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8)

1

강의 종료 시각을 알리는 새가 천장을 한 바퀴 돌고 짹 울자 한꺼번에 소란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다들 끝나고 어딜 간다느니, 누구에게 뭘 소개받는다느니 왁자지껄 떠들며 강의실을 나섰다. 일로델 역시 짐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나 몰라라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집에 가기 싫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더했다. 망할 놈의 연구실이 완성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채에 있는 방에서 쫓겨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별채를 직장 삼아 출퇴근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모르겠는데, 귀족 사회는 물론이고 아카데미 내부에까지 이 소식이 퍼져서 ‘일로델의 연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은 길을 걸을 때마다 축하를 받아서 인간 기피증에 걸릴 뻔했다.

“집에 안 가? 오늘 연구실 완성되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저런 이름도 모르는 놈이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단 얘기다. 일로델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동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맹한 얼굴에 멀대 같은 녀석이지만, 하급 귀족의 자제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아, 오늘도 티베인 중위가 데리러 오는 거야?”

알 게 뭐야, 그런 놈. 이름이 귀에 닿은 것도 짜증 나서 벌떡 일어났다. 도서관에서 최대한 버티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자리에 우뚝 섰다.

“혹시 한가한 거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 오늘 다들 모여서 놀기로 했거든.”

“모여서 논다구?”

“응. 아, 애들이 평민이라서 안 되려나? 그렇겠지?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멋쩍게 웃는 동기를 빤히 바라보던 일로델이 들고 있던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상관없어. 어디로 가?”

“뭐? 정말 올 거야?”

동기 녀석은 자기가 먼저 물어놓고 놀란 눈치였다. 일로델은 두 번 얘기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 하지만 모여서 논다는 말에 며칠 전의 서러움이 떠올랐다. 진짜 평민이랑 어울려 놀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의혹으로 별채에 연구실이 생겨버렸다. 그렇다면 아예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는 심보였다. 한없이 도도한 얼굴이지만, 속으로는 음흉하게 웃고 있는 일로델의 뒤로 근육이 탄탄하게 오른 팔뚝이 슥 다가왔다.

“어딜 간다고?”

“윽… 이거 놔!”

“사람 뺑이 치게 만드는 수법도 여러 가지야. 저번엔 도서관 문을 잠그더니 이번엔 딴 길로 새겠다? 꿈도 꾸지 마.”

티베인이 일로델의 귀에 대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리곤 가방과 함께 일로델을 질질 끌고 갔다. 일로델은 목을 감은 팔을 풀어보려고 낑낑대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이거 풀어! 네가 뭔데 나한테 참견이야!”

“누군 한가해서 따라다니는 줄 알아? 집에 얌전히만 박혀 있으면 참견하라고 해도 안 해.”

“내가 집에 있든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냔 말야!”

“무슨 상관이냐고?”

강의실을 나서기 전, 티베인이 일로델을 내던지듯 벽에 몰아넣었다. 잠깐 발버둥 좀 쳤다고 숨이 거칠었다. 무식하고 미개한 자식. 야만인 같은 놈. 그 증거로 티베인이 지나온 자리는 책상과 의자가 널브러져서 강의실 전체가 엉망이었다.

“너는 약해 빠진 일반인이라 집안의 규율이고 명령이고 전부 어겨도 오냐오냐해주겠지만, 난 아냐. 아무리 거지 같은 명령이라도 들어야 하고, 완수해야 한다고. 알아들어?”

“네 사정을 내가 알 게 뭐야!”

“이게….”

하나의 절차처럼 티베인이 손을 쳐들었다. 오랜만에 맞게 생겼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로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을 마주 보던 티베인이 울컥한 것처럼 이를 악물고, 결국 일로델의 뺨을 세게 갈겼다. 주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골이 띵했다.

“…….”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티베인과는 항상 이런 식으로 싸웠다. 부모님이 중재를 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피를 볼 때도 있었고, 상처 입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티베인은 거칠어졌고 일로델은 타인을 밀어내게 되었다. 같은 날 함께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이너스적인 존재였다.

“더 맞고 싶은 게 아니면 얌전히 따라와.”

“차라리 기절시켜서 데리고 가지 왜? 한 대 쳐서 기절시키는 건 일도 아니라며. 오늘은 형도 없을 테니 마음껏 쳐! 그전까진 내가 널 따라갈 일은 없어!”

그리고 이런 상태의 티베인을 가장 열 받게 하는 키워드는 형이었다. 이유는 아마도, 열등감의 발로일 것이다. 제까짓 게 암만 알파라고 해도 능력으로는 로건 형의 발끝도 못 따라갈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티베인이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일로델을 노려보았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눈알의 실핏줄이 터지는 것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한 광경이었다.

“자, 잠깐. 그만 싸워. 교내에서 외부인이 학생에게 폭력을 쓰는 건 테러 행위야.”

“넌 뭐야? 저리 꺼져!”

맹하게 생겨서 진작 도망쳤을 줄 알았더니, 동기 녀석이 아직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나운 맹수처럼 날뛰는 티베인을 앞두니 무서워졌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일로델은 급격히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며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가방을 주워 들었다. 그리곤 동기 녀석의 팔을 잡고 끌었다.

“가자.”

“으, 응? 괘, 괜찮겠어?”

“저 자식은 어차피 사람 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해.”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것’의 범위에 들어간다면. 사실 사람 때리는 일은 말 못 하는 짐승도 할 수 있다. 마침 문에 달린 창문 위로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는 짐승이 비쳤다.

“그런 걸 개만도 못하다고 하지.”

침을 뱉듯이 말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강의실 안에서 무언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별것 아닌,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었다.

*

평민들이 모여서 논다는 것에 큰 환상은 없었다. 그래 봐야 길을 오가며 보았던 싸구려 펍에서 시끄럽게 수다나 떨면서 놀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들은 시끄럽게 춤을 추며 놀았고, ‘수다’라는 말이 얌전해 보일 정도로 조잡하게 떠들었다. 술과 안주를 먹을 땐 마치 새 모이에 우글우글 모여든 비둘기들 같았고, 게임이랍시고 내놓은 건 웬 네모난 돌에다 동그라미를 그려서 데굴데굴 굴리는 요상한 짓거리들뿐이었다.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걸 무슨 재미로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게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앗, 일로델 걸렸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걸렸을 때는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일로델은 싸구려 맥주를 홀짝이며 테이블 위를 힐끗거렸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쭉 적어놓고 저 주사위라는 걸 굴려서 순서에 맞으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벌칙이라니, 누가 자신에게 벌을 내린단 말인가. 아무리 록퍼스가의 모자란 차남이라고 해도 평민들이 대놓고 벌 같은 걸 내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당연히 주사위는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모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잠시 비장한 눈으로 뭔가를 주고받더니 오르본을 지목했다. 그러니까, 맹하고 멀대같이 생긴 녀석의 이름이었다.

