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허리 아파….
답을 적어 낸 뒤 이진언은 연신 허리를 통통 두들겼다. 간밤에 잠을 못 잔다고 선언한 게 거짓은 아닌 듯, 김유겸은 정말 밤새도록 이진언을 괴롭혔다.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기에는 어폐였지만 어쨌든, 잠을 편히 자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늘 시험이 전필만 아니었더라면 자체 휴강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허리가 쿡쿡 쑤셨다.
“얼굴이 피폐하다? 또 날 샜냐.”
시험이 끝나자 박지운이 다가와 물었다. 시험 전까지는 서로가 예민해 웬만해서는 말을 주고받지 않지만, 끝나면 사정이 달라졌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맛난 음식을 잔뜩 먹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럴 일이 있었어.”
“시험 기간에는 유갱 그 새끼도 안 치대는 거 내가 아는데 뭐가 그럴 일이 있었대. 보나 마나 공부한답시고 밤새웠겠지, 뭐.”
평소의 행동으로 오늘의 이진언을 평가하는 박지운의 판단은 그랬다. 딱히 어디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이진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읏,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에 척추뼈 어딘가가 어긋났다가 도로 맞춰지는 소리가 나며 통증을 유발한다. 저릿하고 묵직한 감각에 이진언은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다시는 시험 전날에 밤새도록 하나 봐라.
과거였다면 행위 자체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텐데, 지금은 조건이 붙는다. 스스로도 이런 상황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며 이진언은 어기적어기적 강의실을 나왔다. 친구의 상태가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시험 기간만 되면 사람이 아닌 좀비가 되는 녀석들을 많이 목격했던 터라 박지운은 별다른 감상을 내놓지는 않았다.
“먹자.”
몸 상태를 봐서는 오늘 일정을 건너뛰고 싶었지만, 모든 시험이 끝난 뒤 박지운과 고기를 먹는 건 그동안 행해온 일과라서 생략하지 못했다. 제 몸 상태를 말한다면 다음에 먹자고 할 박지운을 알지만, 이것은 이진언의 고집이었다. 제발 쓸데없는 데서 고집부리지 말라던 박지운이었지만, 애초에 생겨 먹기를 이렇게 생겨 먹어서 변화하기가 어려웠다.
“이번 시험 특히 어렵지 않았냐? 와 난 머리 터지는 줄.”
“공부를 하라고, 그러니까.”
“했거든? 나름 빡세게?”
“거짓말하지 마. 너 공부한답시고 도서관 와서 영화만 보다 갔잖아.”
“헤헤, 봤어?”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고.”
불판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으며 그동안 공부하느라 잠시 소원했던 우정을 다시 다졌다. 김유겸과는 다른 편안함이 느껴져 이진언은 웃었다. 박지운이 실없는 소리 하면 핀잔주고, 제 의견을 구하면 답을 주었다. 벌써 십 년 가까이 친구라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제 속을 낱낱이 알아주어서 참 편하고 고마웠다. 김유겸과는 다른 의미로 놓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 그게 아니라고~~!”
치열한 전장 같았던 시험을 끝낸 뒤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의 고기라서 학교 앞에서 먹기는 싫었다. 두 사람은 옛날부터 다니던 단골 고깃집을 들렀다. 금요일 오후라서 사람들이 많았다. 방송에 나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깔끔한 밑반찬과 가격 대비 질 좋은 고기로 단골이 많은 곳이었다. 고깃집이니까 술도 같이 팔았고, 두 사람은 술을 즐겨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손님들은 항상 고기에 술을 곁들였다. 때문에 가게는 항상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시끄러웠다.
“아 진짜 이 자식들이랑 뭔 말을 못 하겠네~!!! 꺼져 이 미친놈들아~!”
평소라면 이 북적거리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무슨 주제로 대화하든지 말든지, 해당 대화 때문에 싸우든지 말든지, 솔직한 말로 하자면 두 사람과는 상관없었다. 단, 이러한 가정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의 당사자가 두 사람이 아는 얼굴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성립되는 상황이었다.
