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화 (20/30)

『구해줘』

-울타리

1.

“아….”

까무룩 들었던 잠이 깬 것은 사방에 희미한 박명이 찾아온 새벽이었다. 간밤의 행위가 적잖은 피곤을 유발해서 정말 자는 동안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숙면했다. 가끔 밤 결에 스며드는 악몽을 꾸기도 했는데, 어째 오늘은 정말 피곤하지 않게 잘 잤다가 깼다. 잠은 잘 잤는데, 깨면서 온몸을 울리는 둔통에 인상이 절로 써졌다. 허리 쪽과 허벅지 안쪽, 종아리 근육,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래에 알싸한 통증이 감지되었다. 잠시 왜 내 몸이 아플까 생각에 잠겼던 이진언은 눈을 떠 바로 앞에 보이는 광경에 원인을 납득했다.

…잘 자네.

눈을 꼭 감고 잠든 김유겸의 얼굴은 평온했다. 꼭 저를 안아야지만 직성이 풀린다는 듯, 허리에 둘러진 손길은 언제나처럼 굳건했다.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모양새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치지 않고 뭐든지 열심인 녀석이다. 이 열심히라는 평가의 일등은 뭐니 뭐니 해도 노래였다.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기만 해도 김유겸이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는지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였다. 제가 일등이 아니라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 말을 들으면 형은 일 순위가 아니라 영 순위라고 주장할 김유겸을 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녀석이라 가끔 걱정되기도 하지만, 너무나 투명하게 마음을 내비쳐와 거절하기도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못난이.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괜히 심술 나서 김유겸의 볼살을 쭉 늘렸다. 잠든 와중에도 볼을 만지는 손길이 아프기는 했는지, 꼭 감은 눈두덩이 위의 굵은 눈썹 머리가 맞붙으려 한다. 인상 쓰면 제법 험한 표정이 된다고 하던데, 이진언은 김유겸이 단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유겸은 그랬다. 마치 자신은 이진언에게 화낼 줄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얼굴을 마주하면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이진언이 몇 번이나 입 닫으라고 턱을 닫아주었을 정도였다.

“…….”

가만히 잠든 김유겸의 얼굴을 구경하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깨어났을 때는 어슴푸름이 주변을 기웃거렸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사방이 완전하게 환해졌다. 보통 때라면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기상해서 저를 깨울 김유겸이었지만, 어젯밤 힘쓴 건 김유겸 쪽이 더해서 당장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게 괜히 기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이진언은 섹스에 편견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표출하는 폭력만 경험했으니 당연했다. 사실 섹스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행위였는데, 어떤 사람과 행하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죽기보다 더한 기억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는 했지만,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약간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론과 실전의 괴리를 정확하게 알려준 이가 다름 아닌 김유겸이라서 행운이었다. 제 고지식한 성격에 다른 이와 이런 경험을 했다면 편견이 더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감소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매번 같이 밤을 보낼 때마다 아침 식사는 김유겸이 담당했다. 특별히 그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김유겸은 새벽에 득달같이 일어나 밥상을 차렸다. 평소의 아침을 상기하다가 이진언은 오늘만큼은 반대가 되어보자 결심했다. 온몸에서 쿡쿡 쑤시는 둔통이 감지되지만 그래도 오늘은 왜인지 제가 김유겸에게 아침을 차려 주고 싶었다. 같이 밤을 보낼 때 단 한 번도 오늘처럼 정신 놓고 잠든 김유겸을 보지 못했었다는 돌연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쯤은 김유겸이 해주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자는 애 깨우지 않게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일어났다. 그러자 펄럭이며 가슴까지 덮었던 이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깊게 잠든 사람은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옆자리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평소에도 조용했던 이진언이 특별히 더 조심해서 움직였으니 원래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해야 하는 게 맞았으나 김유겸은 달랐다. 옆에서 아주 조그마한 동작이 감지되자마자 번개같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정신을 끌어올렸다.

“…나 여기 있어요….”

잘 자던 김유겸이 별안간 몸을 움직였다. 눈도 뜨지 않은 상태에서 팔만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더듬하더니 이내 기어코 이진언의 몸에 닿았다. 손끝에 따듯한 체온이 감지되자 그대로 힘을 줘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굉장히 익숙한 몸짓이었다. 너무나 능숙하게 저를 껴안아 와서 혹시 깼나 자세히 살펴보니 여즉 감은 눈이었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옥타브 저음인 게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건 아닌 거 같았다.

“더 자요….”

낮게 잠긴 목소리가 지금 김유겸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도 여윈잠에 들어 말을 웅얼거리면서 하는 짓은 죄 이진언에 대한 걱정뿐이다. 순간 사라져 서늘해진 옆자리를 더듬다가 이내 찾아든 체온에 안심하며 더 자도 된다 허락한다. 딱히 김유겸 때문에 깬 것은 아니지만 잠든 와중에도 제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행동에 참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작은 행동 하나로 저를 감동시키는 재주가 탁월한 녀석이었다.

“…….”

