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부) (1/18)

그 귀족가 형제들의 사정

프롤로그

또 떨어졌다.

일로델은 합격자 발표 게시판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정말 완벽했다. 매번 지적당하는 예민함도 내비치지 않았고, 독초를 애정하는 마음도 애써 감췄다. 밝고 열정적인 약초학부 학생을 힘껏 연기했는데 왜 떨어졌을까. 물론 이름을 얘기하라는 면접관의 말을 끝까지 무시하긴 했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일로델, 붙었어?”

맹하게 생긴 동기 하나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일로델은 쌩하니 무시했다. 평소였다면 대답 정도는 했겠지만, 저 자식은 오늘 합격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 졸업까지 한 번 더 기회가 남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론 비웃고 있겠지. 벌써 몇 번째 떨어지는지 세는 것도 넌더리가 난다. 남들은 서류만 내면 다 붙는다는 예비군 의무대에서도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인 게 분명했다.

합격자 발표는 합격자한테나 해. 성질 같아선 게시판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오늘은 눈에 띄는 짓을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고마워.”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눈썹 하나 찌푸려도 소문거리가 된다. 게시판을 걷어차는 대신 서둘러 도서관으로 올라와 문을 걸어 잠갔다. 다들 게시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느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알 게 뭐야. 다 망해버리라지.

일로델은 광인처럼 눈을 번뜩이더니 누군가 읽느라 펼쳐 두었던 책을 마구 덮었다. 의자에 걸쳐놓은 가방을 다른 것과 바꿔치기하고, 가방이 없는 의자는 뒤집어놓았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서 씩씩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세상.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답답한 집구석만 아니면 어딜 가든 좋은데, 정작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이 일로델 록퍼스이기 때문이었다. 록퍼스가의 차남이면서 베타이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세상에는 빌어먹을 가문도 있는 법이다. 혈통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왔는지 알 바 아니지만, 록퍼스가는 알파만 줄기차게 생산하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오직 자신만이 베타였다. 부모 둘 중 누군가 색다르고 짜릿한 일탈을 경험했거나 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사생아라면 당당히 독립할 이유가 생긴다. 하지만 일로델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겉과 속을 다 털어봐도 록퍼스가의 핏줄이었다.

죽어라. 나쁜 놈들. 다 죽어버려. 잔뜩 웅크린 채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욕을 주워섬기는 일로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냐?”

일로델은 눈동자만 굴려 누군지 확인하고 다시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다. 록퍼스가의 특징인 흑발과 푸른 눈.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자신과 조금쯤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 알겠지만, 어쨌거나 뇌가 형제 관계임을 거부하는 티베인 록퍼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행패 다 부렸으면 그만 가지? 나 오늘 바빠.”

“꺼져.”

“한두 번 떨어진 것도 아니고 왜 또 히스테리야? 어차피 네가 붙을 거 기대한 사람 아무도 없어.”

이 자식은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두리번거리는 일로델의 시야에 열려 있는 창문이 걸렸다. 도서관은 3층인데, 3층 벽을 타고 기어 올라온 것이다. 징그러운 거미 같은 놈. 일로델은 저를 건드리려는 티베인의 손을 피해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저게 있으면 맘 편히 신세 한탄도 못 한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티베인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

“야, 또 어디 가!”

일로델이 말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티베인이 서둘러 어깨를 잡아챘다. 도서관 안에 짝,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얼떨결에 일로델에게 손을 얻어맞은 티베인이 울컥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진짜.”

“뭐, 때리게?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밖에 없지. 미개한 자식.”

일로델이 처음으로 티베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눈이었다. 얼굴만 보면 다투는 사이지만, 오늘은 어머니와 형이 오는 날이었다. 싸웠다는 걸 알면 둘 다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게 뻔했다.

티베인은 진심으로 손이 근질근질하단 얼굴이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연신 시계를 살폈다. 바쁘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알아주지도 않는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축내는 자신과는 다르게 티베인은 이미 군대에서 한자리 차지한 사회인이니까.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야만인이나 때려잡으러 갔으면 좋겠다. 야만인 같은 자식. 야만인이 야만인을 잡아들인다니 웃기는 세상이다.

“너 같은 거 한 대 쥐어박아서 기절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놀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조용히 따라와.”

