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녕하세요, 선배.”
“…….”
갑자기 누군가가 인사해오는 상황은 익숙하다. 상대가 아는 얼굴이든 모르는 얼굴이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오늘도 다른 날과 똑같이 행동하면 됐다. 머리로는 분명 인지한 상황이지만, 어째서인지 행동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눈앞의 얼굴이 익숙한 까닭이었다. 익숙하다고 하여 친분이 두텁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근래에 다른 이들보다 신경 쓴 인물은 확실하다.
“유겸이한테 말 전달해 들었는데, 날짜를 모르겠더라고요.”
친구는 유유상종이라고 하던가. 이 말 하면 절대 친구 아니라고 격하게 반응하며 부정할 김유겸을 알지만, 이진언의 안에서 이 사람은 김유겸의 친구라고 결론 난 지 오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허락도 없이 제 앞자리에 앉은 행위를 가만히 지켜볼 리가 만무하다.
“아, 선배 제 이름 모르시죠. 전 성운이에요, 정성운.”
“…….”
통성명하는 정성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이진언은 필기하던 손을 멈췄다. 지금 이곳은 중도도 아니고 학교 앞 스벅도 아니다. 김유겸과 걷다가 우연히 분위기 좋고 맛 좋은 커피의 카페를 발견하고 툭하면 드나들었다. 학우들의 인적이 뜸한 곳이라 어느새 두 사람의 비밀 데이트 장소처럼 되어버린 곳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금 이진언이 앉은 곳은 출입구를 등져서 이곳에 사람이 자리 잡았다는 사전 정보를 득하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지금 저에게 반갑게 인사해오는 정성운이 고와 보일 리 만무했다.
“저번에 우산 빌려주신 거 진짜로 고마웠거든요. 그래서 인사하고 싶었,”
“여기 어떻게 알았어.”
이진언의 목소리는 낮다. 특별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목소리로 무게 잡아야 할 때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저음을 소유하게 됐다. 어디를 어떻게 들어도 경박하거나 천박하지 않은 소리는 청자로 하여금 상대의 말소리에 집중하게 하였고, 작은 목소리로 제 의견을 전달하는 이진언의 단호한 태도는 매우 강단했다. 사람들은 이런 이진언의 목소리와 태도에 매료되어 웬만해서는 그이가 하자는 대로 했다. 김유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음, 왜인지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요.”
“…….”
선배가 경고의 의미로 행동의 연유를 묻는 목소리에 정성운 답을 회피했다. 이진언의 오른쪽 눈썹이 까딱였다. 이진언은 현시와 같은 상황을 제법 많이 경험했다. 상대가 무슨 감정을 품고 저에게 다가오던 이진언이 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모두가 본인들 마음대로 행동했고, 강요했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던 일이 반복되려는 기미를 보이자 자그마하게 한숨이 나왔다. 김유겸의 친구라고 판단했으니 웬만해서는 충돌을 피하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김유겸한테 전달해.”
“몇 번이나 그러려고 했는데 전달 안 된 거 같아서요.”
“그래서. 직접 부딪치는 게 낫겠다고.”
“유겸이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러시겠죠?”
“…….”
정성운의 협박과도 같은 말에 이번에 이진언은 허리를 느긋하게 뒤로 젖히고는 팔을 들어 올려 팔짱 꼈다. 얼굴에는 너 참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김유겸을 놓고 협상이라도 하려는 건가. 협상할 게 뭐가 있나 싶다. 협박할 거리가 그렇게도 없나 싶어서 피식하니 조소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이진언이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정성운은 웃었다. 웃으니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다. 실음과 애들은 실력이 아니라 얼굴 보고 뽑나. 이진언은 혀를 쯧 찼다. 알이 두꺼운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지만, 정성운의 얼굴이 상당히 잘생긴 편이라는 걸 알겠다. 그런 애가 저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얻기 쉽지 않을걸.”
단단하게 꼬았던 팔짱을 풀고 뒤로 잔뜩 젖혔던 허리도 앞으로 숙이고 중지했던 필기도 재기했다. 눈앞의 정성운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이진언의 행동에 기분 나빠했을 텐데 정성운은 어찌 된 이유인지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치 네가 지금처럼 행동해도 본인은 괜찮다는 듯 외려 예견했다는 태도였다.
