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선배, 선배, 선배, 선배.
김유겸의 입에서는 연신 이진언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한시도 쉬지 않았다. 박지운이 같이했다면 귀에 딱지가 앉겠다고 기필코 한소리를 했을 정도로 김유겸은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딱히 그런 모습이 거슬리지는 않아서 이진언은 김유겸이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입가가 위로 올라가 방긋방긋 웃는 김유겸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지금을 제아무리 염세적으로 관망하는 이진언이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재밌었죠!”
방금 막 둘은 내기 농구를 끝마친 참이었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은 멀티 플렉스에 가까워서 아래로는 쇼핑센터가 자리했고, 위로는 놀 거리가 즐비했다. 한쪽 구석에는 농구대며 사격, 양궁 등이 가능한 게임존이 따로 있었다. 그것을 본 김유겸은 신이 난 얼굴로 이진언을 그쪽으로 이끌었다. 딱히 친구들과도 이런 곳에는 출입하지 않던 이진언이었지만, 김유겸의 흥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 너 농구 못하는 거 잘 알겠더라.”
“아,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라구요!”
농구하는데 김유겸이 내리 졌다. 나중에는 내기를 빙자한 음료수를 사기로 했는데, 결국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건 김유겸의 몫이었다. 이쯤 되니 이진언은 김유겸이 자신이 돈을 내려고 일부러 내기에서 진 건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고서야 자신만만하게 이곳에 들어와 놓고 한 판을 이기지 못할 리가 만무하다.
“네네, 컨디션이 안 좋았던 김유겸 씨. 그래서 다음은 뭘 하고 싶으신가요.”
따져 물을까 하다가 일단은 넘기기로 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슛하는 폼을 보니 어딘가 정말로 어설펐다. 특별히 신경 써서 그동안의 행적을 추적하지 않았던 터라 김유겸이 평소에 동기들과 어울려 축구니 농구니 하는 모습을 상기하지 못했다. 정말로 농구를 못 하든, 저를 봐준 것이든,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지는 않았으니 뒤로 넘기는 것이 가능했다.
“카페 가서 커피 마셔요.”
“너 커피 못 마시잖아.”
“선배가 좋아하잖아요.”
김유겸은 커피나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를 선호하지 않았다. 이진언은 환장했다. 둘이 때때로 카페에 가 담소를 나눌 때면 그래서 음료는 각양각색이었다. 용케도 그것을 기억한 이진언이 미심쩍은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김유겸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방어에 성공했다. 저녁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카페에서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싶었던 이진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자,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카페에 들어와 한적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유명 브랜드 카페는 아니라서 다행히 자리가 많았다. 잠깐 카운터에서 네가 내니 내가 내니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진언은 내기 농구에서 김유겸이 돈을 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해 지갑을 닫게 만들었다. 김유겸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진언이 선배임을 내세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데야 반항하지 못했다. 대신에 이진언 몰래 케이크를 하나 샀다. 이진언은 김유겸이 트레이에 들고 오는 케이크에 피식 실소했다.
귀여워서 봐준다, 진짜.
수작질이라고 명명하면 그럴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김유겸은 정말 순수하게 이진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수법이 다분히 고전적이고 올드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행히도 이해하고 넘길 정도는 되었다. 이제껏 교제를 여자와만 해봐서 마치 어딘가 그들을 꼬시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는 사실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맛있네.”
치즈케이크 위에 송송 올려진 초콜릿은 가루가 씹혔다. 진한 치즈와 초콜릿, 입안에 감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풍미는 제법 어울렸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어디서 이런 풍류를 들은 것인지 궁금한 선택이었다.
“그쵸, 여기 맛있댔어요.”
“검색도 하셨다?”
“헙.”
근처를 지나다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고심하고 고른 카페라는 티가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들어온 모양새가 정말 작정하고 나를 꼬시려고 하는구나 싶어서 기특하기도 했다가 안쓰럽기도 했다. 이진언은 눈앞에 놓인 접시 위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케이크를 잘게 잘라 쑥 앞으로 내밀며 슬쩍 눈짓했다. 네가 오자고 한 곳이니 너도 한입 먹으라는 뜻이었다.