이진언은 일으키려던 몸을 도로 누운 뒤 김유겸의 품을 파고들었다. 잠결에도 상대방의 부재를 예민하게 캐치하는 몸이니 도로 돌아온 체온에는 어느덧 안식을 취한다. 품에 꼭 맞는 체온이 감지되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띤 김유겸은 다시 도로롱 잠에 빠졌다. 이진언은 말없이 잠든 김유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새근새근한 숨을 내어 쉬며 눈 떴을 때와는 다르게 조용하게 안식에 빠진 얼굴은 평온했다. 지금 김유겸이 느끼는 평온함의 이유가 품에 저를 안아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괜히 온몸이 간지러웠다. 여즉 뼈마디를 울리는 둔통은 여전했지만, 이 통증을 선사한 김유겸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랑받는 기분, 좋은 거구나.

제 몸을 조금 더 바짝 붙이며 이진언도 눈을 감았다. 제 등 뒤를 단단하게 둘러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주는 김유겸의 행동에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섹스 후에 사랑받는 느낌을 알게 되니 정말 마음이 충만해진다. 제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었다.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고 혼자만 간직할 혼자만의 소중한 추억이다.

***

“잘 잤어요?”

이진언이 완전히 일어난 시각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분명 어제 지금 시간대에 김유겸과 얽힌 거 같은데, 정신 들어보니 정말 하루가 꼬박 지났다. 아침에 잠깐 잠에서 깨고 얼마나 푹 잤는지, 온몸을 울리던 격통은 좀 둔해졌다. 아직도 몸 안 어딘가에서 본연의 존재를 피력하기는 하지만, 아침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는 확실히 덜 했다. 이 정도면 저녁때가 되면 원 컨디션을 회복할 듯했다. 평소에 체력 좋다 자신했는데, 섹스 한 번에 뚝 떨어지는 기력이 신기했다. 그만큼 섹스에 많은 기운이 필요하다는 뜻인지 제 몸이 요즘 약해졌다는 뜻인지 헷갈렸다. 뭐, 최근에 평소보다 덜 운동했던 건 사실이었다.

“응.”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는 침대에서 잠시 멍 때렸다. 평소에는 빠릿빠릿했던 사람이 침대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광경을 김유겸은 흥미롭게 관찰했다. 까치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 모양에 어딘가 나사 하나는 풀린 모습이었다. 어젯밤 첫 교합 후 얌전히 잤으면 좋았을 테지만, 한번 욕망이 제대로 풀리자 김유겸은 역시나 얌전하지 못했다.

첫 섹스 후 씻기 위해 욕실에 함께 입장했다가 다시 불이 붙었고, 침대로 이동해서 재차 몸을 섞었다. 평소 체력 좋다고 자신하던 이진언이 힘겨워할 때쯤 자연스럽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들었고, 몇 시간 뒤 잠깐 의식이 깨어날 때 또 한 번 몸을 겹쳤다. 종국에는 밤새도록 서로의 몸을 물고 빨았다는 뜻이 되었는데, 이진언은 그러는 동안 힘들다거나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명색이 첫 섹스가 너무 급했다고 판단한 김유겸이 횟수가 거듭될수록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제대로 느끼도록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밥 먹어요.”

너무 잠을 늘어지게 잤는지 허리가 뻐근하며 감각이 다소 둔화되었다. 멍, 하니 앉아서 앞을 바라보며 정신 차리려 노력하는데, 귓가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더니 쪽, 입 맞추고 되돌아갔다.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전에 행해진 애정표현에 이진언이 읏,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솟아 올리고 앞을 바라보니 김유겸이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품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밥했어?”

밥이라는 소리에 이진언은 퍼뜩 정신 들었다. 집에 먹을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아침에 일어나려 했던 이유도 김유겸에게 밥 먹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재료가 부실해서 근처의 마트를 다녀와야 했다. 식비를 상대에게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제 손으로 장 보려 했는데, 어째 김유겸이 선수 쳤다.

“찌개도 끓였다구요.”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어 다소 잘난 척하는 김유겸을 보고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서 씻고 와요. 제 등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하는 독촉에 이진언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발이 바닥을 짚을 때 찌릿, 허리 쪽에 감전되는 감각이 재생됐지만, 아주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요통은 평소에도 간간이 감지되었던 통증이라서 이제 와 딱히 어젯밤의 일이 원인인 거 같지는 않았다. 어젯밤 행위가 아주 원인이 아니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완전한 요인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김유겸을 원망하지 못한다.

…정말 했네….

다소 불편한 뒤 때문에 뒤뚝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수전을 열어 물을 맞았다. 아무래도 둔통을 감소하자는 생각에 온수를 택했다. 사실은 목욕탕에 가서 온탕에 몸을 푹 담그고 싶지만,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전신거울에 비춘 몸 때문에 안 되겠다. 간밤에 너무 흥분한 김유겸은 이진언의 몸에 잔뜩 흔적을 새겼다. 목에서 내려가 어깨선이 딱 떨어지는 곳까지 죄 씹어놔 붉은 자욱이 만연했다. 할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까 온몸에 자욱한 흔적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모두 옷 입으면 가려질 만한 곳이었다. 확연하게 더워진 낮 온도에 옷 입으면 감춰질 만한 곳만 씹어놔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어서 헛헛한 웃음이 흘렀다.

“이건 무슨 이갈이 하는 강아지도 아니고….”

