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8)

2

똑똑똑똑.

기계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약초를 빻아주는 기계였다. 아카데미에는 없는 것이라 처음엔 좀 헤맸는데, 사용법을 숙지하고 나니까 무척 편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가장 좋은 점이 있다면 이런 신문물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도 도시 밖에서는 말이나 낙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본 적이 없어서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잠시 후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약초가 든 사발을 내밀었다. 일로델은 곱게 빻아진 약초를 조심스럽게 이마에 붙이고 거즈로 둘둘 감쌌다. 치료를 마치고 나자 거울 안에는 머리에 붕대를 두른 중상자가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티베인 그 자식이 결국 일을 냈다. 감히 형에게 손을 올리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심각한 부상마저 입게 하다니. 하루아침에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데, 이 꼴로는 오늘도 아카데미는 물론이요 집 안을 맘 편히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생겼다.

“무식한 야만인 자식.”

몇 번째인지 모를 욕설을 지껄이는 찰나 똑똑, 하며 별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로델은 불에 덴 것처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야!”

“일로델님,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야만인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티베인인 줄 알았다. 일로델은 방어용으로 쌓아두었던 의자를 치우고 문을 열었다. 어제저녁 그 난리를 피운 이후로 티베인이 다시 쳐들어오려는 기미는 없었지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 법이었다. 하인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들어와 식사 공간으로 마련된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하곤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식사가 끝나시면 다시 불러주십시오. 문 옆의 초인종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어디?”

“이곳에….”

별채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일로델을 위해 벨 누르는 법을 가르쳐주던 하인이 무언가를 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머리였다. 하인의 시선은 노련하게 수습되었지만, 아차 싶었던 일로델이 서둘러 변명했다.

“이건, 자다가 찧은 거야. 형에게 말하지 마.”

자다가 찧은 것 치고는 붕대를 너무 많이 말아놓긴 했지만, 일로델이 박박 우기면 하인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순종적으로 고개만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당장 가서 보고할 생각으로 가득할 게 뻔하단 걸 일로델은 알고 있었다.

이 집안의 하인들은 기계처럼 일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저들끼리 서열도 있고 계파 활동도 했다. 계파까진 잘 몰라도 서열은 바깥에서 일하는 하인보다 안에서 일하는 하인이, 서재보다 주인들의 방을 도맡는 하인이 더 높았다.

그들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주인에게 보고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것도 나름의 권력인지, 저들끼리 보고 경쟁이 붙기도 했다. 언제인가 창밖으로 넘어가는 노을을 보며 감상에 젖어 한마디 했는데, 형이 그 사실을 언급했을 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 집구석의 하인들은 정말 별의별 걸 다 일러바치는 종자들이었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로건에게 보고할 거리를 하나 획득한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러가고, 일로델은 기운 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되는 일이 없었다. 어제는 술병이 나서 드러눕더니 오늘은 별채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매고 있다더라. 그런 소식을 들으면 형이 자신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까.

일로델은 식사에 곁들여 나온 체리를 우물우물 씹었다. 좋아하던 과일인데 돌이라도 씹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티베인 때문이었다.

그 자식은 뭐 때문에 자꾸 자신에게 참견하는 걸까. 집과 아카데미를 오갈 때 꼭 누군가와 동행할 것. 이는 집안의 명령이 맞았다. 하지만 동행자가 반드시 티베인일 필요는 없었다. 그 자식이 출정이니 뭐니 멀리 가서 오지 못하게 되면 부모님이나 형의 부하가 데리러 왔다. 자신은 그게 훨씬 편했고 티베인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뻔질나게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걸까.

남남처럼 살자는 말은 진심에 가까웠다. 말이 쌍둥이지 그렇게 애틋하지도 않았다. 다른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쓸쓸했지만, 어쩌다 그 녀석이 없으면 속이 시원했다. 시원하다 뿐인가?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티베인은 항상 칼같이 돌아와서 집에 들어앉아 있었고 아카데미에 꼬박꼬박 따라다녔으며 사사건건 참견을 시도했다. 지긋지긋한 놈이었다.

일로델은 깨작깨작 늦은 식사를 마치고 하인을 불러 갈아입을 옷과 모자를 가져오게 했다. 생각해 보니 티베인이 집에 없을 시간이었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별채에 틀어박혀 흘려보내긴 아깝다. 오랜만에 서재에 가서 책이나 읽을까. 붕대가 보이지 않게 챙 모자를 꾹 눌러쓴 일로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자신이 별채를 오간다는 게 아랫것들 사이에 퍼졌는지 오늘은 정원에 나와도 부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산책 겸 걸어 다녀도 되겠는데. 일로델이 차분하게 인사하는 하인들 사이를 걸으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별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문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제발 한 번만!”

“계속 이러시면 군에 통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말이라도 전해주세요! 딱 한 마디만….”

“저희에겐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다가갈수록 왠지 모르게 실루엣이 낯익었다. 저 멀대처럼 키만 훌쩍 큰 남자는… 오르본? 깜짝 놀란 일로델이 산울타리 뒤에 몸을 숨겼다. 마침 근처에서 꽃을 손보던 정원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일로델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로델은 풀 잎사귀 뒤에서 눈만 내놓고 정문을 살폈다.

“정말 한 마디만 전해주시면 돼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자신이 훔친 유리병을 찾으러 온 걸까? 이렇게 된 거 그냥 건네주는 게 낫겠지만 그놈의 체면이 뭔지 차마 나서질 못하겠다. 일로델이 알량한 죄책감과 자존심 사이에서 떨리는 가슴만 움켜쥐고 있는 사이, 경비병과 오르본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그만하십시오. 열 보 이상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할 겁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안 되겠다. 이러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눈 딱 감고 사과하고 넘겨주자. 일로델이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그때, 커다란 군용차가 다가와 정문에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세상이 참 평화로운 모양이다. 오늘도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한 티베인이었다.

“뭐야. 무슨 소란이야?”

그를 확인한 경비병들이 실랑이를 멈추고 절도 있게 경례했다. 오르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로델…! 아, 티, 티베인 중위.”

구원이라도 내려온 것처럼 차창에 매달렸던 오르본이 멈칫했다. 기분 나쁘게도… 자신과 비슷한 얼굴이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티베인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오르본을 훑어보더니 갑자기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컥!”

예고도 없이 문짝에 얻어맞은 오르본이 바닥을 굴렀다. 저놈 자식이? 깜짝 놀란 일로델이 달려 나왔지만, 티베인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기침하며 구르는 오르본의 멱살을 잡고 앞 좌석 아래에 처넣었다. 그리곤 훌쩍 차에 올라탄 뒤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멀리 사라져버렸다.

“…….”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잠깐 사이 꿈이라도 꾼 기분이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덩그러니 남은 일로델을 곁눈질했다. 일로델은 모자에 나뭇잎이 꽂힌 줄도 모르고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눈만 끔뻑였다.

*

그 뒤로 오르본과 씨름하고 있던 경비병들에게 무슨 일인지 캐물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들은 저택의 보안을 맡는 군인들인 만큼 입이 무겁고 고지식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에게만 무거운 입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서재로 들어왔다. 본래 계획대로 디저트와 차를 옆에 두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한참 들여다보아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아서 그냥 덮어버렸다. 어느새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살다 살다 티베인을 기다리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체 오르본을 납치해서 뭘 하고 있기에 이렇게 안 들어오는 걸까. 둘이 아는 사이였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는 사이라고 얘기할 정도라면 대뜸 멱살을 끌고 차에 집어넣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지. 티베인 같은 야만인에게 상식을 바라면 안 된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빚쟁이와 채무자 관계라거나….

일로델은 책을 놓고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모르겠다. 티베인에게 이렇게 뇌의 에너지를 쏟아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주둥이로 사람이나 치는 자식에겐 실낱같은 관심도 아까웠다.

“…….”

