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로델은 집에 돌아온 후 며칠을 앓았다. 저택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하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치의를 데려와 일로델의 간병인으로 붙였다. 선조치 후보고는 다급한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그걸 감기몸살에 적용한 것이었다.
한참 앓다 깨어난 일로델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원래 얼굴 보기 힘든 부모님은 그렇다 치고, 그날 이후 로건과 티베인 둘 다 연락도 없고 저택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집 안에 결정을 내려줄 사람이 없었으니 그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일로델은 침대에 앉아 체리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간 맛도 모르겠더니 제법 입맛이 돌아왔다.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요사이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중병에 걸려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의외로 잘 버티는 몸이 신기했다. 내심 뿌듯함을 담아 조잘대는 일로델을 주치의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평생을 온갖 귀한 것만 접하시는데, 그 정도 체력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도시 밖에는 과일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 그래… 일로델이 떨떠름한 얼굴로 체리를 내려놓았다. 주치의 벤은 평민으로선 드물게 작위를 받은 의사였다. 그만큼 실력이 출중했지만, 정점에 오르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귀족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특히 무능하고 나태한 귀족은 치를 떨며 싫어했다. 대공가 차남이면서 허송세월이나 보내는 자신은 그에겐 빵에 핀 곰팡이보다 못한 존재일 것이다.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혹시 모르니 약은 며칠 더 드십시오. 하인들에게 전달해 놓겠습니다.”
“알았어.”
주변을 정리하던 벤이 순순히 대답하는 일로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원래 그렇긴 하지만 오늘따라 태도가 더 냉랭했다. 갑자기 끌려온 데다 무능한 귀족을 돌보게 되어서 꽁해 있는 거겠지. 일로델은 모른 척 체리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왜?”
“몸은 괜찮으십니까?”
방금 좋아졌다고 하지 않았나? 일로델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렸다. 벤이 의료 기기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힘이 빠진 얼굴에도 선명하게 잡혀 있는 미간의 주름이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혹시 아직 모르십니까?”
“뭘 말야?”
벤이 일로델의 복부를 힐긋거렸다. 꺼림칙한 것이라도 보는 시선이었다. 왜 저러나 싶어 눈만 끔뻑이던 일로델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때 벤을 보았던 것도 같다. 지금처럼 냉정한 낯짝으로 혀를 차고 있었지. 갑자기 입맛이 싹 사라져서 과일이 든 쟁반을 치웠다.
“본인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는 들으신 모양입니다.”
“뭐, 대충….”
“어떤 식으로 이식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명골 열매를 사용하는 건 입증된 불임 치료 방법도 아니고 남성의 몸에 적용된 사례도 없습니다. 언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현대의학 전공인 벤은 전통의학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약초를 달여 먹는다고 하면 ‘차라리 과일주스를 마시면 맛이라도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아니꼬운 의사였다. 지금도 매우 정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속내가 엿보였다. 따지고 보면 전통 의학도인 일로델이 벤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것도 잠시, 무거운 한숨이 뒤따랐다.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도련님께서 유명한 미치광이 과학자에 의해 임신할 수도 있는 몸이 되었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저보다 많이 알고 있다. 자신은 오르본이 유명한 미친놈이라는 건 처음 알았으니까. 일로델이 아찔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벤이 굴러다니는 청진기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자가 괴짜이긴 해도 실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치명적인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호르몬계에 이상이 생기는 정도의 문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이런 경우 발기 부전이 가장 유력합니다.”
“…….”
그건 이미 겪고 있다. 일로델이 망연자실 있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벤에겐 비밀로 했었지. 로건에게 보고되는 게 싫어서 숨겼다. 불편한 것도 아닌데 염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원흉이 로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웃음만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피식피식 웃고 있는 일로델을 보며 벤이 인상을 찌푸렸다.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베타 주제에 임신할지도 모르는 몸이 되었다는데 발기가 뭐가 중요해.”
“하지만….”
벤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얘길 하든 일로델에겐 발기 부전보다 임신이라는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올 것은 분명했다.
“이거 어떻게 할 방법은 없는 거야? 몰래 떼어버릴 순 없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럼….”
“원하시면 수술은 해드릴 수 있지만, 로건님에게 보고는 들어갈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벤은 로건의 추종자였다. 귀족을 싫어하는 주제에 록퍼스가의 주치의를 맡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로건은 벤이 귀족들의 시기로 학업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그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졸업 후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흔한 인재 지원의 하나였지만, 벤에게는 로건이 그의 인생을 구제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일로델은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침대 헤드에 기댔다. 엄청나게 현실적인 문젯거리가 머리를 스친 건 그때였다.
“잠깐… 나 지금 임신한 건 아니겠지? 형이 나한테, 그, 했는데….”
벤이 어물거리는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해괴한 생물이라도 보는 눈이었다.
“두 분이 뭘 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식하고 바로 임신에 성공했을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아….
일로델이 안심하는 한편 실수를 깨닫고 어색한 얼굴을 했다.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는 건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록퍼스가 안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일은 그가 알아선 안 되는 것인데, 이미 알아버렸으니 모르는 척을 하겠단 소리였다.
뭐, 그렇겠지. 어디를 가나 자신의 편은 없었다. 항상 그랬지만, 그간 의심스러운 정도였다면 요즘은 피부로 느껴졌다. 걱정거리를 해결한 일로델이 쓸쓸하게 시트를 파고들었다. 벤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십시오. 약을 드셨으니 점심때까진 푹 주무시는 게 좋습니다.”
