞에서 그는 언제나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하지만 록퍼스가는 달랐다. 평민인 그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없었고 노예 다루듯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고귀한 신분에 대대로 알파로 태어나는 축복까지 지녔다. 모든 게 완벽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더욱 배알이 꼴렸다. 언젠가 무너져 내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어차피 너 같은 건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겠지. 대신 쓰레기 치워줬다고 고마워하는 거 아닌지 몰라. 하하하.”
목에 손을 대자 아이가 발버둥을 쳤다. 힘을 주면 바로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가는 목이었다. 그냥 죽이긴 아까운 것 같은데. 에밀리도 너무 쉽게 죽였다. 저 동생 놈 앞에서 죽게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버트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탕, 하는 굉음과 함께 어깨에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아악!”
이어서 반대편 어깨에도 무언가 날아와서 박혔다. 버트는 밀쳐진 것처럼 앞으로 넘어졌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열린 문으로 경비병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몸부림치는 버트를 제압하고 에밀리의 맥박을 확인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
경비병의 보고에 로건이 작게 턱짓했다. 시신을 옮기라는 의미였다. 어느새 사인도 척척 알아듣게 된 경비병들이 에밀리의 시신을 밖으로 들고 나갔다. 로건은 총을 갈무리하고 일로델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놀랐는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로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조금 더 빨리 진입하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로비에서 버트를 보았을 때, 그는 유괴를 확신하고 수색 중단을 내렸다. 범인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수 시간의 수색이 결실 없이 막을 내렸지만, 티베인은 헤매는 일 없이 일로델을 찾아냈다. 제일 처음 티베인이 찾은 곳은 로건의 방이었다. 그러나 이내 없다는 걸 알고 발걸음을 돌렸다. 로건은 보고를 받으며 티베인이 마치 냄새를 맡는 개와 같다고 생각했다. 베타인 일로델에게서 페로몬이 느껴질 리도 없는데 티베인은 당연하다는 듯 일로델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몹시 이상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이었다.
역시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로건은 경비병들을 객실 앞에 대기시키고 안을 관찰했다. 예상대로 티베인은 위험에 처했고 일로델은 무사히 탈출하는 듯했다. 딱히 일로델을 해칠 목적은 아니었으니 나오면 구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 앞까지 다가왔던 일로델은 돌연 등을 돌렸다. 그리고 티베인에게 다가갔다. 예상은 완전히 뒤틀렸고 그때부터 로건의 시선은 일로델에게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로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떨고 있던 일로델이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로건은 아이가 달려들어 안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로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한참 올려다보더니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홀로 쓰러져 있는 티베인에게 다가갔다.
“티베인… 일어나.”
“…….”
“나 아파….”
일로델이 쓰러져 있는 티베인을 슬쩍 흔들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하면 벌떡 일어나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움직임이 없자 일로델은 티베인의 옆에서 작게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꼭 안고 울먹이는 아이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에 빠져 있었다.
로건은 한숨을 삼켰다. 세상에는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로델과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는 실패에 익숙해져 갔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티베인을 병상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와.”
“예.”
경비병이 팔을 다친 티베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고개를 들고 그가 나가는 걸 바라보던 일로델이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티베인 괜찮아?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에 로건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괜찮아.”
“…….”
“이제 널 해칠 사람은 없어. 안심해도 돼.”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로건이 말했다. 그가 없애고 싶은 건 티베인이지 일로델이 아니었다. 일로델은 로건의 말을 듣고서야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서웠던 버트가 근처에 없었다. 그는 어느새 경비병들에 의해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벌벌 떨면서 흐느끼는 모습이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일로델은 울멍울멍 눈매를 무너뜨렸다. 긴장이 풀리자 왈칵 서러움이 솟았다.
“로건 형아….”
비틀비틀 로건에게 다가간 일로델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로건은 밀어내지 않았지만 위로해주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일로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모릭스가 다가왔다.
“일로델은 괜찮나요? 티베인과 같이 의사에게 보여야 하는 게….”
