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0)

8.

선배, 선배, 선배, 선배.

꿈결에서도 김유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진언은 눈썹을 꿈틀였다.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천장을 응시했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귀가하는 상황이 지연됐다. 순간 지금 귓가에서 저를 호명하던 음성이 실재한 것인지 아니면 뇌 내 망상인지 판단되지 않았다.

“어, 선배 일어났어요?”

“…응.”

꿈이 아니었다. 멍하니 가만 누워있다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훌쩍 상체를 일으키니 어느새 제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김유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음식이라도 했는지 김유겸 뒤의 가스레인지에는 양은 냄비가 올라가 보글보글 뜨거운 김을 내며 끓는 중이다. 집에 무언가 먹을만한 재료가 남았던가 복기해보지만, 언뜻 상기되지 않아 이진언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라면 끓이고 있어요. 선배 해장해야죠.”

아, 라면.

음식의 정체를 인지하고 나서야 안도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김유겸의 음식 솜씨는 영 신뢰하지 못했다. 한 번도 김유겸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데서 온 불신은 나름의 근거가 존재했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김유겸은 그동안 음식 솜씨가 썩 훌륭하다고 평할만한 면모를 보이지는 않았다.

“잘 잤어요?”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서글서글한 얼굴로 저에게 말을 붙이는 김유겸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애에게 괜한 말로 분위기를 침체되게 할 이유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정의되지 못한 지금의 분위기에 의문이 들지만, 일단 이진언은 너무나 제 앞에서 방긋방긋 웃는 김유겸의 얼굴이 행복해 보여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한다.

“씻고 와요.”

어서. 김유겸이 이진언을 독촉했다. 마치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듯 구는 김유겸의 행동에 이게 뭐지 라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이진언은 욕실로 방출됐다. 얼떨떨한 마음에 샤워기 앞에 서서 물을 맞이했다. 이래야 정신이 좀 돌아올 거 같다.

‘선배, 선배, 선배, 아, 윽, 으으읍….’

‘하아, 아, 자, 잠깐만, 유…으윽-!’

‘잠깐, 하아, 읏, 없, 어, 으으읍, 하아아아, 나, 멈추면, 흐읍, 나, 죽어요.’

“…아.”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노라니 어젯밤의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 미친. 이진언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유겸을 좋아한다고 인지했고, 그래서 행동의 선이 희미해졌다. 그것은 인정한다. 조만간 다시 벽을 세울 예정이었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김유겸은 이진언이 벽을 세울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타이밍이 좋았다. 벽이 허물어진 사이를 틈타 치고 들어온 김유겸을 내보내는 것도 일이었다. 하아, 한숨이 짙게 흘러나왔다.

어제의 일이 발생했는데 김유겸을 부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진언은 표리부동한 인간을 경멸했다. 그러한 치들을 계속 멸시하려면 스스로가 다른 양상을 유지해야만 한다. 머리에서부터 내려와 콧등을 가로질러 입술에서 뚝뚝 낙하하는 물방울을 노려보면서 이진언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김유겸이 신난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했다.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김유겸이었으니, 어젯밤의 행위를 허락이라고 판단했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겠다. 정말은 모르겠다. 어젯밤에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감정에 휩쓸려 돌발행동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젯밤은 예외다.

사실은 술을 너무 마셨다.

“…어쩌려고 그랬냐, 이진언. 이 미친놈아.”

응낙할 예정이 아니었다. 우는 것만 같은 김유겸이 안쓰러워서 미칠 것만 같은 감정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는 뜻이다. 수락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지만 문을 연 이유는, 비겁했지만 정말 이게 다다.

변명이라는 것을 안다. 비겁한 변명으로 도망가려 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인식한다. 이러면 안 된다. 제 손짓 하나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왕복하는 김유겸에게 어젯밤의 행동은 분명한 승낙이었다. 그것을 몰랐다고 하면 거짓이다. 이진언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은 결심이 부족하다.

“선배 진짜 오래 씻는다.”

안에서 상대는 알지 못하는 고뇌와 번뇌의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이진언의 얼굴은 퀭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유겸은 신이 나서 이진언을 앉은뱅이 밥상에 앉히고 라면을 놓았다. 이진언의 바로 앞에 자신도 앉은 뒤 작은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여준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거 같은 행동에 이진언이 불만의 표시로 눈썹을 쓱 추켜 올리자, 김유겸은 헤헤 웃는 낯으로 대꾸한다.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지금 이진언이 딱 그러한 꼴이다.

