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금꽃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연오가 세가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남궁세가의 장로는 물론이거니와 최근 새로운 잠룡으로 떠오르는 남궁한위에, 이 세가의 안주인 제갈금려, 그리고 근래 세가에서 나름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주강까지 박박 긁어모은 것이었다.
“모두 모였습니까.”
연오가 위엄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가에 무슨 중대사가 있어 이리 불렀나 긴장한 사람들이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는 좌중을 한번 쭉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리 모두를 부른 건 연이의 이혼 때문입니다.”
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바르게 앉아 주시하고 있던 한위가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청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무슨 중대한 일에 대해 말씀하시려나 했는데 뜬금없이 남궁연의 이혼이라니.
장로들은 벌써 껄쩍지근한 눈빛으로 발을 빼고 싶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훌륭하게 세가를 잘 이끌어 나가던 젊은 가주가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나 싶어 남궁지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주님, 어쩐 일로 갑자기 연 도련님의 이혼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백모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작자인지 잘 알고 있는 장로들의 태도는 떨떠름했다. 그들은 제 손주 뻘에 가까운 젊은 가주가 무엇을 하든 전폭적으로 지지하곤 했지만, 단 한 가지 일에 대해서라면 달랐다.
모란에게 단단히 찍힌 남궁사영이 어찌 되었던가.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한 절름발이가 된 데다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온 몸에는 불쾌하고 기분 나쁜 붉은 선이 죽죽 그였다. 거기다가 그는 최근 완전히 백치처럼 정신이 나간 상태로, 황산 근처에서 나뭇잎을 이불 삼아 거지처럼 살았다. 이 중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연이 혼인이 얼마나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것입니까? 진즉 무효로 했어야 마땅한 혼인입니다!”
연오가 단호하게 답했다. 올해 나이 육십이 세, 남궁지랑은 세가에서 호법장로로서 부와 명예를 충분히 누리기도 했겠다. 이제 슬슬 은퇴해도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전적으로 지지하던 연오 도련님도 이제는 별 탈 없이 가주가 되어 훌륭히 세가를 이끌어 나가고 계시고…….
아니, 실은 백모란의 일에는 그다지 관련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했다. 연오가 이렇게 백모란에게 원한을 불태울 때마다 남궁지랑은 걱정이 되다 못해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가주님께서 연 도련님을 지극히 여기시는 건 전부터 잘 알았지만 상대가 어디 보통인가 이 말이다. 게다가 그 보통 아닌 상대도 연오와 똑같은 상대를 싸고돌고 있으니.
“하나 가주님, 연 도련님께서는 혼인 후 평온하게 잘 지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갑자기 이혼 말씀을 꺼내시는지 이 늙은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긴 왜인가. 다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연오는 그저 백모란이 연과 혼인했다는 게 세상 마음에 안 들 뿐이다. 물론 장로들도 혼인식 날에 백모란이 신부로 등장한 것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사내와 사내가 혼인이라니, 이리도 남사스러운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러나 벽력탄에 산사태, 독, 화공, 수공 등 온갖 공격에도 꿈쩍도 안 하는 중원 최고의 고수 앞에서는 감히 무어라 떠들어 댈 수가 없었다.
도리어 모란 같은 자가 연만 곁에 끼고 산다면 조용히 군다니, 다행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백모란도 혼인은 백매화라는 이름으로 했겠다, 다들 혼인식의 실체를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했다.
“평온은 무슨!”
뜻밖에도 연오는 남궁지랑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평온하게 지낸다면 연이 어젯밤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세가로 피신해 왔겠습니까?”
이건 또 웬 말인가. 남궁지랑은 어쩐지 이 일에는 절대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촉이 왔다. 그건 다른 장로도 마찬가지라 남궁호정 역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연유로 연 도련님이 여기에 다 오셨습니까?”
혼인한 후 연은 종종 남궁세가에 놀러 오기는 했으나 오래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아예 세가에 와 있다니……. 보통 연이 가는 곳에 모란이 있기에 가능한 한 모란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장로들에겐 그다지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
“듣자 하니 백모란 그놈과 불화가 있었던 듯하니, 이번이 연이와 백모란을 떼어 놓을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남궁지랑이 헛기침을 했다. 백모란이 정파와 사파를 죄다 짓밟고 다녔던 이래로 벌써 육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매해 백모란에게서 쏠쏠하게 선물도 받고 있고 지금의 평온함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연오를 지지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지랑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일어나자 다른 장로들도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 말씀하시니…… 전 이번 일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긴한 논의 중에 지금 다들 어딜 가는 겁니까?”
연오가 눈을 부릅뜨자 장로들이 어물어물 말을 빙빙 돌려 댔다.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저는 사태가 워낙 중대하니 일단은 어찌 된 일인지 좀 살펴보고…….”
“게다가 부부간이니 지내다 보면 사소한 다툼이 있을 수도…….”
부부라는 말은 연오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부부라니! 연오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세가 밖에서는 연이 백매화와 혼인했다 박박 우기면서도 세가 내에서는 백매화가 아닌 백모란이 연을 속여 넘겼다며 화를 내는, 다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장로들이 우르르 나간 뒤에는 제갈금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일우와 천우가 낮잠에서 깰 시간입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연오와 달리 금려는 모란에게 결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연이 조카인 천우와 일우를 지극히 아끼는 이상, 모란이 은밀히 자식들의 뒷배가 되어 줬으면 되어 줬지, 결코 해가 갈 일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물론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괜히 제갈이란 성을 달고 있는 게 아니다.
