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4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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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서 형들이 대화하는 걸 가만히 들었다. 큰형이 작은형한테 뭐라고 하면 편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이 됐다.

혼나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유혹한 것도 있지만 막상 큰형이 작은형을 혼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르게 형들의 대화는 평범했다. 큰형은 크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하긴, 나 빼고 3년이나 쑥덕거린 걸 보면 둘도 서로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문이 열렸고 큰형이 자리를 떴다.

작은형이 날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작은형의 태도로 보건대 큰형이 화나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래도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큰형은 이대로 나랑 몸을 섞지 않을 생각인 게 아닐까 싶은 불안이 밀려왔다.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작은형이 엷은 한숨을 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은 어디 가?”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

“오랜만에 왔는데 바빠서 깜박했어, 친구 만나고 올 거니까 걱정 마.”

작은형은 방에 들어가 겉옷을 걸치고 나와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친구를 만난다고? 저런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 어디 있어,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어떻게 할 것인지.

둘이 짠 것도 아닐 텐데 이런 건 어쩜 이렇게 손발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세 가지다.

하나, 작은형을 붙잡는다.

둘, 작은형을 데리고 큰형한테 간다.

셋, 나 혼자 큰형한테 간다.

두 번째가 제일 좋지만 어쩐지 그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게 오면 안 돼.”

현관문을 여는 작은형한테 말하자 형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안 있을 거야, 형한테 빨리 끝내라고 해.”

내 생각을 알아차린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큰형이 있을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옅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형.”

“어, 왜?”

안쪽에서 들린 대답에 문을 옆으로 열었다.

창문이 있는 벽을 제외하고는 벽면 전체가 책장인 방은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큰형은 가운데 있는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작은형이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면 큰형은 공부였다. 머리가 워낙 비상하게 좋아서 멘사 가입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형이 과학자나 발명가 혹은 사업가 같은 게 될 줄 알았다. 아니, 큰형은 원하기만 한다면 뭐든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재계에 인맥이 있는 할아버지를 이용하면 어쩌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외로 형이 선택한 직업은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너무너무 평범한 구청 공무원.

야근이 많은 건 싫다는 이유로 관리직도 아니고 창구에서 일한다. 어쩌면 나랑 작은형 때문에 선택한 직업인지도 모른다. 바빠지면 우리랑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문득 작은형도 공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니까 피아니스트를 안 한 게 아닐까 싶어졌다.

“왜 그러고 있어?”

“아냐, 나도 여기 있어도 돼?”

“들어와.”

형의 손짓에 문을 닫고 타박타박 걸어가 형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 전용석으로 형이 공부할 때 나도 여기서 책을 읽곤 했다.

“책이라도 보고 있어, 처리 못 한 게 있어서 일 좀 해야 하니까.”

“응.”

책상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들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이건 큰형이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형은 이 책을 몇 권이나 갖고 있다. 표지가 바뀌거나 새로운 출판사에서 출간되면 늘 샀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다 옆을 보자 형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손톱이 짧은 단정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타닥타닥 일정한 기계 소리가 울렸다.

조용한 방안에서 들리는 키보드 소리는 피아노 소리와 다르게 또 다른 안정감을 갖고 왔다.

안경을 끼고 있는 큰형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어제 봤을 때는 이글거리는 욕망이 가득했는데. 순간 그 눈동자가 날 향한 순수한 욕정이었다고 생각하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곱아든 발가락으로 바닥을 살짝 긁었다. 낮에도 그렇고, 이건 뭐 형들보다 내가 더 밝히는 것 같다. 아니, 지금 나는 발정기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는 사고를 막지 못하고 쌕쌕거리며 형을 봤지만 작은형보다 상대적으로 페로몬에 둔한 큰형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형, 많이 바빠?”

큰형 팔꿈치를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묻자 형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신호에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낮에 작은형이랑 했는데.”

“그래서? 나랑도 하자고?”

“…하고, 싶어.”

숨기면서 질질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빙빙 돌려 말해봐야 난 큰형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큰형은 내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얼굴을 훑었다. 이마에 닿았던 손가락이 콧등을 스치고 입술을 꾹 눌렀다.

“팬티 벗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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