원래도 시끄러운 가게였지만 오늘은 유난했다. 어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도 되는 건지 가게 구석진 곳에 앉은 테이블이 특히 데시벨이 높았다. 주변 손님들이 힐끔힐끔 해당 테이블을 일별했지만, 딱히 제재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시끄러운 대화 소리에 잘난 얼굴이나 보자 싶어서 힐끔 돌아보기는 했지만, 거기서 여러 가지 의미로 아는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는 하늘에 맹세코 예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화 주인공을 알아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
“…저 새끼,”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이진언의 온몸이 흠칫 굳었다. 박지운도 마찬가지였다.
가게에 들어올 때는 분명 못 봤다.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는 이쪽을 보지 못했다. 만약 서로의 얼굴을 알아봤다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상상에 발밑에서부터 차가운 감각이 종아리를 타고 온몸으로 확산됐다.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 뚜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가 이진언의 몸을 옭아맸다. 순식간에 눈앞에 깜깜해졌다.
“씨발.”
박지운은 나지막이 욕을 지껄였다. 서둘러 본인과 이진언의 짐을 챙겼다. 정신 차려! 멍한 표정의 이진언에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진언은 박지운이 일갈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화들짝 놀라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박지운은 아랫입술을 짓씹고 서둘러 계산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벌써 가? 아직 국수 서비스도 안 나갔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단골을 알아본 가게 사장이 말을 붙였지만, 박지운은 대충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시는 이 가게에 오지 않겠다고 굳세게 다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이 행운이었다. 이곳은 둘이 나온 고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우리뿐이 아니라 다른 고등학교 동창이 이곳을 이용하리라는 가정은 꿈에도 하지 못한 두 사람의 불찰이었다.
“정신 드냐?”
“………어.”
“들기는 씨발, 얼굴이 허옇게 떴다.”
“괜찮아.”
“괜찮기는, 씨발. 네놈 괜찮다는 소리 안 믿는다고 그때 말했다.”
“…….”
박지운의 말에 이진언은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근처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사실 이진언은 어떻게 가게를 벗어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박지운의 이끄는 강력한 힘에 발길을 놀렸다. 그만큼 조금 전에 받은 충격이 대단했다.
“하필 거기서, 씨발, 유재준을 만날 게 뭐람.”
벤치 옆에 앉은 박지운이 담배의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화를 냈다. 박지운의 입에서 상대의 이름이 나오자 이진언의 몸이 순간 흠칫 굳었다. 그걸 느낀 박지운은 아악-!! 하는 소리를 잠시 지르더니 이내 이진언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마음속 위로를 대변하는 손이 대신 말을 전했다. 이진언은 박지운의 손이 제 등을 다독여서야 긴장으로 인해 잔뜩 굳었던 온몸을 이완했다. 너무 긴장해서 등 근육이 다 아팠다.
“하아 씨발 새끼 진짜-”
옆에서 박지운이 연신 유재준을 향해 욕을 해댔다.
유재준은 과거에 이진언을 유리한 패거리 중 우두머리 격인 놈이었다.
당시에 이진언을 짓밟은 가해자는 총 다섯이었다. 다섯 중 셋은 직접 이진언을 유린했고, 나머지는 간접 참여했다. 일이 발생하고 난 뒤 바로 목격자가 등장해 사건이 묻히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그래서 더 골치 아팠던 건지도 몰랐다. 학교 축제 때 선생들의 눈을 피해 발발한 일이라서 학교의 대처는 소극적이었다. 외려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사건을 재판에 세운 건 이진언의 부모였다.
“…하하…하…….”
단호한 부모님의 태도에 사건은 재판의 마지막까지 가는 듯했지만, 돈으로 금방 종결되었다. 이진언의 인격을 유린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게 한 가해자 중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이는 없었다. 이진언의 부모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지만, 종국에는 돈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진 것이 가해자의 보호자라는 사람들이 꾸민 짓인지 아닌지 의심할 정신도 없었다.
