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 어제 왜 안 왔냐.”
이틀을 이진언 집에서 뒹구느라 수업을 빼먹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필에는 죽어라 목숨 걸던 김유겸이 결석하자 아이들의 걱정이 만연했다. 심지어 담당 교수도 김유겸의 부재에 수업 시간 중 몇 번이나 연락되는 사람 있느냐며 물을 정도였다. 그날 저녁 늦게나마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에 불참했다며 장문의 문자를 발송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또 괜한 일로 또 구설수에 오를 뻔했다.
“좀 아팠어.”
오늘 얼굴 본 작곡가 동기에게 뭐라고 변명할까 싶다가 제일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사실대로 당연히 말 못 하니 딴에는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된 변명을 시전한 셈이다. 다행히 평소에 구축해놓은 이미지가 나쁘지 않아서 작곡가 동기는 김유겸의 새하얀 거짓말을 신뢰했다.
“헐, 설마 그날 이진언 선배랑 같이 가더니 너도 감기 걸렸었냐? 이진언 선배도 어제 수업 불참했다던데.”
자신이야 전필을 제외한 몇몇 수업에 결석한 전적을 보유했다지만 이진언은 달랐다. 어찌 보면 김유겸보다 더 출결에 목숨 걸었다. 그랬던 사람이 자신과의 행위에 빠져들어 수업 하나를 날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이진언의 표정은 볼 만했다. 부재중이 엄청나게 쌓인 핸드폰을 보고 사색이 돼서 김유겸이 다 미안할 정도였다.
천행으로 이진언이 결석한 수업의 교수는 출결보다 과제에 중점을 두었다. 과제야 원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게 해내는 이진언이었으니 괜찮았지만, 박지운의 화를 풀어주는 건 힘들었다.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은 전부 박지운이었는데, 연락 안 되는 친구가 걱정돼 당장 찾아온다는 걸 말리느라 고생했다. 김유겸과 마찬가지로 몸이 좋지 않았다는 말과 진짜 약봉지를 인증해 종내에는 용서받기는 했지만, 지금 와 돌이켜 상기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뭐, 그렇게 됐어.”
이틀이나 이진언의 집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침대에서 보냈다. 그때의 시간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몇 번이나 서로를 안았고, 세기도 힘들 정도로 상대를 사정시켰다. 또한, 그에 버금가게 자신도 사정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원룸은 방문할 때마다 항상 상큼한 향이 감돌았는데, 그때는 어딘가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난무했었다.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돌려 부랴부랴 환기하기는 했지만, 맡기만 해도 아래가 묵직해지며 이상하게 흥분되는 향은 한동안 공기 중에 함유되어 두 사람 곁을 맴돌았다.
“나 선배한테 우산 빌린 거 돌려줘야 하는데.”
비 오는 날 우연찮게 이진언에게 우산을 빌리게 된 작곡가 녀석은 힐끗 김유겸의 얼굴을 일별하며 말을 붙였다. 원하는 바가 너무나 뻔해 속으로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작곡가 녀석이 이진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평가가 달라진 듯했다. 원래도 후배들에게 어려운 이미지였으니 한번 베푼 호의가 크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 줘. 내가 돌려줄게.”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그날 나 때문에 감기 걸린 건지도 모르는데. 이런 건 직접 뵙고 고맙다고 해야지.”
작곡가 동기 녀석의 말에 사실 이진언이 어제 결석한 이유는 감기가 아니라 근육통 때문이라고는 차마 전하지 못했다. 박지운에게 보여줬던 약봉지는 진짜였는데, 내용물은 거짓이었다. 박지운에게는 감기약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근육통과 상처에 바르는 약이었다. 끝을 모르는 욕구에 살을 겹치고 겹친 결과 이진언은 아래의 쓰라림을 호소했었다. 빨갛게 부은 하문이 덧날까 싶을 정도였다. 피가 나지 않은 게 용했다.
“선배 뭐 좋아하셔?”
“어, 커피면 될걸. 아메리카노.”