제갈금려가 총총 걸어 나가자 방 안에는 머쓱하게 웃고 있는 한위와 이번 일에 별 관심도 없는 주강만이 남았다. 한위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검술 수련을 해야 해서요.”
모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버림받고 홀로 남겨진 연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한위 도련님.”
주강이 냉랭하게 말했다. 한위가 저린 팔을 애써 감추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자 주강이 이내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두었다. 한위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강에게 패배했다.
“오른발이 먼저 나가는 습관은 고치셨지만 아직도 왼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는 방심을 하시는군요.”
한위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강은 제가 왼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는 방심을 한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겠다. 주강의 공격은 언제나 매서워서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이든, 왼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이든 간에 피하기가 힘들었다.
주강이 검을 완전히 검집에 꽂은 뒤에서야 한위도 검을 거두었다. 숨을 고르며 몸에서 긴장을 풀고 있는데 주강이 다가와 한위의 팔을 잡아 왔다. 그러고는 여기저기 눌러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주강은 언제나 한위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귀신같이 먼저 알아차리곤 했다. 그는 언제나 한위의 뒤에 머무르며 등을 지켜 주었다. 냉랭하고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한위는 그가 자신을 신경 쓰고 돌봐 준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한위는 멋쩍어하며 답했다.
“별 이상은 없습니다.”
비무가 끝나자 주강은 평소대로 말을 낮추며 나무랐다.
“그래도 항상 주의해야지.”
마침내 팔을 놔 주며 주강이 가볍게 한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내 손은 떨어져 나갔으나 그 친근한 행동이 좋아서 한위가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 한위는 주강이 마치 자신의 아버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실제로도 아버지 같은 역할이었다. 주강은 한위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부상을 입었을 때 조치하는 법, 위험한 상대를 만났을 때 취하는 행동, 도망치는 방법, 사냥, 추적…….
그리고 살인하는 방법까지.
-무인으로 사는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검에 피를 묻히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어느 날 그리 말하며 주강은 한위를 데리고 안휘성을 나갔다. 그는 근처에서 악명 높은 자를 한위와 맞붙였다. 한위가 차마 상대의 목숨을 거두지 못해 거의 죽을 위기에 처해도 주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침내 한위가 살기 위해 울면서 상대의 목숨을 거두었을 때에야 가까이 다가왔다.
세가로 돌아온 그는 한위의 부상을 치료해 주고 검에 묻은 피를 직접 닦아 주면서 이리 냉랭하게 말했다.
-나를 원망해도 어쩔 수 없다. 난 네가 상대를 죽이지 못해 죽임당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주강의 사고방식은 철저했다. 그는 한위가 남궁세가에서 촉망받는 무인이자, 중원의 잠룡 중 하나로 주목받는 이상 언젠가 상대의 목숨을 앗게 되는 상황이 올 것임을 확신했다. 한위가 달고 있는 남궁이라는 성과 그 재능이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만들 것이다. 남궁연이야 워낙 병약했던지라 유일하게 예외였을 뿐, 남궁연오도 사람을 죽이는 법을 알았다. 주강이 알기로 남궁연오의 첫 살인 대상은 녹림십오채의 도적 중 한 명이었다.
비단 남궁세가뿐만이 아니다. 검을 든 자는 모두 그럴 수밖에 없다. 남궁세가처럼 적이 많은 집단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불살이란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면 연처럼 아예 검을 버려야 했다. 혹은 백모란처럼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거나.
그 뒤로도 주강은 한위에게 몇 번 더 살인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첫 번째 살인 이후로는 죽여도 될 때와 죽여서는 안 될 때를,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을 지나면서 죽여야만 하는 사람과 살려도 되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점차 한위는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 앞에서도 침착하게 판단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주강은 자신이 마교 출신의 사람임을 밝히며 한위에게 마교의 인물을 구별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누이의 복수를 한다고 마교를 나오긴 했으나, 그는 마교가 자신을 그리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았다. 마교가 주강을 놔준 건 복수에 미친 그가 남궁세가에 큰 타격을 입히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마교의 손길이 자신에게 뻗쳐 올 게 분명했다. 그 손길이 주강의 선에서 끝나면 다행이었지만, 마교가 한위에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위는 주강이 마교의 인물이라는 것에 잠시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이내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는 주강이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인물이라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자신에게 그런 큰 비밀을 알려 주었다는 걸 감사하게 여겼다. 그만큼 주강이 한위를 신뢰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렇게 주강과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한위는 영명에 대한 기억은 차츰 잊어 갔다. 어릴 때는 그렇게 간절하던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주강과 비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검을 손질하다가 문득 떠올라 한위가 말했다.
“아, 이번 사냥은 좀 미루겠습니다. 아무래도 연이 형님과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요.”
‘사냥’은 안휘성에서 지명 수배가 걸린 죄인들을 추적하는 일이다. 죄인들을 추적하고 붙잡아 관아에 넘기는 일을 통해, 주강은 실전 경험을 쌓음과 동시에 한위의 명성을 높이는 것도 노렸다. 오늘이 바로 그 사냥을 하는 날이었으나 한위는 잠시 미뤘다. 사냥보다는 그의 형님에 대한 일이 더 중요했다. 주강도 한위가 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주강은 세가에서 어린 무사들을 맡아 훈육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뜨는 걸 잠시 보다가 한위가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 지나가다 보니 시비와 하인들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한위는 이따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지금 세가에서 받는 대접이 새삼스러워지곤 했다.