“씨발 진짜,”
이진언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한창 친구들과 즐거운 추억으로 도배돼야 하는 곳이 끔찍한 기억들로 점철되어 이진언을 갉아먹었다. 끔찍한 사건의 발생 직후 이진언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감정 표현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울지도 않았다. 사건이 합의되어 가해자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전달해 들었을 때조차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으니 말 다 했다.
“…하아….”
짙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올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착각인 모양이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이진언이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이 최악의 최악으로 치닫고, 저도 죽지 못해 사는 시간이 연속됐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가해자 중 한 명이 명문대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 순간 이진언은 정말 욱했다. 잘못하지도 않은 저는 이렇게 죽도록 힘든데, 잘못을 저지른 인간들은 아무런 법의 제재도 받지 않고 밝은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갔다. 불공평한 일이었다.
“씨발 새끼. 하필이면 거기서 고기를 처먹을 게 뭐람. 입은 존나 까다로워서.”
뒤로 이진언은 변했다. 복수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난 잘못 없어.
당시 이진언을 살린 생각이었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니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 위한 준비는 수월했다. 타인과 대화하고 생활하는 것에 스스럼없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한 번씩 가해자들과 비슷한 외형이나 사건과 흡사한 장면이 연출되면 패닉처럼 온몸이 굳고는 했지만, 근래 들어 많이 나아졌었다. 확실히 최근 1년 동안 머릿속이 까맣게 변하며 소리가 차단되는 듯한 착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웃고 있더라.”
나오면서 얼핏 본 유재준은 웃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친구로 추정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웃었다.
순간, 이진언은 유재준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제 손에 힘을 꽉 주어 유재준의 목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며 얼굴이 퍼렇게 질려 죽어가는 장면을 내도록 목도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순식간의 살의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이라도 실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장에 도로 돌아가서 유재준의 목을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 못했다. 상상과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마음은 죽이고 싶어 하는데, 몸은 뜻을 이루지 못하게 경직됐다.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씨발, 뭐가 좋다고 웃어, 그 새끼는.”
옆에서 담배 한 개비를 모두 피운 박지운이 다시 불을 붙였다. 적잖이 속이 타는 모양인지 다리를 달달 떨며 입으로는 연신 담배를 빨아 댔다.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졌다. 한눈에도 확연하게 구름이 드리워진 얼굴이었다.
“지운아.”
“어.”
“나, 괜찮지.”
“말이라고.”
“됐어, 그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무수히 많은 날 무던히도 했던 노력을 무위로 만들면 안 된다.
이진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도 속은 울렁거리고 토기가 올라오지만, 그래도 앞을 보고 가려 한다. 왜 제가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속으로 수없이 되뇐다. 정말이기를 바랐다.
“세상 존나 불공평하지 않나? 저 새끼 낯짝도 정말 두껍고. 어떻게 저렇게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다니지?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
옆에서 연신 박지운이 의문했지만, 이진언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 새끼 안 잡아가고. 벌써 세 개비째 담배를 입에 물며 박지운은 계속 욕을 읊조렸다. 화를 내지 못하는 저를 대신해 내리 화내는 박지운의 태도가 좋았다. 울렁거렸던 속은 그나마 좀 진정됐지만, 순식간의 긴장으로 식은땀이 나던 손은 여즉 허옇게 질렸다.
“가자, 진짜. 재수 옴 붙었다.”
네 개째 담배를 피우고 나서야 박지운이 제안했다. 이진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인지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우우욱-!!!”
그날 밤, 이진언은 단단히 체기가 들었다.
그래, 예민하다면 예민한 성정인데 어째 밤까지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했다. 자려고 누웠다가 어느 순간 역류하는 느낌에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로 튀어가 변기 뚜껑을 열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마자 반 정도 소화된 고기와 채소가 그대로 세상 구경하러 밖으로 나왔다. 옆에서 얌전히 같이 누웠던 김유겸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으으읍--!!”
