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8)

4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 시간이면 평소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로 갈 수는 없었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일상이 일그러졌는데 이런 상태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거북했다.

분명, 처음이 아니었다. 묘한 기시감도 그렇고 로건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놓고 자신을 임신시키고 싶다고 했다. 살면서 형에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생각이었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 것처럼, 혹은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처럼 아이를 갖자고 했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뱃속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지.

정처 없이 걷던 일로델이 불길함과 마주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열차역에서 밀려 나온 사람들이 우뚝 선 일로델을 피해 흩어졌다. 우산을 쓴 면면들 속에 낯익은 얼굴이 언뜻언뜻 사라졌다 나타났다. 싸구려 맥주 냄새와 함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그렇게 보지 마. 사실 어떤 제안을 받고 살짝 혹해서 시작했다가… 역시 망했거든.’

‘지금까지 하던 것보다는 안전합니다. 발기 부전도 나아질 거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한 뼘은 더 큰 키.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살피며 역의 계단을 오르는 그는 오르본이었다.

“너, 거기 서!”

“허어억!”

어떤 판단이나 생각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일로델이 우산을 내던지며 버럭 소리치자 펄쩍 놀란 오르본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로델도 오르본을 쫓아 내달렸다. 좁은 열차역 앞에서 때아닌 추격전이 펼쳐졌지만, 금방 막을 내렸다.

“악!”

점점 멀어지는 오르본을 죽어라 쫓아가던 일로델이 계단 앞에서 화려하게 엎어졌다.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허리가 굽은 노인 하나가 “괜찮니? 왜 잘 걷다가 엎어지누.” 하며 혀를 차고 지나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저만치 가던 오르본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던 그가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로델!?”

오르본이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와 일로델에게 달려왔다.

“괘, 괜찮아!?”

“어딜 건드려!”

일로델이 제 몸을 잡고 부축하려는 손을 거세게 쳐냈다. 그리곤 다시 주저앉았다. 바닥과 부딪힌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동생에게 툭하면 손찌검당하며 살아왔지만, 그 자식의 같잖은 주먹은 지금 느끼는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르본이 끙끙대며 주저앉아 있는 일로델의 주위를 불안하게 맴돌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맙소사. 널 길바닥에 엎어지게 만들었다는 걸 알면 나는 죽은 목숨이야.”

“너….”

“일로델, 괜찮아? 병원에 갈까? 아니, 보고를 먼저 해야 하나? 로, 로건님께….”

“안 돼!”

일로델이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르본이 제정신을 되찾고 주변을 훑었다. 맹한 얼굴에 두들겨 맞은 멍 자국이 선명했다. 역시, 호텔 방에 들어왔던 건 이 녀석이었다.

“전부 설명해.”

“뭘 말야?”

“잡아떼지 마. 다 기억해. 그때… 눈 가리고 방에 들어와 있었잖아.”

말을 하면서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새삼 분노가 치솟은 것도 있었지만, 감히 자신을 기만한 것도 모자라 그 상황에서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게 미칠 듯이 수치스러웠다.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오르본만이 아니었다. 로건의 부하들도 여럿 있었다. 목적은 아마도 호위였겠지만, 그들이 만약 눈을 감고 벽처럼 서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정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거. 그거 말이지….”

오르본이 바쁘게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흐리멍덩한 얼굴이 드물게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일로델, 일단 역 안으로 자리를 옮기자. 여긴 너무 눈에 띄어.”

“또 도망치려고? 그렇게는 안 돼!”

일로델이 이를 갈며 오르본을 덥석 붙들고 늘어졌다. 한참 돌아다니기라도 했는지 빗물과 섞여 진하게 풍겨오는 땀 냄새가 불쾌했다. 오르본이 펄쩍 뛰어오르며 일로델을 떼놓으려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도, 도망 안 칠게.”

“쳤잖아!”

“그게, 내가 도망을 치긴 했는데, 너한테서 도망을 친 게 아니라 티베인 중위인 줄 알고….”

“티베인?”

낯선 이름을 들은 것처럼 일로델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도 있었지. 머릿속이 로건의 생각으로 꽉 차서 잠시 잊고 있었다. 뭐야, 티베인이 이 녀석을 쫓고 있기라도 한 건가? 왜?

“어젯밤부터 나를 아주 못살게 굴고 있어. 호텔엔 네가 있어서 묵지도 못하고, 잠깐 도시를 나가 있으려고 했는데.”

너한테 잡혔어. 오르본이 울상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일로델은 당황했다. 설마, 티베인이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걸까. 어설픈 감금에서 빠져나오고 반나절이 지났다. 뭐가 급하다고 사람을 가둬두고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알아채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왜 오르본을? 일로델이 몸을 의탁할 정도로 그와 친한 게 아니라는 건 티베인도 알 것이다. 애초에 그가 평소에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른다. 일로델이 혼란에 빠지려던 차에 오르본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 실험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슨 실험?”

“베타에서 오메가로 전환하는 실험 말야. 중위에게 들켰어.”

실패했다는 그거? 하지만 자신에게도 술술 털어놨던 걸 보면 딱히 비밀이었던 거 같지는 않았다. 일로델의 미간이 의아함으로 좁혀졌다.

