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 어느 꽃피는 날에 (18/19)

외전 : 어느 꽃피는 날에

안휘성에 처음 온 사람들이 꼭 들러야 하는 세 가지 명소가 있다. 첫째는 남궁세가의 그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세가이다. 문지기에게 잘 부탁하거나 인맥이 있으면 커다란 대문을 넘어 안을 슬쩍 구경해 볼 수도 있었다. 일전에 불미스러운 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재건되면서 전보다 여섯 자나 더 높아졌다는 창영당은 대문 밖에서도 잘 보였다.

둘째는 안휘성에서 가장 화려한 주루 금각루(金閣樓)다. 금각루의 삼 층 전각 지붕은 그 이름에 걸맞게 도금이 되어 낮이면 금빛으로 빛났다. 지붕에 금칠을 했으니 다들 금각루의 루주는 대단한 부자일 것이라는 추측들이 오갔다. 그중에서도 그 유명한 백모란이나 안휘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단의 주인 백매화가 주인이라는 의견이 유력하게 여겨졌다.

셋째는 안휘성 남쪽에 위치한 한 저택이다. 사시사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그렇게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는 저택. 물론 그냥 꽃이 아름답기만 한 저택이 아니다.

바로 그 백모란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저택이었다.

안휘성은 물론이거니와 무릇 중원에 사는 사람이라면 백모란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었다. 백모란은 삼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남궁세가를 공격한, 실로 막강한 천하제일의 고수다. 남궁세가의 차남인 남궁연을 제물 삼아 자신의 수명과 힘을 늘리려 하는 중에 들통이 나 모든 사이한 계략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어찌나 대단한 고수던지 정파연합은 백모란 단 한 사람을 막지 못했다. 남궁세가는 물론이거니와 정파, 심지어 사파까지도 백모란에 의해 줄줄이 꺾여 나갔으니.

이자가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는 일화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대단한 건 천일령 계곡 사건이었다.

당시 백모란에게 이리저리 두들겨 맞고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정파연합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가장 처음으로 당한 남궁세가부터 제갈세가, 소림, 아미파, 점창파……. 그 외에도 여러 문파들이 우수수 꺾여 나갔다. 힘에서 완전히 눌렸으니 백모란이 봉문 혹은 사람이나 재물 등 무슨 요구를 해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어야 했을 텐데, 그는 오만하게도 꺾고 난 뒤에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정파연합은 이대로 있으면 큰일이 나리란 위기감에 손을 잡아서는 안 될 상대와 손을 잡았다. 어디까지나 임시이지만 사파와 동맹을 맺기로 한 것이다. 정파연합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사파가 소유하고 있는 벽력탄! 그 압도적인 위력으로 인해 벽력탄은 사용되는 것도 제조법도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그들은 백모란을 천일령 계곡에 불러내기로 했다. 그가 방심한 상태로 계곡에 나왔을 때 벽력탄을 이용해 돌더미 사이에 파묻어 버릴 작정이었다. 설마 그 백모란이라 해도 벽력탄에 당해 낼 수는 없을 터. 그들은 백모란의 오만함이 그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침내 천일령 계곡 작전이 시행되는 날, 예상대로 백모란은 유유자적 홀로 나왔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새였다. 그는 숨어 있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다 알겠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팔짱을 꼈다. 그 태도에 내심 불안해하면서 그들은 준비했던 벽력탄을 터트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백모란의 머리 위로 무시무시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그의 머리 위로 흙과 돌들이 족히 스무 자(약 육 미터)는 쌓였다. 산사태가 멈추었을 때 그들은 설마 아무리 그 백모란이라도 이 정도 공격에는 죽었겠지, 조마조마해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일각이 지난 뒤에도 그의 모습이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자 모두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흙더미에서 불쑥 손이 솟아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다들 설마 하여 입을 딱 벌리고 지켜보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가? 설마 지금 헛것을 보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백모란은 흙더미를 아무렇지 않게 파헤치고 나왔다. 상체에 이어 하체까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빼낸 그는 옷에 묻은 흙들을 탈탈 털었다. 퉤, 피가 섞인 침을 뱉은 뒤 그가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다.

“이제 다 끝났나?”

다들 두려움에 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백모란은 우득우득 소리가 나도록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그들은 머리만 내놓고 흙더미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 모란은 마치 밭에 작물 심듯 그들을 열까지 맞추어 산사태 흙더미 위에 심어 놓고 간 것이다…….

벽력탄 공격에도 겨우 피 섞인 침 뱉고 말 정도이니, 이쯤 되자 백모란에 의한 중원 통일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남궁세가에서는 백모란의 사술을 완성할 마지막 단계를 막기 위해 남궁연을 몰래 도피시켰으나,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술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모든 것이 백모란에 의해 끝장나는가, 이렇게 암흑기가 도래하는 것인가, 정파연합은 좌절하고 사파는 백모란 밑에 붙으려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한데…… 놀랍게도 그 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너졌던 창일당은 창영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었고, 정파연합과 사파는 다시 모란이 등장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균형이 깨지거나 달라지는 일도 없었다. 백모란이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고루고루 밟아 준 덕이다. 그렇게 백모란은 남궁세가를 무단 점거하고 있다가 이듬해가 되자 남궁연을 데리고 나갔다. 그러고는 곧장 혼인식을 올렸다.

“잠깐, 뭐라고?”

흥미롭게 백모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천야가 제 귀를 의심했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하였다. 여중이 제 친구에게 주의를 줬다.

“자네, 산골에서 살다 왔다면서 왜 이리 산은 못 타나? 조심 좀 하게. 그러다 넘어져.”

“아, 내가 잠깐 착각을 했어. 그자 이름이 백모란이라 하였지. 남자인 줄로만 알았네.”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이겠거니 했던 진천야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백모란이란 이름은 여인에게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나 여중은 친구의 말을 부정했다.

“백모란 그자는 남자일세.”

여중이 제 친구의 불안한 발걸음을 흘깃거렸다. 산골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왔다던 친구인데 왜 이리 오늘따라 산을 잘 못 타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황산은 꽤나 산세가 험악한 곳이라 주의를 해야 했다. 오래간만에 강호 유람을 한다고 안휘성까지 찾아왔기에 황산 구경 좀 시켜 주려고 데려왔더니 어째 불안하였다. 그 정도로 진천야는 백모란에 대한 이야기에 흠뻑 빠진 듯했다.

하긴 굳이 진천야뿐만이 아니다.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백모란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그만큼 대단한 자였다. 이제껏 정파와 사파를 적으로 돌리고도 멀쩡한 사람은 천 년 전에 있었다는 혈선군주(血仙君主) 외에는 없었다. 혈선군주조차 그 치세는 일 년을 채 가지 않았다. 심지어 혈선군주와는 달리 백모란은 부하도 없이 혈혈단신이었다.

“하지만 백모란 그자가 남궁가 차남과 혼인식을 올렸다면서?”

“그게 좀 소문이 이상하게 났단 말이야.”

영 불안했던 여중이 친구의 발 앞의 돌멩이를 걷어차 치웠다.

“분명 남궁세가에서 공표하기로는 백매화라는 여인과 결혼한다 하였는데, 혼인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백매화가 아니라 백모란이라 하였으니.”

안휘성에서 다시없을 성대한 혼인식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오와 제갈금려의 혼인식보다도 대단하여 안휘성에서 꽤나 산다 하는 자들과 중원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저택 문가라도 들르면 떡 한 줄 씩 얻어먹고 올 수 있을 정도로 인심이 넉넉한 혼인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혼인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신부가 백매화가 아니라 백모란이라 하는 것이다. 반면 남궁세가에서는 또 기를 쓰고 백모란이 아니라 백매화라고 우겼다. 감히 남궁연이 백모란과 결혼했다 떠드는 자들은 세가를 모욕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도 했다. 남궁세가가 그리 나오니 도리어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가는 것이라, 온갖 허황된 소문이 횡횡하였다.

진천야는 여중의 말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남사스럽게, 설마 남자가 남자와 혼인을 했을라고. 그것도 천하제일 고수라는 자가 신부 역까지 자처하면서!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정파와 사파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패왕(覇王)처럼 모두를 꿇렸다던 백모란의 이야기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에 진천야는 백모란이 신랑 역도 아니고 신부 역으로 남궁세가의 누구와 혼인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영 못마땅하였다.

“모르지, 또. 그자가 남색을 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눈 먼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을 테니. 엇, 자네 거기 조심……!”

“으악!”

여중이 미처 충고를 하기도 전에 진천야는 나뭇가지를 밟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강호 유람 초행길이라 지나치게 들떠 있다 하였지, 여중이 혀를 찼다. 진천야는 몇 바퀴를 구르다가 멈춰 섰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더니 구역질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기절했다.

머리를 세게 부딪친 모양에 서둘러 따라 내려온 여중이 기겁했다. 약초를 따다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산에서 죽은 사람을 여럿 봤다. 팔다리가 부러진 정도는 괜찮지만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는 건 대체로 예후가 좋지 않았다.

“자네 괜찮은가?!”

한데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말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머리를 제대로 부딪친 것 같았다. 그래서 잘 좀 보고 내려오라 했건만……. 그는 급한 대로 지고 온 지게에 진천야를 얹었다. 그나마 산을 거의 다 내려온 마당이라 다행이었다. 여중은 얼른 헐레벌떡 뛰어갔다. 남궁연 의원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안휘성에는 솜씨가 좋은 의원이 둘 있다. 한 명은 안휘성 남쪽의 진은록 의원이요, 다른 한 명은 북쪽의 남궁연이다. 진은록 의원이야 안휘성에서 뼈가 굵은 자라 다들 믿고 따랐지만, 작년에 처음 남궁연이 의원을 열었을 때는 다들 반신반의하였다. 그도 그럴게 그 남궁세가의 차남이 아니던가? 다른 할 일이 무궁무진한데, 아니, 백매화와 같은 부유한 상단의 주인을―혹은 그 백모란을―부인으로 맞이했으니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먹고살 텐데 무엇 하러 고생스럽게 의원을 한단 말인가.

때문에 돈깨나 있는 자들은 진은록이나 다른 솜씨 좋다는 의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돈 없고 가난한 자들은 그런 선택지가 없었는지라,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궁연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주 증세가 심각하여 사경을 헤매는 자가 아니라면 놀랍도록 깨끗이 완치가 되어 돌아왔다.

남궁연은 기이하게도 말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아픈 부분을 딱딱 잘도 집어냈다. 그리고 침을 놓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낫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치료비는 진은록이 하는 것처럼 내고 싶은 만큼만 내게 했다.

다만 몸이 병약하여 이틀에 한 번 세 시진 정도 치료하는 것이 고작이라. 세 시진 정도의 치료 시간이 지나면 눈에 띄게 피곤해하곤 하였다. 남궁연이 비틀거리거나 벽을 짚고 서 있는 걸 목격한 사람도 여럿 되었다. 의원도 이틀에 한 번 열 뿐이라 진은록에 비하면 만나기 다소 힘들었다.

진천야에게는 다행히도 지금은 남궁연이 진료를 하는 시간이었다. 여중은 헐레벌떡 남궁연의 의원으로 날듯이 달렸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지게에 얹힌 사람을 보고 환자들은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의원님, 의원님!”

여중은 허락도 구하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을 놓고 있던 남궁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중이 서둘러 조심스럽게 친구를 눕히자 연은 맥을 짚어 보고 눈꺼풀도 뒤집어 보았다. 잠시 살피다가 침을 두어 개 놓으니 놀랍게도 정신을 잃고 있던 진천야가 눈을 떴다.

“으, 으으…….”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에 진천야가 신음했다. 눈앞에서 흰 것이 어른거려 그가 손을 허우적거렸다. 친구의 헛짓거리에 여중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러면서도 몇 번 연의 은혜를 입은 적 있기에 태도가 매우 공손했다.

“의원님, 이 녀석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부종이 있기는 한데…….”

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진천야는 조금씩 시야가 회복되었다. 코를 찌르는 약탕 냄새에, 그는 친구가 저를 의원에 데려왔구나 싶었다. 치료비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전낭을 더듬거리려다가 진천야가 멈췄다. 자신의 손목이 누군가에게 잡혀 있었다. 의원이었다. 고개를 들어 의원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금안이다!