굳이 안 그래도 된다는데 예의 차리는 동기 녀석의 말에 얼결에 이진언이 좋아하는 음료까지 나와버렸다. 이진언에 관한 이야기만 뭐든지 남보다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답이었다. 재빠르게 뱉어놓고 이걸 왜 내가 알려줘야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말이다.
“아, 그래? 땡큐.”
“…그래.”
뼈아픈 자신의 자책을 모르는 작곡가 동기는 산뜻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해왔다. 건성으로 화답한 김유겸의 어깨는 축 처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기분이 가라앉을 일이 아니었다. 이진언의 친절에 반한 사람이 한 명 추가되었다. 이건 분명 좋은 징조였다. 지금이야 좀 침식됐다고 하지만 가뜩이나 안 좋은 소문이 꼬리처럼 붙어 다녔었는데, 누구라도 하나 호감을 품는다면 분명한 호재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싫다고 말한다.
머리와 마음, 이상과 감성, 이성과 감정이 일치되지 않는 현재가 스스로도 꽤 답답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좋아해야 하는 현상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턱에 걸려 기분이 우울해졌다. 평소에는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하여튼 이진언만 관련되면 자꾸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단둘일 때는 이러한 현상이 당연했고 괜찮았지만, 남들 앞에서까지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지금 작곡가 동기 녀석의 행동에 몰랐어도 좋았을 무언가를 자각하게 돼서 더 심란했다.
“얼굴이 왜 그래?”
어떻게 어떻게 수업을 마치고 이진언을 만났다.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오늘은 학교 근처 스터디 카페에 자리 잡았다. 학교 도서관보다 스터디 카페가 조용하다는 이유를 붙였지만, 사실은 김유겸을 향한 배려였다. 확실히 학교보다 이곳이 둘이 붙어 앉기 좋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평소였으면 들어오자마자 다가와 입술부터 부여잡고 늘어졌을 테지만 지금은 영 기분이 아니올시다였다. 김유겸은 자신에게 닿아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옆으로 흘렸다. 사귄다고 명명하고 나서도 무감한 태도를 보이던 이진언이었으니 이런 사소한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이건 김유겸이 이진언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표출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사실 이진언은 제 사람이라고 인식한 이의 사소한 변화에도 굉장히 민감한 편이었다.
“뭔데.”
어째 하는 짓이 평소와 다른 김유겸의 행동에 이진언은 주었던 시선을 도로 책으로 내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잘못 보면 상대의 행동에 상당히 무관심하다 평할 정도의 평이한 어조였으나, 김유겸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 봤다. 차분한 말투에서 여러 가지 뜻이 읽힌 까닭이었다. 걱정도 엿보였고, 어서 빨리 진실을 발설하라는 독촉도 포함되었다.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 더는 캐묻지 않겠지만, 끝까지 비밀을 고수하다가 자신에게 이진언이 실망할까 봐 거짓을 고하지도 못하는 김유겸이었다.
“저, 그게요….”
‘선배한테 물어봐서 번호 꼭 알려줘야 한다! 진짜로!’
머리에서 자꾸만 동기 녀석의 말이 울린다.
작곡가 동기 녀석은 이진언의 번호를 물었다. 그동안 이진언과 친해지고 싶어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 녀석은 그들과 접근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고맙다고 했다. 당사자는 은혜를 베풀었다고 인식하지 않는데 본인만 신나서 보은하겠다며 설쳤다. 아무래도 어제 감기로 아팠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는데, 그런 녀석에게 이제 와 선배는 내 애인이라서 번호를 알려주기 싫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 기억해요? 지난번에 형이 우산 빌려줬던 동기요.”
“어, 기억나.”
“걔가 형 연락처 알려달라는데요. 밥 한번 사고 싶다고.”
“걔가? 왜.”
직접적 사유는 말 못 하고 허락받지 않고 번호를 알려주는 건 아무래도 좀 꺼려진다고 둥글게 돌려서 거절했지만 알아듣지 못한 동기는 그럼 당사자에게 직접 묻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했다. 작정하고 전하지 말까도 생각해봤지만, 보은하겠다는 애한테까지 벽친다고 이상한 소문날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쨌든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진언의 성격상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을 테니 김유겸의 속만 탔다.
