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1/30)

2.

“김유겸.”

“…선배.”

결국, 김유겸의 무대행이 확정되었다.

화를 낼 게 뻔해 그동안 김유겸은 이진언을 피해 다녔다. 평소라면 하루에도 열댓 번씩 전화해서 선배, 선배, 선배 했을 애가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오늘 강길태가 박지운에게 뻐기듯이 김유겸이 전화를 걸어 무대에 올라가겠다고 전해왔다고 통보하는 걸 이진언이 직접 들었다. 순간 이진언은 빡침이 머리끝까지 끓어올랐다. 바로 김유겸을 찾아 나섰다. 실음과 연습실에서 축제 때 부를 노래를 연습 중인 김유겸의 모습을 보자마자 표정이 사늘하게 식었다.

“너는 내가 우습지.”

“…….”

얼굴을 보자마자 말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나갔다. 왜 김유겸이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이진언 한정으로 김유겸은 한없이 약자가 된다는 걸 둘은 미리 인지했었다. 자신 때문에 학생회장에게 대거리를 시전한 모습을 어떻게 보았는지도 대충 짐작됐다. 김유겸의 생각의 길이 어떤 루트를 통해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쉽게 유추 가능했지만, 용납하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무대 올라가기 싫다며. 박지운 좀 말려달라며. 해달라고해서 다 막아주고 쉴드 쳐줬더니, 뒤통수를 이런 식으로 치네.”

제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이진언은 고함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곤조곤한 말투로 조용히 경고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번 왜 지금처럼 행동했는지 설명해보라는 뉘앙스의 말에 김유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지만, 이진언에게는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일을 도모했다.

“왜 꿀 먹은 벙어리야. 말 안 할 거야.”

이진언이 재촉했다. 언제까지 입 다물 거야. 화가 잔뜩 묻어난 목소리가 김유겸을 독촉했다. 김유겸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작은 손이 올라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넌 내가 우습지.”

두 번이나 같은 소리를 지껄인 이진언의 얼굴이 사늘하게 식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표정을 너무나 딱딱하게 굳힌 이진언의 태도에 김유겸은 심장이 쿵 추락했다. 화를 내리라고 예상이야 했지만, 지금과 같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이진언의 얼굴에서는 “실망”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읽혔다. 한사코 이진언이 자신에게 실망하라고 이번 일을 자행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아닌데 왜 이런 짓을 해.”

“선배.”

“제대로 변명해. 나 오해하지 않게.”

평소의 이진언이라면 지금과 같은 일에 변명하라고 하기보다는 통보하고 관계를 단절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진언은 경고를 두 번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단 한 번으로 모든 상황을 조절했다. 남들이 판단할 때는 단 한 번의 경고로 인연을 정리하다니 너무 야박한 처사 아니냐고 할 법했지만, 김유겸은 안다. 경고하기 전까지 이진언이 상대를 얼마나 많이 인내해주는지를.

“싫어서 그랬어요.”

“뭐가.”

“…선배랑 강길태 선배가 말 섞는 거요.”

“…….”

“어리다고 해도 할 말은 없어요. 그런데 진짜, 너무 싫었어요.”

“야.”

솔직한 말로 이게 전부다.

김유겸은 이진언이 자신 이외의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게 싫었다. 상대가 강길태라면 정말 극혐이었다. 강길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었고, 웬만해서는 반대표를 받지 않을 주제였다. 그런 사람과 자신이 죽고 못 사는 선배가 의견 대립하며 멱살까지 잡혔다는 사실을 김유겸은 견디지 못했다. 하물며 두 사람이 의견 대립을 했던 이유가 자신이었음에야.