“그 이후로 실패한 논문이라도 내놓으라고 난리야.”

“뭐? 왜?”

“글쎄. 오메가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오르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로델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마를 짚었다. 설마, 그 미친 자식이 자신을 가둬놓고 오메가로 만들 방법을 찾으러 다닌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다른 이유를 찾아보았다. 없었다. 그 자식의 인간관계라곤 적과 아군 둘뿐인데, 티베인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갖고 오메가로 만드는 귀찮은 짓을 하느니 피떡으로 만들어서 내다 버릴 것이었다. 그야말로 저 오르본이 산증인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데, 오르본이 한숨을 쉬며 한탄을 이었다.

“네게 그 실험을 해왔단 얘길 했을 땐 정말 끝인 줄 알았어. 갑자기 티베인 중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데….”

“뭐?”

일로델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르본이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두 사람 사이가 나쁜 줄 알았더니 역시 그렇진 않았나 봐. 안전한 실험이란 걸 설명해내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쌍둥이니까 너처럼 관대할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더라. 하하.”

해맑은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일로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누구에게 뭘 해왔다는 건지 모르겠다. 베타를 오메가로 만드는 실험?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감히 허락도 없이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고?

오르본이 귀족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귀족이라 해도 자신과 그의 신분 차이는 극명했다.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단독으로 그런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등에 업고 자신을 실험대에 올렸는가. 무서운 속도로 답이 좁혀졌다.

“아쉽게도 실험은 실패했지만, 임신이라는 기회가 한 번 더 생겼어.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해.”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듣고 싶지도 않았다.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는 일로델의 손을 오르본이 잡아챘다. 진지하게 굳어 있는 멍청한 얼굴이 기분 나빴다.

“그래서 말인데, 일로델. 네가 두 사람에게 잘 좀 말해주면 안 될까?”

“뭘… 뭘 말야?”

“시간을 좀 달라구. 원래는 더 친해진 다음 부탁하려 했는데,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 입을 다물지 그래. 다 떠나서 지금은 자신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 아니던가?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고 털어놨으면서 부탁까지 하는 뻔뻔함이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지금 단계에서 성별을 바꾸는 건 힘들지만 임신은 성공시킬 자신이 있어. 이미 네게 자궁을 대신할 것도 심어놓았고.”

일로델이 오르본의 손을 쳐낼 때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귀에 꽂혔다. 뭐를, 심어 놔? 일로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자 오르본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이상한 거 아니니까 너무 놀라지 마. 무명골 열매는 고리짝부터 불임 치료에 이용해왔던 거라구.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들어본 적 있다. 사람의 골반과 흡사하게 생겨서 안에 있는 씨앗이 자궁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열매였다. 쉽게 구할 수만 있다면 많은 불임 부부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했지만,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얘기였다. 졸면서 교수의 말을 필기할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런 걸, 왜 나한테 심어?”

“왜긴… 알잖아.”

로건님이 너를 원하시니까. 오르본이 민망한 듯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일로델은 길 가다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눈만 간신히 깜빡였다. 부정해볼 사이도 없이 자신이 모르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도저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성별 전환이나 불임 치료는 내 전공이 아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실험이긴 해. 앞으로 나올 결과가 특히.”

오르본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일로델이 움찔 놀라며 배를 감쌌다. 차라리 무례한 시선이었으면 나았을 것 같다. 오르본은 홀린 듯한 시선으로 일로델의 복부를 응시했다.

“내가 알기론 너희 가문에서 근친이 행해진 적은 없었어. 오히려 성별로 인한 분쟁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피를 옅게 만들려고 애를 썼지. 그런 집안에서 근친으로 아이가 탄생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될지 궁금하지 않아? 어쩌면 기존의 알파를 뛰어넘는 성별이 나올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오싹해….”

오르본의 얼굴이 흐늘흐늘 풀어졌다. 항상 그런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다. 일견 비굴해 보이는 행동도 멍청해 보였다. 하지만 정말 그뿐이었을까. 자신은 보고 싶은 면만 봐왔던 게 틀림없었다. 오르본도 형도 갑자기 미친 것이 아니다. 그냥 원래 미친놈들이었던 거다.

일로델이 주춤주춤 물러나자 오르본이 멋쩍게 웃었다. 수줍은 표정이 가관이었다.

“나는 너희 가문에 관심이 아주 많아. 아카데미도 네가 입학한다는 얘길 듣고 따라 들어온 거야. 티베인 중위는 그 말을 듣고 스토커라고 오해하더라. 아, 오해가 아닌가? 하하….”

수많은 사람을 두고 자신에게 발정하는 형과 동생, 그리고 맹한 낯짝을 한 스토커. 깨닫고 보니 주위에 안팎으로 미친놈들뿐이다. 목덜미 사이로 차가운 빗줄기가 흘렀다. 역 입구에서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밀물처럼 흘러나왔다. 오고 가며 섞인 인파 속에서 몹시 익숙한 실루엣이 스친 것도 그때였다.

“…….”

일로델이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등을 홱 돌려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일로델? 어디 가?”

