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권) (31/91)

가깝고 친한 2        @하원사랑

3. 메리골드

1

날씨가 아주 맑았다.

장님이 아니고서야 다들 좋은 날씨라고 할 만한, 오늘은 그런 날이다.

내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날씨가 좋아서 더 눈물이 났다.

옆에 앉아 있는 큰형은 단단한 몸으로 곧은 자세를 유지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스님이 외는 알아듣지 못할 염불 소리마저 슬프게 느껴졌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 소리도 슬펐다.

나를 키워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나를 낳으면서 돌아가셨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빠 역시 내가 첫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나를, 아니 정확히는 우리 삼 형제를 거둬 준 게 할아버지였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큰형은 나를 안고, 네 살이던 작은형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과거에 아빠와 엄마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면서 할아버지와 의절하고 외할머니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였나, 부모님은 요즘 세상에 흔치 않게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마치 둘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할아버지한테도 외면 받았으면 어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큰형은 뭔가 확신이 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무작정 택시를 타고 경기도 안성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우릴 본 할아버지는 군말 없이 집안으로 들였다. 그때 어떤 분위기였는지 형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른 모른다.

그저 부모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할아버지는 막내 손주라며 금이야, 옥이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것만 안다.

할아버지가 형들보다 나를 훨씬 더 예뻐했다는 건, 아니 친척 중 나를 가장 예뻐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할아버지는 내 얼굴이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싫으냐 물었더니 미안하다고 자주 말했다. 자신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때는 엄마가 오메가여서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멍청한 짓이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반대로 형들은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밉다고 했다. 애비 가슴에 못을 박았으면서 제 새끼들 행복하게 해주지 못 하고 떠났다고.

할아버지 나름의 후회였을 거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슬펐다.

마을 유지의 장례식답게 시종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다. 넓은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를 기준으로 천막을 쳤고, 평상 위에 상이 여러 개 놓였고, 가마솥이 끓었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준비하는 동안에도 나는 울었다.

큰형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헝클일 뿐이었다. 그 손길이 또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대부분의 손님이 돌아간 새벽, 영정사진 앞에서 졸다가 큰 소리에 눈꺼풀을 움직였다. 하도 울어서 부은 눈이 내 뜻대로 잘 떠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자 서울에 산다는 고모가 미국에서 왔다는 큰고모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내가 다 확인했어.”

“진짜야?”

곧이어 백부의 험악한 목소리, 숙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다섯 형제 중 막내라고 했다. 백부와 숙부는 전부터 종종 찾아와서 할아버지와 싸우고 돌아가곤 했다. 돈 문제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장례식에서 저렇게 싸우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산 자는 역시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없다.

그 모습에 또 한숨이 나와서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자식이 많은데도 할아버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즐겨 피우던 연초가 이제 와서 원망스럽다. 그냥 나랑 좀 더 살지, 왜 이렇게―.

우울하게 떨어지는 내 기분과 다르게 친척 어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불안한 기분이 들어 본능적으로 큰형을 찾았다. 눈을 크게 굴려 마당을 살펴봤지만 까만 정장을 입은 형의 모습은 안 보였다.

이럴 때 작은형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작은형은 3년 전 집을 나간 뒤로 코빼기도 안 비친다.

할아버지나 큰형과는 연락하는 것 같았지만 나랑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집에 오지 않는 것도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으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할아버지 장례식에 안 오는 건 도리가 아니다.

나는 작은형을 싫어하지 않지만 만약 이대로 삼일장이 끝날 때까지 형이 안 온다면 이젠 형을 싫어하고, 평생 안 볼 거다.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해도 절대 안 보여줄 거다.

“포기시키면 돼, 그게 말이 안 되잖아. 아버지가 키워준 건 키워준 거고.”

쑥덕거리는 어른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나한테 쏟아졌다.

“네가 지훈이지?”

“네?”

