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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적이 있었지.
부모님은 지금처럼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었지만, 형은 집에 있을 때였다. 교육을 받으러 나갔던 티베인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아챈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었는데, 그날은 티베인의 방에 장난을 쳐놓은 날이었다. 저 손잡이를 잡으면 손이 물감투성이가 되겠지.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물감이 마를까 봐 몇 번이나 덧바르면서 녀석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밤이 되어 램프에 불이 환히 들어왔는데도 티베인은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티베인 못 봤어?’
결국, 기다림에 지친 일로델이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형 로건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그에게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마침 1층 서재에서 나오던 로건이 저를 찾아온 일로델을 보고 다정하게 웃었다.
‘마침 부르러 가던 참이야. 저녁 들러 갈까?’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독을 줘도 먹을 것 같은 그 먹보 자식이 이 시간까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 일로델이 본론부터 꺼냈다.
‘형, 티베인 못 봤어?’
‘티베인?’
‘아침에 나갔는데, 지금까지 안 들어왔어.’
‘글쎄. 정원이나 별채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까? 하지만 티베인이 혼자 정원이나 별채에서 노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 심술쟁이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는 녀석이지, 얌전하게 혼자 노는 녀석은 절대 아니었다.
‘아냐. 집에 안 왔어.’
확신을 담아 말하는 일로델을 보며 로건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아느냐면, 나름의 추리와 쌍둥이의 감이었다. 하지만 그걸 조리 있게 설명할 능력이 안 되는 일로델이 대답을 헤매자 로건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집 안 어딘가에 있을 거야. 배고프면 나오겠지. 그만 가자.’
‘응….’
그렇게 얼렁뚱땅 식사를 마치고 다시 티베인의 방 앞으로 갔다. 물감이 마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슬쩍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문을 닫고 이번엔 식당으로 갔다. 당시엔 혹시 모를 계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1층에 방을 꾸며주었기에 식당과 방을 오가기 쉬웠다. 유령처럼 티베인의 방과 식당을 왔다 갔다 떠도는 일로델을 하인들이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한참 돌아다니던 일로델은 그들 중 하나를 붙잡아 다시 로건이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납치?’
로건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인이 뒷걸음질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일로델은 그 재빠른 움직임을 놀라서 쳐다보다가 로건의 방에 들어갈 타이밍을 놓쳤다.
‘티베인 도련님을 데려간 야만인들이 인질의 교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공께 연락을 넣을까요?’
‘…….’
일로델은 귀를 의심했다. 인질 교환이라니. 야만인들이 티베인을 데려가? 설마 그 멧돼지 같은 녀석이 야만인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걸까? 허구한 날 듣는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이 되어 다가온 기분이었다. 가슴이 덜컥해서 로건에게 달려가 매달리려는데, 냉정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내버려 둬.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도 제 능력 부족이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저택 안이 아닌 생판 어딘지 알 수 없는 길바닥이었다. 자정이 되어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틈을 타 나왔던 건 기억나는데, 그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는 캄캄하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집도 잃고 길도 잃어버린 일로델이 엉엉 울며 걷던 때였다. 동그란 램프가 허공을 둥둥 떠서 다가오더니 눈앞에서 멈췄다. 희미한 불빛 위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너 여기서 뭐 해?’
‘티베인?’
‘미쳤냐? 이 시간에 왜 혼자 돌아다녀? 너 같은 거한테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눈물로 흐려진 눈을 닦고 다시 보았다. 티베인이 맞았다.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데? 납치당한 거 아냐?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머릿속을 떠도는 의문들과는 달랐다.
‘길 잃어버렸어….’
어쨌거나 지금 현재 일로델에게 가장 서러운 건 그것이었다. 한마디 던지고 엉엉 우는 일로델을 티베인이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자동차 여러 대가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다가왔다. 혼비백산해서 록퍼스가 아들내미들을 찾아 나온 경비병들과 로건이었다.
일로델은 로건을 보자 서러움이 배가 되어서 통곡을 했다. 로건이 냉정한 소리를 해서 제가 집을 나와 길을 잃어버렸다는 묘하게 그럴싸한 결론이 도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다가온 로건이 우는 일로델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못마땅한 기색의 티베인을 흘긋거리곤 다시 일로델을 보았다. 자신이 무언가 하지 않으면 그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일로델은 터덜터덜 다가가 로건의 허리에 찰싹 매달렸다.
‘일로델, 집에 갈까?’
‘응….’
다정한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로건이 일로델을 안아 들었다. 일로델은 그의 시원한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뚱한 얼굴로 선 티베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자.’
티베인은 군말 없이 팔을 뻗어 일로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티베인이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밤에 나와 돌아다녀서 길을 잃었는지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태도였다. 얼마나 끈질기게 구는지, 그만 본심이 나와버렸다.
‘너 찾으러 나갔단 말야.’
그게 본심인 것도 말하고 나서야 알았던 것 같다. 티베인은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본 적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바보 아냐?’
‘…….’
고생을 폄하당한 일로델이 티베인에게 독초 맛 빵을 선물로 준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
그때 일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아마 기쁘게 웃는 얼굴이 지금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가 깜짝 놀랐다. 기억 속 그날처럼 티베인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각도는 좀, 많이 달랐지만.
티베인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걸 깨달은 일로델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몸 상태가 멀쩡했다면 성공했을 테지만, 남이 보기엔 허망한 몸부림이었다. 티베인이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일로델의 가슴팍을 토닥였다.
“누워있어. 어차피 주말이라 아카데미도 쉴 거 아냐.”
“너,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마, 마지막에….”
떠올리기도 끔찍한 일을 꺼내 들며 조심조심 배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터지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서 몸을 일으켜 확인해보려는데 티베인이 또 가슴을 토닥거린다. 아까보다 손에 힘이 좀 들어가 있다. 이건, 토닥이는 척하면서 누르는 거다.
“얘기했잖아. 알파들은 좋으면 그렇게 돼. 나도 말로만 들었고 겪어보는 건 처음이지만….”
“…….”
일로델이 쑥스럽게 웃는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은근슬쩍 가슴팍을 쓰다듬는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처음엔 다리고 허리고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움직여지지도 않더니, 이제 자리에 앉는 정도는 가능했다. 티베인이 침대 헤드에 기대서 숨을 몰아쉬는 일로델을 기웃거렸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청소도 하고 몸도 다 씻겼는데. 물 줄까? 아, 배고픈가? 식사를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혼자 호들갑을 떠는 티베인을 바라보던 일로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좋겠는데, 정신이 들자마자 모든 게 다 생각났다. 알파와 오메가가 한집에서 지내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자신에게 닥칠 줄이야.
이것저것 머리는 복잡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후회한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벌어진 일의 수습일 것이다. 솔직히 수습에도 별로 자신은 없지만, 해야만 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가족 간의 일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티베인.”
“왜, 뭐 해줄까?”
“전에, 그날 일이 실수도 뭣도 아닌 사고였다고 얘기했었지.”
티베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되짚어보는 눈치였다.
