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배, 선배, 서어어언배애애애애애애-.”
김유겸의 선배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축 처진 눈꼬리로 살살 웃으며 선배라고 부르면 누구든 한 번은 돌아볼 법도 한데, 지금 김유겸이 부르는 주체의 사람은 어째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그이의 얼굴은 지금이 귀찮다는 티가 역력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이없는 모양인지 비릿한 허소를 짓는다. 그이가 그러든가 말든가 김유겸은 계속해서 치댔다.
그래, 그것은 치댔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진언과 김유겸의 활동 범위는 겹치지 않았다. 서로가 다른 과를 다니니 당연했다. 김유겸은 실용음악과였고, 이진언은 정치외교학과였다. 박지운과 같은 과다. 정치할 거예요? 라는 질문은 박지운에게 나오지 않았다. 박지운은 정말 정치할 것처럼 굴었다. 집안도 그쪽이었다. 이진언은 모르겠다. 왜 정외과를 온 거지. 권력에는 무심해 보이는데.
“…너.”
“네!”
옆에서 쫑알쫑알 선배 선배 부르는데, 귀에 딱지가 앉게 생겼다. 이진언은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저를 놓고 누가 뭐라고 씨불여대든 상관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하는 이야기는 어차피 비열한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 와서 당당하게 따지면 될 것을, 뒤에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비겁한 모습이었다. 그런 이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이진언의 그런 사상은 말로 하지 않았음에도 행동으로 드러났다. 어디의 누군가는 이런 이진언을 재수 없다고 하였다. 김유겸은 달랐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까불어.”
“음, 아직 좋은 말 나쁜 말 구분할 정도로 대화하지 않았는데요!”
“하….”
타이른다고 타이르는데, 해맑게 웃으며 이런다. 순간 이진언은 골이 띵 울렸다.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전에 얼굴 보고 인사한 전적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얼굴 본 것은 지난번 실음과 연습실이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잠자던 박지운 때문에 안면 텄다. 단지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자 까먹었다. 조교에게 과제를 제출하고 나올 때 김유겸이 먼저 알아보고 선배! 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평생토록 무관한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기억하신다면서요.”
선배! 라고 부르는데, 얘가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이진언도 김유겸은 알았다. 단순히 “김유겸”이라는 아이가 실재함을 인지만 했었다는 소리다. 별명도 안다. 실음과 아이돌. 실력도 얼굴도. 김유겸의 별명이 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예의 없는 짓이다. 남 일에 딱히 흥미 갖지도 않았다.
다가온 김유겸은 웃는 낯이었다. 그러더니 그랬다. 자신을 기억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투정을 부린다. 정말 내가 그랬나 싶어서 기억을 헤집어 봤다. 제 성격을 잘 안다.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 말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먼저 몸으로 깨우쳤다. 김유겸은 거짓말하지 않았고, 거짓말할 연유도 부재한 사이였다. 알지 못하는 관계에서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너는 농담이라는 것도 모르냐.”
기억났다. 아주 짧은 순간에 스치고 지나갔던.
굳이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말에 김유겸이 의미를 부여했다는 게 신기했다. 소문으로 듣던 김유겸은 이런 일에 마음 쓸 아이가 아니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이돌로 데뷔하려다가 친구만 붙고 자신은 떨어진 일로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어대도 무덤덤하게 일관한다고 들었다. 저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반응이 신기하다고만 여긴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일방적인 호감을 표시한다. 솔직히 말해서 당황스러웠다.
“앗! 농담이었어요? 저는 진담인 줄 알고 엄청 긴장했는데에~.”
“…….”
능청도 이런 능청이 있을까.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니 결국 피식하니 웃어버려야 했다. 혹시라도 기분이 나빴을까 얼굴을 살피던 김유겸은 이내 미소 짓는 이진언의 모습에 자신의 입꼬리를 더욱 위로 올렸다. 왜인지 밉지가 않았다. 누구든 치대는 건 딱 질색인데, 희한하게 김유겸은 그랬다. 장난기가 그득한 얼굴로 농담을 건네는 게 이상하게 귀여웠으면 귀여웠지, 미운 구석을 모르겠다.
그래서 큰일이었다.
이진언은 계속 김유겸이라는 아이와 어울리면 벽이 무너지리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타인에게 일부러 벽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선은 긋고 살았다. 누구도 제가 그은 선 안으로 들여놓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김유겸은 그런 사정이야 알기 싫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더니 지금 이진언이 딱 그러한 꼴이었다. 김유겸에게 약해지는 제가 어이없을 정도다.