수전을 열어 뚝뚝 떨어지는 온수로 온몸을 씻고 나서 다시 한번 전신거울로 살핀 몸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손을 들어 김유겸이 흔적한 곳을 꾹꾹 누르니 참 많이도 씹어놨다. 혹시나 뒤에도 그랬나 싶어서 몸을 돌려 비췄더니 아니나 다를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엉덩이며 허벅지 뒤쪽에도 붉은 자국이 만개했다. 이걸 혼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넘겨야 하는 건지 언뜻 판단되지 않아 일단 이진언은 샤워를 마무리했다. 어째 피부에 물이 닿으니 흔적이 더욱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어서 와서 밥 먹어요.”

몸의 흔적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확인하는 동안 좁은 원룸에는 보글보글한 찌개 냄새가 가득 찼다. 요리를 못하겠거니 어림했던 짐작과는 다르게 냄새가 제법 좋았다. 욕실에서 나와 찌개 냄새를 맡고서야 이진언은 제가 꽤 시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만 하루를 침대에서 보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거 어떡할래.”

샤워를 마친 후 나오니 김유겸은 가끔 책상으로도 활용되는 앉은뱅이 상에 찌개와 밥을 올리며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진언이 자리 잡고 앉자 김유겸도 맞은편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식사하기 위해 수저를 들던 이진언의 시선이 문득 제 허벅지에 꽂혔다. 반바지를 입었던 터라 앉으니 밑단이 위로 올라갔는데, 역시나 하얀 허벅지 안쪽에 붉은 기가 잔뜩이었다. 까먹으면 또 말 안 하고 넘어가지 싶었다. 이진언은 막 수저를 찌개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가는 김유겸을 보면서 티셔츠의 목둘레를 쭉 늘려서 안을 보여주었다. 목빗근이 끝나는 지점을 시작으로 어깨뼈 위로 빼곡한 키스 마크가 허공에 노출되었다.

“하하하.”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이는 자신의 흔적에 김유겸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마 자제하고 배려해 저 정도였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면 지금쯤 이진언은 침대에서 앓은 소리만 내야 할지도 몰랐다. 나름 절제했다는 사실을 알아서 더는 타박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았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긴 팔 입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더운데 반 팔 입기 힘들게 됐잖아.”

더한 꾸중을 들을까 봐 슬쩍슬쩍 눈치 보던 김유겸은 수저를 든 이진언이 찌개를 먹기 시작한 모습에서 잔소리가 모두 종료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에 흔적한 자국은 사실 심각하다면 심각한 수준이었으나 이진언은 더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며 다음 야단을 기다리던 김유겸만 뻥찐 상태가 되었다.

“다음번에는 조심할게요.”

아무리 기다려도 더는 꾸지람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김유겸이 은근슬쩍 의견했다. 이진언은 야무지게 손을 놀려 밥을 먹으며 응. 이라고만 대꾸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김유겸은 먹던 수저를 상 위에 가지런히 놓으며 부지런히 식사하는 이진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또 해도 되는 거예요?”

너무나 조심스럽게 다음을 질의하는 김유겸의 얼굴은 무슨 결의를 다지는 무사처럼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쓸데없는 데서 대단한 무엇을 결심한 것처럼 말하는 김유겸의 작태에 이진언은 피식 실소가 흘렀다.

“싫으면 말고.”

“싫다고는 안 했는데요!!!”

싫어할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괜히 무심하게 툭 던지니 이내 돌아오는 반응은 엄청났다. 두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아니라고 항변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수저로 찌개를 헤집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이진언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해명하던 김유겸도 곧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와 조금 전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세상에, 이진언이 이런 농담이라니.

단 한 번도 이진언이 성적인 부분에서 농담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지금이 적잖이 놀라웠다. 어젯밤 분명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역시 싫었나 싶은 생각에 솔직히 좀 시무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생각에 아니라고 쐐기라도 박듯 들려온 농담은 다음을 기약했다. 김유겸의 마음에서 불안이 죄 씻어 나가고 희망이 들어차기 적절했다는 뜻이다. 이진언과 함께하면 인간을 살게 한다는 희망을 계속 맛보았다. 인간이 이렇듯 아주 자그마한 일에도 희망을 찾는 습성의 동물이라는 걸 기존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

엄청난 반응으로 다음을 기대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은 아까부터 실실 새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약삭빠르게 요령 피워도 되는 일에 김유겸은 언제나 항상 정면돌파였다.

지난번 무대만 해도 그랬고, 소문이 돌 때도 그랬다.

대형 기획사 연습생이었던 과거와 현직 아이돌인 절친을 팔아서 학우들의 호기심을 충족해 주며 생활하는 게 누가 봐도 편한 길이었다. 김유겸은 이러한 편한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방법을 택했다. 연습생이었던 과거에서 탈출하려 노력했고, 절친과의 일은 함구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불이익을 묵묵히 인정하며 인내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스물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걸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기대할게.”

이런 아이니, 과거에는 끔찍했던 행위를 반복하고도 이진언은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중간에 잠깐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곧 저를 달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집중했다. 온몸을 쓸어내리던 다정한 손짓, 박아온 뒤 한 템포 쉬었던 강한 몸짓, 행위 내내 곁에서 쏟아 내려졌던 낮고 뜨거웠던 숨결. 모든 상황이 이진언에게는 낯설고 힘들었지만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귓가에 매양 쏟아진 달콤한 목소리 때문인 듯했다. 제 눈에 조금이라도 동요가 깃들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종국에는 이진언도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 갑자기 부담된다.”

