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3/30)

4.

사람과 사람이 사귀면 제일 처음 뭐 해야 해?

누군가에게 질의하면 뭘 그런 걸 묻냐고 대꾸할 법한 질문이었다. 사람을 한 번도 사귀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촌스럽게 뭘 그런 걸 궁금해 하냐고 타박을 받을 법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진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모태 솔로인 이진언은 교제를 시작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학습하지 못했다. 어디다 물어볼 곳도 마땅찮았다. 이럴 때 박지운은 도움이 안 된다.

현실은 단순했다. 고백했고, 응낙했다. 교제의 시작이었다.

관중들이 열광하는 장소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향하는 동안 이진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은 그대로인데,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만 가슴이 이토록 심하게 쿵쾅거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급하게 뛰면 분명 김유겸에게 들릴 텐데 말이다.

“아, 잠깐만 쉬었다 가요.”

날씨가 좋았다. 주변의 나무는 어느새 푸르른 녹색 옷을 입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여름이 성큼 코앞으로 다가왔다. 짙은 녹음의 냄새가 지척에서 요동했다. 얼굴 옆선을 타고 흐르는 땀의 존재를 느끼며 이진언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한 손으로 땀을 닦으려니 불편했다. 다른 손은 김유겸에게 잡혔다. 빼고 싶지는 않았다.

“후아-.”

무대에서 정문까지의 거리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다만 이곳을 뛰어왔다는 가정했을 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거리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듯했다. 그런 거리를 김유겸은 이진언의 손을 잡고 달렸다. 지금 쿵쾅거리는 가슴이 달음박질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 자리한 사람 때문인지 헷갈릴 법도 했다.

“선배는 안 힘들어요? 숨소리가 하나도 안 흐트러지네.”

옆선으로 흐르는 땀을 저와 똑같이 한 손으로만 닦아 내리며 김유겸이 질의했다. 이진언은 옆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는 김유겸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김유겸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픽 웃어버리는 이진언의 모습에 뭐가 잘못됐나 싶어서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네 체력이 약한 거야.”

“그럴 리가요. 체력 하면 김유겸인데?”

“고작 이거 뛰고?”

“고작이라뇨! 진짜 저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내가 이거 진짜 내일 학교 행정실 가서 거리를 재고 말 거예요. 그럼 선배 저한테 고작이라는 소리한 거 사과할걸요?”

잠깐 달음박질을 중지하고 교문 밖으로 걸어가면서 대화했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김유겸이 많이 억울해하기는 했지만, 이진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절대 자신의 체력이 약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김유겸의 열정적인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좋았다. 킥킥 웃음이 났다. 옆에서 정말 얼굴이 다 벌게져서 항변하는 김유겸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귀여웠다.

“알았어, 알았어.”

“…….”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조그마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행동이었음에도 김유겸은 동작 그만이 되었다. 이진언이 지금처럼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 자체가 귀했다. 그것을 김유겸은 알았다. 자신을 특별히 여겨준다는 사실을 알고, 오늘부터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가까운 “연인”이라는 형태를 띤 사이가 되었다는 것도 인지했지만, 정말은 태도를 이렇게까지 확 변화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배.”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곧게 뻗은 다른 손에 사로잡혔다. 작은 손가락 사이로 길고 곧게 뻗은 자신의 손가락을 차례차례 얽은 김유겸은 그대로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발생해도 절대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대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사실은 고작 손 한 번 잡은 것뿐인데.

“우리 커피 마시러 가요.”

“…그래.”

사실은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이진언을 만나면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김유겸이었다. 이것이 모두 저를 위한 배려라는 걸 이진언은 안다. 기꺼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이 모두가 김유겸이 저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서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했다. 김유겸은 사랑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이진언은 상대의 행동을 수락함으로써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발산과 수용. 어찌 보면 밸런스가 좋았다.

“너 아이스크림은 좋아하지.”

“네.”

“그럼 아포카토 먹어볼래?”

“그게 뭐예요?”

카페에 들어온 두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이진언의 고민은 길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김유겸의 고민은 길었다.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애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들어온 카페였으니 당연했다. 하필이면 두 사람이 지금 들어온 카페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서 김유겸이 마실 게 마땅치 않았다.

“아이스크림이랑 에스프레소랑 같이 먹는 거. 달달해. 맛있어.”

“음, 선배가 맛있다니까 믿고 먹어볼래요.”

“그러다 맛없으면 나 원망하려고?”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씩 웃으며 하는 말이 예뻤다. 빈말로나마 부정적인 표현하지 않는 김유겸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농담으로 원망한다고 할 법도 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제껏 김유겸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우는 얼굴을 앞에 놓고 원망하느냐고 질문했을 때도 꼬박꼬박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가자.”