“모릭스.”
로건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너는 네 할 일을 해.”
“…….”
모릭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모릭스는 고개를 돌렸다.
왜 웃고 있지.
아, 혹시 그건가. 로건은 가끔 화가 날 법한 상황에도 웃었다. 지금처럼 만족스러운 듯 웃는 게 아니고 조소에 가까웠지만… 웃는 게 다 웃는 거지 그 차이가 무슨 대수냐며 모릭스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 그의 시야에 불안정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는 버트가 걸렸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할 만한 일을 떠올렸다.
“저 남자는 어떻게 할까요?”
로건이 흘긋 버트를 보았다.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로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슬슬 움직이는 과녁이 필요했지.”
“…….”
“내일 저걸 사격 훈련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놔.”
모릭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마침 과녁판이 지긋지긋했었는데….”
“그랬지.”
“정말 잘 됐어요.”
미친놈들 같은 대화였다. 잔뜩 긴장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버트가 마구 몸부림을 쳤다.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평생 분의 약이 한꺼번에 들어올 기회였는데. 아니, 약이 문제가 아니다. 목숨도 남아 있어야 약을 할 수 있었다. 에밀리, 에밀리는 어디 있지?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던 버트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에밀리는 없다. 그의 손으로 죽였기 때문이었다. 구원자가 사라진 죄인에게 모릭스가 다가왔다. 모릭스는 갑자기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버트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리다. 그런 평가를 받아왔던 모릭스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르게 무심했다.
버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조금은 궁금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때의 얘기라는 걸 모릭스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일은 이걸로 사격 훈련을 하겠구나. 첫 실전 연습은 동물로 시작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크게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죄 없는 동물보다야 죄 있는 인간을 과녁으로 쓰는 게 낫지. 한번 쓰고 버리는 건 아쉬우니까 몇 번 쓸 수 있도록 머리를 잘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릭스는 객실을 나섰다.
로건은 경비병들을 철수시킨 뒤에도 묵묵히 서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이 이상했는지 일로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로건이 그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그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놓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놓지 않을 기세였다.
“그만 방으로 가자.”
“…….”
“데려다줄까?”
일로델은 귀를 쫑긋대며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계단에서 도와주거나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던 형이었다. 정말 그가 한 말인지 확인하는 일로델에게 로건은 웃어 보였다.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였다.
“가자.”
로건이 손을 내밀었다. 일로델은 이끌린 것처럼 그의 손을 잡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끔찍한 기억들이 맞닿은 체온에 녹아내렸다. 일로델은 걸으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로건은 그런 일로델을 주시하다가 아예 안아 들었다.
“…….”
일로델은 졸린 듯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로건에게 착 안겼다. 모든 걸 온전히 믿고 맡기는 몸짓이었다. 뜻밖에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헤롯도 이렇게 안고 다녔던 것일까. 로건은 잠시 묘한 얼굴로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에서 일어났던 실종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며칠 뒤, 바다에서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육지로 돌아온 셰본이 저택을 찾았다. 그는 식사도 목욕도 마다하고 바로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범인은 사흘에 걸쳐 처형. 유모가 한 명 살해되고, 티베인은 팔이 부러지고, 일로델은… 타박상?”
전투적으로 보고서를 읽던 셰본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드윈 남작 부인이 대답했다.
“머리에 살짝 혹이 났지만,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답니다.”
“저런, 아팠겠군.”
셰본은 제가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상 이 보고가 헤롯에게도 올라가면 그도 분풀이로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헤롯은 혼자 베타로 태어난 일로델이 많이 애틋한 모양이었다. 너무 애틋해서 남편도 눈에 안 보인다는 게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일로델에게 혹이 났다니 당분간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았다.
“한 명 사망, 두 명 부상. 그나마 하나는 혹만 나고 말았다니 불행 중 다행이야.”
“그렇지요.”
“네가 큰 활약을 했구나, 로건.”