“헉, 나, 나!?”

“네가 초대했잖아. 그리고 넌 하급 귀족이긴 해도 귀족이니까 우리보단 안전할 거야.”

“그, 그래도 어떻게… 차라리 다시 돌리자. 제발!”

“안 돼. 그럴 순 없어. 이건 룰이야!”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야? 혼자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일로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본에게 다가갔다. 오르본은 일로델을 보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가 창백하게 질렸다가 어쩔 줄을 몰랐다.

“뭐 하는 건데?”

“그, 그게, 그러니까.”

오르본은 도저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새였다. 대신 옆에 있는 녀석의 옆구리를 쳤다. 하지만 그 녀석도 말이 안 나오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고, 결국 대답은 맨 마지막으로 배턴을 넘겨받은 녀석의 몫이었다.

“저기, 이번 벌칙이 그게… 키, 키스하기인데….”

“키스?”

일로델의 미간이 구겨졌다. 해본 적은 없지만, 뭔지는 알았다. 다만 남녀, 혹은 알파와 오메가 간에 하는 그것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딜 둘러봐도 멀쩡한 사내 녀석들밖에 없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멀쩡한 사내 녀석과 하는 키스라서 벌칙이란 얘기였다. 무슨 얘긴지 알겠지만, 그걸 오르본이랑 하라고? 싫다.

“다른 벌칙으로 해.”

“하, 하지만….”

“하지만?”

“루, 룰이라서….”

“룰이 뭐.”

“루, 룰이라는 건, 한번 변경하면, 계속 변경해야 하고, 그래서 예외를 두면, 계속 변경해야 하고….”

알겠다. 일로델이 됐다면서 손을 내젓자 설명하던 녀석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별것도 아닌 게임이지만 그래도 자기들 딴에 룰이 있다는데 귀족으로서 체통 없이 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빨리하라고 턱짓하자 오르본이 대단히 황송한 얼굴로 눈을 꾹 감더니 번개같이 입술을 스치고 떨어져 나갔다. 이런 걸 키스라고 하는 건가? 이론으로 알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지만 아무튼 기분이 좋진 않은 거 보니 벌칙은 맞는 모양이었다.

“오르본, 고생했어!”

“룰을 지켜낸 오르본에게 건배!”

룰을 지켜낸 건 자신인 것 같은데 왜 오르본에게 건배하는지 모르겠다. 살짝 불만이긴 했지만 일로델은 대충 분위기에 맞춰주고 맥주를 홀짝였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던 오르본은 한동안 테이블에 엎어져서 일어나질 못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일로델에게 다가와 사과를 건넸다.

“미안… 쟤들이 좀 앞뒤가 없어.”

“그러게.”

“그래도 나쁜 녀석들은 아니니까 화내지는 말아줘.”

“별로 화 안 났어. 기분이 나쁠 뿐이야.”

“그게 그거잖아.”

오르본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그들에게 많이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해져서 맥주를 비우고 술통을 찾는데, 오르본이 대신 가지고 와서 따라 주었다. 역시 남의 시중을 받는 게 더 편했다.

“그, 뺨은 괜찮아?”

“뺨? 아….”

발광하는 짐승의 앞발에 맞았다. 아프긴 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처음 맞았을 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야? 티베인 중위가 너를….”

“때리는 일? 자주 있어. 옛날엔 나도 같이 때렸지만, 지금은 힘 차이가 나니까 맞기만 해.”

술기운 덕분일까? 평소였다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말이 술술 나왔다. 하긴 대단한 얘기도 아니다. 티베인과 관련된 일은 뭐 하나 소중한 게 없었다. 전부 끄집어내서 마음껏 짓밟은 다음 버려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너희는 쌍둥이잖아. 쌍둥이는 통하는 것도 있고 대체로 사이도 좋아 보이던데, 안 좋아진 이유라도 있었던 거야?”

이유라. 아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언제부터 왜 싸우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티베인의 방 앞에 트랩을 설치하면서부터였을까? 아니, 그 이전일 것이다. 트랩을 설치했던 이유는, 티베인이 자신을 연못으로 밀어서. 티베인이 연못으로 민 이유는, 자신이 녀석의 식사에 독초를 섞었기 때문에. 이렇게 위로 올라가 보면 뭐가 계속 나오긴 하지만 도저히 끝이 없었다. 티베인과의 역사는 오로지 다툼과 멸시뿐이었다.

“기억 안 나. 이제 와서 떠올려도 소용없고. 관심도 없어.”

“관심이 없는 사이에 그렇게 싸우진 않을 것 같은데….”

오르본은 못내 아쉬운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곤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졸업 논문 준비는 시작했어?”

웬 졸업 논문?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아직 졸업은 멀었고, 무엇보다도 입대하는 것만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학벌보다 무서운 혈통이 있는 일로델에겐 일단 군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졸업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역시 내가 좀 빠른가? 주변에 물어보면 나 빼고는 아무도 안 하는 거 같아. 하하.”

“뭐 하는데.”

“베타가 오메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의상 물어봤다가 깜짝 놀라서 술이 홀딱 깼다.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히 엉뚱한 녀석이었다. 논문 주제로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약초학도가 다룰 게 아닌 건 확실했다. 일로델이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보자, 오르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지 마. 사실 어떤 제안을 받고 살짝 혹해서 시작했다가… 역시 망했거든.”

“그렇겠지. 그게 그렇게 쉬우면 베타에서 알파도 될 수 있게? 그럼 아무도 고생 안 해.”

“하하, 맞아. 그래도 하나 건진 게 있긴 해.”

오르본이 품에서 조그만 갈색 유리병을 꺼냈다. 혹시 독인가? 남몰래 독초에게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던 일로델이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자, 오르본이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잠깐, 이건 위험해.”

“뭔데?”

“그게, 그, 뭐냐면… 아, 내가 이걸 왜 꺼냈지.”

아무래도 오르본도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었다. 깊게 자책하며 다시 품에 유리병을 갈무리한 오르본이 술이나 마시자며 맥주를 들이밀었다. 대충 건배를 해준 일로델이 오르본의 가슴팍을 노려보았다.

“뭔지 얘기해.”

“너는, 가끔… 말투가 정말로 귀족 같아.”

당연했다. 태어나길 잘못 태어나서 그렇지 일로델은 귀족 중의 귀족의 피를 가졌다.

“그분도 그렇더라. 고압적이면서 우아하고, 사람을 조종하려고 드는….”

“누굴 얘기하는 거야?”

그분이라면 자신은 아닐 것이고,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럴 법한 사람은 없었다. 오르본은 대꾸 없이 목이 타는 것처럼 맥주를 쭉 들이켰다. 제 할 말만 하는 거 보니 저놈이 정말 취하긴 한 것 같았다. 호기심도 조금 가셔서 맥주나 새로 따르는데, 오르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알파를 쓰러뜨리는 독이야. 만일 네가 이것 때문에 잘못된다면 나는 죽겠지. 그러니까… 모르는 척해줘.”