“가려고?”
일로델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벤을 찾는 환자는 많았다. 며칠간 자신을 돌보느라 발이 묶여 있었으니 바쁘기도 하겠지.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아쉬워하는 소리가 나왔다. 딱히 그와 있는 게 좋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러자 벤이 일로델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니요. 귀한 분의 의존적인 성향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벤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들에겐 달가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부담스럽기만 하군요.”
벤은 몸조리 잘하라며 인사하곤 왕진 가방을 챙겼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일로델이 약이 올라서 베개를 던졌다. 부담스러우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무례하고 아니꼬운 의사 자식. 건강하게 살아서 두 번 다시 보지도 말아야지.
일로델은 한참 씩씩대다가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차단된 시야가 주는 안정감은 좋았다. 특히 혼자인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이 고요했다. 일로델은 몇 번 의미 없이 눈을 깜빡이다 억지로 눈꺼풀을 닫았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땐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잠옷을 벗어 던진 일로델이 식당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식사 준비를 했다. 그들은 저택에 주인이 있든 없든 항상 똑같이 행동했다. 아마 자신이 드러누워 있었을 때도 식당에서 대기하다 해산하길 반복했을 것이었다.
길고 넓은 식탁에 해산물 요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갓 자리를 털고 일어난 주인을 위한 보양식이겠지만, 당분간 푸른색을 떠올리는 건 보기도 싫었다. 전부 물리고 치킨 수프와 갓 구운 빵, 과일만 남겨둔 일로델이 새삼스럽게 접시를 보았다. 언젠가 티베인에게 억지로 끌려와 함께 들었던 식단과 비슷했다.
“…….”
일로델이 반대편에 시선을 주었다. 티베인이 앉아서 끊임없이 주절댔던 자리였다.
“혹시 별채를 관리하는 하인이 있나?”
“아직 없습니다. 명령하시면 배치하겠습니다.”
차 시중을 들던 하인이 대답했다. 일로델이 멈칫했다가 느릿느릿 수프를 떠먹었다. 별채가 연구실로 바뀌면서 개인 공간이 되었다. 당연히 하인들은 주인의 명령이 없는 한 별채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자칫했으면 정말로 그곳에 갇힐 뻔했다는 사실이 조금 오싹했다.
티베인은 자신을 별채에 가둬두고 오메가로 만들 방법을 찾아다녔다. 바다 사막에서는 총까지 빼 들었다. 막 나가는 줄은 알았지만, 정신이 나간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하는 짓이 좀 멍청하고 허술해서 그렇지, 로건만큼은 아니더라도 티베인 역시 수틀리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놈이었다.
/일로델이 반대편 자리를 힐긋거렸다.
“완벽하게 관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소란스럽지 않은 녀석으로 하나만 보내. 초인종이랑 문이 고장 났으니 고쳐놓고.”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한동안 수프를 깨작이던 일로델이 스푼을 놓고 한숨 쉬었다. 자꾸 빈자리에 시선이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뒤 더위가 한풀 꺾이자 날이 제법 선선했다. 저택 앞을 쓸고 있던 하인이 꾸벅 인사하고는 저 멀리 사라졌다. 일로델은 종종거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향했다.
정오를 넘긴 시간이면 분수대 근처로 오색방울새가 모여들었다. 어릴 땐 그 녀석들에게 모이를 주는 게 일과 중 하나였는데,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론 하인들이 대신 챙겨주게 되었다. 그들은 명령 없인 움직이지 못한다.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겠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로델이 정원수 사이를 걷자 정원사들이 나무 손질을 멈추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사들이 사다리 근처에 서서 자신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
아주 잠시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거야?”
꼭 아버지가 하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면서 일로델이 물었다. 아버지 셰본은 하인들이 예의를 차리면 시간 낭비라며 싫어했다. 좀 다른 이유지만, 자신도 이런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알파도 아니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억지로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쾌하기만 했다. 일로델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자 정원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중 나이가 지긋한 정원사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희는 도련님께서 지나가실 때 작업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째서?”
“혹시라도 다치시는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일로델이 길과 나무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보았다. 정원사가 다치게 하려고 작정을 해도 어려울 정도로 멀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하던 일 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련님. 정원 일에는 생각보다 위험한 것이 많습니다. 부디 헤아려주시지요.”
늙은 정원사의 부탁이 간곡했다. 그는 저택에서 오래 일했다. 그만큼 발언할 권한도 있기에 나서서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누군가의….
“그래.”
멍하니 있던 일로델이 알아들었다며 끄덕이곤 등을 돌렸다. 자신이 있어서 일을 못 한다는데, 계속 서 있게 만드는 것도 우스웠다.
해가 주홍색으로 바뀌었다. 일로델은 오색방울새가 모두 떠나갈 때까지 모이를 주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옆방이 티베인의 방이라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틀었다. 바로 옆이라고 해도 거리가 꽤 멀었다. 낯선 방문 앞에 도착한 일로델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당연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뿐인가. 널찍한 응접실이 이상할 정도로 삭막했다. 자신의 방도 아기자기한 건 아니지만 화분도 있고 책도 잔뜩 있고 심심하면 먹을 다과들도 있고 하인들이 오기 전까진 옷도 좀 널브러져 있고… 아무튼 이렇게 빈방 같지는 않았다.