다가오려는 김유겸에게 손을 휘휘 저어 괜찮다고 말하고는 고개를 더욱 변기에 처박았다. 우우우윽, 위장이 쪼그라들면서 연신 소화 시키지 못한 음식물을 위로 게워냈다. 원래 아래로 내려가야 했던 길을 역주행하는 음식물 때문에 코까지 매웠다. 우우으으윽, 굉장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건더기가 목울대를 스치며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무런 맛도 느끼지 않으면 좋으련만, 혀 깊숙한 곳에서 시큼한 식초 맛과 쓰디쓴 한약 맛이 동시에 감지됐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이제는 숫제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아, 어떡해, 약 사올까요? 약 먹을래요?”
괜찮다고 해도 믿지 않을 김유겸을 알아서 이진언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먹는다고 해도 차도를 보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하면 김유겸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일단은 가능한 데까지는 다 해보게 하고 싶었다. 지금이 단순한 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알지만, 김유겸은 모른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형, 약 먹을 수 있겠어요?”
아주 늦은 밤은 아니었던지라 다행히 김유겸은 약을 구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은 채 15분이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이진언의 위는 텅 비어버렸다. 박지운과 함께 먹은 고기를 비롯해 점심은 물론이요, 아침까지 죄 다 식도를 거슬러 올라와 세상 구경하는 중이었다. 제가 원래 소화가 느리다는 사실을 인지야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은 언제나 별로였다.
“으읍-!”
“아, 진짜….”
약을 먹으려고 하는데도 연속으로 올라오는 구역질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김유겸만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도대체 박지운 선배랑 뭘 먹어서 이러는 거냐고 애꿎은 박지운만 원망했다. 허락만 한다면 박지운에게 당장 전화 걸어서 욕을 한바탕하고 싶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야.”
얼굴에 내내 우울이 드리워진 김유겸의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평소에도 아래로 내려간 김유겸의 눈꼬리가 더욱 처졌다. 늘 저를 볼 때면 방싯 올라갔던 광대가 평상시보다 아래로 내려간 거 같다고 생각하며 이진언은 다짐했다. 괜찮다. 괜찮았다. 나는 반드시 괜찮아야만 했다. 어찌 버텨왔는데. 어떻게 견뎌냈는데. 이제 와 무너질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동원하든 버텨내야만 했다.
“나는 괜찮을 거야.”
“…형.”
괜찮을 거라고 읊조리며 이진언이 품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이가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품을 파고든 이진언의 체온이 너무나 연약했다. 마치 후 하고 불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빛나는 촛불인 것만 같아서 김유겸은 이진언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척하니 보기에도 가늘어 보이는 몸을 소유했지만, 김유겸은 안다. 이진언을 실제로 만져보면 절대 가냘프지 않다는 사실은. 그런데 오늘은 왜 이토록 연약하며 여린지 모르겠다. 이대로 손에 힘을 주면 바삭 바스러질 것 같아서 마음대로 힘을 주지도 못하겠다.
“괜찮아야 해.”
눈을 감고 품 안에서 웅얼거리듯 하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형,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말 못 할 일이에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어딘가에서 또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상처 입고 온 것인지 걱정돼서 죽을 거 같다. 아는 척해도 되는지, 아는 척한 뒤에 이진언이 상처받지나 않을지, 무엇에도 확신이 없었다. 대신에 김유겸은 축 늘어진 이진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더는 무엇도 우리를 해치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
“얼굴이 안 좋다?”
“선배.”
“어.”
다음날, 이진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 되었다. 안심되는 한편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이 간밤에 그런 반응을 보였나 궁금해졌다. 이진언의 전필 시험을 마지막으로 학교는 방학에 돌입했다. 전처럼 등교를 위해서라며 밤에 함께할 핑계가 사라져 일단 김유겸 자취방을 나왔다. 이진언은 하등 아쉽지 않다는 태도로 김유겸을 배웅했다. 다른 때였다면 이진언의 태도가 서운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진언의 집을 나오자마자 박지운에게 전화했다. 박지운은 흔쾌히 김유겸의 청을 수락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죠.”
