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너 좀 과해.”
“?”
오랜만에 연습실에서 연습 중이었다. 지난번 실기 때 삑사리에 박자 놓치고 아주 별 지랄을 다 해놨었지만, 다행히 A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부정을 의심했을 테지만, 김유겸의 평소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침 시험 때 때아닌 독감이 유행해 김유겸도 감기에 걸렸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외려 지독한 독감에 걸리고도 그 정도 부른 거면 김유겸이 괴물이다는 말이 심심찮게 같이 돌았다.
“이진언 선배랑.”
“…….”
지난번 자신과 짝이었던 작곡가 동기와 다시 작업하게 됐다. 이번은 정말 잘해야 했다. 김유겸은 이 아이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갚고 싶다. 원래가 누군가에게 폐 끼치고는 두 다리 뻗고 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으면 복수할 생각으로 이를 아드득 깨무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구체적으로, 이상하게 어떻게.”
질문에 작곡가 동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아느냐는 제스처였다. 김유겸은 인상 썼다.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아니면 말고, 다. 그것만큼 무책임하며 불성실한 단어가 있을까. 누군가는 그런 말에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데,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가 타인에게 해를 입혔다는 자각도 없이 살아간다. 김유겸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선배가 솔직히 좀 섹슈얼하잖아. 그러니까 그러는 거지, 뭐.”
“지랄들 났네. 여자애들은 선배 터프하다고 난리인 거 모르나 봐?”
김유겸의 살벌한 말에 동기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진언은 남자에게는 어딘가 섹슈얼한 느낌을 주지만, 여자들에게는 딱 오빠였다. 별로 친하지 않은 남자들은 여자들의 평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김유겸은 이해했다. 확실히 이진언은 여자들이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단지 외모가 사회에서 말하는 터프함이 부족할 뿐이다.
남녀로 나누어서 성격을 단정 짓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남자는 터프해야 하고,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그딴 구시대적 사고를 자신 곁의 사람들이 한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너무나 명확하게 성 역할을 나누는 연습생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걸 그룹이고 보이 그룹이고, 소속사에서 아이돌에게 원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했다. 어쨌든 아이돌은 회사 차원에서는 상품이었고, 조금이라도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는 역할이 필요했다. 섹시로 갈 건지 청순으로 갈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얼굴로 묘하게 성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으로 갈 건지를 논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가장 잘 팔리는 건 순수를 가장한 욕망이었다.
연습생 때는 이러한 역할을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상품이었으니 당연했다. 상품과 반품. 연습생 생활하면서 김유겸이 지겹도록 겪어온 이분법적 세상이었다. 그것에 넌덜머리가 날 때쯤 소속사를 나왔고, 이제는 이분법이 아닌 다분법이 상용되는 사회에 섞여들어 산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아직도 세상은 너무나 많은 이분법으로 사람을 나눈다.
진짜로 구역질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서 상대를 평가하지.”
동기가 제법 철학적으로 말했다. 김유겸은 동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동기가 재차 어깨를 으쓱했다. 김유겸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별다른 반박의 말이 돌아오지 않자 동기는 건반을 조율하며 한 번 더 의견을 고한다.
“나도 애들의 평가가 옳지 않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니까.”
“사회생활을 위해 불합리한 일에 침묵하는 건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거야.”
“원하는 대로 해. 나는 편협해서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 하는 사람이거든.”
“…대부분은 그렇겠지.”
무슨 대단한 정의의 사도가 납시었다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자신이 바꾸지는 못한다. 이미 이진언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이 퍼졌고, 그것을 김유겸이 막을 방법은 부재했다. 그것이 속상하다. 가능하다면 모두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너무 분하다. 하아, 김유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모든 것이 제발 멈춰줬으면 좋겠다. 소문이 어디까지 확산되어 퍼질지 문득 두려워졌다.
“그래도 나는 같이 있을 거야.”
아니, 아니다. 김유겸은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다시 이진언이 상처받을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이진언은 지금도 너무나 굳건하고 꼿꼿하게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이가 똑바로 걷고자 한다면 김유겸은 언제나 응원해 주겠다. 더는 이런 아픔에 지지 말라고. 더 이상은 이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왜? 너 선배랑 친해진 지 얼마 안 됐잖아. 지난번 싸움도 선배 때문이라며. 괜히 붙어 다녀서 네 평판 떨어지는 것보다 멀리하는 게 쉽고 빠른 방법 아냐?”
사실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원하는 것은 뭐든 다 이뤄주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은 아직 능력이 부족해 뒤에서 그이를 욕하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언젠가 더 커서 능력이라는 게 생기면 이진언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왜냐면,”
이 마음은 자신 안에서 점점 견고해진다. 더욱 커진다. 김유겸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이진언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원래 그곳에 자리했던 것처럼 자신의 마음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했다. 어쩌면 이진언이라는 사람에 대해 지니는 마음을 뽑아낸다면 김유겸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어리석게도 이 마음의 주인인 김유겸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지만.
***
“있잖아요, 선배.”
=어.
어찌어찌 연습을 끝내고 교정을 걸었다. 오늘따라 하늘에 걸린 달은 참으로 밝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이 달을 이진언과 함께 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왜 이런 충동이 든 것인지 자신도 모르겠다. 그냥 지금 이진언과 이 달을 보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또 악바리처럼 공부하는 사람 방해했을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이진언은 공부하던 것은 아닌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요?”
=집. 왜.
“좀 친절하게 대답해줘요.”
=집입니다. 왜 전화하셨나요, 김유겸 후배님.
“크읍.”
친절히 대답해달라는 자신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존댓말로 화답하는 이진언의 행동에 웃음 났다. 콧바람 넣어가며 살짝 웃음을 흘리자 이진언도 어이없는지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머리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어째 가슴에도 불어오는 거 같았다. 정말은 여름으로 가는 길목인데 말이다.
“달이 예뻐요.”
=그래서.
“이제 연습 끝나서 집으로 가려고 걷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까 달이 너무너무 예쁜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서요.
“선배 생각이 났어요.”
=…….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달을 보자마자 딱 선배 생각이 났어요. 아, 이건 진언 선배랑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었어요.”
=…유겸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진언의 목소리에서 곤란이 읽혔다. 김유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사방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고요했다. 주변이 너무나 조용한 적막으로 가득 들어차서,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았다.
=너….