망할 야만인 자식이 거짓말을 했구나. 일로델은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근처에서 걸레질하던 하인을 불러세웠다.
“여긴 뭐에 쓰는 방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하인은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티베인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입니다.”
뭐야, 진짜잖아. 일로델이 새삼스럽게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그 자식이 깔끔한 편이었던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근데 방은 왜 저렇게 깨끗하다 못해 삭막한지 모르겠다. 꼭, 금방이라도 떠나갈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있던 일로델이 천천히 하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차분하게 서서 주인이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예?”
하인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다. 일로델은 신경 쓰지 않고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살폈다. 그 시선이 어딘가 불안정했다.
“이상하잖아. 왜 아무도 없어? 부모님은 바쁘고, 형은… 부대에 있나? 그렇겠지. 티베인은? 원래 이렇게 집에 없었어? 설마….”
형에게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스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동시에 정신이 맑아졌다.
아니, 그건 아니다. 로건은 이미 티베인을 건들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말하는 것은 지켰고, 지키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일부러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영원히 모를 테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일로델이 막혔던 숨을 내뱉듯이 호흡했다. 그리곤 가보라며 하인에게 손짓했다. 하인은 일로델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건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
긴 하루가 가고 밤이 왔다.
하인들이 들어와 응접실 곳곳에 랜턴을 두고 갔다. 일로델은 그들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랜턴과 요깃거리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품위 없이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으면 안 되지만, 그것도 보는 사람이 있을 때의 얘기였다. 일로델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책과 함께 뒹굴다가 잠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꼭 누군가 뒤통수를 빤히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있는데. 어떻게 뒤통수를 쳐다보지. 이상한 일도 다 있다며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때였다. 왜인지 모르게 눈이 떠졌다. 희미한 랜턴 빛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
두 사람의 모습이라니? 일로델이 아연실색해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티베인과 눈이 마주쳤다.
“헉….”
일로델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로건이 일로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낮에 벤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왜, 왜….”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야, 꿈인가?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데, 가랑이 사이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나머지는 아침에 보자며 끌어안고 잤던 책이었다.
현실이구나. 일로델은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느낌을 받으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문이 있는 쪽은 로건이 앉아 있었다. 급한 대로 창문에 달라붙자 로건과 티베인의 시선이 따라왔다.
“왜, 둘이, 여기….”
티베인이 흘끗 로건을 쳐다보았다. 로건이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로델이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서 소리쳤다.
“우, 움직이지 마세요. 가까이 오면 뛰어내릴 거예요.”
일로델의 협박은 대단히 초라했지만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로건도 티베인도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간격을 두고 로건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일로델.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제 형이 하는 말은 안 믿어요.”
티베인이 코웃음을 쳤다. 꼴좋다는 표정이었다. 작은 반응에도 예민해진 일로델이 티베인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로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로건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정말이야, 일로델. 네가 의식이 있을 땐 나도 어쩔 수 없어. 무엇을 하든… 제정신으로 버틸 만한 일들은 아닐 테니까.”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걸 필사적으로 버텼다. 동생에게 제정신으로 못 버틸 짓을 했다고 실토하는 주제에 미안한 척도 안 한다. 왜 저렇게 뻔뻔한지 화가 나는 한편, 무서웠다. 외떨어진 숲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자신을 노려보며 어슬렁대는 짐승들을 눈앞에 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일로델이 경계를 풀지 않고 창문 아래를 힐끗거리자 티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넓은 방인데, 체격 좋은 두 사람이 서 있자 좁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물러날 곳도 없어서 벽에 딱 달라붙었다.
“둘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것도 사람이 자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들어와서….”
“그럼 잘 자고 있는 걸 깨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일로델이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티베인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뭘 잘했다고 불퉁한 표정인지 모르겠는데, 그 얼굴을 보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둘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놀랐는지 몰라서 그래?”
“뭐. 자는 거 쳐다보기밖에 더했냐.”
일로델이 다시 창문을 흘깃거렸다. 방금까진 무서워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이젠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로건이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일로델이 움찔 놀라서 로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나가라고 한다면 바로 나갈 테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든 일단 의심하고 보는 사람처럼 일로델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로건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일로델을 보았다. 그 눈빛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믿어도 돼. 우린 그냥 대답을 들으러 온 거야.”
“무슨 대답을 말하는 거예요? 그것도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아침에 해도 되는걸요.”
“그럴 생각이긴 했지. 네가 우릴 찾지 않았다면.”
언제 찾았다고. 속으로 되받아치던 일로델이 오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주 잠깐 불안해져서 하인을 잡고 물어보긴 했었다. 그새 또 일러바쳤구나. 저택의 하인들은 일하는 것만큼이나 주인에게 일러바치는 걸 좋아했다. 일로델이 입술을 꾹꾹 씹었다.
“그럼 아침에 뵙는 걸로 해요. 식사하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 되잖아요. 모자라면 산책도 좀 하면서….”
“예전처럼?”
“네.”
냉큼 대답하자 로건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평범한 형제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점이 네 사랑스러운 곳이긴 하지.”
“…….”
“우린 네 선택에 따라 평생 나타나지 않을 생각으로 온 거야, 일로델.”
“뭣….”
그 말에 일로델보다 더 놀란 건 티베인이었다. 그는 잠시 당황한 얼굴로 로건과 일로델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그걸 원한다면. 뭐.”