“어, 어, 카드…!!”

김유겸을 위한 주문까지 마치고 이진언이 재빠르게 카드를 꺼내 계산까지 끝냈다. 멍하니 메뉴판을 보던 김유겸은 당했다, 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언가 억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이진언은 작게 키들거렸다. 쉽게 웃어주지 않는 이진언의 평소 성정을 알아서 금방 기분을 풀었지, 아니었다면 오후 내내 삐진 얼굴을 했을 김유겸이었다.

“내 나이가 몇 개인데 너한테 얻어먹냐.”

무심하게 툭 던지는 말에 김유겸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껏 여자와만 연애를 해왔던 버릇이었다. 서로가 학생이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사나이 김유겸 자존심 때문에라도 상대에게 데이트 비용을 많이 전가하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는 게 아니라 잠깐 낮에 얼굴을 보고 헤어져야 하는 날이면 카페의 음료는 꼭 자신이 계산했었다. 그것을 상대방들은 고마워했다. 김유겸은 그게 매너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진언과의 연애는 그때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지금은 후배가 아니라 애인인데요.”

“애인한테도 안 얻어먹어.”

후배가 아니라 애인이라서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 마음은 공감한다. 저도 그러하니까. 이것은 성격의 문제다. 이진언은 남에게 빚지는 걸 싫어했고, 이러한 성격은 연애하면서도 더 두드려졌으면 두드려졌지 축소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하나뿐인 절친이라는 박지운에게도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이진언이었다.

“선배 먹는 모습 보면 예쁘단 말이에요.”

트레이에 나온 음료를 담아 2층으로 올라가면서 김유겸이 투덜댔다. 계산을 제가 했는데 트레이까지 들면 김유겸의 삐진 마음을 풀어주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애써 허락했더니, 이번에는 먹는 모습 타령이다. 한가한 2층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듣는 어린 애인의 투정에 이진언은 피식 웃음이 났다.

“예뻐?”

“네, 볼이 잔뜩 부풀어 올라서 오물오물 씹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선배는 모르잖아요.”

“나 원 참.”

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경우 어쭈? 라는 반응을 보였어야 한다. 지금은 달랐다. 선후배 사이에서는 하지 못했던 표현이나 감상이 가능한 사이였다. 즉, 흔한 말로 상대의 어떤 포인트에서 발리는지 설명해도 되는 사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겸은 자신이 왜 이진언에게 먹이를 주는가에 대한 사유를 솔직하게 발설했다. 이진언의 얼굴은 웃음이 드리워졌다.

“선배는 선배가 얼마나 예쁜지 알 필요가 있어요.”

소프트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부으면서 김유겸이 의견했다. 물끄러미 표정을 관찰하니 제법 진지했다. 에스프레소가 들어간 커피를 마셔야 해서인지 아니면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 헷갈렸다.

“내가 예쁜 거 알아서 뭐 하게.”

“음, 본인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걸 좀 알았으면 한다는 거죠.”

“모든 사람 사랑은 필요 없어.”

솔직한 말로 귀찮다. 관종이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은 대중의 관심이 불필요할 뿐이다. 이진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생긴 것 때문에 마지못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생활하지만, 이것조차 제가 원한 현상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조용하게, 남들과 같은 생활하는 게 소원일 정도로.

“그러면요?”

“내가 원하는 사람이면 돼.”

“…헙.”

무심하게 툭 내뱉고 김유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특별히 잘 보이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눈앞에 자리한 사람과의 관계를 잠시 망각했다. 지금 한 말은 평소에도 지니던 생각이었다. 이제 와 특별하다고 칭하지 못하는 소신이라는 뜻이다. 슬쩍 김유겸의 얼굴을 살폈다. 당연히 환한 미소가 목격됐다. 관계가 관계인데, 지금의 말이 김유겸에게 어떤 의미로 닿았을지 모른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또, 완전한 거짓말도 아닌 발언이었다.

“어, 선배, 그러니까 지금, 내 사랑만 있으면….”

“확대해석 금지.”

“넵.”

은근슬쩍 자신이 생각한 대로 들은 바를 확립하려는 김유겸에게 그것은 아니라고 못 박았다.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했음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김유겸은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빛을 받아 맨질거리는 광대가 지금 저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가를 시각적으로 고지했다.

“맛있냐.”