“그땐 못 알아들어서 미안해.”
“…….”
“무슨 뜻인지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어제도 사고였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은 티베인이 사납게 목을 울렸다. 이 녀석이 짐승 같다고 느껴지는 건 이럴 때였다. 감정 교류가 되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어긋나면 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급격히 피곤함이 치밀었지만, 티베인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사고야.”
지금까진 티베인이 개가 되면 개 취급을 해주면 끝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짐승과 사람이 아닌 형제간에 일어난 일이다. 외면하고 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네가 던진 유리병…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안에 있는 게 원인이었을 거야. 너나 나나 그게 깨지고 난 다음부터 이상해졌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었다. 유리병의 내용물이 극독이었다면 티베인도 자신도 어제가 인생의 마지막 날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야 아카데미 학생이 테러범도 아니고 그렇게 위험한 물질을 갖고 다닐 리 없겠지만, 사실상 자신과 티베인에겐 충분히 위험했고 그로 인한 문제도 이미 생겨버렸다.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애초에 남의 것에 손대질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었다.
“너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나는 다행히 임신할 수 있는 몸도 아니니까 그만 됐어. 너도 기분 나쁘겠지만 그냥 잊자.”
말은 그렇게 해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격한 운동을 끝낸 것처럼 쑤시는 몸과 아래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이물감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쌍둥이 동생에게 울고불고 애원하며 신음했던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평생 떠받들어져서 수치심을 느낄 일이 별로 없었던 만큼, 더욱 그랬다.
“잊자?”
티베인이 이를 갈며 일로델의 말을 되풀이했다. 잠들기 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었던 얼굴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나더러 개, 개 하더니, 정말 개한테 물린 것 같냐?”
수습 실패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저러다 분을 못 이겨 한 대 치고 끝내주길 바랐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억센 손에 어깨를 붙들려 시트 위로 처박혔다. 허리가 번쩍 들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티베인을 보고 나서야, 맨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 마, 그만해!”
“뭘 할 줄 알고 그만하라는 거야? 네 말대로 내가 어제 일을 불행한 사고라고 생각한다면, 너한테 그 짓을 또 할 리는 없잖아. 안 그래?”
말문이 막힌 일로델이 잠시 멈칫한 사이 티베인이 거칠게 덮쳐왔다. 일로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항해보려고 벌렸던 입술이 뜨거운 열기에 먹혀 사라졌다.
*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저녁이었다. 하루가 통으로 날아갔다. 허탈하면서도 뭐 어떠랴 싶었다. 하등 쓸모없고 동생에게 덮쳐지기나 하는 베타 하나 없어도 세상은 돌아갔다. 그렇다고 송장처럼 침대에만 누워있을 순 없어서 꾸역꾸역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일로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래에서 뭐가 흘렀다. 이 꼴로 만들어놓고 씻겨놓지도 않은 것이다. 개자식이었다.
별채에 딸린 욕실에서 꾸역꾸역 몸을 씻고 나오는 길에 습관처럼 향유를 바르려다 그만두었다. 당분간 몸에 아무것도 바르지 말자. 유리병처럼 생긴 것 근처에도 가지 말자. 그리고 티베인에게도 다가가지 말자.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입을 걸 찾아보았지만, 입었던 옷은 구석에 걸레짝처럼 처박혀 있었고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티베인이 새로 갈아놓은 하얀 시트를 몸에 둘렀다. 다른 무엇보다 이 꼴을 한 지금이 제일 비참했다.
이참에 정말 나가 사는 걸 진지하게 궁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를 설득해보려는 방법은 어이없게 실패했으니 이번엔 아버지를 꼬셔보는 것도 좋겠지.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라 일단 만나는 것부터가 난관이겠지만.
미친 짐승처럼 날뛰었던 티베인은 자신을 기절할 때까지 밀어붙이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기절했는지 안 했는지 계속 확인을 했다. 왜인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깨어 있었는데 잠깐 멍해진 사이 뺨을 철썩 쳐서 깨우더니 아예 끝까지 몰아붙였다. 개자식에, 야만인 자식이었다.
결국 기절하는 바람에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티베인이 나간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테이블에 놓인 수프의 김이 따뜻했지만,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 별채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티베인이 돌아올까 봐 지레 겁이 난 것도 있었다.
본채로 가야지. 거긴 하인들이 상시 대기 중이니 위험한 일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일로델은 어제의 난동이 꿈이었던 것처럼 깨끗이 치워진 현관에서 문고리를 돌렸다.
“…….”
힘없이 헛도는 느낌이 나서 한 번 더 돌렸다. 열리질 않는다. 어깨로 밀어보았지만, 두꺼운 철문은 꿈쩍도 안 했다. 고장이 났나? 어처구니없이 서 있다가 저번에 하인이 알려준 초인종이 떠올랐다. 문 옆에 있다고 했는데… 있긴 있었다. 뭔가 뜯겨나간 듯한 처참한 잔해가.
서둘러 어딘가에 비밀 문이나 개구멍이 있는지 확인해봤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바닥을 헤집고 다니다 창문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침실, 욕실, 조그만 서재, 응접실을 차례로 훑었다. 천장에 달린 건 닿지 않아 모르겠지만, 손이 가는 곳은 전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응접실 구석에 있는 환기창을 힘주어 밀었는데, 열렸다. 툭 소리가 난 걸 보면 밖에서 문이 열리지 않게 고정해놓은 것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일로델은 물먹은 솜 같은 몸을 환기창 밖으로 빼내며 이를 갈았다. 갇힐 뻔했다. 멀쩡한 집 안에서 감금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범인은 누군지 뻔했다. 개자식에, 야만인에, 미친 자식이었다.
“일로델님?”
“뭐 해? 보고 있지 말고 도와줘!”
일로델이 시트를 두르고 별채의 조그만 환기창에서 빠져나오자 평소엔 몸을 숨기고 있던 호위들이 등장해서 눈을 끔뻑였다. 그들은 어린 날의 ‘납치와 가출 사건’ 이후로 추가된 인력인데 자신이 보기엔 아주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불필요함의 정점을 찍었다. 도대체 뭐 하다가 이제 나오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지쳐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빠져나온 일로델이 호위를 노려보며 쌕쌕거리다 충동적으로 명령했다.
“차를 내와. 외출할 거야.”
“…….”
호위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왜?”
“아니오. 어디로 가십니까?”
“아직 안 정했어. 빨리 내와.”
“…알겠습니다.”
호위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차고로 사라졌다. 곧 외출용 세단이 준비되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경계하던 일로델이 서둘러 올라탔다. 그리고 문부터 잠그고 앉아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된 이상 집 안도 안전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아카데미는 닫힐 시간이고, 티베인에게서 도망치기 좋은 장소도 아니었다. 형은 아마 부대로 돌아갔을 것이고, 어머니 헤롯은 바다 건너 황궁에 있었다. 아버지 셰본은 하도 돌아다녀서 찾아가느니 집에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빨랐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곳이 있었다.
