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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는?”
친척들을 보내고 들어온 형이 거실에 오자마자 물었다.
“잔데.”
“밥도 안 먹고?”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자고 일어나서 먹으라 했어.”
형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훈이를 깨우러 가지는 않았다.
“왜 준다고 마음먹었을까?”
“불쌍해졌나 보지.”
지훈이 심경의 변화가 궁금해서 묻자 형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갑자기?”
“원래 동정은 쉬운 법이니까.”
저 친척들한테 갑자기 동정심을 느낄 이유가 있나?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지훈이 거니까 어떻게 쓰든 지훈이 마음이긴 하지만. 딱히 이해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젓는데 형이 주방으로 향했다.
“지훈이 일어나면 바로 밥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둘 테니까 할아버지 방 좀 정리해.”
“어.”
원래 정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형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할아버지 방에서 가족사진이 장식된 곳을 정리했다. 우리끼리 사는데 이런 사진은 필요 없으니까.
액자에서 사진을 꺼내는데 뒷면에 사진이 한 장 더 나왔다.
숨겨 놓은 사진 속에는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가 양 갈래머리를 한 채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얼굴이 익숙해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깨달았다.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사진으로만 주야장천 봤던 엄마, 지훈이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엄마 사진을 갖고 있지?
뭔가 다른 단서가 없을까 싶어 사진 뒷면을 보자 짧은 메모가 쓰여 있었다.
[그래도 자식이니, 얼굴을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보내요, 당신 말처럼 오메가지만 아주 예뻐요. 내가, 잘 키울 거예요.]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엄마가 할아버지 자식이라면, 그러면….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애가 무슨 확신이 있어서 여길 왔을까 궁금했는데 이제 알았다.
형은 처음부터 엄마도 할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알았던 거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절대 내치지 못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커 가면서 점점 엄마를 빼닮는 지훈이를 보면서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 한 번도 아비의 정을 받지 못한 딸을 떠올렸을까. 그래서 그렇게 지훈이한테 애정을 쏟아 부은 건가.
엄마랑 아빠는 둘이 남매라는 걸 알았을까.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건가.
둘은 호적상 남이니 혼인신고 같은 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 같지만, 알고 한 것인지 모르고 한 것인지는 궁금했다.
만약 알고 했다면 금기를 깨트리고 식구들이랑 절연해가면서 우리를 낳았다는 거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형은 언제부터 알았을까.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은 거지? 아니,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건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지훈이가 처음 발정기를 맞이했을 때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파가 셋이나 옆에 있어서, 페로몬 조절을 못 할 수 있어, 몸도 불안정한데.’
‘몸이 불안정하다뇨?’
‘정확한 건 검사해 봐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처럼 신음했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내가 집을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서.
근데 부질없는 일이었다. 왜 형이 내가 지훈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는지 이제 선명해졌다.
이거, 완전히.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거 아닌가.
핏줄 한번 엿 같네.
헛웃음이 나와서 머리를 길게 쓸어 넘겼다.
그래도 우리가 부모님보다 괜찮은 거 하나는 있다. 우린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 이 징그러운 핏줄은 여기서 끝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