“할 말 뭐야.”
“말해도 돼요?”
“닥치게 해줘?”
“아뇨, 말할게요!”
나름대로 인상을 짙게 쓰며 험상궂고 냉정하게 말해보지만, 김유겸은 역시나 부드럽게 넘어갔다. 도대체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이진언은 기운이 탁 빠졌다. 보통은 서늘한 말투와 사늘한 시선으로 대꾸하면 알아서 쭈뼛대다가 사라지기 일쑤였는데, 김유겸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섞는다. 나 당신에게 관심 있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였다. 이쯤 되니 모르는 사람이 바보일 정도다.
“선배, 저 배고파요.”
“…….”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배고프다고 말하는 뻔뻔한 면상을 이진언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솔직한 말로 이진언의 성격상 친한 후배가 밥 사달라고 요구하면 귀찮아서라도 밥 한 끼 사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친한 후배가 조른다면 말이다, 친한 후배가.
이진언과 김유겸은 빈말로나마 친하다고 정의할 사이가 아니었다. 얼굴과 이름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하다고 규정해야 한다면, 동문의 학우 절반과 친밀하다고 명명해야 한다. 이진언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골치가 아파오는 느낌인데.
“밥 사달라고.”
“와, 정말요?”
“…….”
넉살이 좋구나. 이진언은 픽 웃었다. 무례한 이런 말을 하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귀여워 보였다. 악의가 느껴지지는 건 아니었다. 어떤 약아빠진 후배들은 선배 알기를 돈줄로만 알아서 밥을 매번 얻어먹기만 했다. 선배라면 응당 후배에게 밥을 사야지. 뭐 그런 신조라도 가졌다는 듯이 굴었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모르고도 당해준다고, 이진언은 웬만하면 후배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대학이라는 곳도 하나의 작은 공동 사회였고, 이곳에서 이룩해놓은 이미지가 진짜 사회에 나갔을 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상대방 눈물 콧물 빼게 할 레퍼토리는 이미 여러 개를 소유했다. 살면서 제 독설에 상처받는 이가 더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너무도 간절한 요즘이었다.
“저 돈가스 먹고 싶어요.”
하도 치대오길래 뭐 거창한 걸 사달라고 할 줄 알았다. 학식에서요. 뒤따라오는 말에 장난기가 서렸다. 학식에서 파는 돈가스래 봤자 5,500원이었다.
설마 돈 5,500원 때문에 얘가 나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이것은 김유겸의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의 표현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제 모습이 김유겸에게 좋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진언은 피식피식 웃었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먼저 호감을 지니고 다가왔다. 대부분 얼굴은 알고 이름을 모르거나, 이름은 알고 얼굴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간혹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전부 거절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무엇을 할 정도로 인정에 굶주리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모두 진정한 저를 모른다. 단지 제 얼굴이 마음에 들어 다가오는 이들이었다.
저가 얼마나 이 얼굴을 저주하는지 모른 채.
이 얼굴 때문에 무슨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도 모른 채.
가능하다면 얼굴을 갈아버리고 싶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죄 뚫어놓고도 싶었다.
불가능했다.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으니 평생토록 이같이 살아야 했다. 이진언에게 제 얼굴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어디의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하겠으나, 정말이었다. 이진언은 저주받았다.
아름다움은 보호할 힘이 없다면 저주일 수밖에 없었다.
“가자.”
푹 눌러쓴 스냅백을 아래로 더욱 잡아당겨 얼굴을 가렸다. 가자는 말에 김유겸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마치 간식을 받은 강아지와 같은 표정이었다.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에 희열이 비치는 장면에 이진언은 몸을 돌렸다. 햇볕이 위에서 강하게 내렸지만, 모자챙에 부딪혀 얼굴에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
“…맛있냐.”
학식 돈가스는 그나마 돈값을 한다는 평을 받는 메뉴였다. 어떤 물건이든 가격이 낮게 측정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학식에서 배웠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이토록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난한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최대 6,000원을 넘어가지 않은 음식의 가격은, 이것을 먹느니 차라리 교문 밖으로 나가서 1~2,000원을 더 주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게 하였다. 때문에 학교 주변의 식당가는 언제나 호황이었다.
“네, 학식 돈가스 맛있잖아요.”