커피를 싫어하는 걸 알아서 궁여지책으로 권한 아포카토였는데, 김유겸은 생각보다 잘 먹었다. 작은 커피 스푼을 예쁜 손으로 움켜쥐고는 살살 소프트아이스크림 겉면을 긁어내며 입안에 넣었다. 잠시간 입안에서 바닐라 맛을 음미하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말로 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맛있음을 표현했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 괜히 툭 말을 붙였다. 김유겸의 대답은 엄청났다.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리는데, 저러다 어지럽지 싶을 정도였다.

“그냥 커피는 쓰니까, 이렇게 달달한 거랑 먹으면 좀 나을 거야.”

아무래도 저와 함께하려면 커피 마시는 법을 익히는 게 좋았다. 요즘이야 카페의 메뉴가 잘 나와서 어디를 간다고 해도 김유겸이 마실 음료가 가득했지만, 제가 신경 쓰인다. 굳이 커피를 마시지도 않는 애를 데려다 놓고 고문하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히 들지 않는다. 저야 어디를 가든지 아메리카노면 되지만, 김유겸은 다르다. 기왕이면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사이인데, 서로 좋으면 좋겠다.

“…….”

“…?”

가만히 생각하던 이진언이 픽 웃었다. 솔직히 지금 한 제 생각이 웃기다. 관계의 정의를 공교히 했더니 앞을 함께할 생각부터 한다. 과거에는 옆에서 치대면 그게 누구든 귀찮기만 했다. 현재는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유겸만 예외다. 이진언은 턱을 괴고 제 앞에서 열심히 아포카토를 먹는 김유겸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누군가가 뭘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데.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앞으로도 싫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짙게 든다. 정말은 저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래, 내가 연애를 하기는 하는 모양이네.

자꾸만 계속해서 실실 웃음이 새었다. 확실히 즐거운 기분이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절로 나는 얼굴을 이번에는 김유겸이 물끄러미 관찰했다. 아예 마음을 먹은 듯 이진언이 손을 들어 꽃받침을 하더니 김유겸 쪽으로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설마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터라 김유겸이 놀라서 재빨리 머리를 뒤로 쓱 물렸다. 놀란 얼굴을 한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이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 괜히 머쓱해진 김유겸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이 그게 뭐야.”

“제 표정이 어때서요.”

“완전 멍하다.”

놀리는 말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평소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도 못 볼 텐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김유겸으로서는 어쩌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이 제아무리 붙어 다녔다고 해도 이진언은 오늘처럼 환하게 웃지 않았다. 무심하고 무감한, 다르게 표현하자면 거의 가면을 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웃는 얼굴이 예뻤다.

원래도 예쁜 사람이라고 인지는 했지만, 역시나 웃는 게 예쁘다. 정말은 사랑스럽다. 그 사람이 웃으니까 세상이 환해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다. 겨우내 잠들었던 새 생명이 따듯한 봄바람에 발딱 머리를 땅 위로 내미는 걸 관찰하듯 대견한 마음도 든다. 사방에 생명력이 넘치며 상쾌함이 맴돈다.

웃는 얼굴이 더없이 싱그러웠다.

아니 그러니까, 싱그럽다는 말은 나뭇잎이나 그런 데 쓰는 거 아니냐고.

몇 번이나 느끼는 모순이지만, 정말은 모르겠다. 가만히 관찰하노라면 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것을 단어의 쓰임이 모순된다고 다르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정말 싱그러워서 싱그럽다고 말하는 거고, 이런 표현 외에는 다른 대체어를 못 찾겠다. 순간 자신의 한글 실력이 정말 뒤떨어지는구나 싶다. 이리 봬도 수능 볼 때 언어영역 점수는 꽤 높았는데 말이다.

“선배가 예뻐서 그래요.”

사람들은 누구라도 예쁜 것을 보면 넋을 놓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제일 처음, 이진언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넋을 놓았다. 시선을 빼앗겼다. 작은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흔들며 인사해주는데, 속으로 순간 이진언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상상을 했다.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주변에 다른 아이들이 같이 자리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이진언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도 전에 미친놈으로 낙인찍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사실 그때 이진언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다고 바랐다. 뜻하지 않게 박지운 때문에 안면을 튼 그날, 정말로 기뻤다.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고 막연하게 느꼈던 감정은 어쩌면 첫눈에 반했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들으면 닭살 돋아 해.”

“들으라고 해요. 그런데 들을 일 없을걸요?”

선배 곤란하게 안 해요. 뒤따라오는 말이 야무졌다.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평범한 연애는 아니다 보니 숨겨야 할 게 많다는 걸 잠시 망각했다.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싶은 부정적인 생각이 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남이 우리 얘기를 왜 들어요.”