섹스한 다음 날 나누는 대화가 이처럼 일상적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다른 사람과 살 부대끼며 산 게 오래되어서 함께 일어나고 밥 먹고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감각을 잊었다. 기존에 김유겸이 하룻밤 머물다 가는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이제 정말로 “동거”의 뜻으로 김유겸의 체류를 허락하게 되었다.

“부담되면 말고.”

“절대 안 되죠.”

좋으면서도 괜히 무심하게 툭 던지는 게 버릇이라는 걸 이미 인지했던지라 부정과 비슷한 말에도 실망하지 않고 받아쳤다. 이런 상황에 이제는 익숙해진 이진언은 더는 부언하지 않았다. 전이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지적했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럴 마음이 안 들었다. 바뀐 게 없을 텐데 묘하게 마음이 태연해졌다. 단순히 섹스했다고 하기에는 분명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지만 나쁘지 않아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기로 한다.

“형, 우리 장 봐야 할 거 같아요.”

아침 겸 점심을 같이 먹고 설거지하려고 일어나는 이진언은 잠깐 허리를 잡고 끙끙댔다. 아파하는 이진언의 모습에 김유겸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아파요? 병원 갈까요? 옆에서 저 대신 끙끙대며 묻는 꼴이 볼 만했다. 아프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서 어젯밤 둘이 뭐 했는지는 망각한 김유겸의 말에 이진언은 웃었다. 병원에 방문해서 섹스 때문에 허리가 아픈데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고 아프다는 제가 아프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김유겸의 행동이 귀여운 탓이었다.

“뭐 먹고 싶은데.”

병원 가야 한다고 난리 치는 김유겸을 진정시키고 안마하는 거로 합의 봤다. 침대에 엎드려 김유겸의 안마를 받으니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가끔 엉뚱한 데를 건드리면 악!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고통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김유겸은 생각보다 꽤 훌륭하게 이진언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어느새 노곤하게 풀린 몸으로 제정신 반 졸음 반으로 누워있는데, 부산하게 원룸을 왔다 갔다 하던 김유겸이 의견했다. 원룸의 냉장고가 작아서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김유겸이 들락거린 이후로는 안을 꽉 차게 채워두었다. 냉장고 크기가 워낙 작아서 꽉 채워도 금방 동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음, 저는 괜찮은데, 형 먹을 게 없어요.”

둘이 자취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밥을 많이 먹게 되었다. 나름 김유겸의 계략이었다. 밖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지만, 홀로 집에 머무는 시간에 분명 아무것도 먹지 않을 애인이 걱정돼서 과감하게 홈 데이트를 많이 단행했다. 적어도 자신이 집에 함께 머무는 동안의 이진언은 끼니를 신경 썼다. 저보다는 남을 위한 배려가 몸에 밴 이진언을 알아서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럼 나중에,”

“나중이라고 하고 안 먹을 거 다 알거든요.”

먹을 일에 관해서 김유겸은 이진언을 믿지 않았다. 목격한 바를 토대로 한 근거가 확실한 판단이었다. 이진언은 식도락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섭취한다는 행위는 영양을 보충한다는 의미일 뿐, 즐거움은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런 사람이 커피는 또 환장해서 마신다는 사실이 조금 분한 것도 같았다.

“적어도 달걀은 사놓자구요.”

김유겸은 식도락의 즐거움을 연습생을 그만두고 알게 되었다. 실제로 보는 것보다 카메라로 보이는 모습이 1.5배는 부어서 나왔다. 입체를 평면으로 전환해서 전송하니 부득이한 부분이었다. 때문에 카메라 테스트나 프로필 촬영할 때 실무자의 눈에 어떻게든 띄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다이어트가 필수적으로 동반됐다. 또래들이 야식이나 간식을 즐길 때 김유겸은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노래하고 춤췄다. 그때는 그게 비참하지 않았다. 목표를 위한 당연한 노력이었다.

“살도 찌면 좋고요.”

노력의 대가가 참패로 돌아와 씁쓸하기는 하지만, 잃은 게 있으면 얻은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마른 몸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아도 되니 먹는 일에 관대해졌다. 워낙 오랜 기간 다이어트했던 버릇이 습관으로 남아 아직도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진언처럼 단순히 영양분을 채우기 위해 식사하지는 않았다. 나름 맛있다고 정평 난 곳을 찾아 방문해서 식도락을 즐겼다. 덕분에 연습생을 할 때보다 살이 조금 올랐는데, 주변 사람들 모두가 지금 모습이 옛날보다 훨씬 낫다고 입 모아 칭찬했다.

“원래 살찌는 체질이 아니야.”

“그래도 쪘으면 좋겠어요.”

“왜?”

흔히들 속설로 마른 사람과 하면 뼈가 부딪쳐 아프다고 했다. 왜 살쪘으면 좋겠냐고 물으면서도 이진언은 속으로 김유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젯밤 섹스했으니 정말 뼈가 부딪쳐 아파서 하는 소리겠거니 혼자 이해했다. 김유겸의 대답이 뭐라든 실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랑 사귀고 형 살찌면 내가 잘하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기쁠 거 같거든요. 살찐다는 건 마음 편하다는 증거니까.”