“뭐 얻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선배를 알고 싶어서 그렇지.”
“방법이 상당히 악질적이야.”
“…….”
“그리고 반말하지 마라.”
필기를 연속하며 하는 말이 무덤한 듯하지만 날카로웠다. 김유겸의 친구라고 인식해 살갑게 대해주려 했던 태도는 어느새 높다란 장벽에 가로막혔다. 친구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저에게 적의를 지닌 채 다가오는 사람에게까지 호의를 베풀 정도로 이진언은 호인이 못됐다. 김유겸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이진언은 달랐다. 제 안에서 정한 수위와 선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위반되면 바로 아웃이었다. 어찌 보면 냉혹하고 냉정하다고 할 법한 이 기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김유겸이 유일했다. 심지어 박지운도 이 기준의 평가를 받는다.
“식사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어.”
뭐가 뒤틀려서 저에게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장단 맞춰 줘야 했다. 이진언은 성격상 지금과 같은 일을 경험한다고 해도 김유겸에게 미주알고주알 보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정성운도 이진언도, 심지어 김유겸도 인지했다. 그래서 이진언은 더 지금 정성운과의 만남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믿는다. 김유겸이 제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음, 봐서요.”
이진언의 질문 아닌 강요를 정성운은 어물쩍 넘어갔다. 이진언의 오른쪽 눈썹이 더욱 위로 올라갔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진언이 지닌 인맥이라는 인맥을 모두 동원해 정성운의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망칠 심산 같았다. 정말은 김유겸을 생각해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지금 얼굴은 정말 단단히 화가 났다. 평소에는 매사 평온해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태산의 단단한 바위 같던 사람이 김유겸이 걸린 상황에서는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활화산 같은 반응을 보이니 그것만으로도 정성운은 이진언을 건드린 보람이 느껴지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악취미구나, 너.”
공부하기를 포기한 이진언이 주변을 정리하면서 평가했다. 정성운은 딱히 코멘트하지 않았다. 노트며 필기구를 챙겨 막무가내로 쑤셔 넣은 이진언은 휙 어깨에 백팩을 멨다. 정성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정성운은 입가에 다소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이진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어느새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한 계절이었다.
***
“야, 네 애인 바람피우더라?”
“엥?”
한 템포 쉬고 다음 곡을 연습하려는데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김유겸의 얼굴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애인이라고 하면 이진언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진언은 바람피울 성격이 못되었다. 그건 누구보다 김유겸이 제일 잘 안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기보다는 원래 이진언의 성격이 그랬다. 바람을 피울 거면 차라리 대놓고 네가 싫어졌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사람이었다, 이진언은.
이진언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급속으로 배 속이 가라앉았다. 오장육부가 화기에 뒤틀리는 느낌이 아니라 차가운 냉기에 사늘하게 침체되는 기분이었다. 손끝에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경직된다. 마치 차가운 빙하 속에 갇힌 사람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현실도 아닌 가정된 상상만으로도 이런 기분이라니, 정말 중증은 중증이다 싶다.
“이진언 선배 말이야. 지금 학교 앞 곱창집에 등장했다는데?”
“오늘? 약속 없다고 했는데.”
“뭐야, 너 선배 스케줄 줄줄이 꿰고 있냐. 으, 좀 징그럽다.”
이진언의 행보를 전해준 동기는 김유겸의 말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진심으로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같이 연주하던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부탁으로 학교 밴드 합주를 도와주러 왔던 김유겸 혼자만 심각한 상황이었다.
“형이 곱창집에 갔다고? 혼자?”
“아니? 성운이 녀석이랑 같이인 모양이던데? 동기가 진언 선배가 너 말고 다른 후배랑 단둘이서 밥 먹는 모습 처음 본다고 신기해하면서 말해주더라.”
“…….”
오늘은 원래 정성운과 합을 맞춰봐야 했다. 중간고사 때 시험을 망친 게 아직도 가슴속에 미안함으로 남은 김유겸이었다. 기말은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만회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합이 중요했고, 정성운과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만나서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그래야 했는데, 웬일로 정성운 쪽에서 약속을 미뤘다. 붕 뜬 시간에 온 부탁을 무시하지 못해서 이진언과의 데이트 약속도 뒤로 밀린 참이었다. 이진언은 데이트 약속이 지연된 것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어, 한 십 분 전쯤? 아 근데 이진언 선배도 대단하지 않냐? 단순히 후배랑 밥 한번 먹는 건데 사람들 이목을 집중,”
“…….”
