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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새로운 셔츠를 입는데 옷감이 너무 차갑게 느껴져 등줄기가 부르르 떨렸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들어 몸을 움츠렸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러보자 미열이 느껴졌다.
아침에 수혁이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던 건가.
저녁 약속 취소하면 수혁이가 실망할 건데.
오늘 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곤 점심에 병원에 갈 계획을 세웠다.
괜히 괜찮아질 줄 알고 버티는 것보다는 회사에서 가까운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이다.
표정을 정돈하고 아침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자 이미 준비를 다 마친 강유혁이 아빠와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빠는 제일 상석, 강유혁은 아빠를 기준으로 오른쪽, 나는 왼쪽이었다.
강유혁이 오기 전에는 내가 오른쪽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리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나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강유혁이 날 밀어냈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 나를 지탱해준 건 수혁이 밖에 없다.
“어제도 별로였냐?”
얼굴도 보지 않고 날아온 질문이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쪽 여자 분이 절 마음에 안 들어 했어요.”
“그거, 이상하구나.”
아빠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수혁이와 닮은 검은 눈동자는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았다.
“너는 네 애미를 닮아서 얼굴은 괜찮은데.”
애미, 자신의 와이프이기도 했던 여자를 칭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차가운 단어였다.
“취향이 아닐 수도 있죠, 아니면 우성 알파를 낳을 자신이 없거나.”
일부러 비꼬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빠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덤덤한 얼굴로 날 공격했다.
“집안이 괜찮으면 우성 알파를 찾기 마련이니까.”
내가 우성이 아닌 것을 탓하는 목소리에 손끝이 떨렸다. 입을 꾹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아빠가 숟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달그락거리면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식탁에 가득 찼다.
맞은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강유혁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강유혁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나 혼자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강유혁을 꺼린다는 것도 내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생각만 냉정하게 할 뿐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강유혁이 없었다면 내가 초조해질 이유도 없고, 집에서 나간 수혁이를 몰래 만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당당하게 수혁이를 만나러 다닐 수 있었을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겠지, 왜냐면 강유혁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내가 집안의 유일한 알파 후계자였으니까.
설마 아빠가 뒤에서 다른 자식을 만들고 돌아다녔을 줄은 몰랐다.
그걸 왜 몰랐을까. 아빠는 집착이 강한 사람이니까 우성 알파를 포기했을 리 없다는 걸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았을 것인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강유혁이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날 봤다.
“왜?”
“아냐, 향수 뿌렸어? 냄새 너무 독한데?”
아무것도 뿌리지 않았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코에 팔을 대고 냄새를 맡아 봤지만 옷에 스며든 섬유유연제 냄새 말고는 아무 냄새도 안 났다.
“향수는 무슨 향수.”
“뭔가 달달한 냄새가 나는데.”
강유혁의 말에 아빠가 얼굴을 찌푸렸다. 괜히 한마디 더 들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했지만 혹시 수혁이 페로몬이 남아 있는 걸까 싶어 불편해졌다. 이대로 먹으면 체할 것 같다.
“입맛이 없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여자 만난 자리에서도 그렇게 안 먹는 거 아니냐.”
“…잘 먹어요.”
“강지혁.”
“네.”
“헛짓하고 돌아다니지 마, 네가 할 일은 하나야.”
헛짓이 설마 수혁이를 뜻하는 걸까 싶었지만 만약 수혁이를 만나고 다니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말로만 하지 않을 거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대답하고는 식당을 빠져나오는데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