자신이 고집을 꺾지 않으면 강길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진언을 괴롭힌다. 원래부터도 이진언을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다는 걸 알고 나니, 자신의 태도가 강길태에게는 좋은 구실과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빌미로 강길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진언을 괴롭힐지 알지 못했고 또, 이진언의 성격상 앞으로 강길태가 도발해오는 짓거리에 모두 대응하리라는 걸 알았다. 원래가 이진언은 누군가가 도발한다고 해도 피식 한번 비웃고 말지, 대거리는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선배가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보다, 선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랑 말 섞는 게 더 싫었어요.”

어린 마음이었다. 김유겸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박지운과 대화하는 모습에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로가 워낙 친한 사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박지운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강길태는 달랐다. 강길태는 이진언에게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이진언이 강길태에게 지닌 감정이 긍정적인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싫다. 이진언이 다른 “남자”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견딜 자신은 솔직히 부족했다.

안다,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김유겸.”

“욕해도 돼요. 미친놈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그렇지만 이게 제 진심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던 애가 지금은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이진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화내도 돼요. 정말 이게 내 진심이니까. 표정에서 감지된 언어는 그랬다. 김유겸은 지금 이진언 앞에서 자신의 마음 밑바닥까지 죄 드러낸 후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수치스럽고 창피하다고 여겨 부끄러워하겠으나, 김유겸은 달랐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까지인지 각인이라도 시키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진언은 후, 하고 숨을 내어 쉬었다.

“욕 안 해. 미친놈이라고도 생각 안 해.”

“선배.”

“아, 화는 났다. 너는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내가 왜 선배랑 싸우면서까지 너 쉴드 쳐준 건지, 정말 몰라?”

“…….”

김유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어떠한 시점을 기점으로 자신을 대하는 이진언의 태도가 변화하였다. 단언컨대,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유들유들해졌다. 전에는 다가오면 물어버릴 거야, 라는 눈빛을 발산하던 이가 이제는 눈에서 독기가 많이 빠졌다. 이진언이 변화한 게 다 자신 때문인 거 같아서 김유겸은 요즘 가슴이 좀 몽글몽글하다.

그래서 지키고 싶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과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정한 행동으로 가슴 떨리게 만드는 이진언을.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 한 명에게는 걱정을 끼치면 안 되고, 얼굴에 웃음만 나게 해줘야 한다는 신념은 이제껏 한 번도 변화하지 않았다. 상대가 이진언이라도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예요.”

“김유겸.”

“그래서, 나가는 거예요.”

지키고 싶어서. 지켜야만 해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서, 권력을 쥐지 못해서, 지금과 같은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기 그지없다. 어느새 이진언을 향한 정의가 두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지정됐지만, 김유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진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 감정이 아니면 절대 타인에게 지금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겠다.

“선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서예요.”

“…….”

잠깐, 김유겸의 말에 숨이 막혔다.

이제껏 누구도 김유겸처럼 말해주지 않았다. 모두들 너 때문이라고 했다. 저가 원해서 이리 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네 존재 때문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무용했다. 이변을 보지는 못했다. 누구든 똑같았다. 전부가 동일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어 종국에는 이진언도 포기했다. 누구를 설득시키는 건 힘든 일이었고, 이진언도 사람인지라 지쳐갔다. 누가 뭐라든 침묵하고 대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내가 떳떳하니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김유겸은 달랐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을 해준다.

모든 일의 원흉을 저에게 뒤집어씌우던 과거의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양상이었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조차도 저를 애물단지 취급했다. 왜 하필 거기에 가서. 피해자인 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었다. 그런 말 하나가 얼마나 제 가슴에 크게 생채기를 만들어 내는지 모르고 본인들이 받은 상처에만 급급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이진언에게 전가했다. 그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한 이진언은 모진 바람에 날아오는 돌팔매를 마냥 맞았다. 사실 그것 말고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화, 많이 났어요?”

올바른 일을 하고도 제 눈치를 보며 입술을 깨무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정말이지 불가항력이었다. 가슴이 뭉클거리고 코끝이 매웠다. 현재와 같은 일이 발생할 때 타인에게 단 한 번도 주체가 아닌 도움의 개체로 지적받지 않아서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마냥 고맙다. 네가 내게 지닌 마음이 예상보다 크구나 싶어서 버겁다가도, 너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될 때면 가슴이 너무 가파르게 뛰어서 스스로도 어쩌면 좋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은 꽉 안아주고 싶다.