셰본이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로건을 보았다. 그의 첫아들은 감사하지 않은 얼굴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뿐이었다.
사실 셰본은 처음 보고를 받을 당시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라는 것은 원래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집 밖도 아니고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의 기준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로건이 직접 보고를 명령했다는 말에 주저하지 않고 뱃머리를 돌렸다. 무슨 일이든 로건이 개입하는 일에 작고 사사로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전부 죽을 줄 알았는데.
셰본의 눈이 탁자에 놓인 보고서를 훑었다. 유모는 공범인 유괴범에게 사망. 티베인은 골절. 일로델은 타박상. 앞선 두 사람의 피해에 비하면 타박상은 귀여울 정도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졌다면 티베인을 없애기엔 최적의 기회였을 터. 셰본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로건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네가 경비병들을 지휘했다고 하던데.”
“네.”
“말은 잘 듣더냐?”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은요.”
그랬겠지. 현재 경비병들을 지휘할 권한은 그와 헤롯에게 있었다. 하지만 직접 명령을 내렸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마 십여 년 전 헤롯이 처음 저택에 왔을 때 청소에 동원했던 게 마지막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잊어버릴 만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권력의 이동은 꺾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집안의 권력이 로건에게로 흐르겠다면 두고 보는 수밖에. 헤롯은 억지로라도 비틀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그는 달랐다. 하루빨리 대공 자리를 물려주고 아내 얼굴이나 보면서 살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날이 예상보다 빨리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셰본은 턱을 매만졌다.
“도중에 수색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이지?”
“범인이 갇힌 상태였으니 너무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군.”
셰본은 작게 혀를 찼다. 빠져나갈 구멍도 잘 만들어놓았고 상황도 로건에게 유리했다. 유괴범이 직접 티베인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혼란한 틈을 타 직접 손을 쓰든 오발 사고를 내든 제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티베인이 살아있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구해줘서 고맙구나, 로건.”
“별말씀을요.”
“다음부터는 다치기 전에 조금만 더 빨리 움직여줬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랄 순 없겠지.”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더 바랄 것도 없지. 셰본이 씁쓸하게 웃으며 궐련을 꺼내 들었다. 순간 로건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어리둥절해서 시선을 마주하는 셰본에게 로건이 그의 품을 눈짓했다.
“아아.”
셰본은 멋쩍어하며 궐련을 갈무리했다. 너무 가벼워서 그만 잊고 있었는데 그의 팔 한쪽에는 일로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 잘 노는가 싶더니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셰본은 난감한 얼굴로 품에 달라붙어 있는 일로델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왜 여기서 자는 거지?”
“그날 이후로 편한 곳을 찾으면 낮 동안 쭉 잔답니다.”
“밤에는 뭘 하고?”
“아마 잠을 못 자는 것 같지요. 왜 그러냐고 물어도 모른다고 답합니다마는….”
드윈 남작 부인이 말을 흐렸다.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원인은 뚜렷했다. 셰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잠들지 못한다라. 좋은 현상은 아니다. 머리에 혹만 났다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속으로 곪고 있는 듯했다.
“다른 방으로 옮길 테니 이리 주시지요.”
“아니, 됐네. 그냥 둬.”
셰본이 손사래를 치자 드윈 남작 부인이 물러났다. 저를 챙겨주던 유모도 없고 무엇보다 집 안에서 유괴를 당한 직후이니 아이가 불안해할 만도 했다. 셰본은 일로델을 토닥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상담사라도 붙여주는 게 좋을까?”
“없는 것보다 낫겠지만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왜지?”
“일로델 도련님은 그날 일을 기억 못 한답니다.”
산 넘어 산이군. 아니면 오히려 잘 된 것인가. 셰본은 고민을 이어가다 한숨을 쉬었다. 험한 일을 겪은 아이가 안쓰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결국은 본인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일로델은 그간 사람을 너무 따랐다. 조금쯤은 충격을 받고 세상을 아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었다.
“이번 일로 이 녀석도 깨닫는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무엇을 말이죠?”