생긋 웃으며 한다는 소리가 어째 죄다 감동이었다. 살찌는 이유가 비단 그것뿐이냐겠지만, 저런 생각으로 저에게 살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예뻐서 지적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유겸과 교제를 시작하면서 나름 분위기라는 걸 알게 된 이진언이라서 지금은 부언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노력해볼게.”

과거였다면 쑥스러운 마음에 괜한 타박이 나갔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진언은 전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아낌없이 쏟아지는 김유겸의 마음이 예뻐서 마냥 맞춰주기만 해도 분위기는 몽글몽글해졌다. 거부나 부정한 말을 내뱉지 않은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제법 연애하는 티가 났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방을 손쉽게 행복하게 만들 기회인데 걷어차는 어리석은 연인은 되지 않을 작정이었다.

“뭐 뭐 사 올까요.”

말만 하면 주문한 전건을 구매하기라도 할 듯 비장한 얼굴의 김유겸을 보며 이진언은 피식 웃었다. 침대에 엎드려서 안정을 취하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깐 허리 쪽에서 삐끗한 아픔에 인상 쓰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아프다고 마냥 누워있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안 쓰던 근육이 놀라서 온 근육통이라면 차라리 몸을 움직여 고통을 이완하는 방법을 택하겠다.

“달걀 사자며.”

“그럼 일단 달걀 한 판. 장조림도 살까요? 조리해 먹는 것보다는 조리된 걸 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두 사람 중 요리 실력이 더 낫다고 평가할 만한 사람은 당연히 이진언이었지만, 사실 오십보백보였다. 둘 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제대로 맛을 내지 못했다. 그런 음식을 만들어 먹느니 차라리 간단한 인스턴트나 레토르트를 사는 게 나았다. 근처의 대형 마트에서는 간단한 밑반찬도 세일해서 파니 그것도 좀 쟁여두는 게 좋겠다.

“그리고.”

“형 뭐 해 먹는 거 귀찮으면 차라리 만두를 사요.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해도 되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하는 이진언을 힐끗 일별하고는 김유겸은 장 볼 거리를 빼곡하게 메모했다. 신나서 이것저것 다 적어넣기는 했지만, 냉장고에 다 들어갈 양은 아니었다. 스냅백을 쓰고 얇은 후드 집업을 챙겨 입은 이진언은 김유겸의 옆에 앉아서 메모를 힐끗 살폈다. 뭘 많이도 적어놨다. 저걸 다 못 살 텐데. 보관할 곳이 마땅찮았다. 김유겸은 제 냉장고 크기를 언제나 간과한다.

“가요.”

작은 메모지에 살 거리를 빼곡하게도 적은 김유겸은 뿌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머니에 메모지를 잘 넣어두고 이진언의 뒤를 따라 쭐레쭐레 집을 나섰다. 비가 세차게 내려 온 세상을 젖게 했던 어제가 거짓말 같을 정도로 하늘은 쨍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마트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뒷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헐.”

신났던 걸음은 마트의 입구에서 돌연 중단되었다. 살 것을 꼼꼼하게 적어서 주머니에 넣는다고 넣었는데 어디에서 흘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메모지가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를 홀랑 뒤집어서 안을 탈탈 털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김유겸은 거의 울려고 했다. 내가 형을 위해서 이것저것 모두 다 적어왔는데!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표정에는 미안함도 포함이었다.

“아, 완전 망했어.”

주머니를 몇 번이고 뒤져보지만, 메모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진언은 좌절한 김유겸과는 다르게 없어? 하고 무심하게 물었다. 메모지에 뭘 적은 건지 심하게 낙심한 김유겸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솔직히 메모지를 분실했다고 큰일 나지는 않지만, 마트의 입구에서 주머니를 몇 번이나 홀랑 뒤집고도 메모지를 발견하지 못한 김유겸의 어깨는 누가 뭐래도 축 처졌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이진언이 쇼핑하기 전에 뭐라고 한바탕 꾸중이라도 했던 줄 알 정도였다.

“괜찮아. 대충 뭐 뭐 필요한지 알아.”

“아, 그거 때문이 아니라고요….”

이진언은 너무 낙심하지 말라며 위로했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 김유겸이었다. 여기서 뭘 더 위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이진언은 손을 들어 뺨을 갉작거리고는 쇼핑에 집중했다. 생필품이나 재료는 원래 쓰던 것만 쓰고 먹던 것만 먹어서 특별히 호불호가 나뉘지 않았다. 특별히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지도 않았고, 자체 상품도 곧잘 구매했다. 이럴 때는 까다롭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드넓은 마트를 돌며 척척 원하는 물건만 카트에 집어넣는 이진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가격 하나, 품질 하나 따지며 구매하는 사람이 보면 분통 터져 할 정도로 빠른 쇼핑이었다. 물건이나 상품에는 호불호가 불분명한 게 이진언다웠다.

“브랜드 하나 적어놓은 게 있었다구요.”

“물건이 뭔데.”

마트에 들어온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대충 다 구매했다 싶었는지 슬슬 이진언의 발걸음이 느슨해졌다. 제가 원하는 물건은 대충 다 담았으니 이제 김유겸 차례였다. 둘이 지금처럼 마트에서 쇼핑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서로 다른 쇼핑 스타일에 매번 신기해했다.