“어어어, 선배?”

“…….”

이진언은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김유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머리를 숙여 어깨에 고개를 비볐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안겨 오는 이진언의 몸에 김유겸이 놀랐다. 같이 마주 안아주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멍하니 서서 팔을 들어 등 뒤로 두르지도 못하고 끄응 하는 이상한 소리만 내뱉었다.

“지지 마.”

“네?”

“이겨줘.”

지고 말고 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쩌면 무대에 오르겠다고 한 시점에서 강길태에게 패했다. 인정하지 않았다. 아직 반전의 기회는 유효하다. 우리를 위해 무대에 오른다고 하는 김유겸이니, 강길태가 김유겸을 무대에 오른 건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면 된다. 사실은 모두에게 민폐라 얌전할 테지만, 말이나 한번 해봤다. 말이라도 해야 속이 좀 시원해질 거 같아서.

“지지 말자, 우리.”

이기려고 하는 주체는 명확하지 않았다. 당장은 강길태였지만, 훗날에는 더 큰 누군가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 사회이거나 규칙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법률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앞을 방해하는 무엇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래도 지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둘이서 함께라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이진언은 피식 실소했다. 정말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어디 제가 이런 치기 어린 생각으로 인해 움직였던가. 없다. 그런 적은 정말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존재하지 않았다.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이 김유겸이라는 아이는 대단했다. 절친이라는 박지운도 뚫고 들어오지 못했던 단단한 제 철벽을 단숨에 파괴했다. 붕괴했다. 주저앉게 했다. 말뿐이라도 안심하고 안도하게 만든다. 이래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존재하는가 보다.

“이기고 돌아오면 뭐 해줘요?”

이진언이 온몸을 자신에게 의탁해오자 김유겸이 불안한 마음을 소거하고 생긋 웃으며 질문했다. 손을 들어 자신의 넓은 어깨에 한껏 기댄 이진언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주었다. 어쩜 이 사람은 뒤통수도 이렇게 예쁘지. 팔불출적인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들보다 동그란 뒤통수에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좋다. 정말은 이러고 하루 종일 안고 싶다. 이진언만 협조해준다면 실현될 꿈 같았다.

“뭘 원하는데. 뽀뽀라도 해줘?”

천연덕스럽게 상황을 모면하는 김유겸의 질문에 이진언이 키들키들 어깨를 들썩이며 반문했다. 솔직히 지금처럼 요구하면 시끄러워나 미쳤니. 라는 대답이 들려올 거라고 예상해서 지금 이진언의 말이 뜻밖이었다. 놀란 김유겸이 이진언의 어깨를 부여잡고 자신의 몸에서 유리했다. 얼굴이 마주하자 키득키득 웃는 이진언이 보였다. 김유겸은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지금 표정 바보 같아.”

투박한 타박의 말이 들렸다. 그제야 김유겸은 고개를 도리질 쳐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후려치는 멘트를 하는 이진언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의도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미리 인지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어장 속 물고기처럼 헤엄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주세요.”

“뭘.”

“뽀뽀 말고 키스. 선배가 먼저요.”

생각해보면 둘의 스킨쉽은 잦았다. 전부 김유겸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지난번에 한 번 그런 건 물어보지 말고 하라고 허락했더니 정말 김유겸은 둘만 남으면 이진언의 입술을 쪽쪽 빨아댔다. 함께하기만 하면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진언도 곤란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얼마든지 수용했다. 김유겸이 안달이 날 만도 했다. 희망을 지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나 이진언이 먼저 키스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쩌면 김유겸이 서운했겠구나 싶었다.

“…그래.”

입술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이진언도 모르지는 않았다.

김유겸도 아니까 요구한다.