‘연이 형님이 아니었다면…….’
한위의 인생은 소룡대회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것이 연과 모란의 덕이었다. 모름지기 무인이라면 은원을 확실히 해야 하는 법.
한위는 언제고 연과 모란을 위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은혜를 갚으리라 항상 다짐하고 있었다. 물론 연이 그 다짐에 어찌 반응할지 잘 알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는 곧 화정당에 당도했다. 세가에서 가장 꽃이 많고 풍성한 곳이다. 화정당의 시비가 한위를 보고는 얼굴을 다소 붉히며 걸음을 뒤로 물려 길을 텄다. 이제 나이 스물두 살. 한위는 안휘성의 젊은 여인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다정하고 호감 가는 모양새며 제법 크고 잘 빠진 체격에 그 남궁세가의 잘나가는 젊은 무인이기도 하니 연서도 심심찮게 날아들곤 했다.
“형님, 한위입니다.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이 없었음에도 한위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연이 제일 잠이 많은 이인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해가 정오에 뜬 시간인데 연은 침상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잠자고 있는 중이었다. 혹여나 연이 깰까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면서 한위는 전혀 변한 구석이 없는 형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기도 하지, 어쩐지 형님은 나이를 안 드시는 것 같아.’
육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위는 껑충 자라났고 연오도 주강도 조금씩 연륜이라는 것이 외모에 스며들어 가는데 연만이 오로지 그대로였다. 연과 함께 안휘성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위는 이따금 연과 동갑내기로 착각받기도 했다. 하긴 연만이 아니다. 모란도 거의 나이가 들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한위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이 깨어날 때까지 서책을 읽기로 하며 그는 조용히 독서에 빠져들었다.
연이 깨어난 건 한위가 당도한 뒤로부터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부스스 일어난 연은 한위가 곁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움찔 놀랐다. 눈을 비비고는 잠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왔으면 깨우지 않고.”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형님 오셨다기에 뵙고 싶어 왔어요.”
밝게 대답하며 한위는 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도 잠기운이 남았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더듬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방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햇살을 받은 연이 눈을 찡그렸다. 금색 눈동자에 햇빛이 물처럼 말갛게 고였다.
“식사는 안 하셨지요?”
“그래. 한위 너는?”
아직 안 먹었다 대답하며 한위가 주위를 살폈다. 워낙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곤 하는 모란 때문이다. 한데 연오의 말처럼 불화가 있기는 했는지 그 어디에도 모란의 모습이 없었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한위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모란 형님은요?”
“모란은 일이 있어서.”
연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말투에는 어딘가 쌀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있으셨구나, 한위는 생각했다.
연은 시비에게 식사를 내오라 일렀다. 식사가 차려지는 동안 한위는 무슨 일이 있나 물을까 말까 고민했다. 일단은 먹고 이야기 하는 게 좋겠지. 배가 차면 연의 기분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식사가 차려진 후 연은 느리게 손을 뻗어 식기를 집어 들었다. 요즘 세가의 말썽꾸러기가 된 천우와 일우의 이야기를 하던 한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연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입맛이 없는지 평소보다 느릿느릿했으며 이따금 젓가락이 음식을 집기 직전 머뭇거리곤 했다.
‘어딘가 이상한데.’
모르는 척 한위는 연을 유심히 주시했다. 팔을 다치셨나? 하지만 손목이나 팔의 움직임은 뻣뻣하지는 않았다. 고통을 참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 몸에 이상이 있는 건 분명했다. 연이라면 의원이니 한눈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을 텐데……. 한데 저 움직임은, 마치……. 설마, 아니겠지.
제 형님에게 정확히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된 건 연이 실수로 찻잔을 쳐서 뜨거운 찻물을 엎질렀을 때였다. 다행히도 델 정도로 찻물이 뜨겁지는 않았다. 한위가 벌떡 일어나 시비에게 닦을 것을 내오라 하며 가까이서 연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이유를 깨닫자 곧장 낯빛이 희게 질렸다.
“형님, 설마 한쪽 눈이 안 보이시는 겁니까?”
연은 아니라고 부정할 모양인지 입을 열었다가 시비가 내민 찬 수건을 받아 들었다. 한위가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자 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별것 아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게 어찌 별것 아닌 게 됩니까?”
한위는 연오가 연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확신했다. 알고 있었다면 오늘처럼 유순한 반응은 결코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연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이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형님은 바로 아시겠지?”
한위가 눈치를 챌 정도였으니 연오는 바로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한숨을 쉬며 연이 품 안을 뒤적여 안대를 하나 꺼냈다. 한위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연이 머리카락 뒤로 안대 끈을 가로질러 묶는 걸 지켜보았다. 아닌 척하다가 지금처럼 들키고 상대의 걱정을 사느니 차라리 눈병이 났다고 할 셈인 것 같았다.
“다치신 겁니까? 아니면 일시적인 겁니까? 나을 수는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연은 별 대꾸하지 않더니 잠시 뒤에 글쎄, 하고 애매한 대답만 흘렸다. 의원이니만큼 자신의 눈이 어떤 상태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위는 더는 묻지도 못하고 걱정에 한숨만 쉬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다시 물었다.
“혹시 모란 형님과 싸운 것이 눈 때문입니까?”
