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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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을 때 허리가 불편했지만 병원을 예약해 뒀기 때문에 늦장 부릴 여유는 없었다.

“힘들면 다음으로 미룰까?”

집을 나서기 전까지 정민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도 계속 쉴 수 없으니까 일단 병원에 가자. 괜찮을 때 가야지.”

“응.”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정민이와 함께 도착한 알파와 오메가 전문병원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 병원과 다를 게 없었다.

접수처에 이름을 말했고, 처음 와서 연락처를 적어냈다. 진단받고 싶다는 말에 간호사가 피를 뽑은 다음 열을 쟀고, 조금 뒤 호명 당해 진찰실로 이동했다.

남자 의사 앞에 내가 앉았고 정민이 그 옆에 섰다.

“이수민 씨, 오메가로 발현한 것 같다고요.”

그는 코를 작게 킁킁거려보더니 작은 기계를 들어 목덜미에 댔다. 체온계와 비슷한 기계에서 삐릭 하는 작은 전자음이 울렸다.

기계에 있는 액정을 가만히 보더니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금 전 뽑았던 피 검사 결과로 짐작 되는 것을 확인했다.

“확실히 오메가네요, 페로몬이 약하게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안정적입니다. 각인하면 더 안정적일 거예요. 나이 먹은 뒤 발현이라 발현 열이 심했을 건데 잘 버티셨네요, 곧 발정기가 올 거니까 오메가 키트 받아 가시고, 안에 있는 수첩에 주기 체크하세요. 처음엔 귀찮아도 주기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대비하기 쉬우니까요.”

의사는 수도 없이 많은 오메가를 상대해 온 사람답게 거침없이 말했다. 녹음기를 틀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

“발정기는 최근에 앓은 것, 같은데요.”

“음? 아뇨. 지금 페로몬 수치를 봤을 때 발정기는 아직 인데요. 며칠 째라고 했죠?”

“오늘이 사흘 아니 나흘째인가.”

“그 정도 기간이면 아무리 열성이라고 해도 멀쩡할 수가 없어요, 발현과 동시에 발정기가 찾아왔으면 지금도 페로몬이 줄줄 샜을 겁니다.”

의사는 손사레 치며 절대 아니라는 듯 굴었다.

“열성이요?”

“네, 지금 페로몬 수치로 봤을 때 이수민 씨는 열성 오메라가 약만 잘 먹으면 큰 문제없을 겁니다.”

“발정기가 아니었던 건 진짜 맞아요? 열이, 많이 났는데요.”

“발현 열이라고 하는 거예요, 일종의 성장통 같은 거죠. 처음이라 착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발정기랑은 달라요.”

무뚝뚝한 설명에 대꾸할 말이 없어 정민일 힐끔 봤다.

발현 열이라는 걸 정민이는 몰랐던 건가. 나에게 발정기가 온 것처럼 굴면서 못 나가게 했고, 그걸 핑계로 자꾸 했는데.

정말 몰랐던 거야,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야.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이 입안을 휘저었다.

중요한 건 난 발정기가 아니었는데도 정민이가 찔러주면 찔러주는 대로 좋아했다. 뒤를 있는 대로 흠뻑 적시면서.

“발정기가 오면 전립선 뒤쪽에 자궁 입구도 열릴 겁니다, 열성이라 임신이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발정기 성관계는 임신 가능성이 높으니까 염두에 두세요.”

행위 도중에 정민이 전립선 근처를 쿡쿡 눌렀던 게 떠올랐다. 뭔가 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러트 알파가 본능적으로 씨를 뿌리기 위해 자궁 입구를 찾은 거라는 걸 깨닫자 얼굴에 열이 몰랐다.

형에게 씨를 뿌리려는 동생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 야했다.

“성인이시니 되도록 빨리 각인하는 게 좋아요. 약으로 억제하는 것보다는 성관계가 확실하니까요. 늦은 발현자들은 발정기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

늦게 발현했으니 그만큼 주기가 자리 잡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 나이에 발현하는 경우가 흔한가요?”

“종종 있습니다. 집에 알파도 있잖아요.”

의사는 내 뒤에 서 있는 정민일 힐끔 보더니 거의 확신에 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 병원에 왔기 때문에 의사는 정민이 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생분이 우성 알파니까 거의 확실하네요, 이수민 씨는 주기적으로 알파 페로몬에 노출돼서 숨어 있던 페로몬 샘이 열린 거라고 보면 될 겁니다. 원래 페로몬에 자극 받는 경우가 있어요, 알파나 오메가 부모 아래서 그와 비슷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확률이 높은 건 그래서죠.”

빠른 설명을 정신없이 쫓아가며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현대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어요, 그게 밖으로 얼마나 나오느냐의 차이죠, 그것처럼 형질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베타인줄 알고 지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발현 전 성별이죠. 모든 사람들은 다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할 수 있어요.”

의사는 의학적인 예를 드는 것처럼 굴었지만 내가 느끼기엔 삭막하게만 들렸다. 결국 알파나 오메가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 아닌가.

게다가 알파를 몰랐다면 평생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건데.

정민이 때문에 내가 발현한 거라고 생각하자 목 주변에 열이 몰렸다. 진짜 정민이가 알파여서 내가 그에 맞춰서 반응한 것 같지 않은가.

“알파랑 오메가가 같이 생활하는 건 별 문제없나요?”

다른 집은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묻자 의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두 분은 형제니까 큰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수민 씨 같은 경우엔 열성이라 우성 알파인 이정민 씨 러트를 유발할 확률도 낮습니다. 혹시 러트가 온다고 해도 보통 알파라면 충분히 이성으로 누를 수 있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열성 오메가는 오메가보다는, 임신 가능한 베타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페로몬은 알파의 러트를 유발할 수 없다는데, 그럼 정민인 어떻게 된 거지?

이성으로 누를 수 있는데 그걸 안 했다는 건가. 러트가 갑자기 터진 게 아니었나?

차마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정민일 볼 수가 없었다.

“초기엔 어떨지 모르니까 급성 발정에 대비해서 특효약 드릴 건데 혹시 부작용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병원에 오세요, 약 부작용은 생명에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페로몬 수치 잘 체크하시고 다음 달에 뵙죠.”

“감사합니다.”

진찰실을 나와 접수처에서 특효약과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오메가 키트를 받았다.

키트 안에는 억제제와 페로몬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온도계와 비슷한 작은 기계, 스케줄러가 들어있었다. 작은 주머니를 손에 쥐었음에도 얼떨떨했다.

정민이는 이번에 약을 받지 않았다. 러트가 끝났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했다.

지난 며칠간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에 심장이 콕콕 찔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카페에 들러 사장님한테 사정을 설명했다.

숨겨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오메가로 발현했다고 말하자 사장님은 고생했겠다며, 주말까지 더 쉬어도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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