“번화가의 호텔로 가.”
“…….”
호위들이 또다시 시선을 마주하더니, 백미러로 일로델을 바라본다. 안 그래도 탐탁지 않은데, 이놈들이 자꾸 왜 이래? 언제 티베인이 나타날지 몰라 마음이 급한 일로델이 인상을 팍 쓰자 운전대를 잡은 녀석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꼭, 그리로 가셔야 합니까? 기분 전환이 필요하시다면 다른 장소도 있습니다만….”
이것들이… 형이나 티베인에겐 찍소리도 못하면서 자신에겐 거길 꼭 가야겠냐며 반문까지 한다. 가뜩이나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이렇게 대놓고 무시까지 당할 줄이야. 극에 달한 스트레스로 이성이 반쯤 사라진 일로델이 인내심을 잃고 소리쳤다.
“시끄러! 빨리 출발해!”
일로델의 닦달에 못 이긴 호위가 마지못해 운전을 시작했다. 백미러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어쩐지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힘없는 주인 신분에 호위에게까지 동정받는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아서 무시했다. 경비가 서 있는 정문을 지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러자 마음의 안정이 찾아옴과 동시에 서서히 분노가 떠올랐다.
미친 자식. 뭘 어쩌고 싶은 거야. 사고가 아니면 뭐, 사귀기라도 하자는 거야? 그럴 마음도 없지만, 어딜 둘러봐도 형제끼리 연애하는 집구석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품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귀족이. 야만인들도 경악할 일이었다.
티베인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딱히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하고많은 사람들 놔두고 왜 자신인지는 의문이지만, 알게 되었다. 몸을 겹친다는 건 그런 거였다. 궁금하지 않아도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티베인 자식은 잠자리에선 쓸데없이 솔직해지는 모양이라, 주절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네 반쪽이잖아. 나도 너밖에 없어. 일로델, 일로델….’
그런 놈이 형을 억지로 덮치고 기절까지 시켜서 가둬놓으려 해? 파렴치한 자식. 일로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창문에 갖다 박았다. 거리에 간간이 불빛이 반짝였다. 번화가 초입이었다.
번화가 안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 앞에 차가 정차했다. 북적였던 거리는 어둠과 함께 한산했다. 적게나마 빛이 없었다면 몹시 스산했겠지.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게 현실감이 없다.
어떻게 오긴 왔는데,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낯선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던 때였다.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더니 철컥, 소리가 났다. 문을 열려다가 잠겨 있어서 실패한 소리였다. 깜짝 놀라 문가에서 비켜 앉았다. 조금의 시간을 두고, 이번엔 낯선 손이 차창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희미한 불빛 아래 정체가 드러났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 로건의 부하였다.
“일로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저번에도 갑자기 나타나서 우산 시중을 들더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이었다. 멍청하니 눈을 깜빡이던 일로델이 잠금장치를 풀려다가 멈칫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의문이 다시 한번 되풀이되었다. 한계에 다다른 경계심 때문일까. 불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걸 열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서서히 문에서 멀어진 일로델이 창문 밖을 살피며 호위에게 명령했다.
“출발해. 다른 데로 가.”
“…….”
대답이 없다. 마음이 급해진 일로델이 한 번 더 재촉했다.
“뭐 해? 출발하라니까.”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라고?”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권력도 뭣도 없는 위치라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무시를 한단 말야? 일로델이 기가 막혀서 돌아본 것과 동시에 달칵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운전석에서 해제한 것이었다.
“뭐, 뭐야?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미 열어놓고 죄송하다면 다야!? 소스라치게 놀란 일로델이 문을 열지 못하게 손잡이에 매달렸다. 밖에서 문을 열려던 로건의 부하가 저항하는 힘을 느끼고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다. 힘을 주어 열었다간 상사의 동생이자 황제의 조카가 나뒹굴 수도 있는 것이다. 기회였다. 그 틈을 타서 서둘러 반대편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밤바람이 서늘하다고 느낀 건 잠시였다. 일로델은 무언가에 부딪히듯 끌어안겼다.
“기다렸어, 일로델.”
희미한 가로등 속에서도 파랗게 반짝이는 눈이 곱게 휘어졌다. 형 로건이었다.
“…….”
출발할 수 없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드물게 사복 차림인 로건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차 주위를 포위하듯 서 있는 것을 보며, 일로델은 아득하게 눈을 감았다.
*
호텔 안은 이상할 정도로 어둡고 고요했다. 마치 비밀스러운 고성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 건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들 때문일 것이다. 로비와 복도를 지나치는 동안 손님과 직원은 보이지 않고 대신 제복 차림의 군인들이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어쩌면 무언가 임무 수행 중인 것이 아닐까? 일로델이 설명을 요구하며 저를 안고 걷는 로건과 그의 부하들을 번갈아 보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승강기가 최상층에 도착하고, 앞에서 대기 중이던 군인들이 객실 문을 열었다. 바로 어제 왔었던 그 방이었지만, 느낌은 상당히 달랐다. 로건의 부하들이 방 안에까지 들어와 서 있었다. 경례를 건네는 부하들을 지나친 로건은 안고 있던 일로델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맨몸에 두르고 있는 시트가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형님…?”
눕히면 눕히는 대로 눈만 굴리던 일로델이 홀린 것처럼 로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침대 측면에 걸터앉은 로건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는 눈이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일로델이 들키지 않게 침을 삼켰다.
“왜, 왜 여기 계시나요? 부대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나요?”
“…….”
“저를 기다렸다는 건 무슨 얘긴가요? 저는, 제가 여기 온 건….”
순전히 우연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려다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우연인가? 그래, 우연이었다. 오르본에게서 유리병을 훔친 것부터 시작해서 병이 깨지는 바람에 티베인과 사고를 치고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 모두 우연이었다.
그럼에도 로건이 저를 기다렸다는 건 무슨 말일까.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생각하기엔 로건은 너무나 바쁜 사람이다. 혹시 휴가를 길게 받았나? 그래서 사복 차림인 걸까? 호텔 맛을 한번 본 자신이 또 올지 안 올지 부하들과 내기라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현실도피를 하는 일로델을 로건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듯 신중한 시선이었다.
“대답 좀 해주세요. 저는 지금 너무 피곤하고 불안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니, 일단 옷부터 준비해주시면 안 되나요? 급하게 나오느라 옷이, 아, 왜 급하게 나왔냐면….”
중압감에 못 이겨 횡설수설하던 일로델이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일을 형에게 말할 순 없었다. 형뿐일까. 부모님, 하인들, 방을 지키는 군인들, 하다못해 길 가는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비밀이 없는 저택에서 살고 있지만, 이번 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까지 혼자 안고 가야만 했다.
“옷, 옷은 됐어요. 저 사람들은 왜 있는 거죠? 시중들기엔 너무 많은걸요. 잠깐이라도 좋으니 나가라고 해주세요. 불안해요….”
“일로델.”