모란의 이름을 담자 연은 숨기지도 못하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눈 때문에 싸운 게 맞긴 맞구나. 하지만 왜? 한위가 아는 모란은 연이 아프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을 구해다가 알뜰살뜰 보살폈으면 보살폈지 싸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은 제법 심기가 좋지 않았는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한위는 연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화정당을 나왔다. 대체 형님 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걱정하며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다 그는 연오와 마주쳤다. 마치 일부러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한위야. 연이는 좀 어떻더냐?”
한위는 연오의 질문이 ‘연과 모란의 사이가 어떠한가’ 하는 의미임을 잘 알았다. 한위가 볼 때에는 딱히 둘이 헤어질 것 같지는 않았으나 연오는 포기를 몰랐다. 그는 정말 모란을 싫어했다. 한위가 보기에는 딱히 모란이 연에게 해를 끼쳤다고 여겨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삼 년쯤 전인가 연오가 모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할 때가 있기는 했다. 나름 세가의 연회에도 초대를 했다. 연회 초반에는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어찌 났던가? 파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날 연오가 얼마나 화를 냈었나 떠올려 본 한위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연오에게 있어 모란이 그랬다. 정작 모란은 연오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대가 뭐라 하건 말건 ‘뉘가 짖느냐……’ 하는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무심한 태도가 연오의 화를 더 불러오는 요인 중 하나였다.
“평소와 비슷하셨습니다.”
연오의 질문의 의미를 알면서도 한위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리 말하면서도 연오의 표정은 다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솔직하여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연오는 잠시 동안 화정당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한위도 연오와 똑같이 그곳을 바라보다 뒤를 따랐다. 눈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이어야 할 텐데, 근심이 뒷덜미를 채는 듯했다.
***
연이 화정당에 머무른 지도 벌써 사흘이 되었다. 한위는 매일같이 찾아갔으나 연의 눈은 여전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흘 내내 모란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한위의 근심은 나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왜 연의 눈이 저렇게 되었는지, 모란은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
며칠 동안 슬슬 모란을 한번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한위는 주강과 함께 사냥을 나섰다. 한데 누굴 잡아 볼 것인가 하여 관아에 갔더니 현상 수배범들의 씨가 싸그리 말랐다는 말이 돌아왔다. 듣자 하니 요 며칠 사이에 누가 죄다 잡아다가 관아에 넘겼다는 게 아닌가. 주강이 눈썹을 찌푸렸다.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잡범들까지 죄다 들어와서 한 명도 없소.”
관아에서도 신기한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위는 현상 수배범을 잡아 넘긴 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글쎄, 좀 껄렁해 보이는 사내였지. 키는 이만하던가. 제법 크고. 아, 그래. 검도 없이 맨손으로 잡아 와서 놀랐소.”
묘사를 들어 보건대 그 사람은 모란인 게 분명했다. 모란 외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었다. 이제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한위는 마침내 모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함께 가겠냐 묻자 주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모란을 상대하는 걸 가급적 피하는 편이었다. 한위는 혼자 연과 모란의 사저로 향했다.
연과 모란이 사는 저택은 안휘성에서 꽤 유명했다. 일단 백모란이 사는 곳이라 유명했고, 두 번째로는 저택 근처에 철도 모르고 한가득 피어난 꽃들 때문이었다. 사시사철 꽃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어나는지 백모란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종종 꽃구경을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행히도 모란이 있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커다란 관상용 바위 위에 앉아서 연못의 잉어들에게 먹이나 한 알씩 뿌리는 중이었다. 한위를 흘끗 보더니 모란이 손안에 있던 먹이를 와르르 털어 버리고는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잉어들이 먹이 쟁탈을 하며 요란하게 첨벙거렸다.
“연이는 좀 어때?”
모란이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연에 대해서 물어보았으나 한위는 마음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모란은 그다지 살가운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 보아도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정원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던 한위는 잠자코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란에게 대답했다.
“눈 한쪽이 안 보이시는 걸 제외하면 괜찮으세요.”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모란은 별 반응이 없었다. 얼굴 표정에 별 기복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가 설렁설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위는 조용히 뒤를 따라갔다.
모란은 조용히 차를 한 잔 한위에게 내밀었다. 모란 나름의 손님 대접이었다. 아무에게나 해 주는 게 아님을 알기에 한위는 감사히 받아 들었다.
일단 한위는 현상 수배범에 대한 건부터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관아에 가 보니 현상 수배범의 씨가 완전히 말랐다는 이야기를 하던데요.”
한위에게는 차를 대접해 놓고 정작 제 찻잔에는 술을 따르며 모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심심하고 할 일도 없어서.”
누구나 심심하고 할 일 없다고 현상 수배범 잡아다가 관아에 넘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모란이니 한위는 그러려니 여겼다. 당분간은 안휘성 말고 다른 지역에 가서 사냥을 해야겠다 생각했을 뿐.
한위는 느릿느릿 차를 마시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인내심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인내했다. 예상대로 차를 두 잔째 마시기 시작했을 때 모란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화의 첫 시작이 꽤 충격이었다.
“내가 연이 죽었을 때 살리려고 오른쪽 눈에 박아 넣은 게 있거든.”
“……예?”
한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연이 죽은 건 또 무엇이고 오른쪽 눈에 박아 넣은 건 또 무엇인가? 그러나 한위의 반응이 어떻건 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란은 죽 말을 이어 나갔다. 일방적으로 불친절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내 생각엔 오른쪽 눈이 먼 게 실리낙스의 눈 때문인 것 같단 말이야. 원래는 공성전 무기나 성벽 구축 마법진에나 사용하는 물건이라 그런 건지…….”