셰본의 혼잣말에 내내 조용하던 로건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셰본이 눈을 깜빡였다.
“음… 세상에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할 나이이지.”
“…….”
“믿었던 사람이 배신할 수 있다는 것도.”
로건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셰본의 품에 있는 일로델을 보는 듯했지만 곧 비껴갔다. 하지만 셰본은 푸른 눈동자에 비친 찰나의 불쾌감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 흥미롭군.
로건이 일로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들었어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종류의 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나쁜 신호는 아니었다. 애초에 가족 파탄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까. 그는 헤롯과 영원히 다투는 일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셰본은 어려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낸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지.”
이것저것, 모두. 그렇게 생각한 순간 품에 있던 일로델이 작게 뒤척였다. 로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셰본은 그 모든 걸 빼놓지 않고 관찰할 수 있었다. 모든 건 흘러가는 대로. 그의 입가가 보일 듯 말 듯 호선을 그렸다.
*
해가 땅 아래로 숨고 저택 곳곳에 노란빛이 일렁였다. 새벽조로 들어온 하인은 복도의 불빛을 점검하며 걸었다. 언젠가 불이 난 이후로 전부 불연성 램프로 교체되었지만 그래도 안전 확인은 필수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 집 안에서 유괴사건까지 벌어졌으니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와 램프를 점검하고 침실 문을 열어보았다. 낮은 침대 위에서 두 도련님이 꼭 붙어 자고 있었다. 저렇게 천사 같고 귀여운… 물론 한 분은 조금 무섭지만,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 어찌 그리 끔찍한 짓을 벌일 생각을 했을까. 그는 새삼 분노하며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조용한 기척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
그리고 조금 뒤, 일로델이 눈을 떴다. 일로델은 어둠이 낯선 것처럼 두리번거리다 침상을 빠져나왔다. 티베인이 잠결에 웅얼거리자 멈칫하고 돌아보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복도로 나온 일로델은 곧장 헤롯의 방으로 갔다. 방은 멀지 않았고 문도 잠겨 있지 않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려하지만 텅 비어 있는 침실을 서성이던 일로델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에밀리가 묵던 방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에밀리 유모는 아파서 나갔댔어.
뒤늦게 드윈 남작 부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 일로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일로델은 한동안 걸었다. 마지막으로 가는 길은 조금 멀고 고됐다. 가끔 쉬기도 하며 긴 계단을 오른 일로델은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에 마주친 하인이 화들짝 놀랐지만 보이지 않는 양 스쳐 지나갔다. 헤매지 않고 로건의 방문 앞에 다다른 일로델은 꾹 닫혀 있는 커다란 문을 올려다보았다.
어제도 그제도 왔었지만, 이 문은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일로델은 머뭇머뭇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내렸다. 그러다 곧 중간에 턱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문은 방해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들어갈 수 있어.
울적하게 흐려져 있던 작은 얼굴이 맑게 개었다. 일로델은 나름 발걸음을 조심히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지켜보던 하인은 사색이 되어 서 있다가 닫힌 문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로건의 방에 들어온 일로델은 어디가 어딘지를 몰라 잠시 헤맸다. 응접실을 지나 욕실과 옷방을 본의 아니게 구경하고서야 겨우겨우 침실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곳보다 어둡고 넓은 방이었다.
어둠이 익숙해질 때까지 눈을 깜빡깜빡하던 일로델은 곧장 로건이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뒤로 돌아누워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형이었다. 맨날 보는 뒷모습이니까 알았다. 일로델은 로건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
등에 닿는 따끈한 체온을 느끼며 로건이 눈을 떴다. 이불 속으로 파고든 일로델은 그에게 등을 맞대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몹시 연약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가만히 그것을 듣던 로건은 낮게 실소했다.
결국, 그는 인정하기로 했다. 가족으로서든 다른 무엇이든 일로델은 특별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굳이 몰라도 되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싹이 있다면 처음부터 잘라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로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그 날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