이진언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하아,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때야 김유겸도 숨을 내뱉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자신이 숨을 멈추었다는 사실도 잊었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온몸이 빳빳하게 힘을 주었다. 인지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선배.”
=응.
이진언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결론은 도망이다.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 뒤로 물러서 버린다. 김유겸은 그런 이진언을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확언하건대, 없었다. 다만, 지금은 행동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가 어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김유겸은 지금 당장 이진언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진언이라는 사람을, 이 좋은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보고 싶어요.”
=…….
“보러 갈래요.”
일방적인 통보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하아, 한숨 짓는 소리가 들렸다. 김유겸은 얌전히 이진언의 대답을 기다렸다. 김유겸은 이진언의 자췻집을 몰랐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 근처 원룸텔에서 혼자 산다는 것만 알았다. 알려달라고 할까 했지만 그러지 않은 건, 학교 근처에서 자취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곳이 아지트 화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뻔히 잘 알아서였다. 심지어 자신도 혼자 산다는 동기 녀석의 자췻집에 몇 번이나 신세 졌었다.
“보러 가게 해주세요.”
대답이 꽤 오래 걸려 이번에는 애원해봤다. 이진언의 성격상 이 늦은 시간에 누군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일을 썩 내켜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겠다. 또한, 자신과 이진언이 밤을 공유할 정도의 친분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친분에 정도를 따지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이진언의 룰이었다. 심지어 이진언은 엄청난 절친인 박지운도 재워주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은 당연히 박지운보다 아래였으니 이러한 통보는 이진언으로서는 상당히 건방진 짓이었다.
“선배 제발….”
=김유겸.
자신의 말에 이진언이 드디어 반응했다. 긴장으로 인해 손끝에 피가 돌지 않았다. 김유겸은 혀를 날름여 입술을 축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진언이 뭐라고 할지 알지 못해서 초조해졌다. 김유겸은 이어폰의 볼륨을 더욱 크게 올렸다. 혹시라도 이진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꼭 감았다. 거부의 말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진언으로서는 자신이 생떼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거절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너 진짜….
연이은 한숨이 들려왔다. 김유겸은 눈을 번쩍 떴다.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지금 이진언이 망설였다. 갈등한다. 그것은 좋은 신호였다. 박지운이 술에 취해 재워달라고 해도 단칼에 거절한 뒤 전화기 전원을 꺼버렸었다고 들었다. 어쩌면 사람이 그토록 매정하냐고 박지운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정작 이진언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선배.”
그때 김유겸은 이진언이 제가 정한 룰은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선이었다. 이진언은 모든 이에게 선을 긋고는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몸을 사렸다. 어디의 누군가는 이러한 이진언의 모습이 예의 바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김유겸은 안다. 이것은 예의 바른 게 아닌 경고다. 더는 제 안에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안전한 제 보금자리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더는 상처받기 싫다는 무언의 비명이기도 하다.
“추워요.”
여름으로 가는 길목의 날씨는 당연히 춥지 않았다. 제아무리 일교차가 크다고 해도 춥다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개수작이다. 안다, 알고 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상대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질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런 뻔한 수작을 해야만 할 정도로 김유겸은 지금 이진언이 간절한데.
=정문?
“! 네, 정문이요, 완전 정문!”
춥다는 말에 잠깐 한숨을 흘리더니 이내 위치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유겸은 희망이 살아나는 소리에 목소리가 들떴다. 누가 봤으면 축하고 처졌던 강아지의 귀가 산책? 소리 하나에 뾰족 위로 올라오는 장면을 연상할 정도였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이내 들려오는 한숨 섞인 목소리에도 김유겸은 마냥 좋았다. 결국 이진언은 또 자신에게 져주기로 했다.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정말 정말 기분 좋은 느낌이라 김유겸은 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남들이 봤다면 필시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만한 행동이었다.
“김유겸.”
“선배!”
자췻집이 학교에서 가까운지 약 10분 뒤 이진언은 회색 후드 티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타났다.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김유겸은 헤헤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였으니 옛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은 마구 써볼 예정이었다.
“너 진짜….”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 쉬던 이진언의 얼굴은 온통 일그러졌다. 김유겸은 그런 이진언의 얼굴을 못 본 척했다. 제 앞에서 딴청을 피우는 김유겸의 모습에 피식 웃던 이진언은 그대로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와.”
간단하게 말한 이진언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김유겸은 혹시라도 이진언을 놓칠세라 얼른 뒤를 쫓았다. 누군가 봤다면 분명 김유겸의 뒤에서 살랑거리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봤다고 여길 만큼 신난 걸음이었다.
“들어와.”
이진언의 자췻집은 성격만큼이나 깔끔했다. 바닥에는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았고, 책장의 책은 열 맞춰 진열했다. 남들은 리포트 쓸 때 바닥에 앉아서 자료를 여기저기 흩날리며 쓰는데, 이진언은 자료조차 각 맞춰 딱딱 정리해 놨다.
무서운 사람. 김유겸은 속으로 이 말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야.”
방은 아담했다. 원룸이었고, 척하니 보기에도 정돈이 잘 돼 좁지는 않았다. 남자 혼자 살면 케케묵은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이진언의 자취방은 오히려 상큼한 향기가 났다. 항상 이진언의 몸에서 나던 내음이었다. 익숙한 냄새였는데,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발.”
“아, 네!”
멍하니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신발 신은 채로 들어갈 뻔했다. 이진언이 지적해서야 얼른 정신을 차리고 냉큼 신발을 벗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이 구는 후배 녀석을 보면서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관대한 처사다.
“그래서.”
봄기운이 완연한 바깥 기온과는 다르게 이진언은 집안에서 담요를 덮었다. 자취방에 냉기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추워하는 모습이었다. 저래서는 여름에 에어컨이 아니라 선풍기만으로도 살겠다 싶다. 추위뿐만 아니라 더위까지 타면 정말 최악일 텐데. 괜히 걱정된다.
“추우시다고요, 후배님.”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하는 이진언의 얼굴에는 딱히 어떤 표정이 서리지는 않았다. 귀찮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단답으로 말하자면 이게 끝이다. 공부하는 귀한 시간을 너를 위해 할애했으니, 어서 빨리 용건만 말하고 꺼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김유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트북 모니터를 향했던 이진언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이었다. 참 저 사람은 말하지 않고 표정으로도 잘만 의사소통한다. 저 사람의 조그마한 행동에도 김유겸이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저 싫어요, 선배?”