“그날 형이 우선 빌려준 게 고마웠나 봐요. 형 아픈 게 우산 빌려줘서라고 생각하더라구요.”
“아아.”
남의 왜 저에게 뜻밖의 호의를 보이나 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저에게는 별일 아니었지만, 상대방에는 별일이었다. 하기사, 그날 비는 좀 너무 많이 했었다. 우산을 썼다고 해도 집에 도착했을 때 온전하지 않으리라는 게 너무나 훤히 예상될 정도로 굵은 빗줄기였다. 어쩌면 그대로 학교에 머무는 게 최선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는 게 최고였다. 갈등하는 사이 선택지를 준 사람은 이진언이었고, 녀석으로는 충분히 고마울 만했다. 은혜까지는 오버였지만 밥 한번 먹고 싶다는 말이 납득됐다.
“알려줘.”
원인을 알고 나니 겨우 이것 때문에 눈도 안 마주쳤던 건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싱거운 녀석. 저에 관해서 다른 사람과 나누기 싫어하는 마음을 미리 인지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건 또 뭔 신종 지랄인가 해서 의아할 뻔했다.
“…….”
괜히 사람들하고 얽히기 거북해하는 제 성격 때문에 저러는가 싶어서 긍정으로 대답하니 이내 김유겸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입술은 쭉 앞으로 나오고 볼은 빵빵하게 부었다. 완전 삐진 얼굴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공부를 계속하다가 예상한 소리가 안 들려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얼굴 잔뜩 삐진 티를 낸 김유겸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비틀어 나 삐졌으니까 달래주세요, 라고 말하는 꼴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이진언은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팔짱 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상냥하게 물어도 되지만, 왜인지 오늘은 조금 더 골려주고 싶었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쩔쩔매는 김유겸을 알아서 드는 심술궂은 마음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절대 들지 않았을.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회 줬을 때 하는 게 좋을 텐데,”
살짝 웃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평소였다면 이쯤 해서 삐진 티를 소거하고 이랬고 저랬고 그래서 요랬어요, 라며 미주알고주알 자백했을 애가 오늘은 좀 끈질겼다. 혹 어디서 무슨 소리를 또 들어서 저러는가 걱정했지만,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여전해서 심각한 사건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럼 원인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 갔다. 모르기는 몰라도 또 귀여운 생각으로 그럴 게 뻔하니 조금은 즐기고 싶은 마음이다.
“겸아.”
…움찔.
겸아, 라고 호칭하자 김유겸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언제나 이진언이 해주는 애칭에는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반응하던 김유겸이었고, 그런 모습을 이진언은 즐겼다. 매번 겸아라고 부르면 면역되어 무덤덤해질까 봐 부러 평소에는 부르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지금처럼 호명하면 반응이 참 보기 좋았다.
“답 없는 거 나도 알아요.”
“뭐가.”
“형한테 고맙다고 하는 사람한테까지 이런 마음 드는 거 유치하다는 거 나도 안다고요.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게 안 돼요. 나도 내가 미친 거 알아요. 내가 형 진짜 좋아한다는 거 스스로도 되게 잘 알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까지 들 줄은 몰랐어요. 내가 미친 거 같을 정도예요.”
“그러니까, 뭐가.”
비장의 무기는 언제나 잘 통했다. 겸아, 라고 부르자마자 다다다 속사포처럼 안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두서없이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핵심은 파악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다시 궁금해졌다. 유추해보니 삐진 것도 삐진 건데 저 때문에 혼자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 발생한 거 같았다.
“번호 알려주라고 하지 마요.”
“…….”
“질투 나요.”
마지막 말을 마치고 김유겸은 으아아아, 하고 허공에 한 번 포효한 뒤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솔직히 인정하기 싫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이진언이 작곡가 동기 녀석에게 아무 생각 없다는 걸 알아도 속은 질투로 활활 불탔다. 이진언이 괜히 원망스럽다가, 이진언이 무슨 잘못이냐, 싶은 마음이었다가, 아니 거기서 왜 친절을 베풀어서!! 라면서 무한 루트로 생각이 반복됐다. 원래가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러한 사실에 원망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엄청난 불평불만을 생성하게 했다.