상이든 약속이든 어쨌든, 이진언이 먼저 스킨쉽을 시도하게 되면 두 사람 사이는 정의된다. 말로 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형성된다. 이제 와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원래도 마음으로는 김유겸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고 판단한 이진언이었지만, 상대에게 이러한 제 생각을 표출하며 견고히 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것을 이진언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뽀뽀 말고 키스. 내가 먼저.”

해줄게. 이진언이 허락했다. 김유겸의 입꼬리가 서서히 실룩이며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얼굴 전역에 퍼지는 미소에 이진언도 풋 웃음이 났다. 굳이 즐겁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얼굴의 확연한 미소에 이진언의 입꼬리도 실룩샐룩 올라갔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정돈했다. 너무 풀어져 해이한 표정을 짓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람들이 의심하니까, 라는 이유는 젖혀두고라도 이러는 제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흐흐흐흐, 진짜 좋아요. 정말 좋아요. 벌써 축제날만 기다리게 될 거 같아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하는 말마다 핑크빛인 김유겸을 옆에서 관람하노라면 제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축제가 곧이라 한창 연습해야 하는데 쳐들어온 제가 밉지도 않은지 김유겸은 옆에 앉아서 이진언의 작은 손을 마음껏 주물럭거렸다. 이 손이 뭐가 대단하다고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주물럭거리는 김유겸이 이진언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뭐 부를 건데?”

“비밀이요.”

“어쭈?”

“진짜 진짜 비밀이에요. 선배라도 못 알려줘요.”

뭐 얼마나 거창한 노래를 부르려고 비밀타령 하는 김유겸을 보고 이진언은 피식 웃었다. 그래, 말하지 마. 대신에 나 기대한다? 장난처럼 툭 던지자 이내 배시시 한 미소가 김유겸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나 당신이 너무 좋아 죽겠어요-, 란 빛을 띤 얼굴이 어여뻤다. 너는 내가 뭐가 좋다고 하기 싫은 일을 자처해서 해가며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걸까. 문득문득 드는 의문과 안쓰러움을 뒤로 하고 이진언은 웃었다. 마냥 웃었다. 불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좋아해요.”

손을 만지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김유겸은 또 한 번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이번에는 이진언의 심장이 뛰었다.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느껴졌다. 저를 위해서 원치 않는 무대에 오르고, 다정한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저를 보면서도 때문이 아니라 위해서라고 표현하고, 마지막에는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뭐 이런 애가 어디서 나타나서 이러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이진언을 몰고 간다. 절대 도망하지 못하게 옭아맨다. 전이었다면 이러한 관심과 행동이 부담스럽고 싫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좋았다. 어디까지 네가 진심을 표현하여 나를 당혹하게 만들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아.”

손을 들어 눈을 가로지르는 김유겸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혹시라도 이진언의 행동에 방해가 될까 봐 김유겸은 가만히 자리에서 부동이었다. 작은 배려였지만, 이진언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다정이 베이스인 김유겸의 성격은 이진언에게만큼은 상냥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 마음을 유지할 것인지 예측은 되지 않았지만, 이진언은 되도록 김유겸이 변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길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누구도 저에게 원망하지 않고 너를 위해 살겠다고 해준 이가 부재해서 더 그랬다.

“고마워.”

좋아한다는 말은 아직도 용기가 없어 배설되지 못했다. 대신에 이진언은 제가 가능한 최고의 대답을 해주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에 고맙다는 화답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이었고 거절인 것 같지만, 그래도 김유겸은 안다. 지금의 대답이 이진언에게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더 해주세요.

“까분다.”

“아니이, 그래야아, 없던 힘도 나…?!”

