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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잉, 따뜻한 바람이 지나간 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쓱쓱 넘겼다.
욕실에서 안에 든 걸 빼준다는 핑계로 한바탕 한 뒤에 형들한테 몸을 맡겼다. 씻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다시 옷을 입는 것까지 다 형들이 해줬다.
갓난아이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 같았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큰형이 끓이는 미역국 냄새가 주방에서부터 흘러나왔고 TV에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적당히 평온하고 안락한 기분이 좋아서 자꾸만 몸이 늘어졌다. 소파에 등을 푹 기대자 작은형이 뒷목을 가볍게 주무르고 드라이기를 껐다.
“저녁은 외식할까?”
“나 발정기 끝났나.”
“거의 끝난 거 같은데, 그리고 우리 있는데 뭐 어때.”
작은형이 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말하고는 드라이기 선을 뽑아서 정리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대화를 들은 건지 큰형이 주방에서 물었다. 외식에 찬성한다는 건데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
“지금은 일단 미역국 먹고 싶어.”
“다 됐으니까 이리 와.”
큰형의 부름에 식탁으로 움직이는데 평화를 깨는 벨 소리가 길게 울렸다.
딩동 소리에 큰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계를 봤고 작은형은 작게 욕을 했다.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진짜 온 게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큰형이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 뒤를 나와 작은형이 따라 움직였다. 형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보고 싶었다.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는데요.”
큰형이 인터폰 화면에 나온 서울 고모를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뻔뻔하긴, 안 오긴 우리가 왜 안 와? 지난번에 제대로 얘기를 못 했잖아.”
“…그럼 들어오세요.”
큰형이 대문을 연 순간 마당을 가로질러 우르르 몰려온 네 사람의 얼굴이 현관 앞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친척들은 집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작은형이 그 모습이 우스운 것처럼 쿡쿡거렸다. 친척들이 못 들어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백부가 마당 평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얘기해.”
형들은 성가신 일을 빨리 처리해 버리겠다는 기세로 마당으로 움직였다. 평상에 앉기 무섭게 큰 고모가 서류를 꺼냈다.
“다 포기하라고는 안 해, 오메가가 사회생활 하기는 힘드니까. 어느 정도는 고려해줄게.”
“적당히 40%만 받아.”
고모들이 연이어 말했다.
“착각도 가지가지, 이미 지훈이 건데 뭘 양보해주는 것처럼 말하는지, 뻔뻔한 건 그 집 유전자인가?”
“뭐라는 거야?!”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집에도 못 들어올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김영훈.”
큰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빈정거리는 작은형을 불렀다. 지난번 경험상 큰형의 입에서 좋지 않은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지훈인 스물, 어엿한 성인이에요. 나눠 줄 생각 없습니다. 할아버지 유산은 모두 지훈이한테 상속 될 겁니다.”
“그걸 왜 네가 결정해?”
숙부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나 형들을 노려봤고, 형들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친척들은 무작정 버티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형들은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 상황이었다.
“…할아버지가 준 거니까 많이 줄 수는 없어요.”
평상으로 다가가며 조용하게 말을 뱉었다.
친형제한테 몽땅 뺏겨도 억울할 유산인데, 반쪽 형제의 자식한테 재산을 다 뺏기는 것이니 억울할 만도 했다.
내 말에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네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살아계실 때 잘하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할아버지가 지원해 준 것도 알아요, 매번 돈 받아 갈 때마다 유산 미리 준다고 생각하라는 말 들었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그래서, 뭐?”
백부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적당한 선에서 원하시는 거 말하면 조정해 볼게요.”
“뭐?”
“부동산이든 현금이든 원하시는 거 하나씩 말해 보라고요, 물론 이 집은 안 돼요.”
“지훈아.”
작은형이 날 불렀지만 손바닥을 펼쳐 말을 막았다.
“얘기는 저 말고 큰형한테요, 그럼 큰형이 알아서 해 줄 거예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말아요. 유산 얘기는 이걸로 마무리해요, 더 욕심내실 거면 그냥 가세요.”
친척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걸 확인하자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지훈이 의견이 그렇다고 하니까, 언제까지 결정하실래요?”
큰형이 협상가의 얼굴을 하고 물었다.
친척들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탐욕으로 물든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큰형이 알아서 해 줄 것이란 생각에 집으로 향하자 작은형이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좀 쉴래, 머리 아파.”
복도를 지나 내 방 앞에 서서 작은형한테 말했다.
“밥 먹고 쉬어.”
“입맛 떨어졌어, 자고 일어나서 먹을래.”
“…그래, 그럼 한숨 자.”
단호하게 말하자 작은형이 마지못해 양보하며 물러섰다.
방문을 열고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혼외자였던 아빠는 형제들 사이에서는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고 오직 할아버지한테만 애정을 받았을 거다.
그럼 할머니는 뵌 적이 없는 걸까. 할아버지가 찾을 수 없다고 한 건 분명 할머니였을 거니까.
아빠도 나처럼 엄마 얼굴을 몰랐겠네….
처음으로 아빠가 가깝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