*

술통이 비워질수록 게임은 더욱 단순해졌고 사람들의 발음은 유아기로 퇴행했다. 일로델은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그 꼴들을 구경했다. 무의미하게 떠들고 장난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똑같이 생각이 사라졌다. 긴장이 풀리는 느낌은 약간 불쾌하면서도 달가웠다. 귀족 중에는 부산하고 시끄럽기만 한 원숭이를 귀엽다고 기르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마음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괘종시계가 정확히 열두 번 울렸다. 자정이었다. 일로델이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건 아니었다. 한 10시쯤에 마지막으로 집에 대해 살짝 떠올렸다가 그 뒤로는 모든 상념을 알코올에 씻겨 내려보낸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일로델은 술에 취했고, 취한 줄도 모르고 계속 마시고 있었다.

“그만.”

언제부터인가 주변이 고요했다. 다들 실컷 마시고 놀았으니 집에 간 걸지도 모른다. 도대체 집이 뭐가 좋다고 꾸역꾸역 돌아가는 걸까. 하긴 자신도 평민의 놀이에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즐겨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그들의 거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으니 돌아가는 것일 테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일로델에게 있어 집이라는 공간은 언제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권위적인 어머니, 다정하지만 은근히 벽이 있는 형과 개차반 같은 쌍둥이 동생 사이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말 한마디를 꺼낼 때도 수십 번 생각해야 했고, 뭘 해도 하인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어서 사소한 비밀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있다면 티베인과 맞서는 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싸우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일로델, 집에 가야지.”

“안 가.”

“어째서?”

여기가 더 편하니까.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좁아터졌지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일로델이 아무튼 싫다며 고개를 젓고는 맥주잔을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다 빼앗겼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희고 단단한 손을 따라 올라가 고개를 들자 희미한 시야에 로건이 어른거렸다. 일로델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형님?”

“그만 마셔. 내일 고생한다.”

“왜요?”

“글쎄. 내일이 되어보면 알지 않을까.”

정말로 로건이었다. 일로델이 휘청거리며 손을 뻗자 로건이 팔을 단단하게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럼에도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자 아예 갓난애 안듯 안아 올린다. 물론 일로델은 갓난애가 아니고 다 커서 징그럽기만 한 성인 남자였지만 거기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로델은 반쯤 감긴 눈으로 로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왜 여기 있어요?”

“집 나간 어린 동생을 데리러 왔지. 차에 난방 준비해.”

“예.”

형의 부하인, 누구더라. 이름은 모르지만 자주 보는 사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저도 데리고 가라며 일로델이 팔을 휘젓자 로건이 그 팔을 잡곤 다시 제 목에 둘렀다.

“저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집에 가면 혼자인걸요….”

“저번에는 혼자 살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혼자 살고 싶어요.”

로건이 낮게 웃었다. 취해서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진심이었다. 집에 가면 혼자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 생겨날지 모를 외로움을 혼자 감당해야 했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혼자 상처와 씨름해야 했다. 그렇게 넓디넓은 곳에 방치되어서 살아가느니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조그만 공간에서 꼭꼭 숨어 살고 싶었다.

“집에 가기 싫어요….”

“이런.”

급기야 일로델이 울먹이자 로건이 곤란해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한번 눈물이 터지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아예 헐떡거리며 우는 일로델을 토닥이던 로건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부드럽게 제안했다.

“그럼 호텔로 갈까? 푹 자고 일어나 스파를 하고 조식을 들자. 네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전부 준비해줄게.”

“저는 체리가 좋아요.”

“그래.”

“망고도 좋고요….”

로건이 알겠다며 등을 토닥여주곤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이 좋았다. 로건이 먼저 차에 올라타고, 로건의 부하가 깜빡깜빡 조는 일로델을 조심스럽게 차 안으로 옮겼다. 잠깐 졸았던 일로델은 저를 끌어안는 손길을 느끼고 눈을 떴다. 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호텔로 가.”

“실례지만, 함께 가시는 겁니까?”

“왜 묻지?”

로건의 음성에 어렴풋이 불쾌함이 담겼다. 백미러에 비친 로건의 부하가 긴장한 얼굴을 했지만, 의견 피력을 굽히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시는 게 어떠십니까. 오늘은 그, 날이….”

“아, 그렇군.”

일로델은 눈을 끔뻑끔뻑 떴다. 불길하고도 익숙한 전개였다.

“형님?”

“일로델, 미안하다.”

“집으로 가는 건가요?”

“다음에는 꼭 함께 호텔에 가자.”

다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로건은 몹시 바쁜 사람이었고, 최근에는 집에 들르는 날도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술기운을 빌려서도 그것만큼은 불가능했다.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아직 완성된 연구실을 못 봐서… 집에 가서 보고 싶어요.”

“그래.”

거짓말이었다. 별채에 생긴 연구실 따위 거들떠도 보기 싫었다. 집에도 가기 싫었다.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거짓부렁이라 해도 좋았지만, 로건은 잘 생각했다며 웃을 뿐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어서 힘들지만, 다음에 가면 천천히 야경을 즐길 수 있을 거야.”

“네, 기대돼요.”

일로델은 기대하지 않았다. 멋대로 했다가 멋대로 상처받는 것이 기대였고,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

아카데미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당연히 방금까지 놀고 마시던 술집도 그 근방이었다. 금방 저택에 도착한 차는 반듯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부드럽게 멈춰섰다. 아직 술이 덜 깬 일로델이 비틀비틀 내리자 로건이 부축하러 차 밖으로 나왔다. 일로델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조금 산책하다가 들어갈게요.”

“들어가서 자야지.”

“술이 안 깨서 지금 가면 더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뭣하면 하인들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보세요.”

하인을 운운한 것은 살짝 불평에 가까웠지만, 로건을 설득하기에도 제격이었다. 로건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탔다. 별다른 인사 없이 차가 출발하고, 긴 정원을 가로질러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

어차피 또 볼 테니 인사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밖에서도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이고, 자신은 집에 찾아오는 가족들이나 겨우 만나는 처지였다. 작은 것 하나에도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족들 모두가 알파이고 혼자 베타인 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과 처지가 비슷했다. 광활한 바다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기분이 내키면 자신의 섬에 들렀다. 그들은 섬과 친밀한 것처럼 굴지만, 심해에는 섬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가득했다. 당연히 바다가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궁금해서 손을 뻗으려 하면 파도로 밀어냈다. 섬의 입장에선 아주 외롭고 쓸쓸한 일이었다.

아까 차에서 있었던 일도 자주 겪어온 일이었다.

‘아빠, 엄마는요?’

