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이진언은 옷장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내일 보자고 해놨으니 오늘은 분명 김유겸을 만나게 된다. 매일 보던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왜인지 잘 보이고 싶었다. 옷장을 열어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데, 옷이 하나같이 바보 같았다. 원래가 옷이나 액세서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서 더 그랬다. 마지못해 그나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친구들의 반응이 제일 좋았던-이라고 쓰고 박지운의 호응이라고 읽는다-옷을 입었다.
“김유겸 새끼가 무대에서 내려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내가. 젠장!!”
옷을 다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가 이진언은 흠칫 놀랐다. 집 앞에는 언제부터 대기했던 건지 김유겸이 떡하니 있었다. 놀란 저는 못 본 체하고 방긋 웃는 얼굴로 잘 잤어요? 라는 말과 함께 모닝커피를 건네주는데,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피식거리는 웃음만 났더랬다.
“뭐, 그렇게 됐다고.”
건네준 커피를 맛있게 먹고는 둘은 함께 등교했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오후 수업만 하면 되는 녀석이 새벽 댓바람부터 제집 앞에서 보냈다는 솔직한 고백에 뭐라도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두 눈만 끔뻑댔었다. 왜 하필 오늘 저는 오전 수업뿐인가 속으로 몰래 한탄도 했다. 집에서 잘래? 하고 물었어도, 김유겸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에 이진언은 심장이 뛰어댔다.
형네 집에서는 형 향기가 나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고.”
강의실에서 만난 박지운에게 어제 발생한 일을 설명해 주니 얼굴이 볼만했다. 짐작했던 사실이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착잡한 모양이었다. 박지운의 심정 또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라서 이진언은 애써 친구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곧 크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만나 봐.”
어깨를 툭 치며 응원의 말을 해주는 박지운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그제야 이진언은 시선을 친구에게로 돌렸다. 박지운이 빙긋 웃었다. 이진언도 빙긋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경련하듯이 떨려왔다. 박지운은 이진언의 반응에 쯧, 혀를 찼다.
“뭐가 걱정인데.”
이진언의 얼굴에서 말하지 않은 걱정을 읽은 박지운이 심드렁하게 물어왔다. 이진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걱정거리라고 하면 말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대부분은 이진언의 쓸데없는 기우였다. 원래가 성격이 그랬다. 항간에서는 이런 이진언을 신중하고 진중하다고 평가할지 모르나, 박지운은 안다. 이것은 상처받기 싫어하는 이진언의 방어 체계다. 이미 큰 상처를 한 번 받아봐서 나오는 의무적 경계였다.
“그냥, 괜찮을까 싶은 거지.”
누군가 김유겸을 좋아하느냐고 질문한다면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좋아한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너와 함께해서 김유겸이 행복할 거 같으냐고 재차 질문한다면 대답하지 못하겠다. 자신 없는 까닭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김유겸의 성격을 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마는 그의 성격을 좋아한다. 반면에 저는 아니었다. 얼굴도 까다롭게 생겨서 성격도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김유겸이 이런 저에게 질려서 떠나갈까 봐 그게 너무나 걱정되었다. 기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한번 든 생각이 쉽게 소거되지 않아서 걱정이다.
“괜찮지 않을 건 또 뭔데. 유갱 그 새끼가 너 성격 이런 거 모르고 들이댔겠냐.”
사실 이게 가장 궁금하다. 도대체 김유겸은 제 뭘 보고 반했다고 하는 걸까.
김유겸이 가끔 제 얼굴을 넋 놓고 보고는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제일 처음 다가오는 김유겸을 경계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눈을 달고 태어난 이상 상대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일 테지만, 오로지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고 하는 몸짓을 보인 건 또 아니었다. 제 외모가 다수의 사람에게 호감으로 작용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단순히 외모만을 보고 접근한 이들은 전부 거절했는데, 김유겸은 허락했다. 김유겸의 태도가 타인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삽질 그만해라, 너도.”
이럴 때의 박지운은 냉정했다. 가끔은 가학적이 되는 이진언의 망상을 정지하기 위해서는 냉정만이 답이라는 걸 아는 사람다웠다. 박지운의 단호한 충고를 받고서야 이진언은 생각하기를 중지했다. 어차피 더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이왕 함께하기로 했으니 좋은 모습, 예쁜 모습만 보여줘도 시간은 부족하다. 원래가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형, 형 형, 진언이 형-!!”
“아쭈, 나는 눈에도 안 보인다 이거지 지금?”
“어, 지운 선배 안녕하세요.”