뜻밖의 행동에 김유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내 사르륵 풀리며 예쁘게 반달 모양으로 접혀 웃었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와 광대가 볼록 튀어나온 것이, 아 얘가 지금을 무척이나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얼굴을 처음 본 것과 같아서 이진언은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그래, 맛있네.”
입안에 쏙 넣어줬던 포크를 밖으로 빼내며 이진언이 무심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선은 바로 주지 않고 옆으로 흘렸다. 김유겸은 아까부터 지금이 너무 좋다는 듯 계속 방싯방싯 웃었다. 정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눈앞에서 나 행복해요-빔을 쏘며 웃는 얼굴에 이진언도 마음이 흐물흐물 녹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정말 김유겸에게 깜빡 넘어가게 생겼다.
“으아, 늦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사람들은 남자 둘이서 카페에 앉아서 수다 떠는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는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김유겸은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이진언에게 말 걸고 싶어서 안달이었고, 이진언은 받아주었다. 때로는 이진언이 말하고 김유겸이 듣기만 할 때도 많았다. 이진언은 주로 외적인 상황, 그러니까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갔고, 김유겸은 자신과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확실히 관심도의 차이에서 오는 대화의 주제가 달랐다.
불만하지 않았다. 이진언의 이야기는 그이를 대변하는 주제였다. 지금 이진언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가를 알게 해주었다. 그것만 파악해도 김유겸은 승산이 높았다. 애초에 이진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쪽은 김유겸이었다. 그러니 이진언이 던져주는 아주 작은 감정의 조각이나 관심이라도 김유겸은 감지덕지했다. 원래가 공부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해 지금처럼 타인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성미라는 걸 안다. 공부할 시간에 자신을 만나준 것만으로도 이진언으로서는 엄청난 양보였다.
“밥 먹어요.”
둘이서 양껏 대화하고 카페 밖으로 나오자 이미 사방은 어둠으로 휩싸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떨다 보니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각이 되었다. 원래라면 배를 채운 뒤 근처의 분위기 좋은 술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는데, 어째 자신의 알찬 계획이 어그러지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밥 말고, 술.”
김유겸의 얼굴에서 혼란을 읽은 이진언은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단호하게 밥 말고 술 먹자고 하는 이진언의 모습에 김유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같은 시점에서는 밥 말고 술을 먹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플랜 하나를 건너뛴 사실을 애써 잊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밥집과 마찬가지로 술집도 이미 파악 완료됐다.
“…분위기 좋네.”
들어온 술집은 룸 형식이었다.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였고, 문에는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달렸다. 딱 소개팅한 뒤 뒤풀이로 오거나 썸 타는 관계에서 오면 좋을 듯했다. 웃음 띤 얼굴로 맞이하는 종업원들은 위아래 검은색 티와 바지를 입었고, 허리에도 검은색 앞치마를 멨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깔끔하고 포근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분위기였다.
“네, 여기 가격도 괜찮아요.”
둘은 17번 방으로 안내되었다. 푹신한 의자에 포근한 쿠션까지 구비된 방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남성 고객을 타깃으로 했다기보다는 여성 고객을 타깃으로 한 곳이었다. 김유겸이 어디서 정보를 얻는지 모르겠지만, 남자인 저를 꼬시기에는 이런 곳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이진언은 피식 비소했다. 이제껏 김유겸이 여자를 상대로 연애해왔음을 너무나 명백히 알겠다.
갑자기 온몸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받아주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면 선을 긋는 게 맞다. 귀엽다는 이유로, 열심히 노력한다는 사실로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는 건 김유겸에게 희망을 주는 짓이다.
“뭐 드실래요?”
“…….”