그건 없던 일로 하자. 일로델은 노을빛을 피해 돌아누웠다. 먹고 자고 뒹굴기만 해도 시간은 갔다. 편했지만, 그 이상으로 지루했다.

내일은 오르본에게 유리병도 돌려줄 겸 아카데미에 가볼까? 돌아오면 말린 약초들을 주문해서 연구실에 채워 넣고 독초 재배도 시작해야지. 야무지게 잘 키워서 티베인에게 생일 선물로 주자. 그 자식의 생일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날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년 새로운 독초를 선물로 주고 있었다.

“응….”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에 어렴풋이 깼다. 단단하고 서늘한 손이 머리의 붕대를 벗겨내고 있었다. 티베인이 돌아온 걸까? 자는 틈을 타서 이마에 생긴 혹을 구경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사악하고 음흉한 자식.

“너…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잠이 덜 깬 탓에 발음이 뭉개져서 나왔다. 일로델은 눈을 비비며 돌아누웠다. 그리고 숨을 멈추었다. 자신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티베인이 아니라 로건이었다.

“형님…?”

방금 들어온 참인지 로건은 화려한 금색 휘장이 부착된 제복 차림이었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일로델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아 구겨진 의복을 정리했다.

“어, 언제 오셨어요?”

온다는 이야기도 없었는데. 가족들은 대부분 집에 오기 전에 꼭 언질을 주었다. 어제의 셰본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드문 일이었다. 로건이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어둠이 가라앉아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로델은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다 다시 옷을 매만지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이마에 붙어 있던 약초가 무릎에 툭 떨어졌다. 일로델은 불똥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 이건, 그게, 이마, 이마에 혹이 생겨서.”

“일로델.”

차분하게 흘러나온 부름에 일로델이 숨을 멈췄다. 조용하면서, 무거운 압박이 느껴진다. 문득 요 며칠 긴장을 내려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허둥대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놀라도 놀라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했는데. 거기다 잠옷을 입고 집 안을 활보하질 않나, 이마에 혹을 달고 다니질 않나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저질렀다. 다 티베인 때문이었다.

“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간신히 진정하고 인사를 건네자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일로델은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친 곳은 어때. 주치의를 부를까?”

“괜찮아요. 많이 좋아졌어요.”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주치의는 불편했다. 그는 일로델의 겉과 속을 모두 조사하는 게 사명인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조사 내용은 두꺼운 문건으로 작성되어 로건에게 보고되었다. 발기 불능만큼은 간신히 숨기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 들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로건이 일로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원한 향기가 훅 끼쳤다. 흔히 알파와 오메가에겐 페로몬이 있다고 하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것이 로건에게는 정말 있는 것 같았다. 일로델이 어깨의 힘을 빼고 눈을 스르륵 감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기분 좋았다.

“점심은 들었다고 하던데. 저녁은?”

“아직이에요. 드시고 가시나요?”

일로델이 눈을 반짝 뜨고 묻자 로건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무슨 대답이 들려올지 예상이 갔다.

“그럴 순 없어. 잠깐 와본 거니까.”

“네….”

역시 그렇겠지. 세상을 통치하는 건 황제이지만, 그 세상을 만들어가는 건 귀족들이었다. 그중 우두머리 격인 대공 가의 장남이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끼니를 챙겨 먹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차남은 점심나절에 일어나 밥을 챙겨 먹고 서재에서 뒹굴거리다 저녁을 챙겨 먹어도 되느냐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자신도 알파로 태어났다면 지금쯤 로건처럼 최신식 무기 개발에 힘쓰거나 티베인처럼 야만인들의 기지를 찾아낼 방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머리라도 좋게 태어났다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렵지만, 내일은 점심을 함께하자. 오랜만에 휴가를 냈거든.”

“정말요?”

“그래.”

우울과 체념 그 사이를 흔들흔들 유랑하던 일로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저녁도 아니고 점심을 함께하자니, 연중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이었다. 로건이 함박웃음을 짓는 일로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귀를 어루만졌다. 묘하게 귓가를 바라보는 눈이 깊었다. 찰나의 부드러운 시간이 흐르고, 로건의 뒤로 그의 부하가 다가와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곧 시간이.”

“…….”

로건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다른 때였다면 아쉬웠겠지만 지금은 그저 기뻤다. 내일이라는 말은 ‘다음에’, ‘나중에’ 같은 애매한 약속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쉬워할 필요 없이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로건이 올 것이었다. 일로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건의 뒤를 졸졸 따랐다.

“배웅할게요. 아, 모자.”

저녁 시간이라 이마의 혹이 눈에 잘 띄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로델이 서둘러 돌아가 소파 위에 올려뒀던 모자를 눌러썼다.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던 로건이 다가온 일로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니, 로건뿐만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선 부하들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

뭐지. 또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눈치를 보며 굳어 있는 일로델의 머리 위로 로건의 손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 나뭇잎 하나가 들렸다.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잎이었다.

“본 적 없는 장식인데.”

로건이 드물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일로델도 어색하게 웃었다. 애도 아니고, 한심한 자식. 돌아서는 로건을 쫓으며 일로델은 들키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복도로 나오자 하인들이 빼곡히 줄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 헤롯과 로건이 방문할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형식적인 모든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멋모르는 하인들이 일을 안 하고 서 있는 것을 싫어했다. 반대로 황제의 누이인 어머니는 의전이 없는 걸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었고, 형은 누가 뭘 하든 관심도 없지만 하인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쪽에 가까웠다. 하긴, 딱히 하지 말라고도 안 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녀오세요, 형님.”

일로델은 아버지 셰본을 배웅했던 로비에 서서 로건에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씩씩했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반짝이는 푸른 눈을 바라보던 로건이 일로델의 뺨을 만지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갑자기 저택 문을 열고 들어온 티베인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뭐야?”

들어오자마자 배웅 인파를 맞닥뜨린 티베인이 얼굴을 구겼다. 일로델의 얼굴도 함께 구겨졌다. 가만히 있어도 밉상인 판에 형들 앞에서 말본새가 엉망이다.

“형님 나가실 거야. 비켜.”

“흥!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나도 지금 들어온 거 안 보여?”

“어쩌라구? 비켜.”

티베인이 발끈해서 일로델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목적지는 문 옆이 아닌 로건의 앞이었다. 그때까지도 일로델을 바라보고 있던 로건의 눈동자가 흘긋 티베인을 향했다.

“아직 주기가 안 끝나신 것 같은데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됩니까, 대령님? 그 손으로 누구 인생을 망치든 상관없는데, 정액 같은 페로몬 덕지덕지 묻히고 동생 얼굴 주물럭대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아무래도 티베인 저 자식이 오늘 좀 미친 거 같다. 어제 굴렀을 때 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일로델은 모자를 벗어 방만한 입을 놀리는 티베인에게 씌우고 끌어당겼다. 불시에 습격당한 티베인이 질질 끌려왔다.

“아, 야!”

“죄송해요, 형님. 애가 말버릇이 좀… 제가 잘 교육할게요.”

“교육은 무슨, 너는 저 작자가 어떤 놈인지나 알고.”

그냥, 좀 닥쳐. 일로델이 손을 들어 계속 주절거리려는 티베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워낙 힘 차이가 커서 밀쳐지거나 어쩌면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티베인은 바로 조용해졌다. 야만인 하나가 입을 다물자 로비가 침묵에 휩싸였다.

“바,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세요. 내일,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로델의 얼굴을 바라보던 로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일로델도 그를 따라 머뭇머뭇 고개를 내렸다. 티베인이 마취당한 짐승처럼 얌전히 일로델에게 안겨 있었다.

“…….”

문득, 입을 막은 손에 후덥지근한 숨결이 와 닿았다.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아서 티베인을 팽개쳤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한 티베인과 로건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두 형제를 앞에 두고, 이유 없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저, 저기….”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냥 마주 선 것뿐인데 위협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고, 어느 쪽에게 먼저 잡아먹힐지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묘한 압박감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로건이었다.