살짝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말간 금색 눈동자가 자리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드러나는 금안이 얼마나 신기한지, 진천야는 입을 벌리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중이 이 무슨 실례냐고 툭 쳐도 진천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이토록 아름답고 희귀한 눈은 난생처음 봤던 것이다. 아까 어른거리던 흰 것은 상대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연은 환자의 맥을 잡던 손을 거두었다.

“머리에 충격을 받긴 했으나 며칠 정도 가만히 누워 정양 생활을 하면 회복될 것입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연 의원님.”

여중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주섬주섬 약초를 두어 다발 내밀었다. 진료비였다. 연은 약초를 살피고는 그중 서너 가지를 골라 다시 여중에게 건넸다.

“간이 안 좋으니 당분간 이 약초를 우린 물을 먹고, 술은 좀 자중하도록 하십시오.”

“아,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지적받았기에 여중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었다. 그러면서도 연이 내민 약초는 소중히 따로 품에 집어넣었다. 그는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고는 아직도 남궁연만 바라보고 있는 친구를 지게에 다시 얹었다. 아까는 다급해서 잘 몰랐지만, 새삼 친구 놈의 무게가 무거워서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천야는 표정이 멍했다. 단순히 머리를 부딪쳐서만은 아니었다.

“저 사람이…….”

“그래, 그 남궁연 의원님이야.”

이놈이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군 싶어 여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천야는 의원을 나서 여중의 집에 이르기까지 멀거니 있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눈이 금색이었어.”

여중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 근방에서는 유명하지. 백모란의 사술 때문에 그리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세뇌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세뇌?”

“그야, 백모란 때문에 그렇게 건강이 안 좋아지고 고초를 겪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얌전하니까.”

연기를 삼켜 콜록거리는 바람에 여중은 진천야가 세뇌…… 하고 중얼거리는 건 미처 듣지 못했다. 다 소문이지만, 하고 여중이 중얼거리는 것 또한 진천야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중에게 실려 가는 동안 진천야는 무슨 다짐을 했는지 불끈 주먹을 쥐다가 다시 두통으로 신음했다.

***

보통 연의 하루는 밀려드는 잠과 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 년이면 이렇게 잠이 오는 게 괜찮아질 거라더니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여전히 잠이 해일같이 몰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점차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하루에 다섯 시진(약 열 시간) 정도는 거뜬히 깨어 있을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게 기상했다. 어젯밤에 늦게 잤기 때문이다. 딱히 의원을 열어 피곤해서가 아니다. 모란의 탓이었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일 때면 모란은 연을 붙들고 놔 주지 않았다. 덕분에 연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리 아래의 뼈가 모조리 물렁하게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겨우 엉금엉금 일어나 침소의 창문을 열자 잘 꾸민 정원이 바로 보였다.

한쪽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바위를 가져다 놓아 깎아지른 절벽 산처럼 배치했고, 그 바위 아래로는 큰 연못과 작고 아담한 정자가 자리했다.

졸졸 흐르는 개울과 나무, 그리고 화사하게 핀 꽃들까지 넘실거리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원을 보며 어느 정도 잠이 깬 연이 머리를 단정히 하며 방을 나섰다.

“일어났네?”

“……응.”

아직 잠이 덜 깨어 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좀 낮았다. 혹은 어젯밤 그리도 소리를 질렀던 탓도 있을 것이다. 모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둘이서만 지내는 저택은 고요하여 이따금 산새 지저귀는 소리만 났다.

“잠시만 기다려. 식사 가지고 올 테니까.”

졸음기가 남아 고개만 끄덕이자 모란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연은 멀거니 모란이 만들고 있던 걸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니 바로 꽃꽂이였다.

그렇다. 근 삼 년간 모란의 취미는 꽃꽂이였다. 그도 그럴 게 혼인 후로 툭하면 연과 손잡고 거닐며 이 저택의 곳곳에 꽃을 피우고 다니지 않았나.

넘치는 것이 꽃이었다. 처음에 연은 자고 일어나면 제 머리맡 화병에 풍성하게 꽂혀 있는 꽃가지를 볼 수 있었다. 모란은 퍽 심심했던 모양인지 꽃을 만지작거리며 꽃줄기를 엮어 만든 팔찌나 화관 따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꽃꽂이에 심취하여 본격적으로 취미 생활로 삼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방이 모란이 만들어 놓은 꽃꽂이 작품투성이였다. 이백오십 년간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지냈으니 적어도 십 년 정도는 느긋하게 지낼 거라면서 모란은 집에서만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러고는 연이 이따금 남궁세가에 다녀오거나 의원에 나갔다 오면 걸작이라 할 수 있는 꽃꽂이를 만들어 놓았다. 박제를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을 만한 작품이었다.

하나 모란은 시드는 것 또한 작품의 묘미라면서 꽃잎이 한 장 두 장 흩어지게 두고는 완전히 시들면 정원에 거름으로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란은 꽃꽂이뿐만 아니라 정원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보니 저택의 정원은 마치 무릉도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상태였다. 이따금 저택에 놀러 오는 손님마다 정원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란은 거의 모든 일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얼마나 솜씨가 뛰어났던지 연이 먹는 것부터 입고 쓰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모란의 손길을 거쳤다.

연은 하도 자는 때가 많았던지라 처음 몇 달 동안 빨래며 청소, 식사까지 모두 다른 사람이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모란이 편안히 대청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마법으로 큰 물통의 물을 휘휘 저으며 빨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연은 얼떨떨해서 이리 물었더랬다.

-지금…… 뭐 해?

-빨래하지.

-사람 안 시키고?

-심심하고 할 일도 없는데 뭐.

그러고는 손가락을 휘저어 옷을 통째로 허공에 들어 올려 탈수시키고는 히죽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뭐어, 이런 게 신부가 하는 일이라고들 하던데?

신부…….

그렇다. 믿기지는 않지만 모란은 연의 신부였다. 혼인식을 올릴 때 연이 신랑 자리에, 모란이 신부 자리에 섰으니 어쨌든…… 그리 되었다. 혼인식 날을 떠올리면 연은 지금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결코 그리 크게 혼인식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처음 모란과 반려가 되었을 때, 그 만족감은 퍽 큰 것이었다. 겉으로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연은 어쩐지 모란과 앞으로 계속 함께할 것이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저 이름만 반려가 아닌 것이다. 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그래도 식 정도는 간단히 올리고 싶은데.’

해서 연은 모란에게 간단히 혼인식을 올리는 건 어떠한가 물었다. 모란은 연의 말에 흔쾌히 찬성했다. 연은 어찌하려 했냐면, 당장 다음 날 그냥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빈집 따위를 좀 빌려다가 붉은 등 몇 개 걸어 놓고 붉은 천을 깔아 둔 채 술이나 나눠 마실 생각이었다. 한데 모란이 이러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나름 부친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일 년은 지나 혼인식을 올리는 것이 좋겠지?

모란의 말이 일리가 있어 연이 수긍했다. 혐오스럽기까지 했던 자였으나 그래도 부친은 부친. 그래서 연은 일 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었으니. 하지만 모란은 예의상 일 년을 기다리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미였다.

‘나는 욕먹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네가 욕먹으면 좀 그러니, 그래도 나름 부친이 죽었는데 일 년은 지나 혼인식을 올리는 것이 남들 보기에 좋겠지?’

혼인식을 어찌 치를 것인가부터 모란과 연의 생각은 심히 달랐던지라……. 예전 연오의 혼인식 때 자신이라면 더 크고 성대하게 연다 했던 모란의 발언을 별생각 없이 넘겼던 연의 착오였다. 모란은 정말이지, 정말 연오의 식보다도 크고 성대하고 화려하게 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조용한 오해 속에 시간은 흘러 어느덧 영명이 죽은 지 일 년하고도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때 연은 어쩌고 있었냐면, 실은 혼인식에 대한 것을 거의 잊고 있었다. 매일같이 자는 것이 일상이라 날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었거니와 혼인식에 별로 큰 의의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슬슬 우리 혼인식을 올릴까?

모란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야 연은 혼인식을 올리자 했던 것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럼 올릴 장소는…….

-우리 살 집에서 올리면 되지. 안휘성에 마련해 뒀어. 계속 세가에서 살 건 아니잖아?

-뭐어, 그건 그렇지.

한위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연은 계속 세가에서 살 생각이 없었다. 세가에서는 모란의 운신이 그다지 편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모란은 자신이 다 준비해 두었으니 연에게는 몸만 오면 된다고 말했다. 연은 모란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믿어도 너무 믿었다. 다음 날 연오가 연을 부를 때까지 그는 모란이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아,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겠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네 혼인 말이다. 네 신부가 혼자서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연오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야 연은 상황이 겨우 파악이 되었다.

-……예?

-이런, 매일 자고만 있어서 몰랐던 것이냐? 아무튼 네가 벌써 혼인식을 올릴 나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구나.

그리 말하는데 연은 등골에서 싸아악 핏기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던 그는 졸리다고 둘러대고서 서둘러 창영당을 뛰쳐나왔다.

모란이 대체 어디에 있더라? 왜 연오가 그들의 혼인식에 대해 알고 있나. 모란과 저 둘이서만 올리는 혼인이 아니란 말인가? 심지어 연은 우연히 만난 장로들에게서 혼인 축하한단 소리까지 듣고는 약간 얼이 나갔다.

연에게 마지막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준 건 한위였다. 때마침 화정당에 한위가 놀러 왔기에 누구누구가 제 혼인식에 대해 알고 있느냐 물었다. 그러자 한위는 별생각 없이 해맑게 이리 대답하였다.

-안휘성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지요.

-안휘성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애써 태연하려 했으나 연의 말꼬리는 그만 떨리고 말았다. 요즘 주강과 안휘성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 바쁜 한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여기저기 방이 나붙었으니까요. 형님과 백매화라는 여인이 혼인을 한다고……. 저어, 그런데…….

한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소곤소곤 물었다.

-하지만 왜 모란 형님과 사귀면서 혼인은 다른 분과 올리시는지요?

-…….

일전에 연은 모란에게 입을 맞추다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한위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모란은 태연하고 연만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한위는 동그란 눈으로 둘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었다. 그 후로 아무런 말도 없기에 잊은 줄 알았는데……. 연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름만 백매화란다…….

-……? 아! 그러면 그 백매화란 분이 모란 형님이신 거지요.

연은 잠시 고뇌했다. 어째서 한위는 저가 모란과 혼인한다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가? 오랫동안을 그 하오문의 유모와만 지내서 그런 쪽으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까? 하나 이제는 제법 보고 들은 것도 많아 알 것도 다 알 터였다.

-그런데 한위야, 음……. 보통은 혼인이란 건 남자와 여자가 올리는 것이거든.

-물론이지요. 아, 그야 모란 형님은 남자이시지만.

한위가 빙그레 웃었다. 한위 나이 이제 열일곱, 어느 순간부터 부쩍부쩍 자라더니 이제는 연과 얼추 키도 비슷하고 제법 사내의 태도 났다. 무술의 성취도 또래에 비해 남달라 장로들의 칭찬이 자자하다고 들었다.

-어차피 모란 형님은 세상에서 제일 센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러니까, 그건가. 모란이 세상에서 제일 세니까…… 남자이든 무엇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하긴 일 년 전 창일당이며 온 중원을 그리 뒤집어 놓고 다녔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모란에게 별말 못 하지 않는가. 연도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졌다. 지금 중요한 건 안휘성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는, 자신과 백매화의 혼인이었으니.

한위가 돌아간 뒤 연은 모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며칠에 한 번 모란은 하오문과 주루의 일로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하필 그날이 오늘이었다.

‘아니, 잠시만. 요즘은 유달리 외출이 잦았지. 그게 설마…….’

혼인 준비 때문이었구나.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연이 미간을 짚었다. 모란의 내단을 먹은 뒤로는 매일매일 잠이 몹시 오는 바람에 그는 안휘성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소식들에 늦었다. 이번에는 늦어도 아주 늦었다.

모란이 온 것은 연이 또 잠을 못 이기고 뻗어 버린 뒤였다. 살금살금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있어 눈을 떠 보니 모란이 무릎베개를 해 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졸음을 떨쳐 내기 위해 눈을 깜박거리자 슬슬 옷자락을 들추었다. 잠이 확 달아난 연이 벌떡 일어났다.