언젠가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부름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던 일로델이 로건을 바라보았다. 로건이 진정하라는 듯 일로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들은 너를 불안하게 만들 수 없어. 오히려 네 한마디로 목이 떨어질 수 있는 저들이 더 불안하겠지. 어때, 그렇게 해줄까?”
목이 떨어진다는 게 무슨 뜻일까. 해고된다는 이야기일까. 그렇겠지. 그것 말고 뭐가 있을까. 모두 자신이 쓸데없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어서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일로델이 진정하기 위해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별로 소용은 없었다. 갑자기 침대 가에 앉아 있던 로건이 반듯하게 서 있던 부하 하나에게 손짓했기 때문이었다.
“형님!?”
설마, 저 사람의 목을… 깜짝 놀란 일로델이 벌떡 일어나다가 흘러내리는 시트를 잽싸게 끌어모았다. 그런 일로델을 보며 로건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진정해. 네 부탁이 아니라면 쓸데없는 짓은 안 해.”
“그, 그렇지만….”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지?”
그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뇌가,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형은 여느 때보다 부드럽게 웃고 있고 그의 부하들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혹시 티베인에게 덮쳐지고 감금을 당할 뻔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 아닐까. 그래, 그럴 것이다. 어떻게 잘 도망치긴 했지만, 누구든 쌍둥이 동생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이성을 다잡기 힘들 것이었다. 망할 야만인 자식. 목이 떨어져야 할 건 그 자식이다.
일로델이 속으로 이를 가는 동안 로건의 부하가 물이 든 유리컵을 갖고 왔다. 그가 로건에게 잔을 건네는 찰나였다. 일로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본 것을 되새기려는 행동이었다. 로건의 부하는 무표정한 얼굴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손만 살짝 떨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은 그 떨림에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
“마셔.”
“…….”
일로델은 몸을 덮은 시트를 방패처럼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네받은 잔을 자신에게 권유하는 로건과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정면만 굳게 바라보고 선 그의 부하들은 낯설고, 또 낯익은 광경이었다.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저 커다란 유리창 앞에서였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을 닦아주는 로건이 낯설면서 낯익다고 느꼈다. 왜일까. 그 전에 로건이 자신의 몸을 닦아준 적은 없었는데.
“일로델.”
창 너머 흐릿한 전경을 바라보던 일로델이 다시 로건을 한 번 보고 머뭇머뭇 잔을 받아 들었다. 입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쥐고만 있었지만, 이걸 마셔야 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상황들이 풀릴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형을 믿을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사람을 상대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가족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어야 할까. 자신에겐 그 흔한 친구도, 지인도, 의지할 스승도 없었다. 가정교사가 있었지만 티베인과 문제가 생긴 이후로 들이지 않게 됐다. 그 대신 어머니를 졸라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지만 모두 자신을 피할 뿐이었다. 형, 부모님, 하다못해 동생까지 지나치게 우월해서 열등감만 안겨주는 존재인 데다 그 동생에겐 호된 꼴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겐 가족밖에 없었다.
괜한 불안감이다.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에 잠시 다녀왔던 날부터 오늘까지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일로델은 눈을 딱 감고 물을 들이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냥 물이었으니까. 허탈함에 잔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잠시 관찰하듯 일로델을 바라보던 로건이 빈 잔을 가져가서 부하에게 건넸다. 그리곤 누우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일로델은 순순히 자리에 누우며 로건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는군.”
“피곤해요.”
“무슨 일이 있었지?”
많은 일이 있었다. 이곳에 왔다가 용도를 알 수 없는 피어스를 달고 들어간 날, 티베인이 갑자기 미쳐서 자신의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먼저였지. 뭐라더라. 오메가 페로몬이 들어간 향유가 어쩌고 그랬는데. 늘 그렇듯 하찮은 트집으로 자신을 괴롭히려는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오르본의 유리병이 깨져서 이상한 냄새가 났고 대형사고가 터졌다. 아니, 사고라고 생각한 건 자신뿐이었던 것 같다. 티베인은 사고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이 돌아가선 자신을 감금하려 들었고, 놀라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로건을 만났다.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이런, 질문을 바꿔야겠군. 티베인이 네게 무슨 짓을 했지?”
“저를 덮쳤어요.”
어디선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로델이 말똥말똥 로건의 부하들을 쳐다보자, 로건이 일로델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돌렸다.
“조금 균열이 나길 바랐지만… 그 녀석이 거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그랬지?”
“유리병이 깨졌어요.”
“유리병?”
“오르본 건데 제가 훔쳤어요.”
형에게 도둑질한 걸 털어놔야 한다는 게 부끄럽다. 이제 술 먹고 사고 치지 말아야지. 그런데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지? 술도 안 마셨는데 왜인지 취한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기분이 좋다. 지금은 뭐든 다 기분 좋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병은 이렇게 생겼어요. 조그맣고, 갈색이고, 안에 들어 있는 건 알파를 쓰러뜨리는 독이랬어요. 그래서 궁금해서 훔쳤는데, 죄송해요….”
일로델이 손을 들어 유리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했다. 말이 술술 나오는 김에 그간 마음속에 담고 있던 죄를 털어낼 생각이었다. 옹알옹알 고해성사를 하는 일로델을 웃으며 바라보던 로건이 부하에게 눈짓했다.
“오르본은 어디 있지?”
“아래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데려올까요.”
“데려와.”
고개를 숙인 로건의 부하가 방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아직 방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많았지만, 방금 나간 사람이 자주 보았던 그 사람인 만큼 없으면 좀 허전했다. 계속 형 옆에서 잘 보좌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딜 갔지? 일로델이 사라진 사람을 찾아 방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지?”
“그 사람은 어디 갔나요?”
“누구?”
“형의 부하요.”
“글쎄.”
“그 사람은 이름이 뭔가요?”
로건이 낮게 웃었다. 파랗게 빛나는 눈이 살짝 접혔다. 자신도 저렇게 예쁜 눈을 가졌을까? 저렇게 아름다우면서,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고 차가울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네….”
알고 있다. 가족들이 공유하는 모든 일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계속 닿아보려는 자신이 바보인 것이다. 심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할 걸 알면서 계속 바라는 섬이 미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자신에겐 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어린 날의 티베인처럼 형에게, 가족에게 버림받을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
불현듯 로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로델이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티베인을 죽여줄까?”
“네?”
“그 녀석 부대는 머지않아 출정 예정이니 전사로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아. 얼마 후엔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형님?”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일로델.”
로건은 물어보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반쯤 확정 지은 말투였다. 티베인을 죽인다고? 세상에서 사라져? 그 야생 짐승 같은 녀석이 야만인과 싸우다 괴로워하며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목이 떨어져야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일로델이 겁먹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어요.”
“일로델.”
“싫어요.”
로건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또다시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문득 서러웠다. 왜 그 자식을 이렇게 열심히 살려줘야 할까. 망할 자식. 그래도 동생이다. 그리고 로건은 형이었다. 죽이느니 어쩌느니, 농담이라도 형제간에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허울 좋은 가족이란 이름도 찢겨 사라질 것이었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일로델이 서러움에 못 이겨 엉엉 울기 시작하자, 로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꼭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되는군.”