오르본이 불렀지만 일로델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빨리하며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뒤에서 아악, 하는 비명이 터졌다.

“이게 누구야. 이 멀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헉, 어, 어떻게 여길….”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어디, 열차 타고 좋은 데라도 가시려고?”

또다시 오르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딘가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마침 잘 됐지. 일단 귀찮게 돌아다니는 그 발부터 조져놔 볼까? 거기, 팔 잡고 있어.”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사나운 음성. 지긋지긋한 그 목소리는 티베인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이어지고 사람들이 겁먹은 얼굴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로델은 무시했다. 그저 쉴 새 없이, 그들에게서 한 걸음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둔한 다리를 열심히 놀릴 뿐이었다.

*

허름한 건물 안은 바깥보다 어둡고 서늘했다. 기껏 껴입은 옷이 비에 젖은 탓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한차례 빠져나가서 한가한 역 안을 낯설게 바라보던 일로델이 구석에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몇몇 사람들이 그곳에 멈춰 섰다 돌아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세요?”

투명한 유리 너머로 어려 보이는 아이가 지폐를 세며 건성으로 물었다. 일로델은 잠시 말을 헤맸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다. 갈 곳이 있기나 한가. 자신에겐 반겨주는 사람 없는 거대한 저택과 아카데미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곳 모두 가고 싶지 않았고 마침 도착한 곳은 열차역이었다. 일로델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역 입구를 곁눈질하며 말을 꺼냈다.

“열차를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로델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가끔 있는 일이라는 듯 유리창 위에 조잡하게 붙어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매표소라고 쓰여 있는 게 보이죠? 여기서 표를 사서 열차가 오면 역원에게 주고 탑승하면 돼요. 열차에서 내리는 방법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맹랑한 꼬마였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평민인 게 뻔했지만, 어린애 상대로 불쾌해하는 것도 우스워서 품 안에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뭔가를 살 때 돈을 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를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지갑을 통째로 건넸다.

“실톤으로 가는 표를 줘.”

실톤은 바다를 오갈 수 있는 항구도시였다. 지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바다를 넘어가면 황제가 사는 도시가 나오고 황궁에는 외숙뻘인 황제와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 다 거기까지 찾아간 자신을 보고 놀랄지언정 당장 돌아가라며 내치진 않을 것이었다.

“실톤이요?”

아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더니 어정쩡한 얼굴로 지갑을 받아들였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세요?”

“뭐?”

일로델이 뜨끔해서 노려보았다. 아이는 농담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야만인들 때문에 그쪽 지역이 뒤숭숭해서 잘 안 가거든요. 손님이 없어서 열차도 제일 후지고요.”

“…….”

“어떤 기자는 취재하러 갔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도 하고, 곧 통행금지가 될 거라는 소문도 있어요.”

“그래서?”

“그렇다는 거죠. 제게 책임을 묻지만 않는다면 드릴 순 있어요. 상황이 이래서 좀… 비싸지만요.”

일로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지갑에서 지폐를 뭉치로 꺼내 갔다. 제대로 된 금액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표와 지갑을 받아 들었다. 일로델에겐 가치를 알 수 없는 종이 몇 장보다 시간이 더 귀했다.

승강장 벤치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연신 역 입구를 살폈다. 당장 누군가 들이닥칠 것 같은데 조용했다. 건물로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티베인이었다. 아직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모르는 걸까. 그 야만인 자식은 자신이 열차를 탈 결심을 했다는 걸 알면 펄펄 뛸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티베인이 아직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눈으로 확인해야 불안함이 덜하니까. 그런 생각을 한 일로델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역사 안으로 진입했다. 역원이 ‘실톤행’이라고 쓰인 푯말을 흔들었다.

“…….”

확인해서 뭐하게. 아직 모른다면 오르본을 쥐어박고 있을 것이고, 알았으면 벌써 왔다. 일로델은 열차 앞에 선 역원에게 표를 내밀고 번호표를 받아 차량에 올랐다. 그리고 텅 빈 객실 칸을 헤매다 번호와 맞는 좌석을 발견하고 앉았다.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가 등에 닿자 비로소 열차에 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열차에 타고 있으면 실톤으로 가게 된다.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지. 지금은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이고 이곳엔 자신이 쉴 곳이 없었다. 안전한 휴식처를 찾아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 좀 앉아도 되는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말을 건넨 이는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이었다.

“웬일로 동행이 생겼구만. 가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겠어.”

아직 승낙도 하지 않았는데 중년인이 앞자리에 짐을 펼쳐놓았다. 모르는 사람과 앉아 있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일어나라고 하기도 뭐했다. 일로델은 마음대로 하라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건너편에 열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파리만 날리던 이쪽 승강장과는 모양새가 확연히 달랐다.

“실톤에는 혼자 가시는가?”

일로델이 중년인을 돌아보았다. 행색은 깔끔하지만, 옷깃이 닳아있고 피부가 거칠다. 많이 봐줘도 재산깨나 있는 평민일 것이다. 다른 때라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용납되지 못했겠지만, 지금 이곳엔 그를 제지할 호위들도 없고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약간 관대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담하군!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하는 것도 젊은이의 특권이지. 그러다 마음에 드는 동료를 만나게 될 수도 있고.”