자리에 앉아서 묻는 말이 자신도 어이없었다. 대놓고 면전에 대고 싫으냐고 물으면 맞다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계략이다. 김유겸은 죽어도 이진언의 입에서 너 싫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소 까칠한 인상을 비추는 이진언임을 알지만, 자신에게는 잘해주었다.
지금 김유겸이 거는 건 도박이다. 승률은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중요한 과제는 아니었던 듯 다행히도 이진언은 노트북을 덮었다. 후유, 한숨을 내어 쉬었다. 집안에서 편하게 쉬려 썼던 동글뱅이 안경을 벗어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해 보였다. 이진언에게 피곤을 가중한 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지만,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왜인지 이진언의 입에서 부정한 말이 나올 것만 같다.
“김유겸.”
“…….”
“유겸아.”
“…네.”
김유겸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고 해도 싫다. 김유겸보다는 유겸아, 를 더 선호한다. 김유겸, 이라고 성까지 붙여 딱딱하게 불리는 것은 무정해 보인다. 김유겸은 이진언의 입에서 불릴 자신의 이름이 되도록 딱딱한 김유겸, 보다는 다정한 유겸아, 였으면 좋겠다.
“나랑 뭘 하고 싶은데.”
훅, 치고 들어왔다.
딱히 이진언과 뭘 하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다. 친해지고 싶어요. 진심을 건넸다. 이진언의 손은 계속 이마 근처를 맴돌았다. 두통이 이는 듯 작은 손을 움직였다. 대신 머리를 만져주고 싶었지만, 싫어할 게 자명해 얌전히 굴었다.
“이미 친해.”
“이것보다 더요.”
“더, 어떻게.”
“…….”
“유겸아.”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친해지고 싶어요. 이 말에는 거짓이 없다. 말 그대로 친해지고 싶다. 친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같이 놀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 같이 잠자고, 같이 길거리를 거닐고,
같이, 같이, 같이.
“여자 같아, 내가?”
감정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어딘지 모르게 제가 남자들에게 섹슈얼 적인 느낌으로 다가간다는 걸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김유겸처럼 감정을 착각한 채 다가온 사람은 많았다. 전부 거절했다. 개중에는 정말 악질이라서 저를 한번 어떻게 해보려는 새끼들도 많았지만, “그때”의 일이 발생한 후부터는 마냥 당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이진언은 폭력이 정말 싫었다.
“아니에요, 절대!”
다행히 김유겸은 이진언의 가정을 금방 부정했다. 두 눈 가득 눈물이 맺혔다. 아래로 내려간 순한 꼬리를 가진 눈에 원망이 들어찼다. 자신에게 어쩌면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묻는다. 이진언은 허, 허소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원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선배를 동경해요.”
동경, 그래, 동경이 맞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하는 행위.
그것이 맞다.
요새 김유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는 건 이진언이다. 사귀다가 헤어진 것도 아닌데 내내 이진언이 그립다. 자신을 보는 눈에 조금이라도 혐오가 묻으면 못살지 싶을 정도로, 김유겸은 이진언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왜 이런 마음을 지니게 됐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마음이 자신을 살리니 버리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이진언이 고개를 돌리며 외면한다고 해도 자신은 저 사람을 버리지 못한다.
“동경 맞아?”
이진언이 물었다. 김유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단순히 선배를 동경하는 마음은 아니겠다만, 여기서 더한 마음을 입에 담으면 이진언이 자신을 내칠 것만 같았다. 가능한 최대로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긍정의 뜻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김유겸을 보면서 이진언은 낮은 숨을 몇 번이고 토해내었다.
동경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진언도 김유겸도, 지금 김유겸이 지닌 감정이 그저 그런 마음이 아님을 안다. 안다는 것과 드러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서 김유겸은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숨기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옆으로 줄줄 새어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당사자는 숨긴다고 숨기니 모른 척하는 게 예의다. 지금처럼 돌직구로 저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거기서 더 발전시키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러겠노라고 약속하고,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해준다면 이진언으로서도 김유겸을 밀어낼 이유 따위는 없었다. 김유겸은 생각보다 좋은 후배다. 옆에 있기만 해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에너지를 지녔다. 지금 이진언에게 필요한 건 리프레시였고, 그것을 김유겸은 할 줄 알았다.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콤비다.
“…….”
김유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진언의 한숨은 깊어졌다. 스스로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뭘 하자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아파왔다. 어디서 얽히게 된 인연의 고리인지도 이제는 잊었다.
“소문 듣고 동정하는 거면,”
김유겸은 인정이 많다. 아직 제 앞에서 운 적은 한 번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 적잖이 놀랐다. 원래 제가 눈물이 적기도 했지만, 주변의 누구도 그런 일로 울지 않았다. 태어나서 다 큰 남자애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우는 것을 보는 일은 확실히 드물었다.
“선배는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여요?!”
성격이 성격이니 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감정을 헷갈려 하는가 싶어 말을 건넸다. 이내 들리는 건 고함이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억울하다는 얼굴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 이진언은 아차 싶었다. 실수했다.
“동정 같은 거 안 해요! 그럴 처지도 못 되구요!”
억울하기는 꽤 억울했던 모양이다. 씩씩거리며 말하는 꼴이 쉽게 진정될 거 같지 않았다. 일단 이진언은 조용히 입을 닫고 김유겸의 모습을 살폈다. 흥분한 사람에게 괜한 말을 꺼내서 더 길길이 날뛰게 만드는 건 사양이다.
“그냥, 옆에 있고 싶어요….”
“…….”
“그래서 그렇다구요….”
헐떡임으로 말을 마친 김유겸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두 번째 보는 모습이었다. 지금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무슨 말 했는지 자각도 못 할 테지. 이진언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탄식을 어쩌지 못했다.
절절한 감정 고백의 말이었다.
사랑의 범주에 남자를 포함시키지 않고 살아왔으니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단순한 선배를 향한 동경, 혹은 존경이라고 믿는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에게 감정을 느끼는 본인의 모습에 환멸해 포비아가 되는 것보다는 나은 현상이지만,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이진언은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옴을 느꼈다.
“일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김유겸은 왜 여기서 자신이 이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선배와 달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예쁜 것을 보면 가장 먼저 선배가 생각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다음에 또 선배와 와서 먹고 싶었다. 추위 타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몸을 따듯하게 했으면 좋겠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에게 이런 마음이 든 적은 없었지만, 상대가 이진언이라고 하니 자연스러웠다. 마냥 잘해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이진언은 마치 잘못된 것인 양 꾸짖었다.