“어절씨구, 진짜 나 안 보였냐??”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김유겸이 대기했다가 냉큼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 섰던 박지운이 투덜댔는데, 정말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참 뒤에야 인지하고 인사해왔다. 박지운은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김유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진언만 찾아대는 김유겸에게 불평불만을 해봤자 본인 손해라는 걸 경험을 통해 이미 인지했다.
“그리고 이진언은 형인데 나는 왜 선배야. 이게, 빠져가지고.”
박지운이 투덜거렸다. 김유겸은 웃었다. 누군가 들으면 협박이라고 여길 법한 발언이었지만, 투덜거리는 박지운의 얼굴이 웃는 낯이어서 정말 야단치는 게 아니라는 걸 고지했다. 그걸 알아서 김유겸은 지우니혀어어엉, 하고 말했고, 박지운은 식겁하며 손을 휘휘 휘두르며 선배라고 해!! 라고 경고했다.
“우리 먼저 간다.”
“그래 제발 빨리 사라져줘.”
왜인지 두 사람을 그대로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이진언이 중재하기 위해 나서며 제안했다. 박지운이 옳다구나 빨리 사라져버리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이진언은 피식 웃고는 김유겸에게 그만 가자고 슬쩍 머릿짓 했다. 김유겸은 이 와중에도 예의 바르게 박지운에게 가겠다고 허리 숙여 인사한 뒤에야 이진언의 뒤를 따랐다. 전에 박지운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의외로 예의를 따지는 모습이었다.
“너 수업 시간 앞으로 얼마 안 남았지.”
“음…공강 문자 왔다고 하면 믿어요?”
“진짜인지 아닌지 다 알게 되니까 솔직하게.”
“…네.”
같이 있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마음이야 공감하지만, 저 때문에 자체 휴강을 묵과해주면 안 된다. 저랑 만난다고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마음의 짐으로 남을 거 같아 싫다. 이런 이진언의 생각을 잘 알아서 김유겸은 냉큼 이실직고를 택했다. 고작 몇 초도 안 돼서 거짓이 들통날 걸 왜 시전했나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밥부터 먹자. 배고프지.”
오전 수업이라고 하지만 11시부터 시작이어서 끝나고 나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기 일쑤였다. 세 시간짜리 강의인데 그동안 밖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죽였을 김유겸이 기특했다. 배도 고플 텐데 뭐라도 먹이고 수업에 보내는 게 제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뭐 먹고 싶어?”
“형은요? 예전에는 이럴 때 뭐 먹었어요?”
“글쎄, 보통은 햄버거나 샌드위치?”
전에는 배를 곯지 않게 하는 데 의의를 둬서 뭘 거창하게 먹지는 않았다. 오늘은 달랐다. 저야 괜찮다지만, 김유겸은 수업을 받아야 한다. 김유겸의 수업이라고 하면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으니 뭐라도 든든히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가 노래는 배에 힘이 들어가야 잘 나온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왜 부실하게 먹었어요. 이러니 쪼그맣지.”
“어쭈?”
장난을 쳐오길래 옆구리를 쿡 찔러줬다. 그랬더니 웃는 낯을 하고는 상체를 숙인다. 아파요! 항의해 오지만, 얼굴이 웃으니 정말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이진언도 픽하니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누가 저에게 쪼그맣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한다. 제 외모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른바 “남자다운” 맛이 부족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이진언에게는 콤플렉스였다. 여기에 겉으로 보이는 성격까지 소심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발생했던 일도 다분히 가해자들의 이런 오해에서 비롯됐었다.
“가요, 맛있는 거 먹자.”
제 앞에서 웃는 낯을 하고 이제껏 콤플렉스라고 여겼던 부분을 찌르는 김유겸에게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상대가 악의를 지녔든 아니든 이제껏 지금과 같이 발언하면 차별을 두지 않고 경고를 날렸던 이진언이다. 남들이 평가하는 성격이 차분하고 진중하다는 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서린다는 뜻과 일맥상통했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말로써 상대방에게 경고를 주어 잘못을 깨닫게 하는 이를 권력자라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이진언은 권력자였는지도 모른다. 꼴같잖게.
“그래.”
원하는 바를 말하면 뭐든 이뤄줄 것처럼 행동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마냥 웃음이 났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자가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행동했다는 표현을 동감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정말 남자는 사랑하게 되면 상대에게 불가능한 일을 이뤄주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게 신기했다. 이진언은 제가 살면서 그런 애정을 받으리라고도 또 주리라고도 예상하지 않아서 지금이 퍽 이상했다. 싫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었다.