“…….”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김유겸에 모두들 말을 멈추고 침묵했다.
가볍게 한 농담이었다. 하도 붙어 다녀서 어느새 별명이 오십 년 된 부부라고 다들 놀려댔다. 이진언 앞에서 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니 김유겸 앞에서만 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김유겸은 해당 별명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징그럽다고 동기들은 칭했지만, 안에는 부러움이 함유되었다. 이진언은 학교 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회자되는 유명 인사였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누구든 한번은 친해지고 싶을 법한 인상과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누가 봐도 이진언이 김유겸에게만은 너그러웠으니, 김유겸은 알게 모르게 동기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는 했다.
“…나 먼저 갈게.”
“어어, 그래라.”
다소 심각하게 변한 김유겸의 표정에 밴드원 누구도 나간다는 걸 만류하지 못했다. 옆에서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팍 하고 폭발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일견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일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이진언이 누구와 함께하던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지 못하는 밴드원들만 어리둥절했다.
“…….”
학교 밴드 연습실을 나온 김유겸의 표정은 누가 뭐래도 심각했다. 누가 보면 자신의 권리를 약탈당해 다시 찾아오기 위해 계략을 짜는 줄 알 정도였다. 사실 지금 김유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복잡다단한 계략과는 한참 동떨어진 단순한 계산이었다. 도저히 답을 모르겠는 공식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정성운과 있다고. 이 한 가지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희한하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물론, 이진언이 누구와 밥을 먹든 그건 그이의 자유였다. 성격상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깜빡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성향의 이진언은 왜 제 약속을 타인에게 발설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연인 사이에 놓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얼마 전 이 문제를 가지고 둘은 싸웠다. 아니, 싸웠다고 표현하기는 뭐 하지만 아무튼, 사소한 의견 다툼을 했었다. 그때 잘 풀려서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복병이 나타나 뒤통수를 세차게 내려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 이유가 하등 없는데, 이상하게 그랬다. 가슴이 기분 나쁘게 쿵쾅거린다.
-어디에요?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돼.
정작 무엇을 부정하는지도 모르면서 김유겸은 계속 아니라고 되뇌었다. 확실히 바람은 아니다. 어쩌면 정성운이 이진언만 걸렸다 하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답답해져서 먼저 행동하기로 한 건지도 모른다. 두통이 머리를 옥죈다. 사실 스스로도 왜 이토록 큰 충격을 받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잠깐 누구 만났어.
“…….”
카톡은 즉답이다. 심하게 쿵쾅댔던 가슴이 조금 안정되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건 이진언의 성격이었다.
우선은 이것으로 마음이 진정된다.
-정성운 만난다면서요.
항상 이진언 앞에 서면 예쁘게 말해야지,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지, 하고 다짐했다. 지금은 좀 어렵다. 나쁜 기분과 예감에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는다. 누군가 본다면 이 정도가 뭘 날카롭게 말한 거냐고 핀잔들을 정도의 문체였지만, 확실히 평소 하던 말투보다는 날카로웠고 상대를 추궁하는 어투였다. 나는 모든 걸 이미 인지했으니 어서 빨리 사실을 말하라는 독촉이기도 했다.
♬♪♩♬~
이진언은 답톡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에 전화했다. 조용한 공기를 가로지르며 울리는 벨 소리와 화면 가득 자리한 이진언의 이름에 김유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든지 간에 이진언은 김유겸의 불안을 알아차렸다. 평소에도 카톡보다는 전화를 선호하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과의 약속 자리에서는 전화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가 못내 서운했어도 이진언의 성격을 알아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다른 사람과 함께함에도 전화를 걸었다. 적어도 지금 이진언은 눈앞에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고 해도 네가 우선이라고 간접 대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유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하.”
김유겸은 이진언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전화를 받으면 이진언이 하는 달콤한 말에 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거 같았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하루 종일 달콤한 꿈에 빠지게 하고는 마지막에는 절망의 낭떠러지로 밀었다. 맨몸으로 절벽을 굴러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는데 가까이 다가와 이름을 불렀다. 단지,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었는데, 자신은 아픔을 잊었다. 망각했다. 이름을 불러주는 단순한 행동에 이대로 이 사람에게 농락당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자신에게 이진언이 지니는 의미가 크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 현재 같은 때에 이진언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면 그때처럼 모든 걸 망각하고 또 그이의 뜻대로 하게 된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화낼 거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내고 싶었다. 이진언이 불안한 자신을 알아주고 다정하게 다독여줬으면 좋겠다.