얼굴 한 번 못 봤던 큰고모라는 여자가 나한테 다가왔다. 장례식에 찾아온 자기 손님들하고 인사하고 얘기만 하느라 음식 한 번 나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데요.”

“너 도장 어디 있어?”

“네?”

“그래, 일단 도장부터 갖고 와.”

서울 고모가 몸을 홱 돌려 맞장구쳤다.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둘 얼굴이 무척 닮았다. 눈동자를 돌려 백부와 숙부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네 사람은 닮았는데 사진으로 봤던 아빠와는 별로 닮지 않은 얼굴이다. 형제는 원래 조금씩 다 닮아야 하는 거 아닌가. 닮지 않을 거면 다 닮지 말아야지, 왜 아빠 얼굴만 다르지?

그동안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 눈 안으로 들어와 박혔다.

“몇 살인데 그렇게 어리바리해? 도장 갖고 오라니까.”

“숙희야, 좀, 일단 장례 끝나고.”

“장례 끝나고 상황 정리되면 마음 변해, 당연한 거잖아. 일단 지금 도장부터 찍어.”

숙부가 말렸지만 표독스러운 대답만 날아왔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줄줄 쏟아졌다.

“언니 말이 맞아, 괜히 나중에 하면 더 복잡해진다니까.”

“큰애 없을 때 빨리하는 게 낫지.”

가만히 있던 백부가 넌지시 동조했다. 큰형을 의식하는 말이었다. 왜? 형이 알파여서?

“됐어, 도장 없으면 일단 사인이라도 해.”

큰 고모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더니 몇 장을 뒤로 넘겨 내 앞으로 내밀었다.

“어차피 나중에 도장으로 바꾸긴 해야 할 건데, 딴소리하기 전에 사인이라도 해.”

일부러 서명 페이지만 펼쳐 놓아서 무슨 서류인지 알 수도 없었다.

“자, 여기 볼펜.”

손에 억지로 볼펜이 쥐어졌다.

“이게, 뭔데요.”

“일단 해, 그다음에 설명해 줄 테니까.”

“아니, 그래도 사인하는 거면 뭔지 알아야 하죠.”

할아버지가 그랬다. 사인도 날인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세상에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말은 주로 백부나 숙부가 다녀간 다음에 한 말이었다.

“일단 좀 읽어 볼 테니까―”

“어른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서울 고모가 짜증이 잔뜩 치민 것처럼 볼펜을 쥔 내 손목을 흔들었다. 억지로 이름을 쓰게 할 것 같아 팔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장례식 예의나 좀 지키지 그래?”

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눈이 커졌다.

작은형이, 돌아왔다.

큰형이 타고 다니는 검은 승용차 조수석에서 내린 작은형은 집을 나갈 때보다 키가 더 컸다. 이제 큰형이랑 거의 같을 것 같다.

“어린 애 하나 두고 넷이 뭐 하는 겁니까?”

이어서 운전석에서 내린 큰형이 친척들을 빙 둘러 보곤 안경 브릿지를 손으로 밀어 올렸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불쾌감이 뚝뚝 묻어났다.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와서…!”

“그건 당신한테 들을 말 아니고.”

작은형이 내 앞에 있는 서류를 낚아채 가더니 팔락팔락 넘겼다.

“돌아가셨다는 소리 듣고 미국에서 오신 양반이 오자마자 여기로 온 게 아니라 변호사부터 찾아가셨나 봐?”

작은형은 대충 눈으로 훑은 서류를 큰형에게 넘겼다.

큰형은 작은형과 마찬가지로 서류를 넘겨보더니 망설임 없이 쭉쭉 찢었다.

“지훈인 여기에 서명 안 합니다.”

“뭐 하는 짓이야?!”

“서명 안 한다고요.”

“오메가한테서 나온 새끼들이 다 이렇지, 핏줄 그거 무시 못 한다니까…!”