“넌 뭐 먹고 싶은데.”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지금 저와 김유겸이 가려고 하는 길은 두 사람 모두 경험하지 않은 곳이다.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가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척하니 보기에도 평온하지는 않은 길이다. 가시밭일 게 자명했고, 울퉁불퉁한 자갈밭일 것도 분명했다.
“저는 선배가 좋아하는 거면 뭐든지요!”
“그건 메뉴가 아니잖아.”
“아아아아, 아파요-!”
뭐든지 좋다는 김유겸의 말에 살짝 귀를 잡아당겼다. 아프라고 한 건 당연히 아니라서 손에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김유겸은 아프다고 엄살이었다. 엄살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라도 정말 아플까 싶어 얼른 손을 거뒀다. 손을 거두자마자 바로 싱글싱글 웃는 낯이 되는 김유겸을 바라보자니 어이가 없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자주 가던 햄버거집 가자. 수제버거라 거기 맛있어.”
가시밭이면 어떻고, 자갈밭이면 어때. 어차피 둘이 함께인데.
안일한 평화를 꾀는 목소리에 편승한다. 둘만 함께하면 뭐든 될 거 같다는, 평소였다면 치기 어리다고 치부했을 생각에 합류한다. 사실은 지독히도 고지식한 성격인데, 김유겸과 함께하면 이제껏 제가 옳다고 믿었던 확신이나 신념이 변화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본인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는다고 답답해하던 박지운이 옆에서 본다면 억울해서 뒷목을 잡고 쓰러질 법한 현상이었다.
“그래도 밥 먹어야 하는데….”
“그래서 안 간다고?”
“안 가기는요. 누가요?”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니까 밥 타령하는 김유겸을 보니 아무래도 제 마른 몸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겉보기에야 말라 보일지 모르나 안은 근육으로 뒤덮였는데 그걸 김유겸은 모른다. 몇 번인가 벗은 몸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하게 관찰할 시간은 부족했다. 따라서 낱낱이 아는 게 이상한 거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진언의 입장에서야 김유겸의 걱정은 정말 쓸데없었다. 식사의 중요성을 알아서 그래도 매끼 굶지 않고 먹기는 했다. 그것이 다분히 삼각김밥이나 아메리카노 같은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였다는 게 문제였을 뿐, 정확하게 말하자면 굶지는 않았다.
“오, 여기 맛있네요?”
둘이 함께 간 수제 버거집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터라 한가해 보였다. 이진언을 알아본 알바가 아는 체를 해왔고, 김유겸의 입은 댓 발 나왔다. 자신이 모르는 데서 이진언을 아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싫다는 티를 엄청 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치기 어린 반응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감정을 잘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이진언의 눈에 전부 보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이다.
“먹을 때는 나도 제대로 먹거든.”
“거짓말.”
이진언이 나름 항변해보지만, 김유겸은 이진언이 공부에 박차를 가하면 식사를 쉽게 거르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와 아니라고 항의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김유겸에게도 나름의 근거로써 저런 결론을 내린 거라서 이진언은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형 살쪄야 돼요.”
“이미 충분한데?”
“지금 몇 킬로인데요.”
“음, 65던가.”
“다이어트하냐고요.”
나름 나쁘지 않은 몸무게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걸그룹이냐며 되묻는 꼬라지가 상당히 불만에 찼다. 정말 진심으로 살이 찌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몸무게를 늘리고 말리라는 의지가 확연하게 목격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원해서 뺀 살은 아니었으나 더 찌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던 터라 이진언은 제 몸무게에 별로 크게 불만을 지니지는 않았었다.
김유겸은 그런 이진언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왜 제 몸무게에 관심을 지니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관심 끄라고 하면 김유겸이 화를 낼 거 같아서 조용히 햄버거만 입으로 씹어 삼켰다. 세상에 태어나 제가 후배의 눈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햄버거를 씹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데이트는 먹는 거 위주로 다녀야겠어요. 안 되겠어.”
입가에 묻은 소스를 자신의 예쁜 손으로 닦아내며 야무지게 다짐하는 꼴이 아무래도 목적이 이거지 싶었다. 데이트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고 요청하면 되는데, 꼭 무언가 목적을 향해서 가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제 성격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에게 많이 맞춰주려고 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감동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 데이트 많이 하자.”
“오~ 형이 데이트 많이 하자 그랬어요? 지금 형이 먼저 그랬다?”
원하는 게 이거 맞구나.