나쁜 생각을 금방 제거해 주겠다는 듯, 김유겸이 뒷말을 이었다. 서로가 남자라서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게 아니고, 우리 이야기를 남들이 듣는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정말은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밖에 몰랐으면 한다는 약간의 집착 돋은 말이기도 했다. 전에 강길태와 말 섞는 게 싫다던 치기 어린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래, 그러네.”

하여튼, 조금도 불안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름 이대로도 괜찮다고 느끼는 이유는 분명 이런 김유겸의 다정한 성격에 제가 중독돼서다. 이 다정함은 처음에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거 같지 않지만, 곁에 두고 관찰한 결과, 한 번 맛보면 절대 탈출하지 못한다. 그만큼 중독적이었다. 어느새 시나브로 제 발목을 옥죄었다.

“우와, 맛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양의 아포가토였지만, 김유겸은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다 먹고 난 뒤에 과장되게 배를 통통 두들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는데, 하여튼 변죽도 좋다. 하는 짓이 처음부터 밉지도 않았고 수위도 딱 좋았다. 적절을 안다는 뜻이다.

“너 전화 온다.”

앉은 자리에서 아메리카노를 전부 다 마신 후 김유겸이 하는 짓을 가만히 구경하는데, 아까부터 김유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애써 모른척했지만, 더는 힘들었다. 이진언이 지적을 한 이상 김유겸도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어. 끝났냐? 나, 밖. 엥? 스케줄 없으세요, 슈스님?”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한숨을 쉬고는 통화를 시도하는 김유겸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역력했다.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동조하지만, 끈질기게 전화를 건 상대도 그만한 용건을 지녔으리라는 판단에 이진언은 일단은 김유겸이 통화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여기 학교 정문 카페인데. 너 오려고? 진짜 스케줄 없어? 웬일이래.”

스케줄이라는 말이 들리는 거로 보아 김유겸과 같이 연습을 했다는 아이돌 멤버인 듯했다. 이진언은 큼큼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이돌에는 무관심해서 김유겸의 친구라던 멤버에게도 특별히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이 잘생겼다 어쨌다 하는 말만 몇 번 들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

“불러.”

“…….”

혹시나 저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허락했는데, 순간 김유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원망이었다. 아래로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어떻게 선배는 제 마음을 그렇게 몰라줘요? 하고 서러움을 토하는 것만 같았다. 순간 이진언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은 뉘앙스라서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건데, 제가 잘못한 것인가 싶었다.

“어, 와. 대신 팬 다 떨치고 와. 불가능하면 오지 말고.”

마지막 말에는 장난기가 섞였다. 킥킥거리며 덧붙이는 말에 원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김유겸도 오랜만에 만나자는 친구의 제안이 신이 난 듯했다. 사실 김동준은 연습생 생활하면서 동고동락을 모두 겪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친분이기는 했다.

“친구 그룹 이름이 뭐라고 했지?”

“왜요?”

“찾아보려고.”

명색이 애인 친구인데 그룹명 정도는 미리 외워둬야겠다 싶었다. 평소라면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김유겸의 체면을 생각했다. 애인이라고 소개하지는 못하더라도 축제 때 무대하고 바로 빠질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선후배 사이인데, 그런 사이에서 상대의 이름과 얼굴을 모른다고 하면 김유겸의 얼굴을 먹칠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김유겸은 이런 이진언의 생각에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외울 필요 없어요. 걔 외울 시간에 제 얼굴이나 더 봐주세요.”

제 앞에서 꽃받침을 하며 얼굴을 들이미는 통에 이진언은 웃었다. 하는 짓이 마냥 예쁘기만 했다. 푸흣, 웃음이 난다. 이진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드리워지자 김유겸의 얼굴에도 미소가 짙어졌다.

“와, 너네 학교 학생들 장난 아니다.”

“왔냐?”

김유겸과 잠시 서로의 얼굴만을 보며 웃는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카페의 현관 쪽이 시끄러워졌다. 본능적으로 김유겸의 친구가 왔구나 했다. 신기한 마음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한창 모였다. 다들 상기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거리를 바라보았다. 곧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커다란 인영 하나가 불쑥 카페 안으로 잠입했다.

“나 완전 콘서트 하는 줄.”

“콘서트 언젠데.”

“다다음 달.”

“안녕하세요.”

무대 의상을 입고 들어와서 하는 대화가 여상치 않았다. 콘서트니 뭐니 하는 단어에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싶었다. 힘이 든 모양인지 풀썩 소파에 앉길래 이진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저를 알아본 것인지 두 눈이 커지면서 어어,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김유겸이 다른 사람과 있다고 하는 말을 못 들었다. 김동준으로서는 놀랄 법도 했다.