“…….”
얼굴을 보자마자 안부 인사 대신 나온 말에 타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뜨거운 햇볕을 뒤로 한 채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만난 김유겸의 얼굴이 워낙에 죽상인 탓이었다. 예민한 성정의 이진언을 알아서 간밤에 또 뭔 일이 발생했구나만 짐작했다.
“토하디?”
“네, 밤새요.”
약을 먹어도 효과는 미비했다. 조금 진정되려고 하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옆에서 같이 머물던 김유겸도 덩달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배 속에 들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서 나중에는 신물도 안 나왔다. 웩웩 변기를 잡고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게워내려 하는 모습에 왜인지 이질감이 들었다. 이진언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해서 묻지 않았지만, 김유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역시나.”
“뭔데요.”
재촉하듯 나오는 건방진 말투에도 박지운은 지적하지 않았다. 우울한 기운을 잔뜩 풍기는 김유겸의 모습에 지적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진언이 휘청이면 김유겸도 같이 휘둘리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정도를 예측하지 못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어제 벌레를 만났거든.”
“…….”
“이진언을 짓밟았던 새끼를.”
벌레를 만났다는 말에서 누구인지 대충 예상됐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일은 박지운이 쐐기를 박으며 마무리했다. 김유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금니를 짓씹었다. 아니기를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을 때의 대비책 같은 건 모른다. 누구도 그런 행동 지침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오롯이 김유겸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당사자 다음으로 지금이 아팠다. 도대체 이진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 친한 놈도 아니었어. 계획하고 그 지랄한 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날 있기 며칠 전부터 진언이한테 사근사근하게 굴더라고. 그 새끼 얼굴은 좀 반반하게 생겨서 인기가 좀 있었거든. 그런 애가 지한테 사근사근하게 구니까 진언이도 마음이 풀어진 거지. 원래는 철벽 엄청 치는 애인데.”
한 번도 김유겸은 이진언이 당해야만 했던 일이 어떤 경위로 발생하였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리라 상상하지 않았다. 알고 싶었지만, 그건 이진언의 상처라서 알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박지운이 그때 일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증인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사건의 전말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었다.
불손한 짓이다.
“두 명이 망보고, 세 명이서 그랬어. 내가 갔을 때는 한창 일이 벌어지던 중이었고. 내가 등장하자마자 겁먹은 놈들이 튀었어. 진짜 같잖은 일이지.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진언, 그때는 더 작았거든. 진짜 내 가슴까지밖에 안 왔어.”
박지운이 착잡하다는 듯 말했다.
‘원래 남자들은 남 내리깎으면서 지가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습성의 동물이니까.’
언젠가 이진언이 정의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이진언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었을까.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그때 이진언의 말은 분명 경험담이었다. 그것도 뼈아픈 경험담. 김유겸은 차라리 이진언이 이런 일을 겪지 않고 경험담을 충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학교에서도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던 거, 진언이네 부모님이 펄펄 뛰어서 겨우 고소했어, 그때.”
“하지만 형은,”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원인이라는 건 쉽게 유추했다. 아직 이 나라에서 강간 사건은 가해자가 잘못했다는 인식보다는 피해자가 꼬리 쳤다는 편견이 팽배했다. 쉽게 정의하는 그들의 잇속에서 피해자는 또 피 흘리며 죽어가는데 말이다. 김유겸은 이것이 상당히 불공정하다고 인지한다.
“처음에는 강경했던 부모님도 시간에는 장사 없으셨던 거지. 때마침 그때 아버지 사업이 안 좋아지기도 했고.”
“혹시, 그거….”