제 말을 냉큼 물어서 확인을 받는 꼴을 보니 원하는 대로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었다. 이거를 계략에 걸렸다고 해줘야 하는지 아니면 너무 속 보인다고 해야 하는 건지. 뭐라고 한다고 해도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 이진언은 아까부터 피식거리는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 어려운 것도 아니고. 기껏 알았다고 하니까 예쁜 얼굴에 눈가를 휘며 웃었다. 그게 마음을 푸근하게 해 이진언은 지금 저가 햄버거를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연애는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딱 맞았다. 사귄다고 정의했더니 김유겸은 뭐든지 같이 하고 싶어 했다. 거의 사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원래 연애하면 다 이런 건가 싶어서 박지운에게 상담했다가 욕만 먹었다. 네 개인적인 성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애는 원래 끝의 끝까지 상대와 공유하는 거라는 말을 들었다. 이진언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끝의 끝이라는 게 어디까지라는 건지 모르겠다.
“…못난이야.”
오늘도 한바탕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과제를 하다가 김유겸이 먼저 뻗었다. 체력이 좋다고 하더니 순 거짓말이다. 원래 이진언은 걸어 다니는 걸 좋아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집 근처의 공원이나 하천의 산책로를 마구 걸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찬 머리를 비우는 데는 역시나 걷는 게 최고였다. 김유겸이 간과한 한 가지 실수였다.
체력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김유겸은 걷는 데는 꽝이었다. 이진언은 거의 마라톤 급으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걷는 데 익숙했지만, 김유겸은 한 시간만 걸으면 다리를 절룩였다. 어릴 때 운동했다고, 걷는 건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하길래 좀 믿었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운동할 때 걷는 게 아니라 달리기를 했단다. 곧 죽어도 체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는 모습에 또 피식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났더랬다.
“못난이.”
오늘도 한바탕 한 시간 반쯤 걷고 왔더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배를 깔고 눕더니 그대로 쿨쿨 잠들어 버렸다. 자지 않겠다고 두 눈을 뜨고 꾸벅꾸벅 졸길래 안 쫓아낼 테니 그냥 자라는 말에 그대로 뻗었다. 정말 피곤했던 모양인지 옆에서 코를 꼬집고 볼살을 만지작거려도 깨지 않았다. 과제를 하려고 앉은뱅이 밥상을 펼치고 앉았다가 자꾸만 시선이 평온하게 잠든 얼굴에 가서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얼굴이나 구경하자 싶어서 밥상을 치우고 자는 김유겸 옆에 앉은 참이다.
“잘만 자네.”
손을 뻗어 말랑말랑한 김유겸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진언은 고뇌에 빠졌다. 평소에는 쑥스럽다는 이유로 김유겸을 만지는 게 조심스러웠다. 김유겸도 마찬가지지 싶었다. 예상보다 부들부들한 감촉에 마냥 만지고만 싶은 피부였으나, 제 이런 가벼운 마음은 어쩌면 김유겸에게 고난일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든다. 어쨌든 연애 자체가 처음인 저와는 다르게 김유겸은 그동안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봤다. 그것에 별로 질투가 나지 않지만, 김유겸 과거의 연인들과 비교될까 봐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연애 자체가 처음이다 보니까 뭐든 서툴다. 경험이 많은 김유겸을 따라가자니 성격이 문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관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끙, 절로 울림이 나왔다. 원래 모든 사람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건가 싶다가도, 전부는 또 아닌 거 같아서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이진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겸아.”
새근새근한 숨을 내쉬면서 잠자는 김유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제 과거가 과거라서 김유겸이 무언가를 인내하는 것이라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은 아직 괜찮지가 않아서 말해주지 못했다. 사귀자고 했을 때도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원래가 담백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 과거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남자치고 성욕도 거의 없었다. 반면 김유겸은 모르겠다.
사귀고 나서 저를 만져오는 손길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김유겸은 좋아하면 몸이 먼저 나가는 타입인 거 같았다. 그런 아이에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 혹은 과거의 일을 이유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닐까. 정답을 모르겠는 질문이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정말은 머리가 아팠다.
“…나 많이 잤어요?”
한참 얼굴을 물끄러미 구경했더니 어느새 잠긴 목소리를 하고 김유겸이 물어왔다. 배가 고파서 깬 모양이었다. 더 자도 돼, 무심하게 대꾸하니 어느새 김유겸의 손이 다가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빗거리며 품에 들어온다. 거부하지 않고 팔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순 움직임이 정지했다. 김유겸은 언제고 이진언이 자신의 몸을 만져오면 움직이지 않았다.