“먹자구요.”

무언의 항의를 요란한 발성으로 무마한 김유겸은 얼른 고개를 숙여 라면을 후루룩 먹었다. 그런 김유겸의 행동을 고개를 기울여 잠시 응시하던 이진언은 피식 실소했다. 욕실에서의 번뇌는 김유겸과의 결합으로 허공으로 기화되어 증발하였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다. 전에 한번 박지운에게 고한 대로 이대로 연인이라는 인연으로 명명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맛있네.”

“그쵸, 그쵸! 저 라면 진짜 잘 끓이거든요.”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에도 뿌듯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환히 웃는 낯을 하는 김유겸을 보며 이진언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어젯밤의 일에서는 도망가지 못한다. 도망가면 안 된다. 일이 진행됨에 결론은 하나라는 걸 인지했었다. 더는 김유겸이라는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실수냐고 누군가 질의한다면 재빠르게 맞다고 하지 못하는 저를 발견한다. 명백히 사건 뒤에 발생할 후폭풍을 인식하고 벌인 행위였으니, 이제 와 후회한다고 한들 물리지 못한다.

여기까지 분별이 완료되자 욕실에서는 부족하였던 결심이 굳건하게 세워졌다.

저도 김유겸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고, 김유겸 또한 같은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이 동일한데, 결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마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예정이다. 특히나 제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스스로 잘 알아서 김유겸 외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지 못한다. 제 이런저런 기준을 모두 꿰뚫고 들어온 김유겸이 그러니까 별종이라는 소리다.

“…빨래도 했네.”

욕실에서 한바탕 서로의 몸을 밀착해서 애무하고, 사정하고, 키스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샤워한다고 들어간 게 무색할 정도였다. 감기 걸린다고 김유겸이 수건을 가져와 물기를 제거한 뒤, 둘은 침대로 이동했다. 침대 위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서로의 성기를 어루만지고, 입에 물고, 빨고, 핥고, 깨물고. 삽입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가능한 모든 페팅이란 페팅은 모두 행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묽은 액만 분출될 정도로 아래는 사출하기를 거듭했다.

기진맥진한 이진언이 기절하다시피 잠에 의식을 편입하면서 확인한 시각은 아침 5시가 넘었었다. 서서히 주변을 푸르게 물들이는 박명이 기지개 켤 시간이었다. 이진언은 도대체 어제 몇 시간 동안이나 김유겸과 성적인 행위를 하였던가에 대한 의문을 잠시 침식했다. 괜히 상기해봤자 귓불만 붉어질 게 자명하다.

“네, 선배가 너무 곤히 자서요.”

분명 같은 횟수로 사정했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고 기억한다. 사출 자체가 오랜만이었던 이진언이었던지라 면역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노곤함이 여즉 풀리지 않아 온몸으로 피로가 집중됐다. 반면, 김유겸은 산뜻한 얼굴이었다. 조용히 숙면 취하던 이진언 대신 침대 커버를 수거해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돌린 사실로만 유추해도 지금 김유겸의 몸에 피곤이 축적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겠다.

“수고했어.”

“당연한 거예요.”

함께 밤을 보냈다. 김유겸은 성격상 이럴 때 뒤처리를 주로 자신이 했다. 그게 편했다. 이제껏 연애했던 아이들은 그래서 김유겸을 좋아했다. 다정했고, 다감했다. 연인이라고 명명된 사이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알콩달콩했던 연애가 이별로 이어진 이유는 그때그때 상이했지만, 결코 자신이 먼저 구실을 주지는 않았다고 김유겸은 장담한다.

“몸은 좀 괜찮아요?”

라면을 같이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일어나는 이진언을 김유겸이 저지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설거지는 하게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부득불 제가 하겠다고 우기는데, 갑자기 김유겸이 이진언의 상태에 대한 물음을 투척했다. 다분히 짓궂은 의도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이진언이 샐쭉 얼굴을 째려보는 사이, 홱 설거지를 낚아채는 김유겸이었다.

“야-,”

“어제 저 때문에 힘썼잖아요. 쉬어요, 좀.”