“사이가 제법 좋아졌군.”

“왜, 아쉬워? 어쩔 수 없어. 우린 쌍둥이니까.”

로건과 티베인의 시선이 짧게 부딪혔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로건이었다. 차마 한 번 더 채근할 수 없어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그의 부하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 쉬어라, 일로델. 내일 보자.”

“네, 네!”

일로델이 숨통 트인 얼굴로 대답했다. 로건과 부하들이 차례차례 문밖으로 사라졌다. 하인들도 제 할 일을 하러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로비에는 티베인과 일로델만 남았다.

일로델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오르본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고 할 말이 많았지만 방금 일로 기운이 다 빠져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 지나가는 하인에게 저녁 식사를 방으로 가져오라고 하고 계단을 오르는데, 거머리 같은 야만인이 옆에 따라붙었다. 단추를 풀어헤친 제복 차림에 자신이 덮어놓은 챙 모자를 쓴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왜 따라와? 저리 가.”

“내 방도 위에 있는 거 몰라?”

“몰라.”

“그렇겠지. 참고로 네 옆 방이야.”

그렇게 가까운 데 있었단 말야? 안 되겠다. 당장 내일부터 방을 옮기든가 해야지. 빠른 걸음으로 먼저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었다. 해가 진 저녁이었지만 램프 덕에 대낮처럼 밝았다. 이곳은 밤이 되면 복도뿐만 아니라 사람이 닿지 않는 정원 구석구석까지 기름을 태운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황성을 제외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사치였다.

일로델은 쓸데없이 넓고 긴 복도를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까부터 계속 뒤에서 보폭을 맞춰 걷는 티베인이 신경 쓰였다.

“네가 먼저 가.”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티베인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봐? 뒤에서 따라오는 거 기분 나쁘니까 먼저 가라구.”

“너… 나 돌아본 거 처음이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일로델이 인상을 쓰자 티베인이 혼자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뭐, 그래.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딴 길로 새지 말고 방에 얌전히 들어가.”

티베인이 잘난 척 지껄이곤 스치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서갔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었다. 어디 쓰다듬을 게 없어서 감히 형의 머리를. 하지만 불만을 토할 대상은 성큼성큼 걸어 모습을 감춘 뒤였다.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불퉁한 얼굴을 한 일로델이 바닥을 툭 걷어찼다.

*

아침부터 비가 왔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잠든 탓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식사를 끝마치고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하자 티베인이 입을 댓 발 내밀었지만, 그래 봐야 제까짓 게 뭐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티베인의 출근 차를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대화는 일절 없었다. 옆에서 계속 뭐라고 떠들긴 하는데 무시했다. 요즘 들어 쓸데없이 말을 많이 받아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날도 궂은데 뭐 하러 또 돌아다니겠다고. 도대체 아카데미는 왜 자꾸 나가려는 거야? 뭐 좋은 거라도 숨겨뒀냐? 설마 사귀는 놈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 그건 아닌가? 왜냐면 너는 발기….”

일로델이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티베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끝까지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실을 입 밖에 낸다면 얘기가 달랐다. 차 안에는 티베인만 있는 게 아니라 운전기사와 자신의 우산 시중을 들러 온 하인도 있었다.

“입조심해.”

“입조심하길 원하면 사람을 쳐다보고 나긋나긋하게 부탁해야지. 머리는 놓고.”

일로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티베인을 노려보았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나사 빠진 놈처럼 웃고 있었다. 티베인은 언제나 화를 냈다. 그걸로도 모자라면 난폭하게 굴었고, 종국에는 손찌검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던진 말에 상처를 입었다. 그 모든 게 잘 짜인 물물교환처럼 이뤄졌었는데, 요 며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가 바뀐 느낌이 들었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일이었다.

“뭐. 할 말 있으면 해보든가.”

티베인이 히죽 웃으며 도발하듯 말했다. 일로델은 여전히 티베인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다. 그만 놓을 듯했지만, 그대로 티베인의 귓가에 입술을 들이댔다. 보기엔 자신을 닮아 피부가 차가워 보이는데 티베인은 체온이 높았다. 일로델은 희미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귀에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입 좀 조심해 주세요.”

“뭐….”

“나한테 그러는 것까진 참겠는데, 형님 앞에선 조심해. 또 어제처럼 굴면 내가 너 가만 안 둬.”

“…….”

짧은 침묵 속에서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어느새 아카데미 앞이었다. 앞 좌석에 앉았던 하인이 서둘러 내려 우산을 준비했다. 일로델이 느릿느릿 티베인을 놓아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차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티베인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겨우 그거 때문에 아까부터 쳐다도 안 본 거냐?”

“…….”

“사람 말하는 것도 무시하고?”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뭐면 어떤가. 일로델이 살짝 티베인을 흘끗거리곤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등 뒤로 거친 욕지거리가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비 오는 날에도 짐승은 우는 법이었다.

*

아카데미는 오랜만에 온 것처럼 낯설었다. 일로델은 하인에게 점심 전에 마중 나오라 당부하곤 강의실로 들어왔다. 아직 수업이 시작될 시간은 아니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잠시 품 안에 손을 넣어 별채에서 챙겨온 것을 확인했다. 오르본의 독이었다. 이걸 뭐라고 하면서 돌려줘야 할까. 가족 아닌 남에게는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본 적 없는지라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뻔뻔하게 굴자. 갖고 싶어서 슬쩍했다고 하면 어쩌겠어.

시간이 흐르고 학생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저번에 봐서 낯이 좀 익은 녀석들도 하나씩 나타나는데 오르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줘야 하는 거 빨리 처리하고 싶은데. 오르본이 원래 늦게 다니는 녀석이었던가?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

일로델은 잠시 고민하다가 낯익은 무리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저들끼리 소곤거리던 녀석들이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술집에서 한 번 봤던 녀석들이라 대충 낯이 익긴 한데,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일로델은 잔뜩 긴장한 눈치인 사내놈들을 천천히 훑다가 말을 걸었다.

“오르본은?”

“아….”

한 녀석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 옆구리를 맞고 입을 다물었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일로델은 그중 가장 낯이 익은 녀석을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룰이 어쩌고 설명하던 더벅머리 녀석이었다. 그는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실려 갔는데….”

“실려 가?”

자신도 어제 정문에서 오르본이 티베인에게 실려 가는 모습을 보긴 했는데, 설마 같은 걸 봤단 얘기는 아닐 테고. 일로델이 고개를 기울이며 인상을 쓰자 더벅머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카데미 정문에, 피, 피칠갑을 하고 쓰러져 있었어. 병원에 실려 갔으니까, 오늘은 못 오지 않을까….”

“뭐야?”

이게 무슨 잠꼬대인지 모르겠다. 어제 집 앞에서 봤던 오르본은 살짝 야위어 보이긴 했지만 피칠갑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랬던 녀석이 티베인에게 납치당하고 풀려난 뒤 아카데미에 왔다가 봉변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

그럴 가능성도 없지야 않겠지만, 이 경우 티베인에게 납치당해서 봉변을 당한 다음 아카데미 앞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게 앞뒤가 맞을 것이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은 일로델을 더벅머리가 힐끔거렸다.

“모, 몰랐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옆에 있던 녀석이 뭐라고 입을 여는 더벅머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 녀석들은 옆구리로 대화를 하나? 미간을 찌푸리는 일로델에게 한 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뭐?”

“미안해. 그….”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이름을 들어도 기억 못 하게 생긴 녀석이 일로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가시방석이라도 깔고 앉은 듯 불편해 보이는 태도였다.

“정말 미안해.”