“음, 향기 좋다.”
“배고프지. 밥 먹을래?”
“밥 먹으면 잠 안 올 거 같아요.”
“그래도 밥 먹어야-”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래요.”
제 식사는 챙기지 않지만, 김유겸의 식사는 챙기게 된다. 같이 있었는데 굶기기는 싫은 까닭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도 식사를 하게 되었다. 김유겸이 원하는 게 이것인가 하는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다.
“…….”
방금 잠에서 깬 작은 강아지가 어미를 찾아 꾸물거리며 안을 파고드는 것처럼, 김유겸은 연신 머리를 도리질 치며 이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는 들어올 데가 없어 보이는데도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전이었다면 그만하라고 잔소리했을 이진언도 지금만큼은 가만히 김유겸을 받아주었다. 이러한 변화가 좋아서 김유겸은 눈을 감은 채 씩 웃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진언이 자신을 많이 받아주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기분 좋아요.”
이진언이 가만가만 김유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이진언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기는 김유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이었다. 마치 머리를 만져주는 강아지가 주인에게서 떨어지기 싫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정말이라면 김유겸은 덩치가 커다란 대형견종이다.
“가만 보면 넌 강아지 같아.”
“강아지라고 해줘서 고마워요.”
“사실은 개 같다는 이야기야.”
“조금 전에 강아지라고 해놓고 지적하니까 바로 말 바꾸는 것 좀 봐.”
어찌 보면 화를 낼법한 대화에도 김유겸은 끅끅 목 끝으로 웃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이진언도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말해주지 못하는 제 성격이 저주스럽기는 했지만, 아직은 김유겸의 눈에 콩깍지가 쓰여서 괜찮은 듯했다. 이런 부분까지 하나하나 신경 써서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고쳐야 하는 부분이라고 전부터 인지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노력할 예정이었다. 핑계가 좋았다.
“자고 갈 거면 씻고 와.”
산책을 마치자마자 김유겸이 뻗어서 한바탕 낮잠을 자고 이제 막 기상했으니 시간이 늦은 건 당연했다. 슬쩍 본 시계는 어느새 밤 10시 반을 넘겼다. 전이었다면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내쫓았을 시간이었다. 어제와 그제 함께 있었음에도 자고 가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던 김유겸이 기특해서 오늘은 재워줄까 싶어서 한 제안이었다.
제 제안에 김유겸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형 겁도 없네.”
“뭐래.”
“외간 남자 그렇게 함부로 집에 들이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심각한 얼굴로 한다는 말이 어이가 없어서 이진언은 픽 실소가 났다.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유겸은 정말로 심각했다. 흡사 지금 자신이 말한 내용이 진심이라도 된다는 듯이. 하여튼 입만 살아서 못하는 말이 없다.
“주인님한테 놀아달라고 낑낑대는 강아지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사실이 그랬다. 김유겸은 이진언이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애지중지했다. 가끔 얘가 왜 이렇게 오버하나 싶을 정도였다. 살짝 지나가는 말로 뭐가 불편하다고 하면 당장 그것을 해결하는 게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굴 때도 많았다. 지가 히어로야 뭐야. 그런 생각 하며 속으로 웃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연히 비소가 아닌, 기특해서 지은 미소였다.
“아니 이거 진짜라구요.”
“멍멍아, 자꾸 말도 안 되는 핑계 댈래?”
“아, 진짜 이 형이.”
어디까지나 이진언에게 김유겸은 귀여웠다. 나름 자신이 남자답다며 깨알같이 어필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까지는 귀여울 뿐이었다. 또한, 이진언이 자신을 귀여워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 김유겸이었지만, 언제까지 허용할 예정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은 밤에는.
“겁도 없어요.”
“…….”
옆에서 이진언이 자꾸만 강아지야 강아지야, 하면서 약을 올렸다. 손을 뻗어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평소에도 하는 장난이었다. 오늘도 그러려니 했다. 순식간에 김유겸에게 손목이 잡혔다. 평소에는 힘을 주지 않고 대했던 듯, 잡힌 손목은 빼내기가 힘들 정도로 굳센 힘으로 저를 억눌러왔다. 이진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소 놀란 눈으로 김유겸을 바라보았다. 항상 서글서글하게 웃던 눈가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 어린 애인이 사실은 마냥 어리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으음-.”