실…… 무슨 눈이며, 공성전 무기는 또 뭐고 구축 마법진은 또 무엇인가. 모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한위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란은 딱히 상대의 이해를 바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한위는 그냥 얌전히 눈치껏 이야기를 파악하며 듣기로 했다.
“이론상으로는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될 게 없어. 무슨 속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마력정이니 오히려 시력이 좋아져야지. 애초에 질병에 걸릴 몸인 것도 아니지. 내 내단도 줬겠다.”
한위는 그저 음, 네, 어, 그렇죠, 정도의 대답만 했다. 방금 내단이 어쩌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저 이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내단 어쩌고 했던가…….
한위가 가장 알고 싶었던 부분은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나왔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내 책임이지, 연이 오른쪽 눈이 그렇게 된 건.”
“음…….”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위는 모란이 연을 살리기 위해 어떤 영약 같은 것을 먹였고, 그 영약 때문에 오른쪽 눈이 그리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굳이 인과 관계를 따지자면 연의 오른쪽 눈이 그리된 건 모란 때문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일로 모란을 비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한위는 슬슬 연이 왜 모란과 싸웠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실리낙스의 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려고 했단 말이지. 전 같으면 그냥 넘어가서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대가를 지불하고 가야 하거든. 아무런 대가 없이 갈 수는 없는 곳이라. 한데 별것도 아닌 대가로 그렇게 화를 낼 것은 또 뭐야?”
“그 별것…… 아닌 대가가 뭐기에 그렇습니까?”
“내 수명 약간?”
한위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수명 약간?
“마녀의 술법 중 신체 능력을 넘겨주는 것이 있어. 나야 어차피 외눈으로 오랫동안 산 적이 있어서 그리 사는 것에 익숙하니까 내 눈 주겠다고 한 건데 그리 화를 내면서 집을 나가 버리고…….”
마녀의 술법? 신체 능력을 넘겨줘? 모란이 외눈이었다고?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연이 충분히 화내고도 남을 듯했다. 모란이 정파고 사파고 박살 내고 다니며 천하제일의 공적을 자처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그는 종종 아주 막 나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연이 화난 일에 대해 털어놓는 모란의 기분은 뜻밖에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말꼬리를 흐리다가 희미하게 히죽 웃고는…….
“나 때문에 그리 화내고 가출하는 게 오죽 귀여워야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한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오가 알면 실망하겠지만 모란과 연 사이에 별문제는 없겠다. 괜한 걱정을 했다.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시만.”
모란이 이제 세가로 돌아가 보려던 한위를 붙잡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뒤에 풍성한 꽃다발을 하나 가지고 왔다.
화사한 노란 꽃다발 한가운데 빨간 산딸기 열매가 조롱조롱 박혀 있었다. 한위가 잠시 꽃다발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오도 금려에게 잘해 주는 편이지만 모란은 정말이지 연에게 세상 다정하게 굴었다.
“연이 가져다줘.”
“아, 네.”
“그리고 이건 너 먹거라.”
심부름 값 주듯 모란이 한위의 손바닥 위에 나무 열매를 한 알 떨어트렸다. 눈처럼 흰 색의 열매로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이게 대체 뭔가 하여 한위가 미간을 좁혔다. 생긴 건 개암처럼 생겼는데 아무리 봐도 개암은 아닌 것 같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먹으면 몸에 좋겠지. 그런 종류니까.”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이따금 지금처럼 한위에게 이런저런 먹을 것들을 준 적이 있었다. 그저 좀 특이하게 생긴 작은 삼인줄 알고 먹었는데 알고 보니 인형설삼(人形雪參)*이요, 아주 향기로운 버섯이라 생각했는데 부르는 게 값인 진귀한 약초였고, 산딸기라고 생각했는데 먹고 나니 내공이 증진되어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이번도 그 비슷한 것이겠지…….
예전에 사양했다가 모란이 그대로 그 귀한 물건을 그대로 잉어 먹이로 주는 걸 본 적이 있기에 한위는 감사하게 받았다.
꽃다발을 들고 오는 내내 한위는 사람들의 시선을 샀다. 안휘성에서 꽤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젊은 무인이 커다란 꽃 한 다발을 들고 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령기의 어여쁘고 젊은 여인들의 설레는 시선이 한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위는 부끄러움에 걸음을 빨리했다.
세가에 도착했을 때 연은 의원 일을 하러 나간 터라 자리에 없었다. 한위는 탁자 위에 꽃다발을 내려 둔 다음 시비에게 일러 화병에 물을 담아 오도록 지시했다. 연을 기다리는 동안 마시라고 차도 같이 내왔으나 아까 모란과 대화하며 질리도록 차를 마신 한위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연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쪽 눈만 보이기 때문인지 다소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여전히 안대가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위와 탁자 위에 올려진 꽃다발을 발견하고는 잠시 놀랐다. 그러더니 꽃다발을 누가 주었는지 곧장 깨달은 듯했다.
“모란이 줬지?”
“예, 형님.”
연은 침착한 얼굴로 다가와 꽃다발을 살폈다. 그러나 딱히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줄기를 하나로 묶고 있던 끈을 끄른 뒤 산딸기는 접시 위에 올려 두고 꽃들을 볕 잘 드는 곳에 가지런히 펼쳤다. 한위는 연이 꽃을 잘 말려 오래 보관하려고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꽃을 잘 펼친 뒤 연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한위야, 잘 알아 두어라. 이렇게 생긴 꽃은 말린 뒤 뜨거운 물에 우리면 해열 효과가 있으니 위급할 때 사용하면 좋단다.”