이진언은 이미 밥을 먹었던 터라 배가 고프지 않았다. 김유겸의 몫의 돈가스만 하나 사서 식당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으니, 진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맛있게도 냠냠거리며 음식을 씹었다. 밥을 사줬는데 먹으라고만 하고 자리를 뜨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일단은 앞에 같이 앉았다. 오늘 수업이 전부 끝나서 다행이었다. 아니, 불행인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앉지도 않았을 테니.
“그래.”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친해지고 싶어요. 온몸으로 말하는 김유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는 고기를 꼭꼭 씹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얘가 왜 이럴까 하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었다. 사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호기심이겠지. 신기하니까.
제 외모가 흔히 보이는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은 어릴 때부터 자각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처음 본 사람들은 헷갈려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 외모는 중성적이었다. 그러나 이 중성적이라는 말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욕이었다.
“선배.”
“어.”
김유겸은 정말 잘 먹었다. 꼭꼭 씹어 먹는 것도 같은데 순식간에 돈가스를 후딱 해치웠다. 고기와 같이 나온 양배추 샐러드와 밥 한 공기도 다 먹어 치웠다. 대단한 식욕이었다. 먹는 모습이 보기 불편하지 않았다. 예의 바르게 자랐다. 어떤 이는 같이 밥을 먹을 때 상대방 식욕이 뚝 떨어지게 만드는 버릇을 지녔다. 입안의 내용물을 모두 보이게끔 씹는다든지, 씹을 때 쩝쩝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든지처럼. 김유겸의 입에서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여러모로 신기한 녀석이다.
“커피 사드릴게요.”
“…….”
김유겸의 제안에 이진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잔반을 처리한 김유겸은 의기양양하게 이진언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치 이진언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태도였다. 확실히 이진언은 누군가 커피를 사 준다고 하면 사양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정보를 수집했는지 잘도 공략한다 싶어서 어이없는 웃음이 또 한 번 샐룩 새어 나왔다.
“너 박지운이랑 친하지.”
“음, 나름이요?”
“박지운이 내 얘기 많이 해줬겠네.”
“왜 제가 박지운 선배에게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학교 안에 위치한 브랜드 카페에 들어선 김유겸은 자연스럽게 아메리카노에 샷 두 개를 추가해서 주문했다. 이진언 취향이었다.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제 취향에 맞춰서 주문하는 모습이 이제는 신기하지 않았다. 친해지고 싶다고 몸부림치는 자의 당연한 노력이었다. 김유겸의 음료는 커피가 아닌 자몽에이드였다.
“그럼.”
“스스로의 관찰?”
헤헤 웃으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넉살이 밉지도 않고 수위를 넘기지도 않았다. 이 정도 선만 지켜준다면 곁에 놓고 지내도 딱히 나쁘지는 않겠다. 교내 유명 인사라는 아이를 무조건 밀어내는 것도 골치 아팠다. 지금까지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아도 나쁜 아이는 아닌 거 같고.
이진언은 사람의 순수한 호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지금이야 친해지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지만, 언제 어느 때고 뒤돌아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때린다고 해서 가만히 맞아주지는 않을 예정이라지만, 문제는 기분이었다. 친했던 아이들이 뒤돌아 침을 뱉고, 살려달라던 말을 끝끝내 외면했던 기억은 아직도 가슴 한복판에 묵직하게 남았다. 누구도 알면 안 되는, 심지어 저조차도 기억 너머 어딘가의 언덕에 묻어둔 과거지만, 그래도 가끔 무조건적인 호의를 가진 이를 만나면 경보를 울리고는 하였다.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김유겸은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았다. 땡깡을 부리는 건 아닌데 묘하게 사람 곤란하게 만들고. 처세술이 능한 녀석이다. 이진언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어디, 해봐.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김유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강아지 같았다. 주인만 쳐다보며 충성을 다하는 강아지. 정말 그런 성격인지는 알지 못했다.
***
“선배! 선배! 서어어어언배애애애애애애-.”
그날부터 김유겸의 치댐은 한층 극심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나타나 선배 타령이었다.
선배 밥 먹어요. 선배 커피 마셔요. 선배 같이 걸어요. 선배 이거 모르겠어요. 선배 교양 족보 있어요? 선배 피곤해 보여요. 선배 술 마셔요? 선배, 선배, 선배. 서언배애-.