“…….”

그럴까.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분을 숨긴다면 모르는 사람과도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지는 신분이던가. 언젠가는 들통날 것이고 기껏 쌓아 올린 친밀함은 거품이 되어 사라질 게 뻔했다. 아니, 그 이전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귀족들은 오랫동안 야만인들의 납치 표적이 되어왔다. 목적은 금품이나 물건일 때도 있지만, 인질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티베인도 후자에 속했다. 나중에 듣기론 잡아들인 야만인들 오백과 티베인 하나를 교환하자는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성사될 리 없었다. 그렇게 죽어 나가는 귀족들이 해마다 두어 명 정도는 나왔다. 제 발로 살아 돌아온 티베인이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단칼에 버려지겠지. 살아 돌아오는 건 꿈도 못 꿀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납치당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사실상 문젯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얘기에 가까웠다. 알아서 사려야 했다. 모르는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고 아는 사람이어도 가족들의 용인이 없으면 가까이하지 않는다. 조금 외로웠지만, 버려지는 것보다 나았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곧 열차가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뒤늦게 올라탄 너덧 명의 남자들이 자리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승객을 태운 열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실톤에 가는 사람이 많군. 요즘 밀무역이 성행이긴 하지.”

“밀무역?”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일로델이 묻자 중년인이 눈을 빛냈다.

“관심 있는가? 안 그래도 자네처럼 귀티 나는 동료를 찾고 있긴 했는데….”

밀무역이라면 범죄 아닌가? 이렇게 당당하게 동료를 구하는 거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로델이 아리송한 얼굴로 중년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중년인이 제 가방을 뒤적였다. 오동통한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노란색의 가루가 담긴 종이였다.

“아사초의 잎을 오십 일 동안 말려서 가루를 낸 것이네.”

“아사초의 잎?”

“아주 귀한 약재지. 이걸 한 자루 들여오면 작은 저택 하나 정도는 사들일 수 있을 거야. 한번 맛보겠는가?”

그 말에 일로델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사초의 잎이 약재라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오히려 중독성이 강한 환각을 일으킨다고 해서 쉽게 다뤄선 안 되는 독초였다. 그런 걸 팔고 살 리가 없는데. 혹시 이 사람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걸까. 동료까진 못 되더라도 도와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전공자로서 묘한 정의감이 솟아오른 일로델이 가루를 받아 든 때였다.

위에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려와 중년인의 팔목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가루가 테이블에 쏟아졌다.

“실례.”

옆을 지나가던 남자가 깊게 눌러 쓴 모자를 살짝 건드리며 사과했다. 방금 일부러 손을 쳤던 것 같은데. 잘못 본 걸까? 하지만 중년인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닌지 정신없이 테이블을 훑어댔다. 그걸로도 모자라 가루를 손으로 찍어서 쪽쪽 빨기까지 했다.

“이 아까운 게… 자네도 조금 들어봐. 얼마나 좋은 건지 먹어봐야 알지, 자….”

중년인이 침 묻은 손으로 가루를 찍어 들이댔다. 순간 정의감이고 뭐고 사라진 일로델이 질색하며 몸을 물렸다. 때마침 걸어오던 사람이 중년인의 어깨를 밀쳤다. 일로델에게 달려들 것처럼 손을 내밀던 중년인이 테이블에 철퍼덕 엎어졌다.

“아, 실례합니다.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아까와 같은 사람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인사하곤 성큼성큼 사라졌다.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로델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년인은 그 이후로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

끝없이 이어지는 황무지를 지루하게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열차가 천천히 멈추는 느낌을 받고 눈을 떴다. 앞자리에서 중년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일로델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타오르는 일몰 외의 모든 것들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

순간 바다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모래였다. 빛을 받으면 푸른색으로 빛나는 모래. 사막 속에는 바다처럼 깊고 푸른 또 다른 사막이 있다고 했다. 장관을 눈앞에 두고 넋을 잃은 사이 열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정신없이 졸던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뭐야. 벌써 도착인가?”

반쯤 감긴 눈으로 두리번대던 그가 곧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조용히는 안 넘어가는군, 야만인 녀석들.”

“야만인?”

“사막으로 쫓겨난 굶주린 죄수들이네. 야만인 중에서도 아주 질이 안 좋지.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자자해.”

뭐라고? 일로델이 놀란 것과 동시에 쿵, 하는 흔들림이 열차를 덮쳤다. 중년인이 급히 손잡이를 붙잡았다. 바깥에서 무언가 열차를 강하게 두드리다 뚝 멈췄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별안간 시커먼 그림자가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어이쿠.”

중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물렸다. 창문에 붙은 야만인이 안을 들여다보듯 얼굴을 들이민다.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눈코입과 온몸을 덮은 동물의 모피. 그 손에 들린 무언가가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도끼였다.

“…!”

“아니, 왜 하필 여기 붙었어. 저리 가라, 저리 가.”