뭐가 자꾸 미안하단 거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오르본의 동료들을 노려보던 일로델이 문득 고개를 들고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여기저기서 잡담을 나누며 웅성웅성했는데, 지금은 누가 찬물이라도 갖다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때마침 일로델과 눈이 마주친 학생 하나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은 명백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

일로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없이 빈자리로 다가가 앉으려던 일로델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걸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빨리 가버리라는 것처럼 무형의 무언가가 등을 떠미는 기분마저 느꼈다.

“어이쿠.”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교수가 일로델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남은 시간엔 연구에 매진하는 열정적인 학자인 그도 마찬가지로, 강의실을 떠나는 일로델을 붙잡지 않았다.

아침만 해도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매섭게 돌변해 있었다. 차양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일로델은 뒤늦게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우산만 없다 뿐인가. 자신은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다. 부모님, 형은 물론이고 티베인, 저택의 하인들, 안에 있는 학생들조차도 다들 뭔가를 쥐고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쩌다 잘 갖고 태어난 가문 말고는 빈껍데기 같은 인간이었다.

순식간에 머리와 옷이 젖어 들었다. 빗물에 푹 잠긴 교정을 걷던 일로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꽂혔다. 의무대 합격자 발표를 알리는 게시판이었다. 눈싸움하듯 게시판을 노려보던 일로델은 요전 날에 못 했던 짓을 마저 실행했다. 난데없이 걷어차인 게시판이 털썩 뒤로 넘어갔다. 진흙에 처박힌 꼴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버릴까? 어딜 가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걷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곳이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선 필요한 인간이 되고 싶다. 먹고 자고 뒹굴고 있으면 당신이 필요하니까 할 일을 해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이 항상 형에게 그러는 것처럼.

“…….”

일로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을 멈추고 낯익은 인물을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형의 뒤를 따라다니는 부하가 자신을 따라다니며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아니, 언제부터 있었지? 어디서 나타난 거야?

혼란에 빠진 일로델과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인사를 건네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정중하게 손짓하며 어딘가로 안내했다. 일로델은 귀신에게 홀린 기분으로 그를 멍하니 따라갔다. 정문 근처에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사람이 손을 뻗었다. 형 로건이었다.

“가자.”

묻고 싶었다. 어디로 가나요? 제가 가도 되는 곳인가요? 거기선 저를 필요하다고 해줄까요…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일로델이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그러나 환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알 수 없는 피곤함이 밀려왔다. 교정을 조금 걸은 것뿐인데,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었다.

“형님의 옷이 젖을 거예요.”

“괜찮아.”

형이라면 괜찮다고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일로델은 로건의 손을 잡았다. 강한 힘이 몸을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고 어둠이 내려왔다. 다정한 감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일로델은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로건의 품에 몸을 맡겼다.

*

차는 한동안 달리다 번화가에 접어들었다. 우산을 쓰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대체로 위험했다. 그 말은 사람 자체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 평민인지, 혹은 야만인인지 겉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일로델이 번화가에 방문하는 일은 극히 적었다. 간혹 오게 되어도 숨 막히는 호위가 따라붙었다. 마지막으로 와봤던 건 황제 폐하를 맞이하러 나왔던 때였는데, 그땐 호위에 막혀 차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황제가 조카 얼굴 좀 보자며 안까지 밀고 들어왔을까. 올 때마다 과잉보호 때문에 질리는 느낌이라 일로델은 번화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호위가 몹시 단출했고, 무엇보다 도착한 곳이 고층 호텔이었다. 한번 와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게 된 것이다. 차에서 내려 로비를 지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최상층에 도착해 도시가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앞두었을 땐 더욱 그랬다.

“도시가 전부 보여요.”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 본 건 처음이었다. 비 내리는 도시를 머뭇머뭇 바라보는 일로델의 위로 타월이 내려왔다. 부드러운 천이 젖은 머리와 어깨를 훑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창문 너머로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로건이 비쳤다. 낯선 장면이면서도 익숙함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창문에 손을 대도 돼.”

“깨지지 않나요?”

“물론. 폭탄이 터져도 멀쩡할 거야.”

농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하며 로건이 웃었다. 일로델이 손끝으로 투명한 유리를 건드렸다. 차갑고 아슬아슬했다.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데, 깨지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기 보이는 저택은 집인가요?”

“그래. 가고 싶어?”

“…….”

일로델은 침묵했다. 저택은 주변에 있는 그 어떤 건물보다 컸다. 저렇게 크고 넓은 집인데 아무도 없었다. 하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자신은 무의미했다.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 곳인데,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욕실부터 들어가자. 구경은 천천히 해도 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따뜻한 손이 어깨를 감싸고 이끌었다.

욕실은 저택에 있는 것보단 좁지만 적당히 넓고 화려했다. 호텔 주인의 취향일까. 소품 하나하나 오래된 궁전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취향은 구식보단 신식이었지만… 유적지에 여행 온 것 같아 나름대로 나쁘진 않다.

목욕 시중은 없는 건가? 씻고 나오라는 말에 들어오긴 했지만, 안에는 따뜻하게 차오른 욕탕 외에 반겨주는 인물은 없었다. 하긴 그렇겠지. 여긴 집이 아니니까. 허전함을 억누르며 꾸물꾸물 젖은 옷을 벗는데 손에 뭐가 걸렸다. 기껏 큰맘 먹고 갖고 나왔는데 주인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된 오르본의 독이었다.

일로델은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욕탕에 몸을 담그고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이게 뭘까? 약초학을 전공한 주제에 약초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독초에는 나름 빠삭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남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아편꽃이나 남방의 악명 높은 독버섯도 다뤄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알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어떻게 아느냐면, 그간 쭉 실험체가 되어준 녀석이 있어서 잘 알았다. 본인은 제가 실험체인지도 모르고 있겠지만.

“…….”

이것도 그 자식에게 한번 써볼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관뒀다. 어릴 적 티베인에게 독초를 먹여서 승리를 맛본 이후 꾸준히 독을 선사해주고 있지만 정말 죽으라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화가 잔뜩 나서 콱 죽어버리라는 생각으로 주긴 했다. 그게 끽해야 배탈로 끝나고, 더 강한 독초를 찾다가 아예 전공까지 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깟 놈에게 무슨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티베인이 독으로 죽으면 자신의 짓이라는 걸 모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로델은 향유를 발라 목욕을 마무리하고 준비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품 안에다 유리병을 잘 챙겼다. 아직 확인된 바는 없으나 극독일지도 모르는 물질이었다. 집 안에서는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밖에서는 신경 써서 잘 챙겨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목욕하는 사이 준비했는지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로건의 손짓에 따라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에 젖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였다. 바깥을 내다보던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더니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향유를 발랐군.”

그 말에 일로델이 손등을 킁킁거렸다. 눈에 띄어서 바르긴 했는데, 정작 향기는 별로 안 났다. 어떻게 알았지. 어리둥절한 일로델을 가만히 보던 로건이 와인을 들어 빈 잔에 따랐다.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시중이 없어도 잘하는구나.”

“형님… 저도 스물셋이에요. 혼자 목욕하는 데 문제없는 나이라구요.”

그리고 얼마든지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이다. 방금 목욕하고 나와 마실 것이 당겼던 일로델이 제 앞에 놓인 붉은 와인을 곁눈질하며 로건의 눈치를 살폈다. 로건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이 방에 욕실이 또 있나요?”

“그건 왜?”

“씻고 나오신 것 같아서….”

일로델이 로건의 머리를 흘긋거리며 묻자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 말고도 욕실은 어디에나 있지. 다른 방이 궁금하면 구경시켜 줄까?”

“다른 방이요?”

“호텔의 객실들이 모두 비어 있다는 얘기야.”

그래서 이렇게 조용했던 걸까? 주변은 잔잔한 호숫가처럼 고요해서 귀를 기울이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그래요… 그렇겠죠.”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 가의 자제가 둘이나 와 있는데 생각 없이 손님을 들였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호텔 자체가 사라질 것이었다. 자신은 이런 게 번거롭고 불편해서 호텔이고 번화가고 피해 다니는 편인데, 형은 달랐다. 아마 티베인도 집에서나 돌멩이처럼 하찮지, 밖에선 대우깨나 받고 다닐 게 뻔했다.