빌어먹을. 티베인이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일로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평생 나타나지 않겠다니? 물론 지금 당장은 그들이 거북한 건 있지만, 아예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저지른 잘못은 사과를 하면 되는 거고,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받아줄 생각도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가만히 생각을 이어가던 일로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걸 바란 적 없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냥 평범하게 지내는 거예요. 예전처럼….”
“그건 안 돼.”
로건이 일로델의 말을 끊었다. 설득을 시도해보던 일로델이 멈칫했다. 로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테이블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아.”
“…….”
“나도 들어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 네게서 멀어지기도 해봤고, 저 녀석은 폭력을 쓰기도 했지. 결과적으론 보란 듯이 실패했지만.”
“…….”
“우리가 형제가 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네가 우리를 버리면 돼, 일로델.”
일로델은 귀를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들어버렸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팔을 들어 귀를 막으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쩔 수 없이 벽에 기댄 채 힘없이 주저앉았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예요. 그러지 못할 거 뻔히 알면서….”
로건은 인연을 끊어야 형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다고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대귀족가에서 태어난 알파들 주제에. 황족에게 버금가는 권력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겨우 한다는 협박이 절연이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협박이 먹힌다는 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로델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치사하게….”
“일로델.”
조용히 다가온 로건이 일로델을 안아 올렸다. 쉽게 들리는 몸이 마음에 안 들었다. 바위처럼 크고 무거운 몸이었다면 이 잘난 형제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아닐 것 같았다. 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적인,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연결고리가 맞물렸을 가능성이 컸다. 어렴풋이 그런 확신이 들었다.
폭신한 침구가 엉덩이에 닿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로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답을 내놓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도대체 저에게 뭘 바라는 거예요. 그런 눈으로 올려다보자 로건이 흘긋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티베인이 있는 곳이었다.
“아, 젠장.”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티베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 다가왔다. 일로델의 얼굴이 불안으로 흐려졌다.
“뭐, 뭐야? 왜….”
티베인이 말없이 일로델을 내려다보았다. 로건도 마찬가지였다. 일로델은 당황해서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어깨를 뻣뻣하게 굳혔다. 분명 둘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달아났었는데, 어느새 도망칠 틈조차 없이 가까워져 있었다.
“잠깐, 왜 그러는 거예요?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로건이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단단한 팔목이 드러나는 순간 목덜미 근처에 소름이 돋았다. 속았구나. 뭐에 속은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걸로도 모자라 등을 돌리고 침대 위를 기어가려던 일로델의 위로 티베인이 덮쳐왔다.
“도망치면서 등을 보이면 어떡하냐, 멍청아.”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위협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일로델이 매달리듯 티베인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희게 질린 얼굴이 퍽 애처로웠다. 티베인은 껄끄러운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가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변명하듯 말했다.
“나도 저 자식 손에 놀아나기 싫어. 싫은데… 네가 임신할 수도 있다잖아.”
“그, 그게 왜.”
잠시 멈칫한 티베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로델은 지금 본인이 간접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알까. 둘만 있는 상황이라면 꿈에 그리던 일이지만. 티베인이 로건을 흘끗 노려보았다.
“네가 만약 형의 애를 낳게 되면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겠지.”
“아냐, 안 그래….”
일로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소였다면 너 같은 건 원래 안중에도 없었다고 했을 것이 뻔했다. 그 전에, 임신 같은 헛소린 하지도 말라며 질색했을 것이었다. 공황 상태에서도 하기 싫은 말을 하느라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티베인이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핥았다. 일로델이 흠칫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형이나 나나 당장 서로를 없애긴 글렀어. 네가 질색을 하는데 어쩌겠어. 겉으로나마 사이좋게 지내려면 둘이 같이 임신시키는 수밖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 일로델이 티베인을 밀치고 침대를 기었다. 하지만 곧 로건에게 가로막혔다. 그는 동선을 읽은 것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일로델의 몸을 끌어안았다. 하얀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본 일로델이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제야 덫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이, 나쁜….”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 일로델.”
“형, 제발. 이러지 마요.”
“괜찮아. 한숨 자고 일어난다고 생각해.”
“싫어요. 그런 거 하지 마요, 제발….”
직감적으로 기억을 잃는 약이라는 걸 알았다. 결국 참았던 게 터졌다. 일로델이 발작처럼 울음을 터뜨리자 로건이 행동을 멈추었다. 다가오던 티베인도 제자리에서 굳었다. 일로델이 로건의 품을 벗어나 팔을 감추며 몸을 웅크렸다.
“나한테 왜 이래.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이 나쁜 놈들아….”
동생을 만만하게 여기고 형을 귀찮게 한 게 그렇게 잘못이라면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담스럽다고 떠나가거나 밀어내면 자신도 그렇게 할 텐데, 잘난 형제들은 그마저도 못하게 만들면서 사람을 괴롭혔다. 나쁜 자식들. 일로델이 딸꾹질까지 하면서 울자 티베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왜 애를 놀라게 해?”
티베인이 제 잘못은 잊고 로건을 힐난했다. 로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테이블에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놀란 달팽이처럼 자꾸만 웅크리고 드는 일로델을 달랬다.
“울지 마. 무섭게 하려던 게 아니야. 네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어.”
“하지 마요….”
“그래, 약은 안 놓을게.”
“임, 임신, 그런 것도 하지 마요.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럴 순 없어.”
들어줄 줄 알았는데. 일로델이 배신감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보았다. 로건이 가볍게 웃었다.