결국 티베인은 기껏 쥐었던 주먹을 쓰는 대신 협박을 택했다. 어느 쪽이든 미개했다. 야만인에게 말을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

차에 타서도 내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티베인은 거대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일로델을 방에 구겨 넣었다.

“너 집에 조신하게 있어. 하긴, 어차피 오매불망하는 형님이 오실 테니 오늘은 얌전하겠지.”

“꺼져, 내 방에서 나가.”

“들어와 달라고 빌어도 안 들어가.”

문이 쿵 닫히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갑갑함도 함께 찾아왔다. 욕실과 응접실이 딸린 큰 방이었지만, 일로델에겐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의무대 합격도 못 하는 반푼이어도 아카데미에 있으면 실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감옥 같은 저택에 들어오면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 옥에 티. 모자란 차남. 쌍둥이 동생에게 모든 걸 빼앗긴 불운한 형… 은 자신만의 평가겠지만.

차라리 티베인이 베타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몇 분 차이로 막내가 되었다지만 짊어진 책임감과 의무감은 다를 테니까. 물론 자신이 막내로 태어난다는 선택지도 있겠으나, 그건 싫었다. 티베인 같은 놈을 형으로 모셔야 한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 자식은 막내여야 한다. 그리고 베타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금쯤은 귀엽게 봐줬을 텐데.

일로델은 언제나 알파가 되는 꿈을 꿨다. 알파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처럼 제왕학 교육을 받고 군에 입대해 작위를 받은 다음, 때 되면 영지를 하나 골라 아름다운 아내를 들여서 둘이서만 알콩달콩 사는 꿈이었다. 대부분의 야망 넘치는 알파들과 다르게 끝이 좀 로맨틱하다는 게 베타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일로델의 꿈은 그렇게 거창하고도 소박했다.

“일로델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엎어져서 망상이나 하던 일로델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어릴 적에는 꽤 진지하게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23년이 넘도록 베타이고 앞으로도 베타일 거라는 주치의의 냉혹한 판단만이 남았다. 그래서 요즘은 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일로델은 욕실에서 대충 얼굴을 씻고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비록 속은 썩어들어가는 중이지만, 협상에는 영리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외관이 필수였다.

“형이랑 어머니는?”

“두 분 모두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표정한 하인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이 집구석의 인간들은 다들 저런 표정이었다. 특히 하인들은 옷도 똑같이 입혀놔서 가끔은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되었다. 그나마 표정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티베인이었지만, 일로델에게 티베인은 없는 게 더 나은 인물이니 표정이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쓴다는 게 맞았다.

일로델은 연회장을 방불케 하는 식당에 들어섰다. 긴 식탁에 음식을 늘어놓고 식사를 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로델이 세상에서 가장 거북해하면서도 가장 친밀함을 느끼는 사람들, 어머니인 헤롯과 형 로건이었다.

“늦었구나.”

“죄송해요.”

상석에 앉은 헤롯이 자리에 앉으라며 손을 들었다. 일로델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로건 옆에 앉았다. 하얀 소스가 얹힌 생선 스테이크가 새로 나오고 일로델도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함께하는 귀족 가문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서로 어디 박혀서 뭐 하고 사는지도 관심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록퍼스가는 대대로 무인을 배출하는 가문이고 그 모두가 알파인 만큼 자식들 통제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물론,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이번에도 의무대 지원에 실패했다고 하던데.”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말을 꺼낸 헤롯도, 일로델의 옆에 앉은 로건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일로델은 어금니로 입안 살점을 꾹 깨물었다.

“그만 포기하고 적당한 곳에 출퇴근이나 하려무나.”

“아직 한 번 더 기회가 남았어요.”

“너와 군대는 안 맞아. 매번 네 탈락 소식을 보고해야 하는 내 부하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제게 신경을 끄시면 되잖아요.”

“네가 알파였다면 그랬겠지.”

나왔다. 알파 타령. 일로델은 식탁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인이 따르는 차를 기다리던 로건이 일로델을 힐긋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너를 혼자 내버려 뒀다가 야만인들에게 납치라도 당하면 그땐 나라 전체가 들썩이게 돼. 너는 내 아들이고 황제 폐하의 조카이니까.”

“그러니까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얘기잖아요.”

“군에서는 너를 바라지 않아.”

냉정한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기고 한동안 하인들이 식사 시중을 드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뭐, 좋다. 여기까진 늘 하던 대화이고 익숙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나니까 한 번쯤은 져줄 수 있다. 사실상 한 번이 아니라 언제나 패배해왔지만, 일로델은 굴하지 않고 마음속에 꾹 담아두었던 본론을 꺼냈다.