확연하게 굳은 얼굴을 한 김유겸이 다가왔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도 이진언의 몸은 반항을 몰랐다. 꾹,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닿고는 했던 살결이라서 낯설지는 않았다. 이제는 입술 위에 따스한 체온이 내려앉으면 자연적으로 눈이 감긴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하아,”
살짝 비틀린 틈으로 날래게 혀가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이진언을 배려해 꼼꼼하게 주변을 훑었을 살덩어리였다. 지금은 과거의 행동을 반복할 새가 부족하다는 듯 마냥 밀어 붙었다. 흡, 빨아들이는 세기가 강했다. 순간 깨물린 아랫입술 전체가 김유겸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키스라는 게 감지되자마자 이진언은 머리를 뒤로 빼려 했다. 김유겸의 손이 득달같이 다가와 이진언의 뒤통수를 그러쥐었다.
“아읏,”
고개의 각도가 비틀렸다. 슬쩍 지나가면서 코가 살짝 부딪친 것도 같았다. 순간적인 느낌이라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다시 한번, 김유겸이 이진언을 흡입했다. 끄응, 목구멍이 울렸다. 갓난아이가 젖을 먹듯 무언가 간절하게 갈구하는 움직임에 이진언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동시에 김유겸의 몸이 자꾸만 저에게 닿아왔다. 훅하고 다가온 체향에서는 어느새 페로몬이 맡아질 정도였다.
“유, 읍,”
숨이 막혔다.
호흡하고 싶다고 김유겸의 등을 팡팡 때렸지만, 김유겸은 모른 척하며 계속해서 이진언을 몰고 갔다. 좌로 우로 연신 꺾이는 고갯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김유겸은 이진언이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하게 씹어 먹고 싶다는 듯 계속해서 빨아당겼다. 뒤통수에 밀어 넣은 손에서 강한 힘이 감지된 지는 오래다. 입으로도 이진언을 빨아당기면서 손으로도 강하게 끌어당겼다. 정말이지 대단한 소유욕이 발현되는 현장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흡사 자신 안에서 이진언이 어떤 존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몰아붙이던 키스가 종료됐다. 맞붙었던 살결이 유리되자 입술이 다 아릴 정도였다. 엄청 매운 것을 마구잡이로 입으로 밀어 넣었을 때도 이 정도로 입술이 아리지는 않았다. 약간은 놀란 마음에 눈을 들어 바로 앞을 주시하니, 역시나 아직도 눈가가 서늘하게 굳은 김유겸의 얼굴이 목격됐다.
“강아지는 무슨.”
평소보다 한 옥타브 반은 내려앉은 것만 같은 목소리에 이진언의 등허리에 쭈뼛 짜릿한 전기가 흘렀다. 늑대인 것도 모르고. 김유겸이 자신에게 지닌 마음이야 이미 인지했고, 사랑을 표현함에 몸도 마음도 솔직한 녀석이라는 것도 이미 알았지만, 정말은 이런 식으로 저를 간절하게 원할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형은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니에요.”
이제는 곧잘 형형거리는 김유겸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깊고 진한 키스를 퍼부어놓고는 고개를 숙여 이진언의 어깨에 이마를 박는다. 손은 어느새 이진언의 허리를 둘러 안아 바싹 끌어당겼다. 혹시라도 방금 자신이 한 행동에 이진언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겠다. 이만큼 걱정되면 행하지 않았으면 되겠으나 그건 또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형이 너무 예쁘단 말이에요.”
“…….”
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특할 일인가.
자신의 은밀하고 내밀한 욕망을 고해성사처럼 읊조린 김유겸의 목소리에서 형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제 귀를 강타하고 지나간다. 맨날 선배 소리만 듣다가 요 며칠 형이라는 소리를 조금 들었다고 이미 단어에 익숙해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호칭을 헷갈려 조금씩 실수하기는 했으나 곧 익숙해진 것인지 곧잘 형형거리고는 했다.
“그래, 형이 잘못했네.”
제 어깨에 이마를 박고 도리질 치는 김유겸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당연하게 김유겸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이진언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애가 잘 때 제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던 고민을 김유겸도 같이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함께 고민하는 바보 커플이라고 한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예쁘니까 니가 봐줘.”
“와, 진짜 어이없어. 자기가 예쁜 걸 알아.”
“네가 예쁘다며.”
“네, 예쁘죠. 그래서 어이없어요.”