모질어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눈앞에서 웃는 얼굴에 모진 말 하기는 힘들었다. 지금이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포효하는 얼굴은 저가 자신을 밀어내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못 해줄 게 뭐냐 싶은 이기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검은 연기처럼 제 발목을 잡고 자꾸만 위로 스며든다. 이진언은 한숨을 한번 내어 쉬고는 김유겸에게로 손을 뻗었다.
“줘봐.”
메뉴판을 건네받고 몇 장 넘겼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취해야만 할 거 같다.
***
“선배,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정말 취했다. 저를 부르는 희미한 김유겸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함유되었다. 세상살이가 고단해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말술이 되었다. 동기는 물론이고 교수도 웬만해서는 이진언을 술로 이기지 못했다. 오죽하면 박지운 소원이 술 취한 이진언을 보는 것이었을까. 다 같이 술독에 빠져 죽을 듯이 달리고도 다음날 혼자 해사한 얼굴의 이진언을 보며 박지운은 저 새끼는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은 저런 특출난 간 해독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고 술주정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를 소리를 씨불였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처럼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머리가 빠개질 거 같은 기분을 느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선배, 제대로 좀 걸어요.”
술집에서 술을 너무 연거푸 마셔 걱정됐다. 원래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오늘은 유난했다. 자신은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었던 것인데, 어째 이진언은 대화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술만 마셔댔다. 카페에서도 누군가 보면 질리도록 대화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맨정신에 하는 말과 술에 취해서 하는 것은 달랐다. 김유겸이 원한 것은 취중 진담이라고 할 법한 진솔한 이진언의 속마음이었다.
“선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진언의 몸을 어깨에 올려놓으며 김유겸은 계속해서 상대를 불렀다.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 제대로 걸어봐요. 선배, 앞에 봐요, 위험해요.
어찌어찌 택시를 불러서 학교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진언의 자췻집까지는 길을 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상황에 김유겸은 손을 들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한번 닦아냈다. 이진언은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부름에 대꾸하지 않았다.
“…유겸아.”
술에 취한 사람은 무겁다. 알코올이 혈액과 합세해 중량을 늘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희한하게 술에 취한 사람은 평소의 몇 배나 됨직한 무게를 과시하고는 했다. 혼자만 비틀거려도 위험한데, 부축한 이까지 같이 휘청이니 위험은 배가 되었다. 김유겸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이진언의 집까지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진언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김유겸을 내려다보았다.
“…….”
나른한 눈빛이 김유겸의 몸을 훑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이었다. 김유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진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좋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휘몰아쳤다. 오늘 하루 동안 어째 답지 않게 자신을 받아준다 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사실을 지금 김유겸은 뼈저리게 느꼈다.
“유겸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젖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김유겸은 숨을 죽었다. 지금 이진언이 자신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했다. 왜 말술인 사람이 술을 미치도록 마시나 하는 의문이 해소되었다.
지금 이진언이 하려는 말은 술에 취하지 않고는 운을 떼지 못하는 종류였다. 이진언이 제아무리 사람에게 냉정하고 선을 그어 타인을 냉대하는 부류라고 하여도, 저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거절의 말을 내뱉어야 함에야 양심의 가책은 오늘도 정확하게 심장을 꿰 쑤신다. 그것은 고통이라고 명명하면 그럴 법도 하지만, 사실은 보다 본질적인 통증이다.
“…….”
김유겸은 이진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었다.
거절하려 한다. 지금 이진언은 김유겸의 마음을 어김없이, 하나의 남김도 없이, 희망도 주지 않고, 거절하려 했다. 그것이 뻔히 보임에 김유겸은 지금까지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할 정신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실연에는 의연하지 못한다. 김유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 저는요.”
그러고 보니 내가 마음을 전했던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의 마음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것을 깨닫고 김유겸은 허, 허소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다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마음이 보이게끔 질질 흘리고 다녔으면서, 정작 이 감정의 주체가 되는 이진언에게는 제대로 말 한 번 못 해봤다. 순간 억울해졌다.
선배는 왜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나를 단 한 번이라도 좋아한 적은 있어요?
“선배를 좋아해요.”