“해…열이요…….”
한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한위에게 연은 다정한 형님이긴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성격에 쌀쌀맞고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 준비해 둔 화병이 무색하게 되었다. 연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이렇게 쓸모없어 보이는 잡초도 다 약초로 활용할 수 있지.”
해열 작용 꽃에 이어 잡초 취급까지……. 어지간히 모란에게 심기가 상한 것 같았다. 그리고 과연 한위의 생각대로였다. 산딸기도 한위 먹으라고 내놓은 뒤 연은 조용히 차만 마셨다. 어쩐지 차가 유달리 빨리 식는 것 같다고, 오늘로만 주전자 하나 분량의 차를 마시며 한위가 조용히 생각했다.
“모란이 나를 생각해 주는 건 잘 알겠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연이 입을 열었다. 한위는 모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모란이나 연은 한위 앞에서는 유독 편하게 속내를 툭툭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아무리 자신의 몸이라지만 그리 쉽게 가져다 버려?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건지……. 안 그래도 전보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모란과의 대화가 정보 부족 때문에 일방적이라 한다면, 연과의 대화는 공감할 수 없어서 일방적이었다. 한위는 잠시 모란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떠올려 보고 지금 연과 자신이 같은 사람을 주제로 대화하는 게 맞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란 형님이요?”
아직도 정파와 사파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질겁하고, 심심하다고 맨손으로 현상 수배범 죄다 잡아다가 관아에 넘기는 사람 말입니까? 심지어 한위는 모란이 대수롭지 않게 돌멩이를 손안에서 굴리다가 가루를 내던 걸 눈으로 본 적도 있었다. 그다지 손에 힘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돌멩이는 그냥 부석부석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연도 그런 강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모란을 마치…… 종종 아프고 다치기도 하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한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혈색 좋은 얼굴과 몸의 어디가 안 좋은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납득을 하거나 말거나 연은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한위 너도 잘 유념하거라. 나중에 연인이 생겼을 때 아무리 상대가 좋아도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함께 헤쳐 나갈 줄 알아야지.”
모란이 희생이라……. 여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형님 말 잘 따르는 아우로서 한위는 그저 얌전히 예, 하고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위는 당분간 차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
연이 처음 자신의 오른쪽 눈의 이상을 깨달은 건 며칠 전 아침이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다가 그는 제 시야가 좁아졌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 눈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연이 일단 침착하게 제 상태를 살폈다. 면경을 가지고 와 동공을 살폈으나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두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에 어디 이상한 곳도 없다. 그냥 하루아침에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일어났어?
먼저 일어나 정원을 가꾸던 모란이 연이 깨어난 걸 눈치채고 다가왔다. 이마며 뺨에 다정하게 입 맞추던 그는 일어나자마자 깊은 생각에 잠긴 연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모란에게 오른쪽 눈의 이상을 숨겨야 할까 고민하다가 연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란이니 당장 들킬 것이 분명했다. 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몸이 좀 안 좋네.
-……몸이? 어디가 어떻게? 왜? 아플 이유가 없을 텐데.
모란은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란의 내단을 받은 뒤로 연은 한 번도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몸이 매우 건강해진 것이다. 그는 마치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른쪽 눈이 안 보여.
그제야 모란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당장 연의 눈을 살폈다. 금색 빛이 흐드러지는 눈으로 꼼꼼히 살피던 미간에 점차 골이 패였다.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가?
-전혀. 짐작 가는 이유도 없어.
모란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연의 눈가를 더듬었다. 살살 두드려 보기도 하고,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바짝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왜 연의 오른쪽 눈이 갑자기 그리 되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그날 하던 일을 모두 관두고 연의 곁에 머물렀다. 심각한 얼굴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가 연에게 마법이라 여겨지는 무언가를 걸어 보기도 했다.
연은 어땠냐면…… 오른쪽 눈이 없어도 의원 일은 할 수 있겠다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도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는 건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불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니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란은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았는지 저녁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예전에 지내던 세계 좀 다녀와야겠어.
-거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오른쪽 눈이 그렇게 된 게 실리낙스의 눈 때문인 듯해. 그럼 그 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안 돼.
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모란은 그걸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는 웃었다.
-걱정 마. 아무리 길어도 하루밖에 안 걸릴 거야. 알지 않아, 거기와 이곳 시간의 흐름이 무척 다른 걸.
-그 때문에 그러는 게 아냐. 모란 당신이 그곳에 갈 여력이 안 되니까 이러는 거지.
연이 딱 잘라 말했다. 모란은 잠시 침묵했다. 실리낙스의 눈을 가진 이래로 연은 이따금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 주고는 했다. 환자의 건강을 한 번에 읽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법사인 모란의 상태까지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연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마법의 영역인데도 그랬다.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정도로는 안 끝나지. 그렇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방법도 있어.
모란이 슬그머니 회유를 시도해 봤다. 그러나…….
-무슨 방법? 대가가 무엇인데?
연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모란이 무슨 종류의 회유를 할지 훤히 꿰뚫고 있는 목소리였다. 모란은 잠시 제 몸의 상태를 떠올려 보았다. 연에게 내단을 넘겨준 뒤로 전보다 안 좋아진 건 사실이다.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긴 하지만 전과 같은 상태가 되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했다. 마법 중에서도 공간 마법은 가장 어려웠고, 공간 마법 중에서도 차원을 넘어가는 마법은 제일 까다롭다. 더군다나 지금 모란은 마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만 이 부족한 마력을 충당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녀의 술법 중에서도 ‘거래’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습득해 두면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기에 가장 좋았다.