모란은 연이 막 깨어난 뒤나 혹은 졸려서 느른해하는 모습을 좋아해 자주 집적거리고는 했다. 그 집적거림을 내버려 두면 어느새 옷이 벗겨지고 모란에게 안겨 잠이고 뭐고 어느새 반쯤 울면서 흔들리는 일만이 남게 된다. 다행히 오늘은 별생각이 없었는지 모란은 뒤로 몸을 약간 젖히는 것으로 솜씨 좋게 이마를 맞부딪치는 걸 피했다.

-사과 먹을래?

모란이 넉살 좋게 권해 왔다. 그러고는 솜씨 좋게 사과를 반으로 갈라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연에게 내밀었다. 사이좋게 사과 두 개를 나눠 먹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사과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설명을 듣고 싶어서 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모란. 그, 혼인식 말인데.

모란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연의 말을 가로챘다.

-맞아, 안 그래도 혼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어.

그러고는 모란이 아공간을 휘적휘적 저어 무언가를 꺼냈다.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각각 종류가 다른 홍등 세 개였다. 그 뒤를 이어 종이로 만든 붉은 꽃과 화려한 자수가 놓인 천도 나왔다. 연이 눈을 깜박였다.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더라고. 뭐가 더 좋아?

-그러니까, 이거…… 혼인식 때 쓸 장식?

모란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연은 떨떠름하게 한참 장식들을 보다가 몇 개를 골랐다. 아니, 잠시만. 이거 진짜로 본격적인 것 같은데. 연오와 금려의 혼인 때 쓰인 장식들도 화려했으나 이것들보다는 덜 화려했던 것 같다.

-얼…마나 규모를 크게 열려고?

-음. 일단은 남궁세가 사람들은 죄다 초대해야지. 다음으로는 각 문파에도 몇 명 오라고 보내고……. 정원이 넓으니까 자리는 넉넉할 거야.

그럼, 그럼…… 못해도 하객이 몇백은 족히 된다는 이야기인데. 연은 잠시 까마득해졌으나 더한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란이 매우 화려한 붉은 옷을 주섬주섬 꺼내 든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것이었다. 한데 신부의 옷이 참으로 품이 넉넉하고 컸다. 연이 떨리는 손으로 붉은 면사포를 쥐었다.

-설마 모란 당신이 신부 역?

-어쨌든 명색이 백매화니까? 봐. 홍옥도 달았거든. 예쁘지 않아?

이쯤 되자 연은 될 대로 되라 싶었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까지 준비했으니 도무지 훼방을 놓을 수가 없었다. 모란이 있는 정성 없는 정성 죄다 들인 게 보이는데 이제 와서 둘만의 혼인식을 올리자고 할 수는 없었다.

모란이 이때까지 제게 해 준 걸 떠올리면 혼인 정도는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었다. 부끄러우면, 뭐, 당연히 부끄럽긴 하겠지. 하지만 어차피 한때의 부끄러움일 테니. 연은 모란과 함께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대망의 혼인식 날이 되었다. 안휘성은 온통 떠들썩해졌다. 혼인식 날 백매화와 남궁연의 저택에 들르면 누구나 먹을거리와 약소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했기 때문이었다.

모란이 전에 호언장담한 대로 매우 성대하고 화려한 혼인식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저택까지 이르는 길에 온통 홍등이 내걸렸고 저택 내부에는 아름다운 자수가 새겨진 붉은 천이 여기저기 걸렸다.

하객들이 속속 모여드는 가운에 연은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화려해도 너무 화려하다.

안휘성은 물론이거니와 중원에 아주 방방곡곡 그들의 혼인식을 알리고자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차마 남궁세가에서 온 하객들과 다른 손님들을 볼 수가 없었다. 하객들은 신랑이 참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백매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며?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하네그려.

-그건 그렇고 남궁연 공자는 정말 눈이 금안이군.

-못 들었나? 남궁연이 금안인 이유가 그자의 사술과 세뇌 때문이라던데…….

연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였다. 그저 뻔뻔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쓸 따름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신부가 들어온 순간, 그 뻔뻔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보통 전통적인 혼례에서는 신부가 가마를 타고 들어온다. 그러나 온 하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정문으로 들어온 건 마차가 아니었다. 바로 위풍당당하게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신부다. 모란이 들어오는 걸 볼 적에 연의 입꼬리는 파들파들 떨리고 말았다.

‘우, 웃을 것 같다. 아냐, 이건 울음이 나오는 것인가. 혹은 둘 다일지도.’

모란이 여자 옷을 입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단연 이번이 최고이기도 했다. 신부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는 하객들은 하나같이 입을 벌렸다. 첫째는 신부가 마차도 타지 않고 들어왔기 때문이요, 둘째는 풍채가 사내다운 탓이라. 머리 꼭대기까지 열기가 오른 채 연은 차라리 자신이 면사포를 쓰는 게 좋지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했다.

-……신부가, 어쩐지, 몸이…….

-꼭 남자 같구만.

-……남자 같은 게 아니라 혹시 남자, 아닌가?

-이 사람, 아무렴 신부가 남자일까.

모란은 주위 수근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와 연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절차며 뭐며 다 무시하고 면사포를 약간 걷은 채로 대뜸 연에게 입을 맞추었다. 슬쩍 혀까지 섞고는 씩 웃는데, 그 웃음을 보니 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가 누가 들을까 속삭였다.

-……환각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어.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무엇 하러? 중요한 건 네가 누군가의 반려가 되었음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지.

그러더니 모란이 또 면사포 아래로 쪽쪽 입을 맞추었다. 연은 모란의 입맞춤을 받으며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모란이 여장하는 것도 좀 좋은 듯한데. 붉은 옷이 참으로 잘 어울린단 말이야.

하지만 역시, 이런 옷은 저와 단둘이 있을 때만 입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하객들은 신랑과 신부가 참으로 사이가 좋구나 여겼다. 설마 신부가 남자에다가 그 백모란일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모두가 그러려니 여기는 순간 모란이 등장할 때부터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던 연오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는 면사포 아래로 씩 웃는 입매가 너무나도 익숙했던 탓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네 이놈!

큰 외침에 하객들이 다들 연오를 바라보았다. 아차 한 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연오의 얼굴이 충격으로 붉으락푸르락했다.

-신부가 백매화가 아니라 백모란이지 않으냐!

아니, 어떻게 형님이 백모란이란 걸 알았지! 하고 생각하기에는 양심이 좀 찔렸다. 누가 봐도 모란은 건장하여 사내 같았다. 모란을 흘끔 보고는 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신부가…… 백모란이라니요.

한데 정말이지 양심이 좀 심하게 찔렸다. 연오는 얼굴이 희어졌다가 붉어졌다가 하더니만 주먹을 꽉 쥐었다. 경사스러운 혼인날을 이렇게 망치기는 싫었으나 그는 백모란이 연의 곁에 있다는 게 더욱 싫었다. 그냥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지나면 평생 붙어 있을 터였다.

-감히 내 아우를 현혹해 혼인을 시켜! 네가 백모란이 아니면 증거를 보여라!

이 말은 면사포를 걷어 얼굴을 보이라는 의미인지라. 상대가 정말 여인이고 신부라면 큰 실례지만 연오는 연이 백모란과 혼인한다는 사실에 이성을 살짝 잃은 듯하였다. 모란이 연오를 향해 몸을 돌릴 적에 연은 멀거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오늘 날씨가 참으로 좋구나. 마법으로는 날씨 좋은 것도 알 수 있던가?

-이 무슨 무례인지 모르겠군. 나는 백매화가 맞다.

모란은 정말이지 지나치게 뻔뻔했다. 신부에게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하객들이 입을 딱 벌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연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모란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히죽 웃었다.

-왜, 누구 내가 백모란으로 보이는 자 있으면 나와 봐.

저잣거리 왈짜패가 따로 없는, 실로 깡패다운 태도였다. 실제로도 중원의 깡패나 다름없는 사내이기도 했다. 모란의 말에 다들 딴청을 피웠다.

면사포를 걷지는 않았으니 사내가 아니라 여인으로 생각해 주겠다는 태도였다. 중원이 약육강식의 법칙에 철저히 따른다는 걸 보여 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가…….’

연의 양심이 큰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이래도 되냐고 외치고 있는 양심을 애써 무시한 채 하늘에 희고 말간 구름이 떠가는 것만 바라보았다. 연오에게 무척 미안했다.

-연아, 정녕 저자가 백매화라고 할 참이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애써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연은 속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연오는 연이 모란에게 세뇌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이도 그리 여기리라 믿으며…….

-아무리 보아도 백매화가 아닙니까?

연의 마지막 말에, 결국 연오가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모란을 노려보았다. 모란이 노골적으로 히죽거리는 게 얼핏 보이기에 연이 발을 콱 밟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혼인식은 다시 재개되었다.

그날, 끝끝내 연오는 참지 못하고 검을 빼 들어 모란에게 덤벼들고 말았다. 연은 모란에게 검을 휘둘러 대는 연오를 말리지 않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 참으로 대파란의 혼인식이었다.

‘그래, 그런 혼인식이었지…….’

그날은 장로와 한위에, 금려까지 만류하고 나서야 겨우 연오를 뜯어말릴 수 있었다. 연은 어쩐지 연오가 모란을 악당으로 생각하여 그리 길길이 날뛰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모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로들은 죄다 또 창일당이, 아니 창영당이 부서질까 염려되어 만류하는데 연오만이 앞뒤 안 가리고 모란을 적대했던 것이다.

그 후로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연오는 겨우 모란에게 대놓고 이를 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모란은 나중에야 연에게 귀띔을 좀 해 주었다.

-아마 네 형이 나에게 배신감을 좀 느끼는 모양이지.

-배신감이라고?

왜 연오가 모란에게 배신감을 느끼는지 연은 당장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 내가 네 살일 때부터 알아 왔잖아. 네가 날 괴롭혀서 나름 죄책감도 느끼고 주치의라고 신뢰도 하고 잘해 주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루 만에 창일당을 죄다 때려 부수고 네가 아픈 것도 내가 원인이라 하였으니.

그럴싸하게 들리는 추측이었다……. 하긴 연오가 정말 모란이 이 모든 일의 범인이라고 여겼다면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적으로 삼았으면 남들 보란 듯 큰소리를 내기보다는 조용히 절치부심(切齒腐心) 검을 갈고 있었겠지…….

연은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예술적인 꽃꽂이를 가만히 구경하고 있자 모란이 음식과 함께 나타났다. 둘이 자주 가곤 하는 객잔이나 주루에서 가지고 온 요리다. 모란도 연도 딱히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과일은 잘 깎아도……. 연은 요리에는 재주도, 아는 것도 없었고 모란은 흥미가 없었다.

“이 집은 마파두부가 맛있네.”

“나중에 다른 음식도 한번 사 와 보지.”

음식을 식탁 위에 차려 두고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이 움찔했다. 모란이 슬그머니 발 장난을 걸어온 탓이었다. 움찔 뒤로 몸을 빼면서 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젯밤 그렇게 하고도 또 그럴 만한 기운이 있단 말인가? 하긴, 언제나 기운 넘치는 사내였지. 간에 구멍이 뻥 뚫리고도……. 아직도 모란의 늑골 바로 아래를 누르면 얕게 푹 들어갔다.

하지만 연은 모란과 달리 기운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허리 아래로는 뼈들이 죄다 물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보다는 좀 굳었지만.

“오늘은 세가에 들러서 형수님에게 인사도 좀 하려고…….”

“그래? 같이 갈까?”

“오늘은 형님이 안 계시니 괜찮겠지.”

금려는 남궁세가에서 유일하게 모란을 거리낌 없이 평범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의 쌍둥이 조카들인 천우와 일우는 이상하게도 유달리 모란을 잘 따랐다. 가장 잘 놀아 주는 건 한위인데도 그랬다.

순간이동으로 단숨에 갈 수도 있겠지만 연은 모란과 함께 세가까지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세가 사람들이 깜짝 놀라거나 문지기가 모란이 정문도 지나가지 않고 세가에 들어갔다며 연오에게 보고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또 무엇보다 예의도 아니었고.

남궁세가로 향하는 길은 늘 그러했듯 사람들로 활기찼다. 모란이 방금 막 생각난 모양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야. 한위 그 꼬마, 꽤 실력이 늘었던데.”

“한위야 원래 실력이 좋았잖아.”

“그냥 실력이 좋은 수준은 아니던데. 그 왜, 뇌열쌍장(雷裂雙掌)인가 돼먹지 않은 별호를 가진 자 알아? 요즘 안휘성에서 꽤 유명하던. 그자도 이길 정도니 괜찮은 수준이지 않아.”