옛날이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때 정말 짜증 난다는 표정이 목격됐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라서 한번 말이나 해봤다. 역시나 이진언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더는 타박하지 않았다. 대신에 쪽, 보들보들한 입술이 뺨에 와 닿았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에 김유겸은 얼이 빠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멍한 표정의 김유겸을 뒤로하고 이진언은 실음과 연습실을 나왔다. 곧 김유겸의 기쁨에 찬 포효가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

축제 때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를 노래는 정해졌었다.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다가 우연히 듣게 된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버스에서 내려 찾아본 가사를 보고 더 마음에 들었다.

가사는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자신이 이진언이라는 사람에게 지니는 마음의 대변이었다. 듣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이 노래를 언젠가 이진언에게 제대로 불러주고 말리라고 다짐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이진언이 이런 노래를 불러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예상했다.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덤덤한 성격의 이진언이라서 남들이 연애할 때 경험하는 알콩달콩한 행동이나 꽁냥거리는 행위들을 닭살 돋아 하리라는 걸 알겠다. 알기는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들려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축제는 김유겸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저 때문에 결국은 무대에 오르는 모양새가 된 지금에 이진언은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은 이진언을 무대로 이끈다. 자신의 선곡이 비록 저에게 다소 느끼하고 부담스럽다고 하여도 이진언의 성격상 노래가 완료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겠다. 김유겸이 노리는 건 바로 그거다.

어찌 보면 얌체 같고 기회주의자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는 계략이라고 평가당할 일이라는 것도 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자각보다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진언에게 자신의 마음을 영영 진지하게 전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행동을 종용했다. 김유겸에게 이번이 나름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다.

“연습 잘 돼 가냐.”

“목 나갈 거 같아요.”

“그러길래 왜 나간다고 나대, 나대기를.”

축제가 시작되기 바로 며칠 전에 출연이 확정된 터라 제대로 된 연습을 할 시간이 부족했다. 급하게 방송부에 선곡을 알려주고 어렵게 연습실을 찾았다. 다행히 전공 교수님이 김유겸을 예쁘게 봐서 공강 시간에는 연습실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시험 기간이면 연습실에 틀어박혀 노래를 부르는 게 일인 사람이 자신이라지만, 이진언에게 연락할 시간까지 아껴가며 연습에 매진이었다. 이진언은 이런 김유겸의 결정을 존중해 보채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박지운은 좀 달랐다.

아무래도 박지운은 본인 때문에 김유겸이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얘기해봤자 듣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김유겸은 박지운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연습할 때마다 박지운이 바리바리 싸 오는 간식을 거절하지 않은 건 그래서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배가 고파지기 마련이라 이런 박지운의 방문이 반갑기까지 했다.

“선배는요?”

“암말 안 해.”

속으로는 연락하고 싶어 죽겠는데 혹시라도 실수하게 될까 봐 김유겸은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이런 김유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라서 박지운도 이진언도 뭐라고 보채지는 않았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인지 서로 조심하는 지금이 약간은 속상하기도 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자신의 일로 속상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니라서 정말정말 다행이었다. 혹자들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 아무런 제스처도 하지 않는 이진언의 모습이 원망스럽지도 않느냐고 의문할지도 모르겠다. 김유겸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원망의 마음도 들지 않았고, 축제 당일까지 제발 이진언이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기를 소원했다.

“너네 둘이 뭘 하는 건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본인이 사 온 주전부리를 맛있게도 먹는 김유겸을 보면서 박지운은 혀를 쯧쯧 찼다. 박지운의 퉁명스러운 투박에도 김유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했다.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질문이었다. 너 이진언 선배랑 뭐냐. 사겨?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의문에 대한 답을 아직은 하지 못했다. 이진언이 요즈음 자신을 많이 받아준다는 걸 알지만, 그것을 사귄다고 확장해석하기는 부족했다.

“고백할 거예요.”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의문에 김유겸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박지운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손에 들린 빵을 김유겸은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방금 일생일대의 결심을 발설한 사람치고는 너무나 여상한 행동이었다.

고백은 모험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겸은 지금의 상황에 자신은 솔직히 부족했다. 지금을 허락했다고 해서 이진언이 고백도 수락하리라는 보장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불안감이 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한번 부딪쳐 보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다. 이진언의 거절도 염두에 뒀다는 의미다.