“어, 죄송해요. 유갱이 다른 사람이랑 있다고 말 안 해서…!!”

실례했다고 판단한 것인지 김동준은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해왔다. 처음에야 무시당한 것 같아 인상을 썼던 이진언이지만, 이내 상황을 인지하자 관대한 마음이 되었다. 하여튼, 김유겸과 얽힌 일에는 너무 자비로워져서 탈이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무대 끝나고 사라졌으면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거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얼굴 안 보이고 사라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다고 또 네가 나를 찾아올지는 몰랐지. 우리 똥지니, 겸둥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서라. 죽어, 진짜.”

생각보다 친한 사이인 듯 둘 사이의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장난기가 넘쳤고, 여유로웠다. 주변 애들 말로는 제법 인기가 좋은 그룹이라고 했는데, 딱히 연예인 병에 걸린 거 같지도 않았다. 마셔, 김유겸이 미리 시켜놓은 음료를 권하자 땡큐, 하고 간단하게만 답하고 후루룩 마셨다. 그냥 친구였다.

“유겸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아, 선배예요.”

“헐, 선배예요? 얼굴이 어려 보이셔서 동생인 줄 알았어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몇 살이신데요?”

“스물다섯이요.”

“우와, 진짜 형이구나.”

이진언의 나이를 들은 김동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김유겸은 속으로 좀 뿌듯했다. 자신이 뿌듯해야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괜히 마음이 그랬다. 사실은 평소에 자각을 잘하지 못했는데 김동준의 반응을 보고 재차 살피니 확실히 어려 보이는 외모이기는 했다.

“형은 무슨 과예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요. 저는 정치외교학과예요.”

“헐, 형 그럼 나중에 외교관 되는 거예요? 대박.”

“꼭 그런 건 아니고요….”

“…….”

김동준이 호들갑을 떨면서 과장되게 리액션했다. 하여튼 옛날부터 리액션은 엄청 좋았다. 손을 들어 입을 막더니 정외과에서는 뭘 배우냐며 꼬치꼬치 물었다. 이진언은 곤란하다는 듯 하하하 웃었다. 보다 못한 김유겸이 그만 좀 하라며 타박을 줘서야 김동준은 본인의 과한 호기심을 잠재웠다.

“아, 나 오랜다. 이따가 스케줄 없는데.”

“왜 없어. 한창 바쁠 때 아냐?”

“콘서트 연습 말고는 없어.”

“그건 스케줄 아니냐. 빨리 가.”

“칫.”

연습생 때는 데뷔해서 콘서트 하는 게 소원이었지만, 막상 소원이 일이 되면 피로를 유발하기 마련이었다. 어디의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할지도 몰랐지만, 김동준과 연락이 끊기지 않은 김유겸은 나름 이해되는 소리이기도 했다. 본디 원래가 모든 일에는 역지사지가 필요한 법이었고, 직접이 안 되면 간접이라도 경험해봐야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고는 했다.

“간다. 갈게요, 형.”

잠시 잠깐 앉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김동준은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팬들이 예의를 지켜줘서 카페가 인산인해가 되어 아수라장이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적인 만남을 지켜주는 팬덤인 듯했다. 문제는 학우들이었다. 팬들이야 우리 오빠 불편하지 말라고 예의 차려 주었지만, 학우들은 아니었다. 김동준과 김유겸, 거기에 이진언, 이렇게 셋이 함께 카페에 앉아서 수다 떠는 사진이 이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학우들을 통해 SNS로 확산 중이었다. 박지운에게 조금 전에 연락이 와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왜.”

김동준과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뒤로하고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연락을 보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진언이 말했다. 옆에서 김유겸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동시에 뭔가 심술이 난 표정이기도 했다.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동기며 후배의 연락에 안 그래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옆에서 제 눈치를 살살 보면서도 굳이 삐졌다는 티를 숨기지 않는 김유겸 때문에 더한 두통이 이는 듯했다. 왜 삐졌는지 알면 달래주기라도 하겠는데, 지금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니에요.”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입술은 삐쭉삐쭉 날이 섰다. 누가 봐도 나 삐졌소-하는 얼굴을 해놓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작태가 웃겨서 이진언은 피식 한번 실소했다. 지금이야 김유겸이 왜 저러는지 대충 짐작이 가서 귀엽게 느껴졌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면 퍽 짜증이 날 거 같았다. 애초에 저는 남을 달래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기회 줄 때 이야기하는 게 좋을 텐데,”

유겸아.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종용하자 그제야 얼굴이 순하게 내려앉았다. 이진언의 성격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또, 오늘이 사귄 첫날이라는 자각이 강하게 든 모양이었다. 사귄 첫날부터 이런 사소한 일로 기분 잡치고 싶지 않은 건 김유겸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연락 온 김동준이었지만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타인의 영향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롯이 둘이서만 보내고 싶었던 탓이다.