“우리가 너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언제가 되었든 일어날 일이야.”
로건의 미소가 조금 서늘해졌다고 느꼈을 때였다. 마주 보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짙어졌다.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분명하게 바뀌었다. 의아해할 새도 없이 더운 체온이 등에 달라붙었다. 거친 손이 힘 있게 허리를 감았다. 목덜미에 후끈한 숨이 닿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등을 가로질렀다. 묘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설마.
흔들리는 시야에 낯익은 물건이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작게 솟은 채 뚜껑이 열려 있는 그것은, 낯익은 갈색의 유리병이었다.
“안….”
안 돼, 라고 외치려던 입이 로건에게 가로막혔다. 불에 덴 것처럼 튀어 오르는 몸을 티베인이 끌어안았다. 뜨거운 혀가 각각 목덜미와 입안을 음탕하게 빨아올렸다.
“아, 뭐 하는, 싫….”
로건이 도망치는 일로델의 턱을 붙잡았다. 매끄럽게 밀고 들어온 혀가 혓바닥 아래를 간질였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이어졌다. 일로델이 로건을 밀어내다가 몸서리를 쳤다. 잠옷 안으로 들어온 티베인의 손이 젖꼭지를 꼬집었다.
“흣.”
일로델이 급히 한 손으로 티베인의 팔을 잡았다. 티베인은 개의치 않고 일로델의 뒷목을 길게 빨며 젖꼭지를 괴롭혔다. 어깨가 튀고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로건의 혀가 입천장을 부드럽게 쓸었다. 으으응, 울음소리처럼 떨려 나온 신음이 로건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괜찮아, 겁내지 마.”
로건이 살짝 입술을 떼고 말했다.
“얘기했지?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누군가 죽는 것도 아니고, 너를 떠나가지도 않아.”
단지 섹스를 하는 것뿐이지. 로건이 낮게 속삭이며 턱을 살짝 깨물었다. 티베인의 손끝이 젖꼭지를 세게 긁었다. 아, 일로델이 날카롭게 신음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허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잠옷은 어느새 단추가 열린 채 잔뜩 젖혀져 있었다. 혀로 녹여버릴 것처럼 어깨와 목덜미를 빨아대던 티베인이 괴롭게 한숨 쉬었다.
“이러다 노팅할 것 같은데.”
“참아. 상처 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말은 쉽지. 티베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일로델의 뺨을 핥았다. 등허리에 묵직한 것이 꾹 눌러졌다. 뜨거워서 기분이 나빴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허리에 티베인의 성기가 비벼질 때마다 꼬리뼈 쪽이 간질간질했다.
“흣, 으….”
달콤한 향기가 침실 안을 감돌았다. 오르본의 독이었다. 분명 알파를 쓰러뜨리는 독이라고 했는데. 왜 알파도 아닌 자신이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걸까. 머리가 몽롱해지고 아랫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한 일로델이 힘없이 울먹였다.
“싫어….”
“싫다는 말로는 안 돼, 일로델.”
로건이 잠옷 바지를 벗기며 힐끗 올려다보았다.
“당장 나가서, 두 번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야지.”
“이….”
누가 못할 줄 알고. 일로델이 입을 달싹거리자 로건이 들어주겠다는 듯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로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일로델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리곤 반쯤 선 그것을 입에 담고 세게 빨았다.
“아!”
일로델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상체를 숙였다.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잠깐이지만 두개골 안까지 소름이 돋은 느낌이었다. 티베인도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젠장, 형이 그걸 왜 빨아!?”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다는 것처럼 티베인이 펄쩍 뛰었다. 평소였다면 어이없긴 마찬가지였겠지만, 일로델은 급한 대로 티베인에게 매달렸다. 애원하려고 팔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티베인, 못, 못 하게 해줘. 형이, 이거 못 하게….”
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또 당하면 머리가 이상해질 게 분명했다. 정신없이 티베인에게 매달리자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하, 하고 웃었다.
“이런 거였군. 이런 느낌이었어. 미치겠네, 진짜….”
“티베인, 제발….”
“더 매달려봐, 일로델. 형한테 하는 것처럼 귀엽게 부탁도 해보고. 응?”
티베인이 일로델의 얼굴을 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고개가 꺾여서 아픈 신음이 샜다. 그러자 얼굴을 잡은 손에는 힘이 빠졌지만, 입맞춤은 깊어졌다. 동시에 다리가 부드럽게 벌어졌다. 로건의 혀가 귀두 주변을 느릿하게 핥았다. 우연인지 일부러인지, 말초신경이 잔뜩 몰린 곳이었다.
“으으으응, 싫어, 싫어어.”
일로델이 진저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티베인은 아쉬운 대로 목덜미를 빨며 일로델의 젖꼭지를 세게 문질렀다. 허리에 힘이 빠지고 등이 오싹오싹했다. 일로델은 고개를 젖히며 허벅지를 덜덜 떨었다.
“아, 아….”
일로델은 티베인의 어깨에 누운 채로 로건에게 성기를 빨렸다. 제대로 발기하지도 못하는 성기가 혀로 굴려질 때마다 눈앞이 탁탁 튀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감각이 계속 이어졌다. 티베인은 백치처럼 입을 벌리고 헐떡이는 일로델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 그러더니 낮게 신음하곤 일로델의 엉덩이에 제 성기를 비볐다.
“형은 그거 빨았으니, 먼저 넣는 건 나야.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
“…….”