이진언은 머릿속에서 살 것을 딱 정해서 그것만 골라서 계산하고 끝이었고, 김유겸은 마트 구석구석을 하나부터 열까지 훑다시피 돌면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쓸어 담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필요한 물건은 놓치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는데, 다행히도 옆에서 이진언이 지적해 줘서 재차 방문하는 불상사는 피했다.

서로 쇼핑 스타일이 다르면 한쪽이 다른 쪽에 잔소리하는 양상이 펼쳐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진언은 특별히 김유겸의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뭐 특별하지도 않은 마트에서 마냥 신나서 이곳저곳을 쪼르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스물이 넘어서 동심을 간직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기에 고급 브랜드가 있더라구요.”

“?”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진언의 귓가에 옆에서 누가 들을까 고개 숙인 것도 부족해 손을 들어 입을 가린 김유겸은 나지막이 콘돔이요. 하고 속삭였다. 이 마트에 고급 브랜드가 입점했다는 건 또 언제 조사했대? 입이 딱 벌어지는 사유에 이진언이 다소 구겨진 인상으로 김유겸을 돌아보았다. 약간의 경악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진언의 표정에 김유겸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은 뻔뻔해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걸 계산할 생각이었어? 여기서? 사람들이 다 보는데?”

“뭐 어때요. 어차피 무인 계산대인데.”

진심으로 뭐 어떠냐는 얼굴의 김유겸을 보면서 이진언은 피식 실소했다. 나쁜 짓 하는 건 분명 아니지만, 확실히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 억눌린 건 사실이었다. 분명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서는 필요한 필수품인데, 저부터도 콘돔을 대형매장에서 구매하는 모양새가 딱히 좋게 생각되지 않으니 말 다 했다. 게다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오늘 계산은 김유겸이 할 작정이었다는 게 짐작돼 헛웃음이 나왔다.

이곳은 자취방에서 멀지 않은 마트였고, 그런 곳에서 콘돔을 산다는 행위에 분명 거부감을 느낄 이진언이었다. 이진언에게 짐을 주지 않는 김유겸이었으니, 콘돔을 포함한 쇼핑물건의 계산은 자신이 하려 했다. 무인 계산대라고 하여도 주변 눈을 아예 무시하지는 못할 테니 자신이 방패막이가 될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가 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제 생활필수품인데 김유겸이 계산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한 거 같아서 재빠르게 지출 준비를 마쳤는데, 역시나 김유겸이 한 수 빨랐다. 카트에서 물건을 내려놓고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계산할 때까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텅텅 빈 냉장고를 가득 채울 생각에 물건은 다소 많아졌다. 쓰레기봉투 겸용 봉투에 물건을 담아 넣는 김유겸의 손짓은 여상했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야한 행위를 준비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읏챠, 제법 묵직한 봉투를 양손으로 하나씩 들며 김유겸은 계속해서 의견했다. 상비용으로 사놓으라는 말에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카트에 안착한 달걀 한 판만 이진언의 몫이 되었다.

“그야, 그렇지만.”

척하니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걷는 몸짓에 괜히 미안해졌다. 김유겸의 말마따나 이상한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가 이상했다.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서는 당연한 물품이었다. 마트에서 팔 정도로 대중화된 물건이기도 했다. 정말은 누가 음란 마귀가 쓰였는지 모르겠다.

“하나 줘.”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가는 모습에 괜히 양심에 찔렸다. 일어나자마자 절뚝였고, 침대에서 내려올 때 허리 쪽이 짜릿했으며, 마사지 받을 정도로 근육통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김유겸 혼자서 물건을 모두 들게 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됐다. 더군다나 양손 묵직한 김유겸에 비해 저는 달랑 달걀 한 판이었다. 이 정도는 든 거 같지도 않아서 앞서가는 김유겸에게 짐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자요.”

“?”

이내 건네진 건 짐이 아니라 김유겸의 손이었다. 양손으로 들었던 짐을 한쪽으로 몰아 들고는 자유로워진 다른 손은 이진언과 맞잡았다. 두 개의 짐을 든 쪽 어깨가 축 내려갔으면서도 마주 잡은 손에는 힘을 주었다. 이진언이 이거 말고 짐을 달라고 해도 절대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내가 정말 못 살겠다.”

오늘따라 능글맞게 구는 김유겸의 행동에 이진언은 그냥 픽 웃었다. 마트와 집이 가까웠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길거리에서 또 짐을 주네 마네로 입씨름할 뻔했다. 아니, 확실히 어제만 했다면 절대로 이런 장면을 가만히 보기만 하지 않았을 터였다. 부득불 달라고 해서 기어코 김유겸의 고운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제와 달라진 오늘 제 태도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니 그냥 넘어가자 싶었다.

“냉장고를 꽉 채웠으니까 이제 밥 잘 먹겠지.”

마트에서 돌아와 한 템포 쉬었다. 빈손으로도 더운 날씨였는데,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걸었으니 힘든 건 당연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헉헉대는 김유겸을 위해 차가운 생수 하나를 꺼내주었다. 티셔츠를 펄럭이며 더워해서 에어컨을 틀어줄까 했다가, 그거까지는 너무 오버하는 거 같아서 관두었다. 다행히 김유겸은 차가운 생수 하나로 열기를 식혔다.