“형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로건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단 불쾌함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로건은 자신이 노크를 잊었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난 일로델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로건의 허리에 매달렸다. 어릴 적 분위기상 로건이 화났다고 생각될 때 써먹던 버릇이었다.
“혀엉… 화내지 마세요.”
“일로델.”
“우리 동생인데 왜 죽인다고 해요. 야만인들한테 납치됐는데 구하러 가지도 않고 너무해… 형 너무해요.”
아예 과거의 불만까지 탈탈 털며 울고불고 매달리는 일로델을 로건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생각이 많다는 건 어느 쪽으로든 계산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일로델은 부디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길 바라며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을 내리뜨고 있던 로건이 땀에 살짝 젖은 일로델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눈 밑에 맺혀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또다시 로건의 한숨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쓸데없는 몸부림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정답이었어. 설마 이런 녀석이 태어날 줄이야.”
이런 녀석이 어떤 녀석인 걸까. 쓸모없는 녀석이란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형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괴로울 것 같았다.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시트는 다 흘러내려 허리에 간신히 걸쳐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하나. 로건이 무슨 말을 할지가 가장 두려웠다.
“너는 자주 티베인에게 짐승이라고 했지. 틀린 말이 아니야. 록퍼스가는 왕이 되려는 수컷만 가득한 정글이지. 내게 티베인은 경쟁자이자 제거해야 할 대상이야. 물론 녀석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너는… 무엇일까.”
로건의 엄지 끝이 일로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떼고 제 허리를 감은 일로델의 팔을 풀었다. 나름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허무하게 풀린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침대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로건이었다.
“형님?”
“내 아이를 임신시키고 싶은 걸 보면 암컷 같기도 하고.”
“…….”
“어떻게 할까. 티베인을 죽일까, 아이를 낳을까.”
간단한 말이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씩 커지는 일로델의 눈을 보며, 로건이 짙게 미소지었다.
순간, 무슨 정신으로 침대를 박차고 뛰쳐나왔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비틀거리다 눈에 보이는 문부터 무작정 열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복도였다. 하지만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다. 로건의 부하들이 복도에서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멍하니 선 일로델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죄송합니다.” 한 마디만 남기고 열린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고요함이 찾아왔다.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은 건 티끌만큼 남은 귀족의 자존심 덕분이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느릿한 구둣발 소리가 넓은 방을 울렸다.
“나는 티베인을 죽이는 데에 찬성이야.”
등 뒤에서 다가온 하얀 손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시트를 끌어 올렸다. 그 급한 와중에도 몸을 가릴 건 챙겼구나. 한숨 같은 헛웃음이 흘렀다. 시원한 향기가 코끝에 닿고, 로건의 팔이 상체를 나긋하게 끌어안았다.
“너를 갖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망가뜨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낮은 속삭임이 스친 곳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귓바퀴였다. 일로델은 말하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망가진다는 게 무엇일까. 자신은 망가진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고장이 나도 하인들이 바로 고쳐놓거나 교체했고, 의복이나 하다못해 식탁에 올라오는 콩 하나조차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망가졌다는 건 포크에 찔려 부스러진 콩 같은 것일까. 좀 비참하긴 하겠지만 어디에도 쓸모없다는 점에선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로델, 대답은?”
어느새 온몸이 로건에게 푹 파묻혀 있었다. 강하게 안겨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젠 지쳐서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일로델은 제 몸을 옭아맨 로건의 팔을 잡고 고개만 작게 저었다. 둘 다 싫다는 뜻이었지만, 그 말은 결국 티베인을 죽이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로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목숨 줄도 긴 녀석이군.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 티베인도 그랬다. 발정이 나서 형인 자신의 위에 올라타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창문을 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형 로건도, 동생들을 두고 흉흉한 소리 할 거 없이 머지않아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아이 낳고 오순도순 잘살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황족과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가문의 실세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일로델이 두려운 것을 돌아보는 것처럼 머뭇머뭇 로건을 바라보았다.
“티베인은 동생이에요.”
“그래.”
“가족끼리 살인을 저지르는 건 중죄예요.”
“그랬지.”
“그리고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로건은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정말 그럴까?’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잠시 눈앞이 아찔해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쩌면 농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농담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만이 일말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형은 정말로 자신에게 씨를 뿌리고 아이를 갖게 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티베인과 같은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일로델은 진저리를 치는 것처럼 로건의 품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쳤다. 등 뒤로 차가운 문이 닿았다.
“형님, 제발.”
언제부터. 도대체 왜. 그런 의문보다 애원하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형태로 나타나 로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부하에게서 알코올 솜과 주사기를 건네받은 로건이 일로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진정해, 일로델. 네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상냥한 손길이었지만 속지 않았다. 일로델이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을 지키는 로건의 부하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나마 도망칠 수 있는 욕실 입구도 지키고 서 있어서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로건이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일로델의 팔을 잡아들었다.
“아, 아이가 필요하다면 나중에 제 아이를 양자로 드릴게요. 맞, 맞선 보고 결혼부터 해야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결혼이라.”
로건이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살짝 내리뜬 눈은 푸른 핏줄이 비치는 일로델의 팔뚝 어딘가를 더듬고 있었다.
“그만두는 게 좋아, 일로델. 네 결혼 허락을 내린 부모님까지 죽이고 싶진 않아.”
“…….”
진심이구나. 깨달은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나가는 말로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로건이 주사기의 캡을 열고 안에 든 액체를 몇 방울 흘려보냈다. 차가운 알코올 솜이 피부를 훑고 그 자리에 바늘 끝이 닿았다.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뻣뻣하게 굳었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하, 하지 마세요, 형, 제발….”
“괜찮아. 그냥 마취제야. 불안해할 것 없어.”
마취라니. 독초를 이용한 국소 마취라면 자신도 잘 안다. 하지만 몸 안에 직접 주사하여 마취하는 방식은 들어본 바가 없었다. 일반인이 알지 못한다는 건 귀족의 전유물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군용으로 개발된 것일 가능성이 컸다. 공포에 질린 일로델이 잡힌 팔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볍게 잡힌 것 같은데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와 혈관 속에 안착했다. 서늘하고 꺼림칙한 액체가 천천히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다리가 풀려 무너지는 일로델의 몸을 로건이 안아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가볍게 들리는 제 몸이 이상했다. 로건의 앞에선 언제나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정한 태도도 그러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복종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동생인 자신을 상대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건의 품에 안긴 채 힘겹게 눈을 깜빡이던 일로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물 위에 둥둥 뜬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침대에 눌어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질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눈을 떴다. 하지만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눈도 뜬 건지 안 뜬 건지 모르겠다. 그때, 먹먹한 고요함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작용은?”
“없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하던 것보다는 안전합니다. 발기 부전도 나아질 거고요.”
“성공확률은.”
“지, 지금 당장은 높지 않지만,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 오십… 아니, 최대 육십 퍼센트까지는 올라갈 겁니다.”