“……한위가 뇌열쌍장(雷裂雙掌) 주자령을 이겼다고?”

뇌열쌍장 주자령은 안휘성의 중소문파 구곡문 출신으로 사매(師妹)를 죽이고 달아난 죄로 쫓기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부녀자 겁탈로 그 악명이 자자하였다. 그럼에도 실력이 좋아 구곡문에서는 쉬이 처리하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었다.

죄를 짓고 달아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악명을 떨치게 만들었으니 구곡문으로서는 큰 오명이었다. 그래서 최근 현상금까지 걸렸다 했는데……. 그런 자를, 한위가?

연은 뿌듯하기보다는 걱정부터 앞섰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어디 다친 곳은 없는 듯했는데. 표정도 밝았고.

“대체 어쩌다가 그자와 싸우게 된 거야?”

“몰랐어? 요즘 주강과 함께 현상 수배 걸린 자들 쫓아다니고 있던걸.”

“뭐라고?!”

마침 막 정문을 지나가던 차였기에 소리를 좀 높이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아직도 남궁세가에는 모란을 경계하는 자들이 꽤 있었기에 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현상 수배가 걸린 자들을 쫓아다니다니, 대체…… 주강은 무슨 생각인가?

“그런 자들을 쫓아다닌다니, 위험하잖아!”

“이제 나이 열아홉이고 두 달 있으면 스무 살이잖아.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볼 때도 되었지.”

그건, 그렇지만……. 연오도 이 나이 때에 온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높이 명성을 떨쳤으니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한위는 동생이라 그런지 걱정이 드는 것이다. 처음 한위를 만났을 때 그 빼빼마르고 꼬질꼬질하던 모습이 아직도 연에게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지금 한위의 모습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긴 했다…….

일단 형수님부터 먼저 뵙자 생각하여 창영당으로 향했다. 정식으로 가주 자리를 승계한 뒤 연오와 금려는 화월당에서 창영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침 창영당에서 조카들과 놀아 주고 있던 한위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들!”

연은 한위의 모습을 새삼 다시 보았다. 열아홉, 이제 한위의 얼굴에는 앳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말랐던 팔이며 다리는 흔적도 없이, 근육으로 잘 단련된 몸만이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활발하고 밝은 기색이 가득 찼고 키도 훌쩍 자라서 연보다도 한 뼘이나 더 컸다. 한위가 옆구리에 천우와 일우를 끼고 일어나자 좋아서 애들이 숨넘어가게 까르르 웃었다.

“형수님은?”

“연오 형님과 잠시 산책을 다녀오신다 하셨습니다.”

이런……. 한동안 황산과 장강을 시찰 나갔다 오시는 게 아니었나. 그럼 연오 형님 돌아오시기 천에 창영당을 떠야겠다. 그 전에 물을 건 묻고…….

“한위야. 네가 주자령과 싸워서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 그 소식 들으셨어요?”

천우를 가볍게 번쩍 들어 올리던 한위가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연이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내가 형님의 과보호하는 성격을 닮은 것인가?

한위가 칭얼거리는 일우도 번쩍 들어 허공에 띄워 주는 동안 연이 주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보다 많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주강은…… 주강이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현상 수배범들만 쫓아다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아?”

“위험한 놈들을 상대해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경험이 없으면 실제 상황에서 몸이 굳어 버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연은 뭐라 대꾸할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주강은 마교인이었다. 마교는 대체적으로 무인들을 아주 거칠게 키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걸 고려해 보았을 때 주강이 한위를 지도하는 방식은…… 거친 축에도 끼지 않았다.

천우를 들어 줄 때는 일우의 투정을 듣고 일우를 들어 줄 때에는 천우의 투정을 들으며 난감해하던 한위도 주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형님. 게다가 주자령은 그렇게 위험한 녀석도 아니었어요.”

“……그래, 무인으로서 종종, 도전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연이 마지못해 동감했다. 아무리 그래도 구곡문에서 애먹은 주자령이 위험하지 않다고 하다니, 생각보다 한위의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하긴 소룡대회도 거듭 연승을 했고……. 연오의 뒤를 이어 중원오룡이 될 예정이 아니던가.

“참, 형님. 내년에는 강호 유람을 가려고 하거든요. 같이 가시겠어요?”

천우와 일우를 팔에 매단 채 번쩍 들며 한위가 물었다. 완전히 건강해진 지금에도 연은 천우와 일우를 돌볼 때면 힘겨울 때가 있었는데 한위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강호 유람이라……. 그러고 보니 한위도 벌써 강호 유람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연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한위에게서 어릴 적 불우한 시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은 조카들과 놀아 주면서 한위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오가 금려와 돌아오기 전에 일어났다. 다른 때 같으면 괜찮겠지만 천우와 일우가 있을 때면 연오는 유독 모란에게 가시를 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모란도 대체로 연오가 그러거나 말거나 흘려보내는 편이기는 한데 이따금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안 만나게 하는 게 상책이었다.

세가를 나온 둘은 주위도 좀 돌아다니고 주루도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한데 집 앞에 누군가가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연에게는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벌써 이 년이나 봐 온 사람이었다.

“연 의원님!”

모용세가에서 보낸 심부름꾼이 연을 보자 반색하며 얼른 후다닥 다가왔다. 그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서찰을 꺼내 내밀었다. 요녕성에서 안휘성까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온몸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항상 그렇듯이 여독을 좀 풀라고 제법 돈을 쥐여 주자 피로한 와중에도 심부름꾼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는 항상 가던 객잔에 가 있을 테니 답신 보내실 적에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심부름꾼이 꾸벅 다시 인사를 하고는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발을 질질 끌며 사라졌다. 연은 서찰을 잠시 바라보았다. 모용천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년 전, 남궁세가에서 나와 모란과 함께 살 집으로 옮길 때였다. 개인적인 짐을 정리하고 있던 연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비녀를 다시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모친인 모용단리의 비녀……. 그러자 자연히 모용천도 떠올랐다. 마지막에 그의 외조부가 보여 준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모용천에게 자식이 모용단리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도 연은 어린 자신이 모용세가를 찾아갔을 때 모용천이 얼굴 하나 비치지 않고 문전박대했던 일이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혼인식 때 저를 보던 외조부의 모습이 자꾸만 걸렸다. 경악 그 자체였던 표정이, 마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박힌 것처럼 연의 마음속에서 꺼끌거리는 것이었다.

결국 며칠 동안 끙끙거린 끝에 연은 붓을 잡았다. 마침 해가 바뀔 때라 간단히 새해를 축하하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서찰 정도는 보내도 될 듯했다.

연은 발이 재빠른 심부름꾼을 고용하여 서찰을 모용세가에 보내었다. 만약에 중간에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모용세가에서 들여보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었으나,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연은 서찰을 보낸 사실 자체를 잊으려 애썼다. 보내고 달포가 지났을 무렵 답신이 돌아왔다. 선물과 함께였다.

선물까지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은 다소 놀랐다. 좀 떨리는 마음으로 서찰을 뜯어보니 정갈한 글씨체가 보였다. 연이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간략하게 건강과 무운을 비는 서찰이었다.

다만 글씨 하나하나가 퍽 정성스러워 쓴 사람의 마음이 짐작 가는 것이었다. 같이 보낸 보따리 안에는 새 옷이 하나 들어 있었다. 연은 묘한 마음에 외조부의 답신을 한참 동안 보았다.

그렇게 연은 모용천과 근근이 답신을 주고받게 되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교류하는 정도였으나, 그 정도로도 연의 마음속 골은 차츰 메워지는 듯했다.

수도 없이 서찰을 교류하면서도 모용천은 한 번도 모용세가에 와 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서찰에서 느껴졌기에 최근 연은 한 번쯤은 모용세가에 들러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 슬슬 들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야?”

“평소와 비슷해. 그나저나 이번에는 중추절(中秋节 : 음력 8월 15일) 오기 전에 한번 찾아뵐까…….”

말을 잇다가 연이 모란을 보고는 먼저 선수를 쳤다.

“나 혼자 다녀올 거야.”

“왜?”

“그냥…….”

그냥이 아니다. 연은 모란에게 외조부로부터 온 서신의 내용을 직접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사실 개인적인 서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신을 읽다 보면 연은 모용천이 모란을 마치 천하의 몹쓸 것 취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오와 비슷하게 저를 세뇌당한 것처럼 취급을 하거나, 이 서신이 감시당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그 집에서 나와 모용세가에서 살지 않겠냐고 돌려 묻는다거나.

하나 서신을 보지 않아도 연이 왜 그러는지 훤히 예측하고 있는 모란이 히죽 웃었다.

“정 뭣하면 환각 마법 걸어서 백매화로서 같이 다녀올 수도 있는데.”

“싫어…….”

모란의 제안에 한순간 솔깃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연은 혼인식 후로는 모란이 여장한 걸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여장한 것까지는 그럭저럭 괜찮다. 문제는 이상하게도 모란은 여장할 때에 특히나 더 변태같이 집요하게 군다는 점에 있었다. 혼인식 날 밤, 모란과 함께 보낸 밤은 얼마나 환…장적이었던가. 목소리도 쉬고 눈도 붓고 허리에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연은 이틀을 그대로 침상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모란은 조금도 반성의 기색이 없었다.

“그럼 시종으로?”

“……생각 좀 해 보고.”

그건 그렇고 모란의 신경줄은 대체 얼마나 굵은 것인가. 모란이 온 중원에 시비를 걸고 다닌 뒤로 벌써 삼 년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연오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란에게 아직도 이를 갈고 있었다. 그뿐인가, 중원의 제일강자가 되어 버린 탓에 못해도 달포에 한두 번은 겁 없는 자들이 도전장을 던져 왔다. 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면 마부도 괜찮고.”

모용천의 서신을 자개장에 잘 넣어 두다 뒤를 돌아보자 모란의 손이 은근슬쩍 허리를 감으려 들고 있었다. 연이 서랍을 닫으며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내도 상대는 뻔뻔하게 굴었다.

“아니면 시비는 어때?”

“마부고 시비고 간에 이 손 좀 떼. 나 지금 졸리거든?”

모란의 음흉한 손길을 피하기 위해 졸리다고 하는 게 아니다. 더는 기절하듯이 자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연이 필요로 하는 수면 시간은 길었다.

실제로도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에는 졸음이 와르르 쏟아지곤 했다.

그런데 모란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 연이 넌 자기만 하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뭘, 알아서 한다는 건데!”

자는 사이에 무슨 변태 같은 짓을 하려고! 연이 버둥거려 보았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모란의 손길이 닿은 시점에서 모든 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죽 길게 웃은 모란이 연의 덜미를 덥석 물었다…….

***

피를 토했다. 온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엄습해 이마와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익숙한 고통이라고 생각했으나 죽음을 앞둔 고통은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연이 신음하였다. 다시 왈칵 피를 토하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불안함, 두려움, 원망…….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을 갉았다.

모란, 하고 연이 중얼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를 완치해 준다 하였잖아. 이십 일 안으로 온다 했잖아. 이제 나는 곧 죽을 텐데, 어째서……. 죽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감정의 근본은 원망이 아니다. 원망보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모란, 모란 하고 애타게 몇 번을 더 중얼거리다가 연이 거꾸러졌다. 아득해지는, 고통스러운 현기증이 덮쳤다. 분명히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있을 텐데 몸은 한없이 추락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연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했다.

한참을 떨어져 심연에 잠길 때, 완전히 꺼져 버린 연의 무의식이 외쳤다. 이것이 죽음이다. 너를 맞이하는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 그 얼마나 압도적이고 온기 한 점 없이 차가운 것인가. 장소인가? 아니다, 이것은 부분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이 그렇듯이 태어날 때부터 연과 함께해 온, 친숙하고 낯선 것이다. 필히 찾아오고 마는 종말이자 완벽한 무(無)였다…….

하나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곳에서 피어나는 황금빛 꽃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찬란하게 빛나는 꽃잎, 그 뒤로 너울거리는 어떠한 것……. 거대한 생명체의 눈.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이치가 연의 눈꺼풀 너머로부터 명멸했다.

“……연아, 일어나야지.”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닿는 입맞춤에 연이 그제야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꺼풀 위에서 부서지는 것이 있었다. 한데 너무 눈이 부셔서 햇살인지 아니면 금빛 꽃잎인지 알 수가 없다. 모란이 몸을 덮고 있어 연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마며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또 악몽을 꿨나 봐.”