“그럼, 연구소를 하나 차려주세요.”

늘상 하던 ‘군대 가고 싶어’ 돌림 노래가 아닌 엉뚱한 소리에 헤롯과 로건의 시선이 일로델에게 쏠렸다.

“민간 연구소나 병원에 취직하면 다들 저를 어려워할 거예요. 차라리 조금 떨어진 곳에 제 전용 연구소를 차려주시면 거기서 그냥 먹고 자고 하면서 평생 조용히 연구에만 매진할게요. 출퇴근한다고 호위를 끌고 다니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나요?”

일로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귀족인 이상 놀고먹을 수는 없는 법이고, 어차피 민간 기관에 들어가야 한다면 차라리 가문에서 그럴듯한 연구소를 하나 세워주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헤롯이 솔깃한 얼굴로 로건을 곁눈질했다. 식사를 끝내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로건이 일로델을 돌아보았다.

“아카데미는 잘 다니고?”

“네? 네….”

갑자기 왜 아카데미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협상 성공의 기대에 부풀었던 일로델이 거북이처럼 눈을 끔뻑였다. 로건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요즘 아카데미 학생들과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

“네? 그거야 뭐….”

어울린다고 하긴 뭐하지만, 동기들의 인사 정도는 받아주고 있었다. 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땐 어차피 초고속 승진으로 여러 번 볼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 무시했지만, 인생이 이렇게 꼬이다 보니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름대로 사교성이 발휘된 것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 평민들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헤롯의 의문에 로건이 짧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곳은 집이고 그 안에 있는 건 가족들이지만,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서로를 상사와 부하 대하듯이 굴 때가 있었다. 밖에서 하던 버릇이 집 안까지 옮겨온 것이다. 사소한 버릇이었지만 일로델에게는 이런 것들이 하나씩 모이고 모여 소외감으로 돌아왔다.

“평민과 어울린다고?”

“네? 아니, 그건….”

잠시 씁쓸함을 느끼는 사이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일로델의 눈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설마, 연구소를 핑계로 네 공간을 만들어서 평민들과 저속하게 어울려 놀 셈은 아니겠지?”

“네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일로델에겐 같이 어울려 놀 상대도 없었다. 그의 괴팍한 성질은 남녀노소와 안팎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절대 아니에요! 저는 그냥, 혼자 나가서 살고 싶어서… 아.”

야단났다. 속내가 적나라하게 나와버렸다.

“…….”

입을 합 다물어버린 일로델을 헤롯이 빤히 바라보았다. 바위도 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에 일로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헤롯은 ‘본심을 둘러 얘기하는 것’은 귀족답다고 생각하지만, ‘본심을 대놓고 말하는 것’은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연구소고 뭐고 다 날아갈 판에 구원의 밧줄을 내려준 건 로건이었다.

“일로델이 자유를 갈망할 시기이긴 합니다.”

“형님….”

일로델이 울멍울멍한 눈으로 쳐다보자 로건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정 그렇다면 멀리 갈 필요 없이 별채에 연구 공간을 만들어주는 건 어떻습니까? 출퇴근 걱정도 없고, 평생 안전하게 연구하며 살기엔 별채만 한 곳이 없을 겁니다.”

“뭐라구요!?”

일로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가 헤롯의 싸늘한 눈과 마주치고 다시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건 구원의 밧줄이 아니라 썩은 밧줄이었다. 그렇게 되면 본채에서 별채로 방만 바뀌는 거랑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집에 있음으로써 느끼는 소외감이 여전할 건 물론이요, 별채로 쫓겨나기까지 해서 한층 더 서러워질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집으로 출퇴근하는 귀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문에서 혼자 베타인 것도 모자라 꼴값을 떤다고 세상이 비웃을 일이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아주 좋은 생각이야. 당장 준비를 지시해야겠어.”

“자, 잠깐만요!”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혹시 정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헤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일로델을 노려보았다. 무언의 압박에 약한 일로델은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꿍꿍이는 이미 털어놨다. 나가서 살고 싶다는 것. 그거 하나인데 입대도 안 돼, 연구소는 날아가. 도대체가 자꾸만 일이 꼬이기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연구 공간을 위한 별채 공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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