사실 거절은 이미 한 번 경험했다.

두 번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행하기로 한 건 자신이었다. 모험하기로 하였다. 남자가 고백하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내가 고백을 했을 때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넘치는 경우와 두 번째는 고백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때. 지금 김유겸은 전자라기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좋아한다는 말을 그동안에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어쩌면 이진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파이팅이다.”

고백을 준비 중이라는 자신의 말에 박지운은 심드렁하게 맞장구쳤다. 너무 이르다든가, 너 제정신이냐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박지운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표현하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지금의 사랑이 사회적인 측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잘 됐으면 좋겠다.”

“네에-.”

빈말로나마 하지 말라든가 세상의 편견을 어떻게 견딜 거냐라든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서 더 좋았다. 진심이든 위로든 잘 됐으면 좋겠다는 응원을 들은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누가 뭐라고 하든 포기하지 않을 예정이기는 했지만, 최소한 비난을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고백에 정당성이 부과된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사 온 주전부리를 전부 먹어 치운 것을 확인하고 박지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유겸도 같이 일어났다. 아니, 나오지 마. 퍽 예의 바른 김유겸이 마중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하자 박지운이 손사래를 쳐 만류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본인이 싫다 하니 더는 마중하지 않고 김유겸은 자리에서 조용히 작별했다. 박지운은 미련 없이 연습실을 떠났다.

“어.”

실음과 연습실을 나와서 핸드폰을 꺼내 톡톡 액정을 두들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벨 소리가 울렸다. 박지운은 화면 가득 뜨는 발신자의 이름에 입술을 삐죽이고는 전화를 받았다.

=다 먹어?

“그럼 다 먹지. 배에 거지가 들었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사실 조금 전에 김유겸이 해치운 주전부리는 이진언 발(發)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행사 기간에 끼니도 거르고 연습할 게 분명한 김유겸을 걱정한 결과다. 제가 직접 사다 주고 싶었지만, 연습실을 방문하면 김유겸이 불편해할 게 자명해 박지운에게 부탁했다. 박지운은 뭐 하는 거냐고 투덜대기는 했지만, 다른 누구보다 두 사람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라서 얌전히 이진언의 부탁을 수락했다.

=다행이다.

“…….”

다행을 말하는 목소리에 안도가 감지됐다. 박지운은 조용히 친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진언이 누군가의 안위를 현재처럼 걱정했었던가 복기해보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보는 친구의 모습에 박지운은 걱정되기도 하는 한편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백할 거래.”

김유겸의 고백은 이미 기정 된 사실이었다. 비단 박지운과 이진언뿐만 아니라 최근에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생각했다. 단순한 선후배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치대는 김유겸을 이진언이 쳐내는 모습을 많이 보여 다행히 모두들 두 사람을 완전한 게이라고 결론 내지는 않았으나, 나름 한 눈치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진언을 향한 김유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때 변수는 김유겸에게 지닌 이진언의 마음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알아.

박지운에게는 김유겸의 고백이 기정 된 것처럼 이진언의 수용도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김유겸이 유일했다. 박지운으로서는 김유겸이 왜 이번 일에 겁을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나 김유겸은 본인보다 이진언을 모르는 게 맞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하나같이 고백을 수락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하는 게 이상하다고 입 모아 말할 정도로 이진언은 김유겸에게 약한 면모를 자주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 수고하고.”

=어, 너도 고생했다.

빠르게 용건이 끝난 전화를 종료하며 박지운의 입가에는 한숨이 맴돌았다. 더는 두 사람이 삽질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막상 정말 사귀기 직전에 당면하자 박지운의 마음은 조금 싱숭생숭해졌다. 지금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으면서도 박지운은 한 가지를 바랐다. 부디 이 두 사람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소원한다. 까맣게 변한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박지운은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말로 축제가 곧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