-약간의 수명?
단번에 연의 눈초리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해졌다. 모란이 내심 혀를 찼다. 자신이 얼마나 오래 살지 알기에 그 약간의 수명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연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의원이다 보니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일에 예민하긴 했다.
-정 가고 싶으면 가. 수명을 대가로 하든, 몸이 걸레짝이 되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또 그렇게는 못 하지. 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사실 차원을 넘어간다 하여 방법을 알아낸다는 확신도 없으니 일단은 다른 방법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방법들을 떠올리다가 제 눈을 넘겨준다는 제안도 했다. 외눈으로 사는 것이 익숙하니 이왕이면 자신이 외눈으로 살겠다, 정말 진심으로 제안했건만 연은 그 후부터 급속히 차가워지더니 모란에게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슬슬 환절기니 감기에 걸릴지도 모를 조카들을 보겠다는 핑계로 집을 훌쩍 나가 세가로 가 버렸다.
제안하면서도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모란은 그저…… 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별거 아니었을 뿐이다. 남은 수명이 아직도 한참인 데다가 이백 년을 넘게 외눈으로 살았으니 아무렇지 않았다.
연도 그렇게 여겨 줬으면 좋겠는데 한편으로는 화를 내 주니까 좋기도 하고……. 차갑게 화를 내는 모습은 보기 드물고 귀해서 그도 나름대로 귀엽고 볼만했다. 하지만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화 좀 풀리라고 세가에 보내 놓고 모란은 연의 오른쪽 눈을 어찌 회복할 방법을 여러 가지로 궁리했다. 그러나 정말 방법이 없었다.
연금술을 배워 놓았다면 인공 안구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터다. 하나 연금술을 배우려면 이 또한 차원을 건너가야 한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연의 오른쪽 눈에 실리낙스의 눈이 담겨 있다는 점이었다. 인공 안구를 삽입하려면 기존의 안구를 적출해야 하는데 실리낙스의 눈도 같이 제거될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안구를 적출한다는 사실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에 하나 한다 해도 적출은 또 누가 하고.’
연에게 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란의 손으로 직접 할 것인가. 둘 다 싫었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더더욱 싫었다. 결국 모든 게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 낭비일 뿐이라 모란은 훌훌 털고 일어났다. 며칠 지났으니 이제 연의 화도 슬슬 풀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다 모란이 잠시 멈췄다.
“아니면 아발리의 샘이라든가…….”
몸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완벽하게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 아발리의 샘이라 하여 이 차원에서도 만들 수 있는 인공적인 샘물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을 씻으면 그 어떤 상처나 질병이라도 모두 치유되는데, 문제는 그 재료다. 재료를 구하는 것이 매우 까다로웠다. 샘 하나 만드는 데 작은 아공간이 하나, 그리고 천 명의 눈물과 천 명의 양수, 천 명의 피, 천 가지의 독, 그리고 천 가지의 강물과 샘물이 필요했다.
아이낙스는 황제인지라 아발리의 샘을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천 명도 넘는 신하들이 있으니 한 명당 하나씩만 가지고 오라 하면 끝 아닌가. 하지만 모란이 구하려면 문제다. 눈물이나 피야 대충 만만한 놈 잡아다 쥐어짜라 그러면 되겠지만 나머지의 난이도가 하늘을 찔렀다.
“정 방법이 없으면 왕이나 되어 볼까.”
일단 샘물 하나 만들어 두면 두고두고 쓸 곳이 많을 터였다. 앞으로 만에 하나라도 연이 다칠 만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다만 아발리의 샘 하나 만들자고 왕이 되기에는 너무 귀찮은 일들이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데다가 연이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모란은 미련 없이 세 번째 방법을 접었다. 아직 원인을 모르니 일단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다.
모란은 남궁세가로 향했다. 처음엔 걸어가려다가 중간에 생각을 바꿨다. 안 그래도 연의 오른쪽 눈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연오까지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화정당으로 이동하니 연은 한위와 함께 있었다. 예의 바르게 화정당 문을 똑똑 두드리자 잠시 후에 문이 열렸다. 모란이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조카들은 보고 싶은 만큼 많이 봤어?”
“…….”
연이 대답은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보는 동안 한위가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연이 문 앞에 서 있는 바람에 한위도 그 곁에 어정쩡하게 섰다. 모란의 웃음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안대를 했네…….”
“사람들에게는 눈병 났다고 둘러대려고 했어.”
막상 안대를 한 걸 보니 모란은 마음이 별로, 아니 아주 안 좋았다. 정말로 오른쪽 눈의 시력은 영영 가 버린 것일까? 모란의 손이 안대에 닿자 연이 눈을 감았다. 그가 살금살금 안대를 만지다가 벗겨 냈다. 왼쪽 눈과 다른 점 없이 아름다운 금색의 눈동자가 모란을 향했다. 모란이 혀를 찼다.
“정말 안 되겠어?”
“안 돼.”
“내게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라니까.”
연이 차분하게 모란의 손에서 안대를 다시 받았다. 모란은 연이 안대를 다시 하는 모양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끈을 묶으며 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만약 모란 당신이 외눈이 되어서, 내가 내 눈을 주겠다고 하면 받아 주겠어? 혹은 수명이 짧아져서 내 수명을 내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안 되지.”