중년인이 마치 개라도 쫓듯 손을 내저었다. 일로델이 파랗게 질려서 그와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괜찮네. 사막을 지나는 구간에선 자주 있는 일이야. 모래 때문에 꼭 한 번씩은 엔진이 고장 나서 멈추거든.”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말도 안 돼. 일로델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년인의 말이 허투는 아닌지 띄엄띄엄 앉아 있는 승객들 모두 동요의 기색은 없었다. 불신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중년인이 껄껄 웃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보조 엔진이 있으니 곧 출발할 걸세. 그리고 이 유리창은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안전해. 비싼 특수 소재이지만 록퍼스가의 지원으로 전부 교체됐지.”

록퍼스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일로델이 멈칫했다.

“유명한 귀족가이니 자네도 알겠지? 유난히 도시 방비에 관심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도 덕을 보고 있지. 철도 회사에서 지원금을 슬쩍 떼먹은 게 아닌 이상 문제없을 거야. 하하하.”

중년인이 걱정 말고 잠이나 더 자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때였다. 창문에 도끼가 꽂히더니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깊고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중년인의 미소 띤 얼굴이 금 간 유리처럼 일그러졌다.

“망할 철도 회사 놈들.”

중년인이 급히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는 그 모습을 보며 일로델도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이곳은 열차 안이고 바깥에는 야만인들이 있었다. 생전 처음 겪는 위기에 일로델이 우왕좌왕하던 참이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일로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앉아 있어.”

귓가에 닿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일로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유리창이 깨지며 야만인이 들이닥쳤다. 커다란 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장갑 낀 손이 야만인의 목을 잡아 쥐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했다.

“바람이 차니까 걸치고 있도록 해.”

온기가 남아있는 코트가 어깨를 덮었다. 이 코트의 주인은 방금 야만인의 목을 꺾고 열차 밖으로 내던졌다. 도끼를 휘두르는 위험천만한 상대 앞에서, 맨손으로.

“…….”

한참 그대로 앉아 있던 일로델이 숨을 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앞서 걷는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어릴 적에는 그 커다란 뒷모습을 매일 따라다니며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는 돌아봐 주기를 바라며. 마침내 돌아봐 주었을 땐 너무 좋아서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형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새우잠을 잤었는데.

“형님?”

일로델이 웅얼거리며 로건을 따라가려 했다. 앉아 있던 승객 셋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건을 따르고 나머지 한 명이 일로델에게 다가왔다. 로건까지 총 다섯. 모두 뒤늦게 열차에 올라탔던 사람들이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바깥에 저런 야만인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거길 맨몸으로 나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로델이 코트를 걸친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자 호위가 당황해서 뒤를 따랐다.

“일로델님, 바깥은 위험합니다.”

“알아.”

“안으로….”

“당신은 왜 여기 있어?”

“예?”

“가서 내 형을 도와야 할 거 아냐!”

일로델이 다리에 힘이 풀려서 통로에 주저앉았다. 호위가 서둘러 일로델을 근처에 있는 좌석에 앉혔다. 코트를 덮어주겠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길이 귀찮았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하지만….”

호위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아까 중년인을 치고 지나갔던 예의 바른 남자였다. 잘 보니 집에서도 몇 번 봤던 것 같다. 왜 몰랐을까.

일로델이 실소를 터뜨렸다. 하긴, 형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도 몰랐다. 중년인의 손을 쳐낸 것도 형이었겠지. 참 번거로운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면 당당히 나타나서 명령하면 된다. 떠나지 못하게 막고 싶으면 열차 운행을 멈추고 끌고 가면 된다. 자신에게 손을 대고 싶으면, 그래. 까짓거 대놓고 강간해도 그만이다. 그만한 권력이 있는 사람이면서, 도대체 왜 매번 사람을 이렇게 우습게 만드는 걸까.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죽어버려.”

“예에?”

하지만 그랬다가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순간 도끼를 쳐든 야만인과 그 앞에 선 로건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넋 나간 것처럼 앉아 있던 일로델이 벌떡 일어나 다시 출입구로 향했다.

“일로델님!?”

호위가 서둘러 따라붙으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무례했지만, 이해했다. 자신도 갈피를 못 잡겠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령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정 걱정되시면 제가 밖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필요 없어. 저리 가.”

“그러다 쓰러지시면 제가 경을 칩니다.”

“당신이 날 잡고 늘어지는 건 괜찮고?”

헉. 호위가 불에 덴 것처럼 놀라서 떨어졌다. 그를 노려본 일로델이 밖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호위가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따랐다.

빠지면 잠길 것 같은 푸른 모래가 발밑에서 서걱서걱 밟혔다. 그렇게 조심조심 나아가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발끝을 경계로 검은 핏자국이 만연했다. 천천히 올라간 시야 끝에 로건이 닿았다.

“앉아 있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일로델의 시선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핏물에 검게 젖은 푸른 모래.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도끼. 이상한 자세로 모래 속에 파묻혀 움직이지 않는 야만인들… 그런 것들이 로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로건이 작게 한숨을 쉬곤 묵직하게 젖은 장갑을 벗었다. 일로델은 툭, 하고 떨어지는 그것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로건을 보았다. 입이 굳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로건이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시체들 사이를 걸어 나왔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얄궂게 됐지.”