‘네 어머니? 오메가 애인… 아니, 친구와 여행 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생일날 반드시 오겠다던 부모님이 엉뚱한 이유로 못 오게 되거나.

‘다들 어디 가요?’

‘너는 몰라도 돼. 집 잘 보고 있으렴.’

힘들게 한자리에 모였다가도 자신만 빼놓고 다 같이 나가버리거나.

그리고, 언제인가 로건의 방문을 노크 없이 열었던 적이 있었다. 슬슬 티베인을 힘으로 당해내지 못하고 매일같이 얻어맞던 시기였다. 그날도 자신을 힘으로 이기고 기세등등했던 티베인이 독초가 든 빵을 먹고 배탈이 났다. 자신의 훌륭한 업적이었다. 티베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일로델을 연못에 밀어버렸다. 혼비백산한 하인들이 바로 구해냈지만, 아침엔 얻어맞고 저녁엔 홀딱 젖은 게 그렇게 열이 받을 수 없었다.

치사한 짓인 건 알지만 일러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서 로건을 찾아갔다. 노크를 잊은 건 순전히 분노 때문이었다.

‘형, 티베인이 나를…!’

‘일로델?’

책상에 엎드려 있던 로건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일로델은 씩씩대던 것도 잊고 겁이 덜컥 나서 로건에게 다가가려 했다.

‘형? 어디 아파?’

‘들어오지 마.’

‘형?’

‘나가. 당장 나가!’

그렇게 격렬하게 화내는 로건은 처음이었다. 결국,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쫓겨났다. 다음 날엔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버지에게 조심성이 없다며 혼나기까지 했다.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노크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기에 다시 로건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방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로건은 군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이른 시기였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일로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로건은 그렇게 집을 떠나버렸다.

가족들이 안고 있던 알파만의 비밀은 나이가 들고 나서야 풀렸다. 간단했다. 오메가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발정기가 알파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 뿐이지 그게 어떤 건지는 베타인 자신에겐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고, 그마저도 소외당하는 기분이었다.

‘너는 약해 빠진 일반인이라 집안의 규율이고 명령이고 전부 어겨도 오냐오냐해주겠지만, 난 아냐. 아무리 거지 같은 명령이라도 들어야 하고, 완수해야 한다고. 알아들어?’

그러시겠지. 잘난 알파의 일원이시니 아주 다르겠지. 저 같잖은 티베인조차도 아주 가끔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다. 함께 세상에 나온 주제에, 자신에 대해 이해하려는 생각은 요만큼도 않는다. 오냐오냐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대등한 입장에서 가족들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포기하고 혼자 나가서 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일로델은 정처 없이 쏘다니던 걸음을 멈췄다.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장식된 문이 눈앞에 있었다. 별채 입구였다. 안 그래도 다운되었던 기분이 팍 상해서 방으로 돌아가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자신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는 봐야 할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그럴듯한 연구실이 눈앞에 드러났다. 나름대로 공들여 설계했는지 구석구석 약초를 보관할 곳이 많았고, 설비 자체는 아카데미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거기다 별채에 있던 침실, 응접실, 서재, 욕실 등 기본적인 생활 공간도 그대로 있어서, 그야말로 평생 틀어박혀 살아도 문제없어 보였다. 이대로 뚝 떼어서 집과 먼 곳에 옮겨놓을 수 있다면 아주 완벽할 텐데.

이것저것 들춰보던 일로델이 침실로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침대 위에 짐승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티베인이라는 이름의 짐승이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싫다 싫다 했어도 어쨌든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 티베인이란 오물이 묻은 것이다. 일로델은 불같이 화를 내며 티베인이 깔고 누운 시트를 확 빼냈다. 엎어져 자고 있던 티베인이 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어떤 새끼야? 죽고 싶어?”

“당장 꺼져! 나가라구!”

“어떤 잡놈이 감히… 엉?”

일로델이 던진 베개를 잡고 씩씩대던 티베인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뭐야? 네가 웬일로 내 방에 들어왔어?”

“여긴 내 연구실이야! 나가!”

“연구실? 아.”

그제야 본인이 어디 있는지 깨달은 티베인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하품을 쩍 하곤 다시 침대 위로 기어들어 간다.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일로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주섬주섬 시트를 덮는 티베인의 위를 박쥐처럼 덮쳤다.

“나가란 말야!”

“악, 머리를 왜 잡아! 이… 적당히 하지 못해?”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 나오던 티베인이 역으로 일로델의 팔을 잡고 침대에 메쳤다. 굴하지 않고 뻗어 나온 일로델의 주먹이 티베인의 턱을 후려갈겼다. 자다 일어나 침대에서 구르고 머리채를 잡히고 턱까지 얻어맞은 티베인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티베인은 날뛰는 일로델의 팔과 다리를 제압해서 침대 속에 파묻을 기세로 억눌렀다.

“사람 떨궈놓고 가더니, 어디 술독에라도 빠졌다 왔나 보지? 아까 그 멀대랑 재미 좀 보셨나 봐?”

“이거 놔! 저리 꺼져!”

“좋아, 마침 잘됐어. 대체 왜 이러는지 얘기라도 들어보자고. 어?”

“닥쳐! 너 같은 건 죽어버려!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

“좀 들어!”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눈앞이 번쩍했다. 또 뺨을 맞았다. 아까와 같은 자리였다. 이제는 아무 느낌도 안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속에서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는 것은 선명한 분노였다.

“네가 무슨 사람이야? 손부터 나가는 건 사람이라고 안 그래. 개만도 못한 거고, 밟혀 부스러진 벌레보다도 못한 거야. 넌 죽은 벌레에서 떨어져 나온 다리만도 못해!”

“먼저 내 턱 후려갈긴 건 기억도 안 나?”

“내가 너 같은 걸 왜 기억해. 너는 사람도 아닌데!”

“이….”

티베인이 울컥해서 손을 쳐들었다. 단련된 팔 근육이 위협적으로 떨렸다. 주먹은 일로델의 얼굴 대신 침대에 꽂혔다. 탄성 좋은 침대가 들썩이며 일로델과 티베인을 흔들어놓았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흔들림이 멎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티베인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일로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형 앞에선 온갖 얌전 다 떨면서 나한테는 왜 이래?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냐?”

“지금도 하고 있잖아. 미개한 야만인 자식.”

“벌레라고 했다가 사람이라고 했다가, 하나만 하지 그래.”

“너는 더러워. 더러운 자식이야. 너는… 개야. 발정 난 수캐.”

“적당히 좀 해!”

티베인의 고함이 천장을, 벽을 튕겨져 나와 일로델의 귀에 꽂혔다.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 겨우 그뿐인데도 입꼬리가 환희로 떨렸다.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서 날아갈 것 같았다. 티베인이 상처 입을 때마다 자신의 상처가 하나씩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쌍둥이니까 진짜 옮겨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일을 두고 말하나 본데… 실수였어. 아니, 그건 실수도 뭣도 아닌 사고야.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너 같은 건….”