도대체 왜? 친하게 지내자는 것뿐인데. 잘해주고 싶은 마음뿐인데.
“한숨 자.”
“…네?”
“자라고.”
돌연한 제안에 김유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담담한 얼굴의 이진언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운 말을 지껄였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지금 한 제안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이진언은 노트북이 올라간 좌상을 치웠다. 방 한쪽 구석에 이불과 베개를 꺼내주었다. 씻고 와. 투박하지만, 어딘가 김유겸을 진정시키는 말이 재차 들렸다.
“네!”
방금까지 이진언을 원망하며 울었던 것도 잊고 김유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쾅, 하고 닫힌 문안으로 우당탕 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저리도 좋은지 김유겸의 신난 몸짓이 여기까지 보였다.
“저, 선배.”
“왜.”
안에서 옷을 벗으며 난리 치던 김유겸이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욕실 문을 빼꼼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김유겸과 함께 잘 준비했던 이진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 벗던 옷 때문인지 김유겸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용건을 말했다.
“저 속옷 주세요.”
“…….”
김유겸의 말에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
“선배, 자요?”
속옷과 수건, 새 칫솔까지 꺼내주고 나서야 김유겸은 뽀득뽀득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욕실의 뜨거운 김을 폴폴 풍기며 나오는 얼굴에 한껏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의 집에 하룻밤 묵게 된 것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이진언은 뭐가 저리도 즐거울까 싶어서 고개를 연신 저어야만 했다.
“아니, 아직.”
싱글 사이즈 침대에서 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자기는 무리였다. 실랑이 끝에 김유겸이 바닥에 이불을 덮었다. 평생을 침대에서 잤지만, 오늘은 바닥에서 자야 한다. 불평하지 않았다. 여기서 침대에서 자겠다고 떼를 썼다가는 이진언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집 밖으로 쫓아낼 것만 같았다. 이진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지운 선배도 여기서 못 자봤다면서요.”
“그랬지.”
“그럼 제가 선배 집에서 자는 거 최초인 거예요?”
“아마도.”
“우와 신난다.”
이 집에서 최초로 잔다는 게 뭐가 특별한 것인지, 정말 김유겸은 신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감 없는 투명한 김유겸의 감정에 이진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까 그대로 두면 정말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 울어버릴까 봐 궁여지책으로 자고 가라고 말한 것이었는데, 효과가 뛰어났다. 이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탄해야 하는지 판단되지 않지만, 적어도 제가 한 남자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지는 않았으니 되었다고 위로했다.
“더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
“매일을 선배 집에서 잠들어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요.”
“늙은 선배 부려먹겠다는 소리를 새롭게 하네.”
“헤헤.”
이진언의 말에 김유겸은 부언하지 않았다. 웬일로 이진언이 김유겸이 하는 말에 대거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오늘 하루뿐이라고 못 박았을 이가 은근슬쩍 넘어갔다. 희망이 있다는 소리다. 제가 한 말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 일정 기간은 옆에서 치대도 받아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듯하다.
“자꾸 기어올라.”
투박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안에 애정이 함유됐다. 이진언의 성격상 자신을 또 한 번 봐주기로 한 것이 아니라면 자고 가라는 말도, 기어오른다는 말도 하지 않을 사람임을 안다. 저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부터가 이미 김유겸을 많이 봐준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것을 인지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안 된다고 말하다가도 끝에는 꼭 자신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내일 박지운 선배한테 자랑할 거예요. 선배 집에서 잤다구.”
“아서라. 그랬다가 내가 내일 지운이한테 시달린다.”
“왜 박지운 선배는 선배랑만 놀아요? 친구 없대요?”
“친구는 내가 없지.”
“저 있어요.”
“…….”
“저랑 놀아요. 네? 선배애-.”
“…이미 놀아주고 있는 거 안 보이냐.”
훅하고 치고 들어올 때마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쁜 애가 아닌 걸 알아서 더 혼란스럽다. 분명 지금 자신이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를 아이인데, 다가오는 마음이 너무나 투명해서 무섭다.
순수하게 부딪쳐 오는 마음이 깨어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저는 저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기도 거절하지도 못한다. 받아주기에는 두렵고, 거절하기에는 안타깝다. 이미 제 마음에도 어느 정도 저 아이가 들어앉은 것이 인지되어 혼란스럽다. 어느 쪽이든 누구 하나 다치지 않는 결정이어야만 한다.
“그만 나불거리고, 자.”
“네, 선배. 안녕히 주무세요.”
쫑알쫑알 떠들던 입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낯선 집에서도 잠자리 타지 않는지 새근새근한 소리 내며 잘만 잔다. 어두운 방 안에서 멀거니 앞을 바라보던 이진언은 눈을 감았다. 예민한 성격 때문에 누구와도 한방에서 함께 자지 못해서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박지운은 이런 성격을 예단해서 재워달라고 떼쓰지 못했다.
내일 박지운이 김유겸과 같이 잤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서 입에 거품 물겠네.
상상했다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무언가가 조금씩 무너져간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남들에게 그어놓았던 선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늦은 밤, 이진언은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숙면에 빠져들었다. 다른 때였다면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도 금방 잠에서 깨고는 했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깨어나지 않고 얌전히 잠만 잘 들었다.
***
“미친.”
다음날, 김유겸이 박지운에게 간밤의 일을 자랑하기 전에 이진언이 선수 쳤다. 아무래도 김유겸을 통해 지난밤의 일이 알려지면 한동안 박지운에게 닦달당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아침이 되어서도 나가기 싫다고 이불을 움켜쥐고 뒹굴뒹굴하는 김유겸의 엉덩이를 두어 대 때려주고 간신히 등교시켰다. 확실히 오늘 아침은 이건 무슨 다 큰 성인 남자를 재워준 것인지 아니면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주인과 떨어지기 싫다고 떼쓰는 강아지를 훈련소에 보내는 것인지 판단되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걔를 재웠다고?”
잠은 잘 잤는데, 아침에 한바탕 소란을 겪은 이진언의 얼굴은 퀭했다. 시간표 자체가 똑같았던 탓에 강의실에서 마주한 박지운이 너 어제 뭐 했길래 얼굴이 이 모양이 이 꼴이 됐느냐고 물어올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직 수업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남아서 정신을 차릴 겸 해서 온 카페에서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진실을 털어놓으니 박지운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 찼다.