“여전히 제대로 하는 게 없군.”
“죄, 죄송합니다.”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는 형이고 쩔쩔매는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일로델이 눈을 깜빡였다.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캄캄했던 눈앞이 환해졌다. 동시에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몸의 감각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온 건 안도감이었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로건의 얼굴이 보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짓는 로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일로델이 어깨를 작게 떨었다. 아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몸속을 파고들다 빠져나갔다.
“아….”
로건이 몽롱하게 신음하는 일로델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일로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형이랑 뽀뽀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까. 힘없이 고개를 돌리자 작은 웃음이 뺨을 스쳤다.
“그만 나가봐.”
“저, 저어, 아직 드릴 말씀이.”
형의 뒤에 누군가 있었다.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멍 자국이 가득한 얼굴에 눈가리개를 한 남자였다. 마른 몸에 키만 훌쩍 높은 몸이 상당히 익숙했다. 저 사람이 누구였죠?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벌린 입에선 거친 호흡만 흘렀다. 어느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 얼굴을 훑었다. 대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네가 원하는 걸 보장받고 싶다면 이런 반쪽짜리가 아닌 완벽한 결과를 가지고 와야겠지.”
“…….”
“나가봐.”
“예….”
냉정한 말을 듣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자는 로건의 부하들에게 연행되다시피 방을 나섰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왜 눈가리개를 하고 돌아다니지. 하긴, 베타를 오메가로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도 남다르긴 했다.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르본…?”
“바로 알아보는군. 그와 친해진 모양이야.”
“친하지 않아요.”
“그래.”
몽롱한 와중에도 단호한 대답에 로건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또다시 입맞춤이 내려왔다.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입술을 삼키고 빨아들였다. 이런 것도 뽀뽀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형은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모르는 것뿐이지 흔한 애정표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도 모자란 것 같아서 기운 없이 늘어진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이건 그냥, 거부감이다. 형제끼리 너무 애정을 주고받는 것도 징그러우니까. 그러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것이 천천히 뱃속을 빠져나갔다. 질척, 하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입을 막은 손이 잘게 떨렸다.
“괜찮아, 일로델. 그렇게 떨지 마.”
“형님…?”
“별일 아니야.”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입맞춤이? 아니면, 아까부터 느릿하게 아래를 들락거리는 것이…?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일로델이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집요한 시선으로 그 모든 변화를 관찰하던 로건이 일로델을 깊게 껴안고 아래를 세게 쳐올렸다.
“아!”
손가락 사이로 날카로운 신음이 샜다. 입을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매끄럽게 내벽을 긁고 들어온 굵은 것이 계속해서 같은 지점을 문질렀다. 느긋하면서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아, 아….”
“한 번 사정해놨으니 아프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그 말대로 아프진 않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꾹 참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안을 비비는 속도가 빨라지자 급격히 시야가 비틀렸다. 입을 막던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았다.
“흐읏, 흣, 그만….”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쓸데없이 생생했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귀두로 내벽을 긁어대는 그것은, 평소엔 존재 자체에도 관심 없었던 형의 성기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안 돼, 형님, 싫어요, 싫….”
“일로델, 진정해. 괜찮아.”
“아, 싫어, 아, 앗!”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자 상체를 껴안은 힘이 강해졌다. 벗은 몸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위협적일 만큼 완벽하게 짜인 남자의 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등을 옭아맸다. 아래를 쳐올리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일로델이 진저리치며 고개를 비틀었다. 일부러인 것처럼 어느 한 곳을 찔러 올릴 때마다 뇌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아, 아앗, 아! 아!”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기분 좋아지는 일이지.”
달래듯이 귓가를 문지르는 입술과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서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릴 것 같았다. 일로델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불안정하게 주변을 훑었다. 로건의 부하들이 아직 방에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모두 눈을 감고 늘어서 있었지만, 음란하게 질척이는 소리와 헐떡이는 신음은 적나라하게 들릴 것이었다.
“하아, 하아, 싫어, 싫… 앗, 앗!”
적어도 신음이라도 억누르고 싶었지만, 점점 거칠어지는 움직임에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상체를 옭아매던 로건의 두 팔이 침대를 짚었다. 찔러 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구속이 풀렸지만, 일로델은 저항하는 것도 잊고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두꺼운 귀두가 부푼 안쪽을 긁고 빠져나갈 때마다 근처의 내장이 요동을 쳤다. 도저히 참을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아아! 아아아앗!”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제대로 서 있지도 않던 성기에서 뿌연 액체가 줄줄 흘렀다.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내벽이 꽉 조여들자 안을 드나들던 것이 천천히 멈추었다. 로건이 손을 뻗어 사이트 테이블에 있는 타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일로델의 옅은 음모에 덕지덕지 묻은 정액을 가볍게 닦아냈다. 일로델이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금방 깨끗해진 모습이 이상했다.
“얘기했잖아. 아무 일도 아니야, 일로델.”
일로델이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며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
아무 일 아닌 게 아니었다. 이런 건 형제끼리 할 만한 일이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성기를 쑤셔 박는 짓은 강간이었다. 그러나 차마 강간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조금씩 울먹이는 일로델을 보며 로건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너는 고집이 세.”
“흣….”
안쪽에 파묻혀 있던 로건의 성기가 느릿하게 내벽을 비볐다. 자신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 로건은 우아한 심판자 같기도 하고 냉정한 관찰자 같기도 했다. 동생의 안에 발기한 성기를 넣고 문지르고 있는데,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쓸데없이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약하지. 망가뜨려서 갖겠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거야, 일로델.”
로건의 손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건조한 손끝이 식은땀 맺힌 이마를 닦았다. 얕게 드나들던 성기가 서서히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배가 꿈틀거리고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쾌감의 전조였다. 일로델은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허공에 손을 뻗고 묵묵하게 서 있는 자들에게 애원했다.
“도, 도와주세요….”
로건의 부하들은 감은 눈을 뜨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발로 차고 침을 뱉어도 아무런 반응 없이 서 있을 장식품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일로델은 그들이 도와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애원했다. 그러면 로건은 지금처럼 불쾌하게 입술을 굳히고 뻗은 손을 잡아 눌렀다.
“매번 소용없는 짓을 하는군. 저들은 너를 도울 수 없어.”
이 상황이 왜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도대체 왜. 얼굴을 일그러뜨린 일로델이 서글프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전에 로건이 서러움에 젖은 입술을 먹어치웠다.
“으응, 응, 아읏, 아!”
혀가 깊게 얽히고 로건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울퉁불퉁한 성기가 예민한 공간을 익숙하게 노려 문지를 때마다 울먹임과 비명이 함께 터졌다. 정신없이 헐떡대다 숨이 모자라서 고개를 젓자 로건이 입술을 뗐다. 진득한 시선이 흠뻑 젖은 입 주위를 응시했다.
“다른 때보다 안이 미끌거려. 티베인 때문인가? 평생 거울 보면서 자위나 할 줄 알았더니, 제법 맹랑한 짓을 벌였어.”