“그냥 입 다물어.”

티베인이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손을 들어 일로델의 입을 막았다. 물어뜯으려고 입을 벌리자, 입가를 덮은 손에 힘이 실렸다. 커다란 손이 얼굴 반쪽에 족쇄를 채웠다.

“그 자식이 네 첫사랑인지 뭔지는 내 알 바 아닌데, 알파를 보자마자 질질 싸고 발정이 왔으면 볼 장 다 본 거야. 걸레 새끼였다고. 알았어?”

첫사랑. 일로델의 첫사랑은 가정교사였다. 귀족이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통속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데, 그 흔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온순하게 내리깐 눈과 가는 손이 좋았다. 그 손이 티베인의 등을 움켜쥐기 전까지는 그랬다.

“발정 난 오메가 구멍 좀 썼다고 내가 너한테 이런 취급받을 이유 없어. 형은 뭐 안 그러는 줄 알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알파들은 다 똑같아. 깨끗한 놈 하나도 없다고. 아버지, 어머니, 형, 별 같잖은 멀대 새끼까지 그렇게 따르면서 왜 나한테만 이래!”

“윽!”

일로델의 입을 막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턱이 쪼개질 것 같아서 신음하자 티베인이 놀라서 손을 뗐다. 야만인이었다. 저런 게 동생일 리가 없었다. 자신이 베타로 태어난 게 아쉬우니까, 어디서 비슷한 걸 주워 와서 쌍둥이라고 속인 게 분명했다. 일로델이 입가를 쥐고 끙끙대자 티베인이 일로델의 손을 치우고 얼굴을 살폈다.

“어디 봐, 그러게 왜 자꾸 주둥이를 놀려서….”

“저리 치워! 나한테 손대지 마!”

“윽, 그만 좀 하라니까!”

일로델이 다시 미친 말처럼 날뛰고, 티베인이 가슴팍을 얻어맞았다. 결국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티베인이 일로델을 엎어놓고 뒤에서 내리눌렀다. 일로델은 고장 난 것처럼 양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이거 놔, 나쁜 자식! 너 같은 건 동생도 아니야! 넌 강간범이야! 쓰레기 같은, 발정 난 강간범!”

“닥쳐! 젠장, 그까짓 게 뭐라고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내가 형한테 하는 것처럼 살갑게 웃어주길 바랐어, 뭘 했어. 미친놈처럼 굴지만 말란 말야!”

“나한테 명령하지 마, 이 강간범아! 내가 너 신고할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정뱅이 하는 소리 받아주고 있는 내가 병신이지!”

티베인은 몸부림치는 일로델을 억누르고 재킷을 뒤로 벗겼다. 팔을 구속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일로델은 힘껏 반항하다가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자 제풀에 지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티베인은 이게 무슨 소린가 고개를 들었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움직임을 멈췄다.

“뭐, 뭐야. 내가 뭐 어쨌다고 울어?”

“나쁜 자시익… 죽어버려. 나는, 나는 너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뭐!”

“너 때문에 안 서게 됐는데….”

티베인의 눈이 멍청하게 끔뻑였다. 일로델의 울음소리는 서러움을 듬뿍 담고 커졌다. 남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가끔 그 사실을 잊고 살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티베인을 미워할 이유는 그 외에도 아주 많았고 이건 아주 작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 취급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쏟아내고 나니 서러움이 멈추질 않았다.

“그거 본 이후로, 안 돼.”

“뭐….”

“선생님의, 거기에, 네가, 그거, 윽… 나, 나는, 너무 무서워서….”

무섭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끔찍했다. 한동안 악몽에도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엄청난 크기의 벌건 그것과 찢어질 것처럼 늘어난 그것이 섬뜩할 정도로 뇌리에 박혀서 그날 이후로 자신의 것만 쳐다봐도 오한이 일고 식은땀이 흘렀다. 만지는 건 고사하고, 자신이 남에게 그 짓을 한다는 상상만 해도 뇌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다 너 때문이야. 나쁜 놈. 강간범. 말자지.”

“말… 야! 이게 어디서 이상한 소릴 배워서! 이러니까 평민들 있는 아카데미는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소리 지르지 마, 이 강간범아!”

“자꾸 강간범 소리 할래?”

“야만인 자식. 미개한 놈. 벌레 다리.”

“참나.”

티베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일로델의 재킷을 마저 벗겨냈다. 그리곤 실컷 날뛰어서 움직일 힘도 없는 일로델의 몸을 번쩍 들어 시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일로델은 시트를 부여잡고 계속 훌쩍였다.

“그만 울어. 무슨 사연인지 대충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 탓은 아니잖아?”

“네 탓이야.”

“그리고… 너 말고 누가 확인한 사람은 없을 거 아냐. 뭘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안 서. 너 때문이야.”

“뭐야. 설마… 누가 확인해준 놈이 있어? 형이냐!?”

티베인이 야차처럼 얼굴을 구기더니 시트를 걷었다. 쥐고 있던 걸 빼앗긴 일로델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대뜸 바지를 벗기려 드는 티베인을 걷어찼다. 저런 미친놈을 보았나? 진심으로 경악하다 못해 남아있던 울음기마저 가신 일로델이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 머리맡까지 물러났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시트 위를 또르르 구르더니 티베인 앞에서 멈추었다.

“뭐야, 이건?”

조그만 갈색의 유리병이었다. 어디서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티베인의 손에 든 그것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일로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일로델은 날쌘 제비처럼 날아올라 티베인의 손에서 유리병을 빼앗아왔다. 이건, 오르본이 갖고 있던 건데. 왜 여기 있지?

그러다 번뜩 생각났다. 자신은 이것을 훔쳤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알파들은 기본적으로 약도 받지 않았고 독도 받지 않았다. 억제제도 오메가가 먹는 것보다 훨씬 함량이 높은 것으로 먹어야 했고, 알량한 독초 갖고는 배탈이나 나고 끝이었다. 그런데 알파를 쓰러뜨리는 독이 있다니. 일로델의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거기다 술로 인해 정신도 돌아버렸으니 자제심을 잃고 슬쩍해버린 것이었다.

“그게 뭔데?”

“아무것도 아냐!”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티베인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맹금류에게서 알을 보호하는 어미 새 꼴의 일로델을 보곤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오늘은 그만 자. 내일도 아카데미 갈 거 아냐.”

“안 가.”

“의무대 떨어졌다고 한동안 시무룩하더니, 아예 졸업도 포기했냐?”

그런 건 아니지만 차마 오르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은 실수인 척 돌려주면 그만이겠지만, 일로델의 하늘 같은 자존심이 그런 어설픈 수습을 용인할 리가 없었다.

“뭐, 좋지. 아카데미 졸업이 무슨 대수야? 네 연구실도 생겼으니 이제 얌전히 집에나 있어.”