전에는 악몽을 꾼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완치된 후부터 연은 종종 악몽을 꾸곤 했다. 영락없이 죽어 간다고 생각하며 모란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때의 일이다. 그 뒤로도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항상 몽롱하니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악몽이라. 오늘 식사는 몸을 보신할 것으로 하도록 할까. 오리탕 같은 것으로.”

“오리…….”

아침이라 입맛이 없는데도 오리탕의 맛이 떠올라 연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따금 모란은 황산을 뒤져서 엄선한 재료로 오리탕을 해 줄 때가 있었다. 대체 무엇을 넣었는지는 몰라도 은은하니 향긋하여 얼마나 맛이 그윽하고 좋은지……. 모란은 그런 연을 몰래 살펴보면서 잠시 혀를 찼다.

완전히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나, 연은 분명 죽음이란 것을 겪었다. 그 자체로 실로 연은 대단한 무언가를 보고 온 셈이다. 다시 깨어나면서 평범한 인간의 인지를 넘어간 부분은 잊긴 했다. 하지만 실리낙스의 눈을 가진 연을 과연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잊은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연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따금 ‘악몽’을 꾸는 아침마다 실리낙스를 넣은 그의 오른쪽 눈꺼풀 위로 선명한 금빛이 아롱졌다. 모란은 그게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느 경지에 이르는 방식은 각자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지. 연이 이 모든 일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모란은 속내를 삼키고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다녀와. 오리탕을 해 놓을 테니까.”

“응…….”

모란에게 입을 맞추어 주면서 연이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 백모란이 저를 위해 오리탕을 만들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 할 텐데……. 하긴 어젯밤 모란이 한 만행을 생각하면 오리탕 정도는 먹어야 마땅했다. 정말이지 기운을 빨리는 느낌이었으니. 연은 모란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난 뒤 나갈 채비를 마쳤다.

“오늘 옷은 이걸 입으면 좋겠는데. 날이 슬슬 더워지니까 좀 선선한 것으로.”

“그럴까.”

별생각 없이 연은 모란이 내미는 옷을 입었다. 의원에 갈 때면 입곤 하는 옷들은 죄다 흰 것이다. 그래야 혹여나 몸에 오물이 묻어도 확인이 용이했다. 옷을 입고 난 뒤 신발까지 신던 연이 멈칫했다.

‘……뭐지?’

생각해 보니 살고 있는 집에다가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자는 것, 하다못해 가볍게 걸치는 노리개나 간식에 목욕뿐만 아니라 아침 소셋물 따위도 죄다 모란이 마련하고 있었다.

그야 상당수가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마법으로 해결되는 것이긴 한데. 단순히 모란이 부인…… 역할을 한다 치기에는, 이따금 연을 보는 모란의 시선이 지나칠 정도로 퍽 흐뭇해 보이는 것이었다.

한편 모란은 어찌 생각하고 있었냐면…….

‘오늘도 완벽한데. 좋아. 완벽해.’

모란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그가 해 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연이 남의 손 타는 일 없이 오롯이 그의 것으로만 살아간다는 건 이 얼마나 흡족한 일인가.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연은 오로지 모란의 손만 거칠 예정이었다.

아무튼 이런 속은 모르는 연은 제가 너무 모란을 성가시게 하는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중이었다. 의원 일도 일인데 하루 종일 잠만 자다 보니 대체 뭘 하지를 못하겠다…….

그래도 조금씩 깨어나는 시간이 늘어나고 전처럼 기절하듯 픽 잠들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한때는 의원 일을 한동안 접을까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졸음에 환자 치료를 잘못할까 염려되었던 탓이다.

모란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연은 의원으로 자박자박 걸어 향했다. 집에서 걸어 십 분 거리에 있는 의원은 아침부터 환자들로 북적였다. 연이 도착하자 환자들을 줄 세우고 있던 장철이 달려왔다.

“연 의원님! 어서 오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은 환자들 중 가난이 병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따로 고용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가난하여 사흘에 한 번 묽은 죽을 먹으면 다행인 처지인 사람들이다. 의원에 찾아올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나 정작 식사를 하지 못해 몸이 병이 나니, 그런 이들을 고용하여 며칠에 한 번이나마 의원에서 일하게 하고 있었다.

연이 없을 때에는 환자들에게 의원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려 주고 이처럼 정렬해 주기도 한다. 의원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연의 잡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리 일하고 일주일에 은자 한 푼을 받아 갔다. 많지는 않아도 굶지 않고 몸의 체력을 회복하여 자립하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그는 환자들을 살펴보며 증세가 심한 사람부터 골라냈다. 연의 고요한 금안이 사람들을 쭉 살폈다. 전과 달리 맥을 짚지 않고도 이리 보는 것만으로 누가 얼마나 아픈지 한눈에 보인다. 연에게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으나, 대신 간략하게 어떤 약초를 달여 어찌하란 처방을 받고는 돌아갔다.

“저, 연 의원님!”

한데 오늘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이었다. 연은 잠시 후에 그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자주 거래하곤 하는 약초꾼 여중이 데려온 진천야라는 사람이었다. 친구인데 산에서 굴렀다고 했던가? 아무튼 머리에 꽤 충격이 가해졌었는데. 며칠 누워 있으라고 했는데 겨우 이틀 만에 왜 의원에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악화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기에 연이 의원에 들였다. 머리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 중 하나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연은 진천야를 눕혀 두고는 다른 환자를 먼저 보러 갔다. 처음으로 본 환자는 팔이 탈구된 어린아이였다. 일단 침을 맞춰 고통을 경감시킨 다음 아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 가볍게 힘을 주어 뼈를 밀어 넣었다. 어린아이들은 관절이 약하고 물렁하여 자주 탈구가 일어나곤 했다. 방치할 경우 탈구된 상태 그대로 굳어 버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고통이 심하니 가능한 빨리 맞춰 줘야 한다.

그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속도는 꽤 빨랐다. 잠시간 맥을 잡고 상태를 파악한 뒤 진단을 내린다. 침이 필요하면 침을 놓고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에게는 약탕 처방을 내려 준다.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놀랍도록 정확하고 신속했다.

환자들은 그것을 연이 가진 금안 덕분이라고 여겼다. 어느 사람들은 사술의 흔적이라고들 하는 금안이 그들의 상태를 살필 때에는 유독 환하게 빛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도 환자들이 자신의 금안을 은근하게 떠받드는 걸 알고 있었다. 부정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금안의 덕을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기맥과 그 흐름이 연에게는 책 읽듯이 술술 보였다. 흐름이 엉망이고 꼬인 부분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니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보통 맥을 한참 짚어야 감으로나마 알 수 있는데 맥을 짚지 않아도 본원지기며 기맥의 흐름이란 것들이 보였다. 모란이 봤던 걸 이제는 연도 볼 수 있었다. 의원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안력(眼力)이었다.

“……허어.”

진천야는 누운 채 연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움직임마다 수려하고 실로 근사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봐도 퍽 수준 있는 의원이란 게 확실했다. 연의 조치 후에 안색이 밝아지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잠시 후에 급한 환자들을 우선 처리한 연이 다가오자 진천야가 벌렸던 입을 얼른 다물었다. 사술의 흔적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럼에도 금색의 눈동자가 얼마나 선연한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은 진천야가 무례하게 쳐다보아도 익숙한 듯 신경 쓰지도 않았다. 대놓고 연의 눈을 만지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정도 반응은 보통이다.

“여, 연 의원님. 저는 진천야라고 합니다.”

맥을 짚다가 연이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진천야는 가슴이 다 조마조마하고 뛰었다. 연이 하라는 대로 누워 있지 않고 오늘 기어코 의원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는 연처럼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이가 백모란 같은 질 나쁜 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왜 강호 유람을 떠났나. 의(義)와 협(俠)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백모란을 두고도 가만히 있다니 안휘성의 이들은 죄다 비겁한 자들이었다. 진천야는 연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괴로움과 슬픔이 있노라 저 좋을 대로 해석하였다. 저 침잠하는 눈동자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틀 전 제게 이름을 알려 주셨는데, 혹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실상은 혹여나 단기 기억상실 따위가 아닌가 하여 바라본 것이다. 물론 진천야는 이 역시 좋을 대로 해석했다.

그가 누구던가. 의정문의 일일 계승자이자 금호 상단의 차남이다. 차남! 그러고 보면 남궁연도 차남이다. 공통점을 발견한 진천야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튼 일단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진천야는 연의 질문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통도 심하고, 또 기억도 좀 안 나고…….”

단기 기억상실이 일어날 정도로 센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연은 미간을 접었다. 머리에 약간 부종이 있긴 해도 맥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무난하였다. 다시 한번 맥을 잡아 보자 심박수가 좀 빠르긴 했다. 징검다리도 두드려 보자는 마음으로 연이 처방을 내렸다. 부종을 잡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약탕이다. 간에 약간 안 좋긴 하지만 장기 복용만 아니면 괜찮으니.

“아침저녁으로 달여 먹고, 혹 말이 어눌해지거나 손발이 마비가 되는 것 같다면 바로 의원을 찾아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지나치게 크게 대답하였다 싶어 진천야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헛기침을 하고는 하하 웃는데 연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뒤돌아섰다. 앗, 하고 진천야가 다시 붙잡았다.

“저, 그럼 내일 의원에 다시 찾아오면 됩니까?”

“의원은 이틀에 한 번만 여니 내일 와도 저는 없을 겁니다.”

진천야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씩씩하게 의원을 나갔다. 연이 잠시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아파 보이지는 않는데. 장철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다음에는 들이지 말까요?”

“……아닙니다. 어쨌든 환자이긴 하니까요.”

환자라고 다 고분고분 의원 말을 듣는 것은 아니었다. 부상과 질병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온다. 사람의 됨됨이와도 무관하다. 또한 아프면 아플수록 사람은 짜증과 화가 늘기 마련. 아픈 사람도 그렇고 그 가족과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몸에 여유가 없어지니 갈등과 오해가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은록의 아래에서 의원 일을 배울 때에도 난장을 부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나마 연의 경우에는 모란과 남궁세가가 뒤에 있다는 걸 알기에 거칠게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연이 그런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도 했고. 그럼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

게다가 폭력적으로 나오면 차라리 낫지, 모란 때문이든 금안 때문이든 이따금 이상한 자들이 붙어 오곤 했기에 연은 일단 진천야를 잘 기억해 두었다. 한 번은 연의 눈을 뽑아 가려 한 미친 자도 있었던―물론 이 자는 모란에게 끌려간 뒤로는 영영 다시는 보지 못했다― 것이다.

그는 곧 진천야에 대한 생각은 잊은 채 환자들의 치료에 집중했다.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모란이 끓여 둔 오리탕을 본 순간 진천야는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그가 다시 진천야에 대해 떠올린 건 이틀 뒤였다. 의원에 나가니 기다리는 환자들 중에 그가 있었다.

“연 의원님!”

저를 부르기에 다가가 맥을 짚어 보니 이제는 부종도 완전히 사라져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였다. 원래 무인이니만큼 회복도 빨랐다.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군요.”

그리 말하고 연이 스쳐 지나가자 진천야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아닙니다, 저, 두통도 있고, 또…… 기억도 잘 나지 않고요.”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이 째려보거나 말거나 진천야는 연의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한숨을 쉬고는 연이 고개를 돌렸다.

“일시적일 수 있으니 그저 기다리며 회복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진천야가 가지 않자 연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하루에 겨우 다섯 시진 정도 깨어 있는 게 고작인데 이렇게 성가시게 굴면 짜증이 난다. 연이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진찰에 방해가 됩니다.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하십시오.”

진천야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으나 장철이 연의 뒤에서 험상궂게 눈을 부라리자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제야 저를 향한 환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인식하고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의원을 나갔다.

연이 다시 진천야를 본 건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였다. 장철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의원을 나서는데 기다리고 있던 진천야가 불쑥 나타났다.

“연 의원님!”

“…….”

이건 또 뭔가, 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자 그가 들고 있던 작은 전낭을 연에게 내밀었다. 차츰 졸려 왔기에 연은 제 길을 가로막은 진천야가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물어는 주었다.

“이게 뭡니까?”