낮게 웃은 로건이 일로델의 손목을 억누르고 깊은 곳까지 삽입했다. 그리고 다시 뺐다가, 끝까지 처넣었다. 같은 움직임이 몇 번 반복되며 속도가 붙자 몸이 따라서 덜컥덜컥 흔들렸다. 이러다간 성기가 아랫배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아! 아! 아아아!”
일로델이 정신없이 헐떡대며 몸을 비틀었다. 고환이 철썩철썩 젖은 소리를 내며 엉덩이 사이를 후려쳤다. 티베인도 그랬듯이 형 로건도 자신의 안에 알 수 없는 액체를 계속 쏟아붓고 있었다. 이런 것도 알파들의 특성일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밖으로 넘쳐흐른 액체가 다리 사이를 흠뻑 적셨다. 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를 빠르게 찔러 넣었다. 여유가 사라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처럼 사나웠다.
“나는 지금이라도 티베인 녀석을 죽이고 싶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너를 이렇게 울렸을 거라고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가 않아. 어때, 일로델. 역시 죽일까?”
속삭임은 달콤했지만 중간중간 내뱉는 숨소리에는 난폭한 기운이 가득했다. 로건은 물어봐 놓고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벽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시야가 마구 비틀리고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이러다 미쳐버려서 그러자고 하게 될 것 같았다. 일로델이 자지러지게 울며 고개를 저었다.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뺨에 입술이 닿았다.
“쉿, 울지 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지금 그 녀석이 없으면 너도 금방 망가지겠지.”
“흑, 흐윽, 흑, 형님, 형님….”
“그래, 일로델. 대신 아이를 갖자. 그건 괜찮겠지? 네가 좋아하는 가족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야.”
괜찮을 리가 없다. 괜찮을 리 없는데. 모르겠다. 뇌가 꼬인 것처럼 생각이, 시야가 빙빙 돌았다. 아랫배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꿈틀대고 내벽이 조여들었다. 그러자 로건이 작게 신음하더니, 일로델의 손목을 놓고 제 어깨에 두르도록 했다. 일로델은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로건에게 매달렸다. 성기가 퍽퍽 소리를 내며 거칠게 드나들었다.
“형, 혀엉! 아! 하아아, 아! 앗!”
몸이 흔들리는 대로 비명을 지르던 일로델이 덜컥덜컥 경련했다. 정액이라고 하기도 뭐한 뽀얀 액체가 아랫배를 적셨다. 이런 것도 사정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사정하고 나면 시원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잔류물처럼 남은 쾌감이 온몸을 난도질했다.
“아, 아, 아!”
로건에게 매달려 진저리치던 일로델이 참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침대 시트가 손에 들어오자 그것을 쥐고 위로 기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이 미친 감각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움직임을 멈추고 지켜보던 로건이 도망치는 일로델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곤 살짝 빠져나온 성기를 깊숙이 파묻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었다. 티베인도 했던 그 짓을, 로건도 하려는 것이었다.
“싫어요. 싫어….”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로건이 달래듯이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일로델은 시트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 안 끝나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였지만 등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다. 저도 모르게 티베인이… 하고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더 들어올 곳도 없을 것 같았는데, 커다란 것이 한계까지 꾹꾹 밀고 들어오더니 천천히 부피를 늘려갔다.
“흐으….”
“일로델… 나를 화나게 하지 마. 안 그래도 녀석을 죽여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죄송, 죄송해요, 죄….”
뭐가 뭔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용서를 빌던 일로델이 겁먹은 얼굴로 하반신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번에는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안에서 성기가 커질수록 아랫배도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쌌다. 자신의 것이 아닌 맥박이 쿵쿵대며 울렸다. 바로 이전에는 동생의, 지금은 형의 성기가 뱃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패닉에 빠져서 숨을 몰아쉬던 일로델이 비명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흐윽, 싫어, 너무해, 너무해요.”
“일로델.”
“티베인도, 형도,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미워요. 둘 다 미워….”
힘없이 팔을 휘적거리는 일로델을 로건이 가볍게 제압하고 끌어안았다. 실수로라도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안 되자 더욱 서러웠다.
“놔요, 놔아….”
로건은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일로델을 바로 눕히곤 침대맡에 구겨진 시트를 손에 쥐었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하얀 시트가 허공을 갈랐다. 창백한 장막 안에 두 사람만의 공간이 생겼다. 단절된 시야가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울음소리가 약간 잦아들자 로건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날이 갈수록 눈물이 많아져.”
“형 때문이에요….”
“맞아.”
저도 모르게 티베인에게 하듯 투덜거렸는데, 로건이 웃으며 수긍했다. 젖은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자 단단한 손끝이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내 탓인 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미워하고 싶다면 미워해도 돼.”
“…….”
“하지만 너는 금방 잊고 다가오겠지. 애정에 굶주린 녀석이니까.”
로건이 다정한 듯 잔인한 말을 하며 미소지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짓까지 당해놓고 애정을 바랄 만큼 굶주리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로건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몇 개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부족해진 만큼 걸신들려서 정을 갈구할 게 뻔했다. 서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일로델에게 로건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너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건 나야. 마음껏 미워해. 티베인도 꼭 필요하다면… 좋아. 네가 미치지만 않는다면 뭐든 상관없어. 일로델, 나의 동생….”
혀가 부드럽게 귓바퀴를 핥았다. 동시에 로건이 사정을 시작했다.
“히잇….”
알파의 사정은 길고 집요하고 뱃속을 꽉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일로델이 부푼 배를 움켜쥐고 헐떡대다가 로건에게 매달렸다. 눈에 보이는 배경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매달릴 곳은 그밖에 없었다. 그러자 로건이 기꺼운 듯 상체를 밀착하고 흘러넘치는 정액을 밀어 넣듯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도망칠 곳을 잃고 애처롭게 울던 일로델은 어느 순간 실이 끊긴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
정신을 잃은 뒤에도 안식은 찾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자다 깨길 반복하며 발작처럼 울어댔다. 처음엔 그냥 서러워서 울었던 것 같은데, 나중엔 몸에 이상을 느끼고는 겁에 질려 울었다.
“형… 뱃속이 이상해요….”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내장이 새로 자리 잡으려는 것처럼 꾸역꾸역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로건의 품에서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속이 뒤집혀서 헛구역질을 했다. 전신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아파요, 형….”
“지금은 약을 쓸 수 없어.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 일로델.”
“엄마 보고 싶어요. 데려다주세요….”
“아플 때마다 그 소리 하는 건 여전하군.”
로건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아픈 와중에도 서러워서 눈물이 울컥했다. 꽤 예전 일이지만, 어릴 땐 어딘가 아픈 곳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로건을 찾아가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묘하게 태도가 냉정했다.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 자꾸 찾아갔던 건데, 그게 귀찮았던 걸까. 혼자 있기 싫어서 같이 자자고 졸랐다가 감기를 옮긴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젠 안 그럴게요. 엄마 보고 싶어요. 일로델이 헛소리 같은 말을 웅얼거리는 동안 로건은 가만히 등을 토닥이기만 했다.