오로지 자신뿐이다. 자신만 이런 것들이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고 답답했다. 베타로 태어나 하는 것도 없이 시간만 축내는 주제에 누릴 건 다 누린다는 생각이 들면 밀물 같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귀족이라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귀족 중에 한량처럼 지내는 녀석들이 없는 건 아니다. 유명한 망나니들은 자신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모르긴 몰라도 남들 눈엔 자신 또한 그런 녀석들로 보이겠지. 완벽한 집안에 흠집을 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답답함을 씻겨내듯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일로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건이 병을 들어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던 일로델이 아차 싶어 로건을 만류했다.

“괜찮아요. 제가 따라 먹을게요.”

“왜.”

“이런 건 형님이 할 일이 아닌걸요.”

“그렇지 않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내가 할 일이지.”

백번 지당한 대답이었다. 말문이 막힌 일로델은 얌전히 로건이 주는 와인을 받아들였다. 침묵 속에 와인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길 반복했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어쩐지 계속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하얀 손이 와인 병을 들고 놓지 않기 때문일까….

소소한 잡담이 몇 번 오가고, 그러는 동안 일로델은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워냈다. 조금 뒤 노크 소리와 함께 로건의 부하가 새로운 와인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와인 병을 올려놓고 로건에게 무언가를 건넸는데, 작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벨벳 상자였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세공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합니다.”

“테스트 결과는.”

“모두 이상 없이 통과했습니다.”

짧은 보고는 속삭이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로건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부하가 로건과 일로델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아까는 깨질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한 유리 창문에 반죽처럼 눌어붙어 있던 일로델이 상자를 흘깃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반지가 든 상자처럼 생겼다. 방금 왔다 간 부하도 세공이 어쩌고 했지. 혹시 애인에게 주는 선물인 걸까.

“…….”

로건에게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없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자신보다 일곱 살이 많은 그는 한창 결혼 이야기가 오갈 나이였다.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늘어나면서 결혼 시기도 많이 늦춰지긴 했지만, 이래저래 바쁜 귀족들은 빨리 후계를 보아서 가문의 기반을 다져놓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한창 경제적인 성장이 눈부시던 시기에는 일만 하다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었다는 귀족도 있었다고 하니 알 만했다.

로건의 애인은 어떤 사람일까. 결혼 상대가 될 알파 여성일까? 어머니보다는 좀 덜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아, 어쩌면 가볍게 사귀는 오메가일 수도 있겠다. 어떤 자식이야? 잘못해서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큰일인데. 처음 연애하는 자식을 둔 극성 부모 같은 걱정을 하던 일로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선물인가 봐요.”

어떤 놈팡이에게 홀려서는. 그런 말투였다. 상자를 살펴보던 로건이 눈을 들어 일로델을 바라보았다.

“궁금해?”

“궁금해요.”

냉큼 대답하자 로건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곤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일로델의 몸을 안아 들었다. 단단한 팔이 등과 다리를 지탱했다. 그 와중에도 일로델의 시선은 로건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들린 고급스러운 상자에 꽂힌 채였다.

“보여주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

“보여주세요.”

얼굴이 닿은 가슴팍이 낮게 들썩였다. 익숙하지 않은 진동이었지만, 무척 좋았다. 시원한 향기가 나는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얼마 안 가 등 뒤에 푹신한 침구가 닿았다. 일로델이 떨어지기 싫다는 것처럼 손을 뻗자, 로건이 이끌린 것처럼 몸을 겹쳤다.

“…….”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로건의 얼굴은 묘하게 생소했다.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자신의 형제들은 때때로 낯섦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단순히 자신의 자격지심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일로델이 얼굴을 만지려는 것처럼 다시 손을 뻗었다. 로건은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 겹쳤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 일로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더니 귀를 매만졌다. 어렴풋이 기시감이 느껴졌다.

“제 귀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깨끗해.”

“어제도 만졌잖아요….”

“불만인 얼굴이군.”

그런 건 아니지만, 귀는 좀 그래요. 귀를 만지는 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보다 더 은밀하고 쓸데없이 간지러웠다. 일로델이 싫다는 듯 고개를 젓자 로건이 마지못해 손을 뗐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김이 간지러웠다. 귓바퀴에 솜털이 바짝 섰다고 느꼈을 때, 단단한 이빨이 일로델의 귀를 콱 깨물었다.

“읏, 형님!?”

“가만히… 조금 아플 거야.”

“자, 잠깐만요. 흣….”

깨물린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불쏘시개 같은 뜨거움이 귓바퀴를 뚫고 들어왔다. 달칵, 하고 금속이 채워지는 소리가 불길했다. 일로델이 무서운 것처럼 어깨를 움찔거리자 로건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이 자신의 귓가를 향해 있었다.

“형님…?”

“어울려. 진즉 해놓을 걸 그랬지.”

명백한 혼잣말에 일로델의 눈이 불안으로 떨렸다. 두려운 걸 확인하려는 것처럼 귓가로 올라가는 손을 로건이 잡아챘다. 미적으로도 완벽한 그 얼굴이 서늘함을 간직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저를, 그렇게 보는 건가요? 머릿속에서만 헤매는 질문을 읽어낸 로건이 가볍게 입술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네게 주는 선물이야, 일로델.”

속삭임과 함께 뜨거운 것이 귀를 삼켰다. 진득하고 농밀한… 입맞춤 같은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가 났지만, 입맞춤일 리가 없었다. 일로델은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

움직임이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떴다. 땅거미가 내려온 밤이었지만 주위는 조명 때문에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재력과 지위로 빛을 사들이는 록퍼스가의 저택이었다.

“들어가서 쉬어.”

일로델은 가만히 로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함께 들어가지 않는 건가요? 또 언제 오나요?’ 하며 매달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저 바라보다가 입을 벙긋거리고 다시 닫았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얌전히 차에서 내렸다. 비에 젖은 정원의 풀들이 진한 향기를 풍겼다.

“내일도 아카데미에 가는 건가?”

어쩐 일일까. 항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로건이 열린 차창 너머로 말을 건넸다. 어색하게 대답을 헤매던 일로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주말이라, 쉬는 날이에요.”

“그래.”

로건이 일로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딘지 알았다. 일로델이 그 시선에서 숨기듯이 귀를 가렸다. 부드러운 살갗이 아닌,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손바닥을 찔렀다.

“너무 손대지는 마. 덧날 수도 있으니까.”

덧날 수도 있는데, 어째서 이런 걸 달아놓은 건가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진 못한 원망이 얼굴로는 드러났을 것이다. 로건은 대답을 주는 대신 작게 웃기만 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차창이 올라가고, 조심스럽게 출발한 차가 정문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일로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터덜터덜 저택으로 향했다. 등 뒤로 정문이 봉쇄되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호텔에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방으로 찾아온 의사에게 처치를 받았다. 차가운 소독약이 귓가에 닿을 때마다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같은 장소를 헤집었던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뭘까. 뭐였을까.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벌칙 키스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택 문을 지키던 호위가 일로델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활짝 벌어진 두 문과 안으로 이어진 복도를 앞두자 속이 턱 막혔다. 집이 아니라 입을 벌리고 선 뱀 같다. 저곳에 들어가면 뱀의 뱃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저 멀리 꾹 닫힌 정문이 보였다. 방금까지 바깥에 있다 온 탓일까. 거대한 우리에 홀로 갇힌 짐승이 된 기분이다. 꺼내 달라며 마구 소리치고 싶었지만, 북받치는 비명을 억누르고 정원을 내달렸다. 미로 같은 산울타리를 헤쳐놓고 정원사가 가꿔놓은 잔디를 짓밟으며 정신없이 별채 문을 열고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이전에 쌓아놓았다 치운 의자도 문 앞에 마구 내던지고 그걸로도 모자라 책상 위에 놓인 바구니들도 전부 집어 던졌다. 선반 위에 있는 서랍까지 들어서 던져놓으려는데, 난데없이 강한 힘이 일로델의 몸을 껴안았다.