“알아요, 저 지금 엄청 꼴사납다는 거.”
책상에 처박은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이진언이 이런 자신에게 실망해서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볼까 봐 겁난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보다 원망은 좀 덜해졌지만, 여즉 속상한 채였다. 이진언이 무고하다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속 좁은 자신 탓이다. 이 감정은 결코 상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는 의식하지만, 마음은 다른 말을 했다. 자꾸만 이진언을 탓한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예뻐서.
나한테만 예쁘지, 좀.
정말은 원망인지 투정인지 모를 마음.
그렇대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좀, 싫었으면 좋겠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짜증 낼 수 있게.
“그게 그렇게 싫었어?”
꼭꼭 숨겨왔던 속마음을 마구잡이로 토해냈더니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해졌다. 차마 낯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하겠는데 가벼운 손짓이 뒤통수에 닿았다. 살살 쓰다듬었다. 책상에 처박은 머리에 닿은 손길은 자애를 띠었다. 네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다 괜찮다고 얼러주는 것만 같았다.
“…나 너무 어리죠.”
처박은 고개를 반대로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심해하리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이진언은 웃는 낯이었다. 뭐가 이진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분위기가 무겁거나 가라앉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싫어졌어요?”
머리를 만지는 손을 만류하고 이번에는 자신의 긴 팔을 쭉 뻗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진언에게 가 닿았다. 제법 길어서 이제는 눈을 찌를 듯이 내려오는 앞머리를 잘 갈무리해 귀 뒤로 꽂아주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를 선호해 앞머리는 길게 기르지는 않는 이진언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긴 머리도 제법 어울렸다.
하기야 자신의 눈에 언제 이진언이 안 예뻤던가.
“아니.”
제 뺨을 간질이는 거 같은 손을 부여잡고 입가로 끌어당겨 와서 손마디에 입 맞추며 이진언이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 지금처럼 하는 응답에 김유겸은 괜히 허리가 저릿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달뜨는 마음에 이진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물리지 않던 김유겸은 책상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허리에도 힘을 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이진언도 방금 치기 어린 행동을 보인 어린 애인을 보는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쵹,
두 입술이 맞닿았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이 아쉽다는 듯, 떨어지자마자 도로 들러붙었다. 순식간에 점화된 화기가 두 사람 주변에 달라붙었다. 이만큼의 열기를 언제 내뿜었던 건지 놀라울 정도로 주변의 열감이 상승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김유겸은 마음 놓고 이진언의 입술을 탐했다. 천천히 일으켰던 상체가 이진언을 완전히 덮어 어느새 의자가 삐거덕 소리를 내며 뒤로 기울어졌다.
“제발 그만 좀 예뻐요.”
맞댄 채로 입술을 놓아주지 않아서 뒤로 넘어갈 뻔했던 의자는 벽과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기우뚱 기울어진 채 자세를 유지했다. 의자가 기울어지거나 말거나 이진언의 입술을 탐하기 급급했던 김유겸이 떨어진 것은 체감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단순히 키스만 하고 떨어지려 했는데 눈치 없는 하체가 서서히 대가리를 들었다. 더 했다가는 여기서 일 칠 것만 같아서 김유겸은 이진언에게 입술을 유리했다.
“나한테만 예쁘라고요.”
완전히 분리되기가 아쉬웠던지 김유겸은 바로 뒤에 놓인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재차 고개 숙여 쪽쪽쪽 이진언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붙였다 떼는 걸 반복한다. 귀찮고 산만해서 그만두라고 할 법도 한데, 이진언은 가만히 앉아서 눈만 찡긋일 뿐, 김유겸의 다소 과하다 싶은 뽀뽀 세례를 그대로 맞았다.
“기분 좀 나아졌어?”