옆에 있으면 선배라는 소리가 아예 귀에 들어앉게 생겼다. 박지운은 김유겸의 선배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나 진짜 꿈에서도 선배 소리 들었다니까?”
“왜 남을 함부로 꿈에 캐스팅하세요?”
“내가 널 캐스팅하고 싶어 했겠냐? 니가 멋대로 나온 거지. 나도 너 안 보고 싶어요. 그런데 요새 너 이진언 껌딱지라 계속 내 눈에 보였잖아.”
“선배야말로 진언 선배 옆에서 떨어져요. 훠이 훠이~.”
“와 이 배은망덕한 놈 보소. 야 그리고 아닌 말로, 나랑 이진언은 같은 과 동기에 시간표도 똑같거든? 어떻게 떨어지냐?”
“나 진짜 아직도 의문인데, 시간표가 왜 똑같은 거예요?”
“이진언 수강 신청을 내가 대신해줬다, 왜!”
“선배 다음부터는 제가 해드릴게요. 지운 선배한테 맡기지 마요.”
“와-!!!”
“…….”
어느새 모인 세 사람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박지운은 이기지도 못할 이야기를 하면서 약 올라 했고, 김유겸은 넉살 좋게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 주제는 이진언이었는데, 정작 주인공인 이진언은 끼어들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어디 한 번 더 해보라는 심정이 되었다. 이게 무슨 치정극을 찍는 것도 아니고 저를 놓고 양옆에서 이러는 꼴이 퍽 우스워 이진언은 소주를 홀짝대면서도 입가는 유려하게 호를 그렸다.
“야 아닌 말로, 너 우리 과도 아니잖아. 왜 이진언한테 치대.”
“와 이거 완전 차별 발언 아니에요? 같은 학교 다니면 다 후배지, 같은 과 애만 후배예요? 저 지금 완전 상처.”
“아니 누가 후배가 아니래? 같은 과 애들도 어려워해서 치댈 엄두도 못 내는 애한테 치대는 게 신기해서 그러지.”
“말 걸지 마세요. 저 완전 삐졌어요. 진언 선배 얼굴 봐서 무대 올라가려 했더니, 급 그러기 싫어졌어요.”
“악, 이 약은 놈!!!”
박지운이 아직도 자신을 무대에 세우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 김유겸은 배짱을 부렸다. 화딱지가 나지만, 그래도 뭐라고 하지는 못하는 노릇이라 박지운은 김유겸에게 헤드록을 먹이는 거로 대신했다. 으악, 항복, 항복이요! 김유겸이 술집 탁자를 탁탁 치며 항복을 외쳤지만, 박지운은 쉽게 헤드록을 풀어주지 않았다. 둘의 재롱 아닌 재롱을 보며 이진언은 웃었다.
“이진언 말이야, 재수 없지 않아?”
한바탕 소동을 피우는데,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셋이 앉은 곳은 룸 형식의 술집이었는데, 방음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인테리어가 정갈하고 가격이 싸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소주를 까는 것도 나름 멋과 운치가 있었지만, 이진언의 취향은 이런 폐쇄된 공간이었다. 몸을 사리는 성격이 도드라진 선택이었다.
“게이라는 말 돌던데.”
“그럴듯하네. 솔직히 그 얼굴이 여자랑 좆질 하는 거 상상이 안 된다. 남자한테 깔리는 건 어울리고.”
“씨발 더러운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선배한테 그러고 싶냐?”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뭔데. 여기 이진언 있어?”
술이 많이 됐는지 얇은 유리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수위를 넘겼다. 순식간에 셋이 앉은 방안은 싸늘한 침묵이 돌았다. 박지운은 헤드록을 걸었던 팔을 풀었고, 이진언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김유겸은 괜히 둘의 눈치를 보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쟤들이 제발 좀 닥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솔직한 말로 야, 이진언 존나 여리여리하잖아. 저번에 뭐 하다가 손 올렸는데 옷이 쑥 올라갔거든? 허리가 씨발….”
“변태냐? 아니면 너도 게이야?”
“씨발 뭐래. 말 다 했냐?”
“아닌데 왜 씹스러운 소리를 지껄여, 이 새끼가. 술맛 떨어지게.”
“왜. 뭐. 이진언 야하게 생긴 건 사실이잖아.”
“…정리하고 올게.”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더 수위를 높여갔다. 본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학교 근처라서 대화의 주인공이 지척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하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혀 위에 이진언을 올리고 난도질한다.
대화의 내용 자체가 불쾌했다.