“…….”

“대충 정리됐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곧 출발할 테니 들어가 있도록 해.”

“…….”

“일로델.”

침묵이 계속되자 로건의 미소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서 있던 일로델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로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제 허리에 매달리는 일로델을 끌어안았다.

“일로델?”

“어디 다친 곳은, 형님….”

힘껏 내뱉은 말이었는데, 기껏 나온 건 울먹임 같은 웅얼거림이었다. 등을 껴안은 손이 멈칫했다. 조금의 사이를 두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다시피 다친 곳은 없어.”

“…….”

“괜찮아.”

그제야 일로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로건이 무너지는 몸을 안아 들며 다정하게 물었다.

“집에 갈까, 일로델?”

일로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로건을 꼭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위로 작은 웃음이 스쳤다.

*

로건의 부하들이 야만인들의 시체를 정리했다. 일로델은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로건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시체들이 무서웠다. 끔찍하다거나 징그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보면 자꾸 로건의 죽음이 상상되었다. 자칫했다간 저곳에 죽어 있는 게 로건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발밑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화물칸으로 대피했던 중년인은 소동이 정리되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는 창문 너머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일로델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일로델 역시 그를 모른 척했다. 보조 엔진을 작동시킨 열차가 선로를 타고 빠르게 사라졌다. 드넓은 사막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추워?”

거친 모래바람이 잠잠해지자 로건이 물었다. 일로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고요함은 서늘함을 닮아 있었다. 춥진 않지만 추운 것 같기도 해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로건은 말없이 일로델의 어깨에 걸친 코트를 고쳐주었다.

“위치는 어디쯤이지?”

“도시 남서쪽으로 250마일가량 떨어진 사막 안입니다.”

“가까운 곳에 마을은?”

“걸어서 갈 만한 곳에는 없습니다.”

일로델은 로건과 그의 부하가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묻고 있던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곧 밤이 올 텐데. 어떡하지.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눈치챈 로건이 일로델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해가 지고 있는데… 집에는 어떻게 가죠?”

지금은 빛이 있지만, 완전히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움직이면 위험할 텐데. 차라리 열차를 같이 타고 실톤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일로델의 얼굴이 걱정으로 흐려졌다. 로건은 고개를 조금 갸웃하더니 가볍게 미소지었다.

“글쎄.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노, 노숙이요?”

일로델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열차에 타지 말 걸 그랬지. 물론 원인 제공이 있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지만, 당장 문제가 생기자 후회가 막심했다. 이곳은 짐승들보다 위험한 야만인이 있는 사막이었다. 이불 대신 모래를 덮고 밤새 야만인들이 덮쳐오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모습이 눈앞에 스쳤다.

“농담이야, 일로델.”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일로델이 귀를 의심하며 얼굴을 들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너는 불편하겠지. 저택에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인지 로건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로델은 그런 로건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아침부터 해가 지는 지금까지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호텔을 나와서 오르본을 만나고 그에게서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즉흥적으로 열차에 탔다가 야만인까지 만났다. 전부 눈앞에 있는 자신의 형이 원인이었다. 일로델이 서서히 시선을 떨궜다.

“형이 열차에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겠죠.”

말이 우스웠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우연이길 바라는 속내가 빤했다. 힐끔 올려다보자 로건이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알면서 왜 묻느냐는 투였다.

“저를 미행했나요?”

“그렇지는 않아.”

그럼 어떻게…? 로건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것을 본 일로델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불길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미행하지 않고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됐으니까.”

일로델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뭐가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평범하게 미행을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로건이 혼란스러워하는 일로델에게 손을 뻗었다. 귓가의 피어스가 손끝에 스치며 존재감을 나타냈다.

“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야.”

“…….”

“네 모든 걸 통제할 생각은 없어. 여기서 더 욕심을 내면 너를 가둬놓고 싶어지겠지. 나는 그런 걸 바라진 않아.”

그럼 무엇을 바라는 건가요. 일로델은 대답을 기다리며 로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말을 더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바다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어디선가 낯선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푸른 사막 위로 빛이 저물고 있었다. 일로델은 문득 추위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로건이 일로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낯익은 체온과 함께 시원한 향기가 주위를 휘감았다.

“대령님, 차가 곧.”

마침 보고를 하려던 로건의 부하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같이 있던 다른 부하가 그를 툭 쳤다.

“…….”

예전 같으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부끄러웠다.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리는 일로델을 도닥이며 로건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혼자 있었지?”

“네?”

“내 부하가 호위를 붙여주었을 텐데.”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던 일로델이 작게 숨을 삼켰다. 로건은 호텔에 남겨두었던 부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자는 혼자 있게 해달라는 자신의 말을 들어준 것뿐이다. 어떻게 하면 불이익이 가지 않을지 생각하며 대답하려는데, 로건의 말이 더 빨랐다.

“네가 부탁했군.”

일로델이 움찔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로건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 끝을 올렸다. 미소처럼 보이지만 웃는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기분 나쁠 때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도 좋았다. 일로델의 눈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제가 혼자 나가겠다고 한 게 맞아요. 그 사람은 안 된다고 했지만… 아니, 안 된다고 한 건 아닌데 막으려고는 했어요. 그래도 제가 계속 떼를 쓰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거예요.”