“나 사육하려고.”

왜 마트에서 선수쳐 결제하나 했는데 이런 꿍꿍이 때문이었나. 이진언의 성격상 애인이 사준 물건을 소홀히 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이진언의 성격을 알아서 김유겸은 마트에서 자신이 대신 결제했다. 확실히 이런 식이면 이진언은 김유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머리를 잘도 썼다 싶어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났다.

“사육이 아니라 조공이에요. 살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방에 내려놓은 짐을 깔끔히 정리하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자신이 한 말을 너무나 철저하게 이행하는 모습에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왜 살쪘으면 좋겠다고 하는지는 공감했으나 별도로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은 아니었던 이진언으로서는 이제 영락없이 김유겸의 뜻대로 집에서 밥을 챙겨 먹게 생겼다.

“혼자 밥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학교에서는 혼자 잘 먹지 않았어요?”

“그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집에서는 혼자인 느낌이 싫거든.”

귀차니즘이 극에 다른 성격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꽤 부지런 떠는 성향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집에서는 밥을 챙기지 않나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단순히 밥 차리는 게 싫어서라는 설명은 어폐였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예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집에서 식사를 거르게 된 원인이 과거의 아픔에서 비롯됐다면 자신의 호기심 짙은 질문도 상처가 된다. 이러한 판단 때문에 김유겸은 이진언에게 무언가 궁금한 게 생겨도 묻지 못했다. 대신 행동했다. 행동을 같이하는 건 거부하지 않은 이진언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집밥도 저랑 같이 먹어요.”

“어?”

“집에서는 외로워서 혼자 밥 먹기 싫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집밥도 나랑 같이 먹자고요.”

“…….”

과거의 상처로 인해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한다면 같이 먹으면 된다. 지난날의 악몽 때문에 혼자 잠드는 게 힘겹다면 재워주면 된다. 옛날의 기억 탓에 사람을 믿는 게 어렵고 사랑이 두렵다면 옆에서 계속 사랑해 주고 믿음을 주면 된다. 간단하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정답들이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계속 보여주고 변하지 않으면 이진언은 마음 열고 자신을 대한다.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이진언은 분명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걸 알아서 김유겸은 가끔씩 배짱부리고 간혹은 위로했으며 간간이 능글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형 끼니 책임질게요.”

애초에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이진언은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 김유겸이 하는 약속은 거절하는 게 옳았다. 학과도 다르고 식성도 다르다. 생활 패턴도 달랐고 관심사도 달랐다. 지금까지의 만남은 김유겸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 여기서 김유겸에게 더 희생하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고로 알았다고 긍정해 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 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입은 생각과는 다르게 허락했다. 어차피 매번 이뤄지지 않을 일이고, 약속이 어그러지면 어김없이 실망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진언은 김유겸의 제안을 수락했다.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지 스스로다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까짓,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다.

“네가 책임져.”

누군가에게 제 일을 전가하는 행동을 극혐하는 이진언인데, 지금의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아는데, 정말은 김유겸이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실망해서 관계가 어그러지리라는 게 뻔히 예상되는데, 그래서 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아는데. 그런데도 허락했다. 기대한다. 정말 답지 않은 일이라고 자각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저를 발견할 때면 조금 놀라운 것도 같았다.

“그거 알아요, 형?”

“응?”

“형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가 하자는 거 그대로 다 해줬어요. 토 한 번도 안 달고, 전부 다.”

“…….”

“음, 여기서 기뻐하면 나 정말 답 없는 놈인 거죠?”

킥킥 웃으며 하는 말이 마냥 예뻤다. 평소에 제가 얼마나 무언가를 같이하자는 말을 온갖 이유를 붙여 거부했으면 그저 알았다고 답했을 뿐인데 저렇게 좋아하는가 싶었다. 게다가 이런 조그마한 변화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섬세함도 고마웠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저는 정말 빵점짜리 애인이었다.

“답 없어도 그냥 좋아할래요.”

원래 연애에는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김유겸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제껏 저는 정답만 추구하며 걸어왔다고 자부했지만, 김유겸 앞에서는 정말 그게 정답이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사람의 마음에는 정답이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답대로 걸어가면 될 것을.

“나도.”

“엥?”

식료품 정리를 마치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웃으며 하는 말이 마냥 예뻐서 고백 같지 않은 화답이 자꾸만 나갔다. 어제에 이어 감정에 취한 대꾸에 이번에도 김유겸은 뭘 잘못 들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얼굴이 웃겨서 킥킥 웃던 이진언은 얼떨떨해하는 김유겸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쪽 입을 맞췄다.

“나도 너랑 똑같다고.”

“와, 이진언 진짜,”

“자꾸 반말하지, 너.”

“아하혀.”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뽀뽀에 반말로 감탄사를 내뱉은 어린 애인의 입을 손가락으로 꽉 틀어잡았다. 금방 아프다고 울상짓는 얼굴에 약해져서 손에 힘을 풀었지만, 그것보다 살짝 나온 혀에 닿은 게 먼저였다. 뜨거운 기운을 가진 말랑하고 붉은 살덩이가 쓱 길게 튀어나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전달되는 열기에 몸이 흠칫 굳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김유겸이 얼른 손을 뻗어 김유겸의 목 뒤에 얹었다. 그대로 앞으로 끌고 왔다. 똑바로 들었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지는 걸 확인하고는 이진언은 눈을 감았다.