잠시 움직임을 멈춘 로건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일로델의 다리를 잡고 벌려주었다.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몸이 부드럽게 열렸다. 티베인은 녹은 것처럼 흐느적대는 일로델을 제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문질렀다.
“응, 싫어….”
일로델이 반사적으로 티베인을 밀쳤다. 아니, 밀쳤다고 생각했지만 티베인의 배에 손만 올려놓았다. 손끝에 닿은 탄탄한 복부가 작게 들썩였다. 웃는 것 같았다. 얄미운 자식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친 순간, 허리가 들렸다. 질척거리는 성기 끝이 들어올 듯 말 듯 애널을 벌렸다.
“으응, 흣, 흐읏.”
“너무 좁아. 턱도 없겠는데.”
티베인이 중얼거리며 로건을 힐긋거렸다. 흥분해서 사나워진 한편, 마뜩잖은 시선이었다. 로건이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던졌다.
“뭐야?”
“이완제.”
“…….”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을 손에 든 티베인이 “아주 작정을 했군, 변태 자식.” 하며 이죽거렸다. 그는 통에 있는 액체를 거칠게 손에 쏟아내곤 일로델의 엉덩이 사이에 치덕치덕 발랐다. 차갑고 진득거리는 느낌에 일로델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흣, 하, 하지 마…!”
“안 하면 안 될걸? 여기 너무 좁아서 상처 입을지도 몰라.”
티베인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액체가 내벽에 마구 달라붙어서 이상했다. 일로델이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로건이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반쯤 선 성기를 입에 넣고 빨아들였다.
“아!”
일로델이 비명을 지르며 펄떡였다. 그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힘줄이 끊긴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성기가 부드러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뱃가죽만 움찔움찔 움직였다. 내벽에 발린 액체가 녹아서 밖으로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빠르게 들락거리며 안을 쑤셔댔다.
“아, 하아, 하, 아.”
“귀에 솜털이 바짝 섰어. 형이 빨아주는 게 그렇게 좋냐?”
티베인이 귓바퀴를 핥으며 투덜댔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뜨거운 것이 닿았다. 그게 동생의 성기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앞뒤로 질척질척한 하반신이 신체의 전부가 된 것처럼 신음하고 있자 티베인이 허리를 세게 움켜잡았다. 단단하게 발기된 것이 단숨에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아아아앗!”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는데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기를 빨던 혀가 요도 구멍을 스쳤다. 그 사이로 뭉클한 감각이 줄줄 흘렀다. 일로델은 자신의 성기가 터졌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어깨만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안에 박힌 것이 퍽퍽 소리를 내며 드나들었다.
“아, 아아! 아! 아앗!”
일로델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제 허리를 잡은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서 몸이 늘어졌다. 로건이 일로델의 허벅지를 놓고 일어섰다. 그는 입술에 묻은 정액을 살짝 닦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정액이었다. 일로델이 오싹한 것처럼 몸을 크게 떨었다.
“아, 말도 안, 싫, 아아아…!”
지금까지 성기를 빨고 있었던 게 형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뒤에 꽂힌 건 동생의 성기였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티베인을 밀어냈지만 오히려 허리를 콱 잡혔다. 그대로 커다란 성기가 자비 없이 안을 철벅철벅 쑤셔댔다.
“하아, 하아, 아! 그만, 티베인, 앗!”
턱이 덜덜 떨렸다. 몸은 아까부터 떨리고 있었다. 주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티베인이 드나드는 곳에 힘을 줘보려 했지만, 잔뜩 젖어서 녹아내린 것처럼 벌어지기만 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일로델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
“이미 넣었는데, 무슨 수로 천천히 해? 젠장,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너무 좋아, 일로델….”
티베인이 일로델의 목을 핥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로건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쉬곤 울고 있는 일로델을 달랬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퍽 안쓰러웠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주자 일로델이 매달리듯 올려다보았다. 기만당하고 배신을 당해도 끝없이 믿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괜찮을 거야.”
로건이 일로델의 눈가에 다정한 입맞춤을 쏟았다. 일로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앞에 선 로건은 겉옷만 벗은 말끔한 제복 차림이었다. 성기만 내놓고 안을 찔러대는 티베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자신만 이상한 몰골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걸까. 더 서러운 울음이 터졌다. 로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보고 싶지 않으면 감고 있어. 자….”
로건의 손이 눈가를 가렸다. 동시에 긴 손가락이 애널 주변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흐읏.”
일로델이 허벅지를 긴장시켰다. 녹아내린 줄 알았는데, 그곳은 아직 멀쩡했다. 손가락 두 개가 주름을 펴듯 움직이더니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그러자 쉴 새 없이 드나들던 것이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제길, 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빠.”
티베인이 중얼거리며 성기를 빼냈다가 꾹 밀어 넣었다. 아까보단 움직임이 느려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일로델은 티베인의 움직임에 맞춰 숨을 몰아쉬다가 아, 하고 급하게 신음했다.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앞쪽 내벽을 천천히 문질렀다. 성기로는 제대로 닿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싫어, 이상해….”
“쉿. 괜찮아.”
“아, 아….”
일로델은 멍하니 신음하며 치골 쪽에 손을 올렸다. 내벽이 매끄럽게 문질러질 때마다 그 부분이 찌릿찌릿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안도 꿈틀대며 움직였다. 거친 한숨을 내쉰 티베인이 조금씩 성기를 쳐올렸다. 손가락도 하나 더 늘었다. 안쪽은 이미 꽉 차 있었지만, 뭔가가 들어올 때마다 계속 자리가 생겼다. 이러다 한도 끝도 없이 벌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흐윽, 하지 마, 하지 마요. 늘어나….”