능글맞게 고하고는 김유겸은 몸을 회전했다. 음음음, 허밍까지 하며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뒤에서 허, 허소 짓던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류해도 안 된다는 걸 알겠다. 이진언은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팔짱 끼고는 뒤에서 김유겸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스펀지에 야무지게 세제를 짜서 북북 거품 내던 김유겸은 뒤를 힐끔 일별하더니 이내 씩 웃었다. 쟤가 왜 저러나 싶어서 멀뚱히 응시하던 이진언의 곁으로 몸을 밀착한다. 곧 쪽, 소리 내며 입술과 입술을 가볍게 접촉하고 분리된 김유겸은 손을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뽀득뽀득한 소리가 나며 설거지가 시작됐다.

“…잘하네.”

얼굴은 이런 집안일에 무능하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대부분 또래의 아이들은 집안일에 무관심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김유겸은 달랐다. 뽀득뽀득하게 냄비를 설거지하는 것은 물론, 마른행주로 물기를 제거하고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제가 또래에 비해 유난히 깔끔 떠는 성격이라는 걸 차치하자면, 상당히 정리정돈 잘한다고 칭찬할 법한 실력이기는 했다.

“당연하죠. 집에서 저 설거지 담당이라구요.”

조그마한 칭찬에 뻐기듯이 자랑하는 모양새가 마치 받아쓰기 백 점 맞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같아 이진언은 이번에도 픽 실소했다. 이진언의 반응에 김유겸은 뭐가 좋은지 헤헤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참 요새 따라 조상들의 지혜의 산물인 속담을 많이 떠올리고는 한다.

“몸은요?”

아까부터 김유겸은 이진언의 몸 상태가 괜찮은지에 대해서 자꾸만 관심을 보였다. 어젯밤의 일이 신경 쓰인다는 뜻이었다. 과거의 상처가 상처인데, 혹여나 자신이 그때의 상처를 상기하게 했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묻어난 질문이었다. 김유겸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알 거 같아서, 이진언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구도 저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괜찮아.”

거짓이 아닌 마음을 건넸다. 이진언의 일축에도 김유겸의 얼굴에 드리워진 걱정의 그늘은 소멸하지 않았다. 자꾸만 안절부절못하며 제 곁을 맴돌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무엇을 염려하는지 너무나 명확한 상황에서 차마 직설적으로 발설하지 못하고 낑낑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주인이 아플까 봐 걱정하며 주위를 맴도는 강아지 같았다. 도대체 이 아이를 보며 몇 번이나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강제로 한 거 아니야. 어제 말했다시피 나도 좋았고.”

확언해주었다. 그제야 김유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다행이에요. 입 밖으로 나온 안심 발언에 이진언의 가슴이 애틋해졌다. 싫었다면 어제 거기까지 허락하지도 않았다. 김유겸은 이진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박지운에게 어제의 일을 발설한다면 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자리에서 펄쩍 뛰며 난리블루스를 출 일이었다.

“선배.”

“어.”

“좋아해요.”

“…….”

한 번 고백하고 났더니 두 번은 쉬운 모양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고백하는 김유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이진언은 가만히 그런 김유겸의 얼굴을 응시하기만 했다. 자신의 고백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상대가 원망스럽지도 않은 것인지, 김유겸은 내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종국에는 이진언도 픽하니 웃어버려야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니까, 진짜.

“그래.”

결론은 긍정이다. 지금 저렇게도 행복하다고 웃는 사람 앞에서 그만하라거나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이진언은 김유겸이 웃었으면 좋겠고, 스스로가 김유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김유겸이 낯간지러운 말을 하거나 다정하게 몸을 부대껴와도 거부는 하지 않을 예정이라는 소리다. 무엇보다 저가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김유겸과 함께하고 싶다.

“좋아해도 되는 거죠?”

“…마음대로.”

허락을 구하는 말에 응낙했다. 김유겸의 눈가가 아래로 휘더니 이제는 거의 광대와 맞붙으려 했다. 그만큼 웃는 얼굴이 예뻐서 이진언은 아무런 타박의 말도 하지 못했다. 내도록 김유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김유겸이 제 시선에 귓가가 천천히 붉게 물들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곧이어 들려온 자신을 너무 빤히 보지 말아 달라는 청에 픽 웃음이 났다. 무엇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너무나 확연하게 알아서.

“선배가 절 바라보면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요.”

표현해도 된다고 허하니 김유겸은 거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 낸다. 이대로 가다가는 김유겸이 아니라 이진언의 귓가가 붉게 물들 판이었다.