그 새끼들이 수 쓴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김유겸이 말을 다 잇지 못했어도 정확하게 알아들은 박지운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이런 게 바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상황인가 싶었다.
“합의했어. 그런 사건인데도 합의가 되더라. 집안 분위기 말도 못 하게 참혹했고, 나도 쟤가 과연 살 생각이 있을까 싶었고.”
지금도 작은 이진언은 그때는 더 작았다. 작은 저 아이가 과연 이토록 큰일을 이겨낼까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힘겨운 삶을 투쟁하던 이진언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릴까 봐 모두 조마조마했다. 어떤 누구는 놓을 거면 빨리 놓으라고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진언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보란 듯이 살았다. 비록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두 발을 딛고 섰다. 자력으로 생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잘 살려고 했어, 진언이는. 모두에게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
어떤 사람은 공으로 주어지는 일을 이진언은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가졌다. 엄청난 노력의 산물로 얻어진 이 생(生)이 그래서 소중했다.
“잘살고 있었는데, 씨발, 어제 본 거지. 그 새끼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이진언은 앞으로도 쭉 잘 살았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라며 아픈 기억을 추억으로 묻고 김유겸 곁에서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직 환하게 웃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명 앞으로 두 사람이 더 함께하면 울던 날보다 웃는 날이 훨씬 더 많아지리라는 게 자명했다. 솔직히 말로만 하지 않았지 김유겸도 그런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대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유재준은 등장만으로도 파괴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았다.
“집에 돈이 존나게 많아서 대학교도 기부 입학했거든, 그 새끼. 야, 아이러니한 게 뭔 줄 아냐. 진언이가 이 소식 듣고 세상으로 나왔다는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숨어야 하냐며. 그래서 난 이제 괜찮겠구나 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을 수가 없는데. 애가 겉으로 웃는다고 해서 속까지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데.”
숨기는 게 능숙하다, 이진언은. 김유겸은 다시 한번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걔 고등학교 때만 해도 통통했거든. 사건 발생하고 나서 한동안 먹은 거 다 게워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거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꽤 오래 걸렸거든. 이제 겨우 밥 좀 먹나 했는데 또 이 지랄이야.”
박지운의 한탄에 김유겸은 왜 그동안 이진언이 먹는 것에 취미를 두지 않았는지 알아차렸다. 짧은 시간에 든 습관은 생활 패턴 전체를 바꿔놓기도 했다. 박지운은 이제 이진언의 섭식 장애가 멈췄다고 했지만, 사실은 지금도 장애를 겪는 중일지도 몰랐다. 안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는 이진언의 성격에서 유추하자면 충분히 그럴듯했다.
“네가 옆에서 잘 좀 돌봐줘.”
박지운이 부탁했다. 김유겸은 기운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연 지금의 이진언에게 자신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생성됐다. 이진언의 성격을 잘 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왜 자신에게 발설하지 않았는지도 알겠다. 안다는 것은 머리의 영역이었고, 따라서 가슴은 다른 말을 한다. 서운하다고 한다. 왜 이런 큰일이 발생했는데도 자신에게 기대주지 않느냐고 원망한다.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그랬다.
“……네.”
부탁에 대한 대답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과연 지켜질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터덜터덜 걷는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입술을 곱씹게 됐다. 정말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이 자꾸만 축 처졌다. 자신이 이진언에게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왜 이진언만 이처럼 힘든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밝게 웃기만 바랐는데.
자신의 바람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 현실이 너무나 냉담했다.
“…유겸아?”
원래라면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맞았다. 이진언은 삼일 연속 외박을 불허했다. 불만했지만 그래도 이진언이 정한 룰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김유겸이었다. 오늘은 힘들겠다. 박지운과 헤어진 뒤 발걸음은 절로 이진언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이진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꼭 죽을 것만 같아서.
“얼굴이 왜 그래?”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반나절 만에 무슨 애 얼굴이 반쪽이 됐다. 어제 밤새도록 토악질해 댄 쪽은 저였는데, 누가 보면 김유겸이 더운 여름에 식중독에 걸린 줄 알 정도였다.