“늘어나지 않으면 곤란해.”
로건이 낮게 웃었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손이 치워지고 안쪽을 매만지던 손가락도 빠져나갔다. 대신 양 허벅지를 잡혀서 벌려졌다. 티베인이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경계하듯 일로델의 몸을 끌어안았다.
“진짜 할 셈이야?”
“안 그러면 의미가 없어.”
“그건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로건이 티베인의 말을 끊었다. 다리가 더 벌어졌다.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불길했다.
“태어난 게 자신의 아이가 아닌 걸 알면 죽여버리고 싶을 테지.”
“…….”
“어차피 낳게 만들겠다면, 누구 아이인지 모르는 쪽이 나아.”
티베인이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일로델은 제 다리를 가르며 자리 잡는 로건을 보았다. 머릿속으론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누구 아이인지 모르는 쪽이 나아. 멍하니 되뇌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이 정신 나간 형제들이 하려는 짓을 깨달았다.
“아, 안 돼. 미쳤, 미쳤어.”
“괜찮아, 일로델. 노팅까진 가지 않아.”
사정 시간은 조금 길어지겠지만. 로건이 눈가에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일로델이 정신없이 로건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티베인에게 허리를 잡히고 로건에겐 팔 한쪽을 잡혔다. 그대로 몸이 고정된 채, 손가락으로 아래가 빠듯하게 벌려졌다. 그 사이로 로건의 성기 끝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일로델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눌리며 또 다른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아래가 물처럼 젖어서 흐물거렸다. 힘을 줘서 막아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로건의 것이 더욱 깊이 박혔다.
“히, 잇….”
숨이 막혀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뱃속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그들이 사정하기 전의 느낌과 비슷했지만, 아래가 한껏 벌어져서 더 거북했다.
“하아, 하아, 아.”
일로델이 꼬치에 꽂힌 것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만 몰아쉬자 로건이 천천히 몸을 눕혀주었다. 사양하지 않고 티베인의 가슴 위에 널브러졌다. 훨씬 편하긴 했지만, 티베인이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상체를 옭아매며 목덜미를 빨아올렸다. 무언가를 참는 듯 티베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평소처럼 서늘한 표정이지만, 로건도 어딘지 기세가 사나웠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 움직일 거… 아니죠?”
“…….”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로건의 입에 먹혔다. 입술이 가볍게 빨린 것과 동시에 앞에 박힌 성기가 천천히 움직였다. 뒤에 있는 성기도 잘게 쳐올려졌다. 속도가 점점 붙으면서 내벽이 마구 짓눌렸다. 배꼽 근처가 아플 정도로 당겨왔다.
“하아, 하아, 아, 안 돼.”
일로델은 아무거나 잡히는 걸 손에 쥐었다. 침대 시트가 딸려 올라왔다. 여기저기 찔러 올리는 티베인과는 다르게, 로건은 어느 한 곳을 노리고 움직였다. 아까 손가락으로 문질러졌던 곳이었다. 단단한 것으로 빠르게 비벼지자 그곳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었다.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시트를 쥐어뜯었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이 빙빙 돌고 몸이 뒤틀렸다. 절로 비명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흐아, 아아! 아아아!”
“크, 뭐야….”
안이 마구 조여들자 티베인이 신음했다. 티베인은 무언가를 참듯 허리를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길 반복했다. 그러다 빠르게 안으로 처박았다. 로건과는 다른 움직임이 내벽 뒤쪽을 빠듯하게 긁었다.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앞뒤로 형제들의 성기가 거침없이 움직이며 액체를 줄줄 흘려보냈다. 윤활 역할까지 더해져 내벽이 사정없이 비벼졌다. 미칠 것 같은 감각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아흣, 아아, 아, 아! 앗!”
“하, 젠장, 노팅하고 싶어.”
티베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귓바퀴를 깨물었다.
“조금만 긴장 풀어도 할 거 같은데. 하면 안 될까? 응?”
“아, 싫어, 싫어….”
“농담이야. 일주일이나 전전긍긍했으면 됐지, 또 앓아눕는 꼴을 어떻게 봐.”
안 할 테니까 여기도 좀 봐줘… 부탁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소릴 하며 티베인이 일로델에게 얼굴을 비벼댔다. 일로델이 고개를 돌리자 티베인은 굶주린 사람처럼 입술을 빨고 혀를 집어넣었다.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보던 로건이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삽입이 더욱 깊어지자 일로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펄떡 뛰어올랐다.
“히잇, 아아아아!”
로건의 성기가 이상한 곳에 닿았다. 들어와선 안 되는 곳까지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이어지고 머릿속이 번쩍번쩍 튀었다. 어느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땐 몸을 벌벌 떨며 사정하는 중이었다.
“흐으, 흣, 흐으으….”
“야, 괜찮아?”
방금 뭐였지. 순간이지만 뇌가 타버리는 줄 알았다. 티베인이 묻는 말에 대꾸도 못 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도저히 주체가 안 되어서 웅크리고 싶었는데, 용케 눈치챈 두 사람이 몸을 옆으로 눕혀주었다. 훨씬 편했지만, 안에 있던 성기들도 같이 움직여서 이상한 느낌이 났다.