애초에 이진언이 야심한 시각에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공부할 때는 내 전화도 받지 않았으면서. 배신자. 박지운은 괜히 서운한 마음에 컵에 든 얼음을 아그작 아그작 씹어먹으며 이진언을 노려봤다. 이진언은 박지운의 살벌한 눈째림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지쳐 보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못 자는 네가 어째 부산스러운 걔를 재울 생각을 다 했냐.”
기특하다는 것인지 시비 거는 것인지 판단되지 않는 소리가 박지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잠자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았다. 문제 됐던 건 아침에 온통 제 정신을 빼고 간 김유겸이지.
“걔는 지금 지가 지닌 감정을 몰라.”
“다짜고짜 입술부터 들이대는 것보다는 낫다.”
살아오면서 저에게 호감을 보인 사람이 김유겸뿐이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고백했던 사람 대부분은 여자였지만, 심심찮게 남자들도 있었다. 남자들은 동성에게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분해하면서도 스스로가 컨트롤되지 않는다며 고백인지 원망인지 모를 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개중 상당수는 말로써 마음을 전달하기보다는 몸으로 뭘 좀 해보려고 했었다. 마음이 가면 몸이 간다는 말을 실행하고 싶었나 본데, 문제는 그럴 때 이진언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애였으면 집에 들이지도 않았어.”
좋아한다는 감정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껏 이진언이 만난 남자들이 그랬다. 좋아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와서 좋아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면서 이진언을 내리눌렀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의 이진언을 어떻게 하면 될 줄 알았다고 판단했다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역겨운 사상이었다.
“하긴, 김유겸 걔 보기에는 놀 것처럼 보여도, 예의는 존나 따지는 놈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유유자적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신선놀음하게 생겼다.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울린 사람만 십수 명이 넘어야 한다. 들어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연애 방식을 고수할 것처럼 생겨서는, 어찌 보면 참 내실이 약했다. 김유겸은 말이다.
“네가 예뻐할 만하지.”
예의 따지는 건 똑같다. 나이 때문에 덜 주목받을 뿐이다. 애초에 사회에서 나이라는 건 연륜이라는 말과 동일해서, 연륜 높은 사람을 존중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제 화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나이가 든 두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다른 이가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했다. 가끔 아직도 예의와 도덕은 개나 줘, 라고 말하는 치들이 설치기도 했지만, 머리가 좀 굵다 싶은 후배들은 확실히 선배 앞에서는 예의 지키려고 노력했다.
동기들은 아니었다. 선배가 아닌 또래나 후배에게 괜히 분위기 잡고 군기 잡으려는 얼뜨기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진짜 군대나 갔다 오고 그러는 거면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웅 심리에 그런다고 이해하고 가기라도 하련만, 그러지도 않은 것들이 꼴에 같잖게 나다니는 모습을 언제까지 봐야 될지 모르겠다.
“위험해.”
이진언은 김유겸이 지니는 마음의 정체를 안다. 이제껏 수없이 많이 목도했다. 그것은 어떨 때는 호의로 다가왔고, 어떨 때는 혐오로 다가왔다. 이진언은 김유겸이 이제껏 경험했던 어떤 감정으로 발현되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지 않기를 소원한다. 그런 일로 잃기에는 김유겸이라는 아이가 너무 괜찮았다.
“자각하지 않으면 그만 아냐?”
박지운의 반박에 이진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각하게 된다. 반드시.
억지로 잠재운다고 소멸할 감정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진언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말이다. 그럴 때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거부 아니면 수용. 그리고 이제껏 이진언이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러는 편이 지금까지 누렸던 안락한 삶을 영위한다고 인식했다는 뜻이다.
거부든 수용이든, 이진언은 어느 쪽도 김유겸이 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이 됐든 간에 선택하려면 일단 자신이 동성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꽤 아픈 일이다. 이진언은 진심으로 누군가가 저 때문에 삶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은 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 일은 저 하나면 충분하다.
“자각하지 못하게 해야지.”
“어떻게?”
위험한 폭탄을 끌어안고 가는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불안하다. 애써 불안을 감수하면서까지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김유겸이라는 아이에게는 있었다. 김유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게 매겨졌다.
“받아줘야지.”
원하는 만큼 받아주면 언제가 끝나게 되리라는 걸 안다.
지금 김유겸이 저에게 집착 비슷하게 하는 건 제대로 된 소망을 발산하지 못하게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면 이것은 한때의 반항 또는 호기심 짙었던 일상 정도로 묻히게 된다. 이진언이 바라는 바다. 이 이상의 관계가 진척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김유겸이 진심이면?”
“…….”
“이제까지랑 다른 놈이면.”
박지운이 새로운 가설을 내세웠다. 이진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실소했다. 이뤄질 리가 만무한 가정이다.
“그러면,”
그래도 그러면 좋겠다. 저를 향한 김유겸의 마음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뚜렷한 무언가를 형상하여 인지되고 자각된 감정이었으면 한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인간은 원하는 바가 확고한 상황에서는 목표 또한 확실해진다.
그러나.
“연애하는 거지, 뭐.”
욕심이다. 이진언이 주변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지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같이 주변을 정리했다. 꼼꼼하게 쓰레기를 치운 다음 카페 밖으로 나섰다. 수업까지는 앞으로 십 분여가 남았다.
“나는 말이다, 이진언아.”
강의를 듣기 위해 막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카페에서 강의실까지 걸어오며 무언가를 깊게 사색한 모양인지 박지운이 이진언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심하게 돌아보니 표정이 심각했다. 원래도 쓸데없는 데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하는 녀석이라 이진언은 귀찮으니 빨리 말하라는 무언의 눈빛을 쏴 보였다. 박지운은 이진언의 눈빛을 읽지 못했는지 꽤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중립이야.”
“…….”
이진언의 얼굴은 이건 뭔 개소리야? 딱 이랬다.
옆에서 박지운이 헛소리하는 걸 하루 이틀 들은 건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또 드물었다. 뭐 어쩌라고. 이진언의 얼굴이 묻자 박지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너는 좋은 친구지. 그런데 유겸이도 좋은 후배거든? 그러니까 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한쪽 편만 들어주지 못해. 그건 내 철칙에 어긋나.”
“박지운. 아가리.”