“놔, 이거 놔아!”

“이게 왜 이래? 진정해!”

일로델의 손을 떠난 서랍이 엉뚱한 곳에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일로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넓은 공간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퍼졌다.

“의무대 탈락을 넘어서 이번엔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냐? 왜 또 발광이야?”

익숙한 목소리는 티베인의 것이었다. 순간 이곳이 어딘지 헷갈렸다. 자신이 본채에 들어왔던가? 어제 요긴하게 썼던 약초 빻는 기계가 있는 걸 보면 별채가 맞는데.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아서 티베인의 품을 벗어났다.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지. 분명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왔는데. 도저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티베인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지려는 찰나, 팔을 잡혔다.

“또 나뒹굴고 내 탓 하려고? 이번엔 안 통해.”

“…….”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일로델은 삐딱하게 웃고 있는 티베인을 마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된 연구실 옆의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이 야만인이 저번처럼 몰래 들어와 엎어져 있다가 자신이 들어와서 깨어난 것이다. 천천히,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놔.”

“놓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난동을 피웠는지 말은 해주지 그래. 오매불망하는 형이랑 외출씩이나 하고 오더니, 기대했던 것보다 좋진 않았나 봐?”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얘기해야 해? 이거 놔, 더러운 자식아!”

“또 시작이군.”

티베인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일로델을 확 끌어당겼다. 품에 안기기 전에 한껏 저항했지만, 힘 차이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두 팔을 한 손에 제압당하고 물어뜯으려 벌린 입도 턱을 세게 잡는 손에 막힌 채 벽에 처박혔다. 등허리에 둔탁한 아픔이 퍼졌다.

“얌전히 좀 굴어. 나한테 맨날 야만인이라고 하면서 너야말로 남 말할 처지 아닌 거 알아? 그 미개한 것들도 사람을 물려고 들진 않아.”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면 이빨이든 뭐든 써서 벗어나야 하는 게 맞다. 노려보는 일로델을 보며 티베인이 슬쩍 입술을 핥았다. 정말로, 짐승 같았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네가 미친놈처럼 날뛸 때마다 나도 같이 미쳐가는 기분이 들어. 그냥, 그래도 될 것 같아. 이런 것도 쌍둥이끼리 통한다고 하는 건가….”

제가 미친 걸 갖고 이젠 남에게 책임 전가까지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일로델의 다리 사이로 티베인의 허벅지가 들어왔다.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하복부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신음 같은 한숨이 머리를 스쳤다. 근질근질하고 소름이 확 끼쳐서 몸부림을 쳤더니 옭아맨 힘이 좀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서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려 했는데, 늦었다. 닫히는 문을 억지로 잡아 열고 들어온 티베인이 일로델을 번쩍 들어 침대에 내리꽂았다.

“좋은 냄새가 나는데. 번화가에 있는 호텔에 다녀온 모양이야. 거기 향유는 오메가 페로몬이 조금 섞였지… 젠장. 형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건 아니겠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미친놈아, 왜 이래! 이거 놔!”

“가만히 있어… 잠깐, 이건 뭐야?”

티베인의 손이 귓가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쳐내자 짝, 소리가 날카롭게 퍼졌다. 티베인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선은 귀에 붙어 있을 다이아몬드 피어스에 고정된 채였다. 잠시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귓가를 노려보던 티베인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GPS는 아직 개발 중인 줄만 알았는데. 로건 이 변태 자식, 간만에 마음에 드는 짓을 했어.”

“말조심해. 누가 변태라는 거야!”

“너는 이 짓을 당하고도 편을 들어주고 싶냐?”

이 짓이 뭔데… 일로델은 말문이 막혀서 티베인을 바라보았다. 호텔에서 형을 올려다보았던 것처럼 티베인의 얼굴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너무 닮은 얼굴이어서 그런 걸까. 아까 같은 긴장감이 전혀 없다. 그 대신 피곤함이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안 그래도 오늘 하루 피곤하건만, 왜 집에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평소처럼 때리려면 때리고, 말려면 말고. 어느 쪽이든 어디론가 빨리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한숨과 함께 티베인을 밀어내던 힘이 약해진 순간이었다. 간악한 자식이 그 틈을 타서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하지 마!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 확인만 한다고. 뭔가 있었어도 네 입으론 절대 얘기 안 할 테니 직접 확인해야지.”

“무슨 확인을 한다는 거야! 거긴 아무것도 없어!”

“없긴 왜 없어? 아무리 안 선다고 해도 그렇지 아예 존재를 없애면 되겠냐?”

일로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화, 확인이라는 게, 서는지 안 서는지 확인하겠단 얘기야?”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말 나온 김에 겸사겸사 봐주지 뭐.”

누가 네놈한테 봐달래! 일로델이 온몸의 힘을 짜내서 티베인의 어깨를 밀어냈다. 힘의 차이는 있어도 팔은 똑같이 두 개였다. 그것이 귀찮다고 생각했는지 티베인이 바지에서 손을 떼고 재킷부터 뒤로 벗겼다. 이번에는 진짜로 팔을 구속할 셈인 게 눈에 보였다. 있는 힘껏 반항하는 일로델의 몸에서 조그만 뭔가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묘한 기시감을 일으키는 그것은, 오르본의 독이었다.

“이건 뭔데 또 튀어나와?”

티베인이 다리 사이로 굴러 나온 유리병을 주워들더니 휙 던졌다. 마개가 꼭 닫힌 유리병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런 미친 자식이….

“너 미쳤어! 저거 위험한 거야!”

“그래. 나한테 주겠다고 만들어 온 독약이겠지. 다른 때 같으면 모르는 척해주겠는데, 지금은 내가 좀 급해.”

“그런 거 아냐! 저건 오르본이….”

“오르본? 그 멀대 새끼는 내가 처리했으니 걱정 마. 이젠 스토커까지 달고 다니질 않나, 귀여워서 큰일이라니까. 이런 애를 왜 아카데미에 보낸 거야? 집에 꼭꼭 싸고 있어도 이렇게 불안한데.”

이 자식이 도대체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가만, 자세히 보니 애가 눈도 좀 맛이 간 것 같다.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직감한 일로델이 창백하게 질려서 티베인을 밀어냈다. 하지만 뭐에 씌기라도 했는지 티베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일로델의 두 팔을 뒤로 구속하곤 제 상의를 벗어 던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래, 왜 이러냐구! 네 옷은 왜 벗어!”

“몰라, 젠장. 그러게 왜 이런 향유를 바르고 와서… 괜찮아. 이 정도면 아직 참을 수 있어. 그냥, 조금 보기만 할게. 그거면 되니까….”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던 티베인이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를 아연하게 올려다보던 일로델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향기라고 하기도 묘한 무언가가 방 안을 연기처럼 감돌았다. 무척 불길하면서도 감미로운… 계속 맡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질 것 같은 좋은 냄새였다.

뭘까. 방금 깨진 게 독이 아니라 향수였을까? 하지만, 향수가 이렇게 후각을 넘어 오감을 자극하는 물질이었던가….

그때, 딱딱하게 굳어 있던 티베인이 고개를 툭 떨궜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맹수가 그르렁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숨소리… 티베인이 내는 소리였다.

“너, 너… 왜 그래.”

불길하다. 보이지 않는 공포를 마주한 것처럼 등 뒤가 싸했다. 불안한 얼굴로 몸을 물리는 일로델의 어깨를 티베인이 잡아챘다.

“하, 뭐야, 이거.”

“티베인?”