“흣….”
진저리치며 몸을 웅크리자 머리 아래로 베개가 들어왔다. 로건이 눕기 편하게 머리를 고쳐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조금 쉬어.”
“왜 애를 몰아붙여? 이 성격 파탄자 자식.”
언제나 그렇듯 제 잘못은 모르는 티베인이 뒤에서 구시렁댔다. 일로델은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숨을 고르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씩 몽롱한 기운이 걷혔다. 엄청난 일을 당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직 형제들이 사정은 안 했으니까 정신만 바짝 차리면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에 있는 것들을 빼내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티베인이 으르렁대며 팔로 상체를 휘감았다.
“가만히 있어. 안 그래도 참고 있는데.”
그 말에 일로델이 동상처럼 굳었다가 파르르 떨었다. 야만인 자식.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거야. 이러니까 티베인과는 싸움밖에 할 게 없었다. 자신이 알파로 태어났다면 이 자식은 집안에 발도 못 들여놨을 거다. 그리고 이런 일도 안 당했겠지….
“…….”
입안이 씁쓸했다. 이젠 정체성의 혼란이 와서 베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오메가도 아닌데 임신은 할 수 있다고 하고, 형제들은 미쳐서 덤벼들고, 도통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서 화를 내는 대신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티베인보단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여기서 그만해요, 형님.”
“무엇을?”
“아시잖아요.”
여기서 끝내면 아직 되돌릴 수 있다.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족은 섹스할 수 없는 대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다. 당연히 후자로서 지내는 게 이치에 맞았다. 겨우 비루한 몸뚱이 하나 얻자고 형제 관계를 버리겠단 소리를 하는 건 이해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겐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관계였다.
“아직 사정까지는 안 갔으니까, 그만해요. 저는 정말로 형제로 있고 싶어요. 지금까진 형님 마음대로 했으니 이제 제 말도 좀 들어주세요….”
일로델이 울먹이며 베개에 고개를 박았다. 텅 빈 정적 속에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금의 사이를 두고 다정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매만져왔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들어주고 싶어져. 그래서 속이거나 숨긴 것이 많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
“하지만… 미안하다, 일로델. 이번만큼은 고의가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지? 가만히 듣고 있던 일로델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뒤에서 티베인이 묵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로건은 매우 드물게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일로델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미 사정은 했어.”
“네…?”
“정확히는 지금도 하는 중이지.”
일로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알파는 정액량이 많아. 말했다시피 노팅하지 않으면 관계가 끝나기까지 조금, 길어지지.”
“…….”
“네 성교육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로건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또다시 한숨을 몰아쉰 티베인이 “그럼 지금까지 뭘 내보내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멍청하긴.” 하며 엉겨 붙었다. 안에 있던 성기가 질컥, 소리내며 움직였다. 이미 물기로 젖다 못해 흥건할 때나 나는 소리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일로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이, 나쁜….”
“정말 고의가 아니야.”
“하지 마, 그만해…!”
“사정을 그만둘 수 있는 인간은 없어, 일로델.”
로건이 낮게 웃으며 버둥대는 일로델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티베인도 일로델의 상체를 옭아매며 목덜미에 고개를 박았다. 아래에 가득 들어찬 성기들이 저항할 새도 없이 천천히, 엇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로델은 베개를 붙든 채 신음하고 울고 욕하길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까마득한 어둠으로 굴러떨어졌다.
*
찰랑,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욕조 안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곳이 욕조 바로 옆이었는데, 그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은 것 같았다. 설마 씻으면서도 계속하게 될 줄은 몰랐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물속으로 스르르 잠기려는 몸을 강인한 팔이 지탱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 안이었다. 사실, 정신을 차린 건지 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잔뜩 만취한 것처럼 애매모호한 감각이 이어졌다.
“아, 젠장. 기분 나빠. 이딴 변태 짓 두 번 다신 안 해. 차라리 저 인간을 없애고 말지….”
툴툴대며 새어 나온 말이 등에 닿았다. 이건… 보나 마나 티베인이다.
“내가 있는데 왜 저런 놈팡이까지 갖고 싶어 하는 거야? 저 인간이 얼마나 질이 안 좋은지 아직도 모르겠냐?”
“조용히.”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며 주의를 주었다. 티베인이 흐응, 하며 코웃음을 쳤다.
“아주 사람 구슬리는 데 선수던걸. 뭐, 평생 안 나타나? 여우 같은 자식.”
침묵이 흘렀다. 서서히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티베인이 애교부리는 맹수처럼 등에 얼굴을 비볐다.
“아까 형제로 지낼 수 없다고 했는데, 진심은 아니겠지.”
“…….”
“그 속내를 누가 알겠냐만, 난 아냐. 누구 좋으라고 형제인 걸 포기해.”
“…….”
“꺼지고 싶으면 꺼져. 나는 얘랑 죽을 때까지 붙어 있을 거니까.”
대꾸 없는 침묵에 지쳤는지 티베인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살며시 눈이 떠졌다. 비스듬하게 누운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대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로건의 손이 눈꺼풀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만 자.”
눈꺼풀을 쓰다듬는 손길에 따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로건이 한숨처럼 웃었다. 너는 고집이 세, 그렇게 말할 때의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
“…….”
“너는 내 동생이야.”
일로델은 저항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딱,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침실을 밝히던 랜턴 빛이 꺼졌다. 창밖으로 푸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