악에 받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서울 고모를 보고 작은형이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친척들 앞으로 한발 다가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뭐야, 이건. 열성, 열성, 하? 베타? 이것도 열성인가? 알파라고 하기도 뭐 하네. 차라리 그냥 베타가 낫겠어. 알파랑 알파가 만났는데 이 정도면 실패지.”

“김영훈.”

큰형이 작은형의 팔을 당겼다. 상황 정리를 하려는 것처럼 보여 나도 형을 멀뚱히 바라봤다.

“가까이 가지 마, 썩은 냄새 옮아.”

입이 쩍 벌어지려는 걸 턱에 힘을 줘서 간신히 참았다. 큰형이 어른들한테 이런 식으로 버릇없이 구는 건 처음 봤다.

할아버지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어르신들한테도 언제나 예의가 발라서 대추나무집 큰손주 하면 누구나 다 좋아하고 선망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큰형인데, 지금 모습은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손님들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집안싸움에 끼기 싫은 것처럼 슬슬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슬퍼하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으니 돌아가세요, 남은 장례는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뭘 너희가 해? 우리 아버지야!”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오셨어야죠, 이렇게 유산 상속 서류를 갖고 죽은 뒤에 오실 게 아니라. 돈 찾아오는 게 자식입니까?”

큰형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아빠의 형제들을 패륜아 취급했다.

“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세요, 아니면 어떻게, 페로몬 싸움이라도 해 볼 생각입니까? 백부님 아들이 오메가라고 했던가요, 그거 아무리 약 먹어도 알파로는 안 바뀝니다. 쓸데없는 돈 쓰지 마세요.”

오메가 소리에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러 바지춤에 문질렀다.

“…형 말대로 할 거예요, 가세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급하게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날 향했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억지로 서명하게 하려던 서류는 아마 유산 포기 각서 쯤 될 것이다. 그것 말고는 저들이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내내 운 것보다 더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작은형과 제대로 말도 하기 전에 침입자들이 끼어든 게 불쾌했다. 주먹을 꽉 쥐고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결정해야 끝날 일이다.

“이제 함부로 오지 마세요. 다음에는 신고할 거예요.”

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려 집안으로 향했다.

내 의사는 충분히 전했다. 더 있어 봐야 말만 길어질 것이고 어차피 저들 중 누구도 날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떠올라 또다시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유산 전쟁 하는 꼴 보려고 자식들을 낳은 게 아닐 것 같은데.

복도를 타박타박 걸어서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방문을 열었다.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방은 살아계실 때와 변한 게 없어서 금방이라도 할아버지가 말을 걸 것 같다.

시큰거리는 코를 손등으로 문지르고 책상 서랍을 먼저 열었다. 제일 위 서랍을 열자 낡은 노트가 나왔다. 표지가 낡은 걸 보니 아주 오래 전에 쓰셨던 일기장인 듯했다. 일부러 서랍 안에 숨겨 놓은 것 같았다.

일기는 개인적인 부분이니까 보면 안 되는 건데….

할아버지는 사고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 근데 처분하지 않은 건 돌아가신 다음에 누군가가 보길 바라서였던 거 아닐까.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일기장을 꺼내 후루룩 넘기다가 중간에 꽂혀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가 무뚝뚝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할아버지보다 약간 젊은 여자가 포대에 싸인 아이를 안고 앉아 있었다.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짐작된 사진은 꼭 가족사진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장식장 한쪽에 있는 액자로 시선이 향했다. 우리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는데, 그 사진 속에 있는 할머니는 아무리 봐도 이 사진 속 여자의 늙은 모습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져 이상한 기시감에 싸여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럼 이 애는 누구야?

쉽게 결론이 나오지 않아 사진을 꽂아 두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날짜를 보니 매일매일 성실하게 쓴 것 같지는 않았고 짧은 메모 형식의 글이 많았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익숙한 단어가 보여 나도 모르고 손을 멈췄다.

xx. x. xx

[가문을 잇는 건 우성 알파여야 한다.]