“연 의원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 보답으로 약소하나마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낭은 꽤 묵직하니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꽤 많은 금은보화가 안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라도 혹할 만한 양이었으나 연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의술을 펼치는 일은 자기만족과 스승에게서의 배움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지 금전적인 보상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남궁세가에서 물질적인 부족함 없이 자라기도 했고, 모란이 걸핏하면 아공간에서 주먹만 한 보석을 대뜸 내놓는 걸 몇 번을 보다 보니 전낭을 봐도 물욕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치료 대가는 여중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머리를 다친 소협을 여기까지 업고 온 것은 여중입니다. 보상은 그에게 하십시오.”

그리 말하고는 연이 휙 그를 지나쳤다. 몸은 건강해졌어도 환자를 보는 일은 항상 심력이 요구되어 쉬이 피로하곤 했다. 한편 진천야는 연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호 상단의 차남으로서 그의 재산을 보고 접근하는 자들을 수차례 봐 왔다. 한데 연은 조금도 진천야의 선물에 동요하지 않았다.

금호 상단이 최고 상단으로만 생각되는 진천야에게 연의 뒷배―남궁세가라든가 ‘백매화’의 상단이라든가―는 조금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연에게 무한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지금, 그는 연이 물욕 없는 실로 의로운 의원이라 생각이 들었다.

‘내 필히 연 의원님을 구해 낼 것이다.’

진천야는 의로운 마음가짐에 불타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휘성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백모란에 대한 소문들을 꽤 많이 들었다. 백모란이 아주 옛날부터 비열한 계략으로 남궁연을 사술의 제물 삼아 힘을 갈취한 것도 모자라 겁박 혹은 세뇌하고 있다고…….

그는 일단 연에게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려 줄 참이었다. 백모란이 얼마나 악한 자인지 알려 준 뒤 자신의 재력과 힘으로 연을 안휘성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비록 백모란이란 자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연 의원님! 혼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연이 미간을 접었다. 또 이상한 자가 꼬였잖아…….

의원을 연 뒤로 연에게는 네 종류의 성가신 사람들이 생겨났다. 첫째는 저를 이용해 백모란을 어떻게 해 보려는 이들이고, 둘째는 저를 이용해 백매화의 돈을 어떻게 해 보려는 이들이며 셋째는 제 금안에 얽힌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자들, 넷째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백모란에게서 자신을 어떻게든 ‘구출’하려는 이들이었다. 네 번째 경우가 가장 성가셨다.

‘지난 오곤령 사건 이후로 그런 자들은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오곤령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아래와 같았다.

오곤령은 곤륜산 계곡에서 기거하는 다섯 명의 무인들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들은 온 중원을 돌아다니며 의협을 행했다. 실로 인기도 높았다. 한 명은 곤륜의 수제자 중 하나였고 나머지 넷도 나름 쟁쟁한 문파며 세가에 속해 있었다. 중원오룡만큼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으나 다섯의 합이 참으로 잘 맞아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한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곤령이 안휘성으로 온 것이다. 연이 한참 잠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때라……. 의원에서 몇 번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린 전적이 있어 병약하다는 소문과 함께 모란의 악명이 높아지던 시기기도 했다.

정말 의협심에서인지 아니면 젊은 사람들 특유의 혈기에서인지 아무튼 오곤령은 겁도 없이 모란에게 덤볐다가 무참히 깨졌다. 심지어 그는 오곤령을 날파리보다도 못하게 여겼다. 아마 당시에는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오곤령은 모란에게 깨지고 난 다음에 물러가기는커녕 뭘 했냐면, 병자인 척 의원을 찾아와서는 대뜸 연을 데리고 가려는 시도를 했다……. 하필 또 잠이 몰려들던 때라 부지불식간에 연은 오곤령을 따라나서고 말았다. 질질 끌려갔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지만…….

화도 나고 짜증도 났지만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하고 자고 일어났더니 보이는 건 오곤령이 아니라 모란이라. 얼굴에 성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보니 오곤령이 멀쩡한 사지로 안휘성을 나가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곤령은 사지 멀쩡하게 안휘성을 걸어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쫓겨 나갔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차라리 모란에게 묵사발이 나 동정심이라도 얻었으면 좋았겠지.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아는 모란은 정말 잔인하게 굴었다. 무얼 했냐면 오곤령 오인의 과거를 하나하나 다 까발렸다. 남김없이, 모조리 다.

누구는 실제로 곤륜산의 수제자가 아니라 파문당한 자며, 누구는 도벽이 있고 누구는 이미 혼인하였거나 애인이 있는 자만 건드리고……. 또 누구는 과거에 부인과 애를 놓고 도망간 자라는 것 등등. 오곤령의 인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고 인망이며 신망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렇게 합이 좋던 다섯 명은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안휘성을 떠났다.

원래 어떤 자들의 모임이었는가 생각해 보면 정말 모란에게서 연을 구출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 터다. 다만 모란이 나름 연이 의원인 걸 고려하여 이제까지 누구도 죽인 적은 없었으니 저들도 안이하게 여기고 덤볐던 것이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아도 심한 꼴을 겪을 수 있다는 건 알아야 했다.

이 오곤령 사건 이후 연을 성가시게 만드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모란에게 원한을 가진 자라면 모를까 변변찮은 정의감으로 덤비는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데 진천야는 오곤령과는 또 다른지라, 말하자면 어쭙잖은 정의감이며 신념을 가진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에게는 참으로 성가신 일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세뇌를 당했다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모란을 악당 취급하는 것까지는 좋아. 내가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대체 왜 내가 세뇌당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도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진천야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사정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모란과 제 사이가 그리 느껴지기는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틀 후 진천야가 다시 의원에 찾아왔다. 이번에는 누구의 조언을 들었는지 질 좋은 약초를 듬뿍 사 가지고 왔다. 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진천야는 어리둥절하여 전낭을 받았다가 안에 든 금화를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팔려고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진천야가 딱 입을 다물었다. 누가 팔려고 가져온 게 아니란 거 모르나. 연은 별말 없이 약초를 가지고 의원으로 들어갔다. 진천야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의원을 떠났다. 그가 떠나는 즉시 연은 신경을 껐다.

그날 의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바닥에 빈둥거리며 누워 꽃꽂이 하던 꽃잎을 한 장, 한 장 똑똑 따 먹던 모란이 대뜸 말했다.

“귀찮은 거 또 생겼네. 처리해 줄까?”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갈 곳 가겠지.”

연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보통 모란의 ‘처리’란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행방불명되어 버리는 것이라……. 진천야가 악의를 가지지는 않았기에 이리도 성가신 것이다.

모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원에 있지는 않아도 그는 항상 연의 신상에 대해서는 꿰고 있었다. 이따금 의원에 그가 두고 가는 간식거리만 해도 그렇다. 환자 눈에만 안 보일 뿐이지, 환각 마법을 쓰고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제만 해도 벌써 모란이 두어 번 의원을 들락거렸다. 진천야나 다른 환자들만 몰랐을 뿐.

“아닐 텐데.”

모란이 오묘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과연 모란의 말대로였다.

다음 날 아침, 연은 일어나는 대로 주섬주섬 외출할 채비를 마쳤다. 은록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모란은 주루나 하오문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러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모란이 연을 따라오지 않는 장소가 딱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연의 의원이고 하나는 은록의 의원이다. 전자는 모란을 두려워한 환자들이 오지 않거나 진료를 받다 말고 도망가고, 혹은 심력이 약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병세가 악화까지 되어서였다. 두 번째의 이유도 첫 번째와 비슷했다.

다만 환자 때문만은 아니다. 은록이 모란에게 산공독을 먹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연은 결코 모란과 동행하지 않게 되었다. 어쩐지 내상 회복이 더디더라니……. 게다가 모란을 보고서는 말도 안 하면서 왜 매번 차를 내오는가 하였다. 그런데 모란은 또 왜 부득불 은록에게 찾아가서 끝끝내 독을 마셔 대고 있는가 말이다. 자존심을 부릴 곳에 부려야지. 어느 날 몰래 피 뱉고 있는 걸 보지 않았으면 계속 모를 뻔했다.

그때 일을 회상하자니 연은 입맛이 좀 썼다. 그날은 처음으로 은록에게 언성을 높인 날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은록은 감히 사부에게 무례하게 군 제자를 관대히 봐주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단순히 모란을 싫어하거나 적대하는 것과 실제로 해를 끼치려 했던 것은 달랐다. 아주 많이 달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산공독이 아닌가. 연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후로 다시는 모란에게 독을 쓰지 않겠다 은록이 약조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모란과 동행하기는 매우 껄끄러웠다.

은록에 대해 떠올리니 또 혼인식 날이 떠올랐다. 연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혼인식 날에는 은록도 초대했었다. 그런데 모란을 보자마자…… 은록은 완전히 냉랭해지더니 그대로 발길을 돌려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사부는 봄철에도 한동안 겨울 서리 그 자체였다.

자신이 눈치가 없어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었지. 싫어하는 감정으로만 치면 연오보다도 은록이 훨씬 더한데. 모란도 마찬가지로 연오 앞에서는 태연하게 굴더니 은록 앞에서는 찬바람을 날렸다. 아무튼 둘이 만나 전혀 좋을 것이 없었기에 연은 가능한 은록과 모란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오늘은 사부님을 뵙고…… 약초도 좀 샀다가…….’

연이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며 집을 나설 때였다. 연 의원님!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설마 하여 뒤를 돌아보니 진천야가 있었다. 내내 쪼그려 앉아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진천야가 옷자락을 털며 다가왔다.

“저…….”

연이 싸늘하게 바라보자 진천야는 어물어물거렸다. 집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사라졌다. 안휘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가 모란과 자신이 사는 집이라는 건 연도 안다.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꽃 때문이기도 했고, 모란의 유명세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란을 두려워해 이리 가까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란이 이따금 일부러 히죽거리고 웃으며 집 주위를 맴돌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덥석 붙잡기 때문에…….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게, 두통이…….”

“다른 의원을 찾아가십시오.”

딱 잘라 말한 뒤 연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진천야가 어어, 하더니 얼른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연이 한숨을 쉬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십시오.”

“시간 없습니다.”

차게 일갈하며 지나쳐도 진천야는 성가시게도 줄줄 따라왔다. 연은 목적지까지 반쯤 당도했을 때에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따라다니건 말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은록의 의원까지 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연이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한 번에 다 처리해 버려야겠군.’

연의 속내는 모르고 진천야는 안색이 밝아져서는 얼른 뒤를 따랐다. 외진 곳에 당도하고 나서야 그가 진천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로 이리 방해를 하는 겁니까?”

“바, 방해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연 의원님을 도와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진천야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어쩐지 연과 단둘이 있자 목덜미가 후끈후끈하였다. 그는 잠시간 상상에 빠졌다. 연을 백모란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어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그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 건 연이 미간을 찌푸렸기 때문이었다. 진천야가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의정문의 일일 계승자이자 금호 상단의 차남 진천야입니다. 저라면 연 의원님을 충분히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얕게 한숨을 쉰 연이 물었다. 진천야는 잠시 당황하였다가 이내 당당히 말을 꺼냈다.

“제게는 의정문의 특별한 무공과 금호상단의 재력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백모란 그자와 맞설 수는 없지만 연 의원님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의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연은 가만히 진천야를 보았다. 딱히 어떠한 의도는 없어 보인다. 오로지 순수한 선의로만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이나마 받아 주고 있는 것이지 아니었으면 상대도 안했다. 정말이지 세상 물정을 조금도 모르는 젊은 청년이었다.

“저는 남궁세가의 차남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답만은 참으로 당당하기도 했다. 의정문과 금호상단은 연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들어 본 적이 있다 뿐이지 연의 입장에서는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소문파거나 그저 그런 상단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모란 같은 상식을 파괴하는 사람을 곁에서 보고 있으려면 남궁세가도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제 부인…… 백매화는 안휘성에서 제일가는 상단의 주인입니다. 제게는 힘도 있고 재력도 있습니다. 한데 제게 어떤 문제가 있으며 어찌 돕겠다는 겁니까?”

그제야 진천야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하는 모양이,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나 했는데 그는 요점을 달리 짚었다.

“연 의원님께서는 지금 세뇌로 인해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겁니다. 백모란 같은 사악한 자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입니다! 연 의원님, 주위를 제대로 보십시오.”

부르짖는 음성은 실로 안타까웠다. 연이 진천야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제게 걸어오는 연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그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제 사부님께서는 식견이 매우 넓으십니다. 사부님께서 연 의원님에게 걸린 사술을 푸실 수 있을 거…….”