제 얼굴을 거의 침 범벅으로 만들 기세로 뽀뽀를 퍼붓던 김유겸이 조금 진정한 양상을 보이자 이진언이 침착하게 물었다. 손을 들어 김유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저는 화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전달이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겨우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나이 차가 피부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별일 아닌데 흥분해 날뛰는 자신과는 이진언이 너무 침착하게 대응하기 때문인 듯했다. 솔직히 사귀는데 까짓, 질투,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안 됐다. 이진언이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판 싸울 뻔한 주제였다.
본인의 질투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 탓만 하던 아이들의 결말을 잘 안다. 절대 자신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질투는 소유욕을 낳고, 소유욕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이 심해지면 의심증이 발병한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오늘의 일을 심각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질투한다고 인정하지 않았다면 소유욕 때문에 머리가 돌 뻔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이진언의 연락처를 물어오는 동기에게 쌍욕 하고 싶었다. 네가 뭔데 우리 형의 전화번호를 원하느냐고 소리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분명 그럴 의도로 이진언에게 접근하려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화가 났다. 이제 내 사람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진언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때 처음 짜증났던 거 같다.
“저 너무 어리죠, 형.”
질투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부가물이었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분명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냥 한번 픽 웃고 말면 될 만큼 가벼웠다. 질투 때문에 연애가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질투가 사이를 돈독하게 했으면 했지 심각하게 만들지는 않았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사랑해야만 부가물처럼 딸려왔다. 당시에는 그래서 질투라는 감정을 느껴도 사랑의 부속물이라고 치부하며 웃는 게 가능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오늘 발현된 질투는 전처럼 가볍지 않았다. 어둡고 눅눅한 감정이었다. 순간 저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두고 둘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진언의 집에서 이틀을 꼬박 보내지 않았으면 들지 않을 상상이었다. 기존에는 사귄다고 해도 벽치고 몸 사리는 게 보였는데, 섹스를 허락한 날부터 거리가 좁아졌다. 아직 완전하게 닿았다고 하기는 무리였지만, 확실히 좁혀들고 있다. 그게 실감돼서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정말은 저 사람을 품에 안고 다니고만 싶다고.
“글쎄,”
내가 어리냐는 질문에 피식 웃은 이진언의 손이 다가왔다. 조금 전에 김유겸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귀 앞에서 자라는 솜솜이 털 같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장난친다고 확 끌어당기면 눈물 빠지게 아픈 곳이었다.
“별로 그런 생각은 안 들어.”
김유겸이 생각하는 이진언은 대부분 감정에 솔직했다. 상대가 상처받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했다. 이러한 행동은 사실 솔직하다는 평보다는 무관심하다고 정의해야 옳았다. 상대가 저에게 소중하지 않으니 상처받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관계 초반에 자신이 들이댈 때의 이진언은 분명 그랬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요?”
현재의 이진언은 김유겸을 신경 썼다. 제 말에 혹시라도 상대가 상처받을까 걱정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어리냐는 질문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답해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니 잠시 고민하는 빛을 띠었다. 전이었다면 넌 어린 게 맞으니까, 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을 사람이다.
“그냥 너구나, 싶지.”
너는 그렇구나. 이진언의 평가였다. 인정이었다. 제 기준선에 김유겸을 집어넣어 입맛대로 요리하려 하지 않고 모습 그대로 수긍하고 긍정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김유겸은 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건 사실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었다. 이진언은 이런 힘겨운 일을 언제나 가뿐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형 그렇게 너무 봐주면 선 넘을지도 몰라요.”
“선은 이미 애저녁에 넘었어.”
자신의 고민을, 걱정을 한 방에 시원하게 날려주는 이진언의 태도에 김유겸의 얼굴에는 다시 빛이 찾아 들었다. 역시 우리는 이러는 게 어울린다. 심각하게 분위기 잡는 건 아직 이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마냥 즐겁고 싶다. 매 순간마다 자신이 얼마나 이진언에게 반했는지, 깊이가 가늠되지 않을 감정의 늪에 얼마만큼 빠졌는지, 시시때때로 깨닫게 될 때면 문득 두려움이 이는 것도 같다. 매양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을 비웃듯 마음은 점점 깊어져만 같다. 도대체가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진언이라서 괜찮다. 더 빠져도 된다고도 바란다.