분위기 쇄신용으로 농담을 건넸더니 반응이 엄청났다. 여전히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로 끅끅 웃는데, 온몸이 다 들썩거렸다. 정말 진심으로 즐거워한다는 걸 알아서 이진언도 조그마하게 미소지었다. 왜인지 김유겸이 즐거워하면 저도 같이 즐겁다. 이런 게 커플이라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닮아간다는 증거 같았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경고는 확실하게 줬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못 알아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음에 자고 가라는 권유할 때는 각오를 다졌다는 뜻이 된다. 그때가 언제일지 기다리는 것도 설레겠지만, 지금은 역시 얼굴만 봐도 행복했다. 상대의 상처가 상처인데 그깟 욕망 하나 못 참아서 관계를 어그러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잘 자요.”
어깨에 박았던 머리를 들고 두 손으로 이진언의 얼굴을 딱 잡고 쪽, 뽀뽀를 한 번 했다. 이진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지만, 김유겸은 푸하하하하 하고 웃을 뿐이었다. 이진언이 무슨 표정을 짓든 지금의 김유겸에게는 귀여울 뿐이었다. 솔직한 말로 누가 누구를 더 귀여워하는지 모르겠는 사이의 둘이었다.
“잘 가.”
낮에 그거 잠깐 걸었다고 엄청나게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걸려서 자고 가라고 하고 싶었으나 스스로가 저렇게 안 된다고 어필해서 보내는 것뿐이지 이진언이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김유겸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아니 완전히 괜찮다고는 못하겠는데 어쨌든,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를 생각하는 김유겸의 마음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오늘 목도하게 돼서 그런가, 김유겸이 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두렵고 무섭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저 아이라면 괜찮을 거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심해서 가.”
탁, 김유겸이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닫는 모습이 잔상에 아스라이 맺히다 사라지자 이진언의 입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스정류장까지는 멀지 않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전화를 걸어올 김유겸을 알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미안한 마음도 컸다. 이것이 김유겸의 배려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다음번에는 오늘과 같은 김유겸의 배려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버스에서 에어컨 나와요.
“이제 정말 여름이니까.”
축제는 끝났고, 곧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어느새 고조였다. 아직 여름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일주일만 지나면 다들 더워서 헉헉 대지 싶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갔다. 더위를 타는 사람들은 벌써 반팔을 꺼내 입었고, 그들 중에는 이진언도 포함이었다.
-형 여름 타죠.
“응, 엄청.”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데만 가야겠어요.
아니면 워터파크? 형 그런 데 좋아해요? 수화기 너머에서 앞으로 할 데이트 계획을 짜는 설렘에 들뜬 목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이진언은 가만히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듣기만 했다. 제대로 음미하려는 듯 눈을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 왜 말이 없어요?
“…너 목소리 좋아서.”
-엥? 뭔 말이에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불쑥 감상을 늘어놓으니 수화기 너머에서 김유겸이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 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진언은 아까부터 입가에 발생한 미소가 사그라지지 않은 것을 느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통화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말 그대로인데. 목소리 좋아, 너.”
-아무렴요. 제가 이래 봬도 우리 학교 실음과 목소리거든요.
“얼굴 아니었어?”
-어라. 오늘 형 진짜 왜 이러지. 나 이렇게 칭찬해 줄 사람이 아닌데.
“뭐래.”
-응, 이제야 이진언 같다.
“자꾸 이름으로 부를래. 죽는다.”
다른 후배였다면 존칭을 생략한 시점에서 바로 경고였다. 그냥 경고도 아니고 살벌한 경고. 왜인지 김유겸에게만큼은 그게 안 된다. 연인이고 남친이고를 떠나서, 김유겸은 원래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다. 사실은 누군가가 저에게 치대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성격인데, 김유겸은 처음부터 받아주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도 얘를 좋아한 것인지도 모르지.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건 김유겸한테 평생 비밀이다.
-진언아~. 이진언~.
“어쭈. 집 나갔다 이거지.”
넉살을 떠는 김유겸의 목소리에 행복이 짙게 흘러나왔다. 지금의 모습을 박지운이 봤다면 정말 눈꼴시다고 토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 싶다. 이진언은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평가를 들을 법한 연애를 제가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전화 끊어요. 카톡 할게요.
버스를 타면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싶어 통화를 금방 종료하고 카톡으로 넘어갔다. 김유겸은 괜찮지 않냐고 했지만, 타인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이진언의 성격을 이해해 나온 방법이었다. 김유겸은 카톡과 통화가 별반 다르지 않은 녀석이었다. 함께 있으면 끝없는 수다가 펼쳐졌다. 평소라면 상대와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몰라 금방 툭툭 말이 끊겼을 텐데 김유겸은 달랐다. 역시 처세술이 능한 녀석이다.