“그래서 절대 이것은 헷갈리지 못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심장이 지금처럼 뛰면 전 앞으로 어떡하죠? 꽤 심각한 고민이라는 듯 물어오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은 마침내 푸하하하 하고 파안대소했다. 저를 웃게 하기 위한 전략이라면 성공이었다.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인상 쓰며 한다는 말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런 거로 안 죽어, 라고 대꾸해줄까 하다가 왜인지 그런 것보다 조금 더 김유겸이 감동할 만한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적응해.”

“네?”

“익숙해지라고.”

허락했다. 네가 나를 좋아해도 돼. 나도 이제는 외면하지 않을게. 그런 뜻이었다.

잠시 이진언이 하는 말의 뜻을 해석하지 못했던 김유겸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곧 이진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지한 얼굴은 더없는 환희에 젖어 들었다. 선배! 팔을 가득 열어 이진언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는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어젯밤 이진언의 말처럼 벽이 정말 얇았더라면 아랫집이나 윗집 사람이 시끄럽다며 방문할 정도의 울림이었다.

“선배 너무 좋아요.”

좋아요, 좋아해요. 선배가 너무 좋아요.

허락하고 났더니 좋아한다는 말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린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던 유성우가 땅으로 하강하듯, 거치지 않고 쑥쑥 낙하하는 말의 최종 종착역은 역시나 확인하지 않아도 이진언의 곁이었다. 하나도 아끼지 않고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오는 표현을 만끽하며 이진언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와 함께하려면 표현에 익숙해져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만큼 김유겸은 사랑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선배 너무 예뻐요.”

예쁘다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김유겸은 이진언에게 표현했다. 마음이 정말 그랬다. 정말 이진언이 예뻐 죽을 거 같았다. 비단 어젯밤에 진한 스킨십을 허용해 주었다는 이유로 이런 기분이 든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서 너 참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웃어주는 모습이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저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불끈이었다.

“그래, 너도 예뻐.”

저를 감상하는 말에 화답했다. 다른 이가 하는 예쁘다는 단어는 이진언에게는 칭찬이 아닌 욕이었다. 김유겸은 달랐다. 얼마나 저를 좋아하는지 알아서 가능한 대답이었다. 눈에 가득 애정 담고 저를 보는 시선에서는 온정이 듬뿍 배어 나왔다.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애정뿐이었다.

좋아요, 좋아해요. 지금이 너무 좋아요.

단지 그거 하나.

“키스해도 돼요?”

해장으로 라면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도 내내 이진언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던 김유겸이 마침내 비장함을 각오한 음성으로 질의했다. 이진언은 가만히 김유겸의 얼굴을 보았다. 김유겸은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보기만 하는 이진언의 모습에 거절이라고 인지했다. 이진언이 싫은 건 하고 싶지 않았으니, 어젯밤과 같은 기적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겠구나, 쉽게 포기했다.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나, 이렇게 빠를 줄 몰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젯밤이 단 한 번의 기적이었다면 조금 더 충만하게 만끽할 걸 그랬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다시는 오지 않을 행운인 줄 알았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 하나하나 모두를 머릿속에 자세하게 각인해 둘걸 그랬다. 지금 김유겸은 후회막심이었다. 왜 어제 조금 더 즐기지 못했나 하는 한탄이 들었다.

“그런 건,”

마음 같아서는 입술 먼저 들이밀고 허락은 나중에 받고 싶었다. 김유겸은 인내했다. 생각처럼 해버리면 두 번 다시 이진언이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거 같았다. 그리되면 괴로워지는 것은 자신뿐이니, 지금은 인내만이 미덕이었다.

“---?!”

키스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이진언은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그대로 머리를 돌진해왔다. 쪽, 닿은 입술에 멍해지는 건 김유겸의 몫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앞에 별이 돌았다. 작은 입이 벌어지며 들어온 온기에 입안에 생기가 돈다. 얌전히 바닥에 눌어붙었던 붉은색의 욕망이 크게 요동한다.

“말하지 말고 해. 무드 없게.”

“하…!”

살짝 닿은 것이 아니고 깊게 한 번 윗입술을 빨아들였다가 놔주는 이진언의 입술을 가르고 나온 말은 김유겸의 입장에서는 뜻밖의 허락이었다. 김유겸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리며 허, 웃었다. 정말은 허락할지 모르고 청한 요구였다.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라면 미리 직면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말이나 한번 붙여봤다. 정말은 수락을 예상하지 않았다.