김유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눈앞에서 누군가 저렇게 말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주의하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대화의 당사자가 직접 정리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괜찮겠죠?”
이진언의 얼굴은 평온했다. 특별히 화가 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태도에 김유겸은 속이 쓰렸다.
묘하게 예뻐.
예쁘지. 예쁜 사람이지.
어떤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방금 이진언을 혀 위에 올려놓고 토막 낸 이들에게도 그랬다. 이진언은 누구에게도 그런 평가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타인을 저렇게 저급하게 본인의 혀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짓거리는 잘못되었다.
“알아서 할 거야.”
김유겸의 불안을 읽은 박지운이 말하고는 톡톡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김유겸은 이진언이 이런 장면을 한두 번 마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술을 아리게 깨물었다. 자신도 남들의 혀 위에 많이 올라간 사람이었지만, 이진언과 같은 주제는 아니었다. 저런 식으로 난도질당하지는 않았다. 본인의 혀가 칼날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타인을 찌르는 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누군가가 상처 입어 피를 토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무식했다. 비겁했다. 그들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어, 어….”
딸각.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순식간에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혀 위에 올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댔던 상대가 등장함에 그들은 입을 닫았다. 더군다나 이진언은 선배였다. 사나이들의 세계에서 위계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하극상이 벌어지는 경우도 더러 발생하기야 했지만, 이진언은 보기보다 꼰대라서 하극상을 참아주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내가 누누이 후배님들에게 하는 말인데,”
이진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목소리로 말할 텐데, 이곳까지 들리는 게 신기했다. 그만큼 목소리에 힘이 서렸다. 작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하는 말은 사람을 무겁게 보이게 하였다. 가볍지 않은 저음의 목소리에 힘이 서리자, 그것은 권력이 된다.
사람들은 제 말 한마디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이를 권력자라 불렀다.
“불만 있으면 와서 말하라고. 뒷담화 까다가 걸리면 뒈진다고. 왜 매번 못 알아 처듣지.”
담담한 어조에 힐난의 빛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대놓고 화내는 열정의 분노보다 조용히 조곤조곤 따지는 서늘한 진노가 처리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제 모두 다 알 나이였다. 그만큼 대가리가 굵었다. 차라리 왜 뒤에서 욕하느냐고 대놓고 지랄이라도 하면 깔끔하게 죄송하다고 사과하기라도 하지, 지금 이진언의 분노법은 절대로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내가 누누이 경고하였음에도 어긴 것은 너희니,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하였다.
“이름.”
“…….”
“왜 대답 안 해. 선배가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어. 니네 직속 선배 잡아야 이름 댈 거야.”
“…….”
“세 번 말 안 한다. 이름.”
“…장, 재원입니다.”
“홍섬결…입니다.”
“송성재…요.”
“장재원. 홍섬결. 송성재.”
후배의 이름을 부르는 이진언의 목소리는 낮았다. 비록 목소리에 붉은 기가 묻어나지는 않았지만, 장재원 홍섬결 송성재는 알았다. 조용히 입 닥치고 다니지 않으면 앞으로 학교생활이 좆 될 거라고. 이진언은 단순한 학교 선배가 아니고, 학생회 부회장과 친한 사이였으며 교수들이 예뻐하는 선배였다. 더군다나 재학 중에는 과탑에서 내려오지 않는 수재였다. 담당 교수가 특히 예뻐해 키우려고 한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이진언에게 비벼보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고, 작은 사회라는 대학교에서 인맥은 금맥이었다. 혈혈단신으로 확고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에게 찍혔다, 이 말이다.
“너네 내가 기억한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먹고 가.”
“…….”
“대답 안 하냐.”
“네, 알겠습니다.”
탁, 저쪽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 문이 열렸다. 이진언이 들어왔다. 나가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딘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은 여전했다. 불쾌하다는 기색도, 언짢다는 표정도 무감했다. 귀찮게 됐다는 제스처만 보였다. 김유겸은 괜히 기가 죽어서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 봤다. 이진언은 소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다가 피식 웃었다. 입가로 가져가던 술잔을 도로 물려서 김유겸 앞에 놓인 빈 잔을 툭툭 쳤다. 눈치 보지 말라는 뜻이다.
“한 명 학생회네.”
“들었냐.”
“들리더라.”