=전화 받아
이진언은 두 번 전화하지 않았다. 길고 긴 벨 소리가 끝난 뒤 보이는 화면의 카톡은 평소와 같은 이진언의 말투였다. 어딘가 다소 강압적이고 명령조인. 화면을 보는 순간 김유겸은 욱했다. 괜히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거 같아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원래 잘 안 우는데, 하여튼 이진언만 관련되면 질투하고 감정이 흐트러지고 눈물이 나려고 한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자신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튀는 기분이었다. 연애에서 감정의 크기를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이럴 때면 부득이하게 상대와 내가 지닌 감정의 크기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겸아 전화 받자
다독이듯이 오는 텍스트가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김유겸의 기분은 더욱 다운이었다. 평소에 지금처럼 다정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더 그랬다. 분명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우리 사이가 왜 지금처럼 불안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전화 안 받고 싶어요.
-형 전화 받으면 나 화 다 풀릴 거 같아.
평소라면 이진언의 기분을 생각해서 화났다고 해도 좀 돌려서 말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게 안 됐다. 이진언에게 마구잡이로 화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시작된 불안인지도 모를 정도로 불안정한 감정이 자꾸만 자신을 뒤흔들었다. 원래가 사랑하면 이런 감정이 뒤따라온다는 사실이야 들어서 인지했지만, 지금은 유난했다. 왜 자꾸 이진언과 관련되면 앞뒤 제대로 된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감정적이 돼서 일을 망치는 모르겠다. 자신의 최대 장점은 그나마 다른 이들은 하지 못한 경험을 많이 해서 어떤 일에도 느긋하고 방관자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받아
=나도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
추가로 들어온 이진언의 답톡에 김유겸은 입술을 삐죽였다. 형이 화낼 게 뭐 있다고.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진언이 자신과 대화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기분은 좀 나아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진언이 대화하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진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이럴 때 대화하려 하지 않고 바로 관계를 단절했다. 지금 이진언이 김유겸과 대화하려 한다는 자체가 타인과 자신을 다르게 대한다는 증거라서 쿵쾅쿵쾅 불안감이 엄습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네.”
읽음 표시가 되자마자 득달같이 전화가 울렸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받았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혹시 화났나 싶었지만, 특별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진언은 이런 일로는 화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디야.
“예대 근처요.”
=갈게. 기다려.
깔끔한 선언이었다. 나도 너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듯, 얼굴 보면 화가 풀릴 거 같다는 어린 애인의 말을 그대로 이행하는 모습이었다. 오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오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살짝 미운 반면에 원래 이런 일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평소보다 월등하게 큰 폭으로 행동하는 게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이진언에게 서운했던 감정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오는 감정의 회오리에 김유겸은 자리에서 주저앉아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와요.
마음 같아서는 빨리 오라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신이 빨리 오라고 하면 이진언은 곧이곧대로 행한다. 그것을 김유겸은 인지했다. 무덤덤하고 무심한 듯 행동하고 말하지만, 이진언의 안에서 자신의 존재는 꽤 크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걷던 길을 자신이 기다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땡볕에 전력 질주할 사람임을 이제는 안다.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이 이진언이 자신을 사랑하는 표현이라고.
김유겸은 통화를 종료하고 얌전히 앉아서 이진언을 기다렸다.
왜인지 어린 왕자의 사막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어릴 때는 사막여우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지금은 달랐다. 정말로 자신이 보고 싶어 온 힘을 다해 달려올 이진언을 안다. 타인과 자신을 다르게 대해준다는 사실도 이미 인지했다. 소중한 사람이 나를 특별취급한다는 사실은 언제고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충만하게 만든다.
빨리 와요.
카톡을 천천히 오라고 했으면서 정작 마음은 빨리 오라 한다. 모순되는 장면이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김유겸은 행복했다. 정말 이대로 여기에 앉아서 이진언을 하루 종일 기다릴 만큼. 정말 딱, 그만큼.
하늘이 서서히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