사실은 멋들어지게 고백하고 싶었다.
고전적인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고가의 슈트를 입고, 고급스러운 벨벳 천이 깔린 탁자 위에 자그마한 불을 밝힌 캔들. 다소 낮은 채도를 가진 조명 아래에 붉은 장미꽃을 한 백 송이쯤 건네며, 꽃 속에 작고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 따위를 숨기고.
현실은 잔악했다.
데이트한다고 차려입기는 했지만, 상상 속에서만큼 멋들어진 옷은 아니었다. 주변을 비추는 주황빛 가로등에 반사된 우리의 모습이 추레하기까지 했다. 한 명은 술에 취했고, 다른 한 명은 울기 직전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로맨틱한 장면이 못 된다. 이게 자신의 한계인 것만 같아서 김유겸은 억울해졌다.
“…알아.”
모른다고 하면 그게 거짓이었다. 전부터 김유겸의 마음을 눈치챘다. 다만 모른척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한순간의 방황으로 치부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앞길이 너무 멀었다. 험난했다. 누가 봐도 좋은 길은 아니었다. 이진언은 김유겸에게 고난일 게 뻔한 길을 가라고 권유하지 못한다. 그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심지어 저도 김유겸과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저로서는 김유겸의 마음을 모른 척하여 깨닫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좋아한다고 하였다. 자신이 저를 좋아한다고.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다. 입에 담지 않기를 소망했다. 깨닫지 않고 한때의 열병처럼, 혹은 미열과 같이, 조용히 앓고 지나가기를 소원했다.
김유겸은 그러지 못했다.
기어코 감정을 꺼내 비춰들었다. 찰랑거리는 액체 속에 들어있어야 숨 쉬는 감정을 강제로 물 밖으로 꺼내어 말라가게 했다. 끝을 모르고 부풀어 오르며 무한히 커지기만 하는 감정을 마르게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적어도 이런 식은 곤란했다. 강제로 밖으로 꺼내 돌봐주지도 않고 숨을 헐떡이며 말라죽어가는 걸 옆에서 오롯이 목도하는 건 이진언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돌보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에 눈길을 주지 않는 게 맞았다. 눈길이 가버렸다면, 사후 처리까지 완벽하게 구비해둬야 했다.
아직 이진언은 둘 중 어느 것에도 손 내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김유겸이 기다려 주어야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진언은 김유겸을 밀어낼 예정이었다. 물 밖으로 나와서 질식할 거 같은 연기에 숨을 쉬느니, 차라리 무연히 펼쳐지는 심연과도 같은 좁은 장소에 틀어박혀 고민하고 또 고뇌하여 답을 찾아 결정해야 한다.
박지운은 이러한 이진언을 히키코모리라고 정의했었다.
“말하지 않는 게 좋았었나요?”
김유겸이 물었다. 어느새 눈가로 눈물이 차올랐다.
이로써 이진언은 김유겸이 우는 얼굴을 네 번째 보았다. 가슴이 짜릿짜릿했다. 네 번의 눈물 모두 원흉이 저였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가슴 아픔을 느낀다는데, 당연히 이진언의 감정도 좋지는 않았다.
“선배를 좋아한다고?”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처럼 이진언은 안다고 대답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고맙다든가 싫다든가 역겹다든가 꺼지라든가,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라든가, 아주 작은 확률로 나도 너를 좋아한다든가.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게 김유겸은 못내 서러웠다. 차라리 욕하며 꺼지라고 하는 편이 속 시원할 거 같았다.
이진언이 지닌 과거의 고통을 공감했으면서 이런 마음을 지닌 자신에게로 역겨움을 느낀다. 지니면 안 되는 마음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은 이미 이진언에게 가 버렸다. 너무나 또렷하게 인식되어 더는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저 사람을 좋아한다.
김유겸은 이진언을 좋아한다.
좋아하고 있다.
“…아니.”
말하고 안 하고는 개인의 자유다. 그것마저 컨트롤하는 것은 잔악한 일이다. 이진언은 진실로 그랬다.