박지운 또한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인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호로록 마시면서 말했다. 학생회 부회장과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따위로 말하는 녀석을 후배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요새 신입생들 말세다, 말세. 한 일흔 먹은 노인이 요새 젊은이들을 보고 할 법한 말이 박지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만간 군기 잡아야겠다.”
술잔을 어느새 모두 비운 박지운이 툭 말을 던졌다. 이진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는 학생회가 아니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김유겸은 이진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제아무리 담담하게 상황을 정리했다고 해서 마음속까지 동요가 생기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난도질하는 걸 생중계로 보고 멀쩡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왜.”
“네? 어, 아니요. 아니에요.”
유심히 살피는 눈빛에 이진언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시선이 들켜 화들짝 놀라며 김유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싱겁기는. 들려오는 소리는 타박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김유겸은 안심되었다.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상처받는 얼굴을 보는 건 싫었다.
‘이진언 야하게 생긴 건 사실이잖아.’
자꾸만 이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묘하게 생겼다는 평가가 어느새 야하게 생겼다로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다. 야하게 생겼다는 말은 남자답게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생김새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믿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김유겸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도 남자답게 생겼다는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연습생도 아닌데 왜 외모로 평가되고 인정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진절머리가 난다.
***
“괜찮아요?”
술자리는 예상보다 일찍 파했다. 선배에게 경고 듣고도 계속 술을 마실 배짱을 가진 녀석은 많지 않았다. 특히 뒤에서 말로 떠드는 녀석들이 더 그렇다. 조금 전에 이진언을 혀 위에 놓고 난도질했던 녀석들은 당사자가 방을 나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섬주섬 짐을 챙기더니 술집을 나가버렸다. 다시는 해당 가게에 오지 않을 듯했다. 녀석들이 나가는 것과 별개로 이쪽도 분위기가 영 아니올시다로 바뀌어서 예정보다 일찍 파장했다.
술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쩌다 보니 이진언과 김유겸이 겹쳤다.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주량을 초과한 박지운을 택시 잡아 태워 보내고 심야 버스를 기다렸다. 괜히 힐끔힐끔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진언은 정말로 태연한 얼굴을 하는데, 김유겸의 속이 다 탔다. 자신도 이런 상황을 겪어봐서 지금 이진언이 어떤 기분일지 경험을 통해 공감했다.
“뭐가.”
돌아오는 대답은 무심했다. 예상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속은 쓰렸다. 이런 일에 태생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선천적으로 강심장으로 태어나 무섭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쾌하다는 심정은 느낀다. 누구도 스스로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남들의 입에 올라가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또한, 주제가 주제였다. 스스로 변화하는 게 불가능한 타고난 형질에 대한 평가나 비난은 개인이 감당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요.”
“아무렇지도 않아.”
심야 버스에 같이 올랐다. 목적지가 같았다. 가까운 곳에 산다는 뜻이었다.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서 김유겸이 한참은 더 걸어가야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같이 간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아까와 같은 일을 목격했는데 혼자 보내기는 미안했다. 이진언이 괜찮다고 해도 이것은 자신의 기분 문제다.
“저는 이해가 안 돼요.”
“…….”
“왜 다들 남 말 하기를 좋아하는 걸까요.”
수없이 고찰했다. 모르겠다. 친분의 과시인가 싶었으나, 전체적으로 적용되는 일은 또 아닌 듯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우리나라 정서는 오지랖이지 비난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지랖은 호의에 기반한다.
참견하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악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실도 아닌데.”
당신들이 하는 말 중에 진실은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것이 실재하기는 한 걸까.
궁금하다.
그들은 모든 걸 알고 말하는 걸까. 왜 다들 그토록 남 말 하기를 좋아하는 걸까. 본인들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아까 같을 때 주눅 들면 안 되는 거잖아.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일을 입에 올리면서 스스로 책임은 지지 않겠다니.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신경 꺼. 원래 남자들은 남 내리깎으면서 지가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습성의 동물이니까.”
“…전 안 그런데요.”
“…….”
“전 안 그런다구요.”
“그래.”
“진짠데….”
이진언의 신랄한 평가에 억울하다는 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어두운 밤을 달리는 버스의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김유겸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정말 진짜예요. 라고 다시 말했다. 이진언은 응. 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연습생 떨어졌을 때 있잖아요, 소속사 나올 때요.”
