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늦는다더니 일찍 왔네?”
집에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영훈이 얼굴이었다.
“형, 왔어?”
그다음에는 씻고 나와 따끈따끈한 기운을 모락모락 풍기는 지훈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했구나.
이건 둘이 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렇게 내 예상대로 움직일까.
늦게 간다고 연락하면 둘이 할 줄 알았다. 발정기인데 약을 먹지 않은 지훈이의 유혹을 영훈이가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둘이 할지 안 할지 궁금한 게 아니다. 사실 둘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니까. 어제 화가 났던 건 처음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이제 내가 궁금한 건 과연 둘이 했다는 걸 누가 말할 지, 지훈이는 어떻게 행동할 지다.
너무 궁지에 몰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어제처럼 내 기세에 눌려서가 아니라 지훈이가 스스로 선택하길 바라니까.
“밥은?”
“먹었어, 형은?”
안 먹었다고 하면 차려줄 기세로 영훈이 물었다. 찔리는 게 있으니 잘해주려고 하는 티가 고스란히 나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먹고 왔어, 일단 씻을게.”
씻고 나왔을 때 영훈인 1인용 소파에, 지훈인 3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렇게 떨어져 있으면 더 티 나는 걸 모르나?
만약 둘이 안 했으면 지금쯤 지훈이는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페로몬을 질질 흘려야 한다. 발정기 오메가는 원래 계속 섹스하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영훈인 그 페로몬에 흐물흐물해야 하는데. 이건 뭐, 둘이 너무 멀쩡하잖아.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훈이한테 다가가자 달달한 냄새가 났다.
영훈이 만큼 페로몬에 예민하지는 않지만 지훈이 페로몬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아찔해서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은 향을 맡으며 옆에 앉았다.
“학교는 발정기 끝날 때까지 안 갈 거지?”
“응, 그러려고.”
“오늘은 뭐 했어? 할아버지 물건 좀 정리했어?”
“어, 아니, 그냥 있었어.”
“그래, 그건 내일 정리하면 되지.”
말을 마치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지훈이 소파 위로 발을 끌어 올리더니 꼼지락거렸다.
“형.”
“어?”
“아, 음, 아니야.”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형, 내일 쉬지?”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영훈이 물었다.
“어, 내일 주말이니까. 어쩌면 서울에서 친척들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귀찮은 얼굴들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린 채 안경을 밀어 올렸다.
“또 오는 거야?”
“재산이라는 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오겠지. 다음 주부터는 상속 절차 밟을 생각하고 있어. 발정기 끝나면 빨리해야지.”
“흐음, 그냥 줘 버릴까?”
“이 집도 넘어갈 건데?”
“아.”
지훈이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그냥 받아야겠다.”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아마 지훈이도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아니었을 거다. 할아버지가 저한테 준 걸 왜 그냥 넘기겠나.
정확한 건 확인해봐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메가인 지훈이 평생 놀아도 될 만큼 재산을 남겼을 것이다.
발정기가 있는 오메가의 사회생활은 불안정한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인권운동가가 평등을 주장해도 사라지지 않는 차별이 있는 법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메가가 출세하는 것은 어렵다.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영훈이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형이야말로, 왜 모른 척하는 거야?”
영훈이 못 참겠다는 듯 굴었다.
뻔뻔하게 나오시겠다?
“뭘?”
“알고 있잖아, 내가 지훈이랑 한 거. 안 했으면 발정기 오메가가 제정신이겠어? 알파 페로몬을 이렇게 뿌리는데?”
“그래서?”
“아니, 화를 내든 뭐든 무슨 말을 하라고. 형이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면 더 무서워, 신경 쓰이고….”
영훈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말을 뱉었다. 불만 있는 것처럼 굴었지만 말끝이 힘없이 흐려졌다.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데, 자신도 분명 알 거다. 그런데도 저러는 건 우리가 형제기 때문이겠지.
아, 진짜 갸륵하다니까.
제 오메가를 공유해야 하는 문제라면 아무리 온화한 알파여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알파라는 형질이 갖는 독점욕이나 집착, 소유욕은 그만큼 심했다. 그러니 형제라고 해도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나에게 영훈인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작 저런 태도가 전부다. 아마 지금 태도는 영훈이 내게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인내심일 것이다.
만약 내가 지훈일 독식할 생각이었다면 영훈인 진작 이 집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뭐, 반대로 영훈이가 진작 지훈일 데리고 도망쳤을지도 모르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우린 둘 다 안 그랬고, 그건 김지훈 공유를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우리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형제애가 한 몫 했을 것이다.
내가 영훈일 갸륵하게 여기는 것처럼 영훈이도 분명 나에게 동경과 비슷한 애정이 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는 영훈이한테 화 낼 건 아니다. 사실 이렇게 먼저 말까지 해주는 건 기특하기까지 하다.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거잖아.
“왜 했는데? 지훈이가 발가벗고 안기기라도 했어?”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영훈이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완전히 다는 아니고, 팬티는 안 입었더라.”
영훈이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지만 그 밑에 깔린 감정은 자랑이었다. 저한테 지훈이가 먼저 하자고 했다는.
흐응, 김지훈. 그런 발칙한 짓을 했단 말이지.
“좋았겠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자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어디 가?”
“할 일이 좀 있어서.”
지훈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복도를 걸었다. 영훈이 피아노 방 앞을 지나가자 뒤섞인 페로몬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여기서 했나 보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바로 옆 방 서재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