“…넵.”
박지운은 이진언의 살벌한 경고에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는 항변했지만, 이진언은 무시했다. 이 친구를 고민 상담소로 정했을 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김유겸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고는 하나뿐인 놈이 영 도움을 안 준다. 도움을 받으려 옆에 두는 건 아니지마는, 이럴 때는 옆에서 진심 어린 조언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다. 애초에 성격이 남의 조언을 듣지는 않지만, 이런 일에는 사건의 향방을 예측해 길라잡이 해줄 조력자는 보유한 편이 좋겠다.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옆에 남은 친구가 박지운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는데, 어째 박지운에게 상담하면 해결된다기보다는 더한 고민을 얹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말하지 말자니 그러면 박지운 성격에 백이면 백, 삐지고도 남을 게 자명해 이진언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왜 제가 이런 상황에 빠져 고민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가운데 들어온 강의실은 조용했다.
“그래도 유갱 그 새끼가 진심인 거 같아서 걱정은 좀 덜해.”
“…….”
입을 다물어 달라는 경고를 금세 까먹었는지 박지운이 옆자리에 앉으며 의견했다. 이진언은 침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도 박지운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지금껏 저에게 다가온 사람들 대부분은 호기심이었다. 개중 남자들이 특히 심했다. 제 얼굴이 남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알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다. 알기 싫었던 어떠한 진실을 강제로 마주하게 될 때의 기분은 가히 좆같았다.
“너도 그걸 아니까 진심이면 연애하겠다고 한 거겠지.”
“너는 농담도 구분 못 해.”
“네가 그런 거로 농담할 성격 아닌 걸 알아서 하는 소리인데.”
“…….”
의외로 날카로운 분석에 이진언은 재차 침묵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진언은 어디를 봐도 연애할 거처럼 굴지 않았다. 어떨 때는 연애라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별히 사람이 급해 보이지도 않았고, 연애하면 상대방에게 정말 잘해주리라 예상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를 만난대도 똑같았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성격이라는 건 알겠다. 알지만, 그뿐이다.
예의만 지켜준다면 이진언은 친구도, 후배도, 동기도, 연인도 모두 공평하게 대할 성격이었다. 누가 판단해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알기 쉬운 성격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이진언에게 연애는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박지운은 그래서 놀랍다.
이진언이 김유겸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연애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애 인생 조질 일 있냐.”
피식 웃고 자리에 앉는 이진언을 박지운은 살짝 인상 쓰고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해도 되는가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 모두 의견했겠으나 지금은 어려웠다. 이진언 하나만 얽힌 일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이진언은 저에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걸 좋아했다. 비록 박지운의 말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고 하더라도 모르고 지나가기보다는 인정하고 수정하여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제 성격 때문에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도 이 같은 생각에 한몫하였다.
“그게 인생 조질 일인지 아닌지는 당사자가 판단하는 거 아닌가.”
“박지운.”
“교수님 오셨다.”
자꾸만 옆에서 신경 쓰이는 말을 해대는 박지운을 불만 어린 목소리로 부르려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교수님이 들어왔다. 이진언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물렸다. 박지운은 이진언을 힐끗 일별하고 시선을 똑같이 앞으로 돌렸다. 지루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
“서어어언배애애애애-!!!”
수업이 끝나고 아까 박지운과 못다 한 말을 마저 하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김유겸이 뛰어왔다. 얼굴에 해사하게 복사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어제 타인 접근 금지인 이진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게 김유겸의 기분을 북돋우는 듯했다. 얼굴에 방싯방싯 웃음이 묻어나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이진언은 김유겸을 말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오늘 수업 끝났죠?”
마치 이진언의 스케줄을 모두 꿰뚫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가 어이없었다. 허, 하고 실소를 내뿜는데, 그것마저도 좋은지 김유겸은 헤헤 웃었다. 확연히 다른 웃음이었다. 박지운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먼저 간다며 이진언의 어깨를 툭 쳤다. 먼저 가라며 이진언이 가볍게 묵례했다. 살갑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의 인사에도 김유겸은 볼에 바람을 넣고 얼굴 가득 불만을 표시했다.
“박지운 선배랑 친하게 지내지 마요.”
뾰로통한 얼굴로 김유겸이 말을 걸었다. 돌연한 말에 이진언은 정말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얘가 뭐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가요.”
“가다니, 어디를? 야, 야, 야, 야, 김유겸!”
박지운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김유겸은 이진언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디 가는지 목적지에 대해 언급은 없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끌려가는 것이 트라우마인 이진언이었지만, 김유겸은 몰랐다.
어디 가느냐고 이진언이 연신 물었지만, 김유겸은 듣지 않았다.
이진언은 제 수준에서 무례하다고 할 만한 행동하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젯밤에 지금까지 굳건하게 지켜왔던 규칙을 깨고 제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재울 정도로 예뻐하는 후배라도 마찬가지였다.
“야 이 씨발 새끼야!”
“윽---!!”
결국, 이진언이 퍽 김유겸의 무릎 뒤를 차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김유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아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넘어지면서 손을 짚어 완전하게 나뒹구는 꼴은 면했지만, 퍽, 무릎으로 먼저 떨어지면서 꽤 큰 소리가 나서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왔다 갔다 하는 행인들의 시선에는 의아스러움이 가득하였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이진언이었는데, 가뜩이나 얼마 전부터 좋지 않은 소문도 달고 다녔다. 그런 사람이 건물 한복판에서 학교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말 만들기 딱 좋은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순식간에 앞으로 넘어진 탓에 고통이 엄습해 김유겸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너무나 갑작스레 발생한 일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무엇인지 몰라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가 심각했다. 김유겸은 사색이 된 얼굴로 위를 쳐다보았다. 이진언의 분노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니 따가리야?! 말도 없이 사람을 끌고 가면, 어?!”
이진언은 정말 화가 났다. 누가 봐도 저것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펄펄 뛰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김유겸은 순간 이진언이 자신을 받아준다고 수위를 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동시에 좆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조금 친해졌다고 까불면 안 됐다. 이진언의 얼굴은 정말 다시는 화를 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잘못했어요.”
김유겸이 벌떡 일어나서 냉큼 사과했다. 이진언의 얼굴이 조금 더 굳었다.
성격상 이진언은 잘못을 인정하고 쌈빡하게 사과해오는 사람에게까지 계속 화를 내지 못한다. 속으로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김유겸의 모습에 더는 화내는 게 무의미했다.