“형.”
“응?”
“아팠어요?”
“…….”
“나는 아파요.”
무작정 보고 싶어 찾아간 집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의 표정을 본 순간 김유겸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 자신보다 힘든 사람이 이진언이라고 판단해 애써 눈 끝에 힘을 줘 눈물을 참고는 눈앞의 작은 몸을 확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강한 힘으로 꽉 끌어안자 이진언이 아야, 하는 소리를 냈지만, 김유겸은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이 품에 들어온 이 작은 체온이 아프지 않기를 소원했다.
“나는 당신이 아파요.”
아프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말 그대로 너무 아팠다. 가슴이 찢어지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알게 했다. 그래서 미웠다. 행복만 해도 부족한데 왜 이런 가슴 아픔을 알게 하는지 원망도 들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너무 사랑했다. 가슴이 시리도록 사랑했다.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빌었다. 제발 더는 이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대신 아플 테니까, 이 사람은 이제 그만 아프게 해주세요.
“미안.”
느닷없이 네가 아프다는 말에도 이진언은 가타부타 부언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저를 꽉 끌어안은 김유겸의 허리를 둘러 안으며 사과할 뿐이었다. 이진언이 사과할 일이 아닌데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서 괜히 송구해졌다. 평소와 같이 투정이나 부릴걸. 괜한 짓 해서 엄한 사람 마음 불편하게 했다.
“사과하지 말아요. 형이 잘못한 일 아니니까.”
“응, 그래도 미안.”
“사과하지 말라니까요….”
사과하지 말라니까 기어코 사과하는 이진언의 모습에 김유겸은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정말이지 말도 드럽게 안 들어…. 괜히 타박했지만, 목소리는 짜증이 섞였다기보다는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응, 그것도 미안. 다시 한번 또 사과하는 이진언의 태도에 김유겸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동안 고집 세다는 말 실감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좀 알겠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괜찮아질 거야.”
그동안 열심히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말을 또다시 읊조렸다. 이 말은 주문이었다. 반드시 괜찮아지고 말겠다는 다짐이다.
“안 괜찮아도 돼요.”
“…어?”
“아파도 돼요. 울어도 돼요. 소리쳐도 되고, 욕해도 돼요. 형은 그래도 돼.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
다정한 건 나쁘다. 이진언은 지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김유겸의 다정함이 좋았는데, 지금은 좀 나쁜 거 같다. 저 다정한 말에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이 증거였다.
“진언아.”
커다란 손이 이진언의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마치 사람들이 던지는 모진 돌팔매질을 내가 대신 맞아주겠다는 듯,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보호해 주겠다는 듯.
“괜찮지 않아도 되니까,”
이진언은 눈을 꼭 감았다. 김유겸의 품을 파고들었다. 지금은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눈앞에서 저를 바라보며 다정을 약속하는 김유겸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꼴사납게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김유겸은 쌍수 들며 환영할 일이었지만, 이건 이진언 자존심의 문제다. 아니 사실은, 자존심이라기보다는 김유겸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아프지만 마.”
행복만 하자, 우리.
원하는 게 크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바라는 것은 작고 소박했다.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서로만 보면 행복한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으니 사실은 그저 얼굴만 보고 웃고만 싶었다. 같이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이 작은 마음까지도 바라면 안 된다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고 우리만 있으면 된다는데. 그것만 바란다는데. 이것조차 사치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로 너무했다.
“…응.”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 이는 김유겸이 처음이었다. 아플 때는 앓아야 한다. 참고 인내하고 살아봤자 스스로를 좀 먹을 뿐이다. 현시까지는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김유겸이 허락했다. 제 인생에서 김유겸이 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겠냐 싶었던 초반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정말로 김유겸이 제 안에서 엄청나게 크게 자리했다. 제 온 마음과 몸을 서서히 지배해간다. 더는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정말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고마운 것투성이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진언은 김유겸이 고마웠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저 그런 마음이라 치부했던 지난날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을 정도였다. 도대체가 끝이 보이지 않도록 무한한 김유겸의 마음에 빠져 익사할 것만 같았다. 숨을 쉬지 못하도록 퍼부어지는 마음에 눈을 감고 빠져 죽고만 싶었다.