아주 늦은 밤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새벽이라고 말하기는 뭐한 그런 시간대였다. 심야 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라디오도 심야라고 하지만. 왜인지 기분은 심야가 아닌 것 같았다. 얼큰하게 취한 취객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저만 쳐다보는 거 같았어요. 솔직히 그때 데뷔 조에 들어갔고, 곧 데뷔하는 거 거의 확정적이었거든요. 목에 힘 들어갔죠. 절대 엎어지지 않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데뷔가 엎어지고 제가 제일 처음 잘렸어요.”
실력은 좋다. 자만이라고 하면 솔직히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그랬다. 당시에 선별됐던 연습생 중에서 가장 실력 좋았던 사람이 바로 김유겸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획사 중 한 곳이라서 연습생 때부터 팬이 붙었다. 데뷔 조에 들어가자 소속사에서 품위 유지비가 따로 나왔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품위 유지비를 받으니 정말 데뷔가 코앞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었다.
데뷔 조까지 갔다가 엎어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몇 번 겪은 일이라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때 몸담은 프로젝트가 엎어진 거지, 다른 프로젝트의 데뷔팀은 건재했다. 자신의 실력이면 소속사에서 다른 팀으로 옮겨 주리라 예상했다. 솔직한 말로 그때 자신만큼 노래를 부르는 애는 없었다. 데뷔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소속사에는 김유겸만큼 하라는 이야기가 돈다고 했다.
소속사에서 더는 김유겸을 부르지 않았다.
정식으로 계약한 것은 아니지만, 연습생 계약은 했다. 일정 기간 다른 곳의 연습생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은 계약서였다. 데뷔는 무한정 연기되었고, 소속사에서는 케어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은 기다렸다. 연습생 기간 때문에라도 소속사를 믿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소속사는 연습생을 갈아치웠다. 계약이 안 된 애들을 온갖 핑계를 대서 밖으로 방출했다. 계약된 애들은 만료일까지 계획이 부재했다. 계약 기간은 아직도 일 년여가 넘게 남았는데, 소속사는 앞으로의 스케줄을 묻는 김유겸에게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았다고 하였다. 손을 놨다는 뜻이었다. 발만 묶인 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에서 파벌 싸움이 생겼다. 자신이 소속된 팀을 데뷔시키려던 실무자가 패배했다. 위에서 일어난 싸움에 연습생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새로이 권력을 잡은 이는 이전 실무자가 만든 팀을 믿지 못한다고 하여 프로젝트를 모두 엎었다. 기준이 바뀌었다. 새로운 권력자의 눈에 김유겸은 노래만 잘하는 연습생이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왔다.
계약금이 얼마 되지 않아 나올 때 위약금은 문제 되지 않았다. 부모님께 죄송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데뷔할 줄 알았는데. 동네방네 드디어 아들이 데뷔한다고 소문도 내셨었는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인정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속은 쓰렸다.
연습생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날 처음으로 김유겸은 자신이 가진 꿈에 회의가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노래가 부르고 싶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저기 쟤가 김유겸이야. 왜 아이돌 한다고 깝쳤다가 연습생에서 잘렸다는 애. 쟤 잘만했으면 지금쯤 데뷔해서 한류 스타 됐을 텐데. 쟤 김동준이랑 연습생 동기잖아.”
김동준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회사 차원에서는 쓸 만한 인재라는 소리다. 작곡도 할 줄 알아서 보유하면 어떻게든 활용이 가능했다.
그들에게 연습생은 사람이 아니었다. 돈줄이었다. 물건이다. 회사에게 연예인은 밖으로 내보내 팔아야 하는 상품이었다. 회사가 왜 자신은 내보내고 김동준을 남겨두었는지 이해될 때면 가슴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동시에 회사에서 굴려지면서 상품 취급받는 김동준이 안쓰러웠다. 데뷔 후 생활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알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김동준은 힘들어했다. 여기저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 보였다. 특히나 사생이 심각했다. 회사가 제대로 케어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해가 안 됐어요. 그들은 마치 제가 연습생에서 떨어진 것을 즐기는 거 같았거든요. 같잖은 동정심을 보이든 이해하기 싫은 적개심을 보이든, 왜 그들이 저에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나는 연예인이 아닌데. 아니, 한 번도 연예인인 적 없었는데.”
연습생 때는 참았다. 앞으로 이룩할 목표가 실재했으니, 미리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거 같다. 소속사를 나오고 나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힐난의 빛도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저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의 고뇌와 고민에는 무관심했고, 뜯어먹기 좋은 가십에만 관심을 두었다.