“저도 형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진언이 형이라고 부를 거라구요.”

“…….”

제 짐작은 틀렸다.

이진언은 순전히 김유겸이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삐졌었다고 해석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보상하려고도 했다. 아니었다. 김유겸이 삐진 이유는 김동준의 중간 난입도 난입이었지만, 호칭의 문제였다. 오늘 처음 본 김동준은 자연스럽게 이진언과 호형호제를 했다. 아니 사실은, 김동준만 형이라고 부르고 이진언이 벽을 쳤지만 어쨌든, 김유겸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자신은 아직도 이진언에게 선배라고 호칭하는데 김동준은 만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동안 호칭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선배라고 불러도 그만이었다. 다른 사람과 연애할 때 애칭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던 적도 많아서 거기까지 신경이 가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김동준의 형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드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가 내 애인과 편해지고 싶어서 하는 말에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너무 쪼잔한 거 같기도 했다.

쪼잔해도 하는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은 앵돌아졌고, 삐졌고, 서운했다. 이진언이 의도하지 않고 행동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단단히 삐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김유겸은 이진언에게 밀당이라는 걸 하지 못했다. 그런 걸 했다가는 자신이 남아나지 않는다. 주고 또 줘도 부족해서 더 주고 싶은 사람이 이진언이었는데, 밀당할 정신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 나는 선배고 김동준은 형인데요.

퍽 억울한 듯 보이는 김유겸의 표정이 의문했다. 이진언은 침묵했다.

호칭, 그게 뭐라고. 형이라는 단어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사실 이진언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저와 함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기피하면 안 된다고 판단해서 부르라고 했을 뿐이다. 거기에 친구가 연예인이라든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케이팝 그룹의 멤버라든가 슈스라든가 하는 계산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냥 김유겸 친구라니까 보고 싶었다. 솔직한 말로 하면 이게 다였다.

만난 친구는 넉살이 좋았다. 대화도 불편하지 않게 잘 이어갔다. 김유겸의 성격과 비슷했다. 친구는 유유상종이라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너만 밝고 빛나는 줄 알았는데, 친구도 그러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분은 괜찮았다. 친구는 본인을 연예인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며 웃었다. 때문에 사실은 잘 몰라서 그런다고 이실직고하지 못했다.

김유겸은 서운함은 이게 다라고 판단했다. 오늘이 사귀는 첫날이라는 감상은 동일했다. 특별했다. 살면서 이런 쪽으로 특별함을 느끼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특별하기는 했다. 그런 날에 단둘이만 해도 부족할 텐데 친구를 부르라고 허락하는 제 모습에 김유겸이 서운한 빛을 살짝 내비쳤다. 그때는 그게 마냥 귀엽기만 했다.

“…불러.”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이미 저를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들은 많았다. 친하다고 하기도 뭐하고 소원하다고 하기도 뭐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저는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진언도 이제껏 타인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지 무관심했다. 김유겸이 형이라고 부를 거라며 토라진 얼굴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그랬다.

“겸아.”

애칭이라는 걸 제가 하게 될 줄 몰랐다.

사실 그걸 왜 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그냥 호칭일 뿐이잖아. 이런 소리를 했다가 박지운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때는 박지운이 오버하는 거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호칭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모두 저를 대변하는 이름일 뿐이었다. 상대와 나의 관계에 따라 불리는 게 다를 뿐, 모두 저를 부르는 말이라는 건 동일했다. 그래서 담담하게 대응했다. 한 번도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선, 아니, 형.”

김유겸은 자신을 누군가가 딱딱하게 성을 붙여 김유겸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는 김유겸의 이름도 제대로 불러주지 못했다. 다정한 유겸아, 는 물론이고 성을 붙인 딱딱한 이름을 부른 적도 몇 번 되지 않았다. 괜히 그게 지금 상기되어 마음이 아팠다. 저 아이는 작은 호칭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을 감지하는데, 저는 그것에 반의반도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새삼 김유겸이 저에게 지닌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진언이 형.”