“글쎄, 몰랐을까.”

“…….”

“알아도 들어주고 싶을 때가 있지. 목숨 줄이 위태로워진다고 해도….”

로건의 음성이 미묘하게 낮아졌다. 일로델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형이 화내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게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정말로 해고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일로델이 급하게 로건의 옷깃을 붙잡았다.

“형님.”

“괜찮아.”

로건이 일로델의 말을 잘랐다.

“네가 알고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 마음대로 처리한다면 너는 또 상처받을 테지.”

귀찮은 일이야. 로건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로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건은 가만히 있어도 위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면은 어머니 헤롯과 닮았는데, 고압적인 데다 화까지 잘 내는 헤롯은 반대 의견 하나 꺼내는 것도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로건마저 그러지는 않았으면 했다.

“왜 이렇게 복잡한 아이가 되었을까.”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말이 귀에 닿았다. 떨어져 있었다면 들리지 않았겠지만, 로건의 품속에 있어서 들렸다. 일로델이 로건을 올려다보자 그가 가만히 시선을 마주쳐왔다. 조용한 시간이 아주 잠깐 이어졌다.

고요하던 사막에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자동차 엔진음이었다. 사막용으로 개조된 군용차 두 대가 먼지를 뿜으며 달려오더니 거칠게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남자가 대뜸 일로델의 팔을 잡아챘다. 티베인이었다.

“너 뭐야?”

“티베인?”

푸른색 사막을 배경으로 우뚝 선 티베인은 묘하게 낯설었다. 드물게 무표정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로델은 당황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열차를 타기 전에 티베인을 봤었다. 저 멍청한 자식은 자신이 코앞에서 떠나는 줄도 모르고 오르본을 괴롭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 모래 바닥에 조그만 물건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침반 사이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이며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상한 기계였다.

“저 자식이 이걸 던져주고 가길래 한판 뜨자고 불러낸 줄 알았는데….”

티베인이 실없이 웃어보려다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러는 넌 뭐야?”

“…….”

“설마, 가출했냐?”

티베인이 내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별채에서 빠져나왔단 사실을 이제야 안 모양이었다. 모자란 자식. 그러게 왜 되도 않는 짓을 벌여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애초에 저 자식이 자신을 가둬놓으려 하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일로델은 구구절절 말하기도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일로델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티베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곧 일로델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놔!”

“닥치고 차에 타.”

“싫어!”

사실 모래바람을 맞고 있기보다 차에 타는 쪽이 훨씬 나았지만, 버릇처럼 싫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언제나 그랬다. 티베인은 힘으로 강요하려 들었고, 자신은 거부하고 상처 주면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하지만 티베인은 상처받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고 일로델을 차에 밀어 넣었다.

“하지 마!”

“시끄러. 봐주니까 한도 끝도 없지. 감히 날 두고 집을 나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 때문이잖아!”

“맞아, 내 탓이야. 손이라도 단단히 묶어놨어야 했는데, 잘못 생각했지.”

티베인이 전부터 집을 나가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미친놈처럼 굴 줄은 몰랐다. 일로델은 차 문을 잡고 버티다 힘껏 티베인을 밀쳤다.

“그만 좀 해, 이 강간범아!”

짝, 손을 쳐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뒤로 밀려난 티베인이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작게 한숨이 들린 것도 같았다.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자가 걷히고 드러난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래. 강간이라도 하고 들으니까 그 소리도 나쁘진 않네.”

“…….”

“니 멀대 친구에게 듣기론 형도 만만치 않은 짓을 벌였다던데. 그건 화간이었냐?”

일로델이 할 말을 잃고 티베인을 바라보았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푸른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작정하고 상처 주고 싶다는 눈이었다. 거부하고 거부당하고, 상처 주고 상처 입고. 자주 있는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적당히 그만두었겠지만, 티베인은 오히려 더 날뛰기 시작했다.

“똑같은 짓을 해도 누구 품에는 얌전히 안겨 있고, 누구는 손만 대도 질색을 하고… 모르는 척 참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빌어먹을!”

티베인이 욕설을 내뱉으며 죄 없는 차를 마구 걷어찼다. 일로델은 질린 얼굴로 물러나 그 모습을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귀족이 아니라 야만인 같았다. 제 딴엔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화를 내는가 본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로건이 티베인처럼 매사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굴었다면 자신도 그에 맞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약 조절에 능숙했고 휩쓸리다 보면 뭐가 뭔지 모를 상태에 와 있었다. 일로델이 로건을 친밀하게 여기면서도 거북해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참을 차에 화풀이하던 티베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일로델의 낯이 희게 질렸다.

“티베인!?”

티베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목표는 둘이 다투는 동안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던 로건이었다. 일로델이 경악해서 소리친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금속음이 울렸다. 로건의 부하들이 티베인에게 총을 겨누는 소리였다. 일로델이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을 내려놓으십시오, 중위님.”