“일로델….”

티베인이 낮게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발정한 것 같은데.”

일로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어떠한 예감에 몸부림을 치는 일로델의 위로 티베인이 몸을 겹쳤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귓바퀴 위로 매만지는 듯한 키스가 내려왔다.

“왜, 왜 이래. 하지 마!”

“조금만, 조금만 할게.”

“뭐, 뭐가 조금만이야. 이거 풀어! 풀어줘…!”

“젠장….”

저도 모르게 울먹였던 것 같다. 티베인이 힘겹게 몸을 뗐다. 머리카락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잠시 견디듯이 앉아 있던 티베인이 일로델의 손목을 봉쇄한 옷을 찢어 던졌다. 꽉 다문 턱과 침대를 짚어 지탱한 팔이 딱딱하게 굳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손목이 해방되고도 창백하게 굳어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일로델에게 티베인이 소리쳤다.

“뭐 해. 꺼져! 가라고!”

그 외침에 조종당한 것처럼 일로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침대 위에 엎어졌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전신이 오한이 든 것처럼 으스스했다가 순간적으로 달아올랐다.

“아…!”

일로델이 날카롭게 신음하며 잔뜩 웅크렸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가 질척한 액체가 되어서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침대 시트를 붙잡았지만, 그뿐이었다. 티베인이 짐승처럼 목을 울렸던 것처럼 자신의 입에서도 이상한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아, 안 돼….”

뭐가 안 되는지도 모르면서 엎어져 울먹이는 일로델의 위로 묵직한 체온이 겹쳐졌다. 둘의 무게를 받아든 침대가 움푹 파이고, 부드러운 시트가 얼굴을 감쌌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찔하게 눈을 감은 순간, 축축하게 달아오른 입술이 뒷목을 세게 빨아올렸다.

“아, 아!”

“하….”

거친 숨소리가 목덜미를 핥았다. 아니, 혀인 것 같다. 혀가 턱선을 쓸고 귓바퀴를 헤집더니 귓속으로 들어왔다. 아! 일로델이 길게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면 젓는 대로 따라가던 티베인이 인내가 끊긴 것처럼 한 손으로 일로델의 머리를 잡아 쥐었다. 그리곤 질퍽한 것으로 거침없이 귓속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 그만! 그만!”

겨우 혀가 귀 안으로 들락거리는 것뿐인데, 뇌가 진탕이 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잡혀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티베인이 자지러지며 울먹이는 일로델의 귀를 실컷 괴롭히며 상의와 바지를 찢듯이 벗겨냈다. 귀가 녹아서 사라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을 때쯤, 티베인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어설픈 눈에 만족스러운 웃음기가 가득했다.

“맞아, 이런 거지. 이렇게 구멍마다 쑤셔 넣고 싶어지는 거. 너한테는 항상 그랬어. 오로지 너만.”

혀가 물러난 후에도 물기 어린 소리로 가득했던 귓속이 멍멍했다. 일로델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손가락 사이를 아쉽다는 듯 핥은 티베인이 일로델을 들어 올려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리곤 제 팔에 눕듯이 늘어져 있는 일로델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안 선다더니.”

자신과 닮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고개를 젖히고 헐떡거리며 그 입술을 바라보던 일로델이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다리 사이로 다가온 손이 슬그머니 발기한 성기를 쥐고 부드럽게 마찰했다. 아래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아, 아….”

“이걸 만지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지. 하하, 실감이 안 나. 입에 넣고 빨아도 돼?”

“하, 하지 마, 하지 마….”

“그래, 그건 나중에.”

티베인이 애원하며 울먹이는 일로델의 가슴을 토닥이며 입에 작게 키스했다. 저번엔 막혀서 들어오지 못했던 혀가 거침없이 입안으로 밀고 들어와 연한 살점을 헤집었다. 가슴을 토닥이던 손이 야해졌다. 지금까지 야하다는 게 뭔지 잘 몰랐지만, 단번에 알았다. 가슴을 더듬던 손끝이 젖꼭지를 비틀었다. 동시에 성기를 쥔 손도 빨라졌다.

“으으으응!”

일로델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 질렀지만, 그마저도 티베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손톱이 젖꼭지를 긁고 물기 맺힌 요도를 괴롭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들이 온몸을 타고 뇌로 흘러 들어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신없이 고개를 젓자 티베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순간, 몸이 펄떡 뛰었다.

“아! 아!”

“잘 싸네. 귀여워. 빨고 싶지만, 그랬다간 기절초풍하겠지. 까다로운 자식.”

“아, 하지 마! 하지, 하으, 흐으….”

티베인의 손끝이 울컥울컥 액체를 뿜는 요도를 비볐다. 아쉬운 것처럼 작은 구멍을 벌리려 드는 게 무서웠다. 안으로 파고들 것 같은 행동에 겁먹은 일로델이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그러는 중에도 아래에서는 뜨거운 것이 질질 흘렀다. 머리 대신 거기가 터져버린 기분이었다.

“봐, 내가 너 고쳐준 거야. 나 때문에 그랬다니까 고쳐줘야지. 잘했지? 응?”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티베인이 손에 묻은 뿌연 것을 눈앞에 들이대며 실실 웃었다. 그것이 정액이라는 걸 인지하자 급작스럽게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만 잠깐 돌아왔을 뿐 몸은 여전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근질근질했다. 성기에서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쉬워서 시트에 비비고 싶었다. 아니, 이미 비비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일로델이 다시 멍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제 위를 덮쳐오는 쌍둥이 동생을 간절히 불렀다.

“티베인, 티베인….”

“왜?”

“그만해, 그만하자….”

눈을 뜨는 것도 무서워서 꼭 감고 애원했다. 그만할 것 같지 않았다. 발정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티베인이 자신과 같은 상태라면 그만둘 리가 없었다. 지배하거나, 혹은 지배당하거나. 둘 중 뭐라도 충족해야만 모든 게 끝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러게 왜 도망을 안 갔어.”

“못, 못 간 거야, 못 갔어. 몸이 이상하단 말야….”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티베인이 웅크리고 있는 일로델의 다리를 부드럽게 펴며 등에 입을 맞췄다. 일로델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이러지 마. 잠깐, 환기라도 하자. 티베인, 제발….”

티베인과 자신이 이상해진 이유가 깨진 유리병에서 흘러나온 물질 때문이라면, 창문만 열어도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티베인은 창문을 열러 가는 대신 엎드려 있는 일로델의 위로 몸을 깊숙이 겹쳤다. 터질 것처럼 부푼 것이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질척한 액체를 느릿하게 덧발랐다.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일로델이 깜빡깜빡 넘어가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티베인!”

“여기 너무 조그매. 안 들어가면 어떡하지?”

“그만하자, 그만….”

“괜찮아.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 몸에 힘 풀고.”

“얘기 좀 들어…!”

힘껏 외친 것과 동시에 티베인이 귓불을 깨물었다. 아까 잔뜩 핥아진 곳이라 예민했다. 일로델이 고개를 움츠리자, 티베인이 귓바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이아몬드 피어스가 박힌 곳이었다.

“차라리 잘됐지. 그 작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도 모르고 어영부영하다 뺏길 뻔했는데.”

거친 숨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혀처럼 진득하고 간지러워서, 어깨가 잘게 떨렸다.

“내가 가질 거야. 너는, 내가 가질 거야.”

무서웠다. 때릴 때도 같잖다고만 느꼈던 티베인이 무서웠다. 발정하면 죽사발을 내놔야 성이 풀린다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차라리 주먹으로 후려갈기길 바랐지만 티베인의 손은 자신의 허벅지를 틀어잡곤 위로 쭉 밀어 올렸다. 엉덩이 사이가 벌어지고 애널에 손끝이 문질러졌다. 티베인의 것이 비벼져서 잔뜩 젖은 그곳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흣, 싫어, 제발, 그러지 마….”