=집 도착했어?
-네 방금이요!
-엄마가 뭘 이렇게 맨날 늦게 다니냐고 뭐라고 하세요´ㅅ`
-나 노는 거 아닌데
=나랑 노는 거지 뭐
-데이트도 엄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어쭈 날 만나는 게 일이라 이거지
-어…아니요? 아니에요!
-형 만나는 게 왜 일이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라고요!
가볍게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또 안절부절못하는 김유겸이 눈앞에 그려져 이진언은 정말 크게 웃어야 했다. 옆에 자리했든 아니든 저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역시 김유겸뿐이었다. 우습다는 게 아니고 정말 즐겁다는 의미로 말이다.
-절대 아니라는 거 알죠?
-아 안다고 해줘요 빨리ㅠㅠㅠㅠㅠㅠ
=알았으니까 울지 마ㅋㅋㅋㅋㅋㅋㅋㅋ
김유겸과 카톡 하다 보면 ㅋ이 난무했다.
이진언에게 카톡은 친목의 지표라기보다는 대화의 수단일 뿐이었다. 대면해서 대화한다고 해도 말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은 카톡에서도 동일했다. 확인할 것만 딱딱 알아보고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면 전화했다. 박지운은 이런 이진언을 두고 아재라고 칭했다. 뭐, 박지운의 평가가 아주 틀리지만은 않는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알았다고ㅋㅋ그만 울어ㅋㅋㅋㅋ
=내일 뭐 할 거야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 모두 금요일은 공강이었다. 처음 금공강을 만들었을 때 동기들의 부러움을 잔뜩 샀다. 김유겸은 브이 자를 그리며 잘난 척했고, 이진언은 별다른 리액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런데서조차 차이점을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반대인 사람들인데, 어떻게 서로를 마음에 담고 만나는 것인지 가끔은 정말 신기하다.
-형 만날 건데요
=그러니까 언제
-음, 내일 몇 시에 일어날 거예요?
“…….”
다정한 건 성격일까 아니면 습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의도한 걸까.
언제 만날 거냐는 질문에 언제 일어날 거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짧은 문답이지만, 안에 내포된 뜻은 수많았다. 김유겸은 자신은 언제든 당신의 시간에 맞추는 게 가능하니 이진언에게 편한 시간대를 말해보라고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얘가 다정한 성격이라는 건 익히 인지했었지만, 아주 사소한 이런 곳에서까지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글쎄. 한 아침 다섯 시?
-헐…엄청 일찍 일어나네요?
-음,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ㅋㅋㅋㅋㅋ
=뭐래
=아니거든
오늘따라 저답지 않게 농담을 많이 하게 된다. 김유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언제나처럼 기상천외했다. 이런 대답은 언제고 이진언을 웃게 했다. 오늘 하루만 김유겸 때문에 몇 번을 웃는 건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도 기발한 대답에 이진언은 웃으며 대답을 보냈다. 아까부터 연신 웃어서 광대가 아파올 정도다. 하여튼 김유겸, 물건이었다.
-나는 보고 싶어요.
-아침에 갈게요.
=열 시쯤에 와.
-다섯 시 아니고요?ㅋㅋㅋㅋㅋㅋ
가만히 두면 정말 아침 다섯 시에 득달같이 달려올 기세라 이진언은 적당한 선을 제시했다. 김유겸은 몇 번 농담을 건네더니 이내 알았다고 대답했다. 저는 다섯 시도 상관없는데요. 끝까지 장난치는 모습에 옆에 자리했으면 등짝을 한 대 때렸지 싶었지만, 밉지는 않았다. 아무튼, 넉살도 변죽도 좋은 녀석이다. 옆에 두면 심심한 줄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내일 저 가고 싶은 데 있으니까 우리 거기 가요.
여기 케이크가 맛있대요! 시간을 정하고 이제 어디를 갈까 싶어서 장소를 고민하는데, 김유겸이 주소를 보내왔다. 눌러보니 룸 형태의 카페였는데, 케이크가 특히 맛나다고 정평 난 곳이었다. 지난번에 영화를 봤을 때는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장소를 고르더니, 이번에는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곳을 고른 모양이었다. 노력해 주는 모양새가 좋기는 했으나 어째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거 같은 기분이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이진언도 아는 곳이었다.
=그래, 가자.
가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마지막 말은 전송하지 못하고 이진언은 대화를 종료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유겸에게 저가 지금 이렇게나 설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는 싫었다. 내일이 빨리 와서 말랑말랑했던 김유겸의 얼굴을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