김유겸은 이진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달달한 내음이 입가에 맴돌았다. 단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혀끝이 아릴 만큼의 단미가 진동한다. 이름부터 달다니 이건 정말 반칙이었다. 안 그래도 입술이 너무 달아서 매 순간순간 입에 넣고 굴리고만 싶은데, 요새 따라 자제가 되지 않아 걱정이 태산 같은데. 거기에 이진언은 또 다른 단맛을 추가했다. 이름만 가지고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경험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래, 겸아.”

사람이 많이 응집됐던 카페를 나와 한가한 골목을 거니는 중이었다. 김동준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둘에게 모였던 관심도 흩어졌다.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이진언에게 쏟아지던 관심이 안 그래도 거북하던 차였다.

“저 너무 어린애 같죠.”

재빠르게 옆으로 다가가 손을 부여잡았다. 밖에서 이러는 거 싫어할 거 같은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지 가만한다. 김유겸은 조금 더 대담하게 이진언의 손등을 문질렀다. 작은 손을 들고는 신기하다는 듯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모습이 아이 같아 이진언은 웃었다. 원하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가 신이 나서 그것에만 집중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괜찮아.”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 숨길 줄 모르고 투명하게 표현되는 마음은 이진언을 안온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순수한 애정을 받는 일은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한 번도 느끼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애정을 목도하는 것은 매번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런 사랑을 내가 받아도 되는지 의문하지만, 이제는 저도 욕심이 생긴다. 처음에는 김유겸의 미래를 생각해 수락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지만, 확실히 요새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게 귀여워, 너는.”

귀엽다는 말에 김유겸은 헤헤 웃었다.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폴짝폴짝한 발걸음에 웃음이 났다. 이런 작은 것에도 행복해할 줄 아는 아이구나 싶어서 가슴 한편이 따듯해졌다. 그래, 이게 연하 만나는 맛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박지운이 들으면 다분히 경악할 만한 생각이었다.

“선배랑 있으면 너무 시간이 빨리 가요.”

어느새 날은 어둑해졌고 따라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둘은 조용해진 골목을 함께 걸었다. 원래라면 지금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가 한 번쯤은 들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모두 축제에 넋이 빠진 모양인지 주변이 정말로 조용했다. 근처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학생들이라는 소리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러게.”

가기 싫어요, 가지 말라고 해줘요.

속마음을 여과 없이 그대로 투명하게 보이는 김유겸은 이진언의 집 앞에서 몸을 베베 꼬았다. 혹시라도 들어오라고 해줄까 기대하는 낯빛이었다. 이진언은 김유겸의 얼굴에 피식 웃었다. 오늘은 안 된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축제가 절정으로 치달으면 다음 달은 바로 시험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부터 시험을 준비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진언에게는 아니었다. 지금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성적을 유지한다. 애초에 좋은 머리를 타고나지 못한 노력형 수재다. 주변에서 내리는 평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조심히 들어가고.”

“네.”

“들어가서 연락하고.”

“네에-.”

어째 대답하는 게 영 신통찮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고 또 공감도 돼서 이진언은 웃음이 났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소유하고 싶어진다더니, 지금 김유겸이 딱 그 짝이었다. 원래가 사람은 욕심이 많은 생물이라서 원하는 게 한도 끝도 모르고 계속 증가하는 성질을 지녔다. 김유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야 사귀는 것으로 원하는 바를 다 이뤘다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지금은 더한 것을 원한다고 온몸으로 전해온다. 그게 마냥 귀엽다.

“겸아.”

“네??”

“이리로.”

가라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해놓고 가만히 서서 발밑만 차는 김유겸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예상치 못한 이진언의 행동에 김유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몸짓에는 누가 봐도 경계가 잔뜩이었다. 그게 귀여워 이진언은 풋 웃었다. 내가 너 잡아먹어. 타박 아닌 타박도 해보았다. 김유겸은 손을 들어 뺨을 갉작거렸다.

“나 보고.”

“-!!”

원하는 바가 너무 명료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유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런 다음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김유겸이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이진언의 성격상 길거리에서 키스하지 않을 거라고 여겨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더군다나 아쉬워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키스라니.

아, 이진언. 진짜.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던가. 이진언이 딱 그랬다. 내 감정에 취해서 이진언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을 크기로 비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고, 서로를 비교하는 것 또한 멍청한 일이다.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 최소한 저 사람에게 실망은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상대방도 알아주기 마련이고, 그럼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겼다. 아니었다.

“좋아해요.”

살짝 아랫입술을 한 번 쓱 핥아 내린 키스는 금방 종료됐다. 김유겸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행위였으니 오랜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길거리여서 오랫동안 입술을 맞대지도 못한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뒤로 물리는 것이 아쉬웠지만, 더는 조르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따라서 키스가 끝남과 동시에 김유겸은 멀어져가는 이진언의 몸을 끌어와 단단히 품에 안았다. 발버둥 치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진언은 순순히 김유겸의 품에 안겼다.