남의 속도 모르는 티베인은 그렇게 지껄이곤 방을 나가버렸다. 일로델은 손에 든 유리병을 쏘아보다가 협탁에 잘 올려놓고 침대에 바로 누웠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나서. 티베인의 말을 듣게 된 것 같아서 기분 나빴지만, 어차피 잠은 자야 했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일로델은 시트에 푹 파묻힌 채 눈을 감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자식이 왜 여기서 자고 있었지? 희미해지는 정신으로 슬쩍 의문이 솟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곧 득달같이 찾아온 수마에 휩쓸려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일로델은 오만상을 쓰고 낯선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긴 어디야. 아, 어제부로 연구실이 된 별채였다. 잠깐 구경이나 하러 들어왔다가 잠이 들었다. 영혼이 나간 얼굴로 누워있던 일로델이 뭉그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타서 뭐라도 마시고 싶었다. 그러자 일로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로델님, 일어나셨습니까?”

“응.”

“들어가겠습니다.”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표면에 이슬이 시원하게 맺힌 물잔, 그리고 과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바나나, 청포도, 체리와 망고 같은 것들이었다. 좋아하는 과일들이긴 하지만 가져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좀 뜬금없다. 일로델은 잔을 들고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해갈하고 나니 달콤한 게 당겨서 체리를 하나씩 집어 먹는데, 하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채에 가주께서 와 계십니다.”

“아버지가?”

하인이 그렇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할지 묻는 태도였는데, 주인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일로델은 떨떠름한 얼굴로 먹던 체리를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집을 찾은 건 거의 반년 만이다. 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니 볼 수 있을 때 봐놔야 하는데, 알면서도 항상 주저하게 된다.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왔으니까 얼굴은 봐야겠지. 일로델은 흐트러진 머리와 의복을 최대한 정리하곤 본채로 향했다. 정원으로 나서자, 정원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주인집 차남을 보고 놀라서 작업을 멈추었다. 집 지키는 개를 산책시키던 하인도 저만치 구석에 처박히고, 바닥을 쓸던 하인들은 빗자루를 끌어안고 수십 보 물러났다.

젠장. 운전을 배워서 차를 끌고 다니든가 해야지. 딱히 하인들과 가깝게 지낼 생각은 없지만, 노골적으로 피하는 인간들을 눈앞에 두면 기분이 나쁜 게 당연했다. 그래도 가까스로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씩씩하게 본채로 들어서던 일로델은 마침 밖으로 나오던 풍채 좋은 인물과 마주하고 깜짝 놀라 섰다. 아버지 셰본이 부하들을 잔뜩 이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 일로델. 일찍 일어났구나.”

일로델이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테라스를 흘낏거렸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다.

“어디 가세요?”

“실톤 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러 왔다가 잠깐 들렀다. 다시 가봐야지.”

“네….”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니까 어차피 이렇게 될 게 뻔했다. 숙취 때문에 머리도 띵한데 뭐 하러 여기까지 급히 왔을까? 그냥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나 할 걸 그랬다. 뚱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일로델을 보며 셰본이 슬그머니 웃었다.

“헤롯이 네 연구실을 만들어주었다고 하던데. 마음에 드느냐?”

“네, 뭐….”

“군대도 나쁘지 않지만, 네겐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더 필요한 시점이지. 좋은 선택이야.”

셰본은 겉으로 보기엔 가벼운 깃털 같은 사람이었지만, 정말 그뿐이라면 진작 대공 자리를 반납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로델이 가족 중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 셰본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쉽게 간파당해서 허튼소리 하나 뱉기 힘들었다. 그뿐일까. 가끔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알아채곤 했다.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헤롯도 바쁘고 로건도 오기 어려울 것 같아서 너와 점심이라도 들 생각으로 왔는데… 이번엔 어렵겠구나. 다음엔 느긋하게 저녁 모임을 하자.”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은 다음을 기다리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는 일로델을 셰본이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건 싫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로델이 압박을 못 이기고 눈을 피하자 셰본이 대뜸 일로델의 뺨을 꼬집었다.

“윽… 왜 이러세요!”

“공부 열심히 하고, 괜히 로건 녀석 자극하지 않게 술도 적당히 하거라. 티베인과도 그만 싸우고. 쌍둥이라도 네가 동생인데 형에게 너무 대들고 그러면 안 돼.”

“제가 왜 동생이에요! 저는 그 자식 형이라구요!”

“그랬나?”

셰본이 어리둥절해서 돌아보자 안경 쓴 측근 하나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본은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날카롭지만, 가끔 한없이 무뎌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로델은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셰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나는 왜 항상 요 녀석이 막내같이 느껴지지? 지금이라도 호적에 바꿔 넣을 순 없나?”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쉽군.”

끔찍한 얘길 하면서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셰본을 보며 일로델은 속으로 이를 득득 갈았다. 날 때부터 티베인보다 늦게 나와서 막내가 되어도 억울했을 판인데, 이제 와서 그 자식 동생이 되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날엔 야인이 되어 세상을 떠돌 각오도 되어 있다.

“차라리 네가 막내였다면 너도 티베인도 지금보단 상황이 나았겠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티베인과 사이좋게 지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셰본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금세 말을 바꿨다.

“아니, 어차피 소용없는가.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함께 점심을 들러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으러 온 걸지도 모르겠다. 일로델이 겉으로도 보일 만큼 이를 박박 갈자 셰본이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또 오마.”

셰본과 그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넓은 저택 로비에 일로델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로델은 다시 테라스를 힐끗거렸다. 해의 위치가 그대로였다.

“…….”

헤롯도 로건도 오늘은 오지 않는다. 반년 만에 찾아왔던 셰본도 방금 나갔다. 갑자기 하루가 엿가락처럼 길게 느껴졌다.

한동안 오도카니 서 있던 일로델은 터덜터덜 제 방에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고, 자신은 숙취로 피곤했다.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면에 몸을 맡길 이유로는 충분했다.

*

일로델은 커다란 운석에 올라타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황성이 있는 아름다운 대도시도 들르고, 최근 해적의 출몰로 시끄럽다는 실톤 해안에 가서 해적선들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무인도에 틀어박혀 있다가 심심하면 또 운석을 타고 나왔다. 살면서 이런 즐거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불쾌하기만 했던 바닷바람조차 너무나도 상쾌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잔뜩 어두워지더니 벼락이 꽝! 쳤다.

“야, 일어나!”

벼락이 운석을 쪼개놓기 전, 일로델이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방금까지 타고 있었던 커다란 운석과 푸른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인가? 일로델이 다시 눈을 감았다.

“왜 또 눈을 감아? 일어나라니까!”

티베인이 꿈나라로 빠져들려는 일로델을 붙들고 일으켰다. 사태파악이 안 된 일로델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고 티베인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와는 다르게 순하고 어수룩한 시선이었다. 티베인이 당황한 듯 움찔한 찰나, 익숙한 소리가 빽 터져 나왔다.