진천야의 말이 딱 멈춘 건 연의 신형이 마치 바람이나 번개같이 제 곁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연의 눈이 요요한 금빛으로 잠시 빛났다. 천풍신법(天風身法), 천뢰삼장(天雷三掌) 제 삼식 낙추화뢰(落墜火雷).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뻗은 연의 손이 날렵하고 끊어지는 동작 없이 매끄럽게 상대의 혈맥을 두드려 뭉개 놓았다.

순식간에 사내 둘이 뻣뻣하게 굳어 그대로 기절하더니 바닥에 나자빠졌다. 연이 괴한 둘을 처리한 뒤에야 진천야는 그들에게 줄곧 붙어 따라오던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 누구냐!”

더듬거리고는 검을 뽑은 진천야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누가 미행해 왔는지 감도 잡지 못했고 심지어 연의 움직임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병약하고 또 허약하다, 소문만 들어 낮잡아 보았는데 연의 실력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천야에 비해 연은 지금 상황이 놀랍지도 않았다. 이런 일을 이미 몇 번 겪어 보았다.

모란에게는 적이 많다. 연은 일단 알려진 바로는 모란의 사술에 중요한 재료임과 동시에 그나마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을 인질 삼아 모란을 납치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남궁연! 순순히 따라와라. 그렇다면 피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연의 뜻밖의 실력에 당황하기는 했어도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생각했는지 복면의 괴한이 윽박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어도 아직 다섯이나 남아 있었다. 연은 별말 없이 침착하게 소매만 단정히 걷어 올렸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진천야는 연이 제 앞을 막아서는 걸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괴한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연은 다시 보법을 밟아 괴한들에게 튕기듯 쏘아져 나갔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참으로 앞뒤 안 봐주는 공격 방식이었다.

보통 권법이란 것은 검법에 비해 약하게 여겨지곤 했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바짝 다가가야 할 뿐만 아니라 공격을 막을 수단이 손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전한 방어를 위해선 손에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씌우는 방법 외에는 없는데 이는 상당히 높은 무공성취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진천야는 어떻게든 연을 돕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남궁세가의 무공에 왜 그리 천뢰(天雷)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던가. 그만큼 무공이 번개처럼 빠르고 날렵하기 때문이었다. 연은 쉽게 상대의 검격을 피했다.

동시에 타격을 찔러 넣었는데 그 손에는 상당히 묵직한 무게감이 있어, 가격하면 몸이 울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면 공격을 당한 자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연의 손에 괴한 둘이 더 쓰러질 때였다.

“역시 남궁가인가! 하지만 내게는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복면인 중 한 명이 검에 푸른 검기를 씌웠다. 연이 훌쩍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괴한이 낮게 웃었다. 연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진천야는 정신이 들었다.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여, 연 의원님! 여기는 제게 맡기고 어서 도망가십시오!”

연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실력이 없는 자는 바로 진천야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실력이 좋은 자는 바로 저 복면인이었다. 연은 잠시 복면인과 제 실력을 견주어 보았다.

‘해 볼 만한 것도 같은데.’

그러는 사이 진천야는 혼자서 실로 비극적인 어조를 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검 손잡이를 바로 잡고는 외쳤다.

“만약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 연 의원님을 흠모하고 좋아하던 한 무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그 말에 연이 멈칫하고는 진천야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굳어 있어 진천야는 연 의원님이 제 진심을 알아주시는구나 홀로 감동하였다. 그리고 꼭 백모란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나시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연이 정색하며 부정했다.

“그건 흠모하거나 좋아하는 것 따위가 아닙니다.”

“……예, 에?”

“다른 것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존경이라든가, 동경이라든가, 아니면 호승심이라든가.”

지금 상황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진천야가 입을 벌리거나 말거나 연은 혼자서 심각했다. 착각이라니, 뭐가 대체 착각이란 말인가 하여 진천야가 반박하려 할 때였다. 복면인이 발끈하였다.

“어딜 한눈을 파느냐!”

“연 의원님!”

순식간에 검기를 두른 검 끝이 연의 앞에 들이닥치자 진천야가 소리를 질렀다. 차마 끔찍한 꼴은 볼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상대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면 안 되지, 연아.”

낯선 목소리에 진천야가 번쩍 눈을 떴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건만 어느 사내가 복면인의 검을 막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으로 검날을 쥐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기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복면인이 눈을 부릅뜨는 사이 남자는 검을 쥐어 으스러트려 버렸다. 쨍강 소리가 나며 검 파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 어떻게…….”

상대가 충격을 받건 말건 모란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땅에 내팽개쳤다. 그 모습을 보던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등을 후드려 맞기라도 한 듯 컥 소리를 내며 복면인이 피를 토했다.

땅에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몸을 버둥거렸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손가락에 짓눌린 모습 같았다. 으득으득 소리가 나며 몸이 좀 더 납작해지자 상대는 비명을 지르고는 이내 축 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다지 한눈팔지는 않았어.”

“귀찮았을 텐데 나 부르지 그랬어?”

진천야는 멍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상대가 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꿀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다정했다. 그는 저자를 처음 봤으나 그럼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백모란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저런 실력을 내겠는가. 하지만 어째서일까, 두 사람의 모습이 소문과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것은.

“권법은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실력이 생기지.”

“흠…….”

못마땅한 소리를 내고는 백모란이 뒤를 돌아 진천야를 바라보았다. 숨을 급히 들이쉰 진천야가 더듬더듬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데 수치스럽게도 검 끝이 떨렸다. 모란이 히죽 웃는데 마치 범을 앞에 두는 듯했다. 아니, 범을 넘어선 그 무언가…….

“이건 한 패거리인가?”

용기를 내야지,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한들 물러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진천야는 모란이 제게 다가올 적에는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눈을 마주칠 때는 절로 발이 뒤로 물러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쉰 연이 모란을 잡아 멈춰 세운 뒤 진천야에게 다가왔다.

“진천야 소협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여, 연 의원님.”

연이 모란을 다시 한번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모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이 침착한 어조로 진천야에게 말했다.

“모란이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란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힘도 세고 돈도 많아서.”

“예?”

반문하면서 진천야가 입을 벌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연은 진지했다. 그는 진천야가 더는 자신을 성가시게 만들지 않았으면 했다. 그를 위해서 이런 거짓말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실은, 모란이 이것저것 해 주는 것들을 떠올리면 반쯤은 사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니 더는 쓸데없는 일 하지 마십시오.”

연은 칼같이 돌아섰다. 진천야는 망연자실 연이 모란과 함께 걸어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둘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진천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연 의원님……! 제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서 그런 거짓말까지 하시다니…….”

연이 들었다면 전혀 아니라고 한숨 쉴 만한 오해를 한 진천야는 깊이 통탄했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 연을 돕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폐까지 끼치고 말았다. 아니, 제가 연을 돕기는커녕 도리어 모란에게서 저를 구해 주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도우려고 했던 연보다도 실력이 부족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어쭙잖게 나섰다. 지금까지 그는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돌아가자.”

그가 중얼거렸다. 다시 의정문으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에는 꼭 연 의원님에게 도움이 되고 말리라. 이 빚을 꼭 갚으리라. 굳게 다짐한 진천야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이리하여 연은 뜻하지 않게, 훗날 그 유명한 정의검 청소군자(淸素君子)―백모란에게 매번 필패하는―로서의 진천야의 길이 시작되게 만든 것이었다.

***

“그런 거 아냐.”

“맞아.”

“아니라니까, 글쎄.”

“내 분명히 들었거든.”

모란과 같이 집으로 돌아온 연이 옥신각신했다. 아까 그 소동 때문에 평소보다 많이 늦어, 은록에게 들렀다 오니 벌써 해가 저물고 이미 달이 뉘엿뉘엿 뜬 상태였다. 한데 모란과 달리 주장하는 연의 목소리에는 별 강단이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모란이 단호하게 말했다.

“흠모하고 좋아한다 하였어.”

모란이 의기양양하여 보란 듯 팔짱을 끼는 동안 연이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의원을 열고 난 뒤로 연에게는 참으로 여러 사람이 꼬였다. 보통은 백모란과 금안 때문이었으나 그중 종종…… 연에게 연모한다며 고백해 오는 이들이 있었다. 연이 ‘백매화’와 혼인한 유부남이건 말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고백하건 말건 연은 아무래도 좋았다. 거절하면 그만이었으니.

문제는 이 년 하고도 달포 전 어느 날 밤, 서로 얼큰하게 술에 취했을 적에 했던 내기다. 그날은 왜 그리 흥에 겨웠던지 연은 평소라면 고려도 하지 않았을 내기를 냉큼 받아들였다. 내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모란은 집에 영물이 찾아올 때마다 연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준다.’

‘연은 남으로부터 좋아한다는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모란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준다.’

처음에는 실로 가벼운 내기였다. 이때는 연도 아직 의원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모란이 졌다.

영물 중에서도 삼족오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새로 변하여 찾아오곤 했던 탓이다. 매, 참새, 부엉이, 물까치부터 이따금 닭까지도……. 처음 내기에서 이길 때면 연은 그가 좋아하는 오리탕을 해 달라는 등의 소소한 것을 요구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죽 모란을 이기겠다 싶었다.

하지만 웬걸, 의원을 열자…… 많을 때는 한 달에 세 번도 더 모란에게 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연은 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백매화와 혼인한 데다가 그 악명 높은 모란이 제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상황이다 보니 저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아예 없을 거라 여겼거늘.

모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기의 대가로 온갖 말하기도 민망한 것들을 해 댔다. ……물론 연도 아니 즐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아까 상대할 수 있었어.”

연이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모란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분명 이겼겠지. 하지만 십중팔구 다쳤을걸. 난 그런 건 이겼다고 안 봐.”

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하다 보면 다칠 때도 있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긴, 굳이 다쳐 가면서 싸울 이유도 없긴 하지만. 그가 무심코 제게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모란이 그에게 걸어 준 목걸이는 한층 강화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모르겠지만 목걸이는 연을 향한 적대감을 감지하자마자 모란에게 바로 신호를 보냈다. 그럼 모란이 바로 연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연이 상대할 만한 놈들이다 싶으면 모란은 지켜봐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나섰다. 연이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참, 며칠 전 아공간을 정리하다 보니 말이야, 이런 게 나왔는데.”

내기에서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리고자 하는 연의 시도는 훌륭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자, 이거.”

모란이 흉터 같은 공간 틈 어딘가를 휘적휘적하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연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물건을 모란이 꺼낸 탓이었다.

“그걸 왜 가지고 있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지. 버리기에는 아깝잖아.”

연이 잠시 얼굴을 가렸다. 모란이 꺼내 든 건 여자 옷이다. 그냥 여자 옷도 아니고…… 예전 사술의 범인으로 몰려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을 당시에 입었던 옷이었다. 하오문 분파에 있는 누군가가 알아서 치운 줄 알았는데 모란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래서 이거…… 입으라고?”

어쩔까, 하는 얼굴로 모란이 히죽 웃었다. 또 무얼 시키려고……. 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어찌할까 고민하는 척하고는 제안하였다.

“아니면 오늘은 만월이라 달도 근사하게 뜨고 운치도 있겠다…… 정자에서 할까?”

연에게는 모란의 속셈이 죄다 보였다. 분명 제가 얼굴을 붉히고 어찌할까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모란과 한곳에서 산 지도 벌써 삼 년. 연도 모란의 어지간한 음담패설에는 얼굴도 붉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 그럼.”

“응?”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란이 빙그레 웃으며 턱을 괴고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가 웃은 건 어디까지나 연이 옷을 벗기 시작할 때까지만이었다.

가장 처음으로는 허리대를 풀어 던지고, 다음으로는 상의와 하의를 벗어 내려 두었다. 나신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버선까지 내려 둔 뒤 연이 모란이 내어 둔 여자 옷 중 하늘거리는 푸른 겉옷 자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올라갔던 모란의 입꼬리가 차츰 내려갔다. 연은 겉옷 한 자락만을 몸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는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정자에서 하자고 하였지.”

연은 그대로 유일한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뒤돌아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모란이 깔아 둔 돌길을 맨발로 다박다박 부드럽게 밟자 풀잎과 보드라운 꽃잎이 발등을 간질였다.

모란의 말대로 만월이라 정원의 분위기가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다. 연은 화정당에 있을 때처럼 큰 연못 중앙에 있는 정자로 향하는 작은 다리에 올라섰다. 반을 채 건너기도 전에 소리 없이 달려온 모란이 연을 낚아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정말로 너무한걸.”