사실은 사랑만 하고 싶다.
“그 말 좀 야하당.”
“? 도대체 어디가?”
걱정을 덜었더니 마음이 놓였는지 평소의 김유겸이 되었다. 두 손을 들어 뺨을 감싸며 괜히 수줍은 척 연기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은 실소했다. 쟤는 가수가 아니라 연기자를 했어도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가자.”
예약한 시간이 종료됐다. 마음 편하게 김유겸을 기다리고도 싶었고, 조용히 공부하고도 싶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몸이 편하기는 하겠으나, 마음이 불편했다. 여기저기서 진득하니 달라붙는 시선은 아직 전부 괴멸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신경 쓰지 않았겠으나 김유겸이 걸렸다. 분명 주변 시선을 불편해할 터였다. 서로 좋자고 함께하는 건데 김유겸에게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건 싫었다. 사방에서 저를 물어뜯으려 형형한 빛을 내뿜는 승냥이 떼 가운데로 걸어가는 건 솔직히 저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같이 밥 먹자고 할까.”
“누구요?”
나가자는 말에 자신이 더 신나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겉으로만 대충 쓱 훑어보면 정리정돈은 못 하게 생겨서 의외로 꼼꼼함을 자랑하는 김유겸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얼굴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살면서 겪은 수많은 사람들은 얼굴값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값보다는 첫인상이 들어맞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지만.
“네 친구.”
“아.”
돌연한 제안이 누구를 말하나 싶어서 두 눈을 끔뻑이니 곧 정답이 들렸다. 확실히 둘이서만 연락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었다. 귀한 데이트 시간에 불청객이 낀다는 사실을 애써 지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친하잖아, 둘이.”
원래라면 번호를 알려주고 그러지 않아도 되니 신경 쓰지 말라고 전달하는 게 이진언의 방식이었다. 이진언은 김유겸과 다르게 제 번호가 공공재처럼 돌아다니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아이들도 소수였다. 모두 왜 저장됐는지 고개를 끄떡일 만한 사이였다. 웬만해서는 번호를 더 늘이고 싶어 하지 않음을 미리 알아서 더 전달하기 곤란했다. 그런 이가 자신과 연관된 사람에게 제 룰을 부수며 다른 형식을 제안했다. 사실 이러한 반응을 예측해서 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어….”
작곡가 녀석과는 누군가 친하냐고 묻는다면 답하기는 애매한 사이였다. 중간에 이어 기말까지 함께 실기 평가를 보게 된 질긴 인연이지만, 사적인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카톡이 연동되기는 했지만, 대화는 온통 과제에 관해서였다. 대화라고 하기도 뭐한 짧은 단답형이 주로 오갔고, 그마저도 횟수가 적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말이 오가면 많이 대화했다고 할 법했다.
“안 친해?”
“음, 남들이 봤을 때는 친하다고 할 것도 같네요.”
“낯익은 얼굴이라 친한 줄 알았더니.”
“내 친구인 줄 알고 친절하게 대한 거였어요?”
“아니면. 내가 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 아니 그보다, 그게 친절했어?”
우산을 빌려줬을 때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금세 까먹었던 질문이었다. 제가 친절하다니. 김유겸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절친이라는 박지운에게 나 친절하냐? 라고 묻는다면 이게 어디서 약을 잘못 먹고 헛소리하나 싶은 얼굴로 돌아볼 게 분명한 질문이기도 했다.
“친절했죠. 방긋 웃으며 예쁜 손을 내밀어 우산 건네줬잖아요.”
김유겸의 평가에 이진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쟤 눈에는 제가 어떻게 비치는 걸까 고민됐다. 이건 미화돼도 너무 심각하게 미화돼서 어디서부터 잘못을 지적하고 일일이 수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했다.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다가 여기서 더 말 섞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속이나 잡아.”
투박하게 타박하니 이내 네-!! 하는 맑고 경쾌한 대답이 들렸다. 고민이 해결되니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는 게 눈으로도 확인돼서 정말 못 말릴 녀석이라는 생각에 이진언의 고개는 한시도 얌전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