“네가 왜 내 방에 있어! 나가!”

“너 또… 변한 게 없군. 눈 뜨자마자 그 소리냐?”

“내 앞에서 꺼져, 이 벼락같은 놈아! 너 때문에 운석이 쪼개졌잖아!”

“뭐라는 거야? 눈 떴으면 그만 일어나! 식사도 안 들었다면서.”

“네가 무슨 상관이야!”

순하고 어수룩하긴 무슨… 평소와 똑같은, 히스테리 가득한 도돌이표 대화였다. 더는 말 섞기도 귀찮아진 티베인이 일로델을 강제로 일으키곤 그대로 끌고 나갔다. 복도를 지나가던 하인들이 두 사람을 보고 기겁해서 고개를 숙였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질질 끌려가던 일로델은 뒤늦게 제 차림을 확인하곤 자리에 섰다. 정확히는, 서려고 했지만 계속 끌려갔다.

“이거 놔! 놔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이러고 무슨 밥을 먹어!”

“어디 나갈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야? 쓸데없이 돌아다니느니 차라리 그러고 집에 눌러앉아 있는 게 낫겠네.”

단언컨대 일로델은 자신이 단 한 번도 쓸데없이 돌아다녀 본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깥에서는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적어도 모자라 보이지 않도록 언제나 반듯한 행색을 추구했다. 집 안에서조차 이렇게 잠옷 차림으로 활보한 적은 없었는데. 야만인 같은 티베인이 자신을 망쳐놓으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식당에 도착한 티베인이 일로델을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일로델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어깨에 덮을 블랭킷을 든 하인과 마주하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보는 눈이 많았다.

“식사도 안 하고 잠만 잔다기에 어디 아픈가 했더니, 너는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밥도 못 먹냐?”

“너는 왜 아닌 척해? 너도 똑같잖아!”

야만인 자식이지만, 그래도 록퍼스가의 구성원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치장하는 것부터 목욕, 식사, 외출준비까지 하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요리는커녕 비스킷을 접시에 담아본 적도 없었을 게 뻔했다.

“자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누구보단 낫거든? 이봐, 주정뱅이도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빨리 갖고 와.”

기껏 한다는 게 명령이냐? 그럼 그렇지. 일로델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나도 해.”

“할 줄 알면 좀 써먹어. 우울증 걸린 노인네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딱히 우울증에 걸려서 틀어박혀 있던 건 아니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고, 오늘 하루는 할 일도 없었다. 물론 아카데미에 가거나 새로 생긴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한 사실들은 말끔하게 무시했다.

조금 뒤 일로델과 티베인 앞에 따뜻한 콘 수프와 부드러운 빵,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오늘따라 체리와 망고가 자주 보인다. 홀린 것처럼 체리 꼭지를 따서 우물거리다가 콘 수프를 떠먹기 시작하는 일로델을 보고 티베인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땍땍거리더니 먹을 땐 조용한 게 우습단 태도였다. 열 받긴 했지만, 음식 맛을 보고 허기를 인식한 뇌가 계속 먹을 것을 요구했다. 다른 건 몰라도 뇌의 명령은 잘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다 먹으면 산책이나 가자고. 집에 있어도 몸은 움직여줘야 하는 거야.”

산책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티베인과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대꾸 없이 식사를 마친 일로델이 티베인을 기다리지 않고 훌쩍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어서 밖을 돌아다니는 하인들은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 중인 인원은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안전하지만, 그래서 답답했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버릴까? 나가서 어제처럼 시끄럽고 속없는 녀석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 거다. 밤새 게임을 하고 새벽에 비척비척 일어나 아카데미에 가서 교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버리자. 그런 녀석들은 저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그런데 자신만은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쓸데없이 귀한 신분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현재 잠옷 위에 블랭킷만 걸친 차림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정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일로델이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언제 또 따라왔는지 거머리 같은 티베인이 바로 뒤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집을 나가고 싶냐?”

너랑 상관없잖아. 이젠 입에 붙어버린 그 말도 지긋지긋해서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팔을 잡혀서 질질 끌려갔다. 또다시 야만인의 패악질이 시작된 것이다.

“이거 놔! 나한테 손대지 마!”

“맨날 그러기도 지겹지 않냐? 다른 것도 좀 생각해 봐.”

“놔, 이 강간범아!”

“젠장. 그 소린 하지 마!”

정신없이 끌려오다 보니 어느 순간 별채였다. 티베인은 별채 문을 거칠게 걸어 잠그곤 일로델을 침실에 밀어 넣었다. 때아닌 운동에 지친 일로델은 무례한 행동에 항의 한마디 못하고 씩씩댔다.

무식한 자식. 개를 산책시켜도 이러진 않을 거다. 물론 티베인이 개로 태어났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멈춰달라고 애원하면 한 번쯤은 멈춰주는 너그러운 주인일 자신이 있었다.

티베인 역시 숨이 찬 건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분노 어린 눈으로 일로델을 노려보던 티베인이 짓씹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난 강간을 한 게 아냐. 오히려 그건, 내가 지나가다 얻어맞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그걸 그렇게 이해하기가 힘들어?”

일로델의 가정교사가 된 사람은 가늘고 무해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는 언어 능력이 뛰어난 교사였고, 본인을 베타라고 소개했었다. 당연히 일로델은 철석같이 믿었고 어쩐지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천식이 있다며 약을 자주 챙겨 먹는 것도 연약해 보여서 지켜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천식약이라는 건 억제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꼼꼼하게 몸을 챙기던 선생님이, 하필 왜 그날 발정이 왔던 걸까. 아직도 의문이지만, 의문보다도 충격이 커서 다른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날 이후 자신의 것이 고장이 나버린 바람에 더욱 그랬다. 하물며 티베인의 입장 따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제 네 그게 안 선다고 했지. 나도 비슷해. 그때 이후로… 안 서는 건 아니지만 발정해도 쑤셔 넣기보단 아무나 죽사발을 내놔야 직성이 풀려.”

“그건 네가 야만인이란 증거겠지.”

진짜 고장 난 사람 앞에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안 서는 게 아니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일로델이 대화를 거부하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티베인이 울컥해서 일로델의 어깨를 잡아챘다.

“사람이 얘기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 넌 정말, 나를 조금도 이해할 생각이 없는 거냐?”

잡힌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티베인은 자신과 비슷한 체격이지만 전신에 붙은 근육과 그곳에서 오는 힘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알파로 태어난 것, 그거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자신보다 우월했다. 분명히 쌍둥이인데. 왜 이 녀석만.