그러다 또 잠이 들고 다시 깼다. 옆에는 로건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지키고 있기도 했다. 그럴 땐 괜히 더 눈물이 나서 울었다. 저를 보며 혀를 차는 주치의의 냉정한 낯짝도 언뜻 봤던 것 같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혼자였다.
“…….”
아주 긴 시간이 지났던 것 같은데, 창문 밖은 이제 동이 트고 있었다. 멍하니 누워있던 일로델이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만졌다.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게 꿈이었던 것처럼 잠잠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연달아 당해놓고도 아프지 않으니까 다행이란다. 사람 마음이 정말 간사했다.
안개에 휩싸인 도시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들었다. 반쯤 남은 링거액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팔에 꽂힌 주사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옷이 반듯하게 입혀져 있었다. 일로델은 지체 않고 호텔 방을 나서려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거대한 덩치의 무표정한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낯이 익은 그 얼굴은 로건의 부하였다. 일로델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켜요.”
목소리가 반쯤 쉬어서 나왔다. 생각 같아선 존대가 아니라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랫사람도 아니거니와 오랫동안 로건을 보좌했던 사람이라 꾹 참았다. 사내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왜요? 어차피 내가 울고불고 애원해도 다 무시할 거면서, 말투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는 잠시 대답을 찾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말씀은 낮추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입으론 죄송하다고 하면서 떼쓰는 어린 동생이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일로델이 이를 갈며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다시 가로막혔다.
“어디로 가십니까?”
“비켜요.”
“알려 주시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으니까 비켜!”
일로델이 분에 못 이겨 로건의 부하를 밀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다. 자신의 주변에는 마음처럼 안 되는 일 천지였다. 태산 같은 몸을 조금이라도 밀쳐보려 끙끙대던 일로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형제들에게 돌아가며 괴상한 짓들을 당했다. 그래도 평정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를 앙다물었다.
“형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이 짓거리를 했는데. 당신은 알 거 아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는 있다는 거네.”
젖은 눈으로 노려보자, 그가 슬쩍 눈을 피했다. 이런 곳에서 의미 없이 말씨름하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나 착착 처리하는 게 어울릴 법한 사내였다. 상사와 동생이 헐떡이는 소리를 감상하라 하면 감상하고, 그 동생을 감시하라 하면 감시하고. 그런 사람만 군인이 될 수 있는 거라면 자신은 못 되는 것도 당연했다.
“형은 어디 갔어요.”
“부대에 계십니다.”
“형이 나를 감금하라고 했어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럼 내보내 줘요.”
“어디로 가십니까?”
이건… 끝없는 도돌이표다. 제풀에 지친 일로델이 그의 어깨를 놓고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더 비참할 거 같아서 참았는데, 손으로 훑은 뺨은 이미 눈물로 흥건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혼자 머리 식힐 시간을 달라는 거예요.”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나를 봐왔으면서, 이 꼴을 보고도 불쌍하단 생각이 안 들어요?”
“…….”
“당신들도 똑같아. 개자식들. 다 죽어버려.”
문을 쾅 닫고 들어왔다. 답답하게 구는 로건의 부하 대신 닫힌 문을 걷어찼다. 그걸로도 분이 안 풀려서 곱게 깔린 카펫을 뒤집어엎고 멋들어진 그림 액자를 바닥에 처박았다. 액자가 깨지기라도 했으면 속이 시원했겠는데, 유리 주제에 얼마나 단단한지 표면에 흠도 안 났다. 분통이 터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다는 게 끔찍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차라리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릴까. 그래, 그게 낫겠다. 어차피 살아봐야 별 볼일도 없는 거 죽어버리자. 내세엔 이런 쓸모없는 베타가 아닌 알파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다음 생에 대한 확신이 무럭무럭 자라난 일로델이 시트를 걷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맡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시트를 끌어안았다.
“뭐야, 누가 들어오래! 나가!”
“죄송합니다.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셔서… 받으십시오.”
로건의 부하가 내민 물건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갑이었다. 일로델은 물기 어린 눈으로 멀뚱멀뚱 그것을 바라보다 받아들였다.
“바깥에 비가 와서 많이 쌀쌀합니다. 외투와 우산도 갖고 가십시오.”
얼떨결에 외투와 우산도 받아들였다. 일로델은 품에 한 아름 챙긴 것들을 들여다보다가 로건의 부하를 보았다. 또다시 뭐가 슥 건네졌다. 손수건이었다.
“이동 수단이 필요하시면 차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운전할 줄 모르는데….”
“그럼 드릴 수 없습니다.”
“…….”
그렇게 안 봤는데, 이랬다저랬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로델은 잠시 혼란스럽게 앉아 있다가 손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대충 훔쳤다. 외투를 집어 들자 사내가 서툴게 옷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그도 밖에선 대공가 후계자의 보좌를 맡은 대접깨나 받는 귀족일 것이었다. 어설픈 외출준비가 끝나고 일로델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고, 고마워요.”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혼납니다.”
“저 나가게 해줬다고 더 혼나는 거 아니고요?”
“대령님은 이런 일로 화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럼 형은 무슨 일로 화를 내는 사람일까. 어쩌면 자신에게 뭔가 화가 나는 게 있어서 그런 일을 벌였던 게 아닐까.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동생에게 성욕을 느끼는 형이 아니라 화가 나서 강간을 하는 형이 나을 것 같다. 아니, 둘 다 이상한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몸과 마음이 지치긴 했나 보다.
우울하게 시선을 내리까는 일로델을 바라보던 로건의 부하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입니다. 대령님은 관심 없는 사람에겐 화를 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느니 모가지를 치겠죠.”
“…….”
“해고를 말하는 겁니다.”
로건의 부하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굳어서 그를 바라보던 일로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깜짝 놀랐네. 하지만 해고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군에서 해고된 사람은 기밀 유지를 위해 이직은 고사하고 타인과의 접촉도 제한되었다. 더군다나 귀족이라면 명예의 실추도 함께 따라왔다. 일로델이 걱정을 덜어내지 못하자 로건의 부하가 괜찮으니까 잘 다녀오라며 달래는 말을 했다.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 그냥 던져본 질문이었다. 하지만 로건의 부하는 갑자기 정신이 든 것처럼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희미하게 깔린 경계심이 읽혔다.
“…….”
그래도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린 일로델이 쌩하니 등을 돌렸다. 복도를 걸으며 필요 없어진 손수건을 바닥에 버렸다. 물건은 버리고 싶을 때 버릴 수 있어서 편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치장한 호텔 로비는 폐업이라도 한 것처럼 황량했다. 밖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냈다. 비바람이 치고 있었지만 옆에는 우산을 들어주는 하인도, 차를 운전할 호위도 없었다. 문득 혼자 밖을 나서는 게 몹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일로델은 외투를 여며 쥐고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회색으로 물든 번화가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