로건의 부하 중 하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깐 어색하게 시선을 헤매던 사람이 지금은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무뚝뚝했다. 당황한 일로델이 로건을 찾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일로델은 급한 대로 티베인에게 속삭였다.

“이 미친놈아, 그거 당장 내려놔!”

로건은 티베인을 없애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이건 아주 좋은 빌미였다. 군에서는 상관에게 총을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반란이었고, 반란은 사형이지만 보통 형을 받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한마디로 티베인은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그거 알아? 일로델.”

티베인이 불쑥 말을 꺼내며 일로델에게 눈짓했다.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던 일로델이 놀라서 멈춰섰다. 딱히 총을 뺏으려던 걸 들켜서가 아니었다. 미친놈 같은 표정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냉정해서 놀란 것이었다.

“나는 저 자식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난 알지. 꽤 예전 일이거든.”

“뭐?”

일로델이 사실을 확인하듯 로건을 보았다. 드디어 이쪽에 흥미가 생겼는지 로건이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군.”

완전히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티베인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유모 젖이나 빨던 때의 얘기긴 해. 형도 아기 때 기억 정도는 있을 거 아냐?”

“별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데.”

“마찬가지야. 누가 자꾸 목을 조르지만 않았어도 대충 잊어버리고 살았겠지.”

이게 무슨 대화야. 일로델은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로건에게 어느 정도 잔인한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배자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떠올려 보면 로건은 언제나 쉽게 주변인들의 죽음을 예고했다. 부하들부터 시작해서 티베인, 그리고 부모님까지. 어쩌면 그 모든 게 막연히 던진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로델은 아찔함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티베인과 로건의 시선이 일로델에게 쏠렸다. 둘의 반응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없는 정신에도 변명하는 말이 나왔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차에 타 있어. 너 얼굴 창백해.”

일로델이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일로델은 힘없이 고개를 들고 티베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어릴 때 죽을 뻔했으니 너도 열 받은 김에 형을 죽이겠다구?”

“안 될 건 뭐야.”

“너는 부모님 입장은 생각도 안 해?”

“관심 없어. 너만 이해해주면 돼.”

왜 당연히 이해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일로델이 어이없이 티베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몸과 마음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이런 아수라장에 면역이 없다 보니 더욱 피곤하고 지쳤다.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답은 알고 있다. 저 잘난 형제들 등쌀 때문이었다. 불쑥 서러움이 치밀었다.

“너한테도 부탁하면 돼?”

무슨 말이냐는 듯 티베인이 돌아보았다.

“형한테도 너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너한테도 그럴까?”

“뭐?”

말하다 보니 울컥했다. 일로델이 아무거나 손에 쥐고 티베인을 향해 던졌다. 고운 입자의 푸른 모래가 연기처럼 흩날렸다.

“너한테까지 내가, 빌고, 부탁하고, 그래야 해?”

“뭐? 내가 언제….”

“너는 내 동생인데, 내가, 너한테까지 자존심 굽히고, 그러면 만족하냐고, 이 나쁜 자식아!”

“아… 야, 그만해!”

때아닌 모래바람에 습격당한 티베인이 팔을 저었다. 일로델은 더 당해보라며 되는대로 모래를 던져댔다. 그리곤 제풀에 지쳐서 엉엉 울었다. 깔끔 떨지 않으면 세상이 쪼개지는 줄 아는 일로델에게선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티베인이 황망하게 그 꼴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네가 날 죽이지 말라며 부탁했다고…?”

“꺼져!”

또다시 모래가 날아왔다. 티베인은 화를 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일로델을 보았다. 총구는 이미 목표를 잃고 허공을 향해 있었다. 순식간에 맥이 빠진 분위기에 로건의 부하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때까지 말없이 서 있던 로건이 한 손을 들었다. 티베인을 겨누고 있던 총들이 일사불란하게 내려갔다. 로건은 울고 있는 일로델의 뒤로 다가가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어린애처럼 일으켜 세워진 일로델이 쥐고 있던 모래를 던졌다. 누굴 겨냥해서 던진 건 아니었으나 애꿎게도 피해자는 앞에 있던 티베인뿐이었다.

“이거 놔!”

“일로델.”

“형도 미워요! 다시는 내 동생한테 그러지 마요. 가만 안 둬….”

“그래, 잘못했어. 미안하다.”

로건이 일로델을 안고 토닥였다. 일로델은 저항하는 듯하더니 로건에게 안겨 마저 울었다. 모래를 피해 물러났던 티베인이 사납게 둘을 보았지만 덤벼들진 않았다. 로건이 그런 그에게 살짝 턱짓했다. 총을 거두라는 신호였다. 티베인은 살짝 이를 갈고는 총을 갈무리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시기를 놓쳤다. 티베인은 오갈 곳 없어진 분노를 꿍얼거림으로 대신했다.

“뭐 하는 거야, 애도 아니고….”

저에게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들은 일로델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모래를 던졌다. 나머지 한 손에 남아있던 비장의 무기였다.

“아, 왜 나한테만 이래!”

일로델을 떼어내려고 다가가던 티베인이 버럭 화를 냈다. 한동안 성질머리 더러운 야만인의 포효가 사막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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