아니다. 이 녀석만 알파인 게 아니었다. 가족 모두가 알파인데 왜 자신만 베타일까. 티베인을 주워왔느니 어쨌느니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뻐꾸기 새끼인 게 아닐까.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웠다.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버림받은 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티베인은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고민이 다 뭘까. 자신이 원하고 원했던 길을 폭주 전차처럼 나아갔다. 미웠다. 부러웠다. 상처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 상처 입은 티베인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우월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결국 남는 건 찌꺼기 같은 비참함뿐이었다.

“그러는 너는 날 이해해본 적이나 있어? 없겠지. 너 같은 야만인이 뭘 알겠어!”

“언제 그럴 만한 기회나 줬냐? 넌 항상 날 밀어내기만 하잖아!”

“밀어낼 만하니까 밀어내지. 귀찮게 하지 마! 그냥 하던 대로 남남처럼 살면 되잖아!”

“내가 너랑 왜 남남이야!”

“너는 남보다 못해, 이 강간범아!”

“이…!”

그래, 차라리 때려라. 자신의 뺨이 붓는 대신 티베인은 보이지 않는 생채기를 입는다. 그걸로 끝이었다. 티베인과 자신은 이런 게 어울렸다. 서로를 이해하니 어쩌니 시시한 소리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티베인은 항상 하던 것처럼 뺨을 내리치는 대신 일로델을 침대 위로 밀쳤다. 거칠게 쓰러진 두 사람을 받아들인 침대가 비명을 내질렀다.

“제발… 강간범 소리 좀 그만해. 네가 그럴 때마다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아. 어? 정말로, 그렇게 되고 싶다고.”

넌 이미 훌륭한 미친놈이야. 그렇게 쏘아붙이려던 일로델이 입을 다물었다. 저를 매섭게 쏘아보는 푸른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소용돌이쳤다. 티베인은 잠시 화를 억누르려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굵은 핏줄이 단단하게 올라온 손은 분노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떨리고 있었다.

“너는… 나를 추잡한 오물처럼 쳐다보고 있었지. 나를 가장 이해해줘야 할 반쪽이, 인간도 뭣도 아닌 발정 난 수캐 보듯 쳐다보고 있었어. 그 비참함을 네가 알아?”

그때 티베인이 비참함을 느꼈던가. 잘 모르겠다. 어린 날의 일로델은 밉살스러운 쌍둥이 동생 티베인과 연모하던 선생님의 짐승 같은 성교를 목격하고 자신이 받은 충격을 추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로지 너야. 네 앞에서만 나는 발정 난 개이고 더러운 짐승이 돼. 그래서, 오히려 그래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단 말야. 이제 알겠냐고!”

알겠다. 그러니까 자신을 앞에 두면 짐승이 되어서 때리고 싶어진다는 얘기였다. 추잡한 걸 추잡하다고 쳐다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이해의 영역은 아니지만, 최소한 인과 관계는 알게 되었다.

속으로 짐승이다 짐승이다 했지만, 정말로 개가 되어서 그런 것일 줄이야. 때리겠다면 맞아줄 용의는 있었다. 언제나처럼 맞고, 상처 주고. 그걸로 끝인 것이다.

“…….”

일로델은 위협하듯 노려보는 티베인의 시선을 다부지게 맞받아쳤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그 표정에 티베인의 얼굴이 분노에서 의혹으로, 의혹에서 답답함으로, 답답함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혼자 왜 저래? 이젠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 싶었던 일로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티베인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고함이 벼락처럼 내려친 건 그때였다.

“이, 멍청한 놈!”

“뭐!”

“페로몬도 모르는 빌어먹을 베타 자식!”

“뭐가 어째!”

제가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 일로델이 몸을 벌떡 일으키고, 티베인이 잘 됐다는 듯 멱살을 휘어잡았다. 일로델은 곧 얼굴에 주먹이 꽂힐 것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가온 건 돌 같은 주먹이 아닌 미적지근하고 물컹한… 입술이었다.

“으응!”

기겁한 일로델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물리자, 티베인이 아예 허리를 휘어 감고 혀로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꾹 다문 이빨에 막히고 대신 일로델의 윗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감전된 것 같은 오싹함이 척추를 훑었다. 쾌감이 아니라 공포였다. 미지의 뭔가를 마주했을 때 느낄 법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일로델은 굳어서 삐걱대는 팔을 들었다. 그리고 제 입술에 매달려 있는 티베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악! 이게 또 머리를!”

“너! 너! 내 입에!”

“그러게, 얘기했잖아! 이런 걸 하고 싶어진다고!”

이런 거? 이런 게 뭔데? 입과 입이 마주치고, 혀가 입술을 빨았다. 그러다가 혀와 혀가 얽혔다면 이건 완벽한 키스였다. 키스? 키스라고? 쟤는, 동생, 키….

그때, 정신없이 흔들리던 일로델의 시야에 협탁에 올려놓았던 갈색 유리병이 들어왔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오르본의 독이었다. 오르본. 그랬지. 자신은 오르본과도 키스했었다. 조잡한 게임의 벌칙이었다. 고약한 야만인 자식. 주먹으로 때리는 거로 부족해서 이젠 주둥이로도 치려는 모양이다. 그래, 그런 게 분명했다.

“저리 떨어져!”

“왜, 네가 무슨 폭탄을 건드리고 있었는지 이제 좀 알겠냐?”

“알겠으니까 떨어지라구!”

목소리가 사라진 침실 안에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넋 나간 것처럼 침대에 뻗어 있던 일로델이 어느 순간 번쩍 튀어 나가 별채 문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티베인이 좀 더 빨랐고, 둘은 이유 없이 문 앞에서 씨름하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바깥으로 나뒹굴었다. 그 짧은 순간 일로델을 끌어안고 구른 티베인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야, 괜찮아!?”

“아파….”

“어디!”

“이마….”

아닌 게 아니라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일로델의 이마가 빨갰다. 피부가 연하다 보니 부푸는 속도도 남달랐다. 난감한 표정의 티베인을 본 일로델이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만졌다. 찌릿한 아픔이 퍼졌다. 그 부분만 볼록하게 솟아 있는 게, 감촉이 이상했다.

“뭐야, 이거?”

“혹… 났는데. 달걀이라도 갖다 줘?”

달걀 같은 소리 하네. 생전 처음으로 머리에 혹이 나는 걸 실시간으로 경험한 일로델의 눈이 번뜩 발광했다. 그 손에 주변을 굴러다니던 약초 바구니가 잡혔다.

“꺼져! 다 너 때문이야!”

“뭐? 야… 하지 마! 그러다 또 넘어져!”

“닥치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이 강, 야만인 자식아!”

티베인이 미친놈처럼 약초 바구니를 휘둘러대는 일로델을 피해 몸을 물렸다. 일로델은 마지막으로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잽싸게 별채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걸로도 모자라 창문까지 전부 잠그고 침실로 들어와 이불 속에 숨었다.

다행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천만다행이었다.

일로델은 달이 뜨고 새벽이 올 때까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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