김유겸의 마음은 그의 것이니 제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다.
김유겸은 이진언의 대답에 얼굴이 계속 일그러졌다. 차오르기만 할 뿐 지금까지는 흐르지 않았던 눈물도 이진언의 아니, 라는 대답에 툭 아래로 떨어졌다. 한번 중력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눈물은 이내 계속해서 후두둑 소리가 날 거 같을 정도로 범람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한여름의 소낙비보다 더한 물줄기였다.
거절이었다. 완만한 거부가 아니라 대놓고 선을 긋는 말이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이니, 네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지니든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김유겸이 이해한 바로는 그랬다.
이진언의 개인주의를 이미 인지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크게 기준을 들이대지 않아서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진언이 자신을 귀여워했지만, 그것이 특별히 친한 후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진언이 자신을 전혀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진언의 거절은 마음 아팠다.
가슴에 길게 생채기가 났다. 보이지 않을 상흔이었지만, 심장을 갈고리로 할퀸 것과 같은 통증이었다. 순간 숨을 쉬기 힘들었다.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정말 울고 싶은 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는 느낌이었고, 무딘 칼이 느리게 자신의 가슴에 칼날을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건요.”
“…….”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이진언은 그것을 인지하고 말했다. 이리하면 김유겸이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김유겸은 언제나 이진언의 예상을 벗어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건 제 선택인 거잖아요.”
강요하지 않을게요. 티 내지 않을게요. 좋아하게만 해주세요.
김유겸의 지금 말은 이런 애원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이진언에게 해가 될까 전전긍긍해 하면서도, 숨길 줄을 몰라 옆으로 질질 새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누구나 김유겸을 관찰하면 그가 이진언에게 마음을 뒀다는 걸 금방 알았다.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저리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끔, 김유겸은 이진언을 보았다.
“…그래.”
결국은 허락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혼자서 좋아한다는 데야 말리는 권한은 제 영역이 아니었다. 진심을 거절했으니 앞으로 김유겸이 저에게 마음을 내보이지 못한다. 그러라고 한 일이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고통에 찬 무언의 비명을 지르는 이를 바라보는 건 이진언으로서도 꽤 마음 쓰라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진언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만 가.”
김유겸을 부정했으니 더는 제 영역에 그를 들여놓으면 안 된다. 전이었다면 집 앞에서 가라고 하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하니 들어오라고 했겠지만, 이제부터는 불가하다.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만 했다. 한때나마 김유겸을 제가 정해놓은 영역 안으로 들여놓으리라 예상했지만, 역시나 아직은 무리였다. 아직은 그럴 용기가 없었다.
사실은 전혀 냉정하지 못한 사람이 냉담한 척 말하며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김유겸은 거리에서 이진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나서지도 못하고 그곳에 꼼짝 않고 서서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지금 이러는 자신의 모습이 이진언에게 부담이 되리라는 걸 알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껏 부담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발 자신을 신경 써달라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끼이이익, 탁.
이진언을 집어삼킨 문이 아가리를 닫았다. 딱, 아귀가 맞은 문은 더는 열리지 않을 듯이 굳건했다. 김유겸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진언 앞에서도 내내 울었는데, 지금은 어째 그때보다 더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몸은 감정을 쫓아오지 못했다. 지금이 그랬다. 마음은 정말 시베리아 바람이 부는 한겨울 들판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데, 몸이 하는 건 겨우 우는 것뿐이었다. 아니, 우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눈물이라고는 찔끔, 콧물도 쪼끔. 누가 보면 실연당해서 우는 것이 아닌 발등에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져서 눈물만 잠깐 흘리고 말았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마음을 표현하는 건 정말 어렵구나. 김유겸은 다시 한번 느꼈다.
아직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그래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슴에서 울컥 올라오는 울음이 메마를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겠다. 그래야 자신의 눈물이 좀 마를 거 같았다.
실컷 울다 보면 언젠가 그이를 잊겠지. 되지도 않는 소원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