집어삼키는 듯한 입맞춤을 하고 난 뒤 모란이 연을 뒷걸음질 치도록 밀며 속삭였다. 느릿느릿 옮기는 걸음마다 흰 꽃이 자박자박 피어났다. 등에 정자의 기둥이 닿는 걸 느끼며 연이 모르는 척 물었다.

“무엇이 너무한데?”

“항상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참으로 내게는 너무 불리한 게 아니냐는 말이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면 그저 좋은 것이지 대체 그게 왜 모란에게 불리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연은 그러려니 넘겼다. 그보다 더 집중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윽…….”

덥석 덜미를 깨물린 통증에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근잘근 덜미를 씹던 모란은 펄떡펄떡 맥이 뛰고 있는 목 줄기 연한 부분을 혀끝으로 핥아 맥박 뛰는 모양새를 맛보았다. 입술로 그 줄기를 살금살금 더듬다가 손으로 허리를 쥐었다. 손을 점차 내려 엉덩이를 꽉 쥐고는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마주했다.

“밖에서 하는 것도 좋잖아.”

“벌레에게 물리지 않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절대 안 했어.”

다소 쌀쌀맞게 쏘아붙인 말투와는 달리 연은 더 깊은 입맞춤을 돌려줬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혀가 야하게 얽혔다.

모란은 연이 옷을 벗을 때부터 단단해지기 시작한 물건을 허벅지 위에 문지르며 엉덩이를 바짝 쥐어 벌렸다. 어느새 향유를 꺼내 바른 손가락이 미끌미끌 밀려들어 올 때에는 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 아…….”

한꺼번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은 모란이 질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도록 거칠게 손가락으로 추삽질을 했다. 꾹꾹 연신 밀어 넣다가 다른 손의 검지와 중지도 삽입하고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다시 크게 쥐어 주무르다가, 엉덩이를 잡아 벌리면서 뒤도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넣어 벌렸다.

그러기를 두세 번 반복하자 향유가 바닥으로 뚝뚝 방울져 떨어지면서 연의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오늘따라 뒤를 풀어 주는 것이 다소 거칠었다.

“읏, 모란, 잠시만……. 서서 하는 건, 아, 너무 힘들……어.”

다시 모란의 손가락이 안을 들쑤시는 바람에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 마디 끝까지 삼키도록 깊이 밀어 넣고는 안에서 갈작갈작 움직이면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래, 그럼.”

모란이 전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연을 들어 바닥에 눕혔다. 길고 나풀거리는 푸른 옷자락을 바닥에 나비 날개처럼 늘어트린 연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왔으니 깨끗할 리 없는 발가락을 서슴없이 깨물었다.

다리를 들어 올려 오금 안쪽 연한 살을 핥는데, 돌연 연이 모란의 멱살을 쥐어 제게로 잡아당겼다. 그대로 한 바퀴 구르자 어느새 모란이 아래에 위치했다. 연이 잠깐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오늘은 내가 조금…… 급한 것 같아……서.”

그리하는 얼굴의 뺨이 흥분으로 열기가 올라 있었다. 연이 제 바지춤만 풀어 헤치는 것을 지켜보던 모란이 낮게 한숨을 쉬며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욕망이 어른어른하였다.

“이러니 불리하다 하지 않아. 나는 항상…… 네게 급한데.”

모란의 손이 연의 허벅지를 꽉 쥐었다. 움찔하면서도 연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바지와 속곳을 헤치자 툭 튕겨 나온 모란의 성기가 어찌나 존재감이 크던지, 확실히 급한 것 같기는 하였다.

모란의 물건이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지자 연은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리고 말았다. 모란이 제게 얼마나 큰 쾌감을 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탓이다. 모란의 시선이 한층 무거워졌다.

“아, 으읏!”

몸을 조금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성급하게 모란의 성기를 삽입하던 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귀두를 삼켰을 뿐인데 부피감이 대단하였다. 자세가 다른 탓인가 벌써부터 버거운 것도 같았다.

“연아…….”

한숨 같은 숨을 뱉으며 모란이 바닥을 짚고 있던 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 손을 잡아 핥듯이 손가락 마디에 입을 맞추다가, 다른 손도 끌고 와 깍지를 꾹 꼈다. 가쁘게 숨을 헐떡거리다가 연이 그대로 꾹 엉덩이를 내렸다. 제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벌려 헤치는 감각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윽, 아, 깊……어…….”

항상 그렇듯이 참으로 몽둥이나 흉기 같은 물건이었다. 겨우 반절 넘게 삽입한 것인데도 숨이 턱 막혔다. 그럼에도 그 흉기에 길들여진 몸은 정직하여서 연의 성기도 잘금잘금 말간 액을 흘려 내고 있었다.

모란은 참으로 인내심 깊게도 연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대로 엎어 잡아 누르고 난폭하게 흔들고 싶은 욕망을 참았다.

연은 깊은 삽입감의 고통을 참는 모양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떨다가 모란의 가슴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다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반쯤 빼내었다가 다시 밀어 넣으니 절로 헐떡이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배 속이 아프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온몸이 오싹오싹하여 기분이 좋았다. 주르륵 빠져나갔다가 다시 깊이 밀어 넣어 가만히 있으면 안에서 모란의 성기가 까닥거리는 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쯤에서 모란의 인내심은 차츰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파서 연이 소리를 내도록 아득아득 손가락을 깨문 뒤 허리를 쳐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연이 악, 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만, 아, 아!”

“이만큼 잔인한 일 하였으면 충분하지, 않아?”

무얼, 잔인한 일을 하였다고? 그러나 모란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연의 생각은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오늘따라 잔뜩 흥분한 모란은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 아직, 흐윽, 모란, 앗!”

완전히 앉혀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빼내려 했지만 모란은 연의 골반을 꽉 잡아당겼다. 단숨에 살과 살이 바짝 밀착될 정도로 깊이 삽입하자 연이 발작적으로 몸을 젖혔다.

안을 깊게 찔리는 듯한 둔통이 일었다. 몸을 들썩여도 그저 엉덩이가 움찔하는 정도로 끝날 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안이 빠듯하고 뻐근하였다. 모란은 괴로워하는 연의 귀를 잘근거리며 퍽 다정한 투로 말했다.

“깊은 건 이런 걸, 깊은 것이라 하는 거지.”

벌건 손자국이 남도록 꽉 쥐고 있던 허리를 놔주기에 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모란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가 다시 퍽 밀어붙였다. 연의 입에서 비명과도 비슷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느끼는 안쪽을 찔린 것이다.

연의 안쪽이 움찔움찔 죄어들 때 모란의 이성은 죄다 날아가고 말았다. 연을 꽉 끌어안은 채 모란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앗, 아아!”

모란이 있는 힘껏 박아 올릴 때마다 연은 시야가 까마득했다. 절로 몸을 뒤로 빼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가도 동시에 온몸이 떨리도록 쾌감이 지극했다. 모란의 다리 위에 앉은 채 쳐올려지던 연은 어느 순간에는 허벅지를 바짝 조이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떨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흑, 천, 천히, 아흑, 윽……. 읏!”

매순간 한계까지 깊게 범해지는 건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너무 깊어, 하고 고개를 젓던 연이 모란에게 매달렸다. 마치 안을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철벅철벅 물기 어린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몸을 떨며 모란을 밀어 내고, 매달렸다가도 고개를 젖히며 버거운 감각에 반쯤 우는 신음 소리를 냈다.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 정도로 흰 절정이 찾아와도 모란의 움직임이 멈추거나 느려지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더 격렬해지고 빨라져서, 연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쾌감에 몸서리만 치는 것이었다.

“흐…… 아, 안, 돼, 응, 안 돼애, 아!”

“무어가 안 된다는, 것이야? 응?”

제대로 발음도 하지 못하고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 걸 모란은 무자비하게 범하였다. 연은 몇 번이고 쾌감에 떠밀려 절벽에서 떨어졌다. 추락하고, 다시 내동댕이쳐지기를 반복하니 머릿속이 완전히 희게 흐려졌다. 떨리는 입술을 베어 물며 모란은 마침내 연의 안에 제 정을 토해 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연은 다음으로는 엎드린 채 모란을 받아들였고, 옆으로 뉘여져 다리 한쪽만을 들어 올린 채 흔들리기도 하였다. 각 자세를 취할 때마다 쾌감이 달리 지극하여 연은 내내 우는 신음 소리를 냈다. 벌어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그렇게 몇 번을 자세를 바꿔 가며 정사를 나눈 끝에 마지막으로 취한 것은 처음의 자세였다. 모란은 퍽퍽 소리가 나도록 연을 밀어붙였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싶어 연은 필사적으로 모란에게 매달렸다.

옷자락을 쥐는 손마디가 희었다. 모란의 흉기 같은 성기가 안을 마구 들쑤셨다. 몸속 가장 깊은 곳을 찔리고, 또 수도 없이 찔린 끝에 연은 흰 절정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모란도 얼마 안 가 움직임을 멈췄다.

“헉, 흐으, 아…….”

한참 시달린 나머지, 연은 저도 모르게 길게 떨리는 신음 소리를 내고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모란의 품에 무너졌다. 어찌나 격했던지 배 속이며 엉덩이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모란은 퍽 만족한 얼굴로 연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아직도 한참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연이 끙, 하는 소리를 냈다.

“더……는 못 해.”

“하긴 바닥이 딱딱하기는 하지.”

양심도 없는 모란이, 엎드린 채 그를 받아 내느라 벌겋게 멍이 든 연의 무릎을 살살 문질렀다. 연이 미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침소로 돌아가면 또 한판이 있을 모양이었다. 모란을 도발할 때부터 이런 결과는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매번 참으로 버거웠다.

모란은 흡족해하며 연을 끌어안고 이곳저곳 쪽쪽거리며 지분거렸다. 그러다 행위 도중 완전히 벗겨져 버린 옷을 입혀 잘 싸매고는 더 꽉 끌어안았다. 연이 작게 켁 기침을 했다. 모란은 히죽 웃을 따름이었다.

“모두 다 네 탓이지 않아.”

“뭐가…….”

“항상 어여쁘게 굴면서 참기 힘들게 만드니.”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으로 간질거리는 소리도 잘한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모란이 연의 손에 깍지를 끼고는 정자 바닥 위에 꽃을 피워 냈다.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자 그 자리에서 화사한 꽃이 금방 자라나 톡톡 꽃망울을 틔웠다.

연이 새삼 정원을 둘러보았다. 연 없이는 모란이 꽃을 만들어 낼 수 없기에, 이 정원에 핀 꽃들은 죄다 모란과 함께 거닐며 만든 것이다.

연못의 연꽃과, 그 뒤편에 핀 화중왕 모란꽃. 연못가에 한들거리며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방울꽃, 수풀 수북한 수국. 노오란 금잔화. 아담한 앵초꽃과 보드레한 제비꽃. 발간 해당화, 흐드러지게 핀 온갖 꽃들…….

전에는 그토록 꽃이 싫고 또 싫었는데, 지금은 이리도 달랐다. 모란도 그 꽃만큼이나 싫었을 때가 있었는데. 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은 아주 옛날처럼 느껴진다. 물끄러미 모란이 피워 내는 꽃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떠올라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그곳은 일 년 내내 겨울이라는데 궁금하지 않아?”

“내일 다녀와 볼까? 넉넉하게 한 달포 정도 지내고 오면 여름이 다 가 있을 텐데.”

“달포 정도……. 좋지.”

연은 조용히 대답하며 웃었다. 그리고 불현듯 애정이 샘솟아 모란에게 입을 맞추었다. 모란도 부드럽게 입술을 베어 물다가 혀끝으로 안쪽을 문질렀다. 서로에게 맞닿는 체온이 따뜻하여 기분이 좋았다.

“여행을 다녀오면 꽃이 다 시들어 있겠네.”

입을 맞추다 말고 연이 문득 중얼거리자 모란이 무어가 문제냐는 얼굴로 씩 길게 웃었다.

“시들어도 아무렴 괜찮지 않아. 또 피우면 되는 것을.”

그래, 시들어도 또 모란과 함께 피우면 되는 것이다. 꽃 하나를 따다가 어릴 적 한 것처럼 모란 귀에 꽂아 주며 연이 웃었다. 만월이라 분위기는 근사하고, 바람은 산들거리니 기분이 좋은지라. 달빛 아래서 꽃이 한껏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0