저에게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김유겸은 몰랐다.
“잘못했어요, 선배. 용서해 주세요.”
“됐어. 다리는.”
김유겸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이진언에게 연속 사죄의 말을 읊조렸다.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었다. 이진언의 반항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수위를 예측하지 못했다. 퍽, 맞은 오금이 아프기는 했지만, 맞을 만했다. 누구라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었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이진언이 화낼 만했다. 자신의 행동이 무례했다는 데 공감한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세게 찼는데.”
봐봐. 이진언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망설이지 않고 김유겸의 바짓자락을 걷어 올렸다. 쓱 올라간 다리에는 연하게 멍이 들었다. 이진언의 입은 연속해서 한숨을 내뱉었다. 김유겸은 서둘러 바지를 내렸다. 이진언의 얼굴에 그늘지는 것은 싫었다.
“걸을 수 있어?”
“네.”
“가자.”
손을 내밀었다. 김유겸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리를 움직였다. 되지 않았다. 인상이 절로 써진다. 으윽, 소리가 났지만, 미안해서 크게 내뱉지는 못했다. 이진언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괜히 미안했다.
“죄송해요.”
이진언이 김유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김유겸은 몇 번인지 모를 사과의 말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마냥 미안했다. 자신의 마음에만 들떠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된다. 하아, 가슴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절뚝절뚝 걷는 걸음이 못내 서럽다.
“나 사람한테 끌려가는 거에 트라우마 있어.”
“…….”
“누가 그런 일에 익숙해질까 싶지만, 내가 유독 그래.”
“잘못, 했, 어요.”
몰랐다. 정말 몰랐다. 알았다면 하지 않았다.
김유겸은 어느새 눈물을 퐁퐁 쏟았다. 이진언은 애써 김유겸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심술궂은 마음에서 그런다기보다는, 내버려 둬야 미안한 마음이 죄 씻겨 나간다는 걸 알아서다. 이진언은 김유겸이 저를 바라보는 마음에 죄책감이 깃들지 않기를 바란다.
“몰랐, 킁, 어요, 진짜, 흡, 예요.”
“알아. 알고 그랬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가볍게 농담하고 피식 웃는다. 박지운의 말이 맞다. 아닌 듯하지만, 김유겸은 퍽 예의를 차린다. 다른 새끼였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네 반응이 이상한 거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유겸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했고, 사과했다. 이런 아이라는 걸 은연중 알아서 옆에 두었다.
“울보네, 완전.”
우는 다 큰 성인 남자를 데리고 갈 곳은 마땅하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이진언은 김유겸을 제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김유겸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펑펑 울었다.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지가 우는지.
“울보, 킁, 아닌데요.”
“너 지금 내 앞에서 몇 번 울었는지 알기나 해.”
“…세 번이요.”
대답은 잘한다. 이진언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김유겸은 와중에 고맙다고 꾸벅 인사했다. 그러는 게 어이없고 귀여워 비싯비싯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걸 또 새고 있었냐.”
“크응.”
울어서 온통 얼굴이 빨개졌다. 순간 화가 나서 몰아치기는 했지만, 우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알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무언가 저에게 좋은 걸 하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차 그랬을 텐데, 인지했음에도 너무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취지가 좋다고 무조건 받아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과잉방어였다는 데 동의한다.
“어디 가려고 했는데.”
생수병 하나를 더 가져와 입을 대고 마시며 무심하게 물었다. 김유겸은 소매를 잡아끌어 눈물을 닦으며 킁, 코를 먹었다. 휴지를 건네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찾으면 줄 계획이다.
“학교 뒷산이요.”
“거기는 왜.”
“선배 산 타는 거 좋아한다고 들어서…. 중턱에 팔각정 있대요. 거기 앉아서 바라보면 교정이 한눈에 보인다고….”
김유겸의 말에 이진언은 피식 웃었다.
취지는 확실히 좋았다. 산을 타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가자고 했을 때 거부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체력이 받쳐준다는 의미다. 반면에 김유겸은 모르겠다. 저야 축구며 구기 운동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땀 흘리는 걸 즐겼지만, 김유겸이 그러고 노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약한 체력으로 산을 타봤자 중간에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십상이다.
“그래, 고마워.”
“네?”
“나 생각해 준 거잖아. 기분 좋아지라고.”
“네, 그렇기는 하죠.”
“그러니까 고맙다고.”
“…….”
생각해 준 마음이 고마워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어째 김유겸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고맙다는 인사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은 표정에 이진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심하게 물으니 이번에는 김유겸이 한숨을 내어 쉰다. 이진언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왜 저런 반응인지 진짜로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진짜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뭐?”
“망쳤는데 뭐가 고마워요.”
입술을 내밀어 토라졌음을 표시하는 김유겸의 태도에 이진언은 웃음만 났다. 아무래도 김유겸은 저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진언이라는 남자는 거짓을 진심으로 포장하는 소리는 하지 못한다. 옳다는 걸 알아도 고맙지도 않은데 고맙다는 소리를 입에 담을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을 모르는 김유겸은 지금 이진언이 한 고맙다는 소리가 겉치레인 줄 알고 흔한 말로 삐진 얼굴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이 토라졌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 김유겸을 보며 이진언은 희소했다. 저보다 덩치가 큰 사내애가 삐진 얼굴 하는데 징그럽기보다는 귀여웠다. 제 얼굴은 저주였지만, 김유겸의 얼굴은 아닌 거 같아 조금 부러워진다.
“노력해 준 게 고맙다고.”
손을 들어 김유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자 김유겸의 뾰로통했던 표정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제나 저를 보던 얼굴처럼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에 복스러운 웃음이 들어찬다. 눈앞의 남자를 웃게 하는 건 정말 쉬웠다. 가만히 머리를 만져주기만 하면 되었다.
“고마우면요, 선배.”
“다음 없다.”
“힝.”
은근슬쩍 다음을 약속하려는 몸짓이 보여서 이진언은 다음은 없다며 확실하게 못 박았다. 김유겸은 단호한 이진언의 태도 앞에서 잠시 삐진 티를 내기는 했지만, 이내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싱글싱글한 낯으로 바꾸었다. 다리는? 아까 데리고 올 때 절뚝거렸던 것이 내심 신경 쓰여 지나가는 말로 툭 물어보니, 이제 별로 안 아파요! 라는 천진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진언은 김유겸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에는 선배한테 목적지 분명하게 말하고 갈게요.”