내가 알기로 할아버지는 우성이었다. 우성 알파 욕심을 내는 건 종족 번식을 일종의 의무처럼 생각하는 알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별생각 없이 몇 장 더 넘겼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도 열성이다. 보통도 아니고 열성이라니, 실패나 다름없다. 열성은 알파 사회에서는 하찮은 먹이밖에 안 된다.]

먹이라는 표현과 내게 보여준 할아버지의 모습이 제대로 매치가 되지 않았다.

형질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예측은 가능하다. 우성인지 열성인지는 몰라도 알파와 오메가는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오메가 아이를 가진 경우 낙태하는 빈도가 높아 태아의 형질 확인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뭘 못 하랴.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미 배 속에서 형질 검사를 끝내고 알파라는 걸 확인한 뒤, 아이를 낳은 게 아닐까. 그리고 우성이길 기대했는데 열성이라 실망한 거고.

[씨받이를 들이기로 했다. 우성만 태어나면 원하는 바를 들어 줄 생각이다. 여자는 건강해 보였고…]

옛날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씨받이라는 단어에 눈동자가 굳었다. 현대 사회에 이런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심장이 쿵쿵 떨렸다. 당장 문을 열고 형들이 올 것 같아 빠르게 눈을 굴렸다.

씨받이를 들였을 정도면, 할아버지는 뒤를 이을 우성 알파에 집착한 게 분명하다. 근데 왜 오메가인 나한테 잘해 준 거지? 오메가를 싫어했을 거 같은데.

일기장을 뒤로 넘겨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했다.

[찾을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성 알파 따위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을 말했어야 했는데.]

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절절한 후회가 느껴졌다. 누구한테 무슨 진심을 말했어야 한다는 걸까.

요동치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 채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지금 보니 여자의 얼굴이 사진으로만 봤던 아빠와 눈매가 닮았다.

엷은 심호흡과 함께 눈앞에 드러난 증거를 머릿속에서 열심히 정리했다.

할아버지는 씨받이로 들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거다. 우성을 낳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진심이 됐으니 얼마나 후회가 됐을지 짐작도 안 됐다.

일기장을 덮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할아버지의 비밀을 알아 버린 것에 가벼운 떨림이 일었다.

왜 아빠의 형제들이 할아버지에게 살가운 자식들이 아니었는지, 왜 아빠가 형제들과 얼굴이 닮지 않았는지 이걸로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혼외자식이었던 거다. 알파 아들을 원한 할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 그게 아빠였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우성 알파가 오메가와 결혼한다고 했으니 할아버지가 엄마를 마음에 안 들어 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알파와 결혼해서 알파 아들을 낳길 바랐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분명 아빠한테 기대한 것이 있을 텐데, 갑자기 오메가와 결혼했으니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길렀다. 어쩌면 일찍 죽어버린 아들에 대한 속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부정(父情)을 받지 못했을 아빠의 형제들이 조금 불쌍해졌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호흡을 정리했다.

“일단 가지만 다시 올 거야, 그건 말도 안 되니까!”

재등장을 예고하는 악당 같은 대사를 남기는 서울 고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할아버지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자 현관 앞에 형들이 서 있었다.

“너 괜찮아? 맞은 건 아니지?”

작은형이 혹시 하는 마음으로 내 얼굴을 살피려는 듯 팔을 뻗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형이 가까이 온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양팔을 뻗어 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놀란 듯 살짝 굳는 게 느껴졌지만 3년 만에 보는 형이다.

나한테만 연락을 안 해서 서운했다. 어디서 뭘 했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보고 싶었어, 형.”

내가 말하자 작은형이 짧은 한숨을 내더니 내 뒤통수를 슬슬 쓸어내렸다.

“…나도 보고 싶었어, 동생.”

“왔으니까 이제 됐어.”

큰형이 가까이 다가와 나와 작은형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진짜 내 가족이 모였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을 불러 모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