“선배는 진짜 저를 들었다 놨다 하네요.”

“그래서. 싫다고.”

“그럴 리가요. 더해주세요. 얼마든지 농락당해 드릴 테니까,”

밀어내지만 마요. 김유겸이 손을 들어 이진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내내 김유겸의 얼굴을 응시하던 이진언은 상대의 머리가 아래로 하강하자 눈을 감았다. 곧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맞물린 입술은 후퇴를 모르고 계속 앞으로 돌진이었다. 이진언은 입술을 열었다. 굳건하게 닫혔던 성문이 개방되자 정중한 침입자가 날래게 뛰어 들어왔다.

“하아---.”

짙은 한숨이 지척에서 감지됐다. 괜히 발끝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라 이진언은 김유겸의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체가 바싹 밀착됐다. 상대가 발기하는 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젯밤 맘껏 어루만지며 지겹도록 토정했음에도 위대한 청춘에 당면한 남자에게 발기는 이토록 쉬웠다. 마치 정액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듯 부풀어 오르는 하체의 느낌을 모른 척하고 계속 혀를 섞었다.

혀 상단을 서로 마찰하여 열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좁은 입안에 열이 생성되니 머리가 녹을 것만 같았다. 손에 자꾸만 힘이 들었다. 동시에 하체는 더 단단히 결합되었다. 하의 밖으로 상대가 얼마나 흥분하였는지를 고스란히 알아차릴 정도였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허리가 움찔거렸다. 살짝살짝 움직이는 몸놀림에 아래로 자극이 당겨왔다.

“그만, 유겸아. 그마아아아안.”

“……하아, 하아.”

이대로 진행했다가는 어젯밤과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만 같아 덜컥 두려워졌다. 간당간당한 이성의 끈을 먼저 단단히 부여잡은 것은 이진언이었다. 입술을 마주했던 얼굴을 옆으로 비틀어 주먹을 말아 쥔 손으로 김유겸의 어깨를 콩콩 때렸다. 실음과 연습실에서 잠든 박지운을 깨우기 위해 내리쳤을 때는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던 주먹이 오늘은 그때의 기색은 찾아보지 못하도록 여렸다. 김유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진언의 의지였다.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키스 중지 요구에 단단하게 엇갈렸던 입술을 뒤로 물리며 김유겸이 선언했다. 솔직히 안 된다고 하면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계속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유겸은 순순히 후퇴했다. 다만, 뒤로 완전히 퇴각하지 않고 잠시간 머물며 쪽쪽쪽하는 민망한 소리가 공기 중에 유포되도록 이진언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붙였다 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요. 아니면 전 수위를 모를 거예요.”

“유겸아.”

“의외로 저 연애에서 바보더라구요. 노력은 하겠지만, 음, 아마도 보장은 못 해줄 거 같아요.”

씩 웃으며 하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순간 아릿한 표정 짓는 이진언의 얼굴에 김유겸은 다시 쪽 버드 키스를 날렸다. 나쁜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따스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가자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매만지는 이진언의 모습은 김유겸의 심장을 울렁이게 하기 충분했다. 금방 키스를 끝내놓고서는 지금의 모습에 다시금 들끓는 욕망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말이지 이진언에 관한 한은 하나도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그만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하하.”

말은 그만하겠다고 선언했으면서 아래는 발딱 세운 언행 불일치에 이진언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김유겸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대꾸했다. 동성의 생리현상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물며 김유겸은 이진언을 좋아한다. 그런 상대와 몸을 이토록 가까이 접촉했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진언이 실망할 일이다.

“잠재울게요. 그러니까 잠시만.”

짙게 포개졌던 몸을 뒤로 물린다. 그대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인 김유겸은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곧 등이 일정하게 오르내렸다. 심호흡하는 듯했다. 이진언은 가만히 눈앞의 등을 응시했다. 너른 등이 움찔이며 감정을 침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왜인지 고맙고 미안해 이진언도 눈을 감았다.

유겸아, 좋아해.

아직은 대면해서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언젠가 순한 얼굴에 가득 환희가 들어차도록, 그의 눈앞에서 눈부시게 고백할 날을 꿈꾼다. 어렵게 입술을 열어 뜨거운 제 마음을 고하였을 때, 부디 김유겸의 얼굴이 이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짓기를 소망하였다.