“사랑해.”
“네.”
“…….”
“……네?!?!”
이진언의 말에 긍정의 답을 하는 건 언제나 김유겸의 몫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진언이 무슨 말을 하든 네, 라고 대답하는 게 습관 돼서 무작정 똑같이 말하고 봤다. 곧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이진언이 한 말이 뒤늦게 소화된 탓이었다.
“혀, 형, 지금 뭐라고……?!?!”
“두 번 말 안 해.”
“아~ 형!!! 나 제대로 못 들었단 말이에요!! 이러는 게 어딨어!!!!”
김유겸이 포효했지만, 이진언은 굳건했다. 외려 풋, 웃으며 절규하는 김유겸이 귀엽다는 얼굴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요~! 김유겸이 졸랐지만, 이진언은 끄떡없었다. 김유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외려 그게 더 귀여웠던지라 이진언은 그냥 피식 웃었다.
“포기해.”
“아, 아아아아아~!!!!”
조금 전까지 심각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두 사람 곁을 맴도는 공기가 상쾌해졌다. 고거 제대로 못 들었다고 좌절하는 시늉하는 김유겸을 보면서 이진언은 연신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어제 느꼈던 불안감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유겸아, 네가 내게 주는 의미를 너는 모르겠지.
다른 때였다면 어제의 일로 멘붕 돼서 또다시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오기 아직 일렀다며 안으로 파고들어 예전 그때처럼 한없이 두려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변했을까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김유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제 마음가짐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오래오래 옆에 있으라고.”
“뭐라고요?”
“두 번 말 안 한다니까?”
“아, 진짜 너무해!!!”
뜻하지 않은 애교를 피워오는 김유겸을 보며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인데, 이럴 때면 영락없이 소년이 된다. 자신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달라고 들이미는 강아지와 같은 몸짓을 보인다. 그게 좋아서 연신 손을 놀리면 얼굴 가득 미소를 피워낸다. 표정을 꽃으로 비유한다면 지금 김유겸은 한껏 개화해 화사함이 절정에 이룬 시점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둘은 여즉 현관문 앞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작은 몸을 김유겸이 덥석 끌어안은 뒤 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삼일 연속은 안 된다는 이진언의 룰 때문에라도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곧이어 들리는 이진언의 목소리에 반짝 김유겸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그만 자자.”
“여기서요?”
“내쫓을까.”
“아니요, 싫어요. 오늘은 형 옆에 꼭 붙어 잘 건데요?”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네.”
삼일 연속은 안 된다는 규칙이 깨어지는 순간에 환희하며 김유겸은 냉큼 이진언의 뒤를 따라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사실 속으로는 오늘 혼자 재우고 싶지 않았으니 먼저 손 내밀어 준 이진언이 고마울 뿐이었다. 가끔 현재처럼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먼저 무언가를 제안해 줄 때면 말로 표현하지 않아 그렇지 이진언이 정말 죽도록 사랑스러웠다. 어디 내놓아도 절대 뒤지지 않을 사랑스러움을 보유한 이 사람을 유린한 작자들에게로 살의가 들끓을 만큼.
“잘 자요.”
자연스럽게 씻고 이불을 펴고 누웠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되돌아오는 화답은 없었지만 괜찮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맡고 같은 숨을 쉬며 잠드는 지금이 퍽 좋았다. 앞으로도 내내 이런 공간에서 같이 하기를 소원했다. 더는 저 사람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부디 자신으로 이진언이 만족하기를, 손으로 빌고 또 빌었다. 온통 진심인 마음이었다.
순수하고 무구해서 절대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