“하아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반전되는 지금이 신기했다. 낮고 뜨거운 숨결이 입가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무차별적으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진언이 냉큼 입을 벌리자 두툼한 두께에 비해 상당히 날쌘 혀가 치열을 훑었다. 섬세한 동작으로 앞에서부터 뒤까지 꼼꼼하게 입안을 유린하듯 매만지더니 어느새 얌전하던 또 다른 혀와 얽혔다.

“으음-… .”

쵸옥, 쵸옥, 공기 중에 무언가를 흡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나흘은 굶은 사람처럼 이진언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구는 자세와는 다르게 얼굴선을 훑어내리는 김유겸의 손은 부드러웠다. 귓바퀴를 한번 쓱 만지고 뺨을 스쳐서 목덜미를 매만진 뒤 어깨를 쓸어내려 허리춤을 헤치며 들어가는 몸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머리에서부터 허리까지 내려온 손은 얄쌍한 옆구리에 머물다 뒤돌아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으읍-! 둔부에서 느껴지는 손아귀 힘에 이진언이 목 끝으로 울었지만, 김유겸은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끝나자마자 마사지해 줄 테니까,”

깊고 깊었던 키스가 끝나고 이진언의 눈앞에 자리한 사람은 평소의 다정하고 상냥한 김유겸이 아니었다. 수컷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사내였다. 열정이 이글거리는 눈빛은 열기가 너무 강해 이진언을 자리에서 불살라 버리고 녹아내리게 할 것만 같았다. 바로 보노라면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가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 쾌감을 안 남자의 눈은 더 없는 탐욕으로 형형한 살기마저 띤 사나운 빛이었다.

“해도 돼요?”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심산인 건가. 점점 욕정으로 물들어가는 얼굴과 육허기에 허덕이는 아래를 하고도 김유겸은 이진언의 의사를 물었다. 진짜로 거부를 말하면 그만둘 생각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거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고, 김유겸이 제 허리를 매만질 때부터 곧 발생할 일에 대한 기대로 아래에 피가 응집되기 시작한 건 이진언도 마찬가지였다.

“…응.”

안아달라든가 사랑해달라고 표현하면 김유겸이 더 기뻐하리라는 걸 알지만, 성격상 이런저런 화려한 말로 승낙하지 못한다. 대신에 눈앞에 자리한 김유겸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게 몸을 맞붙이고는 저를 안은 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연신 뱉어지는 낮은 숨이 온기를 전달했다. 이것만으로도 김유겸은 이진언의 대답을 안다. 낯간지럽고 화려한 말로 전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표현하는 마음을 인지한다.

“아 진짜 정말, 존나 예쁘다니까.”

대부분 이진언 앞에서는 예쁜 말만 쓰려고 노력하는 김유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불가항력적이었다. 욕을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해봤자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제 온몸을 투신해 사랑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이진언이 진짜 정말 존나게 예뻤다. 그동안 욕은 좆같은 상황만 대변한다고 여겼는데, 예쁜 마음도 표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김유겸은 처음 알았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굴러왔을까.”

이진언을 바닥에 눕히고 상체를 들어 상의를 벗으며 김유겸은 씩 웃었다. 정말로 진심인 마음이었다. 어디서 이토록 찬란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내 사람이 되어 옆에 자리하는지 모르겠다. 전생에 무얼 해서 이진언이 애인인 건지, 진짜 조상복이 있나 싶을 정도다.

“있잖아요, 형.”

“으응, 으읏.”

“진짜 사랑해요.”

순식간에 탈의를 마친 김유겸은 이진언의 온몸 구석구석에 입 맞췄다. 간밤의 행위로 온 군데에 자리한 흔적 위에 또다시 입술 도장을 새겼다. 살짝 붉어진 살결이 이번에는 확연하게 벌겋게 익었다. 생각 같아서는 진짜 이진언도 보지 못한 몸 깊숙한 곳까지 입술을 내리고 싶었는데 불가능해서 억울했다. 정말은 이 사람이 내 것이라는 각인이 피부가 아닌 뼈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이제는 형 없이 못 살 거 같아요.”

이진언의 다리를 들어 올려 허벅지 안쪽에 입 맞추며 김유겸이 속삭였다.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섬뜩했으나 행위에 취한 지금은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쭉쭉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이진언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젯밤처럼 서서히 배 속에서 요동하는 장기들의 느낌만으로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

처음보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움직이면서 김유겸은 소원했다. 이진언은 아득한 감각에 정신이 놓아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겸이 뭐라고 하는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나쁜 짓을 말하지 않았으리라는 믿음에서 가능한 대답이었다.

“진짜 예쁘다. 우리 진언이.”

얼굴 곳곳에 내려지는 부드러운 키스에 이진언은 눈을 감았다. 좁은 원룸에 어제와 똑같이 신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어제는 하루를 꼬박 침대에서 보냈는데, 오늘은 얼마나 지속될지 정작 행위를 재생하는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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