***

“집에 가기 싫어요.”

김유겸은 정말 그날 온종일 이진언의 집에서 뒹굴뒹굴했다. 딱히 그러는 모습이 불편하지는 않았던 이진언이었던지라 김유겸을 방출해야겠다는 인지는 하지 않았다. 김유겸만 괜히 이진언의 눈치 봤다. 결국 김유겸이 귀가를 위해 이진언의 집을 나선 시각은 막차 시간이 근접해서였다.

“너 오늘까지 외박하면 도합 며칠째야.”

“음…잊었어요.”

“부모님 걱정하셔.”

“내놓은 자식인데….”

귀가가 싫어 칭얼대는 김유겸의 모습에 이진언은 실소했다.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잠은 한군데서 자야 한다는 철칙이 이진언에게는 있었다. 김유겸 앞에서 제 규칙이나 규율이 많이 위반됐음을 부정하지는 못하였으나, 이제라도 규칙을 유지해야 했다. 왜인지 제 규율이 앞으로도 번번이 김유겸이라는 아이 앞에서 무수히 탈선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빨리 가.”

현관에서 가기 싫다고 찡찡대는 김유겸의 엉덩이를 한 대 찰싹 때렸다. 김유겸은 금방 우는 시늉했다. 이진언은 굳건하게 버텼다. 김유겸은 이진언의 얼굴에 표출된 표정을 간파하고는 이내 인정했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지금처럼 단호한 표정을 한 이진언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갈게요. 내일 봐요.”

말은 작별이면서도 김유겸의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현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김유겸을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했다. 약간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이런 이진언의 속마음을 모르는 김유겸의 눈꼬리가 순하게 더욱 아래로 하강했다. 선배, 저 정말 가요? 눈빛이 질문했지만, 이진언은 모른척했다.

“흐음…갈게요. 아, 맞다.”

더는 이진언이 체류를 허락하지 않을 거 같아서 김유겸은 마지못해 몸을 물렸다. 그러다가 뭔가 지금 문득 기억났다는 듯 다시 이진언을 바라보았다. 뭐 때문이냐고 소리 내지 않고 질문하는 얼굴에 자리한 오동통한 입술 위로 순식간에 따스한 체온이 내려앉았다. 이진언의 몸이 흠칫 굳었다. 설마 굿바이 키스할 줄은 몰랐다.

“잘 자요.”

가벼운 키스 후 산뜻한 얼굴을 한 김유겸은 이번에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이진언의 자취방을 빠져나갔다. 탁, 하고 닫힌 문을 응시하며 이진언은 손을 들어 입술을 훔쳤다. 괜히 귓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 진짜,”

손을 들어 귓가를 매만지니 아니나 다를까. 열이 올라 뜨근뜨근했다. 이런 제 얼굴을 김유겸이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 아니다. 김유겸이라면 분명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이진언을 배려한답시고 못 본 척할지도 모르겠다. 의외의 구석에서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라서 이진언이 곤란해하는 걸 즐기는 성미 또한 아니었다. 이진언은 제 작은 두 손으로 손부채질하면서 열을 식혔다. 벌겋게 달궈진 얼굴에 응집된 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못 말릴 김유겸.”

작은 손이 얼굴을 덮었다. 귀 끝까지 상승한 열을 식히려는 의도였으나 불발했다. 아무래도 김유겸과 함께하면 제가 아니게 되는 거 같아서 혼란스럽다.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만 해도 솔직히 벅차서 여기서 더한 무엇이 스며들지 않기를 소원한다. 정말은 이뤄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저를 발견하게 되겠으나, 그것은 어차피 차후의 문제다. 지금 당장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이진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항상 비관적인 끝을 상상하는 제 성격이 저주스럽다.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나 사람들의 시선에 강제로 노출된 채 살아와서 낙관을 모르는 제 머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조금은 좋게 생각해도 좋으련만.

콩, 이진언은 김유겸이 빠져나간 현관을 바라보며 이마를 벽에 찧었다. 세기는 약했지만, 그래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는 되었다. 눈을 감으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가 생겨 먹기를 이렇게 생겨 먹어서 좋아한다고 자각한 상대에게도 살갑게 굴지 못하는 제가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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