“…….”
분명 조금 전에 다음은 없다고 선언했건만, 김유겸은 금방 까먹은 것처럼 제안했다. 그러는 게 화나기보다는 웃겨서 이진언은 웃었다. 그래, 그러라지. 악의로 제 말을 무시한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기는 게 가능했다.
“괜찮아졌으면 이제 그만 가.”
“헐, 완전 너무해. 저 선배 때문에 다쳤거든요?!”
김유겸은 오후에 수업을 하나 더 들어야 한다. 자체 휴강을 원래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가라고 말하니, 김유겸은 기겁해서 옆의 베개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너무한다고 소리를 꽥 질렀다. 도대체 쟤가 왜 저러나 싶어서 이진언이 의아한 눈을 들어 바라보자, 김유겸은 굉장히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아무리 아까보다 덜 아프다고 하지만
, 선배 자취방에서 학교까지 그래도 10분은 걸리거든요? 지금 다 나은 것도 아니고 통증이 아까보다 조금 덜 하다 정도인데, 여기서 걸으면 인대 늘어날지도 몰라요. 그러면 전 선배를 원망할 거고, 선배는 제 원망의 눈초리를 가는 길마다 마주하게 될 거고,”
“-그만. 원하는 게 뭔데.”
“오늘 하루만 더 재워주세요.”
“…하아.”
이틀 연속 외박하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김유겸을 보면서 이진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은 죄가 지은 죄인지라 싫다고도 못하고, 어제처럼 오늘도 확고하게 김유겸과 제 잠자리를 공유하게 생겼다. 어쩌다 일이 이리됐나 싶어서 이진언의 고개는 얌전할 줄을 몰랐다.
“…싫은 거예요?”
선뜻 알았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김유겸이 시무룩한 얼굴로 되물었다. 김유겸의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이진언은 허, 실소했다. 지금 짓는 표정이 가식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 까짓, 알면서도 한번 넘어가 준다 싶었다.
“그럴 리가요, 후배님. 제가 후배님 다리 아작냈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요.”
“헤헤.”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와서야 김유겸은 웃는 낯을 했다. 그게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이진언도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제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앞으로 김유겸이라는 이 후배님과 잠자리를 심심찮게 공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확신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뭐, 나쁘지만은 않다.
“아까요, 제가 정식으로 제안했으면 선배가 같이 가줬을까요?”
과제가 남았다. 이진언은 김유겸을 옆에 두고 노트북을 켰다. 김유겸은 공부하는 이진언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이진언은 김유겸의 노골적인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에만 열중이었다. 이런 데서 이진언 또한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봐서.”
트라우마라고 했다. 알고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놓고 자신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노골적인 자신의 시선에도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이진언을 보면서 김유겸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묻는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속에는 이제 그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김유겸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기는 했지만, 이진언은 애써 모른 척 단순하게 대답했다.
“음, 그럼 어떻게 해야 같이 가줘요?”
지치지도 않았는지 김유겸은 아까부터 신청 방법을 물어왔다. 이진언은 노트북 자판에서 손을 떼지 않고 피식 웃었다. 서프라이즈 해도 수락할까 말까인데, 아예 대놓고 상대에게 이런 걸 묻는 애는 처음 봤다.
“한가하면.”
“선배 맨날 바쁘잖아요.”
무난한 답을 내뱉었더니 이내 얼굴이 완전히 시무룩해진다.
아니 쟤 지금 정말 나랑 학교 뒷산 가고 싶어서 저러는 거였어?
김유겸의 제안을 한순간의 객기, 혹은, 호기심으로 봤던 이진언은 순간 제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정말 같이 가자고?”
“그럼 가짜게요.”
“…….”
진짜로 진심인 냄새를 솔솔 풍기는 김유겸을 보며 이진언은 손을 멈췄다. 타닥타닥 두드리던 자판의 소리가 멈추자 김유겸은 곧 자신의 바람이 이뤄지리라는 걸 깨닫고는 두근두근한 마음이 되었다. 지금 이 마음을 표현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걸 알 거 같아서, 김유겸은 부러 더 고개를 숙이고 속상한 척 연기했다. 원래가 이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래, 그럼.”
“-!! 진짜요??”
“그럼 가짜게요.”
자신의 예상보다 순순히 허락의 말을 내뱉는 이진언의 모습에 고개가 바싹 위로 올라온다. 마치 가만히 있다가 간식? 이라는 말을 들은 강아지 같다. 아니 정말로 하는 짓이 사람이라기보다는 강아지 같아서 이진언은 풋 웃었다. 까탈스러워 보인다는 평을 듣는 얼굴과는 달리 이진언은 동물을 퍽 좋아했다. 동물이 전부 이진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약속해요, 빨리. 약속!!!”
스무 살 넘은 남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약속을 확정하라고 독촉하는 모습이 한심하지는 않았다. 순수해 보였다. 그래, 너는 그렇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이 잘 어울려, 정말로 얘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와 박지운의 예상이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김유겸이라는 이 아이는 확실히 옆에 두어도 괜찮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난도질에 엉망이 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애써 그은 선 안에 들여도 되는 존재.
그럴 만한 이를 만나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 이진언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김유겸을 마주하는 지금이 더욱 조심스럽고,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김유겸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래, 약속.”
어이없었지만, 하는 짓이 귀여우니 떼를 써도 받아주게 된다. 박지운이 옆에서 봤다면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얽혔다. “그 일”이 발생한 뒤, 누군가와 살을 맞대는 게 무서웠다. 사정을 아는 박지운은 이해했지만, 남들이 보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친구들끼리 괜히 부대끼는 일도 기피하게 된다. 가끔 아이들과 하는 축구나 구기 종목은 이런 제 습관을 고치기 위한 일환이었다.
“진짜, 진짜로 약속이요!”
환하게 웃으며 약속이라고 말하는 김유겸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기쁨이 엿보였다. 이게 뭐라고 저리도 좋아하나 싶어서 피식피식 실소했다. 그래, 이번을 기회로 조금씩 웅크림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아직 그어놓은 선 안에 기거하는 게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마냥 이 안에서 영원히 경계선을 보호막 삼아 살아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래, 진짜로 약속.”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이 너였으면 좋겠다.
네 지금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만 준다면, 내 지난 트라우마도 별것이 아니게 되겠다는 믿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