참으로 역겨운 광경이었다.
“당연히 화를 냈어요. 왜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느냐고. 사람들도 처음에는 순순히 사과하더라구요? 이제 조용해질 줄 알았죠. 아닌 거예요. 시간이 경과하니까 오히려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구요. 싸가지 없다, 지가 연예인인 줄 안다. 실패자 주제에.”
실패자.
그들의 말 중 가장 가슴 깊이 후벼 판 말이었다.
네 친구는 데뷔했는데 넌 못 했잖아. 실패한 주제에 넌 아직도 니가 연예인 같지?
면전에 대놓고 그런 말을 들었다. 욱했다. 상대 멱살을 잡아 올렸다. 쳐봐, 쳐봐! 얼굴을 들이밀며 하는 상대방의 도발에는 다행히 넘어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다 말렸다. 상대의 말은 누가 보아도 도가 넘어서 결과적으로 상황을 역전시켜주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곱씹어도 가슴이 사무치게 분한 말이었다.
“짜증 나잖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그래서 무대에 올랐어요. 내가 실패한 게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재수 없는 말이지만, 저 노래 잘 부르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었다. 너네가 말한 나는 사실은 실패자가 아니라고.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자긍심은 원래부터 높았다. 노래로는 어디서도 기죽지 않았다. 보여줘야만 했다. 다시는 주둥아리를 못 놀리게 기를 눌러줘야만 했다.
“알아.”
나도 귀 있어. 이제껏 가만히 김유겸의 이야기를 듣던 이진언이 대꾸했다.
작년 축제 과 대항에서 대상을 거머쥔 김유겸이었다. 다른 과에서도 노래를 불렀고, 더러는 춤을 추었다. 마술을 준비한 팀도 있었으나, 만장일치로 대상은 실음과였다. 실음과에 노래로 대상을 주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그때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김유겸이 대상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었다.
“너 노래 잘해.”
그날 축제에 참여하지 못한 학우들을 위해 김유겸이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이 학교 홈페이지 공식 계정이 올라왔다. 좋아요가 폭발했다. 누구든 결국 인정하고야 마는 실력이었다. 순식간에 김유겸은 인터넷 스타가 됐다. SNS를 하지 않은 학우들까지 일의 진상을 낱낱이 알게 될 정도로 희대의 대파란이었다.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시선은 그때 소멸했다. 왜 김유겸이 데뷔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진실에 가까운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적의가 호의로 변했다. 아직도 김유겸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이 전부 사라졌다고 하지는 못하였으나, 전처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권력의 이면이었다.
“실음과 보컬은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만, 명료한 답이었다. 무심한 듯하지만, 정답인 말이다.
김유겸은 삐죽이 웃었다.
역시 이 사람이 좋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필이 통했다.
이리 말하면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쳐다볼 테지만, 정말이었다. 왜 자신이 장황한 말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다. 구태여 아는 척하고 싶지 않으니 돌려 말하는 화법조차도 김유겸은 좋았다.
그냥 이진언이라는 사람이 좋다.
“누구든 뒤에서 말하는 사람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되레 위로해온다. 김유겸은 삐죽이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아까의 일이 괜히 마음에 걸리지만,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겠노라고 말하는 후배에게 이진언은, 저는 신경 쓰지 않으니 너도 신경 쓰지 말라 한다. 좋은 자세였다. 이미 그들에게는 경고했고, 이것으로 당분간은 조용해진다.
“선배 너무 좋아요.”
“…….”
예고치 않고 훅 들어온 고백에 이진언이 한쪽 눈꼬리를 위로 올리고 돌아보았다. 스냅백에 묻힌 얼굴에는 너 술 많이 마셨냐. 는 질문이 포함이었다. 김유겸은 웃었다. 그냥 웃었다.
선배 너무 다정해요.
자신의 말에 이번에는 픽 웃는다. 사실은 전혀 다정하지 않은 성격인데, 다정하다고 말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도 뭐라 항변하지는 못하겠다 싶었다.
“자라.”
작은 손이 다가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귀엽다는 뜻이 포함된 손길이었다. 이런 말 싫어하지는 않는구나. 다행이다. 혹시라도 이런 말에 거부감을 보인다면 좀 돌려서 표현하려 했다. 좋아하는 거 같으니 돌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버스가 힘차게 도로를 내달렸다. 부디 너무 이른 시간에 내려야 할 곳에 도착하지 않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