“알아.”

코끝에 단향이 맴돌았다.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진언의 곁에 서면 항상 나던 향이다. 어쩜 이 사람은 향기도 좋지. 매번 그런 생각을 했다. 뭐라고 딱 정의하지는 못하겠는데, 이진언, 하면 생각나는 향이었다. 향수는 안 쓰니 그런 향기는 아니고, 섬유 유연제 향인가 의심도 했었는데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그냥 이진언이라는 유기체 자체에 나는 향인 듯했다.

“집에 가기 싫어요.”

자신보다 작은 이진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도리도리하면서 기어코 속마음을 발설한다. 조금 전에는 어른스러운 척하느라 속으로 꼭꼭 묻어뒀던 마음을 지금은 내숭 떨지 않겠다는 듯 가감 없이 그대로 표출했다. 그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진언은 손을 들어 김유겸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흡사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강아지를 달래는 손짓 같았다.

“들어는 가야지. 부모님 걱정하셔.”

전에 이런 말을 했더니 내놓은 자식이라고 항변했었다. 이진언은 김유겸이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막내였다. 원하는 일이 일이라서 외출이나 외박이 잦은 막내와 부모님이 하루에 한 번씩 통화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었다. 내놓은 자식이라는 건 지금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김유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내일은 우리 언제 봐요?”

집에 들어가라고 했더니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주제라고 판단한 건지 냉큼 화두를 바꿔 버린다. 정말 못 말리겠다.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김유겸을 얼른 품에서 떨어뜨렸다. 이내 목격되는 건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을 한 김유겸이었다. 별거도 아닌 일에 엄청난 의미를 부과한 사람처럼, 김유겸은 벌써 다음을 질의하며 희망을 찾으려 하였다.

“너 일찍 일어나면.”

“새벽에 일어난다, 내가.”

이해 못 할 마음은 아니라서 달래기 위한 일환으로 에둘러 표현하니 즉답이다. 생각하는 게 일차원적이었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이진언은 손을 뻗었다. 잠시 눈 앞을 가린 김유겸의 앞머리를 귀 뒤로 꽂아주면서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오늘 무대에 올라간다고 메이크업을 한 모습은 원래도 잘생긴 얼굴을 한층 살게 했다. 이런 얼굴과 마주할 때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어서 가.”

이제 정말 보내야 한다. 어서 가라며 엉덩이를 톡톡 건드리자 김유겸이 입술을 옴싹였다. 할 말이 많은 듯한데, 하지 못했다. 눈꼬리가 축 처져서 결국은 뒤돌아갔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이진언은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한참을 보았다. 어깨는 축 처졌고 발걸음은 무거운 것이, 아니 무슨 나라라도 잃었냐고. 마음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뒤에서 보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김유겸.”

-선배?

가는 모습이 하도 안되어 보여서 이진언은 기어코 핸드폰을 들었다. 채 신호음이 한 번도 가기 전에 김유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액정 가득 뜬 발신인의 표시에 주인이 이름을 불러준 강아지의 귀처럼 어깨가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 우뚝 솟았다. 뒤에서 구경하노라니 웃기기 짝이 없다.

“형이라고 부른다며.”

-아, 맞다. 진언이 형!

매번 불렀던 호칭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해서 선배라는 호칭이 나와도 웃음만 나왔다. 뒤미처 형도 김유겸이라고 했잖아요! 라고 꽤 억울한 듯 항변하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이진언은 정말 크게 웃어버렸다. 이게 뭐라고 씩씩거리며 분한 듯 말했을 김유겸의 얼굴이 그려진 탓이다.

“조심히 들어가.”

-히잉….

진짜 개새끼도 아니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기가 팍 죽었다. 주인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사랑해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와 똑같았다. 이진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낮 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아 차가운 공기를 잔뜩 머금은 실내가 오늘따라 왜인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내일 보자.”

아까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말을 다시 꺼내놓았다. 솔직히 이걸로 해결될까 싶기는 했지만, 역시나 반응은 엄청났다. 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단순하기는. 이진언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내내 떠날 생각을 않는다. 무표정하면 까탈스러워 보인다거나 한발 더 나아가 무서워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잘 자요.

액정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달았다. 아쉬운 마음 그득한 채 김유겸이 전화를 끊었음에도 이진언은 한참이나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귓가에 맴돈 김유겸의 목소리가 사그라지는 게 아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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