“풀어줘야 들어가지. 오메가는 필요 없지만 너는 베타니까… 젠장. 너무 연약해. 어떻게 이런 게 나랑 같이 태어났지?”

또다시 귓속으로 혀가 들어왔다. 아! 일로델이 고개를 비틀며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애널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가 안을 늘리듯이 휘젓고, 금세 둘로 늘었다.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뭔가 들어왔다는 거북함이 팔을 움직였다. 시트를 붙들고 꾸역꾸역 기어가는데, 뒤에서 티베인이 느긋하게 등을 억눌렀다. 그러더니 팔로 허리를 세게 휘감고는 안에 들어 있는 손가락을 마구 쑤셔 넣었다.

“아, 아아! 앗!”

젖지 않는 곳인데, 젖은 것처럼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로델은 등을 핥는 티베인의 머리를 밀어내다가, 시트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상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단단한 손끝이 같은 곳을 밀어내듯이 찌를 때마다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와 내벽을 비빌 땐 간헐적으로 신음이 쏟아졌다. 흐으, 흐으으으.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가락을 삼킨 곳이 마구 꿈틀댔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끌어당기려는 움직임이었다. 뒤에서 목덜미를 깨물던 티베인이 낮게 웃었다.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 괜찮아? 계속 비벼줄까?”

“으응, 으응, 좋아….”

“좋아? 귀여운 소리를 다 하네. 여기 엄청 풀어져서 꿈틀거려. 내 거 넣을까? 넣어도 돼? 넣고 싸고 싶어. 일로델, 형….”

허벅지에 묵직한 것이 비벼졌다. 뜨겁게 젖어서 질퍽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타구니로 올라와 회음부를 짓이기듯 문질렀다. 애널에 꽂힌 손가락이 더욱 깊고 빠르게 움직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귓가에 대고 말을 거는 티베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젓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손가락이 거칠게 빠져나가고, 단단하고 뭉툭한 것이 애널에 꾹 눌렸다. 그리곤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처박혔다.

“아아앗!”

“미안, 천천히 해야 하는데, 빨리 넣고 싶어서. 흣, 아파? 안 아프지?”

티베인이 아랫도리를 되는대로 쑤셔 넣으며 일로델의 턱을 핥았다.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것에 숨이 턱턱 막혔다. 들어오고 들어오는데도 끝이 없어서,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일로델의 머릿속에 첫사랑과 쌍둥이 동생의 정사 장면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식하게 큰 것이 자신에게 박혔다는 생각이 들자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겁이 덜컥 났다.

“그만해! 그만 들어와…!”

“그만 못 해. 그러지 마, 또 좋다고 해줘.”

티베인이 제 얼굴을 밀어내는 일로델의 손을 붙잡고 입안에 넣었다. 간지러움에 움츠린 찰나, 티베인이 더욱 깊게 삽입해왔다. 찢어질 것처럼 늘어난 애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에 박힌 것이 정액인지 뭔지 모를 것을 계속 흘리고 있어서 뱃속이 터질 것 같았다. 생존 본능에 따라 다시 침대 위를 기었다. 그러자 귀찮았는지 티베인이 아예 상체를 팔로 옭아매고는 허리를 거칠게 쳐올렸다.

“아, 아, 그만, 앗, 앗, 앗!”

거대할 정도로 굵은 성기가 질퍽질퍽 소리를 내며 안을 들락거렸다. 꽉 끼어서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티베인이 흘린 것으로 내벽이 흥건해서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거세게 비벼지는 안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달아오르고, 부풀어 올라 꿈틀댔다. 거대한 것이 부풀어 오른 곳을 꾹꾹 찌르고 문질렀다. 어떻게든 참아보려던 일로델이 몸부림을 쳤다.

“흐아아, 아아! 싫어, 싫, 아아앗!”

“엄청, 꿈틀거려. 좋아. 일로델, 좋아해….”

“아아아아!”

눈앞이 하얘졌다. 언제 발기했는지도 모를 성기가 찔끔거리며 사정했다. 반사적으로 안을 꽉 조이자 티베인이 낮게 신음하더니 뒤에서 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몸이 일으켜지고, 성기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히, 익….”

단단한 손이 허리를 꽉 잡았다. 아까처럼 티베인의 다리 사이에 앉은 자세로 거세게 찔렸다. 아직 사정 중인 몸이 감각을 못 따라가고 부들부들 떨렸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힉, 히익, 핫! 그만해! 나, 그만! 그만! 아, 아!”

“너무 좋아. 평생 처넣고 싶어. 그래도 돼? 되지? 나는 네 반쪽이잖아. 나도 너밖에 없어. 일로델, 일로델….”

반쪽이고 뭐고 미쳐버릴 것 같은 일로델이 허리를 쥔 손을 떼어내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로델은 티베인의 팔을 움켜쥔 채 비명만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입을 티베인의 혀가 핥았다. 델 것처럼 뜨거웠다. 턱 밑으로 침이 질질 흘렀다. 내벽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꿈틀거리고, 굵은 것이 잔뜩 팽창한 안쪽을 강하게 쳐올렸다.

“아아! 아아! 아아아앗!”

고개가 뒤로 꺾이고 시야가 번쩍번쩍 튀었다. 달아오른 것도 아니고, 식은 것도 아닌 채 흔들리던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감전된 것처럼 덜컥덜컥 튀어 오르는 몸을 티베인이 강하게 끌어안았다.

“흐읏, 으읏, 흐으으….”

물 같은 액체가 요도 끝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헐떡임이 울음소리처럼 튀어나왔다. 뒤에서 기계처럼 끝없이 찔러 올리기를 반복하던 움직임이 멈췄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직 단단했지만, 다시 쳐올릴 기미는 없었다. 일로델은 사정인지 뭔지 모를 것을 하면서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에 몸을 늘어뜨렸다.

“하, 하아, 하아, 히, 힘들어. 눕혀줘….”

“일로델.”

티베인이 고개를 숙여 덜덜 떨리는 일로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턱과 쇄골에도 입맞춤이 내려오고, 잔뜩 긴장되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티베인이 천천히 일로델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시트에 엎어진 채 이제 겨우 쉬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허리가 살짝 들렸다.

“티베인…?”

“괜찮아.”

뭐가? 하고 묻기도 전에, 안에 있던 것이 조금씩 부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거대하다 못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숨이 가빠졌다. 겁에 질려 도망치려는 일로델의 몸을 티베인이 잡아 눌렀다.

“하, 하지 마, 왜 이래….”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금방 끝낼게. 무서워하지 마.”

“뭐야, 뭐 하는 거야, 싫어…!”

방금까지 티베인과 한 짓은 섹스였다. 믿을 수 없지만, 어쨌든 쌍둥이 동생과 관계를 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도저히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 아직 예민한 내벽을 짓눌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꺾자, 티베인이 뒷목을 잡고 내리눌렀다. 일로델은 옴짝달싹 못 하고 공포에 휩싸였다.

“흐으으….”

자신을 죽이려는 걸까. 사이가 나쁜 건 인정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묘한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안이 한계까지 늘어나고 조금씩 아랫배가 당겨왔다. 숨이 막혔다. 이대로 배를 터뜨려서 죽일 셈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티베인이 목을 잡은 손을 느슨하게 하고 눈물 맺힌 속눈썹을 핥았다.

“괜찮아. 알파들은 원래 하는 거야. 이러다가 사정하면 가라앉으니까 그냥 자.”

“너 같으면 이러고 잠이 와….”

그 와중에도 한마디를 안 지는 일로델을 보며 티베인이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일로델은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한참을 크게 호흡하다가 지쳐서 눈을 감았다. 안을 꽉 채운 것은 더는 커지지 않았지만, 줄어들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 끝난다더니. 거짓말쟁이 야만인 자식. 일로델은 마지막 훌쩍거림을 끝으로 기절 같은 잠에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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