모란은 모란이고 연은 연이지 않은가. 둘은 아주 달랐다. 연에게 무거운 게 모란에게는 가벼운 것이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의 선은 오로지 그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모란의 선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모란, 당신이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나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모란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연이 쏘아붙였다.
“당신이 무슨 걸어 다니는 만병통치약이라도 돼? 내가 아플 때마다 곁에 두고 하수오나 장뇌삼처럼 따다가 먹으라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나 모란은 현명하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죽었다 살아난 대가로 눈 하나 정도면 싸지.”
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란이 말없이 물끄러미 연을 바라보는 동안 한위만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선이 이리저리 허공을 방황했다. 다른 연인들은 돈이나 질투, 혹은 바람난 일로 싸운다던데 모란과 연은 눈을 주니 어쩌니 하며 다투고 있으니…….
“난 당신이 아프고 괴로운 게 싫어. 하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마저 좋다며? 그럼 이것도 그런 거라고 해.”
“내가 좋아하는 괴로움은 그런 게 아니라…….”
말을 하려다 말고 모란이 말꼬리를 흐렸다. 연은 모란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으나 그저 뻔뻔하고 당당하였다.
“그래…….”
모란이 한숨처럼 웃었다.
“내가 이렇게나 더 좋아하니 져 줘야지. 그래도 나 때문에 눈이 그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내 앞에서 안대는 하지 말아 줘. 응?”
고개를 끄덕인 연이 안대를 다시 벗었다. 곁에서 쭉 이 모습을 본 한위는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모란이 연을 다정하게 아끼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그도 그럴 것이 저 때문에 눈이 그리되었다 말할 때 연을 바라보는 모란의 눈빛이……. 글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위는 아직 그런 감정은 알지 못했기에 표현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화정당에 왔으니까 조금 있다가…….”
안대를 벗던 연이 눈을 찡그렸다. 모란과 한위의 시선이 당장 연에게 향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오랫동안 안대를 해서 그런가. 눈이 부셔서…….”
한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안 보이는데 눈부실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가만, 그럼 눈이 부시다는 말은……. 한위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란도 연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연은 이제 아,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눈썹을 찡그렸다. 마치 무언가를 받아 내기라도 하는 모양으로 그가 오른쪽 눈을 가렸다.
“잠깐만, 비비면 안 돼.”
“비비려는 게 아니라…….”
모란이 억지로 손을 떼어 냈을 때 한위는 연의 눈가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햇빛이 고인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빛이 아롱지는 금 같기도 했다. 모란이 바로 손으로 받아 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아주 작은 금빛 조각이 반짝거렸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이제는 잘 보이는데……. 이때까지 이것 때문에 눈이 안 보였나 봐.”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던 한위가 가까이 다가갔다. 정작 이상한 걸 눈에서 흘려 낸 장본인인 연이 멀뚱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모란이 유심히 금빛의 조각을 살폈다. 모란의 눈에도 금색 이채가 잠시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이내 모란이 연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 같아?”
모란은 이게 무엇인지 안다. 실리낙스의 눈에서 나온 부산물이다. 연의 혼이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진짜’ 무엇인지는 연만이 알려 줄 수 있었다. 실리낙스의 부산물이기 이전에 연에게서 난 것이니.
연은 느리게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모란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씨앗……이야.”
놀랍게도 연이 그렇게 말하고 나자 모란의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금빛 조각은 이제 금색의 씨앗으로 보였다.
“그래, 씨앗이네.”
수긍한 뒤 모란은 잠시 더 씨앗을 들여다보았다. 연은 신기해하며 씨앗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마치 눈에서 씨앗을 흘려 내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한위는 이렇게 계속 둘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으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놀랍게 만들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의 눈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모란도 한위도 진심으로 다행히 여겼다.
이왕 온 김에 모란은 저녁까지 연과 함께 화정당에 머물렀다. 한위도 오래간만에 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되어 둘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모란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지. 이건 너 가지거라.”
모란이 던지는 걸 한위가 반사적으로 받았다. 아까 연에게서 나온 씨앗이었다. 한위가 당황했다.
“이걸…… 제가요?”
“그래. 먹어도 좋고, 아니면 심어도 되고. 그냥 버려도 돼.”
모란이 씩 웃었다. 어쩐지 귀한 물건 같은데 자신에게 이렇게 그냥 주고 가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한위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모란과 연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이걸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한위는 화정당 정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의 눈에서 나온 것이니 버리거나 먹기에는 꺼려졌다. 괜찮은 자리를 골라 부드러운 흙을 파낸 뒤 씨앗을 심었다. 까만 흙을 덮고 물도 뿌렸다.
그 후로 한위는 매일매일 찾아와 씨앗에 물을 주었다. 씨앗은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자그마한 싹을 틔웠다. 겨우 새끼손톱만 한 싹이지만 퍽 보기에 좋고 흐뭇하여 한위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갔다.
싹은 착실히 자라 줄기를 뻗고 손바닥만 한 잎들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 장마철이라 이틀 내내 무거운 폭우가 쏟아졌다. 한위는 하릴없이 실내에서만 지내다가 비가 멈춘 뒤에야 자신이 심었던 씨앗 생각이 났다. 혹여나 비가 내려 떠내려갔을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화정당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정원에 당도해 자신이 심었던 씨앗을 찾아본 한위가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씨앗을 심었던 자리에는 화사한 꽃이 피어 있었